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깊은 영성
뿌리깊은 영성이란 뿌리를 가꾸는 것입니다. 나무의 뿌리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무의 생명은 뿌리에 있습니다. 나무를 쓰러뜨리는 가장 무서운 병은 뿌리 병입니다. 뿌리 병은 쉽게 알아 볼 수 없기 때문에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뿌리 병에 걸린 나무는 서서히 생명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깊이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만이 뿌리 병을 식별할 수 있습니다. 영적 민감성을 가진 사람만이 나무의 뿌리와 같은 영혼의 병든 상태를 분별합니다.
깨달음에 이르면 뿌리를 보게 됩니다. 깨달음이란 ‘뿌리로부터 본다’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곧 깨달음이란 문제의 원인을 보고, 본질을 파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영성 생활에서 깨달음은 생명입니다. 깨달음만이 희망입니다. 깨달을 때 병든 뿌리를 치료합니다. 깨달을 때 보이지 않는 뿌리를 돌보게 됩니다. 깨달을 때 열매를 맺게 됩니다(마 13:23).
나무의 미래는 건강한 뿌리에 있습니다. 건강한 뿌리를 가진 나무는 어디에 심기었느냐에 따라 나무의 미래가 결정됩니다. 나무는 좋은 땅에 심기어야 합니다. 좋은 땅이란 물이 잘 흐르는 땅입니다.
물이 막힌 땅은 나무가 결실 할 수 없습니다. 물의 흐름이 좋은 땅에 심기운 나무만이 풍성한 열매를 맺습니다.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는 물의 흐름이 좋은 땅에 심기운 나무입니다.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는 시절을 쫓아 과실을 맺고, 잎사귀가 마르지 않습니다(시 1:3). 더위가 올지라도 두려워아니하고, 가무는 해에도 걱정이 없습니다(렘 17:8).
뿌리깊은 나무와 같은 영성을 소유했던 사람이 요셉입니다. 요셉은 샘 곁에 심기운 무성한 가지였습니다(창 49:22). 그 가지가 담장을 넘었습니다. 샘 곁에 심기었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께 심기었다는 것입니다. 뿌리깊은 영성은 뿌리를 하나님께 깊이 내린 사람입니다.
뿌리깊은 영성은 위로 성장하기 전에 아래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나무의 크기는 뿌리에서 결정됩니다. 나무의 높이와 넓이는 뿌리가 땅 아래로 얼마나 성장했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위로 성장하기 위해 아래로 성장하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고독한 길입니다.
인간의 내면의 심층에 있는 욕망 중에 하나는, 위로 올라가고 싶고 밖으로 드러나고 싶은 욕망입니다.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인기를 얻는 것입니다. 그것을 내려놓고 뿌리를 깊이 내리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래로 뿌리를 내린다는 것은 자신을 은닉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깊은 영성을 소유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오랜 기간 동안 아래로 성장하는 데 시간을 보냈습니다. 아래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려가고, 떨어지고, 버림받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요셉은 구덩이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형제들에게 버림받았습니다. 충성했던 주인에게 버림받았습니다. 애굽에 내려갔고, 감옥에 내려갔습니다. 13년이란 긴 세월 동안 그는 계속해서 내려가기만 했습니다.
모세도 아래로 성장하는 시간을 오랜 세월 동안 보내야 했습니다. 동족의 버림을 받아 광야에서 40년 동안을 보냈습니다. 잊혀진 존재로 40년을 보냈습니다. 기나긴 내려감의 날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내려감을 통해 모세는 온유한 성품의 소유자가 되었습니다.
황량한 광야에서 머리를 키우는 것이 아니라 가슴을 키웠습니다. 외모를 가꾸기 보다 내면을 가꾸었습니다. 육신의 힘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에 복종하는 훈련을 감수했습니다.
뿌리깊은 영성의 모범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마구간으로 내려 가셨습니다. 구유로 내려가셨습니다. 십자가와 음부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만왕의 왕, 만주의 주가 되시기 전에 깊이 내려가는 영성을 소유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먼저 위로 올라가기 전에 자신을 감추고 아래로 성장하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영성의 향기는 외모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면 깊은 곳에서 흘러나오는 향기입니다. 우리 함께 뿌리깊은 영성을 추구합시다. 우리를 부르는 뿌리깊은 영성의 세계 속으로 들어갑시다./ 강준민
뿌리깊은 영성 – 강준민 <요약 >
1. 비움은 영성의 시작이다. 채우기 전에 해야 할 일은 비우는 일이다.
2. 사역의 출발은 주는 것이 아니라 받는 것이다. 그 받은 것을 흘러 보내는 것이 사역이다. 전달자
3. 인생은 채움으로 오는 만족보다 나눔으로 오는 기쁨이 더하다. 진정한 기쁨이란 결국 채운 것을 눌 때 오는 것이다.
영성의 길에 선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균형 잡힌 삶을 산다는 것이다.
4. 인간의 뿌리는 영혼이다. 영성 훈련이란 영혼을 관리하는 것이다.
5. 깊은 영성을 사모하는 사람은 말씀과 성령님과 항상 함께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6.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하나님의 은혜로부터 온다. 영적 성장의 열쇠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 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벧후3:18)
7. 지혜는 예수님을 묵상하고 예수님의 삶과 말씀을 묵상 할 때 지혜가 주어진다.
8. 지식은 단순히 머리로 아는 것 이 아니라 하나님을 맛보아 아는 것이다.
9. 믿음에는 분명한 대상과 내용이 있다. 맹목적인 믿음은 진정한 믿음이 아니다. 분별력 있는 믿음이 참 믿음이다.
10. 영적 성장은 지속적인 지각의 훈련을 통해서 온다. 최상의 지각훈련은 지속적인 독서와 학습이다.
