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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1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by 은총가득 2022. 6. 15.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계시록은 서신서,예언서 및 묵시문학 형식이다-

 

본문 : 계시록 1:1-4; 11

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아포칼립시스-revelation apocalypse)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3. 이 예언(프로페테이아. prophecy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4.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원어에는 없음)~
11.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

 

 

성경은 문자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해석이 중요하다
법 조문의 경우, 동일한 사건에 대해 서로 다르면 1심 재판, 2심 재판, 3심이 있다. 그러나 성경 해석은 이런 것이 없다.

물론 개신교에서 일차적, 원론적 해석은 동일하다. 사람은 모두 하나님 앞의 죄인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일차적 교리는 교파마다 동일하다. 이것이 다르면 이단이나 사이비다. 그러나 종말론과 같은 이차적,부차적 교리에 대한 해석을 천차만별이다.

 

사람마다 교파마다 다른 이유는 해석하는 관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문학은 장르에 따라 해석하는 방법이 다르다. 장르란 문학의 형식을 말하는데 시, 소설, 희곡 등이 있다.

“목아지가 길어서 슬픈 사슴이여~”

이 시를 읽고 ‘사슴도 슬퍼하나 보다’라고 해석하면 이상해 진다. 이것은 사슴을 보는 시인의 감정과 인상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도 여러 ‘장르’ 즉 문학의 형식이 있다.
이야기체, 기사체는 대부분의 구약-창세기, 열왕기 등이나 신약의 복음서나 사도행전을 말한다. 시편, 잠언, 전도서, 잠언 등. 특히 시편은 시적 형식을 가진다. 신약의 서신서는 각 교회의 구체적 문제점에 대한 해결책을 담은 편지 형식들이다.

 

요한계시록은 어떤 형식인가?
아주 독특한 형식이다, 요한게시록은 서신서, 예언서 및 묵시문학이 형식을 가진다. 그러므로 계시록을 해석할 때는 이런 3가지 장르를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런 장르를 염두에 두지 않고, 계시록을 마치 시사 해설서처럼 해석하여, 계시록의 기록을 현대의 시사 주제-사람, 사건 등-과 연관시켜 해석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세대주의 종말론이 대표적이다. 누가 적그리스도이고, 무엇이 666이고, 언제 휴거 되는가 등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영향을 받아 계시록 전체의 기록 목적이 무엇인가에는 관심이 없고, 시사적이고 센세이셔날한 주제에만 비정상으로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다. 그 결과 현실도피적이고 사회 문제에 무관심한 좋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어떤 사람은 임박한 휴거 날짜만 기다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 ‘곧 휴거 될 텐데 다른 것을 할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반문한다. 또, 어떤 사람은 짐승의 표인 666을 받지 안기 위해 나름대로 자급자족 하는 방법을 모색하거나, 무인도에서 농사 짓는 법을 배우려고 한다.

이런 것들은 종말에 대한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경 어디에서 종말이 가까웠으니 팔짱 끼고 휴거를 기다려라, 환난의 때가 왔으니 산이나 무인도로 도피하라는 말이 있는가?

 

이런 잘못된 행동은 초대교회 당시부터 있어왔다-초대교회 당시부터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널리 퍼졌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종말의 열풍이 불기 시작하면,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 22:20)에 의거하여, 마치 예수님이 금방 오실 것 같은 긴박감에서 비상 식량 준비하고, 삶을 정리하고 휴거 날짜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

성경은 종말이 임박했다고 하지만 그런 식으로 준비하라는 말은 어디에도 없다. 건전한 종말론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건전한 종말론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 먼저 요한계시록을 제대로 해석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사람은 자기 만이 성경적이고 다른 사람의 것은 ‘성경에 대한 주석’이나 ‘사람의 말’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다니엘서에 나오는 사자는 영국이고, 곰은 러시아라고 하면서 이것이 성경적이다. 성경을 믿고 성경에 대한 주석이나 사람의 말을 믿지 말라는 주장을 듣고 어이가 없었다. 그런 말 자체도 해석이 아닌가?

 

본론으로 들어가자.
요한계시록은 어떻게 읽고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첫째, 요한계시록은 서신서이다.
(The Book of Revelation is an Epistle)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한글 삽입) ----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계 1:4).

