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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앗시시 성프란시스코

by 은총가득 2023. 12. 18.

● 성프란시스는 중세교회역사상 가장 빛나는 이름이다. 프란시스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모방자로서 너무나도 유명하였으므로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들은 프란스시에 대한 대중들의 존경과 흠모가 예수 그리스도의 지위를 찬탈했다고까지 주장할 정도였다. 문학, 미술, 음악 등 중세의 모든 예술분야는 그를 신비롭고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성프란시스는 중세 천년 암흑기 가운데 가장 빛나는 존재임에 분명하다. 그는 종종 이리를 길들이고 새들에게 설교한 사람으로 묘사되고 있으나, 프란시스의 사역은 허물어진 한 예배당의 재건과 함께 시작되었으며, 영적 무감각에 빠진 교회를 재건하고자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나아가 로마의 궁전과 애굽에 있는 술탄의 장막에까지 가서 그리스도께 대한 자신의 단순한 신앙을 나누어 주고자 노력했다.

 

 

● 성프란시스의 본명은 ‘프란시스 베르나도네’(Francis Bernadone)로, 지금은 앗시시의 성프란시스로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다. 프란시스는 1181년 앗시시라는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피에트로 드 바르나도네는 부유한 직물상이었고 어머니는 피카였다. 원래 세례명은 ‘지오반니’였으나 나중에 ‘프란시스’로 개명되었다. 중세의 전설에 의하면 아기 프란시스는 말구유에서 태어났다고 전해지는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프란시스를 연결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프란시스’라는 이름을 지은 이유에 대해서는,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어 했던 아버지가 ‘프랑스’라는 뜻의 ‘프란시스’라고 붙였다는 속설도 전해진다. 

 

 

어쨌든 포부 높은 상인 계급의 아들로서 특권을 누리며, 프란시스는 잘생기고 활달한 청년으로 자라났다. 달리 표현하면 청소년 시절을 방탕하게 생활했다. 공부나 사업에 특별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프란시스는 스무살이 되던 해에 경쟁 상업도시인 페루자와의 전쟁이 발발하였을 때, 앗시시의 이권을 보호하고 자신의 이권을 도모하고자 군에 입대하여 싸웠다. 하지만 그는 포로로 잡혀 1년간이나 옥살이를 한다. 전쟁터에 출정했다가 포로로 잡히고, 감옥살이를 하면서, 그 참혹함에 충격을 받고 목숨만 부지한 채 명예롭지 못한 귀향을 하게 된 것이다. 예전의 그는 또래 청년들과 어울려 젊은이 특유의 치기어린 행각을 일삼던 유복한 가정의 철부지였으나 귀향 후에는 부모의 극진한 보살핌에도 불구하고 끊임없는 악몽에 시달리며 이상한 행동을 일삼는다. 들판을 헤매는가하면 종달새를 쫓아 지붕 위를 거닐고, 심지어 공장 노동자들의 궁핍한 생활을 동정하여 집안의 각종 진귀한 물건들을 그들에게 나누어준다. 프란시스가 신비의 체험을 통해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드리기로 결심한 것은 이 시점이었다.

 

● 어느 날 저녁 프란시스의 집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그가 나가 보았더니 한 험상궂은 나병 환자가 서 있었다. 그는 몹시 추우니 잠시 방에서 몸을 녹이면 안 되겠느냐고 간청하였다. 프란시스는 그의 손을 잡고 방으로 안내해 주었다. 그러자 그 환자는 저녁을 함께 먹도록 해달라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같은 식탁에서 함께 저녁을 먹었다. 밤이 깊어지자 그 환자는 다시 부탁하기를 자기가 너무 추우니 프란시스에게 알몸으로 자기를 녹여달라고 하였다. 프란시스는 입었던 옷을 모두 벗고 자신의 체온으로 그 나병 환자를 녹여주었다. 이튿날 아침 프란시스가 일어나보니 그 환자는 온 데 간 데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왔다간 흔적조차 없었다. 프란시스는 곧 모든 것을 깨닫고는 자신과 같이 비천한 사람을 찾아와 주셨던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올렸다. 이때 드린 기도가 바로 유명한 '성 프란시스의 기도문'이다.

