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베소서 개요
충만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한 교회
에베소서는 가장 우수한 서신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서신서 중의 여왕’이라고도 합니다. 또 시인이며 철학자인 코울리지Coleridge, Samuel Taylor는 ‘인간이 쓴 가장 신성한 작품’이라고 극찬했습니다.
또한 골로새서와 55개 이상의 구절이 닮아서 두 책을 ‘쌍둥이 서신’이라고도 합니다. 골로새서를 “마치 에베소서가 넘쳐나온 듯하다”라고 말하고, 에베소서를 “더 우수한 또 하나의 골로새서다”라고 하기도 합니다.
회람
에베소서는 어느 한 교회에만 보낸 편지가 아니라 바울이 개척한 소아시아의 모든 교회들에게 보낸 것입니다. 교회들마다 이 편지를 돌아가면서 읽기에 ‘회람(回覽)장’이라고도 하지요. 골로새서 4장 16절에 바울이 “회람장이 있다. 그런데 그 편지가 현재는 라오디게아교회에 있다. 그것이 너희에게 올 때 반드시 읽어라”라고 하는데 그 편지가 바로 에베소서입니다.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리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형제요 주 안에서 진실한 일꾼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6:21),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려주리니”(골 4:7).
바울의 이 말은 로마 감옥에 있는 그가 에베소서를 소아시아의 교회들에게 보낼 때 편지 배달부로 두기고를 세웠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두기고는 이 편지와 함께 바울의소식을 전하면서 교회들을 위로했습니다.
에베소서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만물이 통일되며 또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충만함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분의 충만함을 공유한다는 것입니다. ‘충만한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전체내용입니다.
교회의 모습
에베소서는 교회의 모습을 몇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사람으로 비유를 들자면 예수님은 머리가 되시고, 교회는 몸입니다. 사람의 머리와 몸이 하나로 연결되듯이 교회의 머리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이 그의 몸 된 교회로 그대로 흘러갑니다(1:22,23, 2:4-7).
둘째, 교회는 건물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건물의 중심이 되는 모퉁잇돌이며, 교회는 그것을 기초로 건축된 건물입니다. 건물이 서로 연결되면서 한 건물이 되듯이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연결되어 교회가 되어갑니다(2:20-22).
건물이 기초와 기둥과 지붕과 벽으로 이루어지듯 교회는 기초의 역할을 하는 사도와 선지자와 기둥 역할의 교사와 지붕 역할의 목자와 그 집을 사람들로 채우는 전도자로이루어집니다(2:20, 4:11,12). 이것은 하나의 조직체나 명칭이나 호칭을 말하는 것보다는 성령으로 교회를 세우는 교회 리더십에게 부으시는 성령의 직임입니다.
셋째, 교회는 신부와 같습니다. 신랑과 신부에 비유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신랑 되시고, 교회는 신부 됩니다(5:22-33). 신랑은 신부를 자기 목숨까지 주면서 사랑하고, 신부는 신랑을 위해 순종하는 모습에서 교회와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넷째, 교회는 영적전쟁하는 군인입니다(6:10-17). 그리스도인의 삶은 구원받고 이 세상을 즐기는 삶이 아니라 어둠의 영과 전쟁하며 하나님나라를 확장하는 군인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와 전쟁을 하는지, 군인으로서의 무장은 어떻게 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앉으라, 행하라, 서라
에베소서는 로마서처럼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전체 6장 가운데서 앞의 세 장은 그리스도께서 어디에 계시고 그리스도인들은 어디에 있는지를 말합니다. 4장-6장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말합니다. 앞의 세 장이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을, 나머지 세 장은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을 말합니다.
워치만 니Watchman Nee는 에베소서를 설명한 《좌행참》Sit, Walk, Stand이라는 탁월한 책을 썼습니다. ‘좌’坐는 ‘앉다’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오른편에 앉히셨습니다. 그곳은 모든 것을 다스리는 자리입니다.
