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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1

두 짐승의 사단적 활동/로마황제 숭배사상(계 13:1-18)

by 은총가득 2022. 6. 12.

 

 

두 짐승의 사단적 활동

(계 13:1-18)

 

Ⅰ.도입

 

계 12-14장은 악의 세력과 교회공동체와의 적대적 관계라는 주제를 가지고 일관된 문맥을 형성하는 가운데 10-11장에 이어 또 하나의 삽입환상 군(群)을 이룹니다. 따라서 동일한 주제를 함의한 10-11장을 보다 심화시켜 소개하면서, 15-16장에 기술된 마지막 종말 심판현상인 일곱 대접재앙의 당위성을 제공합니다. 특별히 12장이 용과 아이, 용과 여자, 용과 여자의 남은 자손과의 투쟁적 상황(17절)을 기술하고 있다면, 본 13장은 땅으로 내어 쫓긴 용(12:7-8)이 무저갱에 감금되기 직전 용의 사주를 받은 짐승(13:1, 2, 4절)의 적극적인 핍박활동을 소개합니다. 이 과정에서 땅으로부터 올라온 두 번째 짐승이 거짓선지자의 역할을 수행하면서 첫 번째 짐승을 적극 보좌하게 됩니다(13:11-12).

 

계 12장은 다양한 상징을 통해 용과 아이, 용과 여자, 용과 여자의 남은 후손들 간의 적대적인 반목과 갈등과 투쟁의 관계를 극화시켜 묵시적으로 기술합니다. 이들 영적 전쟁의 기원은 본질상 창 3:15에 예언된 여자의 후손언약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습니다. 원(原)복음인 여자의 후손언약 속에 두 계열 간의 극한 대립구도가 이미 설정돼 있을 뿐 아니라, 종국에 가서는 여자의 후손에 의해 뱀의 머리가 치명상을 입고 멸망당할 것이 예언돼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실이 계 12:5에서는 “...이는 장차 철장으로 만국을 다스릴 남자라”고 시 2:9을 인용해 기술함으로 내용상 병행관계를 이룹니다. 이런 관점에서 요한계시록 구속사의 시종(始終)은 철저하게 여자의 후손언약에 기초하고 있음을 간파하게 됩니다. 본 언약에 근거해 여자의 후손의 당사자인 아기 예수님은 성육신하셨고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마침내 승천하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 12장에 언급된 아이의 승천은 여자의 후손언약에 근거해 구속사역을 완수하신 예수님의 승천사건을 가리킵니다.

 

아이의 승천은 용으로 하여금 미가엘과의 전쟁에서 결정적인 패인으로 작용해 하늘에서 땅으로 축출되는 모욕과 수치를 당합니다. 용의 패배는 그의 때가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미합니다(12절하). 이런 사실을 직감한 용은 극도의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나머지 크게 분노해 남자를 낳은 여자(교회)를 핍박하려하나 하나님의 적극적인 보호와 인도와 양육으로 무위로 돌아갑니다(13-14절). 이 과정에서 요한은 과거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셔서 보호하시고 양육하셨던 출애굽 모티브와 광야 이미지를 교회에 적용시키는 방식으로 교회의 절대 안전과 보호와 양육의 확실성을 보증합니다(6, 14절).

 

한편 아이의 승천에 근거한 용의 패배는 용으로 하여금 무저갱에 일천년 간 감금당하는 완전결박과 전적 무(無) 활동의 사건으로 발전됩니다. 계 20:1-3이 이런 사실을 환상과 상징을 통해 명백히 보여줍니다(유 1:6, 벧후 2:4). 그런 의미에서 12:15-17절의 사건은 용(사단)이 일천년(1260일/42달) 동안 무저갱에 감금돼 있다가 잠시 놓임을 받게 된 계 20:7 이후에 일어난 핍박사건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용의 완전결박과 무활동의 입장을 견지하는 학자들의 해석적 관점입니다(이순태, 200-201/박정식, 372). 한편 용이 무저갱에 감금된 상태를 제한결박과 제한적 활동 및 영향력의 감소로 보는 학자들까지도 용이 여자의 남은 자손들과의 필사적인 최후의 일전을 위해 ‘바다 모래 위에 섰다’는 17절의 말씀은 계 20:7-10에 기술된 최후의 종말적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비상조치라는데 의견을 같이 합니다(이필찬, 내가 속히 오리라, 559/요한계시록 어떻게 읽을 것인가, 190). 용의 휘하 세력들을 총 규합해 사상 최대의 일전을 벌이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렇다면 12:27의 ‘바다 모래 위’와 13:1의 ‘바다’ 사이에는 어떤 병행적 함수관계가 성립되는 것일까요. 이미 12장 강론에서 언급했듯이 계시록에서 ‘바다’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대세력들의 총 본산인 사실을 단 7:3을 배경으로 살펴봤습니다. 이런 이유로 새 하늘과 새 땅으로 호칭되는 새 창조의 하나님 나라에서는 악의 본거지를 상징하는 바다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음을 증거합니다(계 21:1). 하나님 나라는 빛과 어두움이 공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악의 세력의 총수인 사단이 이미 불못에 던져진 후이기 때문입니다(계 20:10). 따라서 12:17과 13:1의 ‘바다’는 본질상 동질성을 띠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이 12장과 13장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상호 시간적인 연속성을 허락하느냐의 문제와는 별개입니다. 마치 12:17이 13:1을 위한 서론 부분에 해당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처럼 12장과 13장을 시간상 연속적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이필찬, 567/유도순, 235-236, 호크마 종합주석, 415). 그러나 두 장 사이에 전개되는 내용상의 정황을 고려하지 않고, 용례상(관주)의 동질성만 강조하다보면 자칫 해석상의 일관성과 통일성이 결여될 수 있습니다.

 

이미 확인한 대로 12:17에서 여자의 남은 자손들과 사상 최대의 일전을 불사하고자 악의 총 본산인 ‘바다 모래 위’로 찾아 온 용에 관한 기사는 20:7-10의 최후의 종말전쟁기사와 내용상 동질성을 띱니다. 이런 관점은 무저갱에 갇힌 용의 상태(20:1-3)를 완전결박으로 보는 입장과 부분결박 내지는 제한결박으로 보는 입장에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12:17을 용이 무저갱에서 잠시 놓인 후(20:7) 획책하려는 최후의 종말적 전투와 동일시한다면, 그 시기는 교회의 보호와 양육기간인 1260일(한 때 두 때 반 때/42달/1000년)이 지난 후라야 논리적으로 타당합니다. 20:7의 사단의 잠시 놓임의 때는 적어도 4-6절에 기술된 소위 천년의 기간(1260일=42달)이 지난 시점으로 추정되기 때문입니다(결박 후). 그러나 13장의 내용은 용이 바다에서 나온 짐승에게 자신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주어서(1-2절) 42달 동안 대리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교회를 적극 핍박하도록 사주하는 내용(석방 전)이 이야기의 주류를 이룹니다(5-6절). 이 과정에서 땅에서 나온 짐승이 바다에서 나온 짐승을 보좌하면서 용의 하수인으로서 충성을 다하는 모습이 소개됩니다(11-18절).

 

따라서 이상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13:1은 12:17과 ‘바다’라는 이미지를 통해 용례상 병행관계를 이룰지라도 시간적인 연속성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내용상 12:17의 용은 적어도 천년 기간이 ‘찬 후’(20:7), 성도들과 최후의 일전을 벌이기 위해 바닷가로 찾아온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그 시점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이 용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받고(13:1-2) 42달 동안 교회를 필사적으로 핍박하던 기간(5-6절)이 ‘끝난 후’란 얘기가 성립됩니다. 때문에 12:17의 용이 13:1의 짐승에게 자신의 모든 권세와 권한을 부여한 시점은 용이 무저갱에서 석방된 직후가 아닙니다. 오히려 무저갱에 갇히기 직전이란 사실을 전체적인 문맥의 흐름 속에서 ‘논리적’으로 간파하게 됩니다. (일례로 뱀에 의한 하와의 범죄와 타락은 엡 1:4과 딤후 1:9에 근거할 때, 많은 교리적인 논쟁의 여지가 여전히 상존할지라도 논리상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처사와 무관치 않은 당위성이 공존하듯이 말입니다).

 

다시 말해 미가엘과 하늘 전쟁에서 패한 용은 땅으로 축출된 후,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예감하고 심히 분노해(12:12하) 곧바로 악의 본거지인 ‘바다 모래 위’(단 7:3)로 찾아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자신의 보좌의 통치권과 모든 능력과 권한을 위임한 후, 무저갱에 감금당한 것으로 논리적 정황상 추정이 가능합니다(이순태, 205). 용의 행보를 추적해보면 이런 사실이 넉넉히 짐작됩니다. 먼저 아이의 승천으로 하늘의 전쟁에서 패해 땅으로 추방됩니다(11:7-9). 다음에 천사가 이내 땅으로 뒤쫓아 내려와 용을 잡아 쇠사슬로 결박합니다(20:1-2). 결박한 후 일천년 동안 무저갱(abyss, bottomless pit)에 감금합니다(20:3). 이 과정에서 무저갱을 열쇠로 잠그고 그것도 모자라 열쇠를 인봉합니다. 용의 예감대로입니다. 용을 왜 이처럼 철저하게 결박해 감금하는 것일까요. 천년이 차기까지는 만국을 미혹할 수 있는 여지를 원천봉쇄하기 위함입니다(20:3하).

 

그렇다면 요한이 이처럼 용의 완전결박 상태를 상대적으로 소상하게 기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아이의 승천으로 말미암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말적 승리의 확실성과 이에 따른 교회의 보호와 구원과 승리 또한 완전함을 보증하기 위함입니다(롬 8:33-39). 지상의 교회가 모든 일에 오직 믿음의 확신과 인내를 가지고 서로의 연약함을 담당하며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시험의 때를 함께 극복해 나가야 할 이유와 명분이 이런 사실에 근거합니다. 용이 천년이 찰 때 잠시 놓임을 받게 됩니다(계 20:7). 그러나 이때의 석방은 일시적일 뿐입니다. 곧 붙잡혀 최후의 심판을 받고 불못에 처해질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계 20:8-10). 용(사단/마귀)의 패배와 종말적 심판은 이미 여자의 후손언약(창 3:15) 속에 예언된 바 있습니다. 결국 용의 최후의 심판과 불못에 던져짐은 결과적으로 여자의 후손언약이 종말론적으로 온전히 성취될 것에 다름 아닙니다.

 

이상의 논증을 통해 패배해 땅으로 축출된 용은 자신의 남은 미래의 처지가 어떻게 될 것을 직감하고 악의 본영인 바닷가로 찾아가 짐승에게 일체의 권리와 권한과 능력을 위임함으로 자신의 사역을 짐승을 통해 대리적으로 수행하고자 통치권을 양도한 셈입니다. 천년이 차서 다시 석방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말입니다. 이런 식으로 현 교회시대는 무저갱에 감금된 용의 사주를 받아 용의 화신(化身)이 된 짐승이 그의 최측근인 땅에서 올라온 짐승 곧 거짓 선지자와 합세해 용의 통치권을 대행하고 있는 시험의 때요 핍박과 환난의 시대인 셈입니다. 이처럼 현 교회시대에 두 짐승은 용과 더불어 소위 악의 삼위일체로 존재하면서 용의 사역을 대리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삼자(三者) 간의 속성과 행태가 본질상 동질성을 띠는 것으로 짐승의 활동은 곧 용의 활동과 동일시됩니다. 현 교회시대에 여전히 사단과 마귀가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설명하는 성경의 내용들이 이런 원리에 근거합니다(엡 4:26-27, 벧전 5:8-9, 고후 11:14-15).

 

따라서 계 13장에서 두 짐승의 활동은 역사의 종말에 사단이 어떻게 역사하는 지를 보여주는 미래적인 환상의 내용이 아닙니다. 오히려 용(사단)이 아이의 승천으로 인한 패배와 축출로 무저갱에 완전결박 돼 감금(계 20:1-3, 유 1:6, 벧후 2:4)된 현 교회시대(1000년=1260일=42달)에 용(사단)의 영향력이 어떤 식으로 행사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영적 상황인 것입니다.

 

Ⅱ. 전개

 

계 13장의 내용은 용이 무저갱에 갇힌 후 현 교회시대에 사단의 영향력이 두 짐승을 통해 행사되는 영적 상황을 환상을 통해 기술합니다. 그 기간이 42달인 사실에 근거해, 두 증인에 의한 1260일 동안의 복음증거사역 기간(11:3)과, 광야에서 여자(교회)를 양육하고 보호하시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의 하나님의 양육기간(12:6, 14절)과 본질상 동일한 기간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의 전(全) 기간을 포괄하는 하나님의 섭리적 작정 기간(providential period)이란 사실입니다.

 

13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먼저 1-10절은 바다에서 올라온 첫 번째 짐승을 소개합니다. 다음 11-18절은 첫 번째 짐승의 보좌관 노릇을 하는 땅에서 올라온 두 번째 짐승에 대해 기술합니다. 이런 사실은 교회에 대한 사단의 핍박이 두 짐승을 통해 양공(兩攻)작전으로 펼쳐지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첫 번째 짐승은 세상권력을 통해 물리적인 힘으로 교회를 억압하고 핍박하며, 두 번째 짐승은 거짓선지자의 정체성을 띠고 진리를 왜곡시키고 변질시키는 방식으로 교회를 타락시키며 세속화시킵니다. 요한은 초대교회 때 이미 적그리스도의 영이 교회 대내외적으로 역사하고 있었음을 진술함으로(계 1:9, 요일 4:1-3) 결국 두 짐승의 활동이 당시에 이미 개시되었음을 시사합니다. 이 과정에서 후자는 전자의 충성스런 보좌관 노릇을 하게 된다는 것이 13장의 설명입니다. 단 7장에서는 당시 바벨론, 페르시아, 희랍, 로마 등의 세상권력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는 첫 번째 짐승의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비유합니다.

