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로마 제국
로마 제국은 아우구스투스가 황제 지배 체제 혹은 원수정(principatus)을 사실상 시작한 기원전 27년부터 몰락까지의 로마를 일컫는다. 로마 제정 시대의 종식은 395년 동서 로마의 분할, 476년 서로마 제국 멸망, 1453년 비잔티움 제국 멸망 등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다.
로마 제국은 지중해 동부의 헬레니즘 문화권과 이집트, 유대, 서부의 옛 카르타고, 히스파니아, 갈리아 등의 기존 영토에 이어 브리타니아와 라인 강 서쪽의 게르마니아, 그리스 북쪽의 다키아까지 판도를 넓혔다. 이러한 패권주의는 로마 제국에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로마 제국의 문화를 고대 지중해 세계에 널리 퍼뜨려, 로마 제국의 건축, 법, 정치,종교 등이 전해지게 되었다.
정치[편집]
황제[편집]
황제의 권력(imperium)은 이론상 황제가 가진 '호민관 특권'(potestas tribunicia)과 '대행 집정관 권한'(imperium proconsulare)에 따른 것이었다.[1] 호민관 특권(공화정 시대 호민관에게 부여되는 권한)은 황제 개인과 그 지위를 신성 불가침으로 규정하였으며, 정부에 대한 통치권을 부여하였다.[2] 대행 집정관 권한(공화정 시대의 총독 역할을 맡던 대행 집정관의 권한)을 통해 황제는 로마군 통수권을 가지게 된다. 황제는 공화정 시대에는 원로원과 민회의 몫이었던 전쟁 선언, 조약 비준, 외교 협상 등의 외교권도 가졌으며[3], 원로원 의원 임명권 등 과거 감찰관이 맡던 여러 권한을 행사하기도 하였다.[4] 게다가 황제는 종교 조직을 통제하였으며, 황제는 늘 대제사장(pontifex maximus)이며 네 가지 주요 사제단의 일원이었다.[3] 제정 초기에 이러한 여러 권력은 명확하게 구분되었으나 나중에는 그 구분이 사라졌으며, 황제권은 입헌적이기보단 군주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5]
사실 황제권의 주요 기반은 군대였다. 황제 금고에서 봉급을 받았던 군단 병사들은 해마다 황제에 대한 충성 서약(sacramentum)을 했다.[6] 황제가 죽으면 위기 상황이 닥치기도 했다. 규칙상으로는 원로원이 새 황제를 선출해야 했지만, 대부분의 황제는 자신이 후계자를(보통 자신의 혈족) 지명하였다. 새 황제는 정치를 안정시키기 위해 신속히 황제권을 인수해야 했다. 근위대와 군단의 충성을 얻지 못하면 황제는 권좌를 지킬 수 없었다. 이들의 충성을 얻기 위해 여러 황제는 이들에게 군대 포상(donativum)을 지급하였다.
제정 이후에도 로마의 민회는 존속하였으나 실권은 모두 원로원으로 넘어갔으며, 원로원의 결의(senatus consultum)는 법적인 효력이 있었다.[7]
이론상 황제는 원로원과 동등한 정부 기관이었지만, 원로원의 실권은 거의 없었고 주로 공화정의 탈을 쓴 제정을 위장하기 위한 기구에 불과하였다.
대부분의 황제는 오래된 정치 기구인 원로원을 존중했지만, 이를 우습게 보는 황제들도 있었다. 원로원 회의시 황제는 두 집정관 사이에 앉아[8] 회의 주재자처럼 행세하였다. 서열이 높은 의원이 낮은 의원보다 먼저 발언하는데, 황제는 언제든지 발언할 수 있었다.[8] 3세기에 이르면 원로원은 실권은 전혀 없는 명예직, 또는 시의원 정도로 격하되고 만다.
역사[편집]
아우구스투스 (기원전 27년–서기 14년)[편집]
악티움 해전은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패배로 끝났다. 로마의 유일한 최고 권력자가 된 옥타비아누스는 군사, 재정, 정치 전반에 걸친 대규모 개혁에 착수하였다. 기원전 31년 안토니우스를 제거한 옥타비아누스는 원로원에 의해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뒤를 이어 종신 독재관직에 올랐다.
