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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어거스틴(Augustin), 그의 모친 모니카

by 은총가득 2023. 12. 18.

 

 

● 영어로는 어거스틴(Augustin), 라틴어로는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라고 불리는 히포 교회의 감독은 4세기와 5세기에 걸쳐 서방교회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사람으로, 초대 기독교역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철학자요 사상가이자 목회자라 일컬어진다. 일반적으로 어거스틴은 고대문화 최후의 위인이자 중세의 새로운 문화를 탄생케 한 선구자로 평가되고 있는데, 천주교에서는 어거스틴을 토마스 아퀴나스와 더불어 최고의 신학자요 사상가로 인정하고 있으며, 우리 개신교에서는 신약성경 이후 종교개혁이 일어나기까지 사이의 기독교 사상사에서 가장 탁월한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그가 남긴 글들은 플라톤주의를 기독교 세계관과 인생관의 골격으로 사용하는 기독교 사상가들에게 아직도 하나의 모델이 되고 있으며, 개신교 종교개혁자들의 경우 대부분의 신학 사상들이 어거스틴에게서 출발된 것들이다.

 

 

● 어거스틴은 오늘날의 알제리에 해당하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 북아프리카 소도시 다가스테에서 AD354년 태어났다.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이교도의 하급관리였고 그의 어머니 모니카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다. 어거스틴은 어머니 모니카로부터 어릴적 예수님의 이야기와 복음에 대해 들었으나 세례를 받지는 않았다. 어거스틴은 고향과 인근 도시 마다우라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후 카르타고에서 공부를 하려 했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잠시 학업을 중단하기도 했다.

 

370년 집안 사정이 나아지자 아버지는 라틴어 문법과 수사학에 뛰어났던 어거스틴에게 수사학을 제대로 배우게 하기 위해 열 여섯의 어거스틴을 북아프리카의 수도 카르타고로 유학 보낸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어거스틴은 그곳에서 한 여인과 동거생활을 시작했고, 얼마 있지 않아 아들 아데오다투스를 얻었다.

 

 

 떳떳하지 않은 이 동거 생활은 이후 14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어거스틴은 아들을 몹시 귀하게 여겼는데, 이 아들은 열 여섯 어린 나이에 죽을 때까지 아버지 어거스틴 품안에서 살았다.

 

열 여덟 살 무렵 어거스틴은 키케로의 저서를 읽고서 철학에 심취하게 된다. 이제 세상 것들에 대한 애정은 시들해지고, 진리를 향한 열정으로 불타올랐다. 철학적 관심으로 성경도 읽어보았지만, 그 문체나 내용이 유치하게 느껴졌기에 금세 덮어 버리고 말았다. 어머니 모니카는 어거스틴이 자기와 같은 기독교인이 되기를 원했지만 당시 철학에 심취해 있던 그는 오히려 마니교의 이성적이고 체계적인 교리에 매력을 느껴 마니교를 지지하며 기독교 신앙을 거부했다. 이러한 아들의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과 절교를 선언한다.

 

