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예수를 어떻게 이해했나? 송영목 목사
송영목 / 고신대 대학교회담임, 부경성경연구원장
예수 그리스도는 바울 신학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게할더스 보스(1998:473-474)는 “바울의 구원론적 가르침이 가장 광범위하게 복음을 기독론화시킨다”고 말한다. 즉 바울은 인간의 구원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리스도와 연관시키며,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 제시한다. 실제로 바울은 회심과 중생 그리고 주관적인 경험조차도 기독론적인 용어(예.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살고, 재위하며, 강림하는 것)로 설명한다. 갈1:15-1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신칭의와 화해의 관점에서 복음을 논하기 전에 복음을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라고 설명한다(롬 1:2-4). 바울은 ‘복음’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 있다. 바울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복음을 요약하고 있다(롬 1:1-4; 고전 2:2; 15:3-5; 갈 6:14). 사실 예수님이 전한 복음이나 바울이 전한 복음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 나라’는 바울이 그토록 강조한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도래한 것이기에, 바울의 ‘하나님 나라 복음’과 일치한다(롬 14:17; 고전 4:20; 6:9-10; 15:24, 50; 갈 5:21; 엡 5:5; 골 1:13; 4:11; 살전 2:12; 살후 1:4-5; 딤후 4:1; 4:18). 롬 1:1-4절과 고전 15:3-5절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이 ‘성경대로’ 이루어진 것임을 강조한다. 즉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발견한 믿음을 아브라함의(언약적) 믿음의 성취로 보았고, 예수님을 (새)이스라엘을 위한 그리고 이스라엘을 통한 하나님의 목적들의 최종 지향점-종착지(telos)이자 절정으로 여겼다(롬 4, 9-11). 이처럼 바울은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의 복음을 ‘약속의 성취’의 관점에서 바라볼 뿐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총체적으로 새로운 구원의 질서가 도래한 것으로 이해한다(고후 5:17; 갈 6:15). 바울이 종종 사용하는 ‘그러나 이제는’(But now, 롬 3:21)라는 용어는 구약과 구별되는 예수님 안에서 성취된 현재적인 구원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극적이고 결정적으로 화목케 된 행위는 가장 중요하고 기쁜 소식이었다.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구약의 종말론적인 대망이 성취되었기에, 이방인들이 교회로 모여들고, 죽은 자들의 부활이 부활의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와 보증이신 성령 안에서 성취되고 있다(마 1:15; 눅 4:19; 갈 4:4; 고전15:20; 고후 6:2; 보라. 데이비드 웬햄, 2002:85-111). 그렇다면 바울은 예수님을 어떤 분으로 이해했는가? 혹자는 역사적 예수님(historical Jesus)을 당대의 위선과 확고하게 굳어버린 종교적인 태도와 제도들을 비판하는 혁명가적 성향을 가진 단순한 유대인 농부(a revolutionary Jewish peasant)라고 본다. 여기에 바울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면서 그러한 기억을 헬라의 신비종교와 헬라 사상들과 접목시켜서 신화화했다고 주장한다. William Wrede는 1907년에 바울을 ‘기독교의 제 2의 창시자’라고 부르면서, 바울은 유대인 예언자인 예수님을 이방인의 하나님으로 바꾸어 놓았고, 기독교를(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현재의 모습으로 만들어 놓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Hyam Maccoby (1986)와 Karen Amstrong (1980)과 같은 이에게 바울은 실질적인 기독교의 창시자(founder of Christianity)였던 셈이다. 지금도 이렇게 바울을 ‘고등 기독론’(high-Christology)의 창시자로 만드는 경향은 여전히 있다. 환언하면, 바울은 순수하게 예수님을 추종했던 것이 아니라, 기독교에 온갖 개념들과 강조점들을 도입함으로써 원래의 단순했던 예수님의 종교를 복잡하게 만든 혁명가였다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역사적 예수 탐구의 편향적이고 단편적인 경향을 극복할 뿐 아니라, 예수님의 생애에 나타난 기독론과 바울 서신에 나타난 기독론 사이에는 상당한 연속성이 있음에 주목한다면 바울을 기독교의 창시자로 보는 실수를 방지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의 창시와 관련하여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그 이하도 그 이상도 아니다(롬 1:1; 참고. 데이비드 웬햄, 2002:20, 62; 레이몬드 브라운, 2003:621-622). 바울이 사용한 기독론적인 호칭을 통해서 간략히 살펴보자. 1. 하나님의 아들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the pre-existent] Son of God)은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관계를 서술하는 표현이다(갈 2:20; 4:4, 6; 골 1:13; 살전 1:10). 애굽의 바로는 물론, 앗수르와 바벨론의 군주들도 신의 아들이란 호칭을 가지고 있었기에, 종교사학파는 이 용어가 초대 교회의 헬라적 혹은 이방적 배경에서 나온 것으로 보지만, 오히려 바울의 유대-구약적 배경이 더 설득력 있다(참고. Du Plessis, 1988:208). 신약에서야 우리는 처음으로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 사이의 분명한 동일시를 본다(마 16:16; 막 14:61; 참고. 창 6:2; 출 4:22; 욥 1:6; 시 29:1; 사 1:2; 에녹 105:2; 4QFlor; 1QSa 2:11-12). 바울이 성도를 예수님의 형제들로 보고 있기는 하지만, 예수님이 유일한 하나님의 (신적)아들로서의 우선성을 가지고 있고(his own Son, 롬 8:32), 믿는 자들은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가족으로 편입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롬8:17, 29). 사실 다메섹 회심 이전의 바리새인 바울에게 있어서, 그의 야웨 유일신 개념 때문에,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 하나님에 대한 예수님의 관계의 독특성은 바울이 롬 1:7절에서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고 말할 때처럼 하나님과 예수님을 한 구절에 묶음으로써 분명해 진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이런 관계는 영원 전으로 거슬러 간다(빌 2:5-8; 골 1:15-16).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창조 사역에 참여하였고, 장래에 만물을 하나님의 발아래 굴복시킬 하나님의 영원한 대리인이었다(고전 15:28). 드물게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지칭하기는 하지만(롬 9:5; 살후 1:12; 딛 2:13), 바울은 예수님을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으로 보면서도 그러한 표현을 삼가고 지존하신 성부와 이에 순종하시는 성자를 구분한다. 2. 인간 예수님 롬 1:3절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신 분’이라고 소개한다. 