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칠언( 架上七言 )
가상칠언(1):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가상칠언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일곱 가지 말씀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이 땅을 사셨던 삶의 마지막 정리이면서 극한의 고통 속에서 나온 최후의 말씀이었다. 당시의 십자가는 흉악범을 처형하는 형틀로서 모두가 혐오하는 수치와 저주의 상징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온 가상칠언은 예수의 삶을 그대로 농축시킨 거룩하면서도 진실한 최후 증언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은 누구에게나 가장 진지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사복음서에 흩어져 있는 가상칠언을 시간대 별로 정리하여 볼 때, 첫 번째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한 용서의 기도이다. 기도 내용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앞부분인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는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용서를 요청하는 것이다. 뒷부분인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는 용서를 구하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내용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의 잘못을 용서하여 달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용서는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다. 용서는 사랑의 첫 출발점이기도 하다. 용서는 서로에게 사랑의 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용서가 빠지면 사랑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래서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한 것"이다(고전 13:4). 사랑의 중요한 바탕색 중 하나는 남을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이다. 소극적 차원에서 용서는 기회를 한 번 더 열어주는 것이라면, 적극적 차원에서의 용서는 잘못된 길에서 바른 길로 돌아오도록 상대를 이끌어 주는 것이다.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그 자체였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는 스스로 대속의 죽음을 선택하셨다. 그것이 예수의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오신 목적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요 10:10)인데, 십자가에서 그 목적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려 십자가를 지신 예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용서의 첫 대상자로 삼으셨다. 그들은 이중적으로 큰 죄를 지은 자들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할 뿐 아니라 그분을 십자가에 직접 처형시키는 일에 앞장 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그들의 죄 용서를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셨다. 십자가에 예수를 못 박은 자들은 그들뿐만이 아니다. 함께 처형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주변의 예루살렘 사람들도 무언의 동조자들로 같은 죄를 지은 자들다. 우리들 역시 그들과 공범자들이다. 비록 시공간은 다르지만,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수 밖에 없도록 죄 값을 축적시킨 유전자적 동조자들이다.
예수께서 용서의 근거로 제시하신 것은 그들의 무지였다. 미처 알지 못하는 것도 용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여기에서의 무지는 지식의 결핍이 아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성경 연구에 대단힌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성경을 많이 알면서도 그 의미를 제대로 깨우치지 못했다.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바른 뜻과 의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외우면서도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를 깨우치지 못했다. 말씀의 깨우침은 자신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뜻을 깨우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들과 함께 사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 것도 큰 죄인데,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어느 것으로도 씻을 수 없는 엄청난 죄였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그들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무지를 안타깝게 받아들이면서 용서의 기도를 드렸다.
첫번째 가상칠언은 우리들에게 무지로 인한 범죄를 피해야한다는 점을 가르쳐 준다. 제대로 깨우치지 못함으로 범하는 잘못도 하나님 앞에서는 핑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감각이 무디어지지 않도록 늘 깨어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조명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며 살아야 한다.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지면서 지속적인 성장과 성숙을 멈추지 말아야 할 이유가 그것이다.
아무리 무서운 죄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모두 용서받을 수 있다. 가상칠언의 첫 번째 말씀은 온 인류를 위한 무죄선언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만이 용석 필요한 사람들이 아니다. 당시에 주변에 있었던 자들도 모두 무언의 공범자들이었으며,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 또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일에 실존적으로 동참했던 당사자들이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용서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방법이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눅 23:34)
가상칠언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남기신 일곱 가지 말씀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이 땅을 사셨던 삶의 마지막 정리이면서 극한의 고통 속에서 나온 최후의 말씀이었다. 당시의 십자가는 흉악범을 처형하는 형틀로서 모두가 혐오하는 수치와 저주의 상징이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나온 가상칠언은 예수의 삶을 그대로 농축시킨 거룩하면서도 진실한 최후 증언이라 할 수 있다. 마지막은 누구에게나 가장 진지한 순간이기 때문이다.