 

스무살이 채 되기 전에 겪은 수많은 경험을 통해 프란시스는 가족과 부와 야망을 버리게 되었으며, 대신에 가난한 자들과 함께 살기로 다짐했다. 1205년에 그는 로마로 순례를 떠났다. 성베드로 성당의 초라한 헌금통을 보고 가진 것을 모두 털어 넣고, 남루한 옷차림으로 지나가는 수도사에게 자신의 옷을 벗어주며, 대신 다 떨어진 수도사의 옷을 입고 거지들의 무리 속에서 하루 종일 서서 금식기도를 하는 프란시스의 모습에서는 벌써 성자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앗시시로 돌아온 프란시스는 성 다미안 성당에서 신비체험을 하게 된다. ‘프란시스야, 네 눈에 보이는 이 허물어져가는 나의 집을 재건하여라’라는 신비의 음성을 들은 그는 이 말을 반쯤 허물어진 성 다미안 성당을 다시 건축하라는 뜻으로 이해하고 혼자 힘으로 돌을 나르며 한 달 동안 성당을 재건함으로써 신비의 음성에 응답한다.

 

그의 아버지는 이런 아들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버지는 프란시스를 골방에다 가두고 만약 그런 이상한 행동을 당장 중단하지 않으면 재산 상속권을 몰수하겠다고 협박했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불꽃에 이끌린 프란시스의 발길을 그 누구도 돌이킬 수 없었다. 프란시스는 소외자들에게 돕기 위해 자신의 말과 부친의 직물을 일부 팔아 자금을 마련했다. 그래서 그 부친은 지방의 주교가 보는 앞에서 프란시스를 잡아끌고 가며 자기에게 빚진 모든 것을 갚으라고 요구하였다. 이에 프란시스는 교회 지도자들과 앗시시의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모든 재산권을 포기하고 이제 하늘의 아버지만을 내 아버지로 고백하겠노라고 선언하면서 입고 있던 옷까지 벗어 아버지에게 반납하고는 알몸으로 성 다미안 성당으로 떠난다.

 

● 이때부터 그는 절대청빈을 가장 중요한 신앙의 덕목으로 여기고, 천 조각 하나로 몸을 가리고 노끈으로 허리를 동이면서 가난한 생활을 시작한다. 맨발로 걸어 다녔고 그의 지갑은 언제나 비어 있었다. 절대청빈을 강조하며 회개와 형제애, 그리고 평화를 외치는 프란시스의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프란시스는 자신의 신앙운동에 동참하는 인원이 11명에 이르렀을 때 자신의 종교집단을 효과적으로 운영하고 절대청빈의 중심사상을 보존하기 위해 ‘회칙’을 제정하고 로마 교황청의 승인을 요청했다. 당시 교황이었던 이노센트 3세는 공식적인 문서가 아니라 구두로 프란시스의 ‘작은 형제단’ 설립을 승인한다.

 

프란시스의 이상은 교회의 주목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부모에게서 큰 유산을 물려받은 앗시시의 귀족 소녀 클라라가 작은 형제단에 가입함으로써, ‘가난한 클라라 수도회’가 생겨났는데, 이 여성 수도회는 후일 프란시스의 이상을 보다 세상에 널리 전파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성 클라라는 프란시스의 모본대로 그리스도를 따르고자 했던 여인으로 가난과 기도의 삶을 살았으며 다른 사람들을 자신의 가난하고 거룩한 삶으로 인도하여 프란시스와 그의 형제들에게 힘과 영감을 제공하였다.

 

프란시스 수도회 운동의 핵심은 가난에 대한 태도에 있었다. 프란시스는 자신의 것을 아무것도 원치 않았으며 형제들에게도 이러한 정신을 권면하였다. 한번은 한 탁발 수도사가 제단 위에 자선 기부금으로 놓인 돈을 주워 창문 선반 위에 올려놓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프란시스는 그에게 입으로 선반 위의 돈을 물어 배설물 더미 위에 올려놓으라고 명령하였다. 프란시스의 초기 추종자들은 ‘그때 이후로 돈을 나귀의 배설물처럼 경멸하였다’고 전해진다.

