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기즈칸(Genghis Khan, 成吉思汗)과 몽골제국(蒙古帝國)
징기즈칸(Genghis Khan, 成吉思汗)과 몽골제국(蒙古帝國)
중앙스텝지역 유목민족의 세력 팽창
투르크계 돌궐제국과 위그르제국이 망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유라시아 중앙스텝지역에서의 정치활동이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 기간은 분열과 정쟁과 내란의 과도기였으므로, 그 결과로 생긴 세력의 공백이 중국 변방에 새로운 제국의 출현을 가능케 하고 있었다. 유라시아 중앙스텝지역은 10세기와 11세기의 전 기간을 거치며 체계가 잡힌 위그르족, 탕구트족, 거란족 등의 군소 반(半)정착국가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당시 그들의 관심은 주로 자신들의 변방국가들에 기울어 있었기에 중앙스텝지역의 활동에 대해서는 관심이 소홀하였고, 스텝의 서쪽에 있었던 투르크계 제국들은 극심한 내부 분열을 겪고 있었으므로 또한 이 지역에 무관심하였다. 따라서 중앙스텝지역에 대한 이러한 세력의 공백기에 몽골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는 사실은 유목민족제국사에서 여러번 있었던 일로, 이는 힘의 공백을 메우는 새로운 제국의 탄생이었다. 이전부터 이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하였던 메르키트, 나이만, 타타르, 맹고족(萌古) 등의 부족들도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또한 몽골계일 가능성이 많다.
징기즈칸이 태어나 성장기를 보낸 몽골 초원지대는 강수량이 적어 농업이 불가능한 지역이었으므로, 여기서 사는 민족들은 이동을 거듭하는 유목으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유목민족은 농경민족과 달리 자급자족이 불가능했으므로 그들은 남방의 선진민족인 한족(漢族)과의 교역을 열어 놓으려고 항상 노력을 기울여왔다. 그러나 유목민족과 농경민족 사이의 교역은 항시 전쟁으로 발전할 소지가 많았다. 비록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열등한 위치에 있었다고 하지만, 몽골족을 위시한 주변의 유목민족들은 군사적으로는 결코 한족에 뒤지지 않았다. 그 당시에 중국대륙에서 기마병의 위력은 가히 가공할 만 하였다. 유목민족의 일상생활은 바로 기마병의 훈련과정이었으며, 잠재적으로 그들은 언제든지 기마병으로서 중원(中原)을 공략할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중국역사에서 오랑캐, 즉 호족(胡族)이라 멸시해왔던 유목민족은 송대(宋代)에 와서 급격히 성장을 이루었다. 물론 이전에도 흉노족이 기원전 3세기에 중국대륙을 침략했으며, 이후에도 선비족이나 돌궐족 등이 꾸준히 한족사회를 위협했다. 그러다 송대에 이르러 북방의 유목민족들은 또다시 새로운 팽창의 시대로 들어섰다.
5세기 후반 거란족(契丹族, Khitan)은 당시 강성한 고구려의 압력을 피하기 위하여 요서(遼西)지방으로 남하하면서 중국과 마찰을 빚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국가의 면모를 갖추지 못한 거란은 북조(北朝)에 속한 여러 왕조에게 조공을 바치며 그 안전을 보장받으려 했다. 당(唐)은 요주(遼州)총관부, 송막(松漠)도독부를 이 지역에 설치하였고, 거란족을 기미주(羈縻州)로 편성하여 지배하에 두었다. 그러나 중국 사회가 혼란해지고 위그르제국의 세력이 쇠퇴해지자, 907년에 야율(耶律)부족 출신 아보기(阿保機)는 오늘날 차하르(察哈爾, Chahar)성(省) 지역에 자신의 세력을 구축하고, 908년 흩어진 거란 8개 부족을 통합하고 추장이 되었다. 그리고 야율아보기(872~926년)는 한인(漢人)을 거란 내부로 강제 이주시켜 거란제국(907~1125년)을 세웠다.
야율아보기는 924년에 이르러 몽골에서 위그르인들을 몰아내고 나라를 세운 키르기즈부족을 격퇴시켰다. 그는 계속해서 인근 지역으로 정벌을 감행하였으며, 926년 1월 발해를 멸망시키고 그 자리에 동단국을 세우고 돌아가던 중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이후 거란은 남으로 강북의 연운(燕雲) 16주까지 그들의 세력을 확장하면서, 북방에는 유목민의 요소를 그리고 남방에는 정착민의 요소를 가진 이중 체제의 제국을 건설하였다. 국가 명칭도 요(遼)라는 중국식 이름을 채택하고, 947년부터 1125년까지 중국을 통치하였다.
거란은 계속적으로 고려(高麗)를 침공하면서 그 힘을 잃어 갔는데, 1010년, 1014년, 1018년의 고려 원정은 계속적인 실패로 그 끝이 났다. 특히 마지막 전쟁에서 요(遼)는 고려의 강감찬 장군과 귀주에서 싸움을 벌여 대패하였다. 발해와 여진, 그리고 고려의 계속적이고 끈질긴 저항은 요의 힘을 약화시켜 1114년에 요는 여진족에 의해 붕괴되었으며, 결국 1125년에 마지막 황제가 퇴위함으로써 종언을 고하였다.
요가 여진에게 멸망하기 직전에 황족이던 야율대석(耶律大石, 재위 1124~1143년)이 몇몇 동료들과 함께 초원지역으로 도망하여 오늘날 추구착 근처의 타르바가타이에 있는 이밀에 근거를 두고, 돌궐계 국가인 카라한조(Karakhanid dynasty)의 도읍인 발라사군을 탈취하여 서요(西遼, 카라키타이)라는 제국을 수립하고, 구르칸(四海의 군주라는 의미)이라는 왕명을 사용하였다. 구르칸은 그의 통치 기간 동안에 주변 여러 지역을 침공하여 제국의 세력을 트랜스옥시아나까지 확장하였다. '트랜스옥시아나(마베레나흐르)'는 중앙아시아의 아무다르야강과 시르다르야강 사이의 지역을 말하는데, 반정착 반유목의 투르크 종족들이 기원전 2세기에 이 지역에 들어왔다. 1212년에 서요제국은 징기즈칸에 의하여 서쪽으로 밀려가는 나이만족의 쿠츨루크에게 패하였고, 호라즘의 무하마드 칸에게도 제국의 큰 부분을 빼앗김으로써 종말을 고하였다.
거란은 역사속에서 큰 흔적을 남겼는데, 거란(키타이)이 중국이라고 서양에 알려지게 된 것이었다. 즉 영어로 중국은 캐세이(Cathay)이고, 러시아어로는 키타이(Kitay)이다.
762년에 위그르의 카간 베키가 마니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면서 마니교는 위그르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마니교는 3세기에 '빛의 사도' 또는 최고의 '빛을 비추는 자'로 알려진 예언자 마니(Mani : 210?~276년)가 페르시아에서 창시한 이원론적 종교운동에서 시작되었다. 마니의 활동 초기에는 그리스도교, 조로아스터교, 불교의 여러 요소가 가미된 이단으로 여겨지기도 했으나, 마니교는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拜火敎]에서 파생되었고 교리가 일관되었기에, 그 체계가 확실히 잡혀가면서 고유한 종교로 자리잡았다. 위그르는 유목민족 최초로 집단적으로 정착민의 종교인 마니교를 받아들이면서 정착화가 더욱 가속화되었다. 위그르인들은 정착을 위해 스텝의 평야지대로 이동하였고, 중앙 아시아 유목민족 최초로 성곽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으로 인하여 위그르제국은 유목민족의 특성을 잃어버렸고 군사적으로도 활력이 약해져 840년에 망하고 말았다. 위그르를 멸망시킨 키르기즈는 강력한 부족 연맹이었으나 제국을 건설하지는 못하였다. 그들은 유목민족의 특성을 그대로 유지하였으므로 도시와 국가를 건설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었다. 마니교는 도시화와 정착화를 촉진시켰고 그리고 소그드인을 통하여 문자를 중앙아시아로 전파시켰다. 위그르인들은 스텝민족 최초로 문학을 발전시켰다. 패망한 위그르는 그 후 다양한 씨족 연맹으로 분열되어 소왕국들을 이루면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북중국을 장악한 반(半)유목국가 거란(키타이)은 오랫동안 여진족을 지배하였다. 원래 초원에서 일어난 거란의 황족, 귀족들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소흥안령에서 장백산맥의 삼림지대에 사는 여진족을 지배하면서 지역 특산물인 사금과 사냥용 매의 헌납을 강요하였고, 여진 미녀들을 기혼 미혼 구별 없이 잡아가 왕의 후궁으로 삼았다. 그러면서도 거란은 평소에 “여진인은 산산히 흩어져 모이는 일이 없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모인다면 대적할 수 없다”며 여진족을 경계하였다.
그러다가 하얼빈 남동쪽의 안추후수이[按出虎水] 부근 아청[阿城]의 완안부(完顔部)에서 세력을 키운 여진족 추장 아구다[阿骨打]가 1114년에 반기를 들고 거란의 전방 지배거점인 영강주를 공격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아구다는 1115년 하얼빈 동남쪽 50 km 지점에 위치한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에 금나라를 세우고 거란 토벌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1120년에는 거란(요제국)의 수도 상경임횡부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왕위에 올라 국호를 금(金)이라 하였으니, 그가 곧 금나라 태조(재위 1115∼1123년)다. 태조는 요군을 격파하며 영토를 넓혀 나갔고, 그 해 송(宋)나라와 동맹을 맺고 요를 협격하여 만주지역으로부터 요의 세력을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이어 태조는 산시성[山西省]의 다퉁[大同], 허베이성[河北省]의 연경(燕京: 베이징)으로 진출하였다. 제2대 태종(재위 1123∼1135년)은 1125년에 요를 멸망시키고 서하(西夏) ·고려(高麗)를 복속시켰다.
1125년 12월 금나라 군사는 동과 서로 나뉘어 동아시아 최대의 인구와 국력을 가진 송나라의 수도 개봉(카이펑)을 향하여 대거 남하하였다. 금나라의 동군은 연경을 거쳐 내려와 화북의 대평원을 가로질러 남으로 질주하고, 서군은 태행산맥과 여양산맥 사이의 분수협곡을 빠져 나와 개봉으로 향하였다. 화북평원의 군사거점이었던 하간, 중산의 수비군과 태원의 수비군은 농성으로 저항하였으나 금나라 군사가 곧바로 개봉으로 향하자 휘종은 남쪽으로 달아났다. 다음달, 금나라 군사가 개봉을 포위하자 송나라가 태원, 하간, 중산 3진의 할양을 약속하여 금나라 병사들은 퇴각하였다. 금나라 군사는 그해 가을 다시 개봉을 포위한 후 휘종과 흠종 그리고 1200여명의 귀족을 북쪽으로 연행하였으며 송나라 재상 장방창을 황제로 하는 괴뢰정권 초나라를 세운 후 북방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금나라 군사력이 떠나자 괴뢰정권은 휘종황제의 8번째 아들인 강왕에게 자발적으로 정권을 내주었다. 그러자 금나라는 다시 남진하였으며 강왕은 양자강을 건너 항주를 임시수도로 정하였다. 한편 화북에서 화중에 걸쳐 여러 자위집단이 이합집산하였으나 금나라 기마대에게 거의 전멸 당하였고, 패잔병들은 삼림이 있던 태행산으로 숨어들어 게릴라전을 펼쳤다. 이마저도 금나라 군사에 눌리면서 회하 이북의 넓은 들판은 금나라 영토로 변했다.
그러나 송나라는 패잔 정규군을 흡수한 지방군벌의 지역자위대 덕분에 강남에서 국가(남송)를 재정비할 수 있었다. 지방군벌들에 의해 회하에서 사천의 대산관까지 국경선이 확립되었다. 동쪽에서 차례로 회남동부 한세충의 한가군, 회남서부 강동에 기반을 둔 장준의 장가군, 호북 악비의 악가군, 사천 오개 오린의 오가군이 있었다. 민중들은 남송 정권보다 강건한 규율과 왕성한 전투심을 과시한 군벌 악비를 더 따랐다. 악비는 화북의 농민출신이었으나 의용군에 몸을 던져 불과 6, 7년 사이에 호북지방의 대군벌로 자랐다.
남송정권은 지역자위대를 이용하여 기반을 확립하였다. 남송정권은 '악비 중심의 군사집단이 화북 땅을 회복하면 악가군이 악가왕조로 변신할 수도 있고, 반대로 전쟁이 길어지거나 패하면 남송정권이 몰락할 수도 있다'라고 예상하였다. 그리하여 재상 진회는 악비를 체포하여 투옥한 후, 금나라와 화의를 체결하였다. 이 화의는 1234년까지 거의 100년간 송-금 관계의 기본을 결정하였다. 화의는 동쪽의 회하에서 서쪽의 대산관까지의 선을 국경으로 확정하였다. 요나라는 중국 땅의 연운 16주를 차지했었지만, 이 화의로 인하여 금나라는 송의 수도였던 개봉을 포함한 화북전체를 취하였다. 송이 요나라를 형으로 삼은 것에 비하여 금나라에게는 신하의 예를 취하였으며, 또한 매년 세폐로서 은과 비단 각 25만냥을 바쳤다. 남송은 군사력으로는 상대적으로 약하였으나, 막대한 금력과 유화정책으로 외세의 위협을 무마하면서 중원의 실지회복을 노렸다.
이리하여 중국지역은 서로 다른 민족이 지배하는 최소한 너댓개의 나라들로 나뉘어졌다. 크게는 여진의 금이 차지한 중원, 한족인 송이 밀려 내려간 남송이 들어선 중원 이남, 탕구트족이 차지한 만주 일부와 중국 서북부의 감숙(甘肅)과 청해 일대였다. 그외 사천성 외곽의 광대한 티베트 및 운남지역 역시 정치, 외교적 권한을 지닌 독립국가였다.
감숙 등지를 중심으로 일어난 티베트어족인 탕구트족(黨項族)은 서하(西夏, 1038~1227년)를 건립하였고, 요, 금, 송과 경쟁하는 세력판도를 형성했다. 한족왕조인 송은 이들 유목민족에게 조공을 바치거나 또는 이들간의 분쟁을 조장하여 현상유지를 도모했다. 이슬람 세계도 여러 제국으로 분열되어 있었고 유럽에서는 봉건영주들이 득세하여 국력이 분산되고 있었다.
징기즈칸이 출생했을 때, 몽골족은 사회적 대전환을 경험하고 있었다. 천막생활을 하며 계절적으로 늘 이동하는 이들은 원래 씨족중심의 가부장적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다, 몽골족은 가족을 기본단위로 씨족을 그리고 다시 씨족들이 뭉쳐 부족을 형성하여 분권적이며 인적 유대를 강조하는 사회체계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중국식 관료제를 도입하여 보다 중앙집권적 사회로 전환하고 있었다.
몽골제국(蒙古帝國)의 성립
징기즈칸(Genghis Khan, 成吉思汗, 1162년경~1227년)
징기즈칸과 그의 후손들이 세계를 흔들자 술탄들이 쓰러졌다. 칼리프들이 넘어졌고, 카이사르들은 왕좌에서 떨었다. 그는 천수를 누리고 영광이 최고에 이른 상태에서 죽었으며,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자식들에게 중국제국 정복을 완수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로마제국 쇠망사’ 중에서)
묘호(廟號) 태조(太祖). 아명 테무진[鐵木眞]. 바이칼호 근처 출생. 징기즈란 고대 터키어인 텡기스(바다)의 방언이었다고 하고, 1206년 즉위하였을 때 5색의 서조(瑞鳥)가 ‘징기즈, 징기즈’ 하고 울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샤머니즘의 ‘광명의 신(Hajir Chingis Tengri)’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우세하다. 태어난 연도에 대해서도 1155년, 1162년, 1167년 등의 이설이 있다.
복수와 약탈의 세계에서 사고무친의 고난을 겪다
1162년경 오늘날의 몽골과 시베리아 지역이 맞닿은 곳, 바이칼호수의 동쪽 오논강 상류유역 델리운 볼닥 숲에서 보르지긴씨족(氏族) 에수게이 바아토르와 올크누트부족(部族) 출신 호엘룬 에케와의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호엘룬 에케는 메르키트부족 전사의 아내였으나 에수게이 바아토르에게 납치당해 그의 아내가 되었다. 오른손에 핏덩이를 쥐고 출생했다고 전해지는 이 아들에게 에수게이 바아토르는 테무진(鐵木眞)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이 이름은 아들의 출산 직전 그가 굴복시킨 타타르족의 두목 테무진 우게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이 시절에는 아이가 태어나면 출생 직전에 발생한 주요사건이나 산모가 해산 후 제일 먼저 보는 물건을 갓난아이의 이름으로 삼곤 하였다. 테무진 외에도 에수게이 바아토르는 호엘룬 에케와의 사이에 테무진보다 두살씩 어린 조치 카사르, 카치운, 테무게라는 아들들과 테무룬이라는 딸을 두었다. 첫 부인 소치겔로부터는 벡테르와 벨구테이라는 아들 둘을 두었다. 테무진은 가족과 함께 아버지 에수게이 바아토르의 고향인 오논 강가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는 다른 몽골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어린 나이에 말 타는 법과 활 쏘는 법을 배워 새들을 곧잘 잡기도 하였다.
테무진이 9세가 되었을 때 에수게이 바아토르는 당시의 조혼 풍습대로 아들에게 아내를 얻어주려 하였다. 결혼이란 양가의 정치적인 연합과 가문의 위세를 높이기 위한 수단도 되었다. 그래서 에수게이 바아토르는 호엘룬 에케의 올크누트씨족이 속한 콩기라트부족이 몽골 부족들 내에서도 평판이 높고 세력도 강했으므로 그 집안에서 신부감을 찾아보려고 길을 나섰다. 그러다 도중에 같은 부족의 보스카올씨족 족장인 데이 세첸을 만나게 되었다. 그에게는 테무진보다 나이가 한 살 많은 보르테라는 딸이 있어 그가 혼사를 제안하자 에수게이 바아토르는 이를 수락하고 테무진을 데릴사위로 주었다. 장가든 남자아이가 처가에 머무는 것이 당시의 풍습이었다. 이 혼인으로 에수게이 바아토르는 중요한 연합세력을 얻게 되었다. 테무진은 이때부터 에수게이 바아토르가 독살당하는 13세까지 데이 세첸가(家)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 시절에 테무진은 자무카를 만나게 되어, 서로 장난감을 바꾸거나 얼어붙은 오논강에서 기구를 던지고 놀기도 하면서 깊어진 우정으로 두 차례에 걸친 안다(盟友, 맹우) 서약을 하였다.
에수게이 바아토르는 어느 날 집으로 가는 길에 식사를 하고 있던 일단의 타타르인들과 만나게 되어 그들과 자리를 같이하였는데, 그가 전부터 자기들을 공격하던 적임을 안 그들은 몰래 음식물에 독을 넣었다. 독 때문에 집으로 가는 도중에 몸에 탈이 났으나 에수게이 바아토르는 가까스로 집에는 도착하였다. 죽음이 가까웠음을 안 그는 신임하던 차라카 노인의 아들 몽릭을 불러 테무진을 데려오도록 부탁하였다. 그리고는 그는 저 세상으로 떠났다. 이제 이 거친 세상에 남은 것이라곤 에수게이 바아토르의 두 아내와 10살이 안 된 어린 자식 일곱뿐이었다. 12세기 당시 초원지대에는 수십 개 부족과 씨족들이 전투, 사냥, 유목, 약탈, 납치, 교역 등으로 생존을 이어가고 있었다.
족장의 죽음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것이 매우 위험한 세상이었으므로 몽릭은 테무진의 장인 데이 세첸의 집으로 가서 아버지 에수게이 바아토르가 테무진을 보고 싶어한다고만 말하였다. 장인의 허락으로 집에 돌아와서야 테무진은 아버지의 죽음을 알게 되었다. 이제 테무진은 어머니와 함께 가족을 이끌어 가야만 했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테무진의 가족은 어려움에 처했다. 당장 암바카이칸의 후비(后妃)들은 호엘룬 에케를 조상들의 제사에 참여치 못하게 했으며, 에수게이 바아토르를 따르던 사람들은 "연못의 물이 끊기고 단단한 돌은 부서졌다"면서 그녀 곁을 떠났다. 억센 호엘룬 에케는 에수게이 바아토르의 깃발을 들고 말을 몰아 그들을 설득하였으나 충성스러운 추종자들조차 그들을 버리고 가축을 끌고 떠나버렸다. 이렇게 연합세력이었던 타이치우드씨계 노얀(씨족장)들에게 키야트 보르지긴 씨족민들을 모두 빼앗기고 테무진 일가는 공동 유목에서 추방되었다. 에수게이 바아토르의 지위는 암바카이칸의 아들들인 탈구타이 키릴툭과 투두옌 기르테가 차지하였다.
어머니로서 어린 자식들을 키워야만 했던 호엘룬 에케는 머리를 묶어 올리고 띠를 둘러 옷을 짧게 하고는 밤낮으로 오논 강가를 다니며 배와 모일순 과일을 따고 풀뿌리를 캐서 어린 자식들의 배를 채워 주었다. 아이들 역시 활과 낚시로 하루하루의 양식을 찾아 다녔다. 헨테이산맥(부르칸칼둔)의 오논강 상류에서 테무진 가족은 이런 상태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다 이 가족에게 기막힌 일이 벌어졌다. 어느 날 첫째 부인 소치겔의 아들인 벡테르, 벨구테이와 둘째 부인 호엘룬 에케의 아들인 테무진과 조치 카사르, 이들 4형제가 개울에서 낚시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테무진이 낚은 물고기를 이들 이복형제가 채가 버렸다. 테무진과 조치 카사르가 화가 나서 어머니에게 일러 바치자 그녀는 그림자 이외에는 다른 벗이 없고, 꼬리 이외에는 채찍이 없는 외로운 처지를 상기시키면서 "타이치우드씨족에게 고난을 당하는 때에 형제가 불화하면 어쩔 것인가. 모두 힘써 이 수모를 갚아야 한다"고 타일렀다. 그러나 두 형제는 "전에도 한번 종달새를 활로 쏘아 맞춘 것을 빼앗겼는데 지금도 또 그러니, 이 자식들과 어떻게 같이 살겠는가"라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때 벡테르는 구릉 위에 앉아 말떼를 보고 있었다. 테무진과 조치 카사르는 활을 쥐고 소리 없이 앞뒤로 다가가 그를 쏘아 죽여 버렸다. 집에 돌아온 두 아들의 얼굴을 본 호엘룬은 곧 이를 눈치채고 둘을 크게 꾸짖었다. "내 배에서 나왔을 때 손에 핏덩이를 쥐고 태어난 자식이 야수같이 사람을 죽였구나. 한 사람이라도 더 필요한 때에 천벌을 받을 짓을 했구나."
그 후에도 테무진은 친동생 조치 카사르가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는 샤만의 말만 믿고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이 소식을 들은 어머니 호엘룬 에케의 분노와 질첵으로 동생을 용서해 준적이 있었다. 이 사건들은 '테무진이 가족의 우두머리로 인정 받느냐 마느냐'하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었다. 테무진은 자기의 권한이 도전 받자 무력을 행사하였다. 친형의 복수를 포기하고 테무진의 권한을 인정한 벨구테이는 오래 살수 있었다. 테무진의 생활은 대단히 검소하였으나 자신의 권한이 도전 받을 때에는 용서 없이 도전자들을 처단하였다.
테무진이 이복형을 죽였다는 소식이 타이치우드씨족의 수령 탈구타이 키릴툭의 귀에 들어갔다. 그는 테무진이 필시 무서운 적이 될 것으로 예상하였다. "병아리가 깃털을 갈고, 침 흘리는 아이가 이제 다 컸다." 탈구타이 키릴툭은 테무진을 미리 잡아죽이려 호엘룬 에케의 목장을 습격하였다. 테무진 가족은 부르칸칼둔산 숲속으로 재빨리 피신한 후, 벨구테이는 나무를 꺾어 방책을 만들었고 조치 카사르는 적을 향해 활을 쏘았으며, 나이 어린 아이들은 골짜기에 숨었다. 타이치우드인(人)들이 "테무진을 내놔라. 다른 사람은 필요 없다"고 하자 테무진은 말을 타고 숲 속으로 도망쳤다.
타이치우드인들은 숲을 둘러쌌다. 테무진은 사흘간 숲속에서 지낸 후 지쳐 나가려고 하자 말의 안장이 저절로 풀리는 것을 보고는 하늘이 막는다며 사흘을 더 숲에서 지냈다. 6일 후 나가려고 하자 이번에는 커다란 바위가 출구를 막았다. 테무진은 이것도 하늘의 뜻으로 생각하여 숲속에 더 머물렀으나 먹을 것이 떨어져 9일째되던 날에는 나무를 헤치고 숲을 빠져 나올 수밖에 없었다. 포위하고 있던 타이치우드인들이 굶주림에 지친 그를 붙잡았다.
타이치우드인들은 테무진의 목에 목쇄를 채워 집집마다 끌고 다녔다. 붉고 둥근 태양이 비추던 여름저녁, 그들은 테무진을 사로잡은 것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고 어린 소년들에게 교대로 테무진을 감시하도록 하였다. 그는 기회를 노리다 차고 있던 목쇄로 어린 소년의 머리를 내리치고는 오논 강가의 숲속으로 도망쳐 냇가로 숨어들었다. 타이치우드인들은 곧 그를 수색하였다. 대낮처럼 달빛이 주위를 비추고 있는 때 타이치우드씨족에 노비로 일하고 있는 술두스씨족 소르칸 시라가 냇가에 숨어있는 그를 발견하고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테니까 어머니가 있는 곳으로 가라"면서 테무진을 도망치게 하였다.
그러나 말이 없이는 도망칠 수 없음을 안 테무진은 소르칸 시라의 천막으로 찾아들었다. 소르칸 시라는 테무진이 나타나자 당황하였다. 그러나 그의 두 어린 아들 칠라운과 침바이가 테무진을 불쌍히 여겨 "참새가 매에게 습격 당하면 풀숲은 새를 구하는 법입니다"라며 목쇄를 헐겁게 풀어주고 하룻밤을 재운 후, 양털을 쌓아둔 마차 속에 테무진을 숨겼다. 테무진을 찾아 각 집을 수색하던 수색대가 마침내 소르칸 시라의 집안과 마차 속을 뒤지기 시작하였다. 소르칸 시라가 "이 더운 날에 어떤 놈이 양털 속에 숨겠는가?"하자 그들은 그냥 돌아갔다. 위기를 모면한 테무진은 말과 식량을 얻어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집으로 돌아왔다. 테무진은 타이치우드씨족이 그를 포로로 잡고 어떻게 할지 잠시 망설일 때 소르칸 시라와 그의 아들들의 도움으로 탈출하였다. 그의 나이 14세였다. 그 일이 있은 후에도 그와 그의 가족은 여전히 초원의 들쥐, 야생 열매, 물고기 등을 먹고 사는 영락한 삼림부족의 상태로 머물러 있었다.
테무진은 궁핍함과 생명의 위협에 쫓기면서도 진취적 기상과 영민함으로 그리고 동생 조치 카사르의 뛰어난 활솜씨를 이용한 사냥으로 집안을 일구기 시작하였다. 말이란 유목민에게 없어서는 안될 재산이었다. 이제 테무진은 백황모의 거세마 등, 말 9마리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날 도둑들이 나타나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테무진의 천막 앞에 있던 8마리의 말들을 훔쳐 달아나버렸다. 고립된 생활을 하는 유목민들은 이러한 여러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은 뻔히 보면서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때 벨구테이는 황색 말을 타고 타르바간(몰모트)을 잡으러 가고 없었다. 저녁이 되어서야 벨구테이가 돌아왔다. 도둑이 모든 말들을 끌고 간 것을 안 벨구테이가 쫓아가려 하자 조치 카사르는 자기가 가겠다고 나섰다. 테무진은 장남인 자기가 할 일이라며 말에 올라타 도둑맞은 거세마들의 흔적을 따라 사흘 밤낮을 쫓아갔다.
넷째날 아침 일찍 테무진은 아룰라트씨족 나후 바얀의 아들 보오르추가 말젖을 짜고 있는 장소에 도달하여 그에게 거세마의 행방을 묻자 보오르추는 그날 아침 해뜰녘에 말떼가 지나갔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는 그는 테무진의 사정을 듣게 되었다. 보오르추는 짠 마유를 덮어놓은 채로 그들이 간 길을 가르쳐 주겠다며 테무진을 따라 나섰다. 두 사람은 거세마들의 흔적을 따라 사흘 밤낮을 가서 저녁해가 기울 때 마차를 나란히 세워놓은 원진 바로 바깥쪽에 말 8필이 풀을 뜯고 있는 것을 보았다. 둘은 기회를 노리다 함께 말을 타고 기습적으로 돌진하여 거세마들을 몰아내었다. 그러자 그곳의 사람들이 줄줄이 그들을 추격해왔다. 손에 올가미를 쥔 백마 탄 자가 먼저 추격해오자 테무진은 활을 당겨 뒤로 쏘면서 달아났다. 해가 떨어져 어두워지면서 그들은 더 이상 쫓아오지 못하였고, 이렇게 그들은 무사히 말들을 되찾았다.
테무진은 보오르추의 도움에 감사하면서 말들을 나누어주려 하였으나 그는 테무진이 곤경에 처해서 도운 것 뿐이라며 거절하였다. 이틀후 두 사람이 나후 바얀의 집에 도착하자 나후 바얀은 보오르추가 없어 슬퍼하고 있었는데 뜻밖에 돌아온 아들을 보자 반가워하며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였다. 이렇게 해서 보오르추는 테무진과 너케르(심복) 관계를 맺게 되었고 테무진의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가 되었다. 이때부터 테무진의 야망은 시작되었다. 테무진은 청년시절에 몇 번의 위기를 넘겼다. 어느 날 그가 보오르추와 함께 말을 타고 가는데 산 위에 숨어있던 12명의 남자가 그들을 향하여 덮쳐왔다. 이때 보오르추는 테무진의 뒤에서 오고 있었다. 그러나 테무진은 보오르추를 기다리지 않고 힘과 기력을 다하여 그들을 공격하였다. 그들 12명은 테무진에게 활을 쏘았고 테무진은 이에 굴하지 않고 말을 지쳐 앞으로 나갔다. 갑자기 한대의 화살이 테무진의 입에 맞았고 그는 의식을 잃고 말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때 보오르추가 나타나 물을 가져와 입을 씻어 목구멍에서 핏덩어리를 꺼낸 후에야 테무진은 의식과 행동을 회복하였다. 그러자 말자 테무진은 다시 벌떡 일어나 그들을 향해 돌진하였고, 이에 크게 놀란 그들은 도망가다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
이제 테무진은 15세가 되었다. 몽골족에게는 이 또래의 젊은이는 성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궁핍함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테무진은 벨구테이와 함께 콩기라트부(部)의 데이 세첸을 찾아가 어린 시절부터 약속되었던 딸 보르테 위진과 결혼시켜 줄 것을 요구하여 이를 허락 받았다. 신부의 어머니는 시부모에게 주는 예물로 검은 담비털 코트를 마련하였다. 테무진은 보르테와 결혼하자, 오논강 상류에서 케룰렌강 상류로 거처를 옮기고 자신의 세력권을 형성하려 하였다. 그래서 보오르추를 부르자 그는 즉시 달려왔다. 테무진에게는 최초의 심복이었다. 물론 그의 동생들도 있었다. 명사수인 조치 카사르, 도끼로 나무를 조각하는 벨구테이, 모두 벌써 훌륭한 전사로 성장하였다. 그렇지만 에수게이 바아토르의 세력이 이미 무너졌고, 또 자무카와 타이치우드씨족 그리고 케룰렌호와 에르군네강 일대의 몽골씨족이 난립하는 상황에서, 테무진이 외부의 지원 없이 자력으로 자신의 세력을 새로이 만든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어려서 경험한 가난은 테무진의 신체를 단련시켰고 초원의 위험은 정신을 예민하게 하였다. 또한 그가 겪은 포로생활은 적의 습격으로부터 안전하게 살아남기 위해서는 보호자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하였다.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권력의지로 야심만만한 테무진은 우선 새로운 주인을 섬겨야겠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테무진은 당시 몽골고원의 강자이자 에수게이 바아토르와 안다 관계였던 케레이트부족 토오릴에게 기대려 하였다. 그 당시 토오릴은 타이치우드씨족이나 자무카와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어 몽골부족 내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토오릴 역시 격동의 젊은 세월을 보냈다. 그는 7세 때에 메르키트족에게 납치당하여 고통을 겪었고, 13세 때에는 어머니와 함께 타타르부족에 끌려가 낙타를 돌보는 노비로 일하기도 하였다. 그는 아버지 쿠르자쿠스 부이룩 칸이 죽은 뒤 칸이 되었지만 구르칸이던 숙부에게서 쫓겨나 테무진의 아버지인 에수게이 바아토르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당시 쿠툴라칸은 에수게이 바아토르에게 돕지 말라고 경고를 하였으나 에수게이 바아토르는 이에 따르지 않고 구르칸을 쳐부순 뒤 토오릴에게 부족민들을 되돌려주었다.
테무진은 케레이트의 강력한 통치자 토오릴의 관심과 호의를 끌기 위해 아내 보르테 위진이 결혼할 때 지참했던 담비털 코트를 가지고 동생 조치 카사르와 벨구테이를 데리고 톨라강 카라 툰에 머물고 있던 토오릴을 찾아갔다. 그의 영역은 서쪽으로는 오논강부터 몽골인들이 사는 초원을 거쳐 동쪽으로는 중국의 변경지방에 이르렀다. 그의 명성은 무엇보다도 그가 금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대신 도움을 받을 수 있는 힘의 배경에 있었다. 테무진은 토오릴에게 그의 아버지 에수게이 바아토르가 그와 맺었던 안다 관계를 상기시킨 뒤, 자신은 그 관계에 따라 그를 아버지로 모시겠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가져온 담비털 코트를 받쳤다. 토오릴은 한때 테무진의 아버지에게 구원받았던 일을 잊지 않고 매우 기뻐하면서 담비털 코트를 받아 들고, "흩어진 너의 부족민을 모아주겠다. 선물에 대한 답례로 떨어져나간 너의 부족민을 거두어 주겠다"면서 그를 신하로 받아들였다.
에수게이 바아토르가 죽고 테무진이 타이치우드씨족에게 생명의 위협을 받을 때에도 외면했던 토오릴이 그를 동맹자로 받아들인 것은 당시 동맹을 맺고 있었던 자무카 같은 큰 세력보다는 언제나 자기에게 충성할 수 있는 새로운 정치적 동맹세력이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한 토오릴은 숙부인 구르칸뿐만 아니라 아들인 닐카 셍굼 조차 자신의 자리를 노리고 있어 가족에게 조차 의지할 수 없었던 차에 테무진이야 말로 호감이 가는 상대였다. 반면 테무진은 토오릴을 자신의 의부로 삼고 그와 주종관계를 맺음으로써 강력한 보호막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테무진의 인생에 새로운 장이 열렸다. 초원의 유목민들 사이에서 소문은 빠른 속도로 퍼져나갔다. 그의 명성은 높아졌고 초원의 유목민들은 그를 알아주기 시작하였다.
에수게이 바이토르의 노비였던 우량카이족에 속하는 자르치우다이 에부겐은 테무진이 출생할 때 에수게이 바아토르에게 약속했던대로 부르칸칼둔산에서 풀무를 메고 아들 젤메를 데리고 테무진에게로 왔다. 자르치우다이 에부겐은 "오논강의 델리운 볼닥에서 테무진이 태어났을 때, 나는 테무진에게 수달피 포대기를 예물로 주었다. 그리고 또 나의 아들인 젤메도 주었다. 그러나 당시 젤메가 너무 어리다고 해서 나는 젤메를 데리고 갔다. 지금 젤메를 줄테니 젤메에게 말안장을 얹게하는 일을 시키거나 문을 열어주게 하는 일을 시키라."며 테무진에게 머물러 봉사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호엘룬의 일족인 올쿠누트씨족도 테무진에게 예속되었다.
이 당시 자무카는 이미 몽골부족의 실력자였다. 자무카의 세력기반은 키야트씨족을 비롯한 여러 세력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탈구타이 키릴툭 사건으로 타이치우드씨족과 적대관계에 있던 테무진은 키야트 보르지긴씨족을 대부분 흡수하고 있는 자무카를 통하지 않고서는 대대적인 세(勢)확장이 불가능하였다.
타타르와 타이치우드를 정복하고 초원의 강자로 떠오르다
테무진이 이렇게 세를 확장하고 있던 중에 예상치도 못하게 메르키트부(部)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메르키트부의 습격은 옛날 에수게이 바아토르가 호엘룬을 납치한 것에 대한 보복이었다. 호엘룬을 빼앗긴 칠레두는 고인이 되었지만 복수는 부족 전체의 의무로서 대대로 이어지는 것이었다. 메르키트부는 테무진이 신부를 맞이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복수할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였다. 톡토아 베키가 이끄는 300명의 메르키트 기마병이 갑자기 테무진의 둔영지를 습격하였고, 그의 가족들은 사방으로 도망쳤다. 테무진, 호엘룬, 조치 카사르, 카치운, 테무게 옷치긴, 벨구테이, 젤메가 각기 말에 올라탔고 테물룬은 호엘룬이 끌어안았지만 보르테에게는 남는 말이 없었다. 테무진은 가족몰살의 위기에서 주저 없이 갓 데려온 신부를 운명에 맡기고 부르칸칼둔산으로 달아났다. 메르키트족은 수레에 숨은 보르테를 잡자 테무진에 대한 추격을 중지하고 이로써 칠레두의 원수를 갚았다면서 돌아갔다. 붙잡힌 보르테는 연혼제의 풍습에 따라 사망한 칠레두의 동생 칠게르 부쿠의 부인이 되었다. 1184년의 일이었다.
테무진은 죽음에서 벗어난 것을 하늘에 크게 감사하면서 자신의 운명을 믿기 시작하였다. 그는 부르칸칼둔산에 올라갔다. "부르칸칼둔산이 벼룩 같은 이 목숨을 지켜 주었다. 정말로 무서웠다. 부르칸칼둔산에 아침마다 제사를 드리리라. 날마다 기도하리라. 나의 자손들이여, 이를 기억하라"고 외친 뒤, 허리띠를 어깨에 걸치고 모자를 벗고 손을 가슴에 올린 뒤, 해를 향하여 아홉 번 절을 하고 쿠미스(말젓술)를 올렸다.
테무진은 서서히 세력을 규합하며 적절한 반격시기를 노렸다. 그는 동생 조치 카사르, 벨구테이와 함께 툴라 강변의 카라 툰에 있는 토오릴을 찾아가 딱한 사정을 호소하였다. 토오릴은 "담비털 코트의 답례로 전 메르키트부족을 공격하여 그들을 도륙한 뒤 너의 처를 구해 주겠다"며 큰소리를 쳤다. 토오릴은 몽골부의 대표 세력인 자무카와 강력한 세력으로 커가는 메르키트부가 연합하면 자신이 궁지로 몰릴 수 있다고 생각하여 자무카를 앞세워 메르키트부를 공격하여 테무진의 세력을 만들어 준다면 몽골부는 분열되리라 생각하였다.
토오릴은 테무진을 자무카에게 보내 메르키트부를 서로 연합하여 공격하자고 제안하고 모든 것을 자무카에게 일임한다고 하였다. 자신의 어릴 적 안다(盟友, 맹우)였던 테무진의 구원요청과 토오릴의 협조요청을 받은 자무카는 흔쾌히 승낙하고 "토오릴은 출진할 때, 부르칸칼둔산의 남쪽 길을 택하여 테무진 안다가 있는 곳을 거쳐 오논강 상류에 있는 보토칸 보오르지에서 나와 만나도록 하자. 나는 2만명의 군사를 만들어 오논강을 거슬러 올라가겠다"는 회신을 보냈다. 이로서 테무진은 케레이트의 통치자 토오릴과 자기 연배의 또 다른 몽골 지도자인 자다란부족의 자무카의 도움을 한번에 확보하였다.
당시 메르키트부는 3씨족 집단으로 나뉘어 있었다. 오도이트씨족의 톡토아 베키는 보오라 케에르, 오아스씨족의 다이르 우순은 탈콘 아랄, 카아트씨족의 카아다이 다르말라는 카라지 케에르에 머물고 있었다. 자무카의 공격계획은 적의 퇴로를 차단하여 메르키트부를 한번에 없애려는 것이었다. 테무진과 토오릴이 군을 합쳐 보토칸 보오르지에 이르자 자무카는 이미 3일전에 도착해 있었다. 자무카는 "우리 몽골인들은 한번 약속하면 눈보라가 쳐도, 폭풍우가 내리더라도 모임에는 늦지 않는다"라며 힐책하였다.
연합군은 함께 진군하여 킬코강에 도달한 후, 떼를 엮어 강을 도강하였다. 연합군은 다이르 우순의 본거지로 진격하여 각지에 있는 메르키트인들을 약탈한 다음 회군하기로 하였다. 연합군은 메르키트부를 기습공격하여 카아다이 다르말라를 사로잡아 대승을 거두었고, 톡토아 베키와 다이르 우순은 겨우 몸만 건져 도주하였다. 테무진은 도망가는 메르키트족 속에서 보르테를 찾아내고는 "나는 내가 찾던 것을 얻었다. 밤을 새워 추격하지 말고 여기서 야영하자" 라고 하였다. 얼마 후 보르테에게서 장남 주치가 태어났는데, 그 이름이 손님이라는 뜻이라 한다. 이는 귀환할 당시 보르테가 임신한 상태라 ‘아이가 메르키트부족의 칠게르 부쿠의 아이다. 아니다, 테무진의 아이다.’라는 말이 많아 테무진도 애매한 상황이라 그런 뜻의 이름을 지어준 것 같다. 출생을 둘러싼 비밀로 장남 주치와 둘째 차가타이가 내내 갈등하는 계기가 되었다. 1185년 이후 차가타이와 오고타이가 태어났으나 둘의 생년월일은 불명이다.
회군할 때 테무진과 자무카는 코르코낙 주부르를 향하여 함께 떠났다. 토오릴은 부르칸칼둔산의 북쪽으로 나가 허르커르투 주부르를 지나 가차오라토 수브치트, 홀리야트르 수브치트를 통과하면서 사냥을 한 뒤 툴라 강변의 카라 툰으로 떠났다. 메르키트부족의 토벌로 18세인 테무진의 위상은 크게 올라갔으며, 한편으로는 토오릴이 보호하는 테무진이 자무카의 세력권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자무카의 세력이 분열할 것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테무진은 메르키트부족에서 얻은 승리로 자신을 얻었다. 테무진은 토오릴과 자무카에게 감사하면서도, 위대한 하늘에 의해 지명되고 어머니인 땅에 의해 축복된 힘이 그에게 주어졌다고 하였다. 자무카와 테무진은 함께 이동하며 공동유목을 하였다. 테무진은 안다 관계를 새롭게 하기 위해 톡토아 베키의 황금허리띠를 자무카의 허리에 매어주고 톡토아 베키의 황백색 말에 자무카를 태웠다. 자무카는 다일 우순의 황금허리띠를 테무진의 허리에 매어주고 다일 우순의 갈기가 선 백색말에 테무진을 태웠다. 이들이 주고받은 황금허리띠와 백마는 칸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로서 테무진은 대번에 자무카와 대등한 지위로 되었다. 이렇게 안다 관계를 새롭게 한 다음 그들은 신목 아래에서 즐겁게 연회를 베풀었다. 이후 둘은 같이 지내면서 밤에는 한 이불을 덮고 자며, 이렇게 테무진과 자무카는 일년 반을 함께 지냈다.
