마지막 때 진리를 사모해야 하는 이유 (살후2:1-17) |
데살로니가 후서 2:1-17
" 1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2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 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3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kjv) 먼저 배도(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라. 4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스스로 높이어)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 5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 6 저로 하여금 저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을 지금도 너희가 아나니 7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 8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 9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11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2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 13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14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15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Traditions: 전통들)을 지키라.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17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주후 50년경 데살로니가교회는 그 당시 여러 초대교회와 마찬가지로 핍박과 환난 가운데 있었으나 인내의 믿음을 가지고 잘 견디었으므로 사도 바울은 그들을 칭찬하였다. 그러나 잘못된 종말관의 소문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곧 임박한 것으로 알고 몹시 당황하였으며 불안했다. 사도 바울은 편지를 통하여 그들을 안정시키고 확신하도록 하였으며, 예수님의 재림 전에 먼저 있어야 할 사건들에 대해서 알려주었다. 즉, 예수님 재림 전에 먼저 "배교하는 일"이 일어나며, 그 다음에는 "불법의 사람"이 등장하여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하며 경배받으려 할 때 예수님이 재림하시며 그를 죽이실 것이라고 하였다. 그처럼 마지막 때가 다가오면 "사탄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수"가 함께 나타난다고 하였다(9-10절). 제자들이 예수님께 "세상 끝날에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라고 질문하였을 때도 예수님은 세상 끝에 난리의 소문, 민족간에 싸움, 각처에 기근, 악한 질병, 지진 등의 징조를 말씀하시다가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great signs)과 기사(wonders)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라도 미혹하게(deceive) 하리라" 고 대답하셨다(마24:24). 이것은 예수님의 재림이 가까워 질때 이 세상에 신비주의가 확산 될 것을 예고하신 말씀이다.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와 거짓 사도들이 온갖 능력, 표적들, 거짓 기적들, 각종 속임수를 사용하여 사람들을 미혹할 때 또 다른 현상이 함께 일어나는데 그것은 "배교의 일"이다. "배교의 일"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과 진리에 대해서 배반, 변절, 또는 버리는 일을 말하는 것인데 교회 밖에서가 아니라 교회 안에서 그런 일들이 나타난다. 이 때 하나님의 백성은 신비주의에 미혹되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오늘 본문 3절에 보면 "아무도 어떤 방법으로든지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라"고 하였다(kjv). 이 말씀은 마지막 때 미혹의 영이 거짓 기적과 거짓 능력의 신비주의로 다양하게 속이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마지막 때는 영적 큰 혼란이 일어난다는 뜻이다. 토네이도 돌풍이 마을과 도시를 초토화시키고, 쓰나미가 몰려와서 마을과 도시를 쓸어버리듯이, 마지막 때의 기독교는 신비주의와 거짓 속임수로 큰 혼란을 겪을 것이다. 이러한 때에 하나님의 백성은 미혹받지 않고 속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방법이 나오는데 그것은 "우리가 반드시 진리를 사모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1. 진리를 사모하지 않으면 반드시 거짓을 믿게 되기 때문이다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진리의 사랑(the love of the truth)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10-11절)
하나님은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 단호한 행동을 보이시는데 "유혹을 저희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하시기로 정하셨다. 그러므로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면 반드시 멸망 당한다. 하나님은 진리에 대해서 왜 그처럼 단호하신가? 그 이유는 "진리의 사랑"이 곧 "그리스도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고(요14:6),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이시다(요1:1,14).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외면하는 사람인데,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배척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 사람에게 하나님은 구원을 허락하지 않으신다. 마지막 때 교회 안에서는 이상한 현상이 나타나는데 "사람이 바른 교훈(sound doctrine)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fables)를 좇으리라"(딤후4:3-4)라고 하였다. 진리가 듣기 싫어서 귀를 돌이켜서 거짓 이야기들(fables)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러한 행동은 오늘 본문에 비추어 볼 때 참으로 위험하기 짝이 없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세에 위기의 때(perilous times)-kjv"라고 하였다(딤후3:1). (한글 개역 - "말세에 고통하는 때") 우리는 이처럼 위기의 때에 살고 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 진리를 사모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반드시 거짓 것을 믿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이 미혹을 보내셔서 거짓을 믿게하시면 우리는 피할 길이 없다. 반드시 거짓을 믿게 된다.
하나님을 거역하고 배반할 때 하나님은 미혹의 세력을 보내셔서 거짓을 믿게 하시는데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그렇게 하셨다. 이사야 66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우상 문화에 빠져서 하나님을 섬기되 우상도 함께 섬겼다. 그들이 하나님께 나아와 정성껏 제사드리며 예배하였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가증히 여기셨다. 그래서 그들이 제사드리기 위하여 소를 잡는 것을 살인 하는 것으로 여기셨고, 어린양 드리는 것을 개의 목을 꺾어 바치는 것으로 보셨으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 피와 같이 여기셨고, 하나님께 분향하는 것은 우상에게 찬송하는 것으로 여기셨다.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는 그 자체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가증한 행위였다. 그 때 하나님은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도 유혹(delusion)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라고 하셨다(사66:4). 마지막 때에도 구원의 진리를 사모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그러한 유혹을 보내셔서 거짓을 믿어 멸망당하게 하신다고 선포하셨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의 신자는 진심으로 진리를 사모해야 한다. 그런데 진리를 사모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
2. 오직 진리를 믿는 자만이 구원을 받기 때문이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13절)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동시에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을 통한 구원의 내용이다. 그 모든 내용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66권 안에 들어있고 그 신.구약 성경의 모든 내용은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러므로 "진리를 믿는다"는 것은 곧 "구속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며 구원의 계시인 신.구약 66권 성경 전체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령을 통하여 그 구원의 계시를 성경에 기록하게 하시고 그것을 진리로 우리에게 주셨다. 그래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성령을 가리켜서 "진리의 영"이라고 하였다(요일4:6). 그리고 성령님은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도록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요16:13).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 진리에 순종하면 우리의 영혼이 깨끗해 지는데(벧전1:22), 그것이 바로 "진리로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요17:17).
우리의 구원은 진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씻음 받은 후, 진리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영혼이 깨끗해 져서 점점 더 거룩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만을 위할 뿐이라고 사도 바울은 증거하였다(고후13:8). 그런데 마지막 때에는 교회 안에 진리를 듣기 싫어하는 신자가 많아지고 따라서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미혹의 영이 거짓 사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러한 신자들에게 접근하게 된다. 진리를 믿지 않으면 미혹당하여 거짓을 믿게 된다. 다시 말하자면 마지막 때는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의 대결이다(요일4:6). 진리를 사모하는 자는 진리의 영에 지배를 받게 되고, 진리를 외면하는 자(딤후4:4)는 미혹의 영에 이끌리게 되어있다(살후2:11). 이것이 이 시대의 위기이며, 또 필연적인 분리가 이루어지는데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는 말씀이 실현되는 것이다(계22:11). 진리를 떠나서는 의롭게 될 수 없으며, 진리를 떠나서는 거룩함에 이르지도 못한다.
3. 참 믿음은 오직 전통적 진리에서만 얻는다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traditions: 전통들)을 지키라” (15절)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오순절 성령님이 제자들에게 임하심으로써 본격적인 복음이 전파되기 시작하였고 사도들이 말로써 전파한 복음의 내용과 사도들이 회람식으로 보낸 편지들을 정리하여 정경으로 만든 것이 오늘날 신약성경이다. 이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이므로 정확무오한(inerrant) 하나님의 말씀이며, 변하지 않는 진리이다. 사도들은 이 변하지 않는 구원의 진리를 후세들에게 물려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사도들이 전해준 전통들(traditions)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생겨나는데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롬10:17). 하나님은 구원 얻는 믿음이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 생기도록 하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전해준 전통적 진리를 들어야 참 믿음이 생긴다.
그러나 마지막 때는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사도들이 맹활약 하는 시대이므로 거짓 진리가 널리 다양하게 전파된다. 뿐만아니라 그들은 "광명한 천사"로 위장하고, "의의 일꾼"으로 위장하기 때문에(고후11:15) 영적 분별력이 없으면 그들의 주장이 믿을만한 진리처럼 들린다. 그들이 영적으로 속이는 수법이다. 그래서 마지막 때는 영적 큰 혼란의 시대이며 가짜 진리가 난무한다. 영원히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진리는 그리스도의 사도들을 통하여 전해주신 전통적 진리에서만 발견되며, 그 진리에 더 추가하지도 못하고, 거기에서 빼버리지도 못하도록 하나님이 확정지으셨다(계22:18-19). 불변의 하나님이 말씀하신 진리는 순전하므로 인간이 함부로 가감하지 못한다(잠30:5-6).
