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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

갈라디아서(Galatians)

by 은총가득 2021. 12. 7.

 

갈라디아서(Galatians)

 

 

들어가면서

 

개신교인이라면 신약에서 가장 중요한 성경이 ‘로마서’라는 것을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로마서는 이신칭의를 다루는 가장 체계적이며, 중요한 성경입니다. 특히 구약의 율법과 신약의 복음을 세밀하면서도 치밀하게 논증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이신칭의에 대한 선언은 초대교회의 핵심사상이자, 종교개혁을 시작하게 한 교리 중의 교리입니다. 로마서 말고는 이신칭의를 다루는 성경이 또 있습니다. 바로 갈라디아서입니다. 야고보서를 제외한다면 신약의 어떤 성경도 이신칭의를 빗겨나가지 않습니다. 직.간접적으로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바울의 외침을 들을 수 있습니다. 이신칭의는 비단 바울의 주장만은 아닙니다. 신약의 모든 성경이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갈라디아서는 ‘작은 로마서’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바울의 이신칭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행위율법에 허우적거리며 하나님의 은혜를 망각한 중세교회에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선언하며 루터는 종교개혁을 시작했습니다. 교회사가들은 루터는 종교개혁을 일으킬 마음이 전혀 없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내 걸었던 95개조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사이다 발언’과 같았고,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번져나갔습니다. 루터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종교개혁을 시작했고, 결국 교회의 역사의 획을 긋고 말았습니다. 교회사 인물 중에서 그 어떤 인물보다 루터보다 유명한 인물은 없으며, 루터를 다룬 책보다 더 많이 다룬 인물은 없습니다. 심지어 칼뱅조차도 루터에 관련된 문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갈라디아서는 짧지만 강력한 서신입니다. 사람이 구원 받기 위해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 받습니다. 사람의 그 어떤 사유나, 논리, 공로나 행적도 구원의 이유나 조건이 되지 못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 어떤 것도 구원의 수단이 되지 못합니다. 이신칭의는 결코 쉬운 교리가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라는 고백 속에는 ‘그럼 사람이 죄를 짓고도 믿음만 있으면 된단 말인가?’라는 의혹과 그와 같은 맥락의 적지 않은 도전들이 사막의 여우처럼 나그네를 노리고 있습니다. 이신칭의는 종종 방종과 나태, 거짓된 삶과 방탕으로 이끄는 사단의 교리처럼 오해 받아왔고, 여전히 공격 받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공격이나 오해를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단호하게 ‘사람의 공로는 필요 없다’고 선언합니다.

 

거짓교사들이 전하는 다른 복음은 ‘구원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였습니다. 그것은 절기를 지키는 일이며, 할례를 받는 것이며, 율법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행위가 정확하게 유대인들이 지킨 율법의 행위들인지는 아직도 학자간의 합의되지 못해 논쟁을 이어갑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구원을 위해 사람이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은 없습니다. 바울은 이신칭의 교리는 1-4장까지 주도면밀하게, 다양한 예를 들어가며 설명합니다. 5장에서는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이야기합니다. 종의 멍에를 벗고 하나님의 아들이 된 자들은 ‘성령’을 따라 행하며(5:16), ‘사랑으로서 역사는 믿음’(5:6)을 가진 자들입니다. 5장은 ‘성령장’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어야 합니다. 6장은 마지막 인사로서 서로 사랑하라는 권면을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현재 새 언약을 비롯한 고전적 이신칭의를 주장하는 학자들이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입니다. 구원 서사에서 적용의 차원을 고려한다면 성령은 빼놓을 수 없는 주제입니다.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인해 내적 소명이 완성되고, 칭의와 성화의 단계에서도 성령은 여전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이신칭의 논쟁은 성령을 거의 언급하지 않거나 대수롭지 않은 것으로 치부합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견해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한 장을 할애하여 성령을 강조합니다. 5장의 마지막 다섯 절은 정확하게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5:22-26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이 책은 주해와 묵상집이기 때문에 5장외에는 성령을 거의 다루지 못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신칭의와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은 중요한 주제라는 점은 잊지 말기를 바랍니다.

 

수신지인 갈라디아에 대한 적지 않은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저는 남갈라디아설을 지지하는 편이지만 모호할 뿐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저작연대 또한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 근거하여 바울의 최초 서신으로 보아 주후 약 48년이나 50년대 초로 잡을 수 있습니다. 만약 북갈라디아설을 따를 경우 주후 50-57년 사이라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 어떤 것도 정확한 것은 없습니다. 다만 전반적인 내용을 고려할 때 예루살렘 공의회가 일어나기 직전이거나 일어난 후에 결정된 소식이 먼 이방 교회까지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거짓교사들은 이방교회로 찾아 들어가 예수를 믿어야 할 뿐 아니라 할례도 받아야 한다고 유혹했습니다. 바울은 거짓교사들의 가르침을 폭로하고, 진정한 복음과 구원 얻음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위해 갈라디아서를 기록했습니다.

 

갈라디아서 구조

 

갈라디아서의 개략적인 구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Ⅰ.1-4장 복음을 변증하다

1:1-10 다른 복음은 없다.

1:11-24 바울의 사도직(1)

2:1-10 바울의 사도직(2)

2:11-21 믿음을 의롭게 됨

3:1-29 율법의 역할

4:1-7 종과 아들

4:8-20 갈라디아교인들의 시작과 현재

4:21-31 하갈과 사라:시내산과 예루살렘

 

Ⅱ.5-6장 그리스도인의 삶

5:1-15 그리스도인의 자유와 사랑

5:16-26 육체대 성령

6:1-18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

 

묵상 본문은 전체 구조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하루 묵상과 설교의 분량의 조절하여 구분했습니다. 또한 주의 깊게 다루어야할 부분이나 강조해야할 부분은 더 짧게 나누어 살펴 보았습니다.

 

성경 본문

 

개정개역 4판

쉬운성경, 공동번역

헬라어 성경은 넬슬 알렌 27판을 기본으로 삼았습니다.

 

1:1-10 다른 복음은 없다.

1:11-24 바울의 사도직(1)

2:1-10 바울의 사도직(2)

2:11-21 믿음을


갈라디아서 수신자들 :

남갈라디아설과 북갈라디아설

 

1. 수신자들

갈라디아서의 수신지는 어디일까? 학자들은 북갈라디아설과 남갈라디아설로 치열하게 공방한다. 그것이 갈라디아서를 해석함에 있어서 크게 지장을 주는 것은 아니지만 독자들에 대한 이해는 갈라디아서를 잘 이해할 수 있다.

 

북갈라디아설

소아시아 북부의 원래의 갈라디아 지방에 위치할 것으로 본다. 사도행전 16:6, 18:23에 언급된 갈라디아는 북갈라디아라고 본다. 교부 시대와 중세, 그리고 종교개혁가들은 북갈라디아설을 지지한다. 그들은 갈라디아교회가 소아시아 북부에 위치한 고올족 또는 켈트족 혈통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쓰여 졌다고 생각한다. 주후 74년경 베스파시안 황제는 갈라디아로부터 비시디아의 거의 대부분을 분리시켰다. 주후 137년에는 루가오니아 갈라티카가 갈라디아로부터 떼어져서 길리기아와 이소리카에 합쳐져 보다 넓어진 길리기아를 이루게 된다.

 

주후 297년경, 남부갈라디아는 여러 인접 지역과 합쳐저 안디옥을 수도로, 이고니온을 제2의 도시로 하는 새로운 비시디아성을 이루게 된다. 초기의 주석가들은 인종에 따라 분류되어 축소된 갈라디아 성에 근거하여 북부설을 지지한다. 1865년 라이트푸트는 바울 서신과 누가의 사도행전 양자에 나오는 '갈라디아'는 정치적 의미가 아니라 인종적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로마서와 고린도전·후서를 쓰기 전인 주후 57-58년경인 제3차 전도여행 중 마게도냐나 아가야에서 북갈라디아에 위치한 도시들에게 편지를 썼다고 주장한다.(WBC) 제임스 모펫은 북갈라디아설을 주장하지만 저작 시기는 1:6에 근거하여 좀 더 이른 주후 53년으로 본다

 

남갈라디아설

안디옥과 이고니온을 주요 도시로 하는 '브루기아 갈라티카'에 위치했다고 본다. 사도행전 13:14-14:23에 갈라디아 교회의 설립이 기록되어 있다. 역시 사도행전 16:6과 18:23에 언급된 갈라디아를 남갈라디아로 본다. 1890년 윌리엄 램지(William Ramesy)는 북갈라디아설을 아래의 근거로 반박한다.

