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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및 신앙 서적

본질과 의식의 관계

by 은총가득 2020. 8. 30.

본질과 의식

 

 “나는 인애(사랑)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하나님의 기준을 살펴보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기준을 읽고 다른 사람이 보이고, 다른 교회들이 보이면, 하나님의 기준을 바로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기준을 바로 보게 되면, 자기 자신이 천리 만리 주님 앞을 떠나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됩니다. 자기 코가 석자인데, 남이 보이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타락한 자신을 보게 됩니다. 이 글이 자신 이외에 남을 비판하고 정죄하는데 사용된다면, 그것은 또 다른 모습의 가짜신앙을 따르고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우리 신앙의 본질(복음)은 하나님(예수)을 알고 사랑하는 하나님과(예수)의 친밀한 교제와 하나님(예수)의 행하심을 보고 온 삶으로 동참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과 복음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신앙의 본질과 의식과의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점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지지 못하면, 그릇된 가짜신앙에 빠지고 맙니다.

 

의식(儀式)은 주님이 명령하신 중요한 것이지만, 의식은 본질을 담는 그릇입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3)

 

성경에 나온 가장 큰 계명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되는 계명이요” (마22:37,38)입니다.

 

호세아 6:6절에는 “나는 인애(사랑)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라 하였습니다.

 

주님이 원하는 두가지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하나님 그분을 아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지 않는 것은 번제와 제사, 즉 예배와 속죄의식 이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본질과 의식의 관계를 볼 수 있습니다.

 

번제와 제사는 원래 하나님이 드리라고 명한 규례입니다. 레위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그것을 정하였습니다. 그럼 이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을 당신은 어떻게 이해합니까?

 

이 구절에서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시는 두 가지는 번제와 제사입니다. 번제와 제사는 원래 하나님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은 그것들을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그것들을 원치 않으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은 어떤 때는 제사를 좋아하셨다가, 다른 때는 그것을 싫어하시는 분이십니까? 하나님도 사람처럼 조변석개하시는 분입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입니다. 만약 호세아서가 신약 성경에 나온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약 시대에는 더 이상 구약 시대에 드렸던 제사나 번제가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호세아서는 구약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 점이 바로 우리에게 우리 신앙의 본질(reality)과 의식(ritual)의 관계를 선명하게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사와 번제를 포함한 모든 종교적인 행위와 의식은 그 본질을 상징하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즉, 본질을 담는 그릇입니다.

 

본질이 없는 의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무리 의식이 많아도 본질이 없으면, 그 의식은 하나님앞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 신앙에서 모든 종교적인 행위들과 의식들은 본질인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표현하는 수단이기 때문에 그 속에 본질이 담겨 있을 때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만약 그 속에 본질이 담겨져 있지 않으면, 아무리 화려한 의식이나 많은 희생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10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희 고모라의 백성아 우리 하나님의 법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1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13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14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

15 너희가 손을 펼 때에 내가 눈을 가리우고 너희가 많이 기도할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니 이는 너희의 손에 피가 가득함이니라 " (이사야 1:10-15)

 

여기에서 소돔의 관원들과 고모라의 백성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을 그렇게 부르고 계십니다. 그들은 참으로 많은 희생과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들은 모든 절기들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안식일은 말할 것도 없고 월삭(매월 첫 날)을 지켰고 모든 대회와 절기를 지켰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맥추감사절, 대강절, 사순절, 오순절 등과 같은 별로 잘 알려지지 않은 절기들까지 그들은 빼놓지 않고 철저하게 지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그 절기마다 수많은 제사들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수양, 수송아지, 어린 양, 수염소 등 그들이 하나님께 드린 제물은 셀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또한 많은 기도를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이사야 58장에 의하면, 그들은 정기적으로 온 백성이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예배(절기)와 헌금(희생)과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반응은 매우 부정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그 모든 예배와 헌금에 신물이 났다고 말씀하셨으며, 심지어 그것들을 증오하신다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그 모든 모임들과 예배들은 하나님의 마당만 밟고 돌아가는 것과 같은 헛된 예배에 불과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의 의식 속에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담겨져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의 삶 속에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신의 생각까지 들여다보실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이 행동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의 깊은 곳까지 모두 아십니다. 우리의 동기가 어떤 동기로 시작되었는지, 나 자신보다 하나님이 나를 더 잘 아십니다. 그러므로 나의 거짓된 동기로 인한 외적인 의식이 아무리 많을 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아뮈 화려한 의식이나 많은 희생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났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휼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사1:4)