그런데 거짓 선지자나 거짓 사도들은 전통적 진리에 모순이 있다고 지적하며 수정한다. 그리고 자신들이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받았다고 하는 계시들을 더 중요시 한다. 사탄이 에덴 동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하면서 하와를 미혹한 것과 흡사하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에 사는 성도들은 가짜 진리들을 파악하는 영적 분별력을 가지고 속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 하면 가짜 진리들을 파악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을 가지며, 또 그들의 복음이 "다른 복음"인 것을 알 수 있는가? 두 가지가 필요하다. 첫째는 영적으로 성숙하여서 성경 말씀의 의미를 잘 헤아릴 수 있어야 할 것이며,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전해준 전통적 진리를 표준 삼아야 한다.
첫째, 복음의 기초만 알고 있으면 영적으로 젖이나 먹는 어린 아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성경은 증거하고 있다(히5:13). 기본적인 구원의 복음을 믿고 거듭난 자가 되었을지는 몰라도 진리의 말씀에 대해서는 익숙하지 못하다. 어린 아이들이 어른 들의 말에 쉽게 속아넘어가듯이 영적으로 미숙한 상태에서는 미혹의 영에 쉽게 속을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마지막 때의 성도는 영적으로 성장하여 말씀의 깊은 뜻을 헤아릴 줄을 알아야 한다. 마치 어른이 되어서 단단한 식물을 먹듯이 성경 말씀의 깊은 뜻을 잘 살펴서 영적으로 소화하고 "선과 악을 분별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히5:14). 그렇게 되기 위하여는 "지각을 사용하여 연단을 받는다" 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성도들이 성경을 좀더 자세히 알기 위하여 자신의 지각을 훈련시킨다는 뜻이다(have their senses exercised to discern - nkjv). 한가지 좋은 예가 바로 베뢰아 사람들이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searched the Scriptures daily) 그중에 믿는 사람이 많고 . . . "(행17:11-12). 영적 분별력이 생기려면 간절한 마음으로 성경말씀을 받아들인 다음 말씀들을 살피고 연구해야 한다.
둘째, 거짓 선지자나 거짓 사도들의 가짜 진리를 분별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주장하는 것들을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전해준 전통적 진리에 비교해 보아야 한다. . 마지막 때 기독교 안에는 혼란을 일으키는 불경건한 자들이 일어나는데 그들은 "흉내내는 자들(mockers)" (한글개역 - "기롱하는 자들") 이라고 하였고, 그런 상황이 일어나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미리 한 말을 기억하라" 라고 하였다(유1:17-18). 에베소교회 성도들은 바로 이 사도들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사도처럼 흉내내는 "자칭 사도"들을 분별해 내었는데 그들은 거짓말하는 자들(liars)이었다(계2:2-kjv).
이 시대에도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전해준 전통적 진리를 표준 삼아서 거짓 선지자나 거짓 사도들이 증거하는 거짓 주장들을 분별해 내야 한다. 거짓 선지자는 마음에서 지어낸 말을 하기 때문에(렘23:16) 개인적 직통계시가 아닌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면 결국 탄로 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러한 거짓 선지자와 꿈꾸는 자들이 일어나서 꿈(dream)과 이적(sign)과 기사(wonder)를 행하며 미혹할 때 하나님의 "그 명령을 지키며"(신13:4), 하나님의 "명하신 도"(신13:5)를 기준으로 하여 그들을 분별해 내고, 그들을 처벌하라고 명령하셨다(신13:1-5). 마지막 때의 성도들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러한 속임수들을 발견하고 분별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그 목적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사도들의 전통적 진리를 우리에게 주셨고 그들을 통하여 확정된 신.구약 성경 66권을 주셨다(히1;1-2). http://www.voamonline.com/truthys
‘주의 날’에 나타날 징조들과 교회의 각성(살후 2장)
다른 서신서들과 동일한 형식의 인사말로 시작된 이 서신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에 있어서 지속적인 성장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이것은 사도들로 하여금 다른 지역의 교회와 성도들에게 그들을 자랑하게 만들었다. 바울은 이 서신을 통해 더 심해지고 있는 핍박과 환난 중에서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인내와 계속되는 믿음을 통해 더욱 돈독해지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충성에 대한 응답이라고 격려하고 있다.
이 점을 분명히 하기 위해 바울은 심판의 때에 하나님의 공의가 명백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며 그때 성도들은 온전함을 입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에 합당한 자들로 여김을 받게 될 것을 선언한다. 사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이 받을 영광을 위해 준비시키신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은 성도들에게 환난을 끼친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며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고난을 극복한 성도들에게는 안식을 주시는 분이시다.
이러한 하나님의 보상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실 때 악인들과 성도들에게 각각 주어진다. 이때 그리스도의 강림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행하는 보응의 때가 된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서 영광을 받으시는 주님은 자신의 영광에 성도들이 친히 참여하게 하는 은혜를 주신다. 그리고 바울의 복음과 그 증거를 받아들인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이 놀라운 영광의 자리에 합당한 자들로 여김을 받게 될 것이다.
바울은 이 사실을 위하여 항상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서 시작된 일이 하나님의 은혜로 완전히 성취될 것을 강력하게 소원하고 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경건한 결심과 믿음의 역사가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마침내 주께서 친히 영광받으실 것을 기도하며 그 은혜의 기준에 따라 데살로니가 성도들 또한 영광이 될 것을 소망하고 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위로하는 말로 2장을 시작하고 있다(살후 2:1-2). 특별히 그리스도의 재림 전에 나타날 두 가지 사건, 즉 배도하는 일과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는 징조를 제시함으로써 이미 ‘주의 날’이 시작되었다고 하는 거짓 주장들로부터 두려워하거나 당황하지 말 것을 독려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데살로니가 성도들 중에서 일부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임박하였으며 이미 ‘주의 날’이 시작되었다고 여기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주의 날’을 그리스도의 강림이 있기 직전에 잠깐 있는 역사의 절정기라고 여기고 있었다.
그들의 오해는 앞선 서신에서 언급한 그리스도 강림의 돌발성(살전 2:19)과 이에 대한 준비의 필요성(살전 5:1-11)에 대한 잘못된 판단으로부터 기인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분명히 바울의 가르침은 일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 의해 ‘돌발적인 그리스도의 강림’이 마치 즉각적인 강림으로 오해되었다. 그들은 즉각적인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급기야 교회를 어지럽히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다.
때문에 바울은 그들의 거짓된 소망의 희생자가 발생하는 상황을 미연에 방지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이에 바울은 앞선 서신에서 주의 날이 예상외로 빨리 임한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강림 이전에 나타날 징조들을 밝히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구원에 이르도록 선택하셨음을 확신하며 성도들의 구원은 하나님의 영의 활동에 의해 이루어지되(살전 1:5-6) ‘진리’ 곧 복음의 말씀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재확인시키고 있다.
사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외부로부터 오는 핍박뿐 아니라 거짓 교사들로 인하여 교회의 평안까지도 위협받고 있었다. 기독교에 대한 지적인 공격은 때로 물리적 공격보다 더 교회에 고통을 가져다 줄 수 있다. 이에 바울은 먼저 ① 거짓 가르침에 대한 오류의 본질을 규정하고(살후 2:1-3), ② ‘주의 날’이 임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잘못된 내용을 반박한 후(살후 2:4-12) ③ 데살로니가 성도들로 하여금 안정된 삶을 유지하도록(살후 2:13-17) 교훈하고 있다.
1.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한 잘못된 이해들
1) 주의 강림에 대한 오해들
데살로니가에 유포되고 있던 특정한 거짓 가르침은 ‘그리스도의 강림’과 그날에 ‘성도들이 주 앞에 모이는 것’과 관련되어 있었다. 하늘과 땅의 만남이라는 이 두 주제는 앞선 서신에서 다루어진 주요 이슈였다(살전 4:13-5:11). 당시에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는 것으로 인해 성도들 사이에 오해가 발생했었다. 몇몇 성도들은 자신들의 친구들 몇몇이 재림이 일어나기 전에 잠들었던 문제로 논란을 펼치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 발생한 문제는 오히려 ‘주의 날’이 너무 빨리 왔다고 오해함으로써 문제가 발생하고 논란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성도들이 낮의 아들들이며(살전 5:5) 낮에 속하였다(살전 5:8)는 바울의 강조를 오해하고 그날이 이미 도래한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은 이미 낮에 속한 존재임을 주장하고 있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강림과 관련된 이러한 잘못된 오해들을 바로잡아야 했다.
바울은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는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하심과 우리가 그 앞에 모임에 관하여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살후 2:1-2)고 하면서 이 두 번째 편지의 중심 주제를 도입하고 있다. 바울은 이미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과 그 앞에 신자들이 모이는 것에 대해서 가르친 바 있었다.