 

1. 일찍이 주전 2세기에 [소아시아북부] 갈라디아 인구의 절반 이상인 브루기아의 기원은 주변 지역의 일반인들에게 잊혀졌으며, 그 나라 전체가 갈라디아로, 그 백성은 갈라디아인으로 생각되었다.

 

2. 갈라디어가 넓어지고 주전 25년 성이 되었을 때, 이것은 그 남부 사람들에게도 적용되었다. 왜냐하면 '로마 제국의 모든 비로마인은 성민으로서의 신분이 되었으며, 그는 그 민족이 아니라 성에 따라 로마 제국의 구성원이라 불려졌기 때문이다.

 

3. 외국인, 적 그리고 노예는 로마의 이론상 서로 연관된 개념들이었기 때문에 정중한 웅변가나 작가 어느 누구도 안디옥인을 브루기아인이라고 또는 루스드라인을 루가오니아인이라 호칭하지 않았을 것이 확실하며-단지 그 경우만은 아니겠지만, 특별히 그들 중에 로마의 시민들이 있을 경우-아마도 그들은 갈라타이 즉 갈라디아 성의 구성원으로서이 로마 제국의 구성원, 또는 훨씬 더 존칭이었을 콜로니, 즉 로마의 콜로니아니의 시민이라 호칭했을 것이다.

요약하면 램세이는 바울이 갈라디아인을 언급할 때는 갈라디아 성의 남부에 위치한 네 교회를 의도하며, 갈라디아 땅을 언급할 때(행 16:6, 18:23) 누가는 인종상의 갈라디아와 대조되는 성이라는 행정 구역상의 갈라디아를 의도했다고 한다. 램지는 저작 시기를 2차 선교 중의 어느 시기이거나 주후 50년 즈음으로 본다. 후에 행 15장에 나오는 예루살렘 공의회 직전에 수리아 안디옥에서 썼다고 말한다.

지지자 : F.F. Bruce

 

수신자를 떠나 중요한 관점은 갈라디아서가 쓰여진 시기가 행15장 이전인가 아니면 이후인가이다. 왜냐하면 행 15장에서는 예루살렘 공외회가 이방인들에게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즉 율법을 행하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선언한 혁명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토마스 R. 슈라이더는 ‘모든 것을 고려했을 때 남갈라디아설이 바람직해 보인다’고 말한다.(<강해로 푸는 갈라디어서>디모데) 간추려보면 북갈라디아설은 예루살렘 공의회 이후에 쓴 것이 되고, 남갈라디아설은 공의회 직전이 되는 셈이다.

 

교회 구성원들

갈라디아 교회 구성원들은 누구일까? 물론 대부분의 초기 이방 신약교회는 대부분이 이방인이고 소수의 기독교 유대인들이었다. 100% 순수한 이방인과 유대인들로 구성된 교회는 존재하지 않았다. 대체로 안디옥 수리아 안디옥은 대부분이 유대인들이었고, 일부만이 이방인들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교회는 대부분이 이방인들이었고, 극소수의 유대인들이 섞인 상태로 존재했다. 로마교회의 경우는 확신할 수는 없으나 유대인들이 약 1/3 정도 차지한 것으로 보인다. 고린도교회의 경우는 90%이상이 고린도 사람들로 구성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갈라디아 교회는 어떻게 되었을까? 일반적인 추론에 의하면 80%이상이 이방인들이거나 더 많을 수도 있다. 즉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극히 적었을 것이다. 그런데 갈라디아 교회의 경우는 일반 범주에 넣기에 적지 않은 어려움이 있다. 그것은 갈라디아서가 결코 이방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는 점이다. 로빈슨은 갈라디아서가 아닌 로마서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유대교적이며 구약적이며 랍비적인 배경을 전제하며 그 배경을 전혀 몰랐던 자들로서는 어려울 것이다.”

갈라디아서는 로마서보다 더 유대적이며, 구약적이다. E.P. sanders는 갈라디아서를 ‘이방인 청중에게 가장 어려운 서신’라고 말한다. 갈라디아서는 이방인들이 읽어내기 힘든 유대적 맥락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사라와 하갈의 은유를 비롯해, 율법에 대한 포괄적 의미를 다양하게 담아내고 있다. 특히 율법의 기능과 한계를 지적하는 부분에서는 유대인조차도 이해하기 쉽지 않는 신학적 해석이 전제되어있다.

 

갈라디아서 강해
1:1-5 바울 사도로 부름 받다.

 

[본문 읽기]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5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주해와 묵상]

갈라디아서의 첫 시작은 다른 서신처럼 인사말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인사하면서 자신과 수신자들에 대한 안부를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묻습니다. 로마서의 경우 복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고린도 전서는 더욱 간략하게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구합니다. 갈라디아서는 기존의 인사말 형식을 그대로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내용은 사뭇 긴장감이 흐릅니다.

사도 된 바울은(Παῦλος ἀπόστολος)

헬라어 첫 구절은 ‘바울 사도’로 시작합니다. 의역하자면 ‘사도인 바울은’이 될 것입니다. 바울의 원래 이름은 사울입니다. 사울이란 이름은 이스라엘 초대 왕이었던 사울 왕에게서 가져온 것입니다. 베냐민 지파였던 바울은 베냐민 지파 출신의 첫 왕 사울의 이름을 물려받은 것입니다. 바울이라 이름은 헬라식이거나 라틴식일 것이라 학자들을 추측합니다. 사울의 뜻이 ‘크다’라면 바울은 ‘작다’는 뜻입니다. 왜 그가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성경을 정확하게 들려주지 않습니다. 자신의 고백대로 유대인의 사도가 아니라 이방인의 사도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자신을 스스로 바울로 불렀을 가능성도 존재합니다.

그는 자신의 원래 이름을 버렸습니다. 사울은 자랑스러운 이름입니다. 바울이 자랑한대로 베냐민 지파이며, 사울 왕에게서 가져왔으며,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것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위해 자신의 원래 이름을 버리고, 작은 자로 자처합니다. 바울의 능력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복음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버릴 줄 알았습니다. 오로지 자신에게서 사울이 아니라 복음, 예수 그리스도만 드러나기를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나아갈 때 어떤 이름을 갖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 ‘성도’라는 이름을 부끄러워하지는 않지요?

 

바울의 자기소개에서 두 번째 주목할 것은 ‘사도(ἀπόστολος)’라는 단어입니다. 바울은 대부분의 서신에서 자신을 사도로 소개합니다. 그러나 몇 곳에서는 사도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사도로 소개하지 않는 곳: 빌, 살전-후, 몬]

사도(ἀπόστολος)는 ‘~으로부터’라는 뜻의 ‘ἀπό’와 ‘~을 준비하다’와 ‘보내다’란 뜻을 가진 ‘στέλλω’가 합해진 단어로 ‘보냄을 받는 자’란 뜻입니다. 현대의 ‘대사’와 비슷한 의미입니다. 이후의 구절들에서 확연하게 드러내고 있지만, 갈라디아서에서는 고린도전서처럼 사도직을 유난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사도(ἀπόστολος)라는 호칭은 먼저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를 뜻했고, 바나바와 같은 열두 사도에 준하는 사람들까지 아우르는 호칭이었습니다. 사도란 호칭은 단순한 직분이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를 드러냅니다. 즉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보내심을 받은 자로서 사도인 것인 것입니다. 이러한 바울의 생각은 누가의 관점과 동일합니다.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행 9:15)

 

바울은 자신의 사도됨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ㄱ. 사람에게 난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말미암은 것도 아니다.

부정에 부정을 더합니다. 사람(ἀνθρώπων)에게서 나온(ἀπ᾽) 것이 아니다. 또한 사람으로 말미암은(δι᾽)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일반적인 사람을 일컫는 것으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연 상태의 육신적 사람을 뜻합니다. 바울은 동일한 사람이란 단어를 부정적으로 취급하여, 앞으로 자신의 사도직인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강조합니다.

