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레고리는 540년경 로마에서, 펠릭스 3세(483~492)와 아가페토 1세(535~536) 등 두 명의 로마교회 지도자를 배출한 부유한 원로원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 고르디아누스는 원로원 의원이었고 모친 실비아는 신심이 돈독했다. 아버지는 귀족으로 정부의 요직에 있었으나 그레고리의 탄생 후에 가문, 재산, 고위관직을 헌신짝같이 버리고 성직자가 되었던 사람인만큼, 그들의 자녀인 그레고리오가 원래 신심이 두텁고 성덕이 출중했던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따라서 그레고리는 로마의 귀족가문의 자제로서 당시 로마제국의 최고 교육을 충분히 받을 수 있었으며 수사학, 법학, 철학 등을 전공하였다. 이런 가운데 그레고리는 특히 성 암브로시우스,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제롬 등 위대한 신학자들의 저서를 읽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고 한다.
● 영원한 도시 로마, 찬란한 문명을 이룩하고 서구 사회의 핵심적 도시였던 로마는 410년경 게르만 부족인 서 고트인들에 의해 약탈된다. 이후 서로마 제국은 몰락하기 시작했다. 이민족들이 수시로 서방을 침략했다. 하지만 이러한 혼란들은 새로운 시대를 여는 신호이기도 했다. 그리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등불의 역할은 교회에 맡겨졌다.
특히 빼어난 능력을 지닌 교황들이 등장해 교회와 세상 안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으며 그 중에서도 그레고리오 1세 교황의 업적은 가장 두드러진 것이었다.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전에 있는 대 그레고리오 교황의 묘비에는 라틴어로 「Consul Dei」라고 적혀있다. 「하나님의 집정관」이라는 이 호칭은 그가 사회와 교회 안에서 수행한 이중적인 역할을 함축적으로 묘사한다.
그의 통치 기간 중에 세속 권력과 교황의 관계에는 변화가 있었다. 이방 칩입자들의 새로운 물결이 교황으로 하여금 정부에 보다 깊이 개입하도록 만들었다. 콘스탄티노플의 황제가 침입자들을 물리칠 수 없었고 서방의 로마 권력은 붕괴되었기 때문이다. 교황권은 민간권력이 결여한 자원과 함께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교황권만이 유일하게 효과적인 지도력을 제공할 수 있었다.
많은 개인들이 죄 용서를 위한 종교 당국의 중재 기도에의 답례로서 교회에 자신들의 토지를 유증하였다. 교황은 그와 같이 기증된 재산들을 관리하며 거기에서 나온 수입을 이용해 이전의 정부가 행사했던 기능을 발휘하였다. 그레고리는 가난한 자들에게 식량과 도움을 제공하였으며, 야만인들에게 자로잡힌 개인들을 속량하였고, 로마의 멸망을 면하기 위해 그들과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는 또한 콘스탄티노플의 황제 및 프랑스, 스페인, 잉글랜드 등지에 이방 왕국들과 외교 관계를 유지하였다.
교황으로서 그는 혼란한 시대가 요구하는 소명을 뛰어나게 완수했다. 그럼으로써 그는 교회 역사에서 몇몇 인물에게만 부여되는 「대」(Magnus)라는 칭호를 얻었고, 암브로스, 제롬, 어거스틴과 함께 서방교회의 4대 교부(敎父)의 한 사람으로 칭송받았다.
그는 최초의 수도사 출신 교황이다. 탁월한 정치력으로 이탈리아에서 로마 교회의 독립성을 확고하게 하였으며, 비잔틴 제국과 롬바르드족(族)과의 관계를 조정하는 등 외교 역량도 돋보였다. 성직의 매매를 금하고 복음화사업·사회사업을 장려하였으며, 특히 빈민·난민·포로·노예를 보호하면서, 로마·시칠리아 등의 교황령(敎皇領)을 확보, 교황권을 확장하였다. 게르만 민족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멀리 앵글로색슨에게까지 전도하고, 특히 프랑크족(族)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욥기》와 복음서를 비롯하여 많은 성서해설과 서간문·사목규칙(司牧規則) 등의 저술을 통하여 종교·문학 방면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 밖에도 성가집 《그레고리오 성가(聖歌)》를 편찬하게 하여 교회음악 발전에도 이바지하였다.