앞선 편지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죽은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오해를 풀어준 바 있다. 이때 바울은 이미 죽은 신자들은 주님을 뵙기 위해 무덤에서 일어날 것이며 이 땅에 있는 신자들은 공중에서 주를 뵙기 위해 구름 가운데로 들려 올려질 것이라고 설명해 주었다(살전 4:17). 그리고 ‘함께 모여 주님을 영접하는 일’과 관련해 살아 남아 있는 자들이라 해서 이미 세상을 떠난 신자들보다 더 이로움이 없음을 밝혔다. 또한 이 두 집단은 함께 올리어 공중에서 주님을 영접하여 영원히 주님과 함께 있게 될 것을 밝힌 바 있다(살전 4:13-18). 이와 관련해 바울은 몇몇 사람들
이 자신들의 생업조차도 중단한 채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는 잘못된 일들에 대해서도 바로 잡아 주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홀연히 오실 것이며 그날을 준비해야 할 것을 제시한 바 있다(살전 5:1-4). 그러나 주께서 홀연히 오실 것이라는 바울의 가르침은 일부 성도들에 의해 주님의 임박한 재림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불안스럽고 혼란의 양상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 가운데는 자신이 받았거나 또는 받았다고 생각되는 ‘영감된 말씀’ 혹은 ‘영의 소리’, 즉 ‘예언적 소리’에 대해 운운했으며, 또 다른 사람들은 자기가 바울과 함께 있을 때 직접 들은 바 있다고 했으며, 어떤 이들은 바울로부터 이와 관련된 편지를 받았다고 주장함으로써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주의 날’을 심판하러 오시는 주의 강림의 날과 이 날이 이르기 바로 직전에 나타날 징조의 날이라고 하면서 머지않아 예수께서 친히 하늘의 구름 위에 나타나실 것이라는 주장도 유포시키고 있었다.
2) ‘주의 날’에 대한 잘못된 이해
일반적으로 ‘주의 날’은 구약에서 흔히 사용되는 표현으로 현재의 사건이든, 가까운 미래의 일이든 혹은 역사의 끝에 발생하게 될 일이든 하나님께서 모든 악의 세력을 패배시키실 때 일어날 몇 가지 기이한 현상들과 관련되어 나타난다(사 13:6, 9; 겔 30:3; 암 5:18, 20; 옵 1:15; 습 1:7, 14; 슥 14:1; 말 4:5). 이때 주의 날은 죄인들에 대한 엄청난 고통과 징벌로 묘사된다. 요엘서에서 ‘주의 날’은 죄로 인해 유다에 임한 파괴의 시기를 가리키고 있다(욜 1:15; 2:1, 11, 31; 3:14).
‘주의 날’이 현재의 사건을 가리킬 때조차도 그것은 최후의 심판에 대한 전조로 이해되었다. 역사의 마지막에 있을 이 최후의 사건에서는 모든 악과 죄에 대한 최종적인 심판과 신실한 신자들에 대한 최종적인 상급이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때가 되면 하나님께서는 직접 그리고 극적으로 세상사에 개입하시며, 의와 진리가 승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심판하시며, 자신의 영원한 나라를 확립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많은 환난이 있을 것이다. 마지막 날이 가까울수록 악이 점점 강해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일반적 개념에 따라 거짓 가르침은 심판의 날이 이미 왔다고 주장하고 있었다. 때문에 즉각적인 신원과 환난으로부터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렇지만 그들이 바라는 일은 그리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이 소망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강림 대신에 고통이 계속되고 더 심해지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신자들의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움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그들은 분명히 자신들은 무엇인가를 놓치고 있거나 구원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불안해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바울은 거짓 가르침으로 인하여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주님의 재림’과 관련해 흔들리거나 쉽게 두려워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로 하여금 바울이 주께 받아 그들에게 전해 준 것과 다른 어떤 가르침에도 미혹되지 않기를 바라며 ‘주의 날’은 아직 임하지 않았음을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주의 날’이 임하기 전에 적극적인 배도의 현상이 나타날 것이며,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서 성도들을 미혹시킬 것이지만 지금은 그 불법에 대한 속박이 제거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직 그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고 밝히고 있다.
2. ‘주의 날’에 대한 바울의 이해
1) 우주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배도
데살로니가 성도들의 심정을 위협했던 동요의 원인은 교리적 오류였다. 그들은 속임을 당하고 그릇된 길로 인도되고 미혹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영’에 의해서나, ‘말’에 의해서나, ‘편지’에 의해서나, 그밖에 다른 무엇에 의해서나 그 어떤 양식으로든지 미혹 당하도록 스스로를 허용치 말라고 경고하면서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 먼저 배도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이르지 아니하리니”(살후 2:3)라고 밝히고 있다.
‘배도’(αποστασια)는 정치적 반란이거나 모세의 율법을 포기하는 것과 같은 종교적 변절(행 21:21)을 의미한다. 유대교에서도 이스라엘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대대적으로 반역할 것임을 예견하고 있다. 이때 유대인들의 배교는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행위와 동일시된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뜻을 배척하는 것이며 사탄의 행위라고 정의된다.
본문에서 배도는 마지막 때에 있을 하나님의 권위에 맞서는 전 세계적인 반역의 형태를 지칭하고 있으며 이것은 정치적 반란과 종교적 변절을 결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배도에 대해서는 이미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가르친 바 있다(살후 2:5). 여기에서 바울은 유대교에서 사용하는 협의적인 의미보다는 기초적 시민 질서의 전반적인 파기라고 하는 우주적인 의미로 ‘배도’를 사용하고 있다.
이 배도는 모세의 율법에 대한 반역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공공 질서에 대한 대규모의 반역도 포함이 된다. 그때까지 이 공공 질서는 하나님께로서 난 ‘위에 있는 권세’(롬 13:1-2)에 의해 유지된다. 따라서 그 권세를 거스른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르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바울에게 있어서 ‘주의 날’은 세상이 전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권위에 대항하는 배도의 양상이 두드러지게 되고 적그리스도의 통치가 하나님의 교회를 휘어잡기 전에는 오지 않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것은 ‘배도’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란 뜻을 가지며 이 배도는 극소수의 개인에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상당수의 사람들에게 광범위하게 파급될 것을 암시한다.
특히 ‘배도’란 먼저 그리스도의 복음을 섬기는 일에 참여한 바 있는 일단의 사람들에 의해 발생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유형 교회의 전반적인 배신을 염두에 두고 있다. 이것은 교회가 완전히 회복되기 전에 처참하고 보기 흉측한 상태로 전락할 것을 암시한다. 그렇다고 ‘배도’가 참된 하나님의 자녀들인 성도들에게서 ‘은혜로부터의 배반’이 있을 것을 지시하지는 않는다. 참된 성도들에게는 배도와 같은 배반은 없기 때문이다.
선한 목자는 자기의 양들을 알고 있으며 그 누구도 그의 손에서 양들을 강탈해 가는 일은 결코 없다(요 10:28). 때문에 이 배교는 단순히 형식적으로 집착하고 있는 거짓 자녀들에 의해서 아버지의 신실함이 적극적으로 버림을 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배교가 매우 현실적임을 암시한다.
주님께서는 “그 때에 많은 사람이 시험에 빠져 서로 잡아 주고 서로 미워하겠으며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0-13)고 ‘배도’에 대해 경고하신 바 있다. 바울 역시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배도’를 이해하고 있다.
2) 배도를 주도하는 ‘불법의 사람’
배도를 주도하는 지도자는 ‘불법의 사람’(ο ανθρωπος της ανομιας, the man of lawlessness), 곧 ‘멸망의 아들’(ο υοις της απωλειας, the son of prediction)로 불린다. 이런 표현은 셈어의 관용적 표현으로 ‘아들, 자식’이란 단어는 그가 속한 영역을 지시한다. 빛의 아들들이 빛의 영역에 속한 것처럼(살전 5:5) 멸망의 아들은 멸망의 세력에 속해 있음을 의미한다.
이 불법의 사람은 ‘불법한 자’(ο ανομος, 살후 2:8)로서 불법에 속한 존재로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거역으로 특징지어는 인물이다. 따라서 그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사람, 즉 멸망할 운명을 지닌 사람이다(요 17:12에서는 가룟 유다를 ‘멸망의 아들’로 부른다). 특히 불법의 사람은 구약에서 말하는 ‘벨리알의 사람’(לעילב שׁיא, 삼상 2:12, 불량자; 삼상 22:5, 불의)과 같은 성격을 가진다. 그가 불법의 사람으로 불리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법을 듣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공공연하게 하나님의 법을 무시하고 이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본문에서 ‘나타나다, 드러나다’(αποκαλυψις)는 말은 이 불법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와 마찬가지로(살후 1:7) 자신의 ‘나타남’을 갖고 있음을 지시한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최후 심판의 날에 심판주로 등장하시는 것처럼 마치 자신이 이 세상의 주인인 것처럼 극적으로 자신을 나타내 보이도록 그리스도를 흉내내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마치 자신이 메시아나 되는 것처럼 위장을 함으로써 사람들을 미혹시킬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이 불법의 사람을 가리켜 메시아의 대적, 즉 적그리스도(αντιχριστος)라고 지적하고 있다(요일 2:18 참고).
