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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폴리갑/이그나티우스

by 은총가득 2023. 12. 18.

교회사 인물(개요)

 

 

1. 교회의 기원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고 제자들과의 공동체생활로부터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보기도 하나 일반적으로는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 오순절 성령강림(AD30년경)과 사도들에 의한 복음전파를 계기로 교회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성령체험 이후 사도들을 비롯해서 제자들은 처음에는 유대인들에게 전도했다. 많은 유대인들이 기독교로 개종해 왔는데, 그 유대인들에는 두 부류가 있었다. 한 부류는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본토 유대인(히브리파 유대인)들이었고, 다른 한 부류는 헬라어를 사용하는 디아스포라 유대인(헬라파 유대인)들이었다.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은 로마 세계와의 교류 중에서 유대교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이들이 만난 이방인들 중에는 유대교의 유일신 신앙과 도덕적 가르침에는 찬동하지만 유대교의 여러 가지 의식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유대교에 개종하지 않으면서 유대교와 친교를 가졌는데, 유대인들은 이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행10:2)라고 불렀다. 그래서 헬라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은 기독교가 이방인들에게 거부감을 주지 않기 위해서는 할례와 같은 유대교 의식이나 의식적 율법은 배제시켜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보았을 때 이런 것은 구약성경의 본질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독교가 유대교 중에서 유일신 신앙과 도덕적 가르침만을 계승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이와는 반대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은 기독교는 유대교의 전통을 다 지키면서 예수를 메시야로 믿는 종교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기독교에 들어오는 이방인들은 할례를 받고 모든 의식적인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기독교 밖에 있는 유대인들이 보았을 때 히브리파 유대 기독교인들은 별 문제가 없었으나 헬라파 유대 기독교인들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헬라파 유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이 때 처음으로 희생당한 사람이 스데반이었다. 이 박해로 인해 헬라파 유대 기독교인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그들은 가는 곳곳마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이방인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해서 이방 지역으로는 처음으로 안디옥에 교회가 세워지게 되었다. 안디옥교회는 곧 대교회로 성장하게 되었으며 바울과 바나바 같은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세계 선교를 시작했다. 이들 선교사들이 이방 지역에 가면 먼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회당을 찾았으며 회당을 선교 거점으로 삼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선교하기 시작했다. 유대의 멸망으로 유대인들이 전세계에 흩어지게 된 것은 유대인들에게는 불운이었지만 교회로 보아서는 선교를 위한 예비된 발판이 되었다.

 

이렇게 기독교가 전세계로 전파되고 있을 때 로마인들은 처음에 기독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로 보고 박해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유대교는 로마가 공인한 종교로서 황제 숭배 등 로마의 규정을 따르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전파되는 곳마다 유대교인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에 분쟁이 있는 것을 보고 기독교와 유대교가 다르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64년 로마에 화재가 발생했다. 이 화재는 1주일간이나 계속된 대화재였다. 로마 시민들 사이에는 네로 황제가 로마시를 정화하기 위해 화재를 일으켰다는 소문이 퍼져 나갔다. 네로 황제는 당황하여 당시 민중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던 기독교인들에게 화재에 대한 책임을 전가시켰다. 기독교인들은 불에 의한 세계 심판을 예언해 왔는데 그것을 실현시키기 위해 불을 질렀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네로는 기독교인들을 체포하여 처형하게 했다. 십자가에 죽이기도 하고 짐승의 가죽을 입혀 개에게 물려 죽게도 했으며 심지어 연회장 주변에 매어달아 태워 죽이기도 했다.

 

