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시대에 사제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였다. 사제의 속죄 권한에 대한 미신 때문에 중세인들은 사죄 받는 최선의 길이 수도승이 되는 것이라고 믿었다. 보통 신자로 살아서는 이 땅에서 예수님의 명령을 완전히 이룰 수는 없지만 수도 생활을 통해서는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사상이 만연하여, 많은 사람들은 수도승이나 수녀가 되려고 하였다.
중세인들에게 있어 수도자로서의 서원은 일체의 부수적인 죄악을 깨끗하게 제거하는 제2의 세례로 간주되었고, 수도복의 효력은 대단해서 생전에 그것을 입어 보지 못한 사람은 임종시에라도 입어 보길 원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와 같은 무지와 미신이 왕 노릇하던 시기에 종교개혁의 횃불을 높이 든 마틴 루터가 태어났다.
마틴 루터(1483-1546)는 개신교 종교개혁의 아버지이다. 그는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의 충실한 일원으로 교육을 받고, 수도사와 신부가 되었다. 그는 열정적인 성경연구와 영적 투쟁을 통해 로마카톨릭의 그늘에서 벗어나 개신교의 기본 원리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칭의론과 성경이 기독교인의 신앙과 행위에 대한 절대적 권위임을 깨달았고, 그것을 중세인들에게 본격적으로 가르쳤다. 그는 16세기 유럽에 광범위한 운동을 주도하여 신학을 개혁하고, 교회를 정화하여, 그리스도인이 성경적 기독교를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루터는 결코 완전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목사, 학자, 신학자,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루터의 업적은 기념비적이며 오늘날에도 교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 마틴 루터는 1483년 동부 독일 작센주의 아이스레벤에서 광부인 아버지 한스와 어머니 마가레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광부로 일하다가 광산업을 경영, 성공하여 중세 말에 한창 득세하던 시민계급의 한 사람이었다. 그의 부친은 엄격한 가톨릭신앙의 소유자였고 자식의 교육에도 관심을 가졌다. 루터는 전통적인 중세의 조기교육을 받았으며 당시 인문주의로 유명한 에르푸르트 대학에 입학하여 법률을 배웠다. 그는 라틴 고전과 기독교 신학을 열심히 공부했으면서, 음악적 재능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이곳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정통으로 배웠으며 1502년 문학사, 그리고 1505년 문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루터는 부친의 염원에 따라 법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루터는 하나님을 찾기 위해 수도원에 입문하기를 원했으나 그의 부친은 루터가 수도사보다는 변호사가 되는 것이 가족에게 더 많은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무렵 천둥번개가 치는 어느 날, 도보여행 중 바로 자기 옆에 떨어진 벼락에 함께 가던 친구는 죽고 자신은 가까스로 살아남게 된 다음, 아버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학업을 중단, 성직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게 된다. 그는 에르푸르트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에 합류하였다. 이 수도원은 엄격한 곳이었으나 루터는 누구보다 열심히 연구와 신앙훈련에 정진한다. 루터는 오랫동안 기도, 금식, 밤샘, 그리고 스스로를 매질하면서 자학하기도 하였다.
루터의 지혜롭고 경건한 스승 요하네스 스타우비츠는 루터의 탁월한 지성적 재능을 인식하고, 루터에게 지나친 자학행위를 삼갈 필요가 있음을 일깨워 주었다. 그래서 루터는 더욱 학문에 매진하였으며 성경을 철저히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루터는 신약성경 대부분과 상당히 많은 구약성경을 암기할 수 있었다고 한다. 1507년 루터는 신부로 안수받고 비텐베르그 대학과 에르푸르트대학에서 강의했다.
● 루터는 1510년부터 1511년까지 수도원 수사로서 로마 여행을 하게 되었는데, 로마여행에서 목격한 로마교황청의 부패는 카톨릭 신부인 그에게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교황과 교회에 대한 모든 환상들이 깨어졌던 것이다. 당시 루터는 “옛 초대 교회시대보다 현재가 더욱 사도를 필요로 하고 있다.”고 말하며 중세교회의 타락상을 안타까워했다. 그 해에 루터는 에르푸르트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취득하였고, 박사학위를 받고 신학교수가 된 루터는 성경을 가르치고 변호하겠다고 엄숙히 서약하였다. 후에 루터가 종교개혁자가 되었을 때 그를 위로해 준 것은 바로 이 서약이었다. 그는 결코 자신을 교회의 반역자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을 교회 앞에서 행한 서약을 신실하게 지키는 신학자로 간주하였다. 루터는 학자이자 목회자였다. 그는 수도원 제도에 대한 행정적인 책임을 맡았으며, 1516년경 비텐베르그의 신부가 되어 정기적으로 설교하였다.