서신서란 무엇인가?
모든 시대의 모든 교회를 위한 성경이 곧 서신서이다. 바울 서신서(14), 일반서신서(12), 요한계시록 등. 서신서는 종말의 특정한 한 시대가 아니라 교회 시대 전체에 해당된다. 로마서를 보면, 일차적 수신자는 당시 로마에 있는 교회이지만 로마서의 내용은 교회 시대 전체의 신자들에게 해당되는 내용들이다. 마찬가지로 요한계시록도 서신서이므로 어느 특정한 한 시대가 교히 시대 전체에 해당되는 내용을 포함한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계 1:4).

원어에는 ‘~에게’라는 말만 잇고, “편지하노니~” 라는 말이 없지만 무리 없는 내용 전개를 위해 번역자가 삽입한 것이다.

“이르되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등 일곱 교회에 보내라 하시기로~”(계 1:1).

이처럼 요한계시록은 구체적으로 당시 현존하던 7교회를 수신자로 기록된 편지 즉 서신서이다.

 

서신서의 형식은?

서론-인사말. 은혜와 평강이 함께할지어다
본론. 각 교회가 처한 구체적이고 특정한 사안들에 대한 신학적, 관계적, 윤리적 문제 해결-교회 시대 전체 신자들을 위한 지침서가 된다.
결론.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다. 서신서이므로 서론, 본론, 결론이 있다.

서론(1:1-20)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일어날 일들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알게 하신 것이라
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본론 (2~22장)

-2~3장. 소아시아의 7교회

7교회들이 지금 현재의 상태를 기록한다. 예수님은 잘한 것은 칭찬하시고 못한 것은 회개하라고 촉구하신다. 당시의 교회는 대부분이 로마 황제 숭배 강요로 인해 심각한 핍박으로 고통 받고 있었다.

내용은 고난, 핍박 및 순교의 상태에서도 끝까지 믿음을 지킬 것과 비록 악의 세력이 지금은 흥왕하지만 하나님이 반드시 승리하신다는 위로와 소망의 말씀을 전하고, 그로 인한 찬양과 경배를 기록한 책이다.

 

-4~22장

7교회가 실제로 당하는 환난, 실제로 당할 환난과 교회를 대적하는 세력에 내려지는 심판 등을 기록한다.

 

결론(계 22:6-21절)

“또 그가 내게 말하기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된지라 주 곧 선지자들의 영의 하나님이 그의 종들에게 반드시 속히 되어질 일을 보이시려고 그의 천사를 보내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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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계 22:6, 21).

특히 계시록 해석의 열쇠가 되는 구절은 계 1:19-20이다.

“19. 그러므로 네가 본 것과/, 지금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20. 네가 본 것은 내 오른손의 일곱 별의 비밀과 또 일곱 금 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계 1:19-20).

 

그 다음 2-3장에 등장하는 7교회는 실제로 사도 요한 당시에 존재했던 교회들에 대해 기록한다.

 

• 요한이 본 것-그리스도의 부활과 권능
• 지금 있는 일-7교회에 대한 주님의 칭찬과 책망
• 장차 될 일-7교회에 일어날 일+미래의 일들을 말한다.

 

지금 있는 일-

당시에 실제로 존재했던 7교회가 잘한 점이 무엇이고 고쳐야 할 점이 무엇이며 그 교회들이 당해야 할 핍박과 환란이 무엇인가를 기록했다. 이 7교회는 요한 당시의 실제 교회이자 교회 시대 전체의 교회를 대표하는 모델 교회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7교회는 사도시대, 중세시대, 현대시대에도 존재하는 교회들의 모습이다.

 

한때 7교회를 시간차로 해석하여 에베소교회는 초대교회의 모습이고, 라오디게아 교회는 말세 교회에 배교하는 교회로 해석했다. 요즈음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계시록을 시간 순서로 해석하는 세대주의자들도 요즈음에는 시간차가 아니라 전체 교회 시대에 존재하는 대표적인 교회의 모습으로 이해한다.

 

그 다음 장차 될 일은?
누구 기준에서 장차 될 일이냐? 성경 해석은 항상 일차적으로 당시의 원 저자(original author)와 원 청중(original hearer. original audience)의 입장에서 해석한 후 현대인인 당사자에게 적용해야 한다. 원저자는 성령이시고 사도 요한은 2차 저자이다.

원 청중은 그 당시 사도 요한과 ‘소아시아의 7교회’로서 그들이 처한 현실적 상황과 앞으로 될 일에 대해서 기록한 책이다. 그리고 그 이후의 교회 전체가 당시의 7교회처럼, 늘 사탄과 핍박을 받으면서 복음 전파 사명을 감당해야 할 것에 대한 기록이다

 

그런데 세대주의자들은 누구 기준에서 해석하는가?
특히 핵심 부분인 4~19장을 아직도 일어나지 않은 휴거 후의 미래 일로 해석한. 4~19장은 휴거 이후 일어나는 7년 대환난으로 해석한다? 그 당시 실제로 존재하여 로마 제국의 극심한 핍박을 받은 7교회나, 이후의 교회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아직도 일어나지 않은 휴거 후의 7년 대환난의 기록이라고 해석한다.