허물과 죄로 죽고 어둠의 권세 아래에 살던 우리를 하나님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고, 일으키시고, 함께 하늘에 앉히신 것이지요. 그러므로 지금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하나님 우편에 앉아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의 위치이며 우리의 영적인 자리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자리에 있습니다. 앞으로 다스릴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다스리는 것입니다.
사탄의 권세를 명하며 결박하는 영적인 권세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10장19절에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능을 주었으니 너희를 해칠 자가 결코 없으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자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에베소서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단어를 1장에서 3장까지 22회나 언급합니다(1장 12회, 2장 6회, 3장 4회).
‘행’行은 ‘행하라’입니다. 4장 1절-6장 9절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행할 것인가를 다섯 가지 영역으로 설명합니다.
첫 번째,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라’(4:1-16). 그것은 ‘하나 됨, 연합’을 말합니다. 성령이 이미 하나 되게 하신 것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힘써 지켜야 합니다. 하나 됨의 요소가 일곱 가지인데 하나 된 몸, 한 분 성령, 부르심의 한 소망, 한 분 주이신, 하나의 믿음, 하나의 세례, 한 분이신 하나님이 그것입니다.
교파가 다르고 강조하는 바가 다를지라도 기반 위에 있다면 하나 됨을 지키는 데 문제가 될 수 없습니다. 큰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그렇다고 종교 다원주의처럼 모든 종교를 아우르라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위의 일곱 가지의 기반이 우리가 하나 됨을 지키는 요소입니다.
두 번째, ‘진리 가운데서 행하라’(4:17-32). 이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으라는 것입니다. 이같이 행할 수 있는 열쇠는 우리의 사고방식을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5:1-7). 예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같이 우리가 서로 사랑함으로 주님의 새 계명에 순종하며 사는 것입니다(요 13:34,35).
네 번째, ‘빛의 자녀처럼 행하라’(5:8-14).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습니다(5:9).
다섯 번째, ‘모든 관계 가운데서 지혜로 행하라’(5:15-6:9). 세월을 아끼고 시간을 잘 사용하며 주의 뜻을 따라 살면서 관계에서 지혜로 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의 관계, 또 사회에서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지혜롭게 행해야 합니다.
‘참’(站)은 ‘서라’입니다. 6장 10-20절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 세상에 하나님나라를 이루려면 방해 세력과 전쟁을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가나안을 유업으로 받은 이스라엘 백성이 여호수아를 앞장세워 가나안의 족속들과 전쟁하며 그 땅을 취했듯이 우리의 유업을 취해야 합니다. 시편 2편 8절에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마태복음 28장 19절에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게 우리의 사명입니다. 잃어버린 영혼을 주께로 돌아오게 하는것만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를 변화시켜 하나님나라가 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쟁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싸움은 육체가 아니요 사탄의 각 영역의 세력들과의 싸움입니다. 우리의 싸움의 상대는 ‘통치자들’, ‘권세들’,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 ‘악령들’입니다. 이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세력들입니다. 그래서 ‘영적전쟁’이라고 하지요.
이 영적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서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말씀합니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호심경, 평안의 복음 신발, 믿음의 방패,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이 전신갑주입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무장 후에 기도해야 합니다. 깨어 구하기를 힘쓰라고 하십니다(6:14-17).
무엇을 위해 기도할 것인가
에베소서에는 우리에게 가장 모범이 되는 두 개의 기도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기도할 것인가를 잘 보여줍니다. 가족과 친구, 동역자와 사역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알게 하소서’는 ‘경험하게 하소서’라고 바꿔도 됩니다.
기도문 1(1장 17-19절)
“하나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000가 하나님을 알게 하소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우리의 삶에 매우 중요합니다. 예레미야서 9장 23,24절에,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공평과 정의와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라고 하십니다.
“000의 마음의 눈을 밝히셔서 다음의 것들을 알게 하소서.”
첫째,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해주소서.”
우리의 부르심을 아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 각 사람은 하나님이 사명을 주어 이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그것에 삶의 추진력과 역동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둘째,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현재의 삶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에서 주시는 유업이 무엇인지 아는 게 중요합니다.이 땅의 삶은 종착점이 아니고 경유지입니다. 우리가 영원히 살 곳에서 내게 주시는유업이 무엇인지 알 때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알게 됩니다.
