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 상처 넘어 축복 산에 오르라 』 류영모 지음
목차
여는 글
1. 아버지 마음으로
2. 아버지 상처로 울고 있는 아버지들
3. 조건 없이 용서하시는 아버지
4. 생명을 먹이시는 아버지
5. 아버지 참좋은 나의 친구
6, 하나님 속에 어머니의 가슴이 있다.
7. 아버지 축복의 통로
8. 아들아 나는 죽어서 유산이 된다.
9. 잃은 자를 향한 하나님의 가슴앓이
10. 아버지의 비전과 함께 살고 죽으렵니다.
여는 글
이 책은 제 자신 스스로 아버지 마음을 찾아 떠난 기나긴 여정의 산물입니다.
그 여정에서 발견한 아버지 상처를 치유하고 회복한 이야기이며 그로 인해 알게 된 하나님
아 버지의 참사랑을 나누기 위한 책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은 곧 잃어버린 영혼의 구원을 위한 열망을 점화하는 일 입니다. 우리의 가슴엔 아버지 상처라는 깨진 거울이 담겨있습니다. 육신의 아버지는 하나님 아버지를 바라보는 창입니다. 그 창이 아버지 상처로 깨어져 있거나 아버지 부채로 인해 흐려져 있다면 하나님 아버지의 완전하신 사랑은 굴절되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깨어진 창을 걷어야 참 하나님 아버지 상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사람만이 아버지 상처를 극복하고 하나님의 축복 산에 오를 수 있습니다.
1. 아버지 마음으로
어린 시절 우리가 겪음 아버지에 따라 우리의 인생과 신앙생활은 달라 질수 있습니다.
♤ 영철이 친구가 영철이 집에 전화를 했습니다. 영철이 아버지가 전화를 받았습니다.
“거기 영철이네 집이죠?” “아니다. 내 집이다.”
♤이런 아버지가 어디 있겠습니까? 아버지 집은 곧 내 집입니다.
아버지 집에 있는 모든 자원, 권세 축복, 능력이 다 내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가지는 기적적인 축복 중 하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아버지로 섬기는 일입니다. 반대로 인간이 가진 저주 가운데 저주는 하나님 아버지를 모르고 또 그 자녀된 권세를 모르고 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1~32절 말씀, 흔히 ‘탕자의 비유’로 불리는 이 이야기는 집나간 자식에 초점을 맞추어 ‘아들의 회개’에 대해 말하지만 성경의 본래 의도는 ‘아버지의 마음’을 알리기 위한 비유입니다. 읽은 양의 비유는 잃은 양의 비유라기보다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마음 비유입니다. 잃은 돈의 비유는 잃은 돈의 비유라기보다 일은 돈을 찾는 여인의 심정 비유입니다.
잃은 아들의 비유는 잃은 아들의 비유라기보다는 돌아온 아들을 반기는 아버지의 마음 비유입니다.
위 말씀은 하나님을 배신하고 떠난 이 땅의 죄인들을 향한 아버지 마음이 어떠한가에 대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특별히 공동체의 리더들이 어떤 마음으로 교회의 지체들을 섬겨야 할지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아버지의 마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청소년들에게 아버지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4살쯤 되면 우리 아버지는 전지전능하다고 믿습니다.
12살쯤 되면 우리 아버지는 아는 것이 많지 못하다고 느낍니다.
15살쯤 되면 아버지는 구식이고,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느낍니다.
21살쯤 되면 아버지 골동품이고 차라리 없는 게 낫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27살쯤 되면 가끔은 제법 아는 것도 있고 판단이 옳을 때도 있다고 느낍니다.
32살쯤 되면 인생의 문제를 아버지와 의논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50세가 되면 아버지는 참 훌륭했다고 말합니다.
60세가 넘어서면 내 아버지는 내 인생의 미래를 모두 알고 계셨음을 깨닫고 자신은
아버지만 못하다고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누가 복음의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주는 도전이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음을 깨닫고 감사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그 아버지의 마음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나아가 아버지 마음을 나누면 살라는 것입니다. 아버지 마음을 가진 리더, 아버지 마음을 가진 어버이, 아버지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2. 아버지 상처로 울고 있는 아버지들
♤ 인도네시아 에디 목사님이 길거리의 한 불량 청년에게 전도를 합니다.
