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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및 신앙 서적

순교사화: <피 흘린 발자취>가 전하는 순교자들|

by 은총가득 2020. 10. 17.

순교를 주제로 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들'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시작해봅니다. 초기 기독교를 향한 박해에 수많은 순교자들의 순교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진실로 그리스도로 인한 새 생명을 얻기위해 자신의 몸을 포기했습니다. 로마가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고 그들을 압제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복음은 순교자들의 순교를 통해 더 힘있게 전해졌습니다.

 


죽음을 이긴 순교자들의 믿음과 소망

 


초기 기독교는 모진 박해의 파고(波高)를 헤치고 살아남았다. 4세기에 이르러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란 칙령>과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기독교 공인으로 로마가 기독교 국가가 되기 전인 1~3세기에 기독교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곧 죽음을 의미했다.

 


그렇지만 모진 고문과 죽음의 위협도 결코 그리스도인을 굴복시키지는 못하였다. 그들은 부활에 대한 확신, 임박한 주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강렬한 소망, 자신들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에 대한 뜨거운 사랑에 사로잡혀 있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인사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였다.

 


어느 시대에나 복음이 전파될 때마다 세상의 통치자들과 관원들, 거짓 종교의 지도자들은 복음을 대적하고 핍박하였다. 특히 사단은 이 세상에서 거듭난 교회를 말살하기 위하여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방법들을 거리낌 없이 사용하였다. 사단의 목표는 이 세상을 복음이 없는 세상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교회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생명을 걸고 복음을 지켰다. 사탄이 성도의 몸은 죽일 수 있었지만 그들의 믿음과 소망을 죽일 수는 결코 없었다.

 

 

 

순교자들

신약 시대 첫 순교의 면류관을 쓰는 영광은 스데반에게 돌아갔다. 그는 죽음 앞에서도 성령으로 충만했고, 복음을 증거하는 그의 얼굴은 천사 같고 악의가 전혀 없었으며, 죄인들을 향한 긍휼이 가득했다.
열두 사도 중 첫 순교자인 요한의 형제 야고보는 헤로디아의 오라비였던 아그립바의 칼에 의해 처형당했다.

 

 


AD 67년경에 순교한 베드로는, 자신을 십자가에 처형시키려는 형리(刑吏)에게 ‘나는 나의 구주께서 돌아가신 자세로 죽기에 합당치 못하니 내 머리를 아래로 향해 죽게 해달라’고 간청하여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안드레는 이방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아가야에서 순교했다고 전해지는데, 두 나무를 중앙에서 가로지른 카이(X) 모양의 십자가에 달려 백성들을 권하고 기도하면서 죽었다고 전해진다. AD 67년경 네로의 박해 때 순교한 사도 바울은 로마 시민이었으므로 십자가형에 처하지 않고 목을 베어 죽였다고 전해진다. 폴리갑은 불꽃 속에서 승리의 면류관을 바라보며 육체를 떠나 영원한 주님의 나라로 들어갔다. 안디옥 교회의 지도자였던 이그나티우스는 AD 115년경 원형경기장에서 굶주린 맹수들에게 갈기갈기 찢겨 죽었다. 마태는 에티오피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며 많은 영적 목자들을 세우고 창에 찔려 죽었다고 전해진다. 디모데는 이교들의 우상 숭배를 나무라다가 곤봉에 맞아 죽기도 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이런 분들 외에도 수많은 성도들이 이름도 남기지 않고 주의 이름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드렸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변치 않는 약속 안에 있다.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고후 6:9)

 


어떤 사람은 끓는 기름에 던져졌고, 어떤 사람은 사지를 절단 당하거나 갖가지 방법으로 고안해낸 고문을 당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들과 정혼한 신랑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며 달려나갔고, 박해는 순교자들의 믿음을 별처럼 빛나게 만들었다.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단 12:3)

 

불과 칼, 십자가형이나 황제의 위협 아래서도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이들의 영혼을 품으며 복음을 전파했고, 어떤 지역에서는 이방 종교가 거의 멸절해버릴 정도로 교세가 확장되었다.

 

 

순교에 관한 주제로 지난 포스팅을 올렸습니다. 이번에도 '순교'에 이어 '순교자'에 관하여 포스팅을 시작합니다. 교회사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유세비우스가 쓴 <교회사>나 존 폭스의 <순교사>, J.M 캐롤 박사의 <피 흘린 발자취> 등을 통해 여러가지 순교사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교회사가들이 전한 순교자들의 이야기 중에 초대교회와 중세교회의 순교자에 대한 이야기들 중 몇 가지를 자세히 소개합니다.

 

 

페르페투아와 펠리키타스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202년 ‘유대교와 기독교로 개종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칙령을 발표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는데, 그때 북아프리카의 페르페투아(Perpetua)가 순교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페르페투아는 20대의 결혼한 귀족 여성으로, 간수의 허락을 받고 젖먹이를 데리고 감옥에 갇혀 있었다. 곁에는 펠리키타스(Felicitas)라는 임신한 노예 소녀와 몇 명이 같이 있었다. 재판 날이 다가오자 딸을 끔찍이 사랑했던 페르페투아의 아버지가 감옥으로 찾아와서 딸에게 그리스도를 부인하라고 설득했다.