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께로부터

그럼 자신의 사도직은 어디서부터 왔는가? 바울은 예수님과 하나님께로부터 왔다(διά)고 말합니다. 바울은 예수님보다는 하나님께 무게 중심을 둡니다. 하나님은 누구신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는 분입니다.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의 인사말은 그 어떤 서신보다 강력하고 긴장감을 유발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이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죽은 자 가운에서 예수님을 살리신 하나님께 왔다고 말합니다. 더글라스 무는 본절을 주해하면서 ‘아포(ἀπό)’와 ‘디아(διά, ~통해서, 말미암아)’라는 두 전치사가 최종적 기원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바울의 사도됨이 인간의 어떠한 간섭도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주님은 아나니아를 통해 사울에게 안수하게 했고, 안디옥 교회를 통해 선교사로 파송했습니다. 이곳에서 바울이 말하고 싶은 것은 최종적인 기원이 인간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말하고 싶은 것입니다.

모든 형제(ἀδελφός)와 더불어

바울은 종종 자신과 동역한 사람들을 ‘형제’로 불렀습니다. 신분과 계급을 뛰어넘어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된 것입니다. 바울이 형제라 부르는 사람들은 유대 기독교인과 이방 기독교인이 섞여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을 한 ‘형제’로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복음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공동체나 친밀한 모임에서는 서로를 향하여 형제로 불렀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분이 다르거나 계급이 다를 때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십자가로 인해 모든 차별과 구별이 사라진 복음 공동체의 힘입니다.

 

자기 몸을 주신 그리스도

참으로 놀라운 고백이 이어집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 기원은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3절)입니다. 진정한 은혜와 평강이 기원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입니까? 그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4절)신 분입니다. 바울은 초지일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단순한 사실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한 대속의 사건임을 강조합니다. ‘이 악한 세대’(4절)는 갈라디아 성도들이 처한 상황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모든 세대는 악한 세대입니다. 그들의 운명은 죽음과 심판이며, 영원한 형별로 향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인들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그들을 죽음에서 구원했고, 영원한 생명으로 선물로 주었습니다.

나가면서

바울은 편지를 시작하자마자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변증을 시작합니다. 바울이 사도된 것은 자신의 의지나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능력의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드림으로 악한 세대 속에서 우리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 어떤 존재도 죄에서 우리를 구할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하십니다. 바울은 이러한 예수님을 위해 사도로 부름을 받았으며, 그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강해] 2. 1:6-10 다른 복음은 없다.

 

[본문 읽기]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주해와 묵상]

 

종교개혁을 일으킨 장본인인 마르틴 루터는 갈라디아서 주석을 시작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다시 한번 이 갈라디아서를 해석하는 데 착수하였다. 이는 내가 그대들이 이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새로운 것들을 가르치기를 원하기 때문이 아니다. 특히 하나님의 은혜로 바울은 이제 여러분들에게 철저하게 알려져 있다. 사단이 우리로부터 믿음에 관한 순수한 가르침을 앗아 가버리고 교회에 다시 한번 행위의 가르침과 사람들의 유전을 들여오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 이 가르침을 잃어버린다면, 진리와 생명과 구원에 관한 지식 전체를 잃어버리게 된다.”

 

종교개혁 시기는 인간의 공로를 부정하고 ‘오직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는 칭의에 몰입해 있을 때입니다. 루터는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통해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종교개혁의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1:6-10절까지는 바울이 자신의 사도 됨과 인사말을 마친 다음 곧바로 경고를 시작합니다. 경고의 핵심은 ‘다른 복음’에 대한 것입니다. 바울은 왜 갑자기 모든 이야기를 버려두고 성난 사람처럼 갈라디아 교회에 ‘경고’하는 것일까요?

 

다른 복음(ἕτερον εὐαγγέλιον)

 

바울은 논쟁을 시작하면서 중요한 단어를 언급합니다. 그것은 ‘다른 복음’(1:6,7,9)입니다. 바울의 주장은 다툼의 여지가 없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다른 복음’은 존재하지 않기에 곧바로 ‘다른 복음은 없다’라고 선언합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무엇이며, 다른 복음은 무엇인지 고민할 필요가 있습니다. 또한 번역된 성경에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지만 성경 원문에서는 ‘다른’이란 단어는 같지 않습니다. 이 부분은 간략하게 정리하고 넘어갑시다.

 

먼저 6절에서 사용된 ‘다른 복음’은 ‘헤테론 유앙겔리온(ἕτερον εὐαγγέλιον)’입니다. 즉 ‘헤테론’의 원형 ‘헤테로스(ἕτερος)’는 영어 단어를 빌려와 설명하면 ‘another’, ‘second’, ‘other’, ‘different’ 등의 의미를 갖습니다. 복음(εὐαγγέλιον)이기는 하지만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7절에서 사용된 ‘다른’은 ‘알로(ἄλλο)’입니다. 알로는 마태복음 2:12과 4:21에 사용된 용례에 의하면 동일한 종류이지만 약간의 차이를 가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글라스 무는 두 단어의 어원이 동일하다는 던(Dunn)과 튜너(Turner)의 주장에 동의하며 ‘두 단어를 어원적으로 동등한 것으로 볼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그는 비슷한 단어를 교차하여 사용했다면 참 복음과 거짓 복음을 대조하기 위해 의도한 것으로 봅니다. 제가 보기에도 두 단어는 ‘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 거짓 교사들에 의해 만들어진 ‘다른 복음’ 있다는 것을 강하게 부정하기 위해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너희는 그들이 전하는 다른 복음이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그것이다. 다른 복음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전한 복음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복음이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전한 복음

 

그렇다면 바울이 전한 복음이 무엇일까요? 가장 중요한 정말 어려운 질문입니다. 바울 신학 전체를 아울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간략하게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간을 대표하여 드려진 속죄 제물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과 고난,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은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죽으심을 죄를 사하는 능력을 갖게 됩니다.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습니다. 이것을 믿음으로 받는다면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이 바울이 로마서 주장한 복음입니다. 본절인 1:6-10까지의 내용만으로 정리해 봅시다.

 

먼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하나님은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십니다.(6절) 그리스도의 은혜는 후반부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바꾸어 사용됩니다. 10절에 의하면 그 복음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앞선 1-5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 됨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1절)로 말미암았다고 주장합니다. 사도는 ‘보냄을 받은 자’의 뜻이기에 자신의 사도적 직분은 혈통이나 전통,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며 오직 하나님께서 직접 세우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사도직을 계속하여 강조하고 변증 하는 이유는 사도직 자체가 아니라 사도적 권위에 의해 전해지는 ‘복음’ 때문입니다.

 

1) 다른 복음을 쫓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6절)

 

6절을 유의하여 읽어 봅시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향하여 ‘내가 이상하게 여긴다’고 말합니다. 그 이상함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죄인들을 아들로 삼으신 또는 구원하신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앞으로 드러나겠지만 ‘다른 복음’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무효화하며,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것을 부정합니다. 자신의 수고와 노력이 더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율법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어떤 것도 제공하지 못합니다. 율법은 무능하고, 유통기한이 지나 폐기되어야 할 것에 불과합니다. 신선하고 영양이 가득한 햇밥을 버리고, 유통기한이 지나 쓰레기통에 버려진 곰팡이 슨 밥을 다시 주워 먹는 것과 같습니다. 그럼에도 갈라디 아교회 교인들은 율법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보기에 이것은 너무나 이상한 일입니다. 비합리적이며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2)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습니다.(8,9절)

 

다른 복음을 전하면, 또는 받으면 저주는 받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복음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르신 하나님을 떠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엔 크리스토), 그리스도의 은혜로 불렀습니다. 은혜(χάρις)는 선물(χάρις)입니다. 은혜의 헬라어 ‘카리스(χάρις)’는 은혜, 선물, 은사 등으로 번역되며 일방적으로 주어진 것을 말합니다. 어떤 대가를 통해 얻어진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바클레이는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주어진 ‘그리스도의 은혜(ἐν χάριτι Χριστοῦ)’가 진리에 대한 인간적 진보와는 아무 관계없이 펼쳐지는 하나님의 주도권이라고 말합니다. 길지만 전후 문맥을 위해 인용해 보겠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이 그리스도-사건을 꼭 붙들지 못하고 흔들거렸을 때, 그들은 바울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떠난 것이다.(1:6) 이 ‘부르심’은 하나님이 발하신다.(참조, 1:15, 5:8, 살전 5:24, 고전 1:9, 7:17-24). 실제로 ‘부르심(καλέω, κλησις)’은 구원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증명하기 위해 바울이 즐겨 사용하는 용어로, 이 부르심에 따라 능력, 지위, 도덕적 가치와 상관없이 새로운 실재가 창조된다. 비상응적인 부르심의 역동성은 갈라디아 교회 교인들이 경우를 보면 증명된다. 그들은 ‘부르심’ 받기 전에 하나님을 몰랐고,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 했다.(4:8-9) 이방인으로서 그들은 율법과 상관없는 ‘죄인’이었다.(2:15) 그들은 이제 하나님을 알았게 되었으나. 이는 자기들이 인식론적 능력에 근거하지 않는다.”

