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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영화 300의 나라 스파르타/ 고대 그리스 역사 / 아테네의 민주주의

by 은총가득 2021. 8. 31.

또 다른 영화 300

 

영화 300의 나라 스파르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전사들/ 고대 그리스 역사 / 스파르타

 

전사의 나라

 

세 번째이자 마지막 종류의 폴리스를 소개해 보자. 이번 부류의 폴리스들은 처음부터 그리스의 요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차지한 도리아인에 의해 세워진 폴리스들이 되겠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스파르타다.

도리아인들은 발칸반도를 유린하고 원주민 미케네인들을 산악지대나 바다 건너로 내몬 후, 처음부터 발칸반도의 노른자 땅을 차지했기 때문에 정착 초기부터 ‘아테네’류 폴리스들보다 좀 더 여유로운 환경에서 시작할 수 있었다.

이곳은 상대적으로 평지도 넓은 편이었고 게다가 남쪽이라 농사짓기에 적합한 기후까지 갖추고 있었다. 따라서 구지 어렵게 해상무역을 통한 상업 활동에 매진할 필요 없이 자급자족 형태의 농업경제로도 충분히 여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대게 농경은 상업보다 더 많은 노동 인력을 필요로 한다. 부족한 노동력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스파르타가 선택한 것은, 처음 마련할 때 빼고는 임금이 거의 들지 않는 노예를 확보하는 방법이었다.

스파르타 전사들의 테르모필레 전투를 그린 영화 300

자연히 스파르타는 주변 폴리스들을 노예 공급 기지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스파르타는 우선 정복지 주민들을 대상으로 분류 작업에 들어간다. 이 분류에 의해 피정복민의 여생은 판이하게 달라진다. 즉 노예(헬로트)가 될지, 아니면 ‘페리오이코이’가 될지가 한 순간에 결정되는 것이다.

여기서 페리오이코이란 노예로 전락할 위기를 간신히 모면한 행운아라 볼 수 있다. 헬로트가 주로 농업에 종사하는 ‘농로’로서 인간으로서의 처우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말하는 짐승’인데 반해, 페리오이코이들은 주로 상업과 제조업 분야를 위해 살려둔 반자유인이었다. 물론 대다수 정복지 주민은 노예로 전락했고 운 좋게 페리오이코이로 뽑히는 이는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대표적인 희생제물은 메세니아였다. 메세니아 역시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어엿한 폴리스 중 하나였으나 스파르타와 인접했던 불운으로 멸망을 맞았다. 주민들은 스파르타의 노예가 되었고, 메세니아의 토지는 스파르타 시민들에게 공평히 분배되었다. 스파르타인은 이렇게 부여받은 토지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곳의 주인이었던 메세니아인들을 농노로 부리며 여기서 나오는 경제적 이득으로 생활했다.

여하튼 이런 정복활동이 반복되면서 자연히 스파르타 내부에는 시민의 수보다 훨씬 더 많은 노예로 넘쳐났다. 한때 노예 수가 시민 수의 20배를 넘기도 했다고 하니, 이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해야했던 스파르타가 일찍부터 군사력을 국가 제일의 당면 목표로 삼은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스파르타가 무를 숭상했기 때문에 전쟁을 통한 노예 공급에 혈안이 되었던 것인지, 어영부영하다가는 큰코다치기 십상일 정도로 너무 많아진 노예들을 철저히 관리하기 위해서 군사력을 중요시한 것인지는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같이 선후를 구분하기 힘들 정도다.

 

그럼 여기서 잠깐 노예를 바라보던 스파르타인의 시선을 한번 살펴보자. 이는 히스테리와 편집증이라 표현해도 과언이 아닐 그들의 광기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겠다.

큰 전쟁이 끝난 어느 날, 스파르타는 노예들에게 이렇게 포고했다. ‘너희들 중 이번 전쟁에서 스파르타를 위해 큰 공을 세운 이가 있다면 모월모일 모두 광장으로 모이라!’

 

전쟁에 동원되어 군수품을 나르고 전사들을 먹일 곡식을 길러낸 노동은 모두 노예들의 땀이었다. 이를 가상히 여긴 위정자들이 자신들을 해방하리라 기대에 부푼 노예들은 광장에 모여들었다. 그 수가 2천에 이르렀다.

 

그러나 상을 받을 들뜬 기분으로 어느 때보다 즐겁던 노예들은 갑자기 나타난 스파르타 전사들에 의해 영문도 모른 채 어디론가 끌려갔다. 이후 그들의 모습을 본 사람은 없었다.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명예를 가슴에 품은 노예는 반드시 반란을 일으킨다는 스파르타의 안전제일주의가 초래한 비극이었다. 2천명의 노예들은 집단학살을 당한 것이다.

스파르타인들은 농노로서 보여주는 최고의 노동력은 전장에서는 최고의 전투력으로 곧바로 전환된다고 믿었으며 이런 전사의 풍모를 풍기는 노예는 가차 없이 제거해버렸던 것이다.

 

이렇듯 스파르타인은 항상 노예들을 잠재적인 반란세력으로 보았다. 설령 지금은 잠들어 있을지라도 훗날 언제라도 다시 깨어날 수 있는 내부의 위험한 적이라 여긴 것이다. 편집증적인 반응으로 볼 수도 있겠으나, 사실 이는 생존을 위한 자구책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넘쳐나는 노예는 당장은 스파르타의 국운을 만개시킬 원동력이자 발판이 되었으나, 장기적 안목에서는 걸림돌이 되었다. 즉 노예의 노동력을 국가 동력으로 삼는 정책은 그 포부만큼 원대해질 수 있었던 스파르타의 대외 정책을 제한하는 요소로도 작용했다. 이는 스파르타가 자신들의 근간인 군대에 순수한 피를 요구한 것과 맞물려 거인으로 자라날 수 있었던 국가 역량의 잠재적인 키를 낮추는 결과를 초래했다.