“얘야, 내 흰머리가 가엾지 않니? 내게 아버지라 불릴 만한 가치가 있다면 네 아비를 불쌍히 여겨 다오. … 사람들에게 손가락질을 당하지 않게 해다오. … 네 아들을 생각해 봐라. 네가 없으면 그 아이가 어떻게 살겠니? 자존심 때문에 우리 전부를 파멸시키지 말아 다오.”

 


페르페투아는 아버지 때문에 마음이 무척 무거워졌다. 그러나 그녀는 아버지의 애원에 굴하지 않았다. 그녀의 결심은 아버지를 몹시 격노케 해서 아버지는 딸을 심하게 때리고는 며칠 동안 찾아오지 않았다. 총독 마누티아스는 그녀에게 황제를 위해 제사를 드리고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라고 명했다. 그녀는 싫다고 대답했고, 아이를 빼앗긴 채 컴컴한 굴 속에 던져졌다.

 


얼마 후, 그녀의 아버지가 다시 찾아와서 아주 부드럽게 신앙을 포기하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자신을 온전한 산 제사로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아버지에게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재판장은 다시 한번 자신의 생명과 아버지의 눈물, 그리고 어린 아기의 인생을 생각해보라고 권했다. 그녀는 “아버지가 오셔서 내 마음을 흔들어 놓으시더니, 턱수염을 잡아뜯고 얼굴을 감싸쥐시고는 살아오신 날들을 저주하기 시작하셨고… 나는 노년에 이런 불행을 끼쳐드려 너무나 슬펐다.”라고 했다. 그러나 재판을 받을 때 페르페투아는 그리스도로부터 온 믿음과 사랑의 위대한 힘을 훌륭하게 증거했다. 그녀의 마음은 이미 육체의 고통과 혈육의 정을 넘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가 있었다.

 


함께 사형 판결을 받은 펠리키타스가 진통이 찾아와 소리지르자 간수가 “이만한 고통에도 소리를 지르는데, 맹수들에게 던져질 때는 어떡할래?” 하고 물었다. 펠리키타스는 “나의 고통은 나 자신의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내가 맹수들을 대면할 때, 내가 그분을 위하여 고난 당하기 때문에, 내 안에 거하셔서 나를 위해 고통을 담당하실 분이 계십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딸을 낳았고, 그 아이는 한 그리스도인이 데려가 친딸처럼 키웠다.

 

원래 로마정부는 임신한 여성은 처형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주의 이름을 위하여 순교하기를 사모했다. 그들이 영원한 본향으로 가던 날, 총독 앞을 지나가면서 “당신은 우리를 심판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을 심판하실 겁니다.”라고 말했다. 대여섯 명의 거룩한 순교자들은 카르타고의 검투장에서 처형되었다.

 

 

줄리안(Julian)

길리기아 태생 줄리안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체포되어 고통을 당했지만 굽히지 않았다. 어떤 노력도 그의 신앙을 버리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지자, 사람들은 그를 채찍으로 때린 후 독사와 전갈이 잔뜩 들어 있는 가죽가방 속에 집어넣어 바다에 던져버렸다.

 

 

블란디나(Blandina)

고울(Gaul) 지방에 혹독한 핍박이 찾아왔을 때 남프랑스의 노예 소녀 블란디나는 이방 신들을 믿고 따르기를 거부하여 사람들과 함께 경기장으로 끌려나갔다. 15세 난 소년 폰티쿠스(Ponticus)는 제일 먼저 죽었고, 블란디나는 제일 나중을 위해 남겨졌다. 그녀는 죽음을 기다리면서 두려워하는 사람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격려하며, 그리스도 앞에서 다시 만나자고 권면했다. 마침내 그녀의 차례가 되었고, 맹수들 앞으로 가는 그녀는 마치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결혼식장으로 나아가는 듯했다. 맹수들 앞에 섰으나 맹수들이 그녀를 해치려 하지 않아, 그녀는 불에 달구어진 의자에 앉혀졌다. 기력이 없는 그녀는 자신의 몸이 타는 것을 알고도 저항할 수 없었다. 고통과 공포가 오고가 기진맥진하여 죽기 직전의 모습이 되자 그녀는 황소가 갇혀 있는 감옥에 던져졌고, 성난 황소가 뿔로 그녀의 온 몸을 들이받아서 갈기갈기 찢어놓았다. 피에 물들고, 불에 탄 그녀의 몸은 사람의 형체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마지막에는 목을 잘랐는데, 그것이 그녀에게는 마지막 고난이며 영원한 영광에 참예하는 일이었다. 참혹한 고통을 통과하여 그녀는 신랑 되신 그리스도의 영접을 받고 그리스도의 왕궁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시신은 6일 동안 시민들에게 전시되었고, 이후 불태워 재를 론강(江)에 뿌렸다. 177년 프랑스 리용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마리아 드 코시카오(Maria de Coceicao)

‘마리아 드 코시카오’라는 젊은 여인이 오빠와 함께 리스본에서 살고 있었는데, 종교 재판관에게 체포되어 고문대에 올려졌다. 그녀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재판관이 요구하는 대로 고백하고 말았다. 쇠사슬이 풀리고 다시 감방으로 보내져, 그녀는 팔 다리가 어느 정도 회복될 때까지 거기 있었다. 그리고 다시 재판석에 불려나가 그녀가 고백한 것을 재인정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완강히 거부하면서, 전에 고백한 것은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억지로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답에 화가 난 재판관은 그녀를 다시 고문대에 누이라고 명했다. 그녀는 다시 연약한 본성에 휩쓸려 전에 한 고백을 또 하고 말았다. 그녀는 즉시 감방으로 보내졌다. 세 번째 재판관 앞에 불려나온 그녀는 고백에 서명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녀는 이번에도 전과 같이 대답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나는 내 육체의 연약함에 두 번이나 지고 말았습니다. 어쩌면 고문대에 있는 동안 또다시 약해져서 그렇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이 내게 100번 고통을 준다 해도 고문대에서 풀려나오자마자 나는 고통으로 인해 억지로 고백한 사실들을 다시 부인할 것입니다.”