셋째, “믿는 우리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어떠한지를 알게 하소서.”
하나님은 전능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믿는 자들을 통해 풀어지고 나타납니다.
기도문 2(3장 16-19절)
첫째,“성령으로 000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소서.”
겉사람(육신)의 건강도 중요하지만 속사람의 건강은 더 중요합니다. 요한삼서 1장 2절에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하심같이 먼저 속사람이 강건하면 범사가 잘되고 육체도 건강해집니다.
둘째, “믿음으로 그리스도께서 000의 마음에 계시게 하소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그의 임재 가운데 머무는 삶은 중요합니다. 그럴 때 마음의 평강과 기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셋째, “000에게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은 4차원의 사랑입니다.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경험하는 것이 참으로 귀합니다
<홍성건 목사>
에베소서 서론
1. 기본적인 배경
1) 저자
에베소서에 있어서 가장 문제시 되는 것은 저작권에 관한 문제이다. 에베소서는 인간 최고의 신적 문장,기독교신앙의 정수를 뽑아 낸 본질, 기독교 신앙의 가장 권위 있고 완전한 개요,고상하고 중요한 교리로 가득찬 서신등으로 불리워 왔다.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모든 국적을 가진 전문적 학자들과 평신도들 그리고성도들에게 그와 같은 인상을 주어왔다. 따라서 에베소서의 저작자가 주님에게서 풍부한 재능을 부여받은 바울이라는 초대교회의 보편적 증언을 부인하는 어떠한 이들에게는 무모한 짓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베소 저작에 대한 부인이 바우어에 의해 마구 성행하게 되었고,그러한 제의가 계속되어 왔다. 바울의 저작권에 대한 부인은 크게 둘로 나눌수 있다.
[1] 너무 많은 유사점을 가진다.
① 에베소서는 골로새서와 유사하다. 그래서 바울이 골로새서를 썼다면,에베소서를 쓸수 없었다는 것이다.
② 에베소서가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 너무도 유사점이 많다. 이것은 무슨 말인가하면, 바울의 제자중,바울의 여러 서신이나 심지어 단어 ,어귀 등에 밝은 한 유능한 사람이 선생을 모방하여 에베소서를 썼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답변한다면,학자들 가운데는 이 유사성의 실재적 범위에 대하여 많은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에베소서의 저자는 그의 주제로서 영광스러운 교회,즉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다같이 주시는 구원의 축복으로 충만해진 교회가 그의 영광을 찬양하는 주제를 가진고로 이 옥중서신 가운데 많은 귀절들이 유사한 주제로 쓰여진 다른 서신과 내용의 유사성을 갖는다는 것은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리고 에베소서는 변증적 자료가 별로 없다. 또한 에베소서는 대부분의 바울서신보다 늦게 쓰여진 서신이다.
③ 에베소서는 베드로 전서와 유사하다. 바울서신이 아닌 다른 신약의 문서들과 유사하다는 점을 들고 있다.
④ 에베소서는 누가복음 및 사도행전과 유사점을 가진다.
⑤ 에베소서는 요한의 저작과 유사점을 가진다.
⑥ 에베소서는 히브리서와 유사점을 가진다.
⑦ 에베소서는 야고보서와 유사점을 가진다.고 주장하고 있다.
[2] 차이점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① 단어의 차이이다.
