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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및 신앙 서적

토마스 선교사(1840-1866)

by 은총가득 2020. 9. 1.

토마스 선교사(1840-1866)

<<한국 개신교의 첫 순교자이자 선교사, 1866년 대동강에서 순교>>

 

 

 

 

 

1.출생: 1840년 9월 7일, 영국 웨일즈의 회중교회 목사의 두 번째 아들로 태어남.

-부친(로버트 토마스)은 매우 경건한 사람으로 웨일즈 하노버교회 담임목사로 목회하다 1884년 2월 28일 하노버교회 사임후 10월 2일 별세.

 

2.학창시절

①3년간 클랜도버리 칼리지에서 라틴어, 헬라어, 불어를 공부(어학에 남다른 재능)

②1856년 16세때 신학공부를 위해 런던 대학 뉴칼리지에 진학했으나 그의 나이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학교측에서 1년후로 입학을 연기함.

-그의 학창생활은 방황과 낙망으로 휴학과 복학의 과정을 지내며 런던대학교 뉴칼리지에서(1857~1863년 5월)학사 및 신학과정을 마쳤음.

 

3.목사안수:1863년 6월 4일 고향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안수(그때 나이 23세)

-그는 목사안수 받은 후 중국선교의 사명을 느껴 부인 캐롤라인과 함께 런던선교회 파송을 받고 중국상해로 떠남

 

4.선교사로 파송

①1863년 8월 영국 런던 선교회 파송선교사로 아내 캐롤라인과 중국 상해 도착.

②아내 캐롤라인이 환경에 적응을 못하고 유산 후 1864년 3월 24일 별세함.

-임신중 이국생활에서 오는 충겨고가 다른 기후로 고생하다 중국 남부로 이동. 거기서 미국 선교사 부인의 죽음을 듣고 그 충격으로 유산후 사흘 뒤 사망.

③중국 선교지에서의 방황

-1864년 사표제출(아내 잃은 충격과 선임 선교사 무어헤드 월권을 이유로)

-1865년 1월부터 8개월간 그는 청나라 해상 세관 통역관으로 근무함.(이때 중국어, 몽골어, 러시아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로 어학을 습득)

④중국 파송선교사 윌리암슨의 도움으로 선교의 열정을 재충전함.

-스코틀랜드 장로교 중국담당자 윌리암슨을 만나 조선에 대해 듣게 되었고 윌리엄슨은 런던 본부 선교국에 적극적으로 그를 변호하여 천거해줌.

⑤방황중에서도 선교사 업무이행

-지푸에 머물면서 해관 업무에 못지않게 성서연구반을 운영하였고 또한 중국인들을 위한 주일예배와 영어 회중교회를 인도하였음.

 

5.한국선교에 대한 관심과 제1차 조선 선교여행

①그는 윌리암슨의 소개로 한국에서 온 천주교인 두명을 만난후 조선으로 떠남.

-1865년 9월 13일 그는 황해도 창린도에 도착하여 2개월간 한글을 배우며 성경을 배포하고 전도한후 1866년 1월초 중국 북경으로 되돌아왔음.

②그후 런던 선교회에서 토마스 선교상게 북경에서 활동하도록 새로이 임명함.

-1866년 4월까지 북경대학 학장서리로 지내면서 평양감사 박규수를 만나 한문성경 1권을 전달했고, 1년후 그 성경이 평양에 흘러들어간것에 감격

③당시 조선은 병인박해(1866-1871)시기로 천주교의 박해가 극을 이루었음. (*1866년 고종3년, 대원군이 천주교 신자들을 크게 학살한 사건)

 

6.제2차 조선 선교여행

①1866년 8월9일 미국 제너럴셔먼호 통역관 자격으로 탑승(동양인19명, 서양인5명)

-당시 조선은 대원군 치하 쇄국정책으로 ‘청국의 허락없이 외국과의 통상 불가능’함을 통보했으나 셔먼호는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으로 전진함.

②이런 상황에서 조선과 셔먼호가 대치중에 협상을 시도함.

-조선은 양쪽 협상을 위해 중국 이익현을 파송했으나 셔먼호 안에서 그를 인질로 붙잡아 두자 결국 박규수는 셔먼호를 불태우기로 결심함.

③조선정부는 대동강 상류에 불타는 나룻배 띄워 셔먼호에 옮겨 붙인후 포위함.

-셔먼호의 선장, 중국 서기 조능봉, 이팔행 등이 참수를 당하고 토마스도 모래사장에서 기도한 후 평양출신 군인 박춘권에게 성경을 건네주고 순교함.

 

7.순교:1866년 9월 2일 27세때 조선 대동강변에서 순교(아내 잃은 지 2년 6개월 후)

 

8.그가 남긴 씨앗

(1)병졸 박춘권

①심경에 변화 경험-‘도대체 무슨 책 이길래 죽어가면서도 건네주려 했을까?’생각.

②동료 몰래 현장에 다시 가서 흩어진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어 영주교회 영주가 됨.

-조카 이영태는 성경을 읽고 예수를 믿어 평양숭실대학에 들어가 졸업한 후 레이놀즈의 조사가 되어 현재 한글성경 2/3을 번역하는데 결정적인 공헌.

