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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및 신앙 서적

모험으로 나서는 믿음/ 마이클 프로스트, 앨런 허쉬

by 은총가득 2020. 9. 11.

                                          작가마이클 프로스트, 앨런 허쉬.

 

 

서론

 

아브라함, 광풍 속에서 예수님을 향해 걸어가는 베드로, 바울의 선교여행의 위대한 믿음의 모범은 모두 믿음의 발걸음으로부터 시작된다. 모혐의 여정을 나서는 성도의 발걸음을 성경은 신실이라고 한다. 이는 곧 믿음의 조상의 기초적 자질로 간주되었다.

 

믿음의 모험은 개인의 안락보다 가치있는 일이다. 교회는 그러한 가치를 실현하는 곳이지 안전한 곳이 아니다. 그럴싸한 종교 조달업이 아닌 교회의 본질을 회복해야한다. 이는 위험할 수 있으나 교회는 이 위험을 감수하며 실패의 가능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1장 성령님의 가장자리 – 다시 위험한 모험으로 돌아가기

 

소설가 DH로렌스의 제도적 교회에 대한 도전적 메시지를 통해서 신앙의 제도적 형식을 넘어서는 신선한 추진력을 발견할 수 있다. 히브리서는 믿음의 영웅들을 열거한다. 그들은 이러한 신선한 추진력을 유감없이 보여준 자들이다. 영적 모험을 상실한 그리스도인은 삶의 의미를 왜곡한 채 살게 되며, 무능력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영적 모험은 매일의 삶의 난관을 대하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살아가시듯 직면하는 것이다. 그러나 안전을 선호하다보면 이러한 모험의 기회를 발견하지 못한다. 우리는 안정성과 품위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안전이라고 오해하기 쉽다. 안전에 집착하면, 우리는 제자도의 여정에서 이탈하게 된다. 우리는 물질적 안전이라는 잘못된 기대에 안주하지 말고 예수님을 믿고 신뢰함으로써 밀려오는 사건들을 대응하며 우리의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용기는 미덕을 보존하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 용기가 없다면, 위기의 순간에 미덕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 종말은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맞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모험심을 가지고 나아가도록 인도한다. 아직과 이미 사이에서 선교의 경계성 앞에 위험과 모험은 반드시 필요하다. 모든 조직의 실패에는 ‘절박감의 결여’로 인한 불필요한 소모가 많다는 원인을 가지고 있다. 절박감은 불필요한 행동을 줄이게 하고 필요한 것에 집중할 수 있게 한다. 교회는 안전한 곳이 아니라 절박감과 모험이 필요한 곳이다. 제자도에는 이러한 경계성을 반영하는 대목이 자주 등장한다. 제자 공동체는 증인과 고난과 죽음이라는 개념이 결합된 그룹이다. 건강한 공동체는 위기의 순간에 사랑하며 증명하는 공동체로 위험을 감수하기 쉽게 이끌어 내는 곳이다.

 

 

제 2장 예수님께서 나를 흔드신다. – 친구가 동료 되는 곳

 

교회가 선교 대신 유지와 관리에 몰두하게 되면, 그 곳에서는 신자 개개인들을 위한 더욱 모험적인 형태의 제자도를 개발하기가 불가능해진다. 모험적 제자도가 만들어가는 공동체적 현상 ‘코뮤니타스’. 위험을 감수하거나 고차원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공동체 유기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개인의 플로우에서 공유된 플로우 - 교감적 언어사용을 경험하게 된다.

 

성경을 코뮤니타스의 개념에서 읽기 시작할 때 새로운 지경(진정한 선교적 교회)가 열린다. 우리는 아브라함, 사무엘, 엘리야, 삼손, 다윗, 예수 그리스도와 그 제자 및 바울의 생애 등을 통해서 코뮤니타스의 전형적인 예를 찾아볼 수 있다. 그리스도인은 나그네와 이방인의 마음 가짐으로 살아가야 한다. 신약성경의 마지막 9권의 책에서 다루듯이 순례의 1)출발과정 2)위험한 여정 3)바라던 나라에 안착 의 단계를 나아가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야 한다. 코뮤니타스의 삶의 흔적은 위기의 공동체의 현장에서 발견된다. 9.11테러부터 교회 캠프, 스포츠팀, 극단 동료, 오케스트라, 댄스동아리 및 군대 등에서 영적인 교제가 이루어질 행동을 할 때, 비로소 생기게 된다. 한 윙킹 서클이라는 집단의 사례처럼 어디서나 창조하고 바보가 되고 모든 것을 구원(의미있게 만드는)의 세 요소를 통해서 경계성 코뮤니타스를 발견할 수 있다. 이러한 모험의 영성을 간직하기 위해서 1) 모험을 문화에 깊이 새겨야 하며, 2)활력 있는 영웅 선정 제도를 개발하고(토착화) 3) 경계성 코뮤니타스를 의례화하는 작업(지속하기 위하여)이 필요하다. 일리노이주의 소망교회에서는 코뮤니타스를 개발하기 위한 노력을 진행해 왔는데, 이러한 일들은 인간 공동체에 더욱 생동감있는 발전을 주며, 사람들로부터 모임에 참여하고자 이끌림 받는 매력을 가지게 되었다.

 

 

제 3장 더 커친 광야로 나서는 여행 – 야성적 희망으로 두려움을 이겨내기

 

두려움은 모든 것의 장애물이 된다. 진정으로 유일한 혁명가는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는 사람[마틴 루터 킹]은 잃을 것이 없는 사람에게 두려움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두려움은 소유에 대한 것이다. 신앙생활은 객관화하기 어렵다. 객관화하기 위해서는 물 밖으로 나서는 물고기처럼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정말로 존재하신다는 사실에 우리의 인생을 거는 흥분되는 모험이다.

 

신앙은 도박처럼 이기거나 지는 것과 같이 모험적이다. 스캇 베이더세이는 문화와 신앙에서 두려움이 차지하는 비중에 대해서 말한다. 두려움의 경제학과 마케팅 속에서 살아가며, 신앙인 마저도 이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영화 ‘니모를 찾아서’에서 엄마의 편집증적인 보호 육아는 일상의 두려움을 잘 표현하고 있다. 두려움은 성장하고 배우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넘어야 하는 장벽과 같다. 탐구하며 위험을 감수할 수 있는 공간을 육아에 반영하여야 아이들이 두려움 많고 옹색한 사람이 아니라 포용력있고 관용적인 성인으로 성장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성경은 ‘주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선언한다. 경외심은 두려움이면서도 우리의 자유를 앗아가지 않는 유일한 것이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은 다른 것을 두려워하는 것과 구별된다. 하나님을 두려워 하는 것은 일반적 두려움처럼 비겁함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교회의 역할은 신앙인이 복음 안에서 용감한 삶을 살고 결론을 알 수 없는 삶을 유지하며 하나님의 모험에 동참하게 하는 것이다. 교회는 자기방어를 위한 기관이 아니며, 승리를 향한 모험을 하는 곳이다.