생활비를 손수 벌어야 했던 어거스틴은 3년만에 유학 생활을 중단하고 고향 다가스테로 돌아와 수사학 학교를 차렸으나 그 이듬해에 다시 카르타고로 가서 9년 동안 수사학을 가르쳤다. 그 아홉 해 동안 어거스틴은 마니교 이단에 기웃거렸지만, 결국 마니교의 어설픈 교리 체계와 지도자들에게 실망하고 만다. 그리하여 28세경 낙심한 어거스틴은 연인과 아들을 데리고 카르타고를 떠나 로마로 건너가서 수사학을 가르쳤다. 로마에서 그는 한동안 아카데미아 학파의 회의주의에 빠지기도 했지만, 서른 살이 되었을 때, 친분관계를 통해 그는 당시 서로마 황제가 머물고 있던 밀라노 황실학교의 수사학 교수로 초빙되었다(384년). 이때 어떤 이유인지 알 수 없으나 14년동안 동거해온 여인과 헤어지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어거스틴은 어떻게 하면 황제에게 바치는 축사를 멋지게 꾸밀 수 있을까 고심하며 밀라노 거리를 거닐고 있을 때, 마침 싱글벙글 환하게 웃고 있는 거지가 눈에 띄었다. 바로 그 순간 어거스틴은 자신이 이토록 고달프게 추구하고 있는 인생의 행복이란 것들이 얼마나 거짓되고 보잘 것 없는 것이며, 어쩌면 지금 거지가 이미 맛보고 있는 작은 행복보다도 못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당시 밀라노에는 당대에 가장 뛰어난 성직자였던 암브로시우스가 감독으로 있었다. 어거스틴은 암브로시우스를 소개받고서 그의 설교를 들으러 갔다가, 그의 논리적이고도 확신감 넘치는 설교를 통해 성경의 참뜻과 그리스도교 진리를 조금씩 깨우쳐 갔다. 게다가, 황실의 고위직 폰티치아누스가 들려준 수도승 안토니우스에 관한 이야기는 어거스틴의 마음을 세차게 뒤흔들어 놓았다. 복음의 권고대로 자기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주님을 따라나선 수도승들의 삶에 비해, 아직도 엉거주춤 망설이고 있는 자신이 삶이 너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리하여 갈등 가운데 괴로워서 밀라노의 한 정원 무화과나무 밑에 홀로 주저앉아 비통한 심정으로 ‘언제까지, 언제까지입니까? 내일, 또 내일이옵니까? 지금은 왜 아닙니까? 어찌하여 제 더러움이 지금 당장 끝나지 않습니까?’라고 울부짖고 있을 때, 갑자기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Tolle lege, tolle lege!)는 어린아이들의 노래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그는 곧장 방으로 달려가 신약성경 로마서를 펼쳐 읽었는데, 그 본문이 바로 로마서13:13,14절이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이 한 말씀 앞에 그는 꼬꾸라졌고, 마음에는 기쁨이 넘쳐흘렀으며, 심령을 덮고 있던 모든 어두움이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386년).

 

마침내 하나님의 사랑에 눈뜬 어거스틴은 이렇게 노래했다. ‘늦게야 주님을 사랑했나이다. 이렇듯 오랜, 이렇듯 새로운 아름다움이시여, 늦게야 주님을 사랑했나이다!’ 어거스틴은 387년 부활절 밤, 밀라노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았다. 이때 그의 나이 서른 셋이었으며, 어머니 모니카가 지켜보는 가운데, 아들 아데오다투스, 친구 알리피우스와 함께 암브로스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가 밀라노를 떠나 채 고향에 도착하기 전 그의 어머니와 아들이 세상을 떠나고 만다. 고향 다가스테에 돌아온 어거스틴은 지니고 있던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었다(388년). 그리고는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고향집에 작은 수도 공동체를 세웠다. 그들은 밤낮으로 주님의 법을 묵상하면서 단식과 기도와 선행에 전념했다(388~391년).

 

어거스틴의 명성이 널리 퍼져나가기 시작하자 그는 온전히 수도생활에만 매달리고 싶어 혹시라도 교회의 공직을 맡게 될까봐 늘 조심했다. 그러다 한 번은 북아프리카 제2의 도시 히포를 방문하게 되었다. 그곳에는 연로한 발레리우스가 감독으로 있었다. 어느 주일날이었다. 발레리우스 감독은 자기를 도와줄 사제가 당장 필요하다고 강론 중에 하소연하였다. 때마침 그 자리에 어거스틴이 있었다. 이때 예배당에서 어거스틴을 알아본 신자들은 환호성을 올리며 몰려들었다. 어거스틴을 발레리우스 감독 앞에 억지로 데려간 그들은 어거스틴에게 사제 서품을 달라고 간청하였다. 어거스틴은 너무 당혹스러운 나머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이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이라 받아들인 어거스틴은 서른 일곱의 나이에 늦깎이 사제가 되었다(391년).

