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마태복음27장1~10절
제목 : 돌이킬 수 없는 선택
종교 지도자들은 미리 짠 각본대로 신속하게 사형 판결을 내린 후,
예수님을 유대의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정식재판을 받게 합니다.
이 과정을 지켜본 가룟 유다는 자신의 잘못을 후회하며 받은 돈을 돌려주고 스스로 목숨을 끊습니다.
1. 종교 지도자들의 결정과 행동(1~2절)
“[1]새벽에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함께 의논하고[2]결박하여 끌고 가서 총독 빌라도에게 넘겨 주니라”
결박하여 끌고 가서 - '결박'은 두손을 뒤로 모으고 포승으로 묶는 것을 가리키는데, 이는 사형과 같은 극형을 인도받은 자들을 언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에서부터 결박당하셨던 것 같으며(26 : 57),
재판과정 동안 풀렸다가 재차 포박당하신 듯합니다.
총독 빌리도 - '빌라도'라는 이름 앞에 '총독'이라 명칭을 덧붙여서 빌라도가 로마 제국을 대표하는 행정 책임자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이 빌라도는 유다, 사마리아, 이두매를 관할한 여섯번째 총독으로서
디베리오(Tiberius) 황제로부터 A.D. 26년에 총독으로 임명되었습니다.
한편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 등의 증언에 따르면 잔인하고 전제적(專制的)이며, 자신의 수하에 있는 유대인 관리들을 싫어하고, 그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는 매우 외골수적인 지배자였던 것 같습니다.
또한 그는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 구별된(고르반) 돈을 훔쳐 수도가 설비로 유용(流用)했으며, 이에 에루살렘 주민들이 반발하여 폭동을 일으켰을 때 군대를 파견하여 많은 양민을 학살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을 더럽힌 적도 있었습니다(눅 13 : 1).
그런데 복음서에 제시된 그의 인물됨이 위와는 크게 대조되는, 그야말로 심약하고 기회적 주의적인 성경으로 묘사된 데 대해 많은 학자들이 의문점을 제시하곤 합니다.
여하튼 A.D. 33년까지의 빌라도의 행정은 극히 부정적으로 평가되었으며, A.D. 36년에는 황제에게 소환되어 프랑스 지방에서 귀향살이를 하다가 그곳에서 일생을마쳤다고 합니다.
예수가 빌라도 앞에 선 때는 금요일 아침, 곧 유대력 니산월 14일
아침입니다.
2. 유다의 어리석은 선택(3~5절)
“[3]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4]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5]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
1) 유다가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었다(3절)
“[3]그 때에 예수를 판 유다가 그의 정죄됨을 보고 스스로 뉘우쳐 그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그 때에(토테) - 여기서는 문맥상 예수가 산헤드린의 고소로 빌라도에게 제소(提訴)된 직후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그의 정죄됨을 보고 - 이는 결국 유다가 예수님의 재판사건에 매우 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따라서 이 문구는 '예수님께서 유죄 판결을 받으신 것을 보고'로 번역된 공동번역과 새번역이 훨씬 이해하기 쉽습니다.
유다는 아마 예수님께서 체포되어 산헤드린에 의해 사형 판결을 받고 빌라도에게 넘겨지기까지 전 과정을 조마조마한 마음을 가지고 직 . 간접적으로 보고 들은 것으로 보입니다.
스스로 뉘우쳐 - 이는 자신의 행위를 뒤돌아보고 단순히 괴로워하며
'후회'하는 정도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죄 청산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단지 인간적 후회의 차원에서만 바꾸는 것입니다.
여하튼 '뉘우치기'까지 하는 유다의 마음의 상태를 보건대 그는 예수께서 설마 사형에 처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그렇게 되는 것을 원하지도 않은 듯합니다.
이렇게 본다면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것은 돈을 탐하였다기 보다는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의 능력을 보이도록 하기 위해 예수님을 배반했다는 이야기가 가능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람이 자기가 계획한 악한 일이 그대로 실현되는 것을 볼 때 순간적인 양심의 가책을 받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꼭 전자의 입장이 옳다고만 볼 수도 없습니다.
은 삼십을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도로 갖다 주며 - 26:15 주석을 참조하라.한편 유다는 악한 자기 행위의 결과요 침묵하고 있는 증인이라 볼 수 있는 은 삼십을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되돌려 주어 양심의 가책을 가볍게 하고자한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그는 당시 자신의 과오를 깊이 인식하는 동시에 예수님의 무죄함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에 이처럼 환불(還拂)하려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의 죄는 그 행위의 결과만을 씻어 버림으로써 해결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대제사장들과 장로들 - 그들이 한 부류, 곧 산헤드린의 회원들임을 암시하기 위해 두 단어를 묶은 하나의 관사(토이스)만을 사용하였습니다(21:23)
2)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4절)
“[4]이르되 내가 무죄한 피를 팔고 죄를 범하였도다 하니 그들이 이르되 그것이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냐 네가 당하라 하거늘”
무죄한 피 - 사본에 따라서는 '의로운 피' 라고 번역되기도 합니다.