 

우리의 두려움보다 더 큰 전망은 예수님으로 인한 모험심과 생명으로 충만한 느낌으로 압도하게 한다. 예수님과의 동행은 삶에서 더 거친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이 여정을 선택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모든 여정의 동기이자 원동력은 사랑이다. 고린도전서 13장에 등장하는 것처럼 인간이 성숙한 인간 존재로 자라기 위해서 사랑해야 하며 사랑하기를 배워야 한다. 사랑을 배움으로써 성숙해지는 것은 위험을 감수함으로 유익이 있다. C.S. 루이스는 사랑의 비극적인 요소를 잘 포착하고 ‘사랑하는 것은 고통받는 것임을 설명한다.’ 우리가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거절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결국 사랑하고 버림받는 것이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것보다 더 낫고, 더더욱 인간적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고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깨어있는 교회는 구성원들에게 중산층의 안전함을 박차고 나와 선교적 사명에 동참하도록 명령할 것이다. 진정한 성경적 영성은 사회에 순응하여 휩쓸리는 태도가 아니다. 그러한 수동적인 삶의 유배지에서 깨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교회는 계속해서 문화에 끌려다니며 두려워하는 중산층 사람들을 위한 종교적 게토로 남을 수 밖에 없다. 우리의 영혼이 바로 그와 같은 기로에 처해있다.

 

모험의 교육적 측면에서 피터 드러커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사람들은 해마다 약 2가지의 실수를 저지른다고 했다. 사람은 실수를 통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닫는다. 그러나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 자세에서는 그러한 깨달음을 얻기가 어렵고, 나아가 두려움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기에 급급한 자세만 취하게 될 것이다. 위대한 교육가 쿠르트 한은 ‘탐험적 학습’을 통해 모험적 경험을 통한 학습 상황을 창출했다.( 1)자기발견의 수위성, 2) 실행 가능한 발상의 창출과 검증 3) 학습의 개인적이며 사회적인 책임 4) 공감과 보살핌 5) 성공과 실패로부터 배우기, 6)협력과 경쟁, 7)다양성과 포용성 인식, 8)창조세계로부터의 학습, 9)고독과 성찰, 10)섬김과 긍휼 ) 이에 저자는 4가지의 원리를 덧붙인다.( 1)선구자의 자세와 저항 정신을 장려하라. 2) 거룩한 불만을 일으키라 3) 전통주의의 전통으로 대체하라 4)실패를 통해 전진할 준비를 하라

 

교회는 이해관계의 수립의 끈을 만들어야 한다. ‘새로운 교회가 온다’에서 설명한 것처럼 대다수의 청중으로서만 존재하는 성도들은 자신의 신앙의 모험의식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어렵다. 그들은 청중이 아니라 출연진이다. 코뮤니타스 교회는 청중이 아니라 레퍼토리 극단이다. 승부의 책임을 갖는 이해관계자들로 성도가 스스로를 인식할 때 비로소 그들은 결과에 대가를 치르는 사람이 될 것이다.

 

배를 불태우라! (헤르난 코르테스)배수의 진과 같이 배를 불태우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돌아서지 않을 것에 대한 각오를 가지고 신앙생활과 삶에 나아가야 한다

 

 

제 4장 영웅의 여정 – 지어진 의도에 맞는 사람이 되기

 

패트릭의 아일랜드 선교는 골방과 작은 배 - (켈틱 선교 운동의 표어) 하나님 앞에서 홀로 있는 시간과 더불어 세상으로 나아가는 두 가지 개념이다. 켈트 선교사들은 파도와 바람에 배를 맡기고 해안선에 도착하면 복음을 전하는 모험을 행했다. 바울은 전도여행을 하면서 믿음으로 나서는 모험을 하는 모범이 된다. 로마 선교 여정은 혹독한 경계선 상에 있던 믿음의 모험이었다. 이는 기독교 선교의 모범이다. 바울의 여행을 보면 상대적으로 안정되고 복음안에서 기뻐하는 시간도 있었으며 사역의 동지애와 교회를 개척하고 양육하는 기간도 있었음을 본다. 그러나 바울은 안주하지 않고 위험과 모험을 감수 했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조셉 캠벨이라는 신화 연구와 신화 창조 분야 전문가로부터 스타워즈(조지루카스), 애들이 줄었어요,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언 킹, 토이 스토리, 라이언킹, 매드 맥스,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 반지의 제왕, 매트릭스, 타이타닉, 아바타, 스파이더맨, 배트맨 등의 영향을 주었고, 캠벨이 주장한 신화적 요소(1)평범한 세계, 2)모험을 요구받음, 3)요구를 거절, 4)조언자를 만남, 5)첫 문턱을 넘어섬, 6)시험, 동맹, 적, 7)접근, 8)시련, 9)보상 10)돌아오는 길, 11)부활하는 영웅, 12)영약을 가지고 돌아옴)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을 하셨을까? 우리의 의식 속에는 영웅적인 모험을 향한 갈망이 있다. 성경 인물 역시(바울, 모세, 이사야, 예레미야, 열두 제자) 병행되는 영웅적 모험의 요소가 등장한다. 캠벨 식의 분석에 따르면 예수님은 모든 인간이 바라는 영웅의 모델이다.

 

신화 창작. 신화를 통해서 우리는 자신과 관련지어 영웅적 삶의 태도를 묵상하려 한다. C.S.루이스는 신화가 영원한 승리를 이야기 하지 않음을 말한다. 끊임없이 악과 싸워야 하는 과정의 삶을 바라본다. 복음은 모험으로서 가지는 신화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영화에 나타난 코뮤니타스. 반지의 제왕에서 주인공과 친구들은 수없이 죽음과 직면하고 협력하고 악의 세력을 물리친다. 그들은 서로 쳐다보는 시간을 통해서 서로를 알고 처한 상황을 이해한다는 강한 동지애를 보여준다.(라이언 일병 구하기, 밴드 오브 브라더스, 레인맨, 프린세스 브라이드, 꿈의 구장, 마이티 덕, 오즈의 마법사, 파이트 클럽, 씬 레드라인 등 도 마찬가지다.) 단기선교와 청소년 선교 여행, 교회 개척도 마찬가지이다. 매일의 예배 이상으로 사도들의 가르침과 함께 살아내는 모험을 진행 할 때, 그들에게서 커뮤니타스가 형성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안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안전과 선교적 삶의 위험요소를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영웅이다. 이제 영웅이 되어라! 선교는 교회가 모험으로 나서는 가장 주요한 형태이다. 교회와 선교는 단절되면 안된다. 교회의 영웅적 모험이 회복되어야 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서에서 신앙과 선교적 실천이 직접적으로 연결된다고 보았다.

