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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서신

갈라디아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무엇인가?

by 은총가득 2021. 12. 30.

갈라디아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무엇인가? /최갑종 교수

 

1. 들어가는 말

 

갈라디아서는 16장으로 구성된 로마서나, 16장과 13장으로 구성된 고린도전서 및 후서와 비교해 볼 때 6장 밖에 되지 않는 비교적 짧은 서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쓴 13서신중에 가장 중요한 서신 중의 하나로 간주되고 있다. 저명한 갈라디아서 주석가중의 한 사람인 H.D. Betz는 갈라디아서를 가리켜, “이 세상에 현존(現存)하는 기독교의 문헌 중 가장 중요한 문헌 중의 하나이다”1)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상 갈라디아서는 사도 바울의 생애와 그의 핵심적인 신학사상은 물론, 기독교역사의 기원과 뿌리를 밝혀줄 수 있는 가장 초창기 기독교문헌 중의 하나이며, 또한 지나간 이천 년간의 기독교역사에 가장 결정적이고,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신약성경 중의 한 부분이다라고 말할 수 있다. R.N. Longenecker는 그의 갈라디아서주석 서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갈라디아서는 (1) 바울의 가르침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2) 바울의 연대기를 확립하는데 있어서, (3)초기 사도시대 역사의 과정을 추적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4) 신약 성경의 많은 비평적, 정경적(正經的) 이슈들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잣대를 제공하고 있다. 아마도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여러 서신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되었을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우리가 신약 성경 전체에 걸쳐서 있는 신앙고백적인 요소를 떠나서 말한다면, 갈라디아서는 신약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들의 근원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울과 그 밖에 전 신약성경을 올바르게 알기위해서는 갈라디아서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필수적이다.2)

 

갈라디아서의 중요성은 지난 1980년대 초부터 등장한 “새 관점의 바울연구”(the New Perspective on Paul)3)로 인하여 다시 한 번 주목을 받고 있다. 왜냐하면 새 관점의 바울연구가들이 제기한 주요 쟁점들, 이를테면, ①바울 당대의 유대교가 인간의 율법적 행위와 공로에 구원적 의미를 부여하는 율법주의적 종교(legalism)인지, 아니면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를 우선적으로 강조하는 “언약적 율법주의의”

(covenantal nomism)4)인지, ②바울이 유대교를 율법의 행위를 통한 의를 추구하는 종교로 규정한 것은 유대교에 대한 역사적-사실적 묘사인지, 아니면 사실상 유대교를 왜곡한 것인지,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통해서만 의(義)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강조하기 위한 수사학적 묘사인지, ③바울이 율법에 대하여 비판적이고 부정적인 입장을 취한 것은 그의 회심과 소명 초기부터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른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을 받았고, 따라서 율법이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구원의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인지,5) 아니면 후일 그의 이방 선교현장에서 할례, 음식법, 절기 등 유대인들의 정체성의 보루가 되어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사회적 장애물이 되고 있는 사실을 보았기 때문이지,6) ④바울은 죄를 단순히 율법의 어김으로만 보았는지, 아니면 율법을 구원의 수단으로 잘못 알고, 율법을 지키려하고 또 남에게 지키도록 강요하는 율법의 남용도 포함하고 있는지 등등의 쟁점들에 대한 해답도 결국 갈라디아서를 어떻게 읽고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7)

그렇다면 갈라디아서는 누가, 언제, 누구에게, 어떠한 상황에서, 어떠한 목적을 위해,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썼는가? 이와 같은 질문들은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어보아야 할 질문들이다. 하지만 금번 강의에서는 이 모든 질문들 중에 가장 핵심적인 질문인 “갈라디아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무엇인가”만을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시간의 제약도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질문들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이 핵심적인 질문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무엇인가? 이 핵심적인 메시지는 어디에서 찾아야 하며, 이것은 갈라디아서의 문학적 구조와 갈라디아교회의 상황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먼저 전통적인 접근 및 문제점을 살펴보고 이에 대조되는 새로운 대안을 생각해보자.

 

2. 전통적인 접근

 

바울은 왜 갈라디아서를 썼으며, 갈라디아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무엇이며, 바울은 이 핵심적인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어떻게 갈라디아서를 썼는가? 그리고 이 핵심적인 메시지는 갈라디아교회의 역사적 정황과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종교개혁 이후 전통적으로 많은 주석가들과 학자들(이를테면, Betz, Bruce, Longenecker, Witherington, Dunn, 이한수 등)은 갈라디아서의 핵심적인 메시지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제 1차선교여행기간 중인 AD 47-48년경에 갈라디아지역에 사는 사람들(남부갈라디아서설), 혹은 제 2차선교여행기간 중인 AD 50-53년경에 인종적으로 갈라디아사람들로 불리어지는 사람들(북부갈라디아서설)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바울이 이들에게 전한 복음은 그가 다메섹사건을 통해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복음, 곧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이루신 구원 사건을 통하여, 할례나 모세의 율법 준수와 관계없이, 인종(人種, 유대인과 이방인), 신분(身分, 종과 주인), 성(性, 남자와 여자)의 차별 없이,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구원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하셨기 때문에, 이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성령을 선물로 받게 된다는 메시지였다. 갈라디아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열광적으로 받아 드렸고, 그리고 성령체험을 하였다. 바울은 이들을 모아 몇몇 가정교회들을 형성한 다음 갈라디아지역을 떠났다.

 

바울이 갈라디아교회들을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예루살렘교회 출신의 보수파 유대인신자들(이하, ‘유대주의자들’, 행 15:1 참조)이 갈라디아교회에 찾아왔다. 이들은 갈라디아크리스천들에게 사도바울의 사도성과 복음을 폄하하였다. 그들은 바울은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보다는 열등한 자이며, 그가 전한 복음도 불완전한 복음이라고 하면서, 바울의 사도직과 복음을 훼손하였다(갈 1:7; 2:3-4; 3:1; 5:7-12; 6:12-13). 그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으로는 갈라디아교인들이 유대인 신자들과 동등한 하나님의 언약백성과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될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보충해서 언약백성들의 신분과 삶의 표지인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지켜야 비로소 유대인 신자들처럼 참된 구원의 공동체, 곧 하나님의 언약백성과 아브라함의 자녀들이란 신분을 가질 수 있다. 갈라디아교인들은 유대주의자들의 이러한 주장에 미혹당하여 바울이 그들에게 전한 복음, 곧 인종과 신분과 성을 초월하여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구원 받는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사실만으로는 자신들의 구원과 신분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못한 것으로 생각하여, 유대주의자들이 요구한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받아드리고자 하였다. 이것은 사실상 교회의 설립자인 사도 바울과 그가 그들에게 전한 복음을 떠나는 것이었다.