“하나님을 믿으세요.” “하나님의 누구인데요?” “하나님은 아버지와 같은 분입니다.”
그러자 이 청년의 얼굴이 분노로 가득 차더니 “그 하나님 내가 죽여 버리겠다.”고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요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계시던 분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아버지는 어떤 분이십니까? ‘하나님은 아버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 이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버지이십니다.
마귀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하도록 합니다.
이 땅의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를 깨트리고 상처 나게 만들어 하나님 아버지를 두려운 아버지라고 속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으로 살지 못하는 것이 바로 저주입니다. 우리의 최고의 복은
아버지의 마음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버지, 어머니가 되고 리더가 되었다는 것은 아버지의 마음으로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주는 삶을 말합니다. 육신의 아버지로부터 ‘아들아 사랑한다. 딸아 사랑한다.’라는 말을 한 번도 듣지 못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 가는데 큰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는 날마다 나를 향해 “사랑한다, 사랑스럽다” 말씀하십니다.
육신의 아버지를 용서하고 아버지 상처를 치료받고 하나님 아버지 품에 안기십시오. 이처럼 아버지의 마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릴 때 받은 아버지 상처를 치유 받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말씀에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고 표현합니다.
고린도교인들은 목사 앞에서는 충성스러운 집사요 권사요 믿음 있어 보이는 장로이지만 자기들끼리 있을 때는 아직도 입엔 독설이 ,가슴엔 상처가, 행동엔 악덕이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이들에게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나는 어린아이의 상처를 버렸노라.”
“나는 어린아이의 기억을 버렸노라.”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과거를 치유 받을 수 있을까요?
먼저 당신으로부터 아버지 마음을 빼앗아 간 모든 사람을 용서 하십시오.지금 내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받아들이십시오.즉 내 이가 시린 것은 아버지가 먹었던 신 포도를 나도 먹었기 때문에 신 것이지, 나는 안 먹고 아버지만 먹었는데 내 이도 시린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부모의 영향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모습 그대로를 주님 앞에 인정하고 나의 잘못과 책임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묵상함으로 예수님을 닮고, 예수 이름의 능력으로 성인아이를 치유하고 극복해 가는 것입니다.
♤ 향기가 없는 아버지는 조화와 같습니다. 단지 무늬만 아버지인 사람들이 이 땅에는 많이 있습니다. 꽃시장에 한번 가본 적이 있습니다. 생화코너와 조화코너가 있는데 조화가 오히려 더 화려하고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조화엔 향기가 없습니다. 벌과 나비도 찾아오지 않습니다. 향기 없는 아버지,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자녀들이 쉴 수 없는 아버지의 품! 그것은 조화 아버지입니다. 용서가 없는 성도들의 가슴, 그곳은 아버지의 향기가 없는 사막입니다. 아버지의 마음과 아버지의 성품이 넘치는 교회와 가정 그것이 우리가 기다리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아버지의 마음과 아버지의 비전이 넘치는 교회, 그것이 바로 주님이 꿈꾸시는 교회입니다.
3. 조건 없이 용서하시는 아버지
♤ 목사님이 교인들에게 물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용서를 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 교인이 당당하게 대답을 합니다. “예, 먼저 죄를 지어야 합니다.”
♤ 죄인 아닌 사람 누가 있으며, 용서받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기독교의 진리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용서’입니다. 십자가의 의미가 용서요 하나님의 사랑의 색깔이 용서입니다. 기독교에서 용서를 빼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용서를 제하면 나무토막만 남을 것입니다. 용서는 권면이 아닙니다. 준엄한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에게 “나는 너희에게 나의 성품을 나누어 주었노라. 나는 너희에게 용서의 씨앗을, 용서의 권능을 너희에게 나누어 주었노라. 너희는 용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 수년전에 세상을 떠난 네덜란드의 성자 코리 텐 붐 여사가 있습니다.
