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의 서신(書信)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최갑종(백석대학교. 신약)
신약성경에는 21개의 서신들(Letters)이 있다. 이 21권의 편지를 저자 중심으로 분류하면 바울이 쓴 편지가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데살로니가전후서, 디모데전후서, 디도서, 빌레몬 등 13개, 요한이 쓴 편지가 요한 1,2,3서 등 3개, 베드로가 쓴 편지가 베드로전후서 등 2개, 야고보와 유다가 쓴 편지가 야고보서, 유다서 등 각각 1개, 저자를 알 수 없는 히브리서로 나눌 수 있다. 신약성경 전체가 27권이라는 점을 감안해 볼 때 21개가 서신으로 되어 있다는 것은 서신이 신약의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서신”(書信)은 무엇인가? 신약의 서신은 어떤 사람이 자신과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 어떤 교회 공동체나 개인에게 보낸 편지이다. 신약의 서신 중 그 어느 하나도 특수한 주제나 교리를 설명하기 위한 에세이나 도서관이나 연구실에서 쓴 논문이 아니다. 편지를 쓰는 사람이나 편지를 받는 구체적인 인물이 있으며, 그리고 발신자나 수신자의 구체적인 필요성을 채우기 위해 쓰여 진 순수한 편지이다. 그럼으로 모든 신약의 서신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서신들에는 발신자와 수신자의 구체적인 상황이 나타나 있다. 신약의 서신중에서 가장 상황성이 결여 되어 있다고 여겨지는 로마서의 경우에도 예외가 아니다. 로마서가 주로 바울자신의 필요성 때문에 쓰여 졌느냐, 로마교회의 필요성에 의해 쓰여 졌느냐는 문제가 여전히 오늘 날 신약학계에서 논의가 되고 있지만, 로마서가 바울 자신의 필요성은 물론 로마교회의 필요성 때문에 쓰여 졌다는 것을 로마서의 서문(1:1-17)과 결언부분(15:14-16:27)이 분명히 말하고 있다.
물론 문학적 장르 중의 하나로서 “서신”은 신약 성경에만 나타나는 특이한 것이 아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 사회에서 이미 서신이 중요한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아마도 서신의 역사를 살펴본다면 인간이 문자를 활용하면서부터 이미 서신이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활용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현존하는 고대 헬라-로마 사회에서 쓰여 진 수많은, 적어도 1만개 이상의 파피루스나 양피지 편지 사본들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고대사회는 오늘 날처럼 교통수단이 발달되어 있지 않았으며, 의사소통의 수단도 매우 제한이 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장거리를 쉽게 오고 갈 수 있는 자동차도, 비행기도, 기차도 없었다. 당시의 장거리 교통수단으로는 말과 당나귀가 끄는 마차나, 노나 바람을 이용하여 가는 배 정도였고, 그렇지 않으면 걷는 경우가 대부분의 경우였다. 그러기 때문에 당시에 장거리 여행을 한다는 것은 상당한 시일, 때로는 수개월이 소요되었으며, 때로는 기후가 좋지 못해서 혹은 질병이나 강도들의 출몰 때문에 중간에 여행이 중단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기 때문에 전화나 인터넷 등의 의사소통의 수단이 없는 고대-헬라 로마사회에서 편지의 중요성은 오늘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개인이든 가족 단위든 혹은 더 나아가서 공동체나 국가 간에도 편지가 상대방과의 의사소통에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서 고대 헬라-로마 사회에서는 이미 부분적으로 원시형태의 우체국제도가 활용되고 있었다.
고대 사회에서 편지의 중요성이 오늘 우리 사회에서 보다도 훨씬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편지가 일반화되지는 못했다. 우선 고대 헬라-로마-유대사회에서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10명 중에 한두 명에 불과했다. 그리고 글을 읽을 수 있다고 해서 편지를 쉽게 쓸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 편지를 쓸 수 있는 종이는 대부분의 경우 쉽게 찢어질 수 있는 파피루스 종이였고, 펜도 마모가 쉬운 갈대 펜이었기 때문에 편지를 쓰는 데는 전문적인 기술이 필요하였다. Cicero같은 로마의 문필가가 편지를 쓸 때도 전문적인 서기를 활용한 것도, 역시 뛰어난 교육을 받은 바울 역시 로마서를 쓸 때도 더디오(롬 16:22)를 활용하였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처럼 고대 헬라-로마-유대사회에서 편지가 중요한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었다는 점은 서신의 양식이 신약성경에만 나타나는 특이한 문학적 장르는 아님을 보여준다. 그리고 편지의 일반적인 양식, 이를테면 고대 헬라-로마-유대사회에서 편지가 크게 세 부분으로 즉 ①서두인사, ②본론, ③결언으로 구성되고 있었던 것처럼, 신약성경의 편지도 주로 동일한 세 부분으로 구성되고 있는 점이 이점을 지지해준다. 그러나 좀 더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양자 사이에 적지 않은 차이점이 있다. 우선 현존하는 고대 헬라-로마사회의 편지를 보면 편지의 길이가 매우 짧다. 우리는 사도행전 23장에 나타나 있는 로마군대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가 사도 바울과 관련하여 총독 벨릭스에게 보낸 다음과 같은 편지를 통해서 이점을 확인할 수 있다.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께 문안하나이다.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 줄 들어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다가 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고발하는지 알고자 하여 그들의 공회로 데리고 내려갔더니, 고발하는 것이 그들의 율법 문제에 관한 것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유가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 그러나 이 사람을 해하려는 간계가 있다고 누가 내게 알려 주기로 곧 당신께로 보내며 또 고발하는 사람들도 당신 앞에서 그에 대하여 말하라 하였나이다(행 23:26-30). "
그러나 신약성경에 있는 21개의 서신들은 당대의 편지와 비교해 보면 대단히 길다. 바울이 쓴 로마서나 고린도전서는 16장이나 되는 긴 편지이다. 가장 짧은 편지로 여겨지는 빌레몬서와 유다서도 루시아의 편지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길다. 이 뿐만이 아니다. 현존하는 고대 헬라-로마의 편지들은 대게 私的으로 보낸 편지이지만 신약의 서신들은 대게 교회에게 보낸 公的인 편지이다. 그리고 그 내용에 있어서도 단순하지 않고 여러 가지 내용들을 담고 있다. 바울의 서신들을 예를 든다면 서신 안에는 바울의 저선적 개인 이야기도 들어있고, 그가 받은 초대교회의 복음전승도 들어 있고, 교리적인 내용과 경고와 권면에 관한 야기도 들어있고, 편지를 받는 교회안에 일어난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한 진술도 들어 있다. 이처럼 편지의 내용이 길고 다양한 만큼 편지에 활용되는 기법도 다양한 문학적 기법들, 이를테면 당대에 발달된 수사학이나, 구약의 히브리문학에서 자주 발견되는 여러 가지 병행법, 대구법등이 활용되고 있다. 편지의 본론은 물론 편지의 서언과 결언도 당대 편지가 간단한 문안인사와 결언 인사를 가지고 있는 것과 비교하면 대단히 길다. 바울이 쓴 로마서의 경우 문안인사만 해도 7절이나 될 만큼 길다.
왜 신약성경에 있는 편지들이 길고, 다양한 내용과 다양한 기법들을 활용하고 있는가? 그 주된 이유는 신약의 편지들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개인에게 보낸 편지가 아니고 교회 공동체나 교회의 대표자에게 보낸 편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바울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바울은 자신이 세웠던 교회들 안에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들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직접 방문할 형편이 되지 않아 대신 편지를 써서 보냈다. 그런 점에서 바울의 편지는 바울자신의 임재를 대변하고, 바울자신의 설교와 교훈을 대변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교회의 문제가 복잡하면 복잡할수록, 교회의 구성원이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문제의 해결책이 쉽지 않기 때문에 다양한 내용과 기법들이 활용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서신을 어떻게 접근하고 해석할 것인가?
신약의 서신들이 그야말로 발신자가 수신자에게 의사를 전달하기 위한 순수한 편지이라는 점에서 서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서신을 쓴 저자나 수신자(독자)의 역사적 정황에 대한 이해가 우선적으로 필요하다. 즉 이 편지를 쓴 저자가 누구이며(그의 삶, 사상 등), 그가 왜 편지를 쓰게 되었는지, 편지를 쓸 당시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으며, 어떤 상황에 있었으며, 편지를 받게 되는 독자들과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가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이와 함께 편지를 받게 되는 독자는 누구이며, 편지를 받게 될 당시에 그들은 어떤 상황에 있었으며, 편지를 보내는 사람과는 어떤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러나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나 수신자에 대하여 그리고 당시 그들이 처한 구체적 상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얻는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우리는 이러한 정보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편지 그 자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저자나 독자의 상황을 담고 있는 편지이기 때문에 우리는 편지를 통해서 어느 정도 우리가 필요한 정보에 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필요한 것은 편지를 보내는 저자가 편지 가운데서 활용하고 있는 문학적 기법이다. 나중에 우리가 보다 자세하게 살펴보겠지만 바울의 편지들을 살펴보면 저자나 독자의 상황과 그 필요성에 따라 편지의 본론만이 아니라 편지의 서문과 결언까지 용의주도하게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면 갈라디아서의 경우 바울은 서문에서 자신을 소개 할 때 의도적으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름을 받은 “사도”임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갈라디아교회에 찾아 온 바울의 반대자들 때문에 교회 안에서 자신의 신적인 사도직이 훼손을 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에 빌립보서 서문에서는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고 다만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임을 강조한다. 그 이유는 빌립보교회 안에는 누가 교회의 리더쉽을 가지느냐는 문제와 관련하여 갈등이 있었고, 바울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종의 자세와 겸손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편지들의 경우 적지 않은 편지들(로마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등)이 본론의 전반부에서는 주로 신학적인 내용들을 직설법 형태로 제시하고, 후반부에서는 주로 실천적이고 윤리적인 내용들을 명령법 형식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편지의 내용들을 거시적 구조(macro-structure)나 미시적 구조(micro-structure)면에서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고대-헬라 로마에서 자주 활용되고 있는 수사학적 기법과 구약의 히브리문학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는 병행법, 반복법, 교차대구법 등의 기법들이 활용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아마도 바울은 자신의 대리 역할을 하는 편지를 통해서 자신의 의사를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하도록 하기 위해, 그리고 독자들도 보다 쉽게 자신의 의사를 이해할 수 있도록 저자나 독자들에게 알려져 있는 다양한 문학적 기법들을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각 편지들을 접근할 때 그 편자에 사용되고 있는 문학적 기법들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면 가질 수록 편지의 의도나 핵심적인 메시지를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이제 바울이 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그리고 요한이 쓴 요한 1서를 중심으로 사례를 살펴보자.
(1) 갈라디아서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교회들에게 보낸 역사적인 편지이다(1:1-4). 그럼으로 갈라디아서는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는 갈라디아서 이해와 해석에 있어서 필수적이다. 갈라디아서의 역사적인 배경에 대한 이해가 깊으면 깊을수록 갈라디아서에 대한 이해는 깊어질 것이며, 반대로 갈라디아서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이해가 빈약하면 빈약할수록 갈라디아서에 대한 이해는 빈약하고 독단적이거나 주관적인 이해로 빠질 수 있다.
갈라디아서는 역사적 문헌인 동시에 또한 글로 쓰여 진 하나의 문학적 작품이다. 바울은 자신이 갈라디아교회들에게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편지를 써서 보냈고, 갈라디아교인들은 바울이 보낸 편지의 내용을 낭독하는 사람으로부터 직접 들었을 것이다. 그들은 낭독하는 편지의 내용을 들으면서 마치 바울이 그들에게 찾아와서 말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글에 익숙한 현대인들과 달리 그들은 주로 듣고 말하였기 때문에, 기억력과 암기력에 있어서는 현대인들보다도 훨씬 더 탁월하였다고 볼 수 있는 그들은, 바울의 편지를 들으면서 바울이 그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를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갈라디아서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울이 청중이 자신의 의도와 메시지를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어떻게 편지를 효과적으로 썼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갈라디아서에 대한 역사적 접근과 함께 문학적 접근이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갈라디아서는 16장으로 구성된 로마서나, 각각 16장과 13장으로 구성된 고린도전후서와 비교해 볼 때 6장 밖에 되지 않는 비교적 짧은 서신이다. 그렇다고 해서 갈라디아서가 중요한 편지가 아닌 것처럼 취급되어서는 아니 된다.1) 갈라디아서는, 저명한 갈라디아서 주석가중의 한 사람인 베츠(H.D. Betz)가 말한바와 같이, 이 세상에 현존(現存)하는 기독교의 문헌 중 가장 중요한 문헌 중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2) 사실상 갈라디아서는 기독교역사의 기원과 뿌리를 밝혀줄 수 있는 가장 초창기 기독교문헌 중의 하나이며, 또한 지나간 이천 년간의 기독교역사에 가장 결정적이고,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신약성경 중의 한 부분이다.3) 그러기 때문에 갈라디아서는 바울 신학은 물론, 기독교 정체성과 신학을 파악하는데 있어서도 좋은 출발점과 안내서로 불리어진다.4)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 Luther)는 갈라디아서를 가리켜, 자신의 “사랑하는 Katie von Bora”(루터의 아내 이름)라 부를 만큼, 갈라디아서를 그 어떤 성경의 부분보다 중요하게 생각하였으며(Luther, Werke, 40:2), 자신의 종교개혁의 신학적 원리인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근거를 거기서 찾았다.5)
갈라디아서는 누가, 언제, 누구에게,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목적을 위해,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썼는가? 이와 같은 질문들은 갈라디아서 연구에 들어가면서 반드시 물어보아야 할 질문들이다. 하지만 갈라디아서의 서론에 해당되는 이와 같은 질문들과 관련해서, 솔직하게 말한다면, 갈라디아서가 사도 바울에 의해 쓰여 졌다는 이 한 가지 사실 외에는, 오늘 신약학계에서 합의된 것은 없다. 갈라디아서가 쓰여 진 연대, 수신자들, 역사적 상황, 바울의 적대자들, 쓰여 진 편지의 문학형식, 중심적인 주제 등등의 문제들은 아직도 현금의 신약학계에서 계속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6) 그 주된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신약성경 중에서 갈라디아서가 그렇게 중요하면서 왜 학자들 사이에 갈라디아서에 관하여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계속 논란을 벌이고 있는가? 그 주된 이유는 우리가 갈라디아서가 바울에 의해 쓰여 졌다는 한 가지 사실 외에는 역사적으로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를 거의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 주석가 베츠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이 자신을 통하여 기독교 신앙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 얼마 후에 그들에게 쓴 편지인 갈라디아서를 제외하고는, 갈라디아에 있었던 기독교 교회에 관하여 현존하는 그 어떤 자료도 남아 있지 않다. 갈라디아의 교회들이 정확하게 어디에 위치하고 있었는지, 갈라디아교회들이 현존하고 있을 당시 어떠한 종교적, 문화적 환경을 가지고 있었는지, 혹은 갈라디아 교인들이 바울의 편지를 읽은 다음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였는지 등등에 관하여 답변해줄 수 있는 그 어떤 고고학적 발견도, 성곽의 유적도, 비문도, 비석도, 혹은 그 밖에 어떤 다른 역사적 기록도 남아 있지 않다.7)
바울 사도가 왜, 무엇을, 어떻게 갈라디아서를 써서 갈라디아교회에 보냈으며, 편지에 나타난 바울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무엇인가? 전통적으로 많은 주석가들과 학자들은 갈라디아서의 중심주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하였다: 바울은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자신이 다메섹에서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복음, 곧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이루신 구원 사건을 통하여, 할례나 모세의 율법 준수와 관계없이, 인종(人種, 유대인과 이방인), 신분(身分, 종과 주인), 성(性, 남자와 여자)의 차별 없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하신다는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열광적으로 받아 드림으로써 갈라디아교회들이 구성되었다. 그런 다음 바울은 떠났다. 바울이 갈라디아교회들을 떠난 다음 얼마 되지 않아 예루살렘교회 출신의 보수파 유대인 신자들(이하,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교회에 찾아와서,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보다는 열등한 자이며, 그가 전한 복음도 불완전한 복음이라고 하면서, 바울의 사도직과 복음을 훼손하고, 바울이 전한 복음과는 다른 복음을 전하였다(갈 1:7; 2:3-4; 3:1; 5:7-12; 6:12-13; 참고 행 15:1).
