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시록을 어떻게 묵상할 것인가
요한계시록은 복음으로 읽고 이해해야만 한다.
서론
일반적으로 사도 요한이 기록한 것으로 여겨지는 요한계시록은 한국 교회 안에서 두 극단적인 태도로 취급되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지나친 결핍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지나친 과잉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된 것이다. 안타깝게도 대부분 건전한 기독교 신앙을 표방하는 교회 안에서 요한계시록은 다루기를 꺼려하는 책으로 여겨지고 있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의 목적은 성도들을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통해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는 것에 있다. 이 면에서 요한계시록의 기록 목적도 결코 예외일 수 없다.
요한계시록은 철통 보완 장치와 함게 박물관 안에 보관되어야 하는 책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읽혀지고 성도들에게 전달되어 마지막 시대를 사는 성도들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계시록이 교회 안에서 마치 한 번도 그 자태를 제대로 드러내지 않은 처녀림으로 남아 있는 것은 가슴 아픈 현실이다. 기존 교회의 형편이 이렇다 보니, 요한계시록은 오히려 불건전한 종말론적인 신앙의 온상이 되거나, 기독교 이단들의 전유물처럼 여겨지게 되었다. 요한계시록에 대한 기존 교회의 지나친 결핍이 나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왜 요한계시록은 그동안 기존 교회에서 이렇게 홀대(?)받게 된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하여 사람마다 견해가 천양지차겠지만, 기본적으로 요한계시록이 바르게 해석하고 설교하기가 어렵다는 뿌리 깊은 편견 때문이라는 점만은 어느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한국 교회는 그동안 칼빈(John Calvin) 같은 위대한 신학자도 요한계시록을 3장까지밖에 주석하지 않았을 정도로 어려운 책이라는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기에 급급했다. 물론 성경의 다른 책들에 비해서 요한계시록이 해석하기가 까다로운 것은 사실이다.
산 등정에 비유해서 말한다면, 요한계시록에는 유난히도 높은 봉우리들이 많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기에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데 자만은 절대 금물이다. 한없이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요한계시록이 아예 정복이 불가능한 책은 아니다. 우리들의 한계 때문에, 요한계시록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천상의 메시지를 완벽하게 파악하기는 힘들지만, 요한계시록의 근간이 되는 메시지(교훈)는 너무나 확실하고 선명하기 때문에 모든 성도들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요한계시록이 신실한 성도들을 미혹하는 데 사용되는 단골메뉴가 되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들이 계시록 앞에 붙어 있는 “접근 금지”의 팻말을 떼어내고, 요한계시록의 숲속으로 좀 더 적극적으로 들어가야만 한다. 깊은 묵상을 통해 요한계시록이라는 산에 올라 오색찬란한 아름다운 정경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두 팔을 벌려 신록의 향기를 마음껏 맛보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각 장들로 들어서기에 앞서서, 요한계시록이 어떤 책인지에 대한 전체적인 개관을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이제부터 간략하게 계시록의 주제, 계시록의 저술 의도, 그리고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계시록의 읽기의 방향성에 대해 살펴보자.
<요한계시록의 주제>
요한계시록의 주제가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주제 성구는 17:13-14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이 한 뜻을 가지고 자기의 권력과 권세를 짐승에게 주더라. 그들이 어린양과 더불이 싸우려니와 어린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신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이 말씀을 통해 계시록의 주제를 세분화해 보면,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계시록은 싸움의 책이다.
짐승을 중심으로 한 악의 무리들이 하나로 뭉쳐서 어린양과 싸우게 된다. 그들은 어린양을 이길 수 없다. 그렇다면 악의 세력들이 순순히 백기를 들지는 않을 것이다. 그 다음의 공격 대상은 12장이 분명히 말하는 것처럼, 교회 공동체가 될 것이다.
12장에서 용이라는 존재가 먼저 아이(예수님)를 공격하지만, 예수님께서 용의 공격에서 승리하신다. 성경은 용의 공격을 무력화시킨 예수님의 승리의 모습을 간략하게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 아이를 하나님 앞과 그 보좌 앞으로 올려가더라.”(5절) 예수님을 삼키지 못한 용은 이제 다음 타깃으로 여인(교회)을 공격하게 된다. 그 결과로 광야로 도망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다(6, 14절).
