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의 쇠락, 탄지마트의 미완과 계속되는 발칸 반도의 영토 상실
압뒬메지트 1세 시대
제국의 대개혁, 탄지마트 추진
AD 1839년 궐하네 칙령
AD 1839년 7월 1일 마흐무트 2세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그의 아들인 압뒬메지트 1세가 오스만 제국의 새로운 술탄으로 즉위하였다. 그리고 마흐무트 2세는 그동안 오스만 제국이 여러가지 개혁을 시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세르비아, 그리스, 이집트, 알제리 등의 여러 속주들을 상실하고 '유럽의 환자(Sick man of Europe)'라는 비아냥을 들을 정도로 국력이 쇠퇴하자 기존의 낡은 종교 및 군사 제도로는 한계에 봉착했다고 여기고 대대적으로 유럽의 제도를 도입하는 일련의 개혁 운동을 추진했다. 이를 '탄지마트(Tanzim?t)'라고 부르는데 투르크어로 재조직을 의미했다. 또한 탄지마트는 위로부터 시작된 개혁이기 때문에 술탄이 오스만 제국의 시민들에게 은혜를 베푼다는 의미로 한국에서는 '은혜 개혁(恩惠改革)'이라고도 한다.
압뒬메지트 1세의 모습
탄지마트는 AD 1839년 11월 3일 압뒬메지트 1세가 '툽카프 궁전(Topkapı Sarayı)'의 '궐하네(Gulhane; 장미의 방)'에서 칙령을 공포하며 시작되었다. 이를 '궐하네 칙령(Gulhane Hatt-ı ?erif)'이라고 부른다. 궐하네 칙령의 초안은 무스타파 레쉬드 파샤가 작성하였는데 그는 이후 대(大) 와지르를 6차례(AD 1846 ~ AD 1848년, AD 1852년 ~ AD 1852년, AD 1852년, AD 1854년 ~ AD 1855년, AD 1856 ~ AD 1857년, AD 1857 ~ AD 1858년)나 역임하면서 탄지마트를 주도적으로 추진하게 된다. 궐하네 칙령은 술탄의 권한 일부의 의회 이양, 이슬람 무슬림과 비(非) 무슬림의 법적인 평등, 모든 오스만 제국의 시민의 생명, 명예, 재산에 대한 완전한 보장, 공개 재판이 없는 임의 처벌 금지, 재산 규모에 따른 과세 및 임의 과세 금지 등의 내용을 담고 있었다.
궐하네 칙령 이후로도 탄지마트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AD 1840년 오스만 제국 최초의 지폐 발행과 우체국 설립, 재정 제도의 재조직, 민법 및 형법의 개편 등이 이루어졌다. AD 1841년에는 훗날 설립되는 오스만 제국 의회의 모태가 탄생했고 AD 1843년부터 AD 1844년까지 군제 및 징병제 개편이 이루어졌다. AD 1844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국가와 국기가 수정되었고 최초로 성인 시민에 대한 인구 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신분증이 발행되었다. AD 1845년에는 공공 교육 위원회가, AD 1847년에는 교육부가 창설되며 공공 교육이 강화되었고 AD 1847년 노예제 및 노예 무역이 금지되었다. AD 1848년 근대식 대학과 학술원, 사법 학교가 세워졌고 AD 1850년 보건부의 설립과 무역법의 제정이 이루어졌고 그 밖에 AD 1851년 최초의 증기선에 의한 여객 회사 설립, AD 1854년 이스탄불의 근대식 지방자치제 도입, AD 1855년 도시 계획 위원회 설립이 이루어졌다.
궐하네 칙령의 모습
탄지마트로 인해 모든 오스만 제국의 시민들이 법적인 보호를 받게 되면서 지방관에 대한 임의적인 사형이나 재산 몰수가 금지되었다. 군사 제도는 프로이센을 모방하여 프로이센 군복과 유사한 군복과 프로이센식 징병 제도를 도입했고 상법과 형법은 주로 프랑스의 법체계를 모방한 개정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슬람 무슬림과 비(非) 무슬림이 법적으로 동등해지면서 종교와 무관하게 모두 법의 보호를 받는 대신에 동등하게 납세와 군역의 의무가 부과되었다. 또한 공공 교육의 확대로 인해 오스만 제국의 시민들의 교육 수준이 높아질 수 있었다.