그들이 제시한 복음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으로는 갈라디아교인들이 유대인 신자들과 동등한 하나님의 언약백성과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될 수 없으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보충해서 언약백성들의 신분과 삶의 표지인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비로소 유대인 신자들처럼 참된 구원의 공동체, 곧 하나님의 언약백성과 아브라함의 자녀들이란 신분을 가질 수 있다. 갈라디아교인들은 유대주의자들의 이러한 주장에 미혹당하여 바울이 그들에게 전한 복음, 곧 인종과 신분과 성을 초월하여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만으로는 자신들의 구원과 신분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여, 유대주의자들이 요구한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받아드리고자 하였다. 이것은 사실상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전한 복음을 떠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하여 자신의 사도직과 복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며, 유대주의자들이 전한 거짓된 복음이 아닌 자신이 전한 복음을 통해서만이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과 구원을 누릴 수 있음을 강조하게 되었다.
갈라디아교회들 안에서 제기된 근본 문제를 이와 같이 주로 크리스천신분의 문제로 보고자 하는 사람들은 갈라디아서의 핵심적인 메시지 역시 이러한 신분의 문제로부터 찾으려한다. 이들은 갈라디아서를, 바울 사도가 유대주의자들에 의해 갈라디아 교회들 안에 제기된 크리스천신분에 관련된 문제를 듣고,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급히 쓴 편지로 본다. 이들이 볼 때, 갈라디아교회 안에 제기된 문제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고, 바로 바울 자신의 사도직과 그의 복음의 사활이 걸려있는 중대한 문제였고, 그의 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사건의 존폐가 달려있는 문제였다. 왜냐하면, 만일 할례와 모세의 율법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신분을 결정하는 구원과 의의 수단이라고 한다면,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고, 성령의 선물도 아무런 가치 없는 것이 될 것이고,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은 거짓된 사도가 될 것이고, 자신의 과거, 현재는 물론 미래의 모든 이방인 선교사역도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교회의 근본 문제를 크리스천 신분의 문제, 구원론 문제로 보는 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의 중요한 근거를 주로 갈라디아서에 대한 전통적인 3등분의 구조분석, 즉 1-2장의 바울의 자서전, 3-4장의 복음과 율법의 대조를 통한 이신칭의(the justification by faith)의 교리강조, 5-6장의 윤리적 권면에서 찾고,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갈라디아서 전체를 이해하려 한다. 이들은 갈라디아서 1-2장에 나타난 바울의 자서전의 주요 기능은,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와서 바울의 사도직과 그의 복음을 훼손하였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유대주의자들의 거짓된 주장에 대항하여 자신의 신적 사도성과 신적 복음을 변증하는데 있다고 본다.
이들은 갈라디아서의 중심부를 차지하면서 복음과 율법 문제를 취급하는 3-4장을 갈라디아서의 가장 핵심부분으로 보면서, 갈라디아 교회의 근본문제가 신분의 문제이며, 따라서 갈라디아서의 중심적인 메시지도 신분의 문제와 관련된 이신칭의의 구원(의/하나님의 백성)문제이라는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결정적인 근거로 삼는다. 즉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교회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대신 모세의 율법을 하나님의 언약백성과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되는 결정적인 조건으로 제시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갈라디아서 3-4장에서 이들의 주장에 반대하여,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크리스천의 신분/구원(의/하나님의 백성) 문제를 결정하는 수단임을 강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갈라디아교인들에 대한 윤리적인 권면을 담고 있는 5-6장이 3-4장의 내용과는 다르다는 점을 들어, 갈라디아서의 필수적인 부분이라기보다도 대게 일종의 부록으로 보고자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갈라디아서 3-4장에서 사실상 갈라디아 교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핵심적인 주장을 다 제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갈라디아 5-6장은, 이들의 입장에서 볼 때, 갈라디아 교회의 근본문제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파악하는데 있어서도, 별다른 중요성을 지니지 못한다.
갈라디아서에 관하여 전통적으로 많은 주석가들과 학자들이 생각해 온 이와 같은 주장들의 문제점은 없는가? 과연 갈라디아 교회의 근본 문제가 크리스천신분만의 문제이며, 따라서 갈라디아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도 신분 문제와 관련된 이신칭의 구원(의)론으로만 보아야하는가?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한 사람의 신분을 결정한다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갈라디아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로 보아야하는가? 갈라디아서에 대한 3등분의 구조 분석과 그 기능 할당이 정당하다고 보아야하는가? 1-2장에 나타난 바울의 자서전의 주요 기능은 과연 바울의 사도성과 복음의 신적 기원만을 옹호하는 변증적인 것이며, 갈라디아서 3-4장을 갈라디아 교회의 근본문제와 갈라디아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결정할 수 있는 중심부분으로 보아야하는가? 반면에 갈라디아서 5-6장은 사실상 부록에 해당하며, 따라서 갈라디아 교회 문제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갈라디아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없는가?
필자는 오랫동안 갈라디아서를 가르쳐 오면서 전통적인 갈라디아서의 3등분 구조 분석과, 그리고 이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신분/이신칭의/하나님의 백성의 가입 중심의 갈라디아서 이해에 적지 않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
첫째, 전통적인 입장은 갈라디아서는 편지를 보내는 바울 자신에 관하여 말하는 1-2장의 "I"(바울) 부분과,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들에 관하여 말하는 3-6장의 "You"(갈라디아 교인들) 부분의 뚜렷한 대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충분하게 설명해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전통적인 입장은 갈라디아서 5-6장의 핵심적인 단어인 “성령”과 “육”이 이미 3-4장에 등장하여(3:2,3,5,14; 4:6,29) 3-4장에 나타난 바울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결정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전통적인 입장은 갈라디아서의 5-6장의 전체 메시지를 이끌어 가는 “성령”과 “육”의 대조가 이미 3장의 서두(3:3)와 4장의 마지막(4:29)을 장식하면서 사실상 5-6장과 깊이 연결되어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점이다.
넷째, 갈라디아서 3-4장의 핵심단어 중의 하나인 “율법”이 무엇 때문에 5-6장에도(5:3,4,14,18,23; 6:2,13) 계속해서 나타나면서 5-6장의 논증을 이끌어가고 있는 점을 충분하게 설명해주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필자가 보기에 갈라디아서 3-4장과 5-6장의 중요 단어들과 중요 사상들이 상호 교차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현상에 대한 확인은, 3-4장과 5-6장은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서로 밀접하게 통일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1,2장, 3,4장, 5-6장의 3등분 구조보다 1-2장의 "I"와 3-4장의 "You"의 2등분 구조가 더 설득력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필자는 필자의 갈라디아서주석에서 소개하는 갈라디아서의 문학적 구조분석에서 보다 더 자세하게 제시하고 있지만, 고대 헬라의 수사학에 이미 이와 같은 “I", "You"의 2등분의 구조가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에 따르면, 상대방을 가장 효과적으로 권면하고 설득하기 위해서는, 연설가나 편지를 쓰는 사람이 가능 한한 상대방으로부터 신뢰를 받을 수 있는 자신의 ‘에도스’[성품, 혹은 인격]를 먼저 제시하여야하고, 그런 다음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패도스’[열정, 혹은 정서]를 제시하여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아리스토텔레스, Rhetoric, 1.ii, 3-5; 역시 Quitilian, Oratoria, IV.1.7).8)
갈라디아서의 “I"부분과 ”You"부분의 다리 역할을 하고 있는 안디옥 사건(2:11-21)도 갈라디아서의 2등분 구조분석에 근거한 갈라디아서이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미 알려진 대로 안디옥 사건은 “I"부분의 마지막에 있으면서 사실상 이 부분의 결론과 절정을 보여주고 있는 동시에 ”You"부분의 핵심적인 논제를 미리 보여주는 거울 역할을 하고 있다. 적지 않은 학자들이 안디옥 사건의 핵심을 여전히 신분의 문제로, 그리고 여기서 제시되는 바울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이신칭의로 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9)
그러나 안디옥 사건의 본문에 대한 자세한 검토는 안디옥사건의 핵심이, 베드로가 안디옥교회에서 이방인 신자들을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간주하지 않은 신분의 문제가 아니라, 오히려 베드로 자신이 믿고, 고백하고 가르치는, 그리고 바울과 예루살렘에서 합의하였던 그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동하지 않은 삶의 문제임을 보여준다. 베드로는 안디옥에서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일어나 자리를 떠남으로써,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없다는 복음의 진리에 역행하는 위선적인 행동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이방인 신자들로 하여금 억지로 유대인의 삶의 방식을 받아드리도록 하였기 때문이었다(2:13-14).
흔히 주석가들은 갈라디아서 2:16절의 이신칭의 본문을, 안디옥 사건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물론 갈라디아서 전체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가리키는 본문으로 삼으려고 하는데,10) 이것은 갈라디아서 2:15-21절의 본문이 베드로와 바울을 함께 묶는 15-17절의 “우리”본문과, 베드로를 배제하고 바울 자신의 삶의 자세를 강조하는 18-21절의 "나”본문으로 구분되고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주목하지 못한데 기인한다. 이신칭의 교리자체를 말할 때 바울은 베드로를 포함시키는 “우리”를 주어로 삼음으로써, 이신칭의 문제, 곧 신분의 문제에 있어서는 서로 일치하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2:15-17). 그런데 이신칭의에 따른 자신의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말할 때, 바울은 의도적으로 베드로를 배제하는 일인칭을 사용하여, 베드로의 실패가 신분 문제보다 삶의 문제임을 강조한다(2:18-20).
만일 갈라디아서 1-2장의 주요 기능이 단순히 바울의 사도직과 복음의 신적 특성을 변호하는 것으로만 끝나지 않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복음의 진리에 일치하여 살아가려고 하는 바울 자신의 ‘에도스’를 갈라디아 교인들의 ‘패도스’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모델과 패러다임의 역할에 있다고 한다면, 1-2장의 절정 부분인 안디옥 사건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다시 말하자면, 안디옥사건의 주요 기능은 베드로의 잘못된 행위를 부각시키려는데 주된 목적이 아니고, 바울과 베드로의 대조적인 삶을 통하여,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문제가 무엇이며, 그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모범적으로 보여주는데 있다. 안디옥 사건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는 안디옥 사건의 핵심적인 메시지가 신분의 문제와 연결된 이신칭의교리 자체가 아니라, 오히려 이신칭의 교리의 적용인 성령을 통해서 내 안에 살아 계시는 그리스도 중심의 삶임을 확인시켜준다.
물론 갈라디아서 3-4장은, 전통적으로 그렇게 주장되어 온 것처럼, 한 사람의 신분을 결정하는 것은, 율법이 아닌 믿음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하더라도, 갈라디아서 3-4장의 초점을, 어떻게 한 사람이 의롭게 될 수 있는가, 어떻게 이방인이 하나님의 언약백성과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만 보기는 어렵다. 3-4장에서 거듭 거듭 강조되고 있는 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은 유대주의자들이 요구한 율법의 행위 없이 바울의 복음을 통해서 이미 의롭게 되었고, 이미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되었으며, 이미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럼으로 비록 갈라디아 3-4장에서 크리스천 신분 문제가 거론된다고 하더라도, 이것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신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아서 이를 해결하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갈라디아 교인들이, 마치 안디옥에서 베드로의 경우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자신의 새로운 신분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하기 있기 때문에 이를 재강조하기 위함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점은 바울이 3:1절 이하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가리켜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부르면서, 그들이 성령으로 새로운 신분을 시작하였으면서도 성령으로 자신들의 삶을 성화시키지 않고, 오히려 육으로 마치려고 하느냐(3:3)하는 질문에서, 그리고 3-4장을, 성령을 따라 난 자유 한자와 육을 따라 난 종에 대한 대조로 종결하고 있는 점에서도(4:29-30) 확인된다. 갈라디아서 3-4장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는 결국 갈라디아서 3-4장은 갈라디아서의 중심부나, 혹은 5-6장으로부터 분리되는 독립된 부분이 아니라. 오히려 5-6장의 한 부분이며, 5-6장의 절정을 준비하는 부분인 것을 확인시켜 준다. 5-6장과 3-4장은 서로 불가분리의 관계로 결합되어 있지만, 5-6장이 3-4장을 위해 있다고 보기보다, 오히려 3-4장이 5-6장을 위해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될 경우 5-6장은 갈라디아서의 결론과 절정 부분에 해당하며, 따라서 갈라디아 교회의 근본 문제도, 갈라디아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도 신분 문제가 아니라 바로 삶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갈라디아서의 핵심적인 주제는 복음에 합당한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거룩한 삶, 곧 육에 따른 삶이 아닌 성령에 따른 삶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지금까지 말해온 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갈라디아교인들이 무엇 때문에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에 미혹을 당할 수 있었는가?11) 바울은 1:6절에서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쫒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라고 말하고 있는데, 왜 갈라디아교인들이, 비록 모든 갈라디아교인들이 아니고 일부이라고 할지라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떠나 유대주의자들이 전한 다른 복음을 쫒게 되었는가? 바울은 갈라디아 3:3절에서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어떻게 육체로 마치려 하느냐?”(역시 5:16; 6:8절 참조), 4:9절 이하에서 바울은 갈라디아교인들을 향하여,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되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 하느냐,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라고 말하고 있는데, 왜 갈라디아 교인들이 초등학문으로 되돌아가며, 유대인들의 절기를 지키려고 하였는가? 바울은 다시 갈라디아 5장 3절 이하에서 이들을 가리켜 “할례를 받는 자,”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 하는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왜 이들이 할례를 받고 율법 안에서 의롭다함을 얻으려하였는가?
갈라디아서를 전체적으로 일종의 성령에 대한 변증서로 보려고 하는 주석가 베츠(Betz)는, 갈라디아교인들이 유대주의자들의 유혹에 미혹을 당할 수 있었던 주된 이유는, 갈라디아교회 안에서 일어난 “육”(肉)의 문제, 곧 도덕적 무질서에 있었다고 가정한다. 베츠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갈라디아 교인들은 처음에 바울의 복음을 통하여, 곧 복음 안에서 역사 하는 성령을 통하여, 자신들이 이 세상의 초등 원리에 대한 예속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바울의 복음을 통하여 우상 숭배로부터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당대의 사회적인 커다란 장벽이었던 인종과 신분과 남녀의 장벽까지 해소되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갈 3:28절 참조). 그야말로 그들은 복음을 통하여 열광주의적인 기쁨을 누리게 되었고, 당대 사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인 장벽이 제거되고 자유의 물결이 넘치는 이상적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울이 그들 곁을 떠난 지 얼마 후에 초기의 열광주의가 식어지면서, 그들은 복음과 성령을 통하여 자신들에게 주어진 그 자유로부터 새로운 문제, 곧 육의 문제인 무질서와 도덕적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 육의 문제를 바울이 전해 준 자유의 복음과 그 복음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을 통하여 해결하지 못하고 고심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에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도착하였고, 그리고 그들이, 바울이 해결할 수 없었던 그 문제를 율법을 통하여 해결할 수 있다고 하자,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들의 가르침에 미혹 당하여 유대인의 할례와 율법을 통하여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들의 무도덕적인 문제를 할례와 율법을 수단으로 삼아 극복함으로써 구원의 높은 단계에 도달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베츠에 따르면, 갈라디아교회의 핵심적인 문제는 도덕법으로서의 율법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 논증하려하는 핵심적인 문제도 율법이 아닌 성령을 육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12)
또 하나의 다른 견해는, 갈라디아교인들의 사회적 정황으로부터 그 문제를 찾아보려하는 것이다. 이미 바클레이(J.M.G. Barclay)를 위시하여 몇몇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13) 갈라디아교인들은 바울의 복음을 받아드리면서 복음을 받아드리지 않은 기존의 소속 공동체로부터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소속 공동체로부터의 단절은 가족과, 친척, 친구, 이웃으로부터의 단절과 소외를 포함하였다. 다수 공동체로부터 단절을 당한 이 소수의 크리스천 공동체는 그들의 사회적 소외와 분리를 채워 줄 수 있는 다른 다수의 공동체와 문화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갈라디아교회에 찾아 온 유대주의자들과 그들이 소속한 유대인공동체와 문화는 갈라디아교인들의 이와 같은 사회적-종교적 소외를 채워줄 수 있는 대안으로 이해되었다고 보는 것이다. 게다가 유대주의자들이 요구한 할례와 율법 및 유대교의 절기 등은 갈라디아교인들이 바울의 복음을 받기 전 그들이 이교도 신앙에 있었을 때 익숙하였던 여러 가지 제의의식들과 유사하였다는 것이다.14) 즉 믿음 외에 그 어떤 종교행위 및 의식을 요구하지 않은 바울 복음을 처음에는 기쁨으로 받아들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의 이교도 신앙생활의 관습 때문에 인간 편에서 무엇을 할 만한 것이 없는가하고 아쉽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유대주의자들이 이러한 필요를 채워주었다는 것이다.15)
우리는 위의 두 가지 제안이 어느 정도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그리고 실제적으로 그런 요인이 작용할 수도 있었음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들이 갈라디아교인들이 유대주의자들의 유혹에 미혹을 당한 결정적인 이유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갈라디아 3:3절이 갈라디아 교인들이 유대주의자들의 유혹에 미혹을 당한 주된 이유를 밝혀주는 중요한 구절 중의 하나이라고 본다. 바울이 볼 때 갈라디아교인들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복음의 진리를 알지 못했거나, 혹은 복음의 진리를 받아드리지 못한 데 있지 않았다. 그들은 바울을 통해 복음의 진리를 받아 드렸다. 그들은 복음을 통해서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맛보았다. 그리고 복음을 통해서 성령의 능력에 대한 체험을 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바울을 천사처럼, 그리스도처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 그리스도의 복음이 자유와 동시에 십자가의 삶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성령은 단순히 열광주의적인 기쁨과 카리스마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전 삶을 사랑과 봉사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는 사실을, 바울이 전한 이신칭의의 복음은 “이미”뿐만 아니라 “아직”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는 종말론적인 것임을 충분하게 감지하지 못하였다.