11. 하나님 앞에서는 양의 모습을, 세상을 향해서는 사자처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살아가야 한다
12. 궁중교육이 모세에게 지식과 정보는 제공해 주었지만, 인격을 변화시키지 못했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모세의 성품을 변화시켰다. 원망과 불평으로 가득 찬 이스라엘 백성을 온유함으로 품을 수 있는 성품은 광야에서 만들어 졌다.
13. 광야는 육신을 의지했던 사람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으로 변화되는 곳이다.
14. 기다림은 하나님의 사람이 미래를 준비하시는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는 것이다.
15. (역상12:32) 시세를 안다는 것은 시대를 알고, 때를 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때를 분별 할 줄 아는 사람을 사용 하신다.
16. 하나님은 모세가 광야에 있는 동안 인내하는 훈련을 시켰다. 인내를 통해 모세에게 나타난 성품은 온유이다.
온유한 성품이 중요한 것은, 온유한 자만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수 있고 하나님의 때를 분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7. 홀로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자신을 돌아 볼 수 있다.
18. '광야'란 말과 '말씀'이란 말은 히브리 어원이 같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말씀하신다. 광야에서 자기 백성을 부르신다.
19. 예수님은 몸 전체가 귀였다. 예수님은 온 몸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순종 하셨다.
20. 하나님의 사람은 사람을 움직이기 전에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21. 하나님의 사람은 새벽에 기도하고, 새벽에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시46:5)
22. 하나님은 자아가 강한 사람을 사용하시기로 작정 하셨을 때는 그를 광야로 보내셔서 깨뜨리시는 일부터 시작 하신다.
23. 광야는 작은 일에 충성하는 훈련장이다.
24. 그리스도인의 리더쉽이란 꿇은 무릎(기도와 섬김), 젖은 눈(자기죄, 백성의죄 회개), 깨어진 심장(그들을위해 중보)에 있다.
25. 고난당한 것이 내개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개 되었나이다. (시119:71)
- 광야 -
26. 광야는 고난의 모습을 한 축복의 장소임을 기억하라!!
27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허다한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병도 나음을 얻고자 하여 모여오되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 (눅5:15~16) 예수님은 전도하시고 물러나 기도하셨다.
28. "나는 아침에 일어나면 하나님의 뜻에 나의 생각을 맞추는 일부터 시작 합니다. 그러면 인생이 보람되고 행복해지게 마련입니다." - 허드슨 테일러 -
29. 하나님과의 깊은 친교는 침묵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침묵 할 때 이루어 진다.
30. 어떻게 우리 마음의 잡초를 뽑아 낼 수 있는가? 회개를 통해서 이다.
31. 예수님은 세리도, 창기도, 죄인도, 병자도 사랑하셨다. 그러나 외식(이중성)하는 자들만은 경계하시고 책망하셨다.
32. 영성훈련은 예수님처럼 사적생활과 공적 생활의 모습을 일치시키는 작업이다.
33.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상에서 화려한 꽃을 자랑하는 인생이 되기보다 비록 화려하지 않아도 열매 맺는 백성이 되기를 원하셨다.
34. "바다가 모든 강들 가운데 왕이 되는 것은 바다가 가장 아래 있기 때문이다." - 현자 -
35. 하나님이 열매를 찾으시는 이유는 그 열매 안에 감추어진 생명 때문이다. 그 안에 감추어진 가능성 때문이다.
36. 열매 맺는 삶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삶,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삶이다. 그리고 그 삶의 절정은 자신을 깨뜨리는 삶이다. 씨앗이 깨뜨려 질 때 생명이 드러나 싹이 나고 열매를 맺게 된다. 열매 맺기 위해서는 예수님처럼 깨어지는 아픔을 경험해야 한다.
37.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하나님과 함께 일하고, 하나님을 통해서 일하는 것은 어렵다.
38. 예수님과 생명력 있는 교제가 없는 한 우리의 사역은 쓸모가 없다.
39. 예수님의 말씀안에 거할 때 예수님과 연합하게 된다. (요8:31)
40. 영성은 하나님의 능력을 담는 그릇이다.
41. 영성 훈련이란 자신을 깨끗게 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기 위해 날마다 자신을 부인하는 훈련이 영성 훈련이다. (눅9:23)
42. 하나님이 쓰시기 원하는 사람들을 깨끗하고 합당한 그릇으로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은혜의 방편 가운데 하나가 고난이다.
43.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는 것이 두 마음을 품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약1:7~8)
44. 한마음을 품는 비결은 다니엘처럼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쓰임받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아는 것이다.
45.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물질, 권력, 섹스, 지식과 정보 같아 보이지만 정작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영적인 감화력이요, 거룩이다.
46. 하나님의 사람에게 있어서 거룩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능력이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바로 거룩이다.
47.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다만 하나님은 우리의 모습 속에서 얼마나 그리스도를 닮았는가를 찾으실 것이다.
48. 예수님의 생애를 관찰하라. 매일매일 기도와 말씀 묵상이라는 거룩한 습관을 가지고 사셨다.
49. 영성이 깊어진다는 것은 영적인 사력이 좋아진다는 것이다. 신앙생활이란 보는 것이다. 하나님을 보고 자신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되면, 하나님의 빛을 통해서 자신의 어두운 부분이 더 밝게 조명되는 것을 보게 된다. 때문에 죄에 대해 더욱 민감해지고, 예민해지는 것이다.
50. 깊은 영성의 세계에 들어가는 사람에게 인내는 필수 과목이다. 인내가 거룩한 습관이 되어야 한다. 거룩한 취미가 되어야 한다. 인내를 이루자. 예수님을 생각하며 오래 참자.