메르키트 약탈로 부유해진 테무진은 자무카의 우정을 바탕으로 자무카에게 예속되어 있던 각 세력들을 서서히 포섭, 회유해 나갔다. 테무진의 아버지는 귀족 출신이었으나 사망한 뒤에는 부족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으므로 테무진이 끌어 모은 사람들은 여러 계층에서 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부족질서와 서열에서 뛰쳐나와 더 나은 생활을 기대하며 새로운 주인을 위해 봉사하려는 너케르들과 주인의 착취에 시달리는 세습노비들이었다. 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테무진은 공정하고 관대한 수령이라는 평판을 얻어야 했다. 몽골인들은 몽골부족 통일과 과거의 영광을 회복시켜 줄 장군으로 태무진을 바라보기 시작하였고, 하늘이 그를 군주가 되도록 선택하였다는 이야기까지 퍼져나갔다.
한번은 테무진이 제위레트 무리 근처에서 사냥을 하게 되었는데, 제위레트인들에게 같이 밤을 지내자고 제안하였고, 더구다나 다음날 사냥을 하여 많은 동물들을 잡아주었다. 이에 제위레트인들은 “타이치우드족과 우리는 비록 형제지간이지만 그들은 우리의 수레와 말을 약탈하고 우리의 음식을 빼앗아 가는데, 이렇게 보살펴주는 사람도 있구나”라고 하였다. 테무진은 그들에게 너케르 관계를 제안하여 두 사람만 이에 응하였지만, 추종자들에게 보여준 그의 도량은 곧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타이치우드씨족의 노비들은 “테무진이 자신의 옷으로 다른 사람을 입히고 자신의 말로 다른 사람을 태운다. 그가 바로 백성과 나라를 안정시킬 사람이다”라고 이야기하였다. 테무진의 정책은 성공을 거두어 따르는 너케르들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테무진은 두 가지 세력을 구축하였다. 하나는 자기직계의 너케르 집단이고, 다른 하나는 연합이라는 성격이 강한 키야트씨족 노얀들의 규합이었다. 테무진은 키야트씨족을 동맹의 상대로 삼았다. 키야트씨족은 자무카 세력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방대하였다. 키야트씨족의 지지를 얻지 못하면 세력권 창출이 안될 뿐 아니라 앞으로도 그들이 족쇄로 작용할 수 있으므로, 테무진은 직계 너케르 집단의 창설에 못지 않게 키야트씨족과의 연합추진도 중시하였다. 키야트계 세력규합은 알탄과 쿠차르 베키를 주축으로 진행시켰다. 이 시도는 모든 키야트씨족이 동의함으로써 성공적으로 끝났다. 이로써 테무진과 키야트씨족은 더 이상 자무카와 공동으로 유목을 할 필요가 없어졌다. 이들은 이제 적당한 명분을 찾아 자무카와 헤어지려고 작정하였다.
테무진의 이런 행태를 뒤늦게 안 자무카는 노골적으로 반발하였다. 보르테는 자무카가 테무진에게 싫증을 느낀다고 충고하였다. 테무진은 그녀의 충고에 따라 공동의 야영지에서 빠져 나와 밤중에 자기의 무리들과 함께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그들은 이동 중 타이치우드씨족이 있는 곳을 지나게 되었다. 이를 보고 놀란 타이치우드인들은 자무카가 있는 곳으로 몰려갔다. 이리하여 1년 반에 걸친 자무카와 테무진의 연합은 끝이 났는데, 이는 두 사람 다 몽골부를 자신이 재건하고 칸으로 인정받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테무진은 말을 키우던 초원 귀족의 지지를 받았고 자무카는 가난한 목민인 평민들(카라추)의 지지를 받았다. 테무진의 곁에는 몽골귀족들 가운데 가장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는데, 그들 중에는 작은아버지 다리타이 옷치긴, 유명한 카불칸의 증손이며 오킨 바르칵의 손자이며 소르카투의 아들인 주르킨 집단의 지도자 사차 베키, 그리고 쿠툴라칸의 아들인 알탄 옷치긴도 있었다. 테무진은 두 칸의 후계자들로부터 지지를 받았다. 옛 칸가의 대표들은 테무진의 전통적이고 온순함에 안심이 된 반면 자무카의 활기차고 혁신적인 성향에 불안을 느꼈다.
자무카와 헤어짐으로서 테무진은 몽골부족의 패권싸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려는 자신의 의지를 세상에 알렸다. 여러 씨족민들이 개인으로 혹은 집단으로 테무진의 밑으로 모여들었다. 잘라이르씨족민들과 타르구트씨족에서도 사람들이 왔고, 옹구르는 바야우트 창시우트씨족에서 사람들을 이끌고 왔고, 망구트씨족에서도 두 명이 왔다. 보오르추의 동생 외겔렌 체르비는 형과 함께 하려고 왔고, 젤메의 동생 수베테이도 우량하트씨족과 관계를 끊고 연합하였다. 이외에도 베수트, 술두스, 콩고탄, 올쿠누트, 코룰라스 등의 씨족민들에서도 떨어져 나왔다. 되르벤씨족으로부터는 목수 한 명이 왔고, 이키레스, 노야킨, 오로나르 등의 씨족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왔다. 바룰라스씨족에서도 한 가족이 왔고, 바아린씨족에서는 한 무리가 단체로 그와 연합하였다. 심지어 자무카의 자다란씨족에서도 사람이 왔다. 이렇게 여러 씨족 사람들이 그들과의 관계를 끊고 테무진을 따른 데에는 대부분 이들이 세습노비였기 때문이었다.
헤어질때 몽골인들의 일부가 테무진을 따름으로써 두 경쟁자 사이의 싸움은 불가피하였다. 키야트씨족 집단과 테무진의 직계 너케르 집단은 커커호반에 모여 키야트 연합정권을 만들어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였다. 키야트 연합정권의 칸은 테무진이 확실하였으나 그는 자기의 힘이 아직 미약했기 때문에 추대라는 형식을 통하여 칸으로 되려 하였다. 테무진은 키야트씨족 노얀들에 비하여 혈통으로는 아래였지만 메르키트 원정에서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많은 추종자와 가축을 소유하게 되었고,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도 토오릴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었다.
테무진은 키야트씨족의 최대세력인 주르킨 무리를 이끄는 키야트씨족의 계보상 제일 높은 소르카투의 두 아들인 사차 베키와 타이추, 네쿤 타이지의 아들인 쿠차르 베키, 그리고 전 몽골을 다스려온 쿠툴라 칸의 아들인 알탄 옷치긴과 만나 이 문제를 상의하였다. 형식적이지만 테무진은 쿠차르 베키에게 칸이 되라고 말하였나 그는 사양하였다. 다음으로 알탄 옷치긴에게 칸이 되라고 하였지만 그도 역시 사양하였다. 또 사차 베키와 타이추 두 사람에게 칸이 되라고 하였지만 그들도 거절하였다. 이런 절차가 끝난 후 그들은 서로 상의한 후 테무진을 칸으로 추대하였다. 이로써 테무진은 독단적으로 등극할 경우 생길지도 모를 불만을 미리 제거하였다. 타이치우드, 콩기라트, 살지우드, 아룰라트 등의 대다수 몽골부족들은 여전히 자무카와 노선을 같이하고 있어 불완전하였지만, 테무진은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해 보였던 칸이 됨으로서 전 몽골부의 칸을 노리는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때는 1180년대 중반의 일이었다.
당시의 몽골인들은 행정조직이나 사무에 대하여 거의 아는 것이 없었으므로, 테무진은 우선 활과 검을 차고 다닐 사람을 정하고, 음료와 식사를 담당하는 사람, 그리고 목장에서 말과 양을 돌보는 사람, 천막을 살피는 사람 등으로 나누었다. 그는 거처를 관리할 자로 보오르추와 젤메를 임명하였다. 이어서 타가이와 수케게이 제운을 케레이트의 토오릴에게, 그리고 아르카이 카사르와 차오르칸을 자무카에게 보내 자기가 칸이 되었음을 알렸다.
이 사실을 들은 토오릴은 “나의 아들 테무진이 칸이 된 것은 잘된 일이다. 몽골족이 칸이 없이 어찌 지내겠는가. 너희들은 이 화합을 깨지 말고, 결합을 풀지 말고, 옷깃을 찢지 말라”고 하였다. 토오릴은 몽골인들이 통일하려면 아직 멀다고 보았으며 까다로운 자무카나, 야심에 찬 주르킨 무리의 사차 베키보다는 받은 도움에 감사할 줄 아는 테무진이 칸으로 추대되는 것이 그에게 더 낫다고 생각하여 테무진의 후견인임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자무카는 자신의 안다가 칸으로 된 것에 화를 냈다. 테무진의 술책에 빠져 자기세력의 상당 부분을 잃은 자무카는 “알탄 옷치긴과 쿠차르 베키는 테무진과 나 사이에 끼어들어 안다의 옆구리를 찌르고 갈비뼈를 찔러대 서로 분열시켰는가? 테무진과 내가 같이 있을 때, 왜 그를 칸으로 뽑지 않았는가? 너희들은 지금 어떤 생각으로 테무진을 칸으로 뽑았는가?”라고 키야트씨족 노얀들의 배반을 나무라고 테무진의 칸을 인정하지 않았다. 자무카가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두 집단이 곧 싸울 것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겸연쩍은 테무진보다는 화가 난 자무카가 쳐들어올 가능성이 컸다. 자무카는 자기의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자기를 이탈한 집단들을 처벌함으로서 테무진의 칸위 계승이 몽골부 소수의 움직임이라는 것을 내외에 분명히 알려야 했다. 테무진 역시 자무카가 쳐들어 올 것을 알고 그의 처남인 부투를 자무카측의 동태파악에 동원하였다.
두 사람이 갈라선 지 얼마 안돼 자무카의 아우인 타이차르가 테무진 진영의 조치 다르말라의 말떼를 약탈해갔다. 조치 다르말라는 화가 나 빼앗아 오려 하였으나 그의 너케르들은 타이차르가 자무카의 아우인 것을 알고 소극적이었다. 그는 혼자 추격하여 밤에 말떼가 있는 곳에 이르러 말 위에 엎드려 상반신을 숨기고 타이차르가 있는 곳으로 접근한 후, 타이차르의 등에 화살을 쏘아 죽이고 말떼를 되찾아왔다. 이것은 초원에서 흔히 있는 사건이었고 관습에 따른 복수였다.
그러나 타이차르의 사건은 즉각적인 반응을 불러왔다. 자무카는 “그들이 나의 아우인 타이차르를 살해했다”면서 즉시 자다란씨족을 비롯한 13개 동맹 집단군 3만명을 거느리고 테무진이 있는 곳으로 쳐들어 왔다. 자무카의 13개 동맹 집단군이란 씨족 수가 아니라 집단수였다. 규모가 큰 씨족일 경우, 한 씨족의 이름 아래 몇몇 다른 집단들이 있었다. 자무카가 동원한 13 집단군이란 씨족 안의 독립된 13개 노얀 집단이었다. 자무카측에 속한 한 사람이 이 사실을 알리자 테무진은 자무카에 대항하기 위하여 13 쿠리엥(병단)을 이끌고 달란 발주트로 이동하였다. 쿠리엥이란 원형진으로 유목민이 천막을 칠 때 적의 습격을 막기 위하여 천막 주위에 마차를 원형으로 배치한 것을 말한다. 테무진의 제1 쿠리엥은 테무진의 어머니 호엘룬, 가신, 친족, 그리고 그 집안의 아들들로 이루어졌다. 제2 쿠리엥은 테무진, 그의 아들들, 너케르와 그들의 아들들, 친위대로 이루어졌다. 이하 제3부터 제13 쿠리엥까지는 키야트씨족의 노얀들이 이끌었다.
1190년 양군은 달란 발주트에서 일대격전을 벌였다. 테무진은 자무카와 격전을 벌였지만 수적 열세로 패하여 오논강의 제레네 산골짜기로 도망쳤다. 자무카는 계속 추격하면 테무진이 결사대응할 것이고 테무진의 후원자인 토오릴의 개입도 생각하여 더 이상 추격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사로잡은 노얀들의 아들들을 70개의 가마솥에 집어넣어 끓여 죽이고, 노얀인 네우데이 차가안 고아의 머리를 잘라 말꼬리에 매달아 분풀이를 하였다. 이러한 처형방식은 적의 의지를 꺾어 복수할 생각을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로서 자무카는 자기를 배반한 세력들에게 분풀이를 하고, 자신의 세력이 테무진보다 압도적이라는 것을 내외에 과시하였다. 그러나 승리한 자무카에게도 타격은 있었다. 동맹세력 중 강력한 전투력을 지닌 우르우트와 망구트 무리의 일부가 테무진에게로, 그리고 대다수는 원래의 동맹세력인 타이치우드씨족에게로 돌아갔다. 또 에수게이 바아토르의 중신이며 몽골의 대표적 샤먼가였던 몽릭 에치게가 일곱 아들과 함께 테무진에게 합류하였다.
1190년에 막내아들 툴루이가 태어났다.
테무진도 나머지 세력이나마 유지하려고 키야트씨족이 큰 타격을 입었음에도 오논강에서 싸움을 마무리하였다. 싸움 얼마 후, 테무진은 키야트씨족 노얀들과 오논 강변에서 연회를 열었다. 벨구테이가 테무진측의 질서를 관장하였고 주르킨 무리에서는 부리 부쿠가 맡았다. 이때 벨구테이가 주르킨 무리 소속인 말도둑을 현장에서 붙잡았으나 부리 부쿠가 그 사람을 두둔하여 패싸움이 벌어졌다. 화합은 깨지고 긴장은 고조되었다. 이들간의 유혈사태로 테무진의 권위는 말이 아니었다. 주르킨 무리는 키야트씨족을 대표하였다. 일찍이 카불칸은 장남 오킨 바르탁에게 재능과 기력을 갖춘 용사들을 뽑아 주었기 때문에 이들을 주르킨(심장)이라 불렀다. 이 무리의 노얀인 사차 베키와 타이추는 알탄 옷치긴, 쿠차르 베키와 함께 커커호반에서 테무진을 칸으로 추대한 인물로, 이들이 키야트 연합정권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테무진에 그다지 떨어지지 않았다. 이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았기 때문에 연합정권이 생길 때, 테무진은 내부의 최대 도전세력이 주르킨 무리가 될 것으로 생각하여 주르킨 무리의 노비인 무칼리를 포섭하여 주르킨 무리를 감시하게 하였다. 그런데 공식 석상에서 갑자기 이런 사태가 일어났다. 평소에 자제심이 많던 테무진은 자신의 격분을 그대로 분출하였다. 테무진은 쿠빌라이를 위시한 그의 너케르들과 함께 나뭇가지나 술젓는 자루 등을 닥치는 대로 집어들고 주르킨 무리와 서로 치고 받은 끝에 이들을 제압하였다. 테무진은 이 무리를 장악하지 않고는 자기의 위상정립은 물론 연합정권이 무너지리라 생각하였다. 이날의 유혈사태로 사차 베키는 자기를 따르는 주르킨 무리와 노예집단을 이끌고 테무진과 헤어졌다.
유목민과 주변 정주국가와의 변경은 차단된 것이 아니었다. 반란을 일으키려다 실패한 사람들이나 전투에서 패배한 유목민들은 이들 이웃 국가에 정치적인 망명처를 찾았다. 테무진은 달란 발주트의 전투에서 패한 뒤 키야트계 몽골씨족으로부터도 배척 당하자 몽골초원을 떠나 금나라의 보호를 찾아 도망쳤다. 금나라는 변경계획의 일환으로 테무진의 보호요청을 받아들였다. 이로부터 7년간 테무진은 많은 고생과 갖가지 어려움을 겪으면서 금나라의 용병역할을 하는 노예신분으로 있었다.
한편 토오릴은 케레이트부족을 이끌고 몽골부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금나라의 지지를 받고 있었으나 그의 권력은 불안정하였다. 그는 형제와 숙부인 구르칸을 죽이고 동생 에르케 카라와 칸의 자리를 놓고 다투었다. 자무카에게 패한 테무진이 금나라에 피해 있을 때, 에르케 카라는 나이만족의 칸인 이난차 빌게의 지원을 받아 토오릴을 몰아내고 케레이트의 칸이 되었다. 그러자 토오릴의 숙부인 자카 감부는 금나라로 숨어버렸다. 쫓겨난 토오릴은 서남쪽 추강의 서요(카라키타이)로 원군을 청하러 갔으나 거절당하고, 빈손으로 그곳을 떠나 위구르와 탕구트 지방을 거쳐 아주 궁핍한 상태로 떠돌았다. 토오릴은 가지고 있던 다섯 마리의 산양의 젖을 아껴먹기 위하여 새끼들의 입에 서르게(입마개)를 채우고 어미 젖을 짜 먹었으며, 낙타에 침을 꽂아 피를 빨아먹었다. 그러면서 비루먹은 말 한 필로 떠돌았다. 금나라는 동(東)몽골에서 세력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지금까지 타타르를 후원하던 금나라는 타타르가 너무 커지자 이를 견제하려고 케레이트의 토오릴을 후원하려 하였다. 토오릴은 동족으로부터 자신의 지위를 보존하기에도 급급하였으므로 금나라는 그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금나라는 토오릴의 세력이 다시 회복되기를 희망하여 자카 감부와 테무진에게 그 일을 돕도록 하였다. 토오릴은 테무진이 세력을 회복하여 쾩세우 호수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를 알렸다. 토오릴의 소식을 들은 테무진은 사람을 보내 굶주리고 보잘 것없는 토오릴을 데려와 자카 감부를 비롯하여 금나라에 피신해 있던 통하이트 무리 등, 케레이트부 사람들을 인도해 주었다. 테무진은 자기의 백성들에게서 고브치리라는 세금을 징수하여 필요한 물자를 주었으며, 그해 겨울을 자기의 쿠리엥에 들어와 함께 유목하도록 하였다. 테무진이 이렇게 토오릴의 세력회복에 적극적이었던 이유는 금나라의 요청도 있었지만 토오릴의 힘을 회복시켜 공동으로 주위세력에 대처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몽골부는 각 세력간에 균형이 이루어져 서로간에 대규모 도발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케룰렌호 주위의 몽골세력들이 금나라의 변경을 공격하였다. 당시 이곳의 몽골씨족들은 카타긴, 살지우트, 그리고 콩기라트였다. 이렇듯 이들의 출몰이 잦아지자 금나라는 북변의 방비를 강화하기 시작하였고, 더 나아가 1195년 여름 이들을 정벌하였다. 정벌은 대성공이었으나 노획물의 분배를 둘러싸고 타타르부의 유력 노얀인 세추가 반란을 일으켰다. 타타르부족의 역할은 금나라의 헌병과 같은 것으로 동몽골의 어떠한 부족이라도 금나라를 위협할 정도로 세력이 크는 것을 막는 일을 하였으나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금나라의 변경을 자주 약탈하였고 반란도 일으켰다.
이번 세추의 반란에 케룰렌호 일대의 몽골씨족들도 호응하여 금나라 북변 전체가 전화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에 금나라 장수 완안양은 먼저 몽골씨족들을 정벌한 다음 타타르부의 반란을 평정하려고 1195년 대염력 부근까지 남하한 콩기라트 기병들과 접전을 벌여 1196년 정월 이들을 격퇴하였고, 그리고 타타르부를 급습하여 패주하는 타타르 잔당을 쫓아 울자강까지 진격하였다. 울자강으로 밀려든 타타르부의 지휘자는 세추의 휘하 노얀인 무진 술투로 이들은 그곳에 방어채를 세웠다. 타타르부족이 도망갔다는 소식을 들은 테무진은 금나라에게 자기도 추격하고 싶다고 하였다. 그는 6일 동안 기다렸으나 아무런 회신이 없자 얼마 안되는 자기 부족민들을 이끌고 이 타타르족을 기습하였다. 테무진은 무진 술투를 죽이고 은으로 만든 요람과 금실로 짠 침상을 노획하였다. 금나라의 완안양은 테무진의 공로를 치하하여 자우트 후리(백부장)라는 칭호를 주었다
테무진의 다음 공격목표는 테무진과 감정대립을 보이는 친족 주르킨 무리의 사차 베키였다. 타타르에 대한 습격에 참여하자는 요청을 무시하고 오히려 테무진이 없는 틈을 타 그의 둔영지(아우락)에 남아 있는 사람 중 50명의 의복을 벗겨갔으며 10명을 죽였다. 테무진은 이러한 만행을 몽골 정통성을 대표하는 자들을 없앨 명분으로 삼아, 카불칸의 증손자이며 주르킨 무리의 수령인 사차 베키를 급습하여 옛 왕가의 지배층을 모두 없애버리고 그 부족민들을 해체한 뒤, 자기의 직계(엠추 이르겐)로 편입하였다. 이러한 동족습격과 처형은 분명히 부족질서를 해치는 것이었지만, 주르킨 무리의 직계군단화는 테무진이 자무카와 헤어질 때부터 노렸던 구상으로 이를 실현하자 1년 사이에 그의 지위와 권력기반은 단단해졌다.
주르킨 무리를 친 뒤 테무진은 부리 부쿠와 벨구테이가 싸우던 연회사건을 기억하고는 이를 복수하려고 두 사람에게 씨름판에 들어가라 하였다. 부리 부쿠는 테무진의 아버지 에수게이 바아토르와는 사촌간으로 누구한테서도 져본 적이 없는 이름난 씨름꾼이었으나 그는 이미 자신의 운명이 끝났음을 알고 테무진의 뜻대로 일부러 쓰러져 주었다. 그러자 벨구테이는 그의 척추를 부러뜨려 버렸다.
테무진은 1196년 가을 툴라 강변의 카라 툰에서 토오릴과 정식으로 부자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적을 공격할 때 함께 공격하며 사냥할 때에도 함께 사냥키로 하였다. 또 토오릴의 아들 셍굼과 숙부인 자카 감부와도 안다 맹약을 맺었다. 카라 툰 맹약 이후, 테무진은 소규모 군사행동을 일으켰다. 주르킨 무리를 합칠 때 가까스로 도망친 사차 베키와 타이추를 토벌하려는 것이었다. 사차 베키와 타이추 두사람은 처자식들과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을 데리고 도망쳤지만 테무진의 추격으로 사로잡혔다. 그 자리에서 테무진은 사차 베키와 타이추에게 이전의 서약을 추궁하고 이들을 죽여버렸다.
카라 툰 맹약의 체결과 주르킨의 나머지 무리를 없앤 이후에도, 테무진은 불안정한 주변정세에 대한 공동대처와 물자부족을 해결해 주려고 토오릴과 공동유목을 지속하였다. 유목경제는 가축위주의 번식경제이므로 기후 등 자연환경에 영향을 받았고, 번식을 위하여 어느 수준 이상의 가축을 도살할 수가 없었다. 또 당시 몽골족의 경제형태는 혼합형경제에서 순수유목형으로 되었으므로 가축에 절대적으로 의존하였다. 이와 함께 당시의 유목형태가 가축생산량을 극대화시킬 수 없는 쿠리엥식 유목형태였으므로 몽골부가 다른 부족에 비해서 가난했다. 따라서 테무진은 경제적 압박을 받는 원조 대신 외부에서 물자를 조달해야만 했다. 여기서 테무진은 혼합경제방식로 비교적 물자가 풍부한 메르키트부를 주목하였다.
얼마 후 테무진은 메르키트부의 톡토아 베키가 케레이트부의 좌익인 자카 감부를 노리는 것을 알고 재빨리 자카 감부를 불러들인 후 습격에 나선 톡토아 베키군을 역공격하여 이들을 패배시켰다. 1197년 가을에 이루어진 이 승리에서 테무진은 얻은 노획물을 전부 토오릴과 그의 부하들에게 보내주었다. 이 전쟁으로 테무진은 혼자 힘으로 외부세력을 공격할 수 있을 정도로 힘이 강대해졌음을 보여주었다.
테무진과 자카 감부가 전투에서 승리하자 투멘 투베겐씨족과 올롱 동카이트씨족 등 사방에 흩어졌던 케레이트부의 백성들이 테무진이 있는 곳으로 몰려들었다. 이후 토오릴의 세력이 점차 공고해지기 시작하였으며, 반대로 확고한 지지기반이 없이 성립된 케레이트의 에르케 카라 정권은 서서히 통치불능 상태에 빠져 급격히 무너져 마침내 토오릴은 다시 케레이트부민 및 군대의 영수가 되었다.
당시 몽골고원은 타타르부의 반란이 계속되었고, 이와 함께 케룰렌호 일대의 몽골씨족들도 금나라의 변방을 수시로 침략하였는데 당시 금나라는 거란족(키타이족)의 반란과 이에 호응한 변방 규군(특히 몽골과 상접하는 북서쪽 변경의 경비를 맡던 주로 거란인들로 구성된 이족부대(異族部隊))의 난동으로 군사를 몽골고원으로 투입할 수 없는 형편이었다. 그러다 1198년에 금나라는 타타르부의 세추를 집요하게 공격하여 항복시켰다. 세추의 항복으로 북변이 일시 안정되자, 금나라는 그 동안 중지돼 왔던 계호 구축을 다시 시작하는 동시에 케룰렌호 일대의 몽골씨족들을 철저히 예속시켜 갔다. 금나라는 침략의 주역이었던 콩기라트씨족을 먼저 공격하여 항복을 받은 다음, 그 여세를 몰아 또 하나의 세력인 카타긴, 살지우트씨족을 공격하여 대성공을 거둠에 따라 금나라 북변은 일시 안정을 되찾게 되었다.
이 같이 금나라가 케룰렌호 주변부족들에 대한 토벌전을 전개하고 있을 때, 이전의 세력을 거의 회복한 토오릴이 테무진과 상의도 없이 메르키트부의 톡토아 베키를 급습하여 그의 큰아들인 터구스 베키를 죽이고, 그리고 두 딸과 카툰들을 사로잡았다. 두 아들인 코토와 칠라운, 그리고 백성들까지도 약탈하였다. 토오릴은 메르키트부를 합치려 침공하였으므로, 톡토아 베키는 생존권이 위협받을 정도로 대타격을 입었다. 토오릴은 막대한 포로, 가축, 전리품을 혼자서 차지하였다. 테무진은 카라 툰 맹약이 적을 공격할 때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당황하였다. 이번 일로서 토오릴은 자신의 뜻대로 행동한다는 것을 과시하였고, 더 나아가 테무진과 그의 상대인 자무카를 계속 자기 밑에 두려는 의지를 보였다. 테무진은 토오릴을 꼭 묶어 놓을 약속을 새로 찾는 수 밖에 없었다. 톡토아 베키는 토오릴과 테무진에 대한 위기감으로 1199년 겨울 테무진의 적대세력인 타이치우드씨족에게 군사를 일으켜 줄 것을 간청하였다. 이런 사실은 몽골고원의 전쟁이 점차 연합부족간의 대규모 형태로 변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메르키트부를 약탈한 직후에 토오릴은 자신을 쫓아냈던 나이만부의 이난차 빌게 부구 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난차 빌게는 죽기 전에 두 아들 타양과 부이룩에게 나라를 할양했다. 타양 칸에게 카라 이르티쉬 강가의 초원지대 부족들을, 부이룩 칸에게는 알타이산맥 부근의 산지부족들을 통치하게 하였다. 이난차 빌게의 죽음과 나이만의 분할은 토오릴에게 좋은 소식이었다. 당시 몽골고원에서는 케룰렌호 일대의 씨족과 타타르부가 금나라의 공세에 눌려 일시 휴식기에 들어가 있었고, 메르키트부도 톡토아 베키의 아들인 코토와 칠라운이 토오릴에게 억류되어 있어 자중할 수 밖에 없었으므로, 토오릴은 대규모 원정이 가능하였다. 1199년 가을에 토오릴은 셍굼이 이끄는 우익군과 자카 감부의 좌익군, 그리고 동맹세력인 테무진과 자무카를 총동원하여 타양 칸의 묵인하에 부이룩 칸이 통치하는 서(西)나이만부를 정벌하러 나섰다.
토오릴연합군은 동나이만부의 북측을 경과하여 서나이만부의 영지인 흡도지방에 도착하였다. 그리고 부이룩 칸군과 대전하여 그들의 예봉을 꺾는데 성공하였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부이룩 칸은 자신의 둔영지로 도주하였고, 그곳에서 양군은 재차 싸워 부이룩 칸군은 다시 크게 패하여 알타이산맥을 넘어 도망쳤다. 서나이만부 정벌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토오릴연합군은 키실 바시호에서 회군을 시작하였다. 이미 계절은 엄동설한의 겨울로 접어들었으므로, 이들은 눈이 쌓여 통행하기 힘든 항가이산맥의 북쪽보다 직선코스이면서도 눈이 덜 쌓이는 남쪽을 택하였다. 이때 전(全)나이만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서나이만부의 용장 퀵세우 사브락이 토오릴연합군을 저지하며 기습적인 반격을 가하였다. 전투는 매우 격렬하였고, 해가 지자 토오릴연합군과 쾩세우 사브락군은 서로 전열을 갖춘 뒤 그대로 숙영에 들어갔다.
그날 밤 친밀 관계에서 테무진에게 밀리던 자무카가 퀵세우 사브락군을 맞아 신경이 예민해진 토오릴에게 몰래 찾아갔다. 그는 테무진을 고립시켜 제거할 목적으로, “나의 안다인 테무진은 이전부터 나이만부에 사신을 파견해 놓고 있었다. 칸이여! 나는 항상 한 곳에만 머무르는 카이로가나 새이다. 나의 안다인 테무진은 한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늘 이곳저곳으로 날아다니는 빌두우르 새이다. 아마 지금 그는 나이만족 주둔지에 갔을 것이다. 그는 나이만에 항복하기 위하여 남았을 것이다” 라고 토오릴에게 속삭였다. 토오릴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자기 진 내의 봉화불들을 밝혀 놓은 채 밤을 틈타 테무진의 행동을 잘 볼 수 있는 지점으로 이동하였다. 토오릴은 테무진 몰래 비밀리에 군대를 철수시켰던 것이다.
테무진은 그것도 모르고 그날 밤 그곳에서 숙영하였고 이튿날 아침에야 토오릴이 밤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다른 곳으로 갔음을 알았다. 테무진측의 분노는 컸다. “이들이 우리들을 제삿밥으로 만들려한다. 토오릴은 우리들만 재난을 당하라고 우리들을 불 속에 밀어 넣은 채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테무진군은 단독으로 위험한 철수를 감행하였다. 테무진은 후퇴하여 에데르강과 알타이강의 합류지점을 급히 건너 사아리 케에르로 이동하여 하영하였다. 그곳에서 테무진과 조치 카사르가 정황을 살펴보니 쾩세우 사브락군이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어 안도하였다.
연합군의 적전분열은 쾩세우 사브락군으로 하여금 부담없이 케레이트군과 싸우게 만들어 주었다. 케레이트군의 후익인 셍굼과 자카 감부는 토오릴의 뒤를 좇아 강도 있고 수목도 울창한 에데르 알타이 지방에 도달하였다. 이때 쾩세우 사브락이 기습하여 셍굼의 처자식 등을 생포하고 이들을 따르던 상당수의 부족민과 가축 그리고 식량을 약탈하였다. 그리고 계속하여 토오릴의 변경영토로 쳐들어가 그의 부민과 예속민들 그리고 가축까지도 모두 약탈한 뒤 회군하였다. 거의 맨몸으로 탈주한 셍굼과 자카 감부로부터 사실을 들은 토오릴은 테무진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나는 나이만군에게 나의 백성들과 처자들을 모두 약탈당하였다. 너의 사준마를 파견하여 나의 백성들을 구해달라.” 테무진은 이 기회에 토오릴과의 관계를 구체적으로 재정립하려고 구원군을 파견하였다. 콜라안 코트에서는 이미 셍굼이 나이만군과 교전하고 있었다. 교전 중에 셍굼이 탄 말이 엉덩이에 나이만군의 화살을 맞아 사로잡힐 위기에서 사준마가 도착하여 그를 구해주었다. 그리고 케레이트부의 백성과 처자들을 구해주었다.
테무진의 도움으로 쾩세우 사브락군에게 빼앗겼던 백성들을 모두 되찾은 토오릴은 “나의 안다인 에수게이 바아토르가 이전에 나의 흩어졌던 백성들을 한차례 구해 주었다. 이번엔 또 아들인 테무진이 나의 흩어졌던 백성들을 구해 주었다. 이들 부자는 흩어졌던 백성들을 나에게 모아주었다. 누구를 위하여 힘들게 모아준 것일까? 나도 이제 늙었다. 늙었기 때문에 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이다. 내가 세상을 떠나면 나의 백성들을 누가 다스릴가? 나의 아우들은 품덕이 없다. 유일한 아들이 셍굼 하나라는 것은 아들이 없는거나 마찬가지다. 테무진을 셍굼의 형으로 하면 두 명의 아들이 되어 나는 안심할 것이다”라며 테무진을 셍굼의 형으로 말하고 케레이트부의 통치에 테무진의 뜻을 반영할 것임을 비쳤다.
그러나 테무진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위기상황이 자무카 때문에 생겼음을 강조하고 자무카를 공동의 적으로 규정한 콜라안 코트 맹약을 맺었다. 토오릴이 맹약을 하게 된 것은 테무진의 강력한 요구와 케레이트부 내에 상당한 친테무진계 세력의 압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부족민들에 대한 지배권을 회복한 뒤, 테무진과의 약속을 후회하고 군대를 이끌고 철수해 버렸다. 그렇지만 테무진은 자무카를 공동의 적으로 간주하는 콜라안 코트 맹약을 체결함으로써 13 쿠리엥의 싸움 이래 꿈꾸어 왔던 몽골부 내의 적대세력들을 토오릴과 함께 공격하여 제거시킬 수 있는 장치를 만들었다. 따라서 지금까지 비교적 잠잠했던 몽골부가 이제부터는 대파란을 맞게 되었다.
1199년 겨울 콜라안 코트 맹약 후, 테무진은 몽골부 내의 적대세력들을 본격적으로 공격할 준비를 갖추었다. 메르키트부의 톡토아 베키는 자신이 이들의 맨처음 희생물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다른 세력과 연합하려 애썼다. 1200년 초 그는 테무진측의 공격대상이 될 가능성이 큰 타이치우드씨족에게 군사연합을 제의하였다. 당시 타이치우드씨족은 몽골울루스 붕괴후 여러 노얀들이 각기 난립하는 내부분열의 상태에 빠졌으나 테무진의 세확장에 자극을 받아, 1190년대 중반이후 아우추 바아토르를 중심으로 점차 통일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연합세력은 일부 집단이 케레이트부에 더 가깝게 지내는 등, 테무진의 키야트씨족 연합정권보다는 결속력이 떨어졌다. 아우추 바아토르는 콜라안 코트 맹약 성립후 테무진의 본격적인 몽골부내 개입이 우려되는 상황에서 톡토아 베키의 제의를 받자 즉각 타이치우드 여러 무리를 소집하는 쿠릴타이를 개최하였다. “타이치우드부의 군장인 아우추 바아토르, 코릴 바아토르, 코도다르 베키와 그들보다 지위가 낮은 탈구타이 키릴툭 등과 같은 형제, 씨족원들은 모두 오논강의 몽골초원에 모여 쿠릴타이를 개최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곧바로 테무진과 토오릴이 있는 곳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이들의 움직임에 테무진과 토오릴측도 즉각 대응하여, 1200년 봄 사아리 강변의 부르칸 에르기 들판에서 쿠릴타이를 개최하고 행동에 들어갔다. 그들은 타이치우드군이 메르키트군과 합류하기 전에 타이치우드를 오논강에서 기습 격파하였다. 그런후 토오릴과 테무진 연합군은 편을 나누어, 토오릴은 메르키트군을 맞아 싸우러 떠나고 테무진은 패주하는 타이치우드군을 뒤쫓아갔다. 테무진은 타이치우드씨족의 아우추 바아토르를 쫓아가자 그는 자기 백성들을 안전한 곳으로 급히 이동시킨 후 오논강의 건너편에서 후퇴하지 않고 전열을 정비하였다. 이들의 저항은 격렬하였고 전세는 갈팡질팡이었고 전투는 어둠이 내릴 때까지 계속되어 양군은 서로 대치하면서 밤을 보냈다.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타이치우드씨족이 무너져 내렸다. 타이치우드의 전사들은 흩어져 도망가기 시작했고, 장막 뒤에 숨어있던 백성들은 버려졌다. 테무진은 전투 도중 목에 화살을 맞고 부상을 입었다. 생명이 위급하게 되자 젤메가 입으로 상처난 곳의 피를 빨았다. 한밤중이 되어서야 테무진은 실신상태에서 깨어났다. 그가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자 젤메는 옷을 벗고 적진의 수레에 몰래 올라가 마유주와 한 그릇의 응유를 가져왔다. 테무진은 정신을 차린 뒤 젤메가 상황을 설명하자 “너는 나의 목숨을 세 번 구해 주었다. 네가 한 일을 마음속에 담아두마”라고 하였다.
테무진은 전투가 끝난 다음날 아침, 도망간 사람들을 불러 모으기 시작하였다. 이때 그는 소르칸 시라의 딸인 카다안이 테무진에게 구원을 청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테무진이 말을 달려 갔으나 그녀의 남편은 이미 테무진의 병사에게 살해된 뒤였다. 테무진은 그날밤 병사들과 그곳에 머물면서 카다안을 자기 천막으로 불러 옆자리에 앉히고 위로하였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평민들의 인기를 샀다. 그 다음날 소르칸 시라는 아들들과 함께 테무진에게 봉사하러 찾아왔다. 또 테무진에게 활을 쏘아 말을 쓰러뜨린 타이치우드의 젊은 전사 예수드는 붙잡혀 처형을 기다렸으나, 그의 용맹함을 안 테무진은 그를 사면하고 십부장으로 임명하여 자신을 위해 봉사하도록 하였다. 그후 그는 제베 즉 화살촉이란 이름으로 백부장, 천부장 그리고 마지막으로 만부장으로 임명되어 동료 수베테이와 함께 가장 뛰어난 장군이 되었다. 이렇게 적의 용기와 명예까지도 생각하는 테무진의 태도는 몽골인들 사이에 널리 알려졌다.
타이치우드족이 패배한 뒤 테무진의 어린 시절의 박해자인 탈구타이 키릴툭이 간신히 숲속에 몸을 숨겼으나 타이치우드에 종속된 시르귀에튀가 그를 생포하였다. 끌고가는 도중에 탈구타이 키릴툭의 형제와 아들들이 그를 구출하려 다가오자 시르귀에튀는 탈구타이 키릴툭을 그 자리에서 죽이려 하였다. 그들은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르귀에튀의 아들인 나야아가 주인을 잡아갈 경우 테무진의 태도를 걱정하자, 시르귀에튀는 탈구타이 키릴툭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그는 테무진에게 “탈구타이 키릴툭을 잡아오는 도중에 주인을 죽일 수 없어 그를 풀어주고, 나는 당신에게 힘을 바치려 왔다”고 하였다. 그러자 테무진은 “너희들의 칸인 탈구타이 키릴툭을 잡아 왔다면, 너의 일족을 참수하였을 것이다. 진정한 칸을 버리지 못한 너의 마음은 올바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탈구타이 키릴툭은 소르칸 시라의 아들 침바이와 격투 끝에 결국 죽음을 당하였다. 테무진은 생포한 타이치우드씨족을 일정한 비율로 몰살시킨 후 생존자들을 그에게 예속시킴으로써 보르지긴계의 통일을 회복하였다. 테무진은 자신이 당한 수모를 잊지 않고 복수하였다.
테무진이 무엇을 추구하는지 모두 다 알게되면서 부족수령들은 반발하였다. 그들은 테무진 앞에서 자유를 포기하지 않으면 처단될 것을 알았다. 나이만과 타이치우드가 패배하자 케룰렌호 일대의 카다긴, 살지우드, 되르벤, 타타르, 콩기라트 등의 부족들까지도 모두 테무진의 위세를 두려워하였다. 이들은 자무카와도 거리가 있었으므로 힘의 열세를 보충하기 위해서 테무진과 토오릴 세력과는 적대적인 타타르부에 눈길을 돌리게 되었다. 1200년 여름 카다긴, 살지우드 양(兩)씨족은 카타긴, 살지우드, 되르벤, 콩기라트 그리고 타타르의 잔여세력과 연합하였다. 이들은 알코이 볼락 샘물가에 모여 종마와 암말의 허리를 함께 자르면서 피의 맹세를 한 뒤 케룰렌호 주변에 있는 테무진과 토오릴군을 공격하러 떠났다.
테무진의 장인인 데이 세첸을 통해 소식을 들은 토오릴과 테무진은 이들을 맞아 싸우러 떠났다. 쌍방은 부이르호에서 전열을 정비한 뒤 격전을 벌였다. 그 결과 토오릴과 테무진측의 승리로 끝났으나 도망가는 여러 씨족군을 추격할 수는 없었다. 에르군네강 일대의 자무카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타타르 여러 씨족들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야했다. 이 싸움을 테무진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였다. “나는 매처럼 산 위로 날아 부이르호를 건넜다. 나는 푸른 다리와 잿빛 깃털을 가진 학을 잡았다. 그것은 되르벤과 타타르였다. 나는 훌룬호를 지나 한번 더 푸른 다리와 잿빛 깃털을 가진 학을 잡았다. 카타긴, 살지우드, 그리고 콩기라트였다.” 이러한 승리는 테무진에게 새로운 야망을 일깨워주었다. 그것은 먼저 케레이트부족의 계승자가 되고 나아가 지배권을 몽골고원의 모든 부족으로 확대시키는 것이었다.
타타르부는 서로 싸우고 약탈을 일삼았으나 몽골부와 싸움이 일어나자 상호간의 대립을 멈추고 단결하였다. 따라서 테무진은 방대한 말떼를 거느리고 있는 이 타타르부가 단결하여 반테무진세력과 연합하기 전에 타타르부를 공격하려 하였다. 테무진은 케룰렌호 주변의 몽골계 씨족이나 타타르부 모두의 움직임을 잘 볼 수 있고 또 즉각적으로 공격과 방어에 나설 수 있는 첵체르산을 자신의 월동지(에불제)로 택했다. 토오릴도 메르키트부 및 타이치우드 잔존세력들과 이 지역 세력들과의 연락을 차단하려고 코바 카야를 자신의 월동지로 택하였다.