이 불법의 사람이 가지는 속성을 가리켜 바울은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살후 2:4)고 밝히고 있다. 배도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단순한 배반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항거인 것처럼 불법의 사람 역시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해 적극적이며 능동적이고 공격적인 대적자이다.
본문의 ‘대적자’(ο αντικειμενος)는 히브리어 사탄(ןטשׁ, 대적하다, 고소하다)의 번역어로 사용되는 용어이다(왕상 11:25; 슥 3:1; 딤전 5:14). 그러나 이 불법의 사람이 사탄 그 자신은 아니다. 이 불법의 사람은 ‘사탄의 역사를 따라’ 이 땅에 나타나게 될 한 인물이다(살후 2:9). 이런 점에서 불법의 사람을 마귀의 화신이라 할 수는 없지만 사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대적자(눅 13:17; 21:15; 고전 165:9; 갈 5:17; 빌 1:28; 살후 2:4; 딤전 1:10; 5:14)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과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존재로 그의 우두머리인 ‘사탄’을 대신하고 있으며 마지막 때에 등장하게 된다. 이 멸망의 아들은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god)이라 일컬으면서 숭배를 받는 모든 것들보다 자신을 더 높이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모든 거룩한 것들, 즉 종교적 의식에 관련하여 숭배의 대상인 모든 것들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더 높이 들어올린다.
이 불법의 사람은 신들보다도 이들 신들의 숭배에 관련된 성별된 모든 것, 즉 성전이나 신들을 경배하기 위해 구별지은 장소나 제단이나 종교적 구조물들(statures)보다도 더 자신을 높임으로써 신들과 이들 성별된 모든 것들을 욕되게 한다. 그는 오로지 하나의 신(one god)만을 인정하는데 바로 그 자리에 자기 자신만을 인정한다. 심지어 참되신 하나님의 자리에 자기가 있다고 주장하면서 하나님의 성전(ναος), 즉 교회 위에 자리를 잡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참된 백성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로챈 이 난폭한 자를 인정치 않고 그에게 경배하기를 거부할 것이다. 그 결과 참된 하나님의 백성들은 커다란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마 24:15, 21, 22, 29).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의 참된 백성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있는 것처럼 행세하면서 이 불법의 사람은 감히 자신을 하나님이라고 선포하기까지 할 것이다.
이 시대를 가리켜 주님께서는 ‘불법의 시대’라고 암시하신 바 있다(마 24:12). 이때 이 불법의 사람은 자신을 모든 예배의 대상으로 선포하고 다른 모든 사람이나 다른 모든 것들에게 예배하는 것을 금지하면서 자신에게만 예배하도록 요구할 것이다.
3) 불법의 사람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
불법의 사람에 대한 묘사는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성격은 바벨론 왕에 대한 이사야의 예언을 통해 계시되었다. 바벨론 왕은 자기 스스로를 신들 위에 가장 높은 신으로 치부하는 세력이었다(사 14:9). 바벨론 왕은 심지어 하나님의 보좌보다도 높은 곳에까지 이를 것이라고 자랑한다(사 14:13).
그때 바벨론은 아침의 계명성처럼 찬란한 영화를 누리며 전 세계를 호령할 것처럼 보였다(사 14:12).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아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그 모습은 마치 구더기와 지렁이들이 득실거리는 구덩이에 빠져 있는 시체와 같았다(사 14:11, 19). 바벨론의 영화를 보고 있던 모든 열방들은 이 일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이처럼 바벨론은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세력의 최고봉에 서 있기 때문에 마치 사탄의 세력을 대신하는 것처럼 묘사되었다. 또한 바벨론은 모든 죄악의 대표적 상징물이기도 하다. 따라서 바벨론의 멸망은 결국 사탄의 멸망을 예표하는 것이며 나아가 모든 죄악과 포악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의미한다(사 14:20).
이와 비슷한 예를 두로의 왕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두로의 왕은 감히 말하기를 “나는 신이라 내가 하나님의 자리 곧 바다 중심에 앉았다”(겔 28:2)라고 말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이때 ‘바다’는 온 세상을 상징하는 그림 언어로 사용된다. 다시 말하면 그가 온 세상을 지배한다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가장 주목할 만한 반역은 BC 169년 에피파네스(Epiphanes, ‘신의 현현’이라는 의미를 가짐)로 알려진 안티오쿠스 4세(Antiochus IV)가 예루살렘 성전을 모독함으로써 발생되었다. 안티오쿠스는 금지된 지성소에 들어갔으며 그 이듬해에는 번제단 위에 제우스 신상을 두었고 돼지를 희생 제물로 바쳤다. 이 사건으로 성전은 폐허된 채 방치되었다.
이 일은 ‘멸망의 가증한 것’(막 13:14)으로 알려졌으며 대단히 혐오스러운 사건으로 다니엘서의 예언과 연결된다(단 11:36-37). 다니엘은 이 사건과 관련해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 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단 7:25)라고 예언한 바 있다. 이 멸망의 가증한 것은 마지막 때, 적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서 자기 상을 세우고 모두 자신에게 경배하도록 함으로써 가장 심한 신성모독을 행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계 13:14-15).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을 때 이와 같은 내용에 대해 가르친 것으로 보인다.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이 일을 너희에게 말한 것을 기억하지 못하느냐”(살후 2:5).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에 종말의 때에 나타날 반역과 악마적 지도자에 대한 교훈을 포함시켰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이를 통해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법과 그의 아들, 즉 장래 노하심에서 성도들을 건지시는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을 기다리는 법도 배웠을 것이다(살전 1:9-10).
4) 지금은 ‘불법의 비밀’과 ‘막는자’의 시대
바울은 배도하는 일이 주의 날에 예수께서 강림하시기 전에 있을 것이며 그 강림으로 말미암아 끝이 날 것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이에 바울은 “저로 하여금 저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을 지금도 너희가 아나니”(살후 2:6)라고 함으로써 지금은 ‘주의 날’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본문의 ‘막는 것을 지금도 너희가 아나니’라는 말은 ‘이제 너희가 그를 막는 것이 무엇인 줄 알고 있나니’라는 의미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참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위해 정해진 ‘저의 때’가 있다고 암시하고 있다. 따라서 ‘저의 때’는 하나님의 계획 속에 감추어져 있으며 ‘불법의 사람’과 ‘그의 활동을 막는 것’들은 모두 하나님의 뜻에 복종할 수밖에 없다. 이 사실은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길 때까지 하리라”(살후 2:7)는 말 속에서 분명하게 확인된다. 지금은 불법의 사람이 활동하는 시기가 아니다. 지금은 ‘불법의 비밀’이 막는자에 의에 억제되어 있는 시간일 뿐이다.
신약에서 ‘비밀’(μυστηριον)은 ‘지금까지 감추어져 있으나 이제는 드러나 있는 하나님의 목적과 관련이 있거나, 하나님의 목적이 성취되는 것’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다(막 4:11; 롬 11:25; 16:25; 고전 15:51; 엡 1:9; 3:3, 4). 특히 하나님의 비밀(μυστηριον)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며(골 2:2),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αποκαλυψις)와 관련이 있다(갈 1:12; 벧전 1:7; 계 1:1).
이와 같은 용법에 비추어 볼 때 본문에서 ‘불법의 비밀’은 하나님의 목적이 지닌 신비와 대조를 이루고 있으며 이것은 사탄이 자기 때가 되면 공개적으로 자신을 나타내기까지 은밀하게 눈을 피해가며 음모하고 있는 ‘불법의 사람’을 지시한다. 따라서 ‘불법의 비밀’은 ‘불법의 사람’으로 나타나기 전까지 반사회적이고 반규범적이며 반하나님적인 모든 운동을 일컫는 총칭이라 할 수 있다.
지금은 ‘불법의 사람’이 표면 아래에서 활동하고 있지만 때가 되면 이 ‘불법의 비밀’이 표면 위로 떠올라 ‘불법의 사람’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불법의 사람’은 억제를 당할 것이다. 이 막는자 또는 억제자는 ‘그가 옮겨질 때까지’ 불법의 비밀을 막고 있다. 바울은 이 ‘막는다’(κατεχω)는 행위를 가리켜 ‘막는자’(το κατεχων)라고 의인화해서 말하고 있다.
그동안 학계에서는 ‘막는자’ 또는 ‘억제자’(το κατεχων)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 개진되었다.
첫째, 그 억제자는 ‘성령님과 교회’를 암시한다고 한다. 이때 성령님은 막는자가 되시며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교회가 막는 힘이 된다.
둘째, 바울과 복음 전도를 의미한다고 한다. 이것은 현 시대를 가리켜 ‘이방인의 때’로 이해하는 바울의 견해와 연결된다. 이때 복음이 널리 전파까지 필요한 지체됨은 막는 힘이 된다.