 

즉 스파르타는 순수한 혈통을 이어받은 스파르타인이 아니면 군복무 역시 엄격히 제한한 것이다. 당연히 한정된 스파르타 시민은 한정된 수의 군대를 만들 수밖에 없었다. 물론 최정예이기는 했으나 이들을 사방으로 분산시킬 만큼 수적 여유는 누리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자국 내 남아있는 위험한 노예들의 수가 너무도 많았던 것이다.

이는 아테네가 해군력을 쌓아 원거리 항해를 통한 장거리 원정까지 가능했던데 반해, 스파르타는 내륙에 남은 육상국가의 이미지를 끝끝내 벗을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다.

 

 

영화 300의 주인공 스파르타의 왕 레오니다스의 동상

 

이런 스파르타 정신의 원류를 찾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언제나 마지막엔 스파르타의 전설적인 건국영웅 ‘리쿠르고스(Lykurgos)’라는 인물과 만나게 된다. 사실 리쿠르고스가 전설 속의 인물인지, 실재했던 인물인지 여부도 정확하지는 않지만, 그의 이름으로 남겨진 일명 ‘리쿠르고스 법’은 이후 스파르타 국가관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리쿠르고스가 꿈꾸던 나라는 투철한 상무정신으로 무장한 시민들이 모여 이루어진 군국주의로 빛나는 국가였다. 또 리쿠르고스가 가장 이상적으로 여긴 시민이란 명령에 의문을 품지 않고 복종하며 전투에서 물러설 바에 아예 죽음을 택하는 불굴의 전사의 모습이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리쿠르고스는 자신의 법이 스파르타를 위해 도움이 될지 신의 뜻을 듣고 싶어 했다고 한다. 그는 신탁으로 유명한 델피의 신전으로 향하면서, 자신이 귀향하기 전까지 자신의 법을 엄격히 시행하라고 단단히 일렀다. 신탁의 결과는 리쿠르고스에게 기쁨이었다. 즉 그의 법은 훗날 스파르타를 그리스 최고의 강국으로 키울 것이라는 예언이 나온 것이다.

 

리쿠르고스는 자신이 돌아가기 전까지 그의 법을 혼신을 다해 지키기로 맹세한 스파르타의 약속을 믿으며 그 자리에서 자결했다고 한다. 그가 영영 돌아가지 않는다면, 스파르타는 그들 기다리며 영원히 자신의 법을 지켜갈 테니 말이다.

​리쿠르고스

죽음으로서 영원한 맹세의 봉인을 마무리한 리쿠르고스의 장대한 이상은 스파르타인의 꿈이자 목표가 되었다. 이를 위해 아주 어린나이부터 시작된 단체생활과 군사교육, 반복된 훈련은 남자아이들에겐 당연시되었고, 건강한 아이를 낳는다는 최종목표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반복되는 체력단련은 스파르타 여자아이들에겐 성장과정에서 느끼는 즐거움의 일부가 되었다.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영유아 건강검진 같은 신체검사를 받아야했고, 여기서 허약하다고 판정된 간난아이들은 아무 망설임도 없이 버려졌다. 만 6세가 되면 시작되는 단체생활은 완전한 전사로 태어날 30세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후에야 그들은 가정을 꾸밀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가정 역시 건강한 전사로 자라날 2세를 생산하는 곳일 뿐, 이후에도 군사클럽을 중심으로 단체생활과 훈련은 계속되었다.

​리쿠르고스

특히 리쿠르고스가 고안한 ‘단체 식사’는 그들을 하나로 묶는 성스러운 예식과도 같은 절차였다. 그들이 속한 클럽은 모든 이들에게 똑같은 음식과 똑같은 음료를 제공하고 같은 장소에서 식사하게끔 만들었다. 전장에서 자신의 바로 옆을 지킬 전우와 매일 같이 식사를 한다는 것은 그들 사이에 강력한 동질감과 연대감, 전우애를 키워내기 충분했다. 스파르타인에겐 맛있는 음식에 대한 탐욕은 사치와 더불어 죄악이었다.

 

한마디로 스파르타는 오직 국가의 안녕만을 염려하는 시민들의 공동체였다. 언제 국가존립에 위협을 가할지 모르는 미래의 적을 항상 머리에 떠올리며, 자신에게 주어진 거의 모든 시간을 전장에서 발휘될 전투력 향상에 바쳤다.

그들의 직업은 전사였다. 그들의 아버지도 전사였으며, 그들의 아들들 역시 전사가 될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딸들은 훌륭한 전사를 낳을 전사의 아내가 될 것이다. 모든 경제활동은 헬로트와 페리오이코이에게 맡긴 채 그들은 최고의 전사를 꿈꾸며 단련을 그치지 않았다.

 

훗날 왕정에서 민주정으로 전환되는 아테네와는 달리 스파르타가 끝까지 왕정으로 남은 이유는, 엄격한 규율과 일률적인 명령체계가 늘 요구되었던 그들만의 삶의 방식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스 전사들] 중장보병 밀집대형 전술의 꽃 팔랑크스 

 

고대 그리스 역사 / 그리스의 전사들

중장보병

그리스 초기, 귀족과 왕가의 기원은 전사(戰士)에서 찾을 수 있다. 모든 전쟁에서 시민은 배제되었고 전투는 오로지 귀족들의 몫이었다. 이렇게 귀족들이 전쟁에 앞장서 출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자신의 토지와 재산을 보호하는 껍질이었던 폴리스를 수호하기 위해서였다. 대다수 시민들을 지킨다는 사명감은 주된 목표도 아니었고, 단지 부수적으로 따라오는 성과물에 지나지 않았다.

