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레데 인들은 항상 거짓말쟁이인가?
"그레데 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 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쟁이라 하니 이 증거가 참되도다...." (딛 1:12-13)
본문 말씀은 누구도 쉽게 진리로 받아드리기 어려울 것이다. 아무리 진실하지 못한 사람이라도 어떻게 항상 거짓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레데는 지중해 동편에 위치한 섬으로 디도가 지도자로 그곳 교회 중 한 곳에서 섬겼다. 바울은 저들 교회들에게 장로를 택할 때 책망할 것이 없는 신앙의 인격자로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혹시 전반적인 그레데 인의 습성이 거짓되었다고 해도 신자들은 그렇지 않지 않았겠나? 그런데 바울은 그 말이 참되다고 확증하고 있다(13절).
이 본문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누가 이 말을 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그레데 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이 말을 했다고 하였다. 그가 누구인가? 많은 학자들은 그가 바로 그레데의 에피메니데스(Epimenides. B.C. 630-500).라고 생각한다.1)
그는 고대 세계의 7대 지혜인 중에 하나로 인정받았다.
예를 들면 그들은 피레네의 바이아스(Bias) 스파르타의 킬론(Chilon), 린더스의 크레오볼러스(Cleobulus), 미라이레데의 피타커스(Pittacus), 밀레도의 탈레스(Thales), 그레데의 에페메네데스였다(Plutarch, Lives, Solon XII, 4 - 6, Clement of Alexandria, Stromata I, XIV).2) 그런데 그가 선지자라고 한 것은 이방 세계에서 신들의 대변자란 뜻이요 성경적 의미에서 선지자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는 플라톤(PLATON)에 의해서도 신의 영감을 받은 자요 신들에게 절친한 사람으로 인정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그레데 인들이 인정하는 선지자 에피메네데스의 책 중에서 한 구절을 인용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의 말은 당시에 하나의 격언처럼 통용되었으므로 바울이 그의 책을 구체적으로 읽었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면 그레데 인은 항상 거짓말쟁이라는 에피메네데스의 판단이 나오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그레데 인들은 헬라의 많은 신 중에서 수위의 신인 제우스의 무덤이 그들의 섬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신으로서 제우스는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그 제우스신의 무덤이 우리 섬에 있다고 주장하는 저들은 거짓말쟁이라는 것이었다.3) 그러나 실제로 그레데 인은 성실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교의 도덕가들은 그레데 인은 시실리인과 가파도기아인과 함께 사악하기 그지없는 악인들로 분류하였다. 그래서 거짓말하는 사람을 크레티제인(Χρήτίξεν)이라 불렀는데 이 말이 바로 그레데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니까 그레데 인이 된다는 동사는 거짓말하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었다.4)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그레데에서 좋지 않은 경험을 하게 되어 그 판단이 옳았음을 확신했던 것 같다.5)
그러면 바울 사도는 여기서 그레데 인은 정말 언제나 거짓말쟁이라고 말씀한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 그것은 앞서 밝혔듯이 에피메네데스의 말을 인용했을 뿐 절대적인 의미로 쓴 것은 아니다. 바울은 그레데 교회의 회중 중에 많은 고상한 신자가 있었지만 거짓 스승들이 이런 그레데 인의 경향이 있었음을 단언한 것이다.6)
여기서 그레데 인들과 그의 선지자 에피메네데스는 다같이 모순에 빠진다. 저들은 그들에 대한 에피메네데스의 판단의 진실성을 받아들이거나 혹은 그 비난을 부인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선지자가 거짓말쟁이라고 낙인 찍어야 한다.7)
주
1. 여기 인용 구절은 6세기의 철학자 Epimenides에게서 왔다고 생각하나 어떤 학자들은 그 인용절이 카리마커스(Callimachus)의 Hymn to Zeus
(B.C. 270년경)에 나오기 때문에 카리마커스의 것으로 돌리기도 한다. 그러나 Lock 같은 이는 그 찬가가 카리마커스 이전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 한다. Donald Guthrie, The Pastoral Epistles, p.188
2. Williams Hendriksen, Timothy and Titus, pp.352-353
3. M.T. Brauch, Hard Sayings of Paul. p.274
4. 박윤선, 바울서신, p.579
5. D. Edond Hiebert, Titus(E.B.C. Vol. 11), p.433
6. The Bible Knowledge Commentary, New Testament, p.763
7. D. Edmond Hiebert, Ibid.,
메튜헨리 주석
인사말(디도서 1:1-4)
위의 본문은 본서의 서문으로서 다음의 사실을 보여 준다.