사복음서에 흩어져 있는 가상칠언을 시간대 별로 정리하여 볼 때, 첫 번째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위한 용서의 기도이다. 기도 내용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앞부분인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는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용서를 요청하는 것이다. 뒷부분인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는 용서를 구하는 근거가 무엇인지를 밝히는 내용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의 잘못을 용서하여 달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용서는 사랑의 또 다른 표현이다. 용서는 사랑의 첫 출발점이기도 하다. 용서는 서로에게 사랑의 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용서가 빠지면 사랑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그래서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한 것"이다(고전 13:4). 사랑의 중요한 바탕색 중 하나는 남을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이다. 소극적 차원에서 용서는 기회를 한 번 더 열어주는 것이라면, 적극적 차원에서의 용서는 잘못된 길에서 바른 길로 돌아오도록 상대를 이끌어 주는 것이다.
예수께서 지신 십자가는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 그 자체였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는 스스로 대속의 죽음을 선택하셨다. 그것이 예수의 이 땅에 오신 목적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오신 목적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요 10:10)인데, 십자가에서 그 목적이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려 십자가를 지신 예수께서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용서의 첫 대상자로 삼으셨다. 그들은 이중적으로 큰 죄를 지은 자들이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할 뿐 아니라 그분을 십자가에 직접 처형시키는 일에 앞장 섰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그들의 죄 용서를 하나님 아버지께 간구하셨다. 십자가에 예수를 못 박은 자들은 그들뿐만이 아니다. 함께 처형과정을 지켜보고 있던 주변의 예루살렘 사람들도 무언의 동조자들로 같은 죄를 지은 자들다. 우리들 역시 그들과 공범자들이다. 비록 시공간은 다르지만,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실 수 밖에 없도록 죄 값을 축적시킨 유전자적 동조자들이다.
예수께서 용서의 근거로 제시하신 것은 그들의 무지였다. 미처 알지 못하는 것도 용서의 대상이 된다는 것이다. 바울이 지적한 것처럼,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여기에서의 무지는 지식의 결핍이 아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성경 연구에 대단힌 열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성경을 많이 알면서도 그 의미를 제대로 깨우치지 못했다.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바른 뜻과 의도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외우면서도 그 속에 담긴 하나님의 계시를 깨우치지 못했다. 말씀의 깨우침은 자신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뜻을 깨우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들과 함께 사신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 것도 큰 죄인데,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어느 것으로도 씻을 수 없는 엄청난 죄였다. 그런데도 예수께서는 그들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그들의 무지를 안타깝게 받아들이면서 용서의 기도를 드렸다.
첫번째 가상칠언은 우리들에게 무지로 인한 범죄를 피해야한다는 점을 가르쳐 준다. 제대로 깨우치지 못함으로 범하는 잘못도 하나님 앞에서는 핑계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 감각이 무디어지지 않도록 늘 깨어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조명으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며 살아야 한다. 속사람이 날마다 새로워지면서 지속적인 성장과 성숙을 멈추지 말아야 할 이유가 그것이다.
아무리 무서운 죄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모두 용서받을 수 있다. 가상칠언의 첫 번째 말씀은 온 인류를 위한 무죄선언이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만이 용석 필요한 사람들이 아니다. 당시에 주변에 있었던 자들도 모두 무언의 공범자들이었으며,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 또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일에 실존적으로 동참했던 당사자들이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용서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방법이다.
가상칠언(2):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눅 23:43)
첫 번째 가상칠언이 온 인류에게 적용되는 용서의 무죄선언이라면, 두 번째 가상칠언은 개별적으로 적용되는 용서의 무죄선언이다.
예수께서 못 박힌 십자가 좌우편에는 함께 처형을 당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마태와 마가는 그들을 강도라고 불렀고, 누가는 행악자라고 지칭하였다. ‘강도’로 번역한 헬라어 ‘레스테스’는 단순한 두둑이 아니라 폭력을 사용하여 남의 것을 갈취하고 살인까지 저지른 흉악범을 암시한다. 당시 십자가는 반역이나 살인과 같은 무서운 죄를 짓고 법정 최고형을 선고받은 비(非)로마시민에게 적용되는 사형방법이었다.
