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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및 신앙 서적

낙심을 극복하는 믿음 1 (시 42:1-5)

by 은총가득 2020. 12. 4.

 

 

낙심을 극복하는 믿음 1 (시 42:1-5)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3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이 시간에 “낙심을 극복하는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낙심이 어떤 것인가를 알려주는 교훈 중에 마귀의 비매품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마귀가 자신의 도구를 내다 놓고는 경매에 붙인다는 광고를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을 홀리고 넘어뜨려 멸망으로 끌고 가는 도구가 무엇인지 호기심에 가득 찬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습니다. 거기에는 핍박 거짓 우상 교만 이단 시기 질투 탐욕 등 아는 물건 모르는 물건 희귀한 물건들이 많았는데 그 많은 물건들 중에 ‘비매품’이라고 표시된 도구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를 이상히 여긴 한 신사가 마귀에게 물었습니다. “대체 이것은 어디에 쓰는 것인데 팔지 않소?” 이 질문에 마귀는 “히히 이건 아주 귀중한 거지. 내 일에 둘도 없이 귀중해. 이 도구는 다름 아닌 낙심인데 이것만 가지면 어떤 일도 다 뚫고 지나갈 수 있고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라도 할 수 있거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낙심이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교훈하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낙심은 불신과 같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의 다윗도 왕자 압살롬의 반란으로 큰 환난 중에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이런 큰 반역을 모의하다니 얼마나 낙심되고 가슴 아픈 일입니까? 부끄럽기도 그지없을 뿐 더러 아들과 싸울 수도 없지 않습니까? 거기다 온 나라와 백성들은 그를 다 반역하고 압살롬 편이 되고 그를 죽이려고 생명을 찾아다닙니다. 그에게 기대를 가졌던 사람들마저 “당신의 하나님은 어디 있소. 아무리 봐도 하나님이 당신을 버린 것 같소.”라고 말합니다. 참으로 가슴 찢어지는 말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루살렘을 떠나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습니다. 낙심할 수밖에 없는 칠흑 같이 어두운 상황입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다윗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을 믿는 신앙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낙심을 극복하는 비밀을 발견하게 됩니다.

 

 



낙심 될 때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1.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1절에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다윗이 피난길에 예루살렘 성전을 생각하며 주님을 갈망하는 기도입니다. 그 심정은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과 같았습니다.

이스라엘은 대부분 광야여서 풀도 많지 않고 물도 귀합니다. 4월부터 9월까지는 비가 오지 않는 건기인데 대부분의 사슴이 이때 새끼를 뱁니다. 더구나 사슴은 다혈질의 열이 많은 동물이어서 갈증을 잘 느끼는데 얼마나 시냇물이 그립겠습니까? 이처럼 하나님을 사모하는 자신의 마음이 극도에 달해있음을 말씀합니다. 이처럼 낙심될 때 맨 먼저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사람을 찾거나 바라보면 안 됩니다.

베트남 전쟁 시 미군 군의관으로 월맹군의 포로가 됐던 쿠쉬너 소령의 회고담에 실린 이야기입니다. 그는 1967년 월맹군의 포로가 되어 27명의 동료들과 함께 생활했는데 그 중에 로버트라는 하사관이 있었습니다. 그는 해병특공대 출신으로 강인한 사람이었고 눈은 빛나고 중노동을 잘 견뎌냈습니다.

월맹군측은 포로들을 마음대로 부리기 위하여 말 잘 듣는 미군 포로 몇 명을 석방시켜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번 석방자는 로버트가 될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로버트에게 이 희망은 그로 하여금 모든 고통을 극복할 수 있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이 희망은 육체적, 생물학적 한계마저 극복할 수 있는 힘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약속한 6개월이 되었지만 월맹군측은 그를 석방시켜 주지 않았습니다. 한 달을 더 기다렸으나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월맹군이 그를 대하는 태도는 더욱 냉정해졌습니다. “다 틀렸구나!” 생각한 로버트 하사는 심한 우울증에 빠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죽었습니다. 로버트의 죽음을 본 쿠쉬너 소령은 말했습니다. “로버트는 질병 때문이 아니고 낙심 때문에 죽었다”

그러므로 사람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나와서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면 낙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 날마다 성령으로 충만해 있으면 어떤 상황이 와도 낙심되지 않습니다.

2.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아야 합니다.

3절에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다윗이 더 낙심하게 된 원인은 사람들이 말 때문이었습니다. 비참하게 몰락한 다윗을 보고 ‘당신 하나님 어디 있소, 하나님이 당신을 버렸소. 아무리 그런다고 이렇게까지 될 수 있겠소.’ 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 말이 외견상으로는 틀린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육신의 생각입니다. 이 육신의 생각이 멀리 있는 것 아닙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날마다 거짓선지자처럼 헛소리를 해댑니다. 그러므로 마음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원수가 됩니다. 육의 생각에 사로잡히지 말고 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 나를 버린 것 같아도 하나님께서는 성경 그대로 나를 버리지 않음을 믿어야 합니다. 환자들도 누가 무슨 말을 하느냐에 병세가 달라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는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면 희망이 옵니다. 세상 방송 10시간 들어도 희망이 오지 않지만 설교 방송 한 시간만 들어도 힘이 솟아납니다. 사람은 면역이 강해야 합니다. 면역만 강해지면 어떤 병도 다 이깁니다. 면역에는 육체의 면역과 마음의 면역이 있습니다. 육체의 면역은 음식과 운동 등에서 오지만 마음의 면역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옵니다. 마음의 면역이 더 강합니다. 그러므로 늘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을 듣고 외우면서 힘을 길러야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MP3로 음악을 많이 듣는데 기왕이면 찬송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수년 전 미국의 프란시스 로셔 박사와 고든 쇼우 박사가 이색적인 연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6개월간 모차르트 곡으로 피아노 레슨을 받은 미취학 아동들이 그렇지 않은 아동들에 비해 뛰어난 학습 능력을 발휘했다고 합니다. 대학생들을 대상으로도 연구해봤는데 불과 10분 동안 좋은 음악을 듣게 했는데도 들은 학생들은 듣지 않는 학생보다 평균 30% 높은 점수를 얻었습니다. 그래서 광란적인 록 뮤직(rock music)은 어떨까 해서 들려주었더니 정 반대였습니다.

모 TV프로의 어느 가수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붓글씨로 2X5m의 크기의 종이에 꼬박 1년에 걸쳐서 성경의 잠언서를 모두 필사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다 써놓고 보니 그 글씨들이 따뜻한 열기를 발산하고 그리고 더 신기한 것은 이 잠언서 표구가 수맥을 차단하더랍니다. 그 뿐 아니라 성가대의 합창을 녹음해서 틀어놓고 수맥현상을 실험해 보니 거기서도 동일하게 수맥차단현상이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수맥이 있으면 가위 눌리거나 질병이 온다고 합니다. 그러나 찬송하는 곳에 수맥이 차단되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프로그램 진행자는 그저 ‘알 수 없는 이상한 일’로 언급하고 지나갔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지 어찌 이상한 일이겠습니까?