 

전면적으로 확장하기. 교회는 네 가지 주된 기능으로 선교를 포함해야한다.(제자도, 예배, 공동체, 선교)

 

선교적 매트릭스. 그리스도인은 교회 집단에 종속되어서는 안되고, 각자 하나님의 형상을 담고 있는 고유한 개인으로 인식해야 한다. 다음의 네 가지의 균형을 갖추어야 한다. 1) 내부-개인영역:제자도, 2)외부-개인 영역:동원, 3)외부-공동체 영역:사회참여, 4)내부-공동체 영역:코뮤니타스 이 네 가지 영역은 순차적으로 진행된다.

 

 

제 5장 위험 혐오증 극복하기 – 용기로부터 진리를 이끌어내기

 

성경은 대부분 위험과 혼란에 처해진 사람들에 의해 쓰여졌다.(아브라함, 요셉, 다윗, 욥, 요나, 룻, 예레미야, 베드로, 바울 등). 물론 평화로운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그 시대에는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이 자신들의 삶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위험과 경계성은 하나님의 백성의 신실성을 성장시키는 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달콤한 지점을 찾아서. 위험에 직면하고 위기에 적응하는 일은 생물학적 관점에서도 같은 맥락을 갖는다. 한 과학저널(혼돈의 가장자리)에서는 정적인 안정 상태를 오히려 죽음의 전조로 보고 있다. 교회에서의 혼돈을 통해서 교회의 방향성과 유연한 지도력의 본성을 회복하게 한다. 교회는 보수적인 조직으로 전반적으로 과거의 전통을 지키려 한다. 이는 곧 교회의 쇠퇴와 이어지게 된다. 교회는 혼돈의 경계선으로 나아감(선교)으로 이러한 위기를 극복해야 한다.

 

놀라운 위험 이야기. ‘사슬에 묶인 프로메테우스’라는 비극에 영감을 받은 피터 번스타인은 확률계산법을 통한 현대 보험과 경제학을 기술한다. 교회는 기이하고 무질서해 보이는 선교적 소명을 끌어안아야 한다. 그렇게 할 경우 잃어버릴 것을 더 염려하지만, 선교적 모험은 정작 교회의 존재 의미를 유지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

 

손실혐오증 진단.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하고자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요,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찾을 것이다.(마16:25) 예수님은 손실을 염려하는 인간의 성향을 직접적으로 다루신다. 사도 바울의 선교여행에서 위험을 대하는 태도는 자신이 아것도 잃을 것이 없다는 기본 전제에서부터 시작하며, 정말로 두려움에서 자유롭게 된다. ‘기독교 종교의 신화’(그레그 보이드)는 결혼서약처럼, 하나님에게 우리의 인생을 드린다는 첫 서약이지만, 평생을 지키는 것이다. 모험이 우리의 행동을 인도하고 선교가 교회의 다른 기능들을 조직하게 되면, 다른 기능들이 퇴화하지 않고 성장한다.

 

현대 사회의 위험 제거.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 사회’는 유익을 얻기 위하여 위험을 의도적으로 떠안는 오늘날 기술 문명을 기술한다. 그는 기술독재로 인한 국가의 위험을 정치적으로 보안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주장한다. 루디 라스무스 목사는 위험을 감수하는 목회(1/3 노숙자 교회 사역)을 감당하며, 땅콩 알레르기 경고가 있는 교회를 보며 당혹감을 갖았다. 맥매너스 목사는(코뿔소교회가 온다) 어린 아들에게 지붕에서 뛰어내리도록 권했다. 위험을 권함으로 도전정신을 키워줄 수 있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국가가 안전을 법제화 하는 사회를 살고 있다. 이러한 환경에서 위험 혐오증은 팽배할 수 밖에 없다. 이럴 수록 기독교 신앙은 위험을 이야기하고 위험을 도전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지도력과 위험 혐오증. 교회의 지도자들은 코뮤니타스의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 위험을 감수하는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균형 상태는 곧 죽음이다. 어항의 물고기보다 바다의 물고기가 위기에 직면했을 때 더 강인하다. 위험을 감수하는 교회로서 유연한 교회의 지도력으로 스트레스 관리법을 배우고 교회와 선교를 위한 혁신적인 자극제로 사용하도록, 위기를 기회로 변형시키는 능력이 필요하다.

 

위험 감수하기와 개인주의의 위험.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위험 사회 속 개인주의의 성장현상을 주목한다. 국가와 교회 등의 기관에서 기술문명으로 인한 위험이 개인의 역량으로는 한계가 있음을 시사한다. 국가의 기술문명의 메카니즘처럼, 교회의 지도자들은 프로그램을 작동시키는 것이 자신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회중에게 하달하는 방식의 목회는 성과에 최적화됨으로 인해, 개인을 억누르고 회중은 세상의 변화의 다양성과 창의성이 줄어들게 됨으로 신앙의 약화를 초래하게 된다. 미국의 사회학자 스티븐 링은 모든 사회에서 필수적으로 위험을 감수하는 엣지워크가 우리 사회를 새롭게 만들어가는 힘이라는 발상을 가져온다. 이는 제도권에 자연스럽고 유기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한다. 같은 맥락에서 이머징 교회가 교회의 엣지워크의 역할을 감당해왔으나, 기성 교회들은 이를 거부하고 비판하며, 자유주의 혹은 반동주의 성향이라는 혹평을 가했다. 그러나 ‘엣지워크’의 정신이 오늘날 기성교회에 반드시 필요하고 도전되어야만 한다. 코뮤니타스로서 집단적인 모험을 경험할 수록 회중은 집단적인 활동 속에서 서로를 위한 공동체와 지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리처드 파스케일은 선교적 교회를 위한 세가지 지침을 준다.(1. 가공하지말고 설계하라(프로그램을 가공하지말고 문화를 설계하라), 2. 지시하지 말고 발견하라(모험에 대해 열린 자세로 적응하라), 3. 전제하지 말고 해석하라(문제의 해결책을 진단이 아닌 고민하게 하라) 우리가 위험을 감수한다면 성령님께서 신선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제 6장 선교라는 촉매제 - 교회와 교회의 사명을 다르게 생각해보기

 