요약하자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들에게 가져다주는 자신들의 신분과 삶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가지지 못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신분과 삶이 성령으로 시작할 뿐만 아니라 성령에 의해 계속 완성되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안디옥 사건에서 베드로가 그가 알고, 받아 드린 그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동하지 않았던 것처럼, 복음의 진리를 받아드렸으나 그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살지 못하였다. 그들은 성령을 받기는 하였으나 그 받은 성령을 따라 그리스도 십자가 중심의 삶을 바르게 살지 못하였다. 갈라디아 3:3절에서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그들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성령으로 완성에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육체로, 즉 유대주의자들이 요구하는 할례와 율법의 도움에 의해 완성에 이르려 하였다. 그들이 복음을 통해 해방되었던 세상의 초보 원리들과 육의 멍에들에 다시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리스도를 통해 허물었던 의식들과 장벽들을 다시 세우려 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안디옥 사건을 통해서, 특별히 안디옥 사건에 나타난 베드로와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문제를 보도록 하였고, 어떤 자의 길을 따라야함을 깨닫도록 하였다. 예수를 믿음으로 즉시 완전한 신분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으로 믿음을 쫒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자”(5:5)가 되어야함을 강조하였고, 그리고 옛 세계의 요소인 육의 길을 버리고 새 시대의 주인공인 성령의 길, 곧 성령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계속해서 성령으로 살아야할 것을 권면하였다.16) 이처럼 갈라디아서 전체의 통합적인 시각에서 볼 때, 갈라디아서의 핵심적인 주제는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에 가입할 수 있겠는가 하는 신분의 문제이라기보다도,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 수 있는가하는 삶의 문제이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할례와 율법/율법의 행위들을 거부한 것은 단순히 유대주의자들이 그들을 언약백성의 가입조건으로만 제시한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언약백성의 삶의 원리로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할례/율법/육을 따르지 말고, 오직 성령을 따라 그리스도 십자가 중심의 삶을 살도록 권면한 것이다.
(2) 로마서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로마서는 바울의 다른 편지와 달리 바울 자신이 직접 설립하지 않은 그리고 한 번도 방문한 적이 없는 교회에 보내진 편지이다. 직접 방문하지도 않은 크리스천들에게 보내는 편지이므로 바울은 길게, 그리고 신중하게 썼을 것이다. 바울이 살았던 고대 헬라-로마 사회에서 말과 글의 기술인 수사학(修辭學)이 매우 발달하였다는 점, 초등교육과 중등교육의 주된 내용이 수사학이었다는 점, 바울이 다소와 예루살렘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았다는 점은 그가 로마서를 쓸 때, 독자들에게 자신의 목적을 보다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도록 용의주도하게 구성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17)
로마서는 신약성경 중에서 가장 긴 서언(序言)(1:1-17)과 긴 결언(結言)(15:14-16:27)을 갖고 있다. 서언에 나오는 주요내용인 문안인사, 기도, 여행계획, 복음의 진술이 결언에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편지의 본론(Body)인 1:18-15:13절은 복음자체의 설명하는 직설법 부분과 (1:18-11:36)과 그 복음의 구체적인 적용을 말하는 명령법 부분(12:1-15:13)으로 양분되어 있다. 또한 1:18-11:36절이 보편적인 문제(1:18-8:39)와 특수한 이스라엘 문제(9:1-11:36)로 양분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12:1-15:13절도 보편적인 문제(12:1-13:14)와 로마교회의 유대인 크리스천과 이방인 크리스천사이의 특수한 문제(14:1-15:13)로 양분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로마서가 고도의 문학적 구상(構想)에 의해 구성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간주될 수 있다. 그럼으로 로마서의 문학적 구성에 대한 이해는 로마서를 듣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18)
바울이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로마교회에 편지를 썼다고 해서(1:13) 우리는 편지를 보내는 바울이나 편지를 받는 로마의 크리스천들이 서로 생면부지(生面不知)의 관계에 있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울은 로마의 크리스천들을 직접 방문하지는 않았지만, 그곳에 있는 가까운 사람들을 통해 로마의 크리스천들과 그들이 처한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적지 않게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로마서 16장에 언급되어 있는 많은 개인적인 문안인사의 대상들은 이 점을 충분히 가능하게 한다. 로마의 크리스천들도 이 점에서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다. 로마의 크리스천들도 바울과 친분관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혹은 로마를 방문하는 사람들로부터 바울에 관한 정보를,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듣고 있었을 것이다. 바울 자신도 로마서를 쓸 때 로마교회의 크리스천들이 자신과 자신의 활동에 관하여 그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로마서를 쓸 때 바울이 백지 상태에서 쓰지 않았다는 것을 뜻하고, 로마의 크리스천들도 바울의 편지를 들을 때 백지 상태에서 듣지 않았다는 것을 뜻한다. 오히려 편지를 보내는 발신자나 수신자 모두가 나름대로의 전이해(前理解)와 관점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바로 이점에서 우리가 로마서를 어떻게 들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로마서를 어떻게 들어야 바울과 로마의 크리스천들이 가지고 있었던 전이해와 관점을, 그리고 나아가서 로마서를 쓴 이유에 접근할 수 있는가? 먼저 지금까지 로마서 이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던 사람들이 로마서를 어떻게 읽고, 듣고, 이해하고, 가르치고, 설교하여 왔는가를 간단히 살펴본 다음, 로마서를 잘 듣고 이해할 수 있는 대안을 생각해 보자.
전통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로마서를 일종의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교과서(敎理敎科書)처럼 생각하고, 로마서를 통해서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를 찾거나 들으려고 하였다.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이 그랬다. 루터와 칼빈과 루터의 후계자인 멜랑톤(P. Melanchton)은 모두 로마서가 기독교의 핵심적인 구원교리를 가르치고 있다고 보았다. 그들이 로마서에 접근하면서 가졌던 핵심적인 질문은 “죄인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게 되고 구원받을 수 있느냐”는 구원론적인 문제였다. 로마서로부터 가졌던 일차적인 관심은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과의 수직적 관계 문제였다. 그들이 나와 너, 유대인과 이방인, 나와 이 세상 등의 수평적인 관계 문제를 전혀 등한시 하지는 않았지만 이들은 2차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의 근본 문제는 창조주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와 교제를 막고 있는 죄의 문제로 보았고, 이 죄의 문제가 수직적인 관계뿐만 아니라 모든 수평적인 관계 문제도 단절시키거나 왜곡시켰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종교 개혁자들이 로마서로부터 발견한 인간의 근본 해결책, 곧 죄인인 인간이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사람이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이신칭의 교리(以信稱義敎理)”였다. 인간이 죄로부터의 해방과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인간 자신의 어떤 노력이나 행위가 아닌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그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은혜로“(sola gratia)라는 구호를 내세운 것도 이 때문이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와 같은 “이신칭의 교리”의 관점에서 로마서를 읽고, 이해하고, 로마서에 대한 주석을 썼다. 그리고 그들이 발견한 이신칭의의 교리를, 한편으로 16세기의 로마 카톨릭교회를 비판하고 공격하는 무기로, 다른 한편으로 자신들의 정당성을 옹호하고 변호하는 방편으로 삼았다. 그들은 로마서에서 바울이 “사람이 율법 혹은 율법의 행위로부터 의롭다함을 얻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롬 3:21, 22, 28)고 주장하는 사실로부터, 자기 당대 로마 카톨릭교회의 지도자들이 구원의 조건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첨부하여 선행(善行), 이를테면 면죄부 구입을 요구하는 것을 반대할 수 있는 성경적 근거를 찾았다.
종교개혁자들의 눈에는 면죄부 구입 등 선행을 구원의 필수적인 조건으로 제시한 자기 당대 카톨릭교회의 사제들이, 바울 시대에 이방인크리스천들에게 유대교의 ‘율법’과 ‘율법의 행위’와 ‘할례’등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덧붙여 구원의 필수적인 조건으로 요구한 유대주의자들(참조 행 15:1)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1세기 유대주의자들에 대한 바울의 비판과 공격은 자신들이 16세기 로마 카톨릭 사제들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성경적 근거가 되었으며, 유대주의자들의 배후에 있다고 보았던 1세기의 유대교는, 16세기의 로마 캐토릭 교회처럼 행위-구원을 추구하는 율법주의적 종교로 이해되었다. 로마서로부터 기독교의 기본교리, 곧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게 되는가라는 기독교구원론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찾고 들으려고 하는 종교개혁자들의 구원론적-수직적 로마서 접근은 지금도 기독교 안에 로마서 접근에 대한 하나의 큰 흐름으로 남아있다.
20세기 영국이 낳은 최고의 설교자로서 한국에도 널리 알려진 로이드 존스(Martin Llyod Jones)의 로마서 접근도 이와 같은 종교개혁 전통의 노선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는 종교 개혁자들처럼 로마서가 “우리의 신앙의 위대한 중심 교리”를 가르치고 있으므로 기독교의 핵심 교리를 로마서에서 찾아 설교하려고 하였다. 14권의 방대한 그의 『로마서강해 설교집』은 각 권의 표제가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로마서로부터 기독교의 핵심적인 교리를 찾아 설교하고 있다. 로이드 존스는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의 복음 문제”를, 2:1-3:20절에서는 “죄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인간의 비참 문제”를, 3:21-4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속죄와 이신칭의 문제”를, 5장에서는 “구원의 보증 문제”를, 6장에서는 “새 사람, 곧 성화 문제”를, 7장에서는 “율법 문제”를, 8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신자의 신분과 궁극적인 보존 문제”를, 9장에서는 “하나님의 주권 문제”를, 10장에서는 “구원하는 믿음 문제”를, 11장에서는 “하나님의 영광 문제”를, 12-14장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이 세상 나라에서 사는 신자의 삶에 관한 문제”등을 찾아 설교하였다.
그의 『로마서강해 설교집』은 종교 개혁자들의 경우처럼, 인간과 관련된 기독교의 기본적인 구원교리, 죄, 율법, 하나님의 의, 믿음, 그리스도의 구속, 화해, 성화, 성령 안에서의 삶 등의 문제가 중점적으로 취급될 뿐, 로마서가 편지로서 간직하고 있는 바울 자신과 로마교회의 상황 문제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한다. 즉 로이드 존스의 로마서강해는 하나님과 인간의 수직적인 관계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 로마서가 1세기의 편지로서 담고 있는 현안의 문제들, 당시의 바울과 유대교와 유대인들과의 관계, 바울과 로마의 크리스천들과의 관계, 로마교회 내부의 유대인 크리스천들과 이방인 크리스천들과의 관계, 바울의 이방인 교회들과 예루살렘교회와의 관계 등 수평적이고 사회학적인 문제들은 거의 취급을 하지 않고 있다.
20세기에는 종교개혁 전통의 구원론적-수직적인 로마서 접근에 문제를 제기한 사람은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였다. 슈바이처는 아프리카 오지(奧地)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헌신적인 의료 봉사를 한 유명한 의사로 널리 알려졌지만, 그는 의사 이전에 유명한 바하 음악 전문가였고, 20세기 초 가장 뛰어난 신학자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역사적 예수 연구]19)라는 책에서, 당대에 풍미하고 있는 역사적 예수 연구, 곧 교회의 전통과 교리와 철학에 채색되지 않는 순수한 역사의 예수를 찾으려는 운동에 쇄기를 박은 사람이다. 슈바이처는 자기 앞서 200년 동안 수많은 학자들이 추구해 온 역사적 예수 연구는, 실상 1세기의 역사적 예수를 찾으려는 것이 아니라, 연구자들 자신들의 시대와 사상과 이념을 투영시켜 그들 자신의 예수를 만든 실패작에 불과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역사적 예수 연구를 원점으로 돌려서 역사적 예수는 유대교 전통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찾은 예수는 주후 1세기 유대교의 종말론적 전통에서 자란 유대인 예언자로서 하나님의 나라가 자기 당대에 도래하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십자가의 죽음을 자초하였다. 하지만 그가 기대하였던 하나님의 나라는 도래하지 않았다.
슈바이처는 자기 당대의 역사적 예수 연구의 방향을 전환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 『사도바울의 신비주의』20)라는 책을 통해 당대의 바울연구를, 특별히 로마서 접근의 큰 방향을 틀게 하였다. 슈바이처는 로마서로부터 무시간적(無時間的)인 기독교의 기본 진리를 찾으려고 한 종교개혁 전통의 로마서 접근은 근본적으로 무시간적인 원리를 추구하는 헬라사상의 영향 때문이라고 단정하였다. 그래서 그는 로마서를 헬라사상의 배경이 아닌 1세기 유대교의 종말사상 배경에서 보아야 할 것을 주장하였다. 슈바이처에 따르면 역사적 예수가 1세기의 유대인 종말론적 예언자였던 것처럼, 사도 바울 역시 1세기의 유대교에서 성장한 유대인 종말사상가인 동시에 복음 전도자였다. 따라서 로마서와 그의 서신들은 헬라적 전통이 아닌 그의 삶과 신앙의 자리인 유대교의 문맥에서 읽고 해석되어야 한다.
그는 『사도바울의 신비주의』에서 로마서를 종교 개혁자들처럼 ‘이신칭의’의 관점에서 볼 것이 아니라, 유대교 종말 사상의 배경에서 나온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연합’을 중심으로, 곧 크리스천은 세례와 성만찬을 통하여 그리스도와 신비적으로 연합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부활하였다는 종말론적-연대(連帶)적 사상으로 읽고 해석하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슈바이처는 이신칭의의 교리가 로마서의 1-4장에서 중요한 주제로 등장 할뿐, 5-8장에서는 오히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중심 주제로 등장하는 것을 실례로 들면서, “이신칭의”의 교리는 실제로 사도바울의 핵심적인 주제가 아니고, 다만 그가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지킬 것을 요구한 유대 주의자들을 대항하기 위해 선교 현장에서 만든 일종의 “논쟁 교리”(Kampflehre)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21) 하지만 슈바이처의 5-8장 중심의 이해는 1-4장은 물론 12-15장의 정당한 자리를 외면하는 것이 된다.22)
로마서를 수직적인 관점보다 수평적인 관점에서, 개인적 관점보다 공동체적 관점에서, 무시간적인 교리 중심에서 역사적인 문제 중심으로, 헬라적 배경보다 유대적 배경에서 보려는 슈바이처의 시도는 가능한 로마서를 그 자체가 가지고 역사적 문맥에서 보려는 멍크(J. Munck),23) 미니어(P. Minear)24)의 로마서 연구에 영향을 주었고, 스탕달(Stendhal), 센더스(Sanders), 던(Dunn), 라이트(Wright) 등에 의해 제창된 “새 관점의 바울 연구 운동”(“The New Perspective on Paul")으로 이어져 금세기 로마서 접근의 커다란 흐름으로 성장하였다.25)
스탕달은 1963년 『하바드대학 신학저널』에 “사도 바울과 서구 사회의 자기 반성적 양심” (“The Apostle Paul and the Introspective Conscience of the West”)이란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사도 바울의 주된 질문은, 서구 기독교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어거스틴과 루터가 제기한 일반적이고 무시간적인 질문인, “내가 어떻게 은혜로운 하나님을 발견할 수 있는가”가 하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유대인과 이방인이 어떻게 한 교회에서 함께 살 수 있는가?”라는 공동체적이며, 사회적이며, 선교-역사적 질문이었다고 주장하였다.26) 슈바이처가 그랬던 것처럼, 스탕달도 종교 개혁자들이 로마서의 중심 주제로 본 “이신칭의”교리는 바울 복음의 핵심에 속한 것이라기보다도, 오히려 바울의 이방인 선교 현장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동등성을 확보하기 위해 만들어진 2차적인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스탕달에 따르면, “이신칭의”교리도 그 본래의 자리를 찾아,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과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하는 개인적인 관점에서가 아니라, 공동체적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새 관점을 촉발시킨 센더스27)는 1977년 금세기 신학계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는『바울과 팔레스틴 유대교, Paul and Palestinian Judaism』28)라는 책을 출판하였다. 이 책에서 센더스는 주전(BC) 2세기부터 주후(AD) 2세기까지의 방대한 유대교 문헌을 검토하였다. 그 결과 그는 예수와 바울 시대의 유대교는, 어거스틴, 루터, 캘빈의 뒤를 있는 전통적인 기독교가 생각한 것처럼, 의(義)와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율법을 지켜 공로를 쌓아야하는 “율법주의적 종교”(legalism)가 아니라, 우리 기독교처럼 의와 구원의 근거를 인간의 행위에 두지 않고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에 두는 “은혜의 종교”임을 주장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수백 년 동안 자신을 우월한 “은혜의 종교”로, 반대로 유대교를 낮은 “행위의 종교”로 단정하여 “반 유대교 운동”을 조장하는 오류를 범해왔다.