옥타비아누스는 내전 당시 제거된 귀족들의 직위를 지방 출신 관리들로 충원하였다. 또한 이들이 원로원으로 진출할 수 있는 길도 열어주었다. 기원전 29년, 옥타비아누스는 감찰관에 선출되었다. 기원전 27년에 옥타비아누스는 내전이 끝났으므로 자신에게 위임된 비정규 특권을 원로원과 로마 시민에게 반납하겠노라 선언하였다.[9] 이로써 로마는 다시 이전의 공화정 시절의 정치 체제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다. 로마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자"를 뜻하는 칭호인 '아우구스투스'를 수여한다.
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여전히 집정관이었고, 원로원은 아우구스투스가 갖고 있는 금화, 은화 발행권을 되찾아 올만한 힘이 없었다. 또한 직접 속주를 다스리고 군대를 이끌지는 않았지만, 아우구스투스는 여전히 군대의 높은 지지를 얻고 있었다. 또한 아우구스투스의 후원에 힘입어 출세한 많은 지지자, 피호민, 또 그가 가진 어마어마한 부는 로마의 그 누구와도 비교할 바가 되지 못했다.
원로원은 전과 다름없는 위엄과 권한을 지닌 듯했으나 실권은 없었다. 아우구스투스는 실질적으로 군사와 재정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특히 원로원 의원직을 자기 마음대로 임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원로원을 전통과 여론을 대변하는 기관으로서 존중했고, 원로원에 정책 자문을 구했다. 마찬가지로 그는 정무관을 임명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지만, 원로원을 존중해 원로원 의원과 기사 계급으로 이루어진 특별 위원회가 법무관과 집정관을 뽑게 했고, 켄투리아회는 이를 자동적으로 승인케 하였다.
이전 속주들은 원로원이 통제했으나, 편입한 지 얼마 안 되는 그 밖의 속주들은 황제가 통제했다. 황제는 그가 통제하는 속주에 군대를 주둔시켰고 속주 총독직에는 원로원 의원뿐만 아니라 기사 계급도 임명했다. 속주는 직접세와 간접세를 로마에 바쳤으나 기본적으로는 각각 자체의 민회와 시 의회, 관리를 거느린 나라(Civitas)를 단위로 자치가 이루어졌다. 속주에 파견된 관리의 수준이 높아졌고 감독이 강화되었으며 평화가 정착되어 더 나아졌고 로마 시민권을 받으면서 자치 도시로 승격되었다.
이러한 평화에 대해 많은 사람이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가문을 숭배함으로써 감사를 표시했다. 그러나 그의 실질적인 권력기반은 바로 그에게 개인적인 충성을 서약한 군대였다. 군대는 군단·보조부대·근위대·해군으로 이루어졌다. 아우구스투스 치세에 황실 근위대의 병사는 대개 이탈리아인이었으나, 많은 군단과 거의 모든 보조부대의 병사는 주로 황제가 다스리는 서부 속주 출신이었는데 이러한 추세는 점점 더 증가했다.[모호한 표현] 그러나 군단은 입대하는 날로, 보조부대는 제대하는 날로 시민권을 얻었고[모호한 표현], 더구나 보조부대에서 제대한 병사들은 종종 그들이 주둔했던 속주에 정착했으므로 이는 제국 전역을 로마화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는 많은 지역을 정복했으나 로마화가 비교적 쉬운 지역만을 속주로 병합해 도로를 건설하고 역참(驛站)제도를 시행한 반면, 로마화가 어려운 지역은 위성국가(예:아르메니아 왕국)로 만들어서 방어에 따르는 비용을 줄였다. 그러나 영토를 확장하는 더 쉬운 방법으로 전쟁보다는 위성국가를 만든 뒤 속주로 병합하는 경우(예:카파도키아, 트라키아 왕국 등)도 있었다.
그러나 로마에서는 제위 계승의 원칙이 없었기 때문에 아우구스투스는 일찍부터 후계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 군대는 부자상속에 정통성을 두었으므로 그는 왕조를 세우려 했으나 그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가까운 친척들도 그보다 먼저 죽었다. 결국 그는 어쩔 수 없이 티베리우스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지명하고 호민관의 권한을 주었다. 서기 14년 아우구스투스가 죽은 뒤 티베리우스가 자동적으로 제위에 올랐다.