51. " 나는 영성의 최고봉을 절제라고 믿는다." 절제 할 수 있는 능력은 어디서 오는가? 첫째는, 성령님 둘째로, 영적훈련이다.
52. 언어가 성숙하려면 성령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한다. 언어에 능한 성숙한 사람이 되려면 마음관리를 잘해야 한다. 언어에 실수가 없으려면 침묵하는 훈련을 겸해야 한다.
53. 성숙한 하나님의 사람들의 특징은 자족하는 삶에 있다. 다윗은 "내 잔이 넘치 나이다." 했다 (시23:5). 천하보다 더 크신 분이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 인간은 만족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고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만날 때 인간의 욕심이 끝을 경험 할 수 있다.
54. "미숙한 사람은 자기와 닮은 사람만 좋아하고, 성숙한 사람은 자기와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
- 프레드스미스 -
55. 예수님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다. 사람들은 온유한 마음을 소유한 사람의 품에 안긴다.
어떤 사람도 이 따뜻한 품에 안기면 변화된다. 딱딱한 달걀도 품으면 병아리가 된다. 그 병아리가 커서 닭이 되어 무수히 많은 달걀을 낳는다. 그러나 달걀을 품지 않고 깨뜨리면 한번 먹고 마는 계란에 불과하다.
56. 예수님은 우리에게 결코 편안한 삶을 약속하신 적이 없다. 다만 풍성한 삶을 약속 하셨다. 인간의 행복은 편안한 삶에 있지 않다. 인간의 행복은 보람에 있고 의미 있는 삶을 추구하는데 있다.
57.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의 특징은 편안한 보금자리를 떠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58. 영성을 유지 할 수 있는 영적 비결은..?
1) 정로로 걸어 가야 한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수1:7)
좁은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은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마7:13~14)
2) 예수님안에 거하고(요15:5),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히3:1)
3) 성령 충만한 갊. 예수님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은 주의 영으로 말미암는 것이다.(고후:3:18)
4)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좇아가야 한다.
5) 사탄과 영적 전쟁을 위해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6) 사랑의 동기로 하나님과 사람을 섬기라.
7) 영성관리와 사역에 균형을 이뤄야 한다. 죄를 비우고, 말씀으로 채워야 한다.
말씀을 채운 다음에는 나누어 주므로 비워야한다. 말씀을 비우고 나누는 순간 말씀은 더 풍성해 진다.
사역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인격에서 나온다. 인격을 통해서 사역이 흘러 나오도록 하는 것이다.
" 뿌리깊은 영성/강준민" 읽고...
영적 성장은 깊은 깨달음에서 온다. 즉, 영성의 깊이는 깨달음의 깊이인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문제의 핵심을 깨달음으로 보신다. 시편 49편 20절에서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말했다.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남을 깨우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깨우치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깨닫기를 힘써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깨우치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실 때 깨우침을 가장 중요하게 다루셨으며 씨뿌리는 비유에서 길가에 뿌리운 씨앗을 설명하시며,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는다고 하셨다(마 13:19). 또한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내가 되느니라 (마 13:23)」고 말씀하셨다. 그런즉, 열매 맺는 비결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며 깨닫는 사람은 순종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열매를 맺는다.
그렇다면 과연 열매 맺는 영성인 깊은 깨달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먼저 가장 흔한 방법이 영적 안내자들을 통해서 깨닫는 것이다.「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행 8:31)」. 영적 안내자는 깨달은 자요, 남을 깨우칠 수 있는 자이다. 깨우침이 '길'이라면 그 길을 보고, 길을 알고, 길을 안내하는 것이 영적 지도자의 일인 것이다. 다음으로 성령님께서 말씀을 깨닫도록 도우시는 것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4:26)」라는 말씀처럼 성령님은 말씀에 빛을 비추어 주시며 우리 안에서 말씀을 열어 주신다. 마지막은 기도하는 사람이 말씀을 깨닫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다니엘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예레미야가 기록한 예언의 말씀을 읽다가 바벨론 포로가 끝나는 70년의 년수를 깨닫게 되고 더 깊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금식하며 기도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천사를 통해 응답하셨다.
결국 말씀에서 깨닫기를 사모하는 다니엘의 겸손이 깨달음을 입게 했고 큰 열매를 맺게 한 것이다.
깨달음이 하루아침에 오는 게 아니듯이 이 오랜 깨달음의 가운데 우리는 기다림이라는 또하나의 힘든 과정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받는 첫 번째 수업은 기다리는 것이었고 하나님이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를 부르신 것도 그가 80세일 때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때는 우리의 생각보다 대체로 더디게 온다. 우리는 급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급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는 반드시 찾아오며 항상 정확하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하나님이 귀히 사용한 사람일수록 많은 시간을 기다리게 하셨으며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은 그 사람의 인격을 성숙하게 만드셨다.
