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 사람에게 주는 교훈(딛2:1-10)
디도서가 다루려는 세 번째 문제를 이곳에서 다루고 있다. 제일장에서 바울은 디도에게 교회 행정상의 문제를 지시하였고 교회에 결핍된 사항들을 질서있게 처리하도록 지시하였다. 이제 그는 디도에게 다시 권면하고 있다.
Ⅰ. 일반적인 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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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의 맡은 바 직분을 성실히 수행하라. 디도가 다른 사람을 설교할 수 있는 직분으로 세웠다. 하더라도 이로써 설교할 의무를 벗어난 것은 아니며 목회자들과 장로들만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성도를 개개인이 자기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도록 가르쳐야 한다. 여기 "오직"이란 부사를 쓴 것은 허탄한 이야기와 공허하고 유익이 없는 이야기를 하는 거짓 교사들을 상기시키려 함이다. "오히려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며, 깨끗하고 올바르며 영생에 이르게 하는 말씀에 합당한 것을 가르치라." 다음 사실들을 고찰해 보라.
1. 복음의 참된 교훈은 형식으로나 실제로나 바른 교훈이다. 그 교훈 자체가 선하고 거룩하며 믿는 자들 또한 선하고 거룩하게 이끌어 준다. 바른 교훈은 그것을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섬기는데 합당하게 해 주고 힘을 불어 넣어 준다.
2. 목회자들은 그러한 진리만을 가르치도록 주의하여야 할 것이다. 일반인들도 신도들도 "언행에 있어서 더러운 말을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도록 선한 말을 하며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쳐야 한다"고 할진대 하물며 목회자는 더욱 더 그러한 것을 실천하도록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바울은 디도에게 일반적으로 권면하였다.
Ⅱ. 특별한 권면.
몇몇 부류의 사람들에게 이러한 바를 교훈을 적응하여 권면하였다(2-10절). 목회자들은 일반적인 교훈으로 머물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자기의 처한 위치와 나이와 생활 정도에 따라, 개별적인 교훈을 하여야 한다. 그들은 가르침에 있어서 실제적일 뿐 아니라 개별적이어야 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그를 공동의 책임을 가르치며 또한 각자의 책임도 일러 주어야 한다. 이것이 뛰어난 기독교의 지도 방법이다. 본문에 노인과 젊은 남자와 여자, 설교자 자신과 하인들 각자에게 교훈이 주어지고 있다.
1. 노인에 대하여
나타나 있는 노인들을 어떤 주석자는 교회의 직분을 맡은 장로와 집사로 해석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노인은 단순히 나이를 많이 먹은 사람들에게 적용시키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나이 먹은 제자들은 스스로 모든 일을 기독교 교훈에 합당하도록 처리해야 할 것이다. "늙은 남자는 절제하며" 노년기가 되면 느낄 수 있는 육체적인 노쇄를 핑계로 무질서 무절제한 행동을 합리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그들은 만사에 건강이나 의복 등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젊은이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 "경건하며"(2절). 경솔함은 모든 사람들에게 어색한 짓이며 특히 나이든 사람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한 것이다. 나이먹은 사람들은 안정되고 흔들림이 없어야 하며 습관, 말, 행동에 있어 위엄 있어야 할 것이다. 웃음 품위 없이 입거나 행동이 경솔하고 허망한 것은 그 나이 값조차 못하는 것이다. "근신하며"(2절), 온전하고 사려 깊으며, 자신의 열정과 욕망을 잘 다스림으로 이것에 휩쓸려 악한 일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믿음에 온전케 되며" 성실하고 확고하여, 복음의 진리에 흔들림이 없이 의지하며, 신기한 것을 좋아하거나 그릇된 사상
이나 당파로 끌려가지 않으시고,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나 전통, 랍비들의 망령에 취하지 않는 자들이어야 한다. 나이든 사람은 은혜와 선함이 넘쳐야 하며, 겉사람은 부패하나 속사람은 나날이 새로워져야 한다. 또한 사랑 또는 자비에 있어서 온전케 되어야 한다고 하였다. 사랑에는 반드시 믿음의 역사가 결합되어야 한다. 또한 믿음은 사랑으로 즉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나타나야만 하는 것이다. 자신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위해 인간을 사랑하여야 한다. 인간 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빛 안에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인간으로서 인간을 사랑하고 이 땅에서 뛰어난 사람들로서 성도들을 사랑하는데엔 특별한 기쁨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항상 사랑하여야 한다. 풍요한 때와 마찬가지로 어려운 때에도 사랑해야 한다.