 

그는 사제서품을 받으면서 감독의 허락을 얻어 교회 옆에 수도원을 세웠으며, 과거 자기가 몸 담았던 마니교의 허구를 비판하는 등 많은 설교 활동도 했다. 특히 구원은 신의 힘만이 아니라 인간의 노력이 보태어져야만 한다고 주장했던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해서 단호히 반대하였는데, 그는 인간의 공로보다 하나님의 은총을 강조하였으며, 이같은 어거스틴의 신학적 성취는 이후 종교개혁 사상에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사랑과 겸손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섬기며 수도 생활과 사제 생활을 함께 하던 어거스틴은 395년 발레리우스 감독이 노쇠하자 그의 공동 감독으로 선출되어 4년동안 감독을 보좌하다가, 발레리우스의 뒤를 이어 히포의 감독이 되어(397년) 평생동안 히포교회와 북아프리카 교회를 위해 목회하였다.

 

참된 목회자이며 탁월한 사상가로서, 모든 교부들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어거스틴의 복음적인 열정은 죽는 날까지 식을 줄을 몰랐다. 병이 깊어져 이 세상 마지막 나날을 보내는 동안에는 다윗의 참회 시편 일부를 옮겨 적어 벽에 붙이게 하고는, 침대에 누운 채 날마다 그것을 되새기고 읽었으며, 뜨거운 눈물을 끊임없이 흘렸다. 그것은 자신의 죄에 대한 참회의 눈물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과 자비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었다.

 

40년 가까이 히포교회의 감독으로 교회를 섬긴 어거스틴은 AD430년 8월28일, 반달족이 히포를 점령하기 얼마 전 피난민을 돌보다가 걸린 열병으로 7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430년 세상을 뜰 때까지 그가 쓴 책은 무려 117권. 어거스틴을 흠모했던 그의 제자 이시도레는 “그의 책을 다 읽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거짓말쟁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어거스틴은 신학의 주제뿐만 아니라 전쟁과 평화, 국가론, 사회와 정치, 역사 등에 대해서도 논하고 있어 현대사회에 제기된 거의 모든 학문의 영역을 다 다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사상은 중세 1000년은 물론 종교개혁을 거쳐 근·현대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사실 모든 신학적 주장은 어거스틴을 기준으로 그에게서 얼마나 가깝고 얼마나 거리를 두고 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할 정도이다.

 

종교개혁가 루터와 칼빈은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해 구원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의 예정과 은총으로만 가능하다”는 어거스틴의 신학에 의지해 로마가톨릭은 물론 인본주의자였던 에라스무스와도 싸웠다. 어거스틴은 루터 이전의 루터였던 것이다. 어거스틴은 프로이트보다 먼저 인간의 무의식을 분석했고, 주지주의에 대항해 인간의 행동과 생각을 이끌고가는 본능(Libido)의 존재를 주장했다. 그밖에도 수많은 현대 신학자들이 어거스틴의 영향을 받았다.

 

● 그는 끊임없이 마니교나 펠라기우스주의 같은 이단과 논쟁을 벌였지만 그가 이룩한 신학적 특징은 논쟁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의 저작들을 통해서였다.

어거스틴은 사랑의 질서가 파괴된 데서 인간타락의 의미를 찾았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 인간은 자기사랑을 추구하고 자기보다 낮은 것에 예속되었다. 인간은 자기 행위로 타락했으며 자기의지로는 타락의 결과를 돌이킬 수 없다. 영이 육에 예속되었으므로 인간은 노예이며, 그러한 노예의지는 구원 자체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 필요한 것은 무게중심을 뒤집는 일이다. 밑으로 내려가는 사랑을 위로 올라가는 사랑으로 바꾸어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은 죄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의 은총으로만 가능하다고 믿었다.