 

1. 바다에서 나오는 한 짐승(1-10절)

바다에서 나오는 첫 번째 짐승의 활동을 소개하는 본 절은 다시 세분화됩니다. 1-2절은 짐승의 외적 특징을, 3-4절은 용의 권한 부여 및 짐승의 대행, 5-10절은 짐승의 포악하고 파괴적이며 배도적인 사단적 활동을 기록합니다.

 

짐승의 외적 모습(1-2절)

1절은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의 외관을 묘사하면서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며 열 뿔에는 열 면류관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기괴한 괴물의 모습입니다. 사실 이런 모양의 짐승은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런 상징적이고 묵시적인 환상을 통해 교회와 적대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용의 왕적 통치권과 능력과 권한을 짐승이 계승하고 있음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12:3에서는 ‘여자’를 핍박하고 ‘아이’를 삼키려는 ‘큰 붉은 용’의 정체를 언급하면서 ‘머리가 일곱이요 머리에는 일곱 면류관이 있으며 뿔이 열’이라고 이미 명시한 바 있습니다. 여기서 잠간 열 뿔과 일곱 머리 이미지에 대해 단 7장을 배경으로 살펴봅니다.

 

먼저 열 뿔에 관해서입니다. 단 7:1-7에서 다니엘은 바다에서 네 마리 괴기스런 큰 짐승들이 나오는 한 종말적 이상(vision, 묵시적 환상)을 봅니다(3절). 네 마리 짐승 중에 네 번째 짐승이 가장 막강한 힘을 가지고 나머지 세 짐승을 제압합니다(단 7:7절상). 바로 이 네 번째 짐승이 열 뿔을 가졌다고 다니엘서는 기록합니다(7절하, 20절상). 다니엘서에서 위의 네 짐승은 당시 이스라엘과 적대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네 강대국(단 2:39-40, 7:17-19) 을 상징하면서 동시에 하나님 나라에 대적하는 세상권력 곧 정치적 세력을 대변한다는 것이 다니엘서의 논지입니다. 그 중 네 번째 짐승은 이들 세상의 적대세력들을 통합한 대표자의 신분으로 하나님과 성도들을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의 기간 동안 대적하면서 온갖 핍박과 박해를 감행합니다(단 7:23-25).

그러나 하나님의 종말적 심판은 네 번째 나라를 멸하시고 승리를 성도들에게 안겨 주심으로 하나님 나라는 든든히 세워집니다(단 7:26-27). 바로 위의 네 번째 짐승이 상징하는 네 번째 나라에서 열 뿔, 곧 열 왕이 나오는 것으로 네 번째 짐승의 이미지가 발전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단 7:23-24절상). 그런 의미에서 열 뿔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의 백성들을 공격하는 네 번째 짐승의 왕적 통치권의 막강함과 파괴적인 힘과 능력을 상징합니다.

 

다음으로 일곱 머리에 관해서입니다. 일곱 머리도 단 7:1-7의 이상에 나오는 네 마리 짐승과 연관된 내용입니다. 특별히 네 마리 짐승 중 세 번째 짐승의 머리는 넷이라고 지적합니다(5절). 호크마 종합주석은 다니엘서 주석에서 이들 네 마리 짐승을 당시 유다와 적대적인 관계를 가졌던 바벨론, 페르시아, 헬라, 그리고 로마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한편 단 2장에 소개된 느부갓네살 왕의 꿈 내용을 해석하는 가운데 다니엘은 신상의 금 머리를 바벨론에 대한 상징으로 해석합니다(36-38절). 신상의 나머지 가슴∙배∙종아리 부분과 관련해서는 바벨론 이후에 계속해서 출현하게 될 여러 제국들로 해석합니다(39-40절).

이상 신상에 대한 다니엘의 해석을 종합해 유추해 보면 나머지 신체의 각 부분이 바벨론 이후에 연속적으로 출현하게 되는 페르시아∙헬라∙로마를 가리킨다는 호크마 종합주석의 관점은 충분히 개연성(probability)을 가집니다. 따라서 일곱 머리 이미지는 세 번째 짐승에게서 발견되는 네 개의 머리와 나머지 세 마리의 짐승의 머리를 합한 숫자인 셈입니다. 이처럼 요한은 하나님 나라에 대적하는 악의 세력으로 단 7장에 소개된 네 마리 짐승의 일곱 머리 이미지를 13장의 첫째 짐승에 적용시킴으로 상호 병행관계를 설정합니다.

 

이처럼 첫 번째 짐승의 외적 특징을 묘사하고 있는 ‘열 뿔과 일곱 머리 및 열 면류관’ 이미지는 공히 바다에서 올라온 네 짐승을 소개하고 있는 단 7장의 내용과 밀접하게 연관되면서 하나님과 성도를 향한 적대적 관계를 심화시킵니다. 나아가 위의 도입부분에서도 언급했듯이 계 13장의 첫 번째 짐승은 12:3의 ‘큰 붉은 용’의 모습과 비교해 전체적인 외관은 유사합니다. 이런 식으로 용과 짐승 양자 간의 외적 유사성은 짐승이 용의 화신(化身)이며 동시에 하수인인 사실을 암시해 줍니다.

따라서 짐승은 무저갱에 갇힌 용의 사역과 활동을 대리적으로 수행한다는 의미가 성립됩니다. 용은 아이의 승천(계 12:5)에 근거해 미가엘과의 전투에서 패해 땅으로 쫓겨났을 뿐 아니라(12:7-9), 곧 이어 쇠사슬에 묶여 무저갱에 일천년 동안 감금된 상태로 현 교회시대에 존재하기 때문입니다(계 20:1-3). 한편 짐승이 올라온 바다는 앞에서 여러 차례 언급했듯이 단 7:3에 근거해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대적인 세상 세력들의 본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세상과 세상권력의 총화를 총체적으로 상징합니다(요일 2:15-16, 5:19, 요 12:31, 롬 12:1상).

이런 관점에서 바다에서 나온 짐승은 자연히 사단적인 정치적 세력이나 이와 유사한 악한 인격체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짐승의 머리에 ‘참람 된 이름들’이 있다(1절하)는 표현은 참람이 ‘훼방과 모독’의 의미를 띠는 것으로 짐승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훼방하고 모독하는 마귀적 속성을 가졌음을 시사합니다. 이는 단 7:25에서 네 번째 짐승에 의해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라는 표현에 근거한다고 추정됩니다. 결국 1절에 묘사된 바다에서 올라온 첫 번째 짐승의 정체성은 단 7장의 네 번째 짐승의 외관과 속성 및 사역에 근거해 하나님과 성도를 대적하는 용의 정체성과 본질상 동질성을 띠는 세상권력이나 악한 인격체를 가리킵니다.

 

2절은 1절에 이어 짐승의 외적 형상을 보다 직접적으로 단 7:3-7을 인용해 설명합니다. 그러나 표현상에 차이가 발견됩니다. 다니엘서는 네 짐승을 각각 개별적이고 독립적으로 기술합니다. 반면 계 13장은 다니엘서에 묘사된 세 짐승(표범/곰/사자)의 맹수적인 특징을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통합적으로 적용시켜 설명합니다. 이런 적용은 요한이 본 첫 번째 짐승이 과거 어느 적대적인 세력과 인격체보다 더욱 강력하게 하나님과 성도들을 향해 핍박과 박해와 공격을 가해 올 대상임을 의도적으로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런 짐승의 가공할만한 힘과 능력의 원천은 용이 짐승에게 자신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전폭적으로 위임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요한은 설명합니다(2절하).

 

그렇다면 왜 용이 자신의 모든 왕적 권한(보좌)과 능력과 권세를 포기하면서까지 일체의 기득권을 짐승에게 위임하는 것일까요. 하나님의 보좌까지도 찬탈하려 했던 (사 14:12-15, 유 1:6) 사단의 반역적이고 배도적인 속성상 자신의 권좌를 기꺼이(?) 하수인에게 양도한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처사이기에 말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이며 그 시점은 언제였을까요. 참고로 이필찬은 본 절의 ‘용의 권한위임과 짐승의 권한대행’ 사건을 해설하면서 첫째 짐승의 배후에 용이 존재하고 있음과, 12:17의 최후의 종말적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공모(共謀)세력으로 첫 번째 짐승을 지목해 불러냈다고 진술합니다(내가 속히 오리라, 574). 그의 견해에서 첫 번째 짐승의 배후에 용이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관점은 문맥 속에서 충분히 동의할 만합니다. 그러나 12:17의 종말적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동조세력으로 짐승에게 권한을 부여했다는 관점은 쉽게 납득하기엔 몇 가지 문제점이 발견됩니다. 물론 책을 통해 저자의 의도와 의중을 십분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음을 첨언합니다. 이필찬은 같은 책에서 용이 획책하려는 12:17의 전쟁의 성격을 병행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최후의 종말적 전쟁으로 분명히 규정합니다(내가 속히 오리라, 559).

 

그러면서도 13장의 두 짐승의 반역과 핍박 사건을 시간적으로 12:17의 연속적인 사건으로 기술합니다. 12:17을 13장의 서론부분으로 해석하면서 말입니다(이필찬, 567). 그러나 두 사건을 연속적인 사건으로 해석할 때 시제상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습니다. 12:17에 기술된 전쟁의 성격을 본질상 주님의 재림 직전에 있게 될 종말적 최후의 전쟁과 동일시여기면(이필찬, 559), 12:17의 전쟁시점은 논리상 용의 무저갱 감금사건(20:1-3)이 해제된 직후를 가리키게 됩니다(20:7). 반면 13장의 두 짐승의 투쟁사역 기간은 본문에 언급된 대로 42달 기간 동안 입니다. 이는 용이 무저갱에 감금당해 있었던 일천년 기간과 내용상 동일한 기간임을 계시록은 자체 문맥을 통해 자증합니다(1260일=3년 반=42달=1000년). 따라서 12:17과 13:1-2은 ‘바다’ 이미지(단 7:3)를 통해 용례상 병행관계를 가질지라도 시간적인 연속성의 문제는 시제상 불일치점이 발견됩니다.

그러면 용이 짐승에게 일체의 기득권을 넘겨준 시점은 언제일까요(13:2). 문맥을 통해 논리적으로 접근할 때, 아이가 승천함으로(12:5) 용이 천상의 전쟁에서 패배해 땅으로 축출당한 후(12:7-9), 쇠사슬로 결박당한 채 무저갱에 일천년간 감금당하기 직전으로 유추해석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용이 짐승에게 자신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13:2)로 호칭되는 일체의 기득권을 양도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하늘 전쟁에서 패한 후, 용은 직감적으로 자신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예감하고 심히 분노해서 땅으로 내려갔다고 계시록은 진술합니다(12:12절하). 용은 공격의 표적을 아이에게서 아이를 낳은 교회로 돌립니다(12:13).

 

 

그러나 이것마저 자기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에게 독수리 날개를 주어 광야의 모종의 장소로 피신케 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의 기간 동안을 양육했기 때문이라고 계시록은 기술합니다(12:14). 물론 이런 표현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광야 모티브를 신약의 교회공동체에게 적용시킴으로 초림과 재림 사이의 전 교회기간에 걸쳐 하나님의 철저한 보호와 인도와 양육의 손길이 함께 하고 계심을 확증하기 위함입니다. 현대교회 성도는 바로 이 구약의 ‘광야’ 모티브에 의한 하나님의 양육의 시기를 살아가는 자들로 존재합니다.

 

상황의 심상치 않음을 예감한 용은 악의 총 본산인 바다로 찾아갑니다. 거기서 짐승을 불러내 자신의 모든 왕적 기득권을 그에게 위임해 줍니다. 하늘 전쟁에서 패배해(12:7-9) 땅으로 내어 쫓긴 용이 무저갱에 완전결박당한 채 감금당한 기사(계 20:1-3)를 통해 이런 식으로 문맥과 행간 속에 잠재된 내용(latent/hidden story)을 유추해석 할 수 있습니다. 마치 12:5에서 아이의 출생과 승천 기사 사이에 예수님의 성육신∙수난∙죽음∙부활 사건이 생략된 채, 시간의 비약이 이루어 진 것과 같은 맥락 속에서 말입니다.

 

그런가 하면 뱀의 미혹으로 말미암은 아담(하와)의 범죄와 타락의 기원은 구체적인 언급이 없을지라도 논리상(not dogmatic) 엡 1:4-6(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과 딤후 1:9(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근거한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섭리역사의 일환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는 이치와도 일맥상통합니다.

이런 식으로 용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권한양도라는 비상강구책을 마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후일을 기약하기 위함입니다. 일천년이 지나고 석방된 후 마지막으로 최후의 일전을 꾀하기 위해서 말입니다(20:7-8). 그러나 사실상 용의 종말은 아이의 승천 속에 함의된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성취 속에서 최후의 심판과 영원한 불못의 형벌이 기다릴 뿐입니다(20:9-10). 이상의 논증을 통해 12:17은 용이 무저갱에서 1000년 감금기간이 끝난 직후의 사건인 반면, 13:1-2은 용이 무저갱에 갇히기 직전인 상황으로 추정하게 됩니다. 13장 본문 속에서 바다에서 올라온 첫 번째 짐승과 이를 분신처럼 보좌하는 땅에서 올라온 두 번째 짐승(11-18절) 외에 어디에서도 용의 모습과 활동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런 사실을 더 한층 뒷받침 해 줍니다.