이와 같이 사랑 또는 자비를 올바로 베풀어야 한다. "인내함" 나이든 사람일수록 성미가 까다롭고 초조하며 걱정에 사로잡히기 쉽다. 그러므로 나이든 사람은 이러한 불안정과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 믿음, 사랑과 인내는 기독교의 주요 세 가지 은사이며, 이러한 것에 온전히 거함이 복음의 완전한 뜻이다. 인내에는 "오래 참는 인내와 기다리는 인내"가 있다. 그 두 가지를 모두 구해야 한다. "불행을 끝까지 견디고" 느긋하게 "행복을 기다려" 우리가 그 행복을 얻고 행복이 우리를 맞기까지, "믿음과 인내를 통하여 약속을 상속받는 자들의"후예로서 살아야 한다. 이것이 나이든 사람에 대한 권면이다.
2. 늙은 여자에게
이들도 또한 훈계 받고 경고 받아야 한다. 어떤 주석자는 여기에서 기록된 늙은 여자를 대부분 가난한 사람을 돌보며 병자를 간호하는데 종사하고 있는 여자 집사들로 보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선 신앙 고백을 한 모든 나이든 여자들을 말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여자들은 "행실이 거룩하며" 남자나 여자나 자기의 직분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자기들의 신앙 고백에 합당한 행동을 해야 한다. 앞서 언급했던 늙은 남자들이 지켜야 할 덕목들(절제, 경건, 근신,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함)은 남자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남자도 여자도 늙은 남자 뿐아니라 늙은 여자도 지켜야 할 것들이다. 여인들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말씀으로부터 자기의 의무를 듣고 배워야 할 것이다. 구원의 길은 한쪽 성(性) 혹은 한쪽 무리들만 위하여 하나만 있고 또 다른 사람들에겐 다른 길이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남자와 여자나 늙은이나 젊은이나 꼭 같은 것을 배우고 훈련하여야만 한다. 덕성이나 의무는 누구에게나 같은 것이다.
늙은 여자도(늙은 남자와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그들이 고백하거나 고백하고자 하는 바대로 거룩한 인격자로서 품위에 맞는 행동을 취해야 한다. 의복이나 몸짓, 용모나 어투, 그들의 모든 처신에 있어 경건한 예절이나 위엄을 잃지 말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은 내적인 훈련과 성스러운 습관에 의한 것으로 밖으로 나타나는 행위는 언제나 이것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특별히 용모와 언행에 대하여 일일이 성서는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일반적인 규칙은 있어 누구든 그것에 맞도록 행동을 해야 함을 명심하자. "네가 무엇이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모든 일을 행하라"(고전 10:31). 그리고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빌 4:8).
그러므로 이제 거룩함에 온전한가 못한가에 따라 나타나는 행동의 법칙과 정도가 결정될 것이다. 결점을 찾아내거나 비방하는 사람이 되지 말며 이웃의 크고 작은 잘못을 중상하거나 험담하지 말라. 남의 말하기 좋아할 뿐만 아니라 남의 욕을 하고 친한 친구를 이간시키는 일을 하지 말라. 비방하는 자는 "혀를 뽑아서 지옥에 던져야 할"자들이다. 이런 일을 하는 자는 대단히 충성스럽게 아주 직접적으로 사탄의 일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자에겐 악마란 이름을 붙여야 한다. 이것은 서로 함께 이룰 사랑과 정의와 평등의 중대한 의무를 배반하는 죄이다. 그것은 때로 적의 증오와 미움, 혹은 질투 같은 악한 원인에서 생겨나는 것으로 그 결과 뿐아니라 뿌리까지도 뽑아버려야 한다.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이 말은 술에 탐닉하여 술의 권세와 지배 아래 술의 종이 되지 말라는 뜻을 암시한다. 이것은 어느 누구에게든지 꼴사납고 보기 흉한 짓이지만 특히 이와 같은 나이의 여자에겐 더욱 그러할 것이다.
그런데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시대와 사회에서는 이런 일이 너무나 보편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얼마나 몸과 마음의 순수성을 파괴하고 무너뜨리는 분수없고 부끄러운 것인가? 나이든 여인으로서 가질 중요한 의무, 즉 선한 것을 가르쳐야 할 자들로서 부탁 받은 입장에 비할 때 이 얼마나 못된 본보기가 되고 있는가? 공적인 설교자로서는 못하더라도(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 고전 14:34) 선한 생활과 좋은 본을 보임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선을 가르치는 선생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행동과 행위가 거룩함에 합당한 자들은 선한 일의 교사가 될 수 있음을 유의하자. 그들은 개인적으로 집안에서 자녀들에게 교리를 훈육함으로써 가르치는 일을 할 수 있으며 또한 해야만 한다. "르으엘왕의 말씀한 바 그 어머니가 그를 훈계함 잠언이라 입열어 지혜를 베풀며 그혀로 인애의 법을 말하며"(잠 31:26), 선을 한 것을 가르치는 자는 혼란을 가르치며 경박하고 헛된 것과 아무 유익이 없는 것, 늙은 여자들의 어리석은 입담과 미신에게 사로 잡힌 이야기를 가르치는 자와 다르다. 이와 반대로 선한 것을 가르치는 것이 그들의 직무이며 그것을 위해 부르심을 입고 있는 것이다.