처음에는 두 강도 모두 예수를 조롱하고 욕하였다.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였더라”(마 27:44) 이들의 비난에 앞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며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 27:40)고 모욕하였고, 뒤 이어 대제사장들을 비롯한 서기관들과 장로들도 조롱과 비난의 강도를 높였다.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마 27:42) 두 강도들마저도 예수를 비난하는 일에 참여하였다는 것은 당시 십자가 주변에 모여 있던 모든 사람들이 등을 돌리며 욕하였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잠시 후 상황이 바뀌었다. 한 강도는 비난과 욕을 계속하였지만, 다른 한 강도는 옆의 강도를 꾸짖으며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리라”(눅 23:40-41)고 하였다. 그러면서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 23:42)라고 했다.
어떤 계기로 그런 변화가 생겼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죽음 직전에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깨우치고 예수 앞에 회개를 한 것이다. 곧 그는 자신의 잘못을 발견하고 그 잘못을 진심으로 인정하였다. 그러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과 대속을 위하여 죽으심을 받아들였다. 또한 그는 하나님나라의 존재와 예수께서 그 나라의 주인이심을 믿고, 그곳에서 자신을 기억해 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회개한 강도는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를 놓치지 않는 인물이다. 인생은 끊임없이 주어지는 기회 곧 카이로스의 연속이다. 그래서 바울은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엡 5:15-16)고 하였다. 여기에서 ‘세월’은 기회를 의미하는 헬라어 ‘카이로스’이다. 그것은 양적인 시간을 의미하는 ‘크로노스’와 대조를 이룬다.
그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는 회개였다. 회개보다 앞서는 것이 자신의 잘못을 깨우치는 것이다. 깨우침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되며, 성령의 조명으로 가능하다. 성령의 하시는 일 가운데 중요한 것이 책망하시는 것이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여기에서 ‘책망’은 ‘유죄증명’이라는 뜻인데, 영어로는 ‘convict'라고 번역한다. 성령께서 우리의 죄를 조명하시면, 누구도 변명의 여지를 찾지 못하고 자신의 잘못을 시인할 수 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그런 점에서 회개한 강도는 성령께서 마지막으로 보내시는 ’카이로스‘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회개한 강도는 예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라는 보장을 약속받았다. 회개가 곧바로 응답된 것이다. 진심의 회개는 하나님의 가장 기뻐하시는 뜻이기 때문에 지체 없이 응답을 받는다. 강도가 예수와 함께 있게 될 낙원은 우리가 추구할 본향이요 궁극적인 하나님나라이다. 우리들은 지금 여기 이 땅에서도 하나님나라를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예비적 단계의 하나님나라이다. 이 땅은 그 나라에서의 영원한 삶과 상급을 준비하는 과정이다. 그런 점은 바울의 고백 속에 잘 드러나 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회개한 강도는 이 땅에서의 예비적 하나님나라를 경험하지 못한 채 곧장 낙원으로 들어갔다. 세상에서 헛된 삶을 살다가 죽기 직전에 회개하고 천국에 들어간 사람이다. 그런 점에서 두 번째 가상칠언은 마지막 순간이라도 자신의 죄를 깨우치고 회개하여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누구라도 구원받아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음을 강조한다. 구원은 자신이 쌓은 공적으로 얻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하심을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다.
그렇다고 해서 회개와 구원의 기회를 마지막 순간으로 미룰 필요는 없다. 이 땅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하나님나라를 경험하며 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안과 기쁨으로 얼마든지 이 땅에서 풍성하고 행복한 삶을 경험할 수 있다. 더구나 이 땅은 하나님나라에서의 상급을 준비하는 기간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구원이 미루어질수록 영혼은 더욱 황폐하여져 구원을 얻되 초라한 구원일 수 밖에 없다. 이 땅에서의 삶은 날마다 새로움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아름답게 가꾸는 더 없이 소중한 기간이다.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요 19:26-27)
첫 번째 가상칠언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의 죄를 용서하는 말씀이었다. 용서의 대상은 못 박는 자들뿐 아니라 못 박는 일에 무언으로 동조하였던 주변 사람들, 그리고 유전자적 동조자인 우리들까지 포함된다. 그러므로 첫 번째 가상칠언의 용서는 온 인류를 위한 것이다.
두 번째 가상칠언은 회개한 강도를 향한 용서와 낙원을 약속하신 용납의 말씀이다. 이는 개인에게 적용된 죄 용서이며, 구원은 개인의 공적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는 믿음으로 얻는 것임을 밝힌 것이다.
세 번째 가상칠언은 육신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에 대한 배려로서 부모공경의 계명을 구체적으로 실천하신 말씀이다.