광야 학교에서 받는 기다림의 훈련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통이었다. 모세가 40년을 잊혀진 존재로 살아야 했을 때, 요셉이 13년을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할 때, 2년 동안 옥중에 있을 때 그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의 침묵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잊으셨다는 생각이 그들로 하여금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통 중에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기다림의 학교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 보통 사람들은 원망하고 세월을 낭비할 때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성품뿐만 아니라 내일의 사역을 준비했다. 기다리면서 기도했고 기다리면서 계획을 세웠으며 기다리면서 준비했다. 결국 요셉은 기다리는 13년 동안 애굽의 문화와 언어를 익혔고 하나님이 국무 총리로 그를 사용하시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기다림은 낭비가 아니다. 기다림은 자신의 백성들의 미래를 준비하시는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는 것이다. 지금 당장의 기다림이 지루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질 수 있으나 먼 훗날 크게 쓰임 받을 자신을 생각한다면 끊임없는 기도로써 기다림을 지혜롭게 이겨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들은 홀로 있는 훈련을 통해 더욱 뿌리깊은 영성을 다져 나갈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과정에서 통과해야 할 수업이 있다면 외로움일 것이다. 깊이 있는 영성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이 외로움이라는 학교에 입학하지 않으면 안 된다. 광야는 황량한 곳이다. 홀로 있어야 한다. 거기서 하나님은 자기 사람들을 준비시키시며 외로움을 통해서 우리를 성숙시키신다. 깊이 있는 사람은 홀로 있음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토저는 「이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들은 대부분 외로웠다」고 말했으며, 실제로 모세도,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그리고 바울도 외로웠다. 왜 하나님은 성도에게 외로움을 통과하게 하실까? 왜 홀로 있게 하실까? 그것은 우리가 홀로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장소도 화려한 궁중이 아닌 외로운 광야에서 였다. 홀로 있다는 것, 다시 말해 고독이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다. 고독은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깊은 친교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축복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시간이다.
비록 오늘날 우리에게는 모세와 같은 광야는 없지만, 이 광야는 단순히 특정 장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홀로 있을 수밖에 없는 고난의 현주소요, 내적 상태일 수 있다. 하나님은 바로 그 곳에서 우리를 만나시기 원하신다.
홀로 있음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다면 이젠 자아를 깨뜨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깨뜨리신다. 그러나 아주 부서뜨리지는 않으신다. 성경은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게 는 자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게 하되 금, 은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말 3:2-3)」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기 사람들을 만드시되 금을 연단하고, 은을 연단하시듯 우리를 연단하신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은 사용하지 않으신다. 지나친 자기 과신은 하나님의 사역에 장애가 된다. 모세는 40세가 되었을 때 육을 신뢰했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보다는 자신의 힘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육의 힘과 세상의 실력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애굽 사람 한 명을 쳐죽이는 것이었고 결국 하나님은 그를 광야로 보내셨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그의 육의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셨고 그의 자아를 철저하게 깨뜨리셨다. 모세의 자아가 깨어졌을 때 비로소 그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다. 그는 육신의 방법과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의 일은 육신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다. 겨우 애굽 사람 한 사람을 쳐죽였던 모세가 장정만 60만, 200만 명 이상의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가른 것처럼 우리는 '나'를 깨고,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용하실 수 있지만 자아가 너무 강한 사람은 사용하실 수 없다. 그래서 자아가 강한 사람을 사용하시기로 작정하셨을 때는 그를 광야로 보내셔서 깨뜨리는 일부터 시작하신다. 이런 깨어짐은 우리에겐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요, 영광이다.
자신을 깨는 훈련을 겪었다면 자신을 감출 줄도 알아야 한다. 열매 맺는 영성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 자신을 감추는 데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애에 나타난 모습이다. 씨앗이 싹이 나고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땅속에 감추어져야 하고 그 씨앗이 썩어서 싹이 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도 밖으로 나오기까지는 땅속에서 감추어져야 한다. 자신을 일찍 드러내는 사람은 인기는 있을지 몰라도 열매는 풍성하지 못하다.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것은 주님이 보여주신 영성이 아니다. 주님의 깊은 영성은 스스로 자신을 감추는 데 있다. 예수님은 늘 자신을 감추기를 힘쓰셨다. 예수님의 탄생에서 보여지듯 그분은 유력한 여인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아무도 기대 할 수 없는 여인의 몸에 자신을 감추셨다. 주님이 드러내길 꺼려하셨다는 사실은 성경에 충분히 나와 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 주신 후 자신이 그 병을 고쳐 주었음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부탁하셨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다가 왕을 삼으려 했을 때도 예수님은 그 무리를 떠나 한적한 곳에 가셔서 홀로 기도하셨다(요 6:15).
우리는 자신을 알리는 것을 최고로 생각하는 시대 속에 살고 있다. 누군가가 내 존재를 알아주길 바라며 사람들의 평판을 자기 존재 가치와 연결시키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가 하는 일을 드러내실 때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자기 과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존재가 넉넉한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힘쓰지 않는다. 그 안에 풍성한 생명이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열매를 찾으시는 이유는 그 열매 안에 감추어진 생명 때문이다. 열매를 풍성히 맺는 영성을 소유한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드러내지 않는 영성은 뿌리깊은 영성의 열매를 맺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이다.
홀로 있는 다는 것과 자신을 깨는 것 등은 분명 우리 인간에겐 고난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하나님은 고난을 통과한 사람들을 귀히 쓰신다. 하나님이 쓰시기 원하는 사람들을 깨끗하고 합당한 그릇으로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은혜의 방편 가운데 하나가 고난이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은 세상의 기준과는 정반대인 것을 볼 수 있다. 세상이 볼 때 지헤롭고 가문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아무렇게나 사람을 쓰시는 것은 아니다. 은혜로 사람을 선택하시며 고난이라는 방법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릇으로 만들어 나가신다.
깊은 영성, 깊은 인격, 깊이 있는 사람은 고난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즉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은 쓸 만한 그릇이 되는 것이다. 잠언 25장 4절에서 하나님은 「은에서 찌끼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라고 말씀하신다. 은에서 찌끼를 제하는 길은 찌끼 있는 은그릇을 풀무에 집어넣는 것이다.