 


재판관은 그녀를 세 번째 고문하도록 명령했다. 세 번째 시험에서 그녀는 아주 꿋꿋하게 고통을 견뎠다. 그녀의 믿음과 인내가 증가되자 재판관은 그녀를 죽이지 않고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거리로 끌고 가면서 매질을 한 뒤 10년 동안 추방시켰다.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사람들

 


이처럼 무서운 박해가 계속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서 복음을 향해 전진해갔고, 성도들의 피라는 풍성한 수액을 공급받아 쑥쑥 자라고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장기간의 잔혹한 박해를 받으면서도 교회는 폭력이나 물리적인 저항으로 맞서지 않고 진리를 위해 고난을 당하고 죽는 거룩한 믿음으로 맞섰다. 이 믿음의 장렬함이야말로 가장 견고하고 아름다운 무기였다. 하늘에서 받을 시들지 않는 면류관을 사모하는 소년 소녀들까지 거룩한 믿음의 용사가 되어 죽음을 향해 달려나갔다. 신앙을 지키느라 온갖 고통을 당하다가 죽은 사람들은 <피의 증인들>이라고 불려지기도 했다. 이 땅의 어떤 종교도, 무기를 들지 않고 영적인 힘으로 황제와 박해와 원수들을 이겨낸 종교는 없다.

 


기록된 순교 사례들 가운데 가장 처참한 모습은 주로 원형극장에서 자행되었다. 군중들이 구경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인들은 뻘겋게 달궈진 쇠사슬에 결박되고, 그로 인해 살이 타들어가며 내뿜는 악취와 연기가 질식할 정도로 사방에 진동했다고 역사는 전하고 있다. 더러는 조개껍질이나 쇠갈고리로 온 몸이 토막났고, 어떤 경건한 처녀들은 검투사나 포주에게 넘겨져 욕을 당했다. 227명의 회심자들이 달궈진 쇠로 한 쪽 다리를 절단 당하고, 한 쪽 눈이 후벼 패인 채 광산으로 보내졌다는 사료(史料)도 있다. 더러는 펄펄 끓는 납 용액을 뒤집어쓰고 죽었으며, 더러는 소금과 식초에 절여져 고문대에서 피흘리며 죽었다. 말 한 마디만 하면 그 참혹한 고통을 면할 수 있었는데도.

 


“저희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히 11:33~38)

[출처] 순교사화: 유세비우스 <교회사>, <순교사>, <피 흘린 발자취>가 전하는 순교자들|

 

기독교박해와 변증가들에 관한 포스팅을 이어가보겠습니다. 기독교박해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변증가들이 사상적으로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현재 우리에게 '디오그네투스 선생에게 보낸 편지'로 알려진 한 서한은 작자미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권하는 내용입니다. 사본은 전쟁으로 소실되었지만 그 전에 기독교학자에 의해 연구되고 출판되었습니다. 콰트라투스, 아테나고라스, 멜리토 등 의 변증가들도 사상적인 기독교박해에 대항하여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 이 서한의 내용과 함께 다른 수많은 변증가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디오그네투스 선생에게 보낸 편지

작자 미상의 저자가 2세기 말엽과 3세기 초엽 사이에 집필한 변증론 『디오그네투스(Diognetus)에게 보낸 서한(Epistola ad Diognetum)』이라는 문헌이 있다. 이 문헌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앙리 에티엔느(Henri Etienne)가 1592년 파리에서 『디오그네투스에게 보낸 서한』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하면서이다. 이 문헌의 사본이 처음 발견된 것은 15세기 초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어느 생선가게의 헌 종이 꾸러미 안에서였다. 희랍어를 공부하러 온 젊은 학생이 이것을 헐값에 산 뒤 한 신학자의 손으로 넘어가면서 서방 교회에 이 문헌이 알려지게 되었다. 그 후 스트라스부르크 시립도서관에 사본이 보관되어 있다가 1870년 전쟁 때 소실되고 말았지만, 이미 여러 번 연구되고 출판된 뒤였다.

 

이 문헌은 호교론(護敎論)이면서 동시에 그리스도교 신앙을 권유하는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곧 디오그네투스가 던진 그리스도교에 관한 질문에 대답하는 편지 양식이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이 “그리스도 신앙에 관한 한, 신약성경을 제외하고 이 책만큼 현대인의 마음에 감동을 주는 저술은 없다”라고 평가할 만큼 뛰어난 작품이다. 일부 학자들은 저자를 유스티누스로 보기도 한다.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남과 다르다면 영토가 달라서도 아니고 하는 말이 달라서도 아니고 의복을 입는 모양이 달라서도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네 고유한 도성에 고립되어 사는 것도 아니고 특이한 언어를 쓰는 것도 아니며 특별한 모양으로 삶을 영위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의 교리는 인간들의 불안한 지성이 탐구하여 달성해낸 것도 아니고, 어떤 사람들이 하듯이 인간적인 철학 체계를 신앙으로 고백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들은 각자의 운명이 정해주는 대로 그리스 도시들이나 야만인 도시에 거주하며, 의복이나 음식이나 그 밖의 생활방식에 있어서 지역의 전통에 그대로 순응하고 있습니다.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방식에서는 놀라운 모범을 보여주며, 그 모범은 누구나 자백하듯이, 믿기지 않을 정도입니다.”