그 목적이야 어찌 되었건 결과적으로 폴리스 방위를 담당한 귀족의 힘은 시민들 앞에서 당당히 자신의 존재 가치를 내세울 권위를 만들었다. 즉 우리가 있음으로 너희의 안전은 보장된다는 말이 먹혀들어갔다.

그러나 전쟁은 점점 진화했다. 가볍게 무장한 소수의 귀족들만이 참여하던 전쟁의 모습은 점차 중무장한 많은 병사가 동원되는 형태로 바뀌면서, 소수 지배계급만의 일대일 대결 같던 옛 모습은 사라져갔다. 시민의 보호자를 자처하던 귀족들은 이제 시민의 힘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아테네를 비롯한 폴리스의 군 체계는 평상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다가 유사시에 거의 전시민이 한데 집결해 나가싸우는 시민군 형태로 바뀌어갔다. 즉 소수정예 귀족 군대는 점차 자취를 감추고 일하면서 싸우는 예비군 같은 대규모 시민군 형태로 거듭난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한 ‘일하면서’라는 단어는 스파르타에겐 예외였다. 또 스파르타 군대는 예비군이 아니라 상비군이라 칭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특이한 군국주의 도시국가를 매우 예외적인 경우로 차치하면, 대다수 폴리스들은 위에 언급한 내용과 같았다.

​영화 300에 묘사된 그리스 전사들

같은 시기 아케메네스왕조 페르시아제국 같은 경우 왕의 친위대만 1만 명이 넘었다. 즉 동방의 군대는 이미 상비군제도가 정착되었으나, 그리스는 예비군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축구로 치자면 페르시아가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였다면 그리스는 거의 동네축구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허나 나중에 나오지만 동네축구팀이 프리미어 리그 챔피언 팀을 이기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만다.

여하튼 시민군으로 자리 잡은 그리스의 전투방식은 우리가 흔히 영화에서 보는 고대전투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가공할 무예를 지닌 장수가 앞장서서 적을 베어나가고 병사들이 그 뒤를 따르는, 일반적으로 우리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뭐라고 할까. 우리나라 차전놀이 비슷하다고나 할까?

 

왼팔에는 커다란 방패를 끼고, 오른손에는 긴 창을 들고 줄을 맞춰 밀집대형을 이루고, 또 그 뒤에는 이 같은 줄이 줄줄이 늘어선……. 옆에 있는 동료병사와 팔이 거의 밀착될 정도로, 뒤에 있는 병사의 무릎이 자신의 엉덩이에 닿을 정도로 한 덩어리가 되어 행군하고 적의 밀집대형과 부딪히면 있는 힘을 다해 밀어 붙이는 싸움이었다.

 

내가 왼팔에 든 방패는 나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내 왼편에 선 동료의 몸을 가려주는 방어막이었다. 또 내 오른쪽에 선 전우의 방패가 나를 보호해주었다. 이런 연유로 그리스 전사들에겐 방패를 내동댕이치는 행동은 용납되지 않았다. 왜냐면 방패는 자신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전우를 지키는 방어막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투구가 벗겨지고 흉갑이 떨어져 나가더라도 끝까지 창과 방패만은 손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전형적인 그리스 전사

밀집대형은 전우의 방패에 보호받기위해 전진할수록 더욱 밀착될 수밖에 없었다. 또 진격이 시작되면 자신의 오른쪽 전우의 방패에 보호를 받기 위해, 대형은 차차 오른쪽으로 움직이게 된다. 훗날 스파르타는 자연스럽게 오른쪽으로 이동할 수밖에 없는 밀집대형의 원리를 이용해, 적 대형의 오른쪽을 타고 돌아 둥글게 포위하는 전술까지 고안하기도 했다.

이렇게 촘촘히 들어선 밀집대형은 적의 대규모 화살 공격이 빗발치더라도 일제히 커다란 방패를 앞으로 혹은 위로 내밀기만하면 빈틈없는 방어벽을 형성할 수 있었다.

 

그들의 긴 창은 맨 선두진형과 그 바로 뒤 2열, 보통 선두에 선 3열이 앞을 향해 내밀고 있었고, 나머지는 하늘을 향해 쳐들고 있었다. 적진을 향해 앞으로 길게 내밀어진 무수한 창들은 웬만한 기병이 일제공격을 감행해오거나 무모한 보병이 돌격해오더라도, 그들이 밀집대형에 다다르기도 전에 분쇄시킬 수 있었다. ‘팔랑크스’라고도 부르는 그리스의 밀집대형은 멀리서 보면 마치 커다란 고슴도치를 연상케 했으리라.

 

그리스의 밀집대형 팔랑크스​

그러나 강력한 밀집대형도 대열이 깨져버리는 순간 전혀 위력을 발휘할 수 없는 무용지물로 전락한다. 따라서 전투의 목표는 상대 병력을 전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적 대열을 분쇄시키는 것이었다. 개개인의 무예나 평소의 훈련 보다는 동시에 밀어 붙이는 단결력과 끝까지 대열을 유지하는 전우에 대한 믿음이 전투의 승패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진격하면서 왼발 오른발이 맞지 않거나, 적의 대형과 충돌 시, 힘을 쏟아야할 찰나와 힘을 아낄 순간이 엇박자가 나버리면, 밀집대형의 파괴력은 날아가 버리고 마는 것이다. 마치 줄다리기할 때 당길 때와 놓아줄 때를 잘 맞추지 못하는 팀이 승리할 수 없듯이 말이다.

 

또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방패를 끌어당겨 내 몸을 막는 순간, 대형은 산산조각 나버릴 것이다. 그러나 만약 전우의 방패가 나를 막아 주리라는 확신이 전투 끝까지 유지된다면, 마침내 승리가 이루질 것이었다.