워낙 뛰어나 업적을 남긴 사람이지만 교리상으로 아주 나쁜 몇 가지 과오를 저질렀습니다. 연옥설을 만들어 낸 것과 교황권 확립이지요. 사실 자신은 교황이라 불리우기를 단호히 거절했지만, 사실상 교황권의 기초를 확고히 다지는 일을 다 한 것입니다. 따라서 후대 사람들은 그레고리를 교황의 시초라 생각한다.
롬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침략이 로마를 위협하고 있을 당시, 30세 경의 그레고리는 이미 유스티노 황제의 신임을 받아 로마 제국의 중직에 취임하는 명예를 획득했으나, 얼마후 부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그레고리는 관직을 사임하고 수도의 길을 선택하여 절제와 금욕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곧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을 정리하여 시칠리아 섬에 여섯 개의 수도원을 세우고, 로마에 있는 저택을 베네딕토회 수도원으로 개축해 성 안드레아에게 봉헌한다. 그리고 남은 재산은 모두 가난한 자들을 돕는데 헌납하고 자신은 즉시 세속을 떠나 수도 생활을 시작했다.
수사가 된 그는 전심전력 덕을 닦고, 회칙을 엄수하며, 열심히 기도하였는데, 금식을 실행하는데 있어서 과격할 정도로 실행한 결과 위(胃)를 크게 해하기까지 해서 이 병은 평생의 고질이 되었지만, 그의 왕성한 정신력은 육체의 허약함을 채우고도 남음이 있었다.
※ 성경은 우리의 정신은 고결하고 우리의 육신은 사악하다고 가르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 몸은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성령의 전이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의 육신을 잘 관리할 책임이 있다. 요즘은 육신을 너무 소중히 여겨 우상처럼 섬기는 것이 문제이지만, 자신의 몸이 병들지 않고 건강을 유지함으로써 하나님의 선한 사업을 감당하는데 연약한 육신이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잘 관리하는 자세는 필요하다. 그런데 육신에 대한 감각이나 태도는 사람마다 많은 차이가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조금만 피곤해도, 열만 조금 나도 드러눕고 만사를 제쳐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지간한 감기 정도는 거뜬히 이겨내고 자신의 사명을 충성되게 감당하는 사람도 있다. 몸을 잘 관리하는 자세는 필요하지만, 정신이 육신의 조그만 고통도 참아내지 못하고 그것에 사로잡혀 나약하게 살아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교회역사 속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들을 접하면서, 저들의 강인한 정신력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모든 충성된 교회의 인물들은 한결같이 강인한 정신력의 소유자들이었다. 어지간한 육신적 고통이나 어려움으로는 저들을 쓰러뜨릴 수 없었다. 성도 여러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신앙고백은 우리의 육신의 고통과 연약성까지도 뛰어넘는 능력의 말씀임을 깨닫기 바란다. 그러므로 어린아이와 같은 연약성에서 벗어나서 잘 참을 수 있는 어른스러운 장성한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섬길 수 있기를 바란다.
● 당시의 정치적, 종교적 상황이 그레고리를 계속 수도원에만 머물 수 없게 만들었다. 그 시대가 그의 능력을 절실히 필요로 했다. AD578년 그레고리가 38세 되었을 때, 그는 로마교회의 일곱 집사 중 하나로 선출되었고, 그 다음해에 그의 능력이 인정되어 그는 당시 로마제국의 수도였던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 궁정에 로마교회의 사절로 파견된다. 그레고리는 그곳에 머물며 외교적, 정치적, 종교적 경험을 쌓았으며, 또한 그곳에서 만난 수많은 영향력 있는 인물들과는 평생 동안 관계를 맺게 된다.
AD586년경 로마로 돌아온 그는 자신이 전에 세운 수도원의 원장직을 맡아 일하면서 수도생활의 규율 개선과 수도원 확장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와같이 절제와 경건 속에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종’이 되기 위해 수도원을 위해 일하던 가운데, 그의 나이 50세 때인 AD590년 수도자로서는 최초이며 또 유례없는 만장일치로 로마교회의 수장으로 선출된다. 이때 그레고리오는 그 직분을 맡기를 사양했던 것으로 전해지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여전히 수도생활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로마교회의 수장이라는 무거운 직책이 자신의 영성생활에 장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신심이 깊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론보다는 실천적이었고, 매우 좋지 못한 건강에도 불구하고 중세 교황권의 창시자로 불릴 만큼 활동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 직책을 수락하고 중세 교회의 기틀을 닦는데 기여한다.