 

바울은 인편(人便)을 통하여 자신이 개척한 갈라디아교회에 자신의 사도성과 복음을 폄하하는 유대주의자들이 찾아왔다는 것과, 그들이 자신이 갈라디아교인들에게 가르쳤던 것과는 다른 메시지를 갈라디아교인들에게 전달하였다는 것과, 그리고 갈라디아교인들 중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들의 가르침에 유혹을 받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떠나려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바울은 너무나 빠른 갈라디아교인들의 변절에 당황하고 분노하였다. 그러면서 어떻게 갈라디아교회문제를 빠르게 수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고심하였다.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당장 그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책망하고 문제를 수습하여야 하겠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갈 수 없기에, 자신을 대변할 수 있는 편지를 급히 써서 인편으로 보내는 것이었다. 그렇게해서 사도 바울이 AD 49년 혹은 52년경에 쓴 편지가 바로 갈라디아서이다.

 

전통적인 접근에 따르면 바울이 본 갈라디아교회들의 위기는 누가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 곧 아브라함의 후손인가하는 신분의 문제와 이 신분을 결정하는 조건에 관한 문제였다.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의 신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주어진다는 메시지를 전한 반면에, 유대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아니라, 거기에 덧붙여 할례와 모세의 율법과 유대교절기에 대한 순종이 추가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바울이 볼 때 갈라디아교회 안에 제기된 문제는 바로 바울 자신의 사도직과 그의 복음의 사활이 걸려있는 중대한 문제였고, 그의 복음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사건의 존폐가 달려있는 문제였다. 왜냐하면, 만일 할례와 모세의 율법이 하나님의 언약백성의 신분을 결정하는 구원과 의의 수단이라고 한다면, 예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무의미한 것이 될 것이고, 성령의 선물도 아무런 가치 없는 것이 될 것이고,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은 거짓된 사도가 될 것이고, 자신의 과거, 현재는 물론 미래의 모든 이방인 선교사역도 함께 무너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교회의 근본 문제를 크리스천 신분과 조건의 문제, 구원론 문제로 보는 전통적인 접근을 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의 중요한 근거를 주로 갈라디아서에 대한 전통적인 3등분의 구조분석, 즉 1-2장의 바울의 자서전, 3-4장의 복음과 율법의 대조, 5-6장의 윤리적 권면에서 찾고, 그리고 이러한 관점에서 갈라디아서 전체를 이해하려 한다. 이들은 갈라디아서 1-2장에 나타난 바울의 자서전의 주요 기능은,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교회에 와서 바울의 사도직과 그의 복음을 훼손하였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유대주의자들의 거짓된 주장에 대항하여 자신의 신적 사도성과 신적 복음을 변증하는데 있다고 본다. 이들은 갈라디아서의 중심부를 차지하면서 복음과 율법 문제를 취급하는 3-4장을 갈라디아서의 가장 핵심부분으로 보면서, 갈라디아교회의 근본문제가 신분의 문제이며, 따라서 갈라디아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도 신분의 문제와 관련된 구원(의/하나님의 백성)문제이라는 자신들의 주장을 정당화하는 결정적인 근거로 삼는다. 즉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교회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대신 모세의 율법을 하나님의 언약백성과 아브라함의 자손들이 되는 결정적인 조건으로 제시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갈라디아서 3-4장에서 이들의 주장에 반대하여, 자신의 복음의 핵심적인 메시지인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만이 크리스천의 신분/구원(의/하나님의 백성) 문제를 결정하는 수단임을 재강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전통적인 접근자들은 갈라디아교인들에 대한 윤리적인 권면을 담고 있는 5-6장이 3-4장의 내용과는 다르다는 점을 들어, 갈라디아서의 필수적인 부분이라기보다도 일종의 부록으로 보고자한다. 왜냐하면 바울은 갈라디아서 3-4장에서 사실상 갈라디아 교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핵심적인 메시지를 다 제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갈라디아 5-6장은, 이들의 입장에서 볼 때, 갈라디아교회의 근본문제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그리고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바울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파악하는데 있어서도, 별다른 중요성을 지니지 못한다. 갈리다아서 5-6장은 로마서, 에베소서의 경우처럼 바울의 서신들이 종종 서신의 후반부에서 윤리적인 부분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바울이 갈라디아교회의 앞날을 생각하면서 추가한 목회적 권면에 속한다.

 

3. 전통적 접근의 문제점

 

갈라디아서에 관하여 전통적으로 많은 주석가들과 학자들이 생각해 온 이와 같은 주장들의 문제점은 없는가? 과연 갈라디아교회의 근본 문제가 신분의 문제이며, 따라서 율법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한 사람의 신분을 결정한다는 이신칭의의 교리를 갈라디아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로 보아야하는가? 그리고 갈라디아서 5-6장의 중심적인 내용인 육이 아닌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은 핵심적인 메시지가 아닌 일종의 목회적인 부록에 불과한가? 갈라디아서에 대한 3등분의 구조 분석과 그 기능 할당이 정당하다고 보아야하는가? 1-2장에 나타난 바울의 자서전의 주요 기능은 과연 바울의 사도성과 복음의 신적 기원만을 옹호하는 변증적인 것이며, 갈라디아서 3-4장이 갈라디아 교회의 근본문제와 갈라디아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대변하는 장이며, 반면에 5-6장은 갈라디아 교회 문제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갈라디아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파악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없는 장인가

 

필자는 갈라디아서를 가르치고 연구해 오면서 전통적인 갈라디아서의 접근에 적지 않은 문제점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첫째, 전통적인 접근은 소위 바울의 자서전적 부분으로 알려진 갈라디아서 1-2장의 결론에 속하면서 동시에 갈라디아서 3-6장의 문을 열고 있는 안디옥사건(2:11-21)을 충분하게 설명해주지 못하고 있다. 전통적인 접근에 따르면 안디옥사건의 핵심은 갈라디아교회의 문제와 동일한 이방인크리스천의 신분문제이다. 즉 전통적인 접근은 안디옥사건에서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근본원인을 베드로가 바울과 바나바가 목회하고 있는 안디옥교회에 와서 이방인신자들을 유대인의 신분이 되도록 강요함으로써 예루살렘에서 바울과 베드로, 야고보 등과 합의한 이신칭의의 복음(2:1-10)을 거부하였기 때문으로 본다. 하지만 필자가 보기에 이와 같은 전통적인 안디옥사건의 이해는 갈라디아서 본문자체의 가르침(2:11-21)과 일치하지 않는 것 같다.