 

마지막 인생을 살면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복되게 사는 것은 단지 오성(이성)에 따라서 사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람의 생각에 따른 삶일 것이다. 복되게 사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에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생각에 따라 사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복된 길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의 심령에, 우리 성도님들의 가정에, 우리 성도님들의 직장에, 여러분의 앞길에 하나님의 무한하신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성 어거스틴의 고국 알제리

 

 

히포의 유적 

 

히포의 유적

히포의 현재 모습

 

어거스틴이 세례를 받은 밀라노 대성당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

 

필리핀 마닐라에 있는 성어거스틴 박물관

 

성어거스틴 박물관 내 정원

 

성어거스틴 수도원 교회

 

이곳의 파이프 오르간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유명하다.

 

어거스틴 어머니 모니카 

 

교회사인물(제11강)  모니카(벧전3:1-7)

 

 

● 어거스틴은 사도바울 이후 가장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로서 서방 교회의 아버지라 불립니다. 그는 북아프리카 히포(Hippo)교회의 감독으로서 초기기독교를 정리하고 중세기독교를 연 기독교 역사의 한 획을 그은 교부입니다. 그런데 이같이 위대한 기독교 역사 인물 어거스틴 뒤에는 모니카라는 어머니가 있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합니다. 성어거스틴의 생애는 어머니 모니카를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을 만큼, 그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던 것입니다. 모니카의 삶은 너무나 힘겹고 어려웠으나 그녀는 자신의 처지에 굴복하지 않고 믿음으로 자신을 지킨 신앙인이었으며 끝까지 기도하여 방탕한 아들을 성자로 만든 위대한 어머니였습니다.

 

경건한 어머니의 표상인 성녀 모니카는 AD332년 아프리카 북쪽, 지금의 알제리의 북동부에 위치한 타가스테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양친은 기독교 신앙이 돈독했던 명문 출신으로 엄격하면서도 자애로운 분위기 가운데서 자랐습니다. 어린 모니카는 선량한 성격을 지닌 재미있고 온순한 아이로 기도나 교회에 가는 것을 무엇보다도 좋아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하는 마음이 남달랐고 특히 병중에 있는 빈민에게는 따뜻한 동정의 손을 펴 가끔 자기의 음식물까지 아낌없이 나누어 주는 때도 있었다. 또한 그녀는 용감스런 순교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해서 가족 중에서 누가 순교자의 이야기만 하면 언제나 열심히 듣는 편이었다.

 

이와 같은 성격과 신심 때문에 사람들은 모니카가 수도자로서 처녀로 일평생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집안은 매우 가난했다. 그래서 양친은 모니카를 결혼시키려고 결정했고, 그녀는 온순히 부모의 뜻에 따랐다.

배우자는 기독교 신자가 아닌 파트리치오라 하는, 한 집에 살고 있었던 로마인이었다. 그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으며 나이도 모니카의 배 이상이나 되는 사람으로 난폭하고 걷잡을 수 없는 한량이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젊은 아내를 사랑했던 것 같았으나 후에 마음이 변해 냉정한 태도를 취했다. 그는 아내의 자비심과 동정심을 비난했다. 그것만으로도 모니카에게는 큰 고통이었는데 게다가 시어머니마저 까다로운 성격으로 매사에 모니카를 괴롭혔다.

 

실로 이같은 환경은 모니카로 하여금 ‘잔소리가 심한 아내, 모진 며느리, 희망을 잃어버린 부모’가 되게 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이 같은 시련과 유혹에 굴복하지 않았다.

모니카는 자신의 신앙과 기도의 힘으로, 최후에는 승리를 얻어 남편과 시어머니를 회개시킬 수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오늘 읽은 벧전3장 본문 말씀이 모니카에게는 큰 힘이 되었다(3:1읽기).