이같은 변형은 전체문맥과 잘 조화를 이룹니다.
즉 19절절에 '의로운사람'이라는 문구가 예수님께 사용되고 있고,
24절에도 '이 의로운 사람의 피'라는 문구가 언급되고 있는데 이들과
'무죄한 피'와는 동일한 맥락을 이룹니다.
한편 '피'는 생명의 요체로서 특히 본문에서는 사람의 전존재롤 의미합니다. 실로 예수는 '무죄한 인격'이었던 것입니다.
죄를 범하였도다 - 유다는 무죄한 죄를 판 자신의 죄를 뒤늦게 고백하나, 하나님께가 아니라 공범자인 산헤드린에게 했습니다.
따라서 이 자인(自認)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가 아니라 자기의 실수에 대한 인간적인 강박 관념에서 비롯된 일종의 넋두리에 불과했습니다.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 고전 셈어의 관용적 표현으로서 참으로 매정한 결별선언입니다.
즉 이것은 배신자에 대한 뼈아픈 배신선언인 것입니다.
네가 당하라 - 똑같은 문구가 24절에 다시 한 번 나옵니다.
여기서 '당하라'는 헬라어 '와세이'는 강한 의지가 내포된 명령입니다.
따라서 본문을 재구성하면'그것은 너의 일이니 네가 알아서 하라'가 됩니다. 이러한 견지에서 공동번역에서는 '그대가 알아서 처리하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3) 유다가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무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지라(5절)
은을 성소에 던져 넣고 - 여기서 '성소'(나오스)가 성전 구내 전체를 뜻하는지, 이방인의 뜰과 막연히 구별된 제사장만이 출입할 수 있는 성소(sanctuary)를 뜻하는지에 대해 의견이 구구하나 대체적으로 후자를 택하고 적어도 그렇다면 이때 유다는 심각한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떻게든 자신의 실수를 만회할 양으로 율법의 규례를 무시한 채 성소 뜰로 뛰어들어 열린 성전문으로 은 삼십이 든 주머니를 던져 넣었을 것입니다.
물러가서 - 마치 단말마(斷末魔)의 그것처럼 필사적으로 자기 절망감을 극복하려했던 유다는 성소에서 뛰쳐나와 곧장 힌놈 꼴짜기의 으슥한 곳으로 숨어들었을 것입니다(The Pulipit Commentary).
스스로 목매어 죽을지라 - 그러나 본문과는 달리 사도행전에서는 유다가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튀어나와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행 1:18)
이는 양 기사간의 모순을 드러내기보다 조화로운 장면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가룟 유다는 자살 장소로 가파른 바위 언덕 위로 올라가 그곳 나뭇가지에 목을 매었는데, 후에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해 그 가지가 부러짐으로 해서 날카로운 바위에 떨어져 창자가 터져 죽어 갔을 것입니다(행 1:18,19 ).
한편 '목 매어 죽은' 사건은 이곳 외에 70인역(LXX)의 삼하 17-23에서 나옵니다.
결국 유다는 끌내 멸망에 이르는 자기 길로 가고 말았다(행 1:25).
3. 예례미야의 예언과 성취(6~10절)
“[6]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7]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8]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9]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ㄱ)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슥 11:12,13[10]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
1) 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6절)
“[6]대제사장들이 그 은을 거두며 이르되 이것은 핏값이라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하고”
이것은 피 값이라 - 유다가 '예수의 피(4절)를 팔므로써 벌어들인 돈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대제사장들이 이같은 단정적 발언을 한 것은 적어도 유다의 행위가 사악한 자신들 의견시에서 볼 때도 옳지 못했다는 점을 간접 시언한 것입니다.
성전고에 넣어 둠이 옳지 않다 - 율법에 의하면서(신 23:18) 이런 피값으로 얻은 돈은 창기나 개 같은 자의 돈과 같이 취급되어 여호와께서 미워하는 것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대신 이런류의 돈들은 자선과 구제 등의 대사회적인 용도로 사용되거나,
현금한 당사자에게 되돌려준 듯합니다.
따라서 제사장들이 유다의 돈을 성전금고에 넣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어찌되었든 대제사장을 위시한 유대 지도자들은 엄청난 불의를 자행했음에도 의식상으로는 깨끗하려는 위선을 떨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12:9-14;15:1-9;23:23).