에베소서가 너무나 많은 예외적 단어, 즉 새로운 단어들을 쓰고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의심없이 받아들이는 소위 바울 서신은 물론 신약성경 다른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는 단어가 에베소서에서 발견되므로 바울의 저작이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하여 답변 한다면,만약 이 주장이 의심없이 바울의 저작임을 드러내는 다른 서신에도 적용이 된다면,이 서신들에서도 다른 서신에서 발견하지 않는 새 단어들이 발견되므로 바울의 서신에서 제외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주제가 다를때 다른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리고 흔히 바울의 다른 서신에서 없는 말이 에베소에서 발견된다는 주장은 일반적으로 말해 목회서신과 골로새서가 바울의 서신이 아니라는 무언의 가정에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이 가정은 근거없는 것이다. 목회서신을 쓴것은 바울이었다. 그리고 에베소서에서만 발견되는 소위 예외적 단어들 중에서 돌로새서와 목회서신에서 발견되는 것들을 제외하고 나면 남은 것은 불과 얼마되지 않는다. 그렇다면,바울같이 유능한 저작자가 그 정도의 새로운 말이나 용어들의 어휘력을 가졌다는 것은 바울 저작권을 부인할 하등의 이유가 성립되지 못한다.
② 의미의 차이를 들고 있다.
③ 문체의 차이를 들고 있다.
④ 교리의 차이를 들고 있다.
먼저 신론에 있어서는 에베소서는 인간의 구원의 근거를 하나님의 영원한 섭리에 두고 있으나 다른 서신에서는 바울은 십자가를 강조한다는 것이다.
인간론의 차이에서는 에베소서는 은혜를 떠난 인간의 죄의 상태를 골로새서나 다른 서신에 비해 훨씬 부드러운 투로 서술하고 있다.
기독론의 차이에서는 에베소서는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라고 했으나 다른데서는 머리를 다만 지체중의 하나로만 서술하고 있다. 그리고 엡2:16절에서는 화해를 이루신 분은 그리스도라고 하였으나 골1:20,2:13-14에서는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또한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이 근본적 문제를 다루어지고 있지 않고 모든 것이 승귀에 집중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서신에서는 죄인들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해된 것을 말하고 있느나 에베소서에서는 십자가로 인하여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화해가 이루어졌음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에베소서는 그리스도의 승천을 가르치고 있는데 다른데는 이 승천 교리가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를 든다면,에베소서는 그리스도께서 지옥에 내려가신것을 가르치고 있는데 그것은 바울 후기의 요소라는 것이다.
구원론의 차이를 들고 있는데 에베소서에서는 은혜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한 구원을 말하고 있느나 바울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에베소서의 율법관이 비바울적이라는 것이다.
교회론의 차이를 들고 있는데 그것은 에베소서에서는 교회란 단어는 언제나 보편교회를 말하고 있는데 바울의 다른 서신들에서는 지교회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에베소서가 교회의 통일성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 서신이 바울의 사후에 즉 많은 파당이 생겨나 중앙집권적 교권의 강조가 요구되는때에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또 사도들과 선지자에 대해 마치 그들이 거룩하고 또 그들이 교회의 기초인양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서 바울 후기시대의 세대들을 위하여 기록된 인상을 짙게 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엡2:11절을 쓸수 없다는 것이다,. 참 유대인은 아무래도 할례를 그런 경멸조의 언어로 볼수 없다는 것이다.
종말론의 차이를 들고 있는데 바울의 저작권을 부인하는 이들은 바울이 에베소서를 쓸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는 여기엔 재림이나 이에 관련된 아무런 교리도 발견할수 없다는 것이다.
[3] 결론
① 너무 많은 유사점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
골로새서와 에베소서의 유사점은 주로 저자가 같다는데 그리고 시간,장소,일반적 상황이 같다는데 있다. 또한 동일 저자라는 사실은 표현과 강조에 있어서 많은 변화가 있고 이유도 설명해 준다. 그리고 바울의 저작이라고 전통적으로 믿어온 다른 서신들은 발신인과 주소에 대한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에베소서와의 유사점이란 큰것이 못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사이에는 많은 비교점이 있고 이 또같은 사상은 새로운 방향을 지시해 주고 있다. 저자의 동일성과 함께 제2의 요소인 교리의 동일성은 고려되어져야 한다. 그리고 일률적 교회의 문답식 교훈의 필료성과 새 개종자들의 증가는 표현의 일치를 가져오게 된다. 또한 신약성경 저자들의 형태와 내용의 유사성은 결국 그리스도에게까지 즉 그의 인격과 업적, 가르침까지 추적 될수 있다. 바울과 다른 저자들은 똑같이 구약의 배경에 조예가 깊었다. 이 모든 요소들은 에베소서가 바울의 저작으로서 잘못 취급되어 왔으며, 그 저자는 어ㄸ넌 모방자였으리라는 가정 보다는 바울의 저작으로 보는 것이 이 유사성들을 설명하느데 더 만족할 답을 줄 것이다.