③병졸 박춘건은 훗날 평양 최초의 교회 ‘널다리골 교회의 대표’가 됨.

(2)최치량

①당시 12살 소년 최치량은 토마스로부터 포리에서 한문성경 3권을 건네받음

②성경이 ‘금서’라는 사실을 알고 겁이나 평양 영문주사 박영식에게 전달.

③박영식 집에 자주 놀러갔다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얻음.

(3)박영식

①조선 평양 영문주사 박영식, 최치량으로부터 한문 성경 3권을 건네받음.

②질 좋은 종이로 만들어진 성경 2권으로 자기 집의 바닥, 벽, 천장까지 도배함.

(#당시 한지류는 종이 질이 우수, 한쪽 단면만 인쇄되는 찢을 필요가 없음)

③어느날 요5장 24절이 눈에 들어와 처음에는 무의미하게 읽다 고민에 빠짐.

-“내가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자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나“

-그후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으니라”말씀 읽고 예수 영접후 구원을 얻음.

④성경으로 돕한 그의 집이 평양 최초의 교회“널다리골교회(장대현교회 전신)”

 

1865년에는 토마스 선교사가 서북해안을 찾아와 백령도를 비롯 황해와 평안도를 순회하며 전도를 했다. 이듬해 토마스 선교사는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백령도를 거쳐 평양에 들어갔다가 순교했다. 토마스는 이 땅에 복음을 들고 찾아와 순교당한 첫 번째 선교사였다.

 

제너럴 셔먼호

 


토머스 선교사 제너럴 셔먼호 기념 선교선

 

 

이 땅에 와서 최초로 순교한 개신교 선교사 토마스 선교사

이 땅에 와서 최초로 순교한 개신교 선교사 토마스 선교사를 소개함으로 ... 이분은 1840년 9월에 영국의 웨일스 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목사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가 신학교에 가면서부터 "나는 선교사가 되겠다. 선교사가 되겠다."

그래서 23살에 대학과 신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에, 런던 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중국 상해에 선교사로 갑니다.
그런데 도착해서 얼마 있지 않아 그 사랑하는 아내가 아이를 가졌는데 아이가 유산이 되면서 아내도 균에 감염이 되어서 죽고 맙니다.

23살의 젊은 선교사로, 목사로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준비하고 선교를 시작하기도 전에 제대로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아이도 죽고, 아내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는 깊이 낙심하고 정말에 빠졌을 것입니다.

기록을 보면 한 1년 동안 손을 놓고 있었어요. 그런데 누구를 만났느냐 하면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온 천주교 신자를 만났는데, 조선의 대원군이 대표적인 쇄국 정책을 통하여서, 천주교를 탄압해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한 꿈을 가졌습니다. '내가 그곳에 이제는 복음을 들고 가서 우리 기독교 복음을 저들에게 전해야 되겠다.' 그때는 가톨릭 밖에 한국에 전해지지 않았을 때인데, 본인이 개신교 선교사로 한국에서 복음을 전하러 왔습니다.
그래서 1865년에 황해도에 와서 성경책을 잔뜩 싸 들고 와서 나눠주면서 그 섬에서 한국말을 배우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태풍으로 인해서 잠시 중국으로 돌아갔던 그가 기도하는 가운데 1866년 조선에 무역을 하러 가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그가 알게 되었고, 그들에게 부탁해서 그 배에 통역관으로 탔습니다.

성경 하나 들고 타가지고, 이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이제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으로 올라오는데, 기록에 따르면 1866년 8월 9일이라고 되어있어요. 이때 올라오는 그 배를 타고 평양에서 올라오는데 평양에서 관리가 나와서 배에 탔습니다.
"왜 배가 여기까지 올라왔습니까?" "본인은 미국 상선인데 조선과 무역을 하려 합니다." "우리는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지 않습니다. 돌아가십시오."
돌아가야 하는데 이 제너럴셔먼호가 가자고 버팁니다. 그래서 거기서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배가 가지 않고 계속 거기서 평양 대동강 가에 머물러 있으니까 백성들이 와서 돌을 던지고 총을 쏘고 하는데 이 상선이 무장한 상선이었어요. 거기서 대포를 막 사격을 하고 총을 쏘니까 전투가 커졌습니다.

한참 전투한 뒤에 서해 썰물이 들어서 물이 싹 빠지면서 강물 수위가 낮아지니까 이 큰 배가 걸리고 말았습니다. 수심이 얕아져 가지고. 그러니까 평양 감사가 지시를 해서 작은 배 여럿을 묶어서 상류에서 그 안에다 나무를 넣고 불을 질러가지고 떠내려 보내가지고 이 제너럴셔먼호가 완전히 불덩이가 되어 타서 가라앉고 맙니다.
그래서 거기 타고 있던 선원이 다 나올 때 그 대동강 가에 있던 사람이 나오는 사람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그 배에서 나올 때 성경책을 한 움큼 쥐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전해 줍니다. 그런데 박춘권이라는 사람이 와서 그에게 칼을 들었을 때 그분에게 그 성경을 전해 주었는데, 이 박춘권 이분이 칼로 쳐서 토마스 선교사를 죽입니다. 피를 흘리며 27살에 젊은 선교사가 한국 최초의 순교자가 됩니다. 1866년 9월 2일입니다.