여기서 육신은 죄가 아니라, 육체적인 통상적인 삶을 지칭한다. 율법 아래(갈 4:4),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다윗의 혈통적 유다지파의 왕적 존재로 오셨다. 이와 관련하여 바울의 대적 중에서 가현설 옹호자(docetist)가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참조. 빌 2:6-11). 3. 그리스도 바울은 롬 1:3절에서 예수님은 다윗 가문에서 나신 ‘메시아’라고 소개한다(롬 9:5). 바울은 예수님을 왕으로 직접 소개하지 않으며, 예수님이 다스리신다는 말도 거의 하지 않는다. 하지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 혹은 ‘그리스도 예수’라는 호칭을 즐겨 사용한다(롬 1:4; 고전 16:24 등). 바울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메시아적 의미를 잃지 않은 체 예수님의 칭호로 사용된다. 롬 9-11장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세상 전체의 구원자라기보다는, 특별히 이스라엘의 메시아로 본다. 따라서 그리스도라는 호칭은 이스라엘과 교회에 대한 예수님의 관계를 시사해 준다. 첨언하면, ‘그리스도 예수’라는 용어는 고유 명사로 바뀌었는데, 바울 서신에서 이 용어가 ‘호칭’(title)인지 아니면 ‘고유 명사’ (proper name)로 의도 되었는지 구분이 안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Du Plessis, 1988:202). 바울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일체적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엡 5:5절에서 ‘그리스도의 나라’를 ‘하나님 나라’와 연결시킨다. 여기서 놓칠 수 없는 용어는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그리스도와 함께’(with Christ) 그리고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Christ for us; 우리를 대신하신 그리스도)이다. 이 용어들은 경험적인 신비주의(experiential mysticism)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오히려 그리스도의 집합적인 인격(corporate personality, 혹은 the whole church person)과 관련되는데, 그리스도와 그분에 의해 대표되며 동시에 그분의 구속의 효력을 받는 성도 사이의 긴밀한 관계성을 강조한다(Du Plessis, 1988:213). 그리스도의 대표성 혹은 집합성은 ‘먼저 나신 자’(골 1:15-20), ‘으뜸, 근원’ (archē), ‘첫 열매’(aparchē, 고전 15:20), ‘머리’(롬 12; 고전 12; 엡 4:15절 이하)에서도 볼 수 있다. 4. 주 바울이 예수님을 서술하기 위해 가장 흔히 사용하는 칭호는 ‘주’(kyrios)이다. 롬 4:8절과 9:28절 이하 그리고 고전 3:20절에서 ‘주’는 성부 하나님을 가리킨다. 바울에게 있어서 ‘주’는 ‘자신의 주인’이라는 뜻을 가진다. 즉 바울 자신은 예수님의 노예라는 것이다(롬 1:1; 고전 4:1; 16:23; 빌 1:1). 바울은 주로 kyrios 앞에 정관사 ho를 붙여서 예수님에게 적용한다. 흥미롭게도, 바울은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 안엷 있다고 말하는 반면에, 그리스도인들의 윤리적 책임을 말할 때는 그리스도인들이 ‘주 안엷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주는 지시하는 분이며, 복종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바울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보았기에 주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바울은 때로 구약의 여호와에 관한 말씀을 예수님에게 적용한다. 이 사실은 LXX가 ‘야웨’를 ‘퀴리오스’로 바꾸어 쓰고 있음을 바울이 알고 있었음을 암시한다. 예를 들어, 바울은 빌 2:5-11절의 송영에서 야웨에게 모든 무릎이 꿇려 질 것이라는 사 45:23절의 표현을 반영하면서 예수님에게 적용한다(특히 11절). 따라서 바울은 ‘주’라는 호칭을 통해서 영광받으시고 승귀하신 주님으로서 예수님의 주권을 증명하려고 했다(Du Plessis, 1988:212). 롬 10:9절과 고전 12:3절도 예수님을 '주'라고 칭한다. 그리고 고전 16:22절의 아람어 ‘마라나타’에서 ‘mr’ 혹은 ‘mr’는 ‘kyrios’와 동의어이다. 5. 인자와 둘째 (마지막, 새로운) 아담 복음서에서 자주 사용된 ‘인자’라는 호칭은 복음서 이외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았다. 초대교회는 표면적으로 ‘사람’을 가리키는 모호한 표현인 인자를 예수님에게 적용하는데 약간 주저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바울은 시 8:4-6절을 예수님에게 적용하면서, 히 2:5-8절에서 인자 칭호를 사용한다(참고. 빌 2:7; 단 7:13). 그리고 바울은 예수님을 새 아담이라고 부른다. 롬 5:12절 이하에서 바울은 인류를 죄 아래 놓이게 한 아담의 죽을 죄를 인류에게 구원과 칭의를 가져다주신 예수님의 의와 순종과 대비시킨다. 고전 15:45절 이하에서 바울은 첫째 아담의 유한한 생명을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의 부활 생명과 대조시킨다. 성육신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은 아담이셨지만, 부활로는 둘째 아담이 되셨다. 예수님이 둘째 아담인 동시에 마지막 아담이시기에, 그리스도의 부활생명을 받은 성도에게는 현재 누리고 있는 영생의 양식과는 다른, 예를 들면, ‘셋째 아담’과 같은 또 다른 생명의 양태가 있을 수 없다. 마지막 아담과 관련되는 다른 사상은 '(보이지 않는)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그리스도이다(고후 4:4; 골 1:15). 첫 아담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이 부분적으로 나타났다면(창 1:16 이하),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온전하신 형상이 계시되었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는데 실패한 아담과는 달리,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 안에서 만유의 주재권이 성취되었다(Du Plessis, 1988:216). 빌 2장에서는 하나님과 동등하게 될 욕심을 가진 첫째 아담의 불순종과 정반대에 계시는 낮아지신 예수님이 둘째 아담으로 암시적으로 등장한다(참고. 데이비드 웬햄, 2002:171-187). 이상의 논의를 종합해 보면, 바울의 선포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셨다. 그 분은 선재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성부와 완전한 영광을 공유하신다. 따라서 바울은 예수님에게 ‘주’라는 호칭을 붙이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교회의 머리시요, 하나님의 영광의 형상이시며, 부활의 첫 열매이신 예수님은 그 집합적 인격 안에 교회를 포함하고 있다. |
바울신학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 연구
목 차
Ⅰ. 서 언
Ⅱ. 구약성서에서의 의(tseteq)와 신약성서에의 의개념
Ⅲ. 신약의 다른기자들의 의와 바울의 의견해 비교
Ⅳ. 바울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 개념
Ⅴ. 결 언
참고문헌
Ⅰ. 서 언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선언하며 롬3:24-26절에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제로 세우셨으니 이를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도 의로우심을 나타내서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하였다.