 

그 순간 쏟았던 힘은 일순간 아지랑이처럼 아련히 온 몸의 혈관을 타고 흐를 것이다. 그들은 뱃속에서 가슴으로 전해지는 벅찬 희열을 맛보았을 것이다. 바로 옆 전우와 얼싸안고 승리의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른다. 그가 나를 지켰으며, 내가 또 누군가를 지켜낸 것이다. 이것은 너 혹은 내가 아닌 우리가 만들어낸 승리였다.

밀집대형을 구성하는 각 개인은 중장보병이었다. 이는 중무장 보병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이들은 양쪽 눈과 입, 턱을 제외하고 머리전체와 코까지 덮어씌운 금속투구를 썼고, 몸통을 보호하는 갑옷과 아이들 키만 한 둥근 방패(지름 약1m), 또 세계 최장신을 자랑하는 사람의 키 정도는 가뿐히 뛰어넘을 길고 긴 장창(길이 2.4m)을 소지했다. 다리에는 정강이 보호대를 찼고, 활동성이 좋은 끈으로 묶은 샌들을 신었다. 중장보병은 그리스 전투의 핵심이었다.

 

물론 고대 그리스에도 기병이 있었다. 그러나 다른 민족의 기마병과 비교해보자면 매우 다른 용도로 말(馬)을 이용했다. 즉 그리스 전사들에게 있어 말이란 단지 이동 수단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스 기마병들은 전장에 당도할 때까지만 말을 탔고, 정작 전투가 벌어지면 말에서 내려 중장보병의 대열에 합류해 전투에 임했다. 말은 전장에 출퇴근하기 위한 교통수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간단히 말해 고대 그리스 기마병은 말을 탄 중장보병이었던 셈이다. 행군하는데 소비되는 스테미너를 비축한다는 의미 혹은 또 다른 어떤 권위의 상징적 의미만을 가질 뿐 일반 중장보병과 전투방식은 완벽히 동일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들 중장보병들이 갖춰야하는 무기들, 예를 들어 방패, 창, 투구, 갑옷 등은 매우 고가의 물품이었다. 게다가 이런 고가의 장비를 국가에서 일괄 지급해주지도 않았다. 자연히 개인이 알아서 일체 구매해야했다. 즉 경제적 여유가 없으면 전쟁에 출전하고 싶어도 나갈 수조차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폴리스의 내부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점차 활발해지는 상업과 무역 덕택으로, 부모의 고귀한 피를 물려받지 않았더라도 능력 있는 평민들 중에서도 상당한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이 늘어갔다. 따라서 이들 역시 자체적으로 중장보병 무장이 가능한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된 것이다. 시민들의 전쟁 참여가 빈번해졌고, 마침내 이들의 수적인 힘은 전쟁의 승패를 좌우해버리는 요소가 되었다.

 

드디어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폴리스에서 기원한 중장보병의 등장과 이들을 토대로 한 밀집대형이 어느덧 모든 그리스 전쟁의 핵심이 되었다

이제 귀족들의 특별했던 존재감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있어 너희의 안전은 유지되는 것이므로 우리가 너희 위에 군림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귀족들의 논리는 깨어졌다.

 

이렇게 소수의 귀족들에게만 주어지던 정치적 특권을 설명하던 국가 방위의 논리가 무너지자, 중장보병으로 출전이 가능해진 시민들의 정치적 요구가 거세졌다. 귀족들은 외부세력으로부터 자신이 소유한 특권과 재산을 지켜야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시민들의 전쟁참여가 절실했다. 따라서 이들 위해 시민들에게 정치적 참여하는 보상을 맞교환해야만 했다.

한편 양지가 있으면 음지가 생기듯이, 축적된 부를 구가하며 목소리를 키우는 시민들이 생겨난 반면, 경쟁에서 처지거나 빚을 지고 파산하여 노예로 전락하는 많은 시민들이 생겨났다. 고소득이 보장된 수출용 올리브유와 포도주를 생산하는 대형 농장이 성행하면서, 소규모 농민들은 경쟁력을 잃고 차차 몰락해갔다. 끝내 이들은 대지주의 소작농이나 농노로 전락했다.

 

이렇게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점점 골이 깊어 갔다. 경제적으로 남부럽지 않게 성장하기 시작한 시민들의 들끓는 정치적 요구, 또 그 반대쪽 끝에 선 빈민이나 노예로 전락한 하층민들의 원성은 강력한 제도적 개혁을 요구했다. 바로 민주화를 위한 요구였다.


 

​아테네 민주정의 효시, 솔론의 금권정치 

 

 

 고대 그리스 역사 / 아테네

​ 중간자

 

아테네 민주화의 첫 이벤트는 솔론이라는 인물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러니까 기원전 6세기 초, 아테네 정계에 혜성같이 등장하면서 정권을 잡은 솔론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귀족과 정치참여를 요구하는 시민들 사이에서 절충적인 개혁이라는 시대적 사명을 부여받았다.

​솔론

원래 아테네도 다른 폴리스들과 마찬가지로 처음엔 왕정으로 시작했었다. 그러나 솔론이 등장했을 무렵, 왕정은 이미 사라지고 귀족들이 득세하는 귀족정으로 변해있었다. 왕의 통치에서 여러 명의 귀족 통치로 이행한 것이나, 이 ‘여러 명의 귀족들’은 아테네인 절대 다수인 시민들을 대변하지는 않았다. 오직 귀족을 위한 귀족들의 통치였다.

귀족정의 수장은 ‘아르콘’(집정관)이라 불렸다. 그 외에도 군대 총사령관격인 대장군과 종교를 관장하는 대사제를 한명씩 두었다. 이 3명이 아테네 행정, 군사, 종교의 중추였다. 또 그 아래로 6명의 하위 장관급 관리를 두어 총 9명의 주요 직책이 존재했다. 이들은 모두 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임기는 1년이었다. 이들 행정관들은 민회를 통해 선출되었는데, 민회 역시 귀족에 의해 장악되다시피 했었다.