2)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습니다(7절)
“[7]의논한 후 이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나그네의 묘지를 삼았으니”
의논한 후 - 구체적인 토론을 한 것이기 보다 신속하게 결의안을 통과시켰음을 암시합니다(1절).
그들의 믿음은 악을 도모하는 일에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토기장이의 밭을 사서 - 사도행전에 의하면 유다가 밭을 산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행1:18).
분명 그 제사장이 밭을 샀다고 하여도 그 돈의 원(原) 주인은 유다 이었으므로, 사실상 유다가 산 것과 같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Roberton).
한편 이 밭의 소재지는 점토지대인 예루살렘 남쪽, 곧 힌놈 골짜기 맞은편에 있다고 전해지며, '악한 회의의 언덕'( the Hill of Evil Counsel) 이라는 별칭이 붙어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곳은 더 이상 토기 굽는 장소로서 효율 가치가 없어진 불모지(不毛地)로 잘 알려져 있었던 듯합니다.
왜냐하면 매우 싼 가격으로 쉽게 이곳을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 유대 지도자들이 이런 결정을 신속히 하게 된 것은 아마도 벌써부터 '나그네의 묘지'에 대한 필요성올 느끼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여하튼 일로 인해 즉 11:12, 13의 예언이 온전히 성취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나그네의 묘지 - 여기서 '나그네'란 이방인들이 아니라 타 지방에 사는 유대인이나 개종한 이방인들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따라서 '나그네의 묘지'란 그들이 명절 등의 일로 예루살렘에 입경했다가 죽는 경우 묻어 주는 묘지를 말합니다.
한편 이곳은 한편 이곳은 현재에도 가난한 예루살렘 주민이나 치욕스런자들의 뼈무덤으로 사용되고있다고 했습니다.
3)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8절)
“[8]그러므로 오늘날까지 그 밭을 피밭이라 일컫느니라”
오늘날까지 - 이 한정적 표현은 본서가 기툭된 그 시점에 이르기 까지라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결국 이 말은 본서가 예루살렘과 그 주변이 완전히 파괴되고 황폐화 되어 버린 A.D.70년의 예루살렘 멸망 전에 이미 기록되었음을 간접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유다 자살 사건과 본서 기록 시점과는 어느 정도 시간 간격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피밭 - 마태복음에 의하면 '피밭'이라는 이름은 피값을 주고 그 땅을 산것에서 유래한다고 하는 반면에 사도행전에서는 유다의 피가 거기에 흘려졌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워진다고 합니다(행 1:18, 19).
그래서 예루살롑 주민들은 이 땅을 '아겔다마', 곧 '피의땅' 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의 극복을 위해 다음과 같이 추론할 수 있습니다.
즉 만약 유다가 제사장들이 산 밭에서 죽었다고 가정(假定)한다면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의 이야기는 일치되는 것입니다.
아마 제사장들은 반드시 바로 그 날은 아니었지만 지체하지 않고(아마 예수의 부활이 있을 일요일로 여겨짐)<Carson> 밭을 샀을 것입니다.
그리고 돈이 어떻게 사용되었는가를 알고 있었으며, 또 극심한 후회로 절망에 잠겨 있던 유다가 이스라엘의 계약에 따라 나그네를 위한 묘지로 삼은 그 밭에서 자살하기로 결심했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유다가 돈을 성전에 던져 넣고나가서 즉시 자살했다면 그 시기는 제사장들이 그 돈으로 밭을 사기 전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유다의 시체를 그곳에 옮겨 묻었다면 앞의 이야기는 무리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입니다.
4) 선지자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9절)
“[9]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나니 일렀으되 ㄱ)그들이 그 가격 매겨진 자 곧 이스라엘 자손 중에서 가격 매긴 자의 가격 곧 은 삼십을 가지고/ 슥 11:12,13”[10]토기장이의 밭 값으로 주었으니 이는 주께서 내게 명하신 바와 같으니라 하였더라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하신 맡씀이 이루어졌나니 - 구약 예언의 성취를 강조하는 전형적인 마태의 문구입니다.
구약 예언의 성취를 알리는 이 문구는 예레미야에서 온 것처럼 되어있는 본문과는 달리 사실은 스가랴의 예언으로 보아도 좋을 만큼 대부분이 슥 11:12, 13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슥11:12,13 “내가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좋게 여기거든 내 품삯을 내게 주고 그렇지 아니하거든 그만두라 그들이 곧 은 삼십 개를 달아서 내 품삯을 삼은지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이 나를 헤아린 바 그 삯을 토기장이에게 던지라 하시기로 내가 곧 그 은 삼십 개를 여호와의 전에서 토기장이에게 던지고”
그러나 렘 18:3에서 토기장이의 집을 방문한 것에 대하여, 그리고 렘 32:6에서는 밭을 산 것에 대해하고 있어서 예레미야서가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습니다.