3. 젊은 여자들에게
늙은 여자들은 그들의 나의 따라서 신앙 생활의 의무에 대하여 충고하고 훈계함으로 가르쳐야 한다. 왜냐하면 나이든 여인이 이런 것을 가르치는 것을 때로 남자, 경우에 따라선 목회자가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며 따라서 나이든 여인은 젊은 여인 특히 젊은 부인들을 가르치는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한다. 바울도 젊은 부인에게 남편과 아이들에 대한 의무를 잘 가르쳐 줄 것을 부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젊은 여자들에게 늙은 여자들이 가르쳐야 할 것은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선한 인품을 갖출 것.
"근신하며 순전하며" 이 말은 젊은 여인들이 대부분 빠지기가 쉬운 경솔함과 허영에 반대되는 말이다. 판단함에 있어 신중하고 자기의 감정과 행동에 있어서 근신하여야 한다. "순전과 정숙"은 서로 통하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은 처음에 경솔함으로 치명적인 유혹에 넘어가고 만다. "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하며"(잠 2:11). 정숙은 또한 집안 일을 하면서 통하는 말이다. 디나는 땅에 있는 자기의 딸들을 만나려 갔을 때 자기의 정절을 잃었다. 자기 집이 감옥으로 느껴지는 여인들에겐 가정이 두렵게 느껴지고 정절은 속박으로 느끼게 된다. 그런 자들에겐 뛰쳐나갈 기회가 오면 뛰쳐나갈 뿐아니라, 가정 일을 잊어버리기 위해 혹은 자기의 처지를 불행한 것으로 여겨 환락과 동무들을 찾아 헤매게 되는데 이것이야말로 사탄이 바라는 바대로 할 뿐아니라 게다가 다른 잘못까지도 야기시키는 못된 행실인 것이다.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만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고 마땅히 아니한 말을 하나니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딤전 5:13, 14). 그들의 임무는 "집안을 이끄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적들에게 비난받을 꼬투리를 잡히지 말아야 한다. 선하며, 일반적인 의미로는 모든 악덕에 반대되는 것이다. 특별한 의미로는 젊은 여인이 자기의 처지에서 친절하고, 자비로우며 남을 도웁기를 좋아하며 자비심이 많은 것을 뜻한다. 도르가와 같이 선행과 자선에 충만한 것을 말한다. 어떤 주석자는 이 구절이 좀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온유하고 쾌활한 마음과 성격을 지니며 혹독하거나 뚱하지 않은 여자. 남을 욕하지 않고 분내지 않고 초조해하지 않는 여자. 자기 자신이나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는 골치 아프고 수다스런 성품이 아닌 선한 성품과 즐거운 대화로 조언을 하며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여자. 그리하여 그녀의 집안을 세우고 남편에게 선한 일을 하여 사는 날까지 악을 행치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젊은 여인들이 갖추어야 할 성품은 "신, 순전, 집안 일을 함, 선함" 등이다.
2) 관계 속에서의 능력에 대하여
첫째, "자기의 남편을 사랑하고 그에게 복종하도록"
진실한 사랑이 있는 곳에는 곤란한 요구란 없다. 하나님께서는 본래부터 당신의 뜻에 따라 여자로 하여금 아래 처하게 만드셨다.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딤전 2:12), 그 이유인즉,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후며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라"(2:13, 14). 여자가 먼저 유혹에 빠졌다. 그리고 남편을 유혹하는 자가 되었다. 여자는 반려자로 지어졌으나 가장 심한 방해자가 되어 버렸다. 심지어 남편의 몰락과 파멸의 도구가 되었으므로 이 때문에 복종의 관계가 더욱 굳어지게 되었고 이로 그녀를 굳게 잡아 매게 되었다.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을 다스릴 것이니라"(창 3:16). 전보다는 약간이마나 불편해지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엔 두 가지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첫째, "아무 죄도 없이" 아담이 먼저 지움을 받고 이브가 나중 지움을 받았으며 여자가 남자의 갈비뼈에서 나왔다는 데서부터 자연적인 복종이 요구 되었다.
