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혁신"-달라스 윌라드 지음
이 세상에는 힘든 일이 많이 있다.
하지만 그 중 가장 힘든 일이 자신의 마음을 다스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미 마음의 질서가 무너진 이 시대에 깨달음과 앎을 통해서 어느 정도까지는 진전을 이끌 수는 있으나, 또 어느 일순간 마음이 뒤집히고 말 때가 있음을 종종 경험한다. 인간의 힘으로는 결코 완벽하게 할 수 없음에 대한 반증이라 할까. 그런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서 온갖 방법을 모색하는가 하면 스스로를 제어하고 다듬기 위해서 고된 훈련을 자청하는 경우도 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적인 깊이 그 어느 지점에서 끌어 오르는 힘은 우리의 이성과 늘 갈등하면서 공존한다는 것을 시시 때때로 느끼곤 한다. 물론 달라스 윌라드가 제시하는 한 권의 책으로 마음의 모든 변화, 혁신을 꾀할 수는 없다. 그러나 노력하지 않는다면 곧 무너지거나 망가지거나 결코 다시 세울 수 없는 처지로 자신을 몰아가게 될 것이기에 자꾸만 자신의 의지와 이성에 자극을 주어 스스로를 혁신해 가는 내성을 길러야 겠기에 이 한권의 도서를 통하여 그 길을 찾아 보고자 함이다.
사람의 힘으로는 결코 가능하지 않음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인간은 원죄로 인하여 전적 타락의 대상이 되었고, 이 전적 타락의 현상으로부터 회복되어지는 유일한 길은 예수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함인 만큼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품안에 안길 때에야 비로소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의 삶을 볼 때도 여진은 남기 마련이다. 그것은 이 세상의 유혹이 끊임없이 영혼을 자극시키거나 타락의 각종 유형의 도구를 동원하여 우리의 영혼을 뒤 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달라스 윌라드는 무엇이라고 공감하는지 한 번 그의 말에 귀를 귀울여 보고 마음의 혁신을 꾀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좀 더 강하고도 지혜로운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고 세상으로부터 밀려오는 각종 유혹과 미혹거리들로 인한 죄를 짓지 말것과 되어지는 현상 모두를 아낄 줄 아는 긍정적 마음의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으면 한다.
달라스 윌라드는 인간의 여섯가지 차원에 대한 개괄을 간략하게 보고하고 있다.
생각 - 생각이란 이런저런 소재를 다향한 방식(지가과 상상을 포함해)으로 머릿속에 넣으므로써, 다양한 관점에서 사고하며 그 상호관계를 추적하는 것이다. 생각을 통해 우리 의지/심령은 코앞에 닥친 환경의 테두리와 오감의 지각을 훨씬 넘어설 수 있다.
감정 - 생각을 통해 머릿속에 들어온 소재에 끌리게 하거나 등돌리게 하는 것이 감정이다. 감정에는 생각거리의 존재나 소유에ㅡ대한 매력이나 반감, 좋고 싫음의 기류가 담겨있다. 음식, 자동차, 관계, 직위,기타 수 많은 것들에 대한 우리 기분이 그 점을 잘 보여준다.
의지(심령/마음) -의지란 달리 존재하거나 발생하지 않을 사건과 일을 일으키는 인간 기능이다. 결단이나 선택은 의지의 구사다. 여기 "일으킨다"는 말에는 인생에 가장 소중한 두 가지가 포함된다. 자유와 창의력이다. 제대로 이해한다면 둘은 사실 동전의 양면이다. 곧 선이나 악을 행하는 능력이다.
몸 -몸은 물리적. 사회적 세계 안에서 우리 존재의 집약점이다. 우리 실존은 몸과의 연합을 통해 시작되어 영원히 존재할 모습이 된다. 몸은 우리의 일차적 에너지원이나 "힘" 곧 개인화된 전원함이며, 최소한 얼마 동안은 하나님께 반항할 수도 있는 곳이다. 바깥 세상의 자극을 느끼는 곳도 몸이고 타인들과 서로 대면하는 곳도 몸이다.
사회적 정황 -인간 자아는 타인 안에 뿌리를 두어야만 한다. 이것은 주로 존재론적 문제, 곧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의 문제이다. 단지 도덕적, 곧 어떤 모습이 옳은지의 문제가 아니다. 도덕적 측면은 존재론적 측면에서 파생된다.