루터는 일찌기 이 말씀이 주는 중대성을 지적하며 갈파하기를 "주의하라 여기에 이 서신과 전 성서의 참된 중심과 진수가 있다"고 하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기이한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듣게 된다. 그러나 이 서신에서 전개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의" 개념은 결코 근본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이 개념은 실로 신·구약성서를 일관하여 흐르는 근본적, 성서적 개념의 하나로 다양한 의미로써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서를 "하나님의 의의 책"이라고 부르는 이(E, Brunner)도 있다. 이것은 성경 특히 로마서의 주제이며 복음선포의 주제였다.
그런데 이 개념은 여러 방향의 각도와 방법으로 해석되어 바울이 사용한 어떠한 개념보다도 더 치열한 논쟁을 일으켜 왔다. 이는 [의]개념이 가진 의미의 중대성과 그 난해성을 표시하는 것이다. 바울서신을 연구하는 신학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하는데 특히 J. Denney는 "바울의 문서에서 매우 빈번한 회수로 등장하는 [의] 용어는 그 사용하는 사실만을 가지고도 그 말이 지닌 의미와 중대성이 바울에게 얼마나 켰다는 것을 암시한다."고 말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소식을 오직 "신앙에 의한 의인(義認)의 소식으로 해석 전개하고 있다."
H. J. Holtzmann은 바울의 하나님의 의 개념을 바울의 기독교 사상에 대한 [술어적 생략]이라고 잘라 말한 바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와 특히 로마서에서 그의 기독교 서신이 전체적 본질을 표시하는 술어로서 "하나님의 의"개념을 사용했다. 그렇다면 이를 바로 이해하는 것은 바울 사상을 바로 이해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될 것은 틀림이 없을 것이다.
바울이 의 개념으로서 뜻한 것은 참으로 무엇이었을까? 이는 단순히 신학도 만의질문이 아니다. 하나님과 의의 간계에 대해서 문법적으로도 대체로 세 갈래의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님의 의]의 소유격은 다음과 같은 여러가지 관계를 표시한다.
①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즉 의로운 존재로서 의 신의 성품을 뜻하는 의다.(소유의 소유격의 의미에서)
② 하나님이 사람에게 요하는 것으로서의 의와 그의 요구에 대한 대답으로서 하나님이 승인할 의로 볼 수 있다.(자격이 소유격 의미에서)
③ 하나님이 그 기원이요 창작자인 의로 볼 수도 있다.(저작의 소유격의 의미에서)
그러나 이 개념은 단순히 문법에 국한시켜 기계적인 해석으로 규명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오르겐 이후 기독교회의 고전적 신학자들은 대개 바울 사상의 분위기를 조성한 히브리적 성서 관념에 대해선 내적인 통찰력이 거의 없는 희랍사람들이었다. 그후 로마의 법률사상에서 유래된 관념이 우세하여져서 바울의 개념은 잘못 채색 당하였다. 더욱 중세기와 종교개혁시대에는 저들의 형편에 따라 재해석이 되어 고대의 희생의 제사 개념은 그야말로 제거되어서 제사 관념에서 유래된 의 개념은 바로 이해되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이와 비슷한 이유들 때문에 바울 사상은 알 수 없는 것이 되며, 또 시대적, 사회적인 또는 전통적인 신학사상을 바울에게 강제로 끌어넣는 일도 있어 더욱 혼란을 조성해 왔다. 이와같은 사정은 오늘날에도 별로 다름은 없지만, 그러나 고대희랍과 히브리 언어와 사상에 대한 활발한 오늘날의 새로운 연구는 바울 학도들 손에 좋은 도구를 마련해 줌으로써 우리가 이전보다 나은 전망을 가지고 바울의 심정에 더욱 더 가깝게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은 다행한 일이라 하겠다.
Ⅱ. 구약성서에서의 의(tseteq)와 신약성서에의 의개념
1. 구약성서에서의 의(tseteq)
구약에서의 의(義)는 tseteq(남성명사), 또는 tsedaqah(여성명사)로 표시되고 있으며 대단히 빈번히 또 다양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는 말이다.
tseteq 또는 tsedaqah는 정결, 심판 , 변호 등을 담고 있는 찬송집에서 자비를 의미하는 말들과 병행하여 나타난다.
야곱(E.Jocob)에 의하면, "의(義), 이말의 어원ts-d-q는 아랍어에서는 원래 구체적 물질적 의미를 가지고 있으나, 일찌기 다방면의 의미를 지니게 된 말이다. 즉 바른, 안정된, 본질적인 것을 표시하는 말로 단순히 규범적인 것에 순응함을 뜻한다. 의는 어떤 규범에 따름을 의미한다. 이는 그 기원에 있어서 처벌이나 분배, 또는 변해적인 의미를 가진것이 아니고, 일반적으로 어떤 상태 또는 행동이나 사고의 습관에 대한 성실성을 뜻하고 있다." 고 어원을 밝힌다.