 

바클레이는 구원과 하나님의 백성 됨, 그리고 믿음조차 하나님의 선물(카리스, χάρις)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선물을 저버리는 행위는 저주 가운데 빠질 수 없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선물을 버리는 것은 결국 하나님의 선물(은혜)인 그리스도를 버리는 것이며, 그리스도를 선물하신 하나님의 방식과 하나님 자체를 버리는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을 기쁘게 하라.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은 ‘율법의 행위’에 주의를 줍니다. 율법은 선하지만, 죄성을 가진 인간을 선한 율법을 행할 능력이 없습니다. 또한 율법 아래 있는 시간은 이미 지났습니다. 성령의 시대가 도래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을 받게 되었습니다.(3:2) 이제 성령의 지배 아래 있는 것입니다. 인간 안에 선한 것이 없음을 안다면 율법을 자신의 힘으로 이루려는 의도는 어리석은 것이며, 결국 하나님을 저버리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이러한 율법의 한계를 알았음에도 그것들을 의지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와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을 기만했습니다. 바울은 그런 ‘다른 복음’은 없다고 단호히 선언합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됩니다. 의롭게 된다는 말은 곧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말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가면서

갈라디아서는 신약 성경 중에서 가장 초기에 기록된 서신에 속하며, 바울의 생각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 곳이기도 합니다. 2천 년이 흐르고, 번역된 글이며, 음성이 아닌 문자로만 읽어도 바울이 얼마나 격하게 반응하고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기어서 고속도로로 들어가는 것을 본 아버지가 미친 듯이 소리 지르며 아이를 향해 달려드는 것 같습니다. 너무나 사랑하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달려드는 아버지의 심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자신이 가르친 것을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다만 바울과 조금 ‘다른 복음’ 일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말하는 ‘다른 복음은 없다’고 분명히 선언합니다. 그들이 가르침은 거짓이며, 왜곡되었으며, 의도적으로 복음을 어지럽히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 1:11-17 은혜로 부르시는 하나님

 

[본문읽기]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주해와 묵상]

 

이제 본론으로 들어왔습니다. 1:1-10까지는 갈라디아서 전체 서두에 해당됩니다. 다른 편지와 다르게 바울은 급하게 서두 안에서 자신이 감정을 드러내고 ‘다른 복음’에 대한 열변(熱辯)을 토했습니다. 거짓 선지자들은 ‘다른 복음’이 있다고 말하지만 바울은 ‘다른’ 복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이제 1:11-2:21까지는 복음이 무엇인가 증명해 나갈 것입니다. 이 부분은 갈라디아서 본론의 서론에 해당합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1:11-17절까지는 바울이 복음을 변증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받은 복음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입니다. 1:11-1:24까지 한 곳으로 묶어 묵상하면 좋겠지만 11-17절까지는 몇 가지 중요한 사항들이 있어 둘로 나누어 1:18-24은 다음에 묵상합시다. 갈라디아서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는 ‘바울이 어떻게 해서 사도가 되었는가’입니다. 다른 서신서에서도 종종 강조되지만 갈라디아서는 더욱 무게를 두고 사도성을 변증해 나갑니다. 사도성은 곧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권위와 갈라디아 교회에 침투한 거짓 교사들에 대한 반론의 근거로 사용됩니다. 1:11-17까지의 내용은 아래와 같이 나눌 수 있습니다.

 

ㄱ. 11-12 바울 복음의 기원

ㄴ. 13-14 유대교에 있을 때의 바울

ㄷ. 15-17 예수를 믿고 난 후의 바울

 

1) 바울 복음의 기원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1-12절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할 구절은 다른 것이 아니라 ‘내가 전한 복음’이라는 구절입니다. 이 구절은 앞선 ‘다른 복음’과 대척점(對蹠點)에 있습니다. 다른 복음과 바울의 복음의 본질적 차이는 복음의 기원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특징을 몇 가지로 정리합니다.

 

먼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다.

 

헬라어 순서에 의하면 ‘(분명히) 알아라(Γνωρίζω)’로 시작합니다. ‘알아라’의 헬라어 ‘그노리조(Γνωρίζω)’가 대문자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대문자는 대화의 시작이나 강조를 나타낼 때 사용합니다. 바울은 감정이 격앙된 것이 분명합니다. 너무나 중요한 것임을 강조하고 싶은 것입니다. 무엇을 알아야 할까요? 그것은 사람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니라(ὅτι οὐκ ἔστιν κατὰ ἄνθρωπον)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복음이 사람으로부터(κατὰ ἄνθρωπον) 온 것이 아니라고 명백히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사람으로 말미암지 않았다는 말을 부정적으로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복음의 기원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으로부터(κατὰ ἄνθρωπον)’라는 말은 거듭나지 않는 사람을 뜻하며, 하나님의 영적인 세계에 대해서는 무지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바울은 사람을 곧 율법과 동일시합니다. 이 말은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16절)와 대등한 말입니다.

 

두 번째는 사람에게 받거나 배운 것이 아니다.

 

이 표현 역시 ‘사람에게’와 동일의 의미입니다. 다만 ‘받다’와 ‘배운다’는 좀 더 명확하고 확고한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처음은 약간 모호하게 강조하다가 점점 분명하게 사람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점진 법을 통해 자신의 의지와 뜻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받다’의 헬라어인 ‘파라람바노(παραλαμβάνω)’는 종종 다른 사람이나 스승에게 전수 받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동일한 단어가 사용된 고린도전서 11:23에서 ‘주께 받은 것이니’이라는 동일한 의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종종 전통을 부정적으로 표현하긴 하지만 전통 자체를 악하다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것들은 구원을 줄 수 없는 무능하고 무가치한 것임을 강조할 때 사용합니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다.

 

11절과 12절 상반절은 ‘아니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그렇다면 무엇인가라고 뭇는 물음에 답을 하듯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았다(ἀλλὰ δι’ ἀποκαλύψ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라고 소개합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입니다. 사람이 생각하거나 궁리하거나 추론한 것이 아닙니다. 계시라는 말은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 그리고 섭리를 통해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오래된 사랑의 발현(發現)입니다. 계시는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계획하시고, 이루어 가시는 의지인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라고 말하지 않고 곧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리고 직설적으로 표현합니다. 요한 역시 요한계시록을 시작하면 곧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ἀποκαλύψεως Ἰησοῦ Χριστοῦ)’라고 표현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한 분이시며, 하나님의 영광이시며,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 함께 세상을 구원하시며 심판하시는 분입니다.

 

2) 박해자 바울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3-17은 앞선 11-12절의 논리적 근거로 제시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사람은 사람 개인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유대교와 그와 관련된 율법 등을 포괄적으로 ‘사람(ἄνθρωπος)’이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제 자신이 사람으로 있을 때, 즉 유대교에 있을 때 어떤 상태였는지를 소개합니다. 그는 한 마디로 교회를 박해하는 자였습니다.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에서 바울이 ‘지금은’ 유대교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바울이 ‘육신적 유대인이 아니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이 말은 유대교 전통에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후에 강조될 ‘율법의 행위’는 ‘유대교에 있을 때 행한 일’과 동의어입니다. 더글라스 무는 이 구절을 “바울이 자신의 헌신과 열정을 뛰어나게 했던 전반적인 유대교 신앙을 아우르는 말로 보인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유대교라는 단어를 “유대 신념과 관례가 모세 율법과 토라에서 발전된 전통에서 성문화된 대로 그것들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왜 문제일까요? 바울이 유대교에 있을 때, 즉 율법의 행위를 통해 의에 이르고자할 때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육신에 속한 자가 성령을 따르는 자를 박해하고, 육신의 자녀가 영적인 자녀를 박해한 것처럼 말입니다.(갈 4:21-31) 바울과 전통 유대인들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것은 다른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율법에 속한 자들의 필연적 행동입니다. 바울은 14절에서 “유대교”와 “내 조상의 전통”을 동등어로 사용합니다. 유대교에 대한 열심히 곧 전통에 대한 열심입니다. 결국 이러한 열심의 근원은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는 육신에 속한 ‘율법의 행위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지금 말하고 싶은 것은 단순히 유대교와 전통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갈라디아 교회가 유대교와 조상(유대인)의 전통을 따르려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렇게 한다면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예수를 통한 ‘의’를 핍박(대적)하는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는 디모데에게 자신이 교회에 대하여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딤전 1:13)로 고백합니다. 13-14절에서 나타난 바울의 열심은 후에 소개될 거짓 교사들의 열심(4:17)과 동일합니다. 결국 그러한 열심은 갈라디아 교회를 복음에서 떠나게 하여 자신들에게 열심을 내게 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러했듯 거짓된 열심은 결국 육식의 욕망을 따라 행하게 합니다. 그러한 욕망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는 거짓되고 왜곡된 열심을 유발시키며 교회를 핍박하게 할 것입니다. 육신에 속한 자들을 본성적으로, 필연적으로 교만합니다. 바울은 왜곡된 열심에 오도(誤導)되어 교회를 박해했던 것입니다.