크리스 탐린과 매트 카터의 대학 캠퍼스 전도로 인해 오스틴 스톤 교회는 6년만에 5000명의 성도 출석이라는 예배 중심의 부흥이 있었다. 매트 카터는 부흥 중에 암진단을 받고 긴 휴가 기간에 더 본질적인 하나님, 인간의 죄, 십자가의 영성을 나누는 교회로서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 이 후 교회는 선교 운동가인 마이클 스튜어트의 지도를 받아 교회 초점을 선교 중심으로 바꾸어 빈민의 구제활동에 나섰다. 교회는 중산층 지역으로의 이전을 포기하고 구제가 필요한 곳으로 들어가 사역을 감당하게 되었다. 오스틴 스톤은 도시안에서의 선교적 운동에 앞장서는 대형교회가 되었다. 하나님의 선교와 하나님의 교회가 단절된 상태로 많은 교회들이 있다. 이것은 우리 시대의 기독교의 재앙이며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중대한 단절. 선교가 교회의 삶에서 벗어나 외부 용역이 되는 것은 비극이다(롤랜드 알렌, 1926) 선교단체의 집중적 공략은 중요한 업적을 이루었지만, 뜻하지 않게 교회와 선교의 분리라는 중대한 단절을 일으켰다.(YFC, CCC, 네비게이토) 기성교회의 턱밑에서 성장해온 선교단체들이 이제는 독립되어 교회와의 단절을 초래하게 되었고, 교회와 선교의 기능의 간극을 더 벌려놓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깡통따개가 정말로 깡통따개인가. ‘새로운 교회가 온다’에서 주장하듯이, 선교라는 제 기능을 상실한 교회는 더이상 교회라고 말하기 어렵다. 도대체 교회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 선교적 교회는 이 세상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선교를 중심으로 스스로를 조직하는 모든 교회를 말한다.

 

교회의 표지들. 선교적 교회는 교회의 본질을 위한 몸부림이다. 교회의 본질을 찾기 위해서 종교개혁 이후에 진정한 교회를 규명하기 위한 세가지 표지를 돌아볼 수 있다( 1)복음의 선포, 2)성례의 올바른 거행 3)교회 권징의 바른 집행). 최근 복음주의자 역시 교회의 바른 기능을 재정립하는데 15가지 이상의 기능을 포함하고 있으나, 본 책에서는 4가지 예배, 공동체, 제자도, 선교에 대한 정의를 살펴본다. 예배는 교회의 핵심이며 양보할 수 없는 기능이다. 모여서 드리는 예배 이상의 본질적인 삶의 예배를 돌아보아야 한다. 공동체 역시 진정한 예수 공동체, 코이노니아가 진행되는 코뮤니타스 공동체를 세워가야 한다. 제자도는 확실히 교회의 핵심 기능이다. 설교는 제자도를 위한 확실한 도구이다. 설교를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보아야 하며, 설교 자체를 목표로 두어서는 안된다. 마지막으러 선교는 넓은 범주에서 예수님의 주권 선언, 주권 증명 모두를 감당해야 한다. 이 교회의 네 기둥을 솔직하게 돌아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삶이 예배이자 진정한 공동체이자 제자도의 교육의 현장이었으며, 선교의 현장이었다.

 

촉매로서의 선교. 예배와 선교는 각각이 다른 세 가지 기능을 위한 촉매제의 역할을 한다.(공동체와 제자도는 별개의 문제로 예배와 선교에 연결되지는 않는 경향이 있다) 예배에 대한 이러한 촉매제의 역할은 설명할 필요없을 정도로 우리가 잘 인식하고 있다. 선교는 세가지 관점에서 촉매제의 역할을 설명할 수 있다.

 

1) 신학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은 그분의 선교라는 차원에서 인식된다. 하나님은 선교적이시다. 보내시고 보내재시는 분이다. 성부께서 성자를 보내시고, 성부와 성자는 성령을 보내신다. 삼위일체의 공동체에서 보내고 보내짐의 모습을 통해서 선교는 교회를 조직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미시오 데이)

 

2) 역사적/사회학적 관점으로서 교회는 탈기독교화 되는 교회에서 예배 공동체로서가 아니라 교회의 역할로서 접근해야 한다. 동원으로서 교회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선교하나님의 정신으로서 구도자들을 모아야 한다.

 

3) 실천적 관점으로 위의 두 가지 관점에서도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지만, 신자들은 자기 경험 이상의 선교적 관점은 인식하기 어렵다. 단기 선교나 봉사활동을 통해서 이러한 선교적교회 인식을 몸소 체험함으로서 받아들여야만 한다. 선교 없이는 제자가 될 수 없으며 선교 없이는 코뮤니타스를 이룰 수 없다. 또한 예배 역시 마찬가지이다. 물론 예배가 촉매제로서 더 큰 역할을 한다고 하며 선교의 촉매 역할을 무시하는 사람들도 혹 있지만, 이 네 가지의 기둥을 더 조화롭게 이루기 위해서 선교의 촉매제 역할을 돌아보아야만 한다. 교회가 선교의 소명을 끌어안을 때, 교회의 모든 영역에 연쇄작용이 일어날 것이다. 선교하시는 하나님으로, 복음의 바른 인식으로 신자들에게 다가오게 될 것이다.

 

 

제 7장 이웃 사랑의 모험 - 뛰어들라는 권유

 

캄보디아 프놈펜의 외곽 지역에 프놈펜 도심지의 빈민가들을 몰아 놓은 언동 마을. 아브라함 행 목사 가족은 이곳에 정착하여 교회를 세우고 다방면의 선교적 노력을 진행했다. 구제와 치료 보호, 의식주가 가능하게 하고 학교를 시작하고 교회를 개척하고 노동거리를 주었다. 이로 인해 언동마을은 개조되었고, 아이들은 건강해지며, 습지는 없어지고, 가난한 자들이 직업을 얻고 잃어버린 영혼들에게 믿음이 생기게 되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가난하고 모자란 이웃은 우리에게 장애가 아니라, 우리에게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를 확신한다는 표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그러나 복음주의 교회성장운동의 일률적인 전략은 위에서 말한 가공된 재료이다. 그 지역을 위한 선교적 관점과는 거리가 멀다고 할 수 있다.

 