티베리우스에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까지의 역사 (14년–235년)[편집]
티베리우스(재위 14년~37년)는 변방을 보호하고, 국가의 행정 조직을 강화하였으며, 원로원의 귀족들과 밀착되어 있던 민회를 폐지하여 하층민의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후계자인 게르마니쿠스가 암살[10] 당하자 티베리우스가 이 사건에 연루되었고, 이는 로마 시민들로부터 배척받게 되었다. 그가 죽자 친척인 가이우스 카이사르, 즉 칼리굴라(재위 37년 ~ 41년)가 그 뒤를 이었다. 그러나 칼리굴라는 원로원을 모욕하며 낭비를 일삼는 등 과대망상적인 폭군이 되어 결국은 암살당했다. 칼리굴라의 숙부로 그 다음 황제가 된 클라우디우스(재위 41년 ~ 54년)는 정부의 중앙집권화를 크게 진척시켰고 대외팽창에 많은 관심을 보여 브리타니아를 합병했으며 서부 속주들의 로마화를 촉진시켰다. 그는 전제 정치를 해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 재무관리를 강화하고 재판 제도를 개혁했다.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은 16세밖에 안된 의붓아들 네로(재위 54년 ~ 68년)였다. 네로는 가족을 비롯해 여러 사람들을 살해하였고, 로마 대화재를 일으켰으며, 그 죄를 기독교 신도들에게 돌려 그들을 박해했지만 반란이 일어나자 자살했다.
네로가 죽은 뒤 내란이 벌어졌고, 이 내란의 마지막 승리자인 베스파시아누스(재위 69년 ~ 79년)와 두 아들이 플라비우스 왕조(69년 ~ 96년)를 이루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내란으로 약해진 변경수비를 강화하고 재정을 튼튼하게 했으며 원로원에 대해 정중하지만 단호한 태도를 보이면서 원로원을 행정관 배출 기구로만 취급했다. 그의 아들 티투스(재위 79년 ~ 81년)는 많은 인기를 누렸으나 얼마 안되어 죽었고, 뒤이어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재위 81년 ~ 96년)가 제위에 올랐다. 그는 유능하지만 고압적인 인물로서 군대의 충성을 확보하고 제국의 복지를 증진시켰다. 그러나 그의 전제로 말미암은 불만 때문에 96년 암살당함으로써 플라비우스 왕조는 막을 내렸다. 플라비우스 왕조는 변경 주둔군을 그들의 출신 속주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배치했고, 군단을 일정한 장소에 주둔시켜 변경 주둔군과 비슷한 성격을 부여했다. 이 군대로 그들은 브리타니아에서 지배 영역을 넓히고 라인 강 유역을 되찾았으며, 실패로 끝났으나 도나우 강 지역도 회복하려 시도했고 동쪽 변방도 강화했다.
도미티아누스를 암살한 자들은 군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마르쿠스 코케이우스 네르바(재위 96년 ~ 98년)를 황제로 추대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후계자로 지목할 아들이 없었고, 군대의 인망을 얻을 만한 군사적 경험이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군인인 마르쿠스 울피우스 트라야누스(재위 98년 ~ 117년)를 양자로 삼아 후계자로 세웠다. 속주 출신의 첫 황제인 트라야누스는 법규를 준수하고 겸손해 인민과 군대 모두에게서 인기를 얻었으며, 제국 전체의 복지를 향상시키기 위해 필요하다면 원로원까지도 거리낌없이 무시하면서 독단적인 결정을 내렸다. 그의 복지 정책 중 하나는 알리멘타(alimenta)로, 먹고 살 능력이 없는 아이들에게 돈을 지급하는 제도였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도나우 강 지역(다키아)과 동쪽 변경을 평정하였고, 북으로는 라인 강 유역과 브리타니아를 점령하였다. 그러나 그는 중동의 파르티아 왕국을 정벌하다가 죽었다.
그의 뒤를 이은 사람은 그의 가장 가까운 친척인 푸블리우스 아일리우스 하드리아누스(재위 117년 ~ 138년)였다. 그는 영토 팽창에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해 변경수비 강화에 치중했다. 그는 속주를 지킬 주둔군을 그 속주 자체에서 충원했고 레기온과 주둔군의 차이를 없앴으며, 군대를 감독하기 위해 자주 몸소 시찰을 다녔다. 한편 군단이 이처럼 주둔군과 다름없어지자 기동작전을 위해 새로운 부대가 필요하게 되었는데, 이 부대는 많은 경우 제국 주변의 이민족으로 충원되었다. 하드리아누스는 민사에서도 업적을 남겼다. 그의 치세 때 관료제가 정착되었는데, 그의 법률적 업적 특히 "영구 고시록"(법무관의 고시에 따라 해석되는 법)의 법전화는 현저한 것이었다. 또 새로운 형식의 라틴 시민권을 창설해 이 권리를 얻은 도시의 모든 지방 원로원 의원에게 로마 시민권을 주어 로마 원로원의 많은 성원이 속주의 귀족으로 보충되었다. 아들이 없었던 그는 136년 티투스 아우렐리우스 안토니누스 피우스를 새로이 양자로 삼았다. 안토니누스 또한 처의 조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와 베루스의 아들 루키우스 베루스를 양자로 삼았다.