 

3) 거듭난 바울

 

바울의 변화는 갑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교회를 박해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향하던 길에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됩니다. 그는 눈이 멀었고, 앞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아나니아에게 안수를 받고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ὁ Υἱὸς τοῦ Θεοῦ)’(행 9:20)이라고 전합니다. 종종 어떤 목사님들은 17절에 나타난 아라비아가 침묵하고 기도하며 사역을 준비하려 갔다고 말하지만 전혀 아닙니다. 바울은 눈을 뜬 즉시 회당으로 갔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다메섹에서의 체험은 하나의 경험이 아니라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났게 했고, 새피조물이 되게 했습니다.

 

바울의 거듭남의 특징들

바울의 거듭남의 특징을 간략하게 살펴봅시다. 세 가지 특징을 볼 수 있습니다.

ㄱ. 어머니의 태에서 택정하심(15 상)

ㄴ. 은혜로 부르심(15 하)

ㄷ. 사명을 위해 부르심(16 상)

 

이 앞선 두 가지는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함’이라는 16절 상반절을 향하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태에서 택정함은 곧 은혜로 부르셨다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태에서부터 불렀다”는 표현들은 사명과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이사야와 예레미야는 태에서부터 택정함을 입었습니다. 바울이 자원하거나 곰곰이 생각해보고 결정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강권적인 부르심 때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택정과 부르심이 ‘선지자직’과 깊게 연관 있는 것을 생각한다면 바울의 이러한 표현은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고 강조하려는 의도가 분명합니다. 이사야 선지자와 예레미야 선지지가 모태에 있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았을 때처럼 사도바울 역시 모태로부터 사도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의 소명에 대해 혈육과 의논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것을 확증받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가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아라비아로 다시 전도하러 갔던 것입니다.

 

3. 나가면서

 

바울은 거짓 교사들이 가르치고 있는 다른 복음의 실체를 폭로하려고 합니다. 먼저 자신이 누군인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자신의 사도직이 왜 중요하고, 그 사도직이 어떻게 해서 생겨난 것인지 강조합니다. 자신이 전한 복음은 인간의 지혜나 경험, 또는 전통에서 생겨난 것이 절대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왜 그것이 중요할까요? 거짓 교사들이 말하는 헛된 가르침에 속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거짓교사들이 가르치고 있는 유대교, 전통은 육체적 욕망에 사로잡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교회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부정합니다. 은혜에 한두 가지 덧붙여지고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것이며, 오히려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 스스로 유대교에 있을 때 왜 교회를 핍박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소개합니다. 헛된 가르침과 어리석음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이 자신의 지혜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고 반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선지자들을 부르시듯 자신을 어머님의 태에서 택정하셨고, 은혜로 부르셨음을 강조합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고 싶어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화가 있기 때문입니다.(고전 9:16) 바울이 복음 전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만큼 자신의 사도직이 하나님의 불가항력적 은혜로 된 것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자랑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장별설교] 갈라디아서1장 다른 복음은 없다

 

[갈라디아서 서론]

 

오늘 저희는 경이로운 문서를 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갈라디아서는 신약성경에서 최초로 기록된 문서입니다. 대개 신약성경을 읽을 때 네 복음서가 있고, 그 다음 사도행전과 바울서신, 그리고 공동서신들이 있고, 마지막에 요한계시록이 나와 있습니다. 이러한 신약성경의 구조는 자연스러운 연대기적 흐름을 따른 것입니다. 3세기 중반쯤에 정경이 확정되면서 순서가 재배열되어 지금까지 이른 것입니다. 학자들은 데살로니가전후서와 갈라디아서가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일반성도들이 굳이 알아야할 내용은 아니지만, 복음서보다 20년에서 30년 가까이 빠른 시기에 기록된 문서들이기 때문에 가장 초기의 초대교회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갈라디아서와 데살로니가 전후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는 핵심적인 이신칭의 교리가 로마서와 더불이 가장 명징하게 드러난 곳이기도 합니다. 바울의 신학의 핵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신칭의는 율법에 의지했던 유대인들의 잘못된 신앙을 배격하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성경의 원리로 돌아간 것입니다. 갈라디아서는 오직 믿음으로 의에 이른다는 이신칭의의 교리가 핵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교리를 다룰 때 주의해야할 것은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는 거짓 교사들에게 반론하기 위해 행위가 거의 배제된 듯한 이신칭의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서서 살폈던 고린도 전후서의 경우는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행위를 가진 이들을 향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에서는 행위와 구원은 전혀 상관없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습니다. 편지 내용만을 본다면 충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짧은 새벽시간에 바울신학을 모두 다룰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구원과 행위는 별개의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고, 진정한 의가 말씀에 순종하는 삶과 긴밀하게 관련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전제(前提)하고 갈라디아서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갈라디아서 1장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만약에 여러분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길 한 가운에서 자동차에 치일 위기에 놓여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저기서 차가 오는데 정작 본인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다른 곳을 보고 있습니다. 소리를 지르면서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미친 듯이 달려가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을 구해야 하니까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으니까요. 갈라디아서는 바로 그런 장면을 닮아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에 의해 잘못된 교리를 받게 됨으로 예수를 믿은 믿음에서 떠나 잘못된 행위구원으로 전락하고 있는 갈라디아 성도들을 향해 바울이 달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서신보다 강열하고 흥분된 바울의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1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1-5절 인사말

2. 6-10절 다른 복음은 없다.

3. 11-24절 복음의 기원

 

세 번째 부분은 1:11에서 시작하여 2:10절까지 이어집니다. 오늘은 2.3 부분을 중심으로 다른 복음은 없다는 주제로 나누기를 원합니다.

 

2. 6-10절 다른 복음은 없다.

 

바울은 인사말이 끝나자마자 격앙된 마음으로 ‘다른 복음은 없다’고 선언합니다. 바울은 ‘다른 복음’과 8절에서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를 비교합니다. 7절에서는 다른 말로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얼마나 화가 났던지 편지를 시작하자마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향하여 ‘저주를 받을지어다’(9절)라고 선포합니다. 10절에 의하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자들이며, 바울이 전한 복음. 즉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역자의 원리를 도출할 수 있습니다. 거짓 교사들의 목적은 복음을 자신의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교묘하게 복음을 변형시켜 사람들이 자신을 우러러보게 하고, 그들에게서 이익을 취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으로 구원 얻는 믿음을 갖게 하는 것이 목적이었습니다. 다른 복음은 사람들을 기분 좋게 하여 그들의 영혼을 강탈하여 자신의 종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간의 무능을 철저히 드러내고 오직 예수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다른 복음과 그리스도의 복음의 결정적 차이입니다. 겉으로 볼 때는 거의 완벽해 보이지만 목적은 너무나 다른 복음입니다. 그래서 복음이지만, 실제로는 복된 소식이 아닌 악한 소식입니다.