센더스에 따르면, 구약의 출애굽 사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먼저 이스라엘 백성을 자신의 언약 백성으로 선택한 다음, 언약 백성의 신분을 유지할 수 있는 구별된 삶을 살 수 있도록, 그리고 범죄 할 경우 속죄할 수 있도록 율법을 주셨다. 이 율법에 대한 순종과 속죄와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 언약 백성 안에 머무는 자는 종국적인 구원을 얻게 된다. 따라서 유대인들에 있어서 선택과 종국적인 구원은 인간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의존한다. 센더스는 하나님의 선행적인 선택과 율법을 통한 언약 백성의 의무를 강조하는 유대교의 종교 시스템을 가리켜, “언약적 율법주의”(Covenantal Nomism)29)로 규정하였다. 그리고 유대교를 율법주의적 종교로 보는 전통적인 기독교의 주장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으며, 이와 같은 잘못된 전제 하에 이루어진 바울과 그의 서신의 기존 해석은 재검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센더스에 따르면 로마서의 중심주제는, 종교 개혁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죄인인 한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는가하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이방인들이 어떻게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에 참여할 수 있는가라는 사회적이고 공동체적 문제였다.30)
센더스는 로마서에 나타나 있는 바울의 율법과 유대교에 대한 비판은 실제적으로 역사적 비판이 아니라고 보았다. 바울 당대 유대인들이, 혹은 바울의 선교 현장에서 바울에게 도전해 왔던 유대주의자들이, 율법을 그리스도 대신 의와 구원의 수단으로, 즉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바울이 율법과 유대교를 비판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의 율법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역사적 판단이나 체험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신학적인 산물이다. 즉 바울 당대의 유대교가 율법의 행위를 구원의 수단으로 삼는 율법주의적 종교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울 자신이 다메섹 사건을 통하여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원이 있다는 사실을 체험하였기 때문에 유대교의 문제를 의식하였다. 다시 말하자면 바울은 유대교의 문제를 먼저 의식하고 그런 다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해결을 발견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다메섹 사건을 통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구원이 나타났다는 해결을 먼저 발견하고 유대교를 보았기 때문에 유대교의 문제를 의식하였다. 센더스는 “바울의 유대교에 대한 부정적인 비판은 유대교 자체가 나쁘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유대교가 기독교가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31) 그러므로 센더스에 따르면, 바울의 유대교와 율법에 대한 비판은 사실상 그리스도 밖에 있는 인간의 비참한 모습과 비참한 인간을 구원하는 유일한 길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는 신학적인 자기표현에 불과하다.32)
1982년 제임스 던은 “새 관점의 바울 연구”라는 논문을 통해 예수와 바울 당대의 유대교를 “율법주의적 종교”가 아닌 “언약적 율법주의”로 보는 센더스의 주장에 적극적인 동의를 하였다. 그는 센더스와 함께 1세기의 유대교가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전제 아래 그동안 잘못 이해한 유대교와 바울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운동을 “새 관점의 바울 연구”(the New Perspective on Paul)로 명명(命名)하며,33) 이 운동의 가장 열렬한 주창자가 되었다.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널리 소개된 그의 [로마서 주석]34)과 [바울신학]35)은 새 관점에 따른 바울 연구의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던에 따르면, 로마서에 나타나 있는 유대교와 율법의 비판은 실제로 유대교가 행위 구원을 추구하는 “율법주의”나 율법이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의와 구원의 수단으로 간주되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다. 다만 바울 당대 유대 민족의 정체성(Identity)의 표지 역할을 하고 있는 율법, 할례, 유대 음식법 등이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유대인과 이방인의 동등성을 방해하고, 마치 구원은 유대인들에만 있다는 우월적이고 배타적인 사상을 가져오기 때문이었다.36) 던에 따르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자주 등장하는 “율법에 대한 행위”는 구원을 얻기 위한 유대인들의 선행이 아니고, 이방인들에게 지킬 것을 요구한 유대교의 정체성의 표현들이며, 언약 백성으로서 율법에 대한 유대인들의 합당한 반응이다. 즉 율법의 행위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인들로부터 구별되게 하는 경계선의 표지들(the boundary markers)인 할례, 음식법, 절기 등을 뜻한다.
던에 따르면, 로마서 2:17-23절에 나타난 유대인들의 하나님 혹은 율법에 대한 “자랑”도 전통적으로 주장되어온 자기 신뢰나 자기-의에 대한 자랑이 아니라, 이방인들에 대한 유대인들의 언약적 특권에 대한 자랑을 가리킨다. 바울은 여기서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잘못된 종교적, 민족적 특권 의식을 비판하고 있다. 던은 로마서 9:30-10:4도 같은 전망에서 해석한다. 즉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의 율법에 대한 열심, 자기-의는 율법주의적 자세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의 언약적 백성으로서의 배타적인 민족적-종교적 특권과 신분을 유지하려는 열심을 가리킨다. 이처럼 던의 입장에서는 바울이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에서 “사람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주장할 때, 바울은 유대인들의 율법주의나 율법 자체를 공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사회적 기능, 자신들을 이방인들로부터 분리시키는 유대인들의 민족적, 사회적 특권의식, 정체성의 표지들을 비판하고 있다.
라이트 역시 1세기의 유대교가 율법주의가 아닌 언약적 율법주의라는 센더스의 주장에 전폭적인 동의를 한다. 그리고 바울이 로마서에서 반대한 ‘율법의 행위’나 ‘자기의 의’가 행위구원을 위한 공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민족적정체성과 언약적 삶을 지칭한다는 던의 입장에도 찬성을 한다. 이리하여 라이트는 이신칭의의 교리가 근본적으로 유대인들의 민족적 자랑을 비판하기 위한 논쟁교리라는 스탕달의 입장에 동조한다. 라이트는 센더스나 던처럼 16세기의 루터가 자기 당대의 상황을 1세기로 가져가서 1세기의 바울과 유대교를 왜곡시켰다고 본다. 따라서 루터와 그를 따르는 종교개혁적 전통에 의해 잘못 이해된 바울과 유대교는 마땅히 본래의 자리로 회복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라이트에 따르면, 바울 당대의 유대교는 결코 행위에 따른 의와 구원을 주장하는 율법주의적 종교가 아니었다. 바울과 그가 한 때 몸담았던 바리새파 유대인들은 다 같이 하나님의 선택과 하나님의 언약과 하나님의 은혜를 믿었다. 그리고 다 같이 그들은 행위에 따른 마지막 심판이 있을 것을 믿었다.
바울과 바리새파 유대인들과의 차이점이 있다면 바울은 은혜 구원을, 유대인들은 행위 구원을 주장하는데 있지 않다. 양자의 차이점은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과 은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자신들의 정체성의 기준으로 삼느냐에 있다. 바울과 바리새파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언약 백성이 된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하였지만, 무엇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기준이냐 하는 문제에 관한 의견을 달리했다. 유대인들에게는 토오라(율법)의 소유와 그것을 지키는 것이 자신들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정체성과 그것을 유지하는 수단이었다. 반면에 바울에게는 언약 백성으로서의 정체성과 그 유지는 예수에 대한 믿음, 곧 예수가 주이시며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음을 믿는 것이다. 바울이 당대의 유대인들과 율법을 비판한 근본 이유는, 전통적으로 주장되어 온 것처럼, 그들이 율법을 의와 구원을 가져오는 언약 백성에 들어가는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 아니라, 언약의 성취자인 예수 그리스도 대신 할례와 율법을 그들의 정체성과 그 유지의 수단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었다.
라이트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언약 백성으로 선택하여 부르시고, 율법을 주신 것은 이방인의 빛으로 삼아 복 주시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율법에 불순종함으로써 이방인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자가 되기보다, 오히려 그들 자신들이 문제가 되었다(롬 2:17-29). 자신들의 죄 때문에 이방인의 빛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심판 아래, 곧 하나님의 언약적 저주인 바벨론의 포로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범죄 때문에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의 언약 자체가 위기에 처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저주 문제를 인식하기는커녕, 율법의 소유, 안식일, 할례, 음식법 등 민족적, 인종적 정체성의 표현에 불과한 것들을 자랑하였다. 그러나 이스라엘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 자체가 무효화될 수 없다.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은 지켜져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이스라엘 백성의 대변자로 보내셨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을 순종으로 바꾸시고, 자신의 의를 들어내셨다. 곧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은 물론 전 피조 세계의 죄 문제를 해결하심으로써 자신의 언약적 신실성을 나타내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죄와 저주와 추방 문제를 해결함으로써 이스라엘 백성들의 숙원이었던 진정한 귀환과 해방이 이루어졌고,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 백성이 할 수 없었던 이방인의 빛이 되었으며, 그를 통하여 언약적 축복이 이방인에게 전달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더 이상 모세의 율법과 율법의 행위와 할례 등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종적, 민족적 정체성과 경계선의 표징들이 언약 백성의 기준이 될 수 없다.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자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는 새로운 기준으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라이트에 따르면, 사도 바울이 모세의 율법, 할례, 율법의 행위 등을 비판한 것은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행위 구원을 가져오는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스도 이후 더 이상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기준이 될 수 없는 그것들을 여전히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기준으로 내세워 그리스도 안에서 마련된 유대인과 이방인의 하나 됨을 방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37)
지금까지 우리는 로마서 접근에 대한 중요한 두 흐름, 곧 전통적인 수직적 접근과 새 관점의 수평적 접근을 살펴보았다. 전자는 로마서를 통하여 기독교의 기본적인 교리, 곧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죄 문제를 해결하고 구원에 이를 수 있는가라는 개인의 구원론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고, 후자는 유대인과 이방인이 어떻게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하나가 될 수 있는가라는 공동체적이고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다. 전자는 모세의 율법, 율법의 행위는 물론, 이를 추구하는 유대인들에 대한 바울의 부정적 평가와 비판을 가능한 한 더 많이 부각시킨다. 반면에 후자는 모세의 율법과 할례, 율법의 행위는 물론 유대인들에 대한 바울의 긍정적인 접근을 가능한 한 더 많이 부각시킨다. 전자의 입장 중에는 바울 당대의 유대교가 율법의 행위를 통하여 의와 구원에 도달하려고 하는 율법주의적 종교로 보려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후자의 입장은 바울 당대의 유대교가 기독교처럼 똑같이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을 강조하는 은혜의 종교로 보려는 사람이 많다. 후자의 입장 중에는 심지어 바울이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유대인들을 옹호하기 위해서 로마서를 썼다고 보는 자들도 있다. 즉 바울이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있어서 유대인의 우선권과 유대인의 민족적 구원과 이방인 크리스천들이 영적으로 유대인에 빚을 지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 로마서를 썼다는 것이다.38) 하지만 지나치게 유대적 시각에서 로마서를 보려는 경향과 반동으로 지나치게 이방인 중심의 시각에서 로마서를 보려는 움직임도 있다.39)
우리는 이제 로마서를 어떻게 접근하고 읽고, 들어야 하는가? 종교 개혁자들처럼 수직적이고 개인 중심적인 관점에서 로마서를 접근하여야 하는가? 아니면 새 관점의 주장처럼 언약적 율법주의와 수평적이고 공동체이며 사회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하여야 하는가? 앞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로마서는 구약의 십계명처럼 하나님께서 직접 돌비나 양피지에 써서 우리에게 주신 초역사적인 교리책이 아니다. 로마서의 내용이 아무리 시대와 공간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갖고 있더라도, 로마서는 분명히 바울이 로마의 크리스천들에게 보낸 편지이다. 편지이기 때문에 로마서는 저자와 독자의 역사적 정황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로마서는 분명히 로마서가 갖고 있는 역사적 문맥에서 접근되어야한다. 그런 점에서 로마서를 1세기 로마의 크리스천 공동체는 물론 초기 기독교전체의 가장 중요한 이슈였던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점에서 보아야 함을 강조한 새 관점의 주장은 상당한 타당성과 설득력을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로마서를 유대인과 이방인의 수평적인 관점에서만 보아야 하는가? 바울은 과연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문제를 해결하게 위해서 로마서를 썼는가? 로마서와 관련하여 우리가 아무리 유대인과 이방인의 수평적인 문제를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항상 잊지 않아야 할 사실은 로마서가 근본적으로 다루고 있는 문제는 창조주 하나님과 그의 피조물인 인간,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와 죄인인 인간이란 사실이다. 다시 말하자면 로마서를 통해서 전달되는 핵심적인 메시지는 시대와 공간과 문화를 뛰어넘어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신 구원/의를 필요로 하는 전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복음의 선포라는 사실이다. 사실상 로마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인간과 이 세상의 근본 문제인 죄와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근본적인 해결책인 그의 구원과 주권 회복을 선포하고 있다.40) 이점과 관련하여 주석가 무(Moo)의 지적은 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
“로마서 전체가 초점을 맞추고 있는 주제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개별적으로 자신과 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하기 위해(1-4장), 그에게 영광스러운 영생을 제공하기 위해(5-8장), 그리고 그의 삶을 이 땅에서 새롭게 변하시키기 위해(12-16장) 그리스도 안에서 어떻게 사역하셨는가에 있다.”41)
따라서 우리는 로마서를 접근할 때마다 하나님과 인간과 세상의 수직적 관점은 물론 인간과 이 세상의 수평적인 관점도 항상 함께 고려하여야 한다. 로마서가 갖고 있는 양면성은 전통적인 수직적-개인 구원론 시각이든 새 관점의 수평적-공동체적인 시각이든 한 면만으로 로마서를 보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오히려 로마서를 바르게 듣기 위해서는 양면을 상호보완적으로 활용하여야 할 것을 가르쳐준다. 따라서 전통적인 시각은 새 관점의 시각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새 관점은 전통적인 시각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42)
만일 우리가 새 관점의 주장처럼 로마서가 단순히 1세기의 유대인과 이방인의 동등성 문제만을 중점적으로 말한다고 본다면 로마서가 사회윤리나 사회학의 교본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인간의 근본 문제와 그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복음의 의미는 무색해질 수 있다. 반면에 로마서를 지나치게 교리 중심으로만 접근한다면 로마서가 시대성과 역사성이 결여된 추상적인 메시지만을 말한다는 비난을 받을 수 있다.43) 십자가는 수직과 수평의 양면을 가지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의 양면을 가지고 있다. 양자는 결코 서로 분리될 수 없다. 양면을 함께 보아야만 십자가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은 올바르게 설명될 수 있다. 로마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수직과 수평, 개인과 공동체의 양면을 함께 보고, 상호 보완할 때 로마서는 우리의 귀에 바르게 들여질 수 있다.
그렇다면 바울이 로마서를 통하여 제시하고자 하는 중심 주제가 무엇인가? 로마서의 중심 주제가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조건과 잘 부합하여야 할 것이다. 첫째,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제시하고 있는 여러 가지 내용을 전체적으로 통일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둘째, 로마서의 어떤 특정한 부분에 한정된 주제가 아니라 로마서 서신 전체를 통해서 일관성 있고 지속적으로 제시된 주제이어야 한다. 셋째, 바울이 로마서를 쓴 목적과 잘 부합하여야한다. 이런 조건에 부응하고 있는 중심 주제가 무엇이며, 그것이 로마서의 전체적인 구조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바울이 서문(1:1-17)과 결언(15:14-16:27) 부분에서 로마서를 거듭 “복음”(eujaggevlion)과 연결시키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서문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택하심을 받았으며”(1:2)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전하기를 원한다”(1:15)며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1:16).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다“(1:16). “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1:17)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결언 부분에서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하사“, ”내가 예루살렘으로부터 두루 행하여 일루리곤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을 편만하게 전하였노라. 또 내가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곳에는 복음을 전하지 않기를 힘썼노니“(15:19-20),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16:25),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하게 하실 지혜로운 하나님“(15:26)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바울은 로마서를 서언 부분과 그리고 로마서를 마감하는 결언 부분에서도 반복적으로 ”복음“이란 말을 로마서를 대변하는 표제로 삼고 있다. 이것은 사실상 바울이 로마서를 복음을 설명하고 전하기 위해 썼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44) 그렇다면 바울이 로마서를 통하여 제시하는 ”복음“이 무엇인가? ”복음“이 로마서의 표제라면, 복음의 내용인 로마서의 중심 주제가 무엇인가? 왜냐하면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로마서만의 표제가 아니라 그의 모든 서신의 표제이기도하며, 신약의 다른 저자, 예를 들면 마가복음서 저자도 ”복음“을 그의 표제로 삼고 있기 때문(막 1:1)이다.