Ⅰ. 저자는 바울이다. 이 이름은 그가 이방인의 사도라는 뜻에서 붙인 로마식 이름이었다(행 13:9, 46, 47). 목회자는 자기의 맡은 바 직분을 보다 잘 완수하기 위하여 아무리 사소한 일일지라도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유대인들은 복음을 거절하였고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후 "사울"이란 유대식 이름은 성경에서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로마식 이름인 "바울"이란 이름만이 나옴을 보게 된다. 본문에 보면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은"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하나님과 관계와 또한 그의 직분을 알게 된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종"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평범한 개인이나 그리스도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목회자를 의미하는 것이다(롬 1:9). 이것은 고귀한 명예이다. 즉 천사들이 받는 영광인 것이다. 그리고 천사들에게 이러한 영광이 주어지는 이유는 그들이 모두 하나님을 섬기는 영적인 존재들로써 결국은 구원의 유산을 받을 사람들을 섬기라고 파견된 일군들이기 때문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복음 사역자들도 천사들과 동일한 영광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또한 바울은 목회자로서는 첫째로 꼽을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로 묘사되고 있다. 즉 주님을 대면하였고 또 주님으로부터 가르침을 직접 받은 사람으로부터 가르침을 직접 받은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가장 높은 직책이란 곧 종의 직분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기독교를 전하기 위하여 택함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를 역시 하나님의 종들이었다. 그들은 자연 종교의 진리들이나 의무들과 일치하지 않는 어떤 다른 이론을 제시하지 않았다. 사도들이 전파한 기독교는 자연 종교의 원리들을 더 분명히 하고 강화시키는 한편 더욱 발전시키고 또한 타락하고 배반한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더해 주기 위한 종교였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하나님의 뽑으신 사람들의 믿음을 도와주기 위하여" 하나님의 종이 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교훈은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선택받은 모든 사람들의 믿음과 일치하는 것이었을 뿐아니라 또한 그들의 신앙과 꼭 같은 그것을 전달하고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들이 있음을 명심하자(벧전 1:2). 또한 성령님께서는 영생에로 택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적절한 귀중한 믿음을 부여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자.
그러므로 이르기를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 복음으로 너희를 부르셨다"고 하였다(살후 2:13, 14). 믿음이란 성화의 첫째 원리이다. 본문에 보면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을 깨우쳐 주기 위하여"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다른 곳에서 복음을 "복음 진리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거룩한 믿음은 오류에 빠지기 쉬운 이성이나 상상의 견해에 근거를 두지 않고 무오한 진리 말씀 자체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이다. 즉 이 진리는 경건한 본성과 경건한 경향을 가지고 있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며 또한 그 자체가 순수하고 또한 믿는 자들의 심령을 정결케 하는 진리인 것이다. 바로 이 진리의 말씀에 근거하여 교훈과 또는 영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가 아닌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참된 경건과 실천적인 신앙을 왜곡하는 영들이나 교훈 또는 불결한 영들이나 교훈은 하나님에게서 유래된 것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모든 복음 진리는 경건에 속해 있는데 즉 하나님을 존경하고 두려워하며 그에게 복종하도록 가르치고 도와 준다. 이 진리는 알아야 되는 동시에 고백되어야 하는 진리이다. 즉 이 진리는 말씀과 실천으로 병행되어야 한다(빌 2:15, 16). 그러므로 이르기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롬 10:10)고 했다. 진리를 안다고 하나 불의한 사람들을 실상 진리를 알지도 못하고 또 믿지도 않는 사람들인 것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지식과 믿음에로 인도하며 경건에 속한 진리를 알게 하고 고백하게 하는 것은 복음 사역의 큰 목적인 것이다. 목회자들의 가르침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 안에서 믿음과 확신을 가지게 하는데 그 목적을 두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본문에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고 하였다(2절).
이것은 복음의 다음 번 목표이다. 즉 복음은 믿음을 생기게 하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소망을 생기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즉 사람들의 생각과 관심을 이 세상으로부터 떠나게 하여 하늘 나라와 위의 일들에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이 복음의 또다른 목표인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믿음과 경건은 영생으로 인도하여 주며 영생에 대한 소망과 확고한 기대를 가져다 준다. 왜냐하면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께서 그것을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거짓이 없고 속임수가 없는 분이라는 사실은 하나님의 명예이다. 또한 이 사실은 그의 신실한 약속에 전 소망을 두고 있는 믿는 자들의 위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런 약속을 하실 수 있었을까? 어떤 이들은 본문의 약속을 하나님의 섭리로 이해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영원한 뜻 가운데 그것을 계획하셨으며 그러기에 그것은 태초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은 본문의 pro. cro,nwn aivwni,wn을 약속의 희미한 윤곽만 제시되었던(창 3:15) 아득한 옛날 또는 여러 해 전이라는 뜻으로 본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도들에게 주신 영생이 약속의 확실성과 그 약속이 오래 전의 것임을 알 수 있다. 거짓말을 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즉 오래 전에 이미 약속하셨던 것이다. 복음이 이같이 일찍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복음의 탁월성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이 복음을 귀히 여겨야 하며 또한 우리 이전 사람들이 받지 못한 이 특권을 우리는 누릴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할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너희 눈은 봄으로 복이 있도다"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이 복음을 오래 전에 약속하셨고(3절)뿐만 아니라 그가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는데도" 만약 복음을 멸시하는 자가 있다면 그가 격렬한 심판을 받아도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으리라.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옛적에 희미하게 윤곽만 제시하셨던 그의 약속을 "때가 되자" 자기 말씀을 전도로 더 명백히 나타내셨는데도 이 복음을 멸시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심판을 받아 마땅하리라는 말이다. 이제 어떤 사람들이 "전도의 어리석음"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존대를 받게 되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전파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이제 바울은 본문에서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고 하였다. 목회는 하나의 위임이다. 아무도 이 명예를 스스로 취할 수 없고 오직 위임된 자만이 지닐 수 있는 것이다. 명령을 받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누구든지 말씀을 전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 전서 9장 16절에 말하기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 하였다. 전도하지 않는 목회자는 누구도 사도의 견습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본문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3절)라고 했다.