 

“그들은 지상에 거처하지만 마치 이방인 같습니다. 시민으로서 모든 본분에 참여하지만 그들은 외국인 취급을 받습니다. 어느 이역(異域) 땅이나 그들에게는 조국이요, 어느 조국도 그들에게는 이역 땅입니다. 누구나 하듯이 그들은 혼인을 하고 자녀를 낳지만 갓난아기를 내다 버리지는 않습니다. 누구와도 밥상을 함께 나누지만 잠자리를 함께 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육을 입고 살지만 육에 따라 살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지상에서 삶을 이루고 가지만 천국의 시민들입니다.

그들은 정해진 법률에 복종하지만 그들의 생활 모습은 법을 초월합니다. 모든 이를 사랑하면서도 모든 사람들에게서 핍박을 받습니다. 혐의가 없으면서도 유죄로 판결을 받습니다. 사람들이 그들에게 죽음을 부여하지만 그들은 거기서 생명을 얻습니다. 처형을 당할지라도 다시 살 것을 생각하고서 기뻐합니다. 그들은 가난하지만 실은 부유합니다. 모든 것을 빼앗기지만 그들은 충만해 있습니다. 그들은 경멸을 받지만 멸시 중에도 하느님 앞에서는 오히려 영광을 받습니다. 그들의 영예는 사정없이 짓밟히지만 그것이 그들의 무죄함을 증명합니다.

 


리스도인들은 모욕을 당하면서 상대방을 축복합니다. 온갖 무례를 가하지만 그들은 존경으로 대합니다. 선을 행하고서 악인으로 벌을 받습니다. 그런데 벌을 받고서도 그것이 자기들에게 생명을 주는 양 즐거워합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이단자들이라고 공격하고 헬라인들은 그들을 박해합니다. 하지만 그들을 미워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미워하는 이유를 밝히지 못합니다.”

 

“영혼은 불멸이면서도 죽어야 할 운명의 육체 안에 예치되어 있는 것같이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비록 타락하기 쉬운 세상사 가운데서 이방인으로서 살아가지만 그들은 하늘에서 그들을 기다리는 거룩함을 바라보며 고대하고 있습니다. …
우리 불의가 극에 다다라 그 책벌의 형태로써 고초와 죽음이 임박해 우리를 위협하고 있는 것이 환히 나타났을 때, 미리 작정하신 자비와 권능을(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은 참으로 위대합니다) 보여주실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미워하거나 거부하거나 복수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내로 우리를 참으시며, 자비하심이 넘쳐 우리 죄를 짊어지고 자원하여 그 죄를 속량할 대가로 당신의 아들을 주셨습니다. 악인을 위해 거룩하신 분을, 죄인을 위해 무죄하신 분을, 불의한 자를 위해 의로우신 분을, 썩어버릴 자를 위해 썩지 않으시는 분을, 그리고 죽어야 하는 자를 위해 불멸이신 분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아니라면 우리 죄를 덮어버릴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독생자 안에서가 아니라면 악하고 불의한 우리가 어떻게 의(義)를 발견할 수 있었겠습니까?

오, 복된 전환이여! 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업적이여! 오, 기대치 못할 은혜여! 많은 이들의 불의가 한 의인 안에서 덮여져, 한 의인의 정의는 수많은 불의한 이들을 거룩하게 했습니다.”

 

 

그 외의 변증가들


콰드라투스(Quadratus)

아테네의 감독으로서 기독교 최초의 변증가이다. 변증가의 아버지라고 일컬어지는 그는 125년경 로마의 하드리안 황제에게 공개적인 변증 서신을 보냈다. 그는 예수께 병 고침을 받은 자들 중 지금까지 살아 있는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들어 기독교를 힘있게 변증하였다.

 


아테나고라스(Athenagoras)
2세기 후반의 인물로서 아테네에서 출생하여 철학자로 활동하다가 후에 기독교를 믿었다. 177년경에 쓴 그의 저서 『기독교에 관한 사명』과 주님의 부활을 적극적으로 변호한 『부활』이 유명하다. 그는 변증가 중 뛰어난 문장력을 갖춘 강력한 변증론자였다.

 


멜리토(Melito)
사데 교회의 감독이었던 멜리토는 신중하고 위엄 있는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이 찢기고, 그리스도인들이 체포와 고문을 당하며, 맹수나 도끼에 의해 잔인하게 죽임을 당하고 화형에 처해지는 모습을 보며 황제 앞에 변호사로 섰다.

 


변증가 터툴리안의 '삼위일체' : 라틴신학의 아버지

 

라틴교회는 초기교회에서 언어에 따라 분화된 세 그룹의 교회(시리아-아르메이나어계, 헬라어계,라틴어계)중 하나입니다. 기독교 변증가 터툴리안은 라틴어로 신학적인 저술을 하여 후에 라틴신학의 아버지라고도 불립니다.