그런데 토오릴이 코바 카야로 이동하는 중, 친테무진 계열인 자카 감부 등 몇몇 노얀들이 토오릴을 제거하려다 밀고로 실패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 사건은 자카 감부의 개인적인 야심으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간 테무진은 토오릴의 예기치 못할 행동을 견제하려고 케레이트부의 많은 노얀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자카 감부는 테무진과 안다 결맹을 한 이래로 친테무진계의 지도자로 일해왔다. 자카 감부는 자신이 테무진과 친밀한 반면 테무진과 토오릴 사이가 어느 정도 틀어진 때 자기가 칸으로 되려고 하였다. 이 음모에 가담했던 주요 노얀들은 토오릴이 코바 카야에 도착하여 이 사건을 정식으로 거론할 것을 두려워하여 동(東)나이만부(타양 칸 울루스)로 도주하였다. 이 사건으로 지금까지 수월하게 이루어졌던 토오릴과의 연합이 멀어져 테무진은 타타르부를 포함한 몽골부내 반테무진 세력들을 혼자 공격해야 하였다. 케룰렌호 일대 반테무진계 씨족들의 지지기반을 빼앗아버린 테무진은 자무카측에 염탐꾼을 파견한 뒤 토오릴이 있는 코바 카야쪽으로 이동하였다. 테무진이 케룰렌호 일대가 아닌 구렐루산에 머무르기로 한 것은 토오릴을 측면 지원하기 위해서였다.
1201년 몽골부 내의 반테무진계 씨족들이 위기에 몰리자 자무카가 나서기 시작하였다. 그는 반테무진계 씨족을 모두 규합하여 토오릴과 테무진이 확립하려는 주도권에 대항하여 동맹을 결성하였다. 그는 테무진에게 반대하는 몽골씨족 자지라트, 타이치우드, 콩기라트, 이키레스, 코룰라스, 되르벤, 카타긴, 살지우드 뿐 아니라 메르키트, 오이라트, 나이만, 타타르도 자기 주변으로 모으는데 성공하였다. 이 연합군은 에르군네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삼각주의 초지에 모여 자무카 세첸을 칸으로 선출한 뒤 구르칸(사해의 군주)이라는 칭호를 주었다. 구르칸이 된 자무카는 자리를 옮겨 칸맹서약을 한 뒤 테무진을 공격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 추대식은 기습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자무카 진영에서 활동하는 차우르를 통하여 즉각 테무진에게 알려졌다. 테무진은 지체없이 진군하여 데니 코르칸 강변에서 자무카 연합군과 격전을 벌여 이들을 대파하였다. 이 싸움에서 테무진은 자무카를 적극적으로 뒤쫓지 못하였다. 아직 자무카는 토오릴의 적대세력이 아니라서 테무진이 무리하게 자무카를 추격한다면 자칫 토오릴과 테무진간의 동맹이 무너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테무진은 이 싸움 후 자신에게 투항한 콩기라트씨족만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테무진은 타타르씨족들이 자무카의 연합세력임을 알고 자무카를 고립시키기 위하여 알치와 차강 타타르씨족을 완전히 무너뜨리려 하였다. 테무진은 부이르호 근처에서 주변정세를 살피고 있다가 1202년 봄 이들을 공격하러 나섰다. 그러나 통합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타타르는 그 수나 세력에서 테무진의 무리보다 우월하였다. 테무진은 타타르와 싸우기 위해 대치하고 있을 때, 효과적인 작전수행을 위하여 사사로운 약탈을 금지시켰다. “적을 눌러도 전리품을 얻기 위하여 멈추지 말라. 다 누른 다음에 그 전리품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니 그때 나누어주겠다. 퇴각하면 처음의 공격선으로 돌아오자. 처음의 공격선으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은 목을 베겠다.” 그러나 이러한 명령은 유목민의 오랜 관습과 어긋나는 것이었다. 유목민은 약탈하기 위하여 전쟁을 하였고, 각 수령들은 그것을 마음대로 처분하고 그 일부를 칸에게 바쳤다. 테무진은 자신의 명령이 각 수령들의 불만을 살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같이 하여 규율 잡힌 군대를 만들지 않고서는 우윌한 적을 이길 수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대규모의 전투집단을 장기간 통솔하는데는 이러한 규율이 아주 중요하였다. 이러한 테무진의 조치는 즉각 효력을 발휘하였다. 토오릴의 지원을 바랄 수 없었던 테무진은 단독으로 타타르부에 대한 선제공격에 나섰다. 공격대상은 도타오트, 알로카이, 쿠인, 테레이트 타타르로서 이들은 테무진군과 격전을 벌였다. 달란 네무르게스 싸움에서 악전고투 끝에 승리를 거둔 테무진은 사로잡은 타타르 백성들의 처리를 위하여 쿠릴타이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는 조상과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타타르인들을 수레바퀴의 활에다 세운 뒤, 그보다 큰 자들은 모두 죽이고 남은 여자나 어린아이들은 노예로 삼아 나누기로 하였다. 이러한 결정은 타타르부가 몽골부의 적대 씨족이기도 하였지만 이 타타르부를 없애지 않으면 두고두고 화근이 되리라 생각한 때문이었다. 타타르의 전사들은 모두 학살되었다. 이때 테무진은 두 명의 타타르 미인 이수이와 이수겐을 취하였다. 타타르의 몰살은 테무진에게 배후지역을 확보해 주었고, 그는 다가올 전투에서 더욱 자유로울 수 있게 되었다.
이 싸움 전에 약탈물 처분에 대한 테무진의 명령을 옛 몽골의 칸 쿠툴라의 아들인 알탄과 쿠차르, 그리고 테무진의 숙부 다리타이가 명령을 업신여기고 전리품을 차지하였다. 이들은 테무진을 칸으로 추대하였고, 그와 친족이면서 부족 내 서열에서는 자신들의 가문이 테무진보다 더 높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테무진은 본보기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되었고, 제베와 쿠빌라이를 보내 전리품으로 차지한 가축을 비롯하여 손에 넣은 것은 전부 몰수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하여 알탄, 쿠차르, 그리고 다리타이는 테무진을 떠나 곧 그의 적들에 가담하였다.
달란 네무르게스 싸움의 승리로 테무진은 타타르부가 소유했던 방대한 말떼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타타르씨족들을 멸망시킴으로서 몽골부 내 반 테무진계 씨족들과 주변세력과의 연합에 제동을 걸었으며 이들의 입지를 축소시켰다. 갈팡질팡하는 몽골고원의 수령들 가운데 테무진만이 고정된 축이 되었는데 이것은 그의 강인한 성격이 끊임없는 게릴라성 상황을 자신에겐 유리하게 바꿔놓았기 때문이었다. 전쟁을 거치는 동안 테무진은 이전과는 성격이 크게 다른 강대한 세력이 되었다.
1202년 가을, 톡토아 베키는 서나이만의 부이룩 칸, 되르벤, 타타르, 카다긴, 살지우드 등의 여러 씨족과 오이라트부, 그리고 케룰렌호 일대의 반 테무진계 몽골씨족을 끌어들였다. 데이 세첸이 이를 테무진에게 알리자, 그는 토오릴칸과 연합하여 그들에 대항하려 하였다. 토오릴에게 연락을 보내자 토오릴은 곧 군대를 이끌고 왔다. 이들은 일단 테무진이 있는 실루겔지트강에서 합류하였다. 테무진과 토오릴은 메르키트, 나이만, 오이라트부와 케룰렌호 일대의 몽골씨족이 만날 수 있는 케룰렌호 서남일대로 급히 북상하였다. 선발대를 전방에 배치한 뒤, 본군은 케룰렌강을 따라 쿠이텐 땅으로 이동하였다. 셍굼이 지휘하는 선발대는 반테무진 세력의 동정을 살피기 위하여 다시 척후를 배치하였으며, 다시 그 앞쪽 첵체르산에도 다시 그 앞쪽에 위치한 치쿠르쿠산에도 한 부대의 척후를 배치하였다.
셍굼의 선발대가 오드키야에 도착했을 때 치쿠르쿠산에 배치한 척후병으로부터 적이 온다는 전갈을 받았다. 이때 치쿠르쿠산 일대에 도달한 적군은 대군이어서 셍굼의 선발대는 후퇴해서 쿠이텐 땅의 본군과 합류하였다. 셍굼의 뒤를 추격해온 연합군과 테무진 토오릴군은 쿠이텐에서 서로 대치한 뒤 아래로 위로 서로 물러나며 진을 갖추고 있을 때, 비바람이 테무진 토오릴군 진영에 휘몰아치지 않고 반대로 부이룩 칸과 쿠두카 베키의 진영 위로 휘몰아 쳐 그들은 앞으로 전진하지 못하고 낭떠러지로 밀려 떨어지는 등 급속히 붕괴되었다. 쿠이텐 땅의 악천후로 전투능력을 상실한 이 연합세력은 제각기 자기들의 본거지를 향하여 도주하였다. 이때 자무카군이 쿠이텐에 도착하였으나 이미 연합군이 붕괴되어 후퇴하는 것을 보자 갑자기 연합군을 약탈하고 에르군네강을 따라 도주하였다. 자무카가 뒤늦게 싸움에 참가한 것은 그가 반테무진계 씨족들에게 배제되자 이들에 대한 보복과 위기타개를 위한 것이었다.
테무진과 토오릴은 이들을 추격하였다. 테무진은 오논강 쪽으로 도주하는 타이치우드의 아우추 바아토르를 추격하여 타이치우드의 나머지 세력을 정벌하였다. 그러나 그와 동맹했던 살지우드, 카타긴, 알치 타타르, 되르벤 씨족들과는 밀약을 맺었다. 토오릴은 에르군네강을 따라 자무카를 추격하였다. 토오릴이 자무카를 추격한 것은 테무진이 자무카의 세력을 무너뜨릴 경우 테무진의 세력이 너무 커져 잘 견제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테무진은 자무카를 추격했던 토오릴이 자무카를 용서하고 그를 환영하자 불만이 컸다. 테무진의 격렬한 항의에도 토오릴은 자무카를 자기의 동맹자로서 인정함으로서 이들 사이에는 골이 생기게 되었다. 하여튼 자무카는 다시 테무진, 토오릴 진영에 들어오게 되었다.
케레이트부의 해체
1196년 이후부터의 본격적인 너케르 체제의 강화와 세 확장정책으로 테무진은 토오릴과 비슷한 군사력을 보유하게 되었고, 그가 벌인 여러 싸움들로 몽골부 내의 적대세력도 크게 약화되었다. 테무진의 세력 급상승에 위협을 느낀 토오릴은 테무진의 정적인 자무카를 세력권 내에 수용하여 그를 견제하려 하였다. 이에 대한 타개책으로 테무진은 토오릴과 이중으로 친목을 도모하려고, 큰아들 주치에게는 토오릴의 딸 차우르 베키를 짝지워 주고, 셍굼의 아들 토사카에게는 딸 코진 베키를 시집보내 사돈을 맺는 방법을 생각하곤, 그 해 겨울 최고의 동맹형태인 결혼안을 토오릴에게 제안하였다. 당시 토오릴은 노쇠하였으므로 테무진은 군사대결로 자기의 불만을 나타내는 것보다, 토오릴이 사망하더라도 그들의 관계를 결혼동맹 등으로 더욱 강화시키려 하였다. 그런 후 케레이트부 내에 있는 친테무진계 세력을 활용하여 셍굼의 형 자격으로 케레이트부의 칸자리에 오르려는 심산이었다.
셍굼이 토오릴에게 “우리들의 친족이 그들에게 간다면 겔의 문옆에 서서 항상 주인이 앉아있는 정면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만약 그들의 친족이 우리들에게 온다면 주인이 앉는 정면에 앉아 겔의 문옆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셍굼은 스스로를 고귀하게 생각하고 테무진을 깔보았다. 테무진이 승부수로 제기한 결혼 제의는 셍굼의 이러한 입장으로 지지부진하게 되면서 서로는 의심하기 시작하였다. 테무진은 화가 나 이렇게 말하였다. “옷을 입은 아들이 나 테무진이며 맨몸으로 태어난 아들이 너 셍굼으로 아버지 토오릴은 우리들을 항상 똑같이 취급해 왔다. 내가 아들로 된 이후 너 셍굼 안다는 나를 증오하기 시작하였다. 지금 너는 아버지 토오릴의 마음에 심려를 끼쳐드리지 말 것이며 그의 거처에 아침, 저녁으로 문안드려 마음을 편하게 해드려라.”
이렇게 케레이트부의 칸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첨예한 대립을 보이고 있을 때, 테무진의 진영에서 예기치 않은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것은 테무진군의 한쪽 날개인 키야트씨족 노얀들의 집단 반발이었는데, 원인은 테무진의 독재화에 따른 노얀들의 기득권 상실과 지위하락 때문이었다. 1203년 자무카는 키야트씨족 노얀들인 알탄, 쿠차르 베키 및 카다긴씨족, 에부게진씨족, 노야킨씨족, 수케겐씨족의 토오릴, 되르벤씨족의 카치운 베키 등과 모여 “그대들은 테무진을 믿을 수 있겠는가? 그대들이 테무진을 치려 한다면 나도 함께 공격하겠다”고 하면서, 셍굼을 지지하기로 의견을 통일한 뒤 그들과 함께 셍굼을 찾아갔다.
셍굼에게 “테무진은 입으로는 토오릴을 아버지라고 말하지만 그의 뜻은 딴 데 있다. 아직도 그를 믿는가. 지금 그를 기습하지 않으면 반드시 화가 닥칠 것이다”라고 하였다. 신출내기에게 칸의 자리를 돌아가게 한 것을 끊임없이 후회하던 몽골 칸의 적통인 알탄과 쿠차르는 “우리가 호엘룬의 자식들을 죽이겠다”고 하였으며, 에부게진, 노야킨, 그리고 카르타아트 씨족들도 말하였다. “그들의 손과 발을 묶어 오겠다.” 수케겐씨족의 토오릴은 “어떤 수를 써서라도 나는 테무진과 그의 백성을 빼앗아 오겠다. 테무진의 밑에 백성이 없어지면 그들은 꼼짝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되르벤씨족의 카치운 베키도 “닐카 셍굼이여! 우리들은 너를 따라 긴 나무의 끝까지, 깊은 물의 바닥까지 같이 갈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자무카는 “나는 좋은 시절이나 나쁜 시절에도 같은 곳에 사는 종달새지만 테무진은 겨울에는 날아가는 기러기입니다”라고도 하였다. 이들의 말에 셍굼은 테무진을 치기로 결심하고 토오릴을 설득하러 나섰다.
닐카 셍굼은 아버지에게 이러한 말들을 전달하였다. 이 말을 들은 토오릴은 “너희들은 나의 아들인 테무진에게 어떻게 이러한 생각을 하는가? 지금까지 나는 그를 지팡이로 삼아왔다. 테무진에게 이렇게 나쁜 짓을 한다면, 하늘이 우리를 돕지 않을 것이다. 자무카는 중상을 잘하는 자이므로 그의 말을 믿지마라”며 화를 냈다. 토오릴은 여태까지 테무진의 지원을 받아왔고, 자무카를 믿지 않았으며, 그 자신은 이미 늙어 여생을 평화롭게 마감하고 싶었다. 토오릴이 듣지 않자 셍굼은 “지금 아버지가 이렇게 살아 있을 때에도 그는 우리들을 우습게 안다. 만약에 아버지가 죽기라도 한다면 할아버지 쿨자쿠스 부이룩 칸이 힘들여 이만큼 모아놓은 당신의 백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다그치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러자 친아들과의 관계를 깰 수 없는 토오릴은 그를 다시 불러들여, “우리는 하늘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을까? 너희들은 나의 아들인 테무진을 어찌 죽이자고만 말하는가. 하여튼 너희들이 그렇게 하기로 했다면 부디 성공하기를 바란다”라고 허락하였다. 셍굼의 개전 의지와 압력에 토오릴은 모든 전권을 넘겨주고 말았다. 테무진과 케레이트의 관계는 파탄에 이르렀다.
셍굼은 먼저 측근들과 협의 끝에 “그들은 일찍이 나의 여동생 차우르 베키를 요구했다. 거짓으로 혼약일자를 정하여 그를 불러 사로잡자”고 한 후, 테무진에게 혼인제의를 받아들이겠노라면서 그를 연회에 초대하였다. 자신의 뜻이 받아들여지자 테무진은 서둘러 10명의 너케르만을 거느리고 길을 떠났다. 가는 도중 몽릭의 집에 도착하여 첫 밤을 지냈다. 몽릭은 “일찍이 차우르 베키를 요구했을 때 그들은 우리를 깔보고 응하지 않다가 이제야 보올자르의 음식을 먹으러 오라고 하는가? 스스로를 크게 여기는 사람들이 왜 지금 차우르 베키를 주겠다고 초대하는가? 여기에는 반드시 무언가가 있다. 테무진이여, 봄이 되어 우리들의 말떼가 쇠약해졌기 때문에 말떼를 돌보아야 한다는 말로 직접 가는 대신 사자를 파견하라”고 하였다. 테무진은 자신이 처한 상황을 즉시 알아채고 사신만을 보낸 채 되돌아 서버렸다.
테무진이 직접 오지않고 사신만 보내자, 셍굼은 “우리들의 음모가 발각되었다. 내일 일찍 쳐들어가 테무진을 포위한 다음 그를 사로잡자”면서 기습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이를 엿들은 말치기인 바다이와 키실릭에 의해 기습 일보직전에 테무진에게 알려졌다. 상황은 매우 급박하였다. 이 야습에 케레이트군은 테무진군의 5배에 해당하는 3만명을 동원하였다. 방비를 하기도 전에 급보에 접한 테무진은 급히 막료들을 불러 말떼를 풀게 하고 전투준비를 시켰다. 테무진 진영의 가족들은 긴급하게 필요할 가구만 서둘러 챙겨 말을 타고 동쪽의 산지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거추장스러운 막사와 무거운 수레들은 버려졌다. 테무진은 케레이트군을 속이기 위하여 엄선한 기마병들을 둔영지 주위에 남겨 피워진 불을 지키게하고, 적이 접근한 마지막 순간에야 철수토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나머지 정예병사들과 함께 가족들을 뒤에서 엄호하면서 천천히 물러섰다.
흥안령의 돌출부, 칼카강의 원류 부근인 카라 칼지드 엘레드까지 후퇴한 후, 테무진은 가족들에게 적은 수의 전투병들과 함께 강을 건너 계속 행군하게 하였다. 그리고 테무진은 정예병 약 5,000명에게 부근의 언덕에서 휴식을 취하게 하면서 장비를 점검하게 하는 등, 서둘러 전투준비를 시켰다. 테무진군이 둔영지를 버린지 채 한시간이 안되어 케레이트의 선발대가 접근하였다. 선발대는 테무진군 둔영지의 야영불빛에 그들이 둔영지를 지키고 있다며 주력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 동안에 테무진군은 그들의 가족들을 더 멀리 이동시킬 수 있었다. 케레이트 본군은 테무진군이 둔영지를 버린 것을 알자 지체없이 추격에 나섰다. 테무진은 적의 위치를 알기 위해 마고 운두르산의 북쪽에 젤메를 보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하늘높이 솟아오르는 먼지를 발견하고 곧장 테무진에게 보고하였다. 테무진은 전열을 정비하고 토오릴의 대군을 기다렸다. 케레이트군은 해질녁에 강가에 도달하였다. 케레이트군은 빠르게 추격하느라 발빠른 말들은 앞서고 느린 말들은 뒤쳐지는 등 대열은 상당히 흩어진 상태였다.
테무진군은 강을 건너는 케레이트군을 밀집대형으로 차단하였다. 처음의 교전에서 테무진군은 케레이트군의 선봉을 흩어 놓았으나 곧이어 케레이트의 토오릴이 주력군을 이끌고 도착하였다. 토오릴의 대군이 카라 칼지트에 도착하자, 테무진군의 주르치데이 노얀과 쿠일다르 세첸은 자신들의 우루우트, 망구트 씨족을 이끌고 전면에 섰다. 이쪽으로 케레이트군은 지르긴, 투멘 투베겐, 올롱 동카이트 씨족들, 그리고 토오릴의 1천호위, 토오릴의 중군 순으로 접근하였다. 테무진이 진을 펼치자마자 토오릴측은 지르긴씨족을 선봉으로 공격해왔다. 지르긴씨족들이 공격해오자 우르우트와 망구트 씨족들도 그들에 맞서 돌격해 이들을 제압하고 앞으로 나아가자 이번에는 투멘 투베겐씨족의 아칙 시론이 공격해왔다. 아칙 시론이 쿠일다르 세첸을 찔러 말에서 떨어뜨리자 망구트군들은 쿠일다르가 쓰러진 곳을 감싸고돌았다. 이때 주르치데이 노얀이 아칙 시론을 공격하여 투멘 투베겐병들을 제압하고 앞으로 계속 나아갔다. 그러자 이번에는 올롱 동카이트씨족이 공격해 왔다. 주르치데이 노얀이 이들도 제압하자 코리 실레문 타이지가 1천명의 호위대를 이끌고 공격해왔다. 주르치데이 노얀은 다시 이들도 물리치고 계속 앞으로 나아가자 셍굼이 공격해왔다. 이때 주르치데이가 쏜 화살이 붉은색의 크림이 칠해져있는 셍굼의 뺨에 박혀 셍굼이 말아래로 떨어지자 케레이트군이 모두 셍굼의 주위를 감쌈으로서 진격이 주춤해졌다.
쌍방의 접전은 실로 격렬하였으나, 그러나 케레이트군에 비해 테무진군은 중과부적이었다. 테무진은 더 이상의 피해를 줄이기 위하여 후퇴할 수 밖에 없었다. 수적으로 우세한 적군의 공격에 점점 힘이 부쳐 밀리게 되자 테무진은 옆에 있는 기수 쿠일다르에게 기회를 보아 케레이트군을 돌아 뒤편에 있는 언덕에 군기인 툭(야크나 말의 꼬리와 갈기 털로 만든 군기)을 세우도록 하였다. 측면과 후면 공격은 몽골군이 잘쓰는 작전으로 적 후방에 테무진의 군기가 나타나면 통과로를 막고 있는 케레이트군이 군사를 나누어 그 언덕을 공격할 것이므로 이렇게 케레이트군의 공격력을 분산시켜야만 테무진군을 구할 수 있었다. 쿠일다르는 케레이트군이 전선을 돌파하여 전세를 장악하는 것을 보자 “안다여! 만약 내가 이 싸움에서 죽는다면 나의 자식들을 부탁한다”고 말한 후 전선을 돌파하여 적 후방의 야산에 군기를 세웠다. 산 정상의 군기는 케레이트군을 혼란스럽게 하였다. 케레이트의 지휘관들은 테무진군이 측면공격을 위한 추가군을 어디에서 얻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토오릴은 재빨리 장수들을 모아 상의하였다. 테무진이 증원군을 얻었는가? 케레이트는 그 산을 공격해야하는가 아니면 퇴각할 것인가? 해는 지기 시작하였고, 케레이트군은 매복작전에 말려들까 야습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은 전장에서 조금 물러서서 다음날까지 공격을 미루기로 하였다. 테무진군의 퇴로는 열렸다. 케레이트군의 공세가 멈추고 해가 지자, 테무진군은 어둠을 틈타 급히 후퇴하였다. 그날 저녁 테무진군은 가족들이 후퇴한 길을 따라 철수하였으며 케레이트군은 다음날 그들을 계속 추격하였다. 테무진군의 전투력은 케레이트군과 비슷하였으나, 테무진군은 가족들의 후퇴로를 지키느라 기동작전을 구사할 수 없었기에 케레이트군의 수적 우세 앞에서 밀릴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 케레이트의 선발대가 나타나자 테무진은 결사대를 모집하였다. 많은 지원자들이 그에게 모여들었다. 테무진은 약 50명을 선발하여 그들의 임무를 설명하였다. “너희들은 케레이트 선발대 사이로 스며들어 20,000명이 넘는 케레이트 본군을 공격한다. 너희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적군을 치고 또 쳐라.” 이들은 재빨리 동료들 곁을 떠나 케레이트 주력군을 향해 달렸다. 이들 소부대는 언덕과 구릉을 이용하여 케레이트 선발대 사이를 쉽게 미끄러져 들어갔다. 그들은 케레이트 주력군이 있는 평지에 도달하자 공격대형을 갖춘 후 말을 몰아 돌격하였다. 케레이트군은 이들을 테무진 본군의 선발대로 생각하여 전군의 반인 약 10,000명으로 맞아 싸우게 하였다. 이 결사대는 북풍과 같이 케레이트의 전투부대에 스며들어 앞을 가로막는 어떤 장애물도 자르고 죽였다. 결사대는 전부 쓰러졌지만 그들은 거의 1,000명의 케레이트군을 쓰러뜨렸다. 케레이트군은 지금까지 이렇게 엄청난 전투정신을 가진 결사대를 본 적이 없었다. 테무진군은 이러한 공격을 할 수 있는 병사들이 아직도 3,000여명이나 있었다. 케레이트군은 위신과 체면이 있어 추격을 계속하였지만 이러한 공격을 다시는 당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그들은 진격속도를 늦추어 테무진군이 빠져나가게 만들었다. 이후 토오릴 진영에서는 테무진군을 계속 추격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놓고 격론을 벌이다 아칙 시론의 주장을 따라 추격을 멈추었다. 토오릴은 “몽골족의 대부분은 자무카, 알탄, 쿠차르와 함께 우리들과 같이 있다. 테무진의 몽골족은 타고 있는 말밖에 없다. 그들이 이리 오지 않는다면 우리가 가서 마른 말똥을 보자기에 싸듯이 잡아오도록 하자”고 말했다.
테무진군은 도망치는 길에 많이 이탈하였고, 부족민의 손실 역시 막대하였다. 이 싸움의 영웅이었던 쿠일다르가 상처가 도져 세상을 떠났고, 테무진은 어르 노오사봉에 그의 뼈를 묻었다. 테무진의 셋째아들 오고타이, 그리고 두 명의 가장 충성스러운 장수 보오르추와 보로쿨은 행방불명이었다. 위급한 상황에도 테무진은 그들을 기다렸고, 사람들은 말 옆에서 고삐를 손에 잡은 채 밤을 새웠다. 날이 밝자 한 사람이 뒤에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보오르추였다. 그는 전투 중에 말이 쓰러지자 걸어서 도망치다가 짐 싣는 말을 집어타고 뒤따라 왔다. 테무진은 감동하여 가슴을 치며 “하늘이여, 이를 기억하라”고 소리쳤다. 잠시 후 또 한 사람이 왔다. 보로쿨이었는데 그는 경동맥에 상처를 입은 오고타이를 말에 태우고 왔다. 보로쿨은 입으로 피를 빨아 오고타이의 상처를 치유하였으므로 입가에는 피가 가득하였다. 이를 본 테무진은 눈물을 흘렸다. 그는 서둘러 불을 지피게 하여 상처를 불로 지진 뒤, 여기서 적이 오면 싸우자하였다. 카라 칼지드 엘레드 싸움 후, 위기에 몰려 있던 테무진군은 토오릴의 추격이 없자, 달란 네무르게스 지방으로 가서 남아있는 군사의 수를 점검한 후 다시 칼카강을 따라 계속 북상하였다. 칼카강의 어귀에는 테무진의 아내 보르테를 배출한 콩기라트 본족이 있었으므로 테무진은 먼저 그들에게 친척관계를 들먹이며 도움을 청하면서 주르치데이 노얀이 이끄는 우르우트씨족을 파견하여 그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콩기라트 본족을 수습한 테무진은 계속 북상하여 퉁게개천의 동쪽에서 토오릴, 셍굼, 자무카 및 자기를 배반한 키야트씨족의 여러 노얀들을 비난하는 사자를 토오릴 진영에 파견하였다. 테무진은 토오릴에게 그들의 다정했던 세월과 그가 바쳤던 봉사를 상기시키는, 옛 주인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한 구두 메시지를 보냈다. 그는 토오릴의 입장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자신과의 연합만이 그의 지배권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 하며, “두개의 바퀴를 갖고 있는 수레의 한쪽 바퀴가 부서지면 소는 그 수레를 끌 수 없게 되는데, 테무진은 당신에게 한쪽 바퀴가 아니었던가”라고 따졌다.
사실 테무진은 토오릴을 위하여 많은 일을 하였다. 그의 아버지 에수게이는 토오릴을 도와 빼앗긴 부족민을 찾아주었고, 토오릴이 두번째로 도망쳤을 때에는 테무진이 그에게 부족민들을 나누어주었다. 그는 메르키트족을 습격하여 빼앗은 것들을 그에게 모두 주었으나 토오릴은 메르키트족의 원정에서 얻은 전리품을 독점하였다. 뿐만 아니라 테무진은 ‘사걸(四傑)’을 보내 나이만족 쾩세위 사브락에게 빼앗긴 셍굼의 처자와 부족민을 되찾아주었고, 되르벤, 타타르, 살지우드, 통하이트와 같은 씨족들을 굴복시켰다. 테무진은 “나의 아버지, 칸이여. 그대는 나에게 어떤 은덕을 베풀어 주었는가”라고 다그쳤다. 그는 또 둘 사이에 맺은 맹약을 깬 책임을 물으면서 자무카의 선동과 유혹에 빠져, 사실을 직접 확인해 보려 하지도 않았다고 하였다. 토오릴은 측근으로부터 소외된 감이 있는 차에 테무진의 이러한 힐난에 흔들렸다. “나는 법도에서 멀어졌다. 이제 나의 아들 테무진을 보고 나쁘게 생각한다면, 내 피가 이처럼 흐를 것이다”라고 하면서 토오릴은 화살을 깎는 칼을 들어 자기 손가락을 찔러 피를 내어 조그만 나무통에 담아 테무진에게 보냈다.
테무진은 알탄과 쿠차르에게도 사신을 보내 자기편이 되라고 하였다. “과거 우리에게는 칸이 없어 나의 큰할아버지 바르탁의 후예인 사차와 타이추를 칸으로 세우려 하였으나 두 사람이 사양하였기에 나의 큰아버지 네쿤 타이지의 아들인 너 쿠차르를 세우려고 하였는데 너 역시 사양하였다. 그렇지만 일을 도중에 그만둘 수 없어 쿠툴라칸의 아들인 알탄을 다시 세우려 하였으나 너 역시 사양하여 너희들이 나를 칸으로 추대한 것이 아닌가. 너희들은 토오릴에 봉사하고 있으나, 토오릴은 변덕이 심하여 나를 이 같이 만들었는데 하물며 너희들인들 별 수 있겠는가.” 그는 알탄과 쿠차르가 그에 대한 분노를 씻어버리고 몽골부를 위하여 그에게 봉사할 것을 호소하였다.
셍굼에게도 테무진은 그를 벌거숭이 아들이라고 하면서 “우리들의 아버지 토오릴은 우리 두 사람을 똑같이 키웠다. 철이 들면서 의형제 셍굼 너는 나를 시기하여 쫓아내 버렸다. 나는 아버지 토오릴이 살아있을 때 칸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셍굼은 “이 말의 의미는 전투의 시작을 알리는 것이다. 빌게 베키와 토도얀은 전투의 깃발을 올려라. 말을 살찌우라. 더 이상 의심할 것 없다”라고 하였다. 셍굼 역시 다가올 전투가 결정적인 것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가 승리한다면 우리부족은 그에게 들어갈 것이고, 우리가 승자가 된다면 그의 부족은 우리에게 들어올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토오릴과 테무진의 관계가 깨지고 테무진이 패퇴하자 변덕스러운 유목민들의 반테무진 동맹은 스스로 해체되었다. 테무진의 숙부인 다리타이 옷치긴, 테무진의 작은 할아버지 쿠툴라 칸의 아들인 알탄 제운, 테무진의 숙부 네쿤 타이시의 아들인 쿠차르 베키, 자지라트부의 자무카, 바아린씨족 노예였던 수케게이의 토오릴, 망구트인 타카이 쿨라카이, 타타르부의 에미르인 쿠투 테무르는 함께 모여 패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우리들은 토오릴과 같이 있을 수도 없고 테무진과도 같이 있을 수가 없다. 토오릴이나 테무진 어느 쪽과 손을 잡지 않아도 되고 그들에게 더 이상 신경을 쓸 필요가 없도록 먼저 토오릴을 급습하여 그를 죽인 뒤 우리들이 칸이 되자”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계획은 토오릴에게 새나갔다. 토오릴은 바로 그들을 공격하여 가진 것을 모두 빼앗았기 때문에 다리타이 옷치긴이나 바아린씨족 및 케레이트부의 한 갈래인 사카이트 무리, 운진 무리는 테무진에게 도망쳤으며 자무카 세첸, 알탄 제운, 쿠차르 베키 등, 반테무진계 몽골부의 대다수는 동나이만부의 타양 칸에게 도망갔다. 이 불발 쿠데타는 카라 칼지드 싸움으로 테무진이 무너져 테무진과 자무카의 공존정책이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자 자무카나 키야트씨족 노얀들은 이번에는 자기들이 제거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여 먼저 토오릴을 제거하여 자기들에게 유리한 정세를 만들려 한 것이었다. 이 사태로 토오릴은 테무진 잔당을 계속 추격할 수가 없었다.
퉁게개천에서 토오릴측을 비난하며 일시 휴식을 취한 테무진은 칼카강을 따라 부유르호와 달라이호 북쪽 몽골초원의 가장 끝이며 중국의 변경에 가까운 오늘날의 몽골리아와 바이칼호 동쪽의 변경지역인 발주나라는 늪지대로 피신하여 그곳에 진영을 갖추었다. 이때까지가 테무진의 일생 중 가장 큰 시련에 봉착한 시기였다. 그러나 테무진이 이 위기의 순간을 헤쳐나올 수 있었던 원동력은 테무진이 처음부터 힘들여 구축해왔던 강력한 너케르 집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테무진은 발주나호로 들어간 후 먼저 이 지방에 유목하고 있는 친자무카계 코롤라스씨족 집단을 항복시켰다. 테무진은 이곳에서 세력을 회복하기 위해 시간이 필요했고, 그래서 1203년 여름을 발주나에서 보냈다. 이때 그가 이끄는 병사들의 숫자는 불과 2,600명이었다. 코롤라스씨족의 투항 후 테무진은 에르군네강 일대로 장사하러 올라온 코라즘 상인 하산을 만났다. 하산은 당시 궁지에 몰려있던 테무진군에게 식량제공은 물론, 카라 칼지트전 후 벌어지고 있는 케레이트부의 사정이나 각지의 정세까지도 상세히 테무진에게 설명해 주었으며, 후에 테무진의 호라즘 원정에도 참가하였다. 무슬림 상인인 하산이 테무진과 손을 잡은 것은 그가 승리할 경우 유목민과의 거래나 중국과의 교역에서 그의 비호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테무진이 비난사절을 파견한 것은 토오릴측을 비난한다는 이유도 있었지만 사방에 흩어져 있는 휘하세력들에게 자기가 어디에 건재해 있다는 것을 알리려는 뜻이 강하였다. 실제로 쿠이두 등 케레이트 내의 친테무진계 세력이 곧 테무진 진영으로 들어왔다. “토오릴에게서 떨어져 나와 테무진과 연합하게 된 사람은 수많은 선물과 최고의 환영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하여 어떠한 혜택이 그들에게 돌아가는지를 보여주었고 이에 끌려 사람들이 떼지어 몰려들었고, 그의 주위에는 수레들이 둘러쌓다. 이렇게 해서 테무진의 세력과 영향력은 점점 강해졌고, 그의 명망과 집단의 규모는 커졌다. 케레이트의 투항자들 가운데에는 테무진의 가까운 자문으로 오고타이의 치세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칭가이도 있었다.
여기서 테무진은 이 세상에 아직까지 없었던 희생을 기꺼이 감수하는 특수부대를 생각하였다. 그는 지체없이 특수부대를 모집하였다. 이 말은 비밀히 이 겔에서 저 겔로 이 진영에서 저 진영으로 퍼져나가 전투의 승패를 떠나 죽음만을 추구하는 새로운 특수군이 편성되었다. 테무진은 역공의 기회를 노렸다. 겨울이 되자 양 진영은 전투준비에 들어갔다. 이번 전투에는 많은 것이 걸려 있었다. 이번 전투는 케레이트군의 수적 우위와 테무진군의 정신적 우위의 싸움이었다. 테무진은 지금까지 자신이 이룩한 모든 것을 이 전투에 걸었다. 테무진과 행동을 함께 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그의 성공여부에 달려 있음을 깨달았다. 테무진은 손을 벌려 하늘을 향해 맹세하기를 “제가 대업을 이루게 하시어 모든 사람들과 고락을 같이하게 하소서. 만약 제가 이 말을 어기면 이 강물과 같이 되게 하소서”라고 하면서 휘하 장군들과 함께 발주나의 흙탕물을 마셨다. 이 맹약에는 19명만이 참여하였는데, 그들은 그후 최고의 대접을 받았고, 그들의 열전에는 빠짐없이 ‘발주나 사람들’ 혹은 ‘강물을 마신 사람들’로 기록되었다. 그들 중에는 키타이(거란)족, 탕구트족, 무슬림들도 있었다. 이민족이 연합을 해올 경우 서약을 하는 것은 일종의 관례로서 이들은 케레이트를 무너뜨리려 발주나에 모여 연맹식을 가졌다.
발주나호에 머무르고 있던 테무진은 주변정세가 점차 자기에게 유리하게 호전되고, 군세도 재정비되자 토오릴에 대한 기습에 나섰다. 당시 동생 조치 카사르는 형 테무진과 떨어져 살고 있었는데 케레이트군이 그의 처자식을 습격하자 부인과 세 명의 자식을 그대로 둔 채 불과 몇명의 너케르와 함께 천신만고 끝에 테무진이 있는 발주나로 찾아왔다. 테무진은 기습에 앞서, 카사르가 온 것을 이용하여 토오릴 진영에 대한 탐지와 적의 무방비를 이끌어내려고 카사르의 너케르인 칼리우다르와 차우르칸을 이용하였다. “형을 찾아 헤맸지만 그 모습을 발견할 수 없었다. 형의 족적을 추적했지만, 결국은 형을 발견하지 못했다. 내가 아무리 소리쳐 불러도 형은 듣지 못했다. 나는 밤에는 별을 바라보며 초목의 뿌리를 베개삼아 누워 잤다. 나의 처자가 칸 아버지가 있는 곳에 있다. 만약 칸 아버지의 믿을만한 사신을 만날 수 있다면 나는 칸 아버지의 곁으로 가고싶다”라는 거짓말을 전하였다. 그리고 테무진은 이들 사자와 케룰렌 강변에 있는 아르칼 게우기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다.
테무진은 토오릴을 공격하기 위하여 발주나호로부터 케룰렌 강변의 아르칼 게우기로 밤에도 쉬지 않고 진군하였다. 오논강쪽으로 북상한 테무진군은 이곳에서 군사들을 보충한 뒤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테무진이 아르칼 게우기에 도달한 직후 사자들도 토오릴군의 정보를 가지고 토오릴의 사신인 이투르겐과 함께 도착하였다. 이들은 “토오릴은 아무 방비도 하지 않고 있다. 도리어 금 장막을 세워 연회를 베풀고 있다. 재빨리 이동하여 불시에 그들을 기습 포위하시오”라고 보고하였다. 테무진은 밤에도 쉬지않고 이동하여 토오릴군이 제제에르 운두르산의 제르협곡 입구에 있을 때 포위하여 기습공격을 감행하였다. 먼저 테무진의 결사대가 케레이트 진지를 돌파하였으며 나머지 몽골군은 이들을 뒤따랐다. 케레이트군은 당황하였지만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케레이트군을 포위한 테무진군은 사흘 밤낮동안 포위공격을 하였다. 사흘째 되던 날 열세에 몰린 그들은 투항하기 시작하였다. 테무진은 이 전투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토오릴은 밤을 이용하여 도망쳐 나이만에게 갔지만 그를 알아보지 못한 나이만의 장수에게 살해되었다. 몽골부 내에서 막강하던 케레이트부족의 수장인 토오릴 옹칸은 이렇게 허무하게 일생을 마쳤다. 셍굼 역시 티베트로 도망갔다가 거기서 다시 호탄과 카쉬가르 지방으로 갔으나 쿠차에서 위그르인에게 잡혀죽었다.
토오릴이 테무진에게 진 이유는 그는 테무진을 신임하여 지지해 주었고 세력을 잡도록 도와주었으나 의심이 많았다. 토오릴은 테무진의 강한 개성을 너무 늦게 파악하여 경솔하게 지원했다가 동맹을 파기하고 테무진을 공격함으로써 테무진에게 꼭같은 구실을 주었다. 토오릴은 우유부단하고 겁이 많았으며 계속 측근들에게 시달렸기에 유목민의 분쟁조정력이 풍부한 테무진에게 정치적으로 패했다. 몽골부가 보잘 것없는 집단으로 출발한 것도 테무진의 성장에는 적당하였다. 테무진은 지도자로서 족한 혈통이지만 그것을 자랑할 정도의 명문은 아니었다. 나이도 들고 고생도 하고 경험도 풍부하여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동료 너케르에게는 아주 자상하였다. 군사적으로 테무진은 자신의 후원인이자 주인이었던 토오릴의 자리를 기습으로 가로챔으로서 오랫동안 꿈꾸어온 그의 목적을 달성하였다.
테무진은 타타르나 타이치우드에게 했던 것과는 달리 케레이트를 몰살시키지 않았다. 테무진은 그들에게 저항을 멈추고 자기 군에 합류하도록 하였다. 테무진은 격렬히 저항했던 장군 카닥 바아토르의 용맹함과 주군에 대한 충성심을 칭찬하며 용서하면서 100명의 주르킨 무리와 함께 죽은 쿠일다르 세첸의 가족에게 힘을 바치도록 하였다. 토오릴의 숙부 자카 감부도 용서하고 케레이트의 왕녀들과는 혼인을 맺어, 자카 감부의 큰딸 이바카 베키는 테무진이 처로 취하고 둘째딸 소르콕타니 베키는 막내아들인 톨루이에게 주었다. 톨루이는 이외에도 토오릴의 손녀인 도쿠즈 카툰을 맞아들였고, 큰아들 주치는 토오릴의 딸 차우르 베키와 결혼하였다. 이외에 케레이트 백성들을 여러 몽골씨족들 사이에 조심스럽게 분산 배치하여 흡수하였다. 그가 승리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사람들은 막대한 보상을 받았다. 누구보다도 토오릴의 습격을 미리 알려 생명을 구해준 말치기 바다이와 키실릭이 많은 보상을 받았다. 이 두 사람의 말치기에게 테무진은 병사와 노예 그리고 많은 가축과 물건을 준 뒤, 그들의 아홉세대까지 잘못을 추궁하지 않도록 하였다.
테무진은 쿠릴타이를 열어 군사조직과 생활관습에 관한 새로운 법령을 공포하였다. 그는 절도나 간음과 같이 문란한 풍습은 모두 금지시켰다. 그리고 그는 떨어져나간 부족, 씨족들에게 자신을 따를 경우 명성과 권위를 인정받을 것임을 알렸다. 이러한 제안을 받아들인 큰 부족으로는 오이라트와 콩기라트가 있었다. 이들은 테무진의 군대에 편입되어 후대를 받았으나 그에게 저항한 세력들은 파멸되었다.