이런 해석은 계시록이 서신서라는 형식을 무시함을 물론, 성경의 예언은 실제 역사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역사성을 무시한 해석이다.

 

*계시록의 기록 연대

계시록의 기록 연대를 통해 당시 상황을 살펴보자
성경은 원 저자와 원 청중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계시록 기록 연대에는 2가지 설(說)이 있다.

(1) 폭군 네로 당시 기록설(A.D. 54~68).


기독교에 대한 핍박이 극심한 때이다. 로마 시내에 네로 황제 자신이 불을 질러놓고 기독교인이 불을 질렀다고 누명을 씌운 후에 대대적 핍박을 가한다. ‘쿼바디스 도미네’ 영화에 이 사살이 잘 묘사되어 있다. 계시록에 성전에 대한 기록이 나오는 것을 볼 때 아직 A.D. 성전이 파괴되지 않은 시대이다.

 

(2) 도미티안 황제의 핍박 시대 기록설(A.D. 81~96)

핍박의 말기인 A.D. 95~96년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레니우스 주교(140-200). 요한이 도미티아누스 황제에 의해 밧모섬에 유배되었다고 기록했다.

도미티안 황제 시대는 전 로마를 헬라 문화화하고 황제숭배 사상 정책이 본격화된 시대이다. 기독교인에게 황제 숭배 강요하고 거부하면 순교하던 때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게시록이 이 시대에 기록되었다고 주장한다.

사도 요한은, 당시에 이미 적 그리스도나 짐승으로 불리는 로마 황제와 <로마 제국>에 의해 엄청나게 핍박 받던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 쓴 책이 바로 요한게시록이다.

당시의 원 청중은 이해하는 짐승은 로마 황제나 로마 제국으로 거짓 선지자는 기독교인들을 핍박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로 이해했다.

 

서머나교회를 핍박한 자칭 유대인들은 실제는 사탄의 회당이었다(계 2:9). 사탄의 회당은 로마 제국과 결탁하여 예수를 죽이고 스데반을 죽이고 기독교인을 제도적으로 핍박한 정통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을 말한다.

사도 요한의 제자 폴리캅이 실제로 순교한 교회일 정도로 서머나 교회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순교했다. 두아디라 교회에서도 사탄의 깊은 것이 교회를 핍박했다(계 2:29). 사탄의 회당은 빌라델비아교회도 핍박했다(계 3:9).

바리새적 정통 유대인들은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인할 때까지, 짐승인 로마 제국의 앞잡이인 거짓 선지자가 되어 기독교인을 핍박, 살해하는 데 앞장 선 사람들이다.

계시록에 나오는 음녀는 바벨론인데 어떤 사람들은 음녀는 타락한 이스라엘?, 바벨론을 예수님을 대적한 예루살렘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타락한 로마 제국으로 해석한다.

 

결국 초대교회 교인 입장에서 보면, 계시록은 일차적으로 초대 교회 당시에 로마의 황제와 로마 제국 및 사탄의 회당인 유대인 거짓 선지자들에 의한 극심한 핍박-환난과 순교- 및 이들에 대한 심판을 기록한 책이다.

대환난에 대한 기록은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이 A.D. 66~70년까지 4년간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면서 약 110만 명의 유대인을 죽이고 10만 명을 포로로 끌고 가고, 예루살렘 성을 초토화하고 성전을 파괴한 한 이야기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책으로 이해한다.

 

즉 계시록의 대환난은 원 청중의 입장에서 보면 조만간 일어난 과거의 대환난에 대한 기록이지만 현대인인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이미 A.D. 70년에 일어난 일을 기록한 책이다. 이것을 과거 해석법이라고 한다.

물론 이런 해석도 치우친 해석이지만 계시록의 기록은 휴거 후 일어날 대환난으로 사건으로 해석하는 미래해석법-세대주의 종말론-도 문제가 많다.

세대주의 종말론은 역사성을 무시하고 모든 종말론적 예언이나 현상을 최종말의 미래에 일어날 일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계시록 4~19장은 당시 존재했던 7교회나 교회 시대 전체 동안 핍박 받은 교회와는 아무런 상관 없는 기록이 되어 버린다.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일제 시대의 핍박 받은 교회, 이북의 핍박 받는 교회나 이슬람 국가에서 핍박 받는 교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책이 되고 만다.