하드리아누스가 죽은 뒤 제위에 오른 안토니누스 피우스(재위 138년 ~ 161년) 때 로마 제국은 세계주의의 성격을 뚜렷하게 띠면서 조용한 번영을 누렸으나 동시에 변경지역이 이민족에 의해 잦은 침략을 당하고, 내부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위험스러운 징조를 보였다.
그의 뒤를 이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재위: 161년~180년)는 루키우스 베루스를 공동 황제로 지명해 하드리아누스의 뜻에 충실히 따랐으나 이는 제국의 동서 분리를 예고하는 것이었다. 더구나 그의 치세에는 이민족이 강력하게 침략해왔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제국 동쪽 변경에 밀어닥친 위험은 무마시켰다. 그러나 게르만 족의 도나우 강 지역 침입은 동부에서 벌어진 반란과 함께 오랫동안 아우렐리우스를 괴롭혔다. 그는 게르만 족을 진압하는 도중에 죽었고, 뒤를 이어 황제가 된 그의 아들 콤모두스(재위 180년 ~ 192년)는 무능하고 변덕스러우며 쾌락만 추구하다가 암살당했다.
192년 12월 31일, 콤모두스가 암살당한 뒤 벌어진 내란에서 도나우 강 주둔군이 193년에 추대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마지막 승리를 거두었다(197년). 트리폴리 출신인 그는 동부인과 자신의 세력기반인 군대를 우대한 반면 이탈리아인과 원로원을 무시했다. 그는 군대를 증강하고 병사의 봉급을 인상하며 상여금을 많이 주어 군대를 특권계급으로 만들었다. 또 그는 관료제를 강화해 중앙권력을 강화함으로써 관료층인 에퀴테스를 우대하는 동시에 지방자치를 더욱 압박했다. 이러한 조치로 지출이 크게 늘어나자 그는 이탈리아에도 세금을 물렸다. 그의 황제권은 사실상 군대에 의존해 있었으며, 세습에서 황제의 정통성을 찾으려 한 그는 두 아들을 후계자로 지명했다.
211년, 그가 죽자 큰 아들 카라칼라(재위 211년 ~ 217년)는 아버지의 정책을 그대로 따랐으나 재정이 계속 궁핍해져 악성 인플레를 낳았다. 그는 또한 제국의 거의 모든 주민에게 시민권을 확대해 제국의 통합을 강화했으나, 동시에 시민권의 가치를 줄이고 군대 충원을 훨씬 더 어렵게 만들었다. 그는 동방정복을 꿈꾸고 원정을 나갔다가 부하인 마르쿠스 오펠리우스 마크리누스의 지령을 받은 자객에게 암살당했다.
이어 마크리누스가 황제에 올랐으나 군대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곧 세베루스 가문의 반란으로 218년 살해당했다. 그 뒤 황제가 된 세베루스 가문의 바시아누스는 그가 모시던 신의 이름을 딴 엘라가발루스로 더 잘 알려져 있다. 14세였던 그는 로마인에게 낯선 신을 광적으로 숭배하고 지나친 낭비를 했기 때문에 결국 미움을 사 222년에 살해당했고, 뒤를 이은 세베루스 알렉산데르 황제도 235년 살해당한다. 이로써 세베루스 왕조는 끊어졌다.
