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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복음서 연구

이교도에 대한 축복 (기도문) ברכת המינים/외

by 은총가득 2021. 8. 24.

 

이교도에 대한 축복 (기도문) ברכת המינים

 

1896년 이집트 카이로에 있는 벤 에스라 회당에서 대규모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게니자의 문을 열였다고 말하는 것이 더 맞지 않나 싶습니다. 게니자(גניזא, 원어의 기본 의미는 “숨김”)는 회당의 창고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잡동사니들을 넣어두는 창고들을 게니자라고 부르지는 않습니다. 회당에는 그동안 잘 사용하였지만 너무 오래되어서 이제 사람들이 읽기에는 낡아버린 거룩한 책들과 두루마리들이 있게 마련인데요. 하나님의 이야기와 공동체가 값어치 있게 여기는 책들과 두루마리들이기에 함부로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책들을 보관하는 일종의 책과 두루마리들의 무덤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1896년에 케임브리지대학의 교수이자 랍비인 솔로몬 셰흐터(Solomon Schechter)가 이 게니자(이하. “카이로 게니자”라 함)를 조사하자 40만개의 먼서들이 쏟아져 나왔고, 그 중에서 1만 개 정도는 중세 이집트에서 지켜왔던 유대교의 전통과 이집트와 지중해 동편 지역의 유대교 공동체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문서들이었습니다. 오래된 성경도 있었고요. 

    카이로 게니자에는 대략 870CE부터 19세기의 것까지 1000년 여간에 기록된 문서들이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기독교인들이 매우 흥미로와할 글이 있는데요. 바로 “이교도에 대한 축복(기도문)“입니다. 

 

 

유대교를 떠나간 배교자들에게는 어떤 희망도 없게하라. 그리고 우리 때에 빨리 사악한 왕국을 뿌리 뽑을 지니라. 기독교인들과 이교도들은 즉시 멸망할 지어다. 그들은 생명책에서 지워질 것이다. 그리고 의로운 이들과 함께 기록되지 못할 것이다. 여호와여! 당신은 찬양받으실 분이십니다. 악한 이들을 굴복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에레츠 이스라엘 ארץ ישראל 버전) 

“이교도에 대한 축복”은 정말 축복이라기 보다는 이교도에 대해서 비꼬는 저주입니다. “이교도인 너희들이 받을 ‘복’이라는 것은 이것 뿐이야!”라는 뜻으로 말이지요. 

 

    유대인들이 공식적인 회당 예배 때에 기독교인들을 저주하는 기도를 한다는 이야기는 이미 초대 교회의 교부들의 글들에 소개되었더랬습니다(Justin Martyr ca 165 CE, Epiphanius ca 403 CE, Jerome ca. 420 CE). 그러나 유대교인들이 어떤 기도를 하는지 그 내용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카이로 게니자에서 “이교도에 대한 축복”이 발견되면서 현재 유대인들의 회당에서 읽고 있는 “이교도에 대한 축복”이 고대 유대교의 산물이며 고대의 원형을 조금 변형시킨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교도에 대한 축복”이 유대인들의 회당 예배에 공식적으로 낭송된 것은 얌니아 공의회(대략 90 CE) 때 부터입니다. 탈무드 전통에서는 그보다도 더 일찌기 가말리엘(?-52CE, 바울의 선생님 라반 가말리엘 רבן גמליאל הזקן)의 요청에 따라서 사무엘(שׁמואל הקטן)이라는 유대교 율법학자가 만들었다고 말합니다(BT. Ber. 28b). 그러다가 70년에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진 후, 얌니아(또는 “야브네”)에서 유대교를 대표하는 종교 지도자들이 모여서 구약 성서의 정경화 작업을 하는 동시에 회당 예배의 기준을 만들었습니다. 이 때 회당에서 주중 예배 때 해야하는 18개의 표준 기도문을 채택합니다(שמונה עשרה).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30여년 전부터 회당들에서 기도문으로 읽던 “이교도에 대한 축복”을 공식 표준 기도문 중의 하나로 덧붙여 채택했던 것이지요(결국 열아홉개의 기도문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것도 이스라엘 버전과 바벨론 버전이 조금 다릅니다). 

 

 

    “이교도에 대한 축복”을 만든 이유는 기독교인들을 유대교 회당 공동체에서 내쫓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내적으로는 소위 정통파 유대교인들이 기독교인들에게 대항하여 자기 정체성을 더 단단히 하기 위해서 이기도 합니다. 이러던 것이 중세 시대로 넘어오면서 기도문의 내용에 변화를 겪에 됩니다. 원래부터 일치된 하나의 정형적인 “이교도에 대한 축복”이 있었겠지만, 회당과 지역의 전통에 따라서 내용이 조금 달라지게 되었는데, 중세 시대 이후에는 기독교 사회 속에서 유대교 공동체가 살아가야 했기 때문에 기독교인에 대한 적개심을 노골적으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들과 이교도들은 즉시 멸망할 지어다” 부분에서 “기독교인들”이 슬며시 빠지게 되었습니다. 