둘째, "타락함으로"
여자가 먼저 죄를 짓고 남자를 유혹하였기 때문이다. 여인이 순종하는 것이 그렇게 쉽거나 편한 일이 아닌 것은 여인이 자기의 죄에 대한 벌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것은 성화(聖化)된 상태로 변하게 되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엡 5:22, 23). 이는 남편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권위에 인함이니 남편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은 자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권위가 교회를 다스린 것과 같이 남편이 아내를 다스리도록 하셨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가 되셔서 교회를 보호하시고 구하시며 선한 것으로 먹이시며, 악으로부터 보호하시고 건져 주신다. 이와 마찬가지를 남편도 아내를 돌봐야 한다. 모든 해으로부터 아내를 보호하고, 자기 능력에 따라서 아내를 편안하게 해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해야 하는 것처럼 "아내들은 남편에게 순종하여야 주께 합당한 것이다"(골 3:18). 이것이 그리스도의 법대로 행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절대적이며 무조건이고 노예적인 복종이 아니다. 다만 무질서나 혼란을 막기 위한 더 나아가서는 모든 식구 가운데 선을 이루기 위한 사랑의 복종이 필요하다. 이와 같이 남편에 대하여는 아내들은 사랑의 의무와 그에게 순종함으로 교훈을 받아야만 한다. "자녀를 사랑하며" 어머니로서 자녀에게 향하는 본능적인 애정뿐만 아니라 거룩하게 성화(聖化)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 말씀에 의하여 이루진 영적인 사랑으로 사랑해야 할 것이다. 필요할 때마다 책망과 교정하기를 게을리하여 자녀들로 악에 빠지게 만드는 우매한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건함으로 교육시키고 그들의 삶과 태도를 올바로 세우며 자신들의 몸뿐 아니라, 영혼도 세상적인 축복뿐 아니라 영적인 축복도 몸이나 세상보다는 영혼과 영적인 것을 더 소중히 알도록 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키워야 한다.
또 이유가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비난받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이와 같은 가족의 의무에 충실하지 못함으로 기독교에 비난이 퍼부어진다. "저 사람들이 새 신앙을 가졌다 하는데 뭐가 나은 점이 있는가?"하고 불신앙인들이 기회만 있으면 야유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복음, 그 자체는 순수하고, 우월하며 영광된 것이다. 그리고 이 우월성은 이런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의 생활 속에서 특히 가족관계 속의 의무를 충실히 행함으로 나타내져야 한다. 이런 것을 잘해 내지 못하면 대단한 불명예가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롬 2:24). 그들은 기회만 있으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려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종들을 보면 된다. 그의 말씀, 교훈, 그리고 신앙 생활을 알려면 그의 추종자들을 보면 알 수 있다"라고 떠들어 될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는 "그의 친구들의 집안에서 해함을 입게 된다." 이상이 젊은 여자들의 의무이다.
4. 젊은 남자들의 의무.
그들은 생각없이 경솔하게 열을 내거나 흥분하기 쉽다. 그러므로 결코 서두르지 말고 좀더 사려 깊게 행동하도록 권고해야 할 것이다. 경솔하지 말고 괴팍스럽거나 고집부리지 말고 남의 말을 경청하고 순종하여야 한다. 교만하고 거친 태도를 가지지 말고 겸손하고 온유하여야 한다. 많은 젊은이들이 다른 어떤 죄보다도 교만 때문에 파멸당하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은 처신과 행동에 있어서 신중하고 흔들림이 없어야 하며 젊음의 생기와 활력에 나이들므로 얻는 사려깊음을 더해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젊은 날에도 선한 목적을 이룰 수 있게 될 뿐 아니라. 노년의 날이 오더라도 평안한 위로를 얻을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게 될 것이다. 죄와 슬픔을 막아 주며 보다 큰 행복을 이루고 즐기는 기초가 될 것이다. 그러한 사랑은 "끝 날에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죽음 안에서도 평안과 위로를 얻을 것이며 죽음 후엔 영광스런 영생의 면류관을 얻게 될 것이다.
5. 디도 자신에게
지금까지 사도는 디도에게 다른 사람들, 늙은 남자와 여자, 젊은 남자와(디도 자신도 이 무렵엔 젊은 시절이었을 것이다) 여자 등에 대하여 가르칠 내용을 쓰고 나서 디도 자신에 대한 교훈을 삽입하였다. 디도 자신도 대화와 설교에 있어서 자신을 성숙시키지 못한다면 다른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가르칠 수 있다는 예상은 어려울 것이다.