제국의 분열 (235년–395년)[편집]
3세기의 위기는 235년에서 284년까지의 로마 제국의 붕괴와 쇠퇴 현상을 일컫는다. 이 기간 동안 로마 제국내에서 25명의 군사 황제가 난립했고, 제국은 군사, 정치, 경제 분야에서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 시대는 디오클레티아누스(재위 284년 ~ 305년)의 집권과 함께 막을 내렸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근본적인 문제는 여전히 남아있었고, 이는 결국 고대 서양 세계의 붕괴를 유발하게 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거대한 제국을 한번에 통치할 수 없다고 판단하였다. 285년 디오클레티아누스는 막시미아누스를 부제(Caesar)로 삼았다가 이듬해 바로 정제(Augustus) 승격시킨다.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제국 동방의 문제를 관할하는 동안 막시미아누스는 제국 서방을 책임지는 형태였다. 293년 두 명의 정제 외에 두 명의 부제를 더 두어 사두정치 체제를 이루었는데, 이러한 정치적인 체제를 테트라키 (사두정치 체제.Tetrarchia)라고 한다.
테트라키는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의 죽음과 함께 붕괴되었고, 콘스탄티우스의 군대는 즉시 그의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대제를 정제로 옹립하였다. 이후 연속적으로 일어난 내전을 종식시킨 콘스탄티누스는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기독교를 공인하였다. 321년에는 "존엄한 태양의 날에는 모든 재판관과 시민 그리고 기술자들은 쉬어야한다"며 일요일 휴업령을 내렸다. 330년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비잔티움을 로마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정하였다. 337년, 그가 죽자 비잔티움은‘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의 콘스탄티노플로 개명되었다. 361년 율리아누스가 황위에 올랐다.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에 박해를 가하였으며 신플라톤 철학과 미트라교에 의한 이교의 부흥과 개혁을 기도하였다. 율리아누스는 또한 페르시아의 샤푸르 2세와 전쟁을 벌였으며, 전쟁에서 큰 부상을 입고 363년 죽었다. 그러자 요비아누스가 군대에 의하여 황제로 추대되었다. 황제가 된 뒤, 샤푸르 2세와 로마군의 무사귀환을 조건으로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대가로 297년 갈레리우스에 의해 로마령이 된 싱가라(지금의 이라크 신자르)와 니시비스(지금의 터키 누시이빈), 아미다 등의 도시와 티그리스강 동쪽의 로마 영토 전부를 양도하였다. 요비아누스는 기독교의 권한을 회복시켜 주었으나, 364년 사망하였다.
요비아누스가 죽자, 발렌티니아누스 1세가 정제로 추대되었고, 가까운 친척인 발렌스가 그를 도와 공동 황제가 되었다. 365년 장군 프로코피우스는 이에 불복하여 콘스탄티노플에서 자신을 황제로 선포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367년 발렌스에 의하여 진압되었다. 367년 8살의 그라티아누스는 발렌티니아누스 1세의 명으로 제국 서부의 공동 황제에 추대되었다. 374년 발렌티니아누스 1세는 게르만 족에 대해 군사적인 압박을 가하다 죽었다. 16세의 그라티아누스는 단독으로 황제가 되었다. 그러나 군대는 그의 어린 이복 동생인 발렌티니아누스 2세를 서부 로마의 공동 황제로 즉위시켰고, 그라티아누스는 이에 복종했다.
당시 제국의 골치거리는 훈족(흉노족)의 침입이었다. 훈족(흉노족)은 동고트족과 서고트족을 압박해왔고 376년 동고트족의 에르마나리크왕은 훈족[흉노족]의 아틸라와 맞서 싸우다가 죽었다. 서고트족의 족장 아타나리크는 훈족(흉노)에 쫓겨 발렌스에게 트라키아로 이주해 달라고 청원하였고 발렌스는 이를 수락하였다. 그러나 트라키아의 총독인 루피키누스는 황제의 명령을 거절하고 서고트족을 탄압하였고 이에 반기를 든 서고트족과의 전투에서 패했다. 서고트족과 모든 트라키아의 고트족, 여기에 훈족(흉노족)까지 가세하여 로마를 압박하자 로마는 전면전에 돌입했다.
378년 봄 발렌스는 서방황제 그라티아누스가 증원군을 보낸다고 하자 이를 믿고 발칸 반도로 진군하였다. 발렌스는 초기에 아드리아노폴리스 근처의 마리차 강변에서 상당한 규모의 고트족 군대를 물리치고 진군했으나 서방에서의 지원군의 도착이 늦어졌다. 서방황제 그라티아누스는 지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대규모 전투를 하지 말라고 요청했으나 발렌스는 적을 과소 평가하고 공격주장을 받아들여 고트족과 전면전을 벌였다. 378년 8월 9일 벌어진 아드리아노폴리스 전투는 로마군의 완패로 끝났다. 이 격렬한 전투에서 발렌스는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고 역사가 암미아누스 마르켈리누스는 이 전투에서 로마군의 3분의 2가 괴멸했다고 추정하였다. 이 전투의 패배로 노련한 병사들과 관료들이 죽었고, 제국의 통치력에 상당한 문제를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다. 그라티아누스는 동부의 황제로 379년 테오도시우스 1세를 지명했다.