슈펜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이 [ts-d-q]를 논할때 먼저 주의해야 할 것은 이는 언제나 관계개념이라는 사실이다. 이 의는 어떤 상태라기 보다는 행동의 의미를 가지는 이유이다. 사람이 의롭다 할 때에 그가 의롭게 행동을 취하기 때문이지, 그가 의롭기 때문에 그가 의롭게 행동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예언자들은 사람들에게 자격으로서나 상태로서의 의를 요구한 것이 아니고, 의가 실천되기를 요구했던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의가 발견될 때에 이는 인간과의 관계에서 야훼의 존재를 볼 수 있는 현시이다. 구약에서 야훼가 그 행동을 역사에서 보일 때에 야훼의 의라 말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는 그 백성과의 관계에 있어서 하나님이 계약에 따라서 통치하는 데서 먼저 나타난다.
의(義)는 어원적으로 그 자체 종교 또는 도덕적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었으나 구약에서는 법적 소송용어로 사용된 것이 분명하다. 야훼는 근본적으로 역사에 있어서 활동하는 역사의 주로 신앙되었다. 야훼는 그 행사하신 일에 의해 알려지고 있다. 야훼는 천지를 창조하고 이를 계속유지하며 특히 선민 이스라엘과 계약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의(義)는 야훼 자신이 규범이요 그러기에 이는 확고하고 바르고 흔들리지 않는다. 이 규범으로서의 의는 야훼가 태초에 세웠고, 이로서 세계를 심판할 것이다. 이와 같이 구약에서 하나님의 심판사상이 [의]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인과보응과 상벌을 가진 사법적 의의 사상은 왕과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의 통치에서 분리 단절 할 수 없는 것이다. 구약에서는 [의]가 심판과의 관련에서 많이 사용되어 있는데 이는 이 같은 사정을 잘 설명해 주는 것이라 보겠다.
후기 유대교에 있어서는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진노를 너무나도 강조한 나머지 하느님의 의를 무자비한 것으로 두려워 할 때가 있었다. 하나님의 의를 엄격한 재판관의 부편부당의 재판으로 믿어 인심은 공포에 떨게 되었다. 이사야51장-55장의 기사도 소송의 용어로 표현되어 있다. 야훼의 사법적 의는 정복자로 진멸하고 눌린 자에게 정의를 보장해 준다. 의롭다고 옹호하고 야훼가 승리한다. 이와 같은 생각에서 도움과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님의 심판과 의의 사상이 직접 유도되어 나온다. 친절과 진리, 충성, 구원은 특별히 이사야서(51-55)나 시편에서 의와 한쌍으로 결합되어 나타나고 있다. [의]와 [구원]과 [계시]의 삼자가 결합되어 언급된 것이 시편93:2절에서 보이고 이와 비슷한 [나의 구원이 가까 왔고 나의 의가 나타날 것 임이라]는 말이 이사야서에서도 보인다. [의]와 [구원]의 결합은 더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 이유는 빈자와 하층의 눌린 자들에 대해 예언자들은 특별히 의를 강조했다. 그러나 이는 하층계급 사람들이 나머지 사회 사람들 보다 다른 어떤 취급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저들의 필요가 다른 이들보다 더 긴박했기 때문이다. 빈궁한 사람들과 의지 없는 자들에겐 하나님 밖에 의지할 자가 없었다. 하나님은 온 백성에게 의를 세우려고 한다. 그는 과부와 고아와 가난하고 의지없는 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이리하여 일찌기 주전 8세기 이전에 tsedeq는 단순히 윤리 이상의 의미를 가진 말이 되었다. 이로써 tsedeq는 구원의 용어가 된 것이다.
히브리 사람들의 의 개념에 있어서 특별한 것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의는 구체적이라는 사상이다. 이 세계에서 언제나 활동하는 하나님은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듯이 그의 의도 이 세상에서 추상하여 된 관념이 아니다. 이점에서 히브리 tsedeq(의)는 희랍 철학사상의 ' (의)와 다르다.
이 tsedeq은 [여기]에서 일어나며 볼 수 있고 인정되고 알 수 있는 구체적인 것이다. 그런고로 히브리 사람들의 tsedeq을 의 일반이라던가 하나의 이념로서의 의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큰 오해다.
2. 신약성서에의 의
의는 사회적 의 또는 정의에 대한 표준적 희랍어다. 이는 사회적 표준, 또는 사람의 생래적 권리에 의해서 허용된 습관인 의를 따라서 행동함을 뜻하는 말이다. 슈렌크에 의하면 ' 는 와 s에 따른 제 3형성기에 속하는 말이다. 어미가 로 끝나는 낱말들은 사물을 추상화하는 사상 시대에 출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주후 신약시대의 의 ( ' ) 개념을 이해하기 전에 주전 희랍과 헬라의 의 개념이 어떻게 발전하였는지 알아보자.
기원전 5세기에 이미 의 ( ' )는 바르게 행동하고 자기의 의무를 수행하는 시민의 덕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플라토도 이런 뜻으로 자신의 일을 생각하고 남의 일에 간섭하지 않는 사람은 정의라고 말했다. 아리스토틀도 이와같은 일반적 의미로 [모든 합법적 행동은 어느 의미에서 정의]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도 역시 좁은 의미에서 다른 덕목들과 나란히 하는 하나의 덕이라고도 말했다. 이 협의의 의는 영어의 righteousness 와 구별되게 justice에 비겨볼 수 있다.
이렇게 플라토 이래 ' 는 지혜, 용기, 절제와 나란히 서는 사대덕목의 하나가 되어왔다. 아리스토틀은 그의 윤리학에서 의를 최고의 덕으로 보는 의견과 의를 모든 덕의 근본으로 보았다.