● 로마교회의 수장으로서의 그레고리의 활동은 후대의 교황들과 중세의 교회에 중요한 선례를 남겼다. 그는 로마교회의 감독으로서 종교적인 지도자였지만 세속적 업무에 깊이 관여하게 된다. 그레고리는 로마교회의 감독직에 오르면서 그의 행정수완과 광대한 이상, 그리고 불굴의 실천력으로 교직제도를 개편하고 교회의 규율을 강화함으로써 교회 소유의 모든 영지를 쉽게 관할하게 되었고, 교회령으로부터 나오는 수입으로 교회의 각종 구제사업은 물론 교회의 영향력을 강화하는데 사용하였다. 실로 로마의 황실의 재정은 바닥이 날 지경이었으나 로마교회의 재정은 나날이 견실해져만 갔다.
당시 로마 제국의 수도는 콘스탄티누스황제 이후 콘스탄티노플이었는데, 수도의 위치가 동쪽으로 치우쳐 있다보니 아무래도 제국의 서쪽 지역은 제대로 관리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로마는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상당히 위축된 가운데 이민족들의 침공 앞에서도 속수무책이었다. 그래서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를 침공해 로마와 라베나 사이에 위치한 영토를 점령했지만 로마의 황제는 그들을 쳐부수기 위해 군대를 보내려고 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그레고리는 그들에게 자신의 군대를 보내 그들의 왕과 잠정적인 평화를 맺었다. 후에 그는 로마시가 약탈을 면하도록 하기 위해 롬바르드인들에게 공물을 바치기도 했다. 그는 이러한 활동에 재정을 조달하기 위해 남이탈리아, 코르시카, 시실리, 고올, 북아프리카 등지의 로마교회 소유 토지들로부터 들어온 수입을 사용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수입은 가난한 자들을 돌보며, 롬바르드인들로부터 포로를 되찾아 오는데도 사용되었으며, 도시의 행정 업무를 수행하는 데도 지출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업무를 이행하는 주최가 로마제국의 황제나 장군, 관리가 아니라 로마교회의 감독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자연스럽게 교회의 제도는 중앙집권제 형태로 서서히 조직이 강화되어 나갔으며, 그레고리는 로마제국의 서쪽 지역 전체를 총지휘하는 총감독의 신분으로 교회의 우두머리였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흐르면서 마침내 그레고리는 당시 무력한 황제를 뛰어넘어 로마제국의 실질적인 권력자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더욱이 6세기에 이미 로마제국의 동쪽과 서쪽은 소원해져 있었는데, 동방에는 여전히 황제가 있었으나 서방의 속령들은 로마제국으로부터 점차 독립하여 이민족 정부에 의해 정복되었다. 하지만 그레고리는 로마제국의 동방과 서방 두 세계를 모두 관여하였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 감독이 그레고리를 ‘보편적 교황’(범 세계적인 교황)으로 지칭하게 된 것이다.
물론 그레고리는 그 칭호가 허영심을 자극하고 기독교적 사랑을 손상시킨다고 주장하면서 그 칭호를 거부하고 ‘하나님의 종의 종’이라는 칭호를 사용했지만, 이미 세상의 흐름은 로마교회의 감독 그레고리를 로마제국의 종교는 물론 정치, 경제, 군사에까지 실권을 쥔 교황으로 인정하고 있었다.
● 그레고리교황의 업적 가운데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선교에 관한 것이다. 선교에 대한 그의 열정은 이후 유럽 전역의 기독교 전파에 지대하게 공헌하는데, 6세기경 기독교의 분포는 로마제국내에 한정되어 있었다. 로마제국 이외의 지역은 무방비 상태였다. 간헐적으로 진행되던 선교 사업은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중단되고 하였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복음을 전하고 교회로 인도하더라도 한 사람이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변화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요구되는 어려운 과정이다.
