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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및 신앙 서적

'순교자, 배교자, 고백자

by 은총가득 2020. 10. 17.

'순교자, 배교자, 고백자 -

300년 기독교 박해 중의 배교한 그리스도인의 처리문제'에 이어서 '키프리안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합니다. 배교자들에 대한 논쟁의 정점에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키프리안과 노바티안이 있었습니다. 키프리안은 소위 온건파에 해당하는 입장을 벌였습니다만 그가 데키우스 황제의 박해 중에 순교를 택하지 않고 숨어서 교회를 살폈던 것은 인도자 없는 교회를 염려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후에 키프리안은 신앙인의 길을 계속 걸어간 결과로 참수형을 당하게 됩니다. 키프리안의 삶을 통하여 교회에서 인도자의 중요성에 대한 부분을 함께 생각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키프리안(Cyprian)

 


이교도 부모 밑에서 태어난 키프리안(200-258)은 육신의 일락과 명예로는 진정한 만족을 느끼지 못해 친구인 캐실리우스 장로의 설교를 자주 들으며 성경도 많이 읽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인이 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가 46세(246년)이던 어느 날 정원에 앉아서 성경을 읽다가 거듭나는 체험을 했다. 그때부터 그의 생활은 현저히 바뀌었다. 오직 주님만을 위하여 헌신하리라 결단하고 그의 평생을 주님께 드렸다.

 


그는 249년 초 카르타고(Carthage, 그리스인들은 칼케돈이라고 부름)의 감독으로 선출되었다. 키프리안은 동양 사람인 터툴리안을 굉장히 존경하여 그를 항상 ‘주(主, The Master)’라고 불렀다. 키프리안은 터툴리안 예찬론자로 그의 글을 열심히 연구해 수사학에 익숙하여 그의 논적(論敵)들을 쉽게 이겼다. 그의 글들은 당대 최고의 기독교 작품들에 속하고, 그는 정열적인 터툴리안과 달리 온건하고 친절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키프리안은 데키우스의 박해 직전에 감독이 되었으며, 박해 때에는 숨어 다니면서 교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의 신앙을 의심했다. 후에 타락한 자들의 회복 문제를 다룰 때 어떤 사역자는 ‘로마 교회는 박해 중에 감독을 잃었는데, 이에 대해 키프리안의 견해는 어떠한지’ 문의하는 편지를 썼다.

 


키프리안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카르타고 지역의 감독 회의를 소집했다. 감독 회의에서 ‘신앙을 버린 자들에게는 엄한 벌을 내리고, 로마의 신들에게 제사하거나 황제의 신상에 경배하지 않고 박해를 피하기 위해 배교증명서를 뇌물로 산 사람들은 조건 없이 교회로 받아들이기’로 아주 쉽게 결정하였다. 또한 배교한 사람이라도 진심으로 회개하였을 때에는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되, 그들의 회개가 진심이라는 것이 증명될 때에 한하여 허락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처리하는 것은 감독들이지 ‘고백자들’이 아니라고 결의했다. 이로써 논쟁은 멎었지만, 감독 회의의 결의에 반대하는 이들도 있어서 교회의 분열은 얼마 동안 지속되었다.

 


키프리안은 이후 발레리안 황제 치하의 박해 때 새로운 총독에 의해 검거되었고, 로마 신들에게 희생제를 드리지 않는다고 참수형을 당한다. 그는 심문이나 처형을 당할 때 신앙인답게 행동하고 순교함으로써 자신의 믿음과 인격의 고매함을 빛나게 하였다.

 


갈레리우스(Galerius): 그(신들을 섬기는) 일을 재고하라.
키프리안: 당신의 그러한 요청을 재고하십시오. 이것은 재고할 필요도 없는 단순한 문제입니다.
갈레리우스: 로마의 신들과 그들에 대한 신성한 의식들의 반대자로 자청하고 나선, 신성 모독자인 그대의 생명은 너무 길었다. 그대는 악질적인 범죄의 기수였기에 우리는 그대를 본보기로 삼아 그대와 사귄 자들에게 교훈을 주고자 한다. 우리는 키프리안이 참수되는 것을 기뻐한다.
키프리안: 하나님께 감사하나이다.

 


258년 9월 14일, 수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부장이 일격에 키프리안의 목을 베었다. 그때 죽음을 각오하고 모여든 성도들이 다함께 함성을 질렀다.

 

“우리도 키프리안과 함께 죽기를 원한다!”