그런데 죽이고 돌아가려다가 그가 자기의 죽기 전에 자기를 애타게 바라보며 전해 준 성경책이 뭔가하고 그 성경책을 들고 집에 가서 성경책을 읽다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를 만나게 되었어요. 할렐루야!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토막 나서 죽임을 당하고 그곳에서 불을 질러 태워서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그가 전한 성경이 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한 가정을 변화시켜서 그분은 나중에 교회의 기록을 보면 영수가 되었다고 그랬는데 요즘 말하면 안수집사쯤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충성하는 교회일꾼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 토마스 선교사가 갖고 온 성경이 많은 기적을 나타냈는데 그 한 어린아이가 와서 성경책을 버린 걸 몇 권 주워가지고 집에 가져가서 그것을 뜯어서 벽지를 다 발랐어요. 그 집에 와서 자다보니 벽지 보고 읽다가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비록 대동강은 피로 물들었지만 그 순교의 피가 온 평양 시내를 주의 복음으로 뒤덮어서 평양에 큰 부흥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1932년 그가 순교한 자리 근처에 토마스 기념 교회를 짓게 되었고 그 평양 성문 앞에는 제너럴 셔면호의 밧줄을 승전기념으로 1945년 해방 때까지 걸어 놨다고 합니다.그런데 그 순교의 피가 온 평양을 뒤덮고 북한을 뒤덮어서 평양에 복음화되고 북한에 복음화되고 그 복음이 월남한 사람을 통하여서 남쪽에 더 확산되어 우리 대한민국이 지금 아시아 최대 기독교 국가로 변화가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할렐루야!평양은 한때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까지 불리었고, 초대교구인 터툴리안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되고 교회는 순교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토마스 선교사의 피 같은 수많은 순교자 피를 먹은 한국교회는 울창한 숲을 이루고 많은 열매를 맺는 아시아 최대의 기독교 국가가 되어서 복음을 세계만방에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죽었지만, 그 죽음이 이 같은 위대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때는 1866년, 병인 해였다. 그 해는 유달리 서양 열강들이 조선을 귀찮게 굴었다. 다사다난했던 대원군 집권 3년째인 병인년에는 병인박해와 병인양요가 일어난다. 바로 종교적으로 혹세무민 하고 정치적으로 모반의 우려가 있다고 해서 새해 벽두부터 9명의 프랑스신부와 수천 명의 조선인 천주교도들을 고문하고 학살한 사건이다.

이것을 계기로 복수의 칼을 품은 프랑스 함대가 9월에 강화도에 상륙, 병인양요가 일어나고 만다. 이때부터 외세에 대한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극으로 치닫는다.

 


이런 혼란스러운 상황에 미국배가 조선 앞바다에 나타난다. 저 멀리서 귀를 쩌렁쩌렁 울리는 대포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그 소리의 위력으로 보아 대단한 무기임에 틀림이 없다. “저놈들, 내 그럴 줄 알았다. 역시 네놈들도 똑같은 놈들이었어.” “어떻게 할까요, 장군님?”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저놈들도 지난번 그놈들과 한 패거리인 게 틀림이 없다. 이곳에 다시는 얼씬도 못하도록 불화살을 쏴라.”


서양의 최신식 화포와 불화살의 대결은 싸움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배가 유유히 사라지는가 싶더니 대동강 모래톱에 걸려서 꼼짝 못하게 되었다. 그러자 조선 군인들은 작은 배에 장작을 싣고 불을 질러 그 배를 전소시켜 버렸다. 배 안에 타고 있던 선원들 대부분이 불붙은 선박위에서 화염에 휩싸여 죽고 말았고, 목숨이라도 부지 하고자 바다로 뛰어든 사람들은 생포되어 그 자리에서 처참하게 몽둥이로 맞아 죽든지 목 베임을 당하고 말았다.

이 배의 이름은 ‘제너럴셔먼 호’였다. 그러는 중에 한 사람이 강물에 뛰어든다. 조선 군인들은 곧장 그를 생포했다. 그때까지 그는 가슴 속에 성경책을 꼭 품고 있었다. 조선 군인들은 그런 그를 잡아 대동강 변에서 목을 베어 죽였다.

 

내가 서양 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 사람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슨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나에게 받으라 권하였다. 그럼으로 내가 죽이기는 하였으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왔노라 <도마스 목사전> 중에서...

그 사람의 목을 친 박춘권이란 사람의 말이다. 그런데 한낱 조선군인의 이름이 어떻게 기록으로 세세히 남아 있게 되었을까? 그의 목을 친 이 박춘권이란 사람이 훗날 예수님을 믿고 요즘의 장로님과도 같은 영수라는 직책까지 받았기 때문이다.


그때 죽은 사람은 바로 제너럴셔면 호의 통역관으로 승선하고 있던 토마스 선교사이다. 1863년 런던 선교회의 파송으로 중국 땅에 도착한 토마스는 그로부터 2년뒤 조선에 대한 정보를 듣는다. 조선에 꼭 가보고 싶었던 토마스 선교사는 작은 목선을 타고 1865년 우리나라에 들어온다. 그러나 서울 쪽으로 내려오다 큰 풍랑을 만나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중국 땅에 머물게 된다.