90년경이 되면 기독교인이면 무조건 죄인으로 취급하기에 이른다. 군중들은 기독교를 이 세상에서 용납할 수 없는 끔찍한 사교로 여겼다. 우선 기독교인들은 전통적인 로마의 신들을 숭배하기를 거부한다고 해서 무신론자들로 여겨졌다. 그리고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고 해서 무정부주의자로 취급되었다. 게다가 기독교의 성찬식이 오해되어 기독교는 인육을 먹는 식인종으로 여겨졌다. 공교롭게도 당시 어린이 유괴 사건이 빈발해서 기독교인들은 어린이를 잡아 인육을 먹는 예식을 행한다고 오해되었다. 또한 기독교인들은 서로 형제자매라 불렀고, 이렇게 형제자매라 부른 사람끼리 결혼을 했으므로 근친상간을 하는 추악한 인간들로 오해되었다. 이런 기독교 집단은 인류가 공동으로 싸워 퇴치해야 할 인류의 적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래서 95년 경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기독교 박해에 나섰다. 당시 로마의 고관이던 클레멘트는 처형되었다. 이 박해는 그 다음 트라야누스 황제에게로 넘어갔다. 이 때 저명한 교회 지도자가 순교하게 되는데 그는 이그나티우스였다. 이그나티우스는 35년경에 출생했으며 안디옥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 안디옥 교회는 바울이 목회하던 교회였고 베드로가 머물던 교회였으므로 이그나티우스는 사도들에게서 직접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는 안디옥에서 체포되어 로마로 끌려가면서 7통의 편지를 썼다. 그는 그 편지에서 감독에게 순종하며 이단을 경계하라고 권면했다. 이 편지로 보아 110년경에 이미 감독, 장로, 집사, 세 계층의 교회 조직이 확립된 것 같다. 이 7통의 편지 가운데 1통은 로마 교회에 보낸 것인데, 그는 이 편지에서 로마 교회가 로마 관리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자기의 순교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까 염려하고 있다. 그는 일생동안 자기가 진리라고 믿는 것을 위해 살고 가르치다가 마지막에 그 진리를 위해 죽는 것을 가장 숭고한 것으로 보았다.

 

이그나티우스와 함께 순교사를 빛낸 사람은 폴리갑이었다. 폴리갑은 에베소에서 70년경에 태어났다. 그는 거기서 사도 요한에게서 가르침을 받은 것 같다. 폴리갑은 서머나의 감독으로 있었는데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자 주위의 권고에 의해 시골로 피신했다. 관리들이 폴리갑을 찾아왔을 때 직접 나가 그들을 맞이하자 그들은 폴리갑의 온화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형장에 끌려가서 기독교를 부인하라고 권고를 받았을 때 자기는 86년 동안 주님을 섬겼는데 주님은 한 번도 자기를 부인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주님을 부인하겠느냐고 대답하면서 순교로 신앙을 지켰다.

 

이들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순교의 제물이 되어 갔고, 이후 계속된 2천년의 교회 역사는 이같은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을 통해 지켜지고 계승되며 땅끝까지 전파되기에 이른다.

 

 

 

2. 교회사의 시대 구분

 

1)초대(고대) 교회사 : A.D.0~590

 

* 그레고리황제(Gregory the Great)가 제1대 교황에 즉위하기 전

* 박해시대(A.D.0~313) - 생존을 위한 투쟁기로 콘스탄틴황제(Constantine the Great)가 기독교를 승인하기 전까지

* 기독교 교리 형성기(A.D.313~590) - 정경, 신조 등이 확정되고 만들어지는 시기

* 예루살렘 성전 파괴(A.D.70) - 로마의 디도 장군에 의해 이스라엘 민족의 정신적인 집합과 유대주의의 구심체 역할을 하던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됨으로써 선민이라는 유대교 의 틀을 벗어나 세계로 흩어지게 되는데, 이 흩어진 사람들이 디아스포라(흩어진 유대 인)가 되었다.

 

2)중세 교회사 : A.D.590~1517

 

* 그레고리황제가 제1대 교황으로 즉위하여 정치와 종교가 하나의 권력으로 모아지게 된 것을 중세의 시작으로 본다.

* 이때는 교회가 국가 위에 군림하던 시대로 교황청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다스렸다. 교회가 세속의 권력을 가질 때 타락한다.

* 기독교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어 기독교 문화가 생활 속에서 꽃을 피우나 동시에 세속 의 권력과 조직의 틀에 갇힘으로써 인간성이 말살되고 교회가 타락하는 암흑기를 초래 한다.

* 동방과 서방교회의 분열(A.D.1054) - 로마 중심의 서방교회와 콘스탄티노플 중심의 동방교회로 분열된다.

 

3)근대 교회사 : A.D.1517 이후

 

* 루터의 종교개혁(A.D.1517) - 종교의 암흑을 벗고 새로운 교회(개신교)가 종교개혁에 의해 생겨남.

* 종교개혁의 3대 지표 :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말씀(sola scriptura), 오직 은혜(sola gracia)

* 종교개혁운동은 전 유럽으로 확산되어 문예부흥운동(르네상스)과 함께 근대 서구문명을 형성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 많은 교회사가들이 현대 교회사의 출발을 17세기 영국의 청교도 운동으로 보고 있으나 일반 사회의 입장과 차이가 많다. 학자들마다 근대와 현대를 구분하는 관점이 다르기는 하나 보편적으로 2차대전 이후를 현대사로 취급하고 있다.