나이만부 정벌과 자무카의 죽음
1203년 가을 자무카 등 반테무진계 몽골부 세력들이 서부 몽골의 강자인 동나이만부로 귀순해 오자 타양 칸은 동몽골에서 일어난 끊임없는 전쟁의 여파가 나이만부에도 미칠 것으로 생각하여 대노얀인 코리 수베치를 변경지대인 디디크 사칼 지방의 네쿤강 일대에 배치하였다. 이렇게 경계를 하고 있을 때, 케레이트의 멸망소식과 함께 아린 타이지 등, 케레이트부의 나머지 세력들과 테무진에 패한 메르키트부의 군주 톡토아 베키, 쿠두카 베키가 수령으로 있는 오이라트부, 자지라트부인 자무카 및 되르벤, 타타르, 카타긴, 살지우드 등, 여러 부가 모두 본능적으로 타양 칸에게 몰려들었다.
타양 칸은 대책회의를 열어 “이 동쪽에 조그만 몽골이 있다고 한다. 그 백성은 늙은 토오릴을 치고 바야흐로 칸이 되려한다. 하늘에는 해와 달이 두개의 빛으로 있지만 땅위에는 어찌 두 칸이 있을 수 있겠는가. 우리들이 먼저 그들의 화살통을 빼앗자”라고 선제 공격할 것을 결의한 후 음산 부근 만리장성 근처에 살고있는 동맹세력인 옹구트부에게 공동협공할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알라쿠시 부족장은 몽골의 실력을 잘 알고 있어 이 사실을 테무진에게 알렸다. “나이만의 타양 칸이 너희들의 화살통을 빼앗으려 한다. 타양 칸은 나를 자기의 오른손이 되라고 사신을 파견하였으나 나는 이를 따르지 않았다. 조심하라.” 테무진은 아브지야 커데게르에 머물면서 사냥을 하고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주요 지휘관회의를 열었다. 많은 지휘관들이 지금은 말이 여위었기 때문에 말이 살찌는 가을철에 공격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테무게 옷치긴은 “왜 말이 야위었다는 구실을 붙이는가? 나의 말은 살쪄있다. 이런 말을 듣고 어찌 가만히 있는가”라고 즉시 공격을 주장하였다. 벨구테이도 “살아 있으면서 화살통을 빼앗긴다면 무슨 소용인가. 남자인 이상 화살통과 함께 묻히는 것이 좋지 않은가. 나이만은 나라가 크고 백성이 많다고 저렇게 큰소리를 치고 있다. 이 같은 큰소리를 듣고서도 어찌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는가. 나이만부를 공격하여 그들의 화살통을 빼앗아 오자”라고 주장하였다. 테무진은 벨구테이의 말을 좇아 사냥을 중단하고 칼카 강변으로 이동한 다음 몽골족의 총수를 점검하기 시작하였으며 신중하게 군사적 조치들을 취하였다.
그는 군대에 엄격한 조직을 도입하여 종래의 씨족 질서를 천, 백호제로 개편하고 호위군도 확대 편성하였다. 모든 병사를 천호, 백호, 십호로 나누고 측근들이 이를 관장하도록 하였다. 즉 천의 아일을 한 단위로 묶어 천호라고 부른 뒤, 천호, 백호, 십호의 노얀까지 임명하였다. 또한 이들과 귀족자제들로 구성된 80명의 야간경호대(켑테울)와 70명의 주간경호대(토르카오트), 그리고 조리사(바오르치), 가축사육사(코니치), 조마사(커덜치) 등을 모아 윤번병(케식텐)을 편성한 후 도다이 체르비, 도콜코 체르비, 어겔레 체르비, 톨론 체르비, 보차란 체르비, 수이케투 체르비 등, 모두 6명의 케식텐 의장(체르비)을 임명하였다. 이밖에 케레이트부를 본따 전시에는 앞에서 싸우고 평시에는 시위를 서는 정예군 천호를 편성하여 케식텐에 소속시켰다. 나이만부 정벌을 앞두고 이루어진 이러한 조치는 새로운 유목제국의 탄생과 같은 것이었다.
1204년 초여름 붉은 해가 중천에 뜨는 날, 테무진은 군기에 제주를 뿌리고 나이만부를 정벌하러 제베와 쿠빌라이를 선봉으로 삼아 진군하여 사아리 케에르에 이르렀다. 몽골군은 투지가 치솟았으나, 그러나 나이만은 대적이었다. “우리들은 소수이다. 우리들은 소수일 뿐만 아니라 장거리 행군으로 모두 지쳐있으므로 이곳에 일단 쉬자. 군마들이 양껏 풀을 뜯을 때까지 이 사아리 케에르에 널리 흩어져 포진하자.” 테무진군은 휴식에 들어갔다. 테무진군이 사아리 케에르에서 진군을 멈추자, 타양 칸은 초병들을 통해 이들을 추적하였다. 테무진은 나이만족에게 자신의 군사력을 속이기 위하여 널찍이 퍼져 초원 전체에 진을 쳤고 밤이 되자 허수아비들을 세워놓고, 한사람 한사람이 각각 다섯 군데에 횃불을 밝히게 하여 원정군의 규모를 대군으로 보이게 하였다. 나이만의 척후병은 “몽골은 수가 적다고 했지만 별보다 많은 불이 보인다”고 하였다.
예상 밖의 수많은 불빛에 놀란 타양 칸은 겁을 먹고 군대를 알타이산맥 너머로 후퇴시켜 몽골군을 더 지치게 한 뒤 싸우려 하였다. “우리는 일단 후퇴하여 그들을 불러들이자. 그들이 알타이산 앞에 이를 때까지 서서히 뒤로 물러나면서 공격할 틈을 노리는 개싸움처럼 싸우면서 뒤로 물러나자. 그리고 몽골의 군마들을 지치게 한 후 그들을 치자.” 그러나 나이만부의 주요 지휘관들은 정면대결을 주장하였다. 장군 코리 수베치는 “당신의 아버지 이난차 빌게 칸이 적에게 등을 돌린 적이 있던가?”라고 하였으며, 왕자 쿠출루크도 “타양이 마음이 약해져서 이런 말을 한다. 몽골인들의 대부분은 자무카와 함께 여기 있는데, 몽골인들이 많을 수 있겠는가, 여자같은 타양!”이라고 분개하였다.
결국 타양 칸은 정면대결로 결심 후 타밀강을 내려가 오르콘강을 건너고 나쿠절벽의 동쪽자락을 통과하여 차키르 마우트에 도착하였다. 나이만측은 톡토아 베키 지휘의 메르키트, 자무카 지휘의 자다라트, 그리고 되르벤, 타타르, 카다긴, 살지우트 등이 가담하여 압도적 우위에 있었다. 타양 칸은 이들과 함께 알타이에서 항가이로 진군하였다. 차키르 마우트에서 일시 접전을 벌였던 양군은 전장을 나코산으로 옮겨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테무진은 스스로 선봉이 되어 전군에 명령을 내렸다. “풀숲과 같이 넓게 진격하라. 호수와 같이 넓은 진을 펴고 끌과 같이 날카롭게 싸우라.” 나이만군은 압도당했다. 겁이난 타양 칸은 물러나서 산 정상에 진을 쳤다. 몽골군은 산을 포위하였다. 격렬하고 끔찍한 전투였다.
“늑대들이 가축의 무리를 쫓듯이 우리를 쫓는 저 자들은 누구인가?”라고 타양이 묻자 자무카가 대꾸하였다. “저들은 내 형제 테무진의 네 마리 사냥개(사구)이다. 저들은 사람의 고기를 먹여 기르며, 쇠사슬로 묶여있다. 저들의 두개골은 놋쇠로 만들었으며, 이빨은 바위를 잘라 만들었고, 혀는 칼과 같으며, 심장은 쇠로 만들었다. 저들은 채찍 대신 굽은 군도를 가졌다. 저들은 갈증을 이슬로 달래며 바람과 함께 질주한다. 그들은 전투에서 사람 고기를 먹는다. 이제 저들은 사슬에서 풀렸으며, 턱에는 군침이 흐르고 기뻐 날뛰고 있다. 이 네마리 사냥개는 제베, 쿠빌라이, 젤메, 수베테이다.” 그러자 타양이 다시 물었다. “저 후방에서 굶주린 매처럼 급하게 달려드는 자는 누구인가?” 자무카가 대답하였다. “그는 나의 안다 테무진이며 쇠갑옷을 입고 있다. 당신은 몽골군이 오면 양을 먹어치우듯 고깃 조각 하나 남김없이 먹어치우겠다고 하지 않았는가?”
밤이 되었다. 승자는 몽골군이었다. 타양 칸은 중상을 입고 부하들에 의해 산 위로 운반되었다.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코리 수베치가 울부짖었으나 소용이 없었다. 코리 수베치는 그의 부하들을 이끌고 산을 내려와 항복을 거부하고 죽을 때까지 싸웠다. 테무진은 “이런 부하들이 있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라고 놀라워하였다. 나이만의 패잔병들은 밤중에 공격을 피하려 가파른 산위로 오르다가 계속 굴러 떨어져 뼈와 머리가 으깨지고 썩은 나무처럼 쌓였다. 타양의 아들 쿠출루크는 이르티쉬로 도망쳤다. 이렇게 적은 수의 도망자를 제외한 대다수의 나이만 병사들은 테무진에게 항복하였다.
자무카는 양측이 접전을 벌이기 직전, 테무진의 새로운 전투대형을 보고 나이만족이 승리하지 못하리라 판단하고 전쟁터에서 빠져 나왔다. 나이만족과 몽골족 간에 인종적 종교적 차이가 너무나 현격하여 자무카 휘하의 병사들은 나이만족 편에서 싸울 뜻이 없었다. 자무카는 몽골족의 적이었던 나이만과 연합함으로써 민족을 배신한 셈이었다. 동나이만이 붕괴하자 타양 칸에 가담했던 반테무진계 몽골씨족들은 대부분 테무진에게 투항하였다. 나이만 패망 후 타양 칸의 금인 보관자인 위구르 사람 타타통가는 포로가 되어 테무진을 위하여 봉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위구르인 관리들로 이루어진 몽골 사무원의 싹이 트게 되었다. 이제 전 몽골고원이 평정되었다. 아홉개의 야크 꼬리털로 만들어진 테무진의 군기는 모든 투르크 몽골 사람들의 깃발이 되었다.
알타이산맥 남쪽에서 나이만군은 패배했고 나이만의 연합부족들도 항복했으나 메르키트만은 도망쳤기에, 1204년 가을 테무진은 톡토아 베키가 이끄는 오도이트 메르키트를 공격하여 격파하고 계속 이들을 추격하였다. 이로써 메르키트부는 사실상 해체되었다. 메르키트부의 한 세력이었던 다일 우순의 오아스 메르키트족은 스스로 귀순하여 아름다운 딸 쿨란을 테무진에게 바쳤다. 이후 타양의 동생이며 서나이만의 칸인 부이룩은 이르티쉬 상류지방 즉 시베리아 알타이, 타르바가타이, 징기즈로 형성된 산지 근처에서 쿠출루크, 톡토아 베키, 자무카와 함께 저항을 계속하였지만, 그는 테무진의 특수부대에 의해 기습 살해되었다.
나이만과 메르키트족을 토벌할 때 자무카의 백성들(자지라트씨족)이 몽골측에 모두 사로잡혔다. 그들의 수령 자무카는 전쟁터에서 도망쳐 쓸쓸히 유랑하였다. 자무카를 따르는 사람들은 흩어졌고 몇명의 너케르만이 그와 함께 탕루산맥에 숨어 모험생활 끝에 비적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무카가 산양을 잡아 구워먹고 있을 때 그를 따르던 자들이 그를 묶었다. 그리고는 그를 테무진에게 끌고 갔다. 그러나 테무진은 자무카의 청에 따라 그를 끌고 온 자들을 그가 보는 앞에서 처형하였다. 자무카는 “나는 하늘의 천명을 받은 안다에게 패하였다. 안다의 마음이 편하게 나를 빨리 죽여달라. 피를 흘리지 않도록 죽여 나의 유골을 높은 산 위에 묻어달라. 그러면 나는 영원토록 너에게 축복을 내려 주겠다”고 하였다.
자무카는 어렸을 때부터 테무진의 친구였고 안다(의형제)였다. 몽골인들의 눈에 안다의 처단은 친형제를 죽이는 것처럼 나쁘게 여겨졌다. 테무진은 주저할 수밖에 없었다. 몽골 울루스 패권경쟁에서 패한 자무카는 테무진에게 피를 흘리지 않는 처형을 자청하였다. 자무카의 죽음으로 파란만장했던 두 사람의 대결은 끝났다. 테무진이 케레이트의 하찮은 부하였을 때 자무카는 그를 밀어주었지만, 일단 테무진의 힘과 명성이 높아지자 그는 토오릴과 테무진의 사이를 갈라놓음으로써 두 사람의 힘을 소모시키려 하였다. 자무카는 영리하고 재능이 있었으며 민첩한 결단력을 갖고 있었지만, 동시에 음모적이고 신임할 수 없었으므로 많은 몽골 민중들은 테무진을 지지하였다.
예케 몽골 울루스(큰 몽골 나라)의 지배자 징기즈칸으로 거듭나다
1206년 봄 테무진은 부르칸칼둔 성산(聖山) 근처 오논강 원류 강변의 초원에서 거대한 집회(대쿠릴타이)를 열었다. 황금씨족의 수호영령인 술데의 상징으로 아홉 개의 야크 꼬리를 가진 흰색 깃발 툭을 세우고 테무진은 지고의 칸(카간)으로 추대되었다. 카간은 5세기 유연이 처음으로 사용한 군장의 칭호로서 몽골고원의 군주들이 이를 사용하였으나 9세기 위그르의 몰락 이후 이를 사용할 만한 계승자가 없었다. 대샤먼인 코코추는 ‘영원한 푸른 하늘이 모든 몽골과 투르크인의 카간, 징기즈칸으로 테무진을 선택했다’고 선언하였다. 샤머니즘에서 텡그리는 하늘을 지배하는 신이었으며 징기즈는 땅을 다스리는 신이었다. “하늘에는 영원한 하늘의 신이 있고 땅에는 유일한 징기즈칸이 있다는 하늘의 소리가 있었다. 이 말을 말이 달릴 수 있는 곳까지, 배가 닿는 곳까지, 사자가 닿는 곳까지, 편지가 닿는 곳까지, 연락이 닿는 곳까지 들려주어라. 이 말을 들려주어도 따르지 않는 자는 눈이 있어도 볼 수 없게 되고, 손이 있어도 잡을 수 없게되고, 다리가 있어도 걸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은 영원한 하늘의 명령이다.”
코코추가 징기즈칸의 권력에 종교적 권위를 주자 몽골인들은 징기즈칸이 세계정복의 천명을 받았다고 굳게 믿었다. 이어서 징기즈칸은 훈시를 하였다. “너희들은 타타르, 케레이트, 메르키트, 오이라트, 투르크 등, 여러 종족에 속하였으나 오늘부터는 하나의 몽골백성이다. 몽골국은 몽골고원에 속한 여러 종족들이 가진 충성심과 군율로 다져질 것이다. 충성과 군율 이것만이 대몽골국이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위대한 비밀이 될 것이다.” 100만명 가까운 인구에 2000만 마리에 가까운 가축을 보유한 새로운 나라가 막 탄생하였다. 새로운 나라의 이름은 예케 몽골 울루스(큰 몽골 나라), 통치자의 칭호는 징기즈칸(成吉思汗)이었다. 징기즈칸이란 ‘황제 중의 황제’ 라는 뜻이다. 원사(元史)에는 1206년을 몽골제국 원년으로 삼고 있으며 징기즈칸을 태조라 기록하고 있다.
이 자리에서 징기즈칸은 자신의 승리를 추종자들의 복종, 충성, 희생으로 돌리고, 어려웠던 3년 전, 그와 함께 발주나호까지 물러나 생사고락을 같이 하기로 서약하였던 너케르들에게 포상을 내렸다. “보오르추와 무칼리는 나를 올바로 이끌고 그릇됨을 멈추도록 하여 이 자리에 이르게 하였다. 이제 뭇 사람의 윗자리에 앉아서 아홉 번 죄를 지어도 벌받지 않도록 할 것이다.” 또 나머지 장군들에게도 “메르키트의 땅과 셀렝가강에 원하는 대로 둔영을 치고 자자손손 활통을 매고 술잔을 비우며 다르한으로 행세하라. 너희들이 어떠한 잘못을 하여도 처벌하지 않겠다. 너희들이 바라는 것이 있으면 무엇이든, 아무에게나 시켜라. 너희는 직접 내게 생각한 바를 말하고 부족한 것을 말하라. 약탈물과 전리품을 마음대로 취하며, 짐승도 잡는 대로 가져라.” 징기즈칸은 가족들, 즉 황금씨족 사람들에게도 당연히 보상을 주었다. 먼저 어머니 호엘룬과 막내동생 테무게 옷치긴에게 1만명을 주었다. 양자 시기 쿠두쿠에게는 “모든 사람의 몫을 나누는 것과 재판을 하는 것을 푸른 글씨로 흰 종이에 기록하여 관리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기록된 법률은 후에 야사로 알려진 법전의 기초가 되었다. 또 벨구테이에게는 “모든 백성들에 대해서 도적을 징계하고 거짓을 자백시켜, 사형에 처할 만한 것은 사형시키고, 처벌할 만한 것은 처벌하라”고 하였다. 또한 그의 친척들과 동료들에게 수 천명씩의 유목민들을 분배하였다.
즉위식이 끝나자 징기즈칸은 저항의 구심점이 될만한 구 경쟁귀족을 없애고 분열성향의 혈연적 충성심을 부수어 모든 유목민을 그의 가계에 충성하도록 몽골군과 사회를 재구성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공식적으로 군사제도는 흉노의 것과 같이 10, 100, 1,000의 십진법으로 구성하여 마지막에는 가장 큰 전투단위인 10,000명으로 된 투멘으로 하였다. 이러한 십진법은 고원통합 이전의 타타르, 메르키트, 케레이트, 나이만 등에서도 시행되었지만 징기즈칸은 이전에 비해 그것을 좀더 조직화하고 지배계층을 완전히 재구성하였다. 즉 대부분의 구세대 귀족들을 없애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너케르를 중심으로 재편성하여 조직을 수중에 넣음으로서 몽골의 황금씨족만이 복종과 충성의 구심점이 되게 하였다.
징기즈칸은 먼저 15세에서 70세까지의 모든 남자들을 95개의 천호 주력군으로 나누고, 철저하게 개인의 능력을 중시하여 그에게 뛰어난 충성심을 보였거나 오랫동안 봉사한 가신 너케르들을 95명의 천인대장(밍간)으로 임명하였다. 이중에는 유년기의 친구 보오르추와 케레이트와의 전쟁에서 징기즈칸의 목숨을 건져준 말치기 바다이와 키실릭, 양치기 데게이, 목수 퀴취귀르, 대장장이의 아들 젤메, 그리고 수베테이와 차우르칸 등 잘라이르, 수니트, 바야우트와 같은 예속 씨족출신이 많았다. 천호의 구성에서 부족이 유지된 것은 자발적으로 징기즈칸과 연합한 오이라트와 옹구트 등에만 한정되었고 나머지 적대 씨족은 분산되어 씨족적 충성심을 없애는 십진단위로 재배치되었다.
징기즈칸은 양치기 데게이에게 무적민들로 천호를 구성하도록 하였고, 목수 퀴취귀르에게는 사람을 여기저기서 모으도록 하였으며, 제베와 수베테이는 본인이 규합한 사람들로 천호를 구성하도록 하였다. 나린 토오릴에게는 흩어진 네귀스 일족을 다시 모으도록 하였으며 욍귀르에게도 흩어진 바야우트일족을 다시 모아 천호를 만들게 하였다. 한사람이 몇 개의 천호를 보유한 자도 있었다. 코르치는 3천명의 바아린족 이외에 특별히 주어진 아다르킨족의 치노스, 퇴욀뢰스, 텔렝귀드를 합쳐 만호(투멘)를 구성하였다. 이 만호는 오르콘(만인대장) 혹은 장군에게 통솔되는 독립된 작전 단위였다. 그러나 투멘의 실제 인력은 5,000명 이하인 경우가 많았으며 때로는 1,000명 이하인 경우도 많았다. 95명의 천인대장들과 소수의 오르콘은 전통적인 씨족장들을 대체하였으며 병사들과 가족들은 그들이 속한 단위를 떠날 수 없게 인력을 완전히 재배치하였다. 또 그는 모반을 막기 위하여 지휘관들을 서로 교체하였고, 감시를 위해 두 사람이 동시에 지휘권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징기즈칸은 이들이 기존의 씨족의 기능과 구조를 대신하도록 특정한 유목지를 분배하였다. 이렇게 천호로 편성된 몽골 울루스는 몽골제국의 바탕이 되었으며 이른바 순(純)몽골군이 되었다. 후에 여기에 유목 키타이인들(거란인들)이 더해져 1227년 몽골군의 수는 약 13만이었다.
천호의 밑에도 백호, 십호라는 방법으로 10진법체계로 조직화되었다. 백인대장(자운), 십호장(아르반)은 천인대장의 추천에 의해 노얀 가운데에서 임명되었다. 이들의 직위는 세습되었지만 자신의 임무를 잘하지 못하면 언제라도 박탈되었다. “만약 십호장이 십호대를 통솔하지 못할 경우, 그의 처자식들과 함께 죄를 묻고, 십호대 가운데에서 한 사람을 십호장으로 임명할 것이다. 백인대장, 천인대장, 만인대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 아래로 자유민(타르칸)이 군대의 중추를 이루었는데, 이들은 전쟁에서 전리품과 사냥에서 잡은 짐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징기즈칸은 몽골고원 통일 직후 전쟁 약탈물을 지휘관이 독식하는 유목민족의 관습을 폐지하고 모두에게 철저히 나누어주도록 지시했다. 징기즈칸은 “열 명을 통솔해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천 명, 만 명을 맡길 수 있다”고 하였으며 실제로 몇몇 용감한 타르칸들은 노얀으로 승진하기도 하였다. 누구라도 사령관이 될 수 있다는 무한한 신분상승에 대한 기대는 몽골 기마군단의 정신력과 전투력을 엄청나게 높여주었다.
이들 전투단위는 평화시에도 유지되었다. 모든 젊은이는 각 단위에 소속되어야 하며 동원령을 피하는 자는 사형에 처해졌다. 모든 남성은 평시에는 수렵의무, 그리고 전시에는 병역의무가 부과되었다. 징기즈칸은 한 집에서 병사 한 명씩만을 차출, 군대를 구성했다. 이들 개개인은 5필의 말을 갖추고 있었다. 전쟁에 임하여 십호에서 이탈자가 하나나 둘 이상이 생기면 전원이 사형되었다. 그리고 만일 10명 전원이 도망친다면 백호를 이루는 나머지 집단 전부가 처형되었다. 마찬가지로 십호의 대원 중 한, 두 명 이상이 대담하게 싸우러 진격하는데 나머지 사람이 그들을 따르지 않는다면 그들 또한 사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십호 중 한, 두 명이 포로가 되었을 때 그들을 구하지 않을 때도 그들은 사형에 처해졌다. 십호를 떠나는 어떤 대원도 그리고 전장에 부상자들을 버린 어떤 십호 대원들도 사형에 처해졌다. 또 군기가 휘날리는데 전투를 피하는 자들도 사형에 처해졌다.
이제 몽골군은 새로운 형태를 갖추었으며 사소한 부족간의 분쟁과 싸움은 과거의 일이 되었다. 친숙한 부족과 씨족의 이름은 사라지고 여기에 속하였던 사람들은 분산 배치되었다. 징기즈칸 개인의 통합 몽골국이 탄생했으며 그의 야망은 초원을 뛰어넘었다. 새로운 국가는 전쟁을 위해 조직되었다. 십진법으로 나뉘어진 징기즈칸군은 강인한 훈련을 받았으며 장비를 잘 갖추게 되었다. 징기즈칸의 군사재편으로 과거의 부족수령들은 오그라들었고 유목민들의 상시 징병으로 전통적인 생활방식은 파괴되었다. 이러한 전통사회의 와해로 광범위한 계층에서 불만과 저항이 싹트게 되었다.
징기즈칸은 자무카와의 마지막 전쟁을 준비할 때부터 그의 추종자(너케르)로 구성된 친위대(케식텐)를 창설하였었다. 70명의 주간친위대와 80명의 야간친위대였다. 수많은 부족들의 집단적 이기주의를 누르고 중앙으로 집중된 권력을 만들기 위하여 징기즈칸은 지휘관들의 자제를 케식텐에 참여시켜 친위부대의 병력을 크게 늘렸다. 천인대장의 아들이 친위대에 선발되면 열 명의 추종자와 아우 한 명을 같이 오게 했다. 또 백인대장의 아들은 추종자 다섯 명과 한 아우를, 십호장의 아들과 평민의 아들이 들어올 때는 세 명과 아우 한 명을 각각 동반케 하여 만 명을 채웠다. 주간 친위와 야간 친위에 호르친 즉 궁사들이 추가되어 야간 친위대가 800에서 1,000명, 궁사가 400에서 1,000명 그리고 주간 친위대는 8,000명으로 되어 완전한 하나의 투멘이 되었다. 이후 몽골제국은 1330년대까지 이를 유지하였으며, 병력은 경우에 따라 1만2천에서 1만5천으로 증원되었다.
이들은 징기즈칸 일족에게 충성을 맹세함과 동시에 각종 특권이 부여되었다. 케식텐의 구성원들은 정규군의 장들보다 우위에 두어졌다. “외부의 천인대장들이 나의 친위병에게 싸움을 건다면 나는 천인대장들을 벌하겠다.” 주간친위와 궁사는 낮에 징기즈칸을 호위하는 임무를 맡았고 해가 지기 직전 야간친위와 교대했다. 야간친위 근무는 엄격했다. 밤에는 야간친위를 제외하는 누구도 오르도 주위를 돌아다닐 수 없었다. 만약 야간친위의 허락 없이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무조건 목을 베게했다. 급한 보고가 있으면 궁궐의 북쪽에서 야간친위에게 말하도록 했다. 또 야간친위의 숫자는 비밀에 부쳤고 밤에는 야간친위가 전권을 행사토록 하여, 왕실의 안녕을 꾀했다.
이들은 칸의 정책조언을 하였고 쿠릴타이나 칸이 결정한 일을 집행하였다. 결국 각 군의 지휘자들은 두 명의 자녀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중앙에 볼모로 보낸 셈이었으나 동시에 중앙과 이어지는 통로를 갖게 되었다. 또 이 조직은 군소 토후들의 전횡과 속민들의 소요를 막는 역할도 하였다. 이후 친위대는 수많은 장군과 대제국의 행정을 담당하는 관리들을 배출하여 몽골 정부의 중추가 되었으며 그 역할은 징기즈칸의 아들과 손자에게서도 계속되었다.
가족과 씨족 내부에도 안정과 질서가 뿌리내려야 했다. 군대를 재편한 징기즈칸은 지금까지 진행되던 약탈과 혈투를 없애고 통일국가수립과 새로운 사회질서에 맞추어 군율이 몸에 배도록 하기 위하여 야사라는 징기즈칸 법령을 공표하였다. 야사는 군인뿐만 아니라 일반 유목민에게도 적용되었다. 통일이전 몽골지역에는 지방별로 관습법이 있었는데 야사는 이러한 지방법을 국가안정과 지배체제확립에 초점을 맞추어 새로운 조항을 추가하였다. 민사사건보다는 형사사건에 관한 사항이 월등히 많다든지, 도망간 노예를 잡아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을 의무화한다든지, 유별나게 상하간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점등은 모두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일사불란한 지배체제를 염두에 두고 만든 법규들이다.
야사는 명령 수행을 거부하거나 수행하지 못한 자 혹은 의무를 아주 태만히 하는 자에게는 사형을 하도록 하였다. 스파이 짓과 도적질, 강간행위, 추잡한 행위, 거짓 증언과 도적과 같은 행동에는 사형이 구형되었다. 이로서 살인, 절도, 음모, 간통, 비적, 저주, 장물취득 등은 사형에 처해 졌으며 불복종은 범죄로 다루어졌다. 야사는 또한 사회내 각계층간 상부상조를 강조하고 주변 사람들과 음식물을 나누어 먹으라고 하는 등 복지 문제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특히 야사는 군주가 사신을 파견하여 외지의 고관을 처벌하고자 할 때 그 사신이 최하위직이고 그 처벌이 사형이라 할지라도 그 형의 집행을 달게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여 자신의 권위에 대한 일체의 도전을 불허하였다.
그러나 유목민들의 일상 생활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사건들을 가능한 한 그 지방의 관습법에 맡겨주었고 피정복지에도 그 나라 고유법에 따라 처리하도록 했다. 또한 야사를 지키면 어떤 민족이든 어떤 종교든 보호를 받게 되었고 야사를 어기면 가차없는 피의 응징이 뒤따랐다. 만일 한 부족이나 도시 그리고 국가 전체가 야사 법을 어기면 이들 주민 모두를 처단하였다. 징기즈칸은 젊은 처녀가 금붙이 자루를 가지고 은하에서 중국 해안에 무사히 다닐 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항구적인 지배체제구축, 가정과 사회의 안정, 종교에 대한 관용이 들어있는 야사는 제국의 안정적 관리를 위한 수단이 되었다.
그는 국가 판사인 자르구치가 위법사항을 심의, 판결하도록 하였다. 야사는 몽골사회에 새로운 질서를 가져다주었다. 야사로서 몽골인들은 아주 순종적이 되었으며 서로 친근하게되어 헐뜯는 일이 없고, 강도와 절도, 그리고 살인은 물론이려니와 말다툼이나 싸움질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또 징기즈칸은 문자로서만 야사를 아득한 후대에까지 변치 않고 전해질 수 있는 수단임을 알고 나이만의 옥새(금인) 관리자였던 위구르인 타타통가에게 이일을 맡겼다. 나이만은 이미 위그르문자에 기초한 문자를 가지고 있어 타타통가는 몽골사람들에게 이 문자를 소개하였으며 징기즈칸에게 성문법과 금인의 중요성을 알려주었다. 이때부터 통치를 위하여 내려진 조칙, 훈령, 지시 등은 문자로 옮겨져 하나의 책에 모아졌고, 이것이 대법령(에케 야사)으로 되어 제국의 구성과 통치의 기초가 되었다.
징기즈칸은 이후, 강력한 군대의 창설에 주력하였다. 보급으로부터 해방과 신속한 기동력이 유목민족의 특징이다. 비록 남루하고 각양각색의 통일되지 않은 복장을 하고 있었지만 철저하고도 확실한 병기점검을 통해 외형상의 조직화된(획일적인) 군대보다 더 실질적이고 내실화된 군대로 움직였다. 몽골군은 전부 기마병이었다. 말들은 같은 기후와 토양에서 자라났으며 똑같은 훈련으로 길들여져 작고 탄탄하였다. 몽골말은 조랑말로 흑마와 백마 두 종류가 있으며 체격에 비해 머리가 크고 눈이 둥글며 목은 굵다. 성질이 온순하고 아무 풀이나 먹고 견딜 만큼 거친 환경에서도 적응력이 강하였다. 힘센 목, 굵직한 다리에, 가죽은 털이 빽빽하였으며 지구력, 꾸준함, 그리고 인내심은 놀랄만하였다.
몽골의 기병들은 둔영지에서 귀마개가 있는 털모자를 쓰고, 털 양말과 장화를 신으며,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외투를 입었다. 전투할 때 그들은 목덜미를 덮는 가죽투구를 쓰고, 검은 옻칠을 한 가죽끈으로 만든 강하고 유연성 있는 흉갑을 입었다. 그들의 공격용 무기는 두개의 활과 두개의 활통, 굽은 군도, 손도끼, 안장에 걸린 쇠로 만든 미늘 창, 적의 기병을 말에서 떨어뜨리기 위한 갈고리가 달린 창, 당기면 죄어드는 올가미가 있는 말 털로 짠 밧줄 등이었다.
독자적으로 전략을 구사하면서 상대방 군대를 혼란에 빠뜨린 후 힘을 모아 생각지도 못한 반격을 가하는 끈질긴 투지가 몽골군에게는 몸에 배여 있었다. 또 싸우기 전 척후대를 보내 지형과 정세를 사전에 확보하여 일사분란한 작전을 펼치는 치밀함이 있었다. 또 몽골군은 일주일 동안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쉬지도 않고 말을 달려 적을 분쇄하기도 하였다. 1206년 징기즈칸의 즉위 후 군사훈련 중에는 6일간의 고비사막의 강행군이 들어 있었다. 행군 동안 모든 음식물들이 거두어 들여졌고 다만 물만이 배급되었다. 휴식은 첫날에는 6시간, 둘째 날에는 5시간, 이런 식으로 줄여져 6일째에는 1시간으로 되었다. 7일째에는 하루종일 공격과 포위훈련이 열렸고, 그리고 이를 견딘 자들만 천호대에 배속시켰다. 이들은 적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었고 다른 군사에게는 공손하여 부대의 핵심이 되었다. 몽골군의 독특한 점은 단순히 개인의 용맹이나 기교에 의존하기 보다 대규모 작전을 전령을 사용하거나 특별한 신호화살을 통하여 조정할 수 있는 능력에 있었다. 이들의 군사적이기 보다 논리적인 능숙함은 연례 사냥대회 같은 대규모 훈련에서 얻어졌다. 이것이 때로는 일사분란한 움직임으로 때로는 끈질긴 생명력으로 이어졌다. 징기즈칸은 병사들의 복지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서 충성심을 이끌어냈다. 그는 장교들에게 병사들과 같은 음식을 먹도록 하는 등 평등한 생활을 요구하였다. 징기즈칸의 생활도 병사들과 거의 같았다. “나는 야만적인 북쪽출신으로 소치기와 말치기와 같은 의복을 입고 같은 음식을 먹는다. 우리는 같이 희생하고 부를 같이 나눈다. 나는 이 나라를 신생아로 보고 병사들을 친형제처럼 돌본다.”
징기즈칸의 군대는 철저하게 평등한 집단이 되었다. 징기즈칸의 지도력과 보호하에서 몽골 기마병은 유라시아 대부분을 휩쓸었으며 그 절정기에는 모든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그들 개개인도 중국이나 러시아, 페르시아, 그리고 서방 유럽이 소집한 적군에 비교하여 매우 우수하였다. 1204년 나이만족에 대한 승리에서부터 1209년 탕구트에 대한 원정이 있을 때까지의 기간이 징기즈칸이 전쟁 대신 제국의 조직을 닦는 일에 몰두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이었다. 이 기간에 제국의 내적인 완성을 위한 기초와 대칸 일족의 권위가 확립되었고, 장군들에게는 전쟁 지휘권이 부여되었다.
몽골에서는 매년 가을 소를 잡아 뼈를 발라낸 뒤 고기를 세로로 길게 자른다. 이 고기를 3~4개월 이상 건조한 창고 등에서 바싹 말린 후 가루로 빻은 것이 보르츠이다. 소 방광 하나에 한마리 분량의 고기가루가 들어가지만 무게는 3~4 kg에 불과하다. 몽골군은 보르츠를 가득넣은 소 방광을 한 사람에 두 개씩 휴대해 다니다가 더운물에 보르츠를 조금씩 풀어 마시면서 식사를 해결하였다.
천호의 재편과 천인대장의 임명 후 징기즈칸은 황금씨족에게 부민을 나누었다. 세 명의 아들,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에게 각각 4개의 천호를 나누어주고 제국의 서방 알타이산 방면에 배치하여 우익 울루스를 만들었으며, 또 세 명의 친동생, 조치 카사르, 카치운, 테무게 옷치긴에게는 각각 1개, 3개, 8개의 천호를 주어 고원동방의 경계인 흥안령 방면에 두어 좌익 울루스를 만들었다. 이 동서 여섯 왕가의 중앙에 징기즈칸과 그의 막내아들 톨루이가 있었는데 중앙의 징기즈칸 직속 천호군도 서쪽으로 보오르추, 동쪽으로 무칼리라는 2명의 노장을 중심으로 다시 우익, 좌익의 형태로 나누어 배치하였다. 중군은 바아린의 나야아가 지휘하였으며 입양아인 탕구트인 차가안이 선발된 천명을 지휘하였다.
결국 징기즈칸은 남쪽을 향해 가장 바깥쪽에 좌우 3개씩의 일족왕가, 그의 안쪽에 또한 좌우의 천호군 그리고 정중앙에 징기즈칸 자신과 4개의 오르도를 지키는 케식텐이 있어, 학이 좌우의 날개를 크게 벌린 것 같은 형태로 남쪽을 향하여 배치되었다. 이 대형은 왼쪽으로 중국, 가운데는 투르키스탄과 동부이란, 오른쪽으로 러시아 초원을 향했다. 징기즈칸이 사망했을 때 몽골군의 실제 병력은 12만9천명이었다. 이중 좌익에 6만2천명, 우익에 3만8천명이 배치되었으며, 나머지는 중군과 보충대였다.
대쿠릴타이가 끝난 1206년 가을에 징기즈칸은 몽골고원의 나머지 잔당을 뿌리뽑기 위하여 부이룩 칸에 대한 원정을 단행하였다. 부이룩 칸은 토오릴과 징기즈칸으로부터 고배를 마신뒤 카라 이르티쉬강 유역으로 물러나 있었다. 그는 친동생인 타양 칸이 징기즈칸과 싸울 때 참여하지 않았지만, 그가 있는 곳은 이미 징기즈칸 적들의 집결지였다. 타양 칸의 아들 쿠출루크가 그에게 도피하였고, 메르키트족의 톡토아도 그에게 피신하였다. 몽골군이 그를 기습하였을 때 그는 매사냥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붙잡혀 처형당하였고, 처자식, 군대, 재산은 모두 약탈당하였다.
그 뒤 1207년 예니세이 상류의 키르기즈족은 싸우지도 않고 항복하였다. 그들은 복속의 표시로 눈부신 흰색의 매들을 바쳤다. 1207년 주치의 원정으로 후에 부리야트로 알려진 오이라트족을 포함한 남부 시베리아의 많은 삼림민들을 복속시켰다. 오이라트족의 수령 쿠두카 베키는 몽골군의 향도 노릇을 하였다. 톡토아와 쿠출루크는 기습을 받고 이르티쉬 강가에서 전투를 벌였다. 톡토아가 활에 맞아 치명적인 부상을 입자 나이만족과 메르키트족은 흩어져 도망쳤다. 이르티쉬강을 따라 내려가다가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물에 빠져 죽었고, 거기서 살아남은 얼마 안 되는 사람들은 멀리 도주하였다.
쿠출루크는 이르티쉬강을 넘어 세미레치를 통하여 신강에 있는 서요로 도망갔고, 메르키트족은 톡토아의 아들들과 함께 킵차크족에게로 갔으나 톡토아의 막내아들 쿠툴란 메르겐은 주치에게 사로잡혔다. 쿠툴란은 명사수였기 때문에 주치가 그의 목숨을 살려주려 했지만 징기즈칸은 “메르키트처럼 말썽 많은 부족은 없다. 우리는 그들과 얼마나 자주 싸워야 했고 얼마나 고통을 받았는데, 그를 살려주어 반란을 다시 일으키게 한다는 말인가. 나라의 적에게는 묘지보다 더 좋은 곳이 없다” 라고 하였다. 이로써 전 몽골고원이 평정되었다. 이후 쿠출루크는 서요(카라키타이) 왕 구르칸의 참모가 되었다가 1211년 스스로 권력을 잡고 1213년 서요의 마지막 구르칸이 되었다.
이제 징기즈칸의 명성과 위세는 내륙아시아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징기즈칸의 즉위 당시 실크로드는 이미 단순한 교역로만은 아니었다. 실크로드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경제문화권인 동시에 세계진출을 위한 관문이었다. 징기즈칸은 유목민 특유의 속도와 거리 개념을 갖고 북에서 남을 내려다보며 손을 펼쳤다. 실크로드는 모든 곳을 연결해주는 동맥이었다. 당시 위그르는 몽골 서방의 동서교통로에 있어서 사람이나 물자나 정보가 왕래하는 요지였다. 위그르족의 이디쿠트(군주)인 바르축 역시 징기즈칸의 등장과 성공에 관한 소식을 듣고 1209년 초 징기즈칸에게 사신을 보내 위그르인들의 주군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구름 걷히고 어머니같은 날을 보는 듯이, 얼음이 녹아 하천 물이 얻어지듯이, 징기즈칸의 명성을 듣고 매우 즐거웠습니다. 칸이 허락하신다면 저는 다섯 번째의 아들이 되어 힘을 바치겠습니다.” 그가 서요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징기즈칸에게 복속함으로서 서요의 동북부는 몽골의 속령이 되었다.
1211년 징기즈칸이 탕구트에 대한 원정을 성공리에 끝내고 케룰렌 강가에 진을 치고 있을 때, 바르축이 금, 은, 진주, 비단 등을 갖고 찾아왔다. 몽골고원 바깥에 있는 민족 가운데 위그르가 징기즈칸의 지배권을 처음으로 인정하였다. 같은 해 이리강 하류 카를룩의 군주 아르슬란과 알마릭의 군주 부자르도 서요의 종주권을 부인하고 징기즈칸의 신하가 되었다. 통일몽골은 타림분지와 발하쉬호 부근의 군소집단에게 그같은 흡인력을 발휘하였다.
위그르와 카를룩은 몽골고원의 바깥쪽에서 징기즈칸에게 항복한 최초의 나라들로서 이들의 항복으로 몽골제국의 남서 국경이 안정되었다. 어렵지 않게 몽골제국은 그들의 선조인 흉노가 몇 세기 동안 장악해온 대교역로를 수중에 넣게 되었다. 이는 정치적인 의미가 크지만 군사적으로도 몽골족은 서남방을 확보하게 되었다. 이로서 투르판 일대에 몽골은 강력한 수비대를 주둔시키게 되었다. 이후 위그르왕국은 몽골과 일체화되었다. 오아시스 통상국가였던 위그르의 지혜와 정보가 몽골과 연결되었다.
샤먼(무당)에 대한 군주권의 우위 확보
몽골인들의 세계에서 샤먼(무당)의 권위는 부족 수령들의 손이 미치지 못하는 자리였다. 몽골인들은 중요한 문제를 그들과 상의하고 그들의 충고를 따랐다. 그들이 퍼뜨리는 이야기는 부족정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당시 몽릭의 아들 코코추가 샤먼으로 대단한 권위를 행사하였는데 평민들은 그가 백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 영혼과 대화한다고 믿었다. 언젠가 그는 몽골고원에 흔히 찾아오는 매서운 추위에 벌거벗은 몸으로 황야와 산 속을 헤매다가 돌아와 “하늘이 나에게 말하기를 땅위의 모든 것을 테무진과 그의 자식들에게 주었으며 그를 징기즈칸이라 부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징기즈칸은 그러한 이야기가 샤머니즘적인 몽골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리라 생각하고 코코추를 신임하였다.