모세가 시내산에 받은 십계명은 두 개의 돌 판에 새겨졌다. 일반적으로 두 돌 판에는 각각 다섯 개의 계명이 기록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그렇다면 제5계명인 부모공경은 대인(對人)계명의 돌 판이 아니라 대신(對神)계명의 돌 판에 새겨졌음이 분명하다. 이는 제5계병이 대인관계의 범주임에도 불구하고 대신관계의 범주에 속함을 의미한다.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부모는 하나님과 동반자 관계이다. 생명의 주인은 분명 하나님이시지만, 그 생명을 잉태하고 낳아서 기르는 일은 전적으로 부모에게 위탁되었다. 그런 점에서 부모공경은 인륜적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직접 관여하시는 생명원리로 다루어야 할 생명윤리이다.
부모공경 계명은 다른 계명들과는 달리 장수와 땅의 축복이 약속되어 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명령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 5:16) 이를 두고 바울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라고 하였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2-3) ‘첫 계명’에서 ‘첫’은 ‘처음’이란 뜻도 되겠지만 ‘유일’이란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가능하고 더 타당하다. 약속이 있는 ‘첫 계명’만 있지 그 다음은 없기 때문이다. 곧 제5계명은 십계명 중에서 약속이 보장된 유일한 계명이다. 십계명은 우리들이 당연히 지켜야할 인륜의 기본계명이다. 그런데 제5계명에 두 가지 축복이 약속된 것은 그만큼 특별한 계명임을 보여준다.
부모공경 계명에 그와 같은 축복이 약속된 것은 하나님 생명의 동반자로서 부모에게 위탁된 책무가 너무 과중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명을 위탁받아 잉태와 탄생과 성장의 전 과정을 책임진 부모에게는 자녀에게 아낌없이 주기만하는 희생적 사랑도 본능으로 주어졌다. 그래서 부모는 자녀에 관한 한 대책 없이 주기만 하는 바보이다. 그런 부모의 사랑과 은혜를 잊거나 모르는 체 한다면, 기본을 상실하고 생명의 원리에 무지한 영적 바보들이 된다. 제5계명에 곁들여져 있는 축복의 약속은 곧 부모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면서 부모공경에 더욱 힘쓰라고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특별보상의 유인책인 셈이다.
예수께서는 왜 어머니 마리아를 요한에게 맡기셨을까? 예수께는 같은 혈육의 친동생들이 있었다. 마태복음을 그들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명하기도 했다. “이는 그 목수의 아들이 아니냐 그 어머니는 마리아, 그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라 하지 않는냐 그 누이들은 다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마 13:55-56) 그런데도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맡긴 것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로, 요한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유일한 제자였다. 베드로를 비롯한 모든 제자들이 각기 흩어져 숨어 버린 것과는 달리 요한은 골고다 언덕까지 예수와 동행하였다. 그런 점에서 요한은 어머니 마리아를 맡길 유일한 대안이었다.
둘째로, 마리아는 예수를 낳으신 육신의 어머니였지만, 그보다 더 큰 비중은 영적인 관계였다. 마리아는 예수께서는 온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오시는 메시아이심을 천사의 전언으로 이미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가나 혼인잔치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예수의 주요 사역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였다. 후에는 마가 다락방 기도회를 통한 초대교회의 태동에도 적극 관여하였다. 그런 점에서 어머니 마리아는 영적 사역을 계승할 제자 요한에게 맡겨진 것이다.
셋째로, 요한은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가장 오래 살면서 교회를 끝까지 지킨 인물이었다. 대부분의 다른 제자들은 복음을 전하다 순교로 일생을 마쳤다. 요한도 박해를 받아 밧모섬에 유배되는 힘든 생활을 하긴 했지만, 오랫동안 살다가 수명을 다하고 죽은 유일한 제자였다. 요한이 다른 제자들보다 더 오래 살아야 했던 이유는 위기에 처한 초대교회를 끝까지 지키기 위해서였다. 1세기 말 초대교회는 내적으로 영지주의라는 이단과 외적으로 로마의 박해라는 큰 시련을 겪었다. 그런 위기 속에서 요한은 5권의 성경을 쓰면서 교회를 굳게 이끌어 갔다. 특히 요한이 요한복음을 쓸 때에 많은 내용을 마리아로부터 도움을 받았을 것이 분명하다. 마리아는 예수의 생애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분이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맡긴 것은 어머니 마리아를 위한 배려이면서 동시에 초대교회를 위한 배려라고 볼 수 있다.