중세 초기 선교의 첫 번째 대상은 영국이었다. 영국은 이미 3세기에 교회가 세워졌다. 그러나 200여년 명맥을 유지하다가 로마교회의 계속적인 보살핌과 협조가 없어 자라지 못하다가 앵글로색슨족의 침입으로 인해 그마저도 소멸될 처지였다. 이때 영국의 교회를 다시 살린 것이 바로 그레고리교황이었다.
그가 베네딕트 수도원장으로 있을 때, 한번은 로마의 노예시장에서 너무나 하얀 피부와 금발을 지닌 앵글로색슨족 소년들이 노예로 매매되는 것을 보고서, 그들의 용모에 감탄한 나머지 그들은 영국인 즉 라틴어로 ‘앙글리’가 아니라 천사 즉 ‘앙겔리’라고 부르면서, 이들을 영원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해방시켜, 그들의 영토에서 할렐루야를 부르도록 해야겠다고 말하면서, 본인 스스로 영국에 선교사로 갈 것을 로마감독에게 요청한다. 물론 그 요청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나, 그는 언젠가는 꼭 영국을 선교하여야 되겠다고 생각한다. 그후 그레고리가 교황이 되면서 영국선교의 꿈은 실현되는데, 그는 AD596년 안드레아 수도원의 원장과 함께 40여명의 수도자들을 영국으로 파견하였고,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노력 가운데 1년후인 597년 성탄절에는 만여명의 주민들이 그리스도를 영접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그레고리가 선교사들에게 내렸던 선교 지침이다. 그는 영국에 살고있는 브리튼(Briton)족이나 골(Gaul)족속의 토착 언어를 존중하고, 교회 설립시 토착 문화적인 특성을 고려하라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그레고리가 선교사 일행을 통하여 영국에서 한 선교사업과 또한 그 후에 그들의 뒤를 따라서 영국에 간 선교사들의 활동은 영국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게 하는데 중대한 공헌을 하였다. 이같은 그레고리의 선교지침은 오늘 우리의 선교사역에도 귀한 교훈을 준다. 가톨릭의 선교방식이 너무 세속화되고 토착화, 우상화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우리 개신교의 너무 도전적이고 독선적인 선교방식도 변화가 필요하다.
● 그레고리는 부패하고 세속적이던 수도사들과 교직자들의 부패를 없애기 위해 노력하였으며, 검소한 삶을 장려하였다. 교직의 매매를 금지했으며, 마구잡이로 이루어지던 교역자가 되는 통로를 하나로 통일시켜 교직의 질서를 잡았다. 그리고 교직자들이 의무를 수행하는데 있어서 보수를 금하였으며, 교직자의 독신 제도를 확립하였다. 특히 그레고리는 교회의 예식과 관련하여서도 많은 공헌을 하였다. 오늘날의 천주교 미사는 그레고리에게서 영향받은 바가 심히 크다.
신심 깊은 영성가이자 탁월한 행정가, 정치가였던 대 그레고리 교황은 14년이라는 다소 짧은 재위기간이었지만,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오는 역사적 전환기에 교회의 중흥을 이룩한 위대한 교회역사인물임에 틀림없다.
그레고리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함께 변천하였다. 그러나 그가 위대한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유능한 행정가요, 경건한 수도사였으며, 수완 좋은 외교가였고, 건전한 도덕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진리를 중세 시대 초기의 이민족들에게 구체적 방법으로 전달한 역량 있는 저술가였다. 특히 로마 카톨릭의 입장에서 보면 ‘대 그레고리 교황’이라는 명칭으로 불려질 만큼 가장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 그런데 무엇이든지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하듯이, 그레고리교황 역시 세속의 정치 등에 너무 관여하다보니 신앙과 교회의 변질을 초래하고 말았다. 자신의 이상과 계획을 자기 뜻대로, 혹은 세상에 맞추어 실행하다 보니, 성경에 없는 것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성경의 정신에 어긋나는 것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레고리가 확립한 신학 가운데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연옥설인데, 생전에 교회생활에서 죄에 대한 해결을 받지 못하면 최종적으로 구원 얻기 전에 연옥으로 가는데, 살아 있는 자들이 죽은자들을 위해 미사를 올림으로써 연옥에 있는 자들이 해방되어 천국으로 간다는 연옥설을 체계화시켰고, 성인들의 유골을 숭배하게 했으며, 성상 사용을 권장하고, 성찬은 주의 희생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사제가 기도하면 빵과 포도주가 진짜 예수의 살과 피가 된다는 화체설을 지지하였다. 그가 쓰러져 가는 로마제국을 기독교라는 종교로 지탱하려다보니 이같은 인본주의적이고 세속적인 사고를 기독교 신앙 안으로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고,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지만, 이것이 결국에는 교회를 죽이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성실히 살아야 하며 열심히 신앙생활 해야 한다. 그러나 ‘열심’이 곧 정답은 아니다. 바르지 못한 열정, 정직하지 못한 열심은 오히려 비극을 잉태하며 퇴보를 가져온다. 주님을 섬기되, 지혜롭고 충성되게 섬기는 성도들이 다 되기를 기원한다.