코코추의 아버지인 몽릭은 과부인 징기즈칸의 어머니 호엘룬 에케와 내연의 관계에 있었다. 코코추는 자신의 주술능력과 자기 아버지의 위치로 자신을 신성불가침의 존재로 여겼다. 징기즈칸이 시행한 1206년의 여러 조치에 많은 사람들이 불만을 품고 코코추의 주변에 모이기 시작하자 그는 초자연적인 자신의 권위를 이용하여 권력을 장악하려 하였다. 그는 우선 징기즈칸의 집안에 불화를 일으켰다. 그는 조치 카사르에 대한 징기즈칸의 의심을 부추겨 조치 카사르를 치게 함으로써 칸의 권위에 손상을 주려 하였다.
징기즈칸과 카사르와의 불화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징기즈칸은 그를 의심할 만하였다. 일찍이 바야우트씨족 출신의 사람이 초원의 왕자가 될 만한 후보자로 사차 베키, 자무카, 그리고 타타르족의 알락 위드르 외에 카사르도 꼽았었다. 케레이트의 토오릴과 싸울때도 카사르는 자기 처자식을 토오릴에게 남겨두었었다. 또 카사르는 여러 번 형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였다. 콩기라트족이 화친하려 왔을 때 카사르가 그들을 덮치는 바람에 그들이 자무카와 연합하게 된 일도 있었으며 타타르와 싸운 후 징기즈칸은 포로 1천명을 모두 죽이라고 하였음에도 그는 자기 타타르족 부인의 말대로 일부를 살려주었었다.
어느 날 몽릭의 일곱 아들이 징기즈칸의 동생 조치 카사르와 다투며 그를 구타하자 그는 울면서 형에게 호소하였다. 징기즈칸은 “너는 지금까지 남에게 져본 일이 없었는데 어째서 졌다고 하는가”라고 조소하였다. 화가 난 카사르는 사흘 동안이나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코코추는 징기즈칸에게 “영원한 하늘이 내게 말하기를, 한번은 테무진이 나라를 지배할 것이나, 그 뒤로는 조치 카사르다”라고 귀뜀하였다. 하늘이 코코추의 입을 통해 그의 의구심을 확인시켜주자 징기즈칸은 더 이상 카사르를 내버려둘 수 없었다.
징기즈칸은 그날 밤 말에 올라타 카사르를 체포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호엘룬 에케는 한 밤중인데도 흰 낙타가 끄는 검은 수레를 밤새 달려 해뜰 무렵에 징기즈칸을 찾아왔다. 테무진이 벡테르를 죽였을 때도 야단을 쳤지만 샤먼의 말만 듣고 친동생을 죽이려 할 때 그녀의 분노는 대단하였다. 호엘룬 에케가 도착하니 징기즈칸은 카사르의 소매를 묶고 지휘권의 상징인 모자와 허리띠를 뺏고 심문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나타나자 징기즈칸은 놀라 두려워했다. 어머니는 수레에서 내려 묶여 있던 조치 카사르의 소매를 풀어 주고 모자와 허리띠를 돌려주었다. 그리고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다리를 꼬고 앉아 자기의 두 젖을 꺼내 두 무릎 위로 넘쳐 내리게 하고는, "보았느냐? 너희들이 빨던 젖이 이것이다. 이 물어 찢다 못해 제 자궁을 물어뜯는 놈들아! 제 배꼽을 자르는 놈들아! 카사르가 어쨌느냐? 테무진, 너는 재능이 있으나 카사르는 힘이 있고 빼어난 궁수다. 부족들이 들고 일어날 때마다 그의 활과 화살이 그들을 길들였다. 이제 적을 무찔렀다 하여 카사르를 못 본다, 너희들이!" 하고 꾸짖었다. 징기즈칸은 어머니의 화를 겨우 달래고 나서, "어머니를 화나게 해서 두렵고 두려웠다. 부끄럽고 부끄러웠다. 물러나자, 우리가!" 하며 물러났다. 그러나 징기즈칸은 카사르에게 칭호와 명예를 되돌려주었지만 어머니 모르게 카사르에 속한 사람을 1,400명으로 대폭 줄였다.
이 사건으로 징기즈칸의 영지를 떠나 코코추를 따르는 사람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났고, 아홉 종류의 말을 하는 사람들이 코코추의 주위에 모여들었다. 이중에는 징기즈칸의 막내 동생 테무게 옷치긴에 속한 예속민도 있었다. 테무게는 사람을 보내 그들을 돌아오게 하였으나, 코코추는 테무게가 보낸 자들을 때리고 걸려서 돌려보냈다. 그 다음날 테무게 자신이 코코추를 찾아갔지만, 몽릭의 일곱 아들들이 그를 에워싸며 무릎을 꿇고 빌라고 강요하였다. 이로서 코코추가 권력을 두고 징기즈칸과 겨룬다는 사실이 명확해졌다.
이때 아내 보르테가 징기즈칸에게 말하였다. “당신 생전에도 당신 아우들이 모욕을 받게 된다면, 당신의 사후에는 당신 아들들에게도 반역할 것입니다!” 초자연적인 힘을 소유한 샤먼에 대한 공포심을 이긴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권력문제가 걸린 그는 물러설 수 없었다. 위기의 순간에 징기즈칸은 결단을 내렸다. 징기즈칸은 테무게에게 샤먼의 처리를 맡겼다. 며칠 뒤 코코추가 그의 아버지 몽릭과 함께 징기즈칸을 방문하러 왔을 때 테무게가 그 샤먼의 멱살을 잡았다. 징기즈칸이 그들에게 문제는 밖에 나가서 해결하라고 명령하였다. 코코추가 대칸의 장막에서 나오자마자 미리 테무게가 배치해둔 세 사람의 힘센 호위병이 그의 등뼈를 분질러버렸다. 이렇게 코코추와 테무게 사이의 다툼은 씨름이라는 전통적인 방법으로 해결되었다.
징기즈칸이 다시 천막으로 들어갔을 때 몽릭과 그의 아들들은 상황을 알아차리고 소매를 걷어올리면서 잡아죽일 듯하자 징기즈칸은 황급히 호위병을 불러 그를 에워싸게 하여 무사히 빠져 나올 수 있었다. 징기즈칸은 “코코추가 나의 동생들에게 손을 대고 나의 동생들 사이를 이간질했기 때문에 하늘의 사랑을 받지 못하여 그의 목숨이 몸과 함께 떠나 가버렸다”라고 말하고 신임하던 몽릭을 나무란 후 위기를 벗어났으므로 그를 용서하였다. “뛰어난 그대의 덕성을 지킨다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그러나 코코추로 인하여 콩고탄씨족의 체면은 사라졌다.”
징기즈칸은 코코추 대신에 바아린씨의 최장로이며 조용한 우순을 흰말을 타고 흰옷을 입는 샤먼 베키로 임명하였다. 이로써 징기즈칸은 샤먼에 대한 군주권의 우위를 확보하였다. 이후에도 징기즈칸은 여전히 하늘(텡그리)을 믿었으며 그의 후손들은 중국화되었든, 이슬람화되었든 모두 텡그리의 대리자임을 자처하여, 그들의 명령은 텡그리의 명령으로 되었고 그들에 대한 반역은 곧 텡그리에 대한 반역이었다.
탕구트(서하)와의 전쟁
징기즈칸은 칸이 되기 전부터 거란인(키타이인)이나 여진인 등, 금나라에서 이탈하여 온 사람들을 참모로 삼았다. 특히 거란(키타이)은 언어도 몽골과 비슷한 유목민으로서 웬만하면 중국어, 여진어 등, 여러 나라 말을 할 줄 아는 선배였다. 그들은 테무진과 그의 몽골군의 미래가 불투명할 때부터 테무진을 따랐다. 몽골의 여러 부족들을 통합하고 중앙아시아의 유목민족들을 하나의 군주권 아래로 편입시켜 조직화와 내정정비를 일단 끝낸 1206년에 징기즈칸은 대외전쟁에 나섰다. 그렇지 않으면 주변국가로부터 와해공작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그의 군대는 피복속 부족민들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그들을 무조건 신임할 수도 없었다. 그들이 원래의 거주지에 머물러 있는 한 그만큼 더 위험하였다. 대외전쟁으로 유목민들의 전리품 획득의 기대에 부응하고 아울러 이제 막 통합된 국내를 전시체제로 완전히 통솔, 장악을 계속할 수 있어야 했다. 더구나 그 동안 끊임없는 전쟁과 기후변화로 가축의 수가 격감되어 몽골고원의 목축경제는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었다.
그는 금나라를 공격하기 앞서 중국의 영하, 감숙, 오르도스, 신강 자치구 일부지역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던 탕구트(서하)를 공격하였다. 탕구트의 북쪽 경계는 고비사막의 남부에서 오아시스 도시인 하미에 이르기까지 몽골족이 살던 지역을 따라 그어져 있었다. 티베트계인 탕구트족은 그들의 지배를 받는 한족과 위그르족 등과 함께 서요를 구성하였으므로, 한족의 정착성향과 위그르의 유목기질이 절충된 사회구조를 유지하였다. 그동안 탕구트는 사막과 초원, 그리고 농경지역을 바탕으로 요, 송, 금 사이에서 독특한 문화를 꽃피우며 발전해 왔고, 경계를 길게 맞댄 막북의 몽골과는 뚜렷한 충돌은 없었다. 그들은 수많은 가축을 쳤고 동서 교역로의 동쪽 끝에 위치하여 국가 재정의 대부분은 교역상의 이득 및 상거래에 부과되는 세에 의존하였다. 탕구트는 중국의 서북방에 있어서 유목민들이 공략하기 힘든 견고한 성곽도시들을 가지고 있었다.
징기즈칸은 내부적으로 제국의 기본틀을 조직화하면서 이 탕구트왕국(서하)을 1205년, 1207년, 1209년의 세 차례에 걸쳐 침입하였다. 쿠릴타이가 열리기 전인 1205년 야율아해 지휘하의 몽골군이 탕구트 영토를 처음으로 공격하여 낙타를 비롯한 많은 가축을 빼앗아 돌아왔다. 두 번째는 1207년 가을로서 그들은 올로하이를 함락하여 많은 말, 낙타, 재물 등을 약탈하고 그곳의 직업적 기술자나 농민들을 잡아 유목지대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들은 탕구트가 군사를 규합하자 1208년 초여름의 더위를 피하여 되돌아왔다. 이 두 번의 공격은 아직 본격적인 정복전쟁이라기보다는 약탈 정보전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당시 서방에는 서요나 호라즘샤가 버티고 있고 남쪽에는 몽골족의 발전을 막아온 동아시아 제1의 강국 금나라가 있었다. 몽골국이 웅비하려면 이들과의 결전을 피할 수 없었고 이를 위해 탕구트를 제편으로 만드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했다. 또 탕구트의 좋은 말과 낙타, 이름 높은 활과 검, 갑주 역시 탕구트의 기병만큼 몽골에 필요했다. 탕구트를 손에 넣으면 비단길을 통한 동서교역의 이익을 나눌 수 있었고, 무엇보다 중원과 서역으로 진출하는 안전한 통로를 확보할 수 있었다. 두 번에 걸쳐 탕구트의 허실을 탐색한 몽골군은 1209년 4월 후방공격을 차단하고 금나라에 대한 원정로를 확보하는데 목적을 두고 탕구트를 침략하였다. 징기즈칸은 중국을 나누고있는 세 나라 가운데 가장 약한 이웃인 탕구트를 공격하여 정착민에 대한 몽골군의 전투력을 시험하였다.
몽골군은 징기즈칸의 지휘하에 약 300km의 고비사막 등, 모두 950km를 통과하여 탕구트 영내로 침입하였다. 몽골군은 처음 올로하이 공격에서 부원수 고령공이 지휘하는 탕구트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탕구트군은 두달 동안 몽골군과 대치함으로서 이 승리를 잘 이용하지 못하였다. 이윽고 몽골에서 지원군이 도착하자 몽골군은 다시 공세에 나서 포위기습전을 벌여 탕구트군의 지휘관인 외명령공을 포로로 잡는 등 큰 승리를 거두었다. 올로하이를 점령한 후 남하한 몽골군은 중흥부 외곽의 최후보루 극이문을 격전 끝에 함락시켰다.
이로써 수도로 통하는 길이 열리게 되어 몽골군은 오르도스 평원으로 진입하였고, 그리고 계속하여 황하유역에 있는 탕구트 수도 중흥부(영하)를 포위 공격하였다. 그러나 탕구트인들은 격렬하게 저항하였다. 황하가 가로놓여 있는 데다 중국식 방비가 되어있는 요새를 몽골기병으로는 달리 공격할 방법이 없었다. 몽골군은 넓은 평원지역에서 적을 공격하는 데는 훌륭하였지만 견고한 성채를 공격하는 데는 미숙하였다. 10월에 들어와 징기즈칸은 거대한 둑을 쌓아 황하상류의 물길을 성안으로 향하도록 하였으나 이것은 몽골군에게는 너무나 복잡한 일이어서 공사 중에 둑이 터지면서 몽골군의 진지를 덮치기도 했다.
이러한 시행착오를 통해 여러 형태의 공성법을 익히면서 몽골군은 왕성한 전의와 전투수행으로 수도를 공격하였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탕구트는 금나라에 급히 구원을 요청하였다. 더욱이 중국과 이란을 연결하는 대륙 횡단의 요지를 차지하여 대상교역이 활발한 탕구트는 몽골군의 봉쇄로 교역이 중단됨으로서 이 왕국은 파산지경에 이르렀다. 금나라 대신들은 탕구트가 무너지면 몽골은 필시 금나라를 공격할 것으로 생각하여 탕구트의 요청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였으나 금나라 황제는 “적들이 서로 싸우는 것이 우리에게는 훨씬 더 유리하다. 걱정할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하고 방관하였다.
탕구트왕 이안전은 별 수 없이 몽골군에게 항복하고 딸 차카란을 바치고 다음과 같이 서약하였다. “우리들은 징기즈칸의 어명을 듣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지금 칸 자신이 친히 출병하시니 위광에 감복하고 있습니다. 탕구트 사람들은 폐하의 오른손이 되어 원조할 것입니다. 우리들은 몽골족과 달리 정주의 토지를 가지고 성곽이 있는 도시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날쌘 전투나 빠른 출정은 할 수 없습니다. 그 대신 만일 허락하신다면 많은 낙타와 최상의 직물과 우수한 수렵용 매를 헌상하겠습니다.” 차카라는 이민족의 여인이었으므로 몽골의 여인에 비해 체격 얼굴 생김생김 등이 아름다웠다. 그밖에도 그들은 수많은 흰 낙타를 공물로 바쳤다. 그는 1210년 탕구트의 항복을 받아내고 공물을 약속받는 것으로 전쟁을 일단락 지었다.
탕구트 공격은 몽골에게는 성곽도시를 공격하는 좋은 경험이 되었다. 징기즈칸은 탕구트를 굴복시킴으로서 중국에서 투르키스탄까지의 통행로를 장악하고 금의 영토를 서쪽에서 포위하였다. 한편 탕구트는 1165년 이후 맺어온 금나라와의 화친관계를 단절하고 금나라의 변경을 약탈하기 시작하였다. 이 양국간의 전쟁은 몽골이라는 공동의 적을 두고 다시 연합한 1225년까지 계속되었다.
금나라를 정복하다
금나라는 몽골의 각 부족들을 그의 지배하에 두었는데 몽골의 강성을 두려워하여 분할지배 정책을 취했다. 금나라는 몽골의 각 부족끼리 서로 싸우게 하고 가혹하게 약탈을 하였으며 3년마다 몽골에 출병하여 각 지방을 순회하며 장정들을 죽여 없앴다. 징기즈칸은 금나라 정벌을 맹세했다.
12세기 중반 금나라는 수도를 중국동북부에서 중도(베이징)로 옮겼다. 금나라의 병제는 300호를 모극(무게), 10모극을 맹안(밍간)으로 하는 맹안모극제로서 이들도 왕을 따라 중국 내부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 편제는 성인 남성들은 평시에는 농업 등 생업에 종사하다가 전쟁이 나면 징집돼 종군하게 되어있었다. 그러나 중국 대륙으로 이주한 후 여진족은 태만하고 나약해졌으며 생활도 눈에 띄게 궁핍해졌다. 금나라 정부는 이런 처지에 빠진 여진인의 보호에만 치중하였기에 한인의 반발을 불러왔다. 중국 내부에 정착한 여진족 무리는 중원의 풍요를 둘러싸고 내분과 부패를 일으키면서 만주 일대에 남은 무리들과 사이에 이질감을 낳았다.
징기즈칸이 금나라를 치려는 생각은 이전 토오릴에게 파견된 금나라 사신 야율아해를 만났을 때, 그로부터 '금나라는 무방비 상태로 사기가 떨어졌다'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였다. 그는 징기즈칸과 의기가 투합하여 그곳에서 외교고문역을 맡았다. 야율아해는 말을 달리면서 활을 쏘는 것에 능하였고 거란어, 여진어, 중국어 그리고 몽골어에도 능하였다. 징기즈칸은 귀순자와 거란인 망명자들을 적극적으로 포섭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들로부터 중국 사정에 관한 정보를 얻기도 했지만 주로 금나라 내의 첩자들, 특히 무슬림 상인들이 가져다주는 정보에 무게를 두었다. 징기즈칸 자신도 정보수집에 참가하였다. 그는 공물을 인도한다는 명목으로 허실을 탐지하려 금나라에 갔다. 금나라 측도 이를 경계하여 칸을 국내에 들이지 않고 국경 밖에서 접대하였다. 금나라에 대한 또 하나의 정보원은 금의 바로 북쪽에 접하며 살고있는 몽골계 옹구트족이었다.
역사적으로 중국은 무한한 물자와 권위 등으로 유목민들을 유혹하였지만 대개는 변경 약탈전으로 끝났다. 징기즈칸 역시 금나라의 황제 알탄칸(장종)의 권위를 인정하고 그에게 조공을 바쳤으며 신하노릇을 하였다. 1207년부터 징기즈칸은 금나라에 당당한 태도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1208년 마침 금나라의 알탄칸이 사망하였다. 징기즈칸은 후계자의 즉위에 맞춰 주종관계를 청산하려 하였다. 그는 금나라 사신에게 새로운 군주가 누군가라고 묻고 사신이 위소왕(영제)이라고 하자 얼굴을 남쪽으로 돌리고 침을 뱉으며 “나는 중원의 황제는 천상의 사람이 하는 것이라고 들어왔는데, 이처럼 용렬한 자도 황제를 할 수 있다니 내 어찌 만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이때부터 몽골과 금나라 사이에는 본격적인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징기즈칸은 그 동안 중국에서 들어오던 물자를 직접 확보해야만 하였다.
그렇지만 금나라와 싸운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황하유역을 모두 장악하고있는 세계 최강국 금나라는 무진장한 인적자원으로 엄청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고 몽골군과 똑같은 기병을 가지고 있었다. 금나라는 비록 중국화되었어도 그들 선조들이 사냥하면서 생활하던 호전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자연적인 요새인 황하와 인공적인 요새인 만리장성은 금나라 천험의 방위선이었다. 금나라의 광대한 영토에는 수도 북경은 물론 열하의 대정, 요양, 산서의 대동, 하남의 개봉 등 도시들이 즐비하였다. 징기즈칸이 1206년 몽골고원을 통일했을 때 몽골제국 인구는 1백만명 정도였고 정규군은 10만명 수준이었다. 반면 세계 인구는 3억명 선이었고 당시 세계 최강대국이던 중국 금나라 인구는 5천만명이었다.
1211년 3월 징기즈칸은 금나라를 치기 위하여 케룰렌 강가에서 쿠릴타이를 열었다. 징기즈칸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모든 부족장들이 각각 참모를 대동하고 이에 참가하였다. 멀리 서쪽 끝에서 참가한 부족들도 있었다. 이 자리에서 징기즈칸은 여진인들이 그 동안 정기적으로 군대를 보내 몽골족의 장정을 제거해왔고 옛 몽골의 칸들을 말뚝으로 찌르고 나무 당나귀에 못박아 죽인 것을 상기시키고 사랑하는 몽골의 처자와 아이들을 굴비처럼 엮어 노예로 팔아먹은 수모를 갚아야 한다고 하였다. 징기즈칸은 "몽골족의 암바카이칸은 타타르족의 손에 의해 체포되어 금나라로 보내져 죽임을 당했다. 그는 사자를 고국에 보내 다섯 손가락의 손톱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원수를 쳐 무찌르라고 명하였다."고 말하였다. 실제로 금나라는 징기즈칸도 붙잡아 죽이려 했다. 금나라를 도와 타타르부를 격파한 공로로 조공 무역권을 획득한 징기즈칸이 1208년 새로 즉위한 황제의 조서를 거부한 때였다.
징기즈칸은 금나라의 수탈대상인 유목부족에서 태어나 유목사회의 생존질서에 따라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복수의 한을 풀기 위해 흩어진 부족을 하나로 끌어 모아 정착지 주변을 약탈하고 여자들을 노예로 끌고 갔다. 몽골을 통일한 이후 그는 주위에 몰려든 전사들에게 나누어줄 약탈물을 얻기 위해 전쟁을 시작하였다. 몽골초원에 있던 가축의 숫자는 패권을 두고 벌어진 내전과 기후변화로 격감하였으므로 이것을 채워야 했다. 당시 몽골인들은 말을 수출하고 밀가루와 무기, 직물 등을 수입했는데, 만성적인 무역적자에 시달렸다. 약탈물에 대한 기대야말로 흩어지기 쉬운 집단을 묶어두고 추종자들을 확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주로 동물 뼈나 가죽으로 만들던 병기는 쇠와 구리 등 철기의 광범위한 보급으로 전쟁을 벌일 기술적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징기즈칸은 말하였다.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은 적을 추격해 쓰러뜨리고 그들 소유물을 독차지하여 그 여자들이 울부짖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들의 말을 빼앗아 타고 다니고 그 여자들의 몸을 침대와 베개 삼아 노는 것이다.”
그는 몽골인들의 민족적인 감정에 호소하고 약탈의 현실적 기대감을 불어 넣어줌으로서 단결심을 불러 일으킨 뒤 높은 산에 올라 제사를 지내고 영원한 하늘의 권능으로 금나라에 대한 원한을 갚도록 도와줄 것을 빌었다. 그는 모자를 벗고 허리띠를 어깨에 건 후 땅에 세 번 엎드려 절을 하였다. “오 영원한 하늘이여! 저는 모욕적인 죽음을 당한 조상들의 복수를 하기위하여 무기를 들었습니다. 만일 제가하는 일을 허락하여 주신다면 당신의 힘을 내려주소서!” 나흘째 되는 날에 그는 비로소 승리의 약속을 받아 하산하였다. 징기즈칸이 신흥 몽골제국의 발전에 걸림돌인 금나라를 굴복시키지 않으면 몽골초원의 명실상부한 주인이 될 수 없다는 것도 큰 이유 중 하나였다.
케룰렌 하반에는 1만명의 케식텐 외에도 몽골부족군 12만명이 모였다. 징기즈칸은 있을지도 모를 케레이트족이나 나이만족 등의 반란에 대비하여 콩기라트부의 타후차르에게 2천명의 군대를 주어 고향에 남도록 한 뒤, 남은 전 복속 부족민들을 이끌고 고비사막을 건너 남하하였다. 징기즈칸은 4만명의 우익군을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에게 주어 토르강에서 옹구트부 지역으로 남하하게 하고, 자신은 무칼리와 함께 중군을 이끌고 제베, 수베데이, 조치 카사르와 막내아들 톨루이에게 맡긴 좌익과 함께 총 7만명이 케룰렌강에서 동남쪽으로 내려갔다. 춘 3월에는 눈이 녹아 물을 얻을 수 있고 덥지 않아 대사막을 건너는 데에는 적합한 때였다. 1211년 5월 징기즈칸은 고비남쪽 내몽골 초원에 자리잡고 있는 동맹부족 옹구트 지구에 다다르자 행군을 멈추고 병사와 말을 쉬게 하였다.
옹구트족은 금나라와 주종관계에 있었지만 징기즈칸과는 나이만전에서부터 인연을 맺어왔던 부족이었다. 징기즈칸은 1206년의 대대적인 논공행상 때 그들 부족장을 새로운 몽골제국의 고관으로 대접하고 딸 아라가이 베키를 그들 족장의 세자 패요랍한테 시집을 보냈다. 옹구트족은 만리장성의 북방 접근로인 산서성 북부 외곽지대를 지키는 금나라의 파수병 노릇을 하였는데 이러한 정략결혼으로 옹구트는 징기즈칸에게 변경지역을 넘겨주었고 침공로를 열어주었으며 지원군도 보냈다. 또한 난하 상류에 근거를 두고 징기즈칸에게 투신한 거란 호족 야율아해와 야율독화 형제도 금나라 북방을 지키는 거란족 장군과 연락이 닿아 있었다. 당시 금나라의 정규군 맹안모극군은 27만명이었고, 여기에 이민족으로 이뤄진 규군과 지방군인 화모군이 따로 있었다. 그러나 몽골통일의 의미를 잘 모르는 새 황제는 주력을 남송경계에 배치하고 있었다.
난하 상류에 도착한 징기즈칸은 한여름을 그곳에서 보내고 8월에 옹구트 부장 알라쿠시를 앞세워 대청산을 넘는 우익군을 기다렸다가 마침내 행동을 개시하였다. 야율아해가 선도한 우익군은 서경(다퉁, 대동)방면으로 공격하였고, 야율독화가 안내한 좌익군은 내몽골 초원에서 중원으로 들어가는 요충인 야호령으로 진격했다. 금나라는 옹구트가 몽골군에 가담한 줄도 모르고 방책에 의지하여 안심하고 있었다. 뒤늦게 급보를 받은 금의 주력은 야호령 근처 오사보에 방어진지를 구축했지만 제베가 이끈 몽골 좌익군이 우회해 이를 격파했다. 금나라 군사는 전원이 남방에 있는 천혜의 요새 야호령으로 후퇴하였다. 징기즈칸의 대군이 무주를 유린하면서 야호령으로 육박하자 금나라의 최고사령관인 완안승유는 40만의 정예군단을 이끌고 야호령으로 향했다. 그러자 야호령에서 몽골군은 두 군데로 공격을 감행하였다. 공격하기 전 제베는 몽골 돌격대를 모아놓고 몽골군이 금나라에 대한 두려움을 버리고 이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초전부터 이들을 박살내는데 있다고 하였다. 이들은 징기즈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최전방의 결사대로서 죽음만이 그들의 영혼을 쉬게 해주는 고향이었다.
먼저 몽골의 돌격대가 성난 파도처럼 금나라 군에 뛰어들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칼을 휘둘렀다. 금나라군은 돌격하는 이들에게 불덩이 기름을 퍼부었다. 그렇지만 불을 끄려고 땅에 구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타고 있는 말들이 숯이 되어 넘어질 때까지 달리면서 싸우고 베었다. 이들은 말이 쓰러지자 맨 땅위에서 타 죽을 때까지 고통을 나타내거나 울부짖지도 않고 까맣게 타들어 가는 손으로 계속 칼을 휘둘러 살육하였다. 금나라군은 두려움을 느껴 전열을 흩으려 뒤에 도착하는 우군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금나라군은 대혼란을 일으켰고 그리고 이들은 뒤따라오는 몽골 기마병에게 짓밟히거나 죽임을 당하였다. 제베는 이들에게 질서있게 퇴각하여 재정비할 시간을 주지 않고 철저히 궤멸시켰다. 살육전의 이야기를 들은 다른 금나라 군사들도 몽골군에게 놀라움을 갖게 되었다. 이제 그들은 이전의 몽골군이 아니었다.
금나라는 다시 완안승유의 지휘하에 제3의 천혜요새인 선평에 대군을 집결시켜 저항하였으나 오래가지 못해 무너졌다. 완안승유의 정예군과 몽골군은 회하보라는 곳에서 또다시 싸웠지만 금나라 정예군도 전멸되고 말았다. 회하보의 패전은 금나라에게 엄청난 공포를 가져다주었다. 다음의 목표는 몽골고원과 중국을 잇는 거용관으로 금나라는 이곳을 사수하였다. 징기즈칸은 이곳 거용관을 어떻게 통과해야할지 몰라 무슬림인 자파르를 불렀다. 자파르는 이 지방의 지리를 잘 알고있었다. 그는 빽빽한 숲 사이로 외길이 있어 그리로 국경을 통과할 수 있음을 알았으므로, 몽골군은 어둠을 틈타 말의 입에 제갈을 물리고 그의 안내에 따라 경계를 무사히 넘었다. 관문의 견고함을 믿고 안심하던 금나라 방위군은 잠든 사이에 급습을 받아 패하고 말았다.
1211년 9월 몽골군은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에서 180리 떨어진 곳까지 육박하였다. 그해 10월 징기즈칸의 세 아들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도 몽골 별동대를 이끌고 탕구트와 금나라의 육상통로인 산서성 최북단의 대동(서안), 즉 서경을 함락시켰다. 그리고 마치 회오리바람처럼 하북성 북부의 선화(당시 선덕)와 보안지역 등 변경지역을 파괴하였다. 징기즈칸은 초기의 승세를 타고 예상하지 못한 속도로 금나라군을 무찔렀다. 그러나 몽골군은 성이나 성곽에 대한 공략법이 서툴러 산의 능선과 능선을 따라 이어지는 만리장성 돌파가 기병만으로는 쉽지 않음을 알았다. 징기즈칸은 중도의 성벽이 보이는 순간 말머리를 돌렸다. 징기즈칸은 회군하면서 제베에게 요동을 거쳐 고원으로 돌아오라고 하였다. 제베는 이에 따라 금나라의 발상지인 요동의 동경을 함락시키고서 몽골고원으로 돌아왔다.
이번의 1차 공격은 탐색전에 가까웠으나 큰 소득이 있었다. 금나라는 이번 싸움에서 중요한 전투부대와 기동력을 잃었다. 금나라의 북변 방위와 말들의 관리를 맡고 있던 거란족 군단은 야율아해와 독화 형제의 사전교섭으로 전투다운 전투없이 몽골로 돌아서 그대로 몽골의 천호체제에 편입되었다. 또한 내몽골 초원에 널려진 금나라의 군목감(국영가축사육장)을 습격하여 40만 마리의 말을 끌어가 금나라 군사의 기동력에 큰 타격을 입혔다. 금나라의 기동부대인 이들 집단이 대량의 군마와 함께 몽골로 돌아갔기 때문에, 개전 초부터 몽골의 노도와 같은 공세가 그리고 금나라의 지리멸렬한 패퇴가 있었다. 징기즈칸의 천호대는 1206년의 95개에서 1227년에는 129개로 되었는데 불어난 34개 천호대의 대부분은 거란군단이었다.
1211년은 금나라에게 악몽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하였다. 1212년 가을 몽골군은 다시 돌아와 공세를 취하였다. 이번에도 몽골은 많은 지역을 다시 석권하고 중도 다음으로 금에게 중요한 산서 북부의 서경(대동)을 포위하였다. 그러나 징기즈칸이 화살에 맞았기 때문에 포위를 풀고 북쪽으로 퇴각하였다. 서경은 다시 금나라에게 돌아갔다. 몽골은 이러한 고전을 통하여 공성기법의 전문성과 공성공병 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이 문제는 결국 금나라에 적대적인 한족들을 징발하여 해결하였다.
1213년 가을 세 번째의 몽골 침략은 가공할 만하였다. 징기즈칸은 앞서 두 번의 경험을 바탕으로 일대 공세를 펴 결정적인 승리를 차지하였다. 야호령을 넘어 거침없이 진격하던 몽골군은 전과 달리 거용관 북구에서 진격을 멈췄다. 금나라군이 거용관에 철제 관문을 달아 대비하고 있었다. 먼저 제베는 중앙 전위부대를 이끌고 거용관 관문 입구를 향해 쳐들어가는 척 하다가 곧 자기 휘하부대를 이끌고 허겁지겁 퇴각하였다. 금나라 병사들은 그가 정말로 퇴각하는 줄 알고 추격해왔다. 유도작전을 위한 위장된 퇴각이었다. 제베는 적의 추격에 걸릴 듯 걸릴 듯하며 추격해오는 적을 멀리까지 유인해 갔다. 그들은 이렇듯 계략이 있는 줄도 모르고 깊숙히 추격해 갔다. 이때 퇴각하던 제베의 전위대가 갑자기 반격을 시작했다. 그 뒤쪽에는 징기즈칸이 직접 지휘하는 중앙군의 본대가 돌격해 왔다. 적의 시체는 나무토막처럼 쌓였다.
적을 완전히 소탕한 몽골군은 회래에서 거용관에 이르는 길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즉 7, 8월에 걸쳐 광활한 일대를 지키는 요새도시, 화산으로 둘러싸여 노란 바람이 부는 선화를 점령하였고, 여기서 다시 톨루이를 공격선발대로 삼아 남동쪽으로 요새화된 보안을 크게 쳐부쉈다. 이로서 장가구와 북경을 연결하는 길이 장악되면서 승리의 전기가 마련되었다. 몽골군은 장가구 근처의 선덕부와 부주를 손에 넣었고, 위녕성의 방위를 지휘하던 유백림도 투항하였다. 몽골은 선덕에서의 승리를 시초로, 덕흥을 부수고 거용관의 북쪽입구에 육박하였다. 금나라는 협상을 위해 징기즈칸을 알고 있던 거란인 석말령안을 보냈으나 그는 몽골측으로 돌아서 버렸다.
거용관에는 인적도 드물고 대낮에도 어두운 22km의 산길이 뻗어 있었고, 양편에는 험준한 절벽인 천연적인 요새에 인공적인 성곽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적이 쳐들어 오기 전에 금나라는 이 장성의 하단문을 철제로 바꾸었고 지면에 장해물을 설치하였으며, 그리고 정예부대로 방위를 세웠다. 당시 금나라는 12만 정도의 여진족 기병과 약 45만의 한족 보병으로 구성된 60만 대군을 보유하였고, 몽골 침공군의 병력은 다른 부족의 지원병 약 1만을 포함하여 6만5천명 정도였다. 몽골병사는 그곳에서 제지되었다. 징기즈칸은 거용관의 견고함을 보고 작전을 변경하였다. 즉 한 부대로 감시시키면서 자신들은 대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돌아 비호령을 넘어 자형구(역주)를 쳤다. 이후 징기즈칸은 제베에게 명하여 경무장한 소부대를 이끌고 거용관 남구의 금군 본영을 기습케 하여, 남북 양쪽에서 협격토록 함으로써 거용관을 함락시켰다. 징기즈칸은 탁주로 내려왔다. 징기즈칸은 탁주를 취한 후 바로 중도로 진격하지 않고 군사를 세 방면으로 나누어 진격시켰다. 주치, 차가타이, 오고타이의 세아들은 우익군, 동생 카사르와 테무게 옷치긴은 좌익군, 칸 자신은 막내아들 톨루이와 함께 중군을 지휘하였다.
몽골의 우익군은 보정에서 태행산맥을 따라 하북성을 남하하였다. 이들은 하남성 북쪽에서 황하에 부딪치자 태행산맥의 남단을 서쪽으로 돌아 산서성으로 나왔다. 그러면서 이들은 그 근처 도시를 하나 하나 점령하였다. 이후 금나라의 중요한 거점인 고북고와 대동 등을 점령하였다. 대동은 만리장성이 두 줄로 되는 해발 1300m 지점에 있는 성곽으로 산서성을 지키는 요지였다. 이 도시는 옛부터 난공불락이었으나 몽골인 특유의 병법에 의해 무너졌다. 몽골 우익군은 산서 중부를 돌파하여 태원과 평양을 빼앗았으나, 약탈물을 북으로 가져가기 위하여 다시 철수하였다.
중군은 전투에 깊이 개입하지 않고 화북평원의 입구인 용호대에 진을 쳤다. 그들의 진지 앞에는 북경에서 남경까지 800km 이상의 넓은 경작지가 망망대해처럼 펼쳐지고 전방 약 30km쯤 되는 곳에는 궁전과 탑들이 바라다 보였다. 중도는 당시 거대한 금나라의 수도로서 길이 43km에 이르는 성벽과 해자로 둘러쳐져 있었다. 이곳에서 금나라 군사 60만이 몽골군 7만5천과 대치하였다. 몽골의 중군은 중도를 공격하지 않았다. 중도는 너무나도 견고한 성곽도시였으므로 이것을 쳐부술만한 장비가 그들에게는 없었다. 징기즈칸은 사실을 냉정하게 파악하고는 그저 포위한 채 막사를 치고 소수병력만 남긴 채 주력인 기병을 남쪽으로 향하게 하였다. 일종의 위장전술이었다. 이 작전은 도시나 성, 하나 하나를 공격하지 않고 몇 갈래로 나뉘어 질풍과 같이 휩쓸고 곧 다음의 지방으로 사라지는 약탈이었다. 화북의 대평야로 진격해 간 몽골기병들은 끝없는 논밭에 경작된 곡식을 짓밟고 불을 질러 태워 없애 버렸다. 그뿐만 아니라 논밭 주위에 늘어서 있는 모든 농가도 불살라 버렸다. 중도 남서쪽의 보정으로부터 하남성의 북쪽에 이르는 500km 이상의 평원을 완전히 유린해 버렸다. 징기즈칸은 하북과 산동 평원을 가로 질러 하간을 취하고 제남을 함락시켰다.
성곽도시 공략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잡은 포로 또는 백성들을 선봉대 앞에 세워 돌격하는 수법을 썼다. 종대로 돌격해 들어오는 몽골군 앞에 내세워진 자기들 군사와 백성에 대하여 차마 무기를 들 수가 없어 대부분의 성곽이나 도시가 모두 함락되었다. 이들 기병의 유린에 견딜 수 있었던 곳은 고작 하북의 진정과 대명을 비롯한 몇 안되는 요새화된 도시뿐이었다. 몽골군은 산동성의 남쪽 끝인 북위 35도선까지 침략하였다. 황하에 부딪쳐 기병만 가지고서는 해협과 같은 넓은 강을 건널 수 없어 그 정도에서 끝난 것이었다. 결과로 금나라의 수도인 중도는 고립되었다.
몽골의 좌익군은 발해만을 따라 영평과 요서의 문턱으로 향하여 산해관에서 내륙쪽 여진족의 발상지인 만주북부 즉 흑룡강 및 송화강 일대를 평정하였다.
징기즈칸은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하고 만리장성쪽으로 돌아갔다. 이들 몽골군의 뒤에는 금은보화를 비롯한 고급 견직물을 실은 수레가 따랐으며, 말과 가축의 떼 그리고 수만 수천의 소년 소녀가 쇠사슬에 묶인 채 끌려갔다.
이렇듯 징기즈칸이 크게 승리하자 금나라에서는 자체 내부에서 붕괴할 징조가 나타났다. 송과의 전쟁에서 능력을 발휘하였던 여진족 장군 호사호가 북방 변경군의 지휘를 맡게되었는데, 1213년 8월 그는 비밀리에 금나라 수도로 돌아와 궁정반란을 일으켜 영제를 암살하였다. 그는 몽골군이 중도를 압박하고 있는 사이 영제의 조카 오도보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금나라의 혼란을 틈타 징기즈칸은 그해 가을 중도로 쳐들어갈 기세를 보였다. 이때 패전장군 술호고기가 도망하여 중도로 돌아왔으나 호사호에 의해 처형될 것을 두려워하여 그를 죽이고 그가 위소왕을 살해했다고 폭로하였다. 오도보는 술호고기의 패전을 용서하고 좌부원수로 다시 세우고 이어서 평장정사(재상)에 임명하였다.
화북과 요동 각지를 공격해 중도를 고립시킨 다음 1214년초 징기즈칸은 몽골 좌익군과 우익군을 합류시켜 중도 북쪽 교외에 둔영을 치고 중도 봉쇄작전에 들어갔다. 징기즈칸의 막료들이나 병사들은 곧장 돌격해 들어갈 것을 바랬으나 징기즈칸에게는 뾰족한 공성수단이 없었다. 금나라의 치열한 반격으로 포위기간이 길어지자 몽골군은 식량이 동이나 굶주리게 되었고 질병이 만연하기 시작하였다. 징기즈칸은 부족몰살에 가까운 참담한 정황을 침착하게 감추며 화친과 타협을 모색하였다.
징기즈칸은 “그대가 갖고 있던 산동과 하북의 군현들은 이미 모두 나의 땅이 되었다. 이제 그대는 오직 대도만을 붙들고 있다. 하늘이 마침내 그대를 쇠약하게 하시거늘, 나마저 그대를 궁지로 몰아버린다면 하늘이 무어라 하겠는가? 나, 이제 그만 군사를 거두려 하니, 그대는 우리 병사에게 먹을 것을 주어 우리 장수들의 분노를 달래줄 수는 없는가” 하였다. 금나라의 평장정사 술호고기는 “들으니 적의 병사도 말도 피로하다고 합니다. 이때를 타서 결전합시다”라고 하였지만 도원수(군사령관) 완안복흥은 “우리 군의 병사는 너무 급히 모아서 군인정신이 없습니다. 병사는 수도에서 군무에 응하나 가족들이 시골에 있어 신경이 모두 그쪽에 가 있습니다. 싸워서 진다면 새나 짐승과 같이 흩어져 도망합니다. 운이 좋아 이긴다고 해도 처자의 곳으로 가려고 할 것입니다. 누가 나라를 지킬 수 있습니까. 이래서는 결전을 할 수 없습니다. 숙고하여 사자를 보내어 강화하는 것이 좋습니다. 적군이 물러가면 뒤의 일을 다시 생각합시다”라고 하였다. 사나운 적의 대군을 눈앞에 두고 있는 황제 오도보로서는 그들의 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금나라는 몽골에게 공물로 위소왕의 딸, 기국공주와 그녀를 지키기 위한 장정 십인, 졸개 백인, 동남동녀 5백인을 붙여왔으며 비단옷 3천벌, 말 3천마리를 보내왔다. 몽골군은 군사를 되돌리고 완안복흥은 그들을 거용관 밖까지 전송하였다. 정복자는 전리품을 갖고 장가구 지방을 거쳐 내몽골 초원으로 돌아갔다. 징기즈칸의 계획은 금나라의 전멸이 아니고 군사상의 위협을 없앰과 동시에 경제상의 지원을 약속시키는 정도였다. 이 공물은 이후 매년 세폐로서 보내게 되었다. 이로서 금나라는 군사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쇠퇴하였다.
몽골군사들이 선물을 받고 만리장성을 넘어 돌아가자, 금나라 황제는 비로소 안도하였다. 우선은 그들의 말발굽 아래 짓밟히는 일을 모면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언제 다시 그들이 만리장성을 넘어올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몽골군이 떠나자마자 금나라 황제는 중도(연경)가 유라시아 초원과 너무 가까워 취약하다고 생각하여 수도를 개봉으로 옮기기로 하였다. 그러니까 휴전을 성립시킨 2달 후인 6월 그는 중도를 버리고 황하로 가로막혀 있는 하남성의 개봉으로 서울을 옮김으로서 천연의 요새인 황하에 의지한 셈이었다. 중도에 남아 지휘하는 자는 완안복흥과 석말진충이었다. 완안복흥은 승상과 도원수를 겸하고 정치, 군사의 최고책임자였으나 군사면은 이전에 서경을 몽골의 맹공에서 지켜낸 석말진충에게 일임하였다. 그는 평장정사(재상), 좌부원수란 직함을 가졌다.