특히 세대주의는 특히 1960년 대에 중동 전쟁 이후의 국제 정세와 관련지어 계시록을 해석하도 보니 항상 틀린다.

계시록은 서신서이기 때문에, 초대 교회의 상황이 한 가지 패턴(모범, 견본)이 되어 교회 시대 전체에 비슷한 방식으로 반복된다. 그러나 대종말에는 이런 현상들의 강도나 심도가 심해진다.


* 누가 적그리스도인가?

초대교회는 로마 황제와 로마 제국을 짐승, 유대인 지도자들을 거짓선지자로 이해했다. 중세시대에 로마 가톨릭은 기독교를 대적하는 이슬람 세력을 적그리스도라고 불렀다.

그러나 16세기 이후 종교개혁가들은 정치와 종교의 권력의 양대 권력을 거머쥐고 온갖 비리와 사이비 행위를 일삼는 로마 천주교 교황과 로마 가톨릭을 적그리스도라고 ㅂ줄렀다. 요즈음에도 로마 천주교 교황과 로마 천주교를 적그리스도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20세기 중반에는 독일의 히틀러, 러시아의 스탈린, 이락의 후세인 등을 적그리스도라고 불렀다. 그런데 20세기 중반에는 세대주의 영향으로 EU(European Union. 유럽 연합)의 의장이나 대통령이 적그리스도라는 설이 대중적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이슬람교의 재림주인 마흐디가 적그리스도라는 주장도 있고, UN 사무총장이 적그리스도가 된다는 주장도 있다.

이들은 수많은 적그리스도 중에서 한 명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최종적인 대(大) 적그리스도는 누구인지 모른다. 적그리스도는 이미 사도 요한 당시부터 있어왔는데 마지막의 대 적그리스도가 누구인가는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하나님이 아직 막고 계시기 때문이다.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단수)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복수)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일 2:18).

“6. 너희는 지금 그로 하여금 그의 때에 나타나게 하려 하여 막는 것이 있는 것을 아나니 7.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하였으나 지금은 그것을 막는 자가 있어 그 중에서 옮겨질 때까지 하리라”(살후 2:6-7).


그런데 세대주의 종말론은 이미 나타난 적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고 대종말에 나타날 대 적그리스도 한 사람에 관심을 집중시켜 교회 시대 전체에 걸쳐 교회를 핍박하고 대적한 수많은 적그리스도에 대해서는 무관심하다.

그 결과 영국이나 미국에서 ‘거짓 선지자들’이 정부 권력과 결탁하여 동성 결혼과 차별금지법을 시행하고 공격적인 이슬람의 포교를 무제한 허용해도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 한국의 신자들은 이런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요약하면, 계시록은 특정한 시대가 아니라 교회 시대 전체의 신자를 위해 기록한 책이다. 사도 요한 당시 로마 제국의 극심한 핍박 아래 있는 성도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는 책이자, 교회 시대에 걸쳐 반 기독교적 거짓 선지자들이 짐승 같은 국가 권력을 끼고 기독교와 기독교인을 핍박하고 대적 세력과의 영적 전쟁에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하는 것을 기록한 책이다.

 

2. 요한계시록은 예언서이다.
(The Book of Revelation is a book of prophecy)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 1:3).

 

*예언이란 무엇인가?

예언에는 대언(Forth-tell)과 예언(Fore-tell)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대언에도 시공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예언이 포함되어 있다. 예언의 내용은 (1) 위로와 소망, (2) 책망과 훈계-이 내용이 7교회에 대해 잘 기록되어 있다. (3) 미래에 있을 일-반드시 될 일과 조건적인 일-이다. 개인, 교회, 국가에 대한 예언은 조건적이지만 대종말의 사건은 반드시 될 일이다(계 1:1).. 하나님이 정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예언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시대적, 국가적, 세계적 예언은 한 번 만에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 복합적, 중복적으로 성취된다. 이것을 예언의 복합 성취, 예언의 중복 성취, 예언적 시각(prophetic perspective) 또는 예언적 단축 (Prophetic foreshortening)이라고 부른다.

 

장은 예수님의 경고성 예언을 기록한다.

4절~15절

거짓 선지자의 미혹, 전쟁, 지진 등은 초림부터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부분적 반복적 성취되면서—온전한 성취를 향해 진행되고 있다.

