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아의 홍수 이야기 김정우
6:9-22, 7:1-24
1. 하나님의 홍수 심판 예고와 노아의 방주 건설(6:9-22)
2. 악인의 멸망과 의인의 구원(7:1-24)
1959년 9월 17일 사라호 태풍이 우리 나라를 덮쳤을 때 나는 경남 남해의 한 마을에서 나의 여동생과 함께 집을 지키고 있었다. 그 때 나는 10살이었고, 나의 여동생은 7살이었다. 비가 억수 같이 쏟아지고 천둥이 쳐 나의 동생은 겁에 질렸고, 울면서 큰 집에 가신 할머니를 찾았기 때문에 나는 어린 동생의 손을 잡고 집을 나왔다. 그러나 평소 물장난이나 하던 조그만 개울은 물이 크게 넘쳐 길을 볼 수가 없었고, 나는 한 손으로는 내 동생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주위 집들의 벽을 더듬으며 큰 집을 찾아갔다. 그 때…. 만약 조금의 실수라도 있었다면 나는 나의 동생을 잃을 수 있었고, 나 역시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만약 내 동생에게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면 나는 평생토록 정신적인 고통 가운데 지냈을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와 보살핌 속에서 나는 그 때의 물난리에서 건짐을 받았고 지금까지도 사라호는 내 인생 최고의 공포로 남아있다.
<합동연감>에 따르면, 사라호의 피해 상황은 사망 528명, 실종자 304명, 부상 2,218명, 이재민 39만 명, 건물피해 121,537호, 선박전파 291척으로 집계되며, 전체 피해액은 129억 원으로서 이 당시 경제 규모로 볼 때 GNP(국민 총생산)의 5%에 이르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사라호는 우리 나라에 홍수 피해가 있을 때마다 길이 기억될 것이다.
나는 창세기에 있는 노아 홍수 이야기를 읽을 때 마다, 내가 겪은 사라호 충격을 늘 기억하게 된다. 물론 피해 상황을 보면, 사라호는 노아의 홍수에 비교될 수 없이 너무나 작은 것이었다. 노아의 홍수 때 비는 40일 간 내렸으며, 물이 온 세상을 1년 정도 덮고 있었다. 그렇지만, 피해 규모와 상관없이 <타이타닉>의 마지막 장면에서처럼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의 절망과 공포를 이 홍수 기사를 읽을 때 늘 실존적으로 느끼게 된다.
그러나 우리가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좀 더 자세히 보면, 여기에는 일반적인 홍수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주제들이 제시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의 홍수는 하나의 천재지변이지만, 노아의 홍수에는 더 깊은 윤리적이고 종교적인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노아의 홍수 이야기에서 우리는 가끔 노아를 주인공으로 생각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세상의 악과 죄인을 심판하기 위하여 홍수를 보내기로 결심하시고, 노아에게 방주를 만들라 하시고, 방주에 들어가라 명하시고, 방주에 있는 노아를 기억하시며, 노아로 하여금 방주에서 나가라 명하시고, 노아에게 다시는 홍수 심판 같은 것이 없을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즉 노아 보다 하나님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시다. 노아는 단지 조연에 불과하다. 물론 하나님의 조연이지만….
이 이야기는 세계 최고의 홍수를 통해 하나님의 속마음과 같은 생각과 뜻을 우리에게 들려주고 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인류 역사에 특별한 의미를 전해 주는 홍수 이야기이다. 옛날 옛적에 있었던 노아의 홍수 이야기가 오늘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를 생각하고자 한다.
1. 하나님의 홍수 심판 예고와 노아의 방주 건설(6:9-22)
1) 노아의 의(6:9-12)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라는 말씀으로 "아담 자손의 계보가 이러하니라"는 이야기가 일단 마무리되며(5:1-6:8), 창세기에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됨을 알려준다. 노아는 새 시대의 주인공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장차 방주를 타고 홍수의 혼돈과 공허를 건너 하나님이 새롭게 만드실 세계를 열어갈 자이다. 이리하여 나래이터는 노아를 그 시대의 사람들과 비교하며, 노아의 "의"(9-10절)와 "모든 육체의 폭력"을 강하게 대조하고 있다(11-12절).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9절)는 노아가 당시대의 사람들과 어떻게 다른지 세 가지 관점에서 그려준다. 노아는 세례 요한(막 6:20)과 시므온(눅 2:25)처럼 "의인"이었으며, 아브라함(창 17:1)과 욥(욥 1:1)처럼, "흠이 없이 완전하였고", 에녹처럼(창 5:22,24)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였다. 이 세 가지 성격은 구약성서가 바라본 한 신자의 이상적 모습이었다. 우리들은 자식들에게 "공부 잘 하라"고 날마다 타령하고 빌고 위협하지만, 구약의 신앙은 입신 출세를 지향하고 있지 않다.
(1) "노아는 의인"이라고 할 때 이것은 노아가 어떤 추상적인 도덕 규범이나, 윤리 규범을 완전히 지키고 있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그는 "하나님을 닮은 자"로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웃과 건강한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시 1, 15편). 노아는 바리새인처럼, 형식적 규범을 치밀하게 따르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을 닮아가고 있음을 말해준다. 또한 의인은 이 세상에서 고고하게 독선적으로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믿음의 공동체 속에서 살며 이웃에게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공동체를 세우는 자이다.
(2) "노아는 완전한 자"라고 할 때, 이것은 노아가 세상의 도덕과 윤리적인 잣대에서 어떤 절대적인 완전의 경지에 도달했다는 뜻도 아니며 죄가 없다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바치는 동물이 무흠한 것처럼 하나님 앞에 "흠이 없다"는 뜻이다(출 12:5; 레 1:3, 10; 3:1 등). 하나님께 온전히 바쳐질 수 있는 자라는 뜻이다. 하나님이 보실 때 노아는 "온전하며, 건전하고, 솔직한 모습"을 지녔음을 뜻한다. 따라서 하나님이 보실 때 노아는 사랑스럽고 친근감이 가며 자신의 비밀을 함께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사람이었다.
(3) "노아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라는 말은 노아가 왜 "의인"이며 "완전한 자"인지를 설명해 준다. 노아가 "의롭고 완전한 사람"이 된 것은 그가 머리가 좋아서가 아니며, 다른 사람보다 성품이 천성적으로 어질고 착하였기 때문도 아니다. 그도 보통사람이었지만, 늘 하나님의 친구로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을 즐겼으며, 하나님과 교통했기 때문에 노아는 점점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갔을 것이다. "의인"이요,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로서의 노아는 역사의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된다. 하나님께서 옛 세상을 버리시고 새로운 세상을 구상하실 때, 노아는 새 출발을 만드는 자가 될 것이다(고후 5:17).
노아의 "의"는 그가 살고 있던 세상이 어두웠기 때문에 더욱 빛났다. 그 당시 세상은 "부패하였고" 또한 "폭력이 만연하였다." 여기에서 "부패함"(개역, "패괴함")이란 단어는 다섯 번이나 나타나 철저하게 썩은 세상의 모습을 그려준다. 특히 이 단어는 옷이 더러운 상태를 묘사할 때 사용된다. 마치 모든 사람이 누더기와 걸레를 걸친 것처럼 방탕하고 더러워졌다. 귀부인들은 아름답고 비싼 옷을 걸치고 다니지만, 그 속은 부정부패로 물들어 마음이 더러워졌으며 진실이라고 강변하지만 화려한 거짓말 잔치만 벌이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그 당시의 세상은 "폭력"이 가득 찼다. 여기에서 "폭력"(hamas)은 강한 단어이다. 이것은 물리적인 완력 뿐 아니라 제도나 법이나 권력으로 한 사람이나 한 그룹을 침범하며 해를 가하고, 희롱하며, 약탈하는 것을 뜻한다(창 49:5; 신 19:16; 잠 16:29). 강자가 약자를 약탈하고 짓밟으며, 공동체가 붕괴되는 모습을 그려주고 있다. 힘이 있는 자들은 공의와 정의를 사랑으로 세워가야 했지만, 모두 물질과 권력에 눈이 어두워져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만을 이루기 위해 혈안이 되고 공동체를 질식시켜 가고 있었다.