 

*가만히 들어오다의 원 뜻은 '곁에서 들어오다'는 뜻이다. 아마도 그들은 정식적인 통로가 아닌 속이는 방법으로갈라디아교회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3. 11-24절 복음의 기원

 

바울은 가장 먼저 자신이 전한 복음, 즉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디서부터 기인했는지 밝힙니다. 11-12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사람의 뜻’(11절)에 따라 된 것이 아니며, ‘사람에게서 받은 것’(12절)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럼 어디서 그 복음을 받은 것일까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ἀποκάλυψις)로 말미암은 것’(12절 하)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먼저 자신이 전한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고 밝힌 다음, 자신이 어떻게 그 계시를 받게 되었는가 설명합니다. 바울은 길리기아 다소 출신의 디아스포라 유대인입니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 예루살렘에 유학하여 당대 최고 학교였던 가말리엘 랍비에게 율법을 배우게 됩니다. 철저한 바리새인이었던 바울은 유대인의 전통에 따라 율법에 열심을 냈습니다. 14절에 의하며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라고 말합니다. 그는 엄청난 열심으로 유대교를 신봉했습니다.

 

그런데 14-15절에 의하면 바울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은혜로’ 부르셨다고 말합니다. 복음 자체의 핵심이기도 하지만 갈라디아서를 읽을 때는 이 ‘은혜’라는 단어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름, 곧 소명을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16절)는 것입니다. 바울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던 사도행전 9장으로 돌아가 봅시다. 다메섹에 있던 경건한 아나니아에게 바울에 대해 하신 말씀입니다.

 

[행]9: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바울은 이것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다음 행보는 정말 놀랍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소명을 설득하기 위해 ‘혈육과 의논하지’(16절 하) 않았습니다. 또한 17절에 의하면 먼저 사도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간다는 말은 예루살렘에 있던 베드로와 같은 사도들의 승인을 받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 곧바로 아라비아로 갔고, 다시 다메섹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삼 년’(18절)이 지난 후 게바(베드로)를 만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간 십오 일을 머물렀습니다. 하지만 게바는 만나지 못하고 ‘주의 형제 야고보’만을 만났습니다. 21절에 의하면 바울이 그 후에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을 다녔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1차 전도 여행을 말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은 사람에 의해 교육을 받거나 전수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계시한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마무리

 

바울의 복음이 갖는 특징을 정리 봅시다. 먼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사람에게 전해 받은 것도, 사람의 지혜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부활의 주님께서 직접 바울을 만나 전해주신 계시(ἀποκάλυψις)입니다. 주님은 바울을 선택하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습니다. 왜 주님은 바울에게 이방인의 사도의 소명을 주셨을까요? 우리는 사도행전 1:8로 돌아가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방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고 영생을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시 유대인의 문화과 관습,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됩니다. 오직 예수 그 분 만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입니다.



[장별설교] 갈라디아서2장 바울이 사사로이 제시한 복음

 

갈라디아서 2장은 2:11에서 시작된 사도직 변증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2장을 1-10까지와 11-21절까지로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살펴보아야 합니다. 서론에서 바울은 자신이 계시에 따라 예루살렘 올라간 이야기를 합니다. 두 번째 부분에서는 복음대로 살지 않는 베드로를 바울이 책망한 이야기를 함으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정당성을 논증합니다.

 

1. 1-10절 두 그룹의 사도와 합의

2. 11-21절 베드로를 책망한 바울

 

1. 1-10절 예루살렘 방문에 복음을 제시하다.

 

바울은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간 이야기를 합니다. 이것이 왜 중요할까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전해 받은 것이 아님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어떤 시기를 기점으로 ‘십사 년 후’(1절)에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갑니다. 올라간 이유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바울을 호출했기 때문이 아니라 ‘계시를 따라’(2절) 올라갔습니다. ‘계시를 따라’ 올라갔다는 말은 주님께서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라 명령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그들에게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제시’(2절)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제시하되 ‘사사로이’ 했다고 말합니다. 즉 공적이 아니라 사적인 것으로 서로 이야기하고 나누었다는 말입니다. 약간 의아해 보이는 표현이지만,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복음을 사도들의 허락을 받거나 인준을 받은 것이 아님을 강조하려는 의도입니다. 7-8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베드로를 할례자들에게 복음 전하는 자로, 자신을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하는 자로 하나님께서 삼으셨다고 말합니다. 사도가 되는 것은 교회의 선택이나 훈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모든 직분이 하나님께 기원이 있기는 하지만 사도직은 다른 직분에 비해 좀더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소명에 의한 것임을 드러내 줍니다. 바울이 제시한 복음을 듣고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친교의 악수’를 했습니다.(9절)

 

또 하나는 3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헬라인 디도에 관한 문제입니다. 바울은 헬라인 디도를 예루살렘에 함께 올라갔음에도 그는 억지로 할례를 시키지 않았다고 밝힙니다. 왜냐하면 할례를 받지 않고도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의도였습니다. 바울이 디도에게 할례를 시키지 않는 이유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4절)이었습니다. 거짓 형제 또는 거짓 교사들의 목적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4절 하)이었습니다. 바울은 5:1에서 다시 그리스도께서 자유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말하는 자유는 율법으로 인해 오는 육신의 탐욕을 따라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성령이 부어지고, 그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3:17을 보십시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이 자유는 이전처럼 죄의 종이 아니라 아들이 갖는 자유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알기 전에는 죄의 종이었습니다. 죄가 이끄는 대로 죄를 짓고 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애굽에 있을 때 애굽이 시키는 대로 해야만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애굽에서 부르시고 아들로 삼으셨습니다. 이제는 종이나 노예가 아니라 아들입니다. 호세아 11:1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호세아 11: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이 아니라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을 받을 수 있고, 당당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직접 은혜의 보좌에 나아가 간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아들이 누리는 자유입니다.

 

그런데 거짓 형제들은 그렇지 않다고 말합니다. 예수를 믿었지만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예수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가만히 들어와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자유를 빼앗아 내 던졌습니다. 그것을 교묘히 이용하여 자신들의 종으로 삼으려 했던 것입니다. 5:10에서는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2. 11-21절 베드로를 책망한 바울

 

바울은 이제 중요한 한 가지 사건을 언급합니다. 사건은 이렇습니다. 게바(베드로)가 안디옥에 이르렀을때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는 일이 일어납니다. 12절 말씀에 의하면 야고보에게서 온 사람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는 이방인들과함께 식사를 했습니다. 그러다 야고보에서 온 사람들을 발견하고 이방인들과의 식탁을 급하게 벗어나 도망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것이 왜 문제일일까요? 먼저 야고보라는 인물을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유대적 전통이라고 생각하고 접근해 봅시다.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유대 전통을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닙니다. 여전들이 그들은 이방인들과 식탁교제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식탁교제를 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신분과 혈통이 무너지고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하나의 민족이 탄생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갈라디아서 다음 성경인 에베소서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2:11-18] 11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12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13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15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16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17 또 오셔서 먼 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시고 가까운 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 18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처럼 복음은 혈통과 민족, 신분과 성별을 너머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는 능력입니다. 베드로는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방인들과 함께 거리낌 없이 식탁교제를 나주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야고보에서 사람들이 왔다는 이야기를 듣는 순간 베드로는 자신도 모르게 율법을 따라 행하던 본성에 의해 이방인들과의 식탁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던 것입니다. 이 모습을 바라본 바울은 베드로를 향해 공개적으로 비판했습니다. 비판의 핵심은 이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먼저는 베드로는 유대인답게 살지 않았습니다. 이 말은 유대인의 전통과 관습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이 행동은 이방인들로 하여금 유대인이 되어야 한다는 보이지 않는 강압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래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고 따집니다. 그리고 나서 16절에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입니다.

 

[장별설교] 갈라디아서 5장 예수로 충분하다!

갈라디아서 5장은 선언과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선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다’는 것이고, 명령은 ‘그러므로 굳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는 것입니다. 5:1은 갈라디아서의 전체 요약인 동시에 권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장은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1. 1-12절 거짓 교사들을 배척하라

2. 13-26절 성령을 따라 행하라.

 

1. 1-12절 거짓 교사들을 배척하라

5:2에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바로 할례입니다. 실제로 유대인들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의 저주에서 벗어나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을 확신했던 근거는 바로 할례였습니다. 할례를 하나님께서 자녀를 약속하신 후에 언약의 표로서 할례를 받도록 했습니다. 창세기 17장으로 가보겠습니다. 이곳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나이 구십 구세에 나타나 언약을 재확신시켜 줍니다.