15~16절

“15.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16.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미래적 성취에만 초점을 두는, 세대주의자들은 이 구절들을 교회가 휴거된 후 대환난 기간 중 적그리스도가 제3성전에서 하나님 행세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이런 해석을 따르는 사람들은 이제 제3성전이 건축되고 적그리스도가 하나님 행세하면 신자는 도망가라고 한다. 어디로 산으로? 섬으로?

과연 가능할까?
요즈음은 인공위성이나 무인 드론으로 위치를 추적하는 시대인데 어디에 가서 어떻게 숨는가? 이처럼 세대주의자들은 종말에 대한 예언을 모두 대종말의 미래에 일어나는 일로 해석하는데 이는 역사성을 무시한 해석이다.

 

이 구절은 일차적으로 A.D. 66~70년에 걸친 로마 디도(Titus) 장군의 예루살렘 함락과 성전 파괴에 대한 기록이다. 당시 크리스천들은 이 구절을 기억하고 피신하여 많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너희가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눅 2:20).

이때, 예수의 형제가 유대인 기독교인들을 이끌고 펠라라는 산악 지방으로 피신하여 많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즉 이 구절은 역사적으로 이미 이루어졌다.

그렇다면 다음 구절은?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단 9:27; 11;31; 12:11 참조).

다니엘이 말한 이 구절은 일차적으로 신·구약 중간시대에 성취되었다.

헬라의 알렉산더 왕이 죽은 후 이집트 지역을 관장하는 실루시드 왕조의 에피파네스 왕(안디오쿠스 4세)이 헬라 문화를 구축하기 위해, BC 167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신상을 세우고 번제단 위에 돼지고기를 제물로 바쳤다. 그리고 이 같은 제사를 매월 25일에 지내게 했다.

격분한 유대인들들은 마카비 형제의 주도로 봉기하여 예루살렘을 탈환했그고 이를 기념하기 위헤 유대인들은 오늘날에도 하누카(수전절. 성전 봉헌절)을 지킨다. 이처럼 다니엘의 예언은 이미 신·구약 중간시대에 일차적으로 성취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사건을 미래의 일로 예언하셨다. 그 예언은 A.D. 70년 예루살렘 함락과 성전 파괴 사건이 있었고 전무후무한 대 학살과 난리가 일어났다.

그때 어떤 사건들이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사건들’인가?

-로마인들이 AD 70년 숭배한 황제상이 새겨진 깃발을 들고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진입한 사건.
-로마 폭군 칼리굴라가 자신의 동상을 성전에 세우려고 한 사건,
-최초에 예루살렘을 공격한 디도 장군이 아버지인 베스파시안의 승마상을 지성소에 세운 사건,
-폐허화된 성전터에 디도의 상을 세운 사건 등 당시에 유사한 거룩 모독 사건들이 있었다.

당시의 이런 상황을 놓고 예수님의 다니엘서 인용구가 어느 사건을 구체적으로 가리키는가를 결정하기는 어렵지만, 이런 것들 중 어느 하나나 모두를 염두에 두시고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류의 대 배교 행위가 최종말에도 일어난다. 예언은 부분적, 복합적, 반복적으로 계속 성취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대주의 자들은 예언의 복합 성취를 인정하지 않고 이 기록을 모두 최종말의 한 가지 사건에 국한시킨다. 성도가 휴거 후 7년 대환난 기간 중에 제3성전이 세워지고, 후 삼년 반에 적 그리스도가 성전에서 하나님 행세를 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들은 이처럼 중요한 종말의 사건들을 분명한 성경 구절이 아니라 유추하고 추론하여 해석한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성전-에 서는 것을 보니 ‘제3 성전이 이미 완성되었을 것이다’는 식이다.

 

그러나 대종말에 대한 예언이 A.D. 70년의 예루살렘 성과 성전 파괴로 해석하는 과거주의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제사 제도를 폐하시고 제3성전 파괴를 통해 물리적으로 제사 제도를 완전히 폐하셨다고 해석한다. 그래서 제3성전에 건축을 기다리고 있는 메시아닉쥬들이 이런 해석법을 제일 공격한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다’는 예언이 대종말에도 이루어진다 주장은 예언의 복합 성취란 점에서 가능성은 있다? 그러나 제3성전 건축 자체가 성경적이냐, 아니면 성경과는 상관 없는 랍비 유대교의 주장이냐에 따라 견해가 갈라진다.