바울은 로마서의 주제 구절로 불리어지는 1:16-17절에서 “복음은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며, 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부터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말하고 있다. 즉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기 때문에 이 복음을 믿는 자에게는 복음이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인종과 신분에 관계없이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3:21절 이하에서 이 복음을 설명하여 이것은 율법과 관계없이 나타난 하나님의 의임을 선언한 다음, 3:22절 이하에서는 이 하나님의 의를 인종과 신분을 초월하여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받게 되는 이신칭의의 의임을 천명한다. 이처럼 바울은 로마서에서 “복음”을 이신칭의와 밀접하게 연결시킨다. 종교개혁자들을 위시하여 많은 주석가들이 하나님의 의, 곧 이신칭의의 복음을 로마서의 중심주제로 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다면 복음의 중심 내용인 “의”, 곧 ‘이신칭의’(以信稱義)가 로마서 전체의 내용을 통합시키는 중심주제로 볼 수 있는 근거가 있는가? 바울이 로마서에서 율법과 그토록 강하게 대조시키고 있는 ‘은혜’나 그렇게 자주 나오는 ‘믿음’, 혹은 ‘구원’이나, 혹은 ‘그리스도에게로의 참여’등을 로마서의 중심주제로 볼 수 없는가?
데이터와 그 분석
우리가 ‘이신칭의’(以信稱義)를 로마서의 가장 중요한 중심주제로 볼 수 있는 점은 우선 이신칭의와 관련하여 로마서에 여러 번 나타나고 있는 어휘들, 이를테면, ‘의’(義) 어휘군인 ‘의롭게 하다’(dikaiovw), ‘의’(dikaiosuvnh), ‘의로운’(divkaio"), ‘의롭다함’(dikaivwma), ‘의롭다하심’(dikaivwsi")과, ‘믿음’ 어휘군인 ‘믿음’(pivsti"), ‘믿는다’(pisteuvw)와 그리고 이신칭의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는 율법 어휘군인 ‘율법’(novmo"), ‘율법의 행위’(e[rgwn novmou) 등이 아래의 도표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여러 바울 서신 중에서 유독하게 로마서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①의(義) 어휘군
의롭게하다(dikaiovw) 의(dikaiosuvnh) 의로운(divkaio") 의롭게함(dikaivwma) 의롭다하심(dikaivwsi")
고전 2 1 0 0 0
고후 8 7 0 0 0
갈 0 4 1 0 0
엡 0 3 1 0 0
빌 0 4 2 0 0
골 0 4 2 0 0
살전 0 0 0 0 0
살후 0 0 2 0 0
딤전 1 1 1 0 0
딤후 0 3 1 0 0
딛 1 1 1 0 0
빌몬 0 0 0 0 050)
②믿음과 율법 어휘군
믿음(pivsti") 믿다(pisteuvw) 율법(novmo") 율법의 행위(e[rgwn novmou)
고전 7 9 9 0
고후 7 2 0 0
갈 22 4 32 655)
엡 8 2 1 0
빌 5 1 3 0
골 5 0 0 0
살전 8 5 0 0
살후 5 4 0 0
딤전 19 3 2 0
딤후 8 1 0 0
딛 6 2 0 0
빌몬 2 0 0 0
위의 도표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로마서에는 바울의 다른 서신들과는 도무지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이신칭의’와 관련된 어휘들인 ‘의’, ‘믿음’, ‘율법’ 용어들이 많이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은 로마서의 주제가 이러한 어휘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신칭의’와 관련된 이들 어휘들이 로마서에서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로마서의 중심 주제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우리가 이들 어휘들의 용법과 이들 어휘들이 나타나고 있는 문맥을 조사해 보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들을 발견할 수 있다.
①동사 ‘의롭게 하다’(dikaiovw)의 경우 항상 하나님이 동사의 행동을 이루어 가시는 주체로 소개되고 있다. 그 이유는 동사가 능동태로 사용될 경우에는 항상 하나님이 동사의 직접적인 주어로 나타나고 있으며(3:26,30; 4:5; 8:30,33), 수동태로 사용될 경우에는 항상 하나님의 행동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신적 수동태 형식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2:13; 3:4,20,24,28; 4:2; 5:1,9; 6:7; 8:30).56) 명사 ‘의’(dikaiosuvnh)의 용법에서도 ‘의’의 신적 특성이 강하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34번의 명사 용법 중에서 5번의 경우에 이 의‘가 ’하나님의 의‘로(1:17; 3:5, 21,22; 10:3), 2번의 경우에 하나님을 가리키는 인칭대명사와 함께 ’그의 의‘(3:25,26)로 표기되어 있고, 5번의 경우에는 이 ’의‘가 하나님의 행동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는 신적 수동태 동사와 함께 사용되고 있다. 이것은 로마서에서 ’의‘는, 그것을 우리가 하나님의 법적인 선언으로 보든,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선물로 간주하든, 혹은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로 이해하든, 혹은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의 행위로 받아들이든, 혹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구원행위로 보든 우선적으로 그것은 인간의 사역이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사역임을 강조하고 있다.57)
②동사 ‘의롭게 하다’(dikaiovw)나 명사 ‘의’(dikaiosuvnh)가 많은 경우에 인간의 어떤 응답이나 행동을 반영하고 있는 동사 ‘믿다’(pisteuvw)나, 명사 ‘믿음’(pivsti")과 함께 사용되고 있다. 즉 ‘믿음’ 혹은 ‘믿는다’가 하나님께서 인간을 의롭게 하거나 혹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의를 주시는 통로로, 혹은 인간이 하나님의 의를 받는 수단으로 제시되고 있다. 예를 들면 동사 ‘의롭게 하다’는 5번의 경우 명사 ‘믿음’과 함께(3:26,28,30; 4:5; 5:1), 1번의 경우 동사 ‘믿는다’와 함께 사용되고 있고(3:26), 명사 ‘의’는 10번의 경우 명사 ‘믿음’과 함께(1:17; 3:22,25,26; 4:5,9,11,13; 9:30; 10:6), 7번의 경우 동사 ‘믿는다’와 함께 사용되고 있다(1:16-17; 3:22; 4:3,5,11; 10:4,10). 로마서에서 ‘의’가 명사든 동사든 자주 동사 ‘믿는다’나 혹은 명사 ‘믿음’과 함께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적어도 로마서에서 강조되고 있는 ‘의’는 믿음과 서로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58) 말하자면 하나님의 사역인 의는 우리의 믿음을 매개체로 하여 우리 안에서 역사한다는 것이다.
③특히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의 문제를 중점적으로 설명하고 있는 3:20-31절에서 의와 믿음은 서로 제휴관계를 가지고 있는 반면에, 의와 율법은 이와 대조적으로 서로 반위관계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면, 3:20절은 “율법의 행위로는 그 누구도 의롭다 여김을 받을 수 없다”, 3:21절은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다”, 그리고 3:28절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다”고 하면서, 율법은 결단코 의를 위한, 혹은 의에 도달하는 수단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이와 반면에, 3:22절은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의이다”, 3:26절은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3:28절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 3:30절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다”고 하면서 믿음이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혹은 하나님의 의를 받는 수단임을 강조한다. “의”가 믿음과는 긍정적인 관계로, “율법”/“율법의 행위”와는 부정적인 관계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은 율법, 혹은 율법의 행위는 결코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이처럼 바울의 어느 서신에서보다도 로마서에서 ‘이신칭의’와 관련된 ‘의’, ‘믿음’, ‘율법’등이 많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이신칭의’가 사실상 로마서의 중심 주제임을 강하게 시사해준다. 그리고 로마서에서 ‘의’ 어휘들이 많은 경우에 하나님과 함께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 ‘의’가 신적 기원이나 혹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역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 ‘의’ 어휘들이 같은 문맥에서 인간의 행위를 요구하는 율법과는 부정적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반면에 하나님의 은혜로운 사역에 대한 신뢰와 수용을 요구하는 믿음과는 긍정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점은 신적인 의가 인간을 위해 마련되었으며, 그리고 이 의가 그리스도를 믿는 인간에게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며, 인간 안에서 믿음을 통해 작용하는 의임을 강조해준다.59) 이처럼 로마서에서 의가 한편으로 신적인 강조를, 또 다른 한편으로 믿음을 함께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이신칭의’를 로마서의 중심 주제로 볼 수 있는 성경적 근거가 된다.60)
‘이신칭의’의 의미
그렇다면 로마서에서 ‘이신칭의’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로마서에서 ‘이신칭의’가 무엇을 뜻하고 있는가를 추적하기 위해서는 먼저 ‘의’ 혹은 ‘의로운’, ‘의롭게 하다’가 로마서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61) 로마서에서 ‘의’가 종종 속격인 ‘하나님의’나 하나님을 지칭하는 인칭소유대명사 ‘그의’와 함께 사용되고 있다는 점, ‘의’가 하나님의 행동하심을 간접적으로 강조하는 신적인 수동태와 함께 사용되고 있는 점, ‘의롭게 하다’의 동사가 신적인 수동태나 하나님을 직접 주어로 가진 능동태 동사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로마서에서 ‘의’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유래되었거나, 하나님에게 소속되어 있거나, 혹은 하나님에 의해 결정되었거나, 혹은 하나님이 이루시는 것임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자면, 로마서에서 의는 우선적으로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올바른 관계 유지에서 이루어지는 사회적인 의나, 하나님이 인간에게 지킬 것을 요구하는 율법/율법의 행위를 인간이 준행함으로써 인간이 하나님 앞에 가지는 율법적 의를 가리키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62) 오히려 하나님께서 먼저 인간과 더불어 맺은 언약관계를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 성실하게 유지함으로써, 죄인인 인간을 구원하시고, 보존하시고, 그리고 그의 모든 피조세계를 회복하시는 하나님 중심의 구원론적이고, 종말론적이며, 언약적인 의를 가리킨다는 것이다.63) 로마서 1:16-17절에서 하나님의 의를 구원의 능력과 연결시키고 있는 점이라든지, 로마서 3:23절에서 먼저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모든 사람의 죄인 됨을 지적한 다음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통한 하나님의 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 이점을 분명히 한다.64)
이처럼 로마서에서 이신칭의는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임을 보여준다. 바울이 이신칭의의 내용이 들어있는 복음을 그의 서문과 결언에서 거듭 거듭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부르고 있는 사실도 이 점을 뒷받침 해 주고 있다. 이신칭의가 전폭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점은 우리가 로마서를 죄인인 인간이 어떻게 의롭게 될 것인가 하는 인간 개인의 구원론적인, 혹은 실존적인 관점에서 접근하기보다도 오히려 하나님께서 전 인류와 그의 피조물을 구원시키고 회복시키기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하는 하나님중심의 관점, 곧 하나님의 언약적이거나, 구원역사적이거나, 종말론적 관점에서 접근하는 것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그런데 문제는 ‘이신칭의’를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자에게 은혜로 주시거나 예수를 믿는 신자에게 돌리는 하나님의 법적인 선언이나 혹은 신자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은혜로운 구원의 선물로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 자신의 의롭게 하는 구원행위 그 자체와 관련하여 이해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어떤 주석가들은 종교개혁자들을 따라 ‘의’를 인간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믿는 예수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선언하는 법정적인 의나 혹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신 의를 예수 믿는 자에게 주는 선물로서의 의로 보고자한다.65) 이들은 로마서에서 ‘의’가 자주 ‘믿음’의 어휘들과 함께 사용되고 있음을 주목한다. 반면에 다른 어떤 주석가들은 이 ‘의’를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신실한 구원행위 혹은 언약의 성취인 창조적 구원행위로 보고자 한다.66) 이들은 로마서에서 이 ‘의’가 자주 하나님과 속격관계로 나타나고 있는 점과, 이 ‘의’가 하나님의 행동을 강조하는 신적수동태와 함께 사용되고 있는 점에 주목한다.67) 우리가 볼 때 전자는 후자의 주장에 약점이 되고 있으며, 후자는 전자의 주장에 약점이 된다.68)
로마서에서 의가 전자와 후자의 문맥에 꼭 같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은 로마서에서 의는 어느 한쪽에 치우쳐서 이해되어서는 아니 됨을 보여준다. 로마서에서 의는, 마치 성경에서 성령이 하나님/그리스도로부터 주어지는 선물인 동시에 하나님/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백성 가운데 거하시는 신적 활동과 임재의 근원인 것처럼,69)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의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인간에게 전가(轉嫁)하거나 혹은 선물로 제공하는 의인 동시에,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에 신실하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인간과 그의 피조세계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행위, 혹은 종말론적인 주권회복으로서의 의이기도 하다.70)
①로마서에서 의가 이와 같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로마서의 주제 구절로 간주되고 있는 1:16-17절에서 확인된다. 바울은 1:16절에서 복음을 가리켜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구분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는 구원을 가져다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그런 다음 17절에서 왜 복음이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느냐 하는 문제가 관련하여, 복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바울이 주제 구절에서 제시하고 있는 “복음=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하나님의 의=나타나고 있음(현재시제)”의 도식은 하나님의 의를 단순히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선물이나 혹은 법적인 선언으로만 볼 수 없게 한다. 오히려 ‘의’를 복음을 통하여, 복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계속하여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자신의 역동적인 신실하신 구원사역으로 보게 한다.71) 그러나 동시에 주제 구절에서 바울이 4번이나 ‘믿음’ 어휘를 사용하여 이 ‘의’를 사람들 편에서의 응답인 믿음과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는 점은 복음이 그 자체 하나님의 능력이며,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계시되고 있다 할지라도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구원이 실제로 그들에게 주어질 수 없고, 하나님의 의가 그들 안에서 실제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하나님의 의는 믿음을 통하여, 믿음이 있는 곳에 역사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②의의 이러한 양면성은 바울 복음의 심장으로 불리어지는 3:21-31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다.72) 3:21절에서 바울은 율법과 관계없이, 그러나 율법과 선지자들, 곧 구약성경으로부터 증거를 받고 있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다고 선언한다.73) 즉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먼저 주신 율법을 통한 의가 실패하자 그 대신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의를 차선책으로 주셨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처음부터 율법과 관계없는 의를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시고, 이 언약적 의를 모세와 선지자들을 통해 계속하여 확인하셨다. 마침내 이 언약적 의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실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울은 3:24-26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속죄적, 화목적 죽음을 통해서 이루신 하나님의 의를 말하면서 항상 하나님을 동사의 주어로 삼고 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의 의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언약 아래에 있었던 이스라엘백성들과 지금 예수 믿는 자들을 의롭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구속과 속죄와 화목제물로 세우셨다는 것과,74) 그리고 지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값없이 의롭게 하신다고 말한다.75) 하나님의 의를 우선적으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 자신의 사역으로 보아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3:21-26절에서 거듭 거듭 이 ‘의’를 믿음과 연결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3:22, 25, 26), 3:27-31절에서도 4번이나 ‘믿음’이란 어휘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신실하신 의가 우리의 믿음과 분리되어, 혹은 믿음과 관계없이 우리에게 작용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③의의 양면성은 4장에 나타난 아브라함의 믿음과 의에 대한 서술에서 보다 더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바울은 4장에서 의가 인간의 행위(혹은 율법의 행위)에 의존하지 않고 믿음에 의존하고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아브라함을 의롭게 하셨는가를 설명한다. 바울은 세 번이나 “아브라함이 하나님(혹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 여겨셨다”(4:3, 9, 22)라고 말한다. 우리가 여기서 의와 관련된 동사 ‘여긴다’(ejlogivsqh)가 하나님의 행동을 강조하는 신적 수동태로 사용되고 있는 점을 보아 의의 원천이 아브라함의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행동에 있음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거듭 거듭 아브라함의 믿음을 하나님의 행위 하심과 그 행위 하심의 결과가 아브라함에게 미치는 근거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의를 믿음과 결코 분리시키거나, 믿음을 이 의와 분리시켜 말 할 수 없다. 오히려 이 의는 믿음을 산출하고, 그 믿음을 수단으로 하여, 믿음 안에서, 믿음과 더불어 작용하는 역동적인 의로 볼 수 있다.76) 바울이 4장에서 두 번(4:11, 13)이나 이 의를 “믿음의 의”(dikaiosuvnh" pivstew")라고 부르고 있는 점도 이를 뒷받침해준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믿음이 의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의가 인간의 믿음을 산출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바울이 의를 성령과 연결시키고 있는 사실이(고전 6:11) 이 점을 확인시켜 준다.