1) 언행에 대한 지시: "범사에 선한 일의 본을 보여"(7절),
이런 본보기가 되지 못한다면, 한 손으로 세운 것을 한 손으로 허물어뜨리는 격이 되고 만다. 선행을 하는 목회자는 그 선행의 본이 되어야 함을 명심하라. 또한 선한 교훈과 선한 생활은 반드시 일치해야 한다. "네가 다른 사람은 가르치면서 자신은 가르치지 못하느냐?" 이런 결점은 복음에 대한 커다란 훼방이며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범사에"를 어떤 주석자를 "무엇보다" 혹은 "누구보다"라고 새기기도 한다. 예를 들면 성도들이 지켜야 할 의무에 대하여 개별적으로 가르치는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교사 자신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 이와 같이 불과 그 빛은 보다 일치하게 되는 것이다. "그들에게 너희 생활 가운데서 그들에게도 있는 덕과 은혜의 살아 있는 모습을 보여 주어라. 살아 있는 본이 됨으로 가르친 바를 더욱 깊이 새겨 줄 수 있다. 그들이 너의 안에 있는 순결, 위엄, 근신, 모든 선행을 보게 된다면 그들은 보다 쉽게 스스로 이것을 얻게 될 것이다. 그들은 너와 같이 경건하고 거룩하며 근신하고 의롭게 될 것이다." 목회자는 양떼들에게 본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양떼는 그리스도를 따르듯이 그들을 따라야 한다.
2) 교훈의 목적: 디도의 생활뿐만 아니라 그의 가르침과 교훈을 위해서.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7,8절). 목회자들은 자기들의 설교의 목적을 순전히 하나님의 영광을 높이기 위함이며, 그리스도와 그의 나라에 유익하도록 하며, 신도들의 복지와 행복을 위하는데 두고 있음을 나타내야 한다. 또한 이런 직분은 세속적인 관점에서 취하고 사용된 것이 아니며, 욕심이나 탐욕으로 얻은 것도 아니며 다만 교회의 영적인 목표를 위한 순수한 마음에서 수행한 것임을 밝혀야 한다. 그러므로 목회자는 설교할 때 인간적인 지식이나 웅변, 재치와 위트를 사용한다고 해서 효과를 거두는 것이 아니다. 건전한 말을 해야 한다. 그런 설교는 책망받을 것이 없다. 최대한으로 성서의 진리를 표현해 주는 성서 언어를 써야 한다. 이렇게 해야 비난할 수 없는 건실한 설교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와 같은 목회자의 이 임무를 수차례 언급해 왔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딤전 4:16). 그리고 같은 장 12절에는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그리스도인으로서 너의 말을 위엄있고 신중하게 하고 덕을 기르는데 보탬이 되도록 하라. 설교는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이어야 하며, 아니면 그 말씀에 부합되고 말씀에 근거를 둔 것이어야 한다.
이와 같이 말에서 본을 보여야 한다. 또한 언행에는 그 교훈과 일치하는 삶을 보여 주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 "너는 너 자신과 네 말을 듣는 자들을 구원하리라."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핍박과 고난과 어떤 핍박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딤후 3:10). 얼마나 어울리는 말씀인가!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도 이래야 한다. 그들의 가르침은 말씀과 일치해야 하고, 그들의 생활은 그들의 가르침과 일치해야 한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진실하고 선한 목회자이다.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이 그러하시도다"(살전 2:9, 10). 이대로 지켜져야 한다. 다음을 보면 그 이유가 더 분명해진다.
3) 목회자의 생활이 엄격해야 하고 그의 가르침이 위엄있고 바른 것이 되어야할 이유.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위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다." 적대자들은 비난할 기회를 노리며 목회자의 교훈과 생활 가운데 어떤 잘못이라도 찾아낸다면 비난하고자 할 것이며 의뢰할 것이다. 그러나 모든 것에 있어 옳고 선하다면 그러한 목회자들은 도전에 대하여 초연한 자세를 취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목회자들은 비난들을 수밖에 없는 악한 일을 하지 않음으로 적대자들은 부끄럽게 만들어야 한다. 신실한 목회자들 행동에서 흠잡을 것이 있는가를 찾으려고 애쓰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을 더욱 더 돌이켜보아 결코 흠잡을 것이 없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반대와 비방은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타락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진리에 대적할 것이며 수시로 목회자들과 진리를 고백하는 자들을 비방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로 하여금 "선한 행실을 보여 줌으로써 어리석은 인간들의 무지를 조용하게 만들고, 그들이 목회자들은 악한 사람이 것처럼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 선한 언행을 행하는 자를 그릇 비판하였음을 깨닫게 하여 부끄럽게 하라." 이것이 바울이 디도 자신에게 직접 주는 교훈이며 또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자유인으로서 지켜야 할 의무인 것이다.
6. 종에 대하여.