* 따라서 기독교역사에서도 19세기 말, 20세기부터 현대 교회사로 보기도 한다.

 

 

3. 교회역사 인물

 

우리는 2천년의 교회역사 가운데서 어거스틴, 루터, 칼빈, 요한 웨슬리, 무디 등 하늘의 별과 같이 빛나는 위대한 신앙 인물들을 수천, 수만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정된 시간에 모든 사람을 소개할 수는 없으므로, 앞으로 대략 40회 정도에 걸쳐 각 시대별로 대표성을 가진 인물들을 중심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그리고 한국 교회역사 인물은 교회역사 인물에 이어 소개할 계획이다.

 

앞으로 소개할 인물들을 대략 아래와 같이 제시하므로, 혹시 추가로 꼭 알고 싶은 인물이 있으면 추천하기 바란다.

 

● 초대 교회사

이레니우스/ 이그나티우스/ 져스틴/ 폴리갑/ 오리겐/ 콘스탄틴황제/ 크리소스톰/ 어거스틴

 

● 중세 교회사

그레고리황제/ 버나드/ 프란시스/ 토마스 아퀴나스/ 위클리프/ 존 후스

 

● 근대 교회사

마틴 루터/ 쯔빙글리/ 요한 칼빈/ 로욜라/ 사비에르/ 존 낙스/ 파스칼/ 조지 폭스/ 스페너/ 죠나단 에드워드/ 요한 웨슬리/ 윌리엄 캐리/ 조지 뮐러/ 리빙스톤/ 무디/ 허드슨 테일러

 

 

교회사인물

 

1. 폴리갑

 

  

 

폴리갑의 초상화

 

 

● 초대교회를 이끌던 베드로와 바울을 비롯한 사도들이 순교한 후, 사도들의 뒤를 이은 교회의 지도자들을 속사도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들이 교회를 이끌던 때를 속사도 교부시대라고 교회사에서 말한다. 교부(Father of the Church)란 ‘교회의 아버지’란 뜻으로 교황이 등장하기 이전에 교회를 이끌었던 지도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속사도 교부시대의 초기 인물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지난 시간 소개한 이그나티우스와 오늘 소개할 폴리갑(Policarp)이 있다. 이그나티우스와 폴리갑은 친구간이었는데, 당시 이그나티우스는 안디옥교회 감독이었고, 폴리갑은 서머나교회 감독으로 섬기고 있었다.

 

서머나(Smyrna) 교회는 요한사도가 요한계시록에서 밝힌 소아시아 일곱 교회(계3:10) 중의 하나로, 서머나의 현재 이름은 이즈미르(Izmir)라는 도시로, 터어키 남부 에게해 연안에 위치한 해안도시이며, 터키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이다. 서머나라는 이름은 ‘몰약’이라는 뜻이며, 소아시아지역에 있지만 오래전부터 헬라인들이 많이 이주하여 살았는데, 일리아드와 오딧세이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헬라의 서사시인 호머가 태어나 활약한 곳이 바로 서머나였다.

 

이 도시는 에게해(Aegene Sea)를 향해 펼쳐진 유명한 항구 도시로서 화재와 지진으로 여러 번 파괴되었고, 전쟁으로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했으나 알렉산더 대왕이 점령한 후 재건되었으며, 상업 도시로 크게 번성하여 흩어진 유대인들이 이곳에 많이 모여 살게 되었던 곳이다.

 

 

● 요한계시록에 보면 소아시아 일곱교회 가운데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받은 교회는 단 두 곳, 빌라델비아교회와 서머나교회다. 그 중에서도 서머나교회는 기독교인들이 유대인의 핍박과 로마황제에 대한 숭배 강요에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신앙의 절개를 지켰고, 다른 교회들과 달리 서머나교회는 오직 칭찬만 받았다.

 

그런데 서머나는 로마황제숭배를 위해 황제신전을 세운 최초의 도시로 기록될 만큼 로마에 대한 시민들의 충성도가 높았던 곳이다. 이같은 이교문화와 황제숭배의 중심지인 이곳에 사도 바울의 선교로 서머나 교회가 세워진 것으로 보인다(행19:10).

