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6이란 무엇인가
요한계시록 전문가인 이필찬 교수가 6월 19일부터 23일까지 뉴저지 초대교회에서 성도들을 위한 특강과 목회자와 신학생을 위한 요한계시록 세미나를 인도했다. 이필찬 교수는 이필찬 요한계시록 연구소를 세워 계시록 연구를 하고 있으며 여러 관련 저서를 냈다.
이필찬 교수는 특강을 시작하며 "우리가 요한계시록을 생각할때 막연한 두려움이나 어렵다는 생각을 많이 하는데 사실은 성경 66권중 하나로 다른 성경책과 같이 그렇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소개했다. 이필찬 교수는 9번의 강의를 했는데, 학술적인 부분이 최소화된 22일 주일설교 부분을 소개한다. 이 교수는 요한계시록 13장 16-18절을 본문으로 "짐승의 진화? 괴물의 출현"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666이라는 부분을 다루었다.
이필찬 교수는 쉽게 이해되지 않는 요한계시록의 부분을 다니엘서와 이사야서와 연결하여 명확하게 설명하고, 요한계시록의 본문이 초대교회 당시에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고 적용했다. 특히 초대교회 당시에는 영적전쟁의 전선이 분명했지만 오늘날은 인간의 탐욕때문에 교회의 안밖의 잘보이지 않는 전선에서 전쟁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 대책은 인내와 믿음이라고 강조했다. 다음은 관련내용이다.
봉준호 감독이 최근 '설국열차'를 만들었다. 메시지를 잘 파악하면 좋은 영화이다. 봉 감독이 전에 '괴물'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는데, 두 영화의 공통점은 현대문명에 대한 비판이다. 두 영화에 결과는 인간이 파괴적인 환경속에서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파괴적인 환경은 인간의 탐욕과 이기심때문에 만들어졌다. 특히 괴물이라는 영화는 재물에 대한 탐욕때문에 한강에 독극물을 방류하는데 그것때문에 물고기가 괴물이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주만물을 창조하셨을때 모든 생물과 인간은 조화롭고 평화로운 관계속에서 살도록 셋팅을 해주셨다. 하지만 타락 이후에 자연만물과 인간은 긴장과 반목과 부질서와 혼돈가운데 싸우는 적대적인 관계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봉준호 감독이 성경을 읽었는지 그리스도인인지 모르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세상의 모든 문제의 근원을 바라보는 통찰력이 좋다.
'괴물'의 성경적인 비전을 나누고 싶다. 성경에서도 괴물 또는 짐승에 대한 기록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본문은 요한계시록 13장 16-18절이다. "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한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것은 사람의 수니 그의 수는 육백육십육이니라"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짐승들
13장 2-4절에는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라고 나온다.
짐승이 어떤 모습인지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 짐승과 관련되어 두가지 내용을 요약해서 생각할 수 있다.
첫번째 특징은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다. 사자에게 있어서 가장 강한 부위는 입이고, 곰에 있어 가장 강한 곳이 발톱이다. 짐승을 묘사하는데 표범은 흉칙한 모습으로 혐오감을 준다. 그 흉칙한 모습에 강한 곰의 발과 사자의 입을 가지고 있다.
두번째 특징은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용으로 부터 받았다. 용으로 부터 받았다고 하는데 용에 대한 의미를 알아야 한다. 요한계시록 12:9에는 "큰 용이 내쫓기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며 온 천하를 꾀는 자라"라고 나온다. 용을 마귀이며 사탄이라고 해석한다. 짐승은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사탄에게서 받은 것이다.