383년 마그누스 막시무스가 브리타니아에서 그곳의 군단에 의해 황제로 추대되었고 갈리아로 건너왔다. 그라티아누스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도망하려다 살해당했다. 이로써 12살의 발렌티니아누스 2세만이 서방의 정제로서 남게 되었다. 막시무스는 테오도시우스 1세와 발렌티니아누스 2세에게 정식적으로 인정을 받고자 했으나 실패하였다. 388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막시무스에 대한 원정을 개시하여 전쟁에서 승리한 후 그를 사형에 처하였다. 392년 발렌티니아누스 2세가 살해당하고 그 이후에 아르보가스테스가 에우게니우스를 황제로 지명하였다. 그러나 동방 황제인 테오도시우스 1세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서방을 침공하여 아르보가스테스와 에우게니우스를 전사시켰다. 이로써 테오도시우스 1세는 로마 제국 전역을 통치하게 되었다. 392년 기독교를 국교로 삼아 이교도를 압박하고 신전령을 몰수하였으며, 393년에는 올림피아 경기를 금지시켰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는 죽으면서 자신의 두 아들인 아르카디우스와 호노리우스에게 제국을 양분하여 물려주었다. 로마 제국은 이로써 두 개의 나라로 완전히 분리되었으며 다시는 통합되지 않았다.
서로마 제국의 쇠퇴 (395년–476년)[
395년 이후, 분리된 서로마 제국의 황제는 허울 뿐인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으며, 대신 군벌의 지도자들이 제국의 실질적인 통치자가 되었다. 한편 서로마 제국에서 게르만족의 영향력이 증대되자, 서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는 게르만족 용병들을 단순한 이민족 군대로 취급하지 않고 로마 제국의 정규군으로 편입시켰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를 장악한 오도아케르는 로마 황제의 직위를 포기하고 대신 스스로 이탈리아의 왕을 자처하였다. 제국은 명맥을 유지할 수는 있게 되었으나 이는 오래가지 못했고 476년 결국 멸망하고 말았다.[11] 이 사건으로 고대 로마는 완전히 멸망하고 말았다.
오도아케르는 이탈리아를 장악하고 제국의 기장을 동로마 제국의 황제인 제논에게 보냈다. 제논은 곧 두 대표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하나는 일단 오도아케르를 이탈리아의 군주로서 인정한다는 사절이었고, 다른 하나는 율리우스 네포스에게 보내어 황제 복위를 보장해 주었다. 그러나 네포스가 죽자 제논은 달마티아에 대한 지배권이 동로마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오도아케르는 달마티아를 공략하였고, 뒤이어 동고트의 왕 테오도릭과도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로마의 붕괴 요인으로는 많은 의견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원인은 군사적인 요인에서 찾을 수 있으며 결정적으로 게르만 이주민들의 반란이 로마 붕괴의 직접적인 요인이 되었다.
동로마 제국 (476년-1453년)[편집]
서로마 제국이 붕괴할 무렵인 5세기에, 경제적으로 더 부유했던 동로마 제국은 파괴된 제국을 복구하였다. 6세기 중반, 유스티니아누스 1세 치세의 동로마 제국은 (비잔티움 제국으로도 불린다.) 동고트 왕국으로부터 이탈리아와 일리리아를 빼앗고 옛 영토를 일부분 회복하였으며, 반달족으로부터는 북아프리카를, 서고트족으로부터는 히스파니아를 되찾았다. 동로마 제국의 히스파니아 지배는 오래가지 못했으나, 북아프리카는 약 1세기 간, 이탈리아는 5세기 간, 일리리아는 거의 천년 간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610년대로 접어들면서 동로마에서 예전의 로마적인 모습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헤라클리우스 황제는 제국내에서 그리스 문화를 널리 보급하였으며, 특히 그리스어를 정부의 공식 언어로 지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에 비해 라틴 문화는 상대적으로 위축되었다. 결국 610년대 이후로, 동로마 제국의 문화는 그리스 문화의 영향력에 들어갔으며, 이는 후세의 역사가들이 동로마를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명칭으로 부르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제국 스스로 이러한 이름으로 스스로를 칭하지는 않았으며, 여전히 자신들이 로마 제국의 정통성을 잇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겼다.