전원도시의 노숙자. 미국 교회의 목회자들이 본인이 태어난 지역에서 목회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곳에서 목회를 하게 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이러한 경우 교회의 지역성을 배제하게 되며, 수박 겉핥기 식의 사역이 진행될 것이다. 선교적교회는 먼 곳으로 가서 사역하는 것이 아니고, 지금 있는 곳에 머물며 깊게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살라는 것이다. 위험한 교섭. 폴 히버트는 비기독교 지역에서 복음을 녹여내는 4가지 틀을 제시했다( 1)문화해석, 2)성경 주석과 해석적 가교, 3)비판적 응답, 4)새롭게 상황화된 관례들) 1) 문화해석 - 먼저 교회가 이웃과 이웃의 문화를 현상적으로 검토해야 한다. 이 일을 위해서 선교사 뿐 아니라 전체 기독교 공동체가 참여하여 특정한 문화 환경을 분석 보다는 매일 신앙을 살아가는 가운데 지역민들에게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집중하고 탐구하는 일을 해야 한다. 릭 워렌과 빌 하이벨스의 성장 모형을 보면 이러한 접근 방식이 자주 발견된다. 하지만 더 지속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2)성경 주석과 해석적 가교 - 말씀에서 말하는 바를 문화적인 이해가 가능하도록 재해석 할 필요가 있다. 3)비판적 응답 - 현지인들의 과거의 신앙적 틀에서의 비판을 듣고, 재평가를 하며 조율해 나가야 한다. 4) 새롭게 상황화된 관례들 - 한국에 복음이 들어올 때 술을 금지하는 상황적 해석과 관례가 있었던 것처럼, 상황에 맞는 새로운 관례를 세워 나갈 필요가 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복음의 홰손이 없도록 유의해야 한다. (예_제임스 선교사와 복음을 받아들인 현지 승려 - 그들에 대해서 매우 비판적인 시각이 있으나 승려들은 예수를 영접하고 가장 진지한 신앙을 가지게 되면서 밖에서보다 사찰 안에서 더 큰 선교적 영향력을 미치는 자들이 되었다) 선교적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혼합주의의 두려움이 있을 수 있다. 단지 우리의 삶에서 성경을 더욱 진지하게 고찰하고 성령님의 역사를 인정하고 나아가야 한다. 선교사들이여 집을 키워라! 이에 따라 새로운 문화화가 아닌 문화토착화의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보쉬는 상호문화화를 강조한다. 제국주의적 기독교와 식민지 공동체는 새로운 문화화의 상처를 주었다. 선교사들은 그 곳의 복음 전파를 하고, 현지화 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바울이 복음이 전파되고 현지화 되었을 때 그 지역을 떠났음을 유념해야 한다.

 

집으로 완전히 데려오기. 캄보디아 프놈펜 언동마을의 아브라함 행은 당국자들로부터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그의 섬김에 대한 오해도 있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기꺼이 마을의 가난을 끌어안고 위험을 감수했다. 텍사스의 극빈자(히스패닉, 무직자)들의 이동식주택단지를 반대하던 밥 볼드윈 부부는 자신의 이익(외곽지역의 여유로움)을 붙잡고 살아가다가 선교적교회를 향한 성령님의 부르심에 충격을 받고, 그 지역을 이동식주택단지로 만들고 커뮤니타스를 형성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주변의 부유한 사람들에게도 도전을 주어 그 지역을 살리는 일을 감당하게 되었다. 영국 런던 남부에서는 거리의 목회자들과 지역교회들의 연합으로 난봉꾼들과 술집주인들과의 투쟁 중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예수님의 희생, 교회의 은혜와 사랑, 자비와 평화를 감당하는 일을 하며 코뮤니타스를 일으키게 되었다. 교회가 이웃과 사회문제를 불편하게 생각하고 비판한 다는 것에 있다. 사회문제를 끌어안고 교회가 그 일을 자신의 일로 품기 시작할 때 교회는 진정한 코뮤니타스를 일으킬 기회를 가지게 된다.

 

무언가를 하려고 하지말고, 그냥 거기에 앉아라! 도시표현 운동(영국 기독교 사회 운동)의 줄리엣 킬핀은 커뮤니타스, 사회 운동을 위한 세가지 조언을 한다. ( 1)현장의 리듬에 귀를 기울여라. 2)이웃에게 헌신하라 3)눈덩이조사를 해보라(유지와 유력자들의 이야기를 통한 이웃을 향한 꿈의 재발견) 4)당신의 교회 건물을 없애라!(교회에 갇히지 마라) 5)당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초대에 응하라.) 우리가 선택한 살고 있는 지역을 깊이 돌아보면서 그리스도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실질적인 도움을 위하여 모험을 감수하는 것이 바로 코뮤니타스의 과정이다.

 

결론 - 끝의 시작

 

우리는 미래에 대한 불확신을 바라보며 모험이라 하며, 성령님의 역사를 믿는 자로서 그 모험을 감당할 수 있다. 모험은 모든 논의에 선행되어야만 한다. 성령님의 모험에 참여하지 못하고 위험을 회피하는 삶은 진정한 교회의 역할을 손상시키고, 증인이 되는 제자도의 본질까지 훼손시켜 왔다. 우리의 모험은 예수님께서 이땅에 오실 때까지 완성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미시오 데이 즉 선교하는 하나님이시다. 그원의 본성과 존재의 내재된 모습 속에 우리는 믿음의 모험을 통해서 천국의 실체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위대한 모험가이시자 영웅의 원형이시고 계시록의 주인공이자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따른 구원받은 백성들의 교회는 위험을 감당할 것이다. 기독교는 영적 모험이다. 그렇지 않으면 기독교가 아니며 우리는 회개해야 한다. 우리의 과제는 모험적인 선교와 제자도의 소명을 고백하게 한다.<Salvador>>

 

 

[이 책을 권합니다!]

모험으로 나서는 믿음

마이클 프로스트·앨런 허쉬

 

 

 

믿음은 모험이다. 모험하지 않고 믿음은 없다. 믿음을 가진 이라면 반드시 위험한 모험 속으로 자신을 던져야 한다. 믿음은 불가피하게 모험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 야곱, 모세, 히스기야, 열두 제자, 바울 등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사람들은 한 결 같이 믿음의 모험을 했다. 모험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며, 거짓된 것이다.

 

믿음 안에 모험이 불가피한 이유는 믿음은 타락한 세상의 문화를 거스르고, 하나님의 창조규칙을 깨뜨리는 죄악된 세상을 향하여 도전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와 같다. 만약 연어가 살아있다면 물을 거슬러 올라갈 것이고 죽었다면 물과 함께 떠내려갈 것이다. 이처럼 모험은 믿음의 핵심이자 원리다.

 

마이클 프로스트와 앨런 허쉬 공저자로 이루어진 이 책은 교회의 방향성과 교회가 끌어야할 참된 믿음이 무엇인지 잘 드러내 준다. 모험의 시작은 지금의 터전에서 터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안주하고 안일한 생각으로 편안하게 살아가려고 하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 저자는 이것을 ‘경계성’(26쪽)이라고 부른다. “경계성은 ... 위험, 소외, 방향감각 상실로 혹은 이것들이 결합하여 ... 만들어 진다.” 영국 선교학자인 스튜어트 머레이는 탈기독교국가를 7가지로 정의했는데 믿음의 모험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다수자에서 소수자로, ?정착민에서 거류자로, ?특권에서 다원성으로 ?통제에서 증언으로 ?관리에서 선교로 ?제도에서 운동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신화학자로 알려진 조셉 캠벨은 다양한 나라들의 신화들을 연구하면서 신화 속에 공통분모를 발견했다. 모두 12가지로 나누었다.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어떤 인물에게 모험을 요구받고, 여러 가지 위기와 어려움에 봉착하지만 결국 문제를 해결한다는 이야기다. 식상해 보이는 이 원리는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과 일치하며, 믿음의 모험을 떠나는 신자들의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해 준다. 결국 믿음은 모험이란 여정(旅程)을 통해 드러나며, 더욱 확고해 진다.