그레고리안 성가
토마스 아퀴나스
●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 진행된 십자군 전쟁을 통해 서방세계는 이슬람 세계와 많은 접촉을 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 천문학, 기하학, 수학 등 자연과학을 비롯 당시 서방세계에 비해 앞서 있었던 이슬람의 문명과 다양한 문화들을 서구 기독교세계가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었다. 특이한 것은 서방이 기독교화 되면서 소멸되다시피한 그리스의 철학사상을 이슬람을 통해 역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리스의 철학,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그동안 이슬람 세계에서 보존되다가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서방 기독교세계로 전해지게 된 것이다. 이같은 서방 기독교세계와 이슬람과의 접촉은 역설적으로 이후 서방세계의 경제적 발전과 문예부흥, 그리고 종교개혁의 발판을 마련하게 된다.
이같은 때에 등장한 토마스 아퀴나스는 중세를 대표하는 스콜라철학자요 신학자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중세 카톨릭 세계관에 도입하여 체계화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로마 카톨릭 교회의 신학을 세우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한 인물이다.
● 토마스 아퀴나스의 개인적 삶에 대한 기록은 단편적으로만 남아있는데, 아퀴나스는 1226년경 이탈리아의 나폴리 근교 로카세카 성에서 아퀴노지방 영주인 란돌포 백작의 막내아들로 태어났으며 토마스는 그의 세례명이다. 어머니 테오도라는 나폴리 출신의 귀부인으로, 로마 황제 프레데릭과도 혈연관계가 있는 상당한 가문이었으며, 1243년경 남편 란돌포가 사망한 후에는 세상을 뜨기까지 로카세카 성에서 아퀴노가문의 지주로서 역할을 다한 용맹한 성품의 여성이었다.
토마스가 유년생활을 함께 했다고 생각되는 형제, 자매에 관하여 알려져 있는 사실은 조금밖에 없다. 아버지 란돌포는 무장이었는데, 상처를 하고 테오도라와 재혼하였다. 먼저 세상을 뜬 아내와의 사이에 몇 명의 아이를 두었으며 테오도라와의 사이에서도 9남매를 두었는데, 토마스는 아들로서는 막내였다. 토마스의 가정은 이처럼 형제자매만 십여명에 이르는 대가족이었다. 후일 큰 누나(장녀)는 베네딕도회의 수녀원장이 되었고, 그 밑의 누나 두 사람과 누이 한 사람은 각기 백작의 가문에 속하는 귀족과 결혼하는 등, 토마스의 집안은 상당한 권세를 누린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1230년경 5살밖에 안된 어린 막내아들 토마스를 성 베네딕트 수도회 소속의 몬테카시노 수도원으로 보냈다. 여기서 토마스는 수도사 수업을 받게 된다. 전기작가들에 의하면 토마스가 몬테카시노 대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것은, 그를 미래의 수도원장으로 성장하길 바랬던 부모들의 바램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15세 정도 되었을 때, 정치적 혼란 등으로 인해 수도원에 더 이상 머물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토마스는 수도사가 되는 수업을 중단하고 전쟁을 피해 몬테카시노를 떠나 당시 프레데릭황제의 후원으로 성장일로에 있던 나폴리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나폴리대학에서 토마스는 당시의 7개의 필수 학문인 문법, 논리학, 수사학, 대수학, 기하학, 음악, 천문학을 배우게 된다. 토마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도미니크회 수도사들을 접하게 된 것은 바로 이때로 추정된다. 특히 도미니크회는 학문연구를 통해서 복음전파를 목표로 하는 탁발수도회로, 어린 토마스에게 큰 충격을 준 것으로 보인다. 도미니크 수도사들과의 만남은 이후 토마스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된다.