그러는 중에 토마스 선교사는 우연히 대원군의 박해를 피해 황해도 장연에서 목선을 타고 필사적으로 탈출한 김자평, 최선일 등 천주교인 2명을 만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성경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 그것을 보고 자극을 받은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 선교의 필요성을 더확고히 하고 조선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렇게 준비를 하고 있던 토마스 선교사에게 조선에 갈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미국 제너럴셔먼호가 조선과 통상을 시도하려고 통역관을 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조선어를 배우고 있었던 토마스 선교사는 자원하여 그 배를 타고 우리나라에 들어온다. 성경책을 가지고서 말이다. 제너럴셔먼 호가 대동강에 도착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9월2일, 우려했던 대로 조선군과 무력 충돌이 발생했다. 토마스 선교사는 죽는 그 순간 까지도 복음을 전했다.

 


토마스 선교사는 중국에 있을 때부터 계속해서 영국에 있는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의 소식을 전했다고 한다. 아버지와 성도들은 중국에서 사역하던 토마스 선교사가 보낸 편지를 읽고 함께 기도와 물질로 도와주었다. 그 편지에는 처음 기나긴 항해 끝에 중국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내용으로 시작해, 어떤 사람들을 만나 무엇을 전했는지 상세히 적혀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엔가 아들에게서 온 편지에는 며느리가 풍토병으로 죽었다는 얘기가 있었다. 그러한 편지를 읽을 때 아버지 목사님과 교인들은 가슴을 치며 함께 아파하고 무릎 꿇고 밤새 기도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한 통의 편지가 도착한다. 편지에는 토마스 선교사가 조선이라는 미전도 종족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 나라에 다녀왔다는 이야기가 써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다시 조선으로 가기 위해서 조선말을 배우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아주 잔인하고 사악한 대학살이 최근 조선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누군가 조선에 들어가 선교의 문을 여는 것의 중요함을 깨달아 제가 조선에 들어가기로 결정하였습니다.
(1866.8.1)

편지의 내용은 여기까지였다. 아버지 토마스 목사님과 하노버교회의 교인들은 토마스가 어찌됐는지 몹시 궁금했다. 하지만 편지는 더 이상 오지 않고 연락은 끊어졌다. 그러던 중에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가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조선에 도착하긴 했는데 그곳에서 목 베임을 당했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들었다. 목이 잘려나간 아들의 소식을 듣고 부모님과 성도들은 조선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내 아들을 목 베어 죽인 민족이지만, 아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조선이 주님 앞에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27살의 나이… 순교의 피를 흘렸던 평양 대동강 변에 수많은 교회가 세워졌다. 위에서 말한 박춘권 뿐 아니라 장사포의 홍신길은 서가교회의 설립자가 되었고, 만경대의 최치량은 평양교회의 창설자가 되었다. 또한 무슨 말인지는 모르지만 종이가 너무 좋다고 그 성경을 한 장 한 장 뜯어 벽지를 바른 박영식의 집은 널다리교회의 예배처소가 되었다.


<로버트 토마스 1840년 9월7일 영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24살에 고향인 하노버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은 후 1863년 8월 런던선교회 파송 선교사로 아내와 함께 중국 상해 도착했다. 3년뒤, 1866년 8월9일 제너럴셔먼 호에 동승하여, 성경을 가지고 들어오다가 대동강에서 27살의 나이로 순교했다.>

 

 

최초의 선교사이자 순교자 토마스선교사님.

 

 

토마스 선교사를 파송한 하노버 교회

저메인 토마스(1839~1866)

 

영국 웨일즈의 작은 마을 클라노바. 인구 1백 50여 명 가량의 이 작은 마을에

1866년 대동강에서 복음을 전하려다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가 자라고, 안수받고,

또 파송받은 곳, 하노버교회를 소개할까 합니다.

이 교회에서 저메인 토마스의 아버지인 로버트 토마스가 목회(1847~1884)를 했습니다.

 

올해로 창립 3백58년이 되는 하노버교회는 50여 가구가 사는 교회로

주일에는 11명의 성도들이 모여 예배를 드릴 정도로 작은 교회입니다.
제가 갔을때 교회 수리가 한창이었습니다.

 

 

이 건물은 교회 바로 아래 있는 건물인데 오랜 기간 동안 교회의 사택으로

사용되어지며 교회에서 사역하는 목사님들이 사용했었는데 지금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개인 주택으로 사용되어지고 있었습니다.

로버트 토마스가 하노버교회에서 목회 할 동안 사택으로 사용되어졌다고 합니다.

물론 저메인 토마스가 이 건물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겠지요.....

안에 들어가 보지 못한 아쉬움을 뒤로 하고 떠나야 했습니다.

 

 

옛날에 사용 되어졌던 교회의 문을 여는 열쇠였다고 합니다.

물론 지금은 다른 문으로 바뀌어 사용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정면으로 강대상이 있었습니다.