종교개혁의 발단은 로마 교황청의 잘못된 행위에서 비롯되었다. 교황청은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을 수리하기 위한 자금 조달의 일환으로 유럽 전역에서 ‘면죄부’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그 ‘면죄부’를 사면 모든 죄를 용서받게 되고 지옥에 갈 사람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1517년 비텐베르그 성당 문에 교회와 교황을 비판하는 95개 조항의 격문을 붙이기 한 달 전, 34살의 젊은 신학교수 마틴 루터는 매우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다. 교황 레오10세는 독일 내 면죄부 판매권을 독일 마인쯔의 주교 ‘알브레히트’에게 위임했고, ‘알브레히트’는 면죄부 판매에 오랜 경험과 능숙한 구변을 갖춘 ‘테첼’이라는 수사를 초빙하여 면죄부를 팔게 했다. 사실 면죄부 판매 대금의 절반은 교황청으로 보내지만 나머지 절반은 주교의 몫이었기 때문에 능숙한 판매자를 초빙했던 것이다. 테첼수사는 엘베강가의 조용한 마을에까지 와서, 붉은 벨벳 방석 위에 올려놓은 교황의 교서, 다시말해 면죄부를 길가에서 경매에 붙이고 있었다.
“독일 사람들아 똑똑히 보라. 나는 교황의 사신이다. 즐거워하라. 나는 속죄 증서를 무려 만구천(19000)장이나 가지고 있다. 부모든지 어린아이든지 남녀 누구를 막론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너희들의 넣는 돈이 이 궤짝에 들어가 ‘딸랑’하는 소리가 나자마자, 불쌍한 영혼은 연옥에서부터 해방되어 뛰쳐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 장면이 루터에게는 마치 노점상인이 길거리에서 물건을 파는 것처럼 비추어졌다. 비록 그것이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 건물의 증축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것이라 할지라도 마틴 루터는 돈으로 면죄부를 팔고 산다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다. 사태를 지켜보던 마틴 루터는 마침내 1517년 10월 31일 95개조의 항의문을 써서 비텐베르그에 있는 성곽교회 문에 붙였다. 그것은 종교의 분리를 위해서가 아닌, 모순된 카톨릭의 처사를 시정하고 성경 말씀에 합당한 참되고 순수한 교회를 만들려는 한 대학교수이자 수도자로서의 항변이었다.
그리고 이같은 루터의 행위는 결코 반역적인 것도, 급진적인 것도 아니었다. 당시 대학에서는 여러 학자를 초청하여 토론하는 것은 전통적인 방법이었다. 그래서 루터는 의무적으로 감독에게 사본을 한 부 보내주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이들 조항들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보고 루터의 허락없이 그것들을 독일어로 번역출판하였다. 이리하여 당시 세속화되어버린 중세교회에 반감을 갖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을 자극하게 되었다.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붙여놓은 95개 항목의 비난이 적힌 커다란 종이에는 주로 교회가 남발하고 있는 면죄부를 비난하는 내용이 라틴어와 독일어로 적혀 있었으며, 매우 강력하게 교회 지도자들을 공격하고 있었다. 마틴 루터는 만일 교황이 신자들의 형편을 잘 이해하고 있다면 곤궁한 삶을 살고 있는 저들의 뼈와 살을 깎아 성당을 증축하기보다는 차라리 성당을 불태워 버리는 것이 더욱 올바른 길이며,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면죄부가 아닌 진정한 회개를 통하여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마틴 루터의 주장은 사실 그 당시 중세교회를 비난하고 있던 다른 사람들의 주장과 거의 일치하는 내용으로 결코 격하지 않았으나, 몇 년 전부터 그의 강의를 듣고 있던 학생들은, 평소 우람하고 강인한 몸집과 열정적인 눈빛을 지닌데다, 까다롭고 기교가 있는 보통 학자들과는 달리 자신의 뜻을 항상 솔직하게 표현하였고, 간혹 거친 상소리도 서슴지 않고 내뱉었으며, 테너 목소리에다가 웃음소리 또한 호탕하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루터를 교회와의 정면충돌도 불사하는 매우 극렬한 이론으로 무장된 비범한 인물로 인정하였고, 자연히 그를 앞세우며 의지하게 되었다.
루터는 주장했다. ‘가난한 자를 돕고 궁핍한 자에게 꾸어주는 사람은 면죄부를 사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을 행하는 것임을 기독교인에게 가르쳐야 한다. 면죄부에 의하여 구원받는다고 믿는 것은 헛된 신앙이다. 비록 교황 자신이 자기의 영혼을 걸로 그 정당성을 보증하려고 해도 그것은 헛된 일이다.’이러한 95개조를 사람들에게 공개함으로 해서 면죄부 판매는 급격히 줄어들게 되어, 교회는 분격하여 1520년 교황 레오 10세가 루터를 파문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반항하여 루터는 대학의 열광적인 학생들 앞에서 교황의 교서를 불태워 버렸다.