천도가 금나라의 마지막 같은 인상을 주자 금나라의 무골들은 집단항명을 하였다. 오도보의 행렬이 중도 남쪽부근의 양향에 도착하였을 때 수행하던 금나라 군대 중 거란족-여진족의 군사들이 그를 버리고 몽골편에 붙어버렸다. 이들은 중도를 공격하면서 그와 함께 징기즈칸에게 원군을 요청하며 집단 투항하였다.
금나라의 천도는 두 마음이 있다는 증거였다. 징기즈칸은 노하여 1214년 가을 사무카와 석말명안의 총 지휘하에 행동을 개시하였다. 완안복흥은 개봉에 위급을 고하였다. 몽골군의 진군이 알려지자 많은 성밖의 사람들이 성안으로 피난하였다. 몽골의 전위 특수부대원들은 중국인 농부로 가장한 후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고 밤낮없이 달려왔다. 말들이 달리다 지쳐 쓰러지자 마지막에는 걸어서 중도로 들어가는 피난민 대열에 섞여 성문 앞에 도달하였다. 이들은 성문 앞에서 삼엄한 조사를 무사히 통과하였다. 군량을 가지고 오던 금나라의 증원군이 중도와 하간 사이의 패주에서 몽골군의 습격으로 격파되어 흩어지자 피난민으로 북새통을 이룬 중도는 식량이 동이나 인육을 먹는 형편이 되었다.
이윽고 몽골군이 중도로 접근하자 성문은 닫히고 파수병들은 방어태세로 들어갔다. 성안의 몽골 특수부대원들은 각 지역으로 흩어져 민가에 금나라군의 방어용 무기인 살상용 불기름으로 불을 놓기 시작하였으며 몽골군이 이미 시내까지 들어와 싸우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시내의 이곳 저곳에서 시커먼 불기둥이 타오르고 민심이 흉흉해져 사람들은 관가와 저자거리를 털기 시작하였다. 병사들도 자리를 이탈하여 약탈과 강도, 강간, 살인에 끼어들어 중도는 생지옥이 되었다. 절망한 중도 유수 완안복흥은 자결해버렸으며 석말진충은 부하를 데리고 탈출하여 개봉에 들어갔으나 패전의 책임을 물어 처형되었다.
거란족 출신인 석말명안은 몽골군을 이끌고 입성하였고 당시 장성의 건너편 드론 노르 호수가의 환주에서 더위를 피하며 머물던 징기즈칸은 자신의 양자인 시기 쿠두쿠를 보내 성내의 재물을 환수케 하였다. 그 뒤 중도는 한달 동안 약탈이 허용되었으며 수천명의 주민들이 죽고 도시전역이 화염 속에 소멸되었다. 당시 몽골인은 도시경제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으므로 금, 은, 보석의 약탈과 살육, 방화 등으로 도시를 파괴하였다. 10세기의 거란이나 12세기의 여진인은 최소한의 살육으로 왕조를 계승한 후 그들의 재산이 될 것은 파괴하지 않았으나 징기즈칸의 몽골인들은 무제한적 파괴만 있었다.
지금까지 금나라에 대한 몽골의 원정은 약탈전과 복수전의 성격을 띠어, 노예와 가축과 재물을 얻기 위한 유목민의 전투였다. 그러나 이제 거란과 한족출신 참모들의 영향으로 전쟁목적은 수정되었다. 징기즈칸은 금나라 황제에게 함락된 모든 영토의 할양을 요구하였고, 아직 함락되지 않은 하북과 산동의 모든 지역을 바칠 것과, 황제는 스스로 황제의 칭호를 포기하고 하남 왕일 것을 명령하였다.
황하의 북측지역은 무정부상태로 되어 대소의 무장세력이 자생적으로 일어났다. 또 중앙의 명령을 받을 수 없었던 지방의 군단들은 독립군벌로 변해갔다. 금나라의 고향 만주는 연락이 끊어져 속속 몽골에 집단 투항하였으며 몽골은 내몽골 초원과 예전 거란의 연운16주를 손에 넣었다. 금나라의 영역은 이제 그 새수도인 개봉 일원을 중심으로 섬서성의 일부 요새와 하남성 지역 정도로 축소되었다. 이리하여 금나라는 하남과 협서를 가진 지방정권으로 전락하였으며 몽골은 아시아 동방의 강자가 되었다.
징기즈칸은 이어 금나라의 왕을 끝까지 추격하여 그가 천도한 새로운 서울 하남성의 개봉까지 점령하려고 사무카를 보냈다. 그러나 개봉은 황하가 앞을 지켜 몽골의 기병으로는 정면공격할 수가 없었다. 사무카가 이끄는 몽골의 대부대는 서쪽으로 크게 우회하여 협서성에서 공격하기로 하였다. 1216년 말부터 1217년의 겨울 사무카의 몽골 대군은 중국의 로마라는 서안과 동관의 요새를 공격하였다. 이곳은 황하와 위수가 합류하는 관문으로 2,700m 높이의 험준한 화산이 그 입구를 막고 있어 화산 밑의 좁은 계곡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안 사무카는 다시 군대를 이동시켜 낙양방면으로 갔으나 절벽 등 험로로 해서 진군을 포기하고 그 대신 남쪽의 고산으로 빠져 낙양의 남쪽 성곽을 점령한 후 개봉 남쪽에 있는 평야로 진출했다.
이로서 금나라는 많은 병력을 모아 대비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으므로 개봉전방 4km 지점에서 그들은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히려 곤경에 빠질 지경이었다. 다행히 황하가 얼어 먼길을 우회하지 않고 그대로 강을 건너 회군하였다. 금나라는 이때부터 몽골군이 확보하고 있던 북경지역을 제외한 여러 성의 상당 부분을 수복하였다.
한편 무칼리는 요동으로 진격하였다. 그것은 거란인 석말야선이 여진족의 발상지에 가까운 요동의 동경을 점령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징기즈칸에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석말야선은 무칼리 군대의 일부를 지휘하게 되었고, 동경은 1215년 경기병의 급습으로 함락되고 말았다. 또 석말야선은 북경성의 방위를 위해 새로운 지휘관이 임명되어 부임해 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 단 2명의 기병을 데리고 신임 지휘관을 도중에 급습하여 죽인뒤, 그의 임명장을 빼앗아 성으로 들어가서 자신이 조정에서 새로이 임명한 지휘관이라고 하였다. 그는 초병들을 철수시키고 새로운 군관을 임명하였다. 그로부터 사흘 뒤에 무칼리는 무혈입성하여 10만8천을 헤아리는 민호와 10만명의 병사, 그리고 수많은 군량과 무기를 손에 넣었다. 이어서 오고륜, 인답호 등을 비롯한 47명의 장군들 및 32개의 성읍이 투항하였다. 이로서 무칼리는 투항한 거란족 및 여진족, 한인 무장 군벌들을 앞세워 지방자치와 같은 분할통치를 실시했다.
1211년부터 1215년까지 햇수로 5년에 걸친 금나라 침략은 몽골인에게는 거국일치의 전쟁이었다. 몽골제국 성립 후 이 작전으로 유목민들은 자신들이 대몽골국(에케 몽골울루스)의 백성이란 의식을 갖게되었다. 잡다한 유목민들을 모아 원정 6년 동안 단체생활을 통해 이들 유목민들이 몽골이라는 공통의식을 가지게 하였다. 또 자체 기술개량은 물론 선진기술 도입, 외국인 기술자 활용을 통해 전쟁 관련기술이 크게 향상되었다. 즉 몽골군은 투항한 금나라 야전군에게서 투석기나 대포, 초보적인 로케트 등 선진 공성 기술을 전수 받음으로서 호라즘 원정 때에는 한 차원 높은 전법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징기즈칸의 금나라 원정은 1211년에 시작되어 짧은 휴지기가 있었을 뿐 그가 죽을 때까지 지속되었으며(1227년), 그의 후계자 시대에 이르러서야 결말이 났다(1234년). 그 주된 이유는 몽골군은 기동력 있는 기병들로 지방과 무방비상태의 도시들을 파괴하는 데는 뛰어났으나, 중국인 공병들이 지키는 성채를 빼앗는 기술은 오랫동안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그들은 중국원정을 초원에서처럼 수행하였으니, 계속 공격하고도 전리품만 갖고 철수했기 때문에 금이 도시를 재점령하고 갈라진 성벽과 보루를 수축하여 요새를 재건할 만한 시간적 여유를 주었다. 그런 상황에서 몽골은 어떤 요새는 두세 번 다시 점령하여야 하였다. 몽골군은 적을 대량으로 학살, 추방하거나 집단적으로 징집하였는데 학살된 자들보다 그 자리를 차지할 주민들이 항상 넘친 북중국에서는 대량학살이 별 효과가 없었다.
똑같은 군사행동을 거듭해야 된다는 것을 알게 된 징기즈칸은 중국에 있어서의 군사행동 일체를 무칼리한테 일임, 그의 권위를 세워주기 위해 1217년의 가을 그에게 국왕 칭호를 내렸다. 징기즈칸은 금나라와 싸울 때 변절한 한족을 동원하고, 금나라에 밀려난 거란족 무장집단의 자발적인 협력이 있으면 많은 몽골기병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징기즈칸은 금나라에 대한 뒷일을 국왕 무칼리에게 맡기고 화약무기 진천뢰 등이 포함된 막대한 전리품을 가지고 몽골로 철수했다. 징기즈칸은 원래부터 정착민의 황제를 꿈꾼 적이 없었으며 그보다는 초원의 유목민인 투르크족과 페르시아인의 카간이 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이제 징기즈칸은 투르키스탄 정복을 위하여 병력의 대부분을 철수시켰고, 그가 떠난 뒤로 그의 장군들은 금나라의 군대를 격파하였으나 금나라를 붕괴시키지는 못하고 지구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금나라는 정예군단만 해도 최하 50만을 거느린 정착문명의 제1 대국이었고 몽골제국은 그때까지 겨우 10만의 기마병뿐이었다. 게다가 여진인인 금나라는 겨우 100년 전에 정주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수렵민의 피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따라서 공성전에 익숙치 못한 몽골인들은 중국인 공병들의 기술뿐 아니라 여진족 전사들의 용맹함에도 저항을 받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배가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금나라군은 자기들이 주둔한 곳만을 무대로 했고 몽골군은 전력을 아껴가며 금나라 군대의 일부를 선택해 싸웠다.
북중국에는 한인이 인구도 많고 경제, 문화면에서 압도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1213년 몽골의 침입에서 한인 사씨 일족이 몽골측에 가담하였다. 한인을 자기편으로 둘려고 하는 외교전의 승리자가 몽골제국이었다. 몽골군이 북중국에 침입하자 지방 유지인 사병직은 가족을 모아 상담하였다. “국가는 소란상태에 있는 이때 우리 가족 100명은 어떻게 자위할 수 있는가. 몽골은 항복하는 자는 벌하지 않는다고 들었으므로 귀순하자.” 그는 같은 마을의 노인과 어린이 수천명을 데리고 칸의 군영을 찾았다. 사병직은 노인이었으므로 장자 사천아가 일족을 통솔하게 되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원근에서 참가한 자들이 십여만 가구에 이르렀다. 사씨 일가는 대대로 의리를 중히 여기고 재산을 가볍게 보는 것을 가훈으로 하여 토착민의 절대적인 신망을 얻었다. 사천아의 모집에 응하여 1만명의 젊은이가 모였으므로 이것을 의용군으로 조직하여 몽골군에 협력하게 하였다.
사천아는 징기즈칸을 배알하여 당면한 여러 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개진하였을 때 칸은 모두 동의하였다. 또 그때 무칼리가 국왕이란 칭호를 받아 대금작전의 최고 지휘관으로 임명되어 몽골 중로군을 지휘하였다. 사천아는 그에게도 한마디하였다. “지금 중원은 거의 평정되었다. 그러나 몽골군이 가는 곳에는 약탈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것은 왕자다운 사람이 백성을 불쌍히 여겨 죄를 사하는 뜻에 반한다. 또 국왕은 칸의 명령을 받들어 천하를 위하여 횡포한 것을 없애는 입장에 있다. 그러나 이와 같아서는 횡포를 가지고 횡포에 답하는 것이 되지 않는가? 인민을 귀여워해 주는 것은 왕자의 책무이다. 그것을 하지 않는 자의 몰락은 빠르다.” 이후 사천아는 항복해온 금나라 장군의 배반으로 살해되어 동생인 사천택이 뒤를 이었다. 사천택은 징기즈칸 이후에도 오고타이나 쿠빌라이에 봉사하여 몽골의 중국지배에 힘을 바쳤다.
1216년 고비 북쪽으로 돌아온 징기즈칸은 몽골군을 둘로 나누어 한 부대를 이끌고 서쪽을 향하게 되었다. 참모장격의 야율아해는 징기즈칸과 같이 서쪽으로 가고 동생인 야율독화는 무칼리의 부장이 되어 동쪽으로 각각 나뉘었다. 징기즈칸은 잘라이르족 출신의 노장군 무칼리에게 태사, 국왕의 칭호를 주어 5투하라고 부르는 5개의 유력 부족집단 (잘라이르, 콩기라트, 이키레스, 우르우트, 망구트)을 위시하여 좌익중 24개의 천호와 새로 편성된 거란군 20개의 천호를 배속시켜 중국방면을 위임하였다. 몽골 정규군은 전체 병력의 절반인 2만 3,000명이고 나머지는 같은 수의 거란계 보조병이었다. 무칼리는 부족한 이들 병력을 이끌고 1217년에는 징기즈칸이 점령하지 못한 하북 남부의 거점 대명을 일시 탈취하였다. 또 1218년에는 산서의 도읍인 태원과 평양을 금으로부터 탈환하였고, 1220년에는 산동의 도읍인 제남을 탈환하였다. 그해 그의 부장은 황하 북부에 있는 하남성 창덕을 점령하였다.
무칼리는 1221년에 보안, 부주를 비롯한 섬서북부의 도시들을 빼앗고, 1222년에는 위수 남쪽 섬서의 옛 도읍 장안을 손에 넣었다. 1223년에 그는 황하 만곡부와 산서의 남서쪽 끝에 있는 중요한 요새인 하중(포주)을 기습 공격하여 빼앗았으나 기진하여 사망하였다. 무칼리는 중국에 대한 책임을 지면서부터 기병 외에 보병, 포병을 고용하여 조직적인 점령에 힘을 기울였으며 1223년 4월 사망할 때까지 몽골에 대한 탕구트와 금나라의 대규모 저항을 막아내는데 커다란 공을 세웠다. 이 7년 동안 끊임없는 전쟁 끝에 그는 금나라를 다시 하남성에 가두었다. 그가 죽은 뒤 하중은 다시 금으로 넘어갔다. 그리하여 인구가 과밀하고 천연의 요새로 꽉 들어찬 북중국의 전투는 끝없는 공성전으로 변질되었다.
거란의 독립운동
몽골과 금나라의 전투에서 몽골군의 우위는 요동지방에 영향을 주었고 그 영향은 또 금나라에 타격을 주었다. 몽골이 금나라를 공격하자 금나라는 피지배민인 거란족(키타이족)이 몽골과 내통할 것을 두려워하여 거란인 1호당 여진인 2호에 끼워 살게 하였다. 의심을 받는다고 느낀 거란족 약 10만이 1212년 거란제국의 왕족이었던 야율유가를 도원수로 하여 요동에서 독립을 선언하고 몽골군에 동맹을 요청하였다. 금나라가 직접 감시하는데 대한 공개적인 반란이었다. 몽골은 즉각 사자를 보내 야율유가와 교섭한 후 쌍방의 대표가 금산에 올라가 백색 말과 소를 제물로 바치고 북쪽을 향하여 활을 꺾는 동맹의식을 행하고 제베가 거느리는 군대를 파견하였다. 여기서 거란군과 제베의 군사가 합세해서 금나라 요양을 공략하게 되었다. 제베는 계략을 써 후퇴를 가장해서 주위에 복병을 남겨 두어 적이 안심한 틈을 타 일제히 공격하여 성을 함락시켰다.
1213년 춘삼월 금나라 완안호사는 본대를 이끌고 걸석열환단은 지대를 인솔하여 요동으로 진격하였다. 전장은 장춘 부근으로 금나라의 지대는 승리하였으나 본대가 패하여 금나라의 국경은 서북의 옹구트족 쪽과 마찬가지로 동북의 거란족 쪽으로도 무방비상태가 되었다. 금나라는 패장 완안호사에 대신하여 포선만노를 요동군의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포선만노는 야율유가를 공격하였으나 패하였으며 그의 부장격이었던 완안철가와도 대립하여 그를 처형하고 나서 이 죄를 물을까 두려워하여 남쪽 개봉으로 천도한 금나라에 반기를 들어 대진국을 세우고 스스로를 천왕이라 불렀다.
패전을 계속하는 금나라에 실망한 요동의 여진인은 포선만노의 독립을 지지하였다. 포선만노의 적은 야율유가의 거란 정권과 금나라의 장군 걸석열환단이었다. 포선만노는 금나라 군에 밀려 동북으로 후퇴하여 틀어 박혔다. 그후 포선만노 정권은 몽골에게 복속과 반역을 반복하였는데 징기즈칸의 아들 오고타이의 대에 멸망되어 요동에서 여진세력은 사실상 사라졌다.
한편 야율유가는 무칼리와 함께 케룰렌강 부근의 둔영지에서 징기즈칸을 만났다. 징기즈칸은 야율유가가 의를 따라 돌아왔다고 기뻐하며 그를 요동왕으로 공식 인정하고 그를 보좌하는 몽골인 부왕을 두었다. 위그르와 함께 거란은 몽골에 합류함으로서 몽골제국 안에서 자치권을 얻었다. 그의 부하들은 그에게 제왕을 칭하라고 권하였으나 신중한 그는 이것을 물리치고 죽을 때(1220년)까지 몽골에 충성하였다. 그러나 이에 불만을 품은 자들은 따로 자립하였지만 70여일 후 야율유가-몽골 연합군에게 토벌되었다.
금나라는 고려에 사신을 보내 거란족이 살길을 찾아 고려로 몰려들면 잡아서 금나라로 보낼 것, 자국의 군사를 출동시켜 이들을 공격하였는데 양식과 말이 모자라니 고려에서 빌려줄 것 등을 요구하였다. 금나라는 연이은 전쟁과 흉년으로 식량이 모자라 고려에 와서 곡식을 사갔는데 정부에서는 이를 엄중하게 막고 있었다. 고려는 요구를 거절하는 뜻으로 회답을 보내지 않았다. 이제 고려와 금나라는 동지도 아니었고 군신관계는 더더구나 아니었다.
드디어 1216년(고려 고종 3년) 몽골과 금나라 양쪽에서 쫓기던 거란 유민 9만명이 압록강을 넘어왔다. 거란인들은 처음에는 곡식과 살 터전을 요구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자 침입한 것이었다. 거란 유민들은 가족을 데리고 다녔다. 이들은 산과 들에서 지내며 매우 굶주렸던 터라 지나오는 고을에서 곡식과 가축 등을 마구잡이로 약탈하였다. 이들은 별다른 방비도 하지않은 평안도 일대로 거침없이 밀려 들어왔다. 이때에야 고려 최씨의 무신정권은 별초군 100명과 신기군 40명을 보내 지방군과 합세하여 토벌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거란 유민군은 계속 남쪽으로 밀고 들어와 경기도 일대에까지 진출하였다. 이들은 묘향산으로 들어가 유서깊은 보현사를 불태우는 등 방화, 약탈을 저지르다 고려군에 쫓겨 가족들을 내버리고 달아났다. 그 뒤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서경과 황해도 주변에서 노략질을 하였으나 고려에서는 제대로 막아내지 못하였다. 거란 유민군이 개경으로 쳐들어 올 것이라는 보고를 받은 최충헌은 일부 군사만으로 시가지 방위를 담당하게 하고 수만명의 군사를 자신의 집을 방어하는데 돌렸다.
개경 주위로 침투한 거란 유민군은 작은 규모로 개경에 들어오기도 하였고 남쪽으로 내려가 강원도 원주와 충청도 제천까지 진출하였다. 김취려가 이끄는 고려군이 맹렬한 공격을 퍼붓자 이들은 박달재로 후퇴하였다. 고려군은 박달재에서 이들을 격파하였다. 거란 유민군은 더 버티지 못하고 대관령을 넘어 강릉으로 도망쳤다가 고려군이 계속 추격하자 함흥 쪽으로 달아났다. 이들의 근거지는 간도지방과 두만강 아래 함경도 땅이었으므로 고려군은 추격을 멈추었다. 이들은 다음 해에 또 침입하여 황해도 일대를 노략질하였다. 고려는 조충을 서북면 원수로 김취려를 병마사로 삼고 군사를 정비하였다. 고려군은 거란 유민군을 황해도 서흥에서 격파하고 대동강 언저리에 있는 강동성까지 추격하였다. 고려군은 이들의 유격전에 지칠대로 지쳐 있었고 거란 유민군은 강동성에 들어가 굳게 지키면서 나오지 않았다.
1219년(고종 6년) 사태를 지켜보던 몽골장군 카치운이 몽골군 1만과 포선만노의 대진군 2만을 이끌고 거란 도둑을 몰아내겠다고 큰소리치며 고려로 들어왔다. 두 나라 연합군은 맹산, 순천 등의 성을 손쉽게 함락시키고 강동성으로 나왔는데 마침 큰 눈이 내려 군량길이 막혔다. 카치운은 강동성을 포위하고 있는 고려군 원수 조충에게 편지를 보냈다. 조충은 군사 1천명을 딸려 쌀 1천섬을 실어 보냈다. 카치운은 뒤이어 강압적으로 고려군사를 더 보충하라고 하였다. 김취려는 정병을 이끌고 갔는데 카치운은 이들에게 징기즈칸에게 절하게 하고 김취려와 조충과는 형제를 맺었다. 다음날 아침 세나라 연합군은 강동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거란 유민군 총지휘자인 함사는 목을 매었으며 군졸과 아녀자 등 5만이 나와 항복하였다. 고려는 몽골과 동진국과 협력하여 거란의 유민을 물리쳤으나 몽골과는 형제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해마다 공물과 사신을 보냈다. 이렇게 해서 2년 5개월 만에 거란 유민군의 소란은 끝났다. 카치운은 거란의 책임자 100여명을 죽이고 포로가 되었던 고려인 200여명과 거란 부녀자 등 700여명을 고려에 주고 나머지는 몽골로 데려갔다. 카치운이 서둘러 몽골로 돌아간 이유는 징기즈칸이 서역원정에 나섰기 때문이었다. 이번 전투를 치르면서 몽골군은 정복국에서 으레 벌이는 약탈을 저지르지 않았고 개경으로 군대를 이끌고 오는 일도 삼갔다. 아무리 세계 최강의 군대라지만 1만명의 군사로는 고려군을 상대하기가 벅찼을지도 모를 일이다.
서요(카라키타이)와 중앙아시아 정복
징기즈칸은 1216년 자신의 숙적이던 메르키트족 톡토아의 동생 호두가 부민들을 모아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몽골본토로 돌아왔다. 1217년 메르키트족에 대한 출정 준비가 완료되자, 그는 수베테이와 토쿠차르에게 메르키트족을 전부 죽여버릴 것을 명령하였고 이에 따라 패배한 메르키트족은 톡토아의 막내아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살해되었다. 이어서 삼림민이던 호리 투마트족에 대한 원정을 감행하였다. 코르치는 자신의 예언대가로 징기즈칸으로부터 투마트족 출신의 미녀 30명을 차지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고 투마트족 정벌에 나섰으나 거기서 거꾸로 그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에 징기즈칸은 삼림민의 행태를 잘 알고있던 오이라트족의 수령 쿠두카를 보냈는데 그 역시 포로가 되었다. 이렇게되자 징기즈칸은 보로쿨을 보냈다. 그는 본대와 떨어져 앞서가다가 밤중에 투마트초병의 급습을 받아 살해되고 말았다.
분노에 찬 징기즈칸은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보로쿨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하려하였으나, 주위의 만류로 되르벤족 출신의 한 장군을 뽑아 엄격한 지시를 내리고 영원한 하늘에 대해 기도를 올린 뒤 출정시켰다. 투마트족은 잔치를 벌이던 도중 습격을 받아 패배하였고, 투마트족 수령의 둔영에 잡혀있던 코르치와 쿠두카는 풀려나게 되었다. 코르치는 약속대로 30명의 미녀를 차지하였고, 쿠두카는 투마트족 수령의 부인인 보도쿠이 타르쿤을 차지하였다. 또 100명의 투마트인이 보로쿨의 장례식에 바쳐졌다.
투마트족에 대한 원정시 몽골군에게 원군을 보내기를 거부한 키르기즈족 등 삼림민들의 독립의지를 완전히 꺾어놓기 위해 징기즈칸은 큰아들 주치를 보냈다. 주치는 쿠두카가 오이라트가 있는 곳을 안내하자 시크시트에서 그들을 복속시켰다. 그뒤 주치는 오이라트, 부리야트를 비롯한 다른 삼림부족들을 차례로 정복하였고 키르기즈도 굴복시켰다. 복속한 부족의 수령들은 충성의 표시로 하얀 말과 하얀 매 그리고 검은 담비털을 가져왔고, 주치는 오이라트와 키르기즈의 수령들을 데리고 돌아왔다. 징기즈칸은 쿠두카의 봉사에 대한 대가로 그의 아들들에게 황녀들을 아내로 주었고 주치에게는 삼림민을 주고 다음과 같이 칭찬하였다. “나의 큰아들이여, 너는 처음으로 집을 나서서 일을 아주 잘 끝냈다. 너는 행운의 삼림민들을 복속시킨 뒤 그들의 말과 사람을 해치지도 않고 무사히 돌아왔다.”
징기즈칸의 적중에 유일한 생존자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나이만족 타양칸의 아들인 쿠출루크였다. 그는 이르티쉬 강가에서의 패전 이후 고향땅인 알타이에서 아버지와 백성들을 잃자 메르키트의 잔당들과 함께 동투르키스탄으로 갔지만 위그르의 이디쿠트인 바르축에게도 몰려 서요(카라키타이)의 군주 구르칸에게로 도망쳤다. 중앙아시아의 투르키스탄은 징기즈칸 침입 이전에 서위그르, 서요, 호라즘 등 세 왕국이 통치하고 있었다. 투르크계 왕조 서위그르는 톈산(천산)산맥 동쪽의 동투르키스탄에, 서요는 탈라스 지방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고, 호라즘은 이란화된 투르크계 왕조로서 서투르키스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서요(카라키타이)는 중국의 거란이 1125년 멸망한 후 거란족의 지도층이 서진, 톈산북로를 통과하여 돌궐(투르크)계 칼라한 왕조를 멸망시키고 그 땅에 왕조를 재건한 것이다.
쿠출루크는 구르칸의 신임을 얻어 그의 딸을 부인으로 맞아들였고, 부인의 영향으로 네스토리우스교를 버리고 불교도로 개종하였다. 궁정 내에서 그의 영향력은 점점 커지고 야심도 늘어가자 그는 몽골고원에 흩어져버린 자신의 부족민을 끌어 모으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지금까지 서요에 조공을 바친 호라즘의 술탄 무하마드가 구르, 가즈나, 호라산, 이라크, 그리고 투르키스탄의 일부를 정복하여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자 더 이상 조공할 것을 거절하고 쿠출루크와 함께 동서에서 동시에 구르칸을 공격하여 서요의 영토를 분할하기로 비밀리에 합의하였다.
1210년 호라즘이 적대행위를 하자 서요는 거세게 반격하여 사마르칸드를 점령하였다. 그 사이 이리 지역에서는 쿠출루크가 반란을 일으켜 페르가나의 우즈겐에서 국고를 약탈하고 서요의 수도 발라사군으로 진격하였다. 쿠출루크는 이 전투에서 패배하였지만 술탄이 서요의 군대를 크게 이기자, 구르칸에게 봉사하던 사람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투르키스탄의 일부를 장악하였다. 1211년 구르칸은 기습을 당해 쿠출루크의 포로가 되었으나 그는 2년간 장인의 이름으로 통치하였다. 이후 실권을 차지한 쿠출루크는 국경문제로 호라즘과 대결하게 되었다. 쿠출루크는 나이만 잔당을 모아들여 군대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쿠출루크는 중앙아시아에서 티베트산맥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여 몽골국에 진입할 태세를 갖추었다. 서요의 이러한 소식에 징기즈칸은 군대를 보내기로 하였다. 그는 몽골에게는 위험인물이었으므로 처치해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갓 불교도가 된 그는 이슬람 신도들을 증오하여 신자들을 박해하고 공개적으로 예배를 올리지 못하도록 하는 한편, 호탄의 종교지도자인 알라웃딘을 마드라사(종교학교)의 문에 십자가로 처형하였다. 1218년 제베의 지휘하에 2만명의 군대가 쿠출루크가 머물던 카쉬가르 근교에 나타났다. 발라사군과 오늘날의 세미레치에 지역은 아무런 저항없이 몽골군에 투항하였다. 제베는 군대를 가장 엄격한 기율로 통제하였으며 모든 약탈을 금하였다. 제베는 주민들에게 어떠한 종교를 신봉해도 좋고 자기 선조들의 믿음을 따를 수 있다는 징기즈칸의 칙령을 선포하였다. 그동안 종교적인 박해를 받고 무거운 세금 속에서 신음하던 토착민들은 몽골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하였다.
쿠출루크는 파미르쪽으로 달아났으나 파미르 산속에서 제베의 부하들에게 붙잡혀 사리콜강 부근에서 살해되었다. 제베와 자파르 호자가 쿠출루크의 머리를 매달고 각도시의 성문에 다다르자 주민들은 환영하였다. 이로서 동투르키스탄 전지역, 즉 이리, 이식쿨, 추, 탈라스 지역은 몽골에 합병되었다. 쿠출루크 원정의 결과 몽골인들은 호라즘의 술탄군대와 직접 접촉을 갖게 되었다. 이제 아시아 내륙은 동부의 몽골, 서부의 코라즘 두 제국의 통치하에 놓이게 되었다.
몽골은 금나라의 거란족으로부터 중국지배의 시야와 의욕을 갖게 되었고 서요의 거란족으로부터는 중앙아시아 서쪽지방의 실마리를 얻게 되었다. 몽골인들은 서요를 점거함으로써 몽골리아와 현 이란 북동부 오아시스 지역인 호라즘 간의 교통이 한결 수월해져 페르시아의 정착사회 문물이 유입되게 되었다. 거란인들은 군사, 정치면에서 몽골의 교사로서 새로운 몽골이 되었다. 즉 순몽골족에게 동서 거란이라는 신몽골족이 더해진 몽골군이 호라즘국을 침공하였다.
서요를 지나 그 서쪽에는 무슬림의 땅 다르알 이슬람이 있다. 아랄해로 흐르는 시르다리아강 하류의 비옥한 이 지역을 차지했던 셀주크제국은 1157년 산자르의 사망 이후 쇠락하여 셀주크 술탄이 임명한 지방총독이 독립하였으며 서요에 종속하였다. 이 호라즘샤 가문은 1194년 급속히 세력을 확장하여, 15년 사이에 페르시아 일대의 대부분을 차지하였고 1210년에는 내분으로 약화된 서요에서 아무다리아강과 시르다리아강 사이의 대오아시스지대를 제압한 후 수도를 우르겐치(히바)에서 사마르칸드로 옮겼다. 이어 1215년에는 골조 술탄들이 있는 아프가니스탄의 산악지대를 점령하였고 이란 방면에서 실권회복 중이던 바그다드 칼리프정권 압바스조를 압박하였다.
이제 이 군사정권은 북으로는 아랄해에서 남으로는 페르시아만까지, 동으로는 파미르고원에서 서로는 자그로스산맥에 이르러, 대부분의 내륙아시아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이란 땅 전부를 차지함으로서 실크로드의 중심부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호라즘은 이슬람세계의 패권자가 된지 얼마 안되었기 때문에 정치적으로는 불안정하였다. 체제안정에 장기간의 휴식이 필요했던 것이다. 제국군대는 키르기스 초원의 구즈나 캉글리의 여러 부족에서 모은 용병들이었으며 정착 이란인과 유목 투르크족 사이에는 끊임없이 분쟁이 있었다.
금나라가 몽골에 짓밟힌 소식은 호라즘샤에게도 전해졌다. 그는 소문을 확인하고 몽골의 군사력에 대한 정보를 탐지하려 징기즈칸에게 사절단을 보냈다. 징기즈칸은 이들을 군영에서 맞아, 자신이 해뜨는 곳의 군주이고 호라즘샤를 해지는 곳의 군주로서 친선을 다짐했지만 알라의 사도인 호라즘샤와 야성의 화신인 징기즈칸의 대결은 불가피하였다. 메르키트 잔당을 추적하던 몽골군과 호라즘 군대 사이에는 당시 소규모 무력충돌이 있었으나 징기즈칸은 이를 피하였다. 그는 총사령관인 주치에게 호라즘과의 마찰을 피하고 전리품도 가능한 한 양보하도록 하였다. 당시 몽골은 새로운 점령지역의 정지작업과 몽골의 행정체제 수립에 바쁘던 때라 분쟁을 바라지 않았다. 주치의 화해제의에 호라즘샤는 “모든 우상숭배자들은 나의 적이다. 징기즈칸이 싸우지 말라 했더라도 알라께서는 너와 싸우라 하였다. 칼이 조각 나고 방패가 산산이 부서질 때까지 싸우자”하였다. 전투는 하루종일 이어졌으나 몽골군은 호라즘군이 두 배나 많아 간단히 처리할 수 없음을 알고 밤을 기다려 철수하였다.
호라즘을 정복하고 제국을 건설하다
금의 수도를 함락한 후 1216년 몽골로 돌아온 징기즈칸은 그가 없는 틈을 타서 그가 복속시켰던 부족들, 특히 나이만족의 반란이 점차 조직적으로 발전하는 것을 느꼈다. 이들 반란세력은 호라즘의 간접지원을 받고 있었다. 징기즈칸은 1216년부터 2년간 전 몽골군에게 휴식을 주어 다음의 원정준비를 시켰다. 서방으로는 첩보, 계략을 목적으로 하는 통상단을 보냈다. 이즈음 중앙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왕래하는 대상들은 여행을 통해 지리적인 특징, 군대의 배치, 주민들의 분위기, 궁정내의 당파 등에 대해 매우 유용한 정보를 서로 주고 받고 있었다.
1218년 호라즘의 교역 사절단이 징기즈칸을 방문하자 그는 답례로 낙타에 귀중품을 실어 450명의 사절단을 보냈다. 이들은 호라즘 땅 오트랄에 도착하면서부터 징기즈칸의 권위와 종교적인 관용, 몽골군의 강인함, 그리고 반항하는 자들이 받는 비참한 처벌에 대해 주민들에게 선전하고 다니자 국경 수비대장 이날축은 이들을 스파이 집단으로 몰아 모두 죽였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징기즈칸은 몽골의 특명사절을 보내 이를 따졌다. 그러나 호라즘샤는 그 중 1명을 살해하고, 다른 사람의 수염을 밀어버리고 쫓아냈다. 몽골인들은 전쟁과 외교를 같은 무게로 보았으며 사신의 처형은 곧 전쟁을 의미하였다.
호라즘(Khwarezm)은 1077년에 아무다리야강 하류 유역, 지금의 히바에 세워져 1231년까지 존속했던 국가였다. 셀주크왕조의 부장(部將) 아누시티긴의 아들 쿠트브 웃딘 무하마드(재위 1097~1127년)가 술탄에서 독립하여 우르겐치를 수도로 호라즘을 건설하였다. 아라비아인은 후와리즘이라 부르고 원(元)나라 사서에는 화자자모(花刺子模)라 기록되어 있다. 그 후 동방의 서요(西遙)와 연합하여 이란, 아프가니스탄으로 진출하여 대국이 되었다.
원정에 앞서 징기즈칸은 만일의 경우를 대비하여 쿠릴타이에서 후계자 문제를 정리하기 위하여 징기즈칸이 큰아들 주치를 부르자 둘째아들 차가타이가 불같이 나오며 “아버지는 이 더럽고 추잡한 메르키트 개자식에게 제국을 넘기려는 것입니까?”라고 외쳤다. 그러자 얼굴이 벌개진 주치는 “아버지가 아직 아무 말씀도 없으신데 무슨 말을 하고 있는가?”라고 화를 냈다. 두 왕자가 멱살을 붙잡고 맞붙어 싸우게 되자 주위의 친족들과 장군들이 이들을 뜯어 말렸다. 주치의 계승은 분쟁을 낳게될 것이 확실하였다. 장내가 겨우 진정되자 징기즈칸이 입을 열었다. “주치를 왜 나쁘게 말하는가? 큰아들은 주치가 아닌가? 앞으로 그런 말을 해서는 안된다”라고 질책하였다. 차가타이는 바로 밑동생 오고타이 곁으로 가면서 대답하였다. “큰 아들인 주치와 저 둘은 앞으로도 아버지께 힘을 보태겠습니다. 3남인 오고타이야 말로 마음이 넓으니 그를 후계자로 하십시오.” 차가타이의 말에 징기즈칸은 “주치도 의견을 말하라”하자 “저도 한마음으로 아버지께 힘을 바치겠습니다”라 하였다. “오고타이의 의견은 어떤가?” “황망하오나 저는 진력을 다하겠습니다.” 일찍이 징기즈칸은 “규범과 지혜를 배우려는 자는 차가타이에게 가고, 관용과 은사, 그리고 부귀를 구하는 자는 오고타이에게 가라. 용기와 명예, 그리고 불퇴전의 정복의지를 찾는 자는 톨루이를 따라라” 하였다. 징기즈칸은 후계자로서 능력보다는 포용력이 있는 오고타이에게 제국을 맡기기로 하였다. 이로서 징기즈칸은 주치가 메르키트의 피를 받았다는 것을 겉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주치는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들쑤시는 차가타이에 대하여 두고두고 한을 품게 되었다. 차가타이도 후계자를 논할 때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격하게 충돌한 이후 주치를 전과 같이 대하기가 힘들었다. 두 사람은 마음속에 커다란 응어리를 갖게 되었다.
1219년 징기즈칸은 전투규범과 수칙을 포고하고 후계자로 셋째 아들 오고타이를 뽑은 후 한족과 거란족 등의 징발병력과 위구르 등 지원병력을 합쳤다. 징기즈칸은 막내동생 테무게 옷치긴에게 몽골고원을 맡기고 호라즘 정벌에 나섰다. 그해 여름 몽골군은 이르티쉬 강변에 집결하여 병사들의 식량조달을 위하여 대규모 집단수렵을 실시하였다. 시르다리야와 아무다리야 등 거대한 강으로 둘러싸인 호라즘을 공격하기 위하여서도 도하훈련이 필요하였던 것이다. 징기즈칸은 그해 가을 발하쉬호 남쪽 오트랄 지방 카얄릭에 도착하였으며, 카를룩의 군주 아르슬란 칸, 알마릭의 새로운 군주 수크낙 티긴, 그리고 이디쿠트인 바르축으로부터 복속민의 병력을 충원, 보강하였다. 이때의 몽골군은 10여만이었다. 징기즈칸의 군대는 수적으로 적었으나 엄격한 군율에 의해 잘 훈련되고 통제되어 있었으며 이들은 탁월한 장군들의 지휘를 받았다.
원정 도중에도 그는 위장 서신 등으로 호라즘 지배층을 이간시키고 회유와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주민들의 저항의지를 마비시킴으로서 병력손실을 줄이려 하였다. 징기즈칸은 대상들을 이용해 호라즘의 지리적 특징, 군대배치도, 군인들의 사기, 주민동정 등에 관한 정보를 수집하는 한편 몽골의 칸은 하늘이 내린 사해의 군주라는 말과 몽골군이 전쟁에서 저항한 자를 어떻게 처형했는지 소문을 퍼뜨렸다. 호라즘의 군대는 그 태반이 킵착과 캉그리의 용병이었다. 이들은 킵착과 캉그리의 왕녀이며 호라즘샤의 어머니인 타르칸 카툰에게 더 충성하였다. 따라서 병력을 집결시키면 캉그리족에 의한 군사쿠데타 가능성이 있었다.
징기즈칸은 타르칸 카툰에게 “당신은 호라즘샤가 마구잡이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잘 알 것이다. 나는 그와 전쟁을 하겠으나 당신은 공격하지 않고 호라즘과 호라산, 그리고 거기에 속한 아무다리아강 북방의 땅을 주겠다”고 한 후 호라즘샤와 그녀 휘하의 투르크군을 이간하기 위하여 그녀의 지휘관들이 징기즈칸에게 봉사할 것을 바라는 편지를 가짜로 만들어 호라즘샤의 손에 들어가도록 하였다. 호라즘샤는 토착영주들과 지휘관들에 대한 불신 속에 전쟁을 치뤄야 했으므로 병력집결보다는 제국전역 각 도시마다 분산 배치하는 전수방위를 택하였다. 즉 그는 군대를 시르다리아강 전선과 트란스옥시아나의 여러 거점에 분산 배치하였다.
전 몽골군은 먼저 시르다리아강 중류 오트랄로 진입한 후 네개 군단으로 나뉘어 곳곳에 늘어서 있는 호라즘의 변방도시들을 공격하는 동시에 수도인 사마르칸드로 진격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사마르칸드를 함락시킨 후에는 다시 후방에 있는 변방 도시들을 일시에 공격한다는 제2전략도 마련하였다. 그 전략에 따라 네개 군단은 사마르칸드에서 만날 날을 기약하며 부여받은 지점들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몽골의 공격은 잘 통제되어 미리 정해진 계획에 따라 호라즘 국경선의 도시, 요새를 착실히 포위 함락시켰다.
먼저 큰아들 주치군은 오트랄에서 시르다라아강을 따라 하류로 내려와 아랄해로 들어가는 곳에 있는 젠드와 시그낙으로 향하였다. 젠드의 백성들은 투항했고 시그낙의 백성들은 저항하였다. 주치의 군대는 시그낙을 공격하여 성벽을 완전히 파괴한 후 2차 집결지인 사마르칸드로 향하였다. 시르다리아강 상류로 파견된 5,000명의 몽골군은 바나카트(타쉬겐트 서쪽)를 취하고 코젠드를 포위하였다. 이 고장의 지사인 정력적인 티무르 말릭은 대담한 방어전을 펼쳤지만, 결국 작은 배로 시르다리아강을 따라 도망쳤다.