변증가 터툴리안은 신약과 삼위일체 와 같은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의 저술활동은 <변증>이라는 책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이 변증가 터툴리안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라틴 신학의 아버지 터툴리안(Tertullianus)

 

터툴리안은 160년경 카르타고(지금의 튀니지)에서 로마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그는 수사학과 법률을 공부하고 법률가가 되었다.

터툴리안은 40세에 그리스도를 만났다. 당시 로마 사회에는 부도덕한 삶이 만연해 터툴리안은 매우 금욕적이었으며, 육신을 절제하는 삶을 강조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후 기독교 신앙을 위한 변증가로서 광범위한 저작 활동에 몰두했다. 그는 철학, 법률, 헬라문학, 라틴 학문에 심오한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다. 번뜩이는 지성, 꺾이지 않는 의지, 불같은 웅변, 날카로운 풍자 등 풍부한 은사를 가지고 진리 수호에 총력을 기울였던 터툴리안은 탁월한 변호사, 논리적인 웅변가, 철의 의지를 지닌 변증가로 평가된다. 그의 방대한 저술들 중 가장 유력한 저서는 『변증Apology』이다. 이 책에서 그는 다른 그리스도인 변증가들이 한 번도 다룬 적이 없는 강력한 논점들을 다루었다.

 


터툴리안은 그의 신학적 저술들을 라틴어로 저술했고, 라틴역 성경도 마련하여 서방 라틴 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터툴리안은 2~3세기의 가장 뛰어난 기독교 저술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되는데, 이교도들도 그의 문체에 매료되어 그의 작품을 읽을 정도였다. 그는 법률학적인 용어나 수사학적으로 세련미가 넘치는 용어들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그는 ‘기독교인들을 색출해낼 필요는 없어도 당국에 고발된 기독교인들을 처벌하라’는 트라얀 황제의 불의한 판결에 항거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를 ‘결코 사과하지 않는 변증가’로 평가했다. 5세기의 한 저술가는 “그가 언급하는 모든 말은 경구(驚句)였고, 그가 진술한 모든 내용들은 승리를 거두었다.”고 말했다. 그는 대적자들을 완전히 패배시킬 때까지 논증했지만, 앙심을 품거나 부정직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자기 주장의 정당함을 확신하고 최선을 다해 자신의 주장을 변증했다.

 


지리상으로 알렉산드리아가 헬라 기독교의 중심지였다면, 카르타고는 라틴 기독교의 중심지였다. 이 시대 라틴 신학자의 중심 인물은 터툴리안과 키프리안이었다.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감독들은 대개 헬라 철학에 정통한 사람들임에 비해 라틴 교회의 감독들은 대개 법률, 정치 등의 사회과학적인 교양을 갖춘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알렉산드리아 신학은 기독교가 지니고 있는 영적 진리의 특성을 잘 설명한 데 비해, 라틴 신학은 기독교의 역사성을 분명히 해주는 데에 도움을 주었다. 즉, ‘역사적 사건과 그것의 근거가 되는 성경의 계시, 그리고 그 계시에서 나온 교회를 통해 기독교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우쳐주는 데 기여했다.

 


터툴리안은 진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발견할 때까지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일단 발견했으면 믿어야 한다. 그 이후에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은 여러분이 이미 믿고 있는 것을 붙드는 일이다. 뿐만 아니라 여러분은 더 이상 믿을 것이 없음을 믿어야 하고, 더 이상 찾을 것이 없음을 믿어야 한다.”

 


터툴리안은 모든 사변(思辨)을 배척했다. 그리고 성경 밖의 문헌에 근거한 신학 추구를 거부했다. 그는 이교 철학이 모든 이단들의 원천이라 하였다.

 


단호하며 열정적인 그는 처음에는 주류인 정통교회를 지지하다가 207년에 몬타누스주의(주로 세상의 임박한 종말과 거기에 입각하여 더욱 엄격한 생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재혼도 금하고 금식을 많이 하며 박해 시에 숨는 일도 금했다)에 가담했다. 법률가적인 그의 성향은 엄격한 질서를 그리워했고, 당시 교회는 터툴리안의 기준에 미달이었기 때문에 몬타니즘과 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그러나 말년에는 몬타니즘에 환멸을 느끼고 거기서 나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탁월한 재능으로 인해 교회의 존경과 신뢰를 계속 받았다. 그는 220년 이후 연로하여 죽었다.

 

 

터툴리안의 『변증』

 


그의 저술 중 가장 유명한 책은 단지 『변증Apology』이라 불린다. 터툴리안의 저술들은 저스틴과 같은 2세기 변증가들의 저술들을 계승한 것이었으나, 그들의 저술보다 훨씬 뛰어난 면을 지니고 있다. 그는 단지 그리스도인이란 이유 때문에 사형을 선고하는 불법에 대하여 그의 모든 해박한 법률 지식을 동원하여 논박했다.

 

“우리는 단지 어제만을 제외하고는 당신(황제)의 모든 곳들-도시들, 섬들, 요새들, 마을들, 시장들, 군대의 막사들, 궁전, 원로원, 공회 등-에서 우리의 의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의 신전은 멀리했다.” 『변증』 37장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국가의 모든 재난의 원인이며 모든 사람이 겪는 고통의 원인이라는 근거 없는 모함으로 그들의 증오를 정당화한다. 만일 티베르 강이 도시의 성벽에 넘쳐 흐르거나 혹은 나일 강이 주위 평야를 적시지 않거나, 만일 천체에 이상 현상이 나타나든지 혹은 땅이 움직이든지, 기근이 있든지 혹은 전염병이 있다면 곧바로 다음과 같이 소리친다.