AD 1856년 하티 후마윤
압뒬메지트 1세는 러시아와의 크림 전쟁(Crimean War, AD 1853년 ~ AD 1856년)에서 영국과 프랑스의 도움을 받은 후 두 나라의 압력을 받으며 AD 1856년 2월 18일 탄지마트의 중요한 2번째 칙령인 '하티 후마윤(Hatt-i Humayun; 술탄 칙령)'을 공포하여야 했다. 하티 후마윤은 오스만 제국의 모든 시민이 민족, 종교, 계급과 무관하게 모두 법적으로 동등하다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AD 1856년 비(非) 무슬림의 징병제인 '데브쉬르메(Dev?irme)' 제도의 폐지, 철도망의 도입, 중앙은행의 설립, AD 1857년 토지법의 제정, AD 1858년 성적 소수자의 비(非) 범죄화, AD 1859년 여러 고등 교육 기관의 설립, AD 1864년 언론 및 출판에 관한 법률 제정 등이 이루어졌다.
이렇게 하여 오스만 제국 내에서 겉으로는 이슬람 무슬림과 비(非)이슬람교 신자 사이의 평등이 실현되었지만 정작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 양 측의 반발을 모두 샀다. 그동안 오스만 제국은 '밀레트(Millet)'라고 불리는 종교적 자치구가 교육과 사법을 자체적으로 담당하고 있었는데 이제 중앙집권화를 위해서 밀레트의 특권이 폐지되었기 때문이었다. 이슬람교 측에서는 그동안 이슬람 교육과 종교법을 관장했던 이슬람 법학자인 '울라마(Ulama)'의 권위가 약화된 것을 문제삼았고 그리스도교 측에서는 밀레트의 특권 폐지로 인한 자치권 제한에 반발하였다.
몰다비아-왈라키아, 몬테네그로의 이탈
크림 전쟁
한편 프랑스는 나폴레옹 1세(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카인 나폴레옹 3세(샤를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AD 1852년 11월 국민투표를 통해 황제로 즉위했다. 그리고 나폴레옹 3세는 국내 로마카톨릭 세력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프랑스가 오스만 제국의 최대 채권국이라는 점을 이용하여 팔레스타인의 로마카톨릭 신자에 대한 보호권을 얻어 내었다. 그러나 러시아도 이미 AD 1774년에 오스만 제국과 체결한 '퀴취크 카이나르카 조약(Treaty of Kucuk Kaynarca)'을 통해서 오스만 제국 내의 동방정교회 신자에 대한 보호권을 인정받았기 때문에 프랑스에 대한 특권 부여에 항의하며 오스만 제국에게 이를 철회하도록 요구하고 나섰다. 그리고 급기야 러시아가 선전포고도 없이 AD 1853년 7월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점령하며 무력시위에 들어갔다.
이 즈음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는 사실상 오스만 제국의 영향력을 벗어나기는 했지만 어찌되었던 명목상으로는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속국이었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이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었다. 이에 따라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간의 전면전인 크림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전장은 전쟁의 시발점이 된 몰다비아와 왈라키아 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사이의 다른 국경인 카프카스 지역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전쟁이 시작되자 AD 1853년 11월 아나톨리아 반도의 항구인 시노프에서 벌어진 시노프 해전(Battle of Sinop)에서 오스만 제국의 해군이 패배하면서 카프카스 지역에 대한 보급에 문제가 발생했다.
그런데 프랑스와 영국이 흑해 내 오스만 제국의 수송 선단에 대한 보호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함대를 파견하였다. 프랑스는 자신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권리를 지키기 위함이었고 영국도 러시아가 발칸 반도와 동지중해를 장악할 경우 인도 식민지와의 교역에 큰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하여 개입하게 되었다. 이어서 오스트리아까지 러시아 군이 발칸 반도에 파견된 것을 경계하며 몰다비아와 왈라키아에서 물러나지 않으면 개입하겠다는 최후 통첩을 AD 1854년 7월에 보내자 러시아 군이 어쩔 수 없이 전면 철수하였다. 다만 오스트리아 군이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점령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오스트리아의 영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크림 전쟁의 전개 모습
이제 영국 및 프랑스는 오스만 군과 함께 AD 1854년 9월 러시아 흑해 함대의 사령부가 있는 세바스토폴을 노리면서 전쟁의 명칭이 유래한 크림 반도의 전역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비록 양 측 지휘관 모두 준비 부족 속에서 무모한 지휘를 거듭하면서 무수한 사상자가 발생하는 졸전이 이어졌지만 AD 1855년 9월 11일 세바스토폴이 최종적으로 함락되면서 전황 자체는 러시아에게 매우 불리해졌다. 더욱이 AD 1855년 1월 이탈리아의 사르데냐 왕국이 반(反) 러시아 동맹에 가담한 데 이어서 AD 1855년 11월 스웨덴 마저 이에 합세하면서 러시아의 외교적 고립이 심화되었다. 결국 러시아는 오스트리아의 중재를 받아 들여 AD 1856년 2월 프랑스의 파리에서 강화 회담을 진행하였고 3월 30일 '파리 조약(Treaty of Paris)'을 체결하며 크림 전쟁을 마무리하여야 했다.