다니엘서에 나오는 짐승들
짐승의 이러한 모습은 저자 요한이 창작한 것이 아니라 구약의 말씀을 자기의 상황에 맞게 변형하여 사용하고 있다. 이 말씀에 대한 구약의 배경은 다니엘서 7:3-6에 나온다. "큰 짐승 넷이 바다에서 나왔는데 그 모양이 각각 다르더라/첫째는 사자와 같은데 독수리의 날개가 있더니 내가 보는 중에 그 날개가 뽑혔고 또 땅에서 들려서 사람처럼 두 발로 서게 함을 받았으며 또 사람의 마음을 받았더라 또 보니/다른 짐승 곧 둘째는 곰과 같은데 그것이 몸 한쪽을 들었고 그 입의 잇사이에는 세 갈빗대가 물렸는데 그것에게 말하는 자들이 있어 이르기를 일어나서 많은 고기를 먹으라 하였더라/그 후에 내가 또 본즉 다른 짐승 곧 표범과 같은 것이 있는데 그 등에는 새의 날개 넷이 있고 그 짐승에게 또 머리 넷이 있으며 권세를 받았더라"
다니엘서 7장에 네마리 짐승을 표현하기를 사자같고 곰과 같고 표범과 같다고 했다. 다니엘서에는 각각의 짐승에 대한 특징을 말하고 있는 것을 요한계시록은 한 짐승에다 이 특징들을 다 몰아넣는다. 표범과 같고 입은 사자같고 발은 곰과 같다.
다니엘서에는 짐승의 중요한 특징이 있는데 바로 폭력성이다. 다니엘서 7:7을 보면 "내가 밤 환상 가운데에 그 다음에 본 넷째 짐승은 무섭고 놀라우며 또 매우 강하며 또 쇠로 된 큰 이가 있어서 먹고 부서뜨리고 그 나머지를 발로 밟았으며 이 짐승은 전의 모든 짐승과 다르고 또 열 뿔이 있더라"라고 나온다. 7:21에도 "내가 본즉 이 뿔이 성도들과 더불어 싸워 그들에게 이겼더니"라고 유사한 폭력성이 기록되어 있다. 이 짐승은 자기들끼리 짓밟고 물고 뜯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을 향하여 대적하며 성도들을 제압하는 강력한 폭력성을 가지고 있음을 본문에서 보여주고 있다. 이 다니엘서에서 짐승의 실체는 바로 세상 세력이다. 세상 세력을 짐승에다 패러디해서 포악한 모습을 비유하고 있는 것이다.
원래 인간과 짐승, 짐승과 짐승이 서로 폭력을 행사하고 서로 반목하면서 서로 적대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하나님께서 에덴에 인간과 온 피조물을 지으셨을때 그들의 관계는 아름다운 조화가운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의 통치를 받는 그래서 보시기에 좋았던 그러한 완벽한 사회, 공동체를 인간과 피조물과 지연과 짐승이 함께 이루고 있었다. 이것을 잘보여주는 본문이 있다.
이사야서에 나오는 짐승들
이사야 11:6-9(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이다.
이 본문은 이사야가 앞으로 회복될 에덴의 모습을 소망하고 있는 내용이다. 그 모델이 타락하기전 에덴의 모습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표범과 사자와 곰이 함께 나온다. 다니엘서에서 네개의 짐승의 모습에서 사자와 표범과 곰이 나오는데, 요한계시록에서 사자와 표범과 곰들을 동일하게 열거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아마도 이사야의 이 말씀과 관계가 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에덴에서는 어린 양, 어린 염소, 송아지, 사자, 표범, 곰, 어린아이등이 아름다운 조화가운데 에덴의 상태가 존재했다. 이러한 아름다운 관계가 깨지게 되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인간의 죄때문이다.
죄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짐승과 짐승, 짐승과 인간, 인간과 인간이 서로 죽이고 짖밟고 서로 물어뜯는 약육강식의 세상이 되어 버렸다. 다니엘서는 타락한 이후에 세상의 그런 부조화의 모습을 세상 세력이 하나님의 백성을 죽이고 괴롭히고 핍박을 가하는 정황에 적용시키고 있다. 뿐만 아니라 요한계시록에서 요한은 짐승에 의해서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는 모습과 다니엘서에 타락한 이후에 에덴의 부조화된 모습을 적용시키고 있다.