전도는 구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일이다. "구주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회개하였을 때 그에게 복음을 전해 준 분이 바로 그리스도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주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동일 인물에 대한 다른 호칭으로 본문은 곧 그리스도의 신성을 밝혀 주는 증거가 되는 것이다(행 9:15, 17; 22:10, 14, 15 참조). 그리고 다시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나타나셔서 그에게 복음을 위탁하셨던 것이다(행 22:17-21). 그러므로 본문의 구주 하나님은 그리스도이시다. 또한 이 "구주 하나님"이란 말씀에서 우리는 삼위 하나님의 일치된 역사를 찾아 볼 수 있다. 즉 아버지께서 성령을 통하여 아들에 의해 구원하신다는 것과 또한 목회자를 보냄에 있어서는 삼위가 다같이 역사하신다는 것을 보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근거하지 않고 인간의 부름에 의존하려는 것은 무익한 일인 것이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일할 수 있도록 능력을 공급하시며 그 일을 하려는 마음을 우리에게 주시고 권위를 주시며 직분을 수행하기 위한 기회를 주신다.
Ⅱ. 이 서신의 수신자.
1. 수신자의 이름이 명시되고 있다. 그는 희랍인 "디도"였다. 그럼에도 그는 믿음과 복음 사역에로 불리움을 받았던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무상으로 주어지는 것이요 능력이 충만한 것임을 명심하자. 그러므로 그의 은총은 이방의 혈통과 이방 교육을 받은 사람도 드셔서 가치있게 쓰시는 것이다.
2. 바울이 수신자와 맺고 있는 영적인 유대 관계가 설명되었다. 본문에 바울은 디도에게 "내 아들아"라고 하였다. 이것을 혈육의 관계를 말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관계를 일컫는 것이다. 바울은 또한 고린도 교인들에게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써 내가 너희를 낳았음이라"(고전 4:15)고 하였다. 목회자들은 자기가 회개시킨 사람들의 영적인 아버지가 된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후에도 그들을 사랑으로 돌보며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본문에서 바울은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아들에게"라고 하였다. 여기서 그가 말한 믿음이란 모든 시대 사람들에게 공통된 것이며, 진리에 대한 믿음이며, 생명을 얻게 하여 주는 믿음이었다. 이 구절은 디도를 위선자들과 거짓 선생들로부터 구별하고 또 그레데인들로 디도를 마치 바울 자신처럼 존경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었다. 즉 디도의 믿음과 생활과 하늘 나라에 대한 교훈을 곧 바울 자신 것과 진배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바울은 자기에게 이토록 귀한 디도에게 서신을 썼던 것이다.
Ⅲ. 디도에 대한 모든 축복을 빌어 주는 기도와 인사. 바울은 본문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4절)라고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것을 알 수 있다.
1. 기원한 축복의 내용. 그것은 "은혜와 자비와 평강이었다." "은혜"란 하나님의 거져 주시는 은총이며 또한 하나님께 용납 받는 것이다. "자비"는 그 은총의 열매로써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이며 죄로 인한 모든 슬픔으로부터 현재와 미래에 자유하게 되는 것이다. "평강"은 자비의 긍정적인 결과이며 열매이다. 즉 이 평강이란 우리 평강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평화하는 것을 말하며 그리고 모든 피조물들과 또 우리 자신들과 평화하는 것을 말한다. 이 평화는 내적 또는 외적 평화를 다 의미하는 것으로 현재와 영원 안에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모든 좋은 것을 말한다. 은혜가 모든 축복의 근원임을 명심하자. 자비와 평강과 모든 선한 것은 이 은혜로부터 나온다. 하나님의 은총 안에 들어가라. 그리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2. 축복의 공급자. 먼저 바울은 축복의 근원으로 모든 선한 것의 근원인 "하나님 아버지"를 말하였다. 모든 축복과 모든 위로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와진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으므로 모든 만물의 아버지가 되신다. 또한 그는 우리를 양자로 삼으시고 중생케 하는 선한 일을 하셨으므로 모든 선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다. 그다음 바울은 축복과 위로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또 얻게 해 주는 길과 수단이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를 말하였다. 모든 것은 아버지로부터 오되 아들을 통하여 온다. 이 아들은 본성으로 주님이시다. 즉 모든 것들의 상속자이시며 또한 구속자가 되시며 주를 따르는 무리들을 명하시고 다스리시는 머리이시다. 모든 만물은 주의 발 아래 있다. 우리는 포로와 같이 주께 잡힌 바 되었으며 또 주께 두려움으로 순종하고 복종해야 한다. 이 아들은 또한 예수이며 그리스도이다. 즉 기름 부음 받은 구세주이며 특별히 우리의 구세주이신 것이다. 그리스도로서 그는 믿는 사람들의 죄와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여 하늘 나라와 행복으로 인도하신다. 여기서 본서신의 서문이 끝나고 본문이 취급되는데 본문은 디도를 그레데 성에 두고 온 목적을 설명함으로 시작된다.