코리 여사는 유대인들을 숨겨준 것이 화근이 되어 독일 병정들에게 잡혀 라벤스브르크 수용소에서 처절한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여자로서는 견딜 수 없는 끔찍한 고문과 아픔을 겪었습니다. 언니 베티는 그 고통을 이길 수가 없어 감옥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코리는 극적으로 생명을 보존했습니다. 그 후 코리는 독일의 말만 들어도 오장육부가 뒤틀리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하나님은 잔인한 명령을 하셨습니다.
“독일인을 사랑해라. 독일을 찾아가 용서의 복음을 선포해라. 독일 사람들을 하나님이 사랑한다고 얘기해라! 독일인들에게 치유의 복음을 전파해라. 용서의 복음을 전파해라” 그녀가 찾아가 집회를 할 때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집회이후 그녀의 손등에 입맞춤을 하려고 줄을 서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때 뒤쪽에서 라벤스부르크 수용소의 간수, 자기와 언니에게 그 끔찍한 고통과 아픔을 준 간수가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내피는 거꾸로 용솟음 치면서 한마디 말이 튀어 나왔다. ‘하나님 저 사람만은 용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큰소리로 내게 말씀하셨다. ‘용서해라’ ‘아니오. 하나님 할 수 없습니다. 용서할 마음이 아닌걸요.’ ‘아니다 코리야, 용서해라’ 그 간수는 아무 일도 모르고 계속 한걸음 한걸음 다가옵니다.
‘나는 너에게 용서할 마음이 있는가, 아닌가를 묻는 것이 아니다, 용서해라. 이것은 나의 명령이다. 용서해라.’ 그 순간 코리 여사는 용서 할 수 있는 마음이 전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손을 내밀어 그 간수를 끌어안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나는 당신을 용서합니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용서할 수 있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의 상태를 물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을 우리가 지킬 때 우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허락받을 수 있습니다. 이 땅의 진정한 아버지가 괴어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내안에 아버지의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바로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내안에 용서의 마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4. 생명을 먹이시는 하나님
♤ 탈무드의 이야기입니다. 한 마을에 포도주 가게를 하는 두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마차를 타고 멀리 가서 포도주를 한 드럼씩 사 가지고 돌아옵니다. 날씨가 으슬으슬 추웠습니다. 포도주의 향기가 코를 찌릅니다. 한 사람이 주머니를 뒤져보니 천 원짜리 한 장이 나옵니다. “이보게 자네 포도주 한잔만 팔게.” 천원 받고 포도주 한잔을 주었습니다. 이번엔 이쪽 사람이 포도주의 향기가 코를 찌릅니다. 구미가 당깁니다. 주머니를 뒤져 보니 아까 받은 천원이 있습니다. “이번엔 자네 포도주 한 잔을 팔게나.” 포도주 한잔을 사 마셨습니다. 천 원짜리 한 장이 이리 왔다 저리 갔다 하면서 먼 여행길에 포도주 두 드럼이 두 사람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마을에 도착해서 얼큰히 취해 마차에서 뛰어내리면서 “야호, 우리는 행복한 사람이다. 기적의 사나이들이다. 포도주 두 드럼을 천 원짜리 한 장으로 다 마셨네”라며 좋아하더라는 것입니다.
♤ 아침에 일어나 새 옷을 갈아입고 또 한 끼 밥을 먹고 물 한잔을 마시면서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다’라고 느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톨스토이「인생론」에 보면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세 가지 비결이 나옵니다.
첫째, 함께 사는 사람들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둘째, 살아가는 삶의 목적이 분명하면 인생은 행복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셋째, 먹고 입고 자는 삶의 환경으로 인해 늘 감사하며 살아갈 때 사람은 행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염려로 해결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해결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 말입니다.
♤ 비 오게 해달라고 어떤 농부가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면서 그냥 빈손으로 나가니까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아빠 우산!” 하며 우산을 들고 나왔습니다. “아니 햇빛이 쨍쨍 나는데 무슨 우산?” “아빠 비 오게 해달라고 기도했잖아.” “야 임마, 기도는 기도지!”