결국 계시록은 사탄의 세력이 우는 사자처럼 어린양과 교회를 향해 달려드는 공격과 그에 대한 응전의 이야기를 다룬다고 할 수 있다. 이 투쟁은 실상 원시 복음으로 알려진 창세기 3:15의 약속의 말씀에 대한 최종적인 완결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계시록의 주제는 어린양의 승리다.
이 싸움이 어떻게 될지를 궁금해 하는 독자들에게 성경은 예수님이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이시므로 승리하게 될 것임을 분명히 선포하신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소개하고 있는 점이다. 계시록에서 예수님에 대한 가장 일반적인 표현이 바로 어린양이다. 어린양이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을 생각나게 한다. 결국 요한계시록은 십자가 사역으로 승리하신 예수님에 대한 복음의 메시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계시록의 주제는 교회의 승리다.
어린양의 승리는 우리를 위한 것이다. 교회 공동체로 하여금 짐승의 세력을 이기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의 대장되시는 예수님께서 승리하신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운명 공동체다. 그분의 이김이 우리의 이김의 기초가 된다. 교회가 사탄의 세력에게서 승리할 만해서 승리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은혜와 공로로 이기는 것이다. 우리가 그분에게 한편이기 때문에 그분의 승리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 이긴다는 말씀의 의미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있는 승리가 그저 어떤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주어진다는 “값싼 은혜”를 조장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값진 은헤의 길을 걸어갈 것을 촉구한다. 그것이 바로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라는 말씀의 의미다. 주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그 분 안에서 거룩해져야만 한다. 하나님 백성들의 변화의 모습 가운데 하나로 진실을 거명한다. 교회 공동체에게 진실이 중요한 이유는 계시록에서 악의 세력이 거짓말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이들과 뚜렷이 구분되는 교회의 표지는 진실이다. 결국 정리하면, 계시록의 중심주제는 투쟁의 역사 속에서 어린양의 승리와 교회의 승리에 대해 다루는 책임을 명심해야 한다.
<요한계시록의 저술 의도>
요한계시록의 주제를 알았으면 이제 계시록의 저술의도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계시록의 저술 의도는 세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계시록은 고난받는 공동체에게 미래의 운명을 제시해 현재를 새롭게 조정하기 위해 저술된 책이다.
일반적으로 계시록은 미래를 다루는 책으로 알려져 있다. 과히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계시록이 그저 우리가 기존에 알고 있던 내일로 숨게 하는 미래학에 대한 논의라고 말할 수는 없다. 계시록이 미래를 제시하는 것은 고난당하는 교회 공동체로 하여금 새로운 관점으로 현재를 다시 살아가게 하기 위함이다. 성경이 말하는 종말론은 이원론적인 사고를 조장하거나, 현재에서 도망치는 도피처로 사용되지 않는다. 오히려 내일의 희망 안에서 오늘을 다시 새로운 용기와 담대함으로 살아내도록 만들어준다. 그러므로 진정한 종말론은 미래 때문에 새로워지는 현재에 초점을 맞추게 되는 것이다. 특히 계시록의 배경은 황제 숭배로 인한 박해 상황 속에서 기록되어졌다고 할 때, 궁극적인 종말의 관점에서 현재를 바라보게 함으로써, 오늘을 다르게 인식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준다.
둘째, 계시록은 교회로 하여금 저항 공동체로 살아갈 것을 독려하기 위해 저술되어진 책이다.
현재를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것의 골자는 저항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만일 도미티안이 자신을 경배하도록 강요하는 황제 숭배의 상황이 계시록의 역사적인 배경이라면, 현재를 재조정시킨다는 것은 좌절과 두려움에 빠져 있는 교회로 하여금 다시금 악의 도전 앞에서 저항하게 하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저항이라는 단어를 결단이라는 단어로 대치해도 무방하다.
마지막까지 저항 혹은 결단의 자리로 나아가려면, 하나님이 언제나 진정한 왕이심에 대한 굳건한 신뢰가 있어야 한다. 환경의 어려움 때문에 마음으로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절하게 될 때, 다른 힘의 세력 앞에 꿇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계시록의 본격적인 계시가 시작되는 첫 마당이라고 할 수 있는 4장에서 하늘 보좌와 그 보좌에 좌정하신 하나님을 소개하는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할 수 있다. 세상 보좌 그 너머에 진정한 통치자가 계신 하늘 보좌가 있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교회가 하늘 보좌를 마음에 품고 있을 때 비로소 악을 향해 끝까지 항거할 수 있는 것이다.