파리 조약의 체결과 몰다비아-왈라키아의 이탈
이렇게 하여 오스만 제국은 모처럼 만에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전국의 지위를 얻었다. 패전한 러시아는 영유하고 있던 흑해 연안의 베사라비아 지역을 몰다비아에게 반환하고 AD 1774년의 퀴취크 카이나르카 조약을 통해 얻었던 오스만 제국 내 동방정교회 신자에 대한 보호자 권리도 포기해야 했다. 다만 오스만 제국이 영토 보전과 독립을 보장받았으나 영국 및 프랑스의 지원 덕분에 승리한 만큼 별다른 실리는 얻지 못했다. 오히려 흑해가 중립 영해로 지정되고 도나우 강이 모든 선박에게 개방되면서 이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독점적 특권이 사라졌다. 그리고 몰다비아와 왈라키아가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명목상 종주권 아래에 있었지만 완전한 자치권을 획득하면서 실질적으로 독립하게 되었고 AD 1859년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에 의해 '몰다비아-왈라키아 연합공국(United Principalities of Moldavia and Wallachia)'으로 합쳐진 후 AD 1862년 '루마니아(Romania; '로마인의 땅')'라는 이름의 하나의 국가로 통합된다.
몰다비아-왈라키아 연합공국(옅은 황색)의 영토 현황
몬테네그로 공국의 성립
몬테네그로는 AD 15세기 말에 오스만 제국에게 병합을 당하면서 알바니아의 '슈코더르 산자크(Sanjak of Shkoder)'의 일부가 되었다. 그러나 AD 1514년 '몬테네그로 산자크(Sanjak of Montenegro)'로 분리되었고 AD 1515년부터 체티녜의 주교가 '블라디카(Vladik)'라고 불리며 통치자가 되는 독특한 자치제가 유지되었다. 다만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향 아래로 들어가면서 처음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이 파견하는 총독에게, 나중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을 병합한 오스트리아 제국이 파견하는 총독에게 통치를 간섭을 받아야 했으나 AD 1832년 몬테네그로의 블라디카인 페타르 2세에 의해 이것도 폐지되었다. 그리고 AD 1852년 3월 새로운 블라디카가 된 다닐로 2세는 아예 성직자의 삶을 포기한 채 결혼을 하며 몬테네그로를 세속 영지인 '몬테네그로 공국(Principality of Montenegro)'으로 탈바꿈 시켰다. 그 뒤 AD 1858년 5월 몬테네그로 공국이 오스만 제국의 침공을 격퇴해 내고 양 국의 국경선을 확정하면서 사실상의 독립을 이뤄냈다.
몬테네그로 공국의 세력 확대 현황
압뒬라지즈 시대
탄지마트의 계승
AD 1861년 6월 압뒬메지트 1세가 39살의 나이에 사망하자 그에게 무려 18명의 아들이 있었지만 이복동생인 압뒬라지즈가 술탄으로 즉위하였다. 그리고 압뒬라지즈도 즉위 초 압뒬메지트 1세의 탄지마트를 계승하여 대(大) 와지르인 메흐메트 푸아트 파샤와 메흐메트 에민 알리 파샤의 주도에 의한 개혁을 계속해서 추진하였다. AD 1861년 프랑스 교육 제도를 모방한 공공 교육을 도입하였고 이스탄불 대학을 근대식으로 재편하였으며 AD 1869년에는 초등 교육의 무상화 계획을 발표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의 최초로 민법도 공포하였다.
압뒬라지즈의 모습
AD 1864년에는 행정구역 개편도 이루어졌다. 본래 오스만 제국의 행정 구역은 여러 개의 '에야레트(Eyalet)'로 구성되어 있었고 에야레트는 다시 '산자크(Sanjak)'로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나 AD 1864년 압뒬라지즈는 기존의 예야레트 제도를 폐지하고 예야레트보다 좀더 세분화한 새로운 행정구역인 '빌라예트(Vilayet)'를 신설하였다. 빌라예트는 술탄이 임명한 '발리(Vali)'가 통치하였고 다시 산자크 혹은 '리바(liva)'로 좀더 세분화 되었다. 또한 AD 1868년 프랑스의 권유에 따라 '국무회의(?ura-yı Devlet)가 만들어졌다.