또한 적그리스도가 이런 일을 행하기 위해 꼭 제3성전을 건축해야 하는가?로 견해가 갈라진다. 거룩한 곳은 굳이 성전이 아니라 교회가 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적그리스도가 로마 교황청이 있는 바티칸의 성전에서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선포할 수도 있다. 한편, 어떤 메시아닉 쥬 중에서는, ‘하늘에서 새 예루살렘 성전이 내려오므로’(계 21:2) 인간의 성전 건축을 부인하는 사람도 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성경 예언은 어느 한 시점에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부분적 반복적으로 성취되다가 마지막에 완전한 성취를 이룬다. 그러므로 성경의 예언을 미래의 특정 시점에만 이루어지는 것으로 해석하면 무리와 혼란이 온다. 늘 예측한 것이 틀린다.

 

개인에 대한 예언도 실제로 보면 전혀 엉뚱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다. 하물며 국가적이고 우주적인 종말론이랴? 예의주시는 하되 특정하는 것은 금물이다. 그래서 휴거 날짜 계산하는 것은 정말 위험하고 지금까지 모두 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대주의자들은 계속 이런 식으로 책을 쓰고 있다. 왜? 장사가 잘 되기 때문이다.

-할 린지의 『대 유성 지구의 종말』(The Late Great Planet Earth)이란 책은 영어로 1800백만 부, 번역본까지 합쳐서 3500만 부나 팔렸다.
-팀 라헤이의 소설 같은『레프트 비하인드』(Left Behind. 남겨짐) 책과 CD등은 6000만 부나 팔렸다.
-메시아닉 쥬인 조얼 리차드슨이 이슬람의 재림주인 마흐디가 적그리스도라고 주장한 책도 미국에서 수백만 부나 팔렸다고 한다.
-세대주의 종말론자인 어빈 백스터도 종말론 사역을 전문으로 하는데, 한국에서도 브래드 TV(대표 김종철)를 통해 DVD세트가 천 세트 이상이나 팔렸다고 한다.
-한국의 데이빗 차가 짜집기 한 종말론 책도 십만 부 이상 팔렸다도 한다.

이런 책들은 세대주의적 종말론 틀에 유사한 국제 정세나 과학적 발명이 탄생하면 주어진 패턴에 나름대로 상상력을 발휘하여 팩션(fact+fiction)으로 출간하면 늘 베스트셀러 반열에 오른다. 미국이나 한국에 아직도 이런 것에 열광하는 고정 팬들이 많다는 증거이다.

 

왜 이런 오류가 계속 반복되는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현상들, 날짜 계산, 누가 적그리스도다? 등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사건에 관심을 가지기 때문이다.

신앙의 본질은 우리가 하나님이 맡기신 소명을 온전히 감당하고, 그리스도의 신부로 단장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가 이런 것에 대한 비전을 주지 못하니까 자꾸만 주변적인 것에 사람들이 몰두하는 불건전한 종말론자가 되어 버린다.

 

예언을 어떻게 해석하는가?

상징적 해석이냐, 문자적 해석이냐? 세대주의자들은 문자적 해석을 강조한다.그러나 문자적 해석에도 단어 중심 해석과 문맥 중심의 해석이 있다.

예를 들어, “저 사람 미쳤다고 A가 말했다.”는 문장을 보자. ‘미친 사람’이란 말은 (1) 미친 사람, 정신병자 (2) 어떤 일에 열심인 사람의 두 가지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말하는 사람이 어떤 의미로 말했는가-문맥, 정황-을 문장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1)의 의미-정신병자-로만 해석해 놓은 후, 문맥과는 상관없이 같은 의미로 해석하면 어떻게 되는가? 틀린 해석이 된다.

세대주의가 말하는 문자적 해석은 이런 단어 중심 해석이다. 한때 한국 교계에 유행했던 해석법이다. 그러나 요즈음은 성경 해석학의 발달과 소개로 인해 많이 시정되었지만 세대주의자들은 여전히 단어 중심적 문자적 해석을 유지하고 있다.

대표적인 세대주의 학자이자 달라스신학교 학장을 역임한 존 월부어드(John Walvoord)는 성경이 말하는 교회, 택함을 받은 자 및 성도를 구분한다. 월부어드는 계시록 4~19장을 7년 대환난에 대한 기록으로 해석하는데 그 이유 중의 하나는 4~19장에는 교회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요한계시록 4~19장까지에는, 교회는 휴거되었기 때문에 교회라는 단어는 나오지 않고, 이스라엘, 성도, 택함을 받은 자는 나온다. 그래서 휴거 후 7년 대환난 중에는 유대인이 대거 구원을 받고 남은 이방인 중에서 택함을 받은 자나 성도들이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바울이나 베드로의 서신서에서 교회, 성도, 택한 자를 구분 없이 사용한다.