셋째, 계시록은 오직 하나님께만 거룩한 입맞춤으로 나아가는 예배 공동체를 세우기 위해 저술된 책이다.
교회에 부여된 최대의 저항 행위는 무력적인 시위 같은 것이 아니라, 끝까지 하나님께만 온전한 경배를 드리는 예배하는 공동체로 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계시록의 예배에 대한 독려는 곳곳에 있는 피조물들이 하나님과 어린양에게 돌리는 찬양의 메아리 속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우리가 드리는 공적인 예배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한다.
그뿐만 아니라 계시록에서 예배는 공적인 예배를 넘어서 삶의 예배를 촉구한다. 그 대표적인 구절이 18:4에 있는 것처럼, 주의 백성들이 바벨론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거기서 걸어 나오는 것이다. 우리들이 바벨론 안에 들어가 살아야 하지만 바벨론이 우리 안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늘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사는 것이 우리가 드릴 진정한 삶의 예배인 것이다.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계시록의 읽기와 방향성>
고정관념을 넘어서야 보이는 책이 계시록이다. 더 구체적으로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계시록 읽기의 방향성을 제시하려 한다.
첫째, 계시록은 두려움이 아니라, 고난 받는 공동체에게 희망을 주는 책이다.
인간이 직면하는 “가장 보편적인 문제”는 고난이다. 그런 고통의 바다를 건너가야 하는 인생의 필연성 가운데 있는 우리를 향해 계시록은 “우리의 현재적인 삶의 기대”를 충족시키기보다 “우리의 궁극적인 운명”을 말해준다. 오늘의 현실은 암담하지만, 반드시 내일은 다시 태양이 떠오를 것이고, 궁극적으로 우리들이 이길 것이다. 그것을 희망하면서 웃을 수 없는 상황 가운데서 웃게 하는 책이 계시록이다. 환경이 바뀌어서가 아니라 승리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계획과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우리로 춤출 수 없는 상황에서 춤추게 하신다. 신자는 “광야에서도 노래하는 이상한 새”다. 현실을 보면 노래할 수 없지만, 광야에서도 식탁을 마련하시는 주님, 그리고 마침내 그 고난을 마련하시는 주님, 그리고 마침내 그 고난을 뚫고 가나안에 입성케 하실 수 있는 그분으로 인해 노래를 생산할 수 있게 한다. 힘겨운 삶 가운데 “모조금(작퉁) 희망”이 아니라 진짜 희망으로 감격하고 싶다면, 계시록을 읽어야 한다.
둘째, 계시록은 우주적 종말에 대한 청사진을 그려주는 책이 아니라, 우주의 종말이 누구의 손에 있는지를 명시하는 책이다.
계시록을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에 퍼즐을 맞추는 책으로 이해하면 큰 문제가 발생한다. 물론 계시록이 미래에 대해 말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계시록이 말하는 미래는 미래의 발생할 사건으로서 미래가 아니라, 미래가 누구의 손에 있는가라는 의미의 미래다. 계시록은 일종의 그림책이지 수수께끼 책이 아니다.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방식의 계시록 이해는 오류에 빠지게 만든다. 6:1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 것처럼, 계시록에서 종말은 어린양이신 우리 주님이 이끌어가시는 미래다.
셋째, 계시록은 난해하기에 평신도들에게 입산금지를 명하는 책이 아니라, 우리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허락하신 책이다.
계시록을 어떤 측면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쉬운 책이 될 수도 있고 어려운 책이 될 수도 있다. 계속은 쉽다. 그러나 계시록은 또한 어렵다. 어떤 면에서 쉬운 책인가 하면, 계시록이 담고 있는 메시지가 명료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프이쓰레스의 주장처럼, 계시록은 “하나님께서 역사를 통치하시고 그리스도 안에서 이를 완성하신다”는 메시지다. 계시록의 전체 메시지는 너무 선명하다. 전체 숲은 분명한 그림을 그려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계시록의 상세한 내용들은 구체화시키고 현대와 연결점을 찾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어렵게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이 땅의 그 어떤 탁월한 신학자도 계시록을 다 정복할 수 있다고 할 수 없다. 그 정도로 난해한 구절들이 있는 책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은 우리에게 자신감과 겸손함을 동시에 준다. 일단 우리는 진리에 대한 자신을 지녀야 한다.