한편 압뒬라지즈는 크림 전쟁을 지원해 준 영국 및 프랑스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AD 1867년 파리와 런던 등을 방문하면서 서유럽을 방문한 최초의 오스만 제국의 술탄이 되었다. 또한 이집트가 반(半) 독립 상태가 되면서 무함마드 알리와 그의 상속자가 사용하고 있던 '헤디브(Khedive; 부왕)' 칭호를 처음으로 승인하였다. 이에 따라 AD 1866년 이집트의 통치자가 된 무함마드 알리의 아들인 이브라힘 파샤가 처음으로 헤디브 지위를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공인받게 되었다. 대신에 오스만 제국이 여전히 이집트에 대한 명목상 종주권을 지니면서 매년 제공받던 연공의 규모를 늘리기로 했다.
AD 1862년 오스만 제국의 영토 현황
내우외환과 압뒬라지즈의 폐위
AD 1869년 메흐메트 푸아트 파샤가 사망하고 2년 뒤에 다시 AD 1871년 메흐메트 에민 알리 파샤마저 사망하면서 탄지마트에 위기가 찾아왔다. 또한 발칸 반도에서 민족주의가 고조되고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그리스도교 속주들에게서 불온한 움직임이 감지되면서 AD 1875년 '헤르체코비나 봉기(Herzegovina uprising)'과 AD 1876년 불가리아의 '4월 봉기(April Uprising)'가 연달아 일어났다. 설상가상으로 그동안 오스만 제국과 우호 관계를 유지했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과 벌인 프로이센-프랑스 전쟁(Franco-Prussian War, AD 1870년 ~ AD 1871년)에서 패배하면서 폐위를 당했기 때문에 더 이상 프랑스의 지원도 기대하기 힘들어졌기 때문에 압뒬라지즈가 크림 전쟁으로 악화되었던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에 나서야 했다.
그런데 AD 1873년 가뭄과 AD 1874년의 대홍수로 오스만 제국이 피폐해졌으나 늘어나는 국가 부채를 상환하기 위해서 오히려 조세 부담은 늘어나면서 오스만 제국 내에 불만이 팽배해졌다. 그리고 메흐메트 푸아트 파샤와 메흐메트 에민 알리 파샤의 사망 이후 압뒬라지즈가 술탄의 권위를 남용하고 재정을 낭비했기 때문에 압뒬라지즈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더욱이 압뒬라지즈가 러시아와의 우호 관계 수립에 나섰지만 이 당시 오스만 제국 내에서는 헤르체코비나와 불가리아의 반란 배후에 러시아가 있다는 의심이 만연했기 때문에 압뒬라지즈에 대한 불만이 한계에 도달하게 되었다. 결국 압뒬라지즈는 AD 1876년 5월 30일 개혁파이자 국무회의 의장인 미드하트 파샤가 이끄는 각료들에 의해 퇴위를 강요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리고 며칠 뒤 시체로 발견되었는데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지만 일부에서는 타살로 보기도 한다.
압뒬라지즈의 사망 모습
압뒬 하미트 2세 시대
오스만 제국 헌법 제정과 탄지마트 종료
압뒬라지즈의 폐위 이후 정변 세력은 전(前) 술탄 압뒬메지트 1세의 장남인 무라트 5세를 새로운 술탄으로 옹립했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그가 정신착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즉위 93일 만인 AD 1876년 8월 31일 다시 폐위되고 그의 동생인 압뒬 하미트 2세가 새로운 술탄으로 옹립되었다. 그리고 미드하트 파샤가 12월 9일 대(大)와지르로 임명된 후 탄지마트를 집대성하는 오스만 제국 역사상 최초의 성문 헌법 제정에 착수했다. 여기에는 유럽의 근대적이고 자유주의적 헌법을 모방하여 민족과 종교의 구분 없는 평등권 보장, 노예제 폐지, 종교법이 아닌 민법에 의한 독립된 재판, 초등 교육에 대한 보통 교육 실현, 양원제 의회 설립 등의 내용 등이 담겼다. 양원회 의회의 경우 상원은 술탄이 임명하지만 하원은 직접 선거로 선출되도록 하면서 입헌군주제의 성격을 띄게 되었다.
압뒬 하미트 2세의 모습
비록 미드하트 파샤의 헌법이 처음에는 오스만 제국의 시민들에게 호응을 받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비(非) 무슬림에게도 평등권을 제공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보수파의 거센 반발을 사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드하트 파샤는 포기하지 않은 채 술탄인 압뒬 하미트 2세에게 헌법 승인을 요청하였고 이를 압뒬 하미트 2세가 받아들이면서 AD 1876년 12월 23일 '오스만 제국 헌법(터키어 Kanun-u Esasi)'에 서명하였다. 이렇게 하여 오스만 제국은 외형적으로 입헌군주국이 되었고 그동안 제국의 개혁을 주도했던 탄지마트가 공식적으로 종료되었다.