롬 1:7 로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모든 자에게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고전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엡 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성도들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신실한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월부어드의 주장대로 라면, 한 교회 안에도 '교회'에 속한 사람이 있고, '성도'라 불리는 사람이 있다. 교회에 속한 사람은 휴거 되고, 성도라 불리는 사람은 환난 중에 순교하는 자들인가? 필자는 한때 어떤 개신교 목사가 이런 식으로 설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왜 이런 잘못된 해석이 나오는가?
성경의 단어를 문맥에 따라 해석하지 않고 지나치게 단어 중심으로 해석하니까 같은 것을 자꾸만 다른 것으로 쪼갠다.

그러다 보니 이방인은 교회를 통해 개인적으로 구원 받고 유대인은 민족적, 국가적으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한다.

교회는 환난 전에 휴거되고 이후의 7년 대환난 기간은 구약에 에언된 대로 유대인이 구원 받는 기간이라고 한다. 7년 환난의 생지옥 같은 상황 속에서, “막는 자”인 성령도 교회의 휴거와 함께 거두어지고, 무저갱에서 귀신들이 방출된 최악이 상황에서 유대인이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휴거되기 전에 이미 많은 메시아닉 쥬들이 대거 회심하고 있다. 세대주의 신학에 의하면 유대인은 교회가 휴거 된 후에 집단적으로 구원을 받아야 하는데 이미 유대인들이 대거 구원 받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메시아닉 쥬들은 세대주의자들과는 달리, 지금 메시아닉 쥬가 대거 구원 받는 것을 구약 예언의 성취로 해석한다.

과연 이런 해석이 옳은가?
지금은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다. 다만 그들이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단어 중심의 해석, 구약 중심으로 신약을 해석하기 때문에 이런 오류가 생긴다.

정리하면, 예언은 역사를 통해 복합적, 중복적으로 성취된다. 그러므로 특히 대종말에 대한 사건을 어떤 한 사람이나 한 가지 사건으로 ‘특정’하면 항상 틀린다.

 

(3)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 형식을 취한다.
(The Book of Rev is a Apocalyptic literature)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계 1:1).

계시(아폴칼립시스. Revelation)는 숨겨진 것을 드러내는 것을 말한다. 성경은 계시(revelation 레벌레’이션)라고도 해석하고 묵시(apocalypse 어파’클립스)라고도 해석한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묵시이며, 묵시 문학의 형식을 취한다. 묵시문학은 B.C. 200~A.D. 200 사이에 유대인들 사이에 유행했던 문학 형태이다.


묵시 문학은 대체로 다음의 내용과 형식을 취한다.

-신의 목적, 천사와 악령의 행위, 마지막 심판, 메시야 재림, 천국과 지옥에 대한 이야기가 주류
-꿈 또는 환상을 통한 계시 기록
-계시를 주는 천사에 대한 기록
-종말에 대한 인간의 관심
-신비적 상징적 표현 사용
-선악의 대결을 그린다
-구약 중심으로 인간의 상상력 발휘하여 기록한 문학 양식이자 저서들이다.

 

요한의 계시록은 형식은 묵시문학이지만 내용은 구속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직접 주신 계시이다. 인간의 상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반드시 될 일을 기록한 책이다. 내용의 핵심은 현재 선과 악의 세력이 팽팽하게 맞서는 것처럼 보이지만, 역사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고, 결국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이기므로 환난과 핍박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소망을 주는 책이다.

묵시 문학은 대부분이 상징적인 단어를 사용하다. 그러므로 해석도 상징적으로 해야 한다.
여러분이 꿈을 꾸고 난 후 어떻게 해석하는가? 필자도 꿈을 꿀 때 꿈 속의 주인공은 필자이지만, 시공간의 제한 없이 막 날라 다니고, 시간 제한 없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막 왔다갔다 한다.

꿈을 꾸고 난 후 어떻게 해몽할 것인가?
어떤 부분이 문자적이고 어떤 부분이 상징적인가? 불신자는 돼지 꿈이나 용꿈을 꾸면 금전적으로 횡재할 일이 생긴다. 그러나 신자에게 돼지, 뱀, 용 꿈은 마귀의 꿈이다 관점에 따라 해석 상의 차이가 생긴다.