Ehrlich, Uri and Langer, Ruth. “The Earliest Texts of the Birkat Haminim ברכת המינים”. Hebrew Union College Annual 76 (2005), 63-112.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한 간단한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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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정리는 기독교계의 고전인 요아힘 예레미야스.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서울: 한국신학연구소, 1992를 바탕으로 하였습니다. 

  책의 내용 중에서 예수님 시대의 상황과 혼동할 수 있는 기원후 2세기의 자료에 근거한 설명들은 제외시켰습니다. 

 

1. “바리새” פר”שׁ 라는 명칭은 “구별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다른 이스라엘들과는 구별된 참된 공동체라는 의미). 그래서 바리새파는 매우 폐쇄적인 공동체였다. 

2. 바리새파는 유대교 공동체에서 상층계급에 속하지 않았다.

3. 바리새파 사람들 중에서 대다수는 성서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4. 바리새파는 주전 2세기에 형성되었다. 이들에 대한 공식적인 첫 기록은 마카베오상 2장에 나온다.

41 그 날, 그들은 다음과 같이 결의했다. “우리를 공격하는 자가 있으면 안식일이라도 맞서서 싸우자. 그래야만 피신처에서 죽어간 우리 형제들처럼 몰살당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42 그러자 일부 하시딤 사람들이 모여와서 그들과 합세했다. 그들은 용감한 사람들이었고 모두 경건하게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었다. 43 박해를 피해 온 사람들이 모두 그들을 지지하여 합세했다. 44 그래서 그들은 군대를 조직하여 죄인들과 율법을 어긴 자들에 대해서 분노를 터뜨리고 그들을  쳐부수었다. 이 때 살아 남은 적군들은 이방인들에게 도망쳐 가 피난처를 얻었다. 45 마따디아와 그의 동지들은 이교제단을 찾아다니면서 모두 헐어버리고 46 또 이스라엘 땅에 사는 어린이로서 할례를 받지 않은 아이들을 찾아내어 강제로 할례를 받게 하고 47 교만한 자들을 쫓아내었다. 그들이 하는 일은 다 잘 되어갔다. (마케베오상 2:41-47)

* 참조. 바리새파와 에세네파 모두 마카베오시대의 하시딤 운동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그래서 바리새파 운동과 에세네파 운동 사이에는 유사한 점이 다수 있다.

다른 의견으로는 기원후 1세기 고정된 기도시간을 엄수하던 사람들의 공동체였다고 말하기도 한다. 

 

5. 유대교의 문헌에서 “(예루살렘의) 거룩한 공동체” 또는 “회당의 아들들”이라고 불린 사람들도 바리새파 사람들의 일원이었을 것이다. 바리새 공동체 안에는 여러개의 작은 공동체들이 있었다.

 

6. 바리새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입회 규정한달 내지 일년간의 시험기간을 거쳐야 했다. 이 시험기간 동안 정결규정(정결 규정들과 십일조 규정들)을 엄수할 수 있다는 신뢰성을 입증해 보여야 했다(바리새파 뿐 아니라, 사두개파 에세네파 등 모든 종파는 입회의 규정들을 가지고 있었다). 

7. 바리새파 사람들은 정기적으로 안식일이 시작되는 금요일 저녁에 공동식사 모임을 가졌다.

8. 바리새파 내부에는 규약이 있기 때문에 독립적인 내부 재판기구가 있었다.

9. 예수님 당시 바리새파 사람들의 수는 대략 6천명 정도였다. 사제와 레위인들이 대략 1만8천명이었고, 에쎄네파 사람들이 대략 4천명이었으니, 바리새파 사람들이 규모는 크지 않았다. 

10.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서로 다른 집단이다. 

11. 예수님 시대를 전후하여 바리새파 사람으로서 유대교와 신약성경에서 이름을 알렸던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1)주전 50-20년경의 샴마이와 힐렐

(2)주후 30년 경 예수 시대와 원시공동체 시대의 니고데모 

(3)예수 시대의 랍비 가말리엘 

13. 바리새파 사람들은 같은 목적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따라서 바리새파 사람들 가운데에는 제사장들도 있었다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의 압도적인 대다수는 평민들이었다).

 

14. 바리새파 운동의 목적은 제사장에게 요구되는 엄격한 규정들을 유다 백성들에게까지도 적용하려고 했던 사람들이다 (바리새파 운동은 사두개파 운동의 반대 급부로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종파의 순서를 굳이 나누자면, 사두개파가 먼저라고 할 수 있다. 사두개파 사람들은 성경의 문자적인 해석을 따라 제의법들, 특별히 레위기에서 규정하는 법들을 제사장과 제의에 한정시키고자 했으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민족 전체의 삶을 위한 기준이라고 해석한다). 

