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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존 칼빈

by 은총가득 2023. 12. 18.

 

 

칼빈은 성직자의 사업 담당자였던 아버지 덕분에 노용 대성당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그는 주교의 후원을 얻어 성당 신부에게 지불되는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했는데, 12살 때에는 당시 성직자가 되는 풍습대로 삭발까지 했다. 어려서부터 남달리 머리가 총명하고 뛰어났던 칼빈은 형제들과 함께 고향에서 카피츠학교를 다녔는데, 타고난 지성과 판단력으로 학우들 사이에서 뛰어난 인물로 인정을 받았다.

 

칼빈은 기록에 의하면 안색이 좋지 않았으며 몸이 허약하고 신경질적이었으며 수줍어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화를 잘 내는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사리를 판단하는 데에는 정확했다. 그리고 그의 지적 능력은 아주 뛰어났으므로 아버지의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칼빈에게 좋은 교육의 기회를 주는 것이 가장 좋은 투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칼빈을 파리에 있는 대학으로 보내게 되었다.

 

14세 때 그는 파리로 가서 라 마르셰 대학에 등록했다. 그곳에서 그는 라틴어를 배웠다. 그러나 칼빈은 다시 몽테규 대학으로 옮겼는데, 몽테규 대학은 중세 수도원의 엄격한 규율에 따라 금욕적이고 엄격한 훈련을 요구하는 대학이었다. 새벽 4시에 기상하여 6시 아침 미사를 드릴 때까지 2시간 강의, 미사 후에는 아침 식사, 그리고 8-10시까지는 오전 강의, 그리고 1시간 동안 토론, 11시에 점심 식사(점심시간에는 성경이나 위인전기가 읽혀지고 기도하고 대학 내의 광고 사항을 알려줌), 12시에는 오전을 반성하고, 1-3시까지는 일반 독서시간과 자유시간, 3-5시 다시 오후 강의, 5시에 저녁 식사, 그리고 기도회를 가진 후, 다시 오후 강의에 대한 토론을 하고 겨울에는 8시, 여름에는 9시 취침을 하는 등 아주 엄격하고 꽉 짜여진 교육을 실시했다. 여기에서 그는 금욕주의적인 삶과 장시간 공부하는 습관을 익혔다.

 

그는 5년간의 대학생활을 통해 종교개혁의 새로운 사상들을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19살의 어린나이였던 칼빈은 대학을 졸업하고 카톨릭 사제가 되기 위한 다음 단계로써 신학 연구 자격시험에 통과하게 된다. 그런데 칼빈의 아버지는 처음에는 칼빈을 성직자로 키우기 위해 무척 노력했지만 갑자기 마음을 바꿔 아들에게 신학에서 법학으로 전공을 바꿀 것을 요구하였다. 그 이유로는 흔히 칼빈의 아버지가 재정문제로 교회 참사회와의 사이가 벌어졌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칼빈의 자서전적인 시편 주석의 서론을 보면, 법조계로 나가는 것이 부와 명성을 얻게 하는데 확실한 보장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칼빈은 아버지의 말씀에 순종하여 당시 유명했던 오르레앙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기 위하여 또다시 진학의 길에 오르게 되었다. 오르레앙 대학에서 칼빈은 영양섭취가 부실한 가운데서도 하루에 4시간 이상을 자지 않고 공부에만 전념했는데, 이로 인해 후일 건강을 잃고 여러 가지 병을 얻게 되었다. 또 이는 결국 그가 일찍 죽게 된 직접적인 원인이 되기도 했다.

 

1531년 칼빈의 아버지는 결국 참사회로부터 파문을 당했고 그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칼빈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칼빈의 육신의 아버지는 칼빈을 법학자로 만들고자 애를 썼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자신의 예정과 섭리에 의하여 그의 진로를 바꾸셨다.

 

그는 1532년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23세의 나이로 세네카의 <관용론> 주해서를 출판하게 되는데, 세네카의 <관용론>은 로마의 황제 네로가 기독교를 무참하게 박해하자 네로의 마음을 돌이키려는 의도에서 쓰여진 책이었다. 칼빈이 주해서를 쓴 것은 프랑스 왕 프란시스1세가 개신교도들을 박해하는 것에 대한 의분 속에서 왕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유창한 라틴어로 이 책을 기록했다고 한다.