 

 

강대상 뒤로 교회에서 사역했던 역대 목회자들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저메인 토마스의 아버지인 로버트 토마스가 목회(1847~1884)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옆에 있는 것은 예배 순서상에 나오는 찬송가 입니다.

그 주간의 찬송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저메인 토마스의 출생 증명서 입니다.

1839년에 태어났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결혼 증명서 입니다.

오른쪽 끝에 보면 토마스 아버지의 직업이 목회자로 나와 있고

저메인 토마스의 아내가 되는 캐롤라인 고드프리의 아버지인

존 고드프리의 직업은 농부로 나와 있습니다.

 

 

 

본당에 들어서며 오른쪽 벽면에 걸려있는 한국의 국기와 지도가 있습니다.

 

 

본당에 들어서며 왼쪽 벽면에 저메인 토마스 목사의 기념비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기념비에는 그가 두번째 아들이며 중국에서 선교 사역을 한것을 알수가 있고

한국에 두번째 방문 했을때인 1866년에 그가 27살의 나이에 죽음을 맞이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의 초상화입니다.

교회 안 한쪽 면에 있었으며 아래에는 한국의 첫 선교사라고 적혀 있으며

1866년 27살의 나이에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교회 바로 앞에 있는 토마스 선교사 아버지인 로버트 토마스(1810~1884)의 무덤입니다.

 

 

이분들은 지난 12년 동안 하노버교회에서 비서관으로 섬기고 있는 수석 장로 낸시 윌슨과

그의 남편 데이빗 윌슨이 우리를 반겨주고 토마스 선교사와 교회의 역사에 대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사순절에 읽을 순교이야기/토마스 선교사

대원군이 집정하여
쇄국정책을 펴고 있는 동안
두 차례에 걸쳐 한국을 방문한 끝에
이 땅에서 처형된 영국 선교사가 있습니다.

한국 기독교사에서 ' 첫 순교'의 영광된 자리를
차지하게된 토마스 선교사가 그 분입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영국 하노버교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런던선교회 파송으로
중국 상해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의 선교사의 길은
처음부터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그의 아내 케럴라인이 변화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망한 데다가
런던 선교회의 상해 주재 책임자인
무어헤드와의 불화가 겹치게 되었습니다.

토마스는 런던 선교회에 사표를 제출하고
해관에서 근무하면서 선교사역을
계속하였지만 선교회의 반응은 경멸과
적의 그리고 불신뿐이었습니다.

그러다 그는 스코트렌드 성서공회
윌리암슨 선교사를 만나게 되면서
지푸에서 윌리암슨 선교사의 일을 도우며
선교사역을 감당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한국에서 건너온 사람들을
지푸에서 만나게 되면서 였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한국어를 배우면서
바로 한국선교여행을 계확하였습니다.

드디어 1865년 9월 13일
그는 한국에 도착하였습니다.

2개월 반동안 한국해안가에 머물면서
가지고 간 중국 성경을 나누어주고

복음을 전하는 등
적극적인 선교활동을 벌였습니다.

그 후 서울을 향해 떠났지만
태풍으로 겨우 목숨만을 건진 채
만주를 거쳐 북경에서 사역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오직 조선에 가 있었습니다.

그의 한국말과
조선에 대한 지식이 알려 지면서

프랑스 함대가
그를 통역관으로 쓰려고 하였습니다.

당시 프랑스 함대는 조선에서 프랑스
신부에 대한 학살을 구실로 조선에
들어가려는 계획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함대는 인도지나 방면의
긴급사태에 투입되면서 토마스의 한국행은
무산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다 제너럴 셔먼호가
한국을 향해 떠난다는 것을 알게 되어

토마스 선교사는 조선에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통역관으로
이 배에 편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토마스 선교사가
꿈에 그리던 조선땅에 도착...

1866년 8월 16일 대동강 입구 용강군에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된것입니다.

평양에 가까워지면서,제너렬 셔먼호와
한국 측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이
고조되었습니다.

이런 긴장 속에 제너럴 셔먼호의 발포사건과
이현익의 억류사건이 일어나자 조선군의
반감을 사면서 사태는 어려워지기 시작하여

긴장의 분위기 속에서 며칠 더 버틴
제너럴 셔먼호가 모래톱에 좌초되면서
조선의 화공이 전개되었고

배에 머무르고 있던 토마스 일행은
뭍에 내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분격한 군민들에 의해 결박되고
타살되어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했습니다.

1866년 9월 2일 토마스 선교사는
27세의 나이로 아직도 수많은 교회가
그의 죽음위에 세워졌던
평양의 대동강 가에서 피를 흘렸습니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도 복음의 말씀을
이 땅에 전하려 하였는데

이때 토마스에게서 한문 성경을 받았던
한 사람이 뒷 날 선교사 마펫을 찾았고,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의 순교는 헛되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너럴 셔먼호가 미국 상선이었기 때문에
미국은 이 배의 행방을 추적하면서
조선을 설득하여 결국 1882년 한미 수호조약을
체결하게 되었고 그 뒤를 이어
각 미국 교단의 선교사 파견으로
연결되었던 것입니다.