 

다행히 남편은 자신을 반성할 줄 아는 사람이었고 겉으로 비난은 했지만 항상 그녀를 존경했다. 이리하여 우선 그녀의 아름다운 태도에 감복하여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시어머니였다. 그 후 남편 파트리치오도 모니카의 일상생활에 감명을 받아 행동을 고치며 종교 이야기에도 점차 귀를 기울이게 되어 마침내 세례를 받고 신앙심이 깊은 신자가 되었다.

 

남편 파트리치오는 세례를 받은 지 1년 후인 371년 세상을 떠났다. 그때 모니카에게는 유년기를 넘긴 아들 어거스틴과 나비지오, 딸 페르페투아 삼남매가 있었다. 그 중 맏이인 어거스틴이 가장 유명하지만 오히려 그는 오랬동안 어머니를 괴롭힌 불효자였고, 어거스틴의 남동생 나비지오는 성실한 교회 감독으로, 또 여동생 페르페투아는 어머니를 닮아 탄복할만한 신심을 가진 여성수도원 책임자로서 성별된 삶을 살았다.

 

남편 파트리치오가 죽었을 당시 장남 어거스틴은 17세였으며, 카르타고의 수사학교 학생이었다. 남편이 죽기 전 가정 형편이 좀 나아지자 어거스틴의 부모는 어거스틴을 공부시키기 위해 나머지 가족을 희생시키면서까지 그를 카르타고로 유학을 보냈던 것이다. 하지만 어거스틴은 보모의 기대와는 달리 카르타고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신앙을 저버리고 향락에 빠졌으며 오래지 않아 마니교에 들어갔다. 어거스틴의 학교성적은 우수하였으나, 이것이 어머니 모니카에게는 아무런 위로도 되지 못했다. 어거스틴은 한 아프리카 여자와 사랑에 빠져 동거하며 아이까지 낳았다. 지금 이대로 나간다면 아들의 앞길에는 멸망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니카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 아들과의 관계를 끊고 집안 출입을 금하는 등 강경하게 대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을 생각하다 참지 못하게 된 모니카는 다가스테 교회의 감독을 방문하고 자기 고민을 털어 놓았다. 감독은 눈물을 한없이 흘리며 말하는 모니카의 말을 다 듣고 나서, “안심하십시오. 눈물의 아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하고 말했다.

 

모니카는 감독의 그 말을 천상으로부터 받은 대답으로 생각하고 더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 그때부터 모니카는 방탕한 아들 어거스틴을 위해 더욱 열심히 기도하고 금식하며 아들의 구원을 위해 매달렸다. 모니카는 아들의 품행이 아무리 나쁘다 하더라도 절대로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그를 독한 말로 꾸짖지 않았다. 도리어 부드러운 태도로 그의 마음을 돌리려 했다. 그러기 위해 그녀는 남몰래 끊임없이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께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이후 아들이 가는 곳은 어디든지 따라갔다. 카르타고에도 갔다가 이탈리아의 로마로 또 밀라노에도 따라간다. 그녀는 아들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정으로 잠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 방황하던 어거스틴은 29세가 되었을 때, 아프리카에서의 생활을 청산하고 로마로 가서 자신을 꿈을 펼치고자 결심했다. 모니카도 함께 가기를 원했다.

그런데 하루는 어거스틴이 어머니에게 친구와 작별 인사를 하러 선창에 간다고 말하고는 그길로 동거하던 여인과 어린 아들을 데리고 로마로 가는 배를 타버렸다. 모니카는 어거스틴의 자신을 떼놓고 떠나버린 것을 알았을 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모니카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들의 뒤를 따라 그녀도 로마로 갔다. 하지만 모니카가 도착했을 때 어거스틴은 이미 로마를 떠나고 없었다. 수소문 끝에 어거스틴이 밀라노로 간 것을 확인하고서, 비록 여행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지만 모니카는 아들을 만나기 위해 밀라노로 갔다.