 

모험으로서의 믿음은 교회가 선교 중심이어야 함을 보여준다. 선교관이 아닌 촉매원리로서의 선교(269쪽)이어야 한다. 예수님은 선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해달라는 주기도문은 선교를 통해 완성된다. 교회는 ‘위대한 모험가이자 영웅의 원형이시고, 계시록의 흰말을 타는 자이시며, 용감한 구원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구원받은 백성들인 교회는 위대한 모험이 존재하며 믿음과 선교의 위험을 감수하는 장소’(325쪽)인 것이다.

 

모험으로 나서는 믿음

 

믿음은 불가피하게 모험을 요구한다. 모험 없는 믿음은 가짜다. 그리스도인은 타락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부름 받았다. 그리스도인은 생존(生存)만이 전부가 아니다. 저마다 생존방식이 존재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다르게 요구 받는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며, 하늘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거류자이며 모험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방식을 소유한다.

 

“하나님에 관한 더 깊은 지식과 경험에 들어서는 일은 분명 무한한 미지의 세계로 깊숙이 들어서는 모험과 같다.”는 앨런 허쉬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믿음이 모험.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 이 모든 이미지는 교회가 짊어지고 있는 운명이다. 교회의 머리시며, 그리스도인의 모범이신 예수는 그리스도인들이 행할 모험의 원형(原形)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의 생존방식과 삶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모험을 논하기 전에 먼저 신화 연구의 전문가인 조셉 캠벨에게 한 가지 이야기를 들어보자. 캠벨은 여러 나라의 신화들을 연구하면서 공통분모를 발견한다. 그는 이것을 ‘원질신화’(mono-myth)라고 부른다. 열두 단계는 이렇다.

 

1.평범한 세계. 2.모험을 요구받다. 3.요구를 거절하다. 4.조언자를 만나다. 5.첫 문턱을 넘어서다. 6.시험들. 동맹들. 적들. 7.접근. 8.시련. 9.보상. 10.돌아오는 길. 11.부활하는 영웅. 12.영약을 가지고 돌아온다.

 

좀 더 요약하면 부름-여행-귀향의 세 단계를 걸친다. 부름과 귀향은 원래의 세계다. 신화의 세계는 단지 신화일 뿐일까? 아닌 것 같다.

 

“사실 신화의 구조를 식별하면서 조셉 캠벨은 모든 위대한 이야기들이 드러내는 인간의 심리적 열망을 포착한 것이다. 이것은 구원을 소원하는 것으로, 뭔가 더 위대하게 되고, 궁극적으로 악에게 승리하는 건의 일부가 되는 일과 같은 것이다.”(172쪽)

 

신화 본질은 여행을 통해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예수의 구원사역과 전적으로 닮아있고, 구약과 신약의 믿음의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일치한다. 즉 캠벨의 신화 구조는 ‘영웅의 여정과 바울의 이야기, 모세를 부르신 일,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소명, 또는 열두 제자 이야기 사이에 놀라울 정도로 병행되는 구절들이 있다’(173쪽) 것이다.

 

믿음은 모험을 불가피하게 요구하고, 모험은 곧 선교다. 교회는 나그네이며, 여행자이다. 곧 되돌아갈 고향이 있다. 그러나 아직 갈 수 없다 소명을 이루지 못했다. 소명을 곧 모험이다. 믿음의 삶은 모험하는 것이며, 보내신 이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이 땅에서 안주하려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모험을 거부한 왕국을 향하여 거침없는 저주를 퍼부었던 이유는 믿음이 가진 모험이란 속성 때문이다.

 

“이러한 전복적인 왕국은 현상을 유지하려는 것을 타파하며, 영적인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완악한 마음들을 깨뜨리고, 정의를 주입한다. 낯선 땅의 순례자들과 같은 우리를 위대한 여정으로 부르셨다. 즉 위대한 모험가로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백성이 되도록 부르셨다.”

 

출애굽은 거짓된 하나님의 나라인 애굽에서 나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모세의 모험은 가짜왕 바로에게서 나와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곧 안정을 추구하며 또 다른 애굽이 되어 버린다. 현대 교회는 어떤가? 예수께서 가신 믿음의 모험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영적 평안을 육신적 평안으로 착각하여 안주하고 있지는 않는가? 프로그램을 돌리고, 전도 축제를 열면 진정한 교회가 될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6장에서 ‘교회와 교회의 사명을 다르게 생각해보기’란 부제를 달고 이야기를 끌어간다. 그곳에 매트 카터라는 리더의 이야기는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매트 카터와 크리스 톰린은 캠퍼스 젊은이들을 전도하게 위해 2003년에 교회를 개척한다. 톰린의 탁월한 찬양인도로 인해 교회는 활기가 넘친다. 6년 만에 경이로운 성장을 이루어 5500명에 이른다. 바로 이 때 매트 카터는 암 진단을 받는다. 카터는 몸을 회복하기 위해 긴 휴가를 떠난다. 휴가 도중 카터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찬양과 예배 중심의 교회 방식을 회개하고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고 싶어 한다. 그가 돌아와선 했던 사역은 찬양이 아니라 ‘도시의 빈곤한 사람들에게 다가’(242쪽)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이웃을 재발견 하는 일’(281쪽)이야 말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웃 사랑의 모험’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 7장이야말로 저자들이 말하고 싶은 핵심이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성장이 아니다. 좋은 프로그램으로 멋진 교양인을 만드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교회의 목적은 이웃을 재발견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이고,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선교적 삶은 이웃을 변혁시킨다. 이웃이 단순히 교회출석자들의 공동체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공의와 평화, 그리고 사랑의 지대에 합류한 것이다. 우리는 일단의 사람들이 선교의 모험과 위험을 감수할 때 그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마을로 더욱더 깊이 인도되리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진정한 이웃 사랑의 모험에 착수하도록 더더욱 준비되어야 한다.”(283쪽)

 

 

교회는 왜 존재하는가? 그것은 곧 예수는 왜 성육신하셨는가의 맥락 속에 존재한다. 선교는 믿음의 모험을 요구한다. 세상을 변혁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존재하는 바로 그곳에서 사랑으로 이웃을 품어야 한다. 이웃이 교회 성장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사랑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는 것이 맞다.

 

 

현재

한국 사회에서

교회는 전반적으로 큰

혼란을 겪고 있다. 사회에서 교회가

차지하는 위치와 역할이 불분명하게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서구에서

기독교 국가가

해체되면서 나타나던

현상과 비슷하게 한국 사회의

근대화와 함께 성장해온 한국교회도

사회의 뚜려솬 변화속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위기를 겪고 있다.

 

이 책은

서구에서 기독교국가가

해체되면서 서구 교회가 새로운

시대에 적응해야만 하는 상황속에서 쓴 책이다.