"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초석이 된다. " 는

터툴리언의 말대로 한국을 위해 최초로 순교한
토마스 선교사의 순교의 피는 한국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그의 순교이후 16년이 지나면서
한국의 쇄국정책은 끝나게 되었으며

19년이 지나면서 언더우드 아펜셀러 선교사가
이 땅에 들어오게 된것입니다.

 

로버트 토마스 선교사

 

 

대원군 집권 3년인 1866년 병인년 우리나라 교회역사상 가장 다사다난했던 한해였습니다. 새해 벽두부터 나라안의 천주교인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병인박해가 일어났고 곧이어 병인양요까지 치뤘으니 외세에 대한 조선의 쇄국정책은 극으로 치닫고 있었습니다. 같은해 8월 평양의 대동강에 미국의 무장상선 제너럴셔먼호가 나타났는데 이 배에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의 후원을 받은 로버트 토마스라는 선교사가 통역관으로 동승하고 있었는데, 그가 바로 한국 개신교의 첫 순교의 피를 흘린 주인공입니다.

1840년, 영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토마스. 어려서부터 선교사에 대한 소망이 남달랐던 그는 드디어, 1863년 24살의 나이에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꿈에도 그리던 중국에 도착하게 됩니다. 하지만 곧이은 부인의 죽음과 선임 선교사와의 갈등으로 한때 선교사역을 포기하기도 했는데... 하지만 세관에서 통역일을 하던 그에게 조선 선교라는 새로운 길이 열립니다.

 

사진 : 토마스 선교사 부부 / 성결교회역사연구소

다시금 복음 사역의 열정에 사로잡힌 그는 같은해 9월 백령도 근처의 작은 섬에 도착해 주민들에게 성경책 200여권을 전하며 전도했습니다. 베이징으로 되돌아간 그는 런던으로부터 정식으로 조선 선교를 허락받았고 다시 조선에 갈 배편을 찾던 그 앞에 제너럴셔먼호가 나타났습니다. 중국을 떠난 셔먼호는 일주일후 평양근처 대동강변에 도착했고 역시 우려하던 대로
조선군과 무력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대동강변에 좌초하게된 셔먼호는 최대의 위기를 맞게되는데. 한편 불바다가 된 셔먼호 위에서는 백기를 들고 화염속을 헤치며 사력을 다해 강가로 책을 던지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토마스 선교사였습니다.

 

단 한권이라고 더 조선인들에게 당신의 말씀을 전하게 해주십시오. 그는 마지막 남은 한권의 성경책을 품안에 넣고 강물로 뛰어들었고 곧 조선군에게 생포되었습니다.

그의 처단은 즉시 집행됬고 그 임무를 맡은 조선 군사가 바로 박춘권 이라는 자였습니다. 박춘권이 칼을 뽑아들자 토마스는 급히 자기품에 들렸던 성경책을 꺼내어 웃으며서 그에게 내밀었고 그리고 두손을 모아 마지막 기도를 올렸습니다.
오..하나님... 이 사람이 자기의 하는일을 모르오니 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조선땅에 뿌린 복음의 씨앗이 헛되지 않게 하소서.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 과연 토마스의 기도는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그에게 성경을 받은 이들 중에 훗날 평양에 유력한 신앙 가문을 일으킨 이들이 많은데 박춘권은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석호정 만경대의 최취량은 평양교회를 창설한 인물로 지목되고 있습니다. 또한 그가 준 성경을 뜯어 벽지를 바른 영문주사 박영식의 집은 널다리교회의 예배처소가 되었다고 합니다.

비록 정식으로 조선땅을 밞아보지도 못한채 27살의 꽃다운 나이로 죽음을 당한 로버트 토마스선교사. 하지만 그의 죽음 뒤에야 비로소 조선땅에도 복음의 문이 열리게 되는데. 서툰 한국말 실력에 가진 것이라곤 한문으로 된 성경책 한권 뿐이었지만, 그가 뿌린 복음의 씨앗은 이 땅에 복음의 부흥을 위한 실로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이었던 것입니다.

약력
1840년 9월 7일 영국 웨일즈라드노주 라야다에서 회중교회 목사의 아들로 태어남
1857~1863년 5월 런던대학 뉴칼리지에서 학업
1863년 6월4일 고향인 하노버 교회에서 목사 안수(24세)
1863년 8월 런던선교회 파송선교사로 아내와 함께 중국 상해도착. 아내 캐롤라인 곧 병사
1865년 1~8월 청나라 해상 세관 통역으로 근무
1865년 9월 세관 사임. 1차 한국선교여행
13일 서해안 도착, 두달 반동안 선교활동.
서울 향해 떠나다 태풍 만나 구사일생. 만주 거쳐 북경으로 돌아감
1866년 8월9일 제너럴 셔먼호 동승, 2차 한국여행
1866년 9월2일경, '제너럴 셔먼호 사건'의 와중에 순교(27세)

 

 

이 땅에 와서 최초로 순교한 개신교 선교사 토마스 선교사

이 땅에 와서 최초로 순교한 개신교 선교사 토마스 선교사를 소개함으로 ... 이분은 1840년 9월에 영국의 웨일스 지방에서 태어났습니다.