 

그런데 밀라노에는 당시 가장 존경받던 감독 중의 한 사람이었던 암브로시우스가 있었다. 어거스틴은 가끔 그의 설교를 들으러 가게 되었는데, 모니카의 기도 덕분인지, 어거스틴은 암브로시우스 감독의 설교를 통해 기독교 진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한번은 어거스틴이 직접 암브로시우스 감독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암브로시우스는 즉시 이 청년의 영혼 상태를 간파하고 온화한 태도로 일일이 확증을 들어 기독교의 진리를 설명해 주었다. 어거스틴은 거부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그의 마음은 대단히 감동되었으나 아직 자기 거취를 결정짓지 못하고 있을 때, 거룩한 이집트의 은둔수도자들의 전기를 읽게 되었고, 저들의 고행과 수련생활에 매우 감동되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아! 우리는 얼마나 한심한 인간들이냐? 세상의 무식한 자들은 온 힘을 다해 천국을 차지하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학문이 있다는 우리가 육욕의 노예가 되어 있다니, 이 무슨 꼴이냐? 부끄러운 일이다. 부끄러운 일!"

 

그리하여 모니카의 권면으로 그는 동거해 온 여자를 고향으로 돌려보내었으나 어거스틴은 여전히 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그는 “왜 나는 이 더러운 생활을 깨끗이 끝내지 못할까?” 하며 애통하고 부르짖으며 폭우 같은 눈물을 쏟으면서 회개하다가 이웃집 뜰에서 아이들이 떠들며 노래를 부르는데 "집어서 읽어라, 집어서 읽어라" 라는 음성이 들렸고, 이에 그는 서재로 뛰어 들어가 성경을 펼쳐 읽는데, 그것이 바로 지난 시간에 보았던 로마서13:13,14의 말씀이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놀랍게도 이 말씀이 어거스틴의 폐부에 깊이 박혀 들어갔다. 이것은 어거스틴의 오랜 방황이 끝나는 순간이었으며, 장차 기독교의 역사를 바꾸어 놓을 위대한 순간이었다.

 

모니카는 고향 타가스테에 있었을 때와 같이 밀라노에서도 신앙심 깊은 부인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녀는 어거스틴이 교육을 받고 있는 동안에도 끊임없이 어거스틴을 위해 기도했다. 드디어 AD387년 부활절에 어거스틴과 그의 친구 몇 사람은 암브로시우스감독에게 세례를 받게 된다.

 

● 우리 주변에 보면 끝도 없는 자식의 방황과 탈선 앞에서 ‘죽을 고생’을 다 하는 어머니들을 가끔 만나게 된다. 어느 정도라야 하는데, 어떤 녀석들은 그 정도가 지나칩니다. 해도 해도 너무할 때가 있습니다. 자식이 아니라 ‘웬수’입니다.

어떤 어머니는 자다가도 수시로 걸려오는 전화벨 소리에 놀란 가슴이 심장병이 되기도 한다. 자식이 저지른 사건 뒷감당하느라 어머니는 바쁩니다. 부지기수로 파출소로 불려가기도 하고 몇 번이나 법정에 서기도 한다.

그런 상황 앞에서 대개 주위 사람들은 ‘더 이상 안 되겠다. 포기하고 호적에서 파라’ 하고 권고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 어머니들은 끝까지 자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불려가는 곳 마다 눈물로 하소연합니다. 자식 때문에 너무 울어서 더 이상 흘릴 눈물이 없을 때까지.

 

그런데 오늘 우리는 어거스틴의 어머니 모니카를 통해 다시한번 확신하게 됩니다. 어머니가 자식 때문에 흘린 그 눈물을 하나님께서는 결코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혹시 자식 때문에 지금도 기도하고 계십니까? 염려하지 마십시오. 눈물의 아들은 결코 멸망하지 않습니다.