 

그러므로

논의의 배경은

한국교회와 조금 다를수 있으나

한국교회가 서구로 부터 직수입되어

비기독교적 환경에서 지금에 이르렀으므로

전반적으로 교회가 위기를 겪는 양상은 매우 흡사하다.

 

저자들은

교회가 이러한

위기 가운데 웅크린 채

이전의 종교형식만 답습하고

있어서는 안되며 모든 위험을 감수하며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선교'를 이행하는

것으로만 위기를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저자들의

깊은 고민과

폭넓은 경험이 녹아있는

이 책은 그렇게 새로운 시대에

위기를 겪고 있는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시금 신앙의 활력과 미랭의 전망을 되찾아 줄 것이라 기대된다.

 

 

당당하게 떠나자!

 

'모험으로 나서는 믿음'은 구원을 통해 믿음의 도약을 경험한 신자가 "그분께서 펼쳐나가시는 통치에 따르고자 기꺼이 모험으로 나서는"(22) 것이다. 모험은 미지의 세계를 향한 새로운 도전이다. 그 이면에는 불안과 염려, 두려움이라는 경계적 상황이 존재한다. 하지만, 이런 경계적 상황은 우리 안에 "거룩한 절박감"(63)을 만들며 주어진 삶에 더 집중하게 한다. 삶에 대한 집중은 삶에 대한 애착과 함께 존재의미를 발견케 한다. 모험을 통해 신자는 "상상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놀라운 하나님의 우주적 사업에 우리 자신이 동역자로 참여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22)

 

위험을 감수하며 불안을 끌어안고 사는 신자의 삶은 개인의 성숙 단계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들은 "더 나은 세상의 전망으로부터 감명을 받고 그 전망을 위해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서만 일어나는 '연대감'(81)을 형성"하고 공동체를 만든다. 이렇게 "모험적 사명과 경계적 제자도를 만들어가는 공동체"(81)를 저자는 '코뮤니타스'라 이름 붙인다. 여기 코뮤니타스에 교회의 본질 회복에 관한 열쇠가 있다. 거룩한 절박감을 통해 강한 연대감을 형성한 코뮤니스타는 "거룩하게 웅크리고 있던 것에서 하나님의 세계를 향한 대담한 모험"(82)을 떠나게 된다. 떠날 때에 회복이 있고, 떠날 때에 부흥이 있다. 혼자가 아닌 함께 모험을 떠나는 것이다.

 

모험을 단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영적야성을 키울 수 있는 광야에 나가보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는 힘을 잃었다. 이 땅에 소망을 갖지 말고 하늘 소망을 두라고 가르치고 설교했던 교회는 언행일치에 실패했다. 오히려, 땅에 소망을 두고, 땅에 관심을 갖고, 땅에 투자했다. 오래전 칼빈이 힐라리우스 주교의 말을 인용하며 했던 경고를 잊어버렸다. "벽을 사랑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언젠가는 무너질 벽을 영원한 것으로 착각하고, 초라한 옹벽을 짓고 그 안에 안주했다. 믿음의 선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과감히 모험에 뛰어들길 그 분은 원하셨지만 우리는 그 무엇도 드리지 않았다.

 

힐라리우스 주교는 지속적으로 이야기한다. "내 상각에, 오히려, 산, 삼림, 호수, 감옥, 그리고 골짜기가 더 안전합니다. 왜냐하면 선지자들은 이런 곳에 추방되어 살면서도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삶의 안주가 아닌 광야의 불안을 택했을 때, 믿음의 영웅들의 삶은 강력했다. 머리 둘곳 없이 아무런 소유가 없었지만 그들은 부유다. 내일 먹을 양식이 없었지만 그들은 풍족했다. 때문에, 평양대부흥을 기점으로 한 세기 동안 한국 땅을 강타한 강력한 부흥의 역사를 직접 체험하신 故 방지일 목사님 또한 마지막까지 자신의 삶을 광야로 내몰았으리라.

 

그레그 보이드의 말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의 삶을 그리스도께 드리겠다는 최초의 서약을 한다. 그러나 우리가 바치기로 서약한 실제의 삶은, 최초의 서약을 한 이후로 매 순간마다 살게 되는 삶이다." 삶을 드린다는 것은 지금의 안정과 평안을 포기하고, 불안한 요소와 위험이 난무하는 모험으로 뛰어드는 것이다. "그것은 날마다 죽는 삶이다. 하나님 나라와 유익을 위하여 계속해서 자신의 유익을 포기하는 삶이다."(219) 포기하고 떠나는 것이다. 내려놓고 떠나는 것이다. 그렇게 떠날 때 공동체 초점은 그 분의 뜻을 헤아리며, 공동체의 방향은 그 분의 뜻에 순종하게 된다.

 

열심히 일한 우리. 이제는 떠날 때이다. 준비되었는가? 모험으로 나서는 믿음이 있는가? 성도여 떠나자! 교회여 떠나자! 불안한 벽을 허물고 위험을 발판삼아 당당하게 모험을 떠나자

 

 

 

 

모험으로 나서는 믿음

마이클 프로스트․앨런 허쉬

 

믿음이란 무엇인가? 전통적인 견해는 교리적인 해설에 한정한다. 즉 인류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믿는 것.이 믿음이다. 단지 그것만으로 믿음을 정의할 수 있을까? 저자는 만약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불가피하게 ‘모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아브라함의 말씀을 좇아 자신의 터전을 버리고 떠나듯 우리도 믿음의 모험을 감해해야 한다. 믿음은 모험을 불가피하게 내포(內包)한다. 모험 없는 믿음은 없다. 왜일까? 예수 그리스도 믿음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지성과 감성, 의지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닮은 것이 믿음의 삶이다.

 

“아브라함은 순종의 행동으로 이에 응답했으며, 이것이 정말로 역사의 경로를 바꾸어놓았다. ... 사실 아브람을 부른 신적 존재는 그 시점까지의 경험상으로는 거대한 신비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브람은 엄청난 미지의 영역으로 향하는 불확실한 여정에 들어서도록 불러내진 것이었다.”(20쪽)

 

타락한 갈대아 우르에서 벗어나 새로운 믿음의 세대를 세우기 위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소명(召命, 불러 내다의 뜻)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서는 모험해야 한다. 안전하지만 미래가 없는 고향을 떠나, 불안전하지만 미래가 있는 믿음의 모험을 감행할 때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에 보냄을 받았다. 안전한 하늘을 버리고 미움과 배신,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는 목적을 가지고 성육신하셨다. 교회는 보이고 경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께서 행하신 그 길을 걸어야하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 나가야 한다.