두 아들 차가타이와 오고타이가 이끄는 몽골군은 강변에 건설된 난공불락의 성채인 오트랄을 포위하였으나 오트랄의 주민들은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전투는 6개월간 지속되었고 치열한 공방전 끝에 오트랄은 함락되어 재건될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고 이날축과 주민 모두가 학살되었다. 파괴를 마친 그들은 2차 집결지인 사마르칸드로 말머리를 돌렸다. 마지막으로 징기즈칸과 막내아들 톨루이가 이끄는 중앙군단은 사마르칸드의 배후에 있는 부하라를 향하였다. 사실 다른 기마군단은 이 중앙군단이 대 우회 작전을 펴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도록 호라즘의 관심을 유도하는 역할도 하고 있었다.
1220년 2월 징기즈칸 자신은 막내아들 톨루이와 함께 주력군을 이끌고 곧바로 키질쿰 사막을 지나 부하라로 진격하였다. 몽골군이 갑자기 출현하자 투르크 수비대는 공성군의 포위망을 뚫고 탈출하였으나 아무다리아 강변에서 전멸 당하였다. 400명의 투르크 병사들만 남아있던 성은 기습 점령되었으며 수비대 전원이 살해되었다. 주민들은 성밖으로 끌려나와 다른 도시를 공략할 때의 화살받이로 이용되었다. 도시는 철저히 약탈되었고 도시전체를 불태워 시내에 숨어있던 주민들은 모두 죽었다.
이어 징기즈칸은 사마르칸드로 향하였다. 이 도시를 공격하기 전 징기즈칸은 오트랄을 함락한 두 아들 차가타이, 오고타이와 합류하였다. 이미 호라즘샤는 1220년 4월 사마르칸드에서 아무다리아강을 건너 서쪽으로 작전상 후퇴하였다. 몽골군을 아무다리아강의 남쪽이나 서쪽으로 끌어들인 후 장기 게릴라전을 펼쳐 공성전에 약한 유목민이 철수할 때를 기다려 한꺼번에 반격한다는 것이었다.
사마르칸드에는 11만에 이르는 많은 투르크와 타직 병사들이 소집되어 당시 사람들은 이 도시를 함락하려면 수년이 걸리리라 생각하였다. 그러나 영향력 있는 대상들과 종교지도자들은 전쟁에 반대하였다. 투르크 군대는 코끼리를 투입한 뒤 공격에 나섰으나, 거짓으로 퇴각하다 급습하는 몽골군에 의하여 포위 격파되고 말았다. 징기즈칸은 이 요새로 4일간 수많은 인간방패를 돌진시켰다. 드디어 성채를 방위하던 캉글리족에 속한 투르크인 병사들 3만명이 항복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처형되었으며 사마르칸드는 철저히 약탈당하였다. 부하라의 경우와는 달리 사마르칸드의 무슬림 종교지도자들은 저항하지 않아 대부분 구제되었다.
주민들은 먼저 성밖으로 끌려나갔으며 몽골군은 그들 가속 5만명의 목숨을 살려주는 대가로 금화 20만 디나르를 요구하였다. 또 6만명에 달하는 기술자들을 사로잡아 공성포의 제조와 관련된 3만명은 성을 공격할 때 대포를 발사하는 회회포 군단으로 편성하였다. 나머지 3만명에 달하는 장인들은 왕공과 공주 그리고 장군들에게 분배되었으며 사마르칸드의 인구는 4분의 1로 줄었다.
사마르칸드의 함락으로 전쟁의 승패는 결정되었다. 제베와 수베테이에게 쫓긴 호라즘샤는 추격을 피해 이곳 저곳으로 떠돌게 되었다. 타르칸 카툰 역시 마잔다란의 조그만 요새에 피신했으나 4개월간에 걸친 몽골군의 포위로 식수가 떨어져 항복하고 말았다. 호라즘샤의 자식들은 처형되었고 여자들은 분배되었으며, 타르칸 카툰은 몽골에 있는 징기즈칸의 본영으로 이송되어 모욕 속에 살게 되었다.
1220년 가을부터 징기즈칸은 새롭게 편성된 회회포군단과 정복지에서 모집한 보병을 이용하여 호라즘의 다른 도시들을 비교적 쉽게 함락시켰으나 호라즘의 옛 수도 우르겐치는 징기즈칸의 두 아들 주치와 차가타이가 매달려 공격을 했으나 6개월이 지나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징기즈칸은 사태의 진상이 두 형제간의 갈등임을 파악하고 오고타이를 총대장으로 보내 포위작전을 총 지휘하게 하였다. 오고타이는 먼저 형들의 불화를 해소하고 군대의 규율을 회복한 후 1221년 4월 성벽을 타고 넘어 성내로 들어가 함락시켰다. 이것으로 오고타이야 말로 몽골제국을 통치할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는 기회가 되었다.
주치는 모든 시민들에게 성밖으로 나가라고 명령하였다. 공예가와 기술자들은 따로 한 무리를 만들어 정렬시켰다. 그런 후 일반시민들은 몽골군의 각부대 사이에 분배되어 칼, 도끼, 활로 학살되었다. 이 학살을 면한 자는 노예가 된 젊은 여자와 어린이들뿐이었다. 이후 몽골군은 시내를 약탈하고 아무다리아강의 제방을 무너뜨려 시내에 숨어있던 자들을 익사시켰다. 이리하여 우르겐치는 완전히 폐허로 되었다. 결국 몽골은 1년반 사이에 트랜스옥시아나에서 호라즘 세력을 몰아냈다. 이 전쟁에서 영웅적인 행위는 호라즘에 많았으나 조직과 지휘의 통일성 그리고 규율에서 몽골이 크게 우세하였다.
몽골군이 트랜스옥시아나를 정복하는 동안 호라즘샤 무하마드 2세는 발흐로 도망쳤다가 서부 호라산의 니샤푸르로 피신하였다. 계속하여 그는 자기 영토의 반대편 끝인 이라키아잠의 서북부 카즈빈으로 내달렸다. 징기즈칸은 제베와 수베테이가 지휘하는 기병 분견대로 그를 추격하도록 하였다. 제베와 수베테이가 접근하자 발흐는 투항하여 위난을 면하고 통치자를 영접하였다. 한시가 급한 제베는 니샤푸르도 위임통치 정도로 상황을 끝냈으나 수베테이는 투스(마쉬하드), 담간, 삼난을 약탈하였다. 두 장군은 계속 무하마드를 추격하여 이라키아잠으로 들어가 라이를 공격한 후 남자들은 모두 죽이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삼았다. 이어 하마단을 전력 질주하여 통과한 후 카룬에 이르러 무하마드 2세를 잡으려다 놓치자 그들은 분풀이로 잔잔과 카즈빈을 파괴하였다. 무하마드 2세는 카스피해의 작은 섬 아베스쿤으로 도망쳤다. 몽골군은 카스피해 연안에서 배를 만들어 그를 추격할 채비를 갖추었으나 무하마드 2세는 이미 거기서 지쳐 죽었다.
호라즘샤의 죽음으로 전쟁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호라즘샤 무하마드 2세의 후계자 자랄 알딘 망구베르티는 나사에서 몽골군의 포위망을 뚫고 도망쳐 트랜스옥시아나와 호라산의 재난에서 벗어났다. 그는 호라산을 거쳐 아프가니스탄 산중의 가즈니로 피신하여 새로이 군대를 조직하였다. 자연 전장은 동부이란의 호라산과 아프가니스탄으로 옮겨졌다. 징기즈칸은 1221년 봄 아무다리아강을 건너 호라즘 잔당이 있는 아프가니스탄과 호라산을 정복하기 위해 나섰다. 징기즈칸은 칙령에서 해가 뜨는 곳에서 해가 지는 곳까지 지구상의 모든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았음을 천명하고, “누구라도 항복하는 자는 그의 처자식과 집안 사람들을 살려줄 것이지만, 항복하지 않으면 처자식은 물론 친족 모두를 몰살시킬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사전조사 없이 도망하는 호라즘군을 쫓아 발을 들여놓은 몽골군은 엄정하지 못하여 주민들을 많이 해쳤다. 몽골군은 발흐를 점령하였는데 그곳 주민의 항복에도 그 도시를 파괴하였다. 우르겐치 함락과 같은 시기에 톨루이는 7만의 군사를 이끌고 메르브를 공격하였다. 시내의 수비대는 돌격을 하였으나 포위군에게 쫓겨 되돌아왔다. 성장은 스스로 톨루이의 막사에 찾아가 항복하였으나 같이간 사람들과 함께 결박되었다. 이어서 몽골군은 시내에 들어가 전 주민을 성밖으로 몰아냈다. 주민들은 남과 여 그리고 노인과 어린이로 나뉘어 몽골군의 각부대에 분배되어 울부짖음 속에서 모두 학살되었다. 목숨을 건진자들은 노예로 쓸 약간의 소년소녀에 불과하였다. 메르브의 학살사건은 몽골군의 공격이 시작될 때까지 항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었다. 또 얼마 전 징기즈칸의 사위 토구차르가 공격하다 죽은 니샤푸르를 기습하여 개와 고앙이까지 죽였다. 이어서 투스 인근의 아랍 페르시아 문명을 파괴하고 헤라트로 간 톨루이는 자발적으로 항복한 헤라트 주민을 무차별 살해한 후, 탈리간에서 징기즈칸과 다시 합류하였다.
징기즈칸은 탈리간을 파괴한 뒤 힌두쿠시를 넘어 바미얀을 포위하였다. 이 작전에서 차가타이의 아들이자 징기즈칸의 손자인 젊은 무투겐이 전사하자 징기즈칸은 바미얀의 모든 생명을 죽여버림으로서 호라산지역(동부이란)은 회복불능의 폐허가 되었다. 몽골군이 무조건 항복인가 죽음인가의 원칙으로 일관한 것은 자기들이 하늘로부터 세계정복의 사명을 받은 종족으로 이러한 신성한 사명을 달성하기 위하여 전쟁을 한다고 확신하였기 때문이었다. 징기즈칸은 이곳에서 살아남은 주민 20%를 다룰 위그르인 관리 다루가치와 서기들을 남겼다.
파르완에서 자랄 알딘은 징기즈칸의 양자 시기 쿠두쿠가 이끄는 몽골군을 처음으로 격파하였다. 파르완의 승리는 살아남은 동부 이란의 도시들에 용기를 주었다. 징기즈칸은 직접 자랄 알딘을 추격하러 나섰다. 그가 가즈니로 진격하자 자랄 알딘은 다시 도망쳤다. 징기즈칸은 강행군을 하여 인더스강에 이르렀을 때 자랄 알딘은 막 강을 건너려던 참이었다. 그는 추격해 온 몽골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자기 주위의 병사들이 모두 전사하자, 말을 탄 채 인더스강으로 뛰어들어 순식간에 강 저편으로 건너가고 말았다.
몽골병사들이 그를 추적하려 하였으나 징기즈칸은 그들을 제지한 뒤 “아버지라면 마땅히 저런 아들을 두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강 건너편에 도달한 그는 델리 술탄국으로 망명하였다. 그러나 자랄 알딘의 가족들은 몽골에게 잡혀 사내아이들은 모두 살해되었다. 몽골은 인도 영내로 추격해 들어가지 않았다. 이듬해가 되어서야 잘라이르부의 발라 노얀이 지휘하는 몽골군 분견대가 물탄까지 수색활동을 벌였지만 더위 때문에 바로 철수해 버렸다.
몽골은 금나라보다 수월하게 트랜스옥시아나와 호라산의 요새화된 도시들을 함락시켰다. 몽골은 도시를 함락시키기 위하여 주변 시골과 무방비상태의 도시에서 남자들을 징집하여 성벽으로 몰아붙였다. 그들은 10명 당 한명 꼴로 몽골 깃발을 들려 몽골인으로 위장되었으며 수비대는 이 사람들이 몽골군으로 비쳤다. 이 방법은 몽골의 훈련과 조직에 의해 완벽해지면서 그들의 보편적인 전술이 되었다. 징기즈칸이 사마르칸드 공성전 때 이용한 사람은 부하라에서 데려온 포로들이었으며, 우르겐치 공격에서는 사마르칸드의 포로들이 이용되었고, 톨루이가 메르브를 함락시킬 때는 호라산의 시골주민들을 이용하였다.
몽골은 호라즘을 대부분 정복하였으나 아주 복속시킨 것은 아니었다. 탕구트족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소식을 접한 징기즈칸은 돌아가기로 결정하였다. 전군에게 선회를 명령하고 천천히 몽골 본토로 퇴각하였다. 그는 처음에 인도를 거쳐 돌아가려 했으나 만년설로 덮여있는 높은 산맥과 울창한 숲 그리고 이곳 도로에 관한 지식부족 등으로 결국 페샤와르를 거쳐 몽골로 귀환하기로 하였다.
제베와 수베테이의 페르시아, 러시아 침공
호라즘샤 무하마드가 죽은 뒤에도 제베와 수베테이는 계속하여 서쪽으로 진군하여 라이를 약탈한 뒤 하마단을 항복시켰다. 그 뒤 잔잔을 파괴하였고, 카즈빈의 주민들은 학살되었다. 계속하여 한겨울에 무간평원을 가로질러 그루지아 기사단과 맞서게 되었다. 수베테이는 이들을 제베가 있는 매복장소로 유인하여 괴멸시키고 그루지아 남부지방으로 짓쳐 들어갔다. 몽골군은 포로들을 앞세우고 성채공격을 하였으며 도시가 함락돼 주민학살이 끝난 뒤에 그곳을 떠나는 체 하다가 회오리바람처럼 되돌아와 도망쳤던 자들의 목을 베었다. 그런 후 몽골군은 아제르바이잔으로 돌아가 샤마카를 약탈하고 이곳을 지나 코카서스산맥을 넘었다.
코카서스산맥을 넘어 북쪽 스텝으로 내려온 제베와 수베테이는 그 지역민인 알란, 레즈기, 시르카스, 그리고 킵차크 투르크인들과 충돌하였다. 몽골군은 먼저 투르크-몽골의 형제애에 호소하고 약탈물의 일부를 주어 킵차크인들이 배신하도록 한 후 다른 지역민들을 하나씩 차례로 격파하고, 마지막에는 킵차크인까지 격파하여 약탈물을 되찾아 갔다.
패배한 킵차크인들은 루시 공작들에게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여러 제후들이 이끄는 8만의 러시아군이 드네프르강을 따라 내려왔다. 몽골군은 러시아군이 지쳐 널리 분산될 때까지 후퇴하다가 아조브해 북방의 칼카 강가에서 갈리치의 왕자와 킵차크인들을 격파하였다. 이어서 몽골군은 크리미아의 수닥과 솔다이아에 있던 제노아인들의 창고들을 털었으며 흑해변에서 겨울을 지낸 후 볼가강을 건너 카마강가의 불가르와 우랄산맥의 캉그리를 격파한 후 원정을 끝내고 시르다리아강의 북부 초원에서 징기즈칸의 본군과 합류하였다.
징기즈칸은 개선한 후, 유목지역을 여러 아들과 동생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즉, 몽골 본토는 징기즈칸 자신의 직할지로 하여, 넷째 아들인 톨루이에게 잇도록하고, 큰아들 주치에게는 카스피해와 아랄해 북방의 영토, 즉 남 러시아의 킵차크 초원지대를 주었으며, 둘째 아들인 차가타이에게는 카라키타이의 옛 땅인 중앙 아시아를 나누어주었다. 또 셋째 아들인 오고타이에게는 일리강 유역을 중심으로 외몽고 서부에서 천산산맥에 걸친 옛 나이만땅을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동부 몽골고원과 만주지방은 동생들에게 나누어주었으며 남방의 농경지대는 황금씨족의 공유재산으로 하고 거기에 다루가치(총독)와 주둔군을 배치하여 치안유지와 징세를 맡게 하였다.
징기즈칸은 서방원정의 고난이 그의 건강을 해치고 있었으나 자신의 일을 끝내지 못하고 죽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그는 장생의 비법을 알고 있다는 도인 장춘진인 구기처를 초청하였다. 1220년 도인은 중국을 출발하여 위그르-알마릭-탈라스를 거쳐 1221년 말 사마르칸드에 도착하였으며 마침내 1222년 5월 힌두쿠쉬 산맥의 남쪽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징기즈칸을 만났다. 징기즈칸은 장생의 비약을 물었고 장춘진인은 생명을 지키는 방도만은 안다고 하였다.
이어서 장춘진인은 백성을 다스리는 방법이라든지 몽골인들의 관습에 대한 질책, 혹은 성생활의 금욕을 말하였고 징기즈칸은 모여있는 측근들에게 “너희들이 하늘을 공경하는 것처럼 한인들은 신선을 존중한다. 나는 그가 진정 하늘이 내려준 사람임을 믿는다” 하였다. 징기즈칸은 1223년 제국의 모든 도교도장에 대한 관리권을 그에게 주었다. 이로서 장춘진인의 전진교는 중국에서 불교의 기득권을 위협하게 되었다.
후계자를 논할 때 주치가 메르키트의 피를 받았다는 차가타이의 주장은 주치의 마음속에 깊은 상처를 주었다. 차가타이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격하게 충돌한 이후 주치를 전처럼 대하기가 힘들었다. 두 사람 모두 마음속에 커다란 응어리를 갖게 되었다. 그후 징기즈칸의 호라즘 원정에서 주치와 차가타이의 우익군이 우르겐치를 포위공격하였으나 두 형제간의 불화로 몽골군은 커다란 피해만 입었다. 이에 징기즈칸은 오고타이를 총대장으로 보냈고, 그는 형들의 불화를 해소하고 군대의 규율을 회복한 후 이 도시를 다시 공략하여 함락시킴으로서 몽골제국의 후계자임을 능력으로 보였다.
징기즈칸은 사마르칸드에서 겨울을 나고 1223년 봄을 시르다리아강 북쪽에서 보냈다. 그는 노얀과 바아토르들을 거느리고 타쉬겐트 부근에 장막궁정을 펼쳤다. 그리고 차가타이, 오고타이 등 자기 아들들과 함께 쿠릴타이를 주재하면서 키르기즈산맥 북쪽에 있는 쿨란바시초원에서 거대한 사냥을 즐겼다. 그러나 큰아들 주치는 우르겐치 공격후 시르다리야강 이북의 이르티쉬강 쪽에 있는 그의 소유령으로 돌아간 뒤로 몸이 불편하다는 이유로 합류하지 않고 수렵물만을 보냈다. 그후 몇번 징기즈칸은 주치를 소환하였으나 그는 끝내 오지 않았다. 주치가 독자적인 세력을 이루려 한다는 것은 그의 죽음을 뜻하였다. 1224년, 징기즈칸은 여러 정보망과 정황을 통하여 자신이 죽은 뒤, 주치가 반란을 일으킬 것으로 보았다. 그러면 이 신생제국이 이러한 회오리를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징기즈칸은 인간적인 감정보다는 제국의 내일을 우려하여 당시 마흔 살이던 주치를 암살하였다.
징기즈칸은 돌아가기 전 칸의 대리인으로 도시에 다루가치라는 행정관을 두었다. 그는 세금을 거두고, 병력을 뽑으며, 역참 시설의 유지, 호구조사의 시행, 중앙정부 공납의 수송 등을 책임졌으며 토착귀족들과 관리들을 감시하고 통제하였다. 정복지에 두어진 주둔군은 소규모였지만 주민들의 저항의지를 꺾어놓기에는 충분하였다.
또 징기즈칸은 타 유목민의 씨족-부족장에게 천인대(밍간)장의 지위를 주었다. 특히 커다란 씨족-부족의 장은 한사람에게 몇 개의 천인대장에 임명하였다. 오이라트나 옹구트 등 몽골과 동맹한 부족, 씨족의 장들도 각각 몇 개의 천인대장의 지위를 받았다. 천인대장은 전쟁 때에는 일정한 수의 병사를 공출할 의무를 지는 동시에 전리품이나 칸의 하사물의 분배를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징기즈칸은 이번의 서정에서 여러 부족들을 몽골중심의 단일체로 흡수 일원화하는데 성공하였으며 몽골제국의 행정구조는 한족과 거란족(키타이족)의 골격을 빌리고, 이를 운용함에 있어서는 범 민족적 참여를 끌어낼 수 있게 되었다. 1224년 여름 징기즈칸은 탈라스와 추강 사이의 초원에서 보낸 후 1225년 몽골고원으로 돌아감으로서 7년간의 원정을 끝냈다.
“내가 사라진 뒤에도 세상에는 위대한 이름이 남게 될 것이다”
몽골로 돌아온 징기즈칸은 1225년 겨울부터 1226년 여름까지 오르콘강의 지류인 툴라강의 막사에서 보냈다. 이제 북경에서 볼가강까지의 세계가 그 앞에서 떨었다. 정복자는 호라즘 문제를 해결하자 탕구트(서하)를 응징하기로 하였다. 보통은 대원정의 전후에 2년간의 준비와 휴식을 주었는데 징기즈칸은 1226년 곧바로 탕구트 원정에 나섰다. 탕구트는 신하국이었음에도 호라즘 정벌전에 지원군 파견을 거절하였다. 몽골이 금나라 정벌에 군사력을 집중한 사이 탕구트에서는 1211년 쿠데타가 일어났었고 새로 즉위한 신종은 서정을 위한 몽골의 출병요청을 거절했다. 더욱이 탕구트는 1225년에는 금과 형제지국의 동맹관계를 회복하여 항몽연합전선을 꾀하였지만 서정에 골몰했던 몽골은 여유가 없었다. 1223년 무칼리가 죽자 잃었던 땅 일부를 다시 회복한 금나라를 재정복하기 위해서도 몽골은 감숙, 알라산, 오르도스를 직접 지배해야만 했다.
1225년 가을 대장 아타치가 이끌고 출정한 서로군은 신장의 서부에서 위구르 지역을 통과해 하서주랑을 따라 하란산맥 서쪽지역을 공략해 갔고, 징기즈칸 자신은 이듬해 2월 동로군을 이끌고 남하해 직접 하란산맥 동쪽으로 나와 탕구트의 복판을 향해 쳐들어갔다. 1226년 11월 아타치의 서로군과 합세한 징기즈칸의 군대가 서하의 배후도시인 서평부(영주)를 포위하자 탕구트는 노장 명외영공에게 병력 10만 명을 주어 이를 구원하게 했다. 황하의 얼음판 위에서 벌인 양측의 최후 결전은 결국 몽골군의 승리로 끝났다. 탕구트가 농성전을 꾀하자 징기즈칸은 주력을 이끌고 황하를 건너 금의 서경을 선제 공격했다. 금의 탕구트에 대한 원군 파견의 여지를 없앤 것이다. 1227년초 징기즈칸은 고비사막을 건너던 중에 진군을 멈추고 야생마를 사냥했다. 갑자기 야생마들이 돌진해오자 징기즈칸의 말이 놀라 뛰어올랐다. 말에서 떨어져 크게 다쳤지만 징기즈칸은 탕구트와 전쟁을 계속했다. 1227년 봄 몽골은 황하 곁에 있는 수도 흥경(영하)을 포위하였다. 몽골은 아프가니스탄에서처럼 무자비하였다. 주민들은 헛되게 몽골을 피하여 산으로 동굴로 숨었다. 벌판은 사람의 뼈로 뒤덮였다.
그러나 이때 징기즈칸은 낙마로 인한 병이 깊어져 죽음이 가까웠음을 깨달았다. 1227년 여름 흥경이 포위되어있는 동안 징기즈칸은 오늘날의 평량 서북에 해당하는 용덕의 청수하 지역 육반산의 남록에 하영하면서 오고타이와 톨루이를 불러들였다. “내 병은 치료될 수 없을 정도로 위중하니, 진실로 너희 가운데 하나가 군주의 지위와 제국의 권력을 수호하고 튼튼한 기초를 다져 권좌를 높여야 한다. 만약 나의 아들 모두가 칸이 되고 군주가 되려고 할 뿐 아무도 상대방에게 복종하지 않으려 한다면, 그것은 마치 여러 개의 머리를 가진 뱀의 이야기와 같이 될 것이다”라고 한 뒤 오고타이를 후계자로 인정하도록 하였다.
이어서 지휘관들이 모였고 톨룬 체르비는 전투를 중지하자고 하였다. 그래서 징기즈칸은 먼저 탕구트 왕에게 사신을 보냈으나 무례한 회신을 받고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이처럼 큰소리를 치는데 물러갈 수 없다. 죽어도 이를 묻고 오겠노라. 영원한 하늘이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1227년 8월 18일 탕구트의 최후를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그의 나이 65세였다.
징기즈칸의 죽음은 몇몇 사람들에게만 알려졌다. 그 3일후 탕구트의 수도 흥경은 몽골의 저돌적인 공격과 엄청난 파괴력에 맞설 수 없어 사령관 아사감부는 패배하였고 탕구트 왕은 항복하였으나 처형되었다. 정복자의 마지막 명령에 따라 전 주민이 살해되었다. 징기즈칸의 마지막 원정은 결국 피바다로 막을 내렸다. 징기즈칸은 정복만으로 인생을 마쳤다. 징기즈칸 시대의 몽골은 풀 냄새가 짙은 제국으로 제국의 행방은 아직 확정되지 않았다.
징기즈칸의 시체는 수레에 실려 고향으로 호송되었다. 장례행렬 도중에 만나는 생명체는 모두 죽였다. 행렬은 오르도스 지방의 무나산에서 수레가 진흙에 빠져 더 이상 움직이지 않자, 징기즈칸의 뜻으로 생각하여 그곳에 매장하였다. 8월은 무척 더운 계절이고 장례행렬도 느릴 수밖에 없어 징기즈칸의 시신은 고향까지 갈 수 없었던 것이다. 몽골군의 사기에 영향을 미칠까 염려해 사체가 케룰렌강 상류의 쿠테아랄 근처 사아리 게르(물이 흐르는 초원)에 도착한 뒤에야 징기즈칸의 죽음은 비로소 공표되었다. 8월 28일 이곳에서 장례의식을 치른 뒤에 그는 텡그리가 있는 오논과 케룰렌의 발원지인 성산 부르칸 칼둔(헨테이)의 고르반골 기슭에 묻혔다. 그곳은 금단의 구역으로 지정되었고 우량카이족 일부가 그곳을 지켰다.
1229년 오고타이는 즉위하자 곧 몽골 방식에 따라 대대적인 제사를 올렸다. 그는 관습에 따라 자기 아버지의 영령에 사흘간 음식을 올리도록 명하였다. 또 아름답고 고운 처녀 40명을 수령들과 고관들의 가문에서 선발하여, 보석 등으로 치장하고 값진 옷을 입혀 말과 함께 징기즈칸의 영혼에 제물로 바쳤다.
훗날 징기즈칸은 손자 쿠빌라이에 의해 원의 태조로 추존되었다.
“우리는 똑같이 희생하고 똑같이 부를 나누어 갖었다. 나는 사치를 싫어하고 절제를 존중한다. 나의 소명이 중요했기에 나에게 주어진 의무도 무거웠다. 나와 나의 부하들은 늘 원칙에서 일치를 보며 서로에 대한 애정으로 굳게 결합되어 있다. 내가 사라진 뒤에도 세상에는 위대한 이름이 남게 될 것이다. 세상에는 왕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내 이야기를 할 것이다!”
징기즈칸의 사후
징기즈칸이 1227년에 사망했을 때, 몽골족의 총병력은 고작 12만9천 명에 불과했다. 유목민족의 관점에서는 대병력이었지만 중국의 한족에 비해서는 미미한 숫자였다. 또한 인구 전체로도 몽골족은 약 1백만에서 2백만 가량으로 추정되지만 한족은 2천만 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징기즈칸이 이끄는 몽골병은 군사적으로 압도적인 역량을 과시했다.
그가 죽었을 때, 분할상속의 부족풍속을 따라 몽골제국은 4개의 지역으로 나뉘었다. 각 지역은 왕이란 뜻의 ‘칸(汗)’을 세우고 독자적인 통치권을 형성했다. 이러한 분열상은 거대한 몽골제국이 백 년을 넘기지 못하고 해체되는 원인이 됐다. 우선 종교적으로 몽골제국의 칸들은 분열상을 보였다. 중국의 황실인 원(元)은 불교를 수용했으나 일부 한국들은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징기즈칸에 의해 시작된 중국의 통일과업은 마침내 그의 손자 쿠빌라이(1215~1294년)에 의해 완성되었다. 1279년 중국 남부를 장악했던 한족 왕조인 남송을 무찌르고, 몽골제국이 중국을 재통일하였다. 몽골족은 남송을 격파하기에 앞서 1271년 원(元)을 세웠다. 지금의 북경에 대도(大都)라는 명칭의 수도를 세우고 본격적인 중국 지배에 들어갔다. 원은 1368년 명(明)에 의해 붕괴될 때까지 중국을 약 1세기에 걸쳐 통치했다.
몽골족에 의한 중국의 재통일은 중국사에 몇 가지 의미를 부여했다. 우선 끊임없는 이민족 침입으로 야기된 장기간의 전란이 끝남으로써 중국의 사회와 경제가 모처럼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중국의 영향력이 북으로는 북극해까지 남으로는 해남도(海南島)까지 확대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또한 중국이 다민족국가로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준비되었다. 그리하여 한족은 물론 몽골족, 거란족, 위그르족, 장족, 여진족 등, 다양한 민족이 하나의 정치체제에서 더불어 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종족이 출현하기도 했다. 탕구스족과 아랍인과의 잦은 접촉으로 새로운 민족인 회족(또는 ‘回回人, 회회인’이라 불리움)이 나타난 것이 그 예다. 이들은 중국 서북부와 중원지대에 정착했다.
소수민족인 몽골족은 정복을 끝내자마자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과 융합하기 위해 적극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 때부터 이민족들이 채택한 이중행정 구조를 설치했다. 모든 행정기관의 수장은 몽골인이 차지하는 대신에 그 밑의 관직에는 한족 출신을 대폭 등용시켰다. 또한 유교를 국교로 복귀시키고 과거제를 부활하여 한인 지배층에 대한 회유책을 펼쳤다. 그러나 한인 지배층에 대한 타협안은 그들의 경제적 기반인 지주경제에 대해 정복왕조가 일체 간섭하지 않음으로써 절정에 올랐다.
이러한 몽골족의 융화 노력에도 불구하고, 정복왕조 원(元)제국사회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몽골족은 일종의 카스트제도와 같은 인종차별 정책을 고수함으로써 다수민족인 한족의 불만을 크게 샀다. 즉 그들 자신을 최정상에, 주로 서역계통의 이민족인 이른바 ‘색목인’을 두 번째로, 그리고 몽골제국에 먼저 복속한 북부지방의 한족을 세 번째로, 최후까지 저항한 남송지역의 한족을 최하위로 분류했다.
징기즈칸의 활약으로 중국제국은 멀리는 동유럽까지 그 위세를 크게 떨쳤다. 뿐만 아니라 중국이 거대한 다민족국가로 발전하는 기반을 마련했다. 그러나 징기즈칸은 물론 이후 정복자들도 민족간의 내부적 갈등을 완전히 해소시키지 못했으며, 그 분쟁의 씨앗은 수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여전히 중국대륙에 존재하고 있다.
징기즈칸 어록
- 집안이 나쁘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잃고 마을에서 쫓겨났다.
- 가난하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들쥐를 잡아먹으며 연명했고, 목숨을 건 전쟁이 내 직업이고 내 일이었다.
- 작은 나라에서 태어났다고 말하지 말라. 그림자 말고는 친구도 없고 병사로만 10만, 백성은 어린애 노인까지 합쳐 2백만도 되지 않았다.
- 배운 게 없다고 힘이 없다고 탓하지 말라. 나는 내 이름도 쓸 줄 몰랐으나 남의 말에 귀 기울이면서 현명해지는 법을 배웠다.
- 너무 막막하다고 그래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목에 칼을 쓰고도 탈출했고 뺨에 화살을 맞고 죽었다 살아나기도 했다.
-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었다. 나는 내게 거추장스러운 것은 모두 쓸어버렸다.
- 나를 극복하는 그 순간, 나는 징기즈칸이 되었다.
징기즈칸 리더십
① 첫 번째 징기즈칸의 리더십 중에 주목 받을 점은 그의 '웅대한 비전'이다.
일찍이 과거에도 없었고 누구도 가능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을 가능하게 만든 대단한 비전이다. 그의 비전이 처음부터 컸던 것은 아니었다. 17살의 어린 소년 테무진이 타타르족의 습격으로 아버지를 잃고 그의 부족은 모조리 흩어 졌으며 자신은 포로로 잡혀 끌려가는 신세에 처해졌다. 이때 그가 가진 목표는 '흩어진 부족을 되찾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것'이었다. '할 일이 있는 한 나는 죽을 수 없다'라는 그의 말과 같이 온갖 모험과 역경을 거쳐 마침내 그 소원을 이루었는데, 테무진의 결론은 그의 부족들이 ‘공동의 목표’가 있으니 더 잘 뭉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같은 공동의 목표는 소박하거나 곧 이룩될 만한 작은 것에서는 별반 효과가 없었으며, 원대야망한 것이라야 사람들이 큰 힘을 낸다는 것이었다. 징기즈칸 리더십의 면면에는 한가지 공동목표가 달성되기가 무섭게 곧 다음의 새로운 공동목표를 만들어 쉬지 않고 달려야만 존재할 수 있다는 듯이 그의 부족을 이끌어 갔다. 그리고 그 비전은 나라를 만드는 것, 주변국가로부터의 위협을 없애는 것, 아예 중원을 경영하는 것, 나아가 천하를 통일하는 것, 그리고 그 천하는 중국 땅을 넘어 사람이 살고 있는 모든 땅으로 계속 커져만 갔으며, 그 꿈들을 하나 하나 실현시켜 나갔다.
② 두 번째는 명분과 정당성의 확보이다.
부족들은 명예를 중시하고 이름 석자에 대한 오명을 몹시도 싫어한다. 항상 그들은 옳은 쪽으로 평가 받기를 원한다. 청군 아니면 백군인 상태의 전쟁이 아니라 자신들은 정의의 편이라는 생각으로 싸우게 하도록, 같은 전쟁을 하더라도 명분이 없는 전쟁을 하지 않았다. 금나라 100만 대군을 칠 때도 그 명분은 나라를 물려 받지 못할 불효한 놈이 천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명분이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는 일종의 해방전쟁이라는 명분을 걸고 땅을 빼앗거나 명분 없는 약탈을 자제시켰다.
③ 세 번째는 슈퍼 리더십이다.
중앙아시아, 그리스 발칸반도, 모스크바, 베를린 등, 엄청난 거리의 원정에도 불구하고 징기즈칸 자신은 본토를 벗어 나 본 적이 없었다. 십수년 전까지만 해도 벌판에서 말을 부리던 부하들이 대군사를 지휘하고 신출귀몰한 전략을 구사하는 대장군으로 변신된 것이다. 부하를 육성함은 물론 전권을 주어 현지의 왕을 임명하고, 인접국가에의 전쟁 여부까지 모든 권한을 위임하였다. 그리고 서양세계 정신적 지주인 교황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숙의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권한을 현지에서 그때 그때의 상황에 맞게끔 현지의 지휘관이 철저히 알아서 하도록 맡겼다.
④ 네 번째로 징기즈칸은 그의 부족들이 끊임없는 상무정신(尙武精神)에 젖어 있기를 바랬다.
그의 마지막 유언 중의 하나가 ‘흙벽돌집에 살지 말라’는 것이다. 흙벽돌집 생활은 정착생활을 의미하며 곧 말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게 되면 허벅지에 살이 찌고 배부른 기름 맛을 알기 때문에 고통스러운 원정길을 포기하고 음주가무에 빠져 들 것임으로 이를 경계한 것이다. 그리고 살림이 풍족해지면 더 많은 재물에 욕심을 내고 단신의 군장이 온갖 재물보화로 무거워질 것이기 때문이며 서로 많은 재물을 차지하려고 서로 싸울 것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⑤ 다섯 번째 리더십 비밀은 스피드다.
마차로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2년이 걸렸다는 것을 생각하면 중원을 점령하던 2년여의 세월은 거의 말을 달리는 속도로 영토를 점령해 간 것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원정군들은 온갖 작전계획을 세우느라 시간을 낭비할 수 없었다. 수많은 정보와 판단을 요구하는 결정임에도 그들은 철저한 임장주의(臨場主義)를 선택하였다. 이는 현대적 의미의 현장주의인데, 탁상공론으로 세월을 보내 봤자 소용이 없고 ‘저 산을 넘어 가 보아야 그곳이 산일지 바다일지를 안다’는 모토로 일단 대원칙을 먼저 세우고 행동에 옮기며 상황을 보아가며 세부적인 사항을 그때 가서 결정한다는 방식이다. 물론 시행착오도 있을 테지만 이는 모르고 내린 결정보다 안전한 것이다. 그리고 이렇듯 무모한 방식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의 조직이 기동력에서 탁월했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몽고말과 손에 익은 작은 칼, 그리고 사냥터에서 갈고 닦은 그들의 활솜씨는 무거운 갑옷으로 무장한 중세서양의 병정들을 양철 허수아비처럼 다루기 편한 연습상대에 불과했다. 중후장대가 아니라 경박단소가 세계를 점령한 것이다. 직관적 감각과 선이 굵은 대원칙주의였다.
⑥ 여섯 번째는 그의 통합적 패러다임에 있다.
일단 전쟁을 벌인 적국이라 할지라도 전쟁이 끝난 뒤 제국의 일원으로 충성을 맹약하기만 하면 이러 저러한 제한을 가하지 않았다. 그들의 재산은 물론, 왕권 심지어 종교까지 자율권을 부여했다. 각 국가가 가진 고유의 특수성(개체성)을 보존하는 것은 보편성(전체성)을 의미하는 제국에 대한 충성 하나로 허용되었던 것이다.
⑦ 일곱 번째는 현대인의 생각을 앞지를 정도의 성개방 의식에 있다.
아울러 자손을 번영시키는 근본으로서의 여성 지위를 무척 인정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사실 그의 아내는 자신의 부락이 공격 받았을 때 적국에게 납치되어 2년여를 적의 장수에게 잡혀 있었다. 그가 자신의 아내를 되찾았을 때는 이미 그의 아내는 적국의 아이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천하에 그 사실을 알리고 나의 아내가 낳은 아이는 나의 자식임을 선포한다. 그리고 그 아이는 대몽골족의 장손으로 남아 아버지 위업을 이어 받게 된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고려시대의 공녀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해가 빨리 된다. 공녀로 끌려간 고려의 아녀자들은 그들의 원래 가문의 등급에 따라 대접을 받게 되는데, 공녀 위씨는 나중에 원나라 황제의 후궁이 되기도 한다.
⑧ 여덟 번째는 조직력에 있다.
대장군 밑에는 사단과 연대, 대대, 중대 등이 편성되었는데, 그와 같은 군대의 편성은 먼 훗날 나폴레옹이 등장하기 전에는 없던 형태의 조직이라고 한다. 징기즈칸은 뛰어난 조직가로도 유명한데, ‘어떤 조직이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는가?’를 끊임없이 생각했다. 징기즈칸은 ‘나라를 함께 세우고 고생한 자들’ 즉 건국공신 88명을 천호장(千戶長)에 임명했다. 그 중에는 두세 개의 천호를 가진 자들도 있었으므로 전체 95개의 천호가 편성되었고 이것이 몽골이라는 국가의 사회조직이 되었다. 천호라고 하면 천명의 전사(戰士)를 제공할 수 있는 단위이고, 그 밑에 백호, 또 십호가 있어서 사회조직 자체가 군대조직과 동일하였다. 따라서 사회조직이든 군사조직이든 동일하였고, 징기즈칸을 정점으로 완전히 재편되었다. 징기즈칸은 종종 적군을 숫자로 압도하며 일렬 횡대로 진격하여 눈깜짝할 새에 포위하는 전법을 썼는데, 이는 조직을 일사불란하게 지휘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전법이었다. 이러한 그의 조직력은 엄격한 군율을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아무리 뛰어난 장수라도 군율을 어기면 엄격하게 벌을 주었다. 그의 몽골군이 승리를 거두었던 또 하나의 요인은 기동력이었는데, 키가 작기로 유명한 몽골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던 백성들이 자기 몸에 딱 맞는 칼을 쥐고 먼지를 일으키며 전쟁터를 질주하였다. 몽골군의 전령은 10마리의 말을 끌고 달리며 교대로 말을 갈아 타며 2천리를 내리 달렸다는 기록이 있다. 몽골에서는 매년 가을 소를 잡아 뼈를 발라낸 뒤 고기를 세로로 길게 자른다. 이 고기를 3~4개월 이상 건조한 창고 등에서 바싹 말린 뒤 가루로 빻은 것이 보르츠이다. 소 방광 하나에 한마리 분량의 고기가루가 들어가며 무게는 3~4 kg에 불과하다. 몽골군은 병사 한 명이 보르츠를 가득넣은 소 방광을 두 개씩 휴대해 다녔다. 이것들에 더운물만 부으면 완벽한 초간편식량이 되었으므로, 병사 한 명이 적어도 몇 달치 식량을 깔고 달리는 셈이었다. 몽골의 역사 속에 더욱 놀라운 것은 역참제도이다. 수도 카라코룸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공용도로를 개설하고 일정거리마다 역을 세웠는데, 그의 손자 오고타이칸이 즉위할 무렵에는 역전을 위한 말이 20만필, 역사만도 1만개가 넘었다고 한다. 이러한 도로운영으로 상인이 다니게 되었고 로마교황의 사자가 다녔으며 마르코폴로 부자도 이 길로 몽골에 이르게 되었다. 강력한 지휘명령 체계로 군율이 잡힌 조직력과 기동력, 이것이 징기즈칸 리더십의 핵심적 성공비결이다.
⑨ 아홉 번째는 과학과 기술, 그리고 교역의 장려였다.
그가 대칸(大汗)에 오르자 엄청난 재보가 들어왔다. 이란이나 아라비아의 산물이 받쳐졌는데, 이런 먼 나라의 진기한 물건은 중앙아시아에서 온 위그르인들에 의해서였다. 대부분의 위그르인들은 이슬람교도들이었다. 일찍이 그들의 사라센제국은 8, 9세기의 영광을 뒤로하고 쇠퇴해 진 상태였지만 그들의 왕성한 교역활동은 여전하였다. 징기즈칸은 자신의 국가를 더욱 강력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위그르인들의 교역활동을 돌봐 주었다. 그들도 징기즈칸의 무력에 의해 교역의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 여러모로 유리하였다. 대부분의 중세국가에서는 이교도들을 적으로 보았지만, 징기즈칸은 실사구시적인 정신으로 이교도를 통하여 국익을 증가시켰고, 그 같은 개방정책으로 선진화된 문명과 각종 과학기술을 교류하였다. 징기즈칸 사후에 호라즘의 수도 사마르칸드를 점령하였을 때 종전의 섬태멸진 전법에 의해 대부분의 주민을 몰살시켰지만, 공예가나 직인들 같은 기술을 가진 자들 3만명은 죽이지 않고 몽고 본토로 후송하였다. 당시 유럽에서 동방에 이르는 길목에는 각종 소국이 자리잡아 통행하기가 곤란하였고, 그 중간 중간의 험한 길에는 도적들이 들끓어 동서교류가 곤란하였다. 그러나 원대에 이르러 동서왕래가 활발해졌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과학문명의 발전이 3세기가량 앞당겨졌다는 평가도 있다.