그렇지만 오스만 제국의 헌법은 여러 가지 한계가 있었는데 술탄의 선전포고권, 각료 임명권, 법률 승인권 등이 그대로 유지되면서 술탄의 권한을 그리 견제하지 못하게 되었다. 더욱이 미드하트 파샤가 보수파의 반발로 궁지에 몰렸을 때 압뒬 하미트 2세는 미드하트 파샤와 협상하여 흔히 제113조라고 불리는 독소 조항을 헌법에 삽입하였는데 이를 통해서 술탄에게 계엄선포권이 부여되었고 국가에 위해를 가하는 자를 재판없이 임의로 국외 추방할 수 있는 권한도 추가되었다. 이를 통해 압뒬 하미트 2세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을 마음대로 추방시킬 수 있게 되었고 실제로 미드하트 파샤도 이 조항에 따라 AD 1877년 2월 5일 추방을 당하게 된다.
AD 1876년 오스만 제국 헌법의 모습
러시아-투르크 전쟁과 베를린 조약
AD 1875년 헤르체코비나 봉기와 세르비아-투르크 전쟁 발발
한편 AD 19세기 유럽에 민족주의 사상이 휩쓸면서 '이탈리아 통일(Italian unification, AD 1861년)'과 '독일 통일(Unification of Germany, AD 1871년)'이 차례로 이루어졌고 독일 통일에서 배제된 채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한 오스트리아는 속국인 헝가리를 자신과 동등한 수준으로 격상시키는 이른바 '오스트리아-헝가리 타협(Austro-Hungarian Compromise)'을 통해서 '오스트리아-헝가리(Austria-Hungary)'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세르비아 및 그리스와 같이 자치 획득 혹은 독립에 성공한 사례가 나타나자 그동안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던 발칸 반도의 나머지 그리스도교인들도 민족주의에 입각한 봉기를 추진하면서 AD 1875년 7월 헤르체코비나 봉기와 AD 1876년 봄 불가리아의 4월 봉기가 잇달아 일어났다.
비록 오스만 제국이 불가리아 봉기는 곧바로 진압했으나 그 과정에서 대대적인 학살이 일어났다는 의혹을 샀기 때문에 다른 유럽 국가들의 공분을 사면서 외교적으로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또한 오스만 제국이 헤르체코비나 봉기의 조기 진압에는 실패하면서 봉기가 '보스니아 빌라예트(Vilayet of Bosnia)'의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오스만 제국 내에서 AD 1876년 5월 30일 압뒬라지즈가 폐위되는 혼란이 발생하자 6월 18일 세르비아 공국과 몬테네그로 공국이 헤르체코비나의 지원을 위해 가세하면서 헤르체코비나 봉기가 세르비아-투르크 전쟁(Serbian-Turkish Wars)과 몬테네그로-투르크 전쟁(Montenegrin?Ottoman War)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비록 몬테네그로는 헤르체코비나에서 오스만 군에게 승리를 거뒀으나 기대하던 러시아의 지원을 얻지 못한 세르비아는 패배하면서 보스니아 진출에 실패했다.
유럽 강대국의 콘스탄티노플 회의
이 당시 러시아는 섣부른 참전으로 다른 유럽 강대국의 개입을 불러왔던 크림 전쟁과 같은 실패를 반복하기를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세르비아에 대한 지원을 거절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세르비아는 AD 1876년 9월 알렉시나크와 10월 주니스에서 잇달아 패배하고 오히려 수도인 베오그라드가 위협을 당하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전황이 세르비아에게 너무 불리하게 흘러가자 그제서야 러시아가 군대를 움직여 국경 지역에서 무력 시위를 벌이며 오스만 제국에게 세르비아와의 강화 협상에 나설 것을 종용하고 나섰다.
AD 1876년 12월 23일 이스탄불에서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가 참여하는 국제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를 유럽에서는 이스탄불의 옛 명칭에서 유래한 '콘스탄티노플 회의(Constantinople Conference)'라고 부른다. 그리고 콘스탄티노플 회의에서 발칸 반도의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한 처우에 대해 논의한 끝에 AD 1877년 1월 20일 보스니아와 헤르체코비아에게 자치를 허용하고 헤르체코비나 남부 지역만 몬테네그로 공국에게 할양하도록 결정했다. 또한 불가리아도 2개의 빌라예트로 재편한 후 자치를 허용하도록 권고했다. 하지만 오스만 제국은 이미 AD 1876년 12월 23일 헌법을 공포하며 이슬람 무슬림과 비(非) 무슬림 간의 평등을 선언한 상태이기 때문에 유럽 강대국들의 이번 권고를 지나친 내정 간섭이라며 수용을 거부했다.