가상칠언(4):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막 15:34)
시간대 별로 구성된 가상칠언의 구조적 특징은 첫 세 말씀과 마지막 세 말씀이 균형을 이룬다는 점이다. 앞부분은 다른 사람을 위한 말씀이라면, 뒷부분은 예수님 자신과 관련된 말씀이다. 시편 22:1절의 인용이다.
첫 번째 말씀인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는 전 인류를 위한 것이라면, 두 번째의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는 개인에게 주신 말씀이다. 그리고 세 번째의 “보라 네 어머니라”는 가족인 어머니와 제자에게 주신 말씀이다.
마지막 세 말씀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자신과 관련된다. 다섯 번째인 “내가 목 마르다”는 육체과 관련된 것이고, 여섯 번째인 “다 이루었다”는 삶의 목적과 관련된 문제이며, 마지막 일곱 번째의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부탁하나이다”는 영혼과 관련된 것이다.
이들 두 종류의 말씀들 사이에 위치하고 있는 네 번째 가상칠언인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대칭구조라는 관점에서 볼 때, 가장 중요하고 핵심적 말씀이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는 당시의 유대인들이 사용하였던 아람어이다. 아람어는 히브리어와 같은 어군에 속하는 유사언어이다. 그 내용을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이다.
네 번째 가상칠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중심 단어 곧 ‘버렸다’와 ‘어찌하여’의 정확한 의미 파악이 필요하다.
첫째로, ‘버렸다’로 번역되는 아람어 ‘사박크’는 히브리어로 ‘아자브’이다. ‘아자브’는 ‘내어버리다’는 뜻인데, 단순한 내어버림이 아니라 완전히 포기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유기하다’로 번역할 수 있다. 하나님은 예수께 완전히 등을 돌리셨고, 예수께서는 영적 소외감과 고독감으로 탄식하며 부르짖은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라는 용어 대신 ‘하나님’을 사용한 것과도 연관이 있다. ‘아버지’는 개인적인 관계를 표현하는 용어라면 ‘하나님’은 공적이고 법적인 관계를 강조하는 용어이다. 지금 예수께서 부르짖고 있는 탄식의 상대인 하나님은 더 이상 개인적인 친분관계에 계신 분이 아니다. 오히려 법정과 같은 공적인 자리에 계신 분이시다. 이것은 예수와 하나님 사이가 개인적 감정이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이고 법적인 엄정한 관계가 우선하는 분위기임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독생자 아들이신 예수께 그렇게 냉정하게 등을 돌리신 이유는 우리를 향하여 사랑과 은혜의 얼굴을 드시기 위함이다.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민 6:25-26) 예수에게서 얼굴을 돌리신 하나님은 우리를 향하여 그 얼굴을 드시고 얼굴빛을 비추어 주신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시 67:1)
둘째로, ‘어찌하여’에 대한 해석이다. 여기에서 ‘어찌하여’는 예수께서 사실을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니다. 자신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하는 것은 구약 전체에 걸쳐서 예언되고 강조되었던 것이라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자명한 일이다. 예수께서는 누군가가 남을 위하여 죽어야 한다는 대속의 원리도 잘 알고 계셨다. 매년 대속죄일마다 한 마리 양을 아사셀 양으로 삼아 사막 먼 곳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것도 잘 알고 계셨다. 지금 예수께서는 인류의 죄를 영원히 용서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그 일을 직접 수행하고 계신 것이다.
그런데 왜 예수께서 ‘어찌하여’라고 물으신 것일까? 히브리어에는 두 종류의 의문문이 있다.
하나는 몰라서 묻는 의문문이다. 이때 사용되는 의문사는 ‘왜’라고 번역되는 ‘마두아’이다. ‘안다’라는 뜻의 ‘야다아’에서 파생된 ‘마두아’는 사실을 알고 싶어서 물을 때 사용한다. 또 다른 의문문은 내용은 잘 알면서도 더 깊은 차원의 이유를 알고 싶을 때 하는 질문이다. 이 경우에 사용되는 의문사는 ‘라마’이다. ‘라마’는 ‘라’와 ‘마’의 결합인데, 히브리어 ‘라’는 ‘for'로 번역되는 전치사이고 ’마‘는 ’what'으로 번역되는 의문사이다. 그러므로 ‘라마’는 ‘for what?'이란 뜻이다. 목적과 의도 무엇인지를 묻는 질문이다.