아는 분 중에 한방에서 체질감별하는 오링테스트를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손에 식품을 들고 테스트를 해보면 나에게 맞는 음식과 맞지 않는 음식이 손가락 힘으로 나타납니다. 나에게 맞으면 손가락 힘이 강하지만 낮지 않으면 맥없이 풀립니다. 어느 날 장난삼아 책을 오링 테스트해보았습니다. 신기한 것은 좋은 책을 쥐면 힘이 오는데 이단의 책은 힘이 빠지는 것입니다. 눈을 가리고 여러 차례 실험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얼마 전에도 해보았는데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여러분도 실험해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창조물들도 하나님을 배도하는 것은 싫어하는 모얍입니다. 이런 것도 그런데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말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사람의 말을 듣지 말고 너를 살려주리라 도와주리라 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세요.

3. 늘 말씀으로 독려해야 합니다.

5절에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11절에도 동일한 말씀이 나옵니다. 두 번이 나온 것은 강조형이요, 그만큼 반복했음을 보여줍니다. 자기와의 대화를 잘해야 합니다. 긍정적인 말씀으로 대화를 하며 반복을 통해 자기 생각을 철저히 훈련시키시기 바랍니다.

위대한 위인들은 자기와의 대화를 잘한 사람들입니다. 날마다 거울 앞에서 자기 표정을 관리하며 자기와 대화합니다. “너는 하나님의 사랑 받은 자녀야, 넌 예수 안에서 큰 복을 받았어, 넌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할 수 있어,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하나님의 일군이고 도구야. 나는 반드시 승리할거야” 이렇게 자기와 대화하며 말씀에 선 믿음의 사람이 될 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그들을 기적의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이것이 묵상입니다. 기도도 해야 하나 묵상도 많이 해야 합니다. 묵상할 줄 모르신다고요? 날마다 묵상하면서 뭘 모르신다는 것입니까? 그동안 육신적인 생각으로 잠못이루는 밤이 많았지요? 근심 걱정 혹은 분노를 마음에 품고 잠도 자지 못하고 묵상하다가 몸과 마음 다 상하도록 시험들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묵상입니다. 그런 죽이는 묵상은 할 줄 알면서 왜 살리는 묵상은 하지 않습니까?

 

이제까지 불필요한 묵상을 했다면 이제는 주님의 사랑과 약속을 매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해 주신 새 자화상을 묵상하세요. 그 때 오히려 찬송하는 역사, 오히려는 더욱이란 뜻입니다. 더욱 새 힘이 나타나 다윗처럼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조심할 것은 마귀의 음성이 자기 생각처럼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생각을 받아들이지 말고 다윗처럼 말씀을 묵상하고 또 자기와의 긍정적인 대화를 통해 하나님을 찬송할 만큼 새 힘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무지는 무서운 죄다 (딤후 3:13-15)

 


이 시간에 “무지는 무서운 죄다.”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무지처럼 어리석고 무섭고 악한 것은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무지라는 것은 의도는 악이 아닐지라도 결과는 악만큼 혹은 악보다 더 심각한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의학이 발달하기 전 서양의 의사들은 환자를 수술하면서 도구를 소독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또 고름과 핏자국이 많이 묻은 가운을 입은 자일수록 수술 잘하는 사람으로 인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 무지가 얼마나 많은 환자들을 죽였는가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런가 하면 미국 텍사스 인디언들이 자기들의 땅에 나는 검은 액체가 석유인지 알지 못하고 풀조차 나지 않는 저주의 땅이라면서 그 넓은 유전지대를 헐값으로 백인들에게 팔았다고 합니다. 나중에야 알고 가슴을 쳤지만 때는 늦었습니다. 혹은 알지 못하면서 설교자가 되면 선한 의도였어도 자동으로 이단설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지란 이처럼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단설도 조심하고 나아가 자기 분수를 넘어 작은 지식으로 타인을 함부로 난도질하는 일도 조심해야 합니다.

 

이처럼 알지 못해서 손해보고 알지 못해서 지배 받고 알지 못해서 멸망의 길로 달려갑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호4:6) 했던 호세아의 외침과 같이 지금 이 시간에도 사람들이 알지 못해서 멸망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지난 주간 일본을 돌아보면서 예수 믿는 저로서는 부러운 것보다는 안타까운 것이 더 많았습니다. 1억 2,800만의 영혼 중 1%만 예수를 알고 나머지 99%는 지옥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해서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무지해도 무지한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지할수록 배움에 대한 갈망이 없습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알지 못하면 속고 속이며 큰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딤후3:13-14)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좀 더 알아야 되겠다고 생각한 몇 가지를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1. 구제를 좀 더 알아야 하겠습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착각하는 것 중의 하나가 구제입니다. 마6:3-4에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하셨는데 이 말씀이 구제에 대한 교훈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5:14-16에 또 다른 교훈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두 말씀을 종합해 보면 우리의 구제가 자기 의나 자랑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 사람들에게 오로지 모르게 해야만 옳다는 뜻은 아니란 말입니다.

가령 성경에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은밀히 계신 하나님께 하라고 했다고 성경에 골방기도만 있나요? 성경을 보면 발성기도도 있고 합심기도도 있고 부르짖는 기도도 있습니다. 다행스럽게 우리 한국교회가 기도 만큼은 양면성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제에 있어서는 오로지 은밀한 구제만을 추구해 오고 있어서 사회의 오해와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에 기독교의 사회봉사를 빼면 타종교는 봉사랄 것도 없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세상의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것 얼마나 억울합니까? 하나님께서 알아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일로 전도의 길이 막힌다는 것입니다. 북한을 돕는 것도 기독교 빼면 다른 종교에서는 거의 없습니다. 지난 번 태안에 기름유출사건 때도 우리 기독교인들의 활약이 대단했습니다. 전체 봉사단의 3분의 2가 우리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사실은 다 묻혀버리고 계속하여 기독교가 세인들의 비난의 타깃이 되고 있음을 볼 때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남의 탓보다 구제에 대한 성경 이해의 부족 탓이 더 큽니다. 이제는 봉사도 구제도 너무 숨길 필요는 없습니다. 간혹 재해를 당했을 때 국민들이 성금을 내는데 그 때 다른 종교의 명단은 수없이 호명 되는데 기독교 명단은 별로 없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 자체 방송언론사에 내기 때문입니다. 각종 구제금이나 의연금은 기독교방송이나 기독교 신문사에 내는 것보다 우리나라 공영방송사에다 내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는 말입니다. 왜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느냐는 것입니다. 이제 주님의 말씀대로 등불을 등경위에 켜서 우리 기독교의 아름다움을 알려야 할 때입니다.

2. 맡김에 대해 좀 더 알아야겠습니다.