♤ 하나님은 넉넉하신 분입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많으신 분입니다.
나를 배부르게 먹이시는 분입니다.
출애굽기 16:1-35절의 말씀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불평과 불만을 털어놓습니다. 하나님은 들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들의 불평과 불만을 들으신 하나님은 “저기 배고 고파 불평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먹이시겠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에 우리가 불평불만을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너희들에게 만나를 내려 먹이겠노라’ 라고 미리 말씀해주시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요? 왜 우리가 아프기 전에 ‘너는 이제 곧 병에 걸릴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 병을 낳게 해주겠다.’ 라고 말씀하지지 않는 것일까요? 하나님은 우리가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없어도,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기대하고 계시는 분입니다. 먹이시는 하나님, 준비하고 기다리시는 하나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합시다. 하늘로부터 내려온 ‘만나’는 일종의 시험이었습니다.
♤ 랍비의 두 아들이 커다란 파이를 붙들고 서로 많이 먹겠다고 싸우고 있었습니다.
“내가 자를 거야. 내가 자를 거야.” 형의 손에 칼이 들려 있었습니다.
큼직하게 자르고 모퉁이 조금을 동생에게 줄 모양입니다. 이때 아버지가 들어오셨습니다.
“애들아 누가 잘라도 좋다. 그러나 한사람이 자르면 나머지 한사람이 먼저 파이를 잡는 특권이 있다.
누가 자를래.” 그러자 형은 정확하게 반을 잘라 사이좋게 먹었다는 탈무드의 교훈입니다.
♤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만나가 내릴 때 하나님의 임재를 느꼈습니다.
만나를 통하여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질을 통하여 하나님을 봅니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는 풍부할 때 그 풍부에 묻혀 하나님을 망각합니다. 잘 나갈 때는 너무 바빠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시간을 갖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가난해지면 하나님이 다 빼앗아 갔다고 불평합니다. 그래서 ‘만나’는 시험이요 심판입니다. 반면 그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이 주신 ‘만나’를 먹은 사람은 아버지의 마음을 먹은 것입니다. 하늘의 양식 만나를 먹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먹은 것입니다. 만나로 배부른 사람은 아버지 마음으로 배가 부른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성품과 비전이 여러분의 심령에 넘치기를 원합니다.
5. 아버지- 참 좋은 나의 친구
♤ 한 마을에 사는 두 사람이 산길을 걷다가 곰을 마났습니다.
먼저 곰을 발견한 친구가 높은 나무 위로 도망을 갔습니다. 늦게 곰을 본 친구는 피할 겨를이 없어서 땅바닥에 엎드려 죽은 척했습니다. 곰은 죽은 사람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아니다 다를까 곰이 냄새만 맡다가 사라졌습니다. 나무에 올라갔던 친구가 내려와서 물었습니다. “곰이 자네 귀에 뭔가 말을 한 것 같던데 뭐라고 하던가?” “위험할 때 혼자 피하는 사람과는 친구를 하지 말라더군.” 세월이 지나 이 두 친구가 산길을 걷다가 또 곰을 만났습니다. 이번에는 반대로 지난번 나무에 올라갔던 친구가 죽은 척 땅바닥에 엎드렸습니다. 곰이 어슬렁거리며 다가 왔는데 한 사람이 죽어 있는 게 아닙니까? 이 곰은 착한 곰이라 땅을 파더니 이 사람을 땅속 깊이 묻어 주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참된 친구는 우리 인생을 풍요롭게 하고 나쁜 친구는 우리를 아프게 합니다.
♤ 철이 철을 날카롭게 하듯이 사람은 그 친구의 얼굴을 빛나게 합니다.
사람이 어떤 친구를 가졌느냐에 따라 인생의 많은 것들이 달라 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만약 대단한 사람을 친구로 사귀고 있다면 사람들 앞에 그를 자랑할 것입니다.
♤ 성경이 바로 그런 친구 한 분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참 좋은 친구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이 멋진 친구를 바라만 보고 있거나 그 친구와 아직도 서먹서먹한 관계에 있다면
우리는 엄청난 축복을 잃고 있는 것입니다. 리더의 아버지 마음은 친구가 되어 주는 마음입니다. 가장 훌륭한 교인은 교회의 친구가 되어주는 사람입니다.