이리하여 원래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으로 좋았던 세상(창 1:31)은 이제 전적으로 "썩었으며" 이 세상을 자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사람들과 그가 손수 만드신 짐승들로 가득 차길 원했지만(창 1:26-28) 오히려 "폭력배"와 "모리배"로 가득 차게 되었다. 달리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높은 기대를 가졌던 인간들이 그의 의도를 철저하게 배신하였다. 모든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바램을 무산시켰다. 이것은 후대 이스라엘의 비극이기도 하였다(렘 3:19, 20). 이리하여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는 금이 갔고, 둘 사이에는 돌이킬 수 없는 균열이 생기게 되었다.
"하나님이 보시니 정말 썩었더라"(12절)는 말씀에는 하나님의 슬픔과 고통이 묘사된다. 하나님의 파토스가 깊다. 그는 분노하는 독재자가 아니라, 아픈 마음을 가진 부모와 같이 자신이 이 세상에서 소외되었음을 아파하신다. 그는 비분강개하기 보다 슬퍼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묘사하는 참 하나님의 모습이시다. 그는 오래 참으시며, 인자하시며 연민의 정으로 가득 찬 분이시다(출 34:6).
2) 방주 건조 명령과 노아의 순종(6:13-22)
이 세상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부패와 폭력이 하늘에 닿았을 때, 하나님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세상의 악을 제거하시기로 결심하신다. 13절의 "멸하다"(mashitam)는 12절의 "부패하였다"(hishit)와 언어의 유희를 이룬다. 인류는 땅에서 부패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 썩은 부분을 도려내신다. 그 수술은 철저하다(창 13:10). 세상의 폭력 때문에, 하나님은 모든 육체의 종말을 선언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시지 않는다. 그는 노아에게 구원의 계획을 알리시며 노아를 통한 새 출발을 준비하신다.
(1) 홍수의 이유(13절)
이제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다. 홍수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연설(혹은 말씀)이 네 번 나타난다(6:13-21; 7:1-4; 8:15-17; 9:1-17). 그렇지만, 흥미롭게도 노아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노아가 한 첫 마디는 "가나안은 저주를 받을지어다"이다(9:25). 노아는 방주를 만들면서도 아브라함이 모리야로 갈 때처럼 침묵 중이다. 홍수 기사에는 하나님과 노아 사이의 대화도 없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노아는 시행한다. 그렇지만, 여기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부 정보를 주신다. 마치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의 운명에 대해 말씀을 주시는 것 같다. 그러나 아브라함과는 달리 노아는 항의하지 않는다.
(2) 방주의 규격(14-16절)
"방주"(teba)라는 단어는 구약에서 거의 독점적으로 노아의 배를 가리키는 데 사용되며, 단 두 번 모세를 담은 "광주리"를 가리킬 때 다시 사용된다(출 2:3, 5). 여기에 예표적인 의미가 있다. 즉, 노아와 그의 가족들이 물에서 건짐 받은 것 같이, 모세도 같은 운명에서 건짐 받았다. 모세의 구원체험과 노아의 구원체험이 유사하다. 우리도 이들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죽음의 물에서 건짐 받을 것이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방주"는 노아와 모세가 구원받기에 충분한 도구가 되었다.
우리는 노아의 방주를 짓는 나무(gopher wood)로 사용된 목재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잘 모른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단지 여기에만 한 번 나타나기 때문에, 확인하기 힘들지만 학자들은 "잣나무"(cypress)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배를 만들라고 명하신 것은 그가 배를 만드는 전문 조선사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가인은 도시를 세우고 그의 후손들은 농사, 음악, 동철 기술자였지만, 노아는 전문적인 조선사가 아니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그에게 배짓는 규격에 대해 구체적으로 말씀하신다.
방주의 크기는 약 450피트 길이와 75피트 넓이와 45피트 높이로 만들어진다(15절). 방주는 3층으로 만들어지며 여러 개의 방으로 다시 나누어진다. 16절에 따르면, 작은 문들이 여러 개 있었다. 이 창문으로 빛과 공기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지붕을 전체로 덮어 비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노아 방주의 모양은 현대의 배와 같지 않다. 또한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이야기에 나오는 우트 나피쉬팀의 배처럼 정사각형도 아니다(정방형 120규빗). 벤 우리(M. Ben-Uri)는 방주가 길고 납작한 상자로서 그 두 끝은 마름모꼴이라고 한다. 약 6,000톤의 무게로서 약 15,000톤을 실을 수 있는 배로 본다. 어떤 이는 노아의 방주가 퀸 엘리자베스 2호(Queen Elizabeth II) 보다는 작지만, 콜롬버스의 배들(Nina, Pinta, Santa Maria) 보다는 더 큰 것으로 본다.
(3) 홍수 선언(17절)
배의 모양이 어떠했든지 간에, 이 배는 8명의 사람과 수천 마리의 짐승을 살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하늘 아래에 있는 모든 생물이 다 죽을 때, 그 안에 있는 사람들과 짐승들은 목숨을 건진다.
(4) 하나님과 노아의 언약(18-21절)
홍수가 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내가 내 언약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신 것은 너무나 돌발적이다. 우리는 이 앞에서 "언약"이란 단어를 본 적이 없다. 물론 하나님과 아담 사이에는 분명히 "언약"이 있었을 것이다. 아담은 제사장으로서 에덴 동산을 지키고 가꾸는 자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계명을 깨뜨리고 언약은 파기되며 하나님의 저주가 그들과 땅에 임했다. 이제 하나님은 노아와 "내 언약을 세우겠다"고 말씀하신다. 우리는 이 언약의 내용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렇지만 이 하나님의 헌신은 홍수 후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언약을 맺은 것(창 9:8-17)이 결코 우발적이 아님을 보여준다. 노아의 관점에서 보면, 그는 홍수가 끝나자 비로소 이 언약의 의미를 이해했을 것이다(9:8-17). 그렇지만, "내가 내 언약을 세우겠다"는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이 분명할 것이다.
노아의 방주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은 짐승들도 포함한다(19절). 대표적인 암수 짐승들이 완전한 구원을 얻는다. 노아는 모든 짐승을 각기 한 쌍씩 방주로 들인다. 여기의 한 쌍은 최소수를 가리킨다. 그러나 모든 짐승들은 자발적으로 노아에게 나아온다. 그가 짐승들을 잡으러 다니지 않는다. 그들이 본능적으로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왔든지 혹은 하나님의 특별한 역사였을 수 있다.
(5) 노아의 순종(22절)
방주를 만드는 데 하나님은 아주 세밀한 지시를 하며, 노아는 빈틈없이 순종하고 있다. 이것은 성막을 만드는 기사에서도 마찬가지이다(출 25-39장). 즉 노아나 모세는 "모든 뜻"을 다해 순종하였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되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하였더라"(6:22).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모습에 대한 틸리케의 관찰이 흥미롭다. "날씨가 그렇게 청명했을 때, 노아는 방주를 지으라는 명령을 받는다. 예언자들과 정치가들은 태평성대를 예언하였다. 이때 노아는 마른 땅 위에 방주를 만든다. 밤이 되면 청춘 아베크들이 이 이상한 배를 보려고 산책 나왔다. 별난 늙은 성자를 조롱하였다."
노아도 방주를 지으면서 고민하였을까?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합리성도 갖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노아는 "마른 땅의 선박의 제독"으로 놀림받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노아는 하나님의 경고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는 자였다. 아무리 하나님의 말씀이 상식 선에서 벗어나 있다 하더라도 순종한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이루어야 할 이상이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즉각적인 순종을 하는 백성이어야 했다.
사람들은 하늘의 구름이나, 폭풍이 오는 것을 보고 배를 지으려고 하지만, 그 때는 이미 늦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일찍부터 순종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노아의 믿음은 자라는 믿음이었다. 우리는 임종의 순간에 즉각적으로 믿어 구원받는 것을 생각하지만, "어떻게 씨앗을 뿌리고 동시에 거기에서 열매를 거둘 수 있겠는가?" 노아는 봄에 씨를 뿌리고 가을에 추수하는 믿음의 비밀을 아는 자였다.