● 미래의 몬테카시노 수도원장으로 성장해줄 것이라는 가족들의 기대를 저버린 채 18살의 토마스는 도미니크회의 수도자로 입문해 버렸다. 당시 상류층과 부유층에서는 아직도 초기 상태에 있었고, 청빈한 삶을 실천하고 있던 이 수도회를 무시하는 편이었다. 이에 당황한 그의 어머니와 형제들은(이때 그의 부친은 이미 돌아가셨다.) 도미니크 수도원의 주선으로 파리로 유학가던 토마스를 도중에 납치하여 로카세카 성에 감금하게 된다. 그리고 1년 이상 회유와 협박을 동원하여 도미니크회 탈퇴를 강요하게 된다. 그러나 어떤 노력으로도 그의 소신을 굽힐 수 없음을 알게 된 가족들은 결국 이듬해 여름 토마스를 나폴리의 도미니크회 소속의 수도원으로 데려다 주게 된다.
이와 같이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몬테카시노의 수도원장이 될 수 있는 출세길이 보장된 화려한 삶 대신 소박한 삶을 사는 수도사가 되기를 선택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일화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마음껏 누릴 수 있었던 모든 세속적인 삶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방하기로 결심한 아시시의 성프란시스코를 연상시킨다. 이후로도 토마스는 대주교직을 정중히 사절하는 등 청빈하고 겸손한 수도사로 일생을 살게 된다.
* 이제 이후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삶을 통해 우리는 한 사람의 위대한 결단이 한 시대를 살리게 됨을 발견하게 된다.
● 가족의 완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도미니크회에 들어간 그는 파리를 거쳐 쾰른으로 건너가 그곳 도미니크회 수도원에서 당대 최고의 지성이었던 알베르토 마그누스로의 지도를 받게 된다. 이때 토마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디오니시우스의 신학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수행한다. 처음 토마스의 동료들은 그의 천재성을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그는 몸짓이 큰데다 조용하였으며, 아직 익숙치 못한 독일어로 인해, 또 토마스는 다소 말더듬이였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을 표현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그래서 동료들은 그를 ‘시칠리아의 벙어리 황소’라는 별명으로 놀려댔다. 그런데 이국땅에서 와서 자기 의사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따돌림 당하고 있던 소심하고 섬세한 감성을 가진 청년 수도사의 침묵 뒤에 숨겨진 무한한 재능과 역량을 꿰뚫어보고, 이것을 꽃피울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준 것은 그의 스승 마그누스의 자상함과 혜안이었다.
한번은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스승 마그누스는 “지금 벙어리 황소라 불리는 저 수도사의 우렁찬 목소리를 장차 온세상이 듣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스승의 예언대로 토마스는 그의 침묵을 뚫고 점차 그의 지성이 빛을 발하기 시작하였으며, 얼마후 수도회는 그가 특별한 지적 은사를 가지고 있음을 공인하게 되었고, 마그누스는 그의 재능을 인정하여 파리대학 교수의 후보자로 추천하기도 한다.
비록 대학자 알베르토 마그누스의 추천을 받기는 하였지만, 도미니크회의 총장은 일단 스물일곱이란 토마스의 어린 나이에 난색을 표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학문은 물론 정치적으로도 수많은 문제들과 씨름을 벌여야 하는 파리에 ‘벙어리 황소’로 불릴만큼 조용하고 소극적인 인물을, 당대 최고의 지성인이 종단을 대표하는 학자로 추천했다는 사실이 더욱 당혹스러웠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총장의 주저함에도 불구하고 스승 마그누스는 토마스가 파리로 가야 한다는 입장에서 단 한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한 걸음 더 나아가 당시 추기경까지 설득함으로써 총장에게 결정적인 압력을 가한다. 결국 추기경의 지원까지 등에 업은 마그누스의 요구는 관철되었고 토마스 아퀴나스는 파리 대학교에서 신학 강의를 하게 된다.