 

핍박이 강하면 신앙은 더 뜨거워진다. 다른 지역보다 악조건을 두루 갖춘 서머나교회가 이를 증명한다. 서머나 교회 성도들은 로마 황제숭배를 철저히 거부했고 이 때문에 큰 핍박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교도들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할 때 ‘이것은 나의 몸이요 나의 피’란 성만찬의 말을 인용해 기독교인은 식인종이란 말을 퍼뜨리며 괴롭혔다. 따라서 폴리갑은 AD115-156년까지 서머나교회의 감독으로 사역하는 가운데, 156년 서머나에 대대적인 기독교 박해가 시작되었을 때, 체포되어 화형에 처해졌다.

 

폴리갑은 예수님이 사랑하던 요한 사도에게 직접 교육을 받은 제자로, 그의 수제자로 알려져 있으며, 요한으로부터 서머나 교회의 감독으로 임명받았다고 한다.

 

 

● 폴리갑(AD.80-165)은 본래 안디옥 출신이었다. 구전에 의하면, 서머나의 어느 과부가 안디옥에서 폴리갑을 노예로 샀는데, 그가 너무 똑똑해서 그녀가 죽게 될 즈음에 폴리갑을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폴리갑은 젊었을 때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직접 받았다. 성격은 직설적이고, 정열적이었다. 20대의 청년 나이에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 되었고, 사도 요한의 가르침을 후대에 가르치고, 가르친 대로 삶을 증거했던 인물이다. 폴리갑은 친구인 이그나티우스가 순교한 후 약 반세기 후인 86세 때 아우렐리우스황제 치하에서 순교했다.

 

로마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황제는 처음에는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아첨하는 자들의 영향을 받아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그의 박해는 참혹했다. 기독교인들은 채찍에 맞아 온 몸이 찢기었고 속살이 드러나고 창자까지 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리고 나서도 그들은 땅위에 박아 놓은 창끝에 눕혀졌으며 온갖 종류의 고문을 받은 뒤에 사나운 짐승의 밥으로 던져졌다. 박해의 강도가 점점 심해지자 기도교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사나운 짐승들과 고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갖은 고문과 박해 속에서도 자신들의 신앙을 지켰다.

 

박해가 휩쓸고 지나갈 때, 폴리갑을 죽이기 위해 군중들이 들끓었지만, 폴리갑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계속 그 도시에 머물기를 원했다. 그러나 주위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에게 은밀하게 그 도시를 떠나라고 간청했기 때문에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농장으로 피신했다. 폴리갑은 몇 명의 친구들과 그곳에서 전 세계 모든 교회에 평화를 주시기를 주님께 간구했다. 이것은 그가 항상 해 온 습관이었다.

 

폴리갑이 체포되기 사흘 전날 밤, 기도 중에 자기가 베고 자던 베개에 갑자기 불이 붙어 타버리는 환상을 보았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즉시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 꿈을 해석해주었다.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예언하면서 폴리갑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불길 속에서 목숨을 바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추적하는 무리들 때문에 폴리갑은 자기를 염려하는 형제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 추적하는 무리들은 그곳까지 쫓아왔다. 무리들은 두 명의 소년을 붙잡아서 그중 한 아이에게 매질을 하면서 폴리갑이 숨어있는 곳을 말하게 만들었다. 해질 무렵 추적하는 무리들이 폴리갑이 있는 곳으로 왔을 때에, 그는 다락방에서 기도하고 있었다. 폴리갑은 더 이상 피신하지 않았다. 폴리갑은 쾌활하고 온유한 얼굴로 추적하는 무리들에게 말을 건넸다. 폴리갑을 본 적이 없는 그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 눈앞에 선 사람은 굳건하고 장엄한 얼굴을 한 노인이었으며, 이처럼 훌륭한 노인을 체포하기 위해 자신들이 달려온 것에 대해 부끄럽게 여길 정도였다. 폴리갑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제자들에게 그 사람들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도록 하고 마음껏 먹도록 청했다. 그리고는 한 시간 동안만 방해받지 않고 기도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들은 허락해 주었다. 폴리갑은 자신과 관련된 모든 사람들, 즉 위대한 사람이나 평범한 사람들, 귀족이나 미천한 사람들 그리고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을 위해서 기도했다.

 

무리들은 폴리갑을 나귀에 태우고 서머나 시로 데려왔다. 폴리갑이 경기장으로 들어갈 때 하늘로부터 “폴리갑, 강건하라! 대장부답게 싸워라!” 하는 음성이 들렸다. 경기장이 너무 소란했기 때문에 그 음성을 들은 청중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믿음의 형제들 중 다수가 그 음성을 들었다.