셋째, 로마와 정부의 권세를 암시한다고 한다. 법과 질서, 공공의 평안과 정의의 수호자 역할을 하는 모든 국가도 이에 포함된다. 로마제국 이후에 등장하는 모든 국가 세력이나 정권 역시 이것들을 하나님께서 제거하실 때가지 ‘불법의 비밀’을 억제하는데 사용될 가능성이 높다.
그밖에도 이 억제자는 하나님 자신을 가리킨다거나, ‘아볼루온’이라는 이름의 무저갱의 천사(계 9:1), 또는 적그리스도 자신이거나, 유대교를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었다.
오히려 이 막는자를 인격적인 존재로 의인화 하여 생각한다면 당시 세상의 질서를 지배하고 유지하고 있는 로마 제국을 인격화시킨 로마황제를 가리킬 가능성이 높다. 비록 로마의 통치가 영원히 지속되지 않을 것이며, 또한 기독교에 대한 로마의 호의적 중립성을 기대할 수 없을지라도 당시 상황에서 로마가 불법의 세력을 적절히 제어하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행 18:12-17; 롬 13:1-7 참고).
그렇지만 이 불법의 사람을 막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지배 아래에서 되어지는 일이다. 따라서 지금 사탄이 할 수 있는 일은 불법의 영을 고무하면서 그들에게 주어질 때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저의 때’에 이 불법의 영에 기꺼이 협력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형벌로써 하나님께서 이 막는자를 옮겨 사라지게 할 때 비로소 사탄은 불법의 사람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 할 것이다.
5) ‘불법한 자’의 등장과 그리스도의 승리
일정량의 정의, 자유, 질서, 예절을 보존하는 억제력으로 나타나는 막는자(το κατεχων)를 하나님께서 옮기실 때 이 불법의 비밀은 마침내 ‘불법의 사람’으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나게 할 것이다. 이와 관련해 바울은 “그 때에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살후 2:8)고 밝히 말하고 있다.
본문의 ‘그 때에’는 6절의 ‘지금’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지금’은 불법한 자가 억제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막는자’를 옮기시는 ‘그 때에’는 그 불법의 사람이 표면으로 등장하게 될 것이다. 정한 때가 도래하면 사탄의 흉계는 외적으로 실현된다. 그때는 불법의 비밀 대신에 불법의 사람이 지상에 나타날 것이며 그의 말과 행동으로 표현될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불법한 자가 나타나리니’(αποκαλυφησεται ο ανομος)라고 묘사함으로써 불법의 비밀이 마침내 그 정체를 드러내고 ‘불법의 사람’으로 등장하는 장면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불법의 사람’을 ‘불법한 자’로 바꾸어 부르는 것은 “저는 대적하는 자라 범사에 일컫는 하나님이나 숭배함을 받는 자 위에 뛰어나 자존하여 하나님 성전에 앉아 자기를 보여 하나님이라 하느니라”(살후 2:4)는 바울의 말과 같이 그의 악랄한 지도 아래 은밀한 배도가 공개적인 반역으로 나타나도록 시도하였음을 암시한다. 이때는 전 세계적으로 종교적, 정치적, 사회적, 도덕적 혼란이 야기될 것이다.
이 반역의 성격은 역사의 무대 위에서 공개적으로 눈에 보이게 나타나게 된다. 특히 법의 통치, 정의의 시행, 참된 종교의 실행이 전 세계적으로 붕괴되는 것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때 주 예수께서 오셔서 그의 입의 기운으로 그를 죽이실 때까지 하나님과 하나님의 법은 이 ‘불법한 자’에 의해 무례하게 조롱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 기간은 결코 길지 않을 것이다.
이와 관련해 바울은 ‘주 예수께서 그 입의 기운으로 저를 죽이시고’라고 밝히고 있다. 이 구절은 다윗 왕조와 관련된 미래의 왕에 대한 예언과 관련이 있다. 즉 바울의 이 해석 이면에는 이사야 선지자가 “공의로 빈핍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 11:4)고 예언하였던 내용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사야는 이 예언에서 ‘악인’(ασεβη)을 포괄적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바울은 이 악인의 정체를 밝혀서 특정한 인물, 즉 본문의 ‘불법한 자’(ο ανομος)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고 있다.
불법한 자의 등장과 함께 극적으로 등장하시게 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불법한 자가 큰 권력을 가지고 악명 높은 악을 무기로 활동하는 것과 달리 단순히 입술의 기운만으로도 이 강력한 악인을 불사르시는 분이다. 이 불법한 자가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그는 단지 그리스도의 기운만으로도 꺼지는 불꽃에 불과할 따름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불법한 자가 극적으로 등장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전격적으로 등장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리고 있다.
‘강림하여 나타나심으로 폐하시리라’에서 ‘강림하여 나타나심’(τη επιφανεια της παουσιας)은 문자적으로 그리스도의 ‘강림의 광채’로 번역할 수 있다. 여기에서 ‘나타나심’(επιφανεια, 顯現)은 목회서신에서 그리스도께서 처음 오시는 것을 가리키는 의미로 한 번(딤후 1:10), 그리스도께서 영광 중에 재림하심을 가리키는 의미로 네 번(딤전 6:14; 딤후 4:1, 8; 딛 2:13) 사용되었다. 이때 ‘나타나심’은 찬란한 새벽을 여는 여명이나 섬광과 같은 광채를 의미한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시는 그 영광스러운 섬광과 같은 빛 앞에서 불법한 자가 속절없이 제거되고 말 것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이 장면은 “환난받는 너희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으로 갚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시니 주 예수께서 저의 능력의 천사들과 함께 하늘로부터 불꽃 중에 나타나실 때”(살후 1:7)를 연상케 한다. 이 장면은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계 1:16)에서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처럼 불법한 자는 그리스도와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는 단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것만으로도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 죽임은 죽음으로 형벌을 받게 된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육체적인 죽임을 당한다는 사실도 포함하고 있다. 결국 그는 자신이 스스로 자랑하던 적그리스도의 높은 위치에서 전격적으로 제거되어 폐함을 당하게 된다. 이것은 마치 커다란 전사(戰士) 앞에서 무력하게 죽임을 당하는 적군의 모습을 연상케 한다.
전사로서의 메시아에 대한 묘사는 구약에 자주 등장하는 모티브이다(사 11:4; 66:15, 16; 말 4:1). 동시에 이 모티브는 여호와를 전쟁의 용사(勇士)로 묘사하고 있는 장면을 연상케 한다(사 42:13, 25; 59:15-19; 63:1-6). 이 모티브는 요한계시록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군마를 타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날선 검으로 원수들을 치실 것이며, ‘짐승’과 그 앞잡이인 거짓 예언자들을 유황불 못에 던지는 모습으로 성취되고 있다(계 19:11-21).
3. 적그리스도의 정체와 하나님의 심판
예수께서 심판하러 오실 때 마지막 적대자, 즉 불법의 사람이며 멸망의 아들이며 불법한 자이며 적그리스도라고 불려지는 이 사람은 어디까지나 사탄의 속임수가 통할 수 있는 흑암 속에서만 자신의 능력을 행사할 수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강림만으로도 찬란하게 비취는 새벽의 여명이 찬란하게 빛을 발하여 순식간에 어둠이 물러가는 것처럼 불법한 자는 죽임을 당하고 말 것이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 앞에서 사람들이 보기에 강력한 신처럼 보였던 불법한 자가 단호하게 징벌될 것을 밝힘으로써 성도들의 두려움과 공포를 제거한 바울은 불법한 자와 그가 활동하는 성질에 대해 좀더 세밀하게 가르치고 있다. 이 가르침은 불법한 자의 정체를 정확하게 드러냄으로써 종말에 있을 사탄의 속임수에 성도들이 미혹을 당하지 않기 위한 바울의 자상한 배려였다.
1) 불법한 자, 즉 적그리스도의 정체
바울은 먼저 불법한 자가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강림을 모방하고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악한 자의 임함은 사단의 역사를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리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살후 2:9-10).
‘악한 자의 임함’(ου εστιν η παρουσια)은 문자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의 파루시아’ 혹은 ‘현현’(epiphany)이라고 부를 수 있는 모양새를 가지고 있다. 바울은 불법한 자가 자기의 등장을 그리스도의 파루시아와 같은 모양으로 모방함으로써 자기가 마치 하나님의 아들이나 되는 것처럼 위장하고 허세를 부리고 있음을 직설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 그 사람을 가리켜 ‘적그리스도’라고 표현하고 있는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이런 점에서 불법의 사람은 모든 면에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적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바울은 지적하고 있다.