 

이상의 논증을 재정리하면, 13장을 12:17에 직접적으로 연관시켜 시간적인 연속선상에서 해석하기에는 양자 간의 정황상 무리가 따름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13장은 12:17의 연속선상에서 최후의 종말적 전쟁과 관련해 용(사단)이 어떻게 활동할 것인가를 보여주는 환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용이 무저갱에 완전결박 된 상태로 갇혀있는 동안 사단의 영향력이 짐승을 통해 어떤 모습으로 행사되고 있는 지를 보여주는 내용입니다. 한편 이상의 논리전개 속에서 이런 문제가 충분히 제기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 곳곳에서 교회시대에 여전히 활동하고 있는 마귀에 대한 경고와 경계를 촉구하는 말씀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 가의 문제 말입니다(엡 4:26-27, 벧전 5:8-9).

 

답변은 이렇습니다. 12장의 용과 13장의 짐승과의 상호 관계성 속에서 발견되는 밀접한 외적 유사성과 권한양수도로 인한 내적 동질성은 짐승의 배후에 용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필찬, 574)과, 이로 인해 양자(兩者)를 동일시하려는 저자의 의도를 엿볼 수 있습니다. 마치 계시록에서 용을 옛 뱀과 마귀와 및 사단과 동일시 취급하면서(12:9상) 상황에 따라 바꾸어 부르듯이 용과 짐승의 관계에서도 동일한 원리가 적용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약의 교회시대에 짐승은 무저갱에 갇힌 용의 권한을 대리적으로 수행하면서 실상은 용의 영향력을 강력히 행사하고 있기에 둘 사이에 본질상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런 이유로 현 교회시대에 짐승의 활동은 곧 마귀의 활동과 동일시될 수 있습니다.

 

짐승의 대관식(3-4절)

짐승의 일곱 머리 중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처럼 보입니다(3절상). 짐승이 아주 죽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속임수입니다. 그래서 이내 상처가 낫습니다. 온 땅이 이를 기이히 여겨 짐승을 추종합니다(3절). 이상의 사실을 통해 짐승이 죽은 시늉을 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입니다. 바로 온 땅에 사는 이방인들을 미혹해 짐승을 추종하며 경배케 하기 위함입니다.

 

본 환상은 넷 째 짐승의 죽음을 다루고 있는 단 7:11을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다니엘서 본문은 짐승의 완전한 죽음을 소개하는 반면에 계시록은 ‘죽은 것과 같다’고 내용상 부분적인 변형을 시도합니다. 이는 계시록이 지향하는바 문맥의 표현상 특별한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이필찬, 575). 다름 아닌 짐승의 죽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비교시켜 상호 간의 유사성을 증시하기 위함입니다. 진상(眞相)은 이렇습니다. 계 5장은 일곱 인봉한 책을 소개하는 과정에서(1절) 이 책의 인을 뗄 수 있는 분으로 유다 지파의 사자(the Lion)인 다윗의 뿌리를 언급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본문은 이런 사실을 증거하면서 예수님을 가리켜 “어린양이 섰는데 일찍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고 기술합니다(5:6상). 바로 이 부분을 의식해서 요한은 다니엘서의 짐승의 죽음을 일부 변형시켜 짐승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계 13:3)라고 설명하는 것입니다. 유사성을 통한 일종의 풍자(parody)로서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실제로 죽으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짐승은 아닙니다. 죽은 척 했을 뿐입니다. 이런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흉내 내 사람들을 속이는 행위를 가리켜 소위 기독론적 풍자(Christological parody)라고 합니다(이필찬, 575). 이런 경우는 계속해서 ”곧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자니라“(12절), ”칼에 상하였다가 살아난 짐승“(14절) 등에서 발견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죽게 된 것 같았던 짐승의 머리 하나’가 무엇을 가리키느냐가 아닙니다.

 

왜 요한은 ‘기독론적 풍자’를 통해 짐승의 거짓 죽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5:6상)에 비교하면서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은’ 사실을 계속 강조하느냐에 있습니다. 해답이 ‘3절하’에 있습니다. ”온 땅이 (이 사실을)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런 표현에는 짐승과 예수님을 적대적인 대립관계로 설정시켜 짐승이 예수님께 필적할만한 능력의 소유자란 사실이 암시적으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래야 사람들을 속일 수 있는 필요충분한 명분과 실질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회복하시고(마 28:18),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신 사실(행 17:31)에 근거해서 말입니다. 유사성(類似性)으로 세상을 속이고 미혹해 자기 수하를 삼고 모든 영광을 갈취하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온 땅’은 악한 세력과 관계있는 ‘땅에 거하는 자들’(11:10, 13:8)로 짐승을 따르고 짐승에게 경배하는 자들을 총칭합니다(13:8). 결국 생명책에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 모두 짐승을 경배하며 그에게 종노릇하게 될 것을 13장은 분명히 강조해 기술합니다(8절). 이들의 결국은 최후의 심판을 통해 영벌의 불못에 들어갈 것이 결정돼 있습니다(20:11-15).

 

반면에 성도는 예수님의 구속 안에서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입니다(눅 10:20, 빌 4:3, 계 3:5). 하늘의 영생이 보장된 자들입니다. 이보다 더한 복과 상급은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의 완성은 최고의 복이며 최상의 상급입니다. 기독교(하나님)에 관심과 접촉을 가질 수 있는 기회는 다양한 경로를 통해 주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관의 성립은 다른 무엇에 앞서 구원의 확신으로부터 비로소 출발됩니다. 무한가치의 예수님의 생명이 지불된 구속의 공효에 근거해 우리가 거저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고, 심판에 이르지 않으며, 영벌에서 영생에로 옮기어졌다는 사실은 아무리 감사와 찬양과 영광을 돌린다 해도 다함이 없는 무한한 은혜의 선물입니다. 이 구원의 생명을 정당하게 소유한 자의 신앙고백이 다름 아닌 ‘무익한 종’의 심정인 것입니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찌니라“(눅 17:10). 이 고백과 심정 속에는 어떤 종류의 보상적이고 기복적이며 지성감천주의적인 신앙적 요소가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

 

아니 적극 배제돼 있습니다. 자연인들이 보편적으로 기원하는 필요와 소원의 절정이요 총화를 암시하는 ‘온 천하’보다 더 귀하고 가치 있는 보화인 ‘목숨’ 곧 영생의 문제가 보장되었기 때문입니다(마 16:26). 따라서 영생(구원)은 복의 본질(시 133:3)이며 상급의 실체(계 11:18)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통해 이기는 자에게 주시겠다고 보증해 주시는 다양한 약속의 총화가 다름 아닌 구원의 생명을 하나님 나라에서 실질로 누리는 사실에 집중돼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계 2-3장). 이런 관점에서 구약의 제반 약속과 축복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질로 성취된 신령한 복 곧 하나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영적 복의 모형이요 예표들입니다. 구약의 복과 신약의 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본질상 동일시됩니다. 단지 성경 계시사의 본질인 언약적 구속사의 점진적인 진행이란 맥락 속에서 구약시대에는 모형과 예표적인 계시로 나타났던 것이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체화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묘막측 하신 구속의 경륜에 깊이 접촉돼 이를 전인적으로 깨닫게 하심으로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케 하기 위함입니다(롬 11:32-36, 엡 1:3-6).

 

4절은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는 장면입니다. 2절의 반복입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재차 반복해서 강조하는 것은 특별한 의미를 같습니다. 용(사단)의 영적 이취임(離就任)식의 성격을 띤 장면이 연출되기 때문입니다. 본 장면은 용의 권한양도와 짐승의 권한대행을 통해 짐승의 대관식(戴冠式)이 용의 주관 하에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따라서 이 장면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이 강조됩니다. 먼저 짐승이 용의 권한을 대행할지라도 한시적인 것으로 인해(1000년=42달) 짐승의 주인은 용이요, 용이 짐승의 실체임을 주지시키기 위함입니다. 다음으로 용이 자신의 추종세력들에게 짐승에게 위임한 대리적인 통치권을 공적으로 보증해 주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이 사건을 통해 짐승은 용의 화신(化身)으로 변모합니다. 모든 용의 왕적 통치권을 대리적으로 수행함으로 명실상부한 세상임금의 자격으로 행세합니다. 본문 속에서 용과 짐승이 동시에 경배를 받지만 상대적으로 짐승의 권한이 강조되는 이유가 이런 사실에 기인합니다. 이런 사실이 4절의 도전적이고 공격적인 문맥을 통해 확인됩니다.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가로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뇨 누가 능히 이로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다시 한번 이 부분을 요약해 설명합니다. 땅에 속한 자들(온 땅=세상)에게 용은 최고의 경배의 대상입니다.

 

요한은 용(사단)을 가리켜 세상의 임금이라고 지칭합니다(요 12:31). 그러나 그는 ‘아이의 승천’(요 12:5)을 통해 사실상 완패 당합니다. 땅으로 내쫓깁니다(12:7-9). 그리고 무저갱에 하나님의 섭리적인 작정의 기간 (1000년)동안 완전결박(inability) 된 채 감금당합니다(계 20:1-3). 이런 이유로 잠시 역사의 전면에서 그 모습이 사라져야 될 형편입니다. 그래서 비상강구책으로 악의 세력의 총 본산인 바닷가로 찾아와 자신의 수장(首長)격인 짐승을 불러내 자신의 모든 왕적 통치권과 권한과 능력을 서둘러 위임시켜 대리인을 삼음으로 다음(계 20:7-8)을 기약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짐승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흉내 냄으로 동조세력들로부터 절대적인 추앙과 경배를 받는 명실상부한 악의 지도자로 자리매김 됩니다. 이런 원리를 일컬어 ‘기독론적 풍자’(parody)라고 말합니다.

 

초대교회 당시에는 특별히 기독교를 박해했던 로마의 정치세력과 몇 몇 황제를 가리켜 흔히 짐승의 정체성과 반기독교적 활동에 결부시키곤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짐승의 정체성은 이 시대에도 동일한 원리 속에서 적그리스도의 성격을 띠고 하나님과 교회를 대적하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현대교회가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하며 처신하는데 지혜를 앞세워 최선으로 경주해야 하는 이유가 이런 사실로 말미암습니다(롬 12:2). 적그리스도의 영이 이미 활동하고 있다는 것이 성경의 경고입니다(요일 4:1-3, 엡 6:12).

 

첫 번째 짐승의 적대적 활동(5-10절)

5-10절은 용의 권한을 대리적으로 수행하는 첫 번째 짐승의 사단적인 사역의 실상을 기술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 짐승의 사역은 실은 무저갱에 갇힌 용이 자신의 화신(化身)인 짐승을 통해 현 교회시대에도 여전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W.헨드릭슨은 이 짐승의 사역의 정체성을 이 땅의 나라들과 정부를 통해 작용하는 사단의 물리적인 박해와 핍박으로 해석합니다(요한계시록, 1981, 176). 이런 관점에서 요한이 계시록을 기록할 당시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핍박했던 로마의 정치세력을 짐승의 활동과 연계시키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용으로부터 왕적 통치권을 위임받은 짐승은 더불어 ‘큰 말과 참람 된 말 하는 입’을 받습니다(5절). 여기서 ‘큰 말’이란 안하무인(眼下無人)격이며 유아독존(唯我獨尊)식의 교만한 막말을 가리킵니다. ‘큰 말’의 배경은 단 7장에 나오는 네 번째 짐승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암시받습니다. 단 7:8은 넷 째 짐승에게서 나온 ‘작은 뿔’에 관해 설명합니다. 이 작은 뿔은 후에 하나님과 성도를 대적하며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의 기간에 적대적인 사역을 행할 사단적 인물(세력)을 가리킵니다(단 7:25). 혹자는 이 작은 뿔을 중간기 시대에 이스라엘을 박해하며 신성모독의 선봉장이었던 헬라의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로 지목하기도 합니다(호크마 종합주석, 410). 이 작은 뿔에게 ‘입이 있어 큰 말’(단 7:8하)을 하였다고 진술하는데, 이런 표현의 반영으로 보입니다.

 

‘참람 된 말’은 하나님을 대적해 훼방하며 모독하는 언사로 결과적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위치로 격상시키려는 저의가 담긴 표현입니다(6절). 이 표현 또한 ‘작은 뿔’의 망언과 깊이 관련됩니다. 단 7:25에는 작은 뿔이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할 것’에 대해 예언돼 있습니다. 바로 ‘지극히 높은 자를 (말로) 대적한다’(blaspheme against God)는 의미가 참람(僭濫)의 본의입니다. 이런 식으로 요한은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도를 박해’하는 작은 뿔의 사단적인 적대적 본성을 짐승에게 적용시킵니다. 이런 사실은 구속사 진행의 점진적인 맥락 속에서 창 3:15의 투쟁적 예언이 신구약을 관통할 뿐 아니라, 계시록에서 발견되는 짐승과 교회간의 적대적 관계 설정에 근간을 이루고 있음을 시종일관하게 시사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역사의 본질이 구속사인 사실을 통찰할 수 있는 계시안목의 회복이 시급히 요청됩니다. 성도의 삶의 정체성이 현상적인 것과의 관계성보다는 보다 영적인 것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는 바울의 선언을 깊이 되새겨야 할 것입니다(엡 6:12).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의 반영이란 원리가 성경의 관점입니다(히 11:3).