666은 무엇인가
짐승이 무엇인가. 다니엘서에서는 세상세력이었다. 세상세력을 패러디해서 짐승으로 표현하고 있다. 요한계시록에서 어떤 대상을 가지고 짐승이라고 말하고 있을까. 요한계시록 13:17(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의 말씀을 살펴보자. "
표가 무엇인가 하면 짐승의 이름이다. 뿐만 아니라 이름의 수, 다시말하면 이름을 수로 표현한 것이다. 수를 살펴보니 육백육십육이라고 나온다. 666은 짐승의 이름을 수로 표현한 숫자이다. 표는 짐승의 이름이나 짐승의 이름의 수이다. 그 수를 세어보니 666이다.
666은 짐승의 이름을 수로 표현한 숫자이다. 요한계시록 기록 당시 사용했던 언어는 헬라어와 히브리어이다. 그런데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각 철자마다 숫자가 부여되어 있다. 그래서 누구의 이름이든지 수로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만약 영어 알파벳에 수가 표현이 되어 있다면 이름을 부를때 수로 부르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한글에도 자음과 모음에 숫자가 부여되어 있다면 재기발랄한 청소년들은 이름대신 수로 불렀을 것이다. 그런데 숫자가 없으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에 철자마다 수가 다 있었다. 그래서 누구의 이름을 부를때 수로 표현하는 습관이 있었다. 그것을 게마드리아(gematria)라고 불렀다. 그런 배경에서 누군가의 이름 짐승의 이름이 666이라고 한다. 역으로 666을 가진 누군가의 이름을 찾아보면 짐승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당시에 의미있는 인물을 역으로 666 숫자에 해당하는 이름을 찾아보면 그 인물이 네로 황제라는 것이다. 헬라어로 된 네로 황제 이름을 히브리어로 음역해서 히브리어로 된 철자의 수를 합했더니 666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짐승의 실체는 네로 황제이다.
왜 네로 황제를 짐승으로 폭력성있는 존재로 등장시킬까. 이 당시 네로는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핍박한 최초의 로마 황제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네로 황제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 물론 요한계시록 기록 당시 네로 황제는 사망하고 존재하지 않았다. 네로 황제는 60년 중반에 살해되었다고 알려져 있고, 요한계시록은 90-100년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30년정도 차이가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네로 황제를 기독교 성도들을 핍박하는 폭력성있는 존재의 모델로 등장시키는 것은 기독교인들에게 네로에 대한 깊은 상처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네로 황제의 존재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로마 제국의 황제를 대표한다. 다니엘서에서 네 짐승을 통해 세상세력의 폭력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 처럼, 요한계시록에서 그 네 짐승의 특징을 짐승에다 비유함으로 그 짐승의 모델로 등장시킨 네로 황제가 얼마나 폭력적인가 특히 그리스도인을 향해서 폭력적이었다는 것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계시록 13:7-10(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권세를 받았는데 용에게서 받았다. 용은 사탄을 의미한다. 당시 네로 황제로 대표하는 로마제국의 황제는 사탄의 조종을 받아 교회와 성도들을 핍박하는 악의 세력의 화신이었다고 13:7에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 짐승이 모든 사람들을 다스린다. 13:8절에 보면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라고 나온다.
13:16-17(그가 모든 자 곧 작은 자나 큰 자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자유인이나 종들에게 그 오른손에나 이마에 표를 받게 하고/누구든지 이 표를 가진 자 외에는 매매를 못하게 하니 이 표는 곧 짐승의 이름이나 그 이름의 수라)을 보면 짐승의 표를 받지 아니하면 사고팔수 없다고 했다. 짐승의 표가 짐승의 이름이라고 했다. 짐승의 표를 받는다는 것은 짐승의 이름을 받는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소유에다 여러분들의 이름을 쓴다는 것은 여러분의 소유라는 뜻이다.
누군가에게 짐승의 이름, 황제의 이름을 이마나 오른손에 새긴다는 것은 새김을 받은 자들은 짐승/황제에게 속한다는 것이다. 황제를 숭배한다는 것이다. 당시 노예를 사고팔때 구입한 노예의 이마나 오른손에 주인이름의 이니셜을 새기는 습관이 있었다. 이마나 오른손은 가장 잘보이는 곳이다. 누군가 짐승의 이름, 황제의 이름, 짐승의 표를 받는다는 것은 짐승에게 속했다는 뜻이고 속했다는 의지의 표현이고 구체적으로 말하면 황제숭배를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중요한 이슈
요한계시록의 중요한 이슈는 무엇인가. 바로 이것이다. 황제를 숭배할것인가, 하나님을 예배할것인가.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다. 믿지않는 사람들이야 황제숭배하고 제국이 가져다 줄 수 있는 경제적인 이익과 사회적인 이익을 받아먹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하나님이 유일한 예배의 대상이시다. 하나님외에 어떤 우상도 둘수가 없다. 황제숭배를 거부하게 될때 주어지는 것은 목베임을 받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계시록을 읽었던 7교회 성도들에게 직면한 신앙의 결단의 문제였다.