불법의 사람, 즉 적그리스도에 대한 묘사가 그리스도의 강림과 흡사하게 묘사되고 있는 것은 두 경우 모두 사람들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명확하게 알 수 있는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진리’만을 선포하신 것과 달리 이 적그리스도는 ‘거짓’만을 선포할 것이다. 단지 적그리스도는 마치 그리스도께서 표적과 능력과 기적을 행하신 것을 흉내를 내는 것으로 자신의 힘을 드러내게 된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표적과 능력과 기적을 행하시되 그것들은 오로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으로 사용하지 않고 전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계시의 말씀을 확증하는 일에만 사용하셨다. 또한 그리스도는 자신의 권세로 이런 일들을 행하셨지만 적그리스도는 자신의 능력으로 이러한 일들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전적으로 사탄의 권능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한마디로 이 적그리스도는 사탄의 괴뢰에 불과할 따름이다.
적그리스도의 임함은 그리스도의 강림을 의도적으로 그리고 파렴치하게도 서투르게 흉내내고 있다. 주 예수께서는 분명히 하늘로부터 나타날 것(epiphany)이다(살후 1:7). 그러나 이 악한 자는 어디로부터 나타나는지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슬그머니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능력과 영(살후 1:7)과 영광 가운데 만민이 보는 상태로 오실 것이다(살후 2:8). 그러나 이 악한자는 불법과 불의 가운데서 은밀하게 등장하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이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통해 메시아로 자신을 보이신 반면에(행 2:22) 적그리스도는 이러한 능력을 행하는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철저하게 사람들을 속이는 것으로 일관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적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임함은 모두 인격적이고, 공식적이며, 눈에 보는 현상을 동반하며, 기적이나 표적이 뒤따르는 능력을 행한다는 점에서 쉽게 구별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비극적이게도 적그리스도의 임함은 그리스도의 강림을 너무나도 교묘하게 모방하고 있어서 사람들은 이러한 사탄의 속임수에 기만을 당하고 말 것이다.
예수께서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이어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게 하리라”(마 24:24)고 경계하신 바 있다. 적그리스도의 앞잡이들인 거짓 그리스도들이 행한 표적과 기사만으로도 성도들을 미혹할 정도임을 감안한다면 정작 적그리스도의 엄청난 능력은 충분히 성도들을 기만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불법한 자의 임함은 그의 주인인 사탄의 강력한 활동과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그를 통해 나타나는 사탄의 ‘역사’는 사탄을 다른 모든 악한 존재들과 구별케 하고 비교케 하는 기준이 된다. 그 사탄은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을 동반하고 있지만 이 능력과 표적과 기적들은 어디까지나 거짓, 즉 사람들을 속이려는 욕구에서 솟아 나와 펼쳐질 뿐이다. 그리고 이 악한 자에게는 언제나 ‘불의에서 비롯되는 모든 속임’이 뒤따라 나타나게 된다. 때문에 이러한 속임이라 할지라도 진리이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을 결코 미혹하지 못할 뿐 아니라 그들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반면에 이미 멸망하기로 되어 있는 자들에게만 이 적그리스도의 술수가 통하게 될 뿐이다.
2) 적그리스도에게 미혹 당하는 ‘멸망하는 자들’
‘불의의 모든 속임’은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 가운데에서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골 2:3)고 언급한 ‘헛된 속임수’와 같다. 이 속임수는 불의에 의해 고무될 것이다.
예수께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고 경고하신 것처럼 이 ‘불의의 모든 속임’에는 진리 대신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사탄의 역사를 따라 이 악한 자가 모든 능력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을 행할지라도 여기에 미혹을 당하는 자들은 택함을 받은 성도들이 아니라 ‘멸망하는 자들’(τοις απολλυμανοις)일 뿐이다. 이들을 ‘멸망하는 자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멸망의 아들’(살후 2:3)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며, 그들은 하나님과 진리이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지 않음으로써 거짓에 속아 멸망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복음이 선포될 때에는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와 그의 모든 은혜’를 받도록 강권함을 받게 된다. 이 은혜들은 ‘천국’과 ‘부활의 몸’과 같은 객관적인 내용뿐 아니라 ‘사랑’과 ‘소망’과 같은 주관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 멸망하는 자들 역시 진리의 복음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의 사랑’(the love of truth)을 받도록 한때 강권함을 받았었다.
본문에서 ‘진리의 사랑’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그리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진리의 사랑을 받는 것만이 구원의 길이며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그들이 멸망의 길에 들어섰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멸망하는 자들은 ‘진리의 사랑’을 거부했다. 혹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려고 했었던 목적은 어디까지나 혹시라도 ‘자신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자기들의 허황된 욕심에 국한되었을 뿐이다.
이와 관련해 바울은 하나님 알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어두워지는 것과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림을 당하는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롬 1:21-28). 따라서 인간은 그 누구라 할지라도 자신의 힘으로는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일 수 없다. 왜냐하면 인간의 죄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구원에 이르지 못하고 구원을 상실한다는 것은 언제나 인간 자신의 탓이지 하나님 탓이 아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사탄의 능력을 제한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선택한 성도들에게는 결코 해를 끼칠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위해 구원을 베풀어주셨기 때문이다. 단지 적그리스도가 막강한 능력을 행사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범위 안에서만 그렇다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에 의해 사탄이 강제를 당하고 있는 모습은 이미 욥을 통해서 보여준 바 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그와 같은 재량권을 허용하신 것은 한마디로 구원의 길로 초청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거절하고 대신에 불경건과 오류에 자신들의 마음을 내어 맡긴 ‘멸망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의로운 처벌을 시행하기 위함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설령 적그리스도의 지배가 가혹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멸망받아 마땅한 자들, 즉 자원해서 ‘멸망의 아들’에게 속한 자들 외에는 아무도 멸망당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3)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할 하나님의 심판
바울은 멸망하는 자들이 변명할 수 있는 여지를 단호하게 거절한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1-12). 이 구절은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롬 1:28)라는 말씀과 병행을 이루고 있다. 여기에서 ‘유혹’은 잘못된 길로 가는 ‘멸망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믿지 않는 이스라엘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던 것처럼(사 29:10; 롬 11:8) 하나님은 거짓에 의해 미혹되어 진리에 대해 눈을 감는 사람들에게 ‘유혹’을 보내심으로써 심판을 행하신다. 그렇다고 사람들을 ‘유혹’하는 일을 하나님께서 일부러 만드시는 분은 아니시다. 그것은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취지 못하게’(고후 4:4) 하는 이 세상 신(神)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멸망하는 자들이 믿는 ‘거짓’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것을 가리킨다(롬 1:25). 따라서 ‘거짓 것’은 ‘하나님이야말로 유일하신 한 분’이라는 근본적 진리를 부인하는 것으로 창조주이자 구세주요 모든 것의 의롭고도 자비로우신 심판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계시를 부인하고 ‘불법의 사람’과 같은 자가 마치 자신이 하나님이나 되는 것처럼 뻔뻔스럽게 주장하고 자신을 경배하게 하는 모든 행위들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고의로, 마음 속으로 기뻐하면서 사람들에게 영원한 벌을 예비하시는 분은 결코 아니시다. 하나님은 진지하게 경고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며, 사람들이 믿을 때 어떻게 될 것과 믿지 않을 때 어떻게 될 것을 미리 명확하게 보여주신다. 그리고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도록 모든 사람들을 공개적으로 강권하신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이신 성령을 통해서 신자들을 내면적으로 깨우쳐 주시며 그 결과 성령의 가르침이 신자들에게서 효력을 발휘하고 신자들의 눈과 마음이 그 복음을 받아들이도록 열어주신다. 하지만 하나님은 끝까지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로 하여금 회개할 수 없게 하고 ‘불법의 사람’이 그들에게는 하나님이고, 유일한 하나님이며, 만인이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하는 거짓말을 믿게 하도록 그들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다. 이것은 마치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애굽의 왕이 멸망을 향해 줄기차게 달려가는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이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의로운 판단에 따라서 파멸하기로 작정한 자들에게는 그들의 ‘버림받은 마음’(롬 1:28)에 그대로 내버려두신다. 그 결과 그들은 마치 스스로 눈을 감고 마음의 이성을 상실한 채 사탄과 그의 하수인들의 속임수에 넘어가게 된다. 마치 바로가 스스로 마음을 강퍅하게 할 때(출 7:14; 8:15, 32; 9:7)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신 것과 같다(출 9:12).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 하나님의 참된 선지자들을 증오할 때 다른 선지자들의 입에 거짓말하는 영을 넣으심으로써 왕으로 하여금 속임을 당하게 하신다(역대하 18:22). 그리고 사람들이 더러운 일을 행할 때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두신다(롬 1:24, 24). 또한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하기를 완고하게 거절할 때 하나님은 마침내 그들을 치사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심으로써 부정한 행위를 하게 하신다(롬 1:28).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다. 따라서 죽음을 당하는 자들이 하나님께 불평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자신들이 추구하던 그대로 보응을 받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진리’와 ‘불의’는 극적인 대칭을 보이고 있다(롬 1:18; 2:8; 고전 13:6). 이것은 인간의 지성이 그의 의지와 정서로부터 분리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를 참으로 받아들일 때 그는 의를 실행한다. 반면에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고 적극리스도의 거짓을 받아들일 때 그는 불의를 행하게 된다. 그 중간 지대란 없다. 사실 이 거짓 가르침은 하나님을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하지 않는 자들에게서가 아니면 그 효력을 전혀 발휘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불의에 관심을 가지는 자들은 이미 그 불의의 열매를 거두고 있는 것과 같다.