 

계속해서 짐승은 불경(不敬)한 망언과 참람 된 막말로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도들을 박해하는 권세를 42달 동안 지속적으로 부여받습니다. 42달의 기간은 계시록에서 이방인들에 의해 교회가 핍박당하는 기간(11:2)이며, 동시에 1260일 동안 교회에 의한 복음증거사역의 기간(11:3)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짐승에 의한 42달의 핍박기간은 보다 근원적으로 ‘작은 뿔’이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대적하고 핍박하는 한 때 두 때 반 때의 기간과 동일한 기간이기도 합니다(단 7:25). 이처럼 요한은 계 13장에서 짐승의 사단적 활동의 근거를 용에게서 뿐만 아니라, 단 7장의 ‘짐승’ 모티브에서 그 기원을 찾습니다. 특별히 바다에서 나온 네 짐승 중 네 번째 짐승의 변형인 ‘작은 뿔’의 불경과 참람 된 사역의 성격을 계시록의 용과 짐승에게 적용시켜 진술합니다. 이는 신구약 역사를 통틀어 사단적 세력의 정체성과 활동의 기원이 창 3:15의 여자의 후손언약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이런 적대적 관계를 총체적으로 주관해 가시는 분은 결국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의 손길입니다. 짐승에게 주어진 42달 간의 권세 또한 결국은 하나님께 종속돼 있다는 사실이 ‘짐승이 권세를 받았다’란 표현 속에서 확인됩니다(계 13:5).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역사의 종국이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인 섭리역사와 그 분의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관장되고 마감될 것을 시사합니다.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계 21:6)고 구속사의 최종성취와 마감을 선언하시는 말씀 속에서 이런 사실이 명백히 확증됩니다. 본 절에서 ‘이루었도다’(It is done)는 역사의 최종이 창세전 수립하셨던 성삼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과 계획(엡 1:3-6)대로 진행되고 마감되었음에 대한 신적 선언의 의미를 가집니다. 이 하나님의 종말적 선언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구속사역을 마치시고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 요 19:30)고 선언하신 사실에 기초하면서, 나아가 일곱째 나팔재앙으로 사단의 사령부인 ‘공중’을 초토화시키고 ‘되었다’(It is done, 계 16:17)고 선언하신 말씀을 동시적으로 포괄하는 총괄적인 성격을 띱니다.

 

6절은 42달 동안 일할 권세를 부여받은 짐승의 활동을 좀 더 구체적으로 기술합니다. 두 가지 측면에서 짐승의 권세가 발휘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일이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훼방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전자는 불손하고 망령된 언사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현대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신은 없다’, ‘신은 죽었다’, ‘하나님을 믿기보다 내 주먹을 믿어라’, ‘하나님을 내게 보이라 그러면 믿겠다’, ‘하나님이 있다면 왜 세상이 이처럼 악할 수가 있단 말인가’,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어떻게 선택과 유기가 있을 수 있는가’ ‘하나님은 사랑이기에 결국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신다’ 등의 성경의 교리에 반하는 인본주의적 발상 등이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식의 인본주의적 표현들은 성경에 반하는 불경한 언사로서 본질상 ‘참람 된 말’과 깊은 연관을 가집니다. 후자는 하나님의 백성인 교회를 핍박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본 절의 문맥 속에서 하나님의 장막과 하늘에 거하는 자들을 동일시합니다. 동격으로 표현합니다.

 

여기서 장막은 구약적 배경에서 성막(tabernacle), 곧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 중에 거하시는 ‘임재’를 상징하는 의미로 사용됩니다(출 25:8). 요한은 동일한 원리 속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가운데 거하시게 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가리켜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친 것으로 설명합니다(요 1:14). 이는 성막의 상징 속에 담긴 임재의 의미를 거하다란 의미와 병행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실례입니다. 따라서 계 13:6에서 ‘하나님의 장막 곧 하늘에 거하는 자들’이란 장막(성전)과 성도(교회)를 동일시함으로 하나님은 교회를 거처삼으시고(고전 3:16, 6:19, 엡 2:21) 교회는 하늘에 거처를 삼음으로 상호간 불가분의 연합과 일치의 관계를 표현해 줍니다(이필찬, 579). 이런 식으로 하나님과 교회 간의 궁극적 연합과 일치(계 21:2-3)는 악의 종말적 파멸(계 16:17)로 도래하게 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출현과 더불어 성취된다는 것이 계시록의 관점입니다.

 

따라서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와 새 창조의 주인공으로 교회가 등장해서 하나님과 연합과 일치의 관계가 성립되는 계 21:1-7의 내용은 첫 창조의 목적이 교회의 종말론적 완성을 통해 비로소 온전히 성취되는 것을 보여줍니다. 에덴의 온전한 회복 말입니다(계 22:1-5). 6절 후반부에서 ‘하늘에 거하는 자들’이란 하나님의 백성을 총칭하는 관용구적 표현(12:12)으로 악의 세력과 연루돼 있는 ‘땅에 사는 자들‘(계 6:10, 8:13, 11:10, 13:8, 12, 14, 17:2, 8절)과 대립적인 관계를 나타냅니다. 특별히 계 13:8에서는 땅에 사는 자들을 ’생명책에 녹명되지 않은 자‘들로 차별화시켜 설명합니다. 이는 상대적으로 하늘에 거하는 자들은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들임을 가리킵니다.

 

7절은 짐승이 권세를 받아 교회를 훼방하고 핍박했던 6절의 내용을 보다 구체화시켜 기술합니다. 성도들과 싸워 이기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다고 설명합니다. 첫째로 짐승이 성도, 곧 교회를 이긴다는 표현은 물리적인 전쟁사건을 의미하지 않습니다(엡 6:12). 실제로 교회는 패배할 수도 없습니다. 오히려 아이의 승천에 근거해 최후의 승리가 보증된 상태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영적이며 일시적인 상태를 가리킵니다. 물론 개인적인 순교자가 나올 수 있습니다. 물리적인 핍박과 박해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전체가 패배하거나 멸망당할 수는 없습니다. 11:7에서 두 증인으로 상징된 교회는 복음증거사역을 마친 후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용)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현상입니다. 삼일 반 후에 부활해 구름을 타고 승천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잠정적이고 한시적인 죽음입니다. 극한 박해와 핍박을 죽음의 이미지를 통해 표현하고 있을 뿐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고 말입니다.

 

계시록은 유다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미 이겼다고 선언합니다(5:5). 어린양의 죽음과 부활과 승천 속에서 용은 패배했고 반면 교회의 종말적 승리는 기정사실화 되고 있습니다(11:15, 12:10). 그런 의미에서 초림과 재림 사이에 한시적인 영적 전쟁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다양한 모습으로 교회를 핍박하고 대적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이 시대에 진리를 생명처럼 받들어 섬기는 참 교회들은 이미 ‘두 짐승’에 의한 영적인 핍박과 박해 가운데 처해 있습니다. 둘째로 짐승이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다는 것은 일시적(42달) 현상으로 사단이 세상임금의 자격(요 12:31)과 우주적인 권세자(눅 4:5-7, 마 4:8-9)로 군림한다는 데서 기원됩니다. 그러나 사단의 종말적 패배와 심판(계 20:7-10)으로 세상나라는 오히려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11:15). 교회는 그리스도의 승리에 연합돼 새 창조의 나라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21:1-3).

 

8절은 짐승이 성도를 핍박하고 세상임금과 권세자로 나타나는 7절의 결과를 설명합니다. 한 마디로 이 ‘땅에 사는 자들’이 다 짐승에게 경배한다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경배란 짐승을 신격화시켜 전인적으로 추앙하며 추종했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계시록에서 ‘땅에 사는 자들’의 정체성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심으로(롬 1:28) 악에 속해 적극 사단의 세력을 좇는 자들을 총칭하는 표현입니다(계 6:10, 13:8하, 11:10, 13:12, 14, 17:2, 8절). 특별히 요한은 ‘땅에 사는 자들’을 좀 더 구체적으로 부연설명하기 위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녹명되지 못한 자들’이란 표현을 사용해 ‘땅에 사는 자들’의 정체성을 의도적으로 차별화시켜 규정합니다. 이런 표현 속에는 창세로부터 어린양에 속한 자들은 생명책에 녹명돼 있는 반면, 땅에 속한 자들은 생명책에서 제외되었음을 암암리에 시사합니다. 이런 사실은 창세전부터 택자와 불택자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기뻐하시는 뜻 가운데 구분되었음을 의미합니다(엡 1:4, 딤후 1:9, 롬 9:11, 이필찬, 583). 칼빈은 성경의 이런 가르침에 근거해 선택(election)과 유기(reprobation)의 이중예정을 피력했습니다(장수민, 칼빈의 기독교강요, 2005, 453).

 

본문에서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이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효 안에서 공급해 주시는 구원의 생명의 영원성과 영속성에 대한 절대 안전과 보증을 생명책이란 상징을 통해 확증시켜 주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늘에 생명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더욱 성도의 이름이 하늘 생명책에 기록돼 있는 것도 아닙니다. 생명책의 기원 또한 구약적인 배경을 가집니다. 출 32:32-33에서 모세는 황금송아지신상을 만들어 경배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의 우상숭배 죄를 물어 진멸하기를 원하셨습니다(출 32:10). 이 과정에서 모세는 차라리 ‘주의 기록한 책’에서 자기 이름을 삭제할망정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해 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본문에서 ‘주의 기록한 책’이란 표현이 성경 다른 곳에서 생명책(시 69:28, 빌 4:3, 계 3:5, 13:8, 17:8, 20:12, 15, 21:27), 책(단 12:1), 기념책(말 3:16) 등과 의미상 동의어적으로 사용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원래 출애굽기서에 기록된 ‘주의 기록한 책’이란 배경은 당시 백성들의 신원이 시민 명부에 기재된 내용을 통해 확인되었던 사실에 근거한 표현입니다.(호크마 종합주석). 물론 본문에서 모세가 자신의 이름을 ‘주의 기록한 책’에서 지워달라는 것은 삭제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간청이 아닙니다.

 

이미 살펴본 대로 ‘주의 기록한 책’은 한 마디로 ‘생명책’과 동의어적인 표현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생명책의 의미는 ‘죽임을 당한 어린양의 생명책’(계 13:8)이란 표현 속에서 확인했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근거한 구원과 생명의 영원한 보증을 가리킵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공효가 영원하고 영속적이기 때문입니다(히 9:12, 26, 10:12-18, 요 10:28, once for all). 따라서 하나님의 생명책에 한 번 등재된 이름은 어떤 이유로라도 지워질 수 없습니다. 만일 모세의 이름이 ‘주의 기록한 책’에서 지워질 수 있다면, 그것은 구원의 중도상실과 무효화가 가능함을 시사하는 것이며, 동시에 예수님의 구속의 능력의 무한함과 구원의 영원성이 부인되는 결과를 인정하는 셈이 됩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본질상 한 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속죄 안에서 다시 죄를 위하여 제사드릴 것이 없습니다(히 9:12, 26, 10:18). 결국 모세의 간청은 불가능(생명책에서 자신의 이름 삭제)을 담보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를 확실하게 보장받기 위한 사랑의 발로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확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책에 녹명된 이름은 결코 지워질 수 없습니다. 창세전 하나님의 선택과 주님의 속죄사역의 완성 및 성령의 인침과 내주 그리고 보증의 사역에 근거해(엡 1:4-14) 불못(지옥)의 심판과 영벌로부터 천국의 구원과 영생에로 이미 옮겨졌기 때문입니다(요 5:24, 빌 3:20, 골 1:13).

 

주님께서도 70인 제자들의 전도사역과 관련해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이 항복하는 것보다 이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생명책)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눅 10:20). 이는 구원과 영생의 보증이야말로 다른 무엇에 비교할 수 없는 최고의 복이며 최상이 상급이란 사실을 가리킵니다. 오늘날 구원은 기본적으로 따 놓은 당상이고, 이 외에 추가적인 또 다른 복과 상급을 기대하며 보상심리의 발동인 상급주의 신앙을 추구하는 것은 심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 가치의 생명이 지불된 구원의 참 된 의미와 가치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所致)일 뿐입니다. 설령 다른 것이 있다고 한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하나님과의 완전한 관계회복 속에서 완성된 구원의 실질을 함께 공유해 누리며,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는 왕 같은 제사장의 삶을 세세토록 누리는 일에 비교될 수 있겠는지요(계 11:16-18, 22:1-5).

 

이런 관점에서 성경적인 바른 신앙관의 정체성은 소위 ‘무익한 종’의 심정과 고백을 통해 그 실상이 적나라하게 제시됩니다.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눅 17:9-10). 그렇다면 본 절에서 무익한 종이 이런 식으로 고백할 수밖에 없는 당위(must)의 배경은 무엇일까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구원의 은혜와 감사의 반응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9절에서 요한은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찌어다”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계 2-3장에서 일곱 교회에게 선포해 주신 주님의 메시지가 말미에 성령을 통해 재확증하시는 선언 속에서 발견되는 내용입니다(2:7, 11, 17, 29, 3:6, 13, 22절). 이런 식으로 교회를 향한 메시지의 선포자가 주님에게서 성령님으로 전환되는 것은 현 교회시대에 부활승천하신 주님의 사역이 성령님을 통해 대리적으로 수행되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입니다(요 14:16, 26, 6:13, 행 2:1-4). 따라서 9절의 동일한 선언을 통해 계 13:1-8절에 언급된 첫 째 짐승의 핍박과 박해활동이 요한 당시 일곱 교회에게 일차적으로 적용될 뿐 아니라, 동시에 모든 시대의 교회들에게도 경계로 주시는 보편타당한 말씀이란 사실이 확인됩니다. 10절은 첫 째 짐승의 적대적 활동으로 인해 사로잡히는 자와 칼로 죽임을 당하는 교회 중의 순교자가 불가피하게 나올 것에 대해 언급합니다. 실제로 서머나 교회(2:10)나 버가모 교회(2:13)의 경우 믿음의 정절로 인해 투옥되는 성도와 죽임을 당하는 성도들이 있었음을 기록합니다.