1204년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를 함락시키자, 동로마 제국은 그 명맥이 끊어졌다. 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역사가 단절되고, 영토 또한 라틴 제국을 위시한 가톨릭 세력의 침공으로 대부분
상실하였다. 1261년 미카일 8세 팔라이올로고스는 가톨릭 세력을 몰아내었지만, 이는 불완전한 회복이었으며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과 위상은 이후로 되찾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잔티움 제국은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당할 때인 1453년까지 스스로를 로마 제국이라 불렀다. 1453년 비잔티움 제국은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으로 결국 멸망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의 정복자인 메메드 2세는 스스로를 로마 제국의 황제(Caesar of Rome / Kayser-i Rum)라 일컬었으나, 대체적으로 로마 제국의 마지막 황제는 콘스탄티누스 11세로 여겨진다. 또한 그리스인들은 로마 제국의 멸망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할 당시가 아니라,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한 1453년이라고 말한다.
AD 397 년 카르타고 종교 회의란?
1. 어떤 사람들은 기독교를 비난할 때에 기독교에서 사용하는 성경이 콘스탄틴 황제가 정치적인 목적으로 선택되었다고 비난합니다. 그들은 이러한 근거로 정경으로 선택된 신구약 성경 66권의 순수성에 대해서 의문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신구약 성경이 정경으로 체택된 자세한 과정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정경의 범위에 대한 결정은 어떤 개인이나 어떤 회의에서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정경의 범위를 결정하는 일은 오래 전부터 교회에서 거룩한 책들로 인정 받아 온 책들을, 후에 교회가 인정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졌습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신구약 66권이 기독교에서 정경으로 인정받게 된 것은 레기우스와 카르타고 회의 때였습니다.
2. 구약 39권의 정경 인정: 90년 얌니야 회의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A.D. 90년에 얌니야에서 열린 얌니야 회의 때에 우리가 가진 구약 39권을 권위 있는 성경으로 수용했습니다.
3. 신약 27권을 포함한 신구약 성경을 정경으로 인정한 과정
나머지 신약 성경은 이때부터 약 200년이 지난 후에(397년) 정경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 과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신약 성경 27권은 주로 A.D. 50-100년의 50년 동안에 기록되었습니다. 신약 27권은 대부분 기록된 후에 즉시 교회에서 중요한 문서로 간주되어 읽혀졌습니다. 이러한 책들은 처음부터 다른 문헌들보다 높은 가치와 권위를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지역과 개인에 따라 어떤 책은 보다 더 존중되었고, 또 어떤 책은 그 정경성을 의심 받기도 했습니다.
오리겐이나 유세비우스 등 영향력 있는 교부들은 이 문서들을 다음과 같은 두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1) 호모루구메나: 교회에서 이미 거룩한 책으로 인정받아 사용된 책들
2) 안티레고메나: 어느 정도 정경성에 이의가 있어서 논쟁 중인 책들
사람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대략적으로 호모로구메나에는 사복음서, 바울서신, 베드로전서, 요한일서, 사도행전, 요한계시록 등이 포함되었고, 안티레고메나에는 히브리서, 베드로후서, 야고보서, 요한이.삼서 그리고 신약 외경 등이 포함 되어 있었습니다. 후에 신약 외경은 '노다'라는 이름으로 따로 분류되었는데, 이는 정경성에 있어서 외경이 다른 안티고메나들과 어느 정도 차이가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 신약 27권에 대한 교회 지도자들의 증언들과 정경 형성 과정
- 로마의 클레멘스(AD 96년경)
로마의 클레멘스는 로마 주교로 있을 때에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냈습니다(제1클레멘스로 알려짐). 이 편지에서 그는 마태복음, 로마서, 고린도전서, 그리고 히브리서에 대해 거듭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 마르시온(140년경)
영지주의 이단자였던 마르시온은 누가복음과 바울서신 중에서 10편만을 정경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는 구약의 하나님을 부정하고 구약과 관계된 성경을 정경에서 제외시켰습니다. 이로 인해 기독교회는 정경 결정에 대한 필요성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 헤르마스(150년경)
그는 매우 정평있는 헤르마스 목자서의 기록자로, 마태복음, 에베소서, 히브리서, 야고보서 특히 요한계시록을 정경으로 인정했습니다.