멸망할 아들 어거스틴을 위해 날마다 눈물로 지새우던 모니카의 눈물의 기도와 사랑의 헌신이 결국 하늘을 감동시키고 아들을 살려내었다.

 

아들을 위해 무려 16년간이나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속에도 오직 자식의 회심을 위해 눈물과 기도의 헌신을 다해온 모니카는 아들이 회심하여 세례를 받은지 얼마되지 않아 큰 병을 얻게 됩니다.

어거스틴은 개종 후 밀라노를 떠나 북아프리카로 돌아가기로 작정하고 어머니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여정에 오르는데, 배를 타기 위해 이탈리아 오스티아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모니카의 병이 깊어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아들 어거스틴의 회심으로 인한 기쁨에 모니카는 목전에 다가온 죽음조차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모니카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들아, 내게 있어서 세상 낙이라곤 이제 아무것도 없다. 이 땅에서의 가장 큰 소망이 다 채워졌는데 다시 더 할 것이 무엇이 있다고, 왜 이렇게 살고 있는지 모르겠다. 내가 이 세상에서 좀 더 살고 싶어 했던 것은 한 가지 일 때문이었다. 내가 죽기 전에 네가 주님의 자녀가 되는 바로 그것이었단다. 하나님께서 과분하게도 내 청을 들어주셨구나. 네가 세속의 행복을 끊고 하나님의 종이 된 것을 보게 되니,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니?”

 

객지에서의 급작스런 어머니 죽음 앞에 너무나 슬퍼 제 정신이 아니었던 어거스틴에게 모니카는 이렇게 당부한다.

“아들아, 내 몸뚱이야 어디다 묻든지 그 일로 해서 조금도 걱정하지 말거라. 한 가지만 너에게 부탁한다. 네가 어디 있든지 주님의 제단에서 날 기억해다오.”

이리하여 위대한 눈물의 어머니 모니카는 회심한 아들 어거스틴의 간호를 받으며 고요히 눈을 감았습니다. 때는 AD387년, 모니카의 나이 56세였다.

 

어거스틴은 꼬박 하루를 슬픔에 잠겨 기절해 있었다고 합니다. 이튿날 어머니의 죽음을 확인하고는 가슴을 치며 자신의 오랜 방황에 대한 어머니의 고통을 생각하며 눈물을 쏟았다고 합니다.

이후 어거스틴은 고비마다 어머니의 희생과 사랑과 눈물의 기도를 생각하면서 자신을 채찍질했고, 사도 바울의 뒤를 계승하는 기독교의 역사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설 수 있었다.

실로 어머니 모니카를 통해 어거스틴의 가슴에 담겨진 사랑의 빛은 그의 신학 형성과 후대의 신학 사조에 지대한 영감을 불어넣는 촉매제가 되었다. 모니카의 그같은 희생과 기도가 결국 교회 역사를 바꿔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그의 고백록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오늘의 제가 있는 것은 모두 어머니의 덕택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어머니는 한 남편의 정숙한 아내였고, 부모님께 순종하였으며, 자기 집안을 경건하게 다스렸고, 착한 일을 하여 칭찬을 받았으며, 자식들이 당신의 길에서 떨어져 가는 것을 볼 때는 그들의 출산 시에 겪었던 산고를 다시 겪듯 괴로움을 몸에 느끼면서 그들을 길러냈습니다.”

 

지금 고통스럽게나 슬픔 가운데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슬픔이나 고통의 기간이 길수록 더 큰 은총을 내려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머니들이 모두 모니카와 같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자식을 위해 어머니들이 흘리는 기도의 눈물이야말로, 자식을 변화시키는 가장 강력한 무기라는 사실입니다. 아무쪼록 우리 동산교회에도 모니카를 닮아가는 기도의 어머니들이 많이 일어나서, 세상을 크게 유익하게 하며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훌륭한 인재들이 많이 배출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잠23:22).”

 

 

 [출처]작성자 예레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