목사님 아들로 태어났는데, 그가 신학교에 가면서부터 "나는 선교사가 되겠다. 선교사가 되겠다."

그래서 23살에 대학과 신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에, 런던 선교회의 파송을 받고 중국 상해에 선교사로 갑니다.
그런데 도착해서 얼마 있지 않아 그 사랑하는 아내가 아이를 가졌는데 아이가 유산이 되면서 아내도 균에 감염이 되어서 죽고 맙니다.

23살의 젊은 선교사로, 목사로 정말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준비하고 선교를 시작하기도 전에 제대로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아이도 죽고, 아내도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는 깊이 낙심하고 정말에 빠졌을 것입니다.

기록을 보면 한 1년 동안 손을 놓고 있었어요. 그런데 누구를 만났느냐 하면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온 천주교 신자를 만났는데, 조선의 대원군이 대표적인 쇄국 정책을 통하여서, 천주교를 탄압해서 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선이라는 나라에 대한 꿈을 가졌습니다. '내가 그곳에 이제는 복음을 들고 가서 우리 기독교 복음을 저들에게 전해야 되겠다.' 그때는 가톨릭 밖에 한국에 전해지지 않았을 때인데, 본인이 개신교 선교사로 한국에서 복음을 전하러 왔습니다.
그래서 1865년에 황해도에 와서 성경책을 잔뜩 싸 들고 와서 나눠주면서 그 섬에서 한국말을 배우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태풍으로 인해서 잠시 중국으로 돌아갔던 그가 기도하는 가운데 1866년 조선에 무역을 하러 가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그가 알게 되었고, 그들에게 부탁해서 그 배에 통역관으로 탔습니다.

성경 하나 들고 타가지고, 이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이제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으로 올라오는데, 기록에 따르면 1866년 8월 9일이라고 되어있어요. 이때 올라오는 그 배를 타고 평양에서 올라오는데 평양에서 관리가 나와서 배에 탔습니다.
"왜 배가 여기까지 올라왔습니까?" "본인은 미국 상선인데 조선과 무역을 하려 합니다." "우리는 다른 나라와 무역을 하지 않습니다. 돌아가십시오."
돌아가야 하는데 이 제너럴셔먼호가 가자고 버팁니다. 그래서 거기서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전투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배가 가지 않고 계속 거기서 평양 대동강 가에 머물러 있으니까 백성들이 와서 돌을 던지고 총을 쏘고 하는데 이 상선이 무장한 상선이었어요. 거기서 대포를 막 사격을 하고 총을 쏘니까 전투가 커졌습니다.

한참 전투한 뒤에 서해 썰물이 들어서 물이 싹 빠지면서 강물 수위가 낮아지니까 이 큰 배가 걸리고 말았습니다. 수심이 얕아져 가지고. 그러니까 평양 감사가 지시를 해서 작은 배 여럿을 묶어서 상류에서 그 안에다 나무를 넣고 불을 질러가지고 떠내려 보내가지고 이 제너럴셔먼호가 완전히 불덩이가 되어 타서 가라앉고 맙니다.
그래서 거기 타고 있던 선원이 다 나올 때 그 대동강 가에 있던 사람이 나오는 사람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그 배에서 나올 때 성경책을 한 움큼 쥐고 나와서 사람들에게 전해 줍니다. 그런데 박춘권이라는 사람이 와서 그에게 칼을 들었을 때 그분에게 그 성경을 전해 주었는데, 이 박춘권 이분이 칼로 쳐서 토마스 선교사를 죽입니다. 피를 흘리며 27살에 젊은 선교사가 한국 최초의 순교자가 됩니다. 1866년 9월 2일입니다.

그런데 죽이고 돌아가려다가 그가 자기의 죽기 전에 자기를 애타게 바라보며 전해 준 성경책이 뭔가하고 그 성경책을 들고 집에 가서 성경책을 읽다가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를 만나게 되었어요. 할렐루야!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토막 나서 죽임을 당하고 그곳에서 불을 질러 태워서 흔적 없이 사라졌지만, 그가 전한 성경이 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한 가정을 변화시켜서 그분은 나중에 교회의 기록을 보면 영수가 되었다고 그랬는데 요즘 말하면 안수집사쯤 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충성하는 교회일꾼이 되었습니다.
또한 그 토마스 선교사가 갖고 온 성경이 많은 기적을 나타냈는데 그 한 어린아이가 와서 성경책을 버린 걸 몇 권 주워가지고 집에 가져가서 그것을 뜯어서 벽지를 다 발랐어요. 그 집에 와서 자다보니 벽지 보고 읽다가 예수 믿게 되었습니다.