 

하나님은 이사야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렸고, 멸시하여 물러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많은 희생예배를 드렸는데, 하나님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버렸다는 사실을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신앙의 본질이 없었습니다. 의식은 가득하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많은 헌금을 하였고, 예배조차도 자신들이 최선을 다해 더 많은 예배를 만들어서 예배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고, 하나님을 멸시하여 물러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을 떠났다는 말을, 교회를 떠났다 라든가 배교 등을 이해합니다. 더 이상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고, 헌금도 드리지 않고, 그 어떤 봉사나 순종을 하지 않는 것을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관점으로는 아무리 의식이 가득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하나님을 떠난 것으로 간주합니다. 자기가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 전 재산을 헌금 드렸어도, 그 마음에 “내 모든 것이 하나님 것 입니다. 다 돌려드립니다.” 이것 하나만 있다면 하나님은 그 예물을 받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전 재산을 드리니, 나에게 다른 더 많은 복(세상에서의 성공)을 주실 것을 기대하였다”면 하나님 앞에 아무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생각을 다 아십니다. 헌금의 동기가 어떤지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주일 헌금을 드리면서, 하나도 그 헌금 안에 감사한 마음이 없습니다. 주일 이니까 당연히헌금을 드리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30년동안 한번도 빠지지 않고 주일성수한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예배 가운데 하나님을 만난적이 몇 번이나 만나셨습니까? 예배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은 그분관의 만남입니다. 예배 30년동안 한번도 빠지지 않은 것 중에, 몇 번이나 그런 경험을 하였습니까? 하나님은 그 중에 하나님 기준에 맞는것만 세어서, 주일성수로 기억하실 것입니다.

십일조를 빠짐없이 정확하게 드린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십일조를 드릴 때, 과연 내 모든 것이 하나님것입니다 라는 마음이 있었나요? 십일조 드리면 축복주시니까 촉복 때문에 드렸나요? 아니면 율법과 같이 반드시 드려야 한다니까 드렸나요? 하나님은 우리 속 마음을 보십니다. 동기와 그에 대한 의식을 함께 보십니다.

교회 섬기면서 많은 봉사를 합니다. 그것은 참으로 귀한 일입니다. 그 봉사에 있어서, 사람들에게 자신이 칭찬받기 위해서, 또는 직분을 성취하기 위하는 마음을 가지고 시작하였다면, 하나님 앞에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봉사와 섬김이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또 목회자는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서 교회에서 많이 봉사하도록 유도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떠났고,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남이 아닌 바로 내가 그러고 있는데도, 자신은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신앙생활 잘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가 보이십니까?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는 자신이 보이면 하나님의 기준이 보여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본질이 없으면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거민과 쟁변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오직 저주와 사위와 살인과 투절과 간음뿐이요 강포하여 피가 피를 뒤대임이라 그러므로 이 땅이 슬퍼하며 무릇 거기 거하는 자와 들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가 다 쇠잔할 것이요 바다의 고기도 없어지리라 그러나 아무 사람이든지 다투지도 말며 책망하지도 말라 네 백성들이 제사장과 다투는 자 같이 되었음이니라 너는 낮에 거치겠고 너와 함께 있는 선지자는 밤에 거치리라 내가 네 어미를 멸하리라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호세아 4:1-6)

 

하나님의 백성이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십니다. 의식이 아무리 많아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 모든 의식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그것은 하나님을 떠난 것입니다.

 

본질이 없이도 얼마든지 의식이 가득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시대의 종교지도자들은 이러한 왜곡된 이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들은 누구보다도 신앙생활을 잘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돌아오라고 아무리 말씀하셔도, 자신들은 그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사야의 말이 너무 귀에 거친 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사야를 톱으로 켜 죽였습니다. 이것이 저와 오늘날 교회가 처한 상황입니다.

 

이사야 시대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을 코앞에 두고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남왕국 유다의 멸망이 코앞에 있을 때, 예레미야는 동일한 메시지를 전하였습니다. 그랬더니 반응은 동일하였습니다.