1장: 장로의 자격
1-4절, 사도의 직무
[1절] 하나님의 종이요.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고백한다.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사용되었던 이 명칭은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복종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종은 바울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인다. 그 관계는 복종 관계이다. 바울은 자유자이었지만, 자원적으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복종은 피조물의 마땅한 자세이다. 하나님과 인간은 사실상 친구 관계가 아니고 복종 관계이다. 인간은 피조물이며 흙이요 티끌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대화할 때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창 18:27). 그것이 바른 깨달음이요 바른 고백이다. 그것이 바로 겸손이다. 겸손은 인생이 자신을 바로 알 때 생긴다. 인간의 교만은 자신을 모르는 데서 생기는 어리석은 악이다.
더욱이, 구속(救贖)의 은혜를 받은 성도는 하나님께 더욱 복종하며 살아야 한다. 죄로 인하여 영원히 죽어야 마땅했던 자들을 그의 크신 긍휼로 구원하여 주셨기 때문에 이제 나의 생명은 내 것이 아니고 오로지 그의 은혜의 선물이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내 뜻대로 살 수 있겠는가?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기꺼이 복종하며 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복종에는 '왜 그렇습니까?'라든가 '내 생각에는 이렇습니다' 등의 말이 필요치 않다. 복종에는 침묵이 필요할 뿐이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면, 복종하는 것이다. 바울만 하나님의 종이 아니고 우리 모두도 하나님의 종이다.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요 더욱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바 된 그의 백성이다. 우리는 죄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종이 된 자들이다(롬 6:22).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사도(使徒)'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는 보내신 자의 뜻을 수행하게 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생각대로 말하고 자기의 뜻대로 행동해서는 안된다. 그는 오직 그를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대로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행동해야 한다.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바울은 무엇을 위해 사도가 되었는가? 첫째로, 그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을 위하여 사도가 되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언제 그들을 택하셨는가? 그는 창세 전에 그들을 택하셨다(엡 1:4). 그가 무엇에 근거하여 그들을 택하셨는가? 그는 오직 자신의 긍휼한 뜻을 따라 그들을 택하셨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택한 자들을 위해 피흘려 구속(救贖)하셨고 성령께서는 그들을 다 중생(重生)시키신다. 중생의 증거는 회개와 믿음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속죄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믿음이 중요하다. 참 믿음이 곧 생명이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하나도 잃어버림을 당하지 않고 다 영생에 이를 것이다. 그들만 영생에 이를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에 이를 것이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으나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 요한복음 3:36은 말씀하기를,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했다.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둘째로,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을 위해서이었다. 진리의 지식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 인간이 죄와 심판 아래 있다는 지식,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소식에 관한 지식, 종말에 관한 지식을 포함한다.
'경건함에 속한'이라는 원어는 '경건함에 일치하는' 혹은 '경건함에 이르는'이라는 뜻이다. 진리의 지식은 경건함에 맞는 지식이다. 그것은 경건한 지식이다. 그것은 단순히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지식이 아니다. 진리의 참 지식은 경건 없는 지식, 경건과 상관 없는 지식이 아니고 경건한 지식, 경건으로 나타나는 지식이다.
지식이 중요하다. 인생은 하나님의 지식이 없어서 멸망을 당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고 말씀하셨다(호 4:6).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이 된다(요 17:3).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가르쳤다(벧후 3:18).
[2절]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셋째로,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었다. 영생은 인생의 최대의 소원이다. 누구나 장수(長壽)하기를 원한다. 전도서는, 하나님께서 사람 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말했다(전 3:11). 죽는 것은 허무한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명 자체이시므로 하나님 안에 영생이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영생케 하실 수 있다.
인간은 본래 영생할 존재이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죽음이 왔다. 그러므로 죄사함으로 말미암아 사람에게 영생이 있게 될 것이다. 이미 원리적으로 성도들은 영생을 얻었다. 그들은 장차 영광스럽게 부활하여 영생을 누릴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귀한 소망이며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소망이다.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신, 거짓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진실하시다. 그러므로 그는 믿을 만하시다. 인간에게는 거짓됨이 있지만 그에게는 지극히 작은 거짓도 없으시다. 만일 하나님께 거짓이 있으시다면, 그는 하나님이 아니실 것이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진실하시므로 참 하나님이시다.