비록 대동강은 피로 물들었지만 그 순교의 피가 온 평양 시내를 주의 복음으로 뒤덮어서 평양에 큰 부흥 운동이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1932년 그가 순교한 자리 근처에 토마스 기념 교회를 짓게 되었고 그 평양 성문 앞에는 제너럴 셔면호의 밧줄을 승전기념으로 1945년 해방 때까지 걸어 놨다고 합니다.그런데 그 순교의 피가 온 평양을 뒤덮고 북한을 뒤덮어서 평양에 복음화되고 북한에 복음화되고 그 복음이 월남한 사람을 통하여서 남쪽에 더 확산되어 우리 대한민국이 지금 아시아 최대 기독교 국가로 변화가 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할렐루야!평양은 한때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까지 불리었고, 초대교구인 터툴리안은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이 되고 교회는 순교자의 피를 먹고 자란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토마스 선교사의 피 같은 수많은 순교자 피를 먹은 한국교회는 울창한 숲을 이루고 많은 열매를 맺는 아시아 최대의 기독교 국가가 되어서 복음을 세계만방에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죽었지만, 그 죽음이 이 같은 위대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 것입니다.

 

 

우리나라에 온 개신교 최초의 선교사이며 순교자는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Thomas, Robert Jermain :1840-1866)라는 분입니다. 영국에서 목사님의 아들로 태어난 토마스 선교사님은 1863년 런던선교회의 파송을 받아 상하이로 갔습니다. 그런데 캐럴라인 사모님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곧 병사하시고, 상해주재 책임자인 무어헤르 선교사와의 불화까지 겹쳐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청나라 해상세관의 통역으로 일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지푸라는 곳에서 대원군의 박해를 피해 중국에 와 있던 김자평 최선일이라는 천주교인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성경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일로 토마스 선교사님은 조선 선교를 결심합니다. 1865년 9월 서해안에 도착하여, 약 두 달 반 동안 인근 선진포, 석호정, 만경대 등을 돌며 한국말을 배우기도 하고 1백여 권의 성경을 나누어주기도 하면서 선교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던 중 해상에서 폭풍우를 만나 표류하다가 간신히 목숨을 건지고 1866년 1월 북경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듬해인 1866년 8월 스코틀랜드 성서공회 지푸지부의 후원을 받아 통역사 자격으로 미국 국적의 무장상선 제너럴 셔먼호에 승선하여 대동강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당시 조선은 거듭되는 외세 열강들의 침입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 또한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맞물려서 그 어느 때보다 외국인에 대한 감정이 나쁜 시기였습니다. 1866년 8월27일 평양의 한 포구에 정박한 셔먼호는 조선을 향해 강력하게 통상을 요구하며 조선의 군인 이현익을 억류하고 총과 포를 쏘아 사상자를 내는 등 강압적인 행동을 거듭했습니다. 그러다가 9월2일에 양각도의 모래톱에 배가 좌초되었는데, 이 때 격분한 조선의 군인들이 배를 공격하여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조선의 군인들이 배를 공격하자 배에서 탈출을 시도하던 토마스 선교사님도 이 때 물로 뛰어 내렸습니다. 그들은 분격한 군민들에 의해 결박되고 , 타살되어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했습니다. 1866년 9월 2일 토마스 선교사는 27세의 나이로 아직도 수많은 교회가 그의 죽음위에 세워졌던 평양의 대동강 가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도 복음의 말씀을 이 땅에 전하려 하였습니다.


그 때 토마스 선교사님을 죽인 병사 박춘권이란 사람이 후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서양 사람을 죽이는 중에 한사람을 죽인 것은 내가 지금 생각할수록 이상한 감이 들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에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슨 말을 한 후 붉은 베를 입힌 책을 가지고 웃으면서 나에게 받으라고 권하였다. 내가 죽이기는 하였으나 이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받아왔노라"


토마스 선교사님에게서 성경을 받은 이들 중에 많은 분들이 훗날 평양의 유력한 신앙인들이 되었습니다. 그를 죽였던 박춘권은 평양교회의 장로가 되었고, 장사포의 홍신길은 서가교회, 석호정 만경대의 최치량은 평양교회를 창립하였습니다. 받은 성경을 뜯어 벽지로 사용했던 영문주사 박영식은 자기 집을 예배처소로 내놓아 널다리교회를 세웠습니다.

복음을 알지 못하던 조선 땅은, 마치 어둠과 죽음의 그림자로 뒤덮여 온통 뼈로 가득차 있던 에스겔이 본 골짜기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 땅에 하나님은 에스겔과 같은 종을 보내셨습니다. 그의 손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게 하시고 마른 뼈들과 같던 이방인들에게 말씀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기까지 복음을 위해 헌신한 토마스 선교사님을 통해 조선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겔 37:10을 보면 에스겔이 뼈들을 향해 말씀을 대언할 때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더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한 사람이 하나님의 감동하심에 순종하여 이 땅을 향해 말씀을 대언하고 전한 결과 훗날 평양은 동양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리고 오늘 날 한국에 셀 수 없을만큼 수많은 복음의 열매들이 맺혀졌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님은 육신의 안전과 평안을 기꺼이 버리고 그리스도의 영이 인도하는 대로 순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육으로는 죽었으나 오늘도 영으로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을 때 많은 열매를 맺듯이 그리스도의 사람, 한 명의 복음을 위한 헌신적 열정과 죽음이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토마스 선교사님은 죽었지만 그의 신앙과 열정은 그가 전한 성경책과 복음을 통해 영원히 한국에 살아 있습니다.

수많은 선교사님들의 피로 세워진 우리나라 주님께 쓰임받는 나라가 되길 간절히 기도 합니다.<가져온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