 

갈라디아서 2:11-21의 본문자체에 따르면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직접적인 원인은 베드로 그 자신이 표리부동한 위선적인 행동을 하였기 때문이다(2:11-13). 베드로가 안디옥교회에 찾아와서 처음에는, 그가 유대인 사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서 합의한 복음의 정신에 따라 유대인과 이방인신자를 구분하지 않고 자유롭게 이방인신자들과 음식을 먹음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신자들이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과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보여주는 행동을 하였다. 그러나 예루살렘교회의 지도자인 야고보로부터 파송받은 어떤 사람들이 안디옥에 찾아오자마자 이방인신자들과 함께 음식먹는 자리에서 일어나 떠남으로서 이방인신자들을 왕따를 시켰다. 베드로의 행동은 안디옥교회의 유대인신자는 물론 목회자인 바나바에게까지 영향을 주어 그들도 동일하게 이방인신자를 왕따를 시켰다. 아마도 베드로 그 자신은 이방인신자를 무시하거나 왕따를 시킬 마음에서보다도, 야고보로부터 보냄을 받은 사람들로부터 그가 유대인 사도로서 이방인과 구분되는 유대인의 삶을 마땅히 살아야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방인과 같은 생활을 함으로써, 야고보 및 예루살렘의 유대인신자로부터 깊은 오해를 받고 있다는 지적을 받았기 때문에 이러한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함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방인 사도인 바울의 입장에서 볼 때 베드로의 행동은, 그 동기와 이유야 어떠했든, 결과적으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별이 없다는 그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살지 않는 위선적인 행동이었음은 물론 그 복음의 진리를 가르치고 전파하는 사도 바울을 폄하하는 행위였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2:14에서 “그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살지 않는 행동을 하였다”(2:14a)다고 하면서, 모든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를 향해, “당신은 유대인임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처럼 살지 않으면서, 어떻게 당신이 이방인들을 유대인처럼 살도록 강요할 수 있단 말이요?”(2:14b)라고 책망하였다. 이처럼 바울이 볼 때 베드로의 문제점은, 그가 바울과는 다른 복음을 가지고 있었거나, 바울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배교적이거나 이단적인 행동을 하였다기 보다도, 오히려 그가 합의하였고, 그가 믿고 가르쳤던 그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살지 않는 위선적인 행동을 하였고, 결과적으로 안디옥에 있는 이방인신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유대인처럼 살지 않는 한, 곧 유대인처럼 할례를 받고, 모세의 율법과 유대인의 절기와 음식법을 지키지 않는 한, 유대인과 동등한 하나님의 백성과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인정받을 없다는 사실을 야기시킨 점에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여야 할 사실은, 한 사람의 삶과 그의 신분은 서로 분리될 수 없기 때문에 베도로의 표리부동한 삶은 결과적으로 이방인신자들의 신분문제를 야기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이 베도로의 행동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자면 안디옥에서 베드로가 처음부터 이신칭의 복음의 진리 그 자체를 거부하거나 이방인신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거부하려는 동기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이 점은 2:15-21의 본문에서 명확하게 들어나고 있다. 즉 바울은 2:15-17에서 이신칭의의 복음을 재진술하면서 문장의 주어를 계속해서 1인칭 복수인 “우리”를 사용하여 베드로와 자신이 동일한 이신칭의의 복음을 믿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사느냐는 문제를 말하는 2:18-21에서는 의도적으로 베드로를 배제하는 1인칭 단수 “나”를 계속 사용하여 베드로가 바울 자신처럼 복음의 진리를 따라 살지 못하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베드로의 문제가 무엇임을 부각시키고 있다.

사도 바울이 안디옥사건(2:11-21)을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편지 가운데 수록한 목적이 사도 베드로를 공격하거나 그를 폄하려는 데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안디옥사건을 거울 삼아 갈라디아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근본문제가 무엇임을 보게하려는 목회적인 목적에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즉 베드로가 예루살렘의 야고보로부터 파송을 받은 할례파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동하지 않을 때 안디옥교회의 일치와 평안이 깨어지고 교회에 위기상황이 일어나게 된 것처럼, 갈라디아교회도 예루살렘교회로부터 온 유대주의자들의 유혹을 받아 바울이 그들에게 가르쳐주었던 그 복음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행동을 하는 순간 교회의 일치와 평안이 무너지는 위기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안디옥사건의 핵심이 이신칭의의 복음의 진리 그 자체를 거부하는 배교에 있다기보다도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살지 않는 삶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면, 갈라디아교회의 근본문제도 동일하게 보는 것이 올바르다고 볼 수 있다.

 

둘째, 전통적인 접근은 갈라디아서가 편지를 보내는 바울 자신에 관하여 말하는 1-2장의 "I"(바울) 부분과, 바울이 갈라디아교회들에 관하여 말하는 3-6장의 "You"(갈라디아 교인들) 부분의 뚜렷한 대조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충분하게 설명해 주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갈라디아아서 본문 그자체를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의 어느서신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면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우선 1-2장에 있는 바울의 긴 자서전적인 부분이다. 이점은 갈라디아서 1-2장의 문단들이 대부분 바울 자신을 가리키는 1인칭 단수 “나”로 시작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된다. 예를 들면, 바울 자신의 신적인 사도성을 강조하는 1:1-5의 서문, 갈라디아교인들의 변절을 책망하고 강조하는 1:6-9의 주제문단, 바울 자신의 복음의 신적기원을 강조하는 1:10-12의 문단, 그 자신의 다메섹사건의 체험을 말하는 1:13-17의 문단, 다메섹사건 이후의 바울의 활동을 언급하는 1:18-23, 바울의 예루살렘방문을 언급하는 2:1-10, 그리고 2:11-21의 안디옥 사건 등이다.