 

15. 바리새파 운동의 중심지는 성전이었다.

16. 바리새파의 최고 수장을 메바케르 מבקר 라고 부른다. 

(1)메바케르는 30이상 50세 이하여야 한다. 

(2)메바케르는 율법학자였다. 

(3)메바케르는 공동체 안에서 율법을 어긴 사람들은 재판한다. 

(4)공동체 가입결정권은 메바케르만 가지고 있다. 

(5)메바케르와 바리새파 공동체원들의 관계는 ‘목자와 양’이라는 비유로 표현되었다. 

(6)공동체에 평등한 권리를 침해당하는 이들이 없도록 관리 감독한다.

 

17. 바리새파 사람들은 유대 사람들의 지지를 얻고 하스몬 가문의 대제사장직에 대한 불합리함을 주장하였다. 알렉산더 얀네우스(103-76 BCE 통치)가 부인 알렉산드라(76-67BCE 통치)에게 정권을 이양하면서, 많은 유대인들의 지지를 받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산헤드린에 가입시켜준다. 당시에는 산헤드린에는 종교적인 귀족들과 세속적인 귀족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이것은 대제사장직을 수행할 수 없었던 여자 통치자의 종교권력을 바리새인들을 통해 장악하려던 계획이었다. 바리새인들이 본격적인 정치 전선에 뛰어 든다. 

 

18. 헤롯대왕은 유대 사람들 대다수의 지지를 받고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에 대해서 특별한 대우를 해주고 사두개파나 다른 세속 귀족 지도자들과는 다르게 관대하게 대우한다 (심지어 헤롯과 황제대 대한 충성 서약을 거부했을 때에도 다른 사람들은 사형에 처하지만 바리새파 사람들에게는 벌금형만을 부과하였다).

 

19. 헤롯대왕 당시 제사장 가문들은 헤롯의 영향력에 완전히 종속되었다. 그러나 바리새파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20. 유다가 몰락할 때 즈음인 주후 66년에 유대의 모든 사법과 예배 규정은 바리새파의 규정에 따라 제정되었다 (심지어는 사두개파의 대제사장들은 마음에 들지 않아도 바리새파 율법 해석에 따라 제의 예식들을 진행해야했다. 예를 들어서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으나 초막절에 물을 붓는 예식이 성전에서 진행된 것은 주후 66년 이후였다. 달력 전체와 오순절의 날짜 계산도 바리새파의 날짜 계산에 따라 확정되었다.).<BIBLIA>


사마리아 오경 (Samaritan Pentateuch) feat. 수가성 여인

요한복음 4장에는 사마리아의 수가성 여인과 예수님과의 대화가 짧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요4:20)

그 대화의 내용은 매우 간결하지만 그 안에는 극과 극으로 다른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대인들의 신앙관이 담겨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장소가 그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예루살렘을 찾아 갔습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솔로몬이 세운 하나님의 성전이 있기 때문입니다(대하 3:1이하). 반면에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심에서 예배와 제의를 드렸다면, 예루살렘의 시온 산 위에 성전이 세워졌듯이 그 산 위에 사마리아 사람들의 성전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렇다면 그리심 산 위에 성전을 짓고 제의를 드린 것은 언제부터일까요?

 

요세푸스(37-약100CE)라는 1세기의 유대인 역사가는 그리심 산의 성전이 알렉산더 대왕시절에 예루살렘 성전을 모방하여 만들어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의 노력으로 그리심 산 위에 세워진 성전의 연대를 특정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심 산의 성전 터로 추정되는 지역을 20년 넘게 발굴하면서 1만7천 개 이상의 금화와 은화들을 발굴했고, 수천 점의 토기와 양, 염소, 소, 비둘기의 뼈들을 찾아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두 개의 성전 터를 발견하였는데요. 그 중 오래된 성전은 기원전 5세기, 그러니까 요세푸스가 말한 때 보다 대략 1세기 전에 세워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참조. 다른 성전은 기원전 2세기에 건축되었음). 이 시기는 에스라-느헤미야와 동시대입니다.