[창세기 17:9-14] 9 하나님이 또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11 너희는 포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12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 13 너희 집에서 난 자든지 너희 돈으로 산 자든지 할례를 받아야 하리니 이에 내 언약이 너희 살에 있어 영원한 언약이 되려니와 14 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포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바로 이것입니다. 할례는 하나님과 아브라함과의 언약이며, 동시에 할례를 받게 된다면 그 언약이 유효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왔던 거짓 교사들은 바로 이 부분을 집요하게 파고들었고, 이것으로 갈라디아인들을 유혹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을 성도가 몇이나 있을까요? 그런데 바울은 이들의 거짓에 대해 명백하게 선언합니다. 2절 후반부를 보십시오.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즉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가 할례 받은 갈라디아인들에게 아무런 효능도 가져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할례를 한 가지를 행하게 되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모든 율법을 다 행해야 합니다.(3절) 결국 율법으로 의롭다함을 받으려 하는 자들은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4절)지게 됩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할례는 예수님을 믿고 추가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할례를 받게 되면 그리스도의 공로가 무가치하게 되어 결국 모든 구원이 취소되고 헛것으로 되돌아게 됩니다. 우리는 율법을 행하든지, 그리스도를 믿든지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율법도 행하고 예수도 함께 믿을 수 없습니다.

 

2. 13-26절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바울은 사랑하라고 말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었으니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사랑 안에 모든 율법이 들어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이야 말로 율법의 핵심이고, 원리입니다.

그럼 우리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을까요? 노력한다고 될까요?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16절에서 조언합니다. 성령과 육체의 소욕은 서로 대결하며 경쟁합니다. 우리 안에는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성령이 함께 합니다. 그러나 육신을 벗지 못했기 때문에 악의 소욕이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성도는 육체의 욕망과 성령의 인도하심 사이에서 긴장된 삶을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육체의 일을 보십시오.(19-21) 모두 나열하기도 힘듭니다. 음행, 더러운 것, 호색(好色), 시기, 분냄, 당 짓는 것, 분열함, 이단, 투기, 술 취함, 방탕함,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말합니다. 육체의 일은 특징은 24절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탐심입니다. 모세는 출애굽기 20장에서 십계명의 마지막 열 번째 계명을 ‘탐식’으로 규정했습니다. 아마도 바울은 골로새서 3:5에서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라고 선언했습니다.

 

육체를 따르는 것은 오직 자신의 쾌락만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수단으로 사용하고 이용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타락의 본질 속에는 모든 피조물이 자신만을 경배하도록 하려는 신적 속성이 왜곡된 모습으로 숨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게 경배를 받으시지만 피조물을 사랑하시고 돌보십니다. 하지만 악은 오직 경배만을 받으려고 돌보지도 사랑하지도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타락의 본질입니다.

 

이제 성령의 열매를 보십시오. 22-23절에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언급합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얻어지는 것들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필요한 덕목들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성령의 열매가 충만히 맺힐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마땅합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에 대해]

 

사랑(ἀγάπη)

갈라디아교회가 고린도교회처럼 현저하게 드러난 분당과 다툼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거짓 교사들로 인해 적지 않은 다툼이 일어났고, 교회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율법의 목적이자 전제, 핵심은 바로 사랑입니다. 신약의 저자들은 아가페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사랑하시는 사랑에 종종 빗대어 사용하며, 성도들의 삶이 그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더글라스 무는 “동일 어근을 가진 동사와 함께 이 명사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가지신 사랑과 서로를 향한 우리의 사랑을 나타낸다”라고 말합니다.

 

희락(χαρά)

카라는 선이 나열된 목록 중에서 이곳에서만 사용된 단어입니다. 희락 즉 기쁨은 육신의 쾌락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오는 기쁨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감정으로부터 나오는 평안한 마음의 상태이며 어려움과 시련 가운데서도 여전히 존재하는 감정’입니다.

 

화평(εἰρήνη)

화평은 히브리어 ‘샬롬’을 번역한 것입니다. 외적인 평화를 표현하지만 신약의 저자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오는 화평을 더 주요하게 다룹니다.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과의 화평이야 말로 진정한 화평입니다.

오래 참음(μακροθυμία)

자비(χρηστότης)

양선(ἀγαθωσύνη)

충성(πίστις)

온유(πραΰτης)

절제(ἐγκράτεια)

 

[장별설교] 갈라디아서 6장 성령을 따라 사는 삶

6장은 5:16부터 시작된 ‘성령을 따라 사는 삶’에 대한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5:16에서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라고 권면했고, 5:25에서 다시 ‘성령으로 행하라’라고 권면합니다.

Ⅰ. 성령을 따르는 삶

1. 5:25-6:5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

2. 6:6-10 나누는 삶

Ⅱ. 율법과 십자가

3. 11-16 할례와 십자가

4. 17-18 마지막 인사

 

1. 성령을 따르는 삶

5:25에서 바울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하라’라고 말합니다. 난해해 보이는 이 구절의 뜻은 “‘너희들이 성령을 따라 살고 있어’라고 말한다면 성령으로 사는 삶의 열매를 드러내라”는 말입니다. 즉 마음이나 생각이 아닌 삶으로 살아 내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이 말하고 싶은 궁극적인 의미는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산다는 증거는 바로 말씀에 합당한 삶입니다. “성령의 너희를 지배하고 있다면 그 증거를 대라”를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만약 성령이 우리를 인도한다면 성령이 그에 합당한 열매가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5절 후반부의 ‘행한다’는 헬라어 ‘스토이케오(στοιχέω’는 ‘열지어 세워지다’이며, 군사들이 정렬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성령과 삶이 일치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성령을 따른다 하면서도 성령이 원하지도 않고, 성령과 일치하지 않는 삶은 사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NIV 성경은 ‘성령과 함께 걷다(in step with the Spirit)’로 번역했습니다. 이것은 마치 구약의 에녹이나 아브라함의 하나님의 동행한 삶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5:26-6:10에서는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열거합니다.

 

ㄱ. 헛된 영광을 구하지 말라(26절)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의 전제는 ‘헛된 영광’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서 ‘헛된 영관’이란 헬라어 단어는 ‘케노독사스(κενόδοξας)’입니다. 이 단어는 ‘비어있다’는 뜻의 ‘케노스(κενός)’와 영광이란 ‘독사(δόξα)’가 결합된 합성단어입니다. 이 단어의 뜻은 ‘실상은 전혀 그런 권리를 갖고 있지 않음에도 자신이 칭찬과 명성을 얻을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말합니다. 바울은 헛된 영광을 구함으로 말미암아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게 됩니다. 상대방을 배려하지 않고 도전하고, 타인이 마땅히 가져야할 것을 갖고 싶어 하게 됩니다. 우리는 이것을 ‘시기’ 또는 ‘투기’라고 말합니다. 도전과 투기를 하게 된 이유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보다 우월한 존재로 간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경쟁이 아니라 섬김에 의해 지배’되어야 합니다.

 

ㄴ.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 잡으라

 

6:1에서 바울은 범죄한 사람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를 제시합니다. ‘신령한’는 영적인 것, 즉 ‘성령의 인도함을 받는다면’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6:1은 바로 앞 절인 5:26을 설명하고 있는 듯합니다. 슈라이더라는 학자는 이렇게 해석합니다.

“신자들은 죄 가운데 넘어진 신자를 친절하게 회복시켜야 한다. 신자들은 서로 오만한 태도를 취하고, 노하게 하며, 질투하지 말고, 다른 이들에게 관심과 사랑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의 목표가 서로를 세워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가끔 죄를 지은 사람을 무자비하게 다룰 때가 있습니다. 엄하게 야단을 치거나 비인격적으로 대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자세를 전혀 옹호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잘못을 할 때라도 그가 하나님의 백성인 것과 하나님의 형상을 지음 받은 존재인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5:23을 보시면 온유도 성령의 열매인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뿐 아니라 우리 자신도 넘어질까 두려워해야 합니다.

 

ㄷ. 서로의 짐을 지라.(2, 5절)

 

6:2에서 바울은 ‘짐을 서로 지라’고 권면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짐(βάρη)’은 1절에서 언급된 다른 성도들의 죄와 관련이 있으며, 성도의 슬픔과 아픔을 포괄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타인의 죄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많은 고통이 따릅니다. 타인의 고통을 나눌 때 역시 희생이 따릅니다. 이렇게 하는 목적은 오직 성도를 바르게 세우기 위함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문자적으로 ‘그리스도의 율법(τὸν νόμον τοῦΧριστοῦ)’을 뜻하지만,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바른 삶을 의미합니다. 더글라스 무가 언급한 것처럼 서로의 짐을 지는 것은 사랑의 형태이며, 그로 인해 율법을 성취하게 됩니다. 바울은 타인의 짐을 자기 전에 또 하나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고 조언합니다. 자신을 먼저 ‘설펴보고(1절)’ 타인의 짐을 질 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것입니다.