 

노령의 지방 총독 게르마니쿠스(Germanicus)가 재판정에 서게 되었다. 재판관은 폴리갑이 노인임을 생각하여 고문과 죽음을 당하느니 개심하도록 충고했다. 이때 폴리갑은 총독에게 말한다.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겨 왔는데, 그동안 그분은 한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소. 그런데 내가 어떻게 나를 구원하신 나의 왕을 모독할 수가 있겠소” 총독이 말한다.‘나는 사나운 짐승들을 준비해 두고 있소, 만일 당신이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당신을 그 짐승들에게 던져 버리겠소’ 폴리갑이 대답한다. “그 짐승들을 부르시오. 우리는 선을 버리고 악으로 돌이켜서는 안 되오, 오히려 악에서 돌이켜 덕을 택하는 것이 선한 일이오.” 뜻을 굽히지 않는 폴리갑을 향해 총독이 마지막으로 위협을 한다. “만일 당신이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당신을 화형 시키겠소” 폴리갑이 대답한다. “당신은 잠시 타오르다가 곧 꺼져버리는 불로 나를 위협하고 있소. 왜냐하면 당신은 장차 임할 심판과 악인을 위해 예비된 영원한 형벌을 알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요” 이렇게 대답하는 폴리갑의 얼굴은 확신과 기쁨으로 가득 차 있었다. 총독의 위협에 전혀 용기를 잃지 않았다.

 

청중들은 폴리갑을 산채로 태워 죽이라고 소리쳤다. 군중들은 상점이나 목욕탕으로부터 장작과 밀짚을 모아다가 단을 만들고 폴리갑을 그 위에 세웠다. 그들은 폴리갑을 큰 못으로 말뚝에 고정시키려했다. 그때 폴리갑은 이렇게 말했다. “나를 이대로 두시오. 나에게 화형을 견뎌낼 힘을 주실 그 분은 당신들이 못을 박지 않아도 장작더미 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견딜 능력도 주실 것이요.”그들은 못을 박지 않고 그냥 말뚝에 묶었다.

 

 

폴리갑이 마지막 기도를 한다. “사랑하는 복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당신에 관한 지식을 주신 아버지여! 당신 앞에 살고 있는 모든 천사들과 천군들과 피조물, 그리고 모든 의인들의 하나님이시여! 당신께서 오늘 이 시간 나로 하여금 순교자의 반열, 그리스도의 잔에 참예하게 하시어 내 몸과 영혼이 성령의 썩지 않은 축복 속에서 영생의 부활을 얻기에 합당하게 여겨주심을 감사하나이다. 오늘 나는 신실하고 참되신 하나님이신 당신께서 예비하시고, 계시하시고, 이루신 풍성하고 열납될 만한 제물로 당신 앞에 드려지기를 소원하나이다. 나는 이 모든 일을 인하여 당신의 사랑하는 독생자, 영원한 대제사장을 통해서 당신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며 영광을 돌리나이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이제부터 영원토록 영광이 있을 지어다. 아멘”

 

폴리갑이 기도를 마친 후 집행인들은 불을 붙였다. 폴리갑의 순교 현장을 목격한 믿음의 형제들이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불길이 크게 솟아올랐을 때 우리는 기적을 보았습니다. 거세게 일어나는 바람을 맞으며 불꽃이 갑자기 아치 모양이 되더니 순교자의 몸 주위를 비껴서 타오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폴리캅은 불에 타서 시커멓게 된 것이 아니라, 마치 구워지고 있는 빵처럼, 아니면 용광로에서 타는 금이나 은처럼 되었습니다. 더욱이 장작더미에서는 마치 몰약 냄새와도 같은 아주 향기로운 냄새가 넘쳐나왔습니다."

 

그래서 박해자들은 그를 칼로 찌르라고 명령했다. 칼로 그의 몸을 찌르자 피가 솟구쳐 올라 불이 꺼져 버렸다. 결국 박해자들은 숨이 끊어져 고통을 잊은 그의 시체를 불에 태웠다고 한다.

 

결국 그 사악한 사람들은 불로써도 그의 몸을 태울 수가 없다는 것을 알고서 사형 집행인을 시켜서 단검으로 그를 찌르게 하였다. 그가 단검으로 폴리캅을 찌르자 엄청나게 많은 양의 피가 한꺼번에 쏟아져 불이 거의 꺼질 지경이 되었다. 수많은 사람들은 불신자와 하나님의 택한 백성이 이처럼 다르다는 사실에 크게 놀랐다. 이 경건한 폴리캅이야말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이요, 하나님의 교회의 사도요 선지자요 교사였으며,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다.