④이와 같은 의의 양면성의 문제는 바울이 이스라엘백성의 구원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는 9-11장에서 다시 나타난다.77) 바울은 10:3절에서 이방인들이 받은 의를 두 번이나 이스라엘백성들이 율법을 통하여 추구하려는 “자기의 의”와 대조하여 “하나님의 의”라고 부름으로써 의가 우선적으로 하나님의 행위임을 강조한다. 그러나 동시에 전자를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th;n dikaiosuvnhn th;n ejk tou" novmou)로(10:5; 참고 9:31), 후자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hJ de; ejk pivstew" dikaiosuvnh)로(9:30; 10:6)라고 부름으로써 하나님의 의는 믿음과 떠나서 주어지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
이처럼 로마서에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인 동시에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인간의 책임적인 응답인 믿음을 매개체로 하여 우리 안에 역사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의=하나님의 사역+인간의 사역(믿음)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울이 아무리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인간의 책임적인 응답인 믿음을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이신칭의를, 혹은 바울의 구원론을 신인협력설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바울이 거듭해서 의가 율법, 혹은 율법의 행위로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신칭의에 있어서 인간의 공헌이나 자리를 배제하고 있다. 이신칭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다. 사실상 믿음이 하나님의 약속이나 복음의 선포와 동떨어져 일어날 수 없다고 하는 점은 믿음도 인간자력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임을 일깨워준다. 믿음을 공로나 행위로 간주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신칭의’의 근거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우리가 로마서에서 “의”를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신 행위의 관점에서 보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법적인 선언이나 은혜의 선물로서 보든 이 ‘의’를 실제로 가능하게 하는 근거, 혹은 의의 방편이 되는 믿음의 기반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언약적, 종말론적인 의를 이루기 위하여 우리의 역사 안에서 마련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적/화목적 죽음이다.
①바울은 로마서 1:1절에서 자신이 사도로서 전파하여야 하는 복음이 “하나님의 복음”임을 천명한 다음, 바로 이어 2절에서 이 복음은 성경의 약속에 따라 육신으로 오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9절에서 이 복음을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이라고 부른다. 그런 다음 주제 구절인 1:16-17절에서 이 아들의 복음이 믿는 모든 자에게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능력임과 이 아들의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②이와 같은 로마서 1장의 내용은 로마서 3:21-26절과, 4:25절, 5:6-21절, 10:4절에서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된다. 첫째, 로마서 3:21-26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적/화목적 죽음이 바로 하나님 자신의 언약적 의의 나타내심임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이 의로우시고,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게 하는 하나님의 신실하신 언약적 의가 실현되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의의 나타나심이라고 하는 점이 우리가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신실하신 행위는 물론 인간의 행위가 전적으로 배제되는 믿음을 통하여 주어지는 법정적인 선언, 혹은 은혜의 선물로, 혹은 하나님의 구원활동으로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5:17절 참조).78) 둘째, 4:25절에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의 의의 근거가 됨을 다시 확인한다. 셋째, 5:6-21절에서 바울은 한 사람 아담의 불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 같이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순종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하심을 얻게 되었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5:9절 참조)이 하나님의 의의 근거가 됨을 강조한다. 넷째, 10:4절의 “그리스도는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하나님의 의의 완성임을 밝힌다.79)
義의 수단으로서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이미 앞에서 지적한대로 바울은 로마서에서 여러 번에 걸쳐서 의 어휘들을 믿음 어휘군과는 긍정적인 관계로, 반면에 율법 어휘들과는 부정적인 관계로 설정한다. 아마도 이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실례는 로마서의 사실상의 주제문단으로 볼 수 있는 3:20-28절의 본문일 것이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마련한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는 수단은 ‘율법의 행위’로 부터(ejx e[rgwn novmou)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dia; pivstew" Ἰhsou Cristou)되었음을 거듭 강조한다.80) 의에 도달하는 수단과 관련하여 서로 대칭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율법의 행위’(ejx e[rgwn novmou)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dia; pivstew" Ἰhsou Cristou)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 할 것인가?
전통적으로 학자들은 행위와 율법,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속격관계를 다 같이 목적 속격관계로 이해하여, ‘율법의 행위’를 율법의 요구에 대한 인간의 행위로,81)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믿음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최근에 적지 않은 학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을 목적 속격관계보다 주격속격관계로 보려고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믿음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믿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성으로 해석하고자 한다.82) 그러나 다음 몇 가지 사항들은 전통적인 입장을 고수하여할 근거가 된다. 첫째, ‘율법의 행위’가 율법에 대한 인간의 행위를 가리킨다고 한다면, 같은 병행으로 나타나고 있는 ‘그리스도의 믿음’도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믿음을 가리킨다고 보아야한다. 둘째, 바울은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을 우리의 구원/의의 근거로 말하고 있으나, 하나님의 신실성(롬 3:3)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신실성을 우리의 구원의 근거나 혹은 수단으로 제시하지 않는다.83) 셋째, 로마서에서 여러 번 의가 인간의 믿음 행위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한 ‘믿는다’와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1:16-17; 3:22; 4:3,5,11; 10:4,10).84) 반면에 그리스도가 믿는다는 언급은 없다.
혹자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의 믿음을 강조할 경우, 인간의 행위를 강조하는 율법의 행위와 다를 바가 무엇이냐고 반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앞에서 지적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하나님의 의를 그 속에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과,85) 복음은 믿음을 불러일으키는 성령의 역사를 동반한다는 점을 감안한다면(참고, 갈 3:3-5; 고후 4:13) 우리가 아무리 믿음을 강조한다하더라도 믿음은 결국 인간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의 선물인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보아야 한다.86) 넷째, 바울 당대 고대 헬라어에서 믿음과 함께 속격관계의 단어가 사용될 때 주격속격보다 주로 목적 속격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의 독자들은 목적속격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87)
의의 표현으로서 순종
의를 법정적인 선언, 전가(轉嫁)된 의, 혹은 선물로서 볼 때는 이 의가 신자의 행위와는 관계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여 질 수 있지만, 의를 하나님 자신의 신실하신 행위로 볼 경우 이 ‘의’는 처음부터 신자의 삶의 변화를 전제하고 있는 역동적인 의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로마서에서 바울이 유대주의자들 때문에 이 ‘의’를 한편으로 율법이나 행위와 부정적으로 대조시키고, 다른 한편으로 이 ‘의’를 믿음과 긍정적으로 병행시키고 있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바울에게 있어서 이 ‘의’가 결코 신자의 삶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①바울은 로마서에서 여러 번 ‘순종’(uJpakoh)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1:5절에서 바울은 이 순종이 믿음과 불가분리의 관계가 있음을 보여주기 위하여 ‘믿음의 순종’(uJpakoh;n pivstew")이라고 말함으로써,88) 이 순종이 믿음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진 의와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암시한다. 바울에게 있어서 의가 신자의 삶/순종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은 이미 주제 구절인 1:16-17절에서 의를 구원의 능력으로 말하고 있는 점과,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하박국 2:4절의 인용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의가 신자의 삶의 순종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는 점은 6장에서 보다 명쾌하게 설명되어지고 있다. 6장에서 바울은 신자를 한 때 죄의 종 되었던 상태에서 해방되어 이제는 의에게 종된 자로 규정하면서 죄와 의를 다 같이 인간을 지배하는 주권적인 힘으로 표현한다. 즉 인간은 죄의 지배를 받든지 아니면 의의 지배를 받든지 둘 중 어느 하나의 지배를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바울에게 있어서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의롭게 된 것은 인간을 지배하는 주권자가 바뀌어졌다는 것을 뜻한다(6:6-11). 따라서 신자는 자신의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려야 하며(6:13),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러야한다(6:19)고 말한다. 심지어 그는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른다”(6:16)고 말하면서 하나님/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있는 순종이 의를 유지하게 하는 길임을 암시한다.
②성령의 사역 문제를 다루는 8장 10절에서 바울은 의의 근거가 되는 그리스도가 신자 안에 계시는 것은 성령이 신자에게 계시는 것을 가리키며, 성령이 신자 안에 계시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의를 통하여 성령께서 신자를 생명에 이르게 한다고 말한다.89) 이처럼 바울이 의를 성령의 사역과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바울에게 있어서 의는 성령을 통하여 신자 안에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종말론적인 의임을 보여준다.90)
③바울은 로마서 12장 이하에서 여러 가지 권면적인 교훈을 통하여 6장-8장에서 말한 신자가 죄의 종이 되지 않고 의에게 종이 되는 것, 곧 죄와 율법의 지배를 받지 않고 성령의 지배를 받은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임을 보여준다. 로마서 12장 이하의 교훈이 단순한 윤리적인 권면이 아니라, 바로 로마서 전체의 중심 주제인 이신칭의의 구체적인 표현으로 볼 때,91) 우리는 로마서의 결론 부분에 나타나 있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여러분들을 받은 것처럼 여러분들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서로 받으라”(15:7)는 교훈의 깊은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92) 여기 그리스도께서 여러분들을 받았다는 말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의와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면, 여러분들이 서로 받으라는 권면은 이 ‘의’를 삶을 통해 구현하라는 교훈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신칭의와 로마서의 구조
로마서의 중심주제인 ‘이신칭의’와 로마서 전체 구조와는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이미 우리는 의의 대한 설명에서 ‘이신칭의’의 주제가 로마서 전체내용을 통합시키고 있음을 제시하였다. 바울은 인사와 서문의 마지막 부분을 시작하는 1:15절에서 먼저 자신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기를 원한다는 의지를 밝힌다. 그리고 이어 1:16-17절의 주제 구절에서 복음의 내용, 곧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으로서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말한다. 그런 다음 바울은 1:18-3:20절에서 이방인과 유대인이 다 같이 죄인으로서 복음 안에 제시되고 있는 하나님의 의를 필요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다. 3:21-3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구체화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행하심과 동시에 하나님의 선물의 양면성을 가지고 있음을 천명한다. 4장에서는 바울은 아브라함을 실례로 들어 3:21-31절에서 말한 ‘이신칭의’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5-8장에서 바울은 아담/죄/율법과 그리스도/의/성령과의 구원 역사적 대조를 통하여 의의 구원 역사적 역동성을 설명한다.93) 동시에 이곳에서 ‘이신칭의’는 신자의 신분의 영역에서는 물론 신자의 삶의 영역에서도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9-11장에서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의 궁극적 구원문제와 관련하여 하나님의 의가 하나님의 자신의 언약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성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밝힌다. 로마서의 후반부인 12-15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의가 마땅히 신자의 순종적 삶을 통하여 구현되어져야 함을 밝힌다. 그리고 결언 부분을 마감하는 16:25-27절에서 하나님의 의를 그 내용으로 가지고 있는 자신의 복음이 바로 주제 구절에서, 그리고 3:21절에서 말한 바대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계시임을 밝힌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신칭의’는 로마서 서언과 본론과 그리고 결언에 이르기까지 로마서의 전체구조를 통일시키는 중심 주제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우리는 ‘이신칭의’의 복음을 중심으로 로마서의 간략한 문학적 구조를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자 한다.
‘이신칭의’의 복음으로서 로마서의 구조
서언: 1:1-17(A)
서문인사(1:1-7)
감사문단(1:8-15)
주제문단(1:16-17)
본론: 1:18-15:13(B)
이신칭의 복음의 필요성(1:18-3:20)
이신칭의 복음의 내용(3:21-11:36)
이신칭의 복음의 실천(12:1-15:13)
결언: 15:14-16:27(A')
(3) 요한 서신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전통적으로 요한 1서는 요한복음과 요한 계시록의 저자인 사도요한이 1세기 말엽 에베소에서 그 지역의 가정교회에 보낸 편지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를 확실하게 뒷받침할 수 있는 역사적 자료는 빈약하다. 역사적 자료의 빈곤 때문에 요한 1서의 저자와 독자, 시기와 장소 등에 관해서는 확실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다음과 같은 구절들,
(1) 요일 1:2-3/요 3:11, (2) 요일 1:4/요 16:24, (3) 요일 2:11/요 12:35,
(4) 요일 2:14/요 5:38, (5) 요일 3:5/요 8:46, (6) 요일 3:8/요 8:14,
(7) 요일 3:13/요 15:18, (9) 요일 3:14/요 5:24, (10) 요일 3:16/요 10:15,
(11) 요일 3:22/요 8:29, (12) 요 3:23/요 13:34, (13) 요일 4:6/요 8:47,
(14) 요일 4:16/요 6:69, (15) 요일 5:9/요 5:32, (16) 요일 5:20/요 17:3이 서로 유사하다는 점은 양 저자 사이에 어떤 연결점이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요한 1서의 여러 가지 내적 증거들에 의존해서 요한 1서가 요한 공동체(교회)로부터 이탈해 나간 무리들에 대항하여 교회 공동체를 보호하고, 정통적인 교리를 옹호하기 위해 기록된 편지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요한 1서는 곳곳에서 너희와 저희, 참된 신자와 거짓된 신자, 참된 교리와 거짓된 교리가 서로 날카롭게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 1서의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는 3:1-7절의 경우를 통하여 요한 1서의 메시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왜냐하면 3:1-7절이 요한 1서 전체의 흐름과 주제로부터 이탈하고 있는 본문이 아니고, 오히려 전체 주제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핵심적인 본문에 속하기 때문이다. 이점은 본문의 전후문맥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즉 3:1-7절의 전(前)문맥인 2:18-29절의 핵심적인 내용은 “‘너희들’[독자들]은 우리의 참된 공동체로부터 이탈해간 거짓된 저희 무리들, 곧 하나님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고 있는 저들의 거짓된 가르침에 미혹당하지 말고, 본래 배운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 굳게 머물라”는 것이다. 후(後)문맥인 3:8-24절의 핵심적인 내용도 거의 같은 흐름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인 너희들은 마귀의 자녀들인 저희들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데, 곧 형제들끼리 서로 사랑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3:1-7절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부분인 3:1-2절은 우리의 정체성, 곧 하나님의 자녀 됨에 관하여 말하고 있으며, 둘째 부분인 3:3-6절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삶의 원리, 곧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를 짓지 않는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으며, 마지막 부분인 3:7절은 8절과 함께 하나님의 자녀들은 죄를 짓는 자, 곧 마귀에게 속한 자로부터 미혹당하지 말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3:1-2)
2:18-29절의 전 문맥에서 저자는 독자들을 2인칭인 “너희”로 표현하였으나, 3:1절부터는 1인칭 복수인 “우리”로 표현하여 저자와 독자들의 일체감을 강조한다. 저자와 독자가 “우리”로 표현될 수 있는 근거는 그들이 다같이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저자는 독자들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강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편으로 독자들을 거짓된 무리들과 구분시키고, 또 다른 한편으로 저들의 신분과 그 신분에 요구되는 합당한 삶을 상기하도록 한다.