하지만 그 과정이 결코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토마스가 파리로 올 당시부터 당대 문화의 중심지였던 파리의 분위기는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파리대학은 일반인 교수들과 수도회 출신 수도사 교수들 사이의 분쟁이 유혈폭력사태까지 야기할 만큼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교수취임강연은 만약의 폭력사태를 막기 위해 프랑스 왕의 군대가 강연장까지 배치되어 삼엄한 경호를 펼친 상태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애초에 도미니크회 총장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연륜과 조용한 성격에 대해 우려했던 것도 파리가 이런 분위기 속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스승 알베르토 마그누스와의 만남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는 더 이상 어리숙한 수도사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소심함과 섬세함을 학문적 신중함과 정교함으로 변모시켜 체화함으로써, 그의 스승을 뛰어넘는 설득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덩치만 큰 수줍은 말더듬이 벙어리 황소가 이제는 적들의 입장을 단호하게, 그리고 조목조목 철두철미하게 비판하며, 동료수도사들과 수도회를 위기로부터 구하기 위해 최전선으로 뛰어드는 위풍당당한 영웅으로 변모해 있었던 것이다. 만약 토마스 아퀴나스가 파리대학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했더라면 그의 위대한 저작들은 물론, 오늘날 천사적 박사라 불리는 위대한 스콜라학자는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우리가 일생을 통해 훌륭한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참으로 복된 일이다. 또한 좋은 스승이 되어 훌륭한 제자를 키워낸다는 것 역시 참으로 귀한 일이다. 진정한 스승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써, 우리 동산교회 가운데도 훌륭한 스승, 훌륭한 제자들이 많이 나올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 이후 아퀴나스는 관례에 따라 3년간 교수로 재직한 뒤, 이탈리아로 돌아가 약 10년 동안 교황청 및 도미니크회 부속학교에서 교수직과 저작에 전념하였다. 이 시기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행적을 살펴보면, 높아져가는 명망과 더불어 문자 그대로 눈코 뜰새 없이 바빠져가는 한 수도사의 강행군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높아져 가는 명망과 쌓여가는 피로 속에서도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변사람들에게 늘 겸손하고 성실한 선생님이자 동료였고, 또 따뜻하고 겸손한 목회자이자 수도사였다.
한 젊은 수도사가 수도원장에게 심부름을 왔다. 그런데 원장은 그 젊은 수도사에게, 원장실에서 나가자마자 복도에서 가장 먼저 만난 수도사와 함께 어디에 다녀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 젊은 수도사는 원장실을 나서자마자 복도에 서있던 뚱뚱한 수도사의 소매를 채고는, 원장의 지시이니 같이 길을 나서자고 했다. 그런데 이 젊은 수도사의 빠른 걸음을 뚱뚱한 수도사가 따라잡기는 쉽지 않았다. 결국 젊고 팔팔한 수도사는 지체된 시간을 탓하면서, 땀을 뻘뻘 흘리며 따라오는 이 뚱뚱하고 느려터진 수도사에게 시내 한복판에서 마구 고약한 말들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기겁을 한 표정과 침묵으로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결국 한 사람이 보다 못해 이 젊은 수도사에게 한마디 했다. “저 분이 온 세상에 이름난 토마스 아퀴나스 수도사이신 건 알고 계십니까? 도대체 저 분이 무슨 잘못을 하셨고, 댁은 누구시길래 저 분을 이리도 혹독하게 대하십니까?” 젊은 수도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거듭 머리가 땅에 닿도록 숙이며 사죄를 했다. 젊은 수도사가 그렇게 하기까지 왜 한마디도 불평없이 그런 불편한 지경을 고스란히 당하셨느냐고 사람들이 묻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수도사의 본분은 순종과 겸양입니다. 저 젊은 수도사와 저는 그 본분을 따랐을 뿐입니다.” 하고 대답했다고 한다. 본분을 실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른다.
●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는 다시 파리대학 교수로 재직하게 되는 영광을 안게 된다. 하지만 파리대학은 여전히 일반교수들과 수도원출신 교수들간의 맹렬한 공방전으로 더욱 혼란스러웠다. 심지어 토마스 아퀴나스가 정죄의 대상으로 거론되기까지 했다. 이런 상황에서 수도회를 대표하는 학자로서, 또한 학생들을 올바르게 지도해야하는 교수로서, 그리고 성직자로서 이 시기에 토마스 아퀴나스는 엄청난 책임감과 압박감을 견뎌내야만 했다.