계시록도 역시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인 성장을 위해 허락해주신 것이다. 동시에 우리가 계시록 본문의 내용을 모두 다 풀 수 있다는 식으로 영적으로 오만해서는 안 된다. 계시록에 대한 다양한 해석이 공존할 수 있다는 겸허한 태도로 거대한 산 등정을 시작해야 할 때다. 비록 힘이 들어도 힘들다는 이유로 산 등정을 포기하면 안 된다. 우리가 입산금지를 선언한 곳에 이단들이 득세하고 있는 모습이 가슴 아프다. 아무튼 진리를 향한 열심과 겸손으로 계시록을 보아야 한다는 사실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넷째, 계시록은 65권의 성경과 다른 차원을 언급하는 부록이 아니라, 복음의 메시지다.
계시록을 흔히 세속적인 종말에 대한 이야기나 지구촌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로만 이해하게 될 때 놓치는 위험은 나머지 65권의 성경과는 성격이 다른 책으로 다루게 되는 점이다. 성경의 전체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구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고 신약은 초림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계시록은 어떤 의미에서 이전의 성경 65권과는 다른 새로운 사상이나 개념이 아니다. 성경의 다른 책이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라면 계시록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메시지다. 계시록을 종말론으로만 풀어가는 것은 반쪽자리 진리다. 계시록은 복음으로 읽고 이해해야만 한다.
그렇다면 복음이란 무엇인가? 한 마디로 기쁜 소식이다. 그렇다면 복음은 왜 기쁜 소식인가? 그에 대한 답이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와 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물론 십자가와 부활로 대변되는 복음의 메시지가 다른 책에 비해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지만, 그 ‘비중’만큼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이전의 책들과는 달리, 요한계시록만 불쑥 복음 이외의 주제를 다룬다고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일관성을 깨는 것이다. 계시록 해석을 시도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범하는 가장 커다란 위험은 바로 이 복음의 메시지가 상실된 채 행해지는 두려움을 자극하는 공상 만화와 같은 허무맹랑한 해석들로 난무하게 하는 점이다.
필자가 요한계시록을 복음으로 전제하는 것은 다름 아닌 계시록에서 기독론이 강조되어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복음의 그리스도를 논하는 기독론은 반드시 교회 공동체를 위한 도전이 되므로 교회론으로 이어지게 된다. 따라서 계시록을 단순히 종말론으로 볼 것이 아니라, 교회론에 입각한 종말론으로 보아야 한다. 아무쪼록 이상의 개관을 통하여 계시록 읽기와 묵상이 더 풍성해지기를 소망한다.
이우제 교수(백석대학교 설교학)
계시록을 어떻게 解釋하고, 說敎할 것인가?
계시록 접근과 해석에 관한 提言
I. 서론
신약성경의 제일 마지막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요한계시록은 전통적으로 요한복음서와요한 1,2,3서의 저자로 알려진 사도 요한이 로마 황제 도미티안(Domitian) 시절(AD 81-96)밧모섬에 유배되어 있는 동안 자신의 목회 대상이었던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곧 에베소, 서머나, 버거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교회에 보낸 일종의 회람 편지로 알려
지고 있다. 계시록을 어떻게 이해하고 설교할 것인가? 아마도 신구약성경중에서 지금까지요한계시록만큼 해석하기 어렵고, 그리고 다양한 해석과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책은 없을 것이다.
종교개혁자 칼빈(John Calvin)선생이 신구약성경중에서 유일하게 계시록에 관한 주석을 쓰지 않은 이유도 아마도 이런 문제와 깊은 관련을 맺고 있을 것이다. 따라서 계시록에 관한 한 그 누구도 자신이 감히 계시록 해석의 권위자나 왕으로 자처할 수 없을 것이다. 계시록에 관한 한 우리는 항상 조심하고 또한 겸손하여야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시록은 닫혀져서는 안되고, 열려져야하며, 읽혀져야 하고,해석되어져야하고, 또한 교회에서 설교되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계시록 자체가 서문에서 계시록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예언의 말씀"임을 주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계시록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1:1-3)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계시록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한 부분이라는 이 단순한 사실에서뿐만 아니라, 또한 오늘 우리 시대와 교회가 계시록에서 울러 퍼지고 있는 중심적인 메시지를 절실히 필요로 하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계시록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고 그리고 자신 있게 설교할 것인가? 계시록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무엇이며, 우리는 그 핵심적인 메시지를 어떻게 발견할 것인가? 이제 계시록해석에 대한 세 가지 중요한 제안을 하고자 한다.