AD 1877년 유럽 모습에 대한 풍자화
러시아-투르크 전쟁의 발발과 산 스테파노 조약의 체결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플 회의의 권고안을 거절하자 러시아가 AD 1877년 4월 선전포고를 하면서 새로운 러시아-투르크 전쟁(Russo-Turkish War)이 발발했다. 그리고 러시아 군은 발칸 반도로 진출하여 플레브나 요새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오스만 제국이 끈질기게 저항했으나 5개월 간의 포위전 끝에 AD 1877년 12월 결국에는 함락되었다. 그 사이 세르비아는 러시아와 무관하게 단독으로 오스만 제국과 협상을 벌여 AD 1877년 3월 강화 협약을 체결하였으나 같은 해 12월 플레브나 요새의 함락을 계기로 이를 파기하고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을 재개했다.
러시아 측에는 세르비아 이외에 몬테네그로, 루마니아는 물론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기를 원하는 보스니아 혁명군과 불가리아 의용군까지 참여하였다. 이제 러시아 군이 세르비아의 참전을 계기로 오스만 제국의 수도인 이스탄불로 진격을 시작했고 인근에 위치한 에디르네까지 함락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러시아 군이 이스탄불 근교까지 진출하자 이를 경계한 영국이 군함까지 동원한 채 무력 시위를 동반한 중재에 나서면서 AD 1878년 1월 러시아 군이 진격을 중지했다. 그리고 AD 1878년 3월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사이에 '산 스테파노 조약(Treaty of San Stefano)'이 체결되었다.
이를 통해서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이 공식적으로 폐지되었고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의 보스니아 빌라예트도 자치를 인정받았다. 특히 불가리아가 여전히 오스만 제국에게 종속되기는 하였지만 마케도니아 대부분 지역을 포함해 도나우 강, 에게 해, 흑해에 이르는 광활한 영토가 별도로 '불가리아 공국(Principality of Bulgaria)'으로 분리되었다. 이는 AD 1396년 오스만 제국에게 '불가리아 제2제국(Second Bulgarian Empire)'이 멸망당한 이후 480여년 만의 부활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불가리아는 산 스테파노 조약이 체결된 3월 3일이 국가 공휴일로 지정되어 있다. 또한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1조 4100억 루블을 배상금으로 지불받고 카프카스 지역과 루마니아의 베사라비아 지역을 양도받았다. 그 밖에 보스포루스 해협과 다르다넬스 해협에 대하여 평상시 모든 선박과 전쟁시 중립국 선박에 대한 자유로운 통행이 보장되었다.
산 스테파노 조약에 따른 불가리아 공국의 영토 현황
유럽 강대국의 재개입과 베를린 회의
그런데 산 스테파노 조약을 통해서 발칸 반도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커지자 인접한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이에 반대하고 나섰다. 그리고 나폴레옹 전쟁(Napoleonic Wars, AD 1803년 ~ AD 1815년)의 종료 이후 지속적으로 러시아를 견제하던 영국이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오스만 제국과 발칸 반도를 둘러싼 '동방 위기(Eastern Question)'가 다시 도래하였다. 그러자 러시아는 내심 독일의 외교를 주도하고 있던 총리 오토 에두아르트 레오폴트 폰 비스마르크-쇤하우젠(약칭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협조를 기대하며 중재를 요청하면서 AD 1878년 6월 13일 러시아,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헝가리, 이탈리아, 독일 등의 유럽 주요 강대국이 참여하는 '베를린 회의(Congress of Berlin)'가 소집되었다. 하지만 러시아의 예상과 달리 베를린 회의는 러시아에게 매우 불리하게 진행되었다.
AD 1878년 베를린 회의 모습
베를린 회의가 산 스테파노 조약에서 인정한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독립을 재확인하면서 AD 1881년 '루마니아 왕국(Kingdom of Romania)', AD 1882년 '세르비아 왕국(Kingdom of Serbia)', AD 1910년 '몬테네그로 왕국(Kingdom of Montenegro)'이 각각 수립된다. 그리고 불가리아의 자치 공국 수립 역시 인정했으나 영토는 대거 축소되면서 트라키아 북부와 마케도니아 지역이 제외되었다. 대신에 트라키아 북부는 '동(東) 루멜리아(Eastern Rumelia)'라는 이름으로 오스만 제국이 그리스도교 총독을 임명하는 불가리아인들의 반(半) 자치 지역이 되었다. 또한 그 이외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이 유지되었지만 오스트리아-헝가리가 별도의 관할권을 얻으면서 사실상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지배하게 되었다. 또한 영국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키프로스 섬을 조차하게 되었다.