마태 4장을 보면 예수를 거룩한 성의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할 때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마4:7) 하시며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 사람의 할 일을 구분하지 못하여 하나님을 시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이 할 일을 하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본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지 진정한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큰 믿음인양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불이 났는데 어떤 사람이 불을 끄기 위해서 기도하자고 했답니다. 그러나 목사는 말하기를 불을 끄면서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어느 편이 믿음이 더 좋은 것일까요? 처음 사람이 믿음 좋은 것 같아도 그것은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내가 할 일을 다 하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돕지 않으시며 그 불이익은 우리가 당합니다.

오늘날 타락한 언론을 가리켜 포퓰리즘 언론이라고 하는데 포퓰리즘(populism)이란 일반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여 진리의 본질을 버리고 행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래야 광고수입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연일연야 교회의 부정적인 면만 부각 혹은 왜곡시켜 나쁜 기사만 쏟아냅니다. 이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듣는 자로 하여금 망하게 하는 마귀의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것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시겠지 하면서 무관심하고 있습니다. 더 안타까운 것은 우리도 사이버선교사가 되어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말하면 상당수 지도자나 교인들이 그것을 반대를 합니다. 하나님께 맡기자는 것입니다. 맡긴다는 것 참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그냥 맡기는 것이 옳을까요? 최선을 다하면서 맡기는 것이 옳을까요? 하나님께 맡기자는 사람들 기도라도 하느냐? 애타는 마음이 없는 것을 보아 별로 기도조차 하지 않습니다.

딤후2:14에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오해가 생겼을 때는 일을 키우지 말고 속히 해명할수록 좋습니다. 하나님만 바라본다면서 침묵만 할 때 일이 더 커지는 것을 저는 수없이 보아왔습니다. 침묵으로 키운 그 문제를 결국 지혜로운 사람들이 등장하여 처리하는 것을 보면서 침묵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을 느낍니다.

이스라엘의 중간사를 보면 적들이 유대를 공격할 때 꼭 안식일에 침략합니다. 그 때 유대인들은 율법에 따라 안식일을 지킨다고 가만있다가 큰 피해를 당했습니다. 이러한 일이 반복될 때 유대인들 사이에서는 신학적인 갈등이 생겨나게 되었고 안식일에도 생명에 관한 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싸울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린 마카비는 군대를 모아 독립운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침략하는 적군들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물리쳐서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크게 그리고 번번이 역사해 주셨는지 자세한 내용은 이스라엘 중간사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마에 의해 기독교가 얼마나 박해를 받았습니까? 박해의 내용은 거의 100% 오해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천국을 전하니 다른 나라를 전한다고 반국가적인 단체라, 왕 되신 예수를 말하니 로마 황제 말고 다른 왕이 어디 있느냐고, 성찬식을 하니 사람 고기 먹는 인육식자라, 박해를 피해 모여 예배하니 남녀 불륜의 집단이라, 혹은 네로는 로마를 불질러놓고 기독교인이 한 것이라고 꾸며 박해했습니다. 그래서 온 국민의 증오의 대상이 됩니다.

그 때까지도 사람들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이라고 변호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이들은 순교를 더 즐겨했습니다. 신학적인 차이 때문입니다. 만약 침묵만이 신앙이라는 신학을 가졌다면 그 박해는 계속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 그렇게 침묵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은 아니라면서 그리스도교를 변호하는 변증가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변증가들은 로마 황제들을 상대로 변증문서를 만들어 보냈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에 대한 오해는 점차 불식되었고 결국 로마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또 국교로 인정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람이 할 일은 하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싸우는 것과 정당한 변호는 구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사사기를 보더라도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사사를 일으키셔서 하셨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통해서든지 뜻을 이루시는데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사람의 하는 일을 비난하거나 차단하는 어리석은 일은 범하지 말아야합니다. 내가 하지 못하면 기도로라도 도와야 할 것입니다.

3. 치유에 대해 좀 더 알아야겠습니다.

병들었을 때 어떻게 하느냐? 이 때 기도만 해야 하는가? 아니면 치료만 해야 하는가? 이것을 알지 못한 사람들이 실패하는 것을 늘 봅니다. 정답은 방법은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가장 보편적인 방법은 기도와 치료가 병행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치유는 하나님이 주시지만 그 방법은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경우 기도만 해도 낫기도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예는 아닙니다.

우리는 그 예를 행9:17-19에서 보게 됩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을 안수할 때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지만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졌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치유해 주셨어도 음식에 문제가 있어 건강치 못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또 디모데의 질병에 대한 바울의 처방 역시 딤전5:23에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했습니다. 바울이 믿음이 없어서 그랬을까요? 그리고 피곤에 지쳐 우울증에 걸린 엘리야를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음식과 잠으로서 그의 질병을 치료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내신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말씀과 양식으로 양육하셨습니다.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시고 매일 하늘의 만나와 반석의 생수 그리고 절기에 무교병과 쓴나물로서 이스라엘을 먹이셨습니다. 이 음식들은 신령한 의미 외에도 그 특징으로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의 몸과 마음을 변화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말씀으로 양육하시면서 음식의 도움도 받게 하신 것입니다.

 

저는 음식을 통해서 많은 분들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얼마 전 스포츠맨으로 불리는 어떤 분이 간에 병이 들었기에 물어보니 10년간 현미를 먹고 있었습니다. 현미는 폐대장에는 좋으나 간담은 억제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데 간이 비교적 약한 소양체질이 현미를 그토록 오래 먹고 있었으니 간이 약해질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사람의 몸은 흙으로 만들어졌기에 우리의 환경을 결코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병들었을 때 회개하고 기도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내신 방법들을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예처럼 음식을 통해서 건강을 얻으시고 혹은 유익하다면 하나님이 내신 다른 방법을 끌어서 사용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얼마든지 건강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이 땅에 베풀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이 시간에도 내 백성이 지식이 없음으로 망한다는 하나님의 탄식이 들려옵니다. 무엇보다 알아야 할 분은 우리 주 예수입니다. 다 잊어도 예수님은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진리를 배워 확신한 일에 거합시다. 우리 모두 진리의 지식으로 충만하여 자유하게 해주시는 놀라운 진리를 경험하시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받는 4대 원리 (삼하 9:1-8)

 

[요약]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은혜를 입는 장면은 죄인 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을 연상시킨다. 은혜 받고 살려면 주신 복음을 그대로 믿어야 한다. 예수와 함께 죽었고 예수와 함께 살았으며 예수와 함께 하늘의 영광 중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늘 감격하며 예배해야 한다. 충분한 예배생활이 없이는 은혜 체험은 불가능하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만 나타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늘 낮아지고 죽어야 한다. 그리고 자기를 슬퍼 애통해야 한다. 육신의 문제 가지고 애통할 때 이기는 능력을 주신다.