2. 악인의 멸망과 의인의 구원(7:1-24)
1) 방주로 들어가라는 명령(7:1-5)
(1) 노아의 의(1절)
저자가 앞에서는 노아의 온전함을 소개했는데(6:8, 9, 22), 이제 여기에서는 하나님께서 친히 노아를 소개하신다(여호와께서 노아에게 이르시되 너와 네 온 집은 방주로 들어가라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보았음이니라-1절). 이 구절은 6장 5절, 6장 12절과 강한 대조를 이룬다. 하나님이 두 곳에서 뭔가를 "보신다" 앞에서는 세상의 악과 부패를 보시고, 여기에서는 땅에 있는 한 명의 의인을 보신다. 두 번째로 노아는 "의인"으로 소개된다. 그는 당대의 모든 사람들과 대조된다. 이 반복을 통해 저자는 "악인의 심판과 의인의 구원"이라는 기본적인 신학적 모티프를 강화해 간다.
(2) 정결한 짐승 보존 명령(2-3절)
이제 노아는 수많은 조롱 속에서 방주를 완성하였다. 그가 방주 안으로 들어가기 전에, 하나님은 노아에게 최종적이며 보다 세부적인 가르침을 주신다. 앞에서는 짐승의 한 쌍을 말씀하셨는데, 이제는 암수 일곱 쌍을 데리고 가라고 명하신다. 우리는 이런 차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문서가 다르다고 하지만, 앞에서의 한 쌍은 최소수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또한 여기의 "일곱"이 문자 그대로 "일곱 쌍"인지 혹은 "여럿"인지도 분명치 않다(삼하 2:5; 왕하 4:35; 뒤에 나오는 7:13-14 주석을 보라). 여기에서 정한 짐승이 더 많이 필요한 이유는 홍수 이후에 그들이 스스로 번성해야 할 뿐 아니라, 번제로 사용되어야 되었기 때문이다(창 8:20).
(3) 하나님의 홍수 예언: 홍수 7일 전(4절)
노아는 한 주 전에 경고를 받는다. 여기에서 "비를 내리다"는 계절 비를 가리키며, 맹렬한 소나기가 아니다. 이 폭우가 무서운 이유는 40일 간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의 숫자는 문자적일 수 있고 또 비유적일 수 있다. 문자적으로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을 지내며(출 24:18), 예수께서 사십 일을 금식하신 것처럼 비가 40일 내렸다(마 4:2). 비유적으로 본다면, 노아가 "사십 주야" 동안 폭우 속에서 산 것 같이(7:4), 후에 이스라엘은 40년 간을 광야에 산다. 이렇게 보면, 여기의 40주야는 이전에 한 번도 없었던, 가장 파괴적인 기간으로 제시된다. 폭우와 광야는 같은 이미지를 지닌다(창 1:2).
"나의 지은 모든 생물을 지면에서 쓸어 버리리라"고 주님은 심판 말씀을 반복하신다(6:7). "쓸어 버리리라"(mahah)는 단어는 강하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하신 최후의 말씀이다. 그는 약 1년 후 홍수가 끝나자 다시 "방주에서 나오라"고 말씀하신다.
(4) 노아의 순종(5절)
다시 한번 더 노아의 순종이 강조된다(5절). 저자는 지치지 않고 노아의 순종을 부각시키고 있다. 노아의 삶은 "침묵"과 "순종"으로 특징지어진다. 박윤선 목사님께서 늘 말씀하신 "침묵정진"이 노아의 삶이었을 것이다.
2) 홍수(7:6-24)
저자는 방주에 들어가는 자들에게 관심을 갖고 있다. 그는 노아의 나이, 비가 오던 달과 날, 물이 어디서 나오는지, 동물의 종류와 수를 말한다. 그는 노아의 구원에 중심 관심을 갖고 있다. 이 기사의 마지막 부분으로 와서야 비로소 방주로 피하지 않았던 자들의 운명을 언급한다. "그들은 다 죽었더라"(7:22). "이들은 땅에서 쓸어버림을 당하였으되 홀로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던 자만 남았더라"(7:23).
(1) 홍수 시작과 40일 주야 동안 비가 땅에 쏟아짐(6-12절)
이제 하나님께서 파국적인 심판을 집행하신다. 모든 죄인의 세대를 다 죽게 하여, 다음 세대로 장차 올 하나님의 분노에 대한 경고를 받게 한다. 방주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께서 안전하게 닫아 넣으셨고, 방주 밖에 있는 자는 모두 죽었다. 노아는 새 시대를 향하여 심판의 물결을 가르고 항해한다. 홍수의 파국으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해 가지신 뜻은 노아를 통해 이어질 것이다.
(2) 주께서 방주의 문을 닫으심(13-16절)
노아가 방주 안으로 들어가자 갑자기 "여호와께서 그를 닫아 넣으시니라"(16절)고 말한다. 그 동안은 "하나님"이 계속 주어로 나타났는데(6:12, 13; 7:9; 8:1 등), 왜 갑자기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가 여기에 나타나는가? 저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바꿈으로써, 창조주 하나님은 노아에게 명하시지만, 구속주 여호와는 노아 방주의 문을 닫아주시고 그를 보호하심을 강조하고 있다. 정통적인 문서설에 따르면, 노아가 방주 안에 들어간 것을 묘사하는 두 개의 중복된 기사는 다른 문서에서 나왔다고 한다(7:7-9[P]; 16-16[J]; 조화선, 이용걸 편 <성서와 함께> 128-9쪽을 보라). 그러나 케슬러(Kessler)는 이 둘 사이의 유사성을 잘 제시한다.
① 두 기사 모두 동물들을 네 개의 범주로 나눈다.
② "정과 부정"은 두 곳에서 모두 반복되며, 제사문서의 전형적인 표현인 "암수" 역시 두 기사에 다 사용되고 있다.
③ 두 기사는 동물들이 "노아에게로 오다, 방주로"라는 표현을 사용하며, 순종 형식으로 마 무리 된다.
④ 두 번째 기사는 첫 번째 기사 보다 더 상세하게 발전되며, 정확하게 헤아리고 있음을 보 여준다.
⑤ 두 기사는 모두 소위 "제사 문서"(P)로 여겨지는 창세기 1장의 어휘들, 즉 "땅"(1:25), " 짐승"(24절), "암수"(27절), "종류"(12절), "기는 것"(24절)들을 문자 그대로 빌려온다.
⑥ 이 두 기사는 열거형식의 문체를 따른다.
따라서 두 기사는 서로 상충적인 것이 아니며, 저자가 "의도적인 변화"를 시도한 것으로 본다. 그는 유사한 기사를 번갈아 가며, 중복하여 씀으로써 마치 히브리 시의 특징인 평행법을 따라 진술해 가는 것 같다(Kessler, "Rhetorical Criticism" 8-9).
(3) 40일 간의 홍수와 산들이 다 잠김(17-20절)
노아와 그의 식구들이 방주 안으로 들어가자 말자, 무서운 홍수가 터진다.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방주 안에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으며, 방주 밖의 상황만 묘사되고 있다. 저자는 폭풍과 폭우가 쏟아지지만, 방주는 침몰하지 않았음을 관찰하고 있다(18절). 노아는 바벨론의 홍수 기사에서처럼 항해사를 태우고 있지 않다. 그는 식구들만 태웠고, 항해를 위한 장비도 없었다. 노아가 살아날 수 있다면,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였을 것이다. 물은 높은 산을 모두 덮었고, 또 물이 더 불어나서 15규빗, 즉, 45피트 더 높아졌다(19-20절). 모두 죽을 수밖에 없었다.
(4) 모든 생물들이 다 죽음(21-23절 상)
저자는 모든 짐승들이 다 "망하고, 죽고, 쓸어버림을 당하였다"고 한다. 홍수는 너무나 방대하고, 너무나 오래 지속되었다. 하나님께서 처음에 모든 짐승에게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창2:7). 이제 세상은 원죄로 저주를 받았고, 자범죄로 모두 심판을 받는다. 사람들의 죄의 무서운 영향으로 모든 짐승들이 다 죽는다.
(5) 오직 노아 식구들만 생존함(23절 하)
반복을 통해 저자는 자신의 메시지를 명료하게 한다. 홍수에서 살아남은 자는 "주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자들이었다(6:22; 7:5, 9, 16).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구원의 길이다. 여기에서 노아는 순종과 구원의 모범이 된다. 후에 아브라함(창 21:4)과 이스라엘 사람들(출 12:28)도 같은 교훈을 따르라고 말한다.
(6) 물이 150일 동안 땅에 넘침(24절)
어디를 보아도 물 밖에 보이지 않는다. 노아는 다섯 달 동안이나 방주를 타고 다닌다. 이 기간동안 그와 그의 가족들은 마른 땅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방주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옛 친구들을 그리워하였을까? 그들은 홍수를 보내신 하나님의 심판이 정당하다고 믿었을까? 그들은 어떤 구원의 희망을 가졌을까? 이 세상은 정말 끝장인가? 아니면 새로운 출발이 있을 수 있을까? 새 출발의 기회가 온다면, 정말 새롭게 살 수 있을까?