저자 요한은 독자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그것이 어려운 일이니 적당히 타협하고 살아라, 앞에서는 안믿는다고 하고, 뒤에서는 적당히 교회와서 신앙생활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13:9-10 말씀을 보면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라고 나온다. 황제숭배를 거부하게 되면 사로잡혀 가기도 하고 칼에 죽임을 당하기도 한다. 요한이 독자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그냥 죽으라, 그냥 감옥에 가라는 것이다.
21세기에 요한계시록 적용
이 말씀을 들으면서 어떤 생각이 드는가. "그때 신앙생활안하기 잘했다. 자유로운 나라에서 예수를 믿기에 방해나는 사람도 없고 죽이는 사람도 없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오해이다. 과연 짐승은 단순히 2천년전 네로 황제를 모델로 한 과거의 산물일 뿐일까. 문제는 사탄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한 존재라는 것이다. 사탄은 그때는 황제숭배라는 그런 절대절명의 도전을 가지고 교회를 멸절시키려고 전략과 전술을 사용했고, 그 동일한 사탄은 이 시대에 또 다른 방법으로 교회를 와해시키기 위해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저는 네로 황제가 아닌 다른 형태 아니 형태가 없는 짐승이 괴물의 모습으로 이 시대에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더 큰 문제는 초대교회 당시에는 전선이 분명했다. 로마제국과 기독교 그룹 전선 하나만 형성됐다. 그러나 이 시대는 전선이 없다. 사탄은 오늘날 인간의 탐욕을 통해 괴물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이 탐욕은 여러분 속에 있고, 교회안에 들어와 있다. 그래서 이 전선이 교회밖에 있는지 안에 있는지 정말 정신차리지 않으면 확인할 수 없는 그러한 어둠의 시대속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LA에서 목회자 세미나를 하고 여기 왔는데, 한국에서 부터 아는 선배 목사를 만났다. 그분이 섬기는 교회가 미국장로교에 속한 교회이다. 미국장로교가 최근 동성애 관련 결정을 했는데, 그 선배가 시무하는 교회가 교단을 탈퇴하려고 결심했다. 공동의회에서 91%의 찬성으로 탈퇴를 결정했는데, 극구 반대하는 9%가 있다. 그 목사님은 치열한 영적 전투현장에 있으며, 어둠의 세력이 교회속에서 동성애라는 이슈를 가지고도 판을 치는 현장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동성애 문제도 어떤 면에서 전선이 뚜렷하지만, 정말 우리가 각성하지 않으면 인간의 탐욕으로 인해 교회공동체의 정체성이 훼손되고 교회의 순수성이 와해되는 위험속에 늘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가
어떻게 오늘날 이러한 짐승이 진화된 모습으로서의 괴물에 맞서 싸울수가 있는가. 다시 한번 13:9-10를 다시 읽음으로서 이 문제에 대한 답을 드리고 싶다.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이 탐욕의 시대, 우리가 교회의 순수성과 신학의 순서성을 지켜나가기 위해 필요한 것은 인내와 믿음이다. 내 속에 솟아나는 탐욕에 대해 인내와 믿음을 통해 이겨나갈수 있다. 이 사회속에서 밀려오는 탐욕의 먹구름을 어떻게 거두어 낼 수 있는가. 인내와 믿음이다. 탐욕은 우리를 유혹한다. 탐욕의 손길이 우리를 덮친다. 어떻게 이겨낼수 있는가. 자기부인을 통한 인내와 믿음이다.