러시아가 이를 받아들이면서 AD 1878년 7월 13일 '베를린 조약(Treaty of Berlin)'이 체결되지만 발칸 반도에 대한 각 국의 이해 관계가 전혀 해소시키지 못했다. 비록 러시아도 산 스테파노 조약에서 얻은 이득을 대부분 인정받았지만 할양받은 영토 중에서는 아나톨리아 반도 동부의 일부를 반환하도록 결정되면서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산 스테파노 조약에서 얻은 이익을 지켜내는 데는 실패했기 때문에 베를린 회의를 주재한 독일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이 경우에는 보스니아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되었지만 보스니아인들이 반발하면서 갈등의 불씨를 안게 되었다. 또한 세르비아와 불가리아가 모두 자신들의 영토에 불만족하면서 서로 간의 국경 대립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된다. 이렇게 베를린 조약이 발칸 반도를 둘러싼 분쟁을 해소하기는 커녕 오히려 첨혜한 대립과 앙금만 남기면서 발칸 반도를 유럽의 화약고로 만들고 말았다.
AD 1878년 베를린 조약 이후 발칸 반도의 모습
압뒬 하미트 2세의 후기 전제 정치
압뒬 하미트 2세의 보수 반동
베를린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의 발칸 반도 영토가 더욱 축소되면서 마케도니아와 알바니아, 트라키아 남부 만 남게 되었다. 그러자 압뒬 하미트 2세는 흔들리는 제국을 재건하기 위하여 탄지마트로 성립된 입헌군주제를 폐지하고 전제군주제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AD 1877년 3월에 소집된 의회를 해산시켰고 AD 1878년 2월에는 유럽 강대국의 도움을 기대하고 그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승인하였던 AD 1876년의 오스만 제국 헌법에 대한 효력을 중지시켰다. 그리고 '일디즈 궁전(Yıldız Palace)'에 칩거한 채 비밀 경찰, 전신으로 인한 통신망 확대, 엄격한 검열 제도를 통하여 나머지 40년 간 전제 정치를 펼쳤다.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을 개혁하기 위해서 애써 추진되었던 탄지마트가 무효화되었다. 하지만 시대착오적인 전제 정치로 오스만 제국의 붕괴를 막을 수 없었다.
AD 1881년 프랑스가 북아프리카의 튀니지를 점령하였고 AD 1882년 영국이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명목상 속국이었던 이집트를 사실상 식민지로 만들었으며 AD 1885년 불가리아가 동(東) 루멜리아까지 병합했다. 이에 압뒬 하미트 2세는 독일의 외교 지원을 바라며 각종 이권을 넘겨줬고 AD 1899년에는 이스탄불과 바그다드를 연결하는 '바그다드 철도(Baghdad Railway)'의 건설까지 허용해야 했다. 그러나 AD 1894년 아르메니아의 반란과 크레타 섬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그리스의 개입을 초래하면서 AD 1897년 '그리스-투르크 전쟁(Greco-Turkish War)'이 벌어졌고 이로 인해 유럽 강대국들까지 가세하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비록 오스만 제국이 독일의 지원을 받아 겨우 그리스를 물리칠 수 있었지만 크레타 섬의 자치 허용은 막을 수 없었다.
AD 1900년 오스만 제국의 영토 현황
압뒬 하미트 2세의 폐위
이후 압뒬 하미트 2세는 유럽 강대국들의 제국주의 침략으로부터 오스만 제국을 지켜내기 위한 방법으로 이슬람교를 중심으로 이슬람 세계를 통합하자는 '범이슬람주의(Pan-Islamism)'를 주창하였고 전 세계의 이슬람교 무슬림의 모금으로 다마스쿠스로부터 메디나에 이르는 '헤자즈 철도(Hejaz railway)'를 부설하면서 이러한 의지를 표출하기도 했다. 그리고 내부적으로 교육 개혁에 많은 관심을 가지며 전문학교 18개와 이스탄불 대학를 설립하고 육군 사관학교를 증설하였다. 또한 철도와 전신 체계도 확대하며 오스만 제국의 근대화를 이어갔다.
그렇지만 이러한 압뒬 하미트 2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가 부채는 계속해서 늘어나면서 오스만 제국은 재정 파탄에 이를 지경이었고 유럽 강대국들의 내정 개입도 노골적이 되었다. 결국 AD 1908년 압뒬 하미트 2세의 전제군주 정치와 유럽 강대국의 노골적인 내정 개입, 지속되는 재정 위기에 반발한 '청년 투르크 혁명(Young Turk Revolution)'이 일어났고 AD 1909년 4월 보수 세력의 반(反) 혁명이 실패로 끝나면서 압뒬 하미트 2세가 최종적으로 폐위되었다. 그리고 압뒬 하미트 2세를 대신하여 그의 동생인 메흐메트 5세가 새로운 술탄으로 옹립되었다.