3. 명상
우리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를 읽으면서 뭔가 새로운 것들을 찾으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마지막까지 다 읽고 보면 이 이야기도 성경의 다른 이야기들과 별로 다를 바 없이 같은 패턴 속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사람들은 타락하고 하나님은 후회하시고 세상을 심판하려고 결심하시며 노아를 선택하시고 그와 그의 식구들과 여러 짐승들을 궁극적으로 구원하신다. 이런 긴 과정은 성경의 어느 이야기에나 나타나는 패턴처럼 느껴진다. 방주를 만드는 과정에 있어서도 저자는 길고도 상세하게 그 규격을 지루하게 묘사하며 노아가 600세 되던 해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그치지도 않고 150일 동안이나 온 세상을 덮어 가는 과정을 지루하게 묘사해 가고 있다.
"왜 저자는 이렇게 도 지리멸렬하게 홍수 심판의 과정을 묘사했을까?" 현대의 성급한 독자들은 온 세계가 철저하게 망하고 소수의 사람들과 다수의 짐승들이 1년 동안이나 방주 속에 갇혀 사는 이야기조차 단숨에 읽어 버리려고 하는 유혹을 받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오히려 저자는 이 깊은 지루함과 적막 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기다리는 믿음을 우리에게 키워주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노아의 홍수 이야기 2
김정우
1. 하나님의 홍수 심판 예고와 노아의 방주 건설(6:9-22)
2. 악인의 멸망과 의인의 구원(7:1-24)
3. 물의 빠짐과 노아의 제단(8:1-22)
4. 노아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9:1-17)
5. 홍수 후 노아와 그 아들들의 이야기(9:18-29)
6. 노아 홍수의 성경신학적 의의
3. 물의 빠짐과 노아의 제단(8:1-22)
온 세계를 뒤덮은 홍수의 물결에 끝 없이 떠밀려 가고 있던 노아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인류의 첫 문명이 바다에 묻히고, 모든 역사가 난파한 정황 속에서 노아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영원한 제국을 꿈꾸며 폭력으로 사회를 물들이던 "하나님의 아들들"과 자신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던 "사람의 딸들"이 홍수에 휩쓸려 갈 때 노아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을까? 수 천, 수 만의 세대들과 여인들과 어린아이들이 무참하게 죽어갈 때 노아는 무엇을 생각하였을까? 노아는 처음으로 세계의 종말을 경험하며, 고요한 절망감 가운데 있었을까, 혹은 믿음 가운데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바라보고 있었을까? 노아는 폭풍우와 굼실거리는 거대한 파도 속에서 온 세계의 파멸을 보며 베드로처럼 허무의 심연에 빠지며 허우적거렸을까, 혹은 주님을 바라보고 다시 한번 바다 위를 걸어가는 베드로처럼 당당하게 노 저어가고 있었을까?
1) 전환의 축(8:1 상)
우리는 노아의 생각은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기억하셨다"라는 말씀을 듣자말자, 하나님의 생각을 갑작스럽게 듣게 된다. 이 미친듯한 폭풍우 속에서도 하나님은 생각하고 계셨고, 구체적으로 노아를 생각하셨다. 이 말씀은 홍수 이야기 전체의 전환점이 된다. 하나님의 기억으로 역사는 새롭게 움직인다. 하나님의 마음이 노아를 향해 움직이면서 방주의 방향도 새롭게 움직인다. 구약 성경에서 "기억"은 항상 "행동"을 뜻한다. 왜냐하면 마음이 움직이면 행동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기억은 본질적으로 어떤 사람에게 하신 이전의 헌신 때문에 그를 위해 행동하는 것을 항상 의미한다"(B. S. Childs).
이사야 선지자는 "여인은 그 젖 먹는 자식을 잊을 수 없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한다(사 49:14). 그러나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신다(15절).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자식을 유기하는 수많은 경우들을 본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인들은 경제적인 이유와 자신의 인생 목표를 위해 자녀들을 쉽게 유기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자기 백성을 잊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라헬을 기억하셨을 때, 그녀는 요셉을 낳게 된다(창 30:24).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기억하실 때, "은혜로" 기억하신다(느 5:19; 13:31). 주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실 때 폭풍은 멎었고, 그의 가족 뿐 아니라, 방주에 있는 모든 짐승들이 구원을 받는다(행 27:24 참조).
2) 물이 줄어 듬(8:1 하-5)
바로 앞 장에서는 물이 계속 불어나는 장면이 묘사되었다. "물이 많아져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으며"(7:17), "물이 많아져 방주가 떠 다녔으며"(7:18), "물이 많아져 산들이 덮였으며"(7:19), "물이 많아져 15규빗이 올라 산들이 덮였다"(7:20). 결과적으로 "생물이 종류별로 다 죽었으며"(7:21), "코로 숨쉬는 생물이 다 죽었으며"(7:22), 다시 "종류별로 다 죽고"(7:23상), "모두 죽었다"(7:23 중). "오직 노아와 방주에 있던 자들만 남았다"(7:23 하). 여기에 4중적인 "모두"와 "오직 노아"의 대조가 강하게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기억하자 말자 "바람으로 땅 위에 불게 하시고 물이 줄어들게 하신다"(8:1 하). 이것은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홍해를 건넌 사건의 원형을 이루어 준다. 주님은 "자신의 언약을 기억하시고"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나오게 하시며(출 2:24), "강한 동풍을 보내어 홍해의 물을 말리셔서, 백성들로 마른 땅을 걷게 하셨다"(14:21-22). 홍수가 끝나고 마른 땅에 발을 디디는 노아의 모습은 이후에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너는 이스라엘의 모습과 같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이 세례를 받으며 죽음을 경험하고 물에서 나와 부활의 생명을 누리는 것과 동일한 경험을 말해준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자 말자 "깊음의 샘과 하늘의 창이 막히고, 하늘에서 비가 그친다"(2절). 하나님께서 비가 그치게 하시니 비가 주님에게 순종한다. 홍수도 해일도 주님의 손에 있다. 그러나 노아는 더 기다려야 했다(3절). 노아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기 위해 인내해야 했다. 그는 150일을 더 기다려야 하였다. 신앙생활은 이렇게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바라보며 기다리는 것이다. 때로는 우리도 노아처럼 아무 대책도 없이 기다려야 한다. 엘리야도 하늘에서 비가 오기를 간절히 기도하면서 기다린다. 엘리야는 자신의 제자를 "일곱 번이나 갈멜산 꼭대기까지" 올라가고 또 올라가라고 명한다. 그는 "손바닥 만한 조그만 구름을 보기까지" 인내하며 기다리고 기도한다(왕상 19:14).
드디어 홍수가 시작된지 일곱째 달이 되자, 방주는 아라랏 산에 머문다(4-5절). 물은 점점 줄어 노아의 나이가 600세 되던 해 10월 1일에 산들의 봉우리가 그의 눈 앞에 드러났다. 아라랏이란 지명은 후대 앗시리아 시대에 우라르투(Urartu)로 알려진 곳이다(사 37:38; 렘 51:27). 이곳은 거대한 산악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메소포타미아 북쪽 지역과 터키 동부 지역과 유프라테스의 상류를 이루는 지역과 반 호수(Lake Van)와 우르미야 호수(Lake Urmia)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Youngblood 103). 아마 노아 방주는 북쪽 우라르투 지역보다 남쪽에 안착하였을 것 같다. 현재 지명으로 '아라랏' 산은 러시아 경계지역에 있는 터키의 북동쪽에 있다. 방주가 산에 도착하자 말자, 노아의 마음은 얼마나 설레고 흥분되었을까? 그는 "홍수를 보내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었고, 사람들의 조롱 가운데 방주를 지었고, 이제 노아와 그의 모든 식구들 뿐 아니라, 모든 짐승들까지도 드디어 땅에 도착하였다. 배가 산에 닫는 그 착지감은 그에게 큰 위안이 되었을 것이다.