이외에도 이 시기의 토마스 아퀴나스의 모습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프랑스 왕으로부터 식사초대를 받은 자리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갑자기 깊은 생각에 잠기게 된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모든 사람들이 놀랄만큼 세게 식탁을 내려치며 “그래! 마니교도들을 논박할 방법을 찾았다.” 하고 큰소리로 외치고는 비서에게 자신이 하는 말을 받아 적으라고 소리쳤다. 아무리 위대한 학자지만 어찌 왕의 식탁에서! 사람들은 긴장했다. 어지간하면 왕에 대한 결례로 큰 벌을 받을 상황이었다. 하지만 토마스 아퀴나스의 학구적 열의에 감동한 왕은 토마스가 비서들에게 구술하는 동안 조용히 기다렸다고 한다.
이렇듯 두번째 파리대학교수로 활동하던 시기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그가 처했던 상황이 어려웠던 것만큼 잠시의 쉴 틈도 없었다. 어쨌든 이런 토마스 아퀴나스의 쉼없는 활동은 이 시기에 완성된 작품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질과 양으로 결과를 맺었다. 특히 신학대전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들에 대한 주석들이 보여주는 완성도는 '기적적'이라는 수식어 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을 정도라고 한다.
● 1272년 40대 후반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파리를 떠나 나폴리로 향한다. 이 곳에서 그는 사도 바울의 서신들에 대한 주해작업과 시편 주해, 그리고 결국 미완성으로 남게 되는 ‘신학대전’의 3부와 같은 대작과 함께 여러 소논문들을 작성하게 된다. 그러나 1273년 12월 6일 성 니콜라오스 축일미사 중 어떤 충격을 받았는지, 토마스 아퀴나스는 미사 이후 수도사 생활을 시작하고서 단 한차례도 멈춘 적이 없던 펜을 놓게 된다. 이 때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 3부 중 속죄에 대해 집필 중이었다. 그가 더 이상 글을 쓰지 않게 된 것을 기이하게 생각한 그의 비서가 토마스에게 그 이유를 묻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난 더 이상 할 수 없네.”라고 답한다. 이에 더욱 걱정이 되어 재차 이유를 묻는 비서에게 토마스 아퀴나스는 “내가 본 것에 비하면 내가 쓴 것들은 모두 지푸라기에 지나지 않아...”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는 종종 명상 중에 의식을 잃곤 했다는 증언들이 전기문에 등장하며, 1273년 12월부터는 침대에서 일어나고 누울 때도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필요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그의 건강이 급격하게 악화되어 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1273년 12월 말부터 1274년 1월 초경 여동생 테오도라를 방문할 무렵 토마스 아퀴나스는 거의 아무 말도 못할 지경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이 무렵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제 내가 바라는 것 한 가지는 하나님이 내 저술활동에 종지부를 찍었듯이 내 인생도 빨리 끝내줬으면 하는 것이라네.”라고 말했다고 한다.
리용 공의회에 참석하라는 교황의 명에 따라 리용으로 향하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식욕까지 완전히 잃게 되어 더이상 여행을 할 수 없게 되어 도중에 한 수도원에 머물게 된다. 그리하여 1274년 3월 7일 토마스 아퀴나스는 100여명의 수도사와 평신도들이 임종을 지키는 가운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된다.
그가 죽은 후 한때 정죄되기도 했으나, 죽은 지 49년째 되던 해 토마스 아퀴나스는 카톨릭 교회의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이후 그의 이론들에 대한 정죄는 모두 철회되었다. 그리고 이후 토마스 아퀴나스는 카톨릭 교회의 교회박사로 선언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마다 다 다른 달란트를 주셨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자칫 묻혀질 수 있었던 자신의 달란트를 최선을 다해 남겼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달란트를 주셨는가? 비록 짧은 49년의 삶을 살다갔지만, 토마스 아퀴나스는 주님을 향한 열정과 헌신으로 자신의 모든 불리함을 극복하고, 어두운 중세 교회역사를 빛낸 아름다운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도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묻어두지 아니하고, 땀흘리며, 때로는 난관에 부딪치겠지만, 그것을 뛰어넘어, 충실하게 결실을 맺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 되시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출처] 교회사인물(제24강) 토마스 아퀴나스|작성자 예레미야
[출처] 작성자 예레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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