영생은 이 하나님께서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다. '영원한 때 전부터'라고 번역된 원어(프로 크로논 아니오니온)는 칼빈 선생의 해석대로 '오래 전부터'라고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로마서 16:25에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永世) 전부터 감취었다가"라는 말씀도 ". . . 오래 전부터 감취었다가"라고 번역될 수 있고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영생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아브라함 등 경건한 선진들에게 약속하셨던 바이었다.
[3절] 자기 때에.
'자기 때에'라는 원어는 '적절한 때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는 시간표가 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이루어진다. 모든 일에는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적절한 때가 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약속을 받았으나 100세에 아들을, 그것도 한 명의 아들을 받았다. 요셉은 17세에 계시적 꿈을 꾸었지만, 30세에 그 꿈이 실현되었다. 다윗은 약 15세 쯤에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삼상 17:13; 민 1:7을 비교하라), 30세가 되어 왕이 되었다(삼하 5:4, 5). 그러므로 우리는 조급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하나님의 말씀은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다. 그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요 구원과 영생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전도'(케뤼그마) 곧 선포 혹은 설교라는 방법을 통하여 나타내셨다. 그리고 이 전도의 일을 바울에게 맡기신 것이다. 이것이 사도의 직무이었다. 전도는 일차적으로 사도에게 맡겨진 임무이었다.
그러나 전도는 또한 모든 성도에게 책임이 있는 일이다.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다 찾아 구원하는 것이 그의 뜻이며 전도의 목적이다. 이것은 전임 전도자들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이 다 중요하게 생각하며 책임을 느껴야 할 일이다. 전도는 남의 일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참여하고 협력해야 할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일이다. 전도를 위해 기도하자. 전도를 위해 헌금하자. 예배당 건축도 이 큰 일인 전도를 위해 의미가 있을 뿐이며,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에 불과하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아버지의 가장 중요하고 긴급하신 이 일에 다 참여하고 힘을 모으자.
[4절]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로 묶는 것은 바로 이 '같은 믿음'이다. '같은 믿음'이라는 원어(코이네 피스티스)는 '공동적 믿음, 함께 가지고 있는 믿음'이라는 뜻이다. 이 공동적 믿음이 피부의 색갈, 언어, 지방색, 사회적 신분, 빈부, 지식, 그리고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을 하나로 묶는 끈이다. 이 공동적 믿음이 바로 사도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옛 신앙' 곧 성경적 신앙이다. 오늘날은 이 신앙이 변질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이 공동적 믿음은 참 교회의 기초이므로 이 믿음이 없으면 참 교회도 없다. 우리는 이 공동적 믿음을 성경 속에서 그리고 바른 신앙의 전통 속에서 확인하고 그 믿음을 굳게 가지고 영생의 소망 안에서 항상 주님을 섬기자.
사도의 직무는 한마디로 전도이었다. 바울 사도는 이 일을 위하여 보냄을 받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다. 그 일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을 위한 것이었다. 그가 전한 바는 '경건에 이르는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에 관한 말씀이었다. 그것이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적으로 믿고 고백하며 소망하고 기뻐하는 하나님의 진리이다. 사도에게만 전도의 사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그 사명이 있다.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은 우리 모두는 이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해야 할 사명을 갖고 있다. 우리의 시간과 힘과 재능과 물질을 바쳐서 전도의 일에 힘쓰며 충성하자.
5-9절, 장로의 자격
[5절]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바울이 디도를 그레데에 남겨둔 이유를 보인다. '부족한 일을 바로잡는 것'은 신앙 사상의 면에서나 교회 행정과 질서의 면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종들은 신앙 지식에서나 교회 행정에서 부족한 점들을 보충하기 위해 필요하다.
또 바울은 디도로 하여금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하였다. '장로'라는 말(프레스뷔테로스)은 '나이가 더 든 사람'이라는 뜻이다. 물론 신약 교회의 '장로'라는 말은 영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 말은 장로가 다른 이들보다 영적으로 그리고 신앙 인격적으로 더 성장한 자이어야 함을 암시한다. '장로들'이라는 말은 한 교회에 장로가 적어도 두 명 이상이 있을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회가 한 사람에 의해 독단적으로 운영되는 것을 방지하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
[6절]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6절부터 9절까지는 장로의 자격에 대하여 언급한다.
이것은 디모데전서 3장의 말씀과 더불어 장로의 자격에 대해 가르치는 말씀이다.
무엇보다, 장로 후보자는 책망할 것이 없는 자이어야 한다. 이것은 사상적으로나 행위적으로 온전한 인격을 의미한다. 그는 사상에 있어서 성경적으로 바른 사상에 서 있어서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하고, 행위에 있어서도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 남을 인도할 자는 자신이 남들보다 나은 인격, 곧 온전한 인격자이어야 한다.
장로 후보자는 또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 이 말씀은 일부일처(一夫一妻)가 하나님의 뜻임을 암시한다. 맨처음에 하나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신 사실에서도 하나님의 그 뜻이 드러나 있다. 결혼한 자는 부부 관계와 결혼 서약에 성실해야 한다. 바른 인격은 가정에서부터 나타난다. 부부 관계에서 불성실한 자는 바른 인격자가 아니다.