II. 계시록의 역사적 특성에 유념하라.
.
우리는 계시록을 포함하여 모든 신구약 성경이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으로써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신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음을 믿는다. 동시에 우리는, 마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고 우리의 역사세계에 오신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모든 성경은 인간 저자를 통하여, 인간의 언어와 역사와 문화와 종교와 사상의 세계를 수단으로 하여 주어졌다는 사실을 믿고 있다. 따라서 모든 성경은 超역사 혹은 無역사적, 無문화적, 無인간적이지 않고, 오히려 각각 고유한 역사적, 문화적 특성을 분명히 가지고 있다. 말하자면요한계시록은, 마치 창세기와 이사야서가 각각 다른 시대의 저자와 독자와 배경과 문학적양식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마태복음서와는 각각 다른 저자와 독자 및 시대적, 문화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한편으로 모든 성경이 모든 시대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강조한다하더라도, 또 다른 한편으로 모든 성경은 일차 적으로 특수한 시대의 저자를 통하여 특수한 시대의 사람들에게 특수한 목적을 위하여 쓰여졌었다는 사실을약화시켜서는 아니 된다.
계시록은 분명히 특정한 시대에 살았던 특정한 저자가, 특정한 목적을 가지고, 특정한시대상황에서 특정한 문제들에 직면해있던 사람들을 위해 썼다. 이미 계시록 자체가, 계시록이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를 인하여 밧모로 불리어지는 섬에 유배되어있던 역사적인 인물인 요한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밧모섬 인근지역에 위치하고 있던 당대의소아시아 일곱 교회에게 보낸 역사적인 편지임을 강하게 증언하고 있다(계 1:1-9; 22:21). 만일, 오늘날 대다수의 학자들이 그렇게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계시록이 AD 81-96년까지 로마 황제로 재임하였던 도미티안(Domitian)에 의해 밧모섬에 유배되었던 사도 요한이, 당시한편으로 로마 황제 숭배 사상으로 인하여, 또 다른 한편으로 기독교에 적대적인 유대교인들에 의하여(2:8-11) 극심한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경제적인 핍박과 어려움에 빠져있던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보냈던 역사적인 편지라고 한다면, 우리는 계시록을 당시 저자와독자들이 처해있었던 역사적, 종교적, 사회적 정황을 떠나서, 초역사적으로나 혹은 지적인호기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접근하거나 해석하려고 시도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오히려우리의 계시록이해가 계시록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이와 같은 역사적 특성에 관한 우리의 이와 비례한다고 생각하면서, 우리는 계시록 자체가 가지고 있는 이와 같은 역사적 특성에유념하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설사 우리가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하여야한다는 개혁주의 성경해석학의 원리를 인정한다하더라도,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서를 위시하여 그 어떤 특수한성경을 계시록해석의 잣대로 사용하여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이사야, 에스겔, 다니엘은 각각 그 자체 독자적인 역사적 상황과 삶의 자리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요한 계시록도 그러하다. 그럼으로 계시록은 일차적으로 계시록 자체가 가지고 있는 역사적 관점에서 해석되어야한다.
III. 계시록의 문학적 특성에 유념하라.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계시록은 밧모섬에 유배되어있던 사도 요한이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에게 보낸 편지의 형태로 주어졌다(1:1-3; 22:6절 이하). 계시록이 편지의 형태로 주어졌다는 것은 계시록은 필연적으로 편지를 보내는 사람이나 편지를 받는 수신자들의 역사적정황과 관련하여 이해되거나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하여 준다. 즉 계시록은 일차적으로 저자나 독자들의 필요성이나 현안의 문제와 관련하여 쓰여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의 계시록은, 마치 바울서신이 사도 바울자신의 대신하는 권위를 가지고 바울자신의 교회에게 읽혀졌었던 것처럼,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안에서 사도요한을 대신하는 권위 있는편지로 읽혀졌음이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계시록은 처음부터 신학적인 연구의 대상으로쓰여진 어려운 연구논문의 형태로서가 아니라, 교회 회중들 앞에서 구두로 읽혀지도록, 그리고 듣는 청중들이 낭독되는 편지를 듣고 그 핵심적인 메시지를 쉽게 파악할 수 있도록 쓰여졌다고 보아야할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는 계시록을 접근할 때 계시록이 편지이다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접근하여야 한다.