 


“… 또 내가 보니 예수의 증거와 하나님의 말씀을 인하여 목 베임을 받은 자의 영혼들…이 살아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천년 동안 왕노릇 하니”(계 20:4)

 


데키우스의 박해 때 키프리안은 자신이 순교함으로써 개인적인 명예를 얻는 것보다 살아서 성도들을 돌보아야 할 사명이 남아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지도자로서의 자신의 입장을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자신의 행위를 비겁하고 믿음 없는 행위라고 비난할 것도 충분히 예견했다. 그러나 그는 ‘지금 내가 순교한다면 남은 성도들은 지도자 없는 상황에서 더욱 방황하고 약해질 것이다’고 생각하여, 훗날 자신이 받을 모욕과 비난을 감수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감독과 고백자

 


노바티안은 배교자들은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때 키프리안의 권위가 문제시되었다. 키프리안에 대한 반대는 노바티안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서도 제기되었다. 사람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하여 고통을 당한 카르타고의 다른 ‘고백자들’이 키프리안보다 더 권위가 있다고 보았다. 그로 인해 ‘고백자들’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져서, 그들이 친구와 친척들에게 사면을 남발하는 부작용이 생기고 감독들의 권위가 상대적으로 경시되었다. 이에 대해 키프리안은 ‘고백자들’의 사면 추천을 존중하지만 사면권은 감독들에게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키프리안은 교회의 하나 됨을 대단히 중요하게 보고, 교회의 분열을 가장 심각한 문제로 보았다.

 


“가지가 나무에서 부러지면 싹을 틔울 수 없으며, 시내가 근원에서 끊어지면 말라버립니다. … 그리스도의 교회를 떠나는 사람은 그리스도의 상급을 받을 수 없습니다. … 그렇게 탄생된 교회는 사탄의 교회를 만듭니다. … 그들은 교회 밖에서 모이면서 마치 그들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것처럼 꾸미고 있습니다.”

 


키프리안은 ‘고백자들’의 행동이 교회가 하나 됨을 위협했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을 배격하고, 타락한 자들의 문제를 해결할 감독 대회를 개최해 인도자의 권위를 세워 분열된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고자 했다.

 


“여러분은 교회 안에 인도자가 있으며, 인도자 안에 교회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 누구라도 인도자와 함께 있지 않으면 그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키프리안은 251년 <교회의 일치에 대하여>라는 선언서를 낭독했는데, 이는 교회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의 교리는 천 년 이상 교회의 규범으로 남아 큰 영향을 미쳤다.

 


교회 안에 감독 제도를 확립하기 위하여 열정적으로 활동한 키프리안은 진정 서방(라틴) 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요, 신학자이며 저술가였고, 영광스런 순교자였다. 무엇보다도 그는 깊은 신앙과 인격에서 우러나온 관심과 사랑으로 양떼들을 열심히 보살핀 목자로 기억되고 있다.

'순교자,고백자,배교자 - 300년 기독교박해 중의 배교한 그리스도인의 처리문제'에 대해서 이번 포스팅에서 다루려고 합니다. 300년 동안 로마의 기독교 박해가 이루어지면서 순교로 주님을 따른 사람도 있었지만 상황에 따라 배교한 사람, 배교했지만 후에 돌이킨 사람 등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데키우스 황제의 강력한 기독교 박해 이후에 배교한 그리스도인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논쟁이 시작됩니다.




고난과 교회의 성장

온갖 잔혹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로마 전국 각처에서 계속하여 자라났다. 사회적 위치나 나이를 불문하고 성도들은 자신들을 피로 사신 주님을 배반하고 믿음을 버리기보다는 차라리 생명을 바치기로 결심하고 순교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오히려 온갖 고난과 핍박 속에서 하늘에만 소망을 둔 순교자들의 거룩한 믿음은 복음의 불꽃에 기름을 붓듯 그들의 신앙을 더욱 뜨겁게 연단시키고 고양시켰다. 부활과 영생의 약속을 굳게 믿으며, 영원한 하늘에 소망을 두고 복음 앞에 전진해 나간 순교자들의 삶은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믿음이 얼마나 놀라운지를 보여 주었다.




오랜 박해가 외형적으로는 교회를 무너뜨릴 것처럼 보였지만, 내적으로는 교회가 정결하고 아름다운 그리스도의 신부로 단장되도록 만들어 주었다. 또한 박해는 성도들을 먼 지방에까지 흩어지게 하였지만, 그것이 결과적으로는 복음의 확산을 가져왔다. 특별히 핍박과 고난이 오히려 기독교를 성장시키는 요인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 시대에 안일하게 사는 성도들에게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순교자들, 고백자들, 배교자들

313년에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합법적인 종교로 공인하고, 392년에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國敎)로 선포된 후부터 오랫동안 박해를 받아오던 기독교는 번영의 시대를 맞이했다. 이처럼 기독교가 자유를 맞이한 것은 오랜 박해에도 불구하고 생명까지 잃어가면서 끝까지 믿음을 지킨 믿음의 씨가 열매를 맺은 것이다.