 

● 1533년경에 칼빈은 카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하였으며 종교개혁 운동에 합세했다. 그는 자신의 개종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칼빈의 회심은 사도 바울이나 성 어거스틴, 그리고 루터와 같이 자세하고 극적인 것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또 언제 정확히 회심의 경험을 했느냐에 대해서도 기술하지 않고 있다. 다만 시편 주석 서문에서 그는 자신의 회심에 대해 ‘뜻밖의 회심’이란 말을 쓰고 있다. 하나님께서 예기치 못한 회심으로 오랫동안 완악해져 있던 마음을 온순하게 길들이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칼빈은 철저히 말씀에 순종하고 열심히 연구함으로써 하나님을 알고자 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한 대로 이해하고자 했고, 이러한 생활을 위해서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며 통회하는 생활을 했다. 이와 같은 칼빈의 경건한 삶, 하나님을 향한 열망이, 올무와도 같은 교황청 미신으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불타게 한 것으로 보인다.

 

1533년 11월 1일에 파리 대학 총장으로 취임하는 콥의 취임 연설의 원고를 칼빈이 작성하게 되는데, '기독교 철학'이란 제목의 이 연설은 루터가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복음과 율법을 비교해서 복음의 절대성을 강조하고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강조했다. 그리고 종교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박해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 연설 이후 그들에 대한 비난과 핍박이 가해졌다. 콥은 바젤로 피신하였고 칼빈도 파리 남서부 400km에 위치한 친구의 집으로 피신하게 되는데, 그 집에는 약 4천여 권의 장서가 있었다. 여기에서 칼빈은 방해를 받지 않고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칼빈은 복음주의 신학의 핵심을 이루는 ‘기독교 강요’라는 대저작의 체계를 세웠던 것이다.

 

* 앞서 소개한 여러 신앙인물들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는 것이지만,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은 이같이 박해 가운데 있을 때, 피신하여 숨어있을 때, 모든 소망이 끊어지고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있을 때, 오히려 위대한 하나님의 사역들을 이루어 냄을 발견하게 된다. 참으로 은총은 고난을 통해 온다. 러시아 낳은 세계적인 작가 도스토예프스키는 9년동안 시베리아 유배생활을 한 뒤 ‘죄와 벌’ 등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이탈리아 출신 단테는 정적들에 의해 추방된 뒤 방랑하면서 ‘신곡’이란 불후의 명작을 집필했다. 헨델의 메시아도 호화스러운 작곡실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헨델은 반신불수로 감옥에 갇힌 후 세계인의 영혼을 뒤흔드는 명곡을 작곡한 것이다.

 

오늘 여러분의 삶의 정황들은 어떠한가? 절망스럽고 고통스러운가? 소망의 빛줄기 하나 찾아보기 어려운가? 어쩌면 바로 지금이 가장 하나님의 은총에 가까이 접근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결코 포기하거나 절망하지 말고, 다시 주님을 바라보고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란다.

 

● 1534년 스물다섯의 칼빈은 공식적으로 로마카톨릭교회와 결별하게 되는데, 그해 10월 개신교인들에 대해 비난하는 삐라가 프랑스 전역에 살포되었고, 개신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예상되는 가운데, 칼빈도 결국 망명자가 되어 고국 프랑스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27세인 1536년 ‘기독교강요’ 첫판을 출판했고, 스위스 제네바에 정착한다. 2년후 제네바에서 추방되어 스트라스부르그에서 잠시 목회했으며 그때 결혼한다. 32세에 제네바로 돌아왔으며, 쉰 다섯, 죽을 때까지 제네바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을 완성시켜 나간다. ‘기독교강요’는 칼빈의 가장 위대한 교리 및 경건서인데, 사실 이 저서는 개신교 신학의 정수이다.

 

* 신대원 시절 칼빈의 세권으로 된 ‘기독교강요’ 수업을 들었는데, 칼빈의 기독교강요 내용을 접하면서 떠오른 생각은, ‘아니 어떻게 27세의 젊은이가 이같은 위대한 저술을 남길 수 있었단 말인가!’ 그저 감탄과 탄복, 놀라움으로 입을 다물지 못했다.