필로는 알렉산드라아의 유대인 철학자로 희랍사상과 히브리 사상을 절충하려 했던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의 의에 관해서 단 한번 언급했는데 그는 의 개념을 스토익적 태도로 다른 덕목중의 하나로 말했다. 언밀한 의미에서 바울적인 것과는 다르지만 롬32:25에 병행되는 "진리와 의를 위해서"란 놀랄만한 말을 한 일도 있다(philo, Vit, Mos.2.237). 필로는 s를 신앙과 일치하는 것으로도 보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주의 할 것은 그가 이를 공적의 덕으로 보았다는 사실이다. 그에 의하면 히브리의 족장들이 의롭다고 불리운 것은 공적의 덕 때문이었다. 또한 그는 피타고라스파에서 평들이 정의의 어머니라는 견해도 취했다. 그는 그 이전 작품을 통하여 의( ' )와 품격으로서 의를 소유한 사람인 의인를 찬양해 마지 않았다. 이는 그의 헬라적 인간의 영광화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의로운 품격속에서 이상적 인간을 발견하려 했다. 이로써 우리는 그가 일반적으로 의를 헬라적인 뜻으로 말했으며, 히브리적인 의도 헬라적 윤리사상에서 해석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희랍-헬레니즘 세계의 의에 대한 사상은 희랍과 라틴 전승에 있어서 특히 플라토와 아리스토틀과 후기 스토아 철학에 있어서 사회적 관점에서 의는 인격적 덕이요 법에 준행함으로써 그 동포들에게 그의 의무를 충실히 지키는 사람은 의롭다고 보는 것이라 잘라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발전한 희랍과 헬레니즘 세계의 의 ( ' )개념은 바울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가?
희랍과 헬레니즘 사상의 의(義)가 인본주의적인 발상에서의 의 ( ' ) 라면, 바울이 말한 하나님의 의 ( ' )는 하나님의 행위이며, 이로써 하나님이 그와 사람 사이에 바른 질서와 관계를 회복하시고 또한 이로써 거룩하지 못한 자를 거룩하다 선포한다. 이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죄인의 의인이다. 이와 같이 바울에게 의(義)는 인간에게 생래적인 윤리적인 것이 아니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주권행사이다. 따라서 희랍-헬라적 배경속에서 바울의 의 개념을 찾는 것은 허사임은 너무도 뻔한 일이다. 바울의 의(義) 개념의 기원은 차라리 구약세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Ⅲ. 신약의 다른기자들의 의( ' )와 바울의 의( ' ) 견해 비교
바울 신학의 의 개념에 영향을 미친 사상은 희랍-헬레니즘 사상적 의 ( ' ) 가 아닌 구약세계에서 온 의(tsedeq)개념을 따른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의( ' ) 를 정의하였고 신약의 다른 기자들은 의( ' ) 개념을 어떻게 파악했는지 알아보고, 바울과 신약의 다른 기자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검토함으로 바울의 위치를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신약의 기자들은 의를 공정한 심판과 통치로 생각했다. 예수에게로 돌아오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의로운 심판을 하신다고 말씀된 곳도 몇 군데 있다(행17:31; 계14:11). 의는 하나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특권으로서 주시는 그의 공의의 통치를 의미하는데도 있다(벧후1:1). 히브리에서는 사도들이 행한 공의로서 말씀되었다(히11:33). [의의 말씀]은 규범적인 정상적인 말을 뜻한다(히5:13).
둘째로 신약의 기자들은 의를 하나님의 현전에서의 선행으로 이해했다. 바울의 표어인 [하나님의 의]를 말한 귀절을 떠나서 신약에서는 거의 어느 때나 하나님의 뜻과 조화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 고결한 생활, 하나님 앞에서의 선행 등 이와 같은 모든 일에 있어서의 인간행실을 뜻한다. 이같은 의 관(觀)이 희랍-헬라적 윤리적 의 개념하고 다른 것은 명백하다. 저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부절히 언급하며 하나님 권능의 역사에 언제나 관계지음으로써 구약의 의(tsedeq) 개념을 상속하고 있다. 구약에서와 같이 저들의 의( ' ) 개념은 하느님이 중심이 되고있다. 신약 다른 기자들의 의 개념의 구체적인 예를 들어보자.
마태는 언제나 의를 위해서 말한 의미로 사용했다. 예수의 수세는 모든 의무를 ( ' )를 이행하기 위함이었지 모든 규정( ' )을 이행하기 위함은 아니었다(마3:15). [그의 나라와 그의 의] 라는 말은 그것이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완전 조화를 가져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관련된 모든 곳과 같이 하나의 선물이다.
누가도 마태와 의견을 전적으로 같이 한다. 마리아의 찬가에는 주 앞에서 성결과 의로 하나님께 섬긴다는 말씀이 있다. 여기에서 두 낱말의 결합은 다소 어떤 문제를 암시하긴 하나 [하나님 앞에서의 의]란 희랍적 덕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 도덕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의 구별은 명백하지 않다. 이 귀절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뜻을 보여준다. 사도행전에는 하나님이 의를 이방세계에서 말씀하시며 의를 어디서 행하던 인정하신다고 밝히 말씀되고 있다.
베드로 전후서에 있어서도 이와 비슷이 의는 언제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일로 말씀되고 있다. 의는 십자가를 통하여 죄에서 구속하는 일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벧전2:24). 마5:10에서 같이 의는 수난을 내포하며(벧전3:14), 노아는 '의(義)의 전파자'로(벧후2:25) 무신적인 세상에 반대하여 하나님께 복종하는 생활을 나타냈다. 의의 길은 거룩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타났다(벧후2:21). 신세계는 의(義)가 거하는 처소가 될 것이다.
히브리서에도 대체로 이와 같은 의(義)개념이 나타나고 있다. 1장9절에서 기자는 그리스도가 높임 받은 일은 그의 의의 생애에 대한 대가임을 증명하기 위해 시편의 말씀을 인용했다(시65:8). 멜기세덱의 [의의 왕]으로서 그리스도의 표상이었다고 말씀되고 있다(히7:22). 노아가 상속한 의는(히11:7)재판적 의미의 의가 아니고 신앙에 상응되는 경건한 생활에 관련되어 언급되고 있다. 히브리서도 여기에서 바울과 같이 의를 선물로 보는 견해에 일치하고 있다. 징계의 열매로서(히12:11) 의는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하는 생활의 뜻으로 말씀되고 있다.