이와 대조적으로 1-2장에 이어 나오는 3-6장을 보면 전폭적으로 갈라디아교인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너희들”에 관한 문단이 등장한다. 즉 바울은 3:1에서 “오 어리석은 갈라디아사람들아”라고 하면서, 1-2장의 주인공인 “나”(바울)에서 3-6장의 주인공인 “너”(갈라디아교인들)로 이동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런 다음 바울은 계속해서 갈라디아교인들의 행동과 그들의 처지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예를 들면, 율법의 행위가 아닌 복음을 통한 갈라디아교인들의 성령체험을 언급하는 3:1-5의 문단, 율법의 사람들이 아닌 믿음의 사람들, 곧 갈라디아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에 의해 성령을 받았을 때, 그들은 또한 아브라함의 축복의 상속자들이 되었음을 언급하는 3:6-14의 문단,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 “형제자매들”라고 부르면서 그들이 약속보다 열등한 율법을 추종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말하는 3:15-25의 문단, 갈라디아교인들이 율법과 관계 없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음을 언급하는 3:26-29의 문단,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갈라디아교인들이 이미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강조하는 4:1-7의 문단, 바울이 갈라디아교인들이 자신을 닮기를 요청하는 4:8-20의 문단, 갈라디아교인들이 육을 따라 난 여종 하갈의 후손이 아닌 성령을 따라 난 자유하는 여자 사라의 후손임을 강조하는 4:21-31의 문단, 갈라디아교인들이 종의 멍에가 아닌 성령으로부터 주어지는 자유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는 5:1-12, 갈라디아교인들이 육이 아닌 성령의 가르침을 따라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는 5:13-25의 문단, 갈라디아교인들이 서로 사랑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할 것을 권면하는 6:1-5, 그리고 마지막으로 갈라디아 교인들이 육이 아닌 성령을 위하여 씨를 뿌릴 것을 촉구하는 6:6-10의 문단 등이다. 이처럼 갈라디아서는 크게 1-2장의 “나”부분과 “너”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접근은 갈라디아서를 1-2장의 자선전인 부분, 3-4장의 교리부분, 5-6장의 실천부분 등 3등분하여 3-6장의 “너”부분의 강조점과 통일성을 보지 못하고 있다.

 

셋째, 전통적인 접근은 본의 아니게 갈라디아서의 3-6장의 “너” 부분을 율법이 아닌 믿음을 통한 구원교리을 말하는 3-4장과 육이 아닌 성령에 따른 삶을 말하는 5-6장을 분리시킴으로써 신학과 윤리, 교리와 실천, 믿음과 행위를 서로 분리시키고 있다. 물론 갈라디아서 3-6장을 보면, 3-4장에서 신학/교리/믿음의 부분을 강조하고 있고, 5-6장에서는 윤리/실천/행위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강조의 차이가 나타날 뿐 양자의 구분이나 분리가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5-6장에서 육이 아닌 성령을 따라 살아야 할 것을 강조하고 있지만 육과 성령의 대조는 이미 3:2,3,5,14; 4:6,29에 등장하여 3-4장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이끌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바울은 3:3에서 갈라디아교회의 근본문제를 지적하면서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어찌하여 육으로 끝을 내려하느냐?”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4:31에서 “너희들은 (육을 따른) 여종(하갈)의 자녀가 아닌 (성령을 따른) 자유하는 여자(사라)의 자녀임을 말하고있다. 이처럼 3-4장의 시작과 결론 부분이 5-6장의 핵심적인 단어인 육과 성령의 대조로 되어 있다는 사실은 3-6장이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통합되어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4-4장의 중요한 어휘중의 하나인 율법(할례)이 이미 5-6장에도(5:3,4,14,18,23; 6:2,13) 계속해서 나타나면서 5-6장의 논증을 이끌어가고 있다는 점도 3-6장이 서로 분리되는 장이 아님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접근은 갈라디아서 3-4장과 5-6장을 서로 구분 내지 서로 분리시키고 있다.

 

4. 새로운 대안

 

우리는 지금까지 갈라디아서의 중심메시지와 관련된 전통적인 접근과 그리고 전통적인 접근이 지닌 문제들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전통적인 접근의 문제점들을 해소시킬 수 있는 대안이 무엇인가? 그리고 이 대안이 보여주는 갈라디아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무엇인가? 필자는 갈라디아서를 가르치고 연구하면서 몇가지 질문을 제기하고, 그리고 그 질문들에 대한 답변을 찾으려고 고심하였다.

 

첫 번째 질문은 갈라디아서 1-2장의 중요기능이 무엇인가하는 문제였다. 전통적으로 갈라디아서 1-2장의 주요 기능은 변증적인 기능인 것으로 이해하여왔다. 즉 갈라디아서 1-2장은 갈라디아교회에 찾아 온 유대주의자들이 바울의 사도성과 그의 복음을 폄하하거나 훼손하였기 때문에 바울이 유대주의자들과 갈라디아교인들을 향해 자신의 사도성과 그의 복음의 신적인 기원을 옹호하고 변증하는 기능을 가진 것으로 이해하였다. 갈라디아서 1-2장에서 바울이 자신의 사도성과 복음의 신적기원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과연 바울이 자신의 사도성과 복음을 온호하고 변증하기 위해 갈라디아서 1-2장을 썼는가?

 

이미 살펴본바와 같이 안디옥사건에 대한 세심한 고찰은 바울이 안디옥사건을 통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살지 않은 베드로의 삶과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산 바울의 삶을 날카롭게 대조시키고 있다는 사실은 갈라디아서의 1-2장의 주요기능이 신학적 혹은 변증적인 기능에 있다기 보다도 오히려 실천적 혹은 모범적 기능에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신학적인 문제가 생긴 것은 베드로가 이신칭의의 복음을 직접 거부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이신칭의의 복음을 따라 바르게 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안디옥 사건은, 복음의 진리를 거부하는 반신학적 입장을 천명할 때 무슨 결과가 나오게 된다는 사실보다, 그가 알고, 믿고, 가르치는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살지 않을 때 무슨 결과가 나오게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갈라디아서의 1-2장의 주요기능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G. Lyons의 연구는 적지 않은 도움을 준다. 그는 자신의 학위논문8) 에서 대부분의 고대의 자서전인 작품들이 독자들의 행동에 감동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갈라디아서에 있는 바울의 자서전의 핵심적인 기능은, 바울 자신의 사도성과 복음을 변호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독자인 갈리다아교인들의 행동에 영향을 주려는 모범적이며 실천적인 것에 있었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최근의 몇몇 학자들도,9) 바울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부터 이탈하여 바울의 반대자들과 그들의 복음에 기울고 있는 갈라디아교인들에게, 자신을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신실성의 모델로 제시하기 위하여, 갈라디아서 1,2장에서 자신의 “에도스”(인격)을 확립하려고 하는 데 있다고 보고 있다.