 

본 절은 렘 15:2과 43:11의 반영으로 불순종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심판하심으로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갈 것에 대한 예언기록입니다. 물론 불순종한 이스라엘에 대한 예레미야서의 심판내용과 계 13장에서 짐승에 의해 교회가 받는 핍박사이에는 내용상 불일치의 요소가 없지 않습니다. 전자는 인과응보적 차원이 강하지만 교회가 짐승으로부터 받는 박해는 섭리적 차원(창 3:15)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중에 일단의 하나님의 신실한 남은 자(왕상 19:18, 사 1:9, 10:20-22, 46:3, 렘 23:3)들이 여전히 존재할 것을 감안하면 이들이 감수해야 하는 심판의 고통은 교회가 짐승의 박해로 인해 받는 고난과 연속성이 존재함을 확인하게 됩니다. 때문에 요한은 첫 째 짐승의 사역을 일단락 시키면서 10절 끝에서 핍박과 고난과 환난에 직면해 있는 교회공동체를 향해 인내와 믿음 곧 믿음의 인내를 강력히 요청합니다. 이때의 믿음과 인내는 억지춘향식의 일방적 요구나 명령이 아닙니다.

 

 

12장에서의 ‘아이의 승천과 용의 패배’에 근거한 순리적 차원의 권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지상의 교회공동체는 짐승과의 적대적인 대립구도 속에서 비록 한시적으로 ‘전투적 교회’로 존재하는 것이 불가피할지라도 종말론적 신앙관에 깊이 접촉돼 믿음의 정절과 인내를 발휘하는 지혜가 필요할 줄 압니다. 이런 식으로 고난과 핍박 중에서도 미래의 확신을 통해 불굴의 투지로 지켜낸 성도의 믿음과 인내는 하나님께 속한 충성된 백성들의 표지로 기능할 뿐 아니라, 성도의 신앙인격을 보다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는 성숙의 동인이 되게 합니다(약 1:2-4). 이런 사실이 교회의 핍박과 관련해 기록된 13장에 이어, 교회의 종말적 승리에 관해 기술된 14장에서 이마에 하나님과 어린양의 인침을 받은 하늘에 속한 십사만 사천명의 출현을 통해 구체적으로 확증됩니다(14:1). 로마서 기자는 이런 성도의 신앙여정을 논하면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롬 8:18). 고린도서 기자는 이 땅에서 성도가 받는 고난의 의미를 구속사적 관점으로 해석하면서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함이라”고 설파합니다(고후 4:17).

 

위 두 구절을 종합해 정리하면 이 땅에서의 고난은 한시적이고 짧은 것에 불과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맛보며 누리게 될 영광스런 삶은 영원할 것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성도의 미래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연합돼 확고부동하게 보증되고 있음을 성경 도처에서 확증해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도의 신앙여정은 상상으로 꾸며낸 이야기(fiction)가 아닙니다. 실제상황(non-fiction)입니다.

 

2. 땅에서 올라온 짐승(11-18절)

바다에서 나온 첫 번째 짐승(1-10절)을 기술한 데 이어 본 절에서는 땅에서 올라오는 두 번째 짐승을 소개합니다. 11절은 이 짐승의 겉모습과 특징을 언급함으로 그의 영적 정체성을 밝혀줍니다. 12-18절까지는 첫 째 짐승과의 관계 속에서 그의 사역을 진술합니다.

 

두 번째 짐승의 특징(11절)

땅에서 올라온 두 번째 짐승의 특징은 겉모습이 두 뿔을 가진 새끼 양과 흡사하나 ‘용처럼 말을 한다’는 데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요 1:29, 고전 5:7)의 흉내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문맥을 통해 강하게 암시받습니다. 첫 번째 짐승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되었다가 회복됨으로(13:3)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모방했듯이 말입니다. 이는 사단도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고 했듯이 사단의 일군(추종세력들)들도 자신을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은 새삼스런 일이 아닙니다(고후 11:14-15). 그래야 사람들에게 쉽게 접근해 미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새끼 양 같은 두 뿔’의 형상은 단 8:3에서 ‘두 뿔 가진 수양’의 모습을 배경 삼습니다. 이는 메대-바사(페르시아)를 가리킵니다(단 8:20). 단 8:5-7에서 비록 두 뿔 가진 수양이 갑작스럽게 나타난 수염소(헬라상징, 21절)에 의해 졸지에 패배를 당하지만 단 8:4은 그의 능력과 권세를 따를 자가 없을 정도로 막강한 힘과 용맹을 갖추고 있음을 기술합니다. 이런 배경이 계 13:12에서 두 번째 짐승이 첫 번째 짐승에 버금가는 권세를 발휘할 수 있는 동인으로 작용합니다.

 

이상 두 번째 짐승의 등장을 통해 사단의 세력은 용과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과 땅에서 올라온 짐승으로 악의 삼두체제를 구성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 지휘체계는 용-바다의 짐승-땅의 짐승의 구조를 띠고 나타납니다. 이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하나님의 정체성을 모방함에 다름 아닙니다. 모름지기 유사성은 성도를 미혹하는 사단의 고전적인 수법입니다. 에덴에서 하와를 미혹하는 과정에서 뱀은 하나님의 말씀(창 2:17)을 유사하게 변조시켜 시험했던 것을 기억합니다(창 3:1-3). 이 외에도 출애굽사건과 관련해 모세를 통해 나타났던 하나님의 기적 중 일부를 애굽의 술객들도 따라서 흉내를 냈습니다(출 7:20-22, 8:5-7). 유사성을 통해 하나님을 대적하기 위함입니다. 북이스라엘의 여로보암에 의해 시행된 종교개혁정책은 종교를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한 유사성의 극치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왕상 12:25-23). 외양은 분명히 구약종교의 모습을 갖췄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제사장에 의해 각종 제사가 집전됩니다. 때를 따라 절기를 지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금송아지로 형상화시켜 우상처럼 경배합니다. 레위인이 아닌 보통사람으로 제사장에 봉직시킴으로 매관매직이 성행합니다. 율법에 정해진 절기일자를 필요에 따라 임의대로 변경해서 지킴으로 사람의 편의성을 앞세웁니다. 이렇듯 여로보암의 종교개혁정책의 실상은 자신의 정권유지를 위해 여호와의 신앙 자체를 도구화시켰습니다. 이는 모세율법의 정신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불법적인 처사요 패역한 행위에 불과합니다. 이후 여로보암의 패역한 종교정책은 ‘여로보암의 길’이란 불의한 신앙적 사상체계로 고착돼 모든 북이스라엘 왕들에게 전통으로 계승되었습니다. 그 결과 북이스라엘은 아합왕 때 이르러 왕비 이세벨의 사주에 의한 바알숭배 장려정책으로 온 나라가 국가적인 우상숭배의 심연으로 빠지게 되었으며 급기야 BC 722년에 앗수르에 의한 침공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이런 영적 암매와 패역의 실상은 현대교회 속에서도 동일하게 발견되는 변질된 종교현상입니다. 흔히 현대교회 속에서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는 소위 기복주의, 상급주의, 지성감천주의 신앙 등 일종의 보상심리의 발동으로 나타나는 일체의 신앙행위는 본질상 자기유익을 위해 신앙을 도구 삼는 과거 여로보암의 종교와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인간의 유익과 행복과 성공이 신앙의 목적이 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이방종교에서는 이것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이방종교는 근본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신앙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상이 아닐뿐더러(창 1:1, 출 20:1-3, 엡 1:4-6) 인간의 근본 필요인 구원과 생명의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통해 죄를 대속하시는 방식으로 먼저 해결해 주신 구원자이십니다(창 3:15, 롬 5:8, 요 19:30). 따라서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은 방편적 신앙이 아닙니다. 구원의 은혜에 감사의 반응으로 보답하는 목적적 신앙입니다. 그래서 총론적 관점에서 ‘주옵소서’의 신앙이 아닌 ‘감사합니다’의 신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무익한 종의 신앙고백이 이런 사실을 적극 뒷받침해 줍니다(눅 17:10).

 

이제 두 번째 짐승의 출현으로 용(사단)의 영향력은 두 짐승을 통해 양공작전을 펼치는 방식으로 교회를 핍박하는 양상을 띠게 됩니다. 첫 번째 짐승을 통해서는 세상권세와 정치권력을 이용해 하나님을 대적하며 물리적인 방법을 동원해 교회를 억압하고 핍박합니다. 두 번째 짐승은 이후 계시록에서 그의 정체를 거짓선지자로 공공연하게 호칭하는 것처럼(16:13, 19:20, 20:10) 교회에 가만히 들어와 거짓말과 헛된 속임수로 복음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말씀을 수단화시키는 방식으로 교회를 세속화시키고 변질시키는 데 앞장섭니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계 2-3장에 기록된 초대 교회역사 속에서 이상 두 짐승의 핍박과 미혹의 역사가 이미 구체적으로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엡 2:2, 8-10, 13-15, 20, 3:8).

 

한편 이들 두 짐승의 정체를 저들이 수행하는 적대적인 사역의 특성과 관련해 설명할 때 흔히 ‘적그리스도(anti-Christ)의 영’의 활동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요일 2:18, 22, 4:1-4, 요이 1:7). 적그리스도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교회공동체를 대적하고 핍박하는 마귀의 세력을 호칭하는 또 다른 표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 교회시대는 두 짐승의 활동기이며 동시에 적그리스도의 영이 온갖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수’로 적극 미혹하는 시기이기도 한 셈입니다(요일 4:3, 살후 2:1-12). 주님께서도 산상수훈을 통해 직접 거짓선지자들의 출현과 저들의 미혹에 주의할 것을 크게 경계시켜 주셨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겉에 양의 옷을 입고 자신을 위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의 본성을 갖고 있어서 할 수만 있으면 기회를 타서 성도를 미혹해 넘어지게 하는 일에 광분하고 있다는 지적입니다(마 7:15). 이는 계 13:11에서 두 번째 짐승의 외모가 새끼 양 같으면서도 입으로 용의 말을 함으로 자신의 사단적 정체를 위장하고 있는 것과 본질상 동질성을 띱니다. 거짓선지자란 용례를 통해서도 사역의 성격상 양자가 동일시됩니다. 마 7:22에 언급된 거짓선지자(거짓목회자/거짓교사)의 목회내역이 이런 사실을 구체적으로 뒷받침해 줍니다. 저들은 시종일관하게 주님의 이름으로 교회 속에서 목회에 진력했음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하나님 앞에서 불법으로 판정돼 심판을 받고 지옥에 떨어질 뿐입니다(마 7:23).

 

그렇다면 본문의 거짓선지자의 사역이 왜 불법으로 판정될 수밖에 없었을까요. 마 7:21은 이들 거짓선지자들이 추구했던 사역의 성격이 계시의존적인 목회가 아니라 자의적(恣意的)인 목회에 전력투구했기 때문이란 사실을 문맥을 통해 암시해 줍니다. 즉 21절속에서 ‘사람의 뜻과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상호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우고 충돌하고 있음을 통해 이런 사실이 넉넉히 추정됩니다. 사람의 타락한 종교성을 부추겨서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의 전통적이고 인본주의적인 목회를 적극 지향했다는 판정입니다. 물론 이런 사실은 비단 목회에만 적용될 성질이 아닙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제아무리 기독교적 열심으로 채워지고 각종 기독교적 요소들로 치장된다고 할지라도 ‘계시의존적인 지식의 체계’를 좇는 것으로 확인되지 않는다면, 그 결과는 불법적이며 불복종적인 신앙으로 판정될 뿐이라고 성경은 엄히 경고합니다.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 하였느니라”(롬 10:2-3). “나더러 주여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두 번째 짐승의 사역(12-18절)

본 짐승의 외관이 두 뿔이 달린 새끼 양으로 위장하고 입으로는 용의 말을 한다고 진술합니다. 이는 주님께서 친히 지적하신 대로 ‘양의 옷을 입었으나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의 야수성을 지닌’ 거짓선지자와 본질상 동일시되고 있는 표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두 번째 짐승을 계시록 도처에서 거짓선지자로 호칭하는 것은 당연합니다(16:13, 19:20, 20:10).