 

 

나중에 기독교인들은 그의 뼈들을 취하여 적당한 장소에 가져다 놓았다.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그것은 세상의 귀한 보화보다도 귀중하며, 금보다도 더 순결한 것이었다.

 

 

 폴리갑의 순교 장면

 

● 폴리갑이 순교한 이후 이레니우스가 서머나 교회의 감독(장로)으로 지냈다. 2세기에는 파피리우스, 카메리우스, 유메니아의 트라시우스가 감독을 지냈다. 데시안 황제 박해시, 서머나 교회 감독(장로)이였던 피오니우스(Pionius)가 폴리갑의 순교 기념일에 체포되었다. 그는 순교하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서머나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멜데스 강가에 살면서 호머를 자랑으로 삼고 있는 여러분! 버림받은 사람을 보고 웃고 농담하는 그리스 사람들이여! 죽어 가는 사람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는 것이 거룩한 일이 아니라고 말한 너희 선생의 말을 들어라. 모세의 율법에 따라 사는 유대인들이여! 너의 원수의 짐승을 보거든 그의 짐을 내려주라. 너희는 그냥 지나치지 말고 가서 도와주라고 한 말을 들어라. 나는 주의 명령을 어기는 것보다 내 주님께 순종하기 위해 죽음을 택한다.”

 

 

피오니우스는 신들에게 희생 제물을 바칠 것을 요구 당했으나 그의 순수한 믿음을 지키며 순교의 반열에 들어갔다.

 

● 성경에 등장하는 초대 7대 교회의 대부분이 현재의 터키에 있다. 터키는 전국민의 90%이상이 무슬림으로 이루어진 국가이다. 따라서, 기독교 성지가 있다고는 하나 대부분의 초대교회는 흔적만 찾을 수 있을뿐 건물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현재 터키 이즈미르에 있는 폴리갑 기념교회(서머나 교회)는 AD 156년 경에 순교한, 서머나 교회의 초대감독이었던 폴리갑을 기리기위해 17세기에 지어진 교회이다.

   

 

교회 내부

 

 

2. 이그나티우스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

 

교회사 인물(제1강)

이그나티우스

 

 

● 안디옥의 성 이그나티우스(Saint Ignatius of Antioch)는 사도 베드로와 요한의 제자로 주후 70년부터 107년까지 37년동안 수리아 안디옥 교회의 제3대 감독으로 사역했던 인물로, ‘이그나티우스 데오포로스(Ignatius Theophoros)’ 즉 헬라어로 ‘하나님을 전하는 자’라고도 불렸던 신실한 교회지도자였다.

 

그는 로마의 트라야누스 황제 때(98∼117년) 로마로 압송되어 원형극장에서 들짐승에 의해 순교 당했는데, 그는 1세기 말부터 2세기 초까지, 즉 사도들이 순교당한 직후, 기독교가 유대땅에서 출발하여 헬라와 로마 세계로 퍼져나가는 전환기에 크게 쓰임 받았던 대표적 인물이다. 그는 순교를 열망하였고 그의 바람대로 순교당한 천국지향적 신앙인으로 유명하다.

 

그러면 이그나티우스가 사역했던 수리아의 안디옥교회는 어떤 교회였는가? 수리아의 안디옥교회는 우리가 이미 알다시피 예루살렘교회가 스데반집사의 일로 핍박을 받을 때 흩어진 성도들이 이주하여 처음 세운 교회로, 세계선교의 전초기지 역할을 했던 교회이다. 수리아의 안디옥은 로마, 알렉산드리아에 이어 로마제국 내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였다. 따라서 당시 손꼽히는 국제적인 도시에서 이방인들을 향해 복음이 본격적으로 전해진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오늘 읽은 행11장 본문에도 나와 있듯이,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에 복음의 역사가 크게 일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바나바를 파송하여 교회를 든든히 하였다. 바나바는 이때 사울(바울로 이름을 바꾸기 전)의 고향 다소까지 가서 그를 데리고 와서 함께 사역하여 교회를 크게 부흥시켰고, 이로 인해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을 ‘그리스도인들’(기독교인들)이라 일컫게 되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기독교)라는 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야로 믿는 종교를 ‘그리스도교’로 이름 붙인 사람은 바로 이그나티우스였다. 이그나티우스는 그의 서신에서 이 말을 최초로 사용하고 있다.