부부도 살다가 보면 친구인 것을 알게 됩니다.
친구 되신 하나님과 친밀하게 사는 것입니다.
친구 되신 예수님과 다정하게 사는 것입니다.
친구 되신 성령님과 늘 가까이 사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내안에 남아 있는 부정적인 마음, 아픈 아버지 상처는 떠나고 아버지 마음,
아버지 성품, 친구가 되어주는 마음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시가 있습니다.
♤ 친구를 찾으러 나갔으나 아무도 찾을 수 없었네.
친구가 되어주려고 나가니 어디나 친구들이 있었네.
날 필요로 하는 사람을 보거든 동행하는 친구가 되어주라
♤ 누가 나의 친구가 되어 줄까 기다리지 마십시오.
내가 먼저 다가가 친구가 되어 주십시오.
6. 하나님 속에 어머니의 가슴이 있다.
땅에 살아가는 모든 자녀들은 어머니의 숨결 속에서 하나님의 숨결을 느낍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는 데 그렇게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풍요로운 사랑을 깨닫고 살아가는 사람은 주의 사람들에게 어머니의 사랑을 나누어 주며 살 수 있습니다.
♤ 우리는 어릴 때 받은 사랑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합니다.
저는 아주 어린 나이에 숨을 헐떡거리다 마침내 숨을 멈추는 큰 고통의 시간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저는 그때 일을 하나도 기억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순간 얼마나 마음 졸이며 저를 지켜보셨겠습니까. 숨을 몰아쉬는 저를 바라보며 얼마나 발을 동동 그르셨겠습니까. 숨을 뚝 멈추고 죽어 있는 저를 바라보며 얼마나 우리 하나님, 우리 어머니 안타까워 하셨겠습니까.
♤ 내가 죄 중에 있을 때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지 못할 때에 우리 하나님은 나를 예정하시고, 부르시고, 구원해주셨습니다. 격려하여 주시는 사랑이 곧 보혜사의 사랑입니다.
구속하여 주시는 사랑입니다. 덮어주는 사랑입니다.
모성애의 상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갑니다. 이제 그 상처에 갇혀 웅크리고 살지 마십시오.
십자가 밑으로 나아가 그분을 자유롭게 놓아 드리십시오.
7. 아버지 - 축복의 통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양자된 하나님 자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이면 또한 그분의 상속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상속자는 그분의 복과 유업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늘 복으로 뭉쳐진 복덩어리입니다. 그런데 우리 시대의 불행이 있다면 이 복덩어리인 아버지들이 무너지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아버지의 영역이 갈수록 축소되고 있습니다. 한때 유행 했던 ‘간 큰 남자 시리즈’가 바로 무너지는 부권의 문화를 대변 합니다.
♤ 아내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하는 남자가 간 큰 남자라고 합니다.
아내에게 돈을 어디다 썼느냐고 묻는 남자는 더 간 큰 남자입니다. 아예 간이 배밖에 나온 남자가 있다고 합니다. 아내가 연속극 보는데 이종격투기 K-1본다고 아내 허락 없이 TV채널 돌리는 남자랍니다.
♤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아버지는 ‘생명의 원천’이며 동시에 ‘축복의 통로’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아버지’입니다.
아울러 그는 ‘꿈의 아버지, 축복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축복의 통로가 되는 꿈’을 주셨습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은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2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자신을 발견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 세계적인 기업 경영 컨설턴트이자 존스 그룹의 창업자이기도 한 로리 베스존스여사는
‘기적의 사명 선언문’이라는 책에서 “이 땅에 기적처럼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에겐 예외 없이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그들 모두에게 비전 선언문이 있었다는 것이다” 라고 선언 하였습니다.