여하튼 '예레미야'란 이름을 후기 편집자들이 첨가했다거나, 순전히 렘32:8-14의 인용이라는 사실을 들어 이 차이를 해명하는 학설들이 있습니다.
이와 함께 선지자의 이름이 '예레미야'로 제시된 이유로는, 스가랴서를 위시한 모든 예언서들을 대표하는 이름이 '예레미야'이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Light foot;Talmud, Baba Bathra 14b).
그러나 예레미야 대신에 '이사야'가 예언서의 대표격으로더 자주 사용된다는 점에서 이 견해는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가장 유력한 설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즉 마태가 렘 18:2;19:1,2;32:8-15의내용을 종합하고, 즉 11:13과 결합시켜 하나의 문장을 만든 후 그 구절을 대표적인 선지자 예레미야의 이름으로 인용 하였다는 학설입니다(Bruce, Meyer, Gundry).
이러한 예는 신약의 다른 곳 에서도 발견됩니다(2:23;막 1:2, 3).
실로 마태가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사형(死刑)에 이르는 이모든 과정(은 30에 팔리우고, 그 돈으로 토기장이의 밭이 사들여진 일 등)이 구약의 예언을 모두 성취했다는 사실입니다.
즉 스가랴서에 기술된 예언이 목적하는 바는 이스라엘 백성이 그들의 목자되신 여호와께 삯 은 삼십은을 드렸고 제사장은 그것으로 토기장이의 밭을 산것을 소개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같이 예언이 예수님의 팔리우는 사건으로 성취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전체 모든 상황을 주도하시며, 자신의 계획과 말씀을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종교 지도자들의 불법적인 재판과 음모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루어가시며, 양심의 가책을 느낀 유다의 자살을 통해 선지자의 예언(예레미야 19장 1~3절; 스가랴 11장 12~13절)을 성취하십니다.
우리는 현실 속에서 힘 있고 돈 있는 악인들의 주도 아래 일어나는 불의하고 비극적인 사건들을 볼 때마다 답답함과 괴로움을 느낍니다.
하지만 그 모든 사건과 상황을 주관하시고 주도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어느 누구도, 어떤 상황도 다 하나님의 손 아래 있다는 사실을 신뢰하며 담대하게 순종하십시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참된 회개는 후회를 포함하지만, 후회를 넘어서는 것입니다(3~5절).
예수님의 말씀대로 베드로도 예수님을 부인했고(26장 34절),
유다도 예수님을 배신했습니다(26장 24절).
두 사람 모두 예수님께 큰 잘못을 했지만, 그들의 반응은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심히 통곡하며’ 회개함으로써 초대교회의 지도자로 회복되었지만, 유다는 죄책감에 ‘스스로 목매어’ 죽음으로써 영원한 저주의 이름이 되고 말았습니다.
후회할 만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지만, 일단 돌이킬 수 없다면 그로 인해 더 이상 후회할 만한 일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나를 가장 괴롭고 수치스럽게 만드는 일은 무엇입니까?
더 큰 후회를 만들지 말고, 더 큰 회복을 기대하며 하나님께 돌아갑시다.
2) 종교 지도자들은 유다가 두고 간 돈을 ‘피값’이라고 하면서 성전에 두지 않고 ‘피밭’을 사는 것으로 성전의 거룩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돈은 바로 그들이 유다에게 준 돈이었습니다.
그들은 성전의 거룩을 지키기 위해 사소한 것까지 신경 썼지만, 정작 성전이신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는 앞장섰던 것입니다.
우리도 본질적이고 중요한 문제에 소홀하면서 사소한 문제들에 대해서만 집착하고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습니까?
기도
공동체-죄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고 회개를 통해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게 하소서.
열방-극심한 고난 가운데 있는 북한의 성도들이 자유롭게 주님을 예배할 날이 속히 오도록, 또 북한선교와 탈북자 지원을 담당하는 선교단체와 사역자들에게 지혜와 담력을 허락하시도록
본문: 마태복음27장57~66절
제목 : 장사, 부활의 준비
아리마대 요셉은 예수님의 주검을 수습하여 자신의 새 무덤에 모십니다. 예수님을 처형하고 장사까지 했음에도 혹시 부활하지 않을까 걱정이 된 종교 지도자들은 빌라도에게 요청하여 무덤을 굳게 지키게 합니다.
1. 장사되신 예수님(57~61절)
“[57]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58]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59]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60]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61]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1)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습니다(57절)
“[57]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저물었을 때 - 이때는 금요일이 끝나고 안식일이 막 시작되려는 오후 6시경으로 추측됩니다.