두 번째 질문은 바울이 왜 갈라디아서를 1-2장의 “나”부분과 3-6장의 “너”부분으로 나누고 있으며, 갈라디아서를 이런 구조로 구성하고 있는 주된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사실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주된 동기는 갈라디아교회가 직면한 위기상황을 해결하고 바울이 전한 복음의 진리에 머물도록 하기위함에 있었을 것이다. 만일 바울이 갈라디아교인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긴급하게 편지를 써야할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면, 그가 갈라디아교인들을 설득시키기 위해 편지를 용의주도하게 구성하고 배열하였을 것임이 분명하다. 갈라디아서가 고대 헬라 편지의 표준적인 3가지 구성 요소인 서언(1:1-5), 본론(1:6-6:10), 결언(6:11-18) 등을 갖고 있다는 점은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쓸 때 자기 당대의 표준적인 편지 양식을 활용하였다는 사실을 편한다. 고대의 서신 관례들에 관한 최근의 연구는 헬라-로마사회에는 여러 종류의 서신양식들, 예를 들면, “비난”, “변증”, “충고”, “권면” 등의 편지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10) 이 편지들 중에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것은 취하고 어떤 것은 버릴 것을 촉구하는 권면 편지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부분, 즉 “격려”와 “설득”으로 구성된다. S. K. Stowers는 당시 권면 편지의 경우, “① 편지를 보내는 사람은 수신자의 친구나 혹은 도덕적으로 더 탁월한 (예를 들면, 나이가 많거나, 더 배웠거나, 더 훌륭한 일을 한) 사람이며, ②편지를 보내는 사람은 수신자로 하여금 부정적인 행위의 모델을 따르지 않도록 하기 위해 이와 대조가 되는 좋은 모델의 행위와 관습 (즉 ‘에도스’)을 추천한다”11)고 말하고 있다.

 

이 뿐만이 아니다. 바울 당시 수사학이 기본적인 스피치 기술일지라도, 그것은 종종 서신에서도 활용되었다. 바울이 당대의 헬라 수사학에 대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았는지, 혹은 그가 당대의 표준적인 수사학 교과서를 활용하였는가에 관하여 우리가 확신 있게 말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바울이 적어도 당대의 수사학 기술을 어느 정도 알았으며 편지를 쓸 때 자연스럽게 수사학을 활용하였다고 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12) 헬라의 수사학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을 표준으로 삼고 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권면적 수사학의 모든 양식을 세 가지 기본적인 제목 아래, 즉 ‘에도스’, ‘페도스’, ‘로고스’로 분류하였다(Rhetoric, 1.ii,3).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연설가의 ‘에도스’와 청중의 ‘페도스’는 연설가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설득의 수단 이었다:

 

연설가는 자신의 스피치가 자신을 신뢰할 수 있는 방법과 함께 제시될 때 도덕적인 사람을 설득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반적으로 매사에 믿을 수 있는 품성(‘에도스’)을 가진 사람들에게 보다 더 쉽게, 더 깊게 신뢰할 수 있게 된다. 반면에 믿음을 가질 수 없고 의심의 여지가 있는 사람에 대하여는 우리의 신뢰가 절대적으로 불가능하다... 연설가는 자기 청중을 방편으로 하여, 즉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스피치에 감동을 받을 수 있게 함으로써(‘페도스’) 그들을 설득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제시하는 판단도 우리가 기쁨과 슬픔과 사랑과 미움 등에 의해 감동을 받을 때는 사뭇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사실 때문에, 우리가 말한바와 같이, 현금의 작가들은 독자들의 관심을 붙들기 위한 노력을 쏟고 있다(Rhetoric 1.ii, 4-5).13)

 

이와 함께, G. Lyons가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우리는 수사학의 설득적 전략에 있어서 ‘에도스’가 먼저 나오고 ‘페도스’가 뒤따라 나온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라이온의 말을 빌리면,

 

가장 중요한 증명은 연설가의 ‘에도스’에 대한 논증, 즉 그 자신의 탁월한 도덕적 품성이다. 연설가가 청중을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청중들로 하여금 자신을 신뢰할 수 있게끔 설득 시켜야 한다. 훌륭한 연설가일수록 자신의 ‘에도스’를 서론에 제시한다. 이것은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작용할 수 도 있고, 가끔 이차적인 증명으로 기능 할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연설가의 결론 부분에서 되풀이된다.14)

 

이상의 고찰은 우리로 하여금,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쓸 때, 자기 당대의 권면적인 수사학이나 편지의 양식의 결정적인 요소인 ‘에도스’와 ‘페도스’의 원리와 일치시켜 편지를 배열하고, 구성하였을 것이라는 생각을 강하게 갖도록 한다. 륂 쓸 Wit⁨와 ington은 다음과 같이 덧 붙힌다: “수사학의 근본적인 기능은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데 있다. 따라서 훌륭한 수사학은 ‘페도스’와 ‘에도스’로 나누어진다. 전자는 분노, 두려움. 전민 등과 같은 강한 감정을 포함하고 있으며, 후자는 웃음과 같은 부드러운 감정을 포함한다.”15) 우리가 보기에 갈라디아서 1-2장에 나타나 있는 바울의 “I” 단락은 바울의 ‘에도스’에 해당하고 있는 반면에, 3-6장의 “You” 단락은 갈라디아 교인들의 ‘페도스’에 해당된다. 물론 우리는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쓸 때 의도적으로 이와 같은 수사학의 전략을 활용하였는지 확신 있게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의 분석은 바울의 편지가 ‘에도스’와 ‘페도스’의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즉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바울 자신의 ‘에도스’나누어라 그들의 정체성과 삶에 대한 새로운 결단인 ‘페도스’을 내릴 것을 촉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세 번째 질문은 왜 바울이 3-4장에서는 율법(할례)과 복음(믿음)의 날카로운 대조를 통해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주어진 갈라디아교인들의 새로운 신분을 강조하고, 이와 대조적으로 갈라디아서 5-6장에서는 육과 성령의 날카로은 대조를 통해서 갈라디아교인들이 육을 따르는 삶이 아닌 성령을 따르는 삶을 말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전통적인 접근에 따르면 5-6장은 중심부분인 3-4장을 뒷받침하는 부록에 속한다. 그래서 강조점은 이신칭의의 복음에 따른 갈라디아교인들의 신분의 재확립에 있다. 즉 강조점의 이동은 3-4장 ← 5-6장이다. 하지만 고대 헬라-로마 유대의 문학양식에 있어서 강조점이 주로 전반부보다 후반부에 주어져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예를 들면, 복음서에 나오는 “씨뿌리는 자의 비유,” “용서하지 않은 종의 비유,” “탕자 비유” 등), 갈라디아서의 3-6장의 흐름을 3-4장 → 5-6장으로 볼 수도 있다. 이럴 경우 5-6장이 오히려 3-4장의 클라이막스인 동시에 서신전체의 결론에 해당하고, 갈라디아서의 중심메시지도 자연히 신분중심에서 삶중심으로, 율법과 복음의 대조 중심에서 육과 성령중심으로 이동하게 된다.