종들은 자기들은 낮고 천한 위치에 있으므로 하나님의 섭리를 받을 가치가 없으며, 율법에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여서는 안 된다. 다시 말해, 그들은 사람의 종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길 책임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아니다. 종들은 세상의 주인에게 할 의무를 알 뿐 아니라 다 하여야 하며 또한 하늘에 계신 분에게도 눈을 돌려야 한다. 그래서 디도는 공중 설교나 개인적인 훈계를 통해 책임을 지고 있는 종들의 세상 주인들 뿐 아니라 그들의 종들도 가르치고 훈계해야 한다. 종들은 주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의 교훈과 평안을 위해 하나님의 성례에 참여해야 한다. 디도에게 준 바울의 이와 같은 교훈에는 종들에게 권고하고 강조한 의무와 그들을 북돋아 주기 위하여 깊은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
1) 종들의 의무
[1]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며"(9절),
이것이 첫 번째 의무이며 이것으로 그들은 구별된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롬 6:9) 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복종, 마음과 생각으로부터 솟아나온 존경과 충성이 있어야 한다. "내가 만약 주인이라면 걱정할 것이 어디 있으랴? 내가 명하는 모든 것을 행함에 내게 충성된 사랑을 보여 주었을 뿐 아니라 그 사랑의 의미와 표현을 밖으로 나타내 보였으니" 이것이 종이다. 그들은 자기의 뜻을 주인의 뜻에 순종하고 자기의 시간과 노력을 주인의 요구에 따라 제공하여야 한다.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벧전 2:18). 그러한 의무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섭리로 맺어진 관계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사람의 질에 의해 나온 것이 아니다. 만약 그가 주인이 된다면 자기를 위하여 자기의 종이 그런 의무를 다하여 줄 것이다. 그러므로 종들은 자기의 주인에게 순종할 것을 권고하여야만 한다.
[2] "범사에 기쁘게 하고"(9절).
모든 주인이 명령할 만한 일이면 적어도 위대하시고 뛰어나신 주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 일이라면, 마땅한 모든 일을 함으로, 어떤 제한이 없이 무조건 자기의 주인을 기쁘게 하거나 순종하는 것으로 생각하여서는 안 된다. 다만 어떤 경우에도 거슬려서는 안 될 하나님의 의(義)를 소중히 여기는 한계 안에서 할 것이다. 만약 하나님 명령과 자기 상전의 명령이 서로 상반되는 것이라면, 인간의 명령을 따르기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종들은 하나님의 뜻에 기초를 두어야 할 것이며 거기에 의견 상충이 있을 때에 징계 받지 않도록 처신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은 종들의 순종의 척도가 될 뿐만 아니라 종들이 순종하는 이유도 된다. 모든 일은 하나님께 대한 존경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기쁘게 하기 위하여 이루어져야 한다(골 3:22-24).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 세상의 상전들을 섬김으로써 그도 섬김을 받게 된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행한 대로 보상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종들은 인간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아니면서 어떻게 모든 일에 있어서 자기의 주인을 기쁘게 할 수 것인가? 인간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란 사람들만 쳐다보면, 혹은 무슨 일을 하든 하나님을 제쳐 두고하는 것, 또는 오르지 사람에게만 복종하는 것 등으로 잘못 알기 쉽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더라도 인간의 뜻에 따라 추진해 나갈 때, 혹은 하나님보다도 인간의 쾌락을 위할 때, 그리하여 하나님은 불쾌하시더라도 세상 주인만 기쁘면 된다고 만족하게 될 때 또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보다 인간을 기쁘게 하는 일에 보다 많은 주의를 기울이려 할 때 이런 말이 붙여지는데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경계해야 할 죄악된 인간 기쁨인 것이다.
에베소서 "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서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며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인간의 기쁨과 칭찬만을 바라면서 이것 외에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 하였다(엡 6:5, 7). 그렇지만 이 말은 육에 속한 주인들을 그리스도 보다 우선하여 섬기라는 뜻은 아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자유인이든 매인 자인이든 우리에게 의무를 요구하시고 그에 따라 우리에게 보상해 주실 그리스도를 일차적으로 섬겨야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사회적인 추종 관계와 조화를 잘 이루는 것임을 명심하자. 종들은 그 주인을 섬기는 것이 마땅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의 종들도 되는 것이다. 육신의 주인을 섬기는 것과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은 서로 상충되는 것이 아니고 종속적인 것이다.
따라서 육신의 주인을 섬기는 자들은 그리스도의 뜻을 따라서 또 그리스도를 위하여 섬겨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회적인 질서나 신분의 차이를 파괴하여 오신 것이 아니다. "네가 종으로 불리우느냐, 그것에 괘념치 말라(고전 7:21). 네가 종이라는 사실 때문에 고심하지 말라. 마치 이것 때문에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은 처지에서 부르심을 입은 것이 하나님께는 덜 기쁜 일이 되는 듯이 여기지 말라. 왜냐하면 주님 안에 부르심을 입은 자는 그가 설혹 종이라 할지라도 자유인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섬김으로부터 자유가 아니라 섬김으로 자유인이 된다. 사회적으로 매였을지라도 영적으로는 자유인이다. 마찬가지로 부르심을 입는 자는 그가 설혹 자유인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의 종이다. 그가 비록 사회적으로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으나 주에게 매인 바 되었으며, 그래서 자유인이든 종된 자이든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이다." 그러므로 종들은 자기의 처지에 대하여 불평하거나 후회하여서는 안 되며 하나님께서 그에게 허락하신 입장에서 성실하고 즐거움으로 만사에 주인을 기쁘게 하는 일에 충성해야 한다. 나발(Nabeal)과 같은 못된 주인 밑에서는 괴로울 것이나 마찬가지로 이 목적을 잊어선 안 된다.