유대인들의 관습에 의하면 예수의 시신은 밤새도록 십자가에 달린 채로 있어서는 안 되었습니다(신21:22,23).
*신21:22,23 “[22]사람이 만일 죽을 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23]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특히 바로 다음날이 안식일과 큰 명절인 유월절이 겹치는 거룩한 날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용납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인들의 관습은 십자가에 달린 죄수의 모습을 만인들이 다 볼 수 있도록 시신이 날짐승에게 뜯겨 먹히거나 부패할 때까지 그대로 십자가에 달아 놓는 것이었습니다.
만일 그 시신을 장사지내고자 하면
로마의 지방 행정관의 용인 하에서만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한편 장사지낼 수 있도록 청할 수 있는 자들은 대개 죽은 자들의 친구들과 친척들이었으며 그나마 대역죄로 죽은 경우는 결코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아리마대 부자 요셉...그도 예수의 제자리 - 여기서 '아리마대'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으나 대개 '리다'나 '라마다임'으로 간주합니다. 한편 마가(막 15:43)와 누가(눅 23:50,51)는 요셉을 산헤드린 공의회의 요직을 맡은 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막15:43“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눅23:50,51“[50]공회 의원으로 선하고 의로운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51](그들의 결의와 행사에 찬성하지 아니한 자라) 그는 유대인의 동네 아리마대 사람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특히 누가는 그가 '의로은 사람'으로서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산헤드린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단지 마태만이 그가 '부자'임을 의식적으로 밝힙니다.
마태는 이 사실을 밝힘으로써 '그 무덤이 악인과 함께 되었으며, 그 묘실이 부자와 함께 되었도다'라는 사 53:9-12의 예언을 상기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지방에 있으면서도 예루살렘 근처에 자기 무덤이 있었다는 것(유대인들은 메시야의 때가 도래하기를 고대하며 사후에라도 그때에 대한 소망을 간직하기 위해 예루살렘 근방에 자기 가족묘를 마련해 두었다고 함)과
요한의 보고를 종합해 보면 요셉은 재물이 넉넉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마태는 요셉을 예수의 제자, 곧 그의 추종자라 합니다(13:52;28:19).
비록 요셉이 사회적 신분 때문에 은밀하게 예수를 좇았다고는 하나 그가
예수의 가르침에 깊은 감사를 받고 예수의 삶을 좇아간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2) 그가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내 주었습니다(58절)
“[58]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빌라도에게 가서 - 지금껏 자신의 신앙을 노출시키지 않았던(요19:38),
요셉은 예수의 죽음을 통해 옛 예언들이 성취되는 것과 십자가에 달린 그분이 바로 메시야라는 사실을 재차 확신하고는 두려움의 그림자를 담대히 떨쳐버리고 예수와 가까운 자로 자처하며 그 시선을 요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한편 본문의 '가서'란 긴급히 달려왔음을 암시하는 말로서, 죄수의 시체 관리 책임자인 총독에게 자신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급히 총독 관저로 나아갔음을 시사합니다.
그런데 그는 산헤드린의 일원으로서 율법 준수에 철저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큰 명절에 즈음하여 이방인과의 접촉을 의도적으로 피해야만 했고 또 시체와의 접촉을 멀리 해야만 할 입장이었습니다(요 18:28).
*요18:28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그럼에도 그는 의식적부정보다 예수의 장사에 더 관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진정 신앙의 바른 도리에 입각한 자는 다른 어느 것보다 예수사랑에 더 큰 비중을 둡니다.
예수의 시체를 달라 - 마가의 보고에 의하면 이때 요셉은 '당돌히'(용감하게) 예수의 시체를 요구했다고 합니다(막15:43).
*막15: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실로 그는 자신의 지위와 명예에 치명적 손실이 가해질지도 모르는 그 상황을 결연히 떨치고 일어나는 참신앙의 용기를 보였던 것입니다.
한편 요셉이 이 같은 간청을 한 때는 아마 요19:31에서 보듯이 일단의 유대인들이 빌라도를 접견하고 난 직후일 것으로 판단됩니다.
내어 주라 분부하거늘 - 빌라도는 요셉의 요청에 따라 먼저 십자가 형장의 관리자인 백부장에게 예수의 죽음을 확인한 다음(막 15:44, 45)시체를 내어주었습니다.