 

사실 바울이 갈라디아서 3-4장에서 율법과 복음의 대조를 통해서 갈라디아교인들의 신분을 강조한 것은 그들의 신분자체가 신자에서 불신자나 유대인으로 바뀌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바울이 3-4장에서 갈라디아교인들이 거듭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 안에서 이미 하나님의 자녀와 아브라함의 자녀임을 거듭강조하고 있는 것은 그들의 신분 자체가 바뀌어졌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유대주의자들의 미혹에 의해 자신들의 신분에 대한 오해가 있었음은 물론 그들의 신분에 합당한 삶이 동반되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상 갈라디아교인들의 신분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그들에게 새로운 신분을 가져온 바울의 복음과 성령 주심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신학생이 부적절한 행동을 하였다고 하자. 그리고 그것을 지켜 본 어떤 선배 목사님이 있었다고 하자. 그럴 경우 그 목사님은 그 신학생에게 먼저 신학생이라는 신분을 재인식시키면서 신학생으로서 합당한 행동을 하도록 권면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신학생에 합당한 삶이 동반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신분 문제가 제기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갈라디아교회의 상황도 이와 유사한 것으로 볼 수 없겠는가?

만일 갈라디아교인들이 바울이 전한 그 복음의 진리에 굳게 서서 그 복음에 일치하는 하는 삶, 곧 성령에 따른 삶을 지속적으로 살았다고 한다면 그들의 신분에 대한 위기도, 오해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설사 유대주의자들이 찾아와서 거짓된 가르침으로 미혹하였다하더라도 그들은 미혹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거짓된 가르침을 단호하게 물리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갈라디아교인들이 유대주의자들의 미혹에 쉽게 넘어갈 수 있었던 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건강상태가 좋지 않을 때 쉽게 바이러스에 감연될 수 있는 것처럼, 교회가 건강하지 못할 때 거짓된 교훈이 쉽게 교회에 침투할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이 이미 적지 않은 갈등과 문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즉 갈라디아 5-6장에 나타나 있는 것처럼, 그들이 성령을 따라 살기보다도 육을 따라 사는 경향이 있었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생활보다 오히려 육의 열매를 맺는 부도덕한 행위들이 나타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교인들 사이에 서로 물고 먹는 갈등이 일어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차에 유대주의자들이 등장하여 자신들의 가르침을 따를 경우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이 쉽게 해결될 수 있다고 유혹하였을 것이다. 즉 그들이 도덕를 받고, 모세의 율법과 유대적 절기를 지키는 유대인의 삶을 살 경우 그들이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유혹하였을 것이다.

 

주석가 Betz도 이와 유사하게 갈라디아교인들이 유대주의자들의 유혹에 미혹을 당할 수 있었던 주된 이유는, 갈라디아교회 안에서 일어난 “육”(肉)의 문제, 곧 도덕적 무질서에 있었다고 가정한다. Betz의 시나리오에 따르면, 갈라디아 교인들은 처음에 바울의 복음을 통하여, 곧 복음 안에서 역사 하는 성령을 통하여, 자신들이 이 세상의 초등 원리에 대한 예속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바울의 복음을 통하여 우상 숭배로부터 해방되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당대의 사회적인 커다란 장벽이었던 인종과 신분과 남녀의 장벽까지 해소되는 자유를 누리게 되었다(갈 3:28절 참조). 그야말로 그들은 복음을 통하여 열광주의적인 기쁨을 누리게 되었고, 당대 사회에서 찾아볼 수 없는 종교적, 문화적, 사회적인 장벽이 제거되고 자유의 물결이 넘치는 이상적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울이 그들 곁을 떠난 지 얼마 후에 초기의 열광주의가 식어지면서, 그들은 복음과 성령을 통하여 자신들에게 주어진 그 자유로부터 새로운 문제, 곧 육의 문제인 무질서와 도덕적 문제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 육의 문제를 바울이 전해 준 자유의 복음과 그 복음 안에서 역사하는 성령을 통하여 해결하지 못하고 고심하고 있었다. 바로 이때에 유대주의자들이 갈라디아 교회에 도착하였고, 그리고 그들이, 바울이 해결할 수 없었던 그 문제를 율법을 통하여 해결할 수 있다고 하자, 갈라디아 교인들은 이들의 가르침에 미혹 당하여 유대인의 할례와 율법을 통하여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들의 무도덕적인 문제를 할례와 율법을 수단으로 삼아 극복함으로써 구원의 높은 단계에 도달하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16)

 

J.M.G. Barclay17)를 위시하여 몇몇 학자들은,18) 갈라디아교인들이 유대주의자들의 유혹에 미혹을 당하게 된 근본원인을 그들이 처한 사회적 위기상황에서 찾으려고 한다. 이들에 따르면 갈라디아사람들은 바울의 복음을 받아드리면서 복음을 받아드리지 않은 기존의 소속 공동체로부터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소속 공동체로부터의 단절은 가족과, 친척, 친구, 이웃으로부터의 단절과 소외를 포함하였다. 다수 공동체로부터 단절을 당한 이 소수의 크리스천 공동체는 그들의 사회적 소외와 분리를 채워 줄 수 있는 다른 다수의 공동체와 문화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갈라디아교회에 찾아 온 유대주의자들과 그들이 소속한 유대인공동체와 문화는 갈라디아교인들의 이와 같은 사회적-종교적 소외를 채워줄 수 있는 대안으로 이해되었다. 게다가 유대주의자들이 요구한 할례와 율법 및 유대교의 절기 등은 갈라디아교인들이 바울의 복음을 받기 전 그들이 이교도 신앙에 있었을 때 익숙하였던 여러 가지 제의의식들과 유사하였다. 즉 믿음 외에 그 어떤 종교행위 및 의식을 요구하지 않은 바울 복음을 처음에는 기쁨으로 받아들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의 이교도 신앙생활의 관습 때문에 인간 편에서 무엇을 할 만한 것이 없는가하고 아쉽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유대주의자들이 이러한 필요를 채워주었다는 것이다.19)

 

필자가 볼 때 위의 두 가지 제안이 어느 정도 타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며, 그리고 실제적으로 그런 요인이 작용할 수도 있었음을 어느 정도 인정한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이들이 갈라디아교인들이 유대주의자들의 유혹에 미혹을 당한 결정적인 이유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필자는 갈라디아 3:3이 갈라디아교인들이 유대주의자들의 유혹에 미혹을 당한 주된 이유를 밝혀주는 중요한 구절 중의 하나이라고 본다. 바울이 볼 때 갈라디아교인들의 근본적인 문제점은, 복음의 진리를 알지 못했거나, 혹은 복음의 진리를 받아드리지 못한 데 있지 않았다. 그들은 바울을 통해 복음의 진리를 받아 드렸다. 그들은 복음을 통해서 자유와 해방의 기쁨을 맛보았다. 그리고 복음을 통해서 성령의 능력에 대한 체험을 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바울을 천사처럼, 그리스도처럼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고 있는지, 그리스도의 복음이 자유와 동시에 십자가의 삶을 요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성령은 단순히 열광주의적인 기쁨과 카리스마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전 삶을 사랑과 봉사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는 사실을, 바울이 전한 이신칭의의 복음은 “이미”뿐만 아니라 “아직”의 완성을 기다리고 있는 종말론적인 것임을 충분하게 감지하지 못하였다.