데키우스 황제 이전까지는 당국에 잡혀가 자기 신앙을 부인하거나 포기하지 않으면 순교자가 되었다. 데키우스 이후 핍박을 이기지 못해 황제나 이방 신 앞에 무릎을 꿇은 기독교인들은 배교자가 되었다. 배교자들은 주로 세 부류였다. 첫째는 실제로 우상들에게 희생제를 드린 자들, 둘째는 신들의 제단에 향을 피운 자들, 셋째는 배교 행위를 하지 않았지만 희생제를 드렸다는 증서를 받은 자들이었다. 그런데 데키우스 황제의 칙령을 따랐던, 신앙이 연약한 배교자들은 박해가 끝난 후 다시 예배에 참석하기를 소원했다.



배교자들의 처리 문제



약 300년 동안의 기독교 박해 속에서 순교자도 있었지만, 주님을 부인하고 타협하는 배교자(Apostacy)들도 많이 나타났다. 이들은 박해의 종식 후 교회 안에서 또 다른 문제거리가 되었다. ‘믿음을 버렸던 배교자들을 받아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교회는 내적 분쟁을 겪게 되었다. 엄격파는 배교자들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고, 온건파들은 일정 기간이 지나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데키우스 황제의 핍박은 짧았지만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신앙을 버린 자들에게는 ‘배교자(Apostate)’ 또는 ‘변절자(Lapsed)’라는 칭호가 붙여졌는데, 문제는 타락의 정도와 사정이 달랐기 때문에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배교자들 중에는 용서받을 수 없는 파렴치한 자들도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넘어지고 배교하여 동정 받을 수 있는 자들도 많았다. 물론 황제의 칙령이 발표되자마자 앞을 다투어 배교한 자들과 기독교인들을 고발하여 자신의 목숨을 구한 자들에게는 동정의 여지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부모 형제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배교한 자들과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거짓으로 배교 증명서를 구입한 자들, 한때 배교했지만 곧 크게 회개한 후 다시 신앙생활을 한 자들까지 배교자로 단죄하기는 곤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떤 이들은 ‘고백자들’(데키우스의 박해와 고문을 받고도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야말로 배교자들 가운데 누가 다시 교회의 구성원으로 회복될 것인가를 결정할 권위를 가졌다고 주장하며, 이 문제의 처리를 ‘고백자들’에게 일임해야 한다고 하였다.



키프리안과 노바티안



북아프리카 지방의 일부 고백자들은 자신들이 그 문제를 해결할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며 일부 배교자들을 교회로 귀환시켰다. 그러자 많은 성도들이 크게 반발했다. 성도들은 고백자들과 감독들이 배교자들을 지나치게 용서한다고 불만을 표하면서 배교자들을 엄중하게 처벌하라고 요구하였다. 한편 교회의 감독들은 그러한 문제는 개인적인 입장에서 해결할 수 없으며 교회들이 회의를 열어서 결정해야 정당하고 공평하고, 또한 일률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 문제를 둘러싼 논쟁에서 두 사람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키프리안(Cyprian)과 노바티안(Novatian, 소아시아 브루기아 출생으로 구원받기 전에는 철학자였다)이다. 교회의 감독들이 모여서 회의한 결과, 카르타고의 감독인 키프리안과 로마의 장로인 노바티안에게 이 문제를 맡기기로 했다. 그런데 키프리안과 노바티안은 서로 견해가 달랐다. 키프리안은 변절자들을 선별하여 구제해야 할 자들은 구제하고, 변절자들이 진심으로 회개하면 다른 절차 없이 그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노바티안은 그 방법이 변절자들에게 지나치게 관대하여 죄를 해결해야 할 교회가 그들의 죄를 나눠 갖는 것으로 보고 반대했다.




노바티안은 <사도적 전통>이라는 저서를 통해 순수한 믿음과 사도적 전통을 보존하려고 애썼던 로마인 장로 히폴리투스(Hippolytus, 170-235, 이레니우스의 제자로 티버 강에서 순교 당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노바티안을 좇던 이들은 순결한 삶을 살아 사람들은 그들을 ‘순결한, 정결한’을 뜻하는 ‘카타리안(Cathari)’이라고 불렀다. 후대에 그들을 침례교 개혁자들이었다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어떤 교회사가들은 노바티안의 중심에 명예욕이 숨어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노바티안의 강경론이 안디옥교회에서는 환영을 받았지만, 서방(라틴) 교회와 키프리안은 노바티안의 주장을 강력히 반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