 

ㄹ.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나누라(6절)

 

설교자의 입장에서 말하기 참으로 곤란한 말씀입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왔으니 언급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구절은 영적은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가르치는 자들을 마땅히 대우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로마서 15장으로 가면 바울이 로마교회를 향해 연보를 언급하면서 마케도냐 교회와 아가야 성도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영적인 것을 받고 육적으로 갚았다고 말하면서 구제에 대한 이야기를 꺼냅니다.

 

[롬]15: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고린도전서 9장으로 돌아가 보면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면서 영적인 것을 뿌렸으니 육적인 것을 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오해가 일어나지 않도록 그 권한을 사용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말합니다. 약간 길지만 고전 9:7-12까지 읽어 드리겠습니다.

 

[고전]9:7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하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열매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고전]9:8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고전]9:9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고전]9:10 오로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 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고전]9: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의 육적인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고전]9:12 다른 이들도 너희에게 이런 권리를 가졌거든 하물며 우리일까보냐 그러나 우리가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 범사에 참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 장애가 없게 하려 함이로다

 

어떤 극단적인 주장을 하는 이들은 복음은 공짜기 때문에 돈을 받고 설교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가만히 들으면 상당히 매력적이고 성경적인 주장인듯 하지만 실은 성경에 대해 무지하고 어리석은 인간입니다. 24시간 교회를 위해 섬기는 사역자들에게 돈을 한 푼도 주지 않고 해보라고 하십시오. 상식적으로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그럼 다른 무엇을 먹고 일하며, 자녀들은 어떻게 양육하겠습니까? 말도 안 되는 주장입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많은 사람들의 도움의 손길을 받았습니다. 누가복음 8:1-3을 보십시오.

 

[누가복음 8:1-3] 1 그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마을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2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3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그들을 섬기더라

복음은 공짜지만, 복음을 전하는 자들은 절대 무책임하게 내버려 둬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마땅히 책임을 지고 공경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말씀 전하는 자들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종종 목사가 무한히 희생해야 되는 존재로 보거나, 교회를 서비스 센터로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것은 상당히 무례하고 비성경적인 생각입니다. 목회자를 섬기고 성도를 돌보는 일은 성령을 위하여 심는 것입니다.(8절)

 

 

2. 율법과 십자가

 

이제 바울은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율법과 십자가의 문제를 한 번 더 언급합니다. 12절을 보면, 할례를 받는 이유를 박해를 면하게 하려는 것 뿐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이 말이 사실이라면 할례는 단순히 율법을 지키는 것보다는 유대인처럼 만들어 불필요한 잡음을 없애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시도가 반기독교적이며, 반복음적이라는 것입니다. 13절 후반분에서 바울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고 선언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아마도 갈라디아인들에게 율법을 행하게 하여 자신들의 파를 만들고, 유대인들과 친목을 도모하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가식적인 교사들이었고, 갈라디아교회 서도들을 바울과 이간질 시켜 자신들에게 충성하도록 만들려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14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선언합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핵심은 죽음입니다. 십자가에 달림으로 세상에 대해 죽는 것입니다. 세상 또한 십자가와 달린 사람과 완전한 결별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안에서 그 어떤 것도 중요하지 않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의만이 믿는 성도들에게 전가됩니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자신에게 ‘예수의 흔적(τὰ στίγματα τοῦ Ἰησοῦ)’이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의 흔적이 나타나는 의미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먼저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생긴 몸의 상처들입니다. 고린도후서 4:10-11로 가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후 4:10-11]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두 번째는 고대 세계에서 노예들이 했던 바로 그 흔적입니다. 노예의 몸에 주인의 고유한 흔적을 남기는 것이죠. 바울은 이 흔적을 염두에 두고 ‘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노예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할례는 몸에 흔적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흔적은 옛 언약으로 돌아가려는 영적 퇴보이자 사단의 계략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할 진정한 흔적은 복음을 위해 헌신하고 수고한 ‘사랑의 흔적’입니다.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그리스도의 흔적, 스티그마입니다. [Pensées]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의 율법관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율법(νόμος)’의 용례

 

‘율법(νόμος)’이란 단어는 25개의 절에서 32회 사용된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의미로서 사용된 경우는 2:16에서 2회 사용되는 것을 비롯해 모두 6회 사용된다.

- 2:16, 2:21, 5:4, 3:11;21

 

(1) 율법과 의

 

2: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ἐξ ἔργων νόμου)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διὰ πίστεως Χριστοῦ Ἰησοῦ)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2: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3: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2) 율법과 믿음

 

3: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율법과 아브라함 언약(약속)

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3: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3: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3) 율법과 행위

 

한 가지의 율법을 행하는 자는 모든 율법을 행해야할 의무를 지니게 된다.

5: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율법을 지키고자 한다면 율법 가운데 살아야 한다.

3: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3:11에서 믿음으로 살리라(ζήσεται)라고 말하고

3:12에서 율법으로 살리라(ζήσεται)라고 말함으로 믿음과 율법을 대등구조로 보고 있다.

[3:11 ὅτι δὲ ἐν νόμῳ οὐδεὶς δικαιοῦται παρὰ τῷ Θεῷ δῆλον, ὅτι Ὁ δίκαιος ἐκ πίστεως ζήσεται· 3:12 ὁ δὲ νόμος οὐκ ἔστιν ἐκ πίστεως, ἀλλ’ Ὁ ποιήσας αὐτὰ ζήσεται ἐν αὐτοῖς.

 

레위기 18:5에 의하면 율법을 지키는 자들은 생명을 얻는다. 바울은 구약에 근거하여 본 절을 설명하고 있을 것이다. 율법은 자체적으로 생명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문제는 사람들은 그것을 지킬 능력이 없다고 본다.(전통적인 율법이해)

 

(4) 율법의 제한적 기능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은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3:19절에서 율법이 온 이유를 ‘범범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고 하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라는 임시적 방편으로서 역할을 할 뿐이다. 3:21-23에서는 하나님의 약속들과 율법이 절대 반대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의’는 율법을 이루어지지 않는다. 또한 율법은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만 필요한 것이다.

 

3: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3: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3: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3: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5) 율법의 완성

 

이 부분은 아직 더 많은 연구와 논의가 필요하다. 율법의 완성이란 개념이 가능한지 아직까지 불투명하다. 바울은 5:14에서 온 율법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다라고 말한다. ‘이루어졌다(πεπλήρωται)’는 ‘성취’한다는 말이다. 이 구절은 상당히 논란이 많은 구절이다. 레이제넨의 경우는 바울이 율법에 대해 모순적이라고 말한다. 웨스터호움는 바울이 율법의 ‘행함’과 ‘이룸’을 구분하며 말하며, ‘행함’이 유대인들에게 적용된다면, ‘이룸’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통한 결과라고 말한다. 슈라이더 역시 웨스터호움의 견해에 동조하며, 율법의 행함(ποιῆσαι)가 성취(πεπλήρωται)를 구분한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6:2절에서 그리스도의 (율)법(τὸν νόμον τοῦ Χριστοῦ)을 언급함으로 구약의 율법과 대조하고 있다.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τὸν νόμον τοῦ Χριστοῦ)을 성취하라

 

결론

 

이상으로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의 율법관을 살펴 보았다. 바울은 율법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다. 간략하게 정리하면, 율법은 결코 의롭게 할 수 없다. 또한 율법과 믿음은 별개의 것이며, 믿음에서 나온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죄를 범함으로 율법을 주셨지만 임시적이다. 아브라함의 언약에 비해 시기적으로도 늦기 때문에 결코 율법을 아브라함의 언약(약속)과 비교할 수 없다. 율법을 지키면 생명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율법으로 ‘살 수’는 있지만, ‘성취’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내용을 통해 우리는 바울이 율법을 구원에 ‘들어가기’ 위한 행위의 개념으로 보고 있지 않다. 오히려 율법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지만, ‘성취’하지 못한 열등한 것으로 치부한다. 성취는 오직 사랑, 즉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일어나는 삶의 결과로서 가능하다. 바울은 의도적으로 율법과 ‘그리스도의 (율)법(τὸν νόμον)’을 대칭적으로 보여줌으로 그리스도의 법이 율법이 이루지 못한 성취를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출처: 392766.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