베를린-바르다드 철도 추진
오스만 제국은 압뒬라지즈의 재위 시절에 적극적으로 아시아 영토에 대한 철도 부설에 힘쓰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이스탄불의 아시아 영토인 하이다르파샤와 펜디크를 연결하는 철도가 AD 1872년 개통되었고 AD 1873년에는 게브제와 이즈미트까지 차례로 연장되었다. 그리고 앙카라와 메소포타미아까지 연장하는 방안이 추진되었으나 오스만 제국의 단독으로는 추진이 어려웠기 때문에 AD 1880년에 60% 지분이 영국 회사에게 양도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아다파자리까지 철도가 연장되었지만 영국 회사도 단독으로는 앙카라까지 연결하는 것은 무리였기 때문에 영국과 미국의 다른 회사로부터 투자 유치를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이에 따라 영국 회사도 앙카라까지 연결하는 것은 포기하였고 오스만 제국은 독일에게 앙카라까지 철도 연장하는 방안을 의뢰하였다.
AD 1888년 독일의 '도이치뱅크(Deutsche Bank)'가 앙카라 철도의 건설을 위하여 '아나톨리아 철도 회사(독일어 Chemins de fer Ottomans d'Anatolie)'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AD 1889년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AD 1892년 앙카라까지 연장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에 고무된 오스만 제국은 이번에는 에스키셰히르와 코니아를 연결하는 철도의 건설을 의뢰하였다. 이는 이스탄불-앙카라 철도의 간선으로써 에스키셰히르로부터 시작하여 알라윤트, 아피온, 아크셰히르를 거쳐 코니아까지 연결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아나톨리아 철도 회사는 오스만 제국의 기대에 부응하여 알라윤트(AD 1894년), 아피온(AD 1895년)까지 차례로 개통한 데 이어서 AD 1896년 코니아까지 연결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이제 오스만 제국은 코니아부터 시작하여 알레포를 거쳐 바그다드까지 이어지는 바그다드 철도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바그다드 철도의 노선도
한편 독일은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하여 후발 주자로서 해외 식민지 개척에 나섰으나 이미 영국이 대서양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육로를 통하여 인도양까지 진출하는 방안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오스만 제국의 바그다드 철도 부설권을 획득하여 이미 설치되어 있는 베를린-이스탄불 철도와 이스탄불-앙카라 철도, 에스키셰히르-코니아 철도를 모두 연결하는 베를린-바그다드 철도를 완성하고 이를 최종적으로 페르시아 만의 무역항인 바스라까지 연장하는 방안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위하여 AD 1898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가 직접 오스만 제국을 방문하기도 했다.
오스만 제국도 AD 1898년부터 AD 1899년까지 바그다드 철도에 대한 입찰을 시행하였고 러시아, 영국, 프랑스, 독일이 모두 관심을 보였다. 먼저 러시아의 제안은 이스탄불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우려하여 기각되었고 영국의 제안은 AD 1899년 영국이 제2차 보어 전쟁에 휩싸이면서 무산되었다. 마지막으로 프랑스 자본가들이 독일의 계획에 투자하기로 결정하면서 AD 1899년 독일의 도이치뱅크가 손쉽게 바그다드 철도의 부설권을 획득할 수 있었다. 그리고 AD 1903년 바그다드 철도 건설을 추진하기 위한 '바그다드 철도 회사(독일어 Societe Imperiale du Chemin de fer de Bagdad)'를 설립하였다.
만일 베를린-바그다드 철도가 독일의 생각대로 완성된다면 장차 독일은 바스라를 이용하여 인도양으로 손쉽게 진출할 수 있었다. 또한 중동에서 새로운 자원으로 부각되고 있던 석유를 독일의 산업단지로 손쉽게 들여올 수도 있었다. 하지만 독일과 대립하던 영국과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의 양해만 있다면 앞으로 독일이 베를린-바그다드 철도를 이용하여 빠르게 중동과 페르시아 만까지 병력과 물자를 이송시킬 수 있는 점을 우려하기 시작했다. 영국은 인도 식민지에 대한 위협으로 느껴졌고 러시아도 카프카스 영토가 위험에 노출될 것을 걱정하였다. 이에 독일의 베를린-바그다드 철도 건설 추진은 장차 제1차 세계 대전(World War I, AD 1914년 ~ AD 1918년)의 원인 중 하나로 분석된다.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과 오스만 제국이 모두 패망하면서 베를린-바그다드 철도는 AD 1918년 미완의 상태로 중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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