 

‘기독교강요’는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라 주제별로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의 탁월한 구성이나 내용의 깊이 등으로 인해 후대의 수많은 신학자들은 한결같이 감탄해 마지 않았으며, 이 저술로 인해 칼빈은 종교개혁시대의 유일한 신학자로 꼽히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마틴 루터가 행동을 통해 종교개혁을 실천해 나갔다면, 칼빈은 신학적으로 종교개혁을 완성시킨 개혁자였다. ‘기독교강요’를 비롯, 그의 탁월한 저서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후에 종교개혁은 유럽전역으로 확산되어 나갈 수 있었으며, 시대를 초월해서 개혁교회의 전통을 세울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칼빈이 어떻게 이같은 위대한 저술을 남기며, 그 젊은 나이에 오늘날 개혁교회의 전통을 수립하고, 또 장로교회의 기초를 놓을 수 있었는지, 그의 삶에 대한 여러 기록들을 조사하면서 조금이나마 짐작할 수 있게 되었다.

 

로마카톨릭에 의해 종교개혁자들은 상당부분 왜곡된 모습으로 후대에 알려지게 되었는데, 예를 들면 마틴 루터는 ‘무식하고 저돌적인 독일 돼지’로 깎아내렸으며, 칼빈의 경우, ‘자기만 아는 광신적이고 딱딱한 유머없는 인간이요, 사람을 싫어하는 교조주의자요, 아집적이고 사랑이 없으며 악마같은 잔인한 독재자’로 수백년동안 유포되어 왔다. 하지만 그것은 사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칼빈은 불꽃 튀듯 뚫어지게 응시하는 커다란 갈색의 눈에다, 갸날프고 예리한 얼굴 윤곽의 검은 머리 멀쑥한 프랑스 사람이었다. 그는 편두통을 피하기 위하여 하루에 한끼 소식을 했으며, 나이가 들고 건강이 약해지면서 허리가 구부정해지고 몹시 수척한 모습이었다고 전해진다. 칼빈은 결코 신체적으로 강건하지 않았다. 극단적인 금욕생활과 수련 등으로 인해 30세까지 그의 건강은 다 망가지고 말았다고 한다. 죽기 전 칼빈은 만성천식과 폐결핵, 위궤양으로 인한 소화불량, 두통, 담석, 치질, 통풍, 열병 등을 앓고 있었으나 그는 최후까지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노력을 다 동원하여 하나님과 인간을 섬겼다.

 

그는 하루에 4시간 이상 자지 않았으며, 심지어 몸져 누워있을 때도 자신의 말을 받아 적도록 불어와 라틴어를 기록할 수 있는 4명의 비서들이 항시 대기하고 있었다고 한다. 방대한 그의 저술들은 이같은 그의 노력에 의해서 산출된 것들이었으며, 결코 그는 천재적인 머리로 손쉽게 기적적으로 책을 써내려간 것은 아니었다.

 

이같은 칼빈의 삶의 불꽃을 태워 기록해낸 저술들은 종교개혁 시대 이후 17,18,19세기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신학자들, 목회자들, 평신도들을 일깨웠으며, 교회를 새롭게 하는 원동력을 제공했다.

 

바울과 어거스틴과 루터에게서 습득된, 절대주권적으로, 오직 믿음과 은혜로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칼빈의 비전은 이후 윌리엄 캐리와 같은 개척선교사들 뿐만 아니라 리처드 백스터, 존 번연, 요나단 에드워드, 조지 화이트필드, 이이작 뉴튼 경, 찰스스펄전, 로버트 마펫, 아브라함 카이퍼, 마틴 로이드 존스와 같은 위대한 부흥목회자들에게 불을 질렀다. 한마디로 시대를 이끌어 갔던 개혁교회 대부분의 지도자들은 칼빈주의자들이었다. 뿐만 아니라 교회의 목회, 목회훈련, 정부 통제로부터의 적절한 자유에 대한 칼빈의 비전은 장로교의 설립을 낳았으며, 거기에서 생겨난 대표제 민주주의는 오늘날의 세속 민주정치의 기초가 되었다.