 

이 시간에 “은혜를 받는 4대 원리”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수천년 역사 이래 몇 사람 나올까 말까 한다는 중세기에 유명한 하나님의 종이 있었습니다. 프란시스라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삶이 너무 위대해서 그를 프란시스라 부르지 않고 성(聖) 프란시스라고 불렀습니다. 어느날 그의 제자가 기도하다가 하늘나라를 갔습니다. 가서 보니 사람의 보좌 중에 과연 자기 스승의 보좌가 가장 높은 곳에 있었습니다. 세상에 내려온 제자는 프란시스에게 자신을 어떤 사람이라 생각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가장 악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대답은 위선이십니다. 성자가 그러시다면 살인자와 거짓증거자들은 어찌합니까?” 그러자 프란시스는 웃으며 “자네가 잘 알지 못해서 그러네. 내가 받은 은혜를 그들이 받았다면 훨씬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것일세”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프란시스에게서 겸손을 봅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 속에 은혜 받아 한다는 교훈, 그 말이 맞는 말입니다. 성경에 위대한 인물들이 많지만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노아도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고 아브라함도 다윗도 바울도 요한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를 얼마나 받았느냐가 얼마나 훌륭하고 큰 사람이 될 것인가를 결정합니다. 내 것이 아닌 주님의 것으로 이렇게 훌륭하게 될 수 있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내 공로 없이도 주님이 인정해 주신다니 참 감사한 일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이 다윗에게 큰 은혜를 입습니다. 비참하게 몰락 당한 사울 왕가의 남은 사람,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은 잡혀가 죽어 마땅할 사람이지만 아버지 요나단 때문에 다윗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할 때 목숨 바쳐 다윗을 도왔던 요나단을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 은혜를 기억하고 후일에 그 아들 므비보셋을 왕궁으로 불러 왕자의 위치에서 최고의 대접을 받게 했던 것입니다. 여기 므비보셋을 통해 은혜 받는 귀한 원리를 봅니다.

 

그럼 은혜 받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복음을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7절에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했습니다. 므비보셋은 목숨 바쳐 다윗을 도운 아버지 요나단 때문에 다윗의 은총을 받게 되었습니다. 영적으로 이해하면 요나단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고 므비보셋은 우리들입니다.

므비보셋의 이름만 봐도 그렇습니다. 므비보셋은 “부끄러움의 추방자”라는 뜻입니다. 죄를 지으면 사회에서 추방됩니다. 그런 이름이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인생은 범죄한 아담 안에서 쫓겨난 인생들입니다.

그리고 므비보셋 나이 다섯 살 때 사울과 요나단이 죽을 때 급히 안고 도망치던 유모의 실수로 떨어뜨려 두 다리 모두 절뚝발이가 되었습니다. 이 모습은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려야 행할 수 없는 인간의 무능함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능력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피해 살았던 로드발은 암6;13에 허무한 곳으로 불리어졌는데 목초지도 없는 황량한 곳이었습니다. 이곳은 바로 죄악 세상입니다. 하나님도 시인하지 않고 만족도 없고 공허한 세상입니다. 우리는 그 가운데 거하면서 우리 마음과 몸의 원하는 것을 하여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이 요나단을 기억하여 그를 왕궁으로 불렀습니다. 므비보셋이 한 일은 없습니다. 그냥 부른 그대로 축복의 부름을 믿고 순종했을 뿐입니다.

 

이처럼 죄인 된 인생이라도 나를 위해 피 흘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믿으면 누구든지 구원 받고 하나님의 자녀 되고 하나님의 왕자가 됩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용서 받았고 죄에 대해서 죽었으며 의에 대해서 살았고 지금 예수와 함께 하늘에 앉혀진 자들이란 사실입니다. 병도 가난도 저주도 담당하셨습니다. 이 복음을 그대로 믿고 이 복음에 서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놀라운 은혜 안에 불러주신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2. 늘 감격하며 예배해야 합니다.

8절 “저가 절하여 가로되 이 종이 무엇이관대 왕께서 죽은 개 같은 나를 돌아보시나이까” 했습니다. 므비보셋이 자기를 돌아본 다윗에게 감사하는 내용입니다. 그런데 므비보셋은 한결같이 자신을 종이라고 부르며 엎드립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죽은 개와 같은 자라고 자기를 낮춥니다. 개만도 못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사울왕가의 왕손이었지만 철저히 자신을 낮춥니다. 낮출 뿐 아니라 감사하고 감격합니다.

 

이렇게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자신이었음을 깨닫는 자만이 자기를 낮출 수 있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진실로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약4:6에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하였습니다. "내가 무엇입니까? " 하는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 찬양과 감사가 나옵니다. 주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해도 찬양해도 감격이 없다면 왜 없는지 돌아보세요. 죽어 마땅한 개보다 못한 자를 불러주신 그 은혜를 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유대인들처럼 입술으로는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도 마음으로는 먼 것은 아닌지요. 자신의 근본을 깨닫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때 비로소 마음의 감격이 나옵니다. 이 감격으로 경외하며 매일같이 찬송하며 살아갈 때 은혜로 충만하게 되는 것입니다.

3. 자기를 부인해야 합니다.

12절 “므비보셋에게 젊은 아들 하나가 있으니 이름은 미가더라” 여기 젊은 아들이라고 한 것을 보아야 합니다. 므비보셋이 은혜를 받으려면 사울왕가의 왕손이기 때문에 다윗을 대적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사울왕가가 멸망했지만 아직도 사울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40년간 통치했으니 그렇지 않겠습니까? 다윗은 11지파를 가진 사울 왕국의 도전을 7년 반 동안 받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사울왕가에 똑똑한 사람이 난다는 것은 다윗에게는 무엇보다 위협적인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미가라는 이름에 뜻이 있습니다. 그 뜻은“누가 같은가?”라는 뜻입니다. “누가 하나님과 같은가?”라는 마가엘 천사와 같은 이름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던 마귀를 대항해 싸우는 하늘의 천군장 미가엘의 이름입니다. 그러니까 미가라는 이름은 전투적인 이름이죠. 하나님이란 뜻만 없을 뿐입니다. 철저한 자기 부정의 이름입니다. 즉 하나님이 세우신 다윗과 같을 수 없다는 의미를 강하게 암시한 이름입니다. 이처럼 므비보셋은 아들 미가의 이름을 통해 철저히 하나님이 세우신 왕 다윗에게 복종하고자 했습니다. 나는 사라지고 다윗만 나타내기로 하였던 것입니다. 다윗을 사랑한 요나단의 아들다운 모습입니다.