귀족들은 보통 토지를 기반으로 하는 피를 통해 내려온 집권세력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경제의 많은 부분을 농업에 의존하던 초기 아테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차 상업이라는 부를 창출하는 새로운 업종으로 간판을 바꿔달면서, 기존의 토지를 소유한 지주들보다 많은 현금을 손에 쥘 수 있었던 상인들이 차차 경제적 주도권을 잡아가고 있었다. 그중에는 평민들도 있었고, 이들은 점차 쌓여가는 부에 어울릴 정치적 입김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와 반대로 귀족의 대토지 소유에 희생될 수밖에 없었던 힘없는 농민들은 빚을 갚기 위해 자신의 땅을 팔아야했고, 군인에게 있어 무기나 다름없는 토지를 잃어버린 많은 수의 농민은 농노가 되기도 했다. 이들의 불만은 당시 아테네 하늘에 가득했다

 

게다가 이런 힘없는 이들을 괴롭히는 또 하나의 구체제 틀이 있었다. 그것은 솔론이 등장하기 이전인 기원전 7세기경부터 제정된 일명 ‘드라콘’법이라는 악법이었다. 그 처벌조항이 혹독하기로 악명이 높아 이른바 ‘피로 쓰여진 법‘이라 불릴 정도였고 그 폐단도 극심했다. 아테네 최초의 성문법이라는 의미는 있었지만, 사소한 잘못을 해도 사형을 당하고, 빚을 지면 노예로 전락해버리기 일쑤였던 공포의 대명사였다.

​솔론의 법

솔론은 이 많은 문제들을 해결해야했다. 먼저 그는 말 많던 드라콘법의 처벌 조항을 완화하고, 빚더미로 노예가 된 이들을 해방시키는가하면, 시민들의 빚을 탕감해주어 노예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하려 애썼다. 위대한 솔론은 아테네 시민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다시는 자유를 박탈당하지 않도록 규정을 강화한 것이다.

 

더불어 솔론은 시민들에게 정치 참여의 기회를 대폭 개방하는 혁신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이는 인류사에서 매우 획기적인 일대 사건이었다. 우선 그는 귀족, 중산층, 무산자 할 것 없이 모든 시민들을 경제력에 따라 등급을 매겨 분류했다. 여기서 말한 경제력이란 ‘토지’를 기초로 했다.

 

즉 각자 소유한 토지의 면적과 수확량에 따라 모든 시민을 4개의 등급으로 나눈 것이다. 1등급이 가장 부유한 계층이었고, 그 아래로 2등급, 3등급 순으로 재산순위에 따라 등급이 결정되었고, 마지막 4등급은 자신의 노동력을 빼고는 재산이 없는 무산자들로 구분했다.

​아테네의 새로운 법과 솔론

이 경제적 등급에 따라 전시에 동원되는 병과도 달라졌다. 경제적으로 가장 부유한 상위 두개의 등급은 기마 중장보병, 세 번째 등급은 말이 없는 일반 중장보병, 네 번째 등급 무산자들은 함대의 노를 젓는 노잡이로 배치되었다.

이렇게 경제력과 병과를 한데 묶어 동시에 취급한 것은 앞서 언급했듯이 당시 중장보병이 갖춰야할 무기나 갑옷 등 전투장비와 기마병에 필수인 말(馬)이 상당히 고가여서, 스스로 이를 구입하기위해서는 어느 정도 경제력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즉 솔론의 4개 등급은 경제력이라는 겉표지를 달고 있었으나 실상은 군사적 요소라는 내용물도 함께 담고 있었다. 물론 솔론이 추구한 개혁의 첫 번째 목적은 어디까지나 귀족과 일반시민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는 것이었으나, 그 배경에는 보다 많은 이들을 중장보병의 대열로 끌어들이고, 또 점차 중요성이 높아가는 해군육성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다수의 노잡이들을 무상으로 확보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이들에게 어느 정도 경제적, 시간적 투자가 필요한 군사적 의무를 부여하면서, 그 보상으로 정치 참여 기회를 선사한 것이다.

 

드디어 4개의 등급으로 시민을 구분하는 작업을 마친 솔론은 이들 모두에게, 그러니까 귀족부터 무산자들에 이르기까지 아테네 시민이라면 누구에게나 민회 출석을 허용했다. 이제 아테네 시민 모두가 민회 위원이 된 것이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개혁이 아닐 수 없었다.

 

당시 아테네의 민회는 집정관을 비롯한 주요 행정관리를 선출하는 등 기본적인 국내 정책의 결정은 물론, 전쟁과 평화의 결정, 외교정책, 수출입정책 등 특히 대외 문제를 의결하는 매우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솔론에 의해 이룩된 아테네 시민 모두의 민회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직접민주주의의 시작이었다.

 

 

그리스 해군의 전함은 훗날 삼단 노를 가진 갤리선으로 발전한다.

따라서 무수한 노잡이들이 필요했고, 이 역할을 무산자 계급이 담당하며,

훗날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로 이들 계급의 위상은 괄목상대해진다.​

그러나 이렇게 모두에게 민회 참석권을 일괄적으로 부여하고 끝낼 것이었다면, 어렵게 등급을 나누지도 않았을 것이다. 경제적 등급은 아직 하나의 계층적 장벽을 남겨두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즉 집정관 및 행정관에 출마할 수 있는 피선거권은 오직 상위 2개의 등급에게만 부여되었고 3등급과 4등급은 여기서 제외되었다.