*막15:44,45 “[44]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가 오래냐 묻고[45]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주는지라”
이처럼 까다로운 절차 없이 시체를 내어준 사실은 적어도 그가 예수는 반역죄로 처형된 것이 아님을 어느 정도 공정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3)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쌌습니다(59절)
“[59]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 요셉 혼자 예수의 시체를 장사 지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사실 시체를 옮겨가기 위해서는 우선 땅에 박힌 십자가를 뽑아 뉘운 다음 손과 발에 박힌 못을 빼어야 했고 시체를 옮기는 채비를 갖춰야 했습니다. 이와 함께 시체를 옮기는 일, 씻는 일, 몰약을 썩는 일 등 장례에 필요한
모든 일을 제한된 시간 안에 요셉 혼자 하기에는 사실상 벅찬 일이었습니다.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 깨끗한 세마포는 주로 시체를 싸는데 사용되었습니다.
한편 요한복음에 의하면 일찍이 예수를 밤에 찾아갔던 니고데모가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 쯤 가지고 와서 요셉을 도왔다고 합니다(요19:39).
또한 요한복음에는 유대인이 장례법대로 향품과 세마포로 쌌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본서에서는 이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4)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갔습니다(60절)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 59절의 '깨끗한'이라는 단어와 '자기의 새 무덤',그리고 '큰' 돌이라는 수식어는 마태복음에서만 강조어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별히 여기서 '새'무덤이란 아직 죽음에 영향력이 그 공간을 침범치 못한 곳으로 영원히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몸을 가지신 예수의 시체를 안치하기에 매우 적합한 곳이었습니다(행2:27).
실로 이곳은 부활 곧 '새' 생명을 준비하는 예수의 휴식 처였던 것 같습니다. 한편 이곳의 위치는 갈보리 언덕에서 매우 가까운 곳에 위치한 현재의 성묘 교회가 서있는 곳으로 추정됩니다.
그곳은 암석들로 구성되어 있어 돌로 깍은 무덤들을 쉽게 볼 수 있는 장소입니다. 요셉은 모든 것을 '두고'그 자리를 떠나갔습니다.
진정 이러한 일련의 행동은 그의 신앙의 성격을 밝혀 줍니다.
왜냐하면 유죄판결을 받아 처형 된 사람을 이스라엘 조상들과의 연속성을 대표하는 무덤에 장례하는 것은 유대 법에 어긋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산헤드린의 결정에 의해 사형을 받은 시체를 산헤드린 공회원이 장사지냈다는 것은 형언할 수 없이 진한 감동을 자아내게 하는 장면입니다.
실로 이같이 주께서 누군가를 필요로 하실 바로 그때 그곳에 주님 곁에 있을 수 있는 신앙인이 참 신앙인일 것입니다.
5)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61절)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 - 여기서 '다른 마리아'는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를 가리킵니다(56절 주석 참조).
실로 이 두 여인들은 예수님의 장래를 주도하던 요셉과 일단의 무리들,
그리고 56절에 언급된 동료 여인들이 모두 떠난 이후 어둠이 깔리는 그 무덤가에서 예수님께 대한 간절한 사랑의 마음을 지을 길 없어 머뭇거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편 로마법에 의하면 처형된 자들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은 금지되었다고 합니다. 하여 여인들은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과 절망을 억지로 참으며,
예수님의 장사를 조용히 지켜보았을 것입니다.
진정 예수님의 처형과 매장의 증인은 제자들이 아니라 여인들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여인들의 권위가 무시당하던 당시의 상황에서 이 여인들의 증거는 참으로 특이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매장 장소에 두 여인이 있었다는 사실은
또 다른 의미에서 중요성을 갖습니다.
그것은 '두 사람' 이상의 증언이 법적인 효력을 지녔던 당시의 상황에서 예수의 죽으심 내지는 부활의 역사성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기 때문입니다(고후3:1; 히10:28). 이 증거와 기록은 모든 가현설의 도전을 이겨내는데 있어서 중요한 자료가 되기도 합니다.
2. 무덤을 지키는 병사들(62~66절)
“[62]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63]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64]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65]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66]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
1) 그 이튼 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62절)
“[62]그 이튿날은 준비일 다음 날이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준비일 다음 날 - 이 날은 안식일을 뜻합니다.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모여 - 서로 반목(反目)과 질시의 대상인 양 집단이 공동의 목적을 위해 공동 전선을 펴고 있는데 그것도 안식일에 이런 일을 펼친다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것으로,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요18:28에 의하면 그들은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안식일 전날,
곧 금요일에는 궁전에 들어갈 엄두를 내지 않습니다.
아마 그때는 그들 주위에 많은 군중들이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제 그들은 군중들의 눈을 피하며 하나둘씩 빌라도의 관정에 모여들기 시작한 것입니다.
한편 이때 예수님의 부활 문제를 대두시킨 것은 부활을 전혀 신뢰하지 않는(22:23) 사두개인 출신들인 대제사장들이 아니라,
부활 교리를 확신하고 있던 바리새인들이었음이 분명합니다.
