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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1

소아시아 일곱 교회 위치 및 남아 있는 유적들

by 은총가득 2022. 6. 17.

소아시아 일곱 교회

 

7대 교회의 위치

 

현재 지명과 비교

 

 

1. 두아디라 교회

 

현지명은 악히사르(AKHISAR).

지리적으로 길고 넓은 골짜기에 위치해 있는 이곳은 B.C. 3세기경 알렉산더 대왕의 장군들중 셀레우코스가 이 지역을 점령해서 군대를 주둔시키고 두아디라 즉 "티아(Thya)의 마을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이 때 군대의 주둔만 가지고는 살아있는 도시가 될 수 없음을 인식하고 많은 유대인들을 이주시켜 그들의 전통적인 상술과 지리적 특성으로 이 도시를 상업도시로 번성케 했다. 그래서 이곳에 많은 상인조합(길드)이 있었다.

사도바울이 빌립보에서 만났다고 하는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Rydya)는 이 도시 출신이다. 이 여자는 자주장사였는데, 자주는 진홍색의 양모나 아마포로서 달팽이로부터 뽑아낸 물감으로 염색하는데 너무 비싸기 때문에 황제만 이 물감으로 염색된 옷을 입을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사도요한은 "네 나중 행위가 처음 것보다 많도다(계 2:19)"라고 칭찬 한 후 이사벨을 비유해서 교회의 신도들을 책망하고 있다. 이 당시 두아디라에 만연한 "삼바데"라고 불리우는 여자무당의 숭배를 배경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

 

 

 

 

두아디라는“두아의 성읍”이란 뜻을 지님, 오토칼에서 북쪽으로 위치해 있다. (항공 사진출처:구글어스)

 

 

-가는 방법

두아디라 교회도 악히사르까지 이즈미르 오토칼 2층에서 가는 돌무쉬가 있습니다. 오토칼이 악하시르 중심지에 있는데,

로타리에서 북쪽으로 200m정도 거리에 있습니다. 여기는 그 유명한 루디아가 실제로 사도 바울에게 세레를 받고

가족드에게 모두 세례를 받게 했던 유명한 여인의 고항이도 합니다.

이즈미르에서 당일치기 가능

자동차 : Salihli - D300 - D555 - Akhisar

 

2. 라오디게아 교회

 

라오디게아 지역의 로마시대 터.

 

현지명은 라이디캬(LAODIKYA). 리쿠스(Lycus)계곡에 위치한 부유한 상업도시로서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Antiochus 2세가 그의 부인 Laodice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라오디게아라고 불렀다. 이곳에서 6.5 Km 떨어진 히에라볼리의 온천물이 수로를 통해 라오디게아로 흘러 들어오게 하였다. 그런데 히에라볼리의 온천물은 이곳에 도착하면 식어서 덥지도 차지도 않는 물이 되는데, 계시록에서 이것을 신앙의 빈곤함에 비유하여 교회의 믿음이 덥지도 차지도 않음을 책망하고 있다. 또한 이 물은 광물질이 섞여있어 마시기에 부적당함으로 입에서 토하여 내치게 하겠다고 선언하고 있다.

1710년과 1899년 대 지진 때 이곳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현재 복원되지 않은 채 폐허 속에 로마식 야외운동장과 원형극장터, 그리고 폐허 속에 십자가가 선명하게 부각되어 있는 돌무더기가 남아있어 교회 터로 추정되고 있다.

 

 

 

라오디게아는“백성의 정의”라는 의미라는 뜻이 담겨 있다. 중앙 윗쪽에 둥구런 것 2개가 원형 경기장 (항공사진 출처:구글어스)

 

 

- 가는 방법

데니즈리에서 돌무쉬를 타고 파묵칼레로 가는 도중에 "라오디게아"라는 이정표가 보입니다. 실제로는 데니즈리에서

더 가깝습니다. 도로에서 약 1km를 걸어 들어가야 유적지가 보일 것입니다. 입장료를 내고 200m걸어서 언덕에 오르면

라오디게아의 광활한 도시와 교회의 흔적이 보일 것입니다. 북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파묵칼레의 목화성이 한 눈에 들어온다.