풀무는 고난을 상징하며 바로 그 곳에서 찌끼 있는 은그릇이 정결케 된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욥' 의 고난을 살펴보자. 그의 고난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 23:10)」라고 자신이 깨달은 고난의 의미를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욥에게서 찌끼가 제해지고 정금 같은 모습이 나오기까지 연단하셨다. 그래서 흔히들 욥기를 읽어보면 인생의 깊이를 알 수가 있다고 한다. 또한 '욥기'에서는 심오한 하나님의 지식과 사상을 배울 수 있다. 아마도 고난 중에 쓰여진 글이기 때문일 것이다. '욥' 뿐만 아니라 고난을 통해 깊은 영성을 얻은 사람이 있다면 아마 '바울'일 것이다. 바울의 인생 이력서는 고난의 이력서였다. 그의 그릇은 고난을 통해 정결케 되었다. 그는 연약한 사람이었지만 그를 통해 나타난 그리스도의 능력은 컸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을 도피하지 말고, 고난 가운데서 과연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또한 고난을 깊은 영성을 형성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분이나를 쓰실 때를 기다리며 홀로 있는 고난을 이겨내고, 자신을 깨는 훈련을 모두 거쳤다면 이제 '인내'라는 마지막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한 사람의 영적 성숙을 무엇으로 측정할 수 있을까? 성경은 바로 '인내' 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사도 됨의 표를 오래 참음으로 보았고 바울은 영의 아들 디모데에게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을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딤전 1:16)」고 말했다. 또한 바울은 그의 생의 마지막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특별히 인내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목회 서신인 디모데서 그는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성품을 인내라고 말했으며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딤후 2:12)」라고 권면한다. 그리고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도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말씀을 가르치는 자나 복음을 전파하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라고 거듭 가르쳤다.
왜 인내가 이토록 중요할까? 바로 인내는 사랑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역자에게서 찾으시는 것은 사랑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것을 참게 만드는 능력이 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4-7)」라는 말씀처럼 인내는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비전을 가지게 하고 그 비전을 가지 사람으로 하여금 그 대상을 향해 인내하게 한다. 또 모든 유혹을 이겨 낼 수 있게 해준다. 주님의 삶 속에 나타난 인내는 비전과 연결되어 있다. 성경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히 12:2)」라고 말한다. 부활의 비전, 영광의 비전을 보셨기 때문에 주님은 십자가를 참으실 수 있었다.
인내는 성숙한 영성의 표지이며 이러한 인내를 이룬 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자이다. 깊은 영성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인내는 필수 과목이 되어야 하며 인내가 거룩한 습관, 거룩한 취미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오래 참으셨던 것처럼 그분을 본받아 인내라는 마지막 단계를 통해 뿌리깊은 영성을 만들어 가야 하겠다.
영적 성장은 깊은 깨달음에서 온다. 즉, 영성의 깊이는 깨달음의 깊이인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문제의 핵심을 깨달음으로 보신다. 시편 49편 20절에서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라고 말했다.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남을 깨우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깨우치기 원하는 사람은 먼저 깨닫기를 힘써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를 깨우치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말씀하실 때 깨우침을 가장 중요하게 다루셨으며 씨뿌리는 비유에서 길가에 뿌리운 씨앗을 설명하시며,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면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는다고 하셨다(마 13:19). 또한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내가 되느니라 (마 13:23)」고 말씀하셨다. 그런즉, 열매 맺는 비결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것이며 깨닫는 사람은 순종하고, 순종하는 사람은 열매를 맺는다.
그렇다면 과연 열매 맺는 영성인 깊은 깨달음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먼저 가장 흔한 방법이 영적 안내자들을 통해서 깨닫는 것이다.「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행 8:31)」. 영적 안내자는 깨달은 자요, 남을 깨우칠 수 있는 자이다. 깨우침이 '길'이라면 그 길을 보고, 길을 알고, 길을 안내하는 것이 영적 지도자의 일인 것이다. 다음으로 성령님께서 말씀을 깨닫도록 도우시는 것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 14:26)」라는 말씀처럼 성령님은 말씀에 빛을 비추어 주시며 우리 안에서 말씀을 열어 주신다. 마지막은 기도하는 사람이 말씀을 깨닫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로 다니엘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예레미야가 기록한 예언의 말씀을 읽다가 바벨론 포로가 끝나는 70년의 년수를 깨닫게 되고 더 깊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 금식하며 기도했다.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으시고 천사를 통해 응답하셨다.
결국 말씀에서 깨닫기를 사모하는 다니엘의 겸손이 깨달음을 입게 했고 큰 열매를 맺게 한 것이다.
깨달음이 하루아침에 오는 게 아니듯이 이 오랜 깨달음의 가운데 우리는 기다림이라는 또하나의 힘든 과정을 이겨낼 수 있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받는 첫 번째 수업은 기다리는 것이었고 하나님이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를 부르신 것도 그가 80세일 때였다. 이처럼 하나님의 때는 우리의 생각보다 대체로 더디게 온다. 우리는 급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급하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때는 반드시 찾아오며 항상 정확하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가운데 하나님이 귀히 사용한 사람일수록 많은 시간을 기다리게 하셨으며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은 그 사람의 인격을 성숙하게 만드셨다.
광야 학교에서 받는 기다림의 훈련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고통이었다. 모세가 40년을 잊혀진 존재로 살아야 했을 때, 요셉이 13년을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할 때, 2년 동안 옥중에 있을 때 그들에게 가장 큰 고통은 하나님의 침묵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들을 잊으셨다는 생각이 그들로 하여금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고통 중에도 하나님의 사람들은 기다림의 학교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다. 보통 사람들은 원망하고 세월을 낭비할 때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의 성품뿐만 아니라 내일의 사역을 준비했다. 기다리면서 기도했고 기다리면서 계획을 세웠으며 기다리면서 준비했다. 결국 요셉은 기다리는 13년 동안 애굽의 문화와 언어를 익혔고 하나님이 국무 총리로 그를 사용하시기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 되었다.