 

“우리가 사명을 받은 교회로서 이처럼 위험한 세상에서 신실하게 살기 위해서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다. ... 용기는 두려움에 직면하여 옳고 선한 것을 행할 수 있는 역량이다.”(49쪽)

 

우리는 믿음의 모험을 감행하기보다 일상에 안주하려 한다. 누군가를 탓하며 내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수많은 핑계를 찾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일어나 가라고 말씀하신다. 두려움과 한계를 뛰어넘는 적이 가로막고 있지만 말씀에 순종할 때 그것들을 능히 이길 수 있다. 왜냐하면 상황은 말씀보다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기꺼이 모험을 통해 고통을 감내할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고통을 받는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우리가 대체로 사랑을 잘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험을 기피하는 것, 더 나아가 안전하고 싶은 욕망이 우리를 사랑으로부터 물러서게 만든다.”(139쪽)

 

사랑하면 힘이 생긴다. 죽어가는 영혼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볼 때 믿음의 모험이 가능하다. 시대를 변화 시키는 힘, 모험으로 나서는 믿음에 있다.

 

모험으로 나서는 믿음

 

믿음은 불가피하게 모험을 요구한다. 모험 없는 믿음은 가짜다. 그리스도인은 타락한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부름 받았다. 그리스도인은 생존(生存)만이 전부가 아니다. 저마다 생존방식이 존재하지만 그리스도인은 다르게 요구 받는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는 것이며, 하늘나라를 이 땅에 임하게 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서 거류자이며 모험의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방식을 소유한다.

 

“하나님에 관한 더 깊은 지식과 경험에 들어서는 일은 분명 무한한 미지의 세계로 깊숙이 들어서는 모험과 같다.”는 앨런 허쉬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믿음이 모험. 미지의 세계로의 여행. 이 모든 이미지는 교회가 짊어지고 있는 운명이다. 교회의 머리시며, 그리스도인의 모범이신 예수는 그리스도인들이 행할 모험의 원형(原形)이시다. 그리스도인들의 생존방식과 삶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모험을 논하기 전에 먼저 신화 연구의 전문가인 조셉 캠벨에게 한 가지 이야기를 들어보자. 캠벨은 여러 나라의 신화들을 연구하면서 공통분모를 발견한다. 그는 이것을 ‘원질신화’(mono-myth)라고 부른다. 열두 단계는 이렇다.

 

1.평범한 세계. 2.모험을 요구받다. 3.요구를 거절하다. 4.조언자를 만나다. 5.첫 문턱을 넘어서다. 6.시험들. 동맹들. 적들. 7.접근. 8.시련. 9.보상. 10.돌아오는 길. 11.부활하는 영웅. 12.영약을 가지고 돌아온다.

 

좀 더 요약하면 부름-여행-귀향의 세 단계를 걸친다. 부름과 귀향은 원래의 세계다. 신화의 세계는 단지 신화일 뿐일까? 아닌 것 같다.

 

“사실 신화의 구조를 식별하면서 조셉 캠벨은 모든 위대한 이야기들이 드러내는 인간의 심리적 열망을 포착한 것이다. 이것은 구원을 소원하는 것으로, 뭔가 더 위대하게 되고, 궁극적으로 악에게 승리하는 건의 일부가 되는 일과 같은 것이다.”(172쪽)

 

신화 본질은 여행을 통해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예수의 구원사역과 전적으로 닮아있고, 구약과 신약의 믿음의 사람들의 삶의 방식과 일치한다. 즉 캠벨의 신화 구조는 ‘영웅의 여정과 바울의 이야기, 모세를 부르신 일,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소명, 또는 열두 제자 이야기 사이에 놀라울 정도로 병행되는 구절들이 있다’(173쪽) 것이다.

 

믿음은 모험을 불가피하게 요구하고, 모험은 곧 선교다. 교회는 나그네이며, 여행자이다. 곧 되돌아갈 고향이 있다. 그러나 아직 갈 수 없다 소명을 이루지 못했다. 소명을 곧 모험이다. 믿음의 삶은 모험하는 것이며, 보내신 이의 뜻을 이루는 것이다. 이 땅에서 안주하려는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이 모험을 거부한 왕국을 향하여 거침없는 저주를 퍼부었던 이유는 믿음이 가진 모험이란 속성 때문이다.

 

“이러한 전복적인 왕국은 현상을 유지하려는 것을 타파하며, 영적인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완악한 마음들을 깨뜨리고, 정의를 주입한다. 낯선 땅의 순례자들과 같은 우리를 위대한 여정으로 부르셨다. 즉 위대한 모험가로서 하나님의 종말론적 백성이 되도록 부르셨다.”

 

출애굽은 거짓된 하나님의 나라인 애굽에서 나오는 것으로 시작된다. 모세의 모험은 가짜왕 바로에게서 나와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곧 안정을 추구하며 또 다른 애굽이 되어 버린다. 현대 교회는 어떤가? 예수께서 가신 믿음의 모험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영적 평안을 육신적 평안으로 착각하여 안주하고 있지는 않는가? 프로그램을 돌리고, 전도 축제를 열면 진정한 교회가 될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6장에서 ‘교회와 교회의 사명을 다르게 생각해보기’란 부제를 달고 이야기를 끌어간다. 그곳에 매트 카터라는 리더의 이야기는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매트 카터와 크리스 톰린은 캠퍼스 젊은이들을 전도하게 위해 2003년에 교회를 개척한다. 톰린의 탁월한 찬양인도로 인해 교회는 활기가 넘친다. 6년 만에 경이로운 성장을 이루어 5500명에 이른다. 바로 이 때 매트 카터는 암 진단을 받는다. 카터는 몸을 회복하기 위해 긴 휴가를 떠난다. 휴가 도중 카터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고 찬양과 예배 중심의 교회 방식을 회개하고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고 싶어 한다. 그가 돌아와선 했던 사역은 찬양이 아니라 ‘도시의 빈곤한 사람들에게 다가’(242쪽)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이웃을 재발견 하는 일’(281쪽)이야 말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다. ‘이웃 사랑의 모험’이란 제목을 달고 있는 7장이야말로 저자들이 말하고 싶은 핵심이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성장이 아니다. 좋은 프로그램으로 멋진 교양인을 만드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교회의 목적은 이웃을 재발견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이고, 그들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선교적 삶은 이웃을 변혁시킨다. 이웃이 단순히 교회출석자들의 공동체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공의와 평화, 그리고 사랑의 지대에 합류한 것이다. 우리는 일단의 사람들이 선교의 모험과 위험을 감수할 때 그들이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마을로 더욱더 깊이 인도되리라는 사실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는 진정한 이웃 사랑의 모험에 착수하도록 더더욱 준비되어야 한다.”(283쪽)

 

교회는 왜 존재하는가? 그것은 곧 예수는 왜 성육신하셨는가의 맥락 속에 존재한다. 선교는 믿음의 모험을 요구한다. 세상을 변혁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존재하는 바로 그곳에서 사랑으로 이웃을 품어야 한다. 이웃이 교회 성장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면 사랑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 가는 것이다.<가져온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