자동차 : 데니즈리 - D585번 국도 - D320 - (20-01) - 파묵칼레방향에서 왼쪽에 있다.

 

골로새 언덕

골로새 언덕은 " 거대함, 크다"라는 뜻으로 해석됩니다.

데니즈리 동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현재는 호나즈(Honaz)라고 부르며 약 5km 떨어져 있는 곳으로 사도 바울이

제자들을 양육할때 제자중 한 명인 에바브라가 이 곳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한 곳이다.

가는 방법 : 오토칼 D320번 - Pinankent - 20-06번 국도- 호나즈

 

 

(항공 사진출처:구글어스)

 

 

 

 

3. 버가모 교회

 

버가모 지역의 항공사진

 

 

현지명은 베르가마(BERGAMA). 버가모(Pergamum)의 기원은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 방비하기에 너무도 수월한 천연의 요새에 위치해 있어 매우 이른 시기부터 인간이 거주했던 곳으로 보인다. 알렉산더 대왕의 시대를 거쳐 로마제국시대, 비잔틴제국시대, 오스만제국에 이르기까지 많은 굴곡을 거쳐오면서 꾸준한 번영을 누려온 것이다. 또한 농업과 은광, 가축, 양털직조 그리고 글씨 쓰는 양피지 등으로 풍요로움과 높은 문화를 이루어 왔던 곳이다. 그러나 잦은 지진과 아랍인들의 침략으로 고대 버가모의 유적들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사라져 땅속에 잠들고 있다. 지난 100년동안 이 지역의 발굴작업은 현재 2-3%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이곳에 4세기경 지어진 병원 아스클레피온(Asclepion)은 세계 최초로 정신요법을 이용하여 환자를 치료하였다. 이곳은 약 800년간 소아시아에서 의료의 중심지 역활을 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세라피스신전은 붉은 벽돌로 지어졌는데, 나중에 기독교가 공인된 후 버가모교회로 사용되었다. 특징인 것은 이 교회 밑에 대각선으로 셀리누스(Selinus) 강이 흐르고 있어, 직경 9m의 토관 2개를 묻어 강물이 흐를 수 있도록 했고 그 위에 대리석으로 바닥을 깔아 평평하게 했다. 바닥 밑에 이 거대한 토관은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다. 오늘날에는 약 1-2m 높이의 벽만이 옛날의 교회자취로 남아있다.
요한계시록 13절에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라고 해서 안디바가 이곳에서 순교했음을 말하고 있는데, 아마도 그는 이 곳 버가모교회의 초대감독으로 추측된다.

 

 

버가모는“이중 결혼”또는“결혼의 산”이란 뜻이 담겨 있다. 베로가마 오토칼 바로 앞에 있다.(항공 사진출처:구글어스)

 

 

-가는 방법

베르가마는 세게최초의 병원인 아클레스피온이 있는 도시이자 버가모 교회가 있는 도시입니다. 여기도 마찬가지로

이즈미르 오토칼 2층에서 베르가마로 가는 버스를 타고 약 2:15분 소요되며, 오토칼에 내리면 바로 앞에

버가모 교회의 건물이 보입니다. 이즈미르에서 당일치기 가능

자동차 : 이즈미르 - E87, D550 - (오토칼)E240 - (35-01) - 베로가마

 

 

4. 빌라델비아 교회

 

현지명은 알라쉐히르 (ALASEHIR). 159-138 B.C. 버가모의 왕 앗달로스(Attalus)2세가 동부 진출의 전초기지로 이 지역에 도시를 설립하였다. 이곳은 사데, 버가모 그리고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이들을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다. 이곳은 농업과 가죽제품 직조업이 주요산업이며 농산물로는 포도를 재배하였다. 현재에도 이 마을 주변 수십 Km까지 방대한 포도밭이 펼쳐져 있다. 그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서는 소아시아內의 300여개의 교회에 성찬식에 쓸 포도주를 무료로 공급하였기 때문에 형제사랑을 실천한 교회이기도 했다.
사도요한에 의해 교회는 강하지 않으나 그 식구들은 충성스럽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곳이다. 오늘 날 비잔틴 시대에 세운 교회 터가 남아 있는데 3개의 큰 기둥과 거기에 그려진 벽화가 비바람에 마모되어 가고 있다.