기다림은 낭비가 아니다. 기다림은 자신의 백성들의 미래를 준비하시는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는 것이다. 지금 당장의 기다림이 지루하고 고통스럽게 느껴질 수 있으나 먼 훗날 크게 쓰임 받을 자신을 생각한다면 끊임없는 기도로써 기다림을 지혜롭게 이겨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들은 홀로 있는 훈련을 통해 더욱 뿌리깊은 영성을 다져 나갈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는 과정에서 통과해야 할 수업이 있다면 외로움일 것이다. 깊이 있는 영성을 소유하기 위해서는 이 외로움이라는 학교에 입학하지 않으면 안 된다. 광야는 황량한 곳이다. 홀로 있어야 한다. 거기서 하나님은 자기 사람들을 준비시키시며 외로움을 통해서 우리를 성숙시키신다. 깊이 있는 사람은 홀로 있음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토저는 「이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들은 대부분 외로웠다」고 말했으며, 실제로 모세도, 세례 요한도, 예수님도 그리고 바울도 외로웠다. 왜 하나님은 성도에게 외로움을 통과하게 하실까? 왜 홀로 있게 하실까? 그것은 우리가 홀로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났던 장소도 화려한 궁중이 아닌 외로운 광야에서 였다. 홀로 있다는 것, 다시 말해 고독이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다. 고독은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깊은 친교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홀로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이것은 축복이고 하나님의 은혜의 시간이다.
비록 오늘날 우리에게는 모세와 같은 광야는 없지만, 이 광야는 단순히 특정 장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홀로 있을 수밖에 없는 고난의 현주소요, 내적 상태일 수 있다. 하나님은 바로 그 곳에서 우리를 만나시기 원하신다.
홀로 있음을 어느 정도 견딜 수 있다면 이젠 자아를 깨뜨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을 깨뜨리신다. 그러나 아주 부서뜨리지는 않으신다. 성경은 「그는 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게 는 자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게 하되 금, 은같이 그들을 연단하리니 그들이 의로운 제물을 나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말 3:2-3)」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자기 사람들을 만드시되 금을 연단하고, 은을 연단하시듯 우리를 연단하신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은 사용하지 않으신다. 지나친 자기 과신은 하나님의 사역에 장애가 된다. 모세는 40세가 되었을 때 육을 신뢰했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보다는 자신의 힘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육의 힘과 세상의 실력으로 할 수 있었던 것은 겨우 애굽 사람 한 명을 쳐죽이는 것이었고 결국 하나님은 그를 광야로 보내셨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그의 육의 힘이 빠질 때까지 기다리셨고 그의 자아를 철저하게 깨뜨리셨다. 모세의 자아가 깨어졌을 때 비로소 그에게 하나님의 능력이 임했다. 그는 육신의 방법과 힘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나님의 일은 육신의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일은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다. 겨우 애굽 사람 한 사람을 쳐죽였던 모세가 장정만 60만, 200만 명 이상의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홍해를 가른 것처럼 우리는 '나'를 깨고, 오직 하나님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용하실 수 있지만 자아가 너무 강한 사람은 사용하실 수 없다. 그래서 자아가 강한 사람을 사용하시기로 작정하셨을 때는 그를 광야로 보내셔서 깨뜨리는 일부터 시작하신다. 이런 깨어짐은 우리에겐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요, 영광이다.
자신을 깨는 훈련을 겪었다면 자신을 감출 줄도 알아야 한다. 열매 맺는 영성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와 자신을 감추는 데 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애에 나타난 모습이다. 씨앗이 싹이 나고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땅속에 감추어져야 하고 그 씨앗이 썩어서 싹이 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도 밖으로 나오기까지는 땅속에서 감추어져야 한다. 자신을 일찍 드러내는 사람은 인기는 있을지 몰라도 열매는 풍성하지 못하다.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것은 주님이 보여주신 영성이 아니다. 주님의 깊은 영성은 스스로 자신을 감추는 데 있다. 예수님은 늘 자신을 감추기를 힘쓰셨다. 예수님의 탄생에서 보여지듯 그분은 유력한 여인에게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아무도 기대 할 수 없는 여인의 몸에 자신을 감추셨다. 주님이 드러내길 꺼려하셨다는 사실은 성경에 충분히 나와 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병을 치료해 주신 후 자신이 그 병을 고쳐 주었음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부탁하셨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셨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을 억지로 잡아다가 왕을 삼으려 했을 때도 예수님은 그 무리를 떠나 한적한 곳에 가셔서 홀로 기도하셨다(요 6:15).
우리는 자신을 알리는 것을 최고로 생각하는 시대 속에 살고 있다. 누군가가 내 존재를 알아주길 바라며 사람들의 평판을 자기 존재 가치와 연결시키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가 하는 일을 드러내실 때 그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자기 과시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다. 존재가 넉넉한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힘쓰지 않는다. 그 안에 풍성한 생명이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열매를 찾으시는 이유는 그 열매 안에 감추어진 생명 때문이다. 열매를 풍성히 맺는 영성을 소유한 사람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드러내지 않는 영성은 뿌리깊은 영성의 열매를 맺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것이다.
홀로 있는 다는 것과 자신을 깨는 것 등은 분명 우리 인간에겐 고난으로 느껴진다. 하지만, 하나님은 고난을 통과한 사람들을 귀히 쓰신다. 하나님이 쓰시기 원하는 사람들을 깨끗하고 합당한 그릇으로 만드시기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은혜의 방편 가운데 하나가 고난이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선택하신 사람들은 세상의 기준과는 정반대인 것을 볼 수 있다. 세상이 볼 때 지헤롭고 가문이 좋은 사람들이 아니라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을 사용하신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아무렇게나 사람을 쓰시는 것은 아니다. 은혜로 사람을 선택하시며 고난이라는 방법을 통해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릇으로 만들어 나가신다.