♤ 성경에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위대한 일들을 감당했던 사람들은
그들의 비전이 무엇인지 똑똑히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의 인생 사명선언문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창세기 12장에서 보면 그에게 가장 중요한 말은 ‘가라’입니다. 즉 내가 복덩어리가 되기 위해서는 떠나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시작은 떠나는 것이요, 믿음의 완성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땅으로 가는 것입니다. 단순히 아비와 나의 고향을 떠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 땅의 가치관을 버리고 떠나라는 것입니다.
어디로? 약속의 땅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축복 받지 못하는 이유는 떠 날 때 떠나지 못하고 옛 가치관에 덧칠을 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의 통로로 부르셨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어떤 복을 받을까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받은 복을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세워 주었느냐, 내가 받은 복을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 얼마만큼 나누어 주었느냐의 문제입니다.
이 땅에는 골칫덩어리, 저주 덩어리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있는 반면 복덩어리로 사라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분입니까?
8. 아들아, 나는 죽어 유산이 되련다.
전 세계적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타이타닉”이라는 영화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실화를 영화한 타이타닉은 대부분이 각색된 내용입니다. 특히 영화의 주인공 이야기는 100% 각색 된 내용입니다. 영화의 주인공처럼 한 여자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남자는 없습니다. 그렇기에 더 많은 여성들이 환상을 갖게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끝까지 침착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던 악단장 ‘웰레스’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침몰하고 모든 사람이 죽음 앞에서 우왕좌왕할 때 어찌할 줄을 모를 때 그는 자기 팀 멤버들을 마지막까지 격려하면서 찬송을 연주합니다.
지금 이 순간이 생애의 마지막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이 땅에 남기겠습니까?
누구나 인생의 종착점에 서고 보면 최고의 가치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생명입니다. 구원입니다. 영생입니다. 하나님입니다. 천국입니다. 우리의 삶의 마지막에 우리가 하는 말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것은 그의 마지막 가치관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것은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손들에게 중차대한 영향력을 남기기 때문입니다.
프린스턴 대 설 교학 교수인 블랙우드는 그리스도인이 남겨야할 세 가지 유산을 말했습니다.
첫 번째는 기쁜 기억의 유산입니다.
두 번째는 좋은 습관의 의지입니다.
세 번째는 높은 생의 목표라는 유산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의 성산에 오르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성산에 오르는 길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버지 축복과 유산 없이 제로베이스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아무런 유산 없이 맨바닥에서 시작하는 길입니다.
두 번째는 아버지의 축복과 유산 위에서 첫발을 내딛는 것입니다.
성경은 어떻게 가르칩니까?
창세기 12장에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너는 앞으로 복의 근원이 되라”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그 자신이 복을 받을 뿐만 아니라 자손에게 복을 넘겨주는 복의 근원이 되라는 축복입니다. 축복하는 일은 어떤 특별한 사람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누구나 축복의 권세가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 자신의 신분 안에 축복의 능력이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아버지가 그 자식에게 남길 진정한 유산이 있다고 하면 틀림없이 축복의 유산일 것입니다.
특별히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그 자식을 축복하는 아버지의 축복 유산을 그 자손의 영원한 양식이 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9. 잃은 자를 향한 아버지의 가슴앓이
♤ 어떤 학생이 기차에서 요나 이야기를 읽고 있었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신사가 비웃듯이 물었습니다. “학생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 삼일 후에 다시 나왔다는 그 얘기를 믿는가?” “그럼요.” “어떻게 그 터무니없는 얘기를 믿을 수 있나?” “자세한 것은 천국에 가서 요나에게 물어보지요, 뭐.” “그 친구가 지옥에 가 있으면 어떡하지?” “그럼 아저씨가 물어보면 되겠네요.”
♤ 하나님께서는 요나서를 통해 보여주고 싶은 메시지는 무엇입니까?
잃은 자를 향한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한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잃은 자를 향한 아버지의
가슴앓이, 통곡의 눈물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생명하나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시는 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 생명을 온 천하보다 귀중히 여기시는 아버지의 가치 기준 말입니다.