그런 점에서 ‘어찌하여’는 질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집행하시는 현재의 그 일에 대한 동의와 인정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자신에게는 일시적인 고통이 따르지만, 그 일로 인하여 온 인류에게 주어지는 죄용서와 구원의 은혜를 내다보면서 오히려 하나님을 찬양하는 부르짖음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예수께서도 그 일을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평생 동안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그리고 지금 그 일이 구체적으로 성취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외친 ‘어찌하여’ 속에는 인간 구원과 그 결과로 주어질 축복에 대한 선언과 찬양이 함께 담겨져 있다.
가상칠언(5): "내가 목마르다"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루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요 19:28)
다섯 번째 가상칠언은 육체적인 갈증을 표현하신 말씀이다. 이는 예수께서는 성육신 하신 하나님으로서 육체를 지니시고 이 땅에서 사셨음을 보여준다. 예수께서는 실제적으로 피곤하시어 주무시기도 하셨고, 시장하여 배고파하시기도 하셨다. 3번이나 우신적도 있으시고, 성전을 더럽히는 상인들을 내쫒으면서는 심히 분노하시기도 하셨다. 그리고 마지막 남기신 말씀 중에는 심한 갈증으로 목말라 하신 것이 들어 있다. 인간 몸은 70%가 물로 되어 있어서 2% 정도만 부족해도 심한 갈증을 느끼게 된다.
인간은 영과 육으로 이루어진 전인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영과 육의 균형이 중요하다. 영성은 영적인 면만의 강조보다는 영과 육의 균형과 조화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1세기 초대교회를 위협하였던 영지주의 이단자들은 이원론에 근거하여 영만을 실체로 받아들이고 육체는 죄악시 하였다. 그런 근거로 예수는 실제의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사신 것이 아니고 육체로 보이는 환상일 뿐이라는 가현설(Docetism)을 주장했다. 오직 영적인 예수만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고, 그 몸으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목 박혀 죽으셨다. 다섯 번째 가상칠언은 그런 점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다.
예수께서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셨기에 인간의 죄 값을 지불하실 수가 있었다.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진 분만이 우리가 지불할 죄 값을 대신 갚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께서는 직접 육체를 입으시고 우리의 연약함을 직접 경험하신 분이시다. 예수께서 우리와 다른 점은 시험을 받았지만 죄를 짓지 아니하셨다는 것이다. 시럼을 받으셨다는 것은 곧 육체를 입고 있으셨음을 의미한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히 4:15) 그런 분이시기에 우리의 죄 값을 대신 지불하실 수 있으셨다.
예수께서 “내가 목마르다”고 호소하신 것은 우리의 영적 목마름을 대신 갚아 주셨음을 선언하신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처럼 목마름을 해결하기 위하여 매일 우물가로 물을 길으러 가야만 한다. 그런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께서는 “이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고 하셨다.
예수께서 목말라하신 것은 육체적 갈증으로 인한 고통의 호소였지만, 그것은 곧 우리의 영적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기 위하여 대신 겪으신 고통이기도 하다. 이사야가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5)라고 하셨을 때, 목마름의 고통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수의 근원이시다(렘 2:13). 예수께서 목마름의 고통을 당하신 것은 우리를 그 생수의 근원으로 이끌어 주시기 위한 사전 조치이기도 하다.
예수께서 목마르다고 하신 것은, 그분께서 우리의 실제적인 필요를 다 아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목마름은 70%가 물로 이루어진 인간이 갖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다 이시는 분이시다. 그것은 ‘여호와 이레’로 표현되기도 한다. ‘여호와 이레’는 ‘여호와께서 보시다’라는 뜻인데, 여호와께서 우리를 지켜보시는 목적은 우리의 필요를 알아보시기 위함이다. 우리의 필요를 아신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구체적으로 공급해 주신다. 그래서 ‘여호와 이레’는 ‘여호와께서 공급해 주시다’로 번역된다.