본문에서 ‘좋아한다’(ευδοκησαντες)는 말은 악에 대해 자발적 성향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멸망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의보다 불의를 더 좋아할 경우 그들에게는 전혀 변명의 여지가 없다. 그들이 몰라서가 아니라 알면서도 속임수에 자신의 귀를 내맡겼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없는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모든 자’라고 지적하고 있는 사람들은 복음에 대하여 순종을 거부하는 방대한 숫자의 사람들이다. 이들이 하나님에 대한 모독죄를 면제받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온 세상의 유일한 심판관이시며 그들에 대한 처벌을 마치 한 사람에게 부과하듯이 행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무도 그 심판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4. ‘주의 날’을 앞둔 교회의 각성
1) 변경되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앞서 바울은 ‘주의 날’이 임했다는 거짓 가르침에 대해 동요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당부한 바 있다(살후 2:2). 그리고 바울은 ‘주의 날’에 대한 성격과 그 날의 징조로 등장할 ‘불법의 사람’과 그 정체 그리고 이 적그리스도의 성격과 미혹 등을 자세하게 제시하면서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흔들리지 않고 굳게 서기를 바라고 있다.
이런 이유에서 성도들은 자신들을 향하여 진행되고 있는 반대나 박해(살전 1:4-6; 3:2-4)에 대해 단호하게 대항해야 한다. 그리고 거짓 가르침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살후 2:2-3). 나아가 종말에 있을 적그리스도의 유혹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대비해야 한다(살후 2:9-12).
이 ‘유혹’의 배후에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원수인 사탄이 잠복하고 있다. 때로는 육체적인 핍박으로, 지적인 거짓 가르침으로, 죄에 대한 유혹과 같은 윤리적인 공격을 가해오기도 한다. 그리고 이 종말론적 유혹은 전 세계적으로 전개되며 혼돈의 시대를 만들게 될 것이다.
여기에서 바울은 사탄의 활동에 대한 경고로부터 하나님의 활동에 대한 감사로 성도들의 눈길을 돌리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아직 어린 성도들이 사탄의 행동에 대하여 필요 이상으로 두려움을 가지지 않도록 독려할 뿐 아니라 오히려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깨닫고 전적으로 하나님께 모든 시선을 돌리게 하기 위함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의 ‘감사’는 역사와 그 혼돈으로부터 성도들을 영원과 그 안전함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에 근거하고 있다. 사탄을 따르는 자들이 받게 될 심판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는 변하지 않는 구원이 예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의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3-14).
이 서신의 초두에서 이미 이 사실을 상기시킨 것처럼(살후 1:3) 바울의 감사는 확고하다. ① 하나님은 성도들의 삶 가운데 역사하시기 때문에, ②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풍성하기 때문에, ③ 하나님께서 그들을 선택하시고 부르셨기 때문에 ④ 결국에 가서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안전하게 하늘의 영광으로 인도하시기 때문에 바울은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비록 현재와 미래의 지독하고 무법하며 불경스러운 환난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확신에 찬 감사를 드리고 있다. 이것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보인 견고함의 근거에는 그들에 대한 확고 부동한 하나님의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라는 말 속에 이러한 바울의 확신이 가득 차 있다.
하나님께서는 주권적으로 그리고 불변의 선택으로 데살로니가 성도들을 처음부터 택하여 구원을 얻게 하신다. 여기에서 ‘처음부터’란 말은 ‘만세 전에’(고전 2:7), ‘만세로부터’(골 1:26), ‘창세 전에’(엡 1:4)와 같은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에서 말하는 ‘미리 정하신’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 말은 사탄이 일으키는 폭동이 제 아무리 혼란스럽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에 근거하고 있는 성도들의 구원을 뒤집어엎을 수 없으며 성도들의 구원은 창세 전부터 보장되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 구원은 죄와 부정과 죄의 형벌로부터의 구출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약속된 것처럼 그들이 하나님의 후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옛적부터 선택하신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위협하는 모든 불행으로부터 그들을 구출해 내실 것이며, 구원받기로 선택받은 성도들은 그 어떤 파멸로부터도 안전하게 보호받게 된다는 사실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다.
2)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그리스도의 진리에 근거한 구원
하나님께서 신자들에게 허락하신 이 구원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주어지게 된다. 이 구원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형상이 신자들에게서 완전히 형성되는 과정을 통해 성취된다. 이 구원이 성화의 과정을 필요로 하는 것은 신자들을 죽음으로부터 부활시켜 하나님 안에 있는 생명에 이르게 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선택함을 받은 성도들 안에서 창조적으로 활동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성도들에게 임하는 성화의 권능이다. 이것을 가리켜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권능과 그의 고난에 참여하는 삶’(빌 3:10-11)이라고 정의한다.
또한 이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구속의 진리’에 성도들이 적극적으로 생명을 다해 따름으로 말미암아 성도들에게 주어진다. 이 구속의 진리인 복음은 신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한다고 증거할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는 그 사실을 확증하시는 분이시다. 이때 성령은 성도들의 보장과 영원한 기업의 보증이 되신다(엡 1:13-14). 이와 같은 근거 아래 신자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다(롬 8:14). 그리고 그리스도는 기꺼이 이 신자들의 소유가 되어 주심으로써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성도들이 영생을 누리도록 하신다(요일 5:12).
이처럼 성도들의 구원은 복음의 신앙과 중생시키는 데 있어서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은혜를 통해 보장되었다. 따라서 성도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핑계로 갖가지 죄악을 일삼는 타락을 반복할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바울은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어 바울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영원하신 선택으로부터 하나님의 역사적인 부르심으로 나아간다.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사’라는 말은 ‘복음이란 하나님의 부르심이 신자들에 이르도록 하는 것이며 동시에 이것은 신자들이 복음에 반응하게 하는 하나님의 숨겨진 계획의 실행’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신적 선택이란 교회가 복음 전도에 전적으로 참여함으로써 신자들을 세상으로부터 교회의 회원으로 불러내는 모든 행위들임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그 분 자신에게로 부르시는 것은 오로지 교회가 행하는 복음 전도를 통해서만 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과거의 영원함 속에서 구원을 받도록 그의 백성들을 택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적당한 때에 신자들이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을 듣고 진리를 믿으며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심으로써 신자들로 하여금 미래의 영원함 속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할 목적으로 그 신자들을 부르신다.
이 하나의 문장에서 바울은 ‘처음’으로부터 ‘영광’에 이르기까지 통전적으로 구속사를 바라보고 있다. 이것은 신구약 시대를 통틀어 구원의 길의 열어주고 있는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확실한 근거 아래에서 성도들은 불안정에 대한 두려움을 더 이상 가질 여지가 없게 된다. 사탄이 가장 연약한 성도에게 가장 맹렬한 공격을 가한다 할지라도, 또한 적그리스도가 나타나고 대대적인 배도의 반역이 전세계적으로 발생한다 할지라도 오직 성도들은 불안정한 환경과 불안정한 상황을 넘어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영원한 안정됨(살후 3:3)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때 바울의 최종적인 시선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4)에 고정되어 있다. 이것은 마치 많은 고난 가운데서도 오로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빌 3:14)는 바울의 고정된 시선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앞선 서신에서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살전 5:9)라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이 구원을 얻는 최종 목적은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살전 2:12)고 밝히고 있다.
복음은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고후 4:4)만을 위해 존재한다. 이 복음의 영광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성도들에게 전해진다(고후 4:6). 그리고 마침내 신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 이미 자기들에게 익숙해진 그 ‘영광’의 광채와 함께 강림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영광을 더불어 나누게 된다. 이 내용에 대해서 바울은 “그 날에 강림하사 그의 성도들에게서 영광을 얻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으시리라(우리의 증거가 너희에게 믿어졌음이라)”(살후 1:10)고 이미 앞서 언급한 바 있다.
하나님의 백성을 위한 구원은 단순히 미래의 진노로부터의 구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현 세계에서의 구원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전달한 복음의 진리와 그 복음을 믿는 신자들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역사를 믿음으로써 받아들이는 모든 것을 포함한다. 그리고 이 구원은 미래의 삶에서 주의 영광에 신자들도 함께 참여할 수 있다는 확실한 약속을 동반한다. 따라서 신자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영원히 선택하신 사실을 알리는 복음과 그 복음에 대한 전적인 순종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삶으로써 자신들이 이 구원에 참여하고 있음을 실제로 증거해야 한다.