요나서를 보면 요나의 불순종은 나의 불순종이었고 요나가 아버지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모습은 바로 나의 모습이었습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우리 교회의 모습이요, 한국 교회의 모습이요,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입니다. 요나는 잠을 자야 할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잠에서 깨어 외쳐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의 신음소리 한걸음 더 나아가 하나님의 신음소리를 들어야 할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의 가슴앓이를 느낄 수 있어야 했습니다. 요나의 불순종에도 하나님은 요나를 포기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나에게 새로운 기회를 주십니다. 우리가 아니라도 하나님은 이 도시를 얼마든지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교회를 통하여 이 사명을 감당하기를 원하십니다.
요나가 그토록 싫어한 니느웨를 행한 하나님 아버지의 가슴앓이를 보라는 것이 요나서의 핵심입니다.
네가 살고 있는 이 도시, 이 나라, 나아가 열방의 구원을 위한 아픔을 함께 나누자는 것입니다.
내가 가져야할 아버지의 마음은 하나님이 기뻐하실 때 나도 기뻐하고 하나님이 아파하실 때 나도 아파하는 마음입니다.
10. 아버지 비전과 함께 살고 죽으렵니다.
‘아버지의 마음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한 편 한 편 쓰면서 제겐 몇 가지 목적이 있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되심을 새롭게 확인하고 그 아버지의 마음을 배우고 싶었습니다. 둘째, 아버지 마음을 찾는 작업은 먼저 제 자신을 향한 작업이었습니다.
셋째, 행복한 가정의 그림을 그려 주고 싶었습니다. 네 번째, 마지막 목적은 고집스럽게 교회가 자족임을 외치고 싶었습니다. 그 교회의 모든 리더는 아버지입니다. 서로 서로 아버지 마음으로 대해야 교회를 만들어 갈 수 있습니다. 비전이나 열정만 가지고는 주님의 심장 속에 있는 그 본래의 교회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성품이 따라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구약의 룻기서의 메시지는 남편 잃은 세 여인이 불쌍하게 살았더라는 얘기가 아닙니다.
물론 감당하기 어려운 커다란 상처임에는 분명합니다. 외관상으로만 보면 결코 행복한 가정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룻기는 이 불행한 가정의 아름다운 결말을 그려내고 있습니다. 무엇이 이 엄청난 상처와 비극과 불행 가운데서도 이 가정을 복 되게 할 수 있을까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첫째는 나오미에게 아버지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며느리 룻의 어머니의 길을 따라가는, 아버지의 비전과 함RP 살고 죽겠다는 아름다운 마음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 마음, 그 열 번째 이야기의 메시지는 ‘아버지의 비전과 함께 살고 죽겠습니다.’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 유대의 속담에
“어리석은 자는 재산을 남기고,
학식 있는 자는 지식을 남기고,
지혜로운 자는 신앙을 남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적인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미래에 대한 비전을 나누어 주우야 합니다. 비전의 기름 부으심이 흐르는 가정, 그 곳이 하나님의 가정입니다. 목사의 가장 큰 축복은 예수님의 비전을 자신의 비전으로 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비전을 나의 비전으로 품고 영적 지도자와 교회의 비전을 내 삶의 비전으로 품고 당당히 하나님 나라의 주역이 되어 살 수 있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 비결, 바로 룻의 결단이 룻기1장 16-17절에 기록 되어 있습니다.
첫째, 아버지의 삶의 목표, 아버지의 비전을 나의 비전으로 받아들이기로 결단하는 것입니다. “둘째, 행복한 공동체는 함께 사는 것입니다.
♤ 어릴 때 소 싸움시키던 추억이 있어서 일전에 전국 소싸움 대회 중계방송을 잠깐 보았습니다. 준결승전에서 ‘승리’라는 소와 ‘달이’라는 소가 붙었습니다. ‘달이’라는 소가 패하여 도망을 가는 데 응원하던 주인이 넘어져 그 밑에 깔렸습니다. 그리고 그 위를 뒤 따라 가던 ‘승리’라는 소가 달려 지나갔습니다. 크게 다쳤겠구나 싶었는데 조금 있으니까 툴툴 먼지를 털고 일어납니다. 슬로우 비디오로 다시 중계를 하는데 두 마리 소가 사람을 밟지 않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그 급박한 상황 속에서 말입니다.