깊은 영성, 깊은 인격, 깊이 있는 사람은 고난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즉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사람은 쓸 만한 그릇이 되는 것이다. 잠언 25장 4절에서 하나님은 「은에서 찌끼를 제하라 그리하면 장색의 쓸 만한 그릇이 나올 것이요」라고 말씀하신다. 은에서 찌끼를 제하는 길은 찌끼 있는 은그릇을 풀무에 집어넣는 것이다. 풀무는 고난을 상징하며 바로 그 곳에서 찌끼 있는 은그릇이 정결케 된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욥' 의 고난을 살펴보자. 그의 고난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욥 23:10)」라고 자신이 깨달은 고난의 의미를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은 욥에게서 찌끼가 제해지고 정금 같은 모습이 나오기까지 연단하셨다. 그래서 흔히들 욥기를 읽어보면 인생의 깊이를 알 수가 있다고 한다. 또한 '욥기'에서는 심오한 하나님의 지식과 사상을 배울 수 있다. 아마도 고난 중에 쓰여진 글이기 때문일 것이다. '욥' 뿐만 아니라 고난을 통해 깊은 영성을 얻은 사람이 있다면 아마 '바울'일 것이다. 바울의 인생 이력서는 고난의 이력서였다. 그의 그릇은 고난을 통해 정결케 되었다. 그는 연약한 사람이었지만 그를 통해 나타난 그리스도의 능력은 컸다.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고난을 도피하지 말고, 고난 가운데서 과연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또한 고난을 깊은 영성을 형성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분이나를 쓰실 때를 기다리며 홀로 있는 고난을 이겨내고, 자신을 깨는 훈련을 모두 거쳤다면 이제 '인내'라는 마지막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한 사람의 영적 성숙을 무엇으로 측정할 수 있을까? 성경은 바로 '인내' 라고 말한다. 사도 바울은 사도 됨의 표를 오래 참음으로 보았고 바울은 영의 아들 디모데에게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을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딤전 1:16)」고 말했다. 또한 바울은 그의 생의 마지막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에서 특별히 인내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목회 서신인 디모데서 그는 목회자의 가장 중요한 성품을 인내라고 말했으며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요 (딤후 2:12)」라고 권면한다. 그리고 디모데후서 4장 2절에서도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말씀을 가르치는 자나 복음을 전파하는 자에게 필요한 것은 인내라고 거듭 가르쳤다.
왜 인내가 이토록 중요할까? 바로 인내는 사랑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사역자에게서 찾으시는 것은 사랑이다. 왜냐하면 사랑은 모든 것을 참게 만드는 능력이 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4-7)」라는 말씀처럼 인내는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비전을 가지게 하고 그 비전을 가지 사람으로 하여금 그 대상을 향해 인내하게 한다. 또 모든 유혹을 이겨 낼 수 있게 해준다. 주님의 삶 속에 나타난 인내는 비전과 연결되어 있다. 성경은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히 12:2)」라고 말한다. 부활의 비전, 영광의 비전을 보셨기 때문에 주님은 십자가를 참으실 수 있었다.
인내는 성숙한 영성의 표지이며 이러한 인내를 이룬 자는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자이다. 깊은 영성의 세계에 들어가기 위해서 인내는 필수 과목이 되어야 하며 인내가 거룩한 습관, 거룩한 취미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이 오래 참으셨던 것처럼 그분을 본받아 인내라는 마지막 단계를 통해 뿌리깊은 영성을 만들어 가야 하겠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뿌리 깊은 영성)
글을 읽기 시작하면서 가슴에 깊이 새겨진 내용이 있다면 그것은 생명의 시작과 같은 뿌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뿌리가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사야 6장 13절 인 것으로 기억되는 그루터기에 대한 비유입니다. 대부분의 나무들은 베임을 당하면 생명이 다하겠지만 참나무(상수리나무)와 밤나무는 그것이 삼키운바 되어 마치 소멸된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 밑에 있는 뿌리는 거룩한 씨앗이 되어서 새로운 생명으로 회복하게 된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하신 말씀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어릴 적 기억에서 아직도 잊혀 지지 않는 사실적인 교훈은 실제로 참나무나 밤나무의 생명력은 산불이 나 까맣게 그을리고 잿더미가 되어 마치 절망과 같이 폐허가 되었던 극한 환경 속에서도 다시 푸른 옷으로 갈아입던 기억이 이사야 6장 13절의 성경을 통해서 더욱 각인되어 떠오릅니다.
그러므로 뿌리 깊은 영성이란 뿌리에 기반을 두는 삶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이사야 6장에서 지목하고 있는 그루터기인 거룩한 씨앗은 곧 예수님 이셨음을 의미 합니다.
또한 신약의 복음서에서는 과수원에 나무를 가꾸는 과수원 지기를 하나님으로 상징하기도 합니다. 뿌리 깊은 영성은 농부의 마음처럼 한 그루의 나무 일지라도 그 나무의 뿌리가 땅속에서 잘 자리를 잡고 건강하게 자라서 좋은 과실을 많이 맺기를 기대하기 때문에 흙이 부드러워 지도록 땅을 고르며 나무를 심는 것입니다. 농부가 땅을 고르는 이유, 그것은 보이지 않는 나무의 뿌리가 처음부터 뿌리를 잘 내릴 수 있도록 하기위한 농부의 마음이 담긴 배려 인 것입니다.