덧붙여 솔론은 민회가 어떤 안건을 의결하기 전에 민회가 결정할 안건을 미리 준비하는 기관으로서 ‘400인 회의’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여기에 참가가 가능한 등급은 1등급에서 3등급까지로 정했고, 역시 4등급은 여기서도 제외시켰다. 이렇게 경제력에 따라 약간씩의 차등을 두고 정치 참여를 허용한 솔론의 개혁과 정치를 흔히들 ‘금권정치’라고도 부른다.

물론 아직은 완전하지는 않았으나 인류 역사상 최초로 시민 모두에게 정치 참여가 허용되었다는 점은 큰 의미가 있다하겠다. 신성한 피는 이제 신성한 돈으로 바뀌고 있었다. 타고난 피는 스스로 바꿀 수 없지만, 경제력은 바뀔 수 있는 최소한의 여지는 품고 있다. 즉 태생의 한계는 이제 겨우 벗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살라미스의 그리스 전함 삼단노선

그러나 솔론의 개혁은 지배, 피지배 계층의 불만을 봉합한다는 목표를 미리 정해놓은 개혁이었으니 예초부터 중간자적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귀족과 평민 모두에게 큰 환영을 받지 못했다. 사실 환영받는 것은 고사하고 반발이 심했다.

귀족들은 지배자로서의 고유 권한 일부를 뚝하고 떼어 평민들에게 나눠주는 것이라 생각했고, 평민들도 그들 나름대로 불만이 없지 않았다. 즉 평민들 중 대다수는 솔론이 제시한 경제력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3등급이나 4등급에 속했고, 이들은 개혁 이전이나 이후나 별반 차이를 느끼지 못했으니 말이다.

뜻은 가상했으나 반대파의 강력한 압력에 못 견딘 솔론은 아테네를 떠나야했고 에게해 여러 나라를 이리저리 유랑하며 세월을 보내야 했다. 솔론이 다시 아테네로 돌아오는 데는 10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했다. 솔론은 실패한 개혁가의 비참한 말로의 역사적인 첫 페이지이기도 하다.


​그리스 참주정의 독재자 페이시스트라토스와 포퓰리즘

 

 고대 그리스 역사 / 아테네 / 참주정치

독재자

 

솔론이 개혁 실패로 아테네를 떠난 후, 페이시스트라토스라는 인물이 정가 제일선에 등장했다. 그는 아테네 귀족들의 머리에 이런 생각을 각인 시켰다.

 

“그래도 구관이 명관이었구나.”

 

그의 정치를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 키워드는 ‘독재’ 바로 그것이었다. 장군 출신으로 전쟁을 치르면서 얻어낸 대중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무력을 통해 정권을 휘어잡은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유일무이한 지위, 이른바 참주(tyrannos)의 자리에 오른다. 여기서 참주란 하나의 직함 정도로 보면 되겠는데, 아테네인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던 강력한 왕의 출현이나 마찬가지였다. 쉽게 참주란 공인된 독재자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다.

 

참주를 뜻하는 티라노스(tyrannos)라는 단어는 나중에 폭군을 의미하는 타런트(tyrant)의 어원이 된다. 재밌는 것은 공룡 중 폭군인 티라노사우루스(tyranosaurus 폭군룡)의 명칭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페이시스트라토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이런 정치형태를 ‘참주정치’라고 하는데, 그가 이렇듯 강력한 일인독재체제를 갖추고 또 오래도록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를 지지하는 세력이 수적으로 아테네인의 대다수였을 뿐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지지가 더욱 강력해졌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자유를 갈망하던 바로 아테네의 일반시민들이었다.

 

왜 이들은 자유를 원하면서도 독재 정치를 강화시키던 페이시스트라토스를 지지했을까?

그것은 대중들의 욕구를 충족한 그의 정책이 잘 말해준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독재자라고는 불리지만 솔론이후 내려온 민주정의 기틀을 파괴하거나 아테네의 전통적인 정신에까지 손을 대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솔론이 만들어 놓은 틀 자체는 그대로 유지한 채, 그 위에 군림했다. 즉 참주시절에도 집정관이나 그 외, 모든 행정관이 존재했고, 민회 역시 존재했다. 그리고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결정적으로 민회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솔론의 민주화 첫발이 기존 귀족들의 권력을 제한한 것이었다면,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은 귀족들을 말살하는 것이었다. 즉 방향은 같았으나 참주가 더 급격하고, 좀 더 급진적이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는 귀족들의 많은 수를 국외로 추방하고, 그들의 토지를 빼앗아 시민들에게 재분배하는 극단적인 정책까지 펼쳤다. 게다가 그는 상업 육성에 온힘을 쏟아 말이 독재정치였지,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치세는 역사상 아테네가 처음으로 누린 경제적 번영기였다. 경제는 더욱 활발해졌고 사회도 안정을 되찾았다.