[3] "거슬려 말하지 말며"
주인에게 말대꾸하지도 말고 주인과 더불어 논쟁하지도 말라. 주인에게 무례하게 대하지도 말고 노하게 하지도 말라. 욥이 자기 종들에 대하여 탄식하기를 자기가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종이 주인의 부름에 답하지 아니하는 것은 또 다른 잘못이다. Non respondere pro conuitio est - 즉 이러한 침묵은 멸시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침묵은 존경이며 독단적이거나 건방진 말대꾸를 하지 않고 겸손히 침묵으로 주인의 책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그것을 변명하거나 합리화하려고 하는 시도는 잘못을 두 배로 만들어 주는 결과가 된다. 여기서 말대꾸하지 않는다는 것은 때와 상황이 허락될 때 부드럽게 해명하는 일까지 금하는 것은 아니다. 선하고 현명한 주인은 언제라도 불만을 듣고 옳게 고치려 한다. 그러나 때를 분간 못하고 대답하거나 혹은 불손한 태도로 대답하는 것, 혹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대답하는 것은 건방이나 무례한 짓으로 이와 같은 주종관계에 필요한 겸손과 온유가 결여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4] "떼에 먹지 말며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게 하라"
이것은 선한 종이 되기 위한 또 다른 기본적인 요소이다. "정직하라." 자기 주인의 것을 자기가 사용하기 위하여 변조하지도 말고, 자기에게 맡겨진 물건들을 낭비하지도 말라. 그것이 바로 떼어 먹는 것이다. 그들은 의롭고 진실해야 하며 자기 자신을 위해서 일하는 것처럼 주인을 위하여 일하여야 할 것이다. "부모의 물건을 도적질하고 죄가 아니라는 자는 멸망케 하는 자의 동류니라"(잠 28:24). 그런 종은 멸망케 하는 자의 편에 언제나 설 준비가 되어 있다. 이처럼 비록 부모나 주인으로부터라도 정당한 것 이상으로 착복하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게 되면 양심은 더욱 더 굳어지기 마련이다. 어떤 경우에든 그런 짓은 악한 것이며 하면 할수록 더하고 싶어진다.
그러므로 주인은 엄격하고 정직해 종들에게 충분한 여유를 주지 않아야 한다. 종들은 주인의 것을 자기의 것인양 베에서 쓰거나 잘못을 덜기 위해 도둑질하여서도 안 될 것이다. 종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급료에 만족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허락하시고 예비해 주신 것만을 가지고 처분해야 한다. 극단적인 경우 생명에 관한 것이나 종으로 당연히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필수적인 조건들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떼어 먹지 말고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여" 종은 훔치거나 낭비 하지말 뿐만 아니라 주인의 재산을 더 늘려 주어야 하며 최선을 다해 주인에게 남는 것과 모자라는 것을 균형 맞춰야 한다.
재산을 늘러 주지 않은 종은 비록 그가 주인의 재산을 잃어버리거나 착복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게으르고 악하다고 책망을 받는다. 성실함이란 종에게 있어서는 주인의 명령을 언제라도 착실히 수행하는데 나타난다. 주인의 비밀과 계획을 지키며, 주인의 일을 신속히 처리하며, 최선을 다하여 주인에게 유익하도록 검약함으로 일을 처분해야 할 것이다. 정성을 다하여 위탁한 것을 최선을 다하여 주인에게 해를 입히고 재산을 잃고, 타격을 받을 일을 막아 주어야 한다. 종은 이렇게 함으로 자신이 축복을 받게 된다. 이와 반대되는 행위는 걷잡을 수 없는 파멸에 이르게 된다. "너희가 만일 남의 것에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눅 16:12). 종들에게 주어진 의무는 이상과 같다.
다음으로,
2) 그들에게 강조해서 훈계하여야 할 것.
"이는 범사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10절).