영혼 -영혼은 인간의 다른 모든 차원을 통합하여 하나의 삶을 이루는 차원이다. 영혼의 직접적 활동 범위는 다른 차원들(생각, 몸 등)로 구성되며, 그것들을 통해 영혼은 인간의 광활한 환경인 하나님과 피조세계로 무한히 깊이 들어간다. 그런 면에서 영혼은 복합차원이나 고등차원이라고 할 수 있다.(pp.59~60)
달라스 윌라드는 파괴된 영혼의 철저한 악을 접근함에 있어서 다음과 같이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영혼과 인격의 파괴된 실상을 보아야 하며 기형화된 역기능적 생각, 감정, 몸, 사회적 간계도 함께 보아야 한다. 그래야 영혼에 구원과 개혁이 필요하다는 사실과, 그것이 이루어질 수 있는 방법을 이해할 수 있다.
오늘날 그리스도 안의 효과적 영성 개발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 가운데 하나는 단순히 인간 실상을 모르고 또 인정하지 않는 데 있다. 인간 실상은 그리스도인과 불신자에게 공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도 말이다.
우리는 정말 우리가 처한 자리에서 출발해야 한다. (p.75)
이 부분에서 마음의 혁신에 대한 바른 이해에 이르러야 한다.
잠언 9:10은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고 결론짓는다. 성경이 말하는 "앎"이란 소위 "머리로 아는 지식"을 가리키는 적이 없고 언제나 앎의 대상과의 체험적 관계, 실제적 맞물림을 뜻한다. 그렇다면 예수께서 친히 자기 사람들에게 주시는 영생을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17:3)이라고 정의하신 것은 곧 삼위일체 하나님과 항상 가까운 관계를 누리는 은혜를 이르신 것이다.
예수는 자기를 구하고 찾는 이들의 삶에 그 관계를 가져다 주신다.
골로새서 3:17에도 동일한 기본 사실이 나오는데, 이번에는 그리스도안의 영성개발(변화)의 궁극적 결과로 표현돼 있다.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p.84)
달라스 윌라드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찬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지적을 하고 있다.
오늘날 기독교의 소위 신앙고백에는 자신의 존재나 심지어 자신의 행위에 대한 가책이나 슬픔이 전혀없다.
잃은 상태, 즉 내 마음과 몸과 영혼의 철저한 악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다.
우리가 그 악에서 반드시 벗어나야 함에도 말이다.
우리를 거기서 구하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이다.
오늘 세상은 그런 인식을 표출하는 자 - 분명 대다수 그리스도인들도 - 심리적 환자로 취급한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상처"에 대해 자주 이야기 한다. 그러나 잘 들어보면, 그들이 이야기하는 상처가 자기 내면의 악이 아니라 자신의 고생담 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자신이 처참히 잘못되었다는 것과, 자력으로 그 결과를 바꾸거나 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자는 극히 드물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p.98)
영성개발은 개념을 변화시켜야 한다. 필요한 변화란 다분히 내 안에 있는 악의 개념 체계들(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문화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현하고 가르치신 개념체계와 하나님 나라의 문화로 대치하는 문제다. 이것은 정녕 어둠에서 빛으로 옮겨가는 일이다.
물론 이런 문제를 이해했고 가르쳤던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6:12)고 경고했다.
이 고차원적 권세와 주관자들은 악의 개념체계와 손잡고 일하는 - 끊임없이 그것을 수행하고 떠받들려고 애쓰는 -영적 세력들이다.악의 개념체계야말로 인류를 지배하는 그들의 주요 연장이다. 반면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골:1:13) 우리는 우리 안에 이 마음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빌2:5)을 품어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 영성개발의 본질과 실체를 묘사하는 가장 중요한 방식이다.
개인이든 단체든 지배적 개념을 바꾼다는 것은 인생의 가장 어렵고 고통스런 가운데 하나다,
진정한 "회심"은 엄청난 고통이 따르는 경험이다. 개인이든 단체든 신적개입이나 혁명이나 정신적 붕과 같은 일이 아니고는 회심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의 생각을 점유하는 이미지는 지배적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 개념의 추상성과 반대로. 이미지는 언제나 구상적 또는 구체적이며 감정이 강하게 실려있다. 이미지는 흔히 강력한 지각으로 찾아오며, 정서적. 감각적으로 지배적 개념체계와 실제 상황 속으로 연결돼 있다. 이미지는 그런 개념체계의 힘을 일상생활의 실제 상황 속으로 중개한다.
모든 개념 체계는 소수의 강력한 이미지를 통해 삶의 한 세력으로 우리를 찾아온다. 십자가는 인간이 잃은 영혼이라는 사실과 하나님께 자신을 드릴 때 그분의 희생을 통해 구속된다는 사실을 동시에 보여준다. 말할 것도 없이 십자가야말로 인류 역사상 단연 가장 강력한 이미지와 상징이다.