♤ 걸핏하면 가족을 아프게 하고 리더도 밟고 사람을 다치게 하는 인간세계를 생각하면 인간이 짐승보다도 못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셋째 룻은 어머니 나오미가 붙들고 살던 바로 그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기겠다고 결단합니다.
넷째, 룻은 어머니와 운명을 함께 하겠다고 결단합니다.
병든 자식을 살리고 자신은 행복하게 죽을 수 있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그린
‘가시고기’의 작가 조창인 씨가 쓴 또 다른 감동작 ‘등대지기’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 주인공 재우는 어려서부터 똑똑한 그의 형과는 차별을 받으면 자랐습니다.
도무지 어머니의 사랑을 느낄 수도 없고 그 차별대우를 이길 수도 없어 집을 나와 등대지기가 됩니다. 어머니의 사랑을 독차지 했던 형은 치매에 걸린 어머니를 동생 재우에게 맡겨놓고 이민을 떠나 버립니다.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어머니를 맡아 섬긴다는 건 재우에게는 고통 그 자체였습니다. 태풍이 몰아치는 어느 날 밤 등대에 불이 나가서 불을 켜기 위해 나가게 됩니다. 누워 있던 어머니가 자식을 부릅니다.
“재우야! 가지마. 재우야. 가지마.” 하지만 재우는 어머니께 “어머니, 저는 가야 합니다. 여기 냉장고에 음식이 있습니다.” 하고는 등대를 고치러 나갑니다. 등대에 올라가 끓어진 퓨즈를 갈아 넣고, 전기를 다시 연결시키는 순간 재우는 감전되어 그 자리에 쓰러지고 납니다. 의식을 찾았을 때 그의 내장은 타 들어가는 듯 몸은 오드라 들고 있었습니다. ‘아! 이대로 죽겠구나!’ 생명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그 시간 수백계단을 올라오는 한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치매를 앓고 있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가 올라오면 분명 죽게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머니, 내려가세요.”라고 소리쳐 보지만 그 목소리엔 힘이 없었습니다. 어머니가 가까이 옵니다.
다가와 어머니가 하는 말 “너 왜 밥 안 주고 여기 있어. 밥 줘!” 그리고는 곧바로 말합니다. “너 힘드니. 내가 너 살려줄게.” 그리곤 무릎에 아들을 눕힙니다. 빗물을 떠서 아들의 입에 넣어줍니다. 빗물이 들어갈 때 타들어 가는 속이 다 식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어머니 돌아가세요! 여기 있으면 죽어요. 어머니 돌아가세요.”
“아니야. 나는 내 곁에 있을 거야.” 치매에 걸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한 노인 안에서는 치매와 모성 본능이 싸우고 있었습니다. 잠시 후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옷을 벗습니다. 그 옷을 벗고 속옷을 빗물에 적셔 아들의 입에 넣어줍니다. 나흘 뒤 구조대가 왔을 때 어머니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들을 살리고 어머니는 죽어갔던 것입니다. 하반신 마비가 되었던 아들은 그러나 미처 깨닫지 못했던 어머니의 깊은 사랑을 느꼈기에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이 등대지기를 지키고 있었던 힘은 바로 어머니의 마음, 어머니의 사랑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아버지 마음을 먹고 삽니다. 아버지 마음을 먹어야 배가 부릅니다.
아버지 마음, 아버지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 다고 넋두리 하지 맙시다.
아버지의 상처에 갇혀서 끌어안고 울고 있는 또 다른 아버지의 모습으로 살아가시겠습니까?
이제 아버지의 상처를 벗어 던지고 당당 하게 축복의 산에 올라야 하지 않겠습니까?
독생자를 아끼시지 않았던 그 아버지의 마음과 아버지의 사랑이 우리 가슴에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이제 아버지의 마음으로 살아갑시다. 가정 안에서, 교회 안에서, 이 세상 한복판에서, 아버지도 아버지의 마음으로 자식을 보고, 자식들도 아버지의 마음으로 늙어가는 내 아버지를 바라보며 섬기도록 합시다.
이것이 천국 공동체, 천국 가족의 진정한 모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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