3) 땅이 말라 감(8:6-14)
그러나 노아는 다시 40일이 더 지나 비로소 방주의 창문을 연다(6절). 앞에서 홍수 직전에 "여호와께서 노아를(방주에) 닫아 넣으셨다"고 말했다(7:18). 따라서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 문을 열고 나올 수 없다. 그러나 그는 "창문은 열 수 있었다." 노아는 이제 창문을 열고 방주 밖을 내다본다. 그는 하나님께서 방주를 떠나라는 명령이 있을 때까지 방주 안에서 기다려야 했다(8:15-17). 방주 안에 있는 자들은 아직까지 안전하지만, 완전한 구출을 받은 것은 아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이 마른 땅을 딛기까지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8:14).
노아는 창문을 열고 물이 얼마나 줄었는지 알아보기 위해 까마귀와 비둘기를 계속 보낸다. 이것은 방주 안에서 홍수가 끝나기를 조급하게 기다리는 노아의 모습을 보여준다. "물이 왜 이렇게 빨리 줄어들지 않는가?" 하고 노아는 조급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진흙탕의 땅을 함부로 다닐 수가 없다. 드디어 비둘기가 감람나무 새 입사귀를 가져왔을 때(10-12절), 노아는 감격하였다. 땅에 새로운 생명의 움이 돋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아는 더 기다린다(10, 12절). 땅이 완전히 마르자, 비둘기는 돌아오지 않았다(12절). 홍수기사의 저자는 노아가 정확하게 1년을 방주 안에서 지내며 기다렸다고 한다(7:6, 11; 8:13-14). 얼마나 지루하고 고적한 시간이었을까?
4) 방주를 떠나라는 하나님의 명령(8:15-19)
노아가 601살 된 첫 달 초하룻날에 드디어 "지면에서 물이 걷히고"(13절), 그 다음 달 27일이 땅이 완전히 마른다". 이 때 주님은 1년 동안의 긴 침묵을 비로소 깨뜨리시고, 노아와 그의 가족들에게 방주에서 "나가라"고 명하신다(8:15-16). 너무나 모처럼 하나님의 음성이 노아에게 들렸다. 노아는 얼마나 깊은 감동을 받았을까. 주님은 노아에게 "모든 식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라"고 명하신다(15-17절).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을 듣자 말자 방주를 나온다(18-19절). 다시 한번 여기에 하나님의 "명령"과 노아의 "순종" 패턴이 나타난다. 노아는 믿음의 조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즉각적으로 받들고 따른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방주를 만들라" 하면 "만들고" 방주 안으로 "들어가라" 하시면 "들어가고" 방주에서 "나오라" 하시면 "나온다." 노아는 세밀한 부분까지 완전한 순종을 하고 있다.
여기에 제시된 노아의 순종은 후에 아브라함의 순종과 완전한 일치를 이룬다. (1) 하나님의 말씀이 노아에게 임한 것 같이(8:15), 아브라함에게 임하였다(12:1 상). (2)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에서 나오라"고 명하신 것 같이(8:16), 아브라함에게는 "네 땅에서 나오라"고 명하셨다(12:1하). (3) 노아가 방주에서 나온 것 같이(8:18), 아브라함은 하란을 떠나 나온다(12:4). (4) 이 직후에 노아가 제단을 쌓은 것 같이(8:20), 아브라함이 제단을 쌓았다(12:7). 믿음의 사람 노아와 아브라함 사이에 있는 유사성은 모든 믿는 자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즉각적으로 따라야 함을 보여준다.
5) 노아의 제단과 하나님의 결심(8:20-22)
(1) 노아의 제단(8:20)
노아는 지난 365일 동안 배를 타고 홍수 속에 살았다. 이제 그는 수중 생활을 마치고 지상 생활로 다시 돌아온다. 노아는 막막했을 것이다. 배에서 내린 감격도 잠깐이고, 너무나 낯선 땅에서의 새 삶을 어떻게 꾸려야 하는지 당황하였을 것이다. 그가 옛날에 살았던 땅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새로 발을 디딘 땅에서 해야 할 일도 너무 많았다. 방주 안에서 눅눅하게 젖은 물건들을 내려 놓고 말리며, 가구들을 새롭게 만들며 살 집을 준비해야 했다. 양식과 물과 거처를 마련해야 하므로 정신이 없었을 것이다. 방주에서 나오는 병든 짐승들을 보살피고, 연약한 짐승들의 살 곳도 마련해 주어야 했다.
그러나 노아는 우리의 예상과는 달리 하나님께 제사드릴 제단부터 쌓는다. 자신의 집을 짓기 전에 하나님에게 예배드릴 장소를 먼저 마련하고 있다. 이것이 노아의 진정한 모습이었다. 그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자신의 삶의 중심에 둔다. 새로운 역사는 제단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새출발을 해야하는 인류의 미래는 하나님께 쌓는 제단에 기초해야 한다고 그는 믿고 있었다.
노아의 제단은 성경에서 처음 나타나는 제단이다. 이후에 노아의 모범을 따라 아브라함(12:7; 13:18), 이삭(26:25), 야곱(33:20; 35:1)이 어디로 가든지 먼저 제단을 쌓는다. 노아의 모범이 그의 영적인 후손들을 통하여 계승되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직업과 사업과 학업과 결혼과 가정이 우리의 모든 일들에 있어서 최우선을 차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노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최우선에 둠으로써 진정한 믿음의 길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노아는 정한 짐승을 가지고 홍수 후에 번제로 제사를 드린다(8:20-21). 노아는 자신의 가축 중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골라 산 채로 태워드린다. 최고의 제물이 아니면, 참된 제물이 될 수 없다. 주님께서는 믿음으로 바치는 노아의 제물을 받으신다(8:21; 레 1:7). 아마 여기에서 노아는 감사제의 성격을 띤 번제를 드린 것 같다. 세계적인 대홍수의 파국에서 노아와 그의 모든 식구들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체험했기 때문에 감사 제사로 보답한다. 이리하여 홍수 후에는 노아를 통해 예배하는 영적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새 날의 모습이 그 윤곽을 드러내기 전에, 새 날의 계획을 정하기 전에 노아와 같이 제단을 쌓지 않는 사람, 그의 제단을 쌓지 않고 성서의 한마디 말씀도 읽지 않은 채 슬그머니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 그러한 사람은 '사악한' 사업가, '사악한' 아버지, 또는 '사악한' 어머니로서 하루를 시작하는 자들이다"(헬무트 틸리케).
하나님은 노아의 번제를 "향기로 받으신다"(8:21). 노아의 번제는 하나님에게 "향기로운 제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바친 제물은 장차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준비하신 완전한 제물에 대한 그림자에 불과하였다. 이후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를 가리켜 하나님께 바쳐진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이라고 말한다(엡 5:2). 그리스도의 인격과 삶과 뜻과 생각이 모두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이었다. 즉 제물은 단지 물건이나 짐승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인격이다. 따라서 바울은 우리가 "거룩한 산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지도록 권한다(롬 12:1). 바울이 로마의 감옥에 있을 때, 빌립보 교인들이 그에게 보낸 헌금이 "향기로운 제물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으로 여겨진 이유는 그들이 사랑과 따뜻한 마음을 다하여 그를 도왔기 때문이다(빌 4:18).
(2) 하나님의 결심(8:21-22)
홍수가 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방주로 들어가라"고 직접 말씀하셨다(7:1). 이제 여기에서는 독백의 형식으로 두번째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그 중심에 이르신다"('amar 'el libbo). 즉 "마음으로 속으로 다짐하셨다"(<공동역>, <표준새번역>). 홍수 전에 하나님은 인간의 폭력성에 대해 깊이 근심하셨다(6:6). 다시 한번 저자는 "하나님의 마음"을 언급함으로써, 홍수의 시작(6:5-8)과 끝 부분(8:20-22)을 연결하고 있다. 이제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에 대해 두 가지 결론을 내리신다.
첫째로, 하나님은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하신다(8:21). 앞에서 하나님은 사람들의 죄와 악 때문에 홍수를 보내셨다(6:5). 이제는 사람의 죄 때문에 땅을 멸망시키지 않겠다고 선언하신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의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하기 때문이다." 사람 마음이 "악하다"는 것은 우리가 말하는 "착하지 않다"든가, "친절하지 않다"든가, "부드럽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 속에는 인간 자신과 공동체를 스스로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없다는 말이다. 인간은 결국 자신을 죽음으로 이끄는 이기심과 배타심에서 벗어날 수 없다. 달리 말하자면, 홍수의 공포조차도 인간의 마음을 바꾸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좌절한 듯한 모습이다. 아무리 무서운 심판이 와도 인간은 변하지 않고, 본성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거스린다.