 


‘그리스도인들을 사자에게 던져라.’
무슨 소린가! 그렇게 많은 사람들을 한 마리의 사자에게 던지란 말인가?” 『변증』 40장

 

“(우리에 대한)당신들의 박대가 아무리 교묘할지라도 그것은 당신들에게 유익을 주지 못한다. 대신에, 그것은 우리 종파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당신들이 우리를 쓰러뜨릴 때마다 우리의 수는 더 늘어난다. 그리스도인들의 피는 (교회의)씨앗이다. 당신들이 비난하는 그 내용이 우리에게는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 내용을 알고자 하는 사람이 그 비난의 이면에 숨어 있는 것을 연구하고 감동을 받지 않겠는가? 이렇게 연구한 그 사람이 우리의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변증』 50장

 

터툴리안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중시했다. 그리스도의 가장 중요한 사명과 활동은 십자가에서의 죽음이라고 했다. 그는 이레니우스와 함께 영지주의를 강력히 반대했다. 그는 또 오리겐과는 달리 그리스 철학을 증오하고 강력히 비판했다. 그는 그리스 철학을 이단의 근원으로 보았다.

 


터툴리안은 그의 생애를 자신의 신앙의 일관성과 반대자들의 모순을 보여 주는 데에 쏟았다. 그는 진실하고 선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위해서는 목숨까지도 바칠 단호한 인물이었다. 한편으로 그의 성격은 다소 모나고 거칠고 괴팍했다고 전해진다. 상대방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경우도 있었고, 사실을 과장하거나 기독교인들의 도덕성을 과장하는 경우도 혹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터툴리안의 신학은 정통으로 인정받고 있고, 그의 탁월한 논리적 사고는 기독교를 변증하는 데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신약(新約)’이라는 말과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하나의 본질과 세 位格(위격)’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특별히 터툴리안의 삼위일체 개념은 후에 있을 니케아 종교회의에 큰 영향을 준다. 그는 또 어린아이에게 주는 유아 세례를 반대했다.



기독교박해와 변증가 저스틴
교회사

 

저스틴은 사상적인 기독교 박해에 대항하여 일어난 대표적인 변증가입니다. 철학에 박식했던 저스틴은 성경을 통하여 참 진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는 성경이야 말로 참된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저스틴은 살아있는 동안에 변증가로서 구약성경의 예수님을 전했고 그가 남긴 <변증서(Apology)>에서 복음 편에 서서 그리스도를 증거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변증가 중에서도 저스틴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저스틴이 어떻게 예수님을 만났는지, 그 후에 그는 순교하기 까지 어떤 삶을 살았는지 함께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저스틴과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


대표적인 변증론자 저스틴(Justin Martyr)은 2세기 초 팔레스타인(세겜 땅)에서 희랍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났다. 저스틴은 진리를 찾고자 하는 열망을 가진 사람으로, 열렬한 철학도였다. 여러 철학을 공부하고, 특히 플라톤 철학에 심취해 있었다. 30대 초반에 그는 ‘플라톤 철학의 최고봉’에 있는 신(神)에 깊이 매혹되어 에베소 근처의 해변을 걷고 있던 중 거듭난 늙은 유대인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다.

 


온유하고 진지한 노인은 저스틴에게 그가 대답할 수 없는 많은 질문을 하였다. 많은 토론이 있은 후, 노인은 저스틴에게 “그대는 행함과 사랑이 없는 말쟁이에 지나지 않소. 그대의 목적은 선의 실천자가 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리한 논쟁가, 교묘한 궤변론자가 되려는 데 있소.”라고 하며 “성경을 뒤져 보라. 히브리 예언자들을 연구해 보라. 그대 앞에 광명의 문들이 열리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 하나님과 그리스도가 지혜와 계시를 주시지 않는 한 아무도 이것들을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을 맺었다. 저스틴의 눈에 그 노인에게는 참된 철학이 있어 보였다. 이후 저스틴은 구약 성경을 탐독했고, 예수 그리스도 구약을 성취한 구원자요, 진리임을 발견했다.

 


“나는 이 철학만이 안전하고 유익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플라톤의 사상에 기쁨을 느꼈지만, 그리스도인들이 비난을 받으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을 보았을 때 그들이 죄악과 쾌락 속에서 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당시 그가 죄 사함의 경험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가 진리라는 사실을 확신했고, 모든 철학 중 기독교가 참된 철학이라는 것이 그의 중심 사상이었다. 이후 그는 기독교의 역사와 진리에 대해 가르침을 열심히 받았고, 교회의 훌륭한 지도자이자 뛰어난 변증론자가 되어 강연과 논쟁과 저술 등을 통해 복음을 변호하고 전파하는 데 헌신했다.

 

 

구약의 그리스도를 증거한 저스틴


 

스스로 철학자라고 했던 저스틴은 거듭난 뒤 자신이 갖게 된 믿음을 전파하기 위해 많은 편지와 글을 썼고, 이교도들이 그리스도인들을 아주 가혹하게 다루자 그리스도인들을 변증하는 글을 써서 황제에게까지 띄웠다.