- 이레니우스(40-203년경)
그는 청년 시절에 서머나의 폴리킵과 교분이 있었으며, 후에 리용의 주교가 되었습니다. 그는 사복음서, 사도행전, 베드로전서, 요한1서, 빌레몬서를 제외한 바울의 모든 편지와 요한계시록을 성경으로 인정했습니다.
- 무라토리 정경(172년경)
이 단편 문서는 1740년 밀란의 암브로시우스 도서관에서 이탈리아인 무라토리가 발견했습니다. 삭제된 앞 부분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무라토리 정경은 베드로전.후서, 야고보서, 히브리서를 제외한 모든 신약 성경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 고대 라틴어역 성경
이 책에는 것은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그리고 테르톨리아누스시대 이전에 첨가된 히브리서를 제외한 모든 신약 성경들을 정경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 터툴리안(150-222년경)
터툴리안은 사복음서, 13편의 바울서신, 사도행전, 베드로전서, 요한1서, 유다서, 요한계시록에 대해서 증언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히브리서의 기록자는 바나바라고 하면서 이를 성경에 넣지 않았습니다.
- 키프리아누스(200-258년경)
카르타고 주교인 키푸리아누스는 터툴리안의 견해를 따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빌레몬서, 야고보서, 요한 2.3서, 유다서는 인용하지 않았습니다.
- 라오디게아 종교 회의(A.D.363)
동서교회는 A.D.4세기 중엽부터 정경 확립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었던 키릴은 교인들에게 성경목록을 가르치면서 계시록을 제외한 신약 성경을 정경으로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A.D.363년 라오디게아 종교 회의에서는 이러한 신약 26권을 정경으로 채택하게 되었습니다.
- 히에로니무스(340-420년경)
히에로미무스는 라틴어 불가타역의 뛰어난 번역자이며 명성있는 학자였습니다. 그 역시 지금 우리가 소유한 신약 정경 모두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그는 바울에 의해 히브리서가 기록되었음을 인정했고, 야고보서와 베드로후서가 어떻게 정경으로 인정될 있는 지에 대해 설명했습니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정경론에 있어서 최상의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 어거스틴(Augustine)(354-430년):
히에로니무스와는 달리 정경에 대한 그의 견해는 모호했습니다. 그는 문제시되었던 7권의 책을 모두 정경으로 수락했지만, 그는 대체로 외경을 포함한 폭넓은 경전관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이러한 정경관은 후에 로마 가톨릭교회의 구약 경전 확립에 기여했습니였다.
- 카르타고 제3차 교회회의(397년)
지금과 같은 신약 27권을 정경으로 인정한 것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아다나시우스의 역할이 컸습니다. 그는 376년 경에 교구에 있는 교회들에게 부활절 서신을 보내면서 지금의 신약 27권을 정경으로 추천했습니다. 당시에 콘스탄틴 황제는 정경으로 된 책 50권을 요구했고, 아다나시우스는 그 요구를 따라 정경을 만들기 위해서 그 동안 교회에서 널리 인정 받아온 책들을 선별하는 작업에 착수했습니다. 그는 신중하게 자료들을 조사한 결과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인정을 받아 온 책들의 범위를 확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가 선정한 신약의 정경 목록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신약 27권의 목록과 같습니다. 그리고 레기우스 회의(393)와 카르타고 제3차 교회회의(397년)는 이러한 책들을 정경으로 확정했습니다. 카르타고 회의에서 규정된 사항 중의 하나는 교회 안에서는 오직 '정경으로 인정된 책'만 읽혀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후에 이것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27권의 목록이 되었습니다.
4. 정경 결정은 어떤 개인이나 교회 회의에서 독단적으로 결정된 일이 아닙니다. 정경 결정은 특별한 책들이 먼저 교회 안에서 거룩한 책으로 수용되었고, 후에 교회 회의에서 이를 인정하는 자연스러운 흐름 속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교회회의에서 정경의 한계를 결정하는 데 참고한 요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1) 이 책이 그 동안 교회에서 보편적으로 거룩한 책으로 인정을 받아 왔는가?
2) 이 책이 사도들의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받은 책인가?(신약)
3) 이 책 안에 신적인 권위를 입증하는 증거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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