둘째로, 하나님은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고 선언하신다(22절). 여기에는 계절의 순환을 추수(심음과 거둠), 온도(추위와 더위), 계절(여름과 겨울)의 세 쌍으로 표현하고 있다. 홍수 기간 동안 이 모든 변화가 깨어졌지만, 이제 새롭게 재개될 것이다. 마지막 쌍을 이루는 "낮과 밤"이 여기에 나타나는 것이 이상하지만, 홍수 기간 동안 밤낮을 구별할 수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하루하루의 정상적인 순환이 이루어질 것을 말하고 있다.
날과 계절의 순환을 보장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은 왕의 칙령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대왕으로서 자신의 백성들에게 인내하실 것이며, 자신의 세계를 지속시킬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반역 때문에, 창조계를 향한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의 죄악이 아무리 깊고 심해도, 하나님께서는 창조계를 자신의 뜻대로 유지할 것이며 종말론적인 완성을 이루실 것이다. 홍수 보다 더 큰 재앙이 없었는데도 사람은 바뀌지 않았다면, 무엇으로 바뀔 수 있겠는가?
창조계를 유지하겠다는 하나님의 헌신 때문에, 이제부터는 시간과 계절이 역사 끝까지 지속될 것이다. "주야의 언약과 천지의 고정된 법은 끊어지지 않을 것이다"(렘 33:25). 그러나 여기에서는 땅에 대한 전반적 저주가 해제되었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창 3:18). 또한 이 절은 구원사적 대전환을 말하고 있지도 않으며(contra 김이곤), 단지 홍수를 통한 세계적인 파국은 피하겠다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말하는지는 다음 장( 9:1-17)에서 상세하게 확대되어 설명된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창조계를 유지할 결심을 하셨다. 그러나 여기에서 그의 결심은 더욱 강화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헌신의 댓가가 커진다. 자신의 피조물에 대해 고통을 느끼시는 하나님과 반역적인 세상과의 갈등 관계가 이제 시작되었을 뿐이다. 이 둘 사이의 긴장 관계에서 변해야 할 쪽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시다. 이것이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핵심을 이룬다(롬 3:25).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하시는 하나님의 의는 심판으로서가 아니라, 인간들이 믿을 수 없는 사랑과 연민에서 나올 것이다.
4. 노아와 맺은 하나님의 언약(9:1-17)
이제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해 온 인류와 새로운 언약을 맺으신다. 9장에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 네 번에 걸쳐 주어지고 있다(9:1, 8, 11, 17). 주님께서는 세 번 노아와 그의 후손들에 관하여 말씀하시며(1-7, 8-11, 12-16), 끝으로 노아에게만 친히 말씀하신다(17절).
노아의 언약 이야기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9:1-7; 9:8-17). 각 단락은 각자의 메시지를 가지지만, 홍수를 마무리하며 홍수 후의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인지 소개해 준다. 첫째 단락은 홍수에서 건짐받은 생물들을 하나님께서 복 주시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두번째 것은 홍수가 다시 없으리라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헌신을 다시 한번 더 천명해준다.
1) 홍수 후의 새 질서(1-7절)
이제 홍수는 완전히 끝나고 인류의 새로운 역사가 시작된다. 창세기의 저자는 홍수 이야기를 멀고 먼 태고의 이야기로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세계와 우리의 세계 속에서 말하고 있다. 즉, 홍수 후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홍수 전의 세계와 후의 세계는 얼마나 다르며, 삶의 질서는 어떻게 짜여질 것인가? 홍수로 말미암아 변화된 상황에서 저자는 세가지의 중심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1)하나님은 여전히 인간이 번성하길 원하시는가? (2)장차 사람과 동물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어야 하는가? (3)장차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있어서 폭력의 한계는 어디까지 제한되어야 하는가?
첫째로, 사람은 이 땅에서 번성하여야 한다(9:1, 7).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생육하고 번성하라"(창 1:28)는 하나님의 첫 명령은 여전히 유효하다. 온 땅을 가득 채우라는 창조의 명령은 여기에서 두 번이나 반복되며 수미일치를 이룬다.
둘째로, 모든 생명의 존엄성은 보전되어야 한다(9:2-4). 사람과 동물의 관계는 에덴 동산에서와 같지 않을 것이며, 짐승들은 사람들을 두려워 할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는 인간에게 육식에 대한 허락 없이 채식만 언급되었다. 홍수 후에는 육식을 먹을 수 있도록 범위가 확대된다. 그러나 모든 짐승들의 생명의 존엄성이 무시되어서는 안된다. 육식은 짐승을 죽이는 행위를 전제하기 때문에 생명을 소홀히 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렇게 되면 땅은 다시 폭력과 무질서로 뒤덮힐 것이다(6:11-13). 그러므로 하나님은 피채 먹지 말라고 규정하시며, 육식에 대한 허용과 생명의 존엄성 유지를 균형 있게 시행하도록 하신다. 이제 사람들은 고기를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의 근원이 되는 피를 먹어서는 안된다(레 17:11). 피는 "물처럼" 쏟아야 한다(신 12:16, 24; 15:23). 달리 말하자면, 인간의 통치는 무제한적이 아니다. 인간들이 세상을 다스릴 때 생명의 신성함을 존중해야 한다. 동물의 생명은 인간의 생명과 밀접한 연관을 가진다. 짐승들의 생명의 존엄성이 약화될 때, 인간 생명의 존엄성도 약화될 것이다(곰의 쓸개에 빨대를 넣고 빨아 먹으며 보신관광을 하는 자들은 지옥에 갈 것이다. 짐승을 도축할 때에도 엄격한 격식을 따라 고통 없이 죽도록 해야 한다. 모피 코트를 좋아하는 자는 옷로비에 걸려 다 넘어질 것이다.--필자 생각).
셋째로 인간 상호 간의 폭력은 금지되어야 한다(9:5-6). 홍수 이전 세상은 폭력과 복수로 가득 찼으며 창조계에 평화가 없었다. 바로 이 폭력과 무질서 때문에 하나님은 홍수를 보내셨다(6:13). 하나님은 인간에 대한 폭력을 가장 끔찍하게 생각하신다. 아담의 타락 후에도, 노아의 홍수 후에도, 사람은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이다(9:6).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인간은 여전히 통치의 책임과 능력을 갖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마음에 고통을 주는 자이지만(8:21 하),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갖고 있는 자로서 존엄성을 가진다.
따라서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에 대해 주권을 가지신다. 사람의 목숨은 하나님의 것이며, 그 누구도 함부로 빼앗을 수 없다. "인간들은 참으로 하나님의 돌보심을 받을 자격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그들 안에 새겨진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이 파괴될 때 자신이 파괴된다고 생각하신다"(칼빈, <창세기주석> 295쪽).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궁극적인 가치를 무조건적으로 부여하신다(마 6:32).
창세기 9:6 하반절 말씀은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너무나 강하다. "피를(A') 흘리는(B) 그 사람은(C) // 사람이(C'), 흘리게 될 것이다(B') 그의 피를(A'). 이리하여 무죄한 "피 흘림"(A:A')이 인간 사회에서 허용되어서는 안됨을 강하게 말한다. 살인은 살인자가 죽음으로써 속죄되며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치 될 수 없다. 살인죄는 속전으로도 만족될 수 없다(민 35:31 참조).
그러나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직접 살인자를 심판하시겠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 공동체가 하나님의 뜻을 집행하는 자가 될 것이다. 세상이 혼란스러워도, 하나님이 물러서서 관망하지 않을 것이며 인간 사회 속에 간섭하셔서 재판의 질서를 세우시며 공의가 시행되도록 할 것이다. 많은 경우 이 절은 사형제도를 옹호하는 구절로 이해되어 왔다. 출애굽기 21:12과 신명기 17-19에도 고대 이스라엘에 사형제도가 있었음을 말해준다. 그러나 신명기조차도 사형은 엄격히 제한된다. 살인자를 위해서 도피성이 세워지며, 그가 정당한 재판을 받기까지 피의 복수자로부터 보호받도록 한다(신 19). 또한 살인죄에 대한 확증은 항상 두 세명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한다(신 18:15).