 


저스틴에게 있어서 구약 성경을 이해하는 열쇠는 그리스도였다. 저스틴은 시편 22편을 26회나 인용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어떻게 예언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등 여러 시편을 자주 인용하였다. 그는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을 증명하기 위해 이사야 52장 13절과 53장 12절을 29회나 인용하였다. 또한 그는 구약 성경의 여러 구절들이 신약의 예표로 나타났다고 보았다. 노아 방주의 나무는 십자가의 나무를, 야곱의 아내 레아나 라헬은 교회를, 여호수아는 예수님을 예표한다고 하였다.

 

 

복음의 변증가요, 순교자였던 저스틴


안토니누스 피우스(Antoninus Pius, 138-161)의 통치 기간에 저스틴은 로마에서 학교를 세워 학생들을 가르쳤다. 저스틴은 사상과 토론과 논증에 열중한 학자였다. 그가 마흔 다섯 살 때, 고린도에서 철학을 공부한 유대인 철학자 트리포(Trypho)와 논쟁을 벌였다. <트리포와의 대화>라는 책에서 저스틴은 트리포에게 구약 성경에 나타난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임을 설명했다. 이 책은 주로 유대교에 공감하는 이방인들에게 기독교가 뛰어남을 변증하고 있다.
저스틴은 로마에서 한 유명한 철학자와 논쟁을 벌였고, 영지주의적인 발렌틴 파(派), 마르시온 파 사람들과 유대인들과도 논쟁하였다. 그러자 그의 삶을 시기하는 철학자들이 일어나, 저스틴은 ‘이방 신들에게 희생 제물을 드리라’는 황제의 새로운 법을 어겼다고 고소되었고, 재판관 앞에 서게 되었다. 재판관은 저스틴의 신앙에 대해, 교회의 모임에 대해 물었다. 저스틴은 ‘그리스도인들은 한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그리스도를 믿으며, 그리스도인의 모임이 어디에서 이뤄지는지에 대해서는 결코 말할 수 없다’고 단호하게 대응했다. 그는 다른 신들에게 예배하고 신앙을 포기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길을 택했다. 저스틴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통치하던 때에 일어난 박해 기간에 6명의 동료들과 함께 채찍질을 당하고 참수형을 당하여 ‘순교자(Martyr)’라는 별칭을 얻었다.

 

 

저스틴의 변증서들

 

 


저스틴의 첫 <변증서(Apology)>는 안토니우스 피우스와 그의 양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그리고 로마 국민들에게 보내는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기독교인들에게 자유와 공평을 베풀 것을 제안하였다. 총 68장으로 구성된 제1 변증서에서 그는 최초로 이교도의 여러 비난과 몰이해에 대해 논박하였다. 4~13장까지 기독교에 대한 비판을 논박하고, 그 뒷장들에서는 기독교의 우월성을 변증하였다.

제2 변증서는 15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인을 부당하게 처벌한 것을 항변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교도인 남편이 그리스도인인 아내를 로마의 행정장관 우르비쿠스에게 고발했는데, 그 부인은 남편의 생활방식 때문에 이혼하기를 원하였다. 귀족이었던 그녀가 자신에 대한 재판을 연기시키는 데 성공하자, 그녀의 남편은 그녀에게 복음을 전해준 프톨레미라는 사람을 투옥시켰다. 프톨레미는 재판에 회부되어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였다는 이유로 사형을 선고받았다. 루키우스라는 사람이 방청인 자격으로 그 부당한 판결에 대해 항의하였다가 그리스도인인지 심문 받았고, 그렇다고 대답하자 그도 즉각 사형을 언도받았다. 저스틴은 이들을 부당하게 처형한 것에 대해 격렬히 항변했다.

그는 또 “그리스도는 소크라테스보다 엄청나게 뛰어나다. … 왜냐하면 아무도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위해 죽을 만큼 그를 신뢰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 철학자들과 학자들이 믿었을 뿐만 아니라 예술가들과 전혀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도 그분을 위하여 부귀, 두려움, 그리고 죽음을 초개같이 여겼다.”라고 말했다.

저스틴이 한 변증의 공로는, 당시 만연해 있던 ‘기독교인은 무신론자고 부도덕하며 인육을 먹는다’는 소문을 확실히 격침시켰으며, 이교에 대한 기독교의 우월성을 입증했다는 점이다. 저스틴의 사상은 전반적으로 성경에 기반을 두었으나 그의 철학적 배경에서 받은 영향도 무시할 수 없다. 저스틴은 소크라테스 같은 이들까지 그리스도 이전의 기독교인이었다고 주장하는 지나친 비약과 오류를 보이기도 하였다. 철학과 기독교 신앙 사이의 연속성을 설명하려 했던 접근방법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클레멘트와 오리겐이 계승했다. 터툴리안은 그런 저스틴의 시도에 대해서는 ‘기독교의 옷을 입은 철학자’라고 아주 단호하고 비판적이었다.

 

또 다른 기독교 박해 : 기독교를 공격한 철학자들

 

로마는 기독교인들을 정치와 군사로만 박해하는 데서 끝난 것이 아니라 다수의 철학자들을 통하여 사상적으로도 공격을 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학문과 지식을 기독교를 비난하고 공격하는 데에 쏟아 부었습니다.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박해에 순교자들과 인도자들이 복음을 지켰던 것 처럼 그리스도인 중에서도 변증가들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흐리고 하나님을 조롱하는 철학가들의 사상에 반격하는 또 다른 복음의 전쟁이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기독교를 공격한 철학자들'에 대해서 살펴보고 이어지는 포스팅에서 변증가로서 기독교 신앙을 정립한 부분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합시다.