요약하자면, 그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들에게 가져다주는 자신들의 신분과 삶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가지지 못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분과 삶이 성령으로 시작할 뿐만 아니라 성령에 의해 계속 완성되어가야 한다는 사실을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안디옥 사건에서 베드로가 그가 알고, 받아 드린 그 복음의 진리를 따라 행동하지 않았던 것처럼, 복음의 진리를 받아드렸으나 그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살지 못하였다. 그들은 성령을 받기는 하였으나 그 받은 성령을 따라 그리스도 십자가 중심의 삶을 바르게 살지 못하였다. 그들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성령으로 완성에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육체로, 즉 유대주의자들이 요구하는 할례와 율법의 도움에 의해 완성에 이르려 하였다. 그들이 복음을 통해 해방되었던 세상의 초보 원리들과 육의 멍에들에 다시 돌아가려고 하였다. 그리스도를 통해 허물었던 의식들과 장벽들을 다시 세우려 하였다.

 

그래서 바울은 안디옥 사건을 통해서, 특별히 안디옥 사건에 나타난 베드로와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을 통해서 갈라디아 교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문제를 보도록 하였고, 어떤 자의 길을 따라야함을 깨닫도록 하였다. 예수를 믿음으로 즉시 완전한 신분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령으로 믿음을 쫒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는 자”(5:5)가 되어야함을 강조하였고, 그리고 옛 세계의 요소인 육의 길을 버리고 새 시대의 주인공인 성령의 길, 곧 성령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으니 계속해서 성령으로 살아야할 것을 권면하였다.20) 이처럼 갈라디아서 전체의 통합적인 시각에서 볼 때, 갈라디아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전통적인 접근처럼 어떻게 갈라디아교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에 가입할 수 있겠는가 하는 신분의 문제이라기보다도,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살 수 있는가하는 삶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할례와 율법/율법의 행위들을 거부한 것은 단순히 유대주의자들이 그들을 언약백성의 가입조건으로만 제시한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언약백성의 삶의 원리로 제시하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 거듭 거듭 할례/율법/육을 따르지 말고, 오직 성령을 따라 그리스도 십자가 중심의 삶을 살도록 권면한 것이다.

 

5. 나가는 말

 

갈라디아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설사 오랜 기간 동안 수많은 신학자, 주석가, 목회자들이 그렇게 믿고 주장해 왔다고 하더라도, 이신칭의의 신학과 연결된 신자의 신분문제에 한정시킬 수 없다. 말하자면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받는 백성이 될 것인가를 묻는 복음의 수직적이고 개인적인 면에만 한정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의 핵심적인 메시지를 단순히 신학문제로만 규정하는 것은, 바울이 처음부터 갈라디아교회에 잘못된 복음, 잘못된 신학을 가르쳐주었다는 논리에 빠질 수 있다. 갈라디아교회의 근본문제는 그들이 잘못된 복음, 잘못된 신학을 받았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바울로부터 바른 신학, 바른 복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것이 아니라교회에이 바울로의 경우에이이 바울그 복음바울그 신학에 일치하는 교회생활을바울성령을 따라 서로 섬기고 사랑하는 십자가의 삶을 살지 못한 점에 있다. 바른 신학, 바른 복음으로 출발 십자없다는당연히 바른 신학에 의한 삶을 살아야함에도 불구하고, 것이다.렇게 잘못된 여 결과적으로 신학과 교회, 믿음과 생활을 서로 분리시킨 점에 있다. 것이다이신칭의의 신학에 일치한 삶을 살려고 하기보다, 오히려 유대주의자들의 유혹을 받아 율법주의적 삶을 살려고 시도함으로써, 바울이 전파 바울신칭의의 복음울그 자체까잘못훼손하는 위험을 초래 십교회에이다. 섬기고 사았<없다는 울성령을 따라 음으로 출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것이다성령보다다.렇게 에 따른 삶을 추구하여 스스로 . 갈라디아서의신학에 주어진 자신들의 새로운 신분신학훼손시키고 있었교회에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3:3에이 갈라디아 교인들신학향 “너희복음같이 어리석으냐?바른 신학에 의한 삶을 이제는 잘못 것이려하느냐?”라고 책망하였다.

 

오늘 한국교회의 근본 문제점 중의 하나는 바른 복음과 신학을 전수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신학을 삶을 통하여 충분히 구현하지 못한 점에 있다. 즉 바른 복음, 바른 신학을 통해 성령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성령을 따른 삶을 통해, 혹은 교회의 변화를 통해 이 사회를 변혁시키지 못한 점에 있다. 오늘 한국 개신교회의 지도자들과 신자들의 비윤리화와 비복음적인 행동과 삶의 문제는 한국교회의 장래 존폐를 위협할 만큼 심각하다는 말을 듣고 있다. 이 문제는 근본적으로 복음의 통전적이고 사회적이고, 우주적인 측면을 망각하고, 신학과 교회, 신앙과 삶을 서로 분리시킨 잘못에 깊이 연유하고 있다. 이러한 분리는 신약성경이 보여주는 예수의 가르침은 물론, 바울 사도의 가르침과도 일치하지 않는 잘못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한국교회의 침체현상과 관련하여 오늘 우리 교회가 안고 있는 근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 모두 통전적인 복음의 진리를 통하여 우리자신의 신앙과 삶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올바른 가르침을 새롭게 회복하여야 한다. 예수와 사도 바울의 바른 가르침에 돌아가야 할 것이다. 거듭 말하지만, 금일의 한국교회의 문제는 행위를 믿음으로부터, 신분을 그 삶으로부터 분리시킨 신학적 오류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다. 따라서 오늘 우리 교회의 강단과 신학교 강단에서 목회자들과 교수들이 그동안 가져왔었던 잘못된 이원론적인 신앙과 신학을 겸허하게 비판하고 반성하면서, 신앙과 행위, 신분과 삶, 나무와 열매, 은사와 윤리가 결코 분리되지 않는 복음의 진리,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선포하고, 바른 신앙과 신학을 정립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그동안 잘못 생각해왔던 목회자들과 교인들의 의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교회 안에 제 2의 종교개혁운동이 일어나도록 해야 한다. 이런 운동이 일어나면, 비로소 한국교회와 신자들은 각성하게 되고 변화될 것이다. 우리 교회가 변화되고 기독교 신자의 삶이 새로워질 때, 마침내 병든 한국사회도 치유되고 새롭게 변화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갈라디아서러부터 21세기 한국교회가 배워야할 주된 메시지가 아니겠는가!