요한복음서에 이와같은 생각이 더욱 발전되었다. 요한 복음서 기자는 마태(3:15)나 히브리서보다도 더 분명하게 그리스도의 의의 생애를 전체적인 사상의 윤곽 속에서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는 그의 기독론을 방편으로 해서 이를 표현했다. 예수는 그의 부활과 높이 올림에 있어서도 의를 사랑하였다고 말씀되었다. [의로운 자]로서의 그리스도와 의를 분리할 수가 없다. 따라서 의를 행하는 것은 그리스도에게 구유되어 있는 의의 실천이요 확인이며 하나님의 사랑하는 자녀의 증거가 되는 것이다(요일2:29). 이같은 의미에서 사람은 의를 모방하고 죄를 피하라고 권고되었다. 의를 행하던 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일로 보여지고 있다(요일3:10). 요한의 참된 의를 다만 [의로운 자]로서의 그리스도와의 합일의 결과라고 봄으로써 그리스도에 있어서의 계시와 관련시켰다. 그러나 이스라엘 민족이 장구한 시일을 두고 씨름하던 하나님의 현전에서의 의인 문제는 요한에 있어서는 아무러한 대상이 못되고 있다.
야고보는 다른 신약기자들과 달리 의를 의인의 문제로서 취급한 바울의 의인론과 비교해 볼만한 기자이다. 그러나 야고보가 말한 [하나님의 의]는 십자가를 통한 구원관의 본질을 의미하는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의]와 동일한 것이라고 단언할 수 없다. 그가 여기서 말한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이 요구하고 그의 뜻에 순종한다는 의미에서의 의이다. 즉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의의 행동으로 보고 있다. 그와 같은 의는 인간이 성내는 일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또 그가 말하는 의의 열매는 하나님의 뜻을 따른 헌신적 생활의 결과 그 수확으로서 얻는 의를 뜻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 점에 있어서 야고보가 유대의 전통적 공로설을 충실히 따른다고 할 수는 없지만 공로설적인 입장을 완전히 벗을 수 없는 이미지를 제공한다.
바울과 야고보는 [신앙]과 [행함]이란 말을 각각 다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야곱이 약2:19절에서 "귀신들도 하나님이 한 분임을 믿고 떤다"고 한 말을 보면 그가 의미하는 믿음은 냉냉한 열매없는 정통주의로 이해한 듯 하다. 반면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와 복종을 의미하는 바울이 말하는 [신앙]을 귀신들이 못 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바울에게서 신앙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길이다. 또한 야고보는 [행함]이란 말로 의지없는 자들에 대한 자비와 친절의 행위 즉 기독자의 실천적 박애를 뜻하고 있는데, 한편 바울은 [행함]을 율법의 행위로 즉 공로를 쌓기 위하여 행하는 양식과 도덕적 규율을 지키는 외적인 행위로 보고 있다.
이러한 양자간의 술어 용법상의 구별을 인정한다 하더라고 야고보는 랍비적 공로주의의 입장을 완전히 청산치 못하였고, 그의 하나님의 의 개념도 전통적인 윤리적 공로주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바울과는 달리 아브라함은 행함으로써 의롭다함을 얻은 것이요(약2:21), 기생 라합도 행함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약2:25)고 잘라 말하고 있다. 그는 신앙의인이 아니고 선행의인을 주장했다(약2:24). 따라서 신앙의인 문제는 신약에서 바울 만큼 정립한 이가 없다고 볼 수 밖에 없다. 여기에 의인사상사에 있어서 바울의 독자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Ⅳ. 바울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 개념
바울의 의 개념은 희랍-헬레니즘세계의 의 개념과 달랐다. 희랍철학이나 로마의 법제와는 전연 이질적인 세계에서 바울의 의 개념은 유래된 것이다. 유대사람으로서 바울은 성서의 사상 세계에서 살고 있었다. 구약이 교훈을 받은 바울은 구원은 의를 전제하고 있음을 잘 알았다. 하나님 편에서 볼 때 구원은 그의 의의 행사이다. 의는 단지 하나의 소유물이나 그 존재의 속성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살아 계신 하나님의 활동적 역사이다. 그의 의는 그가 옹호할만한 자를 무죄선언하고 그렇지 못한 자에게 정죄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한다. 이러한 의 개념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구약의 역사에 줄기차게 흐르고 있는 사상이다. 특히 이사야서와 시편에서 의는 구원과 거의 동의어처럼 사용되고 있는데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구출함으로써 그의 의를 나타내신다.
바울의 의 개념에 있어서 새로운것은 율법에 대한 그의 비판적 태도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율법을 [의의 율법]이라(롬9:31) 불렀다. 그 까닭은 율법이 의를 요구하기 때문이었다(롬11:30). 의는 생명의 조건이 되어있다. 그런데 율법의 의는 현실로는 존재하지 못했다. 어느 정도의 성취가 가능했던 것은 바울도 자기의 경험에서 인정했다. 바울은 율법이 참된 의를 낳을 수는 없고 다만 [손실]을 가져 올 뿐이라고 보았다(빌3:8). 그는 "율법의 행위로 그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고 단언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전역사와 유대교에 있을 때의 자기의 체험을 통해서 율법이 의를 가져오지 못하는 것이니 율법이 구원의 길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여기에 있어서 바울은 랍비의 율법주의의 내적 공허와 무능을 통절히 느끼게 되었다.
바울의 메시지는 하나님은 왕이요 심판자로서 복종을 요구하고 보상과 벌을 주시는 존재라는 구약의 기본 신관과 역사관을 전제하고 있다. 인간은 죄의 노예요, 하나님 앞에서 범법자라는 것도 그의 근본적 확신이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함을 받고 그 마음속에 하나님의 율법이 기록되었지마는 죄의 지배에 굴복당한 존재이다.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다고 믿는 천박한 낙관주의를 거부함으로써 유대교의 율법주의에서 이탈했다. 이것은 바울 자신의 생애에 있어서의 랍비적 경건의 완전 붕괴와 관련되고 있다. 그는 믿기를 의인만이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를 가질수 있는 것이며 하나님의 주관적인 은총만이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만이 일을 현실로 성취케 한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구원의 방법을 위한 필수적인 일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또한 그리스도를 율법의 지배의 종말이 되게 하심으로써 마련하셨다고 주장(롬10:4)했다. 이리하여 바울은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의 불가능성을 명백히 했다(롬10:5). 율법과 죄에서의 자유의 결과에 있어서 구원에 속한 모든 축복과 특권이 그리스도안에 있음을 통하여 믿는 자들에게 부여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에 있어서 혁명적으로 새로운 일이다. 율법의 지배는 이제 옛것이 되었고, 신앙의 새 시대가 왔다. 바울은 이시대에 널리 퍼져 있는 이행득상의 원리에서 이신득의 신학을 선포하면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유할 것을 선포하였다(롬6:7-9,15-18; 7:1-6).