② 차이점이 너무 많다는 이의에 대하여
단어나 문체드의 차이는 이 편지를 쓸 당시 바울의 감사에 대한 감정이 폭발된데 있으며,소위 교리의 차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수 있다. 즉 에베소서에 여러가지 교리들이 다른 서신들보다 더 강조되고 확대되고 있는게 사실이지만 다른 서신들에서 발견되는 교리들과 서로 모순이 되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③ 에베소서가 바울의 저작이라는 이유
먼저 내증을 보면 에베소서의 저자는 자신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 또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로 너희 이방을 위하여 갖힌자된 나 바울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에베소서의 저자는 마지막 축도에 앞서 나의 사정, 곧 내가 무엇을 하는지 너희에게도 알게 하려 하노니 사랑을 받은 현제요,주 안에서 신실한 일군인 두기고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또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여 내가 특별히 저를 너희에게 보내었노라 고 말하였다.
바울의 제자요 그의 가르침에 밝은 서신의 수집자가 감히 자신을 바울과 동일시 할수 있었을까? 그리고 에베소서는 보편적으로 바울 서신이라고 인정된 로마서,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의 모든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한 초대 교회의 바울의 진짜 저작을 그처럼 훌륭한 문체와 논리적 전개와 고상한 내용을 가진 귀절들로 합성할수 있는 위조의 천재가 있었다는 것은 믿기 어려운 일이다. 그것도 바울의 지적능력과 영적 통찰력을 가지고 바울의 사상을 발전시키면서 아무도 구별할수 없도록 했다는 것은 더욱 믿을수 없는 일이다.
또한 외증에 있어서도 증명이 된다. 초대교회의 증언은 이미 내린 결론과 조화를 이룬다. 유세비우스는 에베소서를 바울의 진정한 서신으로 인정한다. 터툴리안도 마찬가지로 바울의 저작을 인정하고 이보다 약간 일찍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와 이레니우스는 바울의 자작을 그대로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가장 오래된 공식적인 정경인 마르키온 정경속에 나타나고 있다. 따라서 당시에는 이 서신을 바울이 기록했다는 점에 아무런 이의가 없었다. 그 이유는 마르키온은 오직 사도바울만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또한 가장 오래도니 라틴 역본 및 수리아 역본에서도 에베소서를 바울의 서신들 가운데 포함시키고 있다. 본서신은 오파이트라,발렌티누스파에 의하여 사용되었으며,폴리갑의 저작들에서와 헤르마스와 디다케 속에서도 본 서신의 언어들이 발견되고 있다.
2세기 후반기를 지나면서 헬마스의 목자,사도들의 가르침,바나바의 서신,등등에 나타난 에베소서의 암시는 제쳐두고라도 100-170년경에 살았던 저술가들에 이르면,당시에 에베소서의 저자가 이미 바울로 인정되고 있음을 발견한다.
이 외에도 본 서신의 바울적 구조와 본 서신의 언어 및 문학적 유사성, 그리고 본 서신의 신학적 유사성, 또한 본 서신의 역사적 자료들을 통하여 우리는 바울의 저작임을 결론적으로 내릴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약의 저작들을 규정할때에 이의 없이 바울을 에베소서의 저자로 지목한 것이다. 2세기 말에 에베소서의 저자에 대하여 극소수의 이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 서신의 가치와 영감성에 대하여는 일찍부터 각처에서 인정되어 온게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 전통적 확신을 저버릴 아무런 이유가 없다.