⑩ 마지막 비밀은 훌륭한 그의 참모에 있다.
그의 주위에는 많은 인재를 두어 각종 자문에 응하게 하였다. 그 중 하나가 야율초재(耶律楚材)다. 그는 징기즈칸이 두 번째로 금을 정벌할 때 중도의 성을 지키고 있던 26세의 청년이었다. 그는 금에 의해 멸망한 요나라의 귀족이었는데, 유불선 3교에 통달하고 모든 학문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그를 불러 칸은 말했다. ‘요와 금은 원수지간이다. 내가 금을 무찔러 그대의 원수를 갚았노라.’ 그러자 초재는 하나의 두려움도 없이 큰소리로 말했다. ‘나의 선조도 나의 부친도 모두 금의 조정에 봉사하였습니다. 한번 신하가 된 이상에는 어찌 두 마음을 품고 주군에게 원수를 갚을 수 있겠나이까?’ 징기즈칸은 이 대답이 마음에 들어 그를 항상 곁에 두고 정치 상담역으로 삼았다.
몽골제국의 확대와 분열
칸(汗)은 원래 유력한 부족장들의 회의인 쿠릴타이에서 선출되었으나, 징기즈칸의 즉위 후 이 관례는 형식적이 되었고, 1227년에 그가 죽자 쿠릴타이에서는 징기즈칸이 죽기 전에 이미 지명한 오고타이를 대칸에 즉위하도록 결정하였다.
오고타이는 금(金)나라와 대규모 전쟁을 재개하여 이를 멸망시키고, 1234년에는 화이허강(淮河) 이북의 중국을 점령하였다. 한편 주치의 둘째 아들 바투에게 명하여 러시아 및 유럽 각지를 1235∼1242년에 토벌하게 하였다. 그 결과 남(南)러시아는 킵차크한국이 되었다. 태종(太宗) 오고타이칸은 오르혼강 상류지역에 수도 카라코룸성(城)을 구축하고, 이곳을 기점으로 전 영토로 통하는 도로를 건설하고 그 연도(沿道)에 역전(驛傳)제도를 정비하였다. 이 제도로 광대한 영토 내의 교통이 용이하고 편리하게 소통되었기에 동서문물의 교류가 활발하게 촉진되었다.
또 오고타이칸은 옐뤼, 취치이 등 정복지역의 학자나 문화인 등을 등용하여 행정기구를 정비하고, 최초의 정액세법(定額稅法)을 시행하였다. 오고타이칸의 사후 그의 황후가 섭정을 한 다음, 오고타이의 큰아들 구유크가 제3대의 대칸위(位)에 올랐으나 3년 만에 죽자, 다시 황후가 섭정이 되었다. 이처럼 대칸위의 공백시대가 계속되었던 것은 오고타이 일가와 바투를 지지하는 툴루이 일가와의 대립이 치열하였기 때문이었다. 오고타이 일가에서는 다음 대의 대칸위에 오고타이의 손자인 쿠주크 시레문을 추대하였고 바투는 툴루이의 큰아들 몽케를 추대하였기에 싸움은 계속되었는데, 결국 툴루이측의 승리로 몽케가 제4대 대칸이 되었다. 이후로는 툴루이의 자손이 원조(元朝: 1271∼1368년)에서 대칸위를 독점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족 내부의 대립과 항쟁은 몽골제국을 분열시키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몽골은 1231년(고려 고종 18년)에 고려에서 공물을 받아가던 몽골사신이 살해되자 오고타이칸은 살례탑을 보내 고려정벌을 단행하고 72명의 다루가치를 두어 고려를 관리했다. 1235년 7월에는 홍복원을 앞장세워 침입하였고, 1238년의 침략에서는 황룡사 9층탑을 불태우는 등 1239년에 이르기까지 고려 전국토를 유린해 쑥밭을 만들었다. 1231년 이래 이러한 3차례의 공략에도 고려가 완전히 굴복하지 않자, 1254년 몽케칸은 고려를 정벌하기 위해 대대적인 군사를 파견하였다. 1254년(고종 41년) 7월에 차라다가 침입하여 1256년 9월에 돌아갈 때까지 잡아간 사람만 20만이 넘었고 죽인 사람은 헤아릴 수가 없었다. 고려는 마침내 항복하고 말았다. 고려는 그 후 공민왕에 이르기까지 90여년 동안 원나라에 예속되다시피 했다. 고려왕은 원나라에 의해 책봉되었고 여러 왕들이 원나라 공주를 왕비로 맞았다. 공민왕이 세상을 떠나고 우왕이 들어서자, 1388년 명나라는 철령 이북의 땅을 요동에 예속시키겠다고 통고해 왔다. 이에 친원파의 영수 최영장군이 조민수, 이성계를 보내 요동을 치려 했으나 이성계는 이에 반기를 들고 위화도에서 회군하여 스스로 왕이 되어 1392년 조선을 건국하였다.
1232년 오고타이칸의 몽골군은 삼봉산에서 금나라 주력부대를 포위하고는 공격해오면 후퇴하고 공격을 멈추면 습격하여 사흘 밤낮을 먹지도 자지도 못하게 하고는 금나라 군사들에게 퇴로를 마련해 놓고 거기에 정예부대를 배치하여 금나라 군사를 완전히 괴멸시켰다. 1232년 남송과 몽골이 남과 북에서 금나라를 협공했고 마지막 황제 애종은 자결하였고 1236년 10월 마지막까지 공주를 사수하던 곽하마의 병력도 관청과 창고에 불을 지르고 불길 속에 몸을 던졌다. 금나라는 9대 120년 만에 막을 내렸다.
금나라가 망하자 1258년 몽골은 남송을 공격했다. 이때 남송의 재상은 무능하고 부패한 가사도였는데 양양을 수비하던 여문환이 6년을 버티며 증원군을 요청하였는데도 증원군을 보내지 않았다. 남송의 뜻 있는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일어났다. 진사시에 수석 합격한 문천상의 기개는 놀라왔다. 고관으로 우대하겠다는 유혹이나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옥살이를 하다가 1282년 쿠빌라이칸에게 죽임을 당했다. 1279년 망명 정부를 이끌던 주전파 중신 육수부는 광동성 애산(涯山) 앞바다에서 몽골군과 해상전을 벌이다가 몽골 선단이 다가오자 자신의 처자를 바다에 던지고 9살된 황제 위왕 ‘병’의 허리에 금으로 새긴 옥새를 묶은 다음 황제를 등에 업은 채 출렁이는 바다에 몸을 던졌다.
몽케칸은 오고타이칸의 사후 약 10년간 난맥상태를 이룬 통치기구를 쇄신하여 관제를 개혁하였으며, 중국의 화북(華北)지방과 투르키스탄의 요지를 확보하고, 호구조사를 실시하여 세제(稅制)를 개정하였다. 그는 국내의 재통일에 성공하자, 동생 쿠빌라이에게 중국의 쓰촨[泗川], 윈난[雲南] 및 안난[安南], 티베트[西藏] 등의 토벌을 위해 대군을 출동하게 했고, 셋째 동생 훌라구를 이슬람국가 정복을 위해 파견하였다. 훌라구는 1253년 서방정벌에 나서 이란에 침입하여 바그다드를 공략하고, 1258년 압바스왕조를 멸망시켜 이곳 이란지역에 일한국(1258∼1393년)을 건국하였다.
몽케칸도 남송(南宋) 토벌작전에 참가하였으나 쓰촨성[四川省]에서 병사하였다. 제4대의 몽케칸이 죽자, 수도 카라코룸에서 몽케칸의 부재 중 대리로 일을 맡고 있던 막내동생인 아리크부카는 그의 부하와 오고타이계 제왕(諸王)의 지지를 얻어 대칸위에 오르려고 시도하였다. 쿠빌라이는 남송과 일시적인 화평조치를 취하고 급히 귀환하여 그의 신복들로 구성된 쿠릴타이의 추대를 받아 제5대 대칸위에 올랐다. 그 후 아리크부카의 반란을 진압하고 1271년 국호를 원(元)으로 개칭하였다. 한편, 쿠빌라이에게 불만을 품은 일파는 오고타이의 손자인 하이두를 칸으로 추대하여 쿠빌라이칸과 대립함으로써 이때부터 30년에 걸친 국내전이 시작되었다. 내전을 계기로 킵차크한국과 차가타이한국은 하이두의 편에 서고, 일한국은 쿠빌라이측에 가담함으로써 징기즈칸이 이루어놓은 몽골제국은 분열하였다.
한편 쿠빌라이칸은 몽골제국이 해상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한 실험으로 일본원정을 감행키로 하고 고려에게 군사, 군량미, 전함을 제공할 것을 명령했다. 그리하여 몽골은 고려와 연합군을 형성하여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을 침략하였다. 그 즈음 일본은 타이라씨(平氏)를 무너뜨린 겐지씨(源氏) 집안의 미나모토요리토모(源賴朝)가 가마쿠라(가나가와켄, 神奈川縣)를 근거지로 정하고 1192년에 무사정권(가마쿠라막부)을 수립하고 권력을 잡고 있을 때였다. 이 가마쿠라막부는 약 140년간 계속되었는데, 이 기간을 가마쿠라시대(1192~1333년)라고 한다. 1274년 1차 일본원정 여몽(麗夢)연합군의 총사령관은 몽골군 힌두였고, 2만여명으로 이루어진 고려군을 이끈 장군은 김방경이었다. 9백척의 전함과 4만명의 병력을 이끌고 연합함대는 쓰시마를 철저히 약탈하고 이키섬을 짓밟은 뒤, 10월20일에 규슈의 하카다만에 상륙하여 해안에서 양군이 본격적으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일본군은 현격한 전력적 열세였지만 쇼우니가케스케장군의 장렬한 죽음으로 가까스로 괴멸은 면하고 퇴각하였다. 이 전쟁에 가미쿠라막부의 사무라이들이 동원되었다. 일본 무사를 칭하는 사무라이는 '섬기는 사람'을 의미하였다. 요리토모가 가마쿠라에 세운 정부는 군주를 충성스럽게 섬기는 것을 개인의 윤리로 확립시켰다. 명예를 보존하는 방법으로써 의식적으로 자살하는 관습인 할복자살도 이 시기에 유래되었다.
일본군의 수준은 춘추전국시대 군사와 비슷하여 연합군과 맞서 싸우면서 각 무사들이 개개인의 공적에 눈이 멀어 자신의 가문과 이름을 외치며 혼자 돌진하다 전사하는 경우가 허다하게 전쟁의 경험이 적었다. 이에 비해 연합군은 오랜 전투 경험과 새로운 신무기를 동원하여 일본군을 크게 물리치는 실정이었다. 김방경은 계속 진격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사령관 힌두는 그의 주장을 묵살하고 하케다만에 정박한 배로 돌아가 전세를 살필 것을 명령하였다. 그날밤 태풍이 불어 거의 모든 전함이 침몰하고 병사들은 수장되었다.
1차 일본원정에 실패하였지만 쿠빌라이칸은 야망을 버리지 않고 1281년에 또다시 원정을 명령하였다. 1차공세 이후 일본 막부도 북규슈 해안 전체를 석조장벽으로 에워싸 몽골기병의 공격에 대비하였고 병력을 모아 훈련시켰다. 여몽연합군은 1차원정보다 더 많은 병력과 군세를 이끌고 쳐들어 갔다. 지휘관은 몽골 장수 아라칸과 항복한 남송 장수 범문호였다. 연합군은 대마도, 시가노섬, 노코노섬에 상륙하여 일본군을 별 어려움 없이 격멸시켰다. 연합군은 여러 차례 규슈 상륙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1차원정 때와는 다르게 번번히 실패하였다. 해안가 주변에 쌓인 튼튼한 성벽과 일본 무사들의 완강한 저항으로 연합군은 고전을 면치 못하였다. 일본은 연합군의 본토 상륙을 막기 위해 관문인 하카다 연안 일대에 방루인 석조성벽을 쌓았는데, 해안에 쌓아진 방루의 길이만도 20km에 이르렀다. 일본군은 끊임없는 게릴라전으로 연합군을 괴롭혔고, 고려군에서는 전염병이 돌아 많은 병사들이 죽어가고 있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서로간에 치열한 공방전은 계속되었다. 그러나 모든 역량을 모은 연합군의 총공세에 일본군은 북규슈로 달아났고, 연합군의 대병력과 5천척의 대선단은 연안바다에 진을 치고 상륙을 준비했다. 그러나 이때 또다시 태풍이 불었다. 연합군은 대부분 수장되었고, 바다와 해안가는 파선된 선박의 파편들과 병사의 시체들로 산더미를 이루었다. 몽골의 두 번에 걸친 침략은 살인적인 태풍에 의해 그 승패가 결정되었다. 일본은 이 태풍을 가미가제(神風), 즉 '신성한 바람'이라 불렀다.
1303년에 몽골제국의 제위쟁탈 싸움에서 결국 쿠빌라이측이 승리하였지만, 이때에는 이미 쿠빌라이나 하이두 모두가 죽은 뒤였다. 이 싸움은 유목 ·농경 양 지역을 영유함으로써 크게 개화(開化)한 원조(元朝) 및 일한국과, 유목지대를 본거지로 삼고 종래의 유목적 전통생활을 보존하려는 여러 한국과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그 후 원조와 대립하였던 여러 한국들도 점차 개화됨으로써 원조와 화의를 맺게 되어 몽골제국의 상호 연대성은 부활되었다.
원조는 몽골제국의 정통을 계승한 종주국(宗主國)이 되었고, 1310년 멸망한 오고타이한국을 제외한 킵차크, 차가타이, 일, 이들 3한국이 서로 연합함으로써 그로부터 60여년간 유라시아 대륙은 ‘타타르의 평화’를 누리게 되었다. 또 아시아와 유럽 세계 사이의 문화교류도 활발해졌다. 그러나 몽골제국은 몽케칸의 치세(治世)까지 몽골고원의 대칸의 권력과 혈연적 연관에 의해 보존되었던 통일성을 잃어버렸다. 몽골제국은 다만 원나라를 종주국으로 하여 그 정권 밖에서 독립국을 형성한 3한국으로 구성된 연합왕국이었다. 이 연합왕국도 1368년 원나라의 멸망과 함께 붕괴되었다.
몽골의 멸망
몽골제국의 종주국인 원이 망한 이유는 중국에서 몽골인들이 매우 소수였다는 점이다. 중국처럼 인구가 매우 많고 넓은 나라를 이민족이 통치하기란 매우 어렵다. 몽골족은 우수한 군사력을 앞세워 역사상 처음으로 중국 전체를 지배하였지만 중요한 실책을 저질렀다. 최상층인 몽골인과 그 다음 지배층인 색목인들의 숫자가 매우 적었는데도 대다수를 차지하는 한족들을 지나치게 차별했다. 한족들은 관직에 나갈 가능성이 매우 희박했고, 경제적으로 큰 부담을 졌으며, 법적 사회적인 차별을 감수해야 했다. 중국은 원제국 황제의 개인 소유물로 취급되었다. 이러한 불만이 쌓인 한족들을 억누를 수 있는 수단은 강력한 군사력밖에 없었는데, 쿠빌라이칸(세조) 이후로 오랫동안 몽골군들은 전투에 나서지 않아 전투력이 약해졌으며, 그나마 상당수는 다른 직업으로 전환했다. 쿠빌라이칸 이후 문종(1329~1332년, 투크테무르)만이 중앙아시아의 차카타이한국으로 원정을 했을 뿐 다른 황제들은 전쟁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또한 원 왕실 내부에서는 치열한 제위 쟁탈전이 벌어져 혼란이 가중되고 있었다.
원의 멸망에 직접적으로 작용한 홍건적의 난 등이 중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이 난들은 경제적인 문제에 원인이 있었다. 원나라는 쿠빌라이 시대에 처음으로 지폐를 사용하는 등 금융상으로 앞선 면도 있었으나 경제관념의 희박으로 화폐발행을 제대로 못하여 원나라 말기에 급격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게다가 황하가 범람하는 등 자연 재해까지 겹쳐 백성들의 상태는 매우 핍박했다. 황하의 범람은 전답은 말할 것도 없고 대운하의 수로마저 파괴하여 화북지방의 식량 공급마저 원활하지 못하게 되었다. 마침내 1351년 한산동을 중심으로 유복통이 이끄는 백련교도들이 홍건적의 난을 일으켰고, 이어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홍건적은 중국 각지를 휩쓸었고 심지어 고려까지 쳐들어 갔다. 그러나 몽골군은 홍건적을 무찔렀고 홍건적은 끝내 다른 반란군의 무리인 장사성의 군대에게 패하였다. 그리고 역시 다른 반란군인 곽자흥의 부장 주원장이 홍건적의 마지막 수령인 한림아를 죽임으로써 홍건적은 완전히 평정되었다. 홍건적 이외에도 장사성, 곽자흥, 주원장(곽자흥군에서 독립), 서수휘, 진우량(1360년 서수휘를 죽임), 방국진 등이 반란을 일으켜 원나라는 도저히 이들을 다 진압할 수 없었다. 원나라가 각지의 반란군을 토벌하는 와중에도 여러 반란세력끼리의 싸움은 계속되어 마침내 주원장이 모든 반란세력들을 없앴다. 이제 주원장과 원나라의 싸움만 남게 되었다. 주원장은 장사성의 세력을 제거한 후 북벌군을 편성해 사방에서 원으로 진격했으며, 다음 해인 1368년 남경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명(明)나라를 세웠다. 명군이 북상하는 와중에도 원나라 조정은 내분에 급급하여 이에 제대로 대처를 하지 못했다. 내분이 마침내 끝났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그 동안 반란군 진압에 큰 공을 세운 쿠쿠테무르 같은 원나라의 유능한 무장도 더 이상 명군을 대적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원나라 마지막 황제인 순제는 북쪽으로 몽진에 나섰으나 응창부에서 죽고, 곧바로 명군이 응창부를 습격하여 원 황족들을 포로로 잡았다. 황태자 아이유시리타라만이 약간의 기병들에게 호위되어 북쪽으로 도망치는 데 성공하여 북원을 세웠으나, 중국 왕조로서의 원나라는 1368년에 멸망했다.
아이유시리타라는 소종으로서 1370년부터 1378년까지 몽골을 다스렸고, 뒤이어 토쿠스테무르가 다스렸으나 1388년 에스델이라는 자에게 피살됨으로써 북원도 약20년만에 망하였다. 그 뒤 몽골은 원의 정통 후계인 타타르(몽고 동부를 지배)와 오이라트(몽고 서부를 지배)로 나뉘게 되었다. 이 두 부족은 번갈아 가며 명나라와 대립했지만 영락제의 5차례의 막북원정으로 멸망했다.
사한국 (四汗國)
징기즈칸이 4명의 아들에게 분봉(分封)한 4개의 한국으로서 킵차크한국[金帳汗國](1243년), 오고타이한국(1224년), 일한국(1258년), 차가타이한국(1227년)을 말한다. 몽골제국의 분열조짐은 징기즈칸이 아들에게 땅을 분봉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징기즈칸은 장남 주치(Juchi, 1185~1127년), 차남 차가타이(Chagatai), 삼남 오고타이(Ogotai, 1186~1241년)에게 북외몽골 및 그 서부를 봉지로 주었고, 막내아들 툴루이(Tolui, 1190~1232년)는 곁에 두었다. 오고타이(태종) 때에 이르러 주치의 아들 바투(Batu, 1205~1255년)가 남러시아에 킵차크한국을, 차가타이는 중앙아시아에 차가타이한국을 건설하고, 오고타이는 외몽골·내몽골, 그리고 북중국을 점령하였으나 툴루이는 봉토를 갖지 못하였다.
오고타이칸(태종)의 아들 구유쿠칸(정종, 재위 1246~1248년)이 일찍 죽자 제국의 정치·군사 위원회인 쿠릴타이(Kurultai)는 툴루이의 아들 몽케칸(Möngke Khan, 헌종, 재위 1251~1259년)을 황제로 옹립하였으며, 몽케칸은 외몽골 지방으로부터 북중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몽케칸은 새로운 봉지를 찾기 위해 동생 훌라구를 페르시아에 파견하여 일한국을 세우게 하는 한편 자신은 동생 쿠빌라이와 함께 남송(南宋)을 정복하기 위해 나섰다. 전쟁 도중에 몽케칸이 죽었으며, 쿠빌라이(Khublai, 세조, 재위 1260~1294년)는 베이징(北京)으로 귀환하여 임시 쿠릴타이를 개최하고 1260년 대칸(大汗)에 즉위하였다. 그러자 이를 반대하던 사한국이 독립을 선언하였다.
오고타이한국은 몽골적 색채가 가장 강한 나라였다. 오고타이한국의 지배자 하이두(Haidu)는 전몽골의 지배권을 얻기 위해 30여년 중앙의 쿠빌라이칸(세조)에 대항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그 후 차가타이한국에 합병되었다. 중앙아시아를 지배한 차가타이한국도 칸위(汗位) 계승권을 둘러싼 싸움 끝에 쇠퇴하여, 14세기 중엽에는 동투르키스탄의 동차가타이한국과 서투르키스탄의 서차가타이한국으로 분열되었다. 티무르제국이 일어나자 서차가타이는 그 영토의 일부가 되고 동차가타이는 그 속국이 되었다.
이슬람 영토에 세워진 일한국은 초기에는 그리스도교를 옹호하고 이슬람교를 압박하였으나, 뒤에는 이슬람문화를 발전시켜 몽골·페르시아문화를 꽃피우고, 수학·지리학·역사학 분야의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킵차크한국은 14세기초 우즈베크칸(Uzbeg Khan, 재위 1312~1341년)과 자니베크칸(Jani Beg Khan, 재위 1342~1357년) 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안으로 러시아 제후를 지배하고 밖으로 동로마제국 황제와 친교를 맺는 한편 이집트와 통혼하여 국가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흑해무역을 독점하여 경제적으로 번영하였으며, 이슬람문화가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1340년대 중반 이후 흑사병이 전국을 휩쓸었고, 1357년에 자니베크칸이 암살당한 뒤 킵차크한국은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분열되었다. 1380년 러시아의 대공 디미트리 이바노비치 돈스키(Dmitry Ivanovich Donskoy)와의 쿨리코보(Kulikovo)전투에서 킵차크한국의 군사 지도자 마마이(Mamai)가 이끌던 몽골군이 패배했다. 그 후 마마이를 처형하고 스스로 칸의 지위에 오른 토흐타미시(Tokhtamysh)가 세력을 모아 1382년 모스크바를 점령하고 러시아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회복했으나, 1395년 티무르의 공격을 받아 토흐타미시 정권이 붕괴되었다. 14세기에 이르러 킵차크한국은 다시 크림, 카잔, 아스트라한 한국 등 여러 개의 소국(小國)으로 분열되었으며, 이 중 가장 큰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크림한국이 1475년에 오스만투르크제국에 복속되었다. 킵차크한국은 1502년에 크림한국의 칸 멘리 기레이(Meñli I Giray)에 패하고 수도 사레이(Saray)를 점령당해 멸망했다.
쿨리코보전투 (Battle of Kulikovo)
1380년 9월 8일 모스크바공(公) 드미트리 돈스코이가 지휘하는 러시아 제후군(諸侯軍)과 타타르군이 돈강(江) 연변의 쿨리코보에서 전개한 전투. 유럽·러시아의 제후국은 13세기 이래 킵차크한국(汗國)의 지배를 받았으나 14세기에 이르자 모스크바공국이 발전을 이룩하여 한국의 지배에 반항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킵차크칸은 친히 대군을 인솔하고 돈강변(江邊)으로 진격하여 쿨리코보에서 모스크바의 동맹군과 싸웠으나 모스크바 측의 교묘한 용병술로 크게 패하였다. 이것은 타타르에 대한 모스크바의 최초의 승리였으며 100년 후의 ‘타타르의 족쇄로부터의 해방’의 제1보가 되었다.
타타르족 (Tatar)
우랄산맥 서쪽, 볼가강과 그 지류인 카마강 유역에 사는 투르크어계(語系)의 종족. 러시아연방 타타르스탄공화국의 기간 주민인데, 공화국 이외의 지역에도 널리 살고 있다. 킵차크족과 그 밖의 남(南)러시아 초원의 유목민과 고(古)불가르족(族)의 자손으로 구성되었고, 농목축을 하고 있으며, 전통적인 수공예에 능하다. 또한 예로부터 교역(交易)에도 뛰어나다. 14세기 이래 이슬람 교도가 되었으나 그 이전의 민간신앙도 남아 있다.
킵차크한국 (Kipchak Khanate)
남러시아에 성립한 몽골왕조(1243∼1502년)로서 금장한국(金帳汗國)이라고도 한다. 징기즈칸의 장자 주치[求赤, 拙赤]는 이르티시강(江) 이서(以西)의 스텝을 영지로 받았으나, 주치의 사후 그의 차남 바투는 몽골 서정군의 총수가 되어 러시아 및 동유럽 각지를 석권함과 동시에 남러시아를 확실히 장악하여 킵차크한국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신도(新都) 사라이가 선 볼가강의 하류지방은 유라시아의 스텝을 경유하는 실크로드와 북방으로부터의 모피로(毛皮路)가 교차되는 요충을 점하여 오랫동안 투르크계 하자르족이 활약하는 무대가 되어 있었다.
몽골군이 출현했을 때에는 같은 투르크계 킵차크족이 북쪽의 불가르, 서쪽의 슬라브 및 동로마, 동남의 이슬람권과의 사이의 중계무역에 의하여 번영하였다. 또 몽골의 지배자가 급속히 투르크화, 이슬람화한 현상도 같은 사실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나라는 그 중계적 입장을 더욱 강화하였으며 제4대의 베르케칸이 건설한 신(新)사라이는 구(求)사라이와 함께 국제시장으로서 크게 번창하였다. 그러나 제9대 우즈베크칸의 최성기 이후 14세기말부터 티무르군에게 유린되는 등 퇴색이 짙어져서 국토는 카잔, 크림, 아스트라한의 3한국으로 분열되고 그들이 대립·항쟁하는 가운데 멸망하였다.
크림한국 (Khanate of the Crimea)
크림반도(半島)를 중심으로 하여 성립된 몽골계 왕조(1430∼1783년)로서, 바투의 아우 토카티무르의 후예 하지 기레이가 킵차크한국으로부터 독립 건국하였다. 반도 남쪽 바그체 사라이에 수도를 정하여 북방 및 동방과 연락하는 상로(商路)인 흑해(黑海)로의 출구를 가로막고, 제노바인(人)의 식민지 카파와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 발전했다. 제2대 멘그리기레이 때 오스만 투르크제국의 속국이 되었으나 이후 2세기에 걸쳐 존속하였다. 1738년 러시아의 예카테리나 2세에 의해 멸망하였다.
카잔한국 (Kazan Khanate)
볼가강(江) 중류의 카마강변에 위치한 카잔시(市)를 수도로 했던 투르크족(族)의 국가(1445∼1552년)였다. 킵차크한국 쿠춤 무한마드(재위 1423∼1459년)의 시대에 그 일족인 우르그 무한마드와 그의 아들 마프무데크가 도망을 쳐서 카잔에 자리잡고 독립왕국을 창건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 지방의 원주민은 추바시인(人), 몰도바인, 체레미스인 등으로서 마프무데크는 이 지방에 투르크 이슬람정권을 세우고 이슬람 사원을 건설하였다. 카잔한국은 처음에 모스크바 대공국(大公國)을 공격하였으나 점차로 반격을 받아 모스크바의 이반 4세는 15만의 군대로써 카잔시를 공격하고 1552년 10월 2일에 이를 함락시켰다. 그 후 5년이 지나 카잔한국은 모스크바 대공국의 영토로 편입되면서 남러시아에 있어서의 몽골 세력은 소멸되었다. 현재 러시아연방 타타르스탄 자치공화국 주민의 대부분은 카잔한국 주민의 후예들이다.
아스트라한한국
1466년 킵자크한국의 말기
에 카심한이 세운 국가였다. 수도 아스트라한을 중심으로 볼가강(江), 우랄강 중하류의 초원지대를 영유하고 주로 수렵, 어로, 목축에 종사하였다. 지리적 위치로 인해 동서의 통과무역이 번창하고 킵차크한국의 구도(舊都) 사라이의 상업적 기능을 계승해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노얀, 베그 등의 귀족계급의 항쟁이 격심하였고, 대외적으로는 크림한국 및 노가이가(家) 사이에 끼어 정치적 간섭을 받아 왕권은 약체화하였다. 1554년 카잔한국을 멸망시킨 러시아의 이반 4세에게 1556년 멸망되었다.
노가이 (Nogay)
스타브로폴 민족의 하나로서, 러시아연방 다게스탄공화국의 카라차이체르케스주(州)에 산다. 조상은 포로베츠인(人)과 섞여 그 언어를 도입한 몽골종족이다. 언어는 알타이어족 터키어군(語群)의 킵착어파(語派)에 속한다. 기본적 생업은 목축이지만, 카라차이체르케스주에서는 농업을 경영한다. 수니파의 이슬람교를 믿는다.
일한국
메소포타미아에서 중앙아시아에 걸친 광대한 지역을 통치했던 투르크계 몽골제국(1259-1336년)으로서, 시조인 훌라구칸(Hulagu Khan, 旭烈兀汗, 욱열올한, 1218~1265년, 재위1258∼1265년)은 징기즈칸의 막내아들인 툴루이의 셋째아들로서 몽케칸(헌종)의 아우이다. 일한이란 투르크어로 '나라의 왕'이라는 뜻이며, 훌라구왕조 군주의 칭호이다. 훌라구칸은 1253년 형 몽케칸의 지시로 서(西)아시아로 원정(遠征)하여 공포의 암살단 조직원인 이스마일파(派)를 토멸하고, 1258년 바그다드를 공략하여 셀주크투르크가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압바스왕조의 칼리프 정권을 멸하였다.
750년 아랍계가 지배하는 우마이야왕조로부터 정권을 탈취한 압바스왕조는 지배층에 페르시아인을 비롯한 비아랍계 무슬림들을 대거 참여시키면서 아랍민족 우월주의는 퇴색되었고 그리고 무슬림 평등원칙이 확립되었다. 다마스쿠스에서 바그다드로 수도를 옮김으로써 정치, 군사, 문화, 경제의 중심지가 동쪽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도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 새로 건설된 바그다드는 세계 동서무역과 문화의 중심지로 성장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상업활동에 종사함으로써 신학자나 법학자 등 이슬람의 성직자층과 나란히 관리·상인·지주가 지배계급의 자리를 차지하였다. 제5대 칼리프인 하룬 알라시드(재위 786∼809년)와 그의 아들 알 마아문(재위 813~817년) 시대가 압바스왕조의 전성기였다. 하지만 다음 칼리프인 알 무으타심(재위 833~842년)이 어릴 때부터 군인으로 훈련 받은 맘루크라 부르던 투르크 노예 용병들을 궁성의 경호원으로 고용하면서 쇠락의 씨앗이 심어졌다. 이들은 지연적·혈연적 관계가 없었으므로 오직 칼리프에게만 맹목적인 충성을 바쳤다.
따라서 칼리프는 중앙정부에서의 고조된 아랍인과 페르시아인 간의 갈등을 드러내지 않고 파괴시킬 자신의 친위대로 이들을 고용하는 한편, 제국의 안전을 도모하는 고급 군사집단으로 이들을 훈련·성장시켰다. 그러나 맘루크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자각하게 되자 이들은 스스로 지배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결국 압바스왕조의 칼리프제는 861년부터 945년까지 맘루크에 의해 좌우되었으며, 동시에 제국 전역에서 정치세력화된 지방 토호나 지방으로 파견되었다가 세력을 확장한 맘루크정권 등이 반(半)독립화되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독립왕조는 파티마왕조(909~1171년)였으며, 파타마왕조는 북아프리카 전역을 세력권 안에 넣었으며 시칠리아, 이집트, 시리아 등을 통치하게 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중동은 서부의 파티마왕조와 동부의 압바스왕조 치하로 양분된 상황이었다.
당시 압바스왕조는 945년부터 페르시아계 시아파인 부와이흐왕조(945~1055년)에 의해 수도 바그다드를 점령당했으며, 칼리프는 그 명맥만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처럼 칼리파제가 맘루크나 부와이흐 같은 이민족에 의해 좌우되면서도 완전히 붕괴되지 않은 것은 무슬림 수장으로서의 칼리파의 전통적 존엄성이 유지되어야만 아미르나 술탄들이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1세기 전반에 이르자 파티마왕조, 부와이흐왕조는 모두 쇠퇴했으며, 셀주크투르크가 1055년 바그다드에 입성하여 부와이흐로부터 압바스왕조의 통치권을 넘겨받았다. 셀주크투르크(1038~1194년)는 칼리프를 인정하고 보호하는 대신 세속통치의 절대권력을 의미하는 술탄의 칭호를 사용했으며, 실질적으로 칼리프는 허수아비 같은 존재였다. 이후 셀주크투르크조가 붕괴하고 13세기 초의 한 시기를 제외하고 칼리프는 종교상의 권위만을 유지하는 데 그쳤으며, 바그다드가 훌라구에게 점령당하면서 칼리프제(制)는 완전히 몰락하였다.
훌라구는 시리아를 정토하던 중 몽케칸의 부보(訃報)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점령지를 확보해야 했고, 또 둘째형 쿠빌라이와 동생 아리크부카 사이의 칸위(位) 다툼을 알고 귀환을 단념하고 1258년 일한국을 세웠다. 그는 몽골제국의 칸 종주권을 존중하며 우호관계를 유지하였지만, 킵차크한국 및 다른 2개 한국과는 영토문제 등으로 사이가 나빠서 자주 싸웠다.
일한국은 역대로 타브리즈를 수도로 하였다. 초기의 군주는 네스토리우스파(派) 그리스도교와 불교를 보호하여 이슬람교국인 이집트의 맘루크왕조와 싸우고, 로마 교황 및 프랑스와는 외교관계를 맺었다. 제7대 가잔칸은 일한국 중흥의 영주(英主)로서 이슬람교를 보호하여 국교로 삼았고, 중앙집권정치를 확립하였으며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이슬람사원을 세웠으나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 국가와도 우호관계를 맺었다.
제8대 올자이투칸도 유럽과 관계를 맺고 맘루크왕조를 공격하였으며, 한편 종실(宗室)인 원(元)왕조와 유대하여 동족인 차가타이한국과 대립하였다. 제9대 아부사이드칸(재위 1317~1334년) 때부터 일한국은 쇠퇴하였으며 귀족들이 왕권을 둘러싸고 항쟁하여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아부사이드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아르파칸(재위 1335-1336년) 시기에 이르러 일한국은 여러 개의 소국으로 분열되었다. 일한국을 계승한 소국들 중 가장 강력한 것은 바그다드를 중심으로 하는 잘라이리조(Jalayirids, 1339~1432년)였으며, 그 외에도 아제르바이잔을 중심으로 하는 추판조(Chupanids, 1337~1357년) 등이 비교적 큰 세력을 갖고 있었다. 추판조는 1357년, 잘라이리조와의 전쟁에서 패망했으며, 잘라이리조는 서(西)투르키스탄에서 일어난 티무르의 흑양왕조(터키어는 Kara Koyunlu)로부터 공격을 받아 와해되었다. 그러나 1405년 티무르가 사망한 뒤 다시 왕조를 일으켜 1432년까지 존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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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타이한국 (Chaghatai Khanate)
징기즈칸의 둘째 아들 차가타이가 중앙아시아에 건립한 몽골왕국(1227∼1360년)이다. 차가타이는 아버지에게서 4천명의 군대를 얻고, 한국의 영지 비시발리크에서 사마르칸트에 이르는 톈산[天山]의 계곡지대를 받아가지고 본영(本營)을 일리 분지의 알말리크에 두었다. 한국은 처음에는 오고타이, 몽케, 구유크 등, 대(大)칸의 통제를 받았으나 1260년 쿠빌라이가 원(元)나라를 세우면서 독립을 꾀하였다. 그러나 오고타이의 손자 하이두는 쿠빌라이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켰으며, 그 결과 차가타이한국은 하이두의 지배에 들어갔다.
1301년 하이두가 죽자 차가타이가(家)의 두와칸은 원나라와 화해하여 한국의 독립과 통일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두와칸의 여러 아들이 서로 분립하여 권력을 다투다가 마침내는 톈산 방면에 거점을 둔 동부 한가(汗家)와 서부 투르키스탄에 웅거한 서부 한가의 동서로 분열하였다. 서부에서는 투르크화한 한국의 귀족들(아미르)이 권력을 다투자, 그 중에서 티무르가 나타나서 서부 한가를 평정하고 1369년에 티무르제국을 건립하였다. 차가타이 한국은 조직화된 국가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정주지대(定住地帶)의 통치를 하였는데, 특히 징세(徵稅)는 토착민인 이슬람교도의 대관(代官)이 행하였다. 서부 한가는 14세기 초부터 투르크 이슬람화하였으나, 에센 부카를 시조로 하는 동부 한가는 모구리스탄한국으로 불리며 몽골의 유목적 생활전통을 유지하기도 하였는데, 16세기초까지 톈산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티무르왕조 (Timurids)
티무르와 그의 자손이 지배하였던 왕조(1369∼1508년)로 중앙아시아를 중심으로 하여 메소포타미아와 코카서스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통치했다. 창시자 티무르는 몽골제국 왕실의 후예로, 1369년부터 중앙아시아의 트랜스옥사니아와 호라산 전역을 점령하기 시작했으며, 1366년에는 사마르칸드를, 1369년에는 발흐(Balkh)를 점령하고 점령지를 통합했다. 그는 사마르칸드에 도읍한 뒤, 몽골계의 차카타이부족의 이름을 걸고 통치를 시작했으며, 1380년부터는 서방을 정복하기 시작했다. 1389년에 이르러 티무르는 페르시아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정복하는데 성공했으며, 1401년에는 바그다드를 함락시켰다.
이후 티무르는 동쪽의 명나라를 정벌하고자 원정을 떠났으나 1405년 병사했으며, 그의 손자 칼릴(Khalil, 재위 1405~1409년)이 술탄의 칭호를 이어 받았다. 그러나 술탄 칼릴은 폭정을 펴 1409년 폐위되고, 티무르의 제4남 샤루크(沙哈魯, Shahrukh, 재위 1409~1447년)가 즉위하여 아프가니스탄의 서부 헤라트(Heart)를 도읍으로 삼았다. 그의 38년간의 치세(治世)는 티무르왕조의 전성시대를 이루었으나 제6대 술탄 아부 사이드(Abu Sa’id Gurgan, 재위 1451~1469년)가 사망한 뒤 헤라트와 사마르칸드를 비롯하여 여러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사마르칸드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은 술탄 아부 사이드의 후손들이 계속 통치했으며, 술탄 알리 미르자(Ali Mirza, 재위 1495~1500년)를 마지막으로 우즈베크족에게 멸망하였다. 한편 헤라트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은 샤루크의 손자인 야디가 무하마드(Yadigar Muhammad, 재위 1469~1470년)가 술탄위에 올라 통치하기 시작했으나, 1470년 9월 호라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티무르의 증손자 후세인 베이카라(Husayn Bayqarah, 재위 1470~1506년)와의 분쟁에서 패하며 왕위를 넘겨주게 되었다.
술탄 후세인은 재위 초창기에는 티무르왕조 전성기 때의 영토를 거의 회복하는 듯했으나, 1500년에 사마르칸드의 티무르왕조가 우즈베크에게 멸망한 뒤로 위축되기 시작했다. 이미 강성해진 우즈베크족은 헤라트의 티무르왕조의 영토를 위협하기 시작했으며, 술탄 후세인의 근거지였던 쿠라산까지 점령당할 위기에 놓여있었다. 술탄 후세인은 이를 막아보고자 했으나 1506년 사망했으며, 그 후 왕위계승 문제를 둘러싼 두 아들인 바디 후세인(Badi Husain)과 무자파르 후세인(Muzaffar Husain) 간의 갈등으로 내분이 일어났다. 우즈베크족의 지도자 무하마드 샤이바니(Muhammad Shaybani)가 이를 기회로 1507년에 헤라트를 점령한 뒤 티무르왕조의 후손들을 각지로 유배시킴으로서 왕조가 멸망했다.
티무르왕조는 비록 몽골과 투르크계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나, 이슬람을 받아들인 이후로는 페르시아와 아랍의 문화를 흡수하여 독특한 문화를 발전시켰다. 특히 지배계층은 고도로 발달한 페르시아의 미술과 문학을 높이 평가하고 이를 장려했으며, 시문학의 발전이 두드러졌다. 티무르왕조 통치기에 가장 유명한 시인이었던 누르 알-딘 자미(Nur al-Din Jami, 1414~1492년)는 오늘날까지도 대표적인 페르시아 시문학의 대가로 평가 받고 있다. 본래 티무르왕조 초기에는 투르크어, 차가타이어 등이 주로 사용되었으나, 페르시아 문학이 발전하면서 점차 페르시아어의 비중이 증가했다. 그러나 술탄 후세인 시기에 들어서면 왕조 차원에서 투르크 전통을 지키고자 투르크어 문학을 장려하기도 했다. 또한 티무르왕조는 페르시아 화풍의 세밀화를 비롯한 회화, 건축, 천문학 등의 발전에도 기여했으며, 술탄 중 한 명인 울룩 베그(Olog Beg)는 위대한 천문학자였다.
오고타이한국
징기즈칸의 셋째 아들 오고타이를 시조로 하여 몽골제국의 일부를 이룬 오고타이가(家)의 국가(1218∼1310년)이다. 징기즈칸은 중앙아시아 원정을 떠나기에 앞서 미리 그 일대의 땅을 여러 아들에게 분봉(分封)했는데, 오고타이는 톈산북로[天山北路]의 에밀지방(현재의 중국령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북서부에 위치)으로부터 이르티시강 상류지방을 소령지(所領地)로 받았다. 오고타이칸(太宗)과 그의 아들 구유크칸(定宗)은 잇따라 몽골제국의 대칸[大汗]이 되어 수도인 카라코룸으로 옮겨갔으나, 남은 일족은 원래의 소령지를 계승하였다. 구유크칸이 죽은 뒤 몽골제국의 대칸 자리는 툴루이가(家)의 몽케칸(憲宗)과 그 자손이 차지하여 오고타이가는 권력을 잃고 불만이 컸다. 특히 오고타이의 손자 카이두[海都]는 툴루이가의 쿠빌라이칸(世祖)이 원조(元朝)의 대칸이 되자 이에 항거하여, 중앙아시아의 차가타이한국도 지배하고 1260년대부터 1301년까지 원나라와 싸웠다. 그러나 카이두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차바르[察八兒]는 차가타이한국의 두와칸에게 영토를 빼앗기고 1310년 도망하여 원나라에 귀순했기 때문에 오고타이한국은 멸망하였다. 이 나라는 1세기도 채우지 못한 단명(短命)의 유목국가로서 제도나 문화면으로는 볼 만한 것을 남기지 못하였다. <작성자 안수 집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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