물론 이 편지의 내용은 사도 요한 자신의 사적인 창작물은 아니다. 오히려 요한은 편지의 서두에서 이 편지의 내용과 관련하여,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1:1,19; 4:1)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1:2)로, 그리고 "예언의 말씀"(1:3)으로 부르고 있다.즉 이 편지의 내용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신 것이며,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요한에게 속히 되어질 일들을 보여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계시록이 미래적인 전망을 가지고 있음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다. 즉 계시록은 하나님께서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셨고(과거), 이루고 있는(현재), 그리고 이루실 것(미래)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사실상 계시록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행동하시는 주인공은 예수그리스도 자신으로 보아야할 것이다. 요한이 종종 편지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일인칭으로 사용하고 있는 점과,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2:7,11,17,29; 3:6,13,22)라는 어귀를 자주 사용하고 있는 점이 이를 뒷받침하여 준다.
그러나 문제는 요한이,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이들을, 이미 구약의 선지자시대부터유대사회에서 활용되어졌던 묵시문학적인 형태를 사용하여, 즉 용, 바벨론, 짐승, 사자 등과같은 특수한 상징적 언어와 문학적인 표현들을 통하여 전달하고 있는 점이다. 마치 어떤詩人이 자신이 경험하고 느낀 바를 독자들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저자와 독자들이 함께 만날 수 있는 특수한 시적인 문학형태를 활용하고 있는 것처럼, 요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통하여 그에게 보여주신 내용을 독자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하여, 저자와 독자들에게 다같이 알려져 있던 묵시문학적 형태를 활용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계시록을 올바르게 해석하기 위하여서는, 우리가 계시록 저자와 독자들이 서로 만나는 그 문학적 세계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된다. 말하자면, 한편의 詩가 신문의 사회면이나 정치면의 한 기사처럼 이해될 수 없고 오히려 그 詩가 의도하고 있는 문학적 형태에서 해석되어야 하는 것처럼, 계시록은 역사적 사실보도의 관점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계시록의 문학적 장르 면에서접근되고 해석되어야한다.
최근의 적지 않은 신약학자들은 계시록의 문학형태가 주전 4세기이후부터 주후 2세기까지 강대국 세력과 박해아래 있었던 유대교와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역사에 나타날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즉 하나님께서 친히 역사에 개입하셔서 그의 택한 백성들을 압제자들의 손에서 구원하여 그들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시는 반면에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대적한자들에게는 영원한 심판을 내리신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하여, 널리 발달되었던 "묵시록"(Apocalypse)에 속한다라는 사실을 거듭 확인하였다. 이미 잘 알려져있는대로,묵시록은, 어떤 초월자가 인간 受納者를 통해 자신의 뜻을 전달하는 일종의 계시적 문학의형태로써, 이것이 인간을 포함하여 全地上世界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역사적이며 예언적인 특성을, 그리고 인간과 全地上世界의 문제는 동시에 超越者와 天上世界의 문제를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 신적이며 종말론적인 특성을 각각 지니고 있다.
이 점을 요한 계시록과 직접 관련시켜 다시 말한다면, 천상에서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와 그의 사자들과, 그리고 용과 짐승으로 표현되는 적-그리스도와 그의 사자들과의 싸움이, 지상에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교회 성도들과 성도들을 핍박하는 로마 제국의 모습을 통해서 각각 반영되고 있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계시록의 특성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계시록에 나타나 있는 천상의 세계에 관한 묘사에서 지상의 세계를, 지상의 세계에 관한 묘사에서 천상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어야할 것이다. 묵시적 문학형태로써 계시록이 지니고 있는 이와같은 두 특성은, 우리로 하여금 계시록에 나타나 있는 수많은 상징적인 언어형태를 마치 역사적이고 과학적인 사실보도로 간주하고 해석하여서는 아니 된다는 점을 다시 한번 일깨워준다.