2)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63절)
“[63]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주여 저 속이던 자가...한 것을 - 여기서 '주여'란 총독에 대한 정중한 어법에 불과합니다.
한편 '저 속이던자'이란 유대 군중들이 고대했던 바, 예수가 해방자요 정치적 메시야라는 사실을 전제로 한 말로서 진정 예수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치 못했기 때문에 '속이는 자'로 농락당했던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초대교회 당시에까지 지속되어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를 가리켜
'세상을 미혹하던 사람'이라고 악선전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여하튼 예수님께서 사사로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던 고난과 부활 대한 예고(12:40;16:21;17: 23:30:19)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알려지기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아마 예수를 배반한 유다가 그들에게 말해주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잊어버리고 있는 사실을 저들이 기억하고 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실로 제자들은 정치적 메시야로서의 예수에 대한 기대가 완전히 무너지자 예수께서 하신 말씀들을 모두 잊어 버렸는데, 배반한 적대자들은 예수를, 죽이고 그 무리들을 완전히 와해시켜 놓고도 신경질적으로 예민한 공포 속에서 예수의 능력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기억하노니 - '지금 막힌 생각이 떠올랐다'는 의미입니다.
아마 그들은 예수의 죽음을 즐기다가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예수의 시체가 장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제자들이 혹시 부활을 조작하여 거짓을 유포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돌연 예수의 말씀이 기억났을(12:40)것입니다.
3)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64절)
“[64]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그러므로 분부하여 - 당시 유대인은 로마 제국의 허락 없이 독자적으로 군사 행동을 취할 수 없었으므로 그들은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 보존을 간청했던 것입니다.
물론 그들에게는 자치 능력을 인정받은 성전 수비대가 따로 있었지만,
그 활동 범위는 성전에 국한되어 있었을 뿐입니다.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 여기서 '사흘까지'란 말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평소에 자주 예언하시기를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16:21;17:23;20:19)고 하셨으니 만인 사흘이 지나도 부활하지 않는다면 예수는 한 갖 사기꾼에 지나지 않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여 예수 부활을 저지함으로써 그를 사기꾼으로 몰아세우려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모든 인간적 장애를 초월하시고 부활하셨으니
바로 여기에 우리가 믿는 부활의 도와 하나님의 권능, 기독교의 진리가있는 것입니다(고전 15:12-28).
그의 제자들이...시체를 도적질하여 - 이는 그때의 정황으로서는 도무지 생각조차 하기 힘든 억측이었습니다.
사실 그 당시 제자들은 죽음으로 끝난 예수님께 대해 깊은 회의와 절망에 빠져있었을 뿐 아니라 더욱이 자신들의 신변 안전을 위해 모두 숨어 있었던 상태였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 종교 지도자들은 흑시 있을지도 모를 예수의 부활로 인한 소란을 미연에 방지하고, 또 자신들의 말대로 예수의 시체 도난을 예방하기 위해 조급히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결국 예수님의 완전한 죽음과 완전한 부활에 대해 더욱 확실한 증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 여기서 먼저 '속임'이란 63절
'속이던 자'란 말과 그 맥을 같이 하는 말로서 타인을 적극적으로 미혹하는 일종의 '사기'를 뜻합니다.
실로 유대 지도자들이 생각하기에 예수는 자신이 메시야라고 주장함으로써
'첫 번째 사기'를 쳤고, 다시 살아난다는 부활의 예언으로써 '두 번째 사기'를 칠 것으로 믿어 자신들을 보호하고 백성들이 미혹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무덤 파수가 필요하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쨌든 그들은 예수의 메시야로서의 선동보다 친히 부활함으로써 백성에게 끼칠 영향력을 더욱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4)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였습니다(65절)
“[65]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 많은 학자들은 이 부분을 현재 명령법으로 해석하여 '경비병을 내어 줄 터이니 지키라'고 해석합니다.
그리고 본문에 언급된 빌라도의 대답은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의미에서의 허락이 아니라 냉소적인 말로 '너희들은 그 예수가 살아있을 때 두려워하더니 지금 그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두려움에 싸여 있구나 그렇게도 두려우면 너희들 힘으로 지키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여라'의 의미로 해석합니다.
본문의 '경비병'은 '네명으로 구성된 군인'(러시어로 Custodia)이라는 뜻으로 유대 성전 수비대가 아니라 로마 군병으로 이뤄진 보초대, 경비대를 가리킵니다(행12:4).
어찌되었든 그들의 말대로 사람들이나 미혹하는 사기꾼으로 예수를 이해했다면 왜 그리 두려워하는 것일까?