 


1)Betz, “In Defense of the Spirit: Paul's Letter to the Galatians as a Document of Early Christian Apologetics," Aspects of Religious Propaganda in Judaism and Early Christianity, ed. Elisabeth Schüssler Fiorenza (Notre Dame: University of Notre Dame Press, 1976), 99.

2) R.N. Longenecker, Galatians, WBC (Dallas: Word Books, 1990), xli.

3)새로운 전망의 바울연구는 E.P, Sanders의 Paul and Palestinian Judaism. A Comparison of Patterns of Religion (Philadelphia: Fortress, 1977)으로 제기되었으나, 그러나 “새 관점의 바울 연구”(the New Perspective on Paul)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이 문제를 폭넓게 부각시킨 것은, James D.G. Dunn, “The New Perspective on Paul," Bulletin of the John Rylands University Library of Manchester 65 (1983), 95-122이다.

4)Sander는 Paul and Palestinian Judaism에서 바울 당대의 유대교를 “Legalism"이 아닌 "Covenantal Nomism"로 규정하였다. Sanders에 따르면,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언약 안에 들어가는 것은(“getting in")은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가 아닌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이며, 그러나 이 언약에 계속 머물기 위해서는("staying in") 율법에 대한 인간의 순종이 요구되며, 인간이 율법을 어길 경우에는 하나님은 심판만이 아니라 다시 속죄의 수단을 제공하는 자비를 보여주신다는 것이다(Paul and Palestinian Judaism, 422). 따라서 Sanders에 따르면 바울 당대의 유대교를 율법을 통하여 구원의 길을 제시하는 율법주의로 보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5)Sanders는 바울의 율법에 대한 비판은 율법 자체가 문제가 있다고 보기보다도 그의 새로운 기독론과 구원론, 곧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기 때문으로 본다. 그의 유명한 말을 따르면, “바울이 발견한 유대교의 잘못은 그것이 기독교가 아니기 때문이며”(Paul and Palestinian Judaism, 550-53), "문제에서 해결이 아니라, 해결에서 문제를 보았기 때문이다”(Paul, the Law, and the Jewish People, [Philadelphia: Fortress, 1983], 68).

6)James Dunn, “The New Perspective on Paul," BJRL 65 (1982-83): 95-122; ”Works of the Law and the Curse of the Law (Galatians 3:10-14)," NTS 31 (1985): 523-42; "The Theology of Galatians: The Issue of Covenantal Nomism," Pauline Theology Volume 1, ed. J.M. Bassler (Minneapolis: Fortress, 1991), 125-146은 바울의 율법에 대한 비판은 그의 선교현장에서 유대인들의 정체성과 경계선의 보루인 율법이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데 걸림돌이 되는 사회적 장애요인이 되는 것을 보았기 때문으로 본다. Dunn의 율법에 대한 사회적인 재해석의 문제점에 관해서는 김세윤, [바울신학과 새 관점] (서울: 엠마오, 2002)을 보라.

7)새로운 바울 연구가 제기한 문제들에 대한 최근의 비판적인 요약을 위해서는 Stephen Westerholm, "The 'New Perspective on Paul' at Twenty-Five," Justification and Variegated Nomis. The Pradoxes of Paul (Grand Rapids: BakerAcademic, 2004), 1-38' Gerd Theissen, "The New Perspective on Paul and Its Limits: Some Psychological Considerations," The Princeton Seminary Bulletin 28 (2007), 64-85; 최갑종, “새 관점의 바울 연구, 다시 보기,” [신약연구] 8/1 (2009): 93-124를 보라.

8) G. Lyons, Pauline Autobiography: Toward a New Understanding, SBLDS 73 (Atlanta: Scholars Press, 1985), 24.

9)예를 들면, R.B. Gaventa, "Galatians 1 and 2 Autobiography as Paradigm," NovT 27 (1984): 309-326; P.J. Grabe, "Paul's Assertion of Obedience as a Function of Persuasion," Neotestamentica 26 (1992): 351-357; B.J. Dodd, "Christ's Slave, People Pleasers and Galatians 1.10," NTS 42 (1996): 90-104.

10) J.T. Reed, "Using Ancient Rhetorical Categories to Interpret Paul's Letters: A Question of Genre," Rhetoric and the New Testament: Essays from the 1992 Heidelberg Conference, ed. S.E. Porter and T.H. Olbricht, JSNTS 90 (Sheffield: JSOT Press, 1993), 294-300; Stanley K. Stowers, Letter Writing in Greco-Roman Antiquity (Philadelphia: The Westminster, 1986), 58-173.

11)S. Stowers, Letter Writing in Greco-Roman Antiquity (Philadelphia: Westminster, 1986), 96.

12) C. Forbes, "Comparison, Self-Praise and Irony: Paul's boasting and the Conventions of Hellenistic Rhetoric," NTS 32 (1986): 23; Ben Witherington III, Conflict & Community in Corinth. A Socio-Rhetorical Commentary on 1 and 2 Corinthians (Grand Rapids: Eerdmans, 1995), 44-48.

13)역시 다음을 보라: Quintilian, Institutio Oratoria, IV.1.7, Loeb Classical Library Vol. 1 (London, 1920): "왜냐하면 그는(웅변가)는 자신이 열정적인 주창자 일 때 보다도 오히려 자신이 절대적으로 신뢰받을 수 있는 증거자일 때 청중들에게 헐씬 더 좋은 인상을 줄 수 있다."

14) Lyons, Pauline Autobiography, 27.

15) Ben Witherington III, Conflict & Community in Corinth, 43-44.

16)Betz, Galatians, 8-9, 28; "In Defense of the Spirit," 105-7; “Spirit, Freedom, and Law. Paul's Message to the Galatian Churches," 145-160.

17)Barclay, Obeying the Truth: A Study of Paul's Ethics in Galatians (Edinburgh: T. & T. Clark, 1988), 68-72.

18) Susan Elliott, Cutting Too Close for Comfort. Paul's Letter to the Galatians in its Anatolian Cultic Context (London: T & T Clark International, 2003).

19) Clinton E. Arnold, "'I Am Astonished That You Are So Quickly Turning Away!' (Gal 1.6): Paul and Anatolian Fork Belief," NTS 51 (2005): 429-449.

20)W. Russell, "The Apostle Paul's Redemptive-Historical Argumentation in Galatians 5:13-26," WTJ 57 (1995): 33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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