2) 수신자 및 기록연대
에베소서에 있어서 하나의 큰 문제는 엡1:1절에 언급된 수신인에 대한 기록이 희랍어 사본에는 차이가 있다는데 있다. 초두의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은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 하노니"에는 아무런 본문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는다. 그러나 에베소에 있는 의 첨가된 낱말이 난점이 있다. 가장 오래된 사본들에는 이 귀절이 없다. 그래서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초기의 사본들에 "에베소에 있는"이란 귀절이 없는 이유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고 에베소서의 참 목적지가 어디인가? 하는 점이다. 여기에 대하여 몇가지 해결책들이 제시되고 있는 것을 볼수 있다.
첫로, 에베소서는 에베소에 있는 교인들에게 보내진 서신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에게 보내진 서신이라는 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서신의 제목이 무엇이든지 간에 에베소서에 있는 이란 말은 바울이 삽입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학설에는 두가지의 형태가 있는데 먼저는 바울이 그의 메세지를 참 존재를 가진 성도들에게 보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바울이 단순히 그리스도 예수안의 신실한 자들에게 썼다는 것이다.
두번째 제시는 에베소서가 어떤 제한된 지역에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진 서신이기는 하지만 에베소는 아니라는 견해이다. 이 이론은 특별히 애보트가 변호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에베소서는 라오디게아,히에라볼리,골로새서등의 이방 개종자들에게 썼다는 것이다.
세번째 제시는 본 서신은 에베소가 도청 소재지인 그 지방에 거주하는 신자들에게 보내졌으며, 그것은 에베소 교회뿐 아니라 주변의 여러 교회들을 위하여 쓰여졌다는 것이다. 오늘날 이 견해는 널리 지지되고 있다.
네번째 견해에 의하면, 본 서신은 한 특수 지역, 즉 빌립보서가 빌립보에 있는 교회들을 위하여 고린도잔후가 고린도 교회를 위하여 쓰여짐 같이 에베소에 있는 한 교회를 위하여 쓰여 졌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순회 서신 이론을 지지하는 이들은 다음과 같은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에베소서에 있는"이란 말은 가장 오래된 사본들 속에 없다. 따라서 에베소서가 수도인 어떤 지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한 이 에베소를 목적지로 주장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1:15; 3:2과4:21,22등을 비교해 보면 분명히 독자들 가운데는 바울이 모르는 자들과 그가 개인적으로 가까운 관계를 갖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바울이 세운 교회와 그가 개인적으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보낸 모든 서신에는 그가 교회의 영적 아버지이며,그들 중에서 해산의 고통을 한것을 기록한 귀절들이 나온다. 그런데 이런 귀절이 에베소에는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에베소서에는 개인적인 인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반대하여 이 서신이 순회 서신이 아니라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말시온의 사본을 제외한 모든 고대 사본에는 본 서신은 "에베소인들에게"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그리고 엡1:15,3:2 과 4:21,22은 해석상의 문제이다.
또한 사도행전에 있는 바울의 활동에 대한 기록과 본 서신의 내용에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다.
고린도후서,갈라디아서,데살로니가 전후서 역시 바울에 의하여 세워진 교회이나 인사에 대한 언급이 없다. 반대로 로마서는 바울에 의하여 세워진 교회가 아니지만 많은 인사가 나온다.
다섯번째 견해는 본서신은 라오디게아로 보내졌다.
이 가설은 마르키온 정경의 증거를 근거로 한 것이다. 그러나 여러방면으로 비판을 받고 있다.
여섯번째 견해는 본 서신은 바울의 영적 유언장이었다는 것이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본 서신이 로마 투옥 말기에 쓰여진 것으로 보며 제 2차 투옥 가설을 부인한다. 따라서 이 서신은 전체 교회에 보낸 바울 사도의 고별 메세지로 생각되고 있다.
일곱번째 견해는 본 서신은 바울 전집에 대한 서론이라는 것이다.