소유물은 개인과 하나님 사이에 개입할 수 있는 온갖 것을 의미하였다. 성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그의 삶은 일편단심이었다. 소유물이 하나님을 섬기는데 장애물이 될 수 있다면 성욕과 결혼으로 인한 주의산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스도를 향한 프란시스의 이같은 뜨거운 열정을 보나벤투르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프란시스가 그의 배우자 그리스도를 향해 불태운 그 열정적 사랑을 어떠한 인간의 혀도 결코 묘사할 수 없다. 그는 마치 이글거리는 숯불처럼 하나님의 사랑의 불에 완전히 빨려 들어간 듯하였다.”

 

● 1212년 프란시스는 사라센에 대한 선교를 꿈꾸면서 시리아 지역으로 출발했지만 파선과 질병 때문에 계획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무슬림과 이교도들에 대한 그의 선교 열정은 계속되었다. 2년 후에는 서북아프리카 지역인 모로코 선교를 계획하고 스페인에 갔지만 병 때문에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대신 이탈리아로 돌아온 프란시스는 유럽 지역으로 퍼져나가는 프란시스 수도회의 선교사업을 진두지휘하여 여러 지역에 수도사를 파견한다.

 

1219년 프란시스는 십자군 운동에 직접 참여하여 11명의 동료들과 함께 애굽의 성지에 이르러 이슬람 황제 앞에서 복음을 전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1223년에 최초의 탁아소를 건립하기도 했다.

 

프란시스가 이탈리아로 돌아왔을 때, 자기 수도회 운동의 상황은 떠나기 전과 같지 않았다. 그가 목격한 첫 번째 변화는 수도원 건물이 설립되었다는 것이다. 일부 형제들은 이를 자신들의 재산으로 간주하였다. 초기 수도회의 절대청빈의 정신이 사라져가고 있었고, 수도회가 조직화되고 있었다. 프란시스는 용기를 내어 수도회 규범을 정비하여 수도회의 정신을 유지하려고 했으나 조직은 방대해졌고 계속해서 늘어나는 수도사를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자신의 수도회가 관료화되는 것을 보고 큰 실망을 느낀 프란시스는, 건강도 좋지 아니하였고 타인들에게 선택의 폭을 넓혀 주고자 수도원장 직책을 다른 사람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명상과 기도를 위한 독거생활에 들어간다.

 

1224년 45세가 된 프란시스는 하나님의 사랑이 지닌 한없는 넓이를 체험한다. 그 사랑은 고통과 죽음을 통해 전해져 오는 것이었다. 그는 기도와 명상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상처가 자신의 몸에서 재현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철저한 고행과 절대청빈의 삶을 끝까지 계속했던 프란시스는 극도로 건강이 나빠졌다. 1225년, 실명하여 앞을 보지 못하던 프란시스에게 임종이 다가오고 있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프란시스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최후의 만찬을 나누고 1226년10월3일 마지막 눈을 감았다. 그는 동네 범죄자들이 묻히는 변두리에 매장될 것을 소원했지만 프란시스 수도회에서는 그의 시신을 앗시시의 ‘성 프란시스 대성당’에 비밀리에 안치했다. 프란시스의 시신은 그로부터 약 6백년이 지난 다음 발견되었다.

 

오늘날에는 로마카톨릭, 영국국교회, 루터교 등에 프란시스 수도회가 존재한다. 전세계 프란시스수도회는 어떤 수도회보다 가장 어렵고 소외받는 이웃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 이들 외에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종이자 평화의 애호자이며 창조주에 대한 피조물적 의존성을 설파한 성 프란시스에게 감화를 받고 있다.

 

 

 

                                                  

 

 

 

앗시시의 성프란시스 수도원

 

[출처] 작성자 예레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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