장로 후보자는 또한 신실한 자녀를 둔 자라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녀를 신앙으로 바르게 양육한 자라야 한다는 뜻이다. 바른 자녀 교육은 믿음의 한 증거이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부모라면 자녀들을 성경 말씀과 믿음 안에서 바르게, 성실하게 가르치며 양육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자녀를 보면, 그 부모된 자가 얼마나 모범적인 신앙 생활을 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믿는'이라는 원어(피스토스)는 '믿는'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지만, 더 빈번히 '신실한, 성실한, 믿을 만한'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본문은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라고 표현하였다. 방탕은 자신의 의무나 책임, 삶의 목표 등을 잊어버리고 술과 음행 등 육신의 쾌락에 빠진 것을 말한다. 불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부모의 말씀에 다 적용된다. 참된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나며 그 결과는 경건함과 거룩함, 성실함과 단정함이다. 바른 신앙 교육은 이런 자녀들을 만들 것이다.
[7절]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감독'은 장로와 같은 직분이다. 성경 아무 곳에도 감독과 장로가 차등하다는 암시는 없다. '감독'이라는 말(에피스코포스)은 '돌아보는 자, 보살피는 자, 감시하는 자'라는 뜻이다. 장로 혹은 감독은 교회를 돌아보고 보살피며 교인들이 바른 믿음에서 탈선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직분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말은 '하나님의 교회를 관리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것은 단지 재산이나 재정을 관리하는 것뿐만이 아니다. 물론 그것도 관리이다. 그러나 그것은 작은 일이다. 교회의 관리는 일차적으로 교인들의 관리, 영혼 관리이다. 교인들이 믿음 안에서 바르게 생활하도록 돌보는 것이다. 이것이 더 크고 중요한 일이다.
다시 한번 더, 본문은 감독 혹은 장로 후보자가 책망할 것이 없는 자이어야 함을 언급한다. 그는 사상에서나 행위에서나 결함이 없어야 한다. 그는 흠 없는 온전한 신앙 인격자이어야 한다.
장로 후보자는 또한 제 고집대로 하지 않는 자라야 한다. 바른 신앙인은 제 뜻대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자기 주관이나 의견이나 생각대로 무엇을 주장하거나 고집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하고 성경대로 하려 할 것이다. 또 그는 다른 교우들과 뜻을 같이 하려 할 것이다.
장로 후보자는 또한 급히 분내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약 1:20). 사람은 성냄으로 실수하기 쉽고 선한 일을 어그러뜨리기 쉽다. 이 말씀은 사람이 전혀 분내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사람에게 정당한 의분(義憤)은 필요하다. 비진리와 불의를 볼 때 분노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그러나 생각하고 또 생각한 후에 분노해야 하며, 오직 진리와 의를 위해서만 그러하고 단순히 자기 이익을 위해서 그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장로 후보자는 또한 술을 즐기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술을 즐기는 자는 술취하게 될 것이다. 술은 사람을 무책임하고 불성실하게 만든다. 술취함은 사람으로 실수하고 범죄하게 한다. 성경은 술취함을 명백히 정죄한다(고전 6:9, 10; 갈 5:21; 엡 5:18).
장로 후보자는 또한 구타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구타와 징계는 다르다. 징계는 부모가 자녀를 바르게 교육하는 한 방법이다. 성경은 징계를 허용할 뿐 아니라, 오히려 명령한다(잠 13:24; 22:15; 23:13, 14; 29:17).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격한 감정을 가지고 아무 곳이나 또 비열한 방식으로 때리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를 주먹으로 얼굴을 치거나 머리를 때리는 것은 옳은 방식이 아니다. 징계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종아리나 손바닥 등을 때리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고 했다(골 3:21).
부모가 자녀를 때리는 것은 허용되지만,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남편은 아내를 때릴 권한이 없다. 결혼은 남녀의 주종(主從) 관계가 아니다. 사랑과 순종은 자발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이지 강요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남녀는 둘 다 동등한 인격이므로 남자가 여자보다 힘이 더 있다고 해서 그를 구타한다면 그것은 죄악이다.
성도는 자기의 아내 뿐 아니라, 누구라도 때려서는 안된다. 자기 자녀는 예외이다. 또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들의 경우는, 만일 부모가 허락한다면, 매를 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외에는 누구도 때리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폭력은 악이다. 주께서는 오히려 누가 우리의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도 돌려대라고 가르치셨다(마 5:39). 성도는 자신의 노를 참고 인자와 온유의 심정으로 악한 자를 교훈할 수 있어야 한다. 결코 구타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장로 후보자는 또한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더러운 이'는 정당하지 않는 소득을 말한다. 성도는 고리대금업을 해서는 안된다. 성도는 투기성 소득을 바라서도 안된다. 특히 명백히 사회적 악인 땅 투기, 집 투기 등에 관여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정당한 노동의 댓가만을 받으려 해야 한다. 놀면서 먹으려 하지 말고 무엇인가 부지런히 일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 직분자들이 교회의 헌금을 취급할 때도 극히 조심해야 한다. 헌금을 부당하게 개인의 일을 위해 유용하는 자는 큰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리는 돈에 대하여 깨끗하고 분명한 자가 되어야 한다.