굳스피드와 존 낙스에 의해 제안된 이 이론은 약간의 수정과 함께 미턴에 의해 주장 되었다. 에베소서를 기록했다고 말하는 헌신적인 바울 주의자는 바울 서신들을 모르고 있을 독자들을 위해 서신들 안에 포한된 가르침에 대한 요약을 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이 서론적인 기록은 수집된 편지들이 에베소 교회에 처음 알려졌기에 "에베소인들에게"라는 명칭을 갖게 된 것이다. 이 이론은 비판을 받고 있는데 그덧은 에베소서가 바울 전집의 서두에 있었다는 증거가 없다. 그리고 에베소서6:21,22에 있는 두기고에 관한 언급은 굳스피드의 이론에서 큰 난제이다. 그리고 이 이론은 바울 서신들이 한동안 무관심의 대상이었으나 사도행전의 출판으로 관심이 되살아났다는 가정에 의존한다. 또 하나의 난점은 문헌적인 문제로서 바울 전집에 대한 서론으로 쓰여진 본 서신이 그처럼 골로새서에 의존했을 것으로 생각하기는 어렵다.
여덟번째 견해는 본 서신은 모든 기독교 세계를 위한 종교 철학을 기록한 것이다.
아홉번째 견해는 본 서신은 골로새 이단의 확장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결론적으로 이야기 한다면 본 서신의 목적지는 "에베소"였다. 즉 에베소와 그 주변의 교회들 이었다. 서신을 기록한 장소는 로마였으며,시기는 A.D 61-63의 어느 시기이었을 것이다.
3) 기록 장소
이 부분은 본 보고서의 빌립보서의 기록연대와 장소부분을 참고하기 바란다.
2. 역사적 배경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에 의해 그의 제 2차 전도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 그 기초가 세워졌다. 그리이스로 부터 시리아로 향해 가는 길에 사도바울은 브리스 길라와 아굴라를 동반하고,에베소를 방문 하였다. 거기에서 그는 이들을 이 도시에 남겨 두고 떠났다.방문은 그가 예루살렘으로 급히 서둘러 가는 도중에 잠시 머물렀던 것에 불과 하다 그러나 그는 그 지역 회당의 유대 지도자둘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그는 그들에게 감동을 주었고 따라서 그들은 바울에게 그곳에 머물러 달라고 간청하기에 이르렀다.그러나 그는 그의 계획을 바꿀수가 없었다.그래서 그는 자신이 돌라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돌아오겠노라고 그들에게 약속 했다. 이러한 사실은 확실히 이루어졌다 왜냐하면,그는 그 다음 전도 여행 일정에 에베소를 포함 시켰고,실제로 에베소에서 3년 이상을 머물렀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곳이 전도 전략상 상당히 유력한 지역임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그곳은 그 지역의 중심 도시였으며, 동서를 잇는 대로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곳에 위치했기 때문이다 에베소의 주위에는 230개의 독립된 공동체 사회가 아시아의 로마 지경내에 산재해 있었다. 만약 기독교의 신앙이 이와 같은 수도에 확고히 세워진다면,그것은 마치 바퀴의 중심에서 테두리로 힘을 옮겨지는 것과 같이 확산 될수 있을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로 돌아 왔을때 그는 자신이 없는 동안에 아볼로가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는 아볼로가 고린도로 옮겨가고 있었으며,따라서 바울은 그곳에서 자신의 사업을 자유로이 강화할수 있었다,. 석달 동안 그는 유대인들과의 대결을 겪어야 했으며, 곧 반대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는 개종자들을 두란노 서원에 모아 2년동안 날마다 강론했다.
바울의 전도의 여파는 에베소지역 너머에 까지 미쳤다. 그 전지역이 영향을 받았으며,이로 인하여 도처에 개종자들이 있었다. 사업차 수도로 왔던 사람들이나 유람차 왔던 사람들을 막론하고 그들은 복음을 들었다.그래서 그들은 각기 고향에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이렇게 획기적인 전도의 확장은 사도행전19:23-41에서 묘사된 소동으로 인해 잠시 주춤하게 되었다. 이 소동이란 더메드리오라고 하는 어느 은장색이 자기의 동료들과 동맹을 결성한 사건이었다. 바울은 이미 그곳을 떠나려던 차였으며,이것은 바울이 에베소에서의 사역을 그만 두고 로마로 향하게 된 신호가 되었다. 수리아로 가는 마지막 항해중에 그는 밀레도에 도착해서 에베소의 장로들과 작별을 하면서 그들에게 엄숙하고도 감동적으로 무리의 실수에 대해 훈계하고 부탁한다. 그후로 바울은 에베소를 다시 방문할수 없었다.