여기서도 잘 볼 수 있지만, 대다수는 모험에 가까운 불안정한 자유와 배부르고 따뜻하며 안락한 독재 중 거의 언제나 후자를 원한다. 우리가 혁명의 대명사라 말하는 프랑스 대혁명 역시, 그 최초의 시작은 체제에 대한 모순을 발견한 것이라기보다는 가난에 찌든 대다수의 굶주림이 촉발시킨 사건이었다. 1789년 혁명의 해와 그전 몇 년간 프랑스를 휩쓸었던 대대적인 흉작이 없었다면, 폭력적인 혁명과 그에 따른 공포정치는 일어나지 않았거나 혹은 영국과 같이 온화한 경착륙과정을 거쳐 입헌군주제로 마무리되었을지도 모른다. 즉 굶주림이 없었다면 단두대가 필요 없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독재란 반드시 악인가? 독재가 선을 떠나 악으로 여겨지는 이유는 독재가 가질 수밖에 없는 태생적 한계 때문일 것이다. 만약 페이시스트라토스처럼 번영과 경제적 충족을 가져다준다면 대다수는 독재의 태생을 잊어버리고 독재를 인정할지도 모른다. 늘 그랬듯 대중은 부담스러운 자유보다는 풍족한 빵을 원할 때가 많다. 프랑스 혁명이후 나폴레옹이 혁명의 주인공 프랑스 대중들에게 추앙받던 예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독재는 스스로를 유지하기 위해 태생적으로 엄청난 유지비용을 지불해야만 한다. 이것이 바로 독재의 해악이다. 그것은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비용이 아니라, 독재자 주변에 모여든 게걸스러운 지배층이 어떤 보상으로도 다 채워지지 않을 자신의 이익을 바라보며, 자신이 숭배하는 독재자의 치세를 영원히 지속시키기 위해, 대다수를 눈멀게 하고 자신들이 만들어놓은 틀 속에 대다수를 가두려는 통치방식에 드는 노력이며 그것으로 파생된 비극이다.

이 수고로움이란 태생적으로 정통성에 취약한 독재를 애써 유지하기 위한 비용이기도 하다. 이들은 국익을 위한 고뇌와 결단은 항상 뒷전으로 미뤄놓고, 단지 대중을 속이는 감언이설을 생각해내기 위해 골몰해야하며, 강압적인 협박을 사용해야 할 것이고, 늘 빠른 반응을 가져다주는 폭력을 써야할 것이다.

 

(​참주정의 희생자라면 플라톤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지금 말하는 페이시스트라토스 보다 훨씬 뒷 세대의 이야기지만, 플라톤은 자신의 철인정치를 실현해보고자,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의 참주의 고문관으로 임명되었다가, 오히려 노예로 팔려가는 고행을 겪는다. 위의 사진은 플라톤의 모습)

이런 지배층에게 언제나 성인군자나 초인의 모습을 요구하는 것은 늘 무리였다. 절제와는 거리가 먼 그들은 인간의 이기심을 극명하게 보여주듯 본능적인 탐욕을 채우기 위해 그들의 숭배자 독재자의 위상과 이름을 마음껏 활용한다. 또 이를 정당화하거나 혹은 은폐하기 위해, 정보의 차단과 귀 막임, 눈 막임은 더해갈 것이고, 이는 반복적인 탐욕의 과정을 확대재생산해내고 지속시켜 언제나 그 끝도 모르는 파멸을 향해 달려간다. 즉 독재란 독재자의 통치 능력이 어떠냐를 떠나, 부패할 수밖에 없는 구조를 태생적으로 지녔기 때문에 악이 되는 것이다.

 

만약 자신과 지인의 이기심을 완전히 절제한 영웅이 있어 그로 말미암아 대다수가 향유할 수 있는 번영이 이룩된다면 그는 아마도 독재자가 아닌 초인일 것이다. 그러나 초인은 그리 쉽게 찾아지지는 것은 아니다.

이기심이라는 간단하지만, 평범한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떼버릴 수 없는 욕구를 완전히 극복할 정치가는 언제쯤 이 세상에 나타나는 걸까. 너무도 순진무구한 생각일지 모르나, 자신을 위해 수십 년간을 따르던 추종자들에게 당신은 나를 따랐으니 행복했다. 그것으로 충분했으며 나를 통해 더 이상의 것을 바라지마라. 이렇게 말 할 수 있는 초인은 과연 나타날 수 있을까. 현실의 이득보다 역사의 고귀한 한줄 이름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릴 초인은 있을까.

 

페이시스트라토스 사후, 그의 아들이 참주가 되었다. 그러나 독재란 한 개인의 철저한 카리스마가 받쳐주지 않으면 영속될 수 없는 것이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 히피아스가 참주자리에 올랐으나 거듭된 실정으로 민심을 잃고 쫓겨나고 말았다. 히피아스는 아테네의 잠재적인 적 페르시아로 달아나버렸다. 그는 훗날 악의 씨가 될 것이었다. 여하튼 이로써 거창했던 참주정은 2대만에 끝을 맺고 만다.

 

​고대 그리스의 민주주의 투사 클레이스테네스

 

고대 그리스의 역사 / 아테네의 민주주의

​ 데모스에게로

 

참주를 권좌에서 물러나게 한 것은 다름 아닌 가장 억압받았던 귀족들이었다. 토지까지 몰수당하고 추방당한 후, 근 40년이라는 세월을 울분으로 지새운 귀족들은 스파르타 군대를 아테네 시내로 끌어들이기까지 하면서 참주를 몰아내고만 것이다. 물론 귀족의 입장에서 보자면, 참주란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반드시 척결해야할 정적 1순위였다. 하지만, 외부의 군대를 끌어들이는 무리수까지 두었던 이들의 운명 역시 오래가지 못할 것이었다.

일단 참주를 몰아내는데 공을 세운 귀족진영의 한쪽에서 집정관이 탄생하기는 했다. 그들은 당연히 참주정 이전의 시대로 돌아가려 시도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한 것은 ‘민주정’으로의 복귀가 아니라 ‘귀족정’으로의 퇴보였다.

즉 그들이 비난하고 증오해마지않았던 1인 통치 참주를 끝끝내 쫓아낼 만큼 귀족들이 목마르게 원했던 것은 아테네 시민 대다수의 의사와는 상충되는 그 옛날 귀족정으로의 복귀였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어느 정도 성숙하기 시작한 아테네 시민의 반발을 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민 대다수의 바람은 한 명의 유능한 정치가를 탄생시켰다. 그가 바로 클레이스테네스였다.