[8절]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장로 후보자는 또한 나그네를 대접하는 자이어야 한다. 이 말씀은 그가 이기적이거나 개인주의적이지 않고 남과 나눌 줄 아는 인격자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사랑이며 선이다.
장로 후보자는 또한 선을 좋아하는 자이어야 한다. 온전한 인격은 좋은 인격, 선한 인격이며 선을 좋아하는 인격이다. 좋다는 말은 선하다는 말이다. 선행은 참 믿음의 열매이다.
장로 후보자는 또한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는 자이어야 한다. 근신하는 것은 깨어 있는 것, 정신 차리는 것, 조심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좋은 인격자의 모습이다. 의로운 것은 공명정대하고 정정당당한 것이다. 성도는 항상 정의로운 인격자이어야 한다. 거룩한 것은 죄와 불결을 버리고 깨끗한 것을 말한다. 절제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술의 절제를 의미하지만, 기타 모든 육신적 쾌락에도 적용될 것이다. 비록 선한 것이라도 거기에 지나치게 빠지면 좋지 않다.
[9절]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장로 후보자는 또한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굳게 붙드는 자이어야 한다. 본절 앞부분을 다시 번역하면, "가르침을 받은 대로의 신실한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하리니"이다. 하나님의 바른 말씀은 신실한 말씀, 믿을 만한 말씀이다. 우리는 그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장로 후보자가 특히 그러해야 하는 것은, 첫째로 다른 이들을 바른 교훈으로 권면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바른 교훈을 본인이 믿고 실천해야 남에게도 권면할 수 있다. 자기가 믿지도 않는 것이라면 남에게 어떻게 가르치며 권면할 수 있겠는가?
둘째로, 장로 후보자가 바른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하는 것은 바른 교훈을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바른 진리를 거스려 말하는 자들이 항상 있다. 사탄은 그들의 대장이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그 진리에 대하여 아멘으로 화합하지만, 그것을 부정하고 불신하고 대항하는 교만한 자들이 있다. 그들을 책망하려면 바른 말씀을 굳게 믿는 자이어야 할 것이다.
말씀을 정리해 보자. 장로들, 감독들은 교회를 돌아보고 교인들을 보살피는 직분자들이다. 그들은 한 마디로 요약하여 책망할 것이 없는 온전한 인격자이어야 한다. 신앙 지식에 있어서나 행위에 있어서나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 특히, 그들은 하나님의 바른 말씀, 신실한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이들에게 권면할 수 있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할 수 있다. 이런 자들이 교회의 장로들이 되어야 한다.
또한 이런 말씀은 우리 모든 성도의 목표이다. 우리 모두는 책망할 것이 없는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고 배우고 믿고 소망하고 실천하자.
10-16절, 복종치 않는 자들
[10절]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당시 교회 안에는 복종치 않는 자들이 있었다. 복종은 성도의 미덕이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적 교훈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 복종치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를 부정하고 대항하는 큰 악이다.
또 헛된 말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헛된 말이란 의미 없고 가치 없는 말, 다른 이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는 말을 가리킨다. 성경은, "의인의 혀는 천은(天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고 말씀했다(잠 10:20). 우리 모두는 의인의 혀를 가져야 한다.
또 속이는 자들도 있었다. 속이는 것이 악한 세계의 특징이다. 주께서는, '마귀가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하셨다(요 8:44). 거짓을 좋아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마귀에게 속한다. 또 성경은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지옥]에 참여할 것이며(계 21:8),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새 예루살렘 성밖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했다(계 22:15).
이와 같이 본문은 그레데 교회 안에 복종치 않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들이 많았다고 말씀한다. 그것이 교회의 현실이었다. 지상 교회는 옛부터 문제들이 많은 불완전한 교회이었다. 그것은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의 성화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리고 사탄의 활동이 맹렬하기 때문에 그러했다. 오늘날도 교회의 모습은 불완전하다.
복종치 않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들이 특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였다. '할례당'은 유대교에서 온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생각 때문에 은혜의 복음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이해가 부족했던 것 같다. 진리의 지식이 없는 자들이 복음 운동에 대항한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바른 지식이 있는 자는 복종하는 자가 될 것이다.
[11절]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
저 복종치 않는 자들은 또한 더러운 이를 취하려 하는 자들이었다. 진리를 모르는 자들에게는 대부분의 경우 세상의 이익이 삶의 전부이다. 돈이 그들의 삶의 중심이다. 더욱이, 그런 자들 가운데는 부당한 방법으로라도 물질적 부요를 얻으려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탐심은 우상숭배이며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이다(골 3:5; 딤전 6:10). 우리는 물질 생활에 있어서 욕심이 없고 깨끗하고 정정당당해야 한다.