초대교회 7교회 성도들은 잡혀갈수 있고 죽임을 당할수 있는 그러한 상황속에서 인내와 믿음이 필요했다면, 우리는 그런 일이 없을지라도 우리가 손해보고 우리의 이익이 빼앗길지라도 탐욕을 거부할 수 있는 개인과 공동체가 존재한다면 어떠한 짐승이라할지라도 어떠한 괴물이라 할지라도 우리는 마침내 승리할 것이다.
육백육십육
(Six hundred and sixty-six)
헬) ‘헥사코시오이 헥시콘타 헥스’ - ΄εχακοσιοι ΄εχηκοντα ΄εχ) 계 13장에 나타나는 짐승의 수를 가리킨다(18절). 이 숫자는 13장의 두 번째 짐승보다도(11절) 첫 번째 짐승과 연관이 되는 듯하다(1절). 이 숫자는 분명히 권위 있는 표식의 하나이기 때문에 이것을 지니지 못한 사람은 매매를 할 수가 없게 되어 있다(17절).
아라비아 숫자가 사용되기 전에는 알파벳이 그 용도를 겸하고 있어서 음을 나타내는 글자로 사용되었을 뿐만 아니라 숫자로도 사용되었다. 여기서 ‘사람의 수’로 언급되고 있는 (문자적으로는 “한 개인의 수”; 헬. ‘아리드모스 안드로푸’ ΄αριθμος΄ανθρωπου;18절) 짐승의 수는, 고대 사회에서 통상적으로 사용되었던 암호 형식의 한 본보기로 간주되는 것으로 한 사람 이름의 알파벳의 총합으로 나타냈다.
가장 보편적으로 널리 제시되었던 이 암호의 해답은 ‘네로 황제’였다. 헬라어 ‘네론 카이사르’ ΄Νερον Καισαρ의 히브리어는 נרון קסר로서 그 알파벳의 총합이 육백 육십 육이다.
다른 사본들 가운데는 육백 십육으로 나타나는데, 그것은 라틴어 ‘네로 카에사르’의 히브리어 음역의 총합이 된다.
요한계시록은 대체로 도미시안 황제 때 기록하였다고 추정되고 있다. 도미시안 황제의 통치는 네로가 죽은 지 30년 후에나 시작되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의 기자는 네로가 다시 살아서 나타날 것이라는 그 당시 로마 사회의 신앙을 이용했을 수도 있다. 즉 도미시안 통치하에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어려움을 이러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비록 이러한 해석이 가장 그럴듯하게 보이긴 하지만 또 다른 어려움에 부닥치게 된다.
다른 해결 방법으로는 헬라어 ‘라테이노스’ (λατεινος-“{그}라틴”)나 ‘도미시안’ (라틴 정식 명칭의 축약형으로서 헬라어 번역을 기초할 때)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
종종 주석가들은 그 짐승의 숫자가 계시록 기록보다 후에 올 어떤 사람을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이 사람은 비록 계시록에서는 한 번도 언급되지 않지만, 적그리스도로서 종말에 나타나는 사람으로 이해되었다.
이러한 주장들 가운데 오늘날 현재 나타나는 중요한 정치. 종교. 군사적인 지도자들도 그 숫자의 주인공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또한 국제적인 기구들도 거론되고 있다. 아무튼 계13장은 로마 제국의 군사력이나 종교적 이단성을 묘사하고 있는 듯하다. 또한 계시록이 씌어진 시대에 있었던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로마제국의 박해를 서술하고 있다는 점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또 다른 하나의 가능성은, 숫자가 한 개인의 수나 그 개인의 이름과 연관이 있다기보다는 ‘인류의 수’이거나 ‘인간들의 수’로서 생각되어져야 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이 주장에 따르면 666은 계시록에 나타난 다른 숫자들과 같은 종류로서 상징적으로 해석되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육이라는 숫자는 계시록 내에서 안전을 상징하는 수로 알려진 칠보다 하나가 모자라는 것이기 때문에 666은 불완전이 합해진 것으로 짐승의 숫자를 거절하였던 하나님의 백성을 제외한 모든 인류들에게 주어지는 하나의 인식표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아가페성경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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