첫째, 죄로부터의 자유선포(롬6:15-18)이다. 죄라함은 거룩한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제반행위나 심성을 가리키는 말로 구약과 신약에서 그 용어는 다양하게 쓰인다. 구약에서'아샴'은 불순정하고 반역하는 행위를, '아온'은 악을 행함의 의미로 죄의 내용적 측면을, '하타'는 표적을 벗어나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기준을 벗어났다는 죄의 형식적 측면을, '페솨'는 반역이라는 뜻으로서 죄의 신학적 측면을 각각 드러낸 준다. 신약에서는 죄를 나타낼 때 '하말티아'나 '파랖토마'를 썼으며 죄를 율법 위반이나 개인적인 악행(막1:5), 하나님께 반항하는 본성적인 죄(요9:41;롬4:7), 인격적 불신(롬5:12)으로 구분하였다. 롬6:1-11의 본문에서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원리(이신득의)를 곡해하여 율법의 불필요로 이해해 율법폐기론적 한탕주의로 착각하였다. 이들은 율법 폐기론자들은 바울이 "죄가 더한곳에 은혜가 더욱 넘쳐난다"(롬5:20)는 역설을 통하여 복음을 증거하였는 때 이 말씀을 오해하여 실제로 은혜를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는 신자들의 삶 속에서도 죄는 계속해서 증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생겨나게 되었고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을 바울은 만나게 되었다. 바울은 이러한 주장하는 이들에게 그들의 주장은 복음의 의미와 믿음의 삶을 파악하는데 완전해 실패했음을 보여주면서 다시금 선포하기를 "우리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6:2) 기록하였다. 이것이야말로 기독인들이 세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합한 것의 실제적인 의미이다. 죄를 노예 주인으로 의인화한다면, 그의 종들은 주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의 명령에 복종하여야 하지만 주인이 죽었을 때는 이 명령들은 더 이상 종들과 아무 상관도 없게 된다. "그런즉 어찌 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롬6:15,18).
둘째,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선포(롬7:1-6)이다.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밝혀줄 수는 있었지만 그것을 행할 능력이나 죄의 속박을 깨뜨릴 능력을 나누어 줄 수는 없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것으로서 그들의 예배, 종교생활, 개인과 사회생활등에 관련된 법적 조문 및 교훈들을 포함하는데 모세의 율법은 도덕법, 시민법, 의식법으로 분류된다. 신약시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말씀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말씀을 빙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려 하였다. 그러나 구약성경 자체가 예수를 증거하고 있다(요5:39). '모세를 믿었다면 예수도 믿었을 것이다'(요5:46). 저들이 구약성경을 대하면서도 예수를 배척한 것은 말씀을 왜곡해서 해석했기 때문이거나 외식을 중시한 나머지 말씀에서 생명을 추구하는 진지한 자세가 없었기 때문이다. 바울도 율법주의자들을 경계하면서 율법주의자들을 일컬어 '개'로 표현(빌3:2)하였다. 개는 율법의 준수를 구원의 필수 요소로 여긴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율법의 준수를 최고의 가치로 삼았으며 스스로 의롭다 하는 교만이야말로 기독교의 적이며, 이적은 율법을 통하여 구원 얻는다는 이행득상이라는 그럴듯한 구호를 내세워 하나님의 은혜를 무력하게 만들려고 한다. 바울은 율법의 요구 자체는 선하고 거룩하나 그 요구와는 정반대로 향하는 자신의 내면 세계를 투시하고서, 바울 자신의 두 자아 비유를 통해 마침내 죄와 진정한 자아를 구분시키기에 이른다. 비록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확신하지만 육신을 입고서 죄악된 세상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는 날마다 죄의 유혹과 압력앞에 무릎꿇는 굴욕적 체험을 하기 마련이다. 이에 바울은 이러한 갈등 체험을 엄연한 현실로 인정하고서 극한적 투쟁의 고뇌를 보여주는데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5)하면서 자신의 갈등을 유발한다. 그러나 결국 이 모든 갈등은 하나님의 은혜 곧 생명의 성령의 법에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시킴으로써 능히 극복되어질 수 있다고 하는 승리의 희망으로 귀결되어진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안에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1,2).
세째, 사망으로 부터의 자유선포(롬6:9)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경험하게 되면 이러한 형벌적인 종노릇의 상태에서 더 이상 머무를 필요가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령을 받고 그리스도의 성령은 그들을 내주하는 죄의 전횡에서 자유케 하는 새로운 권능인 생명의 법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제 성령이 인도하심을 받는 사람들은 이제 율법 아래에서 할 수 없었던 하나님의 요구들을 성취할 수 있게 된다. 죄가 지배하는 바로 그 영역(인간본성의 영역)에서 그리스도는 죄를 이기고 그 지배를 부수었는데, 이 승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의 백성들안에서 효력을 발휘한다. 성령은 새로운 권능을 나누어주고, 이 권능은 이전의 죄악된 성벽들을 몰아낸다. 성령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생명을 바로 지금 여기에서 존재케 하고 활동케 한다. 그리고 장래에 성령은 신자들의 현재의 죽을 몸을 죽지않는 몸으로 변화시키실 것이다. 이렇게 삶을 인도하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신자들은 하느님의 아들로서 살 수 있게 된다. 성령은 신자들을 고무하여 자발적으로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한다. "우리가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을 때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8:15). 모든 죽은 것으로부터 해방된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들이 지음 받은 바 그 영광으로 만유 앞에 나타날 때가 오고 있다. 그날이 오면 현재 멸망의 사슬에서 신음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들은 거기에서 풀려나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자유를 함께 누릴 것이다. 바울은 이 부분에서의 논증을 하나님을 신뢰하는 가운데 의지하라는 요청으로 끝맺는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 편이다. 한번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영원히 높이 들리 우신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그들을 대변하는 자이시며, 현세나 내세의 그 어떤 권세도 그들을 그의 사랑에서 떼어낼 수 없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8,39).