 

 

 

빌라델비아는 “형제의 사랑” 의 뜻을 의미, (항공 사진출처:구글어스)

 

 

- 가는 방법

파묵카레에서 자가용으로 투어를 하지 않으면 데니즈리에서 알라쉬히르까지 버스를 타고 가야 합니다. 데니즈리

오토칼에서 돌무쉬로 2시간 이상 걸릴 것으로 사료됩니다. 이즈미르에서도 가능합니다만 데니즈리가 편리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알라쉬히르 오토칼에서 주택가로 500m정도 걸으면 자미가 보이고 바로 옆에 있습니다.

여기는 모든 유적지가 도시의 주택밑에 있어 발굴이 어렵다고 합니다. 주의 깊에 보실 부분은 기둥에 3세기때에

그려진 벽화가 희미하게 보일 것입니다.

자동차 : 데니즈리 - D320국도 - E87번 - Koprubasi - D585번 국도 - Alasehir

 

 

5. 사데 교회

 

현지명은 사르트(SART). 주전 3세기경 Sardis왕가에 의해 이 도시가 세워지게 되었으며, B.C. 546년에 페르시아 제국의 서부 지역의 수도가 되어 페르시아의 수도인 Susa에서 사데에 이르는 약 3,000Km 도로를 대리석으로 포장하여 "황제의 길"을 만들 정도로 페르시아 제국의 도시로 번영 하였다. 그 후 B.C. 334년에 알렉산더 대왕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 당시 세운 신전은 희랍시대에 가장 큰 신전중의 하나로 B.C 100년에 로마의 속령이된 후 잦은 지진과 터어키및 몽고족의 침입으로 폐허가 되었다.

1914년 프린스톤 대학 팀의 발굴로 시작하여 지금도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 신전 후면에 비잔틴 시대에 교회로 사용되었던 유적이 남아있다. 초대교회 당시 사데교회는 매우 번성하고 활동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사도요한은 외관상의 일만으로는 완성된 일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래서 "네가 살았다하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계 3:1)"라고 책망하였다

 

 

 

 

사데는 히브리어로“남다”라는 의미로 로마시대의 체유관을 지나 이즈미리 방향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1KM 들어가야 한다.

(항공 사진출처:구글어스)

 

-가는 방법

사데 교회는 이즈미르 오토칼 2층에서 실리홀리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운전기사에게 사데 교회로 간다고 하면 실리홀리

시내로 들어가기전에 내려 줄 것입니다. 바로 옆에는 로마 회관 및 유대회장이 있습니다.

샤데 교회도 마찬가지로 좁은 길로 약 1km 들어가야 합니다. 사데 교회는 양쪽으로 높은 산 , 앞으로는 강으로

난공불락의 요새처럼 되어 있습니다.

여기는 미리 도시락을 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근처에 음식점이 없어 실리홀리까지 가지 않으면 굶어야 합니다.

이즈미르에서 당일치기 가능

자동차 : Alasehir - D585번국도 - E96번 - D300 - Salihli - D300 - Sartmamut - 45-27번국도 갈림길

 

 

6. 서머나 교회

 

현지명은 이즈미르(IZMIR). 고대 서머나는 기원전 3,000년경 전반에 이미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그 후 1,100년경 이오니아 그리스인들에 의해서 번영하기 시작하였으나 실제로 이 도시의 번영과 영광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에 의해서이다.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진격하던 중 이곳에 성벽을 쌓고 새 도시를 건설했던 것이다. 이 서머나는 주전 3-2세기 희랍시대에 항구도시로서 유대인들이 이곳에 많이 살게 되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초대교회를 핍박하였다.