이처럼 큰 은혜 받으려면 자기를 부정하고 하나님만 나타내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내가 나타나면 안 됩니다. 나의 선이든 나의 악이든 다 처리 되어야 합니다. 누가 하나님과 같으냐면서 자기 생각을 쳐서 복종시키십시오. 그래서 내 안에 하나님이 왕이 되신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해야 합니다. 하나님 생각 때문에 내 의식 속에서 내가 사라져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에게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목사님 아파요." 가만 보니 신경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엉뚱한 방향으로 대화의 주제를 돌렸습니다. 한참 이야기하던 성도가 "아니 왜 그러세요?" 그래서 "제가 일부러 그랬어요. 성도님 지금도 아프세요?" "엇! 안 아픈데요." 자기 몸 상태에 지나치게 집착할 때 작은 아픔도 크게 느껴집니다. 이명이 있다면 원인치료해야겠지만 귀에 소리가 나도 하나님만 생각하고 살면 소리나는 줄 모릅니다. 염려도 하지 말고 죽음도 생각하지 말고 예수만 생각하세요. 이것이 인생길을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시14:1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 없다 한다 했습니다. 믿는다면서 하나님 없는 것처럼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하시지만 의식 속에 하나님을 제외하면 하나님은 자기의 모습을 나타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곁에 계심을 믿고 늘 경외하며 조심하며 기뻐하며 찬양하세요. 늘 여쭈고 대화하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십니다.

 

은혜를 끼침도 나를 감추고 예수만 나타내야 합니다. 1871년 가을, 무디가 부룩클린의 어느 교회에서 목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온갖 열심과 정열을 다해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교인들은 하나 둘 다 떠나가고 몇 명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그는 충격을 받았고 마음에는 패배감과 좌절감으로 메워졌습니다. 어느날 예배가 끝난 후 한 여성도가 무디에게 나와 겸손히 말했습니다. "무디 선생님, 세상 이야기를 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을 이야기 해주세요" 무디는 그후 부터 하나님 말씀만 설교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러자 설교에 능력이 생기고 교인들이 힘을 얻고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도 역시 비슷한 체험을 하였습니다. 나를 죽이고 예수만 나타내는 것이 은혜 받는 방법이요 은혜 끼치는 방법입니다.


4. 자기를 슬퍼 애통해야 합니다.


그런데 므비보셋에게 시험이 닥칩니다. 삼하 16장을 보면 므비보셋의 종 시바가 다윗을 속여 므비보셋을 모함한 것입니다. 압살롬이 난리를 일으켰을 때 시바는 나귀에 온갖 먹을 싣고 가서 지친 다윗을 대접하면서 므비보셋이 왕이 되려고 모반했다고 속입니다. 그 때 다윗은 속아 넘어가 므비보셋에게 준 모든 재산을 빼앗아 시바에게 돌립니다. 참으로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돌아온 다윗은 노하여 므비보셋을 책망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와 함께 가지 아니하였느냐” 그러자 므비보셋은 “내 주 왕이여 왕의 종 나는 절뚝발이이므로 내 나귀에 안장을 지워 타고 왕과 함께 가려 하였더니 나의 종이 나를 속이고 종 나를 내 주 왕께 참소하였나이다 내 주 왕께서는 하나님의 사자와 같으시니 왕의 처분대로 하옵소서”(삼하19:26-27) 시바가 방해공작을 꾸몄던 것입니다.

그래서 므비보셋은 왕이 수도를 떠난 날부터 발도 씻지 않고 수염도 깎지 아니하고 옷도 빨지 않고 어떤 이유로든 왕을 따르지 못했음에 애통했습니다. 그 진심을 본 다윗은 시바의 모함인 줄 알고 시바에게 넘겨준 재산의 절반을 다시 므비보셋에게 넘겨주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시바는 바로 우리 육체입니다. 이 몸이 주님 따르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하나님의 은혜 누림을 방해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복을 깍아요. 육체의 본능이라는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변하는 것 아닙니다. 이것이 늘 유혹하고 하나님을 모반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육체라는 건 시바와 같아요. 다윗이 그랬듯이 이걸 죽일 수도 없고 잘 달래서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다윗이 시바를 죽이거나 재산을 다 빼앗지 않는 것도 어쩌면 은혜의 예표입니다. 게다가 약해지고 병들기 쉽습니다. 육체를 갖고 있는 한 늘 긴장해야 합니다.

 

그러나 수염도 깍지 않고 그 슬픔을 애도한 므비보셋처럼 늘 기도하며 금식하며 자기를 슬퍼하며 애통하면 하나님께서 주님을 따라갈 수 있는 특별한 은총을 베풀어주십니다. 그래서 약4:9에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했습니다. 그러므로 육체의 한계만 가지고 실망하지 말고 주님께 그러하지 못함을 슬퍼하며 애통하시기 바랍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큰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다윗이 베푼 은혜를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다윗은 멸해야 할 사울의 씨 므비보셋이었으나 죽이지 않았습니다. 큰 은혜입니다. 그리고 왕궁에 와서 살도록 했습니다. 이건 있을 수 없는 큰 은혜입니다. 그리고 시바와 그 아들 열다섯과 그 종 스물까지 다 므비보셋에게 주었습니다. 역시 생각할 수 없는 큰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많은 사울의 토지도 므비보셋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이 역시 있을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왕자처럼 왕의 식탁에서 먹도록 했습니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 뿐 아니라 기브온 사람들이 사울의 자손들을 매달겠다고 달라고 했을 때도 다윗은 므비보셋을 끝까지 지켜주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공로로 값없이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하시고 영생 얻게 하시고 하늘의 왕궁에서 살게 하시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보배를 허락하시고 악의 세력을 이기고 주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며 영원히 버리지 않으실 은혜를 주셨습니다. 예수 안에서 하늘의 신령한 복과 지상의 온갖 기름진 복도 주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실상으로 내게 다가옵니다. 우리에게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제 남은 것은 믿음으로 이 은혜를 풍족히 누리는 것입니다.

 


순종이 사는 길이다 (요 5:1-10)


이 시간에 “순종이 사는 길이다”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민수기 21장을 보면 이런 사건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할 때 여호와께서 불뱀을 보내어 죽게 하셨습니다. 이 때 모세가 부르짖을 때 여호와께서 “불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달라 물린 자마다 그것을 보면 살리라”(민21:8) 하셨습니다. 그래서 놋뱀을 만들어 달았더니 놋뱀을 쳐다보는 자마다 다 살았습니다. 이 놋뱀 사건은 예수님의 대속의 십자가 사건을 예표합니다. 그리고 십자가가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누구든지 살려면 예수를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본문에도 보면 그런 말씀이 나옵니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못가에서 38년 된 불치의 병자를 고쳐주신 장면입니다. 유명한 헨드릭슨이라는 주석가는 이 병자가 바로 혈기 마른 자일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마를 대로 말라 몸은 굳어지고 힘은 없고 병은 몸에 창궐하고 마음마저도 심히 병들었을 것입니다. 물이 동할 때 물 속에도 뛰어들어 가지 못할 만큼 비참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병자에게 다가가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살려면 순종하라는 말씀입니다. 가만있어 병든 그 모습 그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주님이 하라는 대로 순종하여 살 것인가? 그 선택은 그 병자에게 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침체 가운데 있다고 합니다. 성도들의 영적상태도 예전만 같지 못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어요. 예수님의 은혜도 변함이 없어요. 성령님의 함께 하심도 역시 그래요. 이제 모든 것은 우리에게 있어요. 감사한 것은 성경을 보면 살아날 길이 다 나타나 있어요.