2) 무조건적인 노아 언약(8-17절)
(1) 생명 보전의 약속(8-11절)
이전에 주님과 노아 사이에 맺어진 언약(6:18)이 이제 자세히 소개된다. 앞에서는 주님께서 "내 언약을 너와 함께 세운다"고 말씀하셨으며, 이 언약의 성격이나 목적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이 "노아와 그의 모든 식구들이 함께 방주로 들어가 '생명을 보전하게 하라'"고 명령하셨다(6:18-19). 즉 앞에서는 미완료형으로서 "내가 내 언약을 세울 것이다"(I will establish)라고 말씀하시고, 이제는 분사형으로서 "내가 지금 내 언약을 세운다"(I am establishing)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이전의 약속을 이제 확증하고 있음을 말해준다.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노아에게 세우시는 이 언약은 그의 가족 뿐 아니라(9절) 온 인류를 포함하며 나아가 모든 피조물을 포함한다(10절). 그리고 이 언약은 모든 인류와 피조물의 생명을 보전하는 하나님의 약속과 헌신을 담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키시는 이유는 인간이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성숙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내가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며, 땅을 멸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고 결심하신다. 여기에 "다시는"('od)이 두 번이나 반복되었다.
사람과 피조물과 홍수와 물은 여전히 바뀌지 않아도, 하나님은 변할 것이다. 이리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고통과 슬픔을 간접적으로 드러내신다. 물론 앞으로도 홍수가 있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류를 파국적으로 멸망시키는 홍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인간이 범죄한다고 즉시 하나님이 홍수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이제 인간의 죄와 하나님의 심판은 직결되지 않을 것이다. 즉 우리가 범죄하자 말자 즉각적인 하나님의 심판이 오는 것은 아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는 더 이상 즉각적인 보응 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마음의 변화 때문에, 이제부터 하나님은 더욱 인내하실 것이며, 궁극적으로 인간의 마음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실 새로운 언약을 준비하실 것이다(렘 31:32-32; 33:20-32). 그동안 하나님은 창조계를 믿을 수 있는 세계로 보존하겠다고 약속하신다(창 8:22).
(2) 언약의 증거로서의 무지개(12-17절)
12절과 17절에는 "이것은 언약의 증거니라"가 나와 시작과 끝을 연결하고 있다. 따라서 17절의 말씀은 문학적 통일성을 이루기 위해 "언약의 증거로서의 무지개"를 두 번 확증해 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단락에는 또한 "나와 ~ 사이"가 4 번이나 반복된다. 처음에는 "나와 너희와 모든 생물 사이에"(12절), 다음에는 "나와 세상 사이에"(13절), "나와 땅의 모든 생물 사이에"(16, 17절)로 이어진다. 시간적으로는 "영세까지"(12절)와 "다시는 홍수가 되지 아니하리라"(15절)로 이어진다. 하나님의 언약은 "나(I)와 너(Thou)"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기계적으로 조작되는 자동적인 장치가 아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에 대한 증표로서 "무지개"를 "구름 사이에 두시겠다"고 하신다(창 9:12). 하나님은 "나와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로서 "구름 사이에 있는 무지개"를 두신다(9:16). 무지개를 볼 때 마다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
히브리어로 "무지개"(qeshet)는 "활"을 뜻한다(창 48:22; 욥 29:20). 왜 여기에서 "구름 사이에 걸린 무지개"가 하나님의 심판을 억제하는 언약의 표징이 되었는지 이해하는 것은 쉽지 않다. 구약성서에 산재된 "활의 영상"들을 살펴보면, 활은 하나님의 홍수 심판의 도구였다. "어인 일로 활을 꺼내어 살을 메우시고 힘껏 잡아 당기십니까?"(합 3:9 <공동역>)은 홍수를 배경으로 말하는 것이다(Cassuto 1984:137).
그렇다면, 하나님은 노아 홍수 때에 자신의 화살(번개)을 한없이 쏘아 대시고, 온 세상을 홍수로 덮으셨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자신의 화살을 구름 사이에 걸어 두심으로써, 자신의 심판을 억제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멘덴홀은 "노아의 무지개"는 "무기로서의 활이 아니라, 열려진 활(undrawn bow)로서 창조주가 혼돈과 심판하고자 하는 경향에 대해 승리한 것"으로 본다. 즉 하나님은 자신의 원수를 쫓고 있지 않으며, "자신의 무기를 사용하고자 충동받지 않을 것"이다.
5. 홍수 후 노아와 그 아들들의 이야기(9:18-29)
1) 서문: 노아의 세 아들(18-19절)
이제 홍수 이야기는 끝나고, 노아와 세 아들의 이야기가 새롭게 시작된다. 즉 홍수 이야기가 노아와 그의 세 아들 이야기로 시작된 것처럼(6:9-10), 홍수 후의 이야기도 이들의 이야기로 시작되고 있다(9:18-19). 이런 관점에서 보면 노아에 대한 첫 소개(6:9-12)는 마지막 마무리(9:18-29)와 완벽한 짝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9:18-19의 이야기는 노아 홍수의 결론이라기보다(Wenham, B. W. Anderson), 노아 이야기의 전체적 결론(9:18-29)에 대한 서론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노아와 노아의 세 아들을 다루는 이 부분은 이전 이야기(6:9-10)와 비교해 볼 때 두가지 정보를 추가하고 있다. (1)홍수 후에 노아의 가문은 3세대가 언급된다. 즉 "함은 가나안의 아비"로 소개되어, 앞으로 나올 이야기(9:25)와 가나안 족속의 족보(10:6, 15-19)를 예시해 준다. (2)홍수 후의 모든 나라들은 노아의 세 아들로부터 나왔다. 이 세 아들을 통해 민족들과 나라들이 분산될 것을 말해주며, 이 세 아들들이 앞으로의 창세기 이야기에 중심을 이룰 것이다. 따라서 이 짧은 두 절은 노아의 세 아들에 대한 단순한 족보가 아니라, 곧 소개될 만취한 노아 이야기의 서론을 이룬다. 이것은 저자의 문체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이 짧은 전환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저자는 개인 이야기를 더 큰 이야기의 흐름에 넣고 있다. 여기에서 가나안이 함의 아들 중 하나였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9:18). 이 정보는 뒤따라 나오는 이야기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게 사용되므로 복선으로 작용하고 있다(9:22, 25 참조).
2) 만취한 노아와 세 아들들의 반응(9:20-23)
창세기 저자는 노아를 "땅의 사람"('ish ha'adama), 즉 "땅의 첫 경작자"(RSV)로 소개한다. 이것은 노아가 단순한 "농부"(<개역>) 혹은 "농군"(<공동>)이 아니라, "땅의 지배자"(master of the earth; Cassuto 1984:145)라는 뜻이다. 노아는 "땅의 주인"으로서 두번째 아담이 된다. 이리하여 홍수 후에 새로운 시작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노아는 포도나무를 심고(9:20), 니므롯은 사냥군이 되고(10:8), 시날 사람들은 바벨탑을 세운다(11:6). 이 세 본문은 모두 "시작하다"(halal)라는 단어로 시작하며 서로 연결을 만들고 있다.
노아는 첫 농부로서 "포도나무를 심었다"(nata'). 마치 창조 이야기에서, 하나님께서 남자와 여자를 위해 동산을 창설하신(nata') 것처럼(2:8), 노아도 포도원을 만들고 있다. 이 두 이야기는 결론도 유사하다. 첫 사람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이 금하신 과실을 먹고 벌거벗은 것을 보았듯이, 노아는 술에 취해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고 누워 있다"(9:21).
포도주는 성경에서 처음으로 여기에 소개되면서 그 파괴적인 영향이 함께 나타나고 있다(잠20:1). 포도나무를 심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다. 오히려 성경에서 포도나무는 가장 귀한 나무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삿 9:13; 창 5:29 참조). 또한 포도나무는 장차 올 메시야 시대의 복을 상징한다(슥 8:12; 사 25:6; 요 2). 포도주도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최고의 선물이다(신 32:15; 시 104:15). 그렇지만 성경은 포도주의 위험을 동시에 경고한다. 성전에서 주님을 섬기는 자들(레 10:9), 서원한 자들(민 6:2-4), 지도자들(잠 31:4-5)은 음주와 과음에 대한 경고를 받는다. 노아 이야기에서 포도주는 술 취함과 벌거벗음이라는 이중적인 파괴적 효과를 잘 드러내어 준다. 선지자들도 그들의 신탁에서 이런 비극을 잘 드러낸다(합 2:15; 애 4:21).