3) 교회가 받은 복음에 대한 각성
바울이 이 복음을 가리켜 ‘우리 복음’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점에서 성도들은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바울이 선포한 ‘우리 복음’만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알게 하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고후 11:4)라고 고린도 교회를 책망하는 사도의 말에 귀를 기울일 이유가 있다. 바울은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라고 선언한 바 있다.
바울은 분명히 데살로니가 성도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음을 의심하지 않았다. 내적 부르심은 구원으로 귀결되어야 하며 이 부르심은 마지막까지 거부할 수 없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불가항력적이다(요 4:14; 10:28; 롬 8:28-39; 11:29; 고전 1:9; 빌 1:6).
때문에 이 부르심을 실제적인 것으로 만들고 이 은혜를 거부할 수 없는 것으로 만들기 위한 일련의 수단으로 바울이 전파한 ‘우리 복음’을 향한 엄숙한 경고와 이 경고에 대한 복종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한 사도의 권리였다(갈 1:9). 이런 차원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이러므로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살후 2:15)고 강력하게 권면하고 있다.
바울이 전파한 복음인 그리스도의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의 의를 성취한 사건이었고 죄 있는 인간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유일한 구원의 근거였다. 때문에 오직 십자가만이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줄 수 있으며,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사랑이 모든 성도들의 일상 생활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바울에게 있어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복음의 전체 메시지를 가리키는 압축된 용어이다.
나아가 십자가 사건을 구원의 능력으로 성도들에게 믿음을 일으키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죄의 속박과 좌절과 공포에 잡혀있던 사람들이 십자가의 능력을 입게 되며 새로운 세계로 옮겨지게 된다. 따라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중에 그리고 그 선포와 더불어 성령께서 임하시게 되며 그 성령께서 그 복음을 듣는 이들을 회심시키고 신자로 부르신다. 이로써 성령은 개인의 삶에 변화를 가져오며 믿음과 협력의 교회 공동체를 이루도록 역사하심으로써 교회가운데 활력을 일으키시는 실체가 되신다.
따라서 바울과 사도들이 전파한 ‘우리 복음’은 그들이 개종시킨 성도들로 하여금 주 안에서 ‘굳게 서는 것’으로써 그 생명력을 증거할 수 있었다. 바울 역시 이 점을 중히 여기고 있었으며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살전 3:8)고 할 정도로 데살로니가 성도들과 교회를 통해 바울이 전파한 ‘우리 복음’의 생명력을 확증하는데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러한 관심 아래 바울은 성도들에게 ‘유전을 지키라’고 권면한다. 여기에서 ‘유전’(παραδοσις)이란 부활하신 예수의 주 되심을 시인하는 모든 것을 포괄한다. 그 내용은 단순히 역사적 예수의 전승을 통해서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고전 11:23). 그 내용은 부활하신 주의 영을 통해 그의 사도들과 제자들 안에서 계속 보존되고 전달되었다(살전 4:1).
이 그리스도에 대한 가르침이 이제 ‘말로나 우리 편지로’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에게 전파되었다. 따라서 바울이 전파한 ‘우리 복음’을 받은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은 그 복음을 지속적으로 보존하고 계승해야 할 역사적인 사명을 가지고 있다. 아울러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과 전통 가운데서 우리 시대의 교회는 마울이 지적하고 있는 ‘우리 복음’의 계승자로 존재해야 한다.
기독교의 자유와 진보의 정신은 결코 기독교의 유산을 존중하는 것과 상반되지 않는다. 기독교의 안정은 믿음과 행위에서 그리고 단체 및 개인 생활에서 기독교의 연속성을 유지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연속성의 유지는 ‘유전을 지키라’는 권고에 의해 장려된다. 모든 다양한 기독교의 유전은 역사적 예수, 즉 예수의 구속 역사와 그의 가르침으로 표출된 생활 방식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또한 이 모든 것은 부활하신 주께서 그의 영을 통해 이 세대 속에서 계속 이어지게 하는 것이므로 기독교의 전승은 활력 있고 역동적이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핍박이 심해질 때 굳게 서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하다. 이것은 성도들이 구원을 받았고 그들에게 승리가 확실하게 약속이 되었다 할지라도 그들이 처한 영적인 싸움을 싸우는 동안 가만히 앉아 있어도 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나아가 성도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을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이끄는 일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때문에 성도들은 전신갑주(엡 6:13-18)로 단단히 무장해 있어야 한다.
오히려 바울은 자기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안정된 목적에 대한 확신이 무책임한 느슨함을 정당화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스스로 굳게 설 것을 확신 있게 촉구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때 성도들이 확신을 갖고 굳게 붙잡고 있어야 할 것이 바로 ‘우리의 복음’이며 교회에게 전달한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유전’이다. 따라서 사도들이 전한 복음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삶의 토대이며 그 위에 교회가 세워졌음을 명심해야 한다.
또 하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굳게 서라’는 바울의 요청은 그들이 서로에게 형제로서 데살로니가 교회에게 주어졌다는 점이다. 이것은 기독교 공동체가 ‘굳게 서서 유전을 지켜야 함’을 요구하고 있다. 교회는 믿음의 친교를 나누는 곳이며 참신한 연구를 위한 단체로서 해석학적 공동체이다. 그 안에서 성도들은 사도들의 유전을 해설하도록 정식으로 인정받은 목사들로부터 가르침을 받으며, 그것을 자신들의 삶으로 적용시키기 위해 함께 씨름하고, 같은 성경을 가지고 서로를 가르치며 훈계하며 권고함으로써 서로를 격려해야 한다.
성경을 개인에게 맡겨 두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못 해석하고, 성경이 결코 의도하지 않았던 의미를 부여하며, 심지어 자신의 편견에 맞추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조작하게 된다. 따라서 성경 해석은 분방한 개인주의를 저지하는데 도움을 얻고 진리 안에서 굳게 서기 위해 기독교 공동체의 점검과 균형을 필요로 한다. 성도들로 하여금 굳게 서도록 만들어 주고 핍박과 거짓 가르침과 유혹의 압력에서 견딜 수 있도록 힘을 주는 것은 바로 역사적 개혁 교회 안에 있는 성경 해석이다.
특히 사도 시대에 사도들의 가르침은 구전으로 전해졌든 문서로 전해졌든 동일하게 중요했으며 동일한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사도들의 가르침은 이제 문서로 기록되어 역사적인 개혁교회들을 통해 계승되었으며 성경계시의 형태로 보존되어 왔다. 따라서 이 시대의 교회들은 바울이 선포한 ‘우리 복음’을 통해 교회와 신자들을 가르치고 순종케 하는 전승을 따라 지속적으로 가르침을 받고 순종을 배워야 한다. 무엇보다도 이 시대의 교회들은 성경계시로 계승된 말씀을 부인하고 경시하는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 즉 이단 사상들과 거짓 복음을 설교하는 이들로부터 훼손되지 않도록 이 복음을 보존하고 우리 후배들에게 전승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5. 사명을 각성한 교회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들의 마음을 고무하고 강하게 해 주시지 않는다면 그들은 결코 굳게 서서 사도들의 유전을 지키지 못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 교회와 성도들을 택하시고 부르신 것에 대해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감사의 내용에 근거하여 바울은 그들에게 굳게 서라고 권고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복음 안에서 굳게 설 수 있도록 또한 하나님께 간구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원하노라”(살후 2:16-17). 이 기도에는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간구가 함께 결합되어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 우리 아버지’를 결합하여 단수 동사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성자와 성부에 대한 본질의 단일성과 목적의 단일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살전 3:11).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구절은 예외 없이 구속의 모든 복을 포함하고 있다. 그 내용은 앞서 제시된 것처럼 ①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택하셨다는 사실, ②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주셨다는 사실, ③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는 사실들이 포함되어 있다. 아직 ‘주의 날’에 대한 두려움과 의문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에게 이러한 바울의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은 커다란 도움이 되었음이 분명하다.
‘영원한 위로’는 현세뿐 아니라 마지막 심판의 날에도 주어져야 한다. 사실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기쁨이 중단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슬픔에 대한 위로나 위안이 필요하지 않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신자들에게 영광 위에 영광을 베풀어주심으로써 그들을 항상 위로해 주신다. 본문의 ‘좋은 소망’은 든든한 토대 위에 서 있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역과 그에 따른 보혜사 성령의 인도하심에 입각한 소망이기에 기쁨에 찬 소망이며 결코 실망으로 끝나지 않는 소망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다.
이러한 위로와 소망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선물이다. 그리고 이것들은 마음을 위로하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는 은사로 주어졌다. 이것은 위로가 내적인 확신이라면 선한 일과 말은 내적인 확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외적인 확신이다. 그리고 ‘모든 선한 일과 말’은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는 일과 말을 지시한다. 결국 좋은 소망은 좋은 삶 안에서 성취되어야 한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에 전개되는 3장에서 구체적으로 다루어진다.<송영찬 목사>
https://cafe.daum.net/correctth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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