 

 

기독교에 대한 사상적 공격

 


로마제국이 정치적, 군사적 방법으로 기독교인들을 박해한 것과 병행하여 문서적, 사상적으로 기독교를 공격하는 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사단은 복음을 대적하기 위해 물리적 박해만 가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전술을 구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사상적 공격수들은 주로 철학자들이 많았는데, 루키아누스(Lucianus of Samosada)와 켈수스(Celsus, 셀수스) 등이 대표적인 사람이었다.

 


안팎에서 공격을 가하는 이단들(영지주의, 몬타니즘, 반삼위일체주의)이나 철학자들과 교회가 싸우면서 기독교 신앙을 변증(辨證, 변론하여 증명함)하는 변증서들이 많이 저술되었고, 교리문답 학교도 등장했다. AD 125년 즈음에는 아테네 교회의 감독 콰드라투스가 하드리안 황제에게 공개적으로 변증서를 썼고, 아리스티데스는 피우스 황제에게 변증서를 썼다. 하지만 그 중요성으로 볼 때 저스틴(Justinus, 유스티누스)이 기독교의 첫 변증가로 꼽힌다.

 

켈수스(Celsus)


켈수스(Celsus)는 2세기 후반의 인물로, 플라톤 학파에 속하면서도 에피쿠로스 학설에 기울어진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저서 <진리>에서 기독교에 대하여 총체적이면서도 논리적이고 학문적인 비판을 시도했다. 켈수스는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온갖 학설과 풍자와 상식을 다 동원해서 기독교를 공격하였다.

 


켈수스의 사상은 그리 깊지는 않지만 후세의 기독교 반대론자인 볼테르, 시트라우스가 사용한 말들 중 상당수가 켈수스의 저서에서 나왔을 만큼 날카롭게 기독교를 부정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근친상간을 하고 인육을 먹는다’는 식의 대중적 비판을 답습할 만큼 경솔하지 않았고, 기독교 신조의 각 조항을 조목조목 조롱하고 비방했다.

 


그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고 했다. 만약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 즉 그릇되게 나가지 않을 세상을 창조했을 것이라고 했다. 만일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그릇된 방향으로 나갔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세상을 바로잡는 데 관심이 없다는 증거라고 했다. 만약 하나님이 그런 데 관심이 있었다면 팔레스타인을 자기 땅으로 선정했을 리 만무하며, 아울러 그 땅에서 저급한 하층민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세상을 구원하도록 맡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부활했다고 하지만, 누가 살아난 것을 보았는가? 미친 여자와 넋나간 사람들뿐이다.”

 

 

신플라톤주의자 포르피리우스(Porphyrius)


신플라톤주의 철학자들 중에서 가장 냉정한 인물로 여겨지는 포르피리우스(Porphyrius)는 성경이 말하는 창조, 타락, 성(成)육신 구속, 심판 등의 진리를 송두리째 배격했다. 그는 다신교 옹호자로서, 교회에 대해 몹시 적대감을 품고 무려 15권의 저서를 지어서 기독교를 공격했다.

 

그는 ‘하나님이 어떻게 해와 달을 창조하시기 전에 빛을 창조하실 수 있었는지, 그리스도가 어떻게 제자들에게 더 이상 자기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고 동시에 그들과 항상 함께 있겠다고 할 수 있었는지’를 물었다. 또 신약과 구약이 서로 충돌한다는 것, 사도들이 서로 분쟁했다는 것, 제자들의 사상이 일치되지 못했다는 점 등을 들어서 예수님의 신성을 부정하고 그 가르침이 불완전하다고 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이 거짓말을 했으며, 제자들의 본이 되지 못했다고 했다. 또,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 사후에 그 교훈을 곡해하여 사족을 달았다고 했다.


초기 교부들은 그를 가장 지독하고 화해할 수 없는 신앙의 적대자로 여겼다.

 

 

대항마(對抗馬) 변증론자들

철학자들의 공격에 맞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기독교에 대한 오해와 잘못된 소문을 제거하고, 진리의 복음과 교회를 지키고 변증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학식 있는 자들이 일어나서 자신들이 믿는 바를 붓으로 담대하고 능력있게 전했는데, 이들을 변증가(apologist)라고 부른다.

변증가들은 하드리안 황제(재위 117~138) 때부터 기독교에 대한 오해나 비난에 대하여 편지나 글로 변박하고, 기독교인이라고 까닭 없이 박해받는 사람들이 공평한 재판을 받을 수 있도록 변호하며 복음의 진리를 역설하였다. 이들의 글은 기독교 신앙을 정립하고 체계화해 신자들의 신앙을 견고케 하고 북돋우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속사도들이 서신을 남겼다면, 변증가들은 작품을 남겼다. 일부 변증가들이 복음의 진리를 헬라의 철학적 개념으로 설명하려고 한 경향 때문에 신앙적인 면에서는 속사도들의 신앙보다 후퇴했다고 평가되기도 하지만, 한편 신학의 기초를 놓았다고 볼 수 있다.
변증가들 중에는 주로 2세기에 출현한 신학자들, 특히 철학적 소양이 풍부한 헬라(동방) 계통 사람들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순교자 저스틴은 탁월한 변증가였다. 또 라틴의 교부 터툴리안(Turtulian, 155~230 추정)도 대표적인 변증가였다. 터툴리안은 ‘신약(新約)’이라는 말과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한 사람이기도 하다.

[출처] 또 다른 기독교 박해 : 기독교를 공격한 철학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