예수께서도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리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우리의 필요가 충족되는 방법을 제시하셨다. 그것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구약의 시편에서도 같은 내용이 제시되었는데, 그것은 여호와를 찾으며 경외하는 것이다. “나희 성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라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도다.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4:9-10)
다섯 번째 가상칠언은 단순히 목마름의 고통을 호수하는 절규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의 영적 목마름을 해결해 주시겠다는 복된 소식의 선언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아시고 부족함이 없도록 채워주시겠다는 약속이다. 예수께서 목말라하심으로 우리들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수의 근원으로 나아가는 구원을 얻었다. 그 구원을 통하여 우리는 또 다시 목마름을 경험하지 않으면서 날마다 새로워지는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서울신대 권혁승 교수>
가상칠언(6): "다 이루었다"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요 19:30)
여섯 번째 가상칠언은 “다 이루었다”는 완성의 선언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온 인류를 위하여 속죄의 제물이 완성된 것이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완벽한 제물이 되셨을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절차도 완전히 끝마친 것이다. 그러므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은 제물로서의 내용도 완전하였고, 드리는 절차도 완전히 마쳐졌음을 선언한 것이다.
“다 이루었다”는 선언으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사명이 완성되었다. 모든 사람은 살기 위하여 이 땅에 태어났지만, 예수께서는 죽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다. 예수께서 죽으시기 위하여 오셨음을 보여주는 것으로 다음 두 가지 사건을 들 수 있다.
하나는 베드로와 관련된 사건이다.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의 질문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한 베드로는 크게 칭찬을 받았다(마 16:15-17). 그 후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하였다. 그러자 베드로는 예수를 붙잡고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고 항변하자 예수께서는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하시면서 뒤로 물러가라고 명령하셨다(마 16:23). 예수의 죽음을 거부하거나 가로 막는 것 자체가 사탄의 시키는 일이라는 것이다.
또 다른 하나는 한 여인이 베다니에서 값진 옥합을 깨뜨린 사건이다. 300데나리온의 값어치가 되는 나드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은 것을 두고 제자들은 쓸데없이 허비하는 것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면서 차라리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들을 위해 쓰는 것이 났겠다는 제안까지 하였다(마 26:9-9). 그러나 예수께서는 여자의 한 일을 자신에게 좋은 일 곧 장례를 미리 준비한 것이라고 칭찬하시면서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 이 여자가 한 일도 전해져 기념이 될 것이라고 하셨다(마 26:10-13). 예수께서는 여인의 향유부음을 미리 자신의 장례를 준비한 것으로 받아들이신 것이다. 이는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죽으시기 위하여 오셨음을 보여주는 좋은 증거이다.
“다 이루었다”는 여섯 번째 가상칠언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구원의 길이 완성되었음에 대한 선언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의 성취이기도 하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구원의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그 길은 예수께서 못 박혀 죽으신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서 이다. 다른 길, 다른 대안은 있을 수 없다. 구원을 위한 필요조건은 완전하게 갖추어졌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베드로는 이렇게 외쳤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 없음이라”(행 4:12)
“다 이루었다”는 구원의 완성은 누구에게나 열려있다는 점에서 완전한 성취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효력이 발휘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구원의 필요조건은 갖추어졌지만, 구원의 충분조건은 마음의 문을 열고 하나님께서 마련해주신 구원의 길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몫으로 남겨진 것이다. 성경에서 영접의 중요성이 강조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느니”(요 1:12) 구원의 길을 완성하신 예수께서는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지금도 기회를 주시기 위하여 끊임없이 마음의 문을 두드리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계 3:20)
십자가 위에서 자신의 사명을 완성하신 예수께서는 살기 위해 이 땅에 온 우리들이 어떻게 해야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살 수 것인가를 직접 보여주셨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는 것이다.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명과 함께 각자에게 적합한 은사를 나누어주셨다. 이 땅에 살면서 무엇을 먹고 마실 것인가는 가장 현실적이고 시급한 과제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예수께서 보여주신 우선순위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것이다. 의미 있는 삶은 하나님께서 설정하신 목적이 이끄는 삶이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께서 완성하신 구원의 길은 하나님 앞에 범죄 함으로 상실한 본래적 의미와 목적을 회복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제는 우리가 우리의 언어로 여섯 번째의 가상칠언을 고백할 차례이다.