12-18절에서 두 번째 짐승의 사역의 핵심은 사람들로 하여금 첫 번째 짐승에게 경배케 하는데 집중됩니다(12, 14-15절). 이런 결과 전자의 사역이 후자의 사역을 도와 보좌관의 임무와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 과정에서 땅의 짐승이 발휘하는 권세의 출처는 바다 짐승으로부터 부여받습니다. 따라서 두 짐승은 공히 용으로부터 권세를 위임받아 하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핍박하려는 용의 사역을 연합해서 대리적으로 수행한다는 의미가 성립됩니다. 특별히 땅의 짐승이 ‘땅에 거하는 자들’로 하여금 바다의 짐승을 경배케 하는 사역과 관련해(12절) 이는 짐승의 지위와 권세를 더욱 고양시켜 경배를 배가시키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왜냐하면 4절에서 바다 짐승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되었다가 기사회생함으로 이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기이히 여겨져 경배의 동인으로 이미 작용했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두 짐승의 관계는 환상의 복식조를 이루면서 바다 짐승을 통해 용의 사역을 대리적으로 행사하는 일에 땅의 짐승은 최선으로 봉사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혹자는 이런 상황을 1세기 교회가 처한 극도의 신앙적 위기상황과 관련시켜 땅의 짐승의 존재가 당시 로마정권의 황제숭배사상을 종교적 차원에서 적극 선도했던 제사장의 직분에 연결시키기도 합니다(이필찬, 589). 그래서 당시 바다 짐승을 네로나 도미티안 등 정치적 박해자와 연관시키고 땅의 짐승은 이들의 황제숭배정책을 적극 선도하고 후원했던 이교도 제사장 직분과 관련시키려고 합니다. 물론 1세기 교회가 처했던 특별한 정황상 개연성의 여지가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계시록을 비롯한 성경의 내용은 동시에 시공간을 초월해 보편적이고 개관적인 진리성을 갖는 것이기에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교회 입장에서는 보다 보편타당성 있는 원리의 적용이 절실히 요구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때(text)와 지금(context)이라는 두 시대의 불가분의 상호연관성 속에서 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두 짐승의 적대적 활동사역은 현 교회시대에 정치적이고 종교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예술, 음악, 매스컴, 각종 주의와 주장, 유행 등 다양한 경로와 시대적 풍조를 통해 무차별적으로 교회를 타락시키고 세속화시키는 일에 집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계 13장 말미에 사람의 수(man's number)와 짐승의 수(the number of the beast)를 나타내는 666숫자는 총론적 관점에서 하나님께 대적해 인간의 행복과 성공을 약속하는 세속주의와 물질만능주의 그리고 인본주의와 기복주의 등 다양한 현상을 통한 미혹을 총망라한 상징적인 숫자로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7은 하나님과 관련된 완전수와 충만수를 가리킨다면 6은 불완전한 사람의 수와 짐승의 수를 상징합니다. 결국 666은 하나님의 완전수 777에 대립되는 불완전한 수로 하나님의 의에 미달하며 하나님의 주권에 도전하는 모든 악한 세력들을 총칭하는 상징적 의미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호크마 종합주석, 419-420).

 

사람들로 하여금 바다의 짐승을 경배하도록 촉구하던 땅의 짐승은 보좌관의 사명을 더욱 충실히 수행하기 위한 일환으로 불이 하늘로부터 내려오게 하는 이적을 행합니다(13절). 이는 아합왕 시대에 엘리야선지자가 참 신(神)의 진위성 여부를 가리기 위해 갈멜산에서 바알선지자들과 영적 전투를 벌였던 기사를 연상케 합니다(왕상 18:38). 이때 엘리야는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늘로부터 여호와의 불이 내려와 번제단의 제물을 일순간에 태워버리는 기적을 행합니다. 그런가 하면 계 11:5에서 ‘두 증인을 해하려는 자들에게 입에서 불이 나와 원수를 소멸할 것이라’는 말씀에 대한 모방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땅의 짐승은 왜 이런 식으로 이적을 미혹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일까요. 주님의 말씀대로 악하고 음란한 세대의 보편적인 특징은 말씀보다 표적과 이적기사 등 신비주의적 현상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딤후 4:3-4, 마 12:39, 16:4). 땅의 짐승은 각종 이적을 행함으로 이런 자들의 호기심을 충족시켜 바다 짐승의 추종자를 삼고 그를 경배케 하는 일에 ‘충성된 종’의 사명을 감당하는 셈입니다.

 

이에 더하여 땅의 짐승은 바다 짐승으로부터 받은 권세를 발휘해 그 앞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다양한 이적을 행합니다. 여기서 땅의 짐승이 행한 이적기사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바다 짐승을 기쁘게 하기 위함이며, 다음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미혹해서, 궁극적으로 바다 짐승의 우상을 만들게 해 그것을 전심으로 경배케 하기 위함입니다(13-14절). 여기서 성도들이 유의할 것은 긍정적인 입장일지라도 이적기사는 복음의 실질이 아니라 복음증거를 위한 방편적 기사일 뿐이란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사도들의 기적을 가리켜 표적적 기사라고 부릅니다(요 2:11, 6:1-2, 26, 행 8:6, 13절). 믿음에 이르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표적 말입니다. 더구나 성경이 완성된 계시로 주어진 교회시대에는 사도적 기사의 재현과 반복은 원리상 불가능합니다. 성경이 모든 표적을 포괄하고 대신하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는 원리가 성경을 통해 유효하게 작용하기 때문입니다(롬 10:17). 그럼에도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기도의 응답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이적기사는 하나님의 필요를 좇아 여전히 일어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반면에 이적기사 자체를 종교적 호기심에 이끌려 하나님의 능력의 현시로 맹신하는 일은 지극히 위험천만한 생각입니다.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교회시대에 거짓선지자들은 온갖 능력과 표적과 거짓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수로 땅에 속한 자들은 물론 성도까지도 미혹할 것을 성경은 경고합니다(마 24:24, 살후 2:9-10). 이와 관련해 성경은 영을 다 믿지 말고 영들이 하나님께 속했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것을 강력히 주문합니다. 적그리스도의 영이 이미 활동했으며 그 결과 거짓선지자들이 도처에서 미혹의 역사를 펼치고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요일 4:1-3). 성령의 역사는 영혼들을 말씀으로 거듭나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십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며, 감사함으로 순종하면서 일평생 하나님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삶을 살아가는 데 집중하게 합니다.

 

부단한 자기포기의 삶을 통해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영광구현이란 명제 속에서 일평생을 무익한 종의 심정으로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이런 현상들이 성령의 통치를 받는 자의 보편적인 모습입니다. 이 길은 ‘좁은 길’(마 7:14)이며 ‘옛적 길’(렘 6:16)입니다. 그 결국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반면에 적그리스도 영은 자기만족과 자기자랑과 자기과시 및 자기 의를 내세워 사람의 영광을 추구하게 합니다. 세속적인 행복과 부와 성공을 보장해 주면서 현세 지향적이며 자기중심적인 삶을 추구해 나가도록 적극 충동합니다. 그래서 수분자족 하는 감사의 마음이 결여됩니다. 늘 욕심에 종노릇하게 됩니다. 자연히 기복적이며 보상심리적이고 지성감천주의적인 신앙관을 형성하게 됩니다. 이 길은 ‘넓은 길’(마 7:13)이며 ‘곁길’(렘 18:15)입니다. 그 결국은 심판과 멸망입니다.

 

땅의 짐승은 다양한 이적을 행함으로 땅에 거하는 자들을 현혹할 뿐만 아니라, 이번에는 그의 사역을 더욱 발전시켜 바다 짐승의 우상을 만들 것을 촉구합니다(14절). 이 과정에서 땅의 짐승은 바다 짐승이 ‘칼에 상했다가 다시 살아난 사실’(3절)을 강조함으로 우상 제작의 정당성을 고취시킵니다. 이는 온 땅이 앞서 바다 짐승의 기사회생 사건을 목도한 후, 이를 경이롭게 여긴 나머지 자원해 그를 섬겼던 사실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고도의 책략인 셈입니다. 경이(驚異)의 단계를 경외(敬畏)의 단계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를 위해 땅의 짐승은 바다 짐승으로부터 권세를 부여받습니다. 그러나 이번에 받은 권세는 단순히 이적기사를 행하기 위한 수준이 아닙니다. 바다 짐승이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말하게 하고, 우상을 경배하지 않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죽음에 처할 것을 경고합니다(15절).

 

정치권력과 종교세력이 공조해 백성들을 국가적 차원의 우상숭배로 이끌려는 계략입니다. 이런 시책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임할 핍박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교회가 가장 극심한 피해의 당사자가 될 것입니다. W. 헨드릭슨은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주님의 재림이 임박할수록 이적과 기사와 표적을 통해 사람을 미혹하는 거짓선지자들의 활동은 극대화 되고(마 24:24), 지상의 정치세력들이 사단의 도구로 이용돼 교회를 더욱 탄압하게 될 것이라고 경계시킵니다(호크마 종합주석, 412). 우상에게 생기를 주어 말하게 하고 경배하게 한다는 표현이 이런 사실의 개연성을 충분히 뒷받침해 줍니다. 이는 정치적 규제와 법규로 인해 교회의 신앙 활동이 구속과 제재를 받게 되는 일과 무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편 15절의 우상건립과 경배강요 및 처형기사는 단 3장에서 느부갓네살 왕이 금 신상을 세우고 그것에게 절하지 않는 자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타는 풀무에 던져 넣어 죽일 것을 선포하는 기사와 의미상 유사합니다. 다니엘의 세 친구인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이에 불응함으로 결국 풀무 불에 던져졌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기적처럼 살아납니다. 이처럼 요한은 단 3장의 절박한 정황을 계 13장에 적용시켜서 두 짐승의 핍박 하에 놓여있는 교회의 신앙적 위기와 영적 현실을 직시케 함으로 다니엘의 세 친구가 보여줬던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투철한 믿음과 인내로 사단의 세력에 대처할 것을 성경 독자들에게 촉구합니다. 이런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은 계 2-3장에 언급된 일곱 교회의 정황을 통해 이미 현실화되고 있음을 확인한 바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환란과 핍박에 대처하는 최선의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보증된 교회의 종말적 승리를 확신하면서 믿음과 인내로 신앙의 정절을 지켜나가는 의연(毅然)한 자세입니다.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14:4-5). 본문은 그 이마에 어린양과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으로 인침을 받은 하늘에 속한 십사만 사천명에 대한 계시록의 진술입니다(14:1).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생명의 도리로 붙들고 살아가는 전폭적인 신뢰의 믿음만이 사단이 왕 노릇하는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역사합니다. 주님께서는 말세를 살아가는 현대교회를 향해 오늘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8). 본문은 재림의 때가 지연되는 것처럼 여겨지는 것과 관련해 진리성과 진정성에 입각한 참된 믿음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우회적인 표현입니다. 믿음의 진위성은 최악의 상황에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재림의 지연(?)과 다양한 세속주의의 범람, 인간의 행복과 성공을 보장하는 물질만능주의의 유혹, 그리고 축복을 빙자한 말씀의 왜곡과 변질 등 현대교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 심각한 신앙의 위기와 영적 암매 및 도전적인 시험에 직면해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매매를 보증하는 666표(16-18절)

바다 짐승을 보좌하는 땅의 짐승의 사역은 우상건립을 통한 신격화작업 및 경배 강요에서 한 단계 더 발전합니다. 그것은 각계각층의 모든 사람들의 오른 손과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게 하는 계획입니다(16절). 표(mark)는 문서상의 확인이나 소유권의 확증을 위해 짐승이나 노예에게 찍는 낙인 등을 가리킵니다. 곧 표(標)는 인(印)이며 기호(記號)입니다. 따라서 ‘누구의 표를 받는다’는 것은 그의 소유가 되었을 뿐 아니라, 그를 주인으로 모시고 종의 신분으로 섬긴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계시록에서 표는 두 가지 대응되는 의미로 기술됩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인을 맞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의 신분을 나타냅니다(계 7:3-4, 14:1). 다른 하나는 본문의 ‘짐승의 표’로서 동일하게 짐승의 소유권과 소유된 추종세력들을 상징적으로 나타냅니다. 나아가 그 결국은 불신과 불순종으로 인한 심판과 멸망이란 사실까지도 포함합니다(14:9, 11절).

 

특별히 ‘표를 오른 손과 이마에 받는다’는 표현은 신 6:8의 반영을 연상케 합니다. 신 6:8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신민(神民)으로서 말씀연구와 순종하는 삶의 일상화를 위해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자녀들에게 가르치고, 배우고, 강론할 뿐만 아니라, 친히 말씀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며 집 문설주와 바깥문에 기록할 것을 요구받습니다. 본문에서 말씀을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고 미간에 붙여 표를 삼으라’는 표현은 말씀을 언행심사의 근간으로 삼아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며 그 뜻을 받들어 행하라는 명령을 비유적으로 언급한 내용입니다. 따라서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세상만민들로 하여금 오른 손과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게 한다(16절)는 진술은 온 땅(13:3하)을 바다 짐승의 소유된 백성을 삼아 만왕의 왕의 신분으로 경배와 영광을 받게 하려는 거짓선지자(땅의 짐승)의 저의를 엿보게 합니다. 이는 하늘보좌를 찬탈하려다 실패해 쫓겨났던(사 14:12-14, 유 1:6, 벧후 2:4) 굴욕의 과거사를 짐승을 통해 만회해보려는 사단의 고등한 간계가 이런 식으로 나타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나아가 이 또한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만 왕의 왕의 신분과 자격으로 재림하셔서 성도들에게 영광을 받으시고 모든 믿는 자에게서 기이히 여김을 얻게 되시리라는 말씀(살후 1:10)에 대한 모방의 일면을 발견하게 됩니다.