“ 내가 너희에게 말하되 새벽부터 부지런히 말하여도 듣지 아니하였고 너희를 불러도 대답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렙7:13)

 

예수님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은 동일하였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1주일에 2일은 금식하며 기도할 정도였고, 바리새인이 될 정도면 모세오경을 통째로 히브리어로 외웠다고 합니다. 그들의 행동은 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범일 될 정도로 철저히 신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의 동기를 아신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에게 “독사의 자식”이라 표현하였습니다. 외적으로는 누구하나 나무랄데없는 완벽하게 보이는 신앙을 보여주었지만, 외식으로 가득찬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이제 조금 보이십니까? 내가 바로 바리세인이라는 것이요? 내가 바로 독사의 자식인 것이 보이십니까? 내가 심판받고 저주받을 그 대상이라는 것이 보이십니까?

 

조심해야할 사항

 

의식은 본질을 담는 그릇입니다. 본질이 없는 의식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니, 이래도 저래도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니 아무런 의식도 하지 말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의도를 벗어난 생각입니다.

의식은 본질을 담는 그릇입니다. 본질이 살아있을때만 그 의식이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의식 가운데 본질을 살아 있도록 해야합니다. 버리라고 주신 의식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복음 - 본질과 의식

호6:1~6

 

우리가 하나님과 실재적으로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 가장 중요 - 신앙의 본질에 서는 것.

신앙의 본질에서는 것은 하나님과 실제적으로 동행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도 필수,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기위해서도, 개인의 신앙과 교회가 히ㅗ복되기 위해서도, 예배가운데 하나님의 임재가 회복되기 위해서, 우리의 삶 가운데 성령님의 운행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도, 거룩한 삶을 위해서도,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기 위해서도, 하나님의 행하심을 보기 위해서도 필수입니다. 우리 신앙의 모든 면에서 신앙의 본질이 필수입니다. 이 부분이 되어져야 모든 부분이 가능합니다.

 

반대로 신앙의 본질에 서지 못하면 위에서 언급한 것은 물론이요 우리 신앙의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그 어느 것도 되지 않습니다. 그 만큼 신앙의 본질은 우리 신앙의 핵심입니다. 성경 가운데 신앙의 본질에 대하여 가장 잘 말해주는 부분이 호6:6절입니다.

 

1.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6절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여기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애)

 

누가 이렇게 질문할 수 있습니다. 아니 목사님! 호6:6절이 성경전체의 핵심구절인가? 성경 한 구절을 뽑아다가 전체를 엮어 매는 것은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물론 성경 한 구절을 뽑아서 전체를 엮어 매는 것은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전체를 보면 신앙의 본질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신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마22: “35-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또 예수님 시대 바리새인만큼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본이들도 그렇게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이 생각하기에도 그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들의 신앙이 완전히 옆으로 가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릇된 신앙의 이해를 가지고 기회만 있으면 예수님을 대적했습니다.

그때 반복적으로 옳은 신앙을 제시하면서 인용한 구절이 있는데 그 구절이 호6:6절입니다.

 

마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이상을 보아도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헨리 블랙가비 목사님도 그의 책 ‘하나님과 신선한 만남’ 에서 “우리의 신앙의 가장 핵심은 인격체이신 하나님과 실제적이고, 개인적이고 살아있는 교제다” 이렇게 말하면서 그 교제를 위해 가장 필수적인 두 가지 성경구절을 요17:3과 마22:37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임을 그분도 이해하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의 본질, 핵심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2.모든 의식은 본질을 담는 그릇입니다.

신앙의 본질을 다루면서 많은 구절 가운데 호6:6을 사용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호6:6절은 신앙의 본질이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을 이해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부분인 본질과 의식과의 관계를 잘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말하면 다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여러분 예수님 시대 바리새인들에게 신앙의 본질이 뭐냐고 물으면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했을 것입니다.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 한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의미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의미가 왜곡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6:6에서 신아의 본질과 의식과의 관계를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

 

다시 호6:6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 사랑하는 것이요, 원치 안은 것 - 번제와 제사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왜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하셨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왜 살펴보아야 하면은 원래 번제와 제사를 드리라고 하신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레1:13 “그 내장과 그 정강이를 물로 씻을 것이요 제사장은 그 전부를 가져다가 제단 위에서 불살라 번제를 드릴지니 이는 화제라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호세아서가 신약이라면 이해가 됩니다. 오늘날은 더 이상 번제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번제나 제사는 구약의 예배였고 한편으로는 다가오는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희생에 대한 그림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그 모든 예언을 성취하셨으니까 오늘날은 더 이상 짐승을 잡아 희생을 드림으로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은 신령과 진정의 예배를 드리라고 하셨죠.