이처럼 종말의 날의 의인은 기독자에게는 이미 현재적인 소유가 되었다. 의인의 새 의미는 의인을 의인하는 것이 아니고, 죄인을 의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죄인을 의롭다고 선포함으로써 무서운 [의의 하나님]이 아니고 [은총의 하나님]이요 [구원의 하나님]이 되셨다. 바울은 엄숙히 선포했다. 롬3:23-24절에 "이제는 율법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은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는 실로 랍비적인 율법주의 의인관을 지축으로부터 뒤흔든 완전 혁명이다. 유대인 반대자들이 바울들 이 말을 들었을 때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외쳤을 것이다. 저들은 바울이 말장난한다고 코 웃음을 쳤을 것이다. 율법을 뛰어 넘는 일만도 죽어 마땅한 이단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의 새로움과 함께 그의 용기도 높이 보아야 할 것이다.
Ⅴ. 결 언
바울의 신앙 의인(義認) 사상은 랍비와 신약의 다른 기자의 의(義) 개념과는 전적인 차이를 보인다. 바울에 가장 가까운 사상을 엣세네 훈련서에서 발견하게 된다. 거기에도 은총의인이 이야기 되고 있으나 바울이 말한 신앙의인, 율법주의에서 자유사상은 암시도 얻을 수 없다. 여기에 바울의 독자성이 있다. 따라서 신앙의인을 바울만의 신학사상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바울은 랍비적 율법주의가 망각한 "의는 하나님만이 것"이라는 예언자들의 사상을 재확립했다. 왕과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의 행사하는 의는 법정적-종말론적 개념이다. 이의는 하나의 주권확립을 위한 그의 주권행사이다. 이는 하나님이 심판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구원의 역사이다. 여기서 더 나아가서 바울은 의인의 의인이 아니고, 죄인의 의인을 의미하는 신앙의인을 주장한다. '신앙의인'이란 말은 죄에도 불구하고 '의롭다고 선언한다'는 뜻이다. 의인은 무죄 사면이란 말이다. 이는 종래의 의인관에 있어서의 완전혁명이다. 신앙의인은 신앙을 조건으로 의롭다고 선고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은 공적이 될 수 없다. 후대 신학의 그리스도의 대리설도 바울이 의도한 것은 아니다. 선행의인이 아닌 신앙의인으로의 변화는 마술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적이요 새로운 창조행위이다. 하나님의 의는 희생의 제물로 자기몸을 바친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계시되었다. 그리스도 없이는 의인도 없다. 의인은 인간의 성취가 아니고 하나님의 주권속에 은사다. 신앙이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일이다. 신앙은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통해서만 활동한다. 하나님의 의는 복음에서 계시되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종말이 되어서 율법을 완성했다. 우리는 계시되었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종말이 되어서 율법을 완성했다.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선 의를 지금 소유하고 있고 앞으로 완전히 소유하게 될 것이다. 종말론적인 의미에서 우리는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다. 여기에 종말론적 긴장이 있고 신앙의 역리가 있다. 우리는 바울의 의인 사상이 가진 독자성과 그 진리와 그것이 끼친 영향으로 말미암아 그 의미는 실로 크다고 본다. 우리는 의 개념으로서 바울이 그의 전 신학사상을 의식적으로 정의했다고 하는 주장은 좀 지나쳤다고 보나 이상의 관찰에 의해 바울의 의 개념은 그의 사상의 핵심을 이루는 것이라 본다. 이것이 논쟁중에서 전제되었다는 단순한 이유로써 그 중대성을 부정하는 주장에나, 바울의 사상을 랍비적 공로설에 일치시켜 그 독자성을 해소함으로써 그 중대성을 과소평가하는 주장에도 우리는 동의할 수 없다. 또 이를 단순히 유대주의자들에 대한 논쟁적 무기에 불과한 것으로 보는데 찬성할 수 없다. 바울은 이방선교를 위해 이 사상 전개에 헌신한 것이 아니고 신앙의인의 진리 때문에 이방선교에 헌신한 것이다. 그가 유대주의자와 싸운것도 단순히 저들이 바울의 이방전도의 길을 방해했기 때문만이 아니라, 저들의 예수의 십자가의 구속을 무의미하게 만들려 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의 복음을 십자가의 도라고 선언했다(고전1:18).
바울은 의(義) 개념으로써 복음 진리의 가장 심오한 골자를 밝혔다. 율법에 대한 근본적 비판과 율법주의에서의 자유사상을 의인관에 관련시킨 것은 그의 창작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의 신학은 독자적 길을 달리게 되었다. 그의 사상에서 이처럼 뚜렷한 것은 없다. 이 개념으로 유대주의에 대립함으로써 새 종교의 본질적 성격을 분명히 천명했다. 이것은 기독교에 있어서 최초의 주체의식의 표현이다. 이점에 있어서 갈라디아서의 3-4장은 종교사에 있어서도 일대 금자탑이다. 이로써 바울은 교회사상 최초의 위기를 극복했다. 이 개념의 영원한 의미와 중대성은 루터에 의해 형식주의와 율법주의를 무찌르는 칼을 그 속에서 발견케 했다. 칼빈은 이 사상없이는 기독교가 존재할 수 없는 주요한 것으로 보았다. 이와 같은 주장을 프로테스탄티즘의 편견이라고 보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사상 속에서 그리스도 교회의 본질적인 위대한 진리가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신앙의인이 의인의 조건 혹은 자격으로 이해될 때 이는 새로운 율법주의에로의 전략이 된다. 의로 여기는 신앙은 새로운 행위(공로) 즉 평신도에게는 안면하고 교직자에게는 교회조직을 옹호하는데 편리한 방편으로 변질되고 만다. 여기에 이 사상이 위대한 진리를 의식하고 있는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언제나 각성해야 할 중대한 문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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