그렇다면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불릴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저자는 그 근거를 하나님의 사랑에 둔다. 이 사랑은 추상적인 사랑이 아니고, 여러 요한문헌에서 제시되고 있는 바대로, 역사적 사건을 통해서 나타난,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구속적 사랑이다. 요한복음 3:16절은 이 사랑을 가리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시고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구원하는 사랑”으로, 요한 1서 4:10절은,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신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한 이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의 고귀한 희생이 지불된 값비싼 사랑이다. 하지만 세상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세상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버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이 어떻게 그의 자녀들을 알 수 있겠는가? 여기서 세상의 불신앙과 무지가 폭로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구속적인 사랑에 의해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그러나 우리의 자녀 됨은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그 완성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까지 기다림의 대상이다. 완전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이 재림 할 때 비로소 우리는 예수님의 형상으로 화하게 된다(고후 3:18; 골 3:4). 이처럼 우리의 자녀 됨은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바로 여기에 하나님의 자녀의 삶의 원리와 책임이 놓여있다. “이미” 우리가 고귀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구별되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그 완성을 기다려야하기 때문에 우리는 죄의 유혹을 받을 수 있고, 사탄의 공격을 받을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죄의 유혹과 사탄의 공격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하고, 설사 유혹과 공격을 받는다하더라도 거기에 넘어가지 않고 승리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의 삶(3:3-6)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적인 구조 가운데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3:1절에서 저자는 주님의 형상으로 닮아갈 이 소망을 가진 자는 예수님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수님이 의로우시기 때문에 우리도 그분처럼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점은 이미 예수님께서도 산상설교 중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는 말씀으로 강조한바 있다. 이처럼 요한 1서 저자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에 부합하는 삶이 함께 동반되어야 함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가진 자가 그 신분과 부합하지 않는 불의한 삶, 곧 죄를 짓는 삶을 살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죄를 짓는 자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불법을 행하는 자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여러 곳에서 “죄”와 “불법”이 서로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다(예, 시 32:1; 51:3; 롬 4:7; 히 10:17). 그러나 요한 1서 저자는 단순히 죄와 불법을 동의어로 제시하기 보다도 죄가 하나님의 계명을 깨뜨리거나 불순종하는 구체적인 행위임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거나 하나님의 계명을 깨뜨리는 것은 바로 그 법과 계명을 주신 하나님께 반역하는 행위이다. 인류의 시조 아담과 이브는 하나님이 금한, 선악과를 따먹을 경우 오히려 하나님처럼 된다는 사탄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께서 금한, 선악과를 따먹었다.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하기보다도 오히려 사탄의 거짓된 말에 순종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반역이며, 이 반역이 바로 죄의 실체이다. 아담의 모든 후손들은 이 죄의 실체에 동참하여 죄인이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죄를 없애려고, 곧 우리를 죄의 권세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무죄한 그의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셨다(요 1서 1:29; 히 9:26). 하나님의 아들로 오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무죄(無罪)한 삶을 사셨다(요 1서 2:1; 고후 5:21). 그리고 무죄하신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써(요 1:29) 죄인인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그 스스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죽으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우리를 죄의 권세로부터 해방시켰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통해 우리는 예수님의 의로우심과 부활 생명에 참여하게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의로우신 예수님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죄 없으신 예수님처럼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가? 저자는 6절상반절에서 “그[예수님]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나니”라고 말하면서, 예수님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는 자는 죄를 짓지 않고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여기 “거하다”는 말은 요한문헌의 독특한 용어로서 연합, 일체, 교제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예수님 안에 지속적으로 거하는 자, 곧 예수님과 연합하여 그분과 하나가 되어 그분과 교제를 가지는 자는 죄를 지을 수 없다. 왜냐하면 죄 없으신 그분께서 죄를 예방하게 하고, 설사 죄의 유혹을 받는다고 하더라도 죄에 빠지지 않고 승리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 예수님은 요한복음의 고별설교에서 보혜사 성령을 제자들에게 약속하시고, 그가 오면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고(요 16:8),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라(요 16:13)고 약속하셨다.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약속은 요한복음 14:16-18절에 설명되어 있는 것처럼,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 자신의 임재의 약속이다. 곧 예수님은 보혜사 성령을 통하여 제자들에게 찾아오시고, 제자들은 성령을 통하여 예수님 안에 거하게 된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하여 자기 안에 거하는 자를 성결케 하신다(갈 2:20).
따라서 범죄 하는 자는 예수님을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자이다. 예수님을 보지도,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그는 예수님 안에 거할 수도 없다. 예수님 안에 거할 수 없으니 그는 범죄에 빠지지 않을 수 없으며, 죄로부터 벗어날 수도 없다.
미혹 예방(3:7)
우리 주석의 마지막 구절인 7절은 8절과 함께 미혹 예방, 곧 죄를 짓게 하는 미혹을 당하지 않아야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자녀들아 아무도 너희를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는 명령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서 마귀로부터 죄를 짓게 하는 유혹을 당할 수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인 사역을 통하여 이미 의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할지라도, 그들이 죄의 유혹자체도 받지 않고,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죄를 지을 수도 없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는 죄의 유혹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자가 되었으나, 유혹자체도 받지 않고,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죄를 지을 수 없는 완전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완전하신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님의 재림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그럼으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날마다 미혹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곧 죄에 빠지지 않도록 날마다 죄의 유혹을 경계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날마다 미혹으로부터 예방을, 죄의 유혹으로부터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가? 저자는 “미혹하지 못하게 하라”는 부정적인 명령에 이어, 보다 적극적으로 “의를 행하는 자는 그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롭다”라고 말한다. 즉 지속적으로 의를 행하는 자만이 모든 죄의 유혹으로부터 승리하신 예수님처럼 죄의 유혹으로부터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깨끗한 물을 계속해서 가득 채우고 있는 항아리는 더러운 물을 받을 수 없는 것처럼, 의를 지속적으로 행하는 자에게는 죄가 들어올 틈이 없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누가 진정 의로운 자인가하는 문제를 밝힌다. 곧 지속적으로 의를 행하는 자가 진정 의로운 자라는 것이다. 나무는 그 열매를 보아 아는 것처럼, 존재와 행위, 믿음과 삶은 서로 분리될 수 없고 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지 않고 죄를 짓는 자는 의로우신 예수님에게 속한 자가 아니고 마귀에게 속한 자이다. 왜냐하면 마귀는 범죄의 원조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요한 1서의 저자는 공동체가 직면하고 있는 상황과 관련하여, 요한공동체에 남아 있는 독자들을 “너희”로, “참 제자”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고 있다. 반면에, 교회를 이탈한 거짓 선생들이나 그들을 추종하고 있는 무리들을 “저희”로, “거짓 제자”로, “마귀의 자녀”나 “마귀에게 속한 자”로 부르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요한의 공동체의 구별된 정체성과 결속을 확립하고 거짓된 무리에게로 이탈을 방지하고 있다. 우리가 살펴본 요한 1서 3:1-7절은 이와 같은 전체적인 흐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축소판이라고 할 수 있다.
주------------------------------------------------
1) Leon Morris, Galatians. Paul's Charter of Christian Freedom (Downers Grove: InterVarsity Press, 1996), 13: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가장 짧은 서신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덜 중요한 서신으로 간주해서는 아니 된다. 갈라디아서는 위대한 주제들, 기독교교회가 항상 귀를 기울여야 할, 그리고 모든 크리스천의 매일 매일의 삶에 영향을 주는 위대한 주제들을 취급하고 있다.”
2)Betz, “In Defense of the Spirit: Paul's Letter to the Galatians as a Document of Early Christian Apologetics," Aspects of Religious Propaganda in Judaism and Early Christianity, ed. Elisabeth Schüssler Fiorenza (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76), 99-114.
3) 기독교회에 미친 갈라디아서의 영향력에 관하여서 R.N. Longenecker, Galatians (WBC 41, Dallas: Word Books, 1990), xliii-lii; Betz, “Galatians," ABD 2, 873-874를 참고하라.
4)James Dunn, The Theology of Paul's Letter to the Galatian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xiii를 보라. 갈라디아서 주석을 쓴 R.N. Longenecker는 그의 주석 Galatians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갈라디아서는 (1) 바울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2) 바울의 연대기를 확립하는데 있어서, (3) 초기 사도시대 역사의 과정을 추적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4) 신약 성경의 많은 비평적, 정경적(正經的) 이슈들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잣대를 제공하고 있다. 아마도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여러 서신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되었을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신약 성경 전체에 걸쳐서 있는 신앙고백적인 요소를 떠나서 말한다면, 갈라디아서는 신약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들의 근원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울과 그 밖에 전 신약성경을 올바르게 알기위해서는 갈라디아서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xIi).
5)루터와 갈라디아서와의 자세한 관계에 대하여서는 Richard N. Longenecker, Galatians, Iiii-Iiv를 보라. 루터는 그의 생애 초기(1519년)에 갈라디아서 주석을 썼고, 그리고 그의 생애 후기(1538)에 그것을 다시 수정 보완하였다. 그러므로 루터의 갈라디아서는 그의 사상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므로 루터의 사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그의 갈라디아서 주석만큼 좋은 것이 없을 것이다. 오늘날 새로운 전망의 바울 연구가들 중에 Luther를 비판하는 자들도 적지 않지만, 그들이 Luther만큼 바울을 더 잘 이해하고 있는지 물어보아야 할 질문이다.
6)특별히 E.P. Sanders, 김진영옮김, [바울, 율법, 유대인] (서울: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1995); 홍인규, The Law in Galatians (JSNT Suppl. 81; Sheffield: JSOT Press, 1993); James D.G. Dunn, The Theology of Paul's Letter to the Galatians (Cambridg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3); Frank Thielman, Paul & the Law (Downers Grove: IVP, 1994); Hendrikus Boers, The Justification of the Gentiles. Paul's Letters to the Galatians and Romans (Peabody: Hendrickson, 1994)를 보라.
7)Betz, "Spirit, Freedom, and Law. Paul's Message to the Galatian Churches," SEA 39 (1974), 145.
8) 자세한 문제는 Stanley K. Stowers, Letter Writing in Greco-Roman Antiquity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1986), 58-96.
9)예를 들면, 이한수, “안디옥 사건과 바울의 이신칭의의 복음,” [바울신학연구] (서울: 총신대학교 출판부, 1993), 99-149.
10) James D.G. Dunn, "The Incident at Antioch (Gal. 2:11-18)," in Jesus, Paul and the Law (Louisville: Westminster, 1990), 129-182; John M.G. Barclay, "The Antioch Episode and Justification of Faith," in Obeying the Truth (Edinburgh: T. & T. Clark, 1988), 76-83; Peter J. Tomson, "The Antioch Incident," in Paul and the Jewish Law (Minneapolis: Fortress, 1990), 222-230; P.C. Böttger, "Paulus und Petrus in Antiochien: Zum Verständnis von Galater 2.11-21," NTS 37 (1991) 77-100; Sabbas Agourides, "Peter and Paul in Antioch (Galatians 2,11-21)," in The Truth of the Gospel (Galatians 1:1-4:11) (Rome: Benedictina, 1993), 59-90.
11)우리는 이 점에서 갈라디아교인들이 유대주의자들의 미혹을 받아 이미 할례를 받았거나 모세의 율법과 유대교의 절기 등을 지키고 있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다. 유혹에 넘어갈 위험에 처해 있었기는 하나 아직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갈라디아서의 권면과 경고는 불필요한 것이 되고, 오히려 편지의 내용은 회개를 촉구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Cf. Troy Martin, "Apostasy to Paganism: The Rhetorical Stasis of the Galatian Controversy," Mark D. Nanos, ed. The Galatians Debate. Contemporary Issues in Rhetorical and Historical Interpretation (Peabody: Hendrickson, 2002), 76-77.
12)Betz, Galatians, 8-9, 28; "In Defense of the Spirit," 105-7; “Spirit, Freedom, and Law. Paul's Message to the Galatian Churches," 145-160.
13)Barclay, Obeying the Truth: A Study of Paul's Ethics in Galatians (Edinburgh: T. & T. Clark, 1988), 68-72.
14) Susan Elliott, Cutting Too Close for Comfort. Paul's Letter to the Galatians in its Anatolian Cultic Context (London: T & T Clark International, 2003).
15) Clinton E. Arnold, "'I Am Astonished That You Are So Quickly Turning Away!' (Gal 1.6): Paul and Anatolian Fork Belief," NTS 51 (2005): 429-449.
16)Cf. G.E. Ladd, "The Holy Spirit in Galatians," in Current Issues in Biblical and Patristic Interpretation in Honor of M.C. Tenney, ed. G.F. Hawthorne (Grand Rapids: Eerdmans, 1975), 211-216; W. Russell, "The Apostle Paul's Redemptive-Historical Argumentation in Galatians 5:13-26," WTJ 57 (1995): 333-57.
17)Esler, Conflict and Identity in Romans, 16.
18)어떤 점에서 로마서는 크게 헬라-로마-유대문학에서 자주 사용되고 있는 문학적 기교인 A(1:1-17) B(1:18-11:36) B'(12:1-15:13)A'(15:14-16:27) 형식으로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19) 본래 이 책은 독일어로, Von Reimarus zu Wrede (Tübingen: J.C.B. Mohr, 1906)로 출판되었으나, 1910년에 [역사적 예수 연구]라는 제목 아래 영어로 번역 출판되어 널리 알려졌다: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A Critical Study of Its Progress from Reimarus to Wrede, trans. W. Montgomery (London: A. & C. Black, 1910). 우리말로도 [역사적 예수연구]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되었다.
20)본래의 책 제목은 Die Mystik des Apostels Paulus (Tübingen: J.C.B. Mohr, 1930)이며, 영어로
The Mysticism of Paul the Apostle, trans. W. Montgomery; with a new foreword by J. Pelikan (Baltimore,
Md./London, 1931, 1998).
21) Moo, Romans, 23. 이 부분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Carsten Claussen이 2007년 미국 San Diego에서 개최된 SBL Annual Meeting, “Romans through History and Cultures Group”에서 발표한 논문, “‘Albert Schweitzer’'s Understanding of Righteousness by Faith according to Paul’'s Letter to the Romans”를 보라.
22)역시 박익수, [로마서 주석 I]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2008), 56-57에 있는 지적을 보라.
23) Johannes Munck는 그의 책, Paulusn und die Heilsgechichte, 영역, Paul and the Salvation
of Mankind (London: SCM, 1959)에서 로마서는 바울의 선교적 상황의 관점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24)Paul S. Minear는 그의 책, Obedience of Faith: The Purpose of Paul in the Epistle to
the Romans (London: SCM, 1971)에서 로마서를 로마교회의 갈등문제를 말하고 있는 14-15장을 중심으로 로마서를 해석하려고 시도하였다.
26)K. Stendahl, “The Apostle Paul and the Introspective Conscience of the West," HTR (1963): 199-215; 그의 단행본, Paul Among Jews and Gentiles, 78-96을 보라.
27)그는 1990년대에 영국의 옥스퍼드대학교의 교수로 있다가 지금은 미국 듀크대학교의 교수로 있다.
28)E.P, Sanders의 Pauland Palestinian Judaism. A Comparison of Patterns of Religion (Philadelphia: Fortress, 1977)
29) Sanders,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180에서 “언약적 율법주의”를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 이스라엘은 그 선택을 받아들였다. 하나님은 왕으로서 이스라엘에게 그들이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순종하여야 할 계명들을 주셨다. 순종은 보상이 주어졌고, 불순종은 심판이 주어졌다. 그렇지만순종에 실패하였을 경우에는 인간은 하나님이 규정한 속죄의 수단을 의지하여야 한다. 그 수단에는 회개도 요구되어 있다. 그가 하나님의 언약에 머물려는 바람을 계속 유지하는 한 그는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들에 주어진 유업, 다가올 세상에서의생명을 포함하여,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순종하려는 인간의 의지와 노력은 언약에 머무는 조건이다. 그러나 그들이 언약을 보수로 받는 것은 아니다.” Sanders가 예수와 바울 당대의 유대교를 “covenantal nomism"로 규정하였는데 이를 우리말로 어떻게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는 것이 좋은지에 관한 논의가 2008년 12월 12일 안양대학교에서 ”바울신학의 ‘New Perspective' 논쟁과 그 의미“라는 주제로 개최된 제 2회 한국신약학회 콜로키움에서 있었다. 왜냐하면 어떤 학자들은 이를 ”언약적 신율주의”로, 또 다른 학자들은 이를 “언약적 율법주의”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몇몇 학자들이 “언약적 신율주의”가 Sanders의 의도를 더 잘 반영하는 용어이기 때문에 이 말로 통일하자는 제안이 있었지만 필자는 이것은 Sanders가 언약과 함께 똑같이 강조하는 율법을 약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언약적 율법주의“로 번역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의견을 제시한바 있다.
31) “This is what Paul finds wrong in Judaism: it is not Christianity.”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552.
32) 우리는 Sanders와 거의 유사한 주장을 이미 금세기 초엽의 하바드 대학교 교수로서 Max Weber의 유대교 구성을 비판하였던 G.F. Moore, Judaism in the First Century of the Christian Era: The Age of Tannaism I-III (Cambridge, 1927-1930)에서 발견할 수 있다.
33)신약학계에 새 관점의 바울연구는 사실상 E.P, Sanders의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A Comparison of Patterns of Religion (Philadelphia: Fortress, 1977)으로 제기되었으나, 그러나 “새 관점의 바울 연구”(the New Perspective on Paul)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이 문제를 폭넓게 부각시킨 사람은 James D.G. Dunn, “The New Perspective on Paul," Bulletin of the John Rylands University Library of Manchester 65 (1983), 95-122이다. "새로운 전망의 바울연구”의 쟁점들에 관한 소개를 위해서는 M.B. Tompson, The New Perspective on Paul (Cambridge: Grove Books, 2002); Stephen Westerholm, "The 'New Perspective on Paul' at Twenty-Five," in The Pradoxes of Paul (Grand Rapids: Baker Academic, 2004), 1-38; Donald Macleod, "The New Perspective: Paul, Luther and Judaism," Scottish Bulletin of Evangelical Theology 22 (2004), 4-31; Don Garlington, "The New Perspective on Paul: An Appraisal Two Decades on"<www.thepaulpage.com/new_perspective.pdf>; Mark M. Mattison, "A Summary of the New Perspective on Paul"<www.thepaulpage.com/Summary.html>; Francis Watson, Paul, Judaism, and the Gentiles. Beyond the New Perspective (Grand Rapids: Eerdmans, 2007)을 보라. 웹싸이트 www.thepaulpage에 들어가면 새 관점에 관한 수백종류의 자료를 발견할 수 있다.