 

17절은 사람들의 오른 손과 이마에 받은 표의 용도와 정체성에 대해 진술합니다. 먼저 표의 용도는 매매를 위한 경제행위의 수단임이 강조됩니다. 즉 표가 없이는 일체의 매매행위가 허락되지 않습니다. 다음으로 표의 정체성은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고 설명합니다. 이를 18절과 연계시키면 표=짐승의 이름=이름의 수=짐승의 수=사람의 수=666이란 등식이 성립됩니다(17-18절). 이들 상호간 내용상으로 동격관계를 이룹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저들의 이마에 하나님과 어린양의 이름을 가짐으로 구원과 영생이 보장됩니다(계 14:1). 반면에 짐승의 추종자들은 그들의 오른 손과 이마에 짐승의 이름을 가집니다(계 13:16). 이는 14:1과의 대비 속에서 복음을 거절함으로 구원에서 떠나 멸망을 자초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선지자는 거짓복음을 통해 세상적인 성공과 부와 행복을 약속합니다. 축복을 미끼삼아 세속적인 삶을 보장해 줍니다. 이런 달콤한 유혹에 종교를 통해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욕심을 충족시켜보려는 어리석은 자들이 부화뇌동(附和雷同)하게 됩니다.

 

기복적이고 보상심리적이며 지성감천주의적인 신앙관의 정체성이 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것이 제아무리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외관상 기독교의 이름으로 행세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행복과 성공과 부를 목적삼고 하나님을 도구삼는 데서 성경이 말하는 여호와중심의 신앙과는 거리가 멉니다. 무관합니다. 성경은 이런 신앙을 가리켜 불복종적이며 불법적인 신앙으로 판정합니다(롬 10:2-3, 마 7:21-23). 주님은 이런 자들을 가리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선언하십니다(마 7:23). 이들이 본질상 짐승의 표를 받고 세속적인 목적을 위해 하나님을 도구삼아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겼던 ‘자의적 숭배신앙’의 소유자들인 셈입니다(롬 10:2-3).

 

이상의 논증이 ‘짐승의 이름과 사람의 수’를 상징하는 666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 한다는 선언에 담긴 본질입니다(17절상). 이처럼 거짓선지자(땅의 짐승=둘 째 짐승)는 짐승의 표인 666표를 미끼삼아 사람들을 자기소유로 삼습니다. 저들의 현실적인 욕망을 일시적으로 충족시켜 줍니다. 그러나 그 결국은 불신과 불법과 불복종으로 판정돼 사망과 멸망에 이릅니다. 계속해서 악의 세력에 대한 종말적 심판현상을 다루고 있는 14:6-20에서 요한은 심판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지목하면서 “짐승과 그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은 자“(9, 11절)로 설명합니다. 이는 결과적으로 13:16-17에서 짐승의 표를 받고 그를 경배하며 추종한다는 것이(매매의 보증=축복의 미끼에 현혹돼) 신앙을 도구삼아 일시적으로 일신상의 영달을 도모하는데 성공했을지라도 결과는 불신과 불순종으로 정죄돼 심판에 처해진다는 사실을 확증시켜 줄 뿐입니다(마 7:21-23).

 

교회역사 속에서 666 짐승의 표에 대해 학자 간에 많은 해석이 분분합니다. 지금도 통일된 해석은 여전히 요원합니다. 혹자는 666표가 짐승의 이름과 사람의 수란 사실에 착안해(gematria) 역사 속에서 교회를 핍박했던 네로나, 도미티안, 심지어 히틀러, 뭇소리니 나폴레옹 등을 예로 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관점을 가진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사단의 종말적 핍박과 환난의 시기에 세상정부를 대표할 만한 정치지도자가 적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출현할 것을 동일한 맥락 속에서 해석합니다. 내용상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짐승의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한다’는 말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한 나머지 신용카드나 바코드 또는 세계통일통화화폐가 될 것이라는 주장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계시록에서 제시되고 있는 숫자가 주로 상징적인 용례로 쓰이고 있음을 고려하면 666 또한 상징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다시 말해 계시록에서 7은 완전수와 충만한 수로서 하나님의 수로 사용됩니다(7교회, 일곱 인/나팔/대접, 일곱 영, 일곱 눈 등). 그런 의미에서 6은 사람의 수로 완전에서 1이 부족한 불완전한 수를 상징합니다. 따라서 666은 하나님의 완전에 대한 마귀적인 모방과 현혹, 불신과 불경 등 신성모독을 상징하는 숫자로 해석합니다(호크마 종합주석,413/W.헨드릭슨, 183-184/G.골드워디, 193-196). 이런 관점에서 초대교회 당시 네로를 짐승을 상징하는 장본인으로 지목하는 것은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기독교와 성도를 핍박했던 당시 네로의 기독교 말살정책 속에 짐승의 마귀적 사역의 속성이 그대로 반영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짐승은 곧 네로 황제다’라는 식의 등식 설정은 상징성에 담긴 해석의 다양성과 보편성을 자칫 제한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계시록 자체에서 요한은 그런 식의 해석의 개연성을 허락할지언정 단정적인 해석에는 침묵하고 있습니다.

 

Ⅲ. 결론

 

계 13장에서 두 짐승에 의한 42달 박해기간은 12장에서 하나님에 의한 여자(교회)의 보호와 양육기간인 1260일과, 핍박과 보호(양육)라는 대립구도 속에서도 본질상 병행을 이룹니다. 이는 11장에서 교회로 상징된 두 증인의 복음증거의 이중성(핍박/보호, 11:1-2)과 10장에서 요한으로 대표되는 교회의 복음사명의 양면성(입/배, 10:9)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이런 상호 불가피한 연관 속에서 13장은 12장과 내용상 연속성을 가집니다.

 

그러나 이런 연속성은 내용상 그렇다는 것이지 혹자들의 관점대로 12:17이 13:1의 서론과 도입부분으로 설정되기 때문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12:17에서 용이 분노해서 악의 세력의 본거지인 바닷가를 찾은 시점은 아이의 승천으로 하늘의 전쟁에서 패해 땅으로 쫓겨난 시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땅으로 쫓긴 용은 이번에는 자신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음을 직감하고(11:12하) 아이를 낳은 여자(교회)를 핍박하려 시도합니다(11:13).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자를 광야로 인도하셔서 1260일간을 보호/양육하심으로 이 일마저 실패합니다. 때문에 용은 1260일 기간 동안은 교회를 직접 해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내 교회의 양육기간인 1260일(42달/1000년) 동안 무저갱에 결박당해 감금당하게 됩니다.

 

이런 사건의 진상을 기술하고 있는 내용이 계 20:1-3입니다. 즉 천사가 하늘에서 쫓아 내려와 용을 붙잡아 무저갱에 일천년 동안 완전결박 한 채로 감금해 버린 것입니다. 그 후 일천년이 차매 용은 잠시 풀려납니다(20:7-8). 그리고 최후의 일전을 벌이려고 바닷가 본거지를 찾아옵니다. 바로 이 시점이 12:17의 장면입니다. 때문에 내용 전개상 13장의 42달 기간은 용이 무저갱에 일천년간 감금당한 기간과도 동일시됩니다. 따라서 시간적 연장선상에서 12:17을 13:1의 도입부분으로 해석하면 시제상 일치가 안 됩니다. 12:17의 장면은 용이 감금당했던 1000년 기간 직후의 사건인 반면, 13:1은 42달 곧 1000년 기간 동안에 발생한 사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12장은 용과의 전쟁이 3단계로 진행되고 있음을 시사합니다. 1단계는 아이(예수님)와의 전쟁입니다(12:4). 2단계는 아이를 낳은 여자(교회)와의 전쟁입니다(12:13). 3단계는 여자의 남은 자손과의 전쟁입니다(12:17). 이 3단계의 전쟁은 적어도 여자의 양육과 보호기간인 1260일(6절)과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의 기간(14절)이 모두 지난 시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12:17의 장면은 동일한 기간을 상징하는 1000년이 지난 시점이란 관점이 설득력을 갖게 됩니다.

 

이상의 논증을 통해 두 사건 간의 시제상의 불일치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강구가 제기됩니다. 바로 용이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나 무저갱에 감금당하기 직전, 그리고 교회에 대한 핍박시도가 하나님의 보호와 양육으로 무위로 끝나버린 직후, 용은 비상강구책으로 바닷가를 찾아 수석(首席) 하수인인 짐승을 불러내 사단의 통치권 일체(보좌/능력/권세)를 짐승에게 잠정적이긴 하지만 전향적으로 위임한 것입니다. 용이 일천년간 무저갱에 갇혀있는 동안 짐승을 통해 여전히 자신의 왕적 영향력을 대리적으로 행사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이후부터 악의 지휘체계는 용-짐승-거짓선지자의 삼두체제를 통해 시행됩니다. 물론 짐승이 사단의 화신(化身)으로 왕권을 대리적으로 담당합니다. 그러나 본질에서 사단의 역사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거짓선지자는 짐승의 보좌관으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짐승을 신격화시켜 숭배하는 일에 모든 역량을 쏟아 붓습니다. 그 일환으로 짐승의 우상을 만들어 경배를 강요합니다.

 

거짓선지자에 의한 짐승경배 촉구는 추종자들로 하여금 오른 손과 이마에 짐승의 표인 666표를 받게 하고 이를 매매의 수단으로 삼게 하는 데서 절정에 이릅니다. 표를 받는다는 것은 인침을 받는 것으로 인치는 자에게 소속돼 그를 주인으로 모시고 섬긴다는 의미가 성립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13장의 짐승의 표를 받는 사건은 14장에서 하늘에 속한 144000명이 하나님과 어린양의 인을 이마에 받는 사건과 병행을 이룹니다. 따라서 전자의 짐승의 표는 축복을 미끼로 추종자들에게 매매의 보증 곧 세속적인 부와 성공과 행복을 약속해 주면서 대신 사람들의 맹종을 요구하며 저들 위에 군림하려고 시도합니다. 그러나 14:9절과 11절에서 보듯이 저들의 결국은 심판과 멸망입니다.

 

반면 후자의 하나님과 어린양의 표 곧 인침은 죄로부터의 구원과 칭의를 약속해 주심으로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무익한 종의 심정으로 자원해 하나님을 예배하며 섬기에 됩니다. 따라서 짐승의 표가 시사하는 것은 인간의 현실적인 유익과 행복과 성공적인 삶을 보장함으로 신앙을 도구삼게 해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불신하며 복음을 거절하는 세속주의의 다양한 모습을 총체적으로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요한은 이런 식으로 하나님과 복음과 교회를 대적하는 짐승의 표에 담긴 영적 사상이 이후 전개되는 큰 성 바벨론의 상징(17-18장)을 통해 구체화될 것을 시사합니다.

 

이상의 사실을 고려할 때, 현 종말의 시대(초림-재림)를 살아가는 교회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성취 속에서 종말적 승리가 보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짐승에 의한 핍박에 직면해 있음으로 고난이 불가피한 이중의 정체성 속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친 백성들입니다. 때문에 비록 짐승의 잠정적인 권한행사로 인해 교회가 핍박을 당하고 순교자가 나오고 악의 세력이 승리하는 것 같아도 이런 13장의 영적 전쟁이 12장의 내용의 연속선상에서 진행된다는 것을 주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12장에 약속된 승리의 보증이 13장의 과도기적인 영적 전쟁기간을 거쳐 14장에서 마침내 하늘에 속한 승리한 교회의 모습으로 확증되기에 이릅니다.

 

따라서 전투하는 교회원의 신분으로 살아가는 현대교회에게 요구되는 것은 종말적 신앙관의 재확립입니다. 다시 말해 미래의 승리의 확신을 가지고 순전한 믿음의 정절과 인내로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시종일관한 신앙자세 말입니다. 이들에게 주 안에서 경험하는 현재의 고난과 핍박은 장차 나타날 영광의 보증입니다.

http://cafe.daum.net/remnant7000


로마황제숭배(Roman Emperor Worship)
(계13:1-8)


신약시대의 로마 황제들

 

 

 

계시록 13장에 묘사된 두 무서운 짐승은 요한 사도의 극적인 비전을 이해할 수 있는 힌트가 된다. 첫째는 참람한 이름을 가진 열개의 뿔이 머리에 달린 바다에서 나온 짐승이었다. 그 짐승은 용, 즉 사단에게 받은 권세로 큰 힘을 발휘하며 온 땅을 돌아 다녔다. 둘째는 새끼 양 같이 두 뿔이 달린 땅에서 올라온 짐승으로 같이 사단을 섬기되 특별히 땅에 거하는 자들로 강제로 처음 짐승을 경배케 했다. 두 짐승 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압제했는데 바다짐승은 성도들과 전쟁을 벌였고, 땅의 짐승은 첫째 짐승을 경배하기를 거부하는 자가 누구인지 확인했다.

이 무서운 짐승들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가? 대체로 주석가들은 계시록의 이미지들은 이 책을 처음 읽는 독자들이 살았던 당시 상황과 연관이 있다고 본다. 요한은 아시아의 로마 식민지에 있던 일곱 개 교회에 편지를 보냈다.(계 2,3장) 그곳은 황제숭배(Imperial Cult)의 중심지로서 제국의 머리인 황제를 신성시하여 그에게 충성과 경배를 돌렸다. 따라서 로마 황제숭배와 급성장하는 기독교 공동체가 가장 첨예하고 충돌했던 지역이다. 특별히 도미티안 황제 통치 말기(AD 81-96)에 가장 심했다. 그래서 교회의 초기 역사가들은 전통적으로 계시록의 기록 연대를 그 때로 잡는다.