IV. 계시록의 핵심적인 메시지에 유념하라.
우리는 계시록을, 마치 우리가 복음서의 비유를 그 비유가 묘사하고있는 세밀한 부분에이르기까지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알레고리적 관점이 아닌 하나의 중심적인 주제나 핵심적인 메시지를 찾으려는 관점에서 접근하여야하는 것처럼, 계시록의 모든 내용으로 부터 오늘우리 시대나 세계역사와의 관련 점을 찾으려는 현학적인 자세가 아닌, 핵심적인 주제나중심적인 메시지를 들으려는 자세에서 접근하여야한다. 계시록이 어떤 특정한 시대의 저자가, 어떤 특정한 시대의 상황에 살고 있는 독자들에게, 당대의 저자와 독자들에게 다같이 익숙한 편지의 형식과 묵시문학적인 양식을 통하여 주어졌다는 사실과, 그리고 독자들이 그것을 읽거나 들을 때, 저자가 자신들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쉽게 포착할 수 있었을 것
이라는 점은, 계시록은 나무의 관점에서보다 오히려 숲의 관점에서 먼저 접근되어야한다는것을 우리에게 일깨워준다.
그렇다고 한다면, 계시록을 통해서 저자가 독자들에게 제시하고자하는 핵심적인 메시지가 무엇인가? 계시록 1:9절의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라는 구절을 통하여, 우리는 당시 계시록 저자나 독자들이 신앙 때문에 핍박과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는것처럼, 만일 당시 요한과 그의 독자들이 한편으로는 스스로 자신을 신격화시켜 제사를 요구한 로마 황제 도미티안과,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인과의 단절을 선언하고 유대교회당에서 크리스챤들을 추방하였던 유대교로부터 오는 핍박과 고난가운데 처해 있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그들이 다음과 같은 절실한 문제들에 직면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인간과 전세계역사를 통치하시는 분은 과연 누구인가? 하나님인가 아니면 로마 황제인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 무엇을 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관자이시며, 주님께서살아 역사하신다고 한다면, 왜 구원받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이 이 지상의 나라에서 고난과 핍박과 심지어 죽음까지 당하여야만 하는가?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는 이교도 로마황제와 그의 세력들의 진정한 정체(Identity)는 무엇인가?"
계시록저자와 독자들은 다같이, 자신들이 믿는 신앙과, 그리고 그들이 살고있는 現世上에서 당하는 감당하기 어려운 죽음의 위기와 핍박사이에서 엄청난 갈등을 겪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계시록은 분명히 요한의 당대 독자들이 당하고 있는 절실한 현안의 문제들에 부응하기 위하여, 즉 일차적으로 牧會的인 관점에서 쓰여졌음이 분명하다. 이점은 계시록의 첫부분(1-3장)이 소아시아에 위치하고 있는 일곱 교회의 실제적인 문제들을 직접 다루고 있는점에서 분명하여 진다. 계시록저자는 로마제국아래 살고있던 당대 독자들이 네로 황제 이후 도미티안황제에 이르기까지 당하고 있는 모든 지상의 핍박과 고난을 천상의 관점, 곧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과 그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사탄과의 관점에서 서술한다. 계시록저자에따르면, 역사의 진정한 주관자이신 하나님과 어린양이 일곱인(6:1-8:5), 일곱 나팔(8:6-11:19),일곱 대접(15-16)등의 병행적인 심판을 통하여 그들을 대적하는 사탄의 무리인 용과 짐승을격파하고 승리하는 것은, 마치 일찍이 하나님께서 에집트에 대한 10가지 재앙을 통하여 이스라엘백성을 바로와 그의 백성들로부터 구원하여내신 것처럼, 지상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사탄과 짐승을 대변하는 로마제국의 세력으로부터 당하는 고난과 박해로부터의 궁극적인 승리와 그 확실성을 강조해주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적그리스도(사탄, 짐승과 바벨론)에 대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이세상의 나라에 대한 하나님의 나라의 궁극적인 승리를 보여준다.