그럼 진정 영적으로 살려면 어떻게 순종해야 할까요?

1. 미신적인 신앙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4절 "이는 천사가 가끔 못에 내려와 물을 동하게 하는데 동한 후에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지 낫게 됨이러라" 당시 베베스다 연못은 물이 솟구치고 움직일 때 먼저 들어가면 병이 낫는다는 민중의 전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신념을 가지고 거기에 모여들었습니다. 온천수에 목욕하여 도움을 받는 경우가 없지 않겠지만 천사 이야기니 다 낫느니 이런 것은 미신입니다. 이 미신에 생명을 걸고 모여든 그들을 보세요.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런데 이 모습이 바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교회에도 사람이 만든 미신이 있습니다. "100일 기도하면 능력을 받는다." 물론 100일 기도하면 대단한 기도훈련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100일 기도가 무엇을 줄 것으로 안다면 미신입니다. 혹은 "금식기도하면 영계가 열리고 교회가 부흥된다." 금식기도 역시 대단한 기도훈련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주님도 금식하셨고 바울도 금식했으니 우리도 금식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금식기도가 구원을 주고 권세를 주고 능력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금식기도하다가 시험 든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도 이것으로 권능 받겠다고 목숨 걸려고 합니다.

 

잘 알아야 합니다. 진정한 구원과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와 복에서부터 출발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안에서 이미 이루신 이 사실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아무 것도 받지 못한 양 산과 들로 능력과 축복 찾아 헤메입니다. 100일기도도 1,000일 대장정도 금식기도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더 복음에 서고 더 감사하고 더 겸손하고 더 아버지의 뜻을 알고 더 온전히 믿음에 서려는 것은 물론 기도해 주어야 할 사명 감당이지 구원이나 무엇을 받지 못해서 헤메이는 모습이 아닌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항상 주셨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복음에 서서 미신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2. 소극적 신앙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2-3절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그 안에 많은 병자, 소경, 절뚝발이, 혈기 마른 자들이 누워 물의 동함을 기다리니” 병자들이 누워서 물의 동함만을 기다리는 얼마나 소극적입니까? 거기 누워 때만을 기다리며 수많은 세월을 보내는 것보다 하나님께 날마다 부르짖는다면 더 신속한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에 소극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양문 곁의 베데스다 연못은 양들이 하나님께 드려지기 위해서 이곳에서 씻음 받아 흠 없이 준비되는 곳입니다. 이처럼 우리 심령도 하나님께 열납되려면 온전히 준비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제단의 제물이 되고 성령의 불이 임하는 것입니다.

베데스다 연못을 교회로 본다면 교회는 하나님께 양들이 드려질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곳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베데스다 연못에 물이 동하듯 은혜가 넘칠 때가 있는데 못가에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은혜의 물결 속에 들어가야 합니다. 소극적이면 은혜의 물결에 동참하지 못합니다. 이런 소극적인 신자가 많습니다. 적극과 소극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입니다. 다윗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힘을 내어 적극적으로 부르짖으니 하나님께서 다 물리쳐 주셨습니다.

 

믿음의 침체는 죽은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계3:16-17에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3절의 병자들은 바로 은혜 받지 못한 심령의 모습입니다. 적극적으로 신앙생활하시기 바랍니다.


3. 의타적 신앙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여기 38년 된 병자가 얼마나 의타적인가를 봅니다. 7절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병들어 움직이지 못하니 남이 연못에 넣어주기만을 기다린 것입니다.

이처럼 내가 노력하지 않고 누가 은혜 끼쳐주기를 기다린다면 그 심령은 언제까지도 그 상태 그 형편일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열심히 교회출석하고 열심히 성경보고 기도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은혜를 받습니다. 남이 나에게 은혜 끼쳐주기를 바래서 여기 저기 쫓아다니거나 기도는 않고 기도 받기만을 바란다면 받긴 받아도 그 때 뿐이고 항상 구걸신앙이 되고 맙니다. 이제는 신앙도 자립해야 합니다. 항상 품 안의 양이어서는 안 됩니다. 의타성을 버려야 그 신앙은 비로소 자라게 됩니다.

 

저의 첫 목회 시 여집사님 한 분 이야기입니다. 몸이 굳어져서 움직일 수조차 없는 병에 걸렸습니다. 겨우 숨만 쉴 뿐 몸이 굳었을 뿐 아니라 부서질 것만 같아서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죽어가면서 불신자 남편 만나 남편 뜻에 맞추다 믿음을 떠난 죄가 생각났습니다. 그래서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다리를 뻗고 기도하는 것이 너무 죄송스러웠습니다. 그래서 다리만이라도 굽혀지게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며칠 기도했을까 다리가 굽혀졌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다보니 이제는 누워 기도하는 것이 죄송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일어나서 기도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며칠 기도하자 일어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일어나서 기도합니다. 그 분의 소원은 이제 걸어서 교회를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서 걸을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설 수 있었고 걸음마를 시작했습니다. 그 때부터 새벽마다 한 걸음씩 교회를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10분 걸이를 몇 시간씩 쉬면서 교회에 나와 기도합니다. 그런데 감사한 것은 그 긴 시간이 한 시간으로 줄어들고 30분으로 줄어들고 나중에는 10분으로 그러다가 완치 되는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회계 맡아 충성하고 교역자 잘 섬기고 초등학교 교사직에도 복직이 되었습니다. 대장부도 헤어나오기 어려운 환난에서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승리한 좋은 케이스입니다. 이처럼 의존하지 않고 자립하는 믿음이 되시기 바랍니다.

4. 율법적 신앙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8-10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가니라 이 날은 안식일이니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안식일인데 네가 자리를 들고 가는 것이 옳지 아니하니라”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 병자에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는 말은 장로들의 유전에서 탈피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율법을 범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에서는 소나 나귀가 빠졌다든가 사람이 병들었다든가 그런 생명을 살리는 일은 가능합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칠 수도 있고 자리를 들고 가는 그 정도 가지고 안식일 범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의 해석으로 본다면 율법을 범한 것입니다. 만약 병자가 당시 계율에 얽매여 순종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영원히 고침을 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교훈합니까? 너무나도 사람들이 여러 가지에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것에 얽매여서 활발한 영적 생활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교훈입니다. 이것에 얽매이고 저것에 얽매이고 체면에 얽매이고 전통에 얽매이고 생활에 얽매이고 핍박에 얽매이고,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함에 방해가 되고 영적생활을 방해하는 전통이나 체면이라면 과감하게 버려야 합니다. 초대교회를 본받아야 합니다. 자기의 틀을 깨뜨리지 않고 어떻게 새로워질 수 있겠습니까? 꽃게가 껍데기를 벗듯이 자기 틀을 깨드린 것만큼 자랍니다.