34)Dunn, Romans 1-8, 9-16, WBC (Dallas: Word Books, 1988).
36)Dunn, Jesus, Paul and the Law, 186-88.
37) 최근에 라이트는 그의 논문, “Paul and Caesar: A New Reading of Romans,” in A Royal Priesthood: The Use of the Bible Ethically and Politically, ed. C. Bartholemew (Carlisle: Paternoster, 2002), 173–193에서 로마서를 바울당대 헬라-로마사회에 급성장하고 있던 로마황제 숭배와 제사의 문맥에서 보아야할 것을 주장하면서, 이것을 “옛 관점”이나 “새 관점”과 대조하여 “신선한 관점”(A Fresh Perspective)이라 명명하였다. 라이트에 따르면, 바울의 주된 선교지였던 지중해 연안의 지역에는 로마황제 숭배사상과 황제제사가 만연되어가고 있었다. 로마 안에서는 황제들은 신격화되지 않았지만 지중해 연안의 동로마제국에는 로마황제가 신으로 숭배되었다. 황제는 신으로 숭상되었고, 황제의 탄생과 등극에 관한 소식을 가리켜 “복음”이라 불렀다. 바울이 로마서 서문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다윗의 가문에서 출생한 메시야로, 주로, 그에 관한 소식을 복음으로 소개한 것은 의도적, 로마제국의 황제숭배와 제사에 대한 도전이었다. 그리고 로마 황제가 아닌 예수에 대한 전폭적인 믿음과 순종을 요구한 것도, 로마서의 마지막부분인 15:7-13에 유대인크리스천과 이방인크리스천의 하나 됨을 강력하게 촉구한 것도 로마황제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우주적인 통치와 왕권을 실현하기 위함이었다. 라이트가 제안한 “신선한 관점”이 로마서를 하나의 고정적인 관점이 아닌 다양한 각도에서 접근하여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는 어느 정도 긍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과연 바울이 의도적으로 로마서를 그러한 관점에서 섰는가에 관해서는 여전히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라이트에 대한 보다 폭 넓은 이해를 위해서는 그의 책, What Saint Paul Really Said (Grand Rapids: Eerdmans, 1997); Paul in Fresh Perspective (Minneapolis: Fortress, 2005)과 그의 논문, “ROMANS AND THE THEOLOGY OF PAUL in Pauline Theology, Volume III, ed. David M. Hay & E. Elizabeth Johnson, 1995), 30-67를 보라. 라이트에 대한 비판적인 평가를 위해서는 S. Westerholm, Perspective Old and New on Paul. The "Lutheran" Paul and His Critics (Grand Rapids: Eerdmans, 2004), 179-183; Karl P. Donfried, "Paul and the Revisionists: Did Luther Really Get it All Wrong?" Dialog: A Journal of Theology 46 (2007): 31-40을 보라.
38)예를 들면, Stuhlmacher, Romans.
39)예를 들면, 최종상, [이방인의 사도가 쓴 로마서]; A. Andrew Das, Solving the Romans Debate (Minneapolis: Fortress, 2007).
41) Moo, Romans, 28.
42)최근에 로마서에 대한 2권의 무게 있는 주석을 쓴 박익수 교수는 그의 [로마서 주석 I], 47에서 로마서의 집필 동기와 목적을 논의하면서 “로마서는 이처럼 교회 안에 있는 두 그룹 사이의 긴장과 갈등을 해소시켜 하나의 교회를 이루게 하려는 목적으로 쓰여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로마서를 지나치게 수평적 관점에서 보고 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게 만든다. 로마서가 아무리 1세기 로마교회 안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하더라도, 또 우리가 그러한 상황을 외면하고서는 로마서를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로마서를 로마교회 상황에서만 해석하는 것은 로마서 그 자체의 가르침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거듭 말하지만 로마서는 1세기의 로마교회를 뛰어넘어 전 인류를 대상으로 말하고 있다. 로마교회안의 이방인 크리스천과 유대인 크리스천들을 뛰어넘어 창조주 하나님과 전 인류와의 관계 문제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로마서 본론이 시작되는 1:18절 이하에서 인류의 범죄문제를 다루고, 로마서 주제 구절의 해설부분인 3:21절 이하에서 전 인류의 범죄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문제를 말하고 있고, 5장에서 인류를 대변하고 있는 아담과 마지막 아담인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점을 부인할 수 없게 한다.
43)이 점은 더글라스 J. 무, 이경석 옮김, [로마서의 신학적 강해] (서울: 크리스챤, 2007), 29-39에서도 지적되고 있다.
44)바로 이점에서 Moo, Romans, 29-30에서 로마서의 주제(the Theme)를 “복음”으로 보고 있다. 어떤 점에서 Moo의 주장은 정당하다. 하지만 복음은 로마서는 물론 바울의 전 서신, 나아가서 신약성경전체의 주제로 볼 수 있는 큰 주제이다. 따라서 복음을 로마서만이 가지고 있는 중심적인 주제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46) 1:17; 3:5,21,22,25,26; 4:3,5,6,9,11x2,13,22; 5:17,21; 6:13,16,18,19,20; 8:10; 9:30x3,31; 10:3x3,4,5,6,10; 14:17.
47) 1:17; 2:13; 3:10,26; 5:7,19; 7:12.
48) 1:32; 2:26; 5:16,18; 8:4.
49) 4:25; 5:18.
51) 1:5,8,12,17x3; 3:3,22,25,26,27,28,30x2,31; 4:5,9,11,12,13,14,16x2,19,20; 5:1,2; 9:30,32; 10:6,8,17; 11:20; 12:3,6; 14:1,22,23x2; 16:26.
52)1:16; 3:2,22; 4:3,5,11,17,18,24; 6:8; 9:33; 10:4,9,10,14x2,16; 13:11; 14:2; 15:13.
53)2:12x2,13x2,14x4,15,17,18,20,23x2,25x2,26,27x2;3:19x2,20x2,21x2,27x2,28,31x2;4:
13,14,15x2,16;5:13x2,20;6:14,15;7:1x2,2x2,3,4,5,6,7x3,8,9,12,14,16,21,22,23x3,25x2;8:2x2,3,4,7; 9:31x2; 10:4,5; 13:8,10.
54) 2:15; 3:20,28.
55)로마서와 함께 갈라디아서에서 유독 “믿음”과 “율법” 어휘들이 많이 나타나고 있는 점은 갈라디아서의 주제와 로마서의 주제 사이에 서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시사해 준다.
56)신적 수동태는 하나님의 행동하심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일종의 히브리어에서 온 LXX의 용법이다. 자세한 것은 Smith, Biblical Greek, 74; BDF S.337을 보라.
57) Dunn, Romans, 41.
58) 로마서에서 명사 “믿음”(πιστις)는 모두 40번(1:5,8,12,17x3; 3:3,22,25,26,27,28,30,31; 4:5,9,11,12, 13,14, 16,16,19,20; 5:1,2; 9:30,32; 10:6,8,17; 11:20; 12:3,6; 14:1,22,23,23; 16:26) 나오고 있으며, 동사 “믿는다”(πιστευω)는 모두 21번(1:16; 3:2,22; 4:3,5,11,17,18,24; 6:8; 9:33; 10:4,9,10,11,14,14,16; 13:11; 14:2; 15:13) 나타난다. 재미있는 사실은 “의”가 자주 나타나고 있는 곳에서 또한 “믿음”도 자주 나타나고 있는 점이다.
59) 이 점은 구약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의는 언약 아래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적 신실성을 가리키고 있는 동시에 이스라엘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종말론적인 법정적 무죄선언이기도 하다. Cf. Onesti and Brauch, "Righteousness, Righteousness of God," 829-830.
61)우리가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의” 어휘들의 용법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로마서 자체의 문맥적 연구가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바울의 용법에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보아지는 구약, LXX역, 중간시대의 유대 문헌, 바울 당대의 헬라 문헌 등의 용법을 TDNT, IDB, ABD등의 성경사전 등을 통해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62)예를 들면, 로마서 10:3절의 “자기의 의”나 10:5절의 “율법으로부터의 의.” 혹자는 바울이 말하고 있는 율법으로부터의 의에 근거하여 만일 인간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킨다고 한다면, 율법으로부터의 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추론을 한다. 현실적으로 율법이 인간에 의를 줄 수 없는 것은 율법 자체가 불완전하거나 문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는 인간의 무능력과 부패성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의에 도달 할 수 수 있는 두 종류, 첫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허락한 율법을 통한 길과 둘째는 이방인들에게 허락한 믿음을 통한 길을 주셨다는 결론에 도달 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될 경우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 마련된 차선책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의한 의를 율법에 의한 의가 실패함으로써 마련된 차선의 의나, 비 언약백성인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해 특별히 마련된 의로 보지 않는다. 바울에게 있어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모두를 포함하는 참된 의는 처음부터 끝까지 율법으로부터 오는 의가 아닌 믿음으로부터 오는 의이다. 바울이 말하는 자기의 의나 율법으로부터의 의는 하나님이 마련한 의가 아니고,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들 스스로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일종의 의와 구원의 수단으로 잘못 이해하여 만든 의이다. 율법은 처음부터 믿음에 의한 의와 대조가 되는 또 다른 의의 길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된 자들의 합당하고 의로운 삶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따라서 율법으로부터 오는 의는 언약 안에 들어가기 위한 의가 아니라 이미 언약 안에 있는 자들이 그 언약 안에 머물러 있기 위한 의이다.
63)TDNT II, 203; Reid, M.L., "A Rhetorical Analysis of Romans 1:1-5:21 with Attention given to the Rhetorical Function of 5:1-21," 267-268.
64)새로운 바울 전망가들은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떻게 의롭게 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이신칭의 이해의 출발점으로 삼은 루터의 영향을 받아 이신칭의를 지나치게 개인적이고 수직적인 관점에서 이해하여왔음을 비판하고, 오히려 이신칭의는 바울 당대 교회의 가장 큰 현안의 문제였던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관계문제, 이를 테면 이방인신자들이 어떻게 유대인 신자들과 동등한 하나님의 언약백성이 될 수 있는가하는 수평적 문제를 중심으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필자가 볼 때, 우리가 로마서 1:16-17절의 주제구절에서도 볼 수 있는 것처럼, 바울이 이신칭의의 문제를 당대교회의 현안의 문제인 유대인과 이방인 크리스천들의 관계문제와 관련하여 서술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이신칭의를 단순히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문제로만 보는 것은 대단히 잘못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이신칭의를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문제를 뛰어넘어 모든 사람, 전 인류의 문제, 나아가서 전 피조물의 문제, 칭조, 타락, 구속이라는 우주전제의 종말론적인 회복이라는 관점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66) Käsemann, "The Righteousness of God in Paul," 168-182; Romans, 23-30; Wilckens, Der Brief an die Römer, 1:194-199.
67)자세한 설명은 Dunn, "Justification by Faith," in The Theology of Paul the Apostle, 334-389.
68) 장종현, 최갑종, [사도 바울], 245-246.
69) Brauch, "Perspectives on 'God's Righteousness' in Recent German Discussion," 523-542.
71)TDNT II, 203; Käsemann, "Righteousness of God in Paul," 168-182; Romans, 23-30.
72)C.G. Kruse, Paul, The Law and Justification (Peabody: Hendrickson, 1996), 188-193.
73) 하나님의 義를 구약과 직접 연결시킴으로써, 그리고 역사적인 전환점을 가리킬 때 사용하는 νυνι를 사용함으로써,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義를 하나님의 언약적 관점과 종말론적인 성취의 관점에서 말하고 있음을 분명히 한다.
74) 우리 말 개역성경에서는 “화목제물”로, 표준판에서는 “속죄제물”로 번역되고 있는 로마서 3:25절의 헬라어 ἱλαστἠριον의 원래적인 의미는, 신약성경에서 로마서 3:25절과 함께 유일하게 동일한 말을 사용하고 있는 히브리서 9:5절이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속죄소” 혹은 “속죄단”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물론 ἱλαστἠριον을 “속죄소”으로 번역하는 것이 정당한가(예를 들면, Origen, Luther, Calvin, Nygren, Stuhlmacher, Schreiner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아니면 “속죄제물” 혹은 “화목제물”로 번역하는 것이 정당한가(예를 들면, Lightfoot, Cranfield, Morris, Murray, Ridderbos, Käsemann, Kümmel등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하는 것이 오랫동안 논의가 계속되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가 이 말이 본래 구약의 제사 제도에서 속죄고 혹은 속죄단을 뜻하고 있었다는 점만 고려한다면, 이미 오랫동안 우리말로 “속죄제물” 혹은 “화목제물”로 번역되어 사용되어 온 것 자체를 구태여 바꿀 필요는 없다고 보아진다. 이 문제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변종길, "로마서 3장 25절의 ἱλαστἠριον,“ 57-76을 보라.
75) 3:21-26절은 하나님의 의와 관련하여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하여 말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무엇을 하셨는가에 말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3:27절에서 자랑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76)TDNT II, 206.
77) 로마서 9-11장에 나타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문제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최갑종, “사도 바울과 ‘비밀’: 그의 이방인 선교와 이스라엘의 구원과의 연계성,” 78-116을 보라.
78) TDNT II, 205.
79)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τελος)이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참된 요구를 성취함으로써(롬 8:3-4), 인간에 대한 율법의 요구를 종결하셨다는 양면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자세한 논의는 Moo, Romans, 636-643를 보라.
80) 이와 같은 강조는 다음과 같이 갈라디아서 2:16절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ejx e[rgwn novmou)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dia; pivstew" Ihsou" Cristou")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ejx e[rgwn novmou)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dia; pivstew" Ihsou" Cristou")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ejx e[rgwn novmou)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81)Dunn은 “율법의 행위”가 율법 자체의 요구에 대한 인간의 행위를 가리키기보다도 할례, 유대인의 절기, 음식법 등 유대인들이 자신들을 이방인으로 구분하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민족적, 사회적 정체성의 표지로 보고자 한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에 대한 Dunn의 사회학적인 접근은 바울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종종 율법과 율법의 행위를 상호 교차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점(예를 들면, 롬 3:20, 28-30; 갈 3:16-21)과 일치하지 않는다. 자세한 논의는 Schreiner, "'Works of Law' in Paul," 217-244를 보라.
82) 예를 들면, Hays, The Faith of Jesus Christ,158-62; Williams, "Again Pistis Christou," 431-47; Stowers, "Εκ πιστεως and δια της πιστεως in Romans 3.30," 665-74; Longenecker, Galatians, 87-8; Hooker, From Adam to Christ, 165-86; Davies, Faith and Obedience, 106-10; Campbell, "Romans 1:17-A Crux Interpretum for the ΡΙΣΤΙΣ ΧΡΙΣΤΟΥ Debate," 265-285; "False Presuppositions in the ΡΙΣΤΙΣ ΧΡΙΣΤΟΥ Debate: A Response to Brian Dodd," 713-719; Kobayashi, "A Renewed Understanding of Justification by Faith and Church Growth: A Proposal from Biblical (New Testament) Theology," 23-30.
83) Dunn, Romans, 166-167; Seifrid, Justification By Faith, 220, n166.
84)Dunn, "Once More," 730-746.
85) Seifrid, Justification by Faith, 218-19.
86) 홍인규, “바울과 성령,” 207-209.
87) Roy A. Harrisville III, "Before ΡΙΣΤΙΣ ΧΡΙΣΤΟΥ: The Objective Genitive as Good Greek," 353-358을 보라.
88)Davies, Faith and Obedience in Romans: A Study in Romans 1-4, 25-30; Garlington, Faith, Obedience, and Perseverance: Aspects of Paul's Letter to the Romans, 1-31; Moo, Romans, 51-53.
89)이 문제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최갑종, “바울과 성령: 로마서 8장 1-27절에 대한 연구,” 440-452을 보라.
90)Bertone, "The Function of the Spirit in the Dialectic Between God's Soteriological Plan Enacted But Not Yet Culminated: Romans 8.1-27," 75-97.
91) 적지 않은 사람들이 바울 서신의 직설적인 부분을 신학의 범주에, 명령법적인 부분을 윤리나 실천의 범주에 한정시켜 신학과 윤리를 나누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양자가 마치 십자가와 부활사건이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서로 통합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한 자세한 논의는 “바울과 윤리: 바울의 윤리적 교훈의 특장-직설법과 명령법,” 527-549를 보라.
92) Stuhlmacher, "The Theme of Romans," 40: “Romans 12-15 are thus the practical test case for the justification which Paul teaches."
93) Reid, "A Rhetorical Analysis of Romans 1:1-5:21," 255-272.
- 형람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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