 

그러니 호세아서가 신약성경에 있었다면 하나님께서 내가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말씀하실 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호세아서가 구약에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번제와 제사를 원치 않는다고 말씀하셨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은 인간처럼 기분이 좋으면 드려라하고 기분이 나쁘면 드리자 말라 라고 하시는 하나님입니까?

 

왜 하나님은 그렇게 하셨느냐? 이것을 우리가 성경을 읽을 때 보아야 합니다. 이것에 대하면 의문을 던져야 합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 의문점을 던진다면 아주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신앙을 이해함에 있어서 핵심적인 부분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게 뭐냐? 본질과 의식과의 관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본질과 의식과의 관계가 이해되어져야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비로소 알 수 있게 되어 집니다.

 

그럼 어떻게 본질과 의식과의 관계를 발견할 수 있는가?

우리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반면 우리가 드리는 제사, 지금은 예배, 봉사(어원이 같음 - 워쉽) 헌금, 찬양, 기도, 성경공부, 전도, 구제 이 모든 것들은 의식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의식과 본질의 관계를 잘 볼 수 있는데, 의식은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을 담는 그릇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은 그 속에 본질이 있어야 의미가 있습니다. 반대로 의식은 본질인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것이기에 그 속에 본질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그것을 말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사야시대나 호세아 시대는 같은 시대로 그 시대에 많은 헌금, 예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호4: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6절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호4:1, 6절에는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는 본질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가 원하는 것은 나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지 번제와 제사가 아니라고 말씀하는 겁니다.

 

3.의식은 본질을 위한 수단

그러다보니 어떤 사람들은 의식을 소홀히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의식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여깁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의식은 매우 중요합니다. 의식은 본질을 담은 그릇으로 중요합니다. 의식에 우리의 본질을 담아서 하나님께 올려 보내기 때문입니다.

 

예) 좋은 포도주는 좋은 컵에 담아야하 듯이, 아무리 좋은 포도주라 해도 컵이 없다면 어떻게 귀한 손님에게 대접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말하는 요점은 의식은 소중하지만 본질이 같이 가야한다는 말입니다.

 

예) 바리새인들, 안식일, 십일조, 구제를 누구보다도 잘 한다고 자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평가는 하나님을 알지도 사랑하지도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호세아 시대 사람들은 그 누구보다 신앙생활을 잘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의 이해로.. 이사야시대와 호시에 시대 같은 시대인데 왜 그 많은 예배, 헌금, 희생을 받지 않으시느냐 말이에요, 이것을 보셔야 합니다.

 

호4:1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 의식은 많은데 신앙의 본질이 없으니 이 많은 의식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들을 신앙이 좋다고 말합니까? 7대 의무를 잘하는 사람들 아닙니까?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이사야시대 사람들은 엄청 신앙이 좋은 사람들입니다. 또 본인들은 신앙생활을 잘 한다고 생각? 못한다고 생각? 당연히 잘한다고.

 

그런데 그들을 소돔의 관원, 고모라의 백성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니 그들이 이해를 못하고 이사야를 거짓선지지로 여기고 톱으로 켜 죽인 거 아닙니까. 여러분들이 그 당시에 그들이라면 이해하시겠어요.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려면 신앙의 본질과 의식과의 관계를 이해해야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앙의 본질이 없으니 그 많은 헌신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강하게 말씀하신 겁니다.

 

문제는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했겠느냐는 거예요. 사랑하지 않으면서 그 많은 희생을 누가 드리겠느냐는 겁니다.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자부했을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에게 물어보면 당연히 사랑한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을 알지고 사랑하지도 않는다는 겁니다.

 

그럼 문제가 뭐냐?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과 그들이 사랑한다는 관점이 이해가 다르다는 겁니다.

 

의식과 본질의 관계 - 의식은 본질을 담는 그릇이다.

의식은 본질이 있을 때 의가가 있음.

의식은 본질이 없으면 의미가 없음.

 

예)결혼반지의 예 - 이 예는 본질과 의식과의 관계를 질 설명해줌.

크리스마스 선물 - 머리핀 과 시계 줄

보세요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본질이 없으면 의미가 없는데 하나님 앞에서 본질이 없는 의식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말이예요.