5. 기복적 신앙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12-13절 “저희가 묻되 너더러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냐 하되 고침을 받은 사람이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그는 병 고침을 받았지만 자기를 낫게 한 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갑작스럽게 얼떨결에 된 일이고 또 예수님이 그 자리를 피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모르는 병 고침이라면 의미가 없습니다. 육신의 병은 병원에서도 고칩니다. 그가 후에 에수를 만나지 못했다라면 구원의 소식은 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 없는 기적, 예수 없는 축복, 예수 없는 능력, 예수 없는 형통, 예수님에게는 관심이 없고 자기가 목적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면 그것은 기복신앙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예수님을 구하지 않는 기복적 신앙으로는 변화될 수 없습니다. 참된 은혜가 임하지 않습니다. 예수를 구하지 않는 소원성취기도는 이방인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왕으로 삼고 그 발아래 복종하며 예수님을 가장 원하고 예수님을 구해야 합니다. 예수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비로소 성장하는 것입니다.

6. 자만의 신앙에서 탈피해야 합니다.

14절 “그 후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그 사람을 만나 이르시되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 병 고침 받은 사람은 너무나도 좋았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자리를 들고 갔다고 핍박하든지 말든지 병 고침 받은 사실에 즐거움이 넘쳤습니다. 38년간 누웠다가 살아났으니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처럼 뛰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기를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병 나은 것으로 자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범죄하면 또 재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은혜 체험한 것으로 만족하지 말아야 합니다. 복 받았다고 교만해서는 안 됩니다. 자만하지 말고 더욱 자신을 하나님 앞에서 씻고 겸손하고 새로워져야 합니다.

항상 어리고 부족하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섰다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섰다. 이루었다. 이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섰어도 섰다 하는 순간 넘어집니다.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교만은 더욱 안 됩니다. 방심해서도 안 됩니다. 더 하나님을 사모하고 예수님을 구하고 더 회개하며 긍휼을 구하고 가난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창 35:1-5)

 

이 시간에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라는 제목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둘로 나눈다면 세상에서 승리하는 자와 실패하는 자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행복한 사람과 행복하지 못한 사람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어떤 성도는 예수 믿고 세상에 나가서 죄와 저주를 몰아내고 축복의 동산을 이루며 사는가 하면 어떤 성도는 날마다 넘어지고 쓰러지며 복이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합니다. 그 원인은 무엇일까요? 그 원인을 오늘 읽은 본문이 잘 가르쳐 줍니다.

한 마디로 벧엘의 삶이 없거나 적었기 때문입니다. 벧엘의 삶은 무엇일까요? 예배하는 삶입니다. 야곱이 형 에서를 피해 도망하던 때 자기에게 나타나신 하나님께 벧엘에 단을 쌓겠다고 약속했듯 우리들도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해야 합니다. 예배하는 생활이 부족하면 세상에서 100%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교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예배와 기도의 제단 쌓는 일을 잘해야 합니다.

야곱을 보세요. 야곱이가 하나님께 제단 쌓겠다고 한 약속을 어기고 세겜에 머물 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하나 밖에 없는 사랑하는 딸 디나가 강간을 당하는 수치를 당했습니다. 그 일로 아들들이 무수한 살인을 저지르고 그래서 가나안 전역에서 노리는 히위족속들의 보복의 두려움 등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참으로 눈조차 뜰 수 없는 시험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데 왜 이런 어려움을 당할까? 번민하며 부르짖는 야곱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1절에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단을 쌓으라” 이 말씀을 듣고서야 깨닫습니다. 형 에서를 피해 도망하던 때 나타나신 하나님께 벧엘에 단을 쌓겠다고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들도 이 말씀으로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벧엘에 올라가기 위해 극복해야 할 몇 가지가 있습니다.

1. 세겜을 떠나는 일입니다.


1절에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벧엘로 올라가려면 머물던 곳을 떠나야 합니다. 머물던 세겜은 바로 세상입니다. 벧엘은 ‘하나님의 집’입니다. 그런데 야곱에게 세겜은 정말 비전과 매력 있는 곳으로 지남철보다 더 강하게 끌어 떠날 수 없는 곳이었습니다. 양을 먹일 초지가 얼마나 좋은지 아무 생각 없이 거기 꾹 눌러 앉고 싶은 생각밖엔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기 집을 짓고 우릿간을 짓고 또 지으며 정착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이 생각 나는 때면 “하나님 조금만 더요. 조금만 더요.” 하면서 떠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재미있어도 떠나 하나님의 집으로 가야 합니다. 아무리 연속극이 재미있고 축구 야구 경기가 좋아도 떠나야 합니다. 세상이 바빠도 떠나 하나님 앞에 나아와야 합니다. 세상 일이 바쁩니까?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섬길 시간이 없다면 잘못입니다. 그렇게 시간 관리해서는 성공할 수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하나님께 드릴 시간입니다. 이것만 제대로 되면 은혜 받지 않을 수 없고 복 받지 못할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시간이지만 특별히 하나님 앞에 드릴 시간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보장합니다. 예배와 기도시간만이라도 제대로 해보세요. 복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앞은 은혜의 보좌로서 때를 따라 돕는 온갖 은혜와 복으로 충만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84:11에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했습니다. 세상이 나를 끌어당겨도 거기에 사는 길이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유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교회에 믿음 없는 어느 집사가 입만 열면 “목사님, 제가 너무 바빠서요.”라는 핑계를 대며 요령만 피우다가 죽어서 지옥으로 떨어졌답니다. 그는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하나님! 저는 세상에서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믿었는데 대체 하나님은 뭐하고 계셨길래 제가 지옥에 왔단 말입니까?”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래, 너만 바빴냐? 나도 바빴다. 나도 바빠서 너를 구하지 못했다. 유감 있냐?” 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일에 바쁘다고 핑계 대지 말라는 교훈입니다.

혹시 하나님을 믿어 주시기 위해서 나오셨나요? 어느 농촌에 가축 장사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부인의 생명이 위독하다고 목사에게 달려왔습니다. 가보니 맹장염이 쇠하여 복막염 상태라 속히 병원에 가도록 해서 목숨을 건졌습니다. 부인은 은혜를 잊을 수 없다며 교회를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두어 달 교회에 나오더니 예배에 불참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왜 빠지십니까?” 그러자 “목사님의 은혜를 잊을 수 있나요? 그런데 요즈음 너무 바빠서요. 염소장사는 요즈음이 한철이거든요. 목사님 한가하면 열심히 믿어 드릴께요.” 이처럼 믿어 주시는 분이 계시다면 그 일 그만하셔도 좋으니 이제는 하나님을 나의 주 나의 하나님으로 바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애굽의 바로를 보세요. 이스라엘을 놓아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세상이 나를 놓아주려고 하지 않아도 나와야 합니다. 성도들은 직업도 하나님 섬기기 위해서 분주하지 않는 직업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돈벌이가 많아도 하나님 섬길 수 없다면 그것은 복이 아닙니다.