그리스 민주정의 첫발 클레이스테네스​

그러나 사실 클레이스테네스 역시 참주정을 무너뜨리는데 일익을 담당한 귀족가문 출신으로, 참주를 몰아낸 후 정권을 잡기 위해 귀족들 사이에 벌어진 살벌한 권력투쟁에 혼신을 다했던 인물이었다. 즉 클레이스테네스는 귀족정이냐 민주정이냐 선택의 문제보다는 스스로 정권의 최고 정점에 서는 것을 최상의 목표로 한 야심찬 인물이었다. 그러나 첫 결과는 패배였다. 다른 귀족들과의 정권쟁탈전에서 패배의 쓴 잔을 맛보아야했던 것이다.

 

귀족정에서 도태된 그가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당시, 놓쳐버린 권력욕을 채워줄 수단으로 그의 눈에 들어온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로 아테네 대다수 시민들이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페이시스트라토스가 그랬듯 대중이 원하는 바를 충족시키면 정권 역시 자신의 품으로 들어오리라 확신했다. 드디어 이런 그의 신념은 그를 민주투사로 탈바꿈시켰다.

마침내 클레이스테네스는 자신의 예상대로 아테네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으며 정계의 최상위 정점에 설 수 있었다. 이후 클레이스테네스는 시민들에게 보답이라도 하듯 아테네 민주주의의 기본 틀을 완성하게 된다. 그는 유능했고, 현명했으며, 또 행동 역시 빨랐다.

 

앞서 거창한 혁명 이야기를 했던 이유가 여기에도 있다. 클레이스테네스의 이런 과정을 혁명으로 볼 수 있을까? 이 답은 모두의 몫으로 남겨두자.

 

또 하나, 정치가가 되겠다는 최상위 목표를 미리 세워놓고 그 수단으로서 ‘투사’가 되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은 순수한 것일까? 클레이스테네스는 이런 부류의 원조가 된다. 그러나 클레이스테네스는 최고 권력자라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한 후, 그 사회가 요구하는 바까지 실현시킬 현실적인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우리가 클레이스테네스의 초심이 어땠는지 여부를 떠나 그를 민주주의 완성의 큰 공로자로 보는 것은 그의 초반이 아니라 정권을 잡고난 후 그의 후반부 위대한 성취를 가능케 한 그의 능력 때문이다.

​정의의 여신, 한손엔 공정한 저울, 한손에 서늘한 칼

 

우리는 현재를 가능케 한 많은 희생자들과 불철주야 고민하고 타는 목마름으로 자신의 뼈를 깎았던 많은 투사들을 기억하고 존경해야 할 것이다. 그들은 눈에 보이는 자신의 이익이라는 이기심을 버리고 민주화를 향한 가시밭길과 영영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르는 광야에 스스로를 내던진 위대한 사람들이었다. 또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지금 이 시대를 맞을 수 있었다.

 

우리가 지금 받는 혜택에 이바지한 그들의 희생은 당연히 어떻게든 보상되어야 마땅하다. 그들이 잃었던 젊음과 그들이 희생을 위해 감수했던 잃어버린 것과, 그들이 받았을 정신적인 상처를 우리는 존경으로서 치유하고, 그들의 후손이 그의 희생을 값지고, 자랑스럽게 여길 만큼 물질적 지원까지 아끼지 말아야한다.

시대의 폭력에 맞섰던 용기와 불의에 항거하던 그 의지는 가장 고귀한 것이었다. 그 용기와 의지가 새로운 시대에 부합한다면, 충분히 그것을 활용해야한다. 충분한 능력을 갖추었음에도 시대의 요구를 저버리는 것 역시 투사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투사를 원하는 시기가 있는가하면, 또 유능한 행정가를 원하는 시기도 있다. 시대가 요구하는 능력은 갖추지 못했으면서, 옛날 내가 이랬으니 지금 비록 모자라지만 나를 봐달라는 것은 매우 초라한 행동이다.

만약 자신이 위정자를 꿈꾸는 옛 투사라면 자신의 능력을 살피고 지금 이 시대가 원하는 능력까지 갖추었는지를 돌아보아야한다. 이에 자신할 수 있는 자라면 클레이스테네스의 뒤를 따르면 된다. 그렇지 않다면 깨끗이 포기하는 것도 위대한 결정일 것이다. 그리고 이런 모든 결정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역시 시대가 필요로 하는 능력일 것이다.

 

위정자가 될 사람이라면 언제나 자신의 능력과 시대의 요구를 비교해볼 수 있어야한다. 위정자란 자신의 현실적인 욕망과는 바꿀 수 없는 자신을 바라보는 너무도 무수한 사람들의 미래를 책임져야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인간성은 좋으나 늘 수술에 실패하는 의사가 좋은 의사가 아니듯, 인간 개인으로 보기에는 너무도 매력적이고 좋은 사람일지라도 시대를 읽고 실천할 능력을 갖추지 못한 이라면 그런 이를 위정자로 삼은 대다수는 가장 불행한 시절을 맛보게 될 것이니 말이다

 

국가를 이끌 인물을 평가할 때 반드시 그의 도덕성이 가장 중요한 잣대가 될 필요는 없다. 위정자의 평가는 그들이 이루어 놓을 결과물로 평가받아야 한다. 위정자란 인간성과 도덕적인 규범으로 뽑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시대를 읽는 시각과 시대를 이끌 능력으로 선택받아야하는 것이 아닐까? 늘 바른 생활을 하며 고고한 인격까지 갖추고 수술을 앞둔 환자를 늘 걱정하는 의사이지만, 정작 수술에 능하지 못한 외과의사와, 평소 인간적으로는 존경할만한 인물은 아니지만, 환자를 치료하는 수술만큼은 혼신의 힘을 다하고 늘 수술을 성공으로 이끄는 외과의사가 있다면, 우리는 과연 누구에게 자신의 몸을 맞기며 수술을 받고 싶어 할까? <naver.com/hartman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