 

4.본질에서 떠나면 하나님을 떠나는 것

호4:1 -본질에서 떠나니 그 많은 예배를

“이스라엘 자손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이 땅 주민과 논쟁하시나니 이 땅에는 진실도 없고 인애도 없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도 없고”

 

6절 - 본질에서 떠나면 심판이 있음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왜? 본질에서 떠나는 것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데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났다고 생각했을까요?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들은 하나님을 떠났으니 하나님을 버렸으니 당연히 심판이 오지, 하지만 우리는 상관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주일날 예배드리고, 헌금도하고....그러니 안 떠났다고 생각해요.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저들은 훨씬 우리보다 잘했어요.

 

그런데 하나님은 저들에게 하나님을 버렸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이랬을 거예요, 아니 하나님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버렸다고 그러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떠나다니요, 말도 안 됩니다.

 

여기 중요한 것은 의식이 아무리 많아도 본질에서 떠나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이러한 관점을 이해야 성경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 보세요 6절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우리는 이 구절을 읽으면 그들이 율법을 잊었으니 당연히 심판이 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바리새들을 보고 그들은 성경을 믿지도 안았다고 하니 에고~~ 바리새인들은 성경도 안 믿었구먼~~그러니 그러한 책망을 듣지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처럼 성경을 철저하게 믿는 자도 없었습니다. 문제는 성경을 믿는 다는 것에 있어서도 하나님과 그들의 생각이 달랐습니다.

 

호4:6 만하도 그렇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잊었다고 하니 성경공부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성경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면 하나님 말씀을 잊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 예수님이 여러분의 왕이 십니까? 여러분과 물질의 주인이십니까? 교회의 주인이십니까? 당연히 예라고 합니다. 그러면서도 실제의 삶은 주인이 아님. 그러니 본질에 서지 않으면 실제로는 말씀을 버리게 되어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에 서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어있습니다. 신앙의 본질에서 떠나는 것이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요, 하나님을 떠나면 하나님의 약속이 거두어집니다.

 

호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 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출19:5~6 “5-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보세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너희는 내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의 약속을 출애굽기에서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안 될 거라는 거예요.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은 신앙의 본질 가운데 서야 주어집니다. 보증이 아니라 초청입니다. 그러니 본질에서 떠나면 약속이 거두어집니다.

 

예) 애들에게 약속 - 뭐하면 뭐 해준다 (초청입니다)

 

어떤 사람은 출19: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내 언약을 지키면 라고 말하지 않았느냐라고 반문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언약을 지키는 것도 본질에 서야 가능합니다. 본질에서 떠나면 하나님 앞에서 순종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니 말씀을 버리게 됩니다.

 

헨리 블랙가비 - 하나님을 떠나면 나타나는 특징 - 불순종이 나타난다고...

 

우리는 이런 말을 들으면 우리는 순종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선별적 순종은 전적 불순종과 같습니다.

보세요, 지금 내가 하나님의 말씀이 부담스럽고 하나님의 말씀에 내 삶의 조정이 어렵다면 내가 하나님을 떠난 증거입니다. 하나님을 떠나면 심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떠나면 심판이 있다는데 나에게는 심판이 없으니 나는 안 떠났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심판에 있어서도 이해가 달라요)

 

우리는 심판을 사업이 망하거나, 교통사고를 당하거나, 질병등...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보세요

 

롬1:28-32

28-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1-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2-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우리에게 심판이 있음 - 하나님의 임재가 그침, 성도의 삶을 보면 주일날 교회에 오는 것 외에 이 땅에서 살아가는 방법, 가치 있게 여기는 것, 그것을 취하는 방법, 모든 것이 똑 같습니다.

우상이 가득 - 나눠지는 마음이 우상인데, 세상에 대한 욕심, 탐욕, 돈 집착, 사람 의지하는 것... 죄의 억압

의식은 많아도 하나님을 개인적으로 아는 지식은 너무 고갈되어 있습니다.

성도들의 삶 속에 하나님은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이 모든 것이 심판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문제가 있음을 압니다. 그러니 어디서부터 출발해야 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환경을 바꿔보기도하고, 직장을 옮겨보기도하고, 새로운 성경공부, 세미나 가 있다하면 참서도해보기도하고, 교회는 새로운 프로그램을 시도해 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으로 안됩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말래도 몰라요, 왜? 자기는 열심히 하니까 떠나지 않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왜 하나님을 떠났다고 그래~~도리어 반문합니다.

 

우리는 신앙의 본질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회복됩니다. 가정,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임재, 성령의 통치, 하나님의 능력, 세상을 이기는 능력이 회복되고 세상 사랑이 깨뜨려지고 하나님의 승리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발의 무리>

 

마 7:21-22

"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