 

* 참으로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성경말씀처럼, 칼빈이라는, 자신을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로 살다간 위대한 개혁자로 인해, 하나님의 교회는 중세의 깊은 잠과 어두움에서 벗어나, 오직 말씀에 근거한 참된 진리의 빛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어느 시대나, 어느 장소나 마찬가지다. 각 가정의 경우만 보더라도, 한 가정이 제대로 정결하고 건강하게 유지되려면 누군가 희생하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대부분 한국 가정의 주부들은 보이지 않는 위대한 희생자들이다. 특히 요즘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가정에서 주부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밖에 나가 돈을 벌어야 하는 가정주부들의 경우, 직장일은 물론 가정에서 감당해야만 하는 그 수고로움들을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우리 동산교회에 그런 분들이 많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직장생활하는 가정주부들을 위로해 주시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남편들과 자녀들은 자신들의 수고로움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함께 가정을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희생하지 않으면 교회는 세워질 수가 없다. 이 지역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수많은 생명들을 구원의 생명선에 승선시키기 위해서는, 한 알의 썩어지는 밀알들이 이곳 저곳에서 많이 나와야 한다. 자신을 한번 돌아보자. 나는 아직까지 한 알 그대로 남아있는 밀알인가? 아니면 자신을 죽여 많은 열매를 맺는 밀알인가? 여러분이 속한 구역을 위해, 혹은 찬양대원으로서, 교사로서, 남녀선교회 임원으로서, 봉사부원으로서, 여러분은 어떤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고 있는가?

 

● 프랑스 사람인 칼빈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혁운동을 전개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칼빈은 참으로 수없이 많은 어려움을 당했다. 칼빈의 저술이나 설교에 대해 트집잡고 비판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반대파들의 공갈과 협박은 끊일 새가 없었고, 주민들 중에는 자기 개의 이름을 칼빈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를 혐오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하루에도 열 번씩이나 죽음을 동경할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칼빈은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죽어버린 미사 대신 예배를 갱신해 나갔으며, 어른들은 물론 어린이들의 신앙 교육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칼빈은 어린이들에게 신앙의 핵심인 요리문답을 가르치지 않고는 교회 개혁이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 칼빈은 1540년 31세 때, 이델레트라는, 두 아이를 가진 과부와 결혼을 했다. 칼빈의 부인은 자신의 건강이 그리 좋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순복의 성품으로 죽을 때까지 칼빈을 도왔다. 1549년 이델레트가 죽을 때까지 칼빈은 9년동안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였다.

 

제네바의 개혁을 위한 14년 간(1541-1555)의 계속된 투쟁은 칼빈의 승리였다. 칼빈의 개혁 운동은 그의 생존시에 이미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위그노(Hugnote) 운동이 칼빈의 사상을 받아들여 칼빈주의적 신조를 채택했고, 네덜란드에서도 칼빈주의자에 의해 신앙고백이 채택되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에서는 그의 제자에 의해 장로교 신조가 채택되어 장로교 국가가 되었다. 영국 교회는 칼빈주의 영향 하에 '39개 신조'를 채택했고 곧 청교도 운동의 효시가 되었다. 독일 남부 지역도 칼빈주의로 변하여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이 채택되었다. 스위스에서는 취리히, 바젤, 베른 등 전역이 칼빈의 영향을 받았다.

 

칼빈은 몸이 허약한 사람이었다. 위궤양, 관절염, 천식, 폐병 등 종합병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병을 앓으며 고통 받으면서도 열정적인 사역을 계속했다. 그는 연 200회의 설교와 200회의 강의를 하였으며 성경 각 권의 주석을 썼다. 그는 <기독교 강요>를 계속 재편집했고 20편에 달하는 신학 논문을 발표했다. 그의 저작 전집은 모두 59권이 달한다.

 

칼빈은 1564년 5월 27일, 그의 나이 55세에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칼빈이 죽을 때 남겼던 유언은 지금도 유명한 일화로 전해지고 있다. “내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내 무덤의 흔적이 없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그의 유지를 따라 지금도 제네바에 가면 칼빈의 무덤에는 이름이 없음을 알 수 있다. 단지 그를 추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너무 아쉬운 나머지 무덤 위에 ‘J. C’라고 이름 약자만 새겨 놓았습니다. 그래서 칼빈의 유언을 음미하는 사람들은 그의 무덤가에서 더 큰 은혜를 받는다고 한다.

 

여러분은 이땅을 마감하고 떠나는 날, 무엇을 이땅에 남겨놓으려고 하는가? 호화로운 무덤을 남기기 원하는가? 무엇을 남기기 위해 오늘도 수고로이 달려왔는가가? 장차 부활의 새 아침이 올 것을 믿고 살아가는 우리 기독교인들은 칼빈처럼 아름다운 영적유산을 이 땅위에 남기고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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