 

본문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울 때에 유대 본토의 교인들을 돕기 위해 안디옥교회가 일종의 성금을 거두어 바나바와 사울 편으로 보내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안디옥 교회는 이미 당시에도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행13장에 보면, 안디옥교회는 바나바와 사울을 구별하여 세워, 복음전파를 위해 이들을 이방세계로 파송했다. 이후에도 안디옥교회는 이방인선교의 대표 교회로 복음이 이방세계로 전파되는데 크게 기여한다.

 

이같이 수리아의 안디옥교회는 빛나는 신앙적 전통을 가진 교회였고, 초대교회 시절 바로 그 교회의 감독으로 섬기다 순교당한 이그나티우스는 사도들이 죽은 다음 교회의 역사를 이어간 속사도시대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 이그나티우스는 그의 순교 시기를 고려해 볼 때, A.D.30-35년경에 태어난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의 칠십여 평생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의해 잉태된 자"라는 별명으로 불려졌을 정도로 신실했다. 이그나티우스의 생애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으나, 전설에 의하면,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마 18:3)고 말씀하시며 무릎에 앉히고 축복하셨던 바로 그 어린아이가 이그나티우스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2세기 기독교 사회에서 이그나티우스에 대한 존경과 신망이 얼마나 두터웠는가를 짐작케 하는 것이다.

 

이그나티우스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나, 그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기초 자료는 그의 이름으로 남아 있는 서신들이 중심을 이룬다.

 

폴리갑, 이레니우스, 유세비우스 그리고 제롬 등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A.D.108년경 트라야누스(트라얀)황제 때 로마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어떤 죄목으로 그가 로마군인들에게 체포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며, 사로잡혀 지금의 터키 북서쪽에 위치한 드로아에서 로마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해 압송되고 있었다. 열 명의 로마 군인들에게 붙들려서 압송되어 가는 도중 그의 일행이 서머나(오늘날 터키의 이즈미르)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감독 폴리갑을 비롯한 서머나 성도들의 따뜻한 영접을 받았고, 에베소 등의 교회 대표들과도 만나 도움을 받았다. 이그나티우스는 그들이 떠난 후 서머나에서 그들에게 감사의 편지를 썼고, 또 앞으로 갈 로마의 교회에도 편지를 써 그들이 자신의 사면을 위해 탄원하지 말도록 부탁했다. 그의 이름이 기록된 서신은 모두 15점인데, 그 가운데 7점이 대체로 진정한 그의 작품으로 인정된다. 그의 일곱 편지는 로마를 비롯, 요한계시록의 일곱 도시 가운데 세 도시인 에베소, 빌라델비아, 서머나에 보내졌으며, 서머나 감독인 폴리갑에게도 보냈다. 이 서신들은 교회사에서 ‘2세기 교회가 전해준 가장 아름다운 보물들 가운데 하나’라고 평가되어 왔다.

 

그 중에서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의 순교관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그나티우스는 로마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로마교회가 교회들 가운데 사랑의 공동체로서 가장 모범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칭찬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는 이제 바로 그 로마로 가는 길에서 마침내 자신이 그리스도의 진정한 제자가 되기 시작했다고 고백하면서, 따라서 로마교회의 성도들이 자신을 살리기 위해 특권층이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사면을 얻어내게 된다면, 제자로서 완성되기 위해 걸어가는 길에서 자신이 벗어나게 될까 걱정하고 있다.

 

그는 바울과 달리(빌1:22이하) 사는 것과 죽는 것의 갈림길에서 단호히 죽음의 길을 선택했으며 순교를 향해 적극적으로 나아가는 자세를 취하였다. 그에게 있어서 순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며,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에게 기울어가는 것이며, 기독교인임을 증명하는 것이며,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며, 그리스도에게 이르도록 하는 것이며, 하나님에게 속하는 것이며, 진정한 사람이 되는 것이며, 하나님의 고난의 모방자가 되는 길이라고 확신하였다.

 

그는 편지에서 말하기를 로마 교인들이 그의 육신보다는 하나님을 위해 순교하는 마음을 더 귀중하게 여겨줄 것을 당부했다. “나는 내 자유의지를 따라 하나님을 위해 죽는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기를 바랍니다. 나는 하나님의 알곡으로 맹수 이빨에 갈아져 하나님의 순수한 떡으로 발견되기를 바랍니다. 맹수들이 나의 무덤이 되고 나의 몸을 남김없이 삼켜서 내가 잠들 때 내가 아무에게도 짐이 되지 않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기독교는 세상에 의해 미움을 받을 때 가장 위대합니다.”라고 썼다. 그가 이처럼 열렬히 순교를 사모한 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써만이 그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는 그 당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던 생각의 표현이었다. 그가 진정 두려워한 것은 죽음이 아니라 죽음 앞에서 뒷걸음치게 하는 나약함이었다. 그는 교회 성도들에게 자기에게 힘과 절개가 있도록 기도해주기를 부탁했다.