 

느헤미야가 유다로 와서 대략 12년을 있었습니다(445-433 BCE). 그리고는 유다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쌓고 잊고 살았던 율법을 회복시켰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였고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살겠노라고 다짐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을 비운 사이 느헤미야의 모든 수고는 헛것으로 돌아가버렸습니다. 유다의 사람들은 이방인들과 결혼하며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을 잃어버리기 시작했고 유다의 지도자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제의를 돕는 레위인들에게 그들이 받아야할 몫을 제대로 주지 않았습니다. 생활고를 겪던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성전을 떠나 흩어져 버렸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런 유다의 혼란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도 여호와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유다에 비해서 그 제의나 율법이 체계적이지 못했던 것같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것들을 보완하기 위해서 포로로 잡혀갔다 다시 유다 땅으로 돌아온 유다의 제사장들 그리고 레위인들과 교류하려고 노력하였고, 그들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공을 들였습니다. 그들을 통해서 율법과 예배의 체계를 만들고 싶었으니까요. 사마리아 사람들은 유다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과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서 무던히 애썼습니다.

 

그러던 중 느헤미야의 공백 시기 제대로 자신들의 몫을 받지 못하여 살 길을 찾아 예루살렘 성전을 떠났던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을 받아들여 그리심 산에 예루살렘 성전과 같은 성전을 건축하고 그곳을 사마리아의 가장 거룩한 성소로 삼은 것입니다. 고고학자들은 발굴된 성전과 그 주변의 마을들의 규모를 토대로 그리심 산의 제사장과 레위인들의 주거 지역과 제의 구역의 면적이 대략 400두남(약 12만평)이나 되었다는 것을 알아냈습니다. 어마어마한 수의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이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이주한 것이지요.

 

사마리아의 제의는 급속도로 발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기원전 2세기에 이르러서는 사마리아 성전이 예루살렘 성전 못지 않은 권위를 가진 장소로 인식되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그리심 산에 세운 여호와 하나님의 성전을 무척 뿌듯해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율법을 고쳐썼습니다. 성경의 내용을 바꾼 것입니다. 그래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읽는 성경인 사마리아 오경(Samaritan Pentateuch)이 탄생합니다. 사마리아 오경과 유대인들의 성경은 매우 소소한 부분에서 차이가 납니다. 그러나 그 작은 차이가 엄청난 신학적인 대립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어보자면, 사마리아 사람들도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십계명을 신앙의 토대로 삼고 소중하게 여깁니다. 그렇지만 유대인들이 보는 성경과 그 내용이 동일한 우리 말 성경의 십계명과는 달리 사마리아 사람들은 출애굽기 20:17 뒤에 내용을 첨가하였는데, 아래와 같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를 네가 유업으로 받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시는 날에 너는 큰 돌들을 세우고 회반죽을 바르라. 그 위에 이 율법의 말들을 기록하라. 그리고 요단 강을 건너고 오늘날 내가 네가 명령한 이 돌들을 그리심 산에 세우라. 그리고 그곳에 여호와 너의 하나님을 위한 돌제단을 만들어라. ׳제단 위에는 철을 두르지 말아라. 너는 여호와 하나님의 제단을 온전히 돌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난 다음 그 위에서 여호와 하나님께 번제를 드려라. 너는 제물을 드리고 그 곳에서 제물을 먹어야한다. 너는 요단 건너편 해지는 곳 길갈 앞 가나안 사람들이 거주하는 땅 세겜 앞의 모레 상수리 나무가 있는 그 산에서 여호와 너의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

요한복음 4:20에 소개된 사마리아 여인의 질문은 그 여인이 들었던 바로 이 사마리아 오경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오경 E-Book


 

Yahweh’s Ashera (혼합주의 신앙)

 

 

고고학을 연구하는 많은 학자들은 고대 이스라엘 신앙에서 여호와 יהוה 가 배우자가 있었다는 신앙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그 증거로 Kuntillet ‘Ajrud에서 발견된 토기를 증거로 내세운다. 그러나 Keel 과 Uehlinger는 Kuntillet ‘Ajrud에서 발견된 그림과 글자들의 해석에 대해서 이것이 יהוה가 배우자인 아세라 אשרה가 있었다는 증거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한다. 그럼에도 두 저자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이스라엘이 혼합주의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혼합주의 신앙이라는 것은

(1) 이스라엘만의 하나님 신앙에 가나안 신앙의 흔적들이 들어와서 서로 섞이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고,
(2) 이스라엘 하나님의 신앙과 더불어 가나안 고유의 신들을 함께 숭배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יהוה가 아내인 אשרה를 가지고 있었다는 신앙은 (2)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 아티클의 두 저자가 주장하는 바는 (1)을 의미한다. 그 어느쪽이든 간에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래로 이스라엘 공동체가 순수한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으로부터 멀어져 갔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이것이 바로 성서의 예언자들이 줄곧 지적해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의 모습이다.

 

Keel, Othmar; Uehlinger, Christoph. “Kuntillet ‘Ajrud, Khirbet El-Qom and ‘Yahweh’s Ashera’.” Pages 210-248 in Gods, Goddesses, and Images of God in Ancient Israel. Edited by Trapp, Thomas H. Fortress Press, 1998.

<BIBL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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