이러하듯이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이 이 땅을 살아가는 동안 어떻게 살아야 할지 우리의 삶의 방향과 성도로서의 영적인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관심을 그분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서 또한 그분의 뜻에 따라 쓰임 받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으며, 그리고 오늘 날에도 한결같이 변함이 없는 그분의 사랑이 우리에게 동일하게 그분의 음성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길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떠오르는 몇 가지 사항들을 무시하고 지나칠 수 없는 것 들이 있었습니다. 다음의 사항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때때로 우린 우리 스스로에게 자문을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에 대해서 깊이 있게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리스도인 이라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반드시 뒤따라야 함을 잊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에 제시된 질문을 분석해 보면 그것은 곧 우리 신앙인의 정체성을 이야기 하고 있으며 반드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요구하신 역할을 어떻게 감당을 해야 하는지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우연히 접하게 된 어떤 자료에 의하면 미국의 연합 감리 교회에서 운영되고 있는 어떤 기관에서 청년, 청소년들이 교회를 떠나는 원인에 대해서 1500명을 대상으로 설문을 한 결과 그들이 교회를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교회에서 더 이상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 이었고 두 번째로는 그들의 부모들의 우선순위가 바뀐 모습 즉 부모들의 우선순위가 하나님 중심이 아닌 모습이 그들의 자녀에게 비추어 지기 때문에, 예를 들자면 고3의 자녀를 둔 학부모들이 주일을 경홀히 여겨 예배에 참여케 하기 보다는 입시에 치중하는 모습을 통해서 그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결국은 교회를 떠나게 하는 원인이 되었고 세 번째로는 미디어 발달의 영향으로 인해서 삶에 대한 가치 기준이 변하고 서로 간의 관계와 소통에 대한 중요성이 무너져 버렸기 때문 이라고 하였으며 이를 통틀어 뿌리가 약해서 흔들리고 있는 오늘날의 교회의 현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위에 제시 된 문제점과 교회가 잃어버린 세상에 대한 영향력은 이제 단편적인 부분으로 볼 수 없는 범위를 벗어난 총체적인 난관이 되었으며 이는 또한 극복해야할 오늘 날 우리의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미 우린 지나간 과거의 역사를 통해서 유럽의 교회가 그리하였고 우리가 살고 있는 우리의 이민 교회들의 모습과 가슴으로 품고 울어야할 조국의 교회들이 세상에 대하여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능력이 점점 잃어 가고 있음을 자각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절망과 같은 이 어두움의 현실을 자각해야만 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살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1장 5절에 기록된 말씀은 빛이 어두움에 비추데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무지 함으로 깨닫지 못했던 세상에 대한 이야기로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답을 더 이상 찾지 못할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기준을 자신에 적용 할 수 없다면 하나님이 오늘 날 안타까움으로 우릴 찾으시는 그분의 음성을 제대로 들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빛으로 오셔서 또한 믿는 자에게 세상의 빛이 되어라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지를 전하려하는 자의 뜻을 잘못 이해하여 의사 전달이 오해로 받아들여진다면 그것을 전하려 하는 자의 마음의 답답함은 이루 헤아릴 수 없듯이 오늘날 우리가 처한 현실을 자각하지 못할 때에 우린 분명 이런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을 것임을 우린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볼 때 뿌리 깊은 영성이라는 저자의 깊은 묵상에서 얻어진 메시지들은 그가 오늘 날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보아야 하며 또한 그의 깊은 고민과 이 시대를 향한 안타까운 심정이 우리의 가슴속에 느껴져야만 합니다.
저자의 묵상을 통해서 얻어진 하나님의 귀한 음성들을 다시 되새김 하면서 뿌리 깊은 영성이 필요한 이유는 곧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관하여 정확하게 인식하는 분별력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영성이란 우리의 영적인 귀와 눈이 열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분이 보이시고자 원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 있는 능력을 말하며 영성이란 곧 하나님의 관심 안에 내가 있으며 나의 관심도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시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기를 원하시는 우리에게 뛰어난 영성을 소유하길 원하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뛰어난 영성을 소유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지혜로 세상을 살아가기 원하는 아버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뿌리 깊은 영성이란 의미는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며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거룩한 통찰력이며 이를 통하여 하나님 편에 서서 교회가 세상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성이란 하나님의 마음으로 하나님이 부여하신 세상을 볼 수 있으며 이를 통하여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에 마음을 두고 하나님께 소원을 두고 행하는 것이며. 그것은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능력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매신저로서의 역할을 통하여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영광을 만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이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만 할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혹자는 말하기를 1970년대 한국교회의 수적인 성장에 대하여 부흥이라 말하고 있을지 몰라도 후대의 평가는 오늘날 만연되어 있는 교계에 드러난 수많은 문제점과 부패한 교회의 지도자들과 날로 피폐해져가는 세상에 대해서 교회가 대처하는 자세와 교회가 가진 사상으로 인해 진정한 부흥으로 평가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역사는 박해와 순교가 있던 고난의 시대를 가리켜 위대한 부흥으로 여기었으며 우리는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르셔서 하나님의 음성을 전하였던 순간들을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으며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이 이끄셨던 교회의 역사를 절대로 빼어 놓을 수 없는 교훈으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성에 대해서 깊은 묵상을 해보았습니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았던 그리하여 일관되게 하나님의 모습만을 드러낼 수 있었던 뿌리 깊은 영성을 소유했던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핵심은 변질 되지 않고 끝까지 귀하게 쓰임 받는데 있었습니다. 또한 이들의 삶에서 볼 수 있었던 공통적인 삶의 모습은 거룩한 습관이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의 환경을 보지 않았고 어떠한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하나님이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행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뿌리 깊은 영성을 소유한 삶이란 다른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늘 내안에 머물러 있으며 나를 통하여 그분의 능력이 흘러넘치게 하는 것, 하나님의 축복의 통로가 나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그러한 하나님의 은혜가 내 마음에 소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 우리의 삶의 근원되신 하나님을 인정하는 삶이 되는 것이며 이를 통해 세상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얻어진 영성이야 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가져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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