이런 맥락에서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바다짐승로마 제국으로 해석하며 머리 일곱은 권력을 제멋대로 휘두른 로마 황제들로 본다. 또 땅의 짐승은 아시아 지역에 황제숭배를 강요한 관리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계시록의 기록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의 로마제국의 종교 양식과 그 조직을 더 자세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제국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황제숭배는 1 세기 후반에 이르러선 로마 국가종교의 핵심이 되었다. 종교와 국가가 분리되기 전이라 로마의 신들에 대한 충성은 로마 자체에 대한 충성으로 간주되었다. 황제숭배는 아구스도 황제 시대(27 B.C.-A.D. 14)부터 국가종교의 하나가 되었는데 곧바로 황제에 대한 충성이 제국에 대한 충성을 시험하는 기준이 되었다.

황제숭배는 원래 동방의 헬라왕국 고유의 지도자 숭배 제도에서 발단된 것이다. 그리스인들에게는 신과 인간의 구별이 모호했다. 그리스 도시의 시민들은 자기들에게 베푼 축복에 감사하기 위해 왕을 숭상했다. 다분히 아첨하는 문구인 “구원자(savior)” 또는 “은인(benefactor)"이라는 호칭으로 불렀고 왕은 마치 축복을 나눠 주는 힘을 가진 신처럼 여겨졌다. 로마가 헬라 지역을 정복함으로써 이 관습을 알게 되었다. 로마 장군들이 현지인으로부터 동일한 숭상을 받았던 것이다.

로마인들은 전통적으로 인간을 숭배하는 것은 거부했었다. 대부분의 로마인들은 가문의 우두머리를 “천재(genius)”로 존경은 했다. 원래 “Genius”라는 용어는 가장(家長)과 연결해 사용했고 “삶의 능력 (life force)” 또는 “보호하는 영(protective sprit)"이라는 의미를 지녔다. 어쨌든 아구스도 황제가 헬라관습에서 아이디어를 빌려와 황제 숭배제도를 만들었다.

아구스도는 삼촌인 쥴리어스 시저의 인기를 이용했다. 당시 옥타비우스로 알려진 그는 시저의 입양된 후계상속자이기에 “신성한 시저의 아들(son of the divine Caesar)"이라는 공식 명칭을 사용했다. 원로원도 그를 신의 지위로 격상하는 법령을 통과시켜서 신과 동일한 명예(apotheosis)를 수여했다.

아구스도는 재임 기간 중에 뛰어난 업적을 쌓아 황제 숭배의 기초를 놓았다. 수십 년간 계속된 내전을 종식시켜 모든 주(州)에 안전과 풍요를 가져다주었다. 동부의 주들은 그를 구원자로 경배했고 신에 버금가는 찬사를 돌렸다. 심지어 로마에서도 그에게 아주 특별한 칭송을 올렸다. 원로원은 주전 27년에 옥타비우스에게 “exalted"(숭고한, 경외할만한)라는 뜻의 “Augustus”라는 이름을 부쳐주었고 인간(mortal)보다는 높고 신보다는 모자라는 신분을 부여했다. 온갖 맹세와 제물들이 제국의 머리이자 “하늘이 내린 아구스도”에게 바쳐졌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높이는 축제와 경기를 주관했다. 그러나 그는 로마에선 전통을 중시하는 보수주의자들을 의식하여 신격화 작업을 조심스럽게 진행했다.

AD 14년에 그가 죽자 원로원은 그를 신으로 명명했다. 사가(史家)들은 이 신격화 의식과 또 그에게 바친 예배 등을 기록하고 있다. 한 기록에 따르면 죽은 황제가 신의 왕국으로 오르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 화장용 장작더미로부터 독수리를 공중으로 날아 올렸다고 한다. 이후 원로원에 의해 파문당하지 않거나, 또 로마의 전통을 무시하며 생존 기간 중에 숭배를 요구하지 않는 한에는 황제가 죽으면 원로원이 신의 지위를 부여했다. 예를 들어 인기가 없었던 티베리우스 황제는 신의 지위를 얻지 못했다. 갈리규라(AD 37-41), 네로(AD54-68), 도미티안(AD81-96)도 신이 되지 못했는데, 이들 모두 로마인들의 사고방식에 맞지 않는 여러 숭배 조건을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네로와 도미티안은 심지어 그들이 범한 잘못 때문에 원로원에서 공식적인 유죄 선고까지 받았다.

아구스도는 로마를 벗어난 지역에선 신과 버금가는 지위를 비교적 자유롭게 누렸다. 자기에게 바치는 제단과 신전 건립을 허용했다. 그러나 그는 그 신전이 로마의 기존의 신들과 자신에게 공동으로 봉헌되도록 함으로써 자신에 대한 개인적 숭배를 보는 로마 보수주의자들의 반감을 무마시켰다. 소아시아(현재의 터키)의 지도자숭배 유전(遺傳)은 황제숭배종교의 모델이 되었다. 각주의 로마 총독들은 아구스도에게 신전 건립 허가를 요청했고 로마와 아구스도를 위한 신전들이 당시 소아시아의 수도인 Pergamum(버가모)와 Bithynia 주의 수도인 Nicomedia에 세워졌다.

아구스도의 뒤를 이은 1세기의 로마 황제들은 그의 전철을 다소간(多少間) 따랐다.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와 베스파시안 같은 현명한 황제들은 자신들에 대한 숭배를, 특별히 로마에선 의도적으로 요구하지 않았다. 그들은 로마에 대한 헌신을 함께 요구해 신격화에 조화를 추구했으며 자기들이 죽으면 원로원에서 신의 지위를 부여해주리라 기대했었다. 그렇지 않고 이런 전례를 깨트린 황제들은 원로원의 비난을 면치 못했다.

황제 숭배는 지방의 주에서 더 크게 발전되었다. 티베리우스 황제는 Smyrna(서머나)에 자신과, Lyvia와 로마원로원에 바치는 신전을 짓도록 AD 26년에 짓도록 허락했다. 클라디우스 황제는 새롭게 정복한 영국에서 자신을 숭배하도록 했다. 특별히 아시아 주들이 황제숭배에 가장 앞섰다. 수많은 제단과 신전들이 곳곳에 건립되었다. 개별 도시마다 작은 사당들이 여러 개 있었고 각 주의 주의회는 큰 신전을 건축해 관리했다.

황제가 인정하는 신전을 갖는 것은 신전이 위치한 도시와 그 주의 명예가 되었다. 한 주 안에서도 도시마다 신전 건립 경쟁이 심했다. 신전은 로마당국과 황제와의 관계를 긴밀하게 하여 경제적 이익을 불러옴으로써 주내에서 그 도시의 지위를 높여주었다. 건축에 오랜 기간이 요구되므로 많은 일자리를 창출했고 또 신전에서 벌어지는 예식, 축제, 경기 등은 관중을 끌어 모아 지역 경제를 살찌게 했다. 1세기 후반에 도시의 공식명칭에 “temple keeper”(신전지기)라는 뜻의 헬라어 “neokoros”를 사용하는 도시는 황제 숭배의 “수호자”(warden)로서의 자부심과 특혜를 누렸다.

황제 숭배를 장려하는 것은 주의회의 아주 중요한 역할이 되었다. 황제의 신전(Imperial Temples-로마제국과 황제 둘 다 숭배하는 곳)은 주로 주의회와 서로 보이는 위치에 건립되었다. “Commune of Asia”로 불렸던 아시아의 주의회는 주내의 중요 도시들을 대표하는 부유한 명망가 의원들과 의장으로 구성되었다. 의회는 주의 중요현안을 토의하고 로마의 지시를 받는 역할을 담당했다. 또 각종 예식과 경기에서 황제에 대한 공개적 헌신을 고백토록 하는 것이 의회의 중요 관심사였다. 신전의 고위 제사장들도 의원으로 봉직했다. 그들은 제물을 바치고 기도를 인도하며 제사를 주관했고 황제를 숭배하는 각종 행사를 이끌었다. AD 40년경에는 “아시아의 대제사장”(High Priest of Asia)이라는 명칭이 사용되었다. 일부학자들이 대제사장이 주의회의 의장이었다고 주장하지만 행정관리가 맡았을 가능성이 더 높다. 여러 비문에는 여사제들에 관한 언급도 있는데 신전에서 직접 봉사한 여자를 말하는지 아니면 제사장의 아내에 대한 존칭인지 여부에 관해선 학자들 간에 이견(異見)이 있다. 주의 발전을 바라는 주의회와 의원들이 로마와 황제에게 열렬한 충성을 나타냈다. 자연히 주의회와 지방 관리들의 관심은 황제에게 적절한 경배를 표하지 않는 자가 누구인지 알아내는 것에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배경들이 요한계시록 해석의 좋은 근거가 된다. 요한 사도는 1세기의 아시아 주에 있는 교회들을 대상으로 계시록을 기록했다. 황제숭배는 필연적으로 로마의 지방 관리들과 황제에게 경배를 드릴 수 없었던 기독교인들이 충돌하는 시발점이 되었다. 흥미롭게도 계시록에 언급된 7교회 중 세 도시(버가모, 에베소, 서머나)에 황제숭배를 위한 신전이 있었다.

이 문제는 도미티안 황제 시절에 가장 첨예한 이슈가 되었다. 도미티안은 베스파시안 황제에 의해 AD 69년에 시작된 Flavian 왕조의 마지막 황제였다. 베스파시안 황제는 자기 왕조를 견고히 세우고 각 주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황제 숭배를 적극 장려했다. 비록 그의 아들 Titus는 오래 통치하지 못했지만(AD79-81), 차남 도미티안은 15년간(AD81-96) 왕위에 있었다. 그를 로마 역사가들은 신격화를 고집했던 독재군주로 묘사하고 있다. Suetonius에 따르면 그는 자기를 “주(主)이자 신”(Lord and god)으로 불러줄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비록 현대 사가들이 그의 통치를 앞선 황제들보다는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그의 마지막 2년은 극단으로 흘렀다. 나아가 그의 통치 기간 내내 아시아에선 기독교 신자들에 대해 지역적이긴 하지만 극심한 핍박이 가해졌다.

아시아에서의 신자들에 대한 박해는 도미티안 황제의 과대망상증보다는 주들 간에 황제숭배를 더 잘하려는 경쟁의 결과였다. 도미티안은 에베소에 새로운 신전(neokrate)을 짖는 특권을 주었다. 새 신전은 시청(Agora) 근처에 특별히 마련된 고지대에 자리 잡았다. 신전은 42X25 ft(약 13X8 미터) 크기의 장방형으로 북쪽은 몇 층으로 이뤄진 주랑(柱廊 stoa -기둥으로만 이뤄진 복도)과 마주하고 있었다. 신상들은 그 주랑의 이층에 세워졌다. Atemis 여신상 앞의 대제단과 닮은 모양의 U-자형의 제단이 도미티안 상에도 설치되었다. 신전 비명에는 “신들의 성전”(Temple of the Sebastoi)이라고 새겨져 있다.

 

Sebastoi는 Sebastos -라틴어 “Augustus”(Exalted)의 헬라어 표현- 의 복수형으로 Flavian 왕조, 즉 베스파시안, 도미티안, 타이투스 황제를 의미했다. 신전이 있었던 현장에서 대형 조각상의 일부가 발굴되었는데 도미티안 자신 혹은 타이투스의 상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 상은 한쪽 벽면에 붙어있었다. 에베소 신전은 지금까지의 다른 신전과는 달리 로마제국과 원로원과 다른 왕족에 바쳐진 것은 전혀 없고 오직 Flavian 왕조에게만 바쳐졌다. 2세기 이후 건립된 황제 신전들은 이 에베소 신전을 본 따 지어졌다.

이런 사실들이 요한계시록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로마제국에 충성했던 아시아가 1세기 말 무렵에는 주로, 아마 전적으로, 황제에게만 경배를 드리게 되었다. 제국의 머리인 황제는 로마 전체를 대표했고 또 모든 물질적 영적 축복의 근원이었다. 황제숭배는 권력구조에 통일성과 위계질서를 갖추게 했다. 황제를 숭배하지 않는 것은 최고 권력자를 거역하는 근본적인 죄가 되어 아예 용납될 수 없었다. 주와 지방 도시 관리들은 이점을 분명히 인식했기에 일절 용서하지 않았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리스도 외에는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게 경배를 돌릴 수는 없었다. 자연히 그들은 황제를 경배하지 않을 경우 엄청난 훼방과 핍박이 닥칠 것이라고 예감했다. Pliny의 서신에 따르면 로마 관리들은 기독교인들이 죽이겠다는 협박에도 로마황제와 신들에게 경배하지도 또 그리스도를 저주하지도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요한은 기독교인들이 강요된 황제숭배와 격렬하게 맞서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핍박에도 불구하고 신실하게 믿음을 지키도록 격려했다. 또 요한은 계시록 13장의 무시무시한 짐승의 정체를 밝히 드러냈다. 그것은 단지 사단의 도구일 뿐이었다. 바다의 짐승은 로마제국을 상징했다. 아무리 로마 제국이 그 충성과 연합을 뽐내지만 진정한 경배를 바쳐야 할 살아계신 하나님과 비교하면 헛된 속임수요, 하나님과 전혀 무관한 우상에 불과했다. 신자를 핍박하는 로마 관리들을 상징하는 땅의 짐승도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이 쳐진 신자들에게 어떤 실질적인 힘도 발휘할 수 없었다. 황제숭배는 생명이 아니라 죽음으로 이끄는 거짓이요 공허한 속임수였다. 요한의 말씀은 모든 세대의 믿음의 사람에게 아무리 막강한 세상 권력이 핍박해도 이길 수 있도록 용기를 준다. 또 오직 홀로 경배 받기에 합당하며 영원토록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신자에게는 궁극적 승리가 보장되어 있음을 확신케 해준다.
원전: "Roman Emperor Worship" by Tommy Bris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