<어려서 거부나 학대를 당한 사람들은 자아와 '현실"에 대한 이미지가 뒤틀려 있다. 중독에 빠진 부모나 "냉담한 부모와 함께 산 자들도 그렇다. 왜곡된 이미지가 언제나 머릿속에 남아 그들을 위험한 '사고 범주"로 몰아넣는다. 이제 그들은 그 안에서 살아야 한다. 단체의 경우 공유된 이미지는 유행, 집단적 사고, 군중 광란으로 이어지며 역시 그것들은 사실과 전혀 무관하다.
빈곤한 자아 이미지로 고생하는 개인들은 자기 거부에 사로잡혀 집단의 압력을 막아 내지 못한다. 그들은 자신을 하나님 사랑의 대상으로 보지 못하며 따라서 저항할 근거가 없다. 헨리 나우웬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성공과 인기와 권력은 정말 대단한 유혹일 수 있으나, 실은 자기 거부라는 훨씬 큰 유혹의 일부다. 전자의 유혹의 질은 대게 거기서 연유한다. 우리가 무가치하고 사랑받지 못할 존재라고 말하는 음성들이 있거니와, 그것들을 믿을 때 성공과 인기와 권력은 어느새 매력있는 해답으로 다가온다.">
임마누에 칸트는 "인간은 휘어진 나무로 만들어졌으며 그 휘어진 나무로는 어떤 곧은 것도 만들 수 없다"고 말했다. 인간적으로 말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불가능한 것이 하나님께는 가능하다.
하나님이 우리 앞에 서시면 우리도 그분앞에 선다. 그분을 예배하기를 거부하는 것은 그분의 얼굴과 눈빛을 피하려는 시도다.
개인이 하나님께 회복되려면 감정도 변화되어야 한다. 옛 감정들이 많은 경우 없애거나 적어도 철저히 고치는 한편으로, 새 감정들을 도입하거나 적어도 강도를 높여야 한다.
감정이 변화된 자는 이제 허구한 날 관능적 쾌락과 복수의 공상에 빠져 지내는 자가 아니다.
태도나 언행으로 남을 지배하거나 상처 주려는 자도 아니다. 그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는다.
상대가 민다고 나도 밀고 상대가 친다고 나도 치지 않는다. 조롱을 조롱으로, 미움을 미움으로, 경멸을 경멸로 갚지 않는다. 그는 늘 육신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일2:16)을 채우려 돌아 다니지 않는다. 그러니 장차 될 자신의 모습을 전혀 감 잡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 그는 "예수의 제자"라는 정체 하나로 만족해야 한다. 그것이 그의 새 정체가 생겨나는 출발점이다. 사실 그것은 변화의 짐을 너끈히 져낼 만큼 강력한 정체다.
예컨데 우리는 감정이 우리를 움직인다는 것과, 그렇게 움직임 당하는 것을 우리가 좋아한다는 것을 안다.
감정을 통해 우리는 살아있음을 느낀다. 감정이 없으면 사물에 관심도 없고 행동에 끌림도 없다.
"살맛을 잃는다"는 것은 의지의 구사만으로 근근히 버티거나 감나무에서 감 떨어지기만 기다린다는 뜻이다.
그것은 끔찍한 상태이며 오래 갈 수도없다. 그래서 수 많은 사람들이 약물과 각종 활동에 중독된다. 중독이 자신과 주변 사람들에게 심한 악영향을 줄지라도 일단 감정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 상태는 종종 자살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이렇듯 감정은 삶의 필수 요소다. 우리는 그 점을 받아들이고 잘 대처해야 한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아예 감정이 없는 상태보다는 차라리 해로운 감정 - 악에서 생겨나든 악을 유발하든, 악과 연관된 감정-을 더 낫게 여긴다. 확실한 사실이다. 건강한 감정은 행복한 삶의 필수이며 감정 상호간에 바른 질서를 이룬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으로 빚어지려면 감정을 "제멋대로" 방치하지 말고 잘 간수해야 한다.
글사랑 이충재
'신앙 및 신앙 서적 '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아버지 상처 넘어 축복 산에 오르라 』 (0) | 2020.08.19 |
---|---|
살아계신 하나님 (0) | 2020.08.18 |
메튜 헨리의 기도 2 (0) | 2020.07.23 |
메튜 헨리의 기도 1 (0) | 2020.07.23 |
믿음의 진정한 척도 / 로이드 존스 (0) | 2020.07.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