이듬해 새로이 왕위를 오른 신성로마황제 찰스(Charles) 5세는 루터를 설득하기 위하여 소환하였는데,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이 한결같고 인간의 양심이 자유롭다는 사실을 교황에게 강력히 주장하고 황제의 설득에 불응하였다. 그러자 루터를 이단자로 선고하고 법률상 보호를 박탈한 것이다. 그리하여 1525-34년 사이 그는 친구의 도움을 받아 비밀리에 발트부르그의 프레드릭 3세의 성내에 피신하여 그곳에 머물면서 그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게 된다.
95개조의 항의문을 베텐베르크 교회 정문 앞 게시판에 게시를 하였다가 파문을 당한 후 웜즈 국회에 출두하라는 명령을 받고 죽음을 각오하며 출두하여 하나님 앞에 기도한 내용과 그 장소는 유명한데 지금도 그 현장에 유명한 글이 남아 있다. "ich kann nicht anders sein hier stehe ich, Gott helfe mir, . Ame"(나는 변할 수 없다. 나는 여기 서 있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
그러나 한편으로 루터는 종교개혁에서 파생된 과격파나 농민의 운동, 농민전쟁에 대해서는 성경의 신앙적 입장을 분명히 함으로써 과격주의자들과는 분명한 구분을 지었다. 그 뒤 만년에 이르기까지 가톨릭교회와 종교개혁 좌파 사이에서 이들과 논쟁 ·대결하면서, 성경강의, 설교, 저술, 성경번역 등에 헌신함으로써 종교개혁 운동을 추진하였다.
루터는 모든 신앙생활의 기본은 성경에 바탕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또 실천적인 신앙이 중요하다고 주장하였는데, 1525년 한때 수녀였던 카타리나와 결혼한 것도 이같은 실천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 부인과의 사이에 7명의 자녀를 두었던 루터의 가정생활은 그런대로 비교적 만족한 편이었다고 한다.
루터는 학자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상소리나 야비한 말을 서슴지 않았으며 화를 자주 내는 인물로 묘사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행동은 항상 교회나 권력 기관에 억울하게 짓눌리는 서민들의 입장을 그냥 보아넘기지 못하는 그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루터는 중세교회의 성례와 행위에 의한 은혜를 통해 하나님의 의에 도달하기는 아직 부족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루터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완전한 의의 수준까지 도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한 모든 노력을 다했다.
어느날 그는 로마서 1:17절에 있는 칭의 문제와 씨름했다. 루터는 자문했다. 어떻게 하나님의 의의 계시가 복음 혹은 복된 소식이 될 수 있는가? '어째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버림을 당해야 했단 말인가? 나 자신이 버림을 당하는 것은 타당한 일이다. 그러나 어째서? 어째서?'
다음 순간에 루터는 벼락을 맞는 듯한 놀라움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할 수밖에 없는 나 루터 대신에 그리스도가 친히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했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가 내 대신 죄를 담당하시고 내 대신 버림을 받았다.'
이와 같이 루터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습은 더 이상 무서운 심판자가 아니었고, 진노와 심판의 하나님이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으로 나타났다. 드디어 그는 이제까지 애타게 추구하던 자비로운 하나님을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되는 것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구원이 인간의 공로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에 기반한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이므로 구원받은 자는 아직도 죄인이면서도 자유스럽게, 그리고 온전히 용서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의 새롭고 즐거운 관계에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새로운 삶이 되어진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이 때까지도 이해가 되지 않는 문제가 있었는데 이것은 바로 하나님의 의에 대한 것이었다. 루터는 이 하나님의 의에 관한 문제를 로마서 강의를 준비하는 동안 깨닫게 되었는데 '하나님의 공의'와 '칭의'와의 관계를 깨닫게 되었다. 그는 그 때까지 '하나님의 공의'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루터의 개혁사상을 보면, '하나님 중심의 종교 사상',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는 인격적 관계라는 사상', '율법과 복음을 구별하는 사상', '십자가의 신학', '만인사제론', '오직 성경으로만' 등의 사상이 있다. 이것들은 또한 오직 은혜로만, 오직 믿음으로만, 오직 그리스도로만, 오직 성서로 만이라는 말로 함축될 수 있는 말들이다.
가장 큰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창시자인 마틴 루터가 63년 전에 자신이 태어났던 아이슬벤이라는 조그마한 마을에서 숨을 거두었다. 오랜 질병과 거듭되는 격무로 망가진 몸을 강인한 정신력으로 버티어나가던 그는 평소 불같았던 그의 성격과는 달리 아주 온화한 모습으로 눈을 감았다.
[출처 :작성자 예레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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