즉, 범사에 온유와 겸손과 순종으로 행함으로 믿지 않는 사람들이 그들에 대해 호감을 가지도록 경건한 신앙과 복음에 충실하게 하기 위함이다. 비록 종들도 자신들의 이러한 비천한 처지를 생각하고 있을지라도 기독교의 명예를 위해 무언가 할 수 있을 뿐아니라 그리스도의 교훈을 높이며 그리스도의 진리와 말씀의 우월성을 밝힐 수 있다. 게다가 그들이 자신의 책임에 충실하게 되면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신앙 생활의 본보기가 될 수 있다. 믿지 않는 주인이 모든 종들이 거역할 만한 그런 형편에도 종들 가운데 그리스도인 종이 있어 남보다 더 순종하고 복종하며 신실하고 자기의 직무에 근면함을 발견한다면 기독교에 대하여 호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진실한 믿음은 그 믿음을 고백하는 이들에게 영광이 된다. 그리고 그들은 가능한 한 범사에 그 믿음에 불명예가 되는 일을 하고 있지나 않나 돌아 보아야 한다. 우리의 빛이 사람들 사이에서 빛나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선행을 보고하늘에 계신 우리의 선행을 보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영광을 돌릴 수 있게 해야 한다. 이상으로 바울이 디모데에게 몇몇 종류의 사람들에 관하여 지시할 목회자의 사명을 살펴 보았다.
권사란 무엇인가(딛 2:3-5)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초대교회의 조직가운데 일면을 고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 있는 나이드신 여자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기에 나오는 늙은 여자들은 오늘날 권사의 원형을 가리킵니다. 이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1. 목회자를 돕는 사람들
첫째로 권사는 목회자를 돕는 사람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도를 그레데 (크레타) 섬에 두어 목회하게 하였습니다 (딛 1:5). 디도는 그레데 교회에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여성목회는 디도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들 가운데 중요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여성에게는 남성목회자가 접근할 수 없는 점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디도에게 여성을 목회하는 것을 도울 여성일군을 세우게 하였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권사는 무엇보다도 목회자가 여성목회를 수월하게 하는 것을 돕기 위하여 세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면 권사는 목회자의 여성목회를 돕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로 권사는 목회자를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물론 권사는 목회자를 위하여 부지런히 기도해야 합니다 (롬 15:30; 골 4:12). 목회자의 사역과 가정과 건강을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해야 합니다. 둘째로 권사는 목회자의 뜻에 민감해야 합니다. 목회자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목회자의 생각에 익숙해져야 합니다. 권사는 목사가 목회하는데 무엇이 부족하지 않은가 늘 주목해야 합니다. 셋째로 권사는 목회자의 생각을 성도들에게 이해시키는 일을 해야 합니다. 권사는 여성도들이 목사의 설교를 잘 이해하고 있는지 점검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부지런히 목사의 설교를 공부해야 합니다. 넷째로 권사에게는 목회자를 돕기 위하여 순종과 희생이 있어야 합니다.
2. 모범이 되는 사람들
둘째로 권사는 모범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먼저 사도 바울은 생활과 관련하여 세 가지 권면을 주고 있습니다.
행실이 거룩해야 합니다. 그것은 육체를 더럽혀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소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말로 마귀짓하지 말 것을 의미합니다.
술의 종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쾌락주의적인 생활이나 자포자기적인 생활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모두 권사의 모범적인 생활을 알려줍니다.
권사는 여성으로서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여성으로서 가져야 할 예절과 정숙이 있어야 합니다. 권사는 (만일 남편이 살아있다면) 아내로서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남편을 존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하며, 남편에게서 존귀히 여김을 받고 사랑을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권사는 (만일 자녀가 있다면) 어머니로서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자녀들을 말씀으로 양육해야 하며, 자녀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권사는 여신자로서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를 사랑하고, 성도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이렇게 권사는 모범적인 인물입니다.
사도 바울은 모범적인 사람은 다른 사람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합니다 (3). 그래서 권사는 단순히 육체적으로 노력봉사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권사는 지성적으로 교훈봉사를 하는 사람입니다.
특히 권사는 젊은 여성들을 교육시켜야 합니다 (4). 권사는 젊은 여성을 위한 신앙과 인생의 선생입니다. 권사는 젊은 여자들에게 가정생활을 가르쳐야 하며 (4,5), 인격을 가르쳐야 합니다 (5). 이렇게 볼 때 교회의 젊은 여자들이 신앙과 행실에 올바르지 못한 것은 권사의 책임입니다. 권사는 교회 안에서 어머니 학교의 선생역할을 담당해야 합니다.
3. 영적 목적의 사람들
사도 바울은 권사를 세운 궁극적인 목적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영적 목적입니다.
권사의 최종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말씀을 세워나가기 위한 것입니다. 권사는 하나님의 말씀이 견고하게 세우기 위하여 노력해야 합니다. 권사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진다면 대단히 무서운 일입니다. 권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굳게 서는 일이 생겨야 합니다. 조병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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