사도요한의 직계제자였으며 그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았던 폴리갑은 115-156년까지 서머나교회의 감독이었다. 156년에 서머나에서는 대대적으로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 때 밀고로 체포된 폴리갑은 화형에 처해졌다. 몰려있던 군중들은 "이 사람은 우리 신의 파괴자이다. 그는 기독교인들의 아버지다"라고 외치면서 화형에 처할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오늘날 그의 순교를 기리기 위하여 그가 세웠던 지하교회위에 현대식으로 폴리캅 교회를 지었다.

 

 

 

 

고대 그리스도인들은 서머나를“몰약”이라 불렀다. 이 교히는 폴리캅이 순교한 것을 기념하여 지은 교회이지만

폴리캅이 순교한 자리에서 좀 이동하여 현대식으로 건축된 교회이자 소아시아 7대 교회중 유일하게

건물이 있는 교회입니다. (항공 사진출처:구글어스)

 

 

-가는 방법

이즈미르의 바스마네 역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습니다.

 

 

7. 에베소 교회

 

 
현지명 셀축(SELCUK). 역사에서 에베소(Ephesus)의 이름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기원전 13세기경의 Hittite(성경의 햇족속)비문인데, 그 비문에 Apasas라고 불렸던 도시가 바로 이 지역이다.
기원 후 1세기에 에베소는 기독교인들에게 중요한 도시중의 하나가 되었다. 37-42년 사이에 기독교 전도에 주력하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하게 되자 사도바울은 그의 2차와 3차 전도여행 때 에베소를 방문하여 선교를 벌이고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또한 사도요한도 그리스도로부터 성모마리아를 돌 볼 임무를 부여받고, 성모마리아와 함께 에베소에 와서 살면서 말년을 보냈다. 64년 사도바울이 로마의 성밖에서 순교 당하자, 요한은 그를 대신해서 에베소의 기독교 지도자가 되었다. 요한은 노구를 이끌고 버가모, 서머나 등 지에서 선교를 하다가 로마로 끌려가 고문을 당한 후 지중해 연안의 밧모섬으로 유배를 당했다. 요한은 이곳에서 계시록을 썼다. 로마황제 Domitian이 피살당하자, 요한도 유배에서 풀려나 에베소로 돌아와 요한복음을 썼다. 그 후 요한은 자신의 뜻에 따라 에베소에 묻혔으며, 비잔틴 제국시대에 그의 무덤이 있는 자리에 사도요한의 교회가 세워졌다.
7-8세기에 들어와 에베소는 다른 지중해 연안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아랍인들의 침략을 감수해야 했으며, 결국 1304년에는 터어키인들의 수중에 떨어졌다.

 

에페소란 헬라어로“인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여기에는 사도 요한 교회, 성모 마리아 교회 등이 있으며,

누가의 무덤도 여기에 있습니다. 성모 마리아의 집은 에베소 유적지 남문 입구에서 약 6km 떨어진 곳에

집이 있습니다.(항공 사진출처:구글어스)

 

 

<성모 마리아의 집 지도> (항공 사진출처:구글어스)

 

-가는 방법

셀추크 시내에서 걸어서 가능하지만, 성모 마리아의 집은 택시 투어를 해야 합니다.

 

누가의 무덤

현재 누가의 무덤은 빈 무덤이다. 머리는 바티칸시국의 은쟁반에 있고, 몸은 파도바의 성 기우시티나 교회에 있다.

자칙 지나키기 쉬우니 에베소 유적지를 관람할때 꼭 남문으로 입장하기 전, 주차장쪽의 덤불속에 표지판이 하나

있는데, "누가의 무덤" 이라 써 있을 정도로 찾는 사람이 별로 없다.

 

 

(항공 사진출처:구글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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