 

묵시 문학의 해석도 마찬가지다. 해석이 쉽지 않다.
요한계시록의 짐승, 음녀, 백마, 흑마, 적마, 청황마, 해와 달과 별이 흔들림 등을 문자적 헤석을 강조하는 세대주의자들도 모두 상징적으로 해석한다. 그런데 교회 시대 전체에 걸쳐 등장하는 상징이 아니라 최종말의 어느 한 순간에 나타나는 상징으로 해석한다. 이것이 문제다.

숫자도 마찬가지다. 문자적 의미와 상징적 의미가 혼합되어 있다.

1. 절대 수
2. 증인의 수
3. 삼위일체, 3직분
4. 동서남북, 지상의 수
6. 불완전한 수, 인간의 수, 사탄의 세력 상징
7. 하나님의 수, 승리의 수, 완전의 수, 안식의 수
10. 완전 수, 세상적 측면에서 완전 수
12. 완전 수,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의 수
1000. 10x10x10완전 수. 상대적으로 많은 수-천년 왕국
144,000. 1212x10x10x10

그런데 세대주자들도 이런 것들의 대부분을 상징적으로 해석하면서 ‘이스라엘’과 ‘교회’, 사람의 1/3이 죽는다는 숫자, 천년 왕국의 '천년'은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고집한다. 그러나 계시록은 묵시문학이고 묵시문학 자체가 비유와 상징을 중심으로 기록한 책이므로 형식을 무시하고 억지로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문제가 일어난다.

특히 짐승, 거짓 선지자, 666 등을 대종말의 특정한 사람이나 물건으로 해석하면서 늘 틀려왔다.
한때 컴퓨터가 666이다, 바코드가 666이다, 이제는 베리칩이 666이다고 했다. 앞으로 이 보다 성능이 더 좋은 것이 나오면 그것이 또 666이라고 할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짐승의 표는 오른 손이나 이마에 받는다고 한다. 베리칩이 아무리 쌀알만하다지만 손이나 이마가 아니라 손목에 이식한다. 손과 손목은 전혀 다른 것이다. 문자적 해석과 미래적 해석이 낳은 병폐들이다.

그런데도 세대주의자들은 ‘가능하면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문자적 해석이 되지 않을 때 상징적으로 해석한다’고 주장한다. 계시록이 예언서이고 묵시록이란 사용된 단어 자체가 상징적인데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우긴다. 오히려, 계시록은 상징적으로 해석하고 상징적 해석이 되지 않을 때 문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런데 세대주의자들은 틀리면서도 계속 이 사람이 적그리스다, 저것이 666이다, 언제 휴거 된다고 예측한다. 왜 그런가? 문자적 해석, 미래적 해석의 잘못된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 해석의 틀에서 종말론이나 계시록을 해석하면 안 되는데 해석의 틀은 그냥 두고 혹시 계산이 잘못되었나, 계산 방법이 잘못 되었나 하면서 다른 계산법으로 예측을 하니 계속 틀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계산이 잘못된 것이라기 보다는 그런 계산을 하게 하는 프로그램 즉 성경해석학이 잘못된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정리해 보자.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첫째, 요한게시록은 서신서이므로 교회 시대 전체를 위한 책이다.

초대교회나 말세교회만을 위한 책이 아니다. 계시록을 최종말을 살아가는 현대인 위주로 해석하면 많은 무리가 따른다. 지금도 적그리스도 같은 이북이나 이슬람권에서 666보다 더 심한 핍박과 환난을 당하면서 신앙생활 하는 신자들이 많다. 이들에게는 요한계시록이 가장 위로가 되는 책일 것이다.

 

둘째, 요한계시록은 예언서이다.

예언은 교회 시대 전체에 걸쳐 부분적 반복적으로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종말론적 현상과 현 시대의 상황이나 사건을 지나치게 특정하여 연관시키는 것은 좋지 못하다.

 

마지막으로, 요한계시록은 묵시문학의 형태를 취한다.

특정 숫자나 단어를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특정인이 적그리스도이다, 베리칩이 666이다, 언제 휴거될 것이다는 식으로 점치는 것은 ‘아버지 외에는 그날을 모른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예수님의 초림 이래로 세상은 지금까지 종말을 향해 진행하고 있다. 초대교회는 물론 교회 시대의 모든 성도들이 어떠한 환난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도가 승리하는 계시록을 통해 많은 위로와 소망을 가져왔다.

그러므로 오늘날의 성도들도 종말의 날짜 계산이나 현상들 보다는,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1) 주어진 소명을 감당하고 (2) 현실도피적인 삶이 아니라 정상적인 삶을 살면서 (3) 그리스도의 신부로 단장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 더 중요한 일이다.

구요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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