우리는 최소한 첫 시간은 드려야 합니다. 그러나 정말 행복한 삶을 위해서라면 시간의 십일조는 드려야 합니다. 24시간이면 2시간 24분입니다. 약 2시간 반은 하나님께 드려야 합니다. 새벽에 한 시간, 저녁에 한 시간, 낮에 30분 이렇게 하나님께 드리면 그 삶은 놀라운 풍성함이 있을 것입니다. 복을 받으려면 놓지 않으려는 세겜에서 떠나야 합니다.

2. 버릴 것을 버리는 일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은 야곱은 자기 식솔들을 준비시킵니다. 2절 “야곱이 이에 자기 집 사람과 자기와 함께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의 이방 신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데 우상이 있으면 되겠습니까? 그런데 야곱의 가족들은 아직 이방의 냄새가 물씬 나는 삶이었습니다. 드라빔이라는 우상도 있었고 신상이나 주문을 새긴 부적 같은 귀걸이도 있었습니다.

자기 식솔들이 갖고 있는 드라빔과 귀걸이는 고향으로 돌아가면 아버지의 거대한 유산과 바꿀 수 있는 보물이었습니다. 얼마나 귀한 것이었으면 라반이 그것을 잃고 군사를 이끌고 야곱을 추격해 왔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발견한 자는 살지 못한다고 했으나 라헬이 얼마나 귀하게 여겼으면 끝까지 목숨 걸고 감추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걸 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세겜에서 수치를 당할 대로 당하고 고통을 당할 대로 당한 후에야 이게 다 뭐냐 하면서 그것을 다 상수리나무 아래다 묻었습니다.

이처럼 세상의 버려야 할 것들 다 십자가 아래 묻으시기 바랍니다. 그것들이 행복을 가져다 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걸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고통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그것 때문에 임합니다. 버리기 어려운 마음의 탐욕과 죄악, 세상 생각들 있다면 다 버리세요. 그게 행복의 길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거룩함과 화평함이 없이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3. 옷을 바꾸어 입는 일입니다.

다시 2절 " 자신을 정결케 하고 의복을 바꾸라” 그리고 그들은 야곱의 말대로 의복을 바꾸어 입었습니다. 이방의 유행하는 자유롭고 요란한 패션이 아니라 성도의 거룩한 옷을 입었습니다. 아무렇게나 터져 시원하게 입고 뒹굴면 좋은데 하나님 앞에서 입는 옷이니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더구나 열대 지방 아닙니까? 여름에 우리 목사들 까운 입어 봐서 압니다. 그러나 세겜에서 당한 고통에 비하면 이건 아무 것도 아니었기에 군소리가 없었습니다.

옷은 영적으로 행실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새 마음을 가지라는 교훈입니다. 내 맘대로 살지 말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니 내 뜻대로 살며 자유분방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만 그래도 내 뜻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삽니다.

 

김익두 목사가 부흥회에 참석하려고 산길을 걷다가 더워서 웃옷을 벗고 시원한 바람에 땀을 식히고 있었습니다. 그 때 맞은편에서 술 취한 사람이 오더니 "너 왜 나보다 먼저 올라온 거야?" 라고 말한 후 다짜고짜 김익두를 때리기 시작했습니다. 김익두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 매를 맞았습니다. 그리고는 술취 한 사람에게 "형님, 다 때렸습니까?" 라고 묻자 "그래 다 때렸다. 어쩔래?" 그러자 김 목사는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형님이 받으셨군요. 내가 바로 익두요." 그러자 깜짝 놀라 살려달라고 빌더랍니다. 이처럼 이제는 때리면 맞아야 합니다. 거짓말도 하지 않아야 합니다. 얼마나 불편합니까? 그래도 죄짓고 사는 것보다는 백배 천 배나 낫습니다.

그리고 옷은 준비입니다. 항상 준비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배를 위해 준비해야 합니다. 그러면 놀라운 은혜를 주십니다. 모든 삶이 예배이지만 특별히 드리는 예배가 있는데 준비해야 합니다. 어느 은혜 많이 받은 성도가 영안이 열려 보니 교회 일찍 나와서 예배를 위해 준비기도하는 성도들이 있는데 천사가 그들에게서 기도의 향을 취하여 강단에 붓더랍니다. 기도의 향을 붓자 하나님의 영광이 안개처럼 자욱하게 되는데 그래도 좀 부족하더랍니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니 뒤에 성도들이 교회에 왔지만 난로를 쐬며 잡담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 성도들의 기도만 합해지면 되는데 하면서 마음이 그렇게 안타까울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준비한다면 하나님이 크게 받으실 예배가 될 것이고 큰 임재하심으로 복 내려 주실 것입니다.

4. 다 맡기고 전진하는 일입니다.

5절 “그들이 발행하였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신 고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야곱의 최고의 두려움은 주변 족속들의 보복이었습니다. 방비가 가장 취약할 때가 이동할 때입니다. 그의 아들들이 세겜성 사람을 다 죽였으니 주변 족속들이 가만있겠습니까? 특히 세겜 사람들이 히위족속입니다. 히위족속은 전 가나안에 퍼져서 큰 세력을 이루며 살고 있었고 이 사건으로 히위족속이 발칵 뒤집혔습니다. 그러므로 벧엘로 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두려움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셔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예배하는 생활을 하려고 하면 왜 두려운 것이 많은지요. 야곱의 아들들의 잘못 때문에 추격자들이 두려웠듯이 율법과 양심이 나를 쫓아옵니다. “너 죄인이잖아? 오늘도 다투었고 양심을 속였다. 탐욕도 부렸고 하나님을 망각하며 살았다.” 하면서 우리 심령을 찌르고 갈기갈기 찢어놓습니다. 사단의 참소입니다. 이 추격이 얼마나 집요한지 하나님께 나갈 수가 없고 기도해도 기도가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습 그대로 나오는 것을 기뻐하시지 외식으로 가리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 이 대로 받으신다는 믿음 가지고 나가면 아무도 추격할 자가 없습니다. 죄도 허물도 맡겨야 합니다.

사업도 가족도 책임지실 것을 믿고 맡겨야 합니다. 내가 주일을 드려도 하나님이 책임지시겠지. 내가 하루 한 두 시간 하나님께 드려도 하나님이 알아서 해주시겠지, 자녀들이 안 풀린다고 말해도 천대에 복을 주신다 하셨으니 기다려라 우리 하나님 잘 섬기면서 조금만 더 기다리자 이렇게 말하세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셔서 가난도 염려도 추격하지 못할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이 어려울 때마다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기도합니까? 기도 말고 더 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 가져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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