가상칠언(7):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어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 23:46)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낮 12시(제6시)로부터 오후 3시(제9시)까지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둠이 계속되었다(눅 23:44). 이 3시간 동안 어둠이 온 땅을 뒤덮은 것은 죄의 결과로 인하여 예수와 하나님 사이에 소통과 교제가 완전히 차단되었음을 의미한다. 예수는 아무런 죄가 없으신 분이다(히 4:5). 그러나 우리의 죄가 예수께 전이되었기 때문에 그런 막힘이 생겼고 3시간 동안 초자연적인 어두움이 온 땅을 엄습한 것이다.
온 땅에 임한 어두움과 함께 성전의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지는 일이 있었다(눅 23:45). 그것은 더 이상 성전이 존재가 필요 없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전에서 드려지는 마지막 희생 제물이 되셨다. 예수의 십자가 희생은 마지막 제물일 뿐 아니라 단 한번으로 영원히 드리는 제물이 되셨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더 이상 성전에서 다른 희생 제물을 드릴 이유가 없음을 뜻한다. 그런 사실이 성전의 휘장 한가운데가 찢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신앙적 중심은 예루살렘 성전이었다. 성전은 하나님께 희생 제사를 드리는 장소인데, 예수께서 마지막의 영원한 희생 제물이 되셨기에 성전은 더 이상 존재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새 예루살렘 성안에도 성전은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어린 양 예수께서 성전이 되시기 때문이다(계 21:22).
성전의 휘장이 찢어짐으로 성전이 존재할 의미가 사라졌다는 것은 또한 예수와 하나님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회복되었음을 말한다. 3시간 온 땅을 뒤덮었던 어두움은 걷히고, 예수께서는 하나님을 다시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관계 회복을 근거로 예수께서는 자신의 영혼을 아버지 하나님께 부탁드렸다.
육체를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는 마지막 단계로 영육이 분리되는 죽음을 맞이하였다. 육체는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주인이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생명의 불가피성을 직접 경험하신 것이다.
육체는 흙에서 왔기에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유한성을 지닌다. 그런 유한성 때문에 육체가 무의미하거나 무가치하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영과 육은 분리될 수 없다. 살아 있는 동안 육체는 영혼을 담고 있는 소중한 그릇이다. 건전한 영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건강한 육체가 반드시 필요하다.
육체의 한계는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낡아진다는 것에 있다. 그래서 육체를 지나치게 신뢰하면 결국에 가서 낙심하게 마련이다. 반면에 속사람은 날마다 새로워짐으로 영적 성장과 성숙을 이룰 수 있다. 영육의 균형을 유지하되 영혼우선주의로 살아야만 하는 것은 영육이 지닌 본래적 속성 때문이다. 육체는 점차로 낡아져서 마지막에는 땅으로 돌아가지만, 영혼은 마지막까지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 하나님 앞으로 가게 된다. 하나님 앞에 섰을 때의 우리 모습은 육체가 아니라 영혼의 건강과 아름다움이다.
가상칠언의 마지막 말씀은 영혼을 하나님 손에 위탁한다는 내용이다. 예수의 마지막 모습은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본받아야 할 모범이다. 그 모범을 그대로 따른 인물이 최초의 순교자였던 스데반이다. 돌로 치는 유대인들 앞에서 마지막 남긴 말은 예수의 가상칠언 중 첫 번째와 마지막 것과 같은 내용이다.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행 7:59)가 그것이다.
스데반이 따른 예수의 모범은 이제 우리가 뒤따라 실천할 차례가 되었다. 가상칠언의 말씀은 우리에게 베푸시는 구원의 메시지이면서 동시에 우리들이 따를 신앙의 이정표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서울신대 권혁승 교수>
'4복음서 연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활하신 예수님!! (0) | 2022.04.15 |
---|---|
예수님의 장사, 부활의 준비 (마 27장57~66절) (0) | 2022.04.15 |
비아돌로로사 (0) | 2022.04.15 |
이교도에 대한 축복 (기도문) ברכת המינים/외 (0) | 2021.08.24 |
마태복음 25장 - 종말론적 비유 3가지 (0) | 2021.08.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