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배교자, 고백자 -
300년 기독교 박해 중의 배교한 그리스도인의 처리문제'에 이어서 '키프리안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합니다. 배교자들에 대한 논쟁의 정점에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키프리안과 노바티안이 있었습니다. 키프리안은 소위 온건파에 해당하는 입장을 벌였습니다만 그가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중에 순교를 택하지 않고 숨어서 교회를 살폈던 것은 인도자 없는 교회를 염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후에 키프리안은 신앙인의 길을 계속 걸어간 결과로 참수형을 당하게 됩니다. 키프리안의 삶을 통하여 교회에서 인도자의 중요성에 대한 부분을 함께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키프리안(Cyprian)
이교도 부모 밑에서 태어난 키프리안(200-258)은 육신의 일락과 명예로는 진정한 만족을 느끼지 못해 친구인 캐실리우스 장로의 설교를 자주 들으며 성경도 많이 읽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가 46세(246년)이던 어느 날 정원에 앉아서 성경을 읽다가 거듭나는 체험을 했다. 그때부터 그의 생활은 현저히 바뀌었다.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헌신하리라 결단하고 그의 평생을 주님께 드렸다.
그는 249년 초 카르타고(Carthage, 그리스인들은 칼케돈이라고 부름)의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키프리안은 동양 사람인 터툴리안을 굉장히 존경하여 그를 항상 ‘주(主, The Master)’라고 불렀다. 키프리안은 터툴리안 예찬론자로 그의 글을 열심히 연구해 수사학에 익숙하여 그의 논적(論敵)들을 쉽게 이겼다. 그의 글들은 당대 최고의 기독교 작품들에 속하고, 그는 정열적인 터툴리안과 달리 온건하고 친절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키프리안은 데키우스의 박해 직전에 감독이 되었으며, 박해 때에는 숨어 다니면서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신앙을 의심했다. 후에 타락한 자들의 회복 문제를 다룰 때 어떤 사역자는 ‘로마 교회는 박해 중에 감독을 잃었는데, 이에 대해 키프리안의 견해는 어떠한지’ 문의하는 편지를 썼다.
키프리안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카르타고 지역의 감독 회의를 소집했다. 감독 회의에서 ‘신앙을 버린 자들에게는 엄한 벌을 내리고,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하거나 황제의 신상에 경배하지 않고 박해를 피하기 위해 배교증명서를 뇌물로 산 사람들은 조건 없이 교회로 받아들이기’로 아주 쉽게 결정하였다. 또한 배교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회개하였을 때에는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되, 그들의 회개가 진심이라는 것이 증명될 때에 한하여 허락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것은 감독들이지 ‘고백자들’이 아니라고 결의했다. 이로써 논쟁은 멎었지만, 감독 회의의 결의에 반대하는 이들도 있어서 교회의 분열은 얼마 동안 지속되었다.
키프리안은 이후 발레리안 황제 치하의 박해 때 새로운 총독에 의해 검거되었고, 로마 신들에게 희생제를 드리지 않는다고 참수형을 당한다. 그는 심문이나 처형을 당할 때 신앙인답게 행동하고 순교함으로써 자신의 믿음과 인격의 고매함을 빛나게 하였다.
갈레리우스(Galerius): 그(신들을 섬기는) 일을 재고하라.
키프리안: 당신의 그러한 요청을 재고하십시오. 이것은 재고할 필요도 없는 단순한 문제입니다.
갈레리우스: 로마의 신들과 그들에 대한 신성한 의식들의 반대자로 자청하고 나선, 신성 모독자인 그대의 생명은 너무 길었다. 그대는 악질적인 범죄의 기수였기에 우리는 그대를 본보기로 삼아 그대와 사귄 자들에게 교훈을 주고자 한다. 우리는 키프리안이 참수되는 것을 기뻐한다.
키프리안: 하나님께 감사하나이다.
258년 9월 14일,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부장이 일격에 키프리안의 목을 베었다. 그때 죽음을 각오하고 모여든 성도들이 다함께 함성을 질렀다.
“우리도 키프리안과 함께 죽기를 원한다!”
“…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계 20:4)
데키우스의 박해 때 키프리안은 자신이 순교함으로써 개인적인 명예를 얻는 것보다 살아서 성도들을 돌보아야 할 사명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입장을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자신의 행위를 비겁하고 믿음 없는 행위라고 비난할 것도 충분히 예견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내가 순교한다면 남은 성도들은 지도자 없는 상황에서 더욱 방황하고 약해질 것이다’고 생각하여, 훗날 자신이 받을 모욕과 비난을 감수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감독과 고백자
노바티안은 배교자들은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때 키프리안의 권위가 문제시되었다. 키프리안에 대한 반대는 노바티안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제기되었다. 사람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고통을 당한 카르타고의 다른 ‘고백자들’이 키프리안보다 더 권위가 있다고 보았다. 그로 인해 ‘고백자들’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져서, 그들이 친구와 친척들에게 사면을 남발하는 부작용이 생기고 감독들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경시되었다. 이에 대해 키프리안은 ‘고백자들’의 사면 추천을 존중하지만 사면권은 감독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키프리안은 교회의 하나 됨을 대단히 중요하게 보고, 교회의 분열을 가장 심각한 문제로 보았다.
“가지가 나무에서 부러지면 싹을 틔울 수 없으며, 시내가 근원에서 끊어지면 말라버립니다. … 그리스도의 교회를 떠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상급을 받을 수 없습니다. … 그렇게 탄생된 교회는 사탄의 교회를 만듭니다. … 그들은 교회 밖에서 모이면서 마치 그들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것처럼 꾸미고 있습니다.”
키프리안은 ‘고백자들’의 행동이 교회가 하나 됨을 위협했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을 배격하고, 타락한 자들의 문제를 해결할 감독 대회를 개최해 인도자의 권위를 세워 분열된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고자 했다.
“여러분은 교회 안에 인도자가 있으며, 인도자 안에 교회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누구라도 인도자와 함께 있지 않으면 그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키프리안은 251년 <교회의 일치에 대하여>라는 선언서를 낭독했는데, 이는 교회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교리는 천 년 이상 교회의 규범으로 남아 큰 영향을 미쳤다.
교회 안에 감독 제도를 확립하기 위하여 열정적으로 활동한 키프리안은 진정 서방(라틴) 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요, 신학자이며 저술가였고, 영광스런 순교자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깊은 신앙과 인격에서 우러나온 관심과 사랑으로 양떼들을 열심히 보살핀 목자로 기억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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