그러나 계시록에서 보좌에 앉으셔서 모든 사람들의 구원과 심판은 물론 온 세상을 주관하시는 어린양은, 이미 이 땅에 오셔서 그의 백성들을 위한 구원과 심판 위해 죽임을 당했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이시며, 그리고 장차 재림하실 분이시다. 어린양의 죽음과 부활은 그의 백성들의 신분과 삶의 여정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기독교 신자들은, 종말론적인 구원과 심판을 여전히 기다리고있는 유대교 신자들과는 달리, 한편으로 이미 십자가에 죽으시고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종말론적인 구속사건을 통하여, 이미 구원받은 하나님의 종말론적인백성의 신분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이미 죄와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해방되었으며, 이미 하나님의 나라의 왕적인 신분과 제사장의 신분을 누리게 되었다(계 1:5-5; 5:9-11). 그러나 또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아직 로마제국의 왕권이 미치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궁
극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기다리며 살고 있다. 이 세상은 장차 하나님과 그리스도의나라로 바뀌어지겠지만,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와의 대립관계에 있다. 따라서 한편으로 하나님의 나라와, 또 다른 한편으로 이 세상의 나라에 살고있는 신자에게 있어서, 고난과 긴장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계시록에서 강조되고있는 이 "이미"와 "아직"의 종말론이, "아직"만이 자리잡고있는 유대교 묵시문학의 종말론과는 대조를 이루는 독특한 것이다.
계시록저자에 따르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이 아무리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한다 할찌라도, 영원한 하나님의 도성에 들어갈 수 있는 궁극적인 구원과 승리가 보장되어 있는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파멸과 심판이 기다리고있다. 계시록저자는 효과적인 문학양식과 상징과 구성을 통하여, 충성스럽게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들에게는, 보장된 승리와 구원으로부터 오는 놀라운 위로와 용기를, 반면에 그리스도를 배반하거나 대적하는 모든 불신자들과 사탄의 세력에게는 심판의 경고와 아울러 회개를, 각각 촉구하고 있다. 말하자면 계시록의 수많은 상징과 병행법을 통해 제시되고있는구원사적이고 종말론적인 긴장과 싸움에서 울려 퍼지는 핵심적인 메시지는 하나님의 나라와그의 백성들은 어떤 자들이며(신분), 그들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삶)를보여주는데 있다.
만일 우리가 제안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분과 삶이 계시록의 중심적인 메시지이라면, 계시록은 마땅히 모든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시대의 크리스챤들과 사람들에게 선포되고 설교되어져한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계시록의 중심주제는 복음서에 나타나있는 예수님의 핵심적인 메시지는 물론, 신구약성경전체의 중심 주제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오늘 우리 시대의 크리스챤들은, 비록 주후 1세기말엽의 크리스챤들과 정확하게 동일한 역사적 정황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직면했던유사한 문제들을 경험하고 있다. 오늘 우리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돈, 물질, 性, 정치세력, 이데오로기, 과학 등의 절대화와 우상화는, 1세기 말엽의 크리스챤들이 직면했던 로마황제의
신격화 못지 않게 적그리스도의 모습을 띄고 크리스챤들을 위협해오고 있다.
사실상 오늘 우리는 그 어느 때 보다도, 역사의 진정한 주관자는 누구이며, 역사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이며, 이 세상에서 다방면에 걸쳐서 일어나고 있는 우상화의 진정한 정체성은 무엇이며, 이세상에서 구현되어져야할 크리스챤들의 진정한 신분과 삶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들에 직면해있다. 계시록은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일찍이 일세기말엽의 크리스챤들에게 그렇게 하였던것처럼, 또한 오늘 우리에게도, 역사의 진정한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며, 역사의 구원과 심판을 수행하시는 분은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역사와 신자의 정체성에 대한 파라다임과 열쇠가 되며, 이 세상의 나라는 결국 하나님의 나라에 의해 정복되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제시해주고 있다. 우리가 계시록을 열고, 계시록을 읽고, 가르치고,그리고 설교하여야하는 이유도 바로 이점에 있다고 하겠다. 최갑종 교수
'성경과 신학 1'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아시아 일곱 교회 위치 및 남아 있는 유적들 (0) | 2022.06.17 |
---|---|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0) | 2022.06.15 |
두 짐승의 사단적 활동/로마황제 숭배사상(계 13:1-18) (0) | 2022.06.12 |
666이란 무엇인가/ 이필찬 (0) | 2022.06.12 |
우리에게 계시록을 주신 일곱 가지 이유 (0) | 2022.06.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