아마 그들은 예수께서 메시야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을지라도 적어도 예수를 탁월한 예언자정도로는 이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예언자라 할지라도 자기들의 기득권을 위협할 때
저들은 지체 없이 제거해 버립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가장 온전히 따른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가장 완전히 반역하는 경우입니다.
힘대로 굳게 하라 - 이를 직역하면 '너희가 알고 있는 방식대로 스스로 그것을 튼튼히 지키라'입니다.
즉 온갖 적절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 두려움의 원인을 제거하라는 의미입니다. 이로써 빌라도는 자기의 권위를 확실히 세우는 동시에 더 이상 예수 사건으로 인한 골머리를 앓지 않기 위한 처방을 내린 것입니다.
5)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무덤을 굳게 지키니라(66절)
그들이 경비병과 함께 가서 돌을 인봉하고 - 본문은 마치 '왕과 대신들은 사자 우리의 문을 막은 돌에 봉인을 하여 아무도 다니엘을 건져 내지 못하게 하였던(단6:17) 다니엘의 체험을 연상케 합니다.
사실 초대교회에서는 다니엘이 갇혀있던 사자 굴에서 무사히 나온 것을 예수께서 무덤에 머무시다가 그것을 뚫고 나와 부활하신 것에 대한 모형 또는 비유로 생각했습니다.
한편 유대 지도자들은 서둘러 무덤 봉쇄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큰 돌을 굴려 무덤 출구를 막은 밧줄로 그 돌과 무덤 출구 양쪽에 동여맨 후, 밧줄의 중심부와 돌과 무덤 벽 사이에 얽혀 있는 밧줄에 초나 흙으로 밀봉했습니다.
따라서 만약 출구에 조그마한 이상이 있더라도 이 인봉이 깨어지기 때문에 부정한 방법의 헛소문을 미연에 방지하는데 용이합니다.
실로 로마 제국의 추악한 정권의 인준하에 유대인들의 치밀한 간계로 포장, 인봉된 꾸밈이었지만 모든 노력은 얼마 후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안식 후 첫날 동시에 밝은 기운이 이는 동시에 메시야이신 예수를 하나님의 구속하라는 무대에서 제거해 버리려는 그 모든 노력들은 부활의 항거할 수 없는 승리로 말미암아 하늘의 비웃음(시 2:4)을 사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만약 예수님이 죽지 않으셨다면
-빌라도가 예수님의 시신을 내어줄 수 없었을 것이고,
-아리마대 요셉도 예수님을 장사 지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끝까지 예수님의 죽음을 목격하던 여자들은(56절) 예수님을 장사 지낸 것까지 목격했으며, 예수님을 죽이는 데 앞장선 이들이 경비병들을 보내어 무덤을 지킬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틀림없이 죽으시고 무덤에 장사되셨으며,
-또한 틀림없이 부활하실 것입니다.
우리를 무덤에서 살리시기 위해 무덤에 거하신 예수님을 깊이 묵상합시다.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 예수님의 사형 판결과 집행은 예수님을 따르는 이들에게 매우 큰 충격과 두려움을 안겨주었을 것입니다(57~61절).
이런 상황에서 아리마대 요셉은 용기 있게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달라고 요구합니다.
안식일이 다가오고 있었고, 나무에 매달린 시체를 밤새도록 두는 것은 율법에 위배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신명기 21장 23절).
아리마대 요셉은 주님의 제자이면서도 유대인이 두려워 정체를 숨겼지만(요한복음 19장 38절),
주님께서 돌아가신 후에는 담대하게 앞장서서 주님의 장례에 필요한 모든 일을 감당합니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 그리스도인인 것을 드러냅니까?
예수님의 제자로서 용기 있게 앞장서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2) 제자들은 잊고 있었지만,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사흘 만에 부활할 거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62~66절).
그러나 그들은 말씀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경비병들을 보내 큰 돌로 무덤 입구를 막고 굳게 지키게 했습니다.
그러나 큰 돌과 경비병, 그 어떤 것도 예수님의 부활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그 모든 것은 오히려 주님의 권능을 드높이게 될 것이며,
주님의 부활이 사실임을 입증하게 될 것입니다.
혹시 내 삶 속에서 주님의 뜻을 가로막고 있는 부분은 없습니까?
기도
공동체-아무리 막아도 주님의 부활은 막을 수 없으며, 아무리 속여도 주님의 부활은 진리입니다.
열방-전 세계 무슬림 국가, 공산주의 국가, 독재국가의 2/3는 그리스도인에 대한 박해가 심각하다. 종교 간의 증오와 갈등이 완화되고 그리스도인에 대한 핍박이 그치도록
-헤브론 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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