3. 저술 목적
수신지에 대해 다양한 견해들이 제기되고 있는 본 서신의 저작동기와 목적을 확실하게 결정하기란 어렵다. 만일 우리가 회람이론을 가정한다면,우리는 독자들의 상황보다는 저자의 상황으로부터 목적을 제시할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감옥에 있었기 때문에 생각할수 있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이러한 사실은 그 서신이 훨씬 더 명상적인 분위기를 띠고 있음과 함께 그가 다루고 있는 특별한 상황에 관련된 긴장이 없음을 잘 설명해 준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를 깊이 생각하고 있었고 결국 영광 받는 기독론과 그리스도안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의 특권을 높이 찬양하게 되었다.
본 서신과 골로새서의 밀점한 관련은 에베소서의 저작 목적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이 두 서신은 다소 방법상의 차이는 있으나 동일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의 교리를 여전히 마음속에 생각하면서 이단이 존재하는 특별한 배경없이 일반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다시 썼다고 생각할수 있다.
이제 바울이 이 서신을 쓴 목적을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수 있겠다.
1) 바울은 에베소서를 그곳 성도들의 그리스도를 중심한 신앙과 모든 성도들에 대한 그들의 사랑에 대한 그의 만족을 표현하기 위하여 기록하였다.
2) 또 하나의 연관된 목적은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속죄적 은혜를 알려주어 세상에 대하여는 축복이 되며, 몯굳게 서며,그리하여 구속주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하려는데 있었다.
3) 본 서신에서 바울은 그가 죄수로 갖혀 있는 로마의 제국과 교회 사이에 대조를 하려 했는지도 모른다.이 가능성은 같은 옥중 생활중에 쓰여진 빌립보서신에도 암시되어 있다. 만약 그렇다면,로마의 마력은 그에게는 교회의 영광으로 암시 되었을 것이다.아직 제한된 영역만을 통치하는 로마의 횡포한 독재자와 온 세게를 다스리는 교회의 은혜로우신 주님과의 대조,로마의 물리적 힘에 대한 정치적 통합과 평화의 줄로 매어진 교회의 유기적 단일성의 대조,로마의 군사적 힘과 교회의 영적 갑옷과의 대조,뢈의 시간과 변화와 성쇠속의 기초와 교회의 영원하며,끊임없는 기초와의 대조등이 바울의 의도였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1. 배경
바울이 제 2차 전도 여행 때 드로아에서 환상을 본 뒤에 마게도냐로 건너가서 그 지 방 수도인 빌립보에 들렸었다.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로서 이 지방은 정치의 중심지 였지만 유대인의 회당은 없었다.
빌립보는 구라파 기독교의 출생지로서 구라파에서 제일 먼저 교회가 세워진곳이 이 곳이다.
최초의 신자는 자주장사 루디아였으며 바울과 실라가 사귀들인 여종 하나를 고쳐준 탓으로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이 사건으로 인해서 옥사장과 그의 집의 식구가 회개하여 마침내 빌립보에 교회가 설립되었다.
빌립보 교회 교인들이 바울를 대하는 사랑이 두터워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를 갔을 때에도 한 두번 도운 일이 있었고(빌4:16), 지금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을 때에는 에바브로디도 편에 돈을 보내고 그리고 그로 하여금 바울을 시종 들게 했다(빌4:18). 그후 에바브로디도가 중병에 걸려 거의 죽게 되었다가 회복되어 빌립보에 돌아가기를 원했으므로 그 기회에 이 편지를 썼다. 로마에서 61,2년경 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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