또 저 복종치 않는 자들은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었다.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친다'는 말은 '가르쳐서는 안될 것들을 가르친다'는 뜻이다. 참된 교사는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며 가르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지 않는 자이다. 그러나 악한 교사는 정반대이다. 그는,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지 않고 가르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는 자이다.
그 결과, 그들은 '집들을 온통 엎드러쳤다.' 즉 그들은 믿는 가정들의 믿음을 어지럽히고 파괴시켰다. 아마 그들은 집집마다 심방하며 그런 일을 했을지 모른다. 악한 자들은 종종 그런 식으로 악을 행한다. 말의 영향력은 크다. 좋은 말은 좋은 영향을 주지만, 나쁜 말은 나쁜 영향을 준다. 이단은 누룩같이 퍼진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저희의 입을 막아야 한다'고 말한다. 불순종의 말, 헛된 말, 속이는 말,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막아야 한다. 그것은 교회를 어지럽히고 파괴시킨다. 그러므로 악한 말이 교회 안에서 퍼지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런 말을 하는 자는 교회에 앞세우지 말아야 한다. 그런 자는 교회의 직분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오직 순종의 말, 가치 있는 말, 진실한 말, 해야 할 말만 해야 한다.
[12절]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
그레데인의 한 선지자가 말한 바와 같이, 그레데인의 풍습과 기질은 좋지 않았다. 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남을 해치는 악한 자들이며 먹기를 좋아하고 게으른 자들이었다. 좋은 풍습이든지 나쁜 풍습이든지 사회 분위기는 그 사회의 사람들의 기질을 형성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백성이 있는 반면, 신용을 생명처럼 생각하는 백성이 있다. 또 근면한 백성이 있는가 하면, 게으른 백성이 있다. 그레데인들은 대체로 거짓되며 악하며 게을렀다. 그레데 교인들도 그런 기질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13-14절]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이제 디도에게 그레데 교인들을 엄히 꾸짖으라고 말한다. 아첨은 상대방의 영혼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지만, 책망은 진정한 사랑의 표현이다. 성경은, 훈계를 듣는 것이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며 목의 금사슬이라고 말씀했고(잠 1:8, 9), '면책(面責)은 숨은 사랑보다 낫다'고 했다(잠 27:5). 우리는 책망을 들을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책망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사람이 책망을 통해 잘못을 고치고 바른 신앙 인격자가 된다. 둘째는, 저희로 하여금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들과, 진리를 배반하는 자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잘못된 말을 듣는 것은 신앙을 해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책망을 통해 그런 일에 빠지지 않게 된다.
[15절]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씻음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 음식물에 있어서도 더러운 것이 따로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아직도 죄와 불결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다. 저들은 구약의 율법대로 여전히 음식물 중에 어떤 것은 깨끗하고 어떤 것은 더럽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 저희의 생각과 양심이 더러운 것이다.
[16절]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저 복종치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시인한다. 즉 하나님을 안다고 공언(公言)한다. 그러나 그들은 행위로 하나님을 부정한다. 다시 말해, 그들의 말과 행위, 신앙고백과 생활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진실한 믿음은 반드시 선한 행위로 나타난다. 우리는 언행(言行)이 일치하고 신행(信行)이 일치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고백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가증한 위선에 불과하였다. 차라리 그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입으로는 안다고 말하면서, 행위로는 그를 부인하니, 그것은 가증스러운 일이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께 복종치 않는 자들이었다.
또 그들은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들이었다. 신앙의 결과는 선행이다. 물론 모든 선행이 다 참된 신앙의 증거는 아니다. 참된 신앙이 없이도 어느 정도의 선행이 가능하여 보인다. 슈바이처나 테레사 수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고 생각되지만, 많은 진실한 선행을 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 안에서는, 선행이 참 신앙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라는 이가 모든 선한 일을 버린다면 그는 참으로 믿는 자가 아니다.
10절로 16절까지의 본문은 현실 교회 안에 때때로 복종치 않는 자들이 있음을 증거한다. 그들은 헛된 말과 거짓말을 하며 더러운 이를 구하며 해서는 안될 말을 하여 믿는 가정들을 온통 어지럽히고 파괴시키기도 한다. 또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공언하지만 행위로는 그를 부정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가증한 자들이며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들이다.
진실한 성도들은 그런 자들의 헛된 말, 거짓말, 정당치 않은 말이 교회와 성도들의 가정들의 믿음을 파괴시킨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의 입을 막아야 한다. 교회는 그들로 하여금 말하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또 참된 성도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말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목사와 장로들은 그들을 엄히 꾸짖어야 한다. 책망은 참된 사랑에서 나온다. 잘못된 말, 거짓말, 악한 말을 하는 자들은 책망을 들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바른 길로 돌이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항상 바른 말을 듣고 바른 말을 하고 흠과 점 없이 믿음에 온전히 서야 한다. 바른 지식과 바른 삶--그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우리는 바른 지식을 가진 참 신자가 되기를 원하며, 순종과 선행의 열매를 맺는 바른 삶을 살기를 원한다. 바른 지식과 바른 삶을 위해 우리 모두 하나님께 기도하며 날마다 힘쓰자.<김효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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