 

이그나티우스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이 고난을 받는 그리스도를 닮고, 그 고난을 나누며, 자신도 고난을 당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을 뜻한다고 여긴 것이다.

 

다른 편지에서 이그나티우스는 이단 교리에 대해 경고하고 정통교리를 확립하는데 기여했다. 그는 당시 기독교인들 가운데, 신약성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안식일을 준수하는 등 유대교 의식을 계속 따르는 유대교 복귀주의자들을 비판했다. 또한 그리스도가 오직 외형으로만 고난을 당하고 죽었다고 주장하는 가현설주의자들을 비판하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의 명확한 보증이라고 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실제로 죽지 않았다면 그리스도로 인한 고난과 그를 위한 헌신이 모두 헛된 일이라고 믿었다. 그는 영지주의자들과는 달리 영혼과 육체가 대립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이 육체보다 우월하며, 영적인 사람이 육체를 따라 사는 것도 영적이라고 보았다.

 

그는 이단들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감독제를 시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교회 직분을 집사와 장로와 감독의 셋으로 나누었으며, 마치 수금의 현이 수금에 밀착되고,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께 밀착되며, 성자 예수님께서 성부 하나님께 밀착된 것 같이 장로들이 감독에게 밀착되어야 교회의 조화로운 일치를 이룰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만약 감독이 없다면 교회도, 세례도 없고 성찬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이처럼 그는 교회의 성직자들의 위계체계를 옹호하고 감독의 권위를 강조했다. 다시말해 이그나티우스는 당시 심각했던 교회의 분열과 이단에 대항하기 위해 교회는 감독을 중심으로 통일되어야 함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그나티우스는 그의 서신에서 구약성경을 별로 인용하지 않는다. 그는 마태복음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고 일부 문구는 요한복음과 매우 흡사하다. 그러나 그에게 깊은 영감을 준 것은 무엇보다도 바울 서신이었다. 그는 특별히 고린도전서를 좋아하여 많이 인용하고 있으며, 그가 에베소에 보낸 서신에 보면 바울의 에베소서와 유사한 구절들이 많다.

 

그는 사도 바울을 많이 칭찬하는데, “바울은 거룩하심을 입고 좋은 평판을 얻었으며 주님께 은총을 받은 인물이었다. 내가 하나님께 이를 때에 그의 발자취 가운데서 발견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그나티우스는 결코 자신을 사도들과 같은 반열에 올려 놓지 않았다. “베드로와 바울이 한 것처럼 내가 여러분에게 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사도였으나 나는 한 죄수에 불과합니다.”

 

 

● 이그나티우스는 실로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를 철저히 버린 신앙의 위대한 스승이었다. 예수께서는 자기의 죽음과 구속의 일에 대하여 한 비유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12:24)고 말씀한 바 있는데, 이그나티우스는 이 말씀을 염두에 두고 자신이 "순수한 빵"이 되는 길은 "야수의 이빨에 의해 갈아지는" "하나님의 밀"이 될 때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한 알의 밀"이 되는 일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피 없는 순교이다. 자신을 부수고 썩혀 자기 존재가 사라질 때, 싹이 나고 열매를 열림 같이 오늘날 "그리스도인 되기"는 "세상이 더 이상 나의 몸을 보지 못할 그때, 진실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될 것"이라는 이그나티우스의 말에서 힌트를 얻는다.

 

참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좇는 그리스도인"이 필요한 때이다. 나는 과연 신앙생활 가운데서 나를 부인하고 살아가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제자의 길이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는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고 있는가 돌아보아야 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오늘 교회의 문제는 교인들이 살아있지 않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죽지 않은 데서 시작된 것이다. “No Cross, No Crown”(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이라는 격언이 있다. 누가 고난을 즐겨 하랴마는 죽음의 고통을 통해 부활의 영광을 얻는 것이 기독교적 역설이요 신비이다. ‘나를 죽여주시오!’ 하고 부탁하며 순교자의 영성으로 살았더 이그나티우스는 후대에 그의 뼈가 수거되어 안디옥으로 이송되었다가, 나중에 6,7세기경에 다시 로마로 이관되었다고 한다.

 

 

[출처] 교회사인물(제2강) 폴리갑|작성자 예레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