홍수 후 노아의 행동은 홍수 이전과 너무 달라 우리는 마치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다. 노아는 처음에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으로 소개되었다. 노아가 이렇게 3중적으로 소개된 것은 점층법으로서 노아의 의로움과 완전성이 최고조에 달했음을 강조해 준다. 그러나 이제 그는 술주정꾼의 모습으로 소개되며 그의 두 모습은 너무나 대조된다. 노아는 크게 퇴보하였음이 분명하다. 영적인 거인이었던 노아에게도 이렇게 어두운 구석이 있었을까? 프란시스코는 "이상적 사회를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던 노아는 자기 장막에서 술 취해 있다"고 관찰한다(1964:678).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자신의 장막에 누워 있는 노아를 보고 세 아들은 다른 반응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서 "보다"와 "알리다"가 핵심 단어를 이룬다. "가나안의 아비 함은 그 아비의 하체를 보고… 형제들에게 알렸다"(22절). 그러나 "셈과 야벳은 … 뒷걸음질 쳐 들어가서 아비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은 얼굴을 돌이키고 그 아비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다"(23절).
여기에 나타난 함의 행동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온갖 추측을 하였다. 어떤 이는 함이 노아의 "벌거벗음을 보았다"는 것은 완곡어법(euphemism)으로 함이 노아의 아내와 관계를 맺고 그로 말미암아 가나안이 태어났기 때문에 가나안이 저주를 받는다고 말한다(Bassett 1971). 그러나 "누구의 벌거벗음을 보다"(ra'a 'erwa)는 말은 성경에서 수치스럽게 노출되었거나 감출 수 없이 드러난 것을 가리킨다. 이 표현은 "하체를 범하다"(galla 'erwa)와는 다르다(레 18:6-7).
또 어떤 이는 여기에 근친상간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만약 함이 근친상간을 범했다면, 두 형제에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이 당시에 벌거벗음 자체가 큰 수치였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 장면은 "함의 잘못" 대신에 "가나안의 잘못"을 암시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본문은 함을 그의 두 형제와 대조한다. 함은 가나안의 아비이다. 노아는 함의 후손들을 저주하며, 셈과 야벳의 후손들을 축복한다. 만약 함 대신 가나안이 잘못했다면, 왜 함이 축복에 포함되지 않았겠는가? 본문은 함의 잘못 때문에 가나안에게 저주가 임했다고 한다.
따라서 함이 아버지의 노출을 본 것은 당시의 도덕적 규범을 깬 것이며, 노아의 명예를 치명적으로 손상시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함은 자연적이고 신성한 경계를 무너뜨린 것이다. 플라톤과 노자, 맹자는 "자식이 부모의 죄를 보면 고발할 것인가, 혹은 덮을 것인가"의 문제를 다루며, 결론으로서 "부모를 엎고 멀리 도망쳐야 한다"고 결론 내렸다. 이것은 셈과 야벳의 태도와 일치한다. 함의 행동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자신의 벗은 것을 노출하는" 행동과 같다(출 20:26). 그의 행동은 후에 가나안의 성적인 부패와 연관된다(레 18:7-8, 24-30). 특히 가나안에는 제의적인 매음이 성행하였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자신을 가리기 위해 "세마포 속옷"을 입어야 한다(출28:42-43).
노아의 아들들은 두 종류의 인간을 보여준다. 한 부류는 부모의 수치를 가리지만, 다른 부류는 오히려 들추어 낸다. 셈과 야벳은 함과는 달리 "그 옷"으로 그를 덮었다(23절). 이것은 함이 노아가 자신을 가렸던 옷을 가져와서 완전히 벗겼다는 암시일 수 있다. 두 형제는 아버지의 벗음을 보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나아가 아버지의 수치를 덮는다. 노아는 이들의 행동을 의로운 행동으로 보고 그들을 축복한다.
3) 세 아들과 그 후손에 대한 예언(24-27절)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하시고
그는 셈의 장막에 거하시며,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여기에서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는 세 번이나 반복되고 있다. 우리는 이 본문을 읽을 때 마다 왜 죄는 함이 범했는데 가나안이 노아의 저주를 받는가? 라고 묻게 된다. 출애굽기 20:5의 말씀처럼 아비의 죄 때문에 자식이 심판을 받는가? 그러나 십계명에서는 "나를 미워하는 자"라는 수식어를 통해 부모의 죄가 자식에게 자동적으로 전가되지 않음을 말해준다. 델리취는 노아의 막내 아들 함이 그에게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함의 막내 가나안이 그의 아버지의 죄를 감당한다고 말한다. 우리는 가나안이 저주를 받게 된 정확한 경위는 알 수 없지만, 노아의 아들들이 그 후손들의 성격을 구현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함으로부터, 구스, 애굽, 붓과 가나안이 태어났다(10:6). 이들 중 가나안 사람들은 구약성경에서 변태적인 성유희를 행한 것으로 나타난다.
레위기 18:3에는 애굽과 가나안이 같은 가증스러운 일을 행한 것으로 말한다. 함의 무분별성은 후대 애굽인과 가나안인의 무분별하고 무절제한 성적 방종에 대한 예표가 된다. 따라서 노아가 가나안을 저주한 것은 장차 가나안 사람들이 지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언도를 반영한다. 따라서 이 구절은 흑인을 셈과 야벳의 후예에게 종으로 주었다는 인종차별 이데올로기를 전혀 뒷받침해 주지 않는다.
한글성경에는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케 하사 그로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로 번역되어 있으나, 원문에는 "그는 셈의 장막에 거하시며"로 되어 있다. 따라서 셈의 장막에 거할 자가 "야벳"인지 "하나님"인지 명백하지 않다. 옛날의 탈굼이나 주빌리서에는 주어가 "하나님"이 되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거하시길 기원하는 기도라고 보았다(출 28:8; 29:45). 최근에 와서 카이져 역시 같은 해석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셈의 장막에 거하는 것"이 야벳에게 축복이 되는 것 같지 않으며, "셈의 장막들"(be'aholey-shem)이란 복수형태가 여러 그룹의 백성들이 셈의 여러 후예들과 함께 사는 것을 말한다. 또한 하나님이 "거하신다"는 동사의 주어라면, 아마 "하나님" 대신에 언약의 명칭인 "야웨"를 사용하였을 것이다(26절에 있는 "셈의 하나님 야웨를 찬송하리로다"를 참조하라).
따라서 야벳이 셈의 장막에 "거하다"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즉, 야벳의 영토와 영향력이 확대될 것이며, 그의 후손들은 장차 셈의 후손들과 평화롭게 공존할 것이다. 가나안은 셈과 야벳의 종이 되리라는 것은 이스라엘과 가나안의 미래에 대한 예언으로 보는 것이 좋다. 저자는 미래의 역사를 개요로 제시한다.
4) 노아의 생애 총정리(28-29절)
노아는 1000년에서 50년이 모자라는 950세로 인생을 마감한다. 그가 600세에 홍수를 당했으므로 인생의 2/3는 홍수 전의 생활이며, 1/3은 홍수 후의 삶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노아는 태어날 때 "저주받은 땅에서 수고롭게 일하는 인생을 위로하는 자"라는 이름을 얻었다(5:29). 그는 500세 되었을 때 세 아들을 가졌으며(5:32), 세 아들과 함께 홍수를 통과한 후 이제 인생을 끝낸다. 이리하여 노아는 셋의 족보를 이어가며(5:1-32), 셈을 통해 아브라함의 족보를 열어준다(10:1-32).
6. 노아 홍수의 성경신학적 의의
노아가 살았던 세상은 홍수 심판을 받아 멸망하며,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남은 자로서 구원을 받는다. 이것은 이 후 역사에 전개되는 심판과 구원의 모델이 된다. 이리하여 노아의 홍수는 미래 심판의 모형이 되며(사 8:7-8), 노아와 그 가족의 구원은 모든 구원의 모형이 된다(마24:37-39). 노아의 "물"은 이후 심판의 수단, "의인" 노아는 은혜를 입은 자의 모형이 된다.
1) 소돔의 심판과 롯의 구원
"노아의 때"에 물 심판이 있었던 것처럼 "롯의 때"에 불 심판이 임한다(눅 17:26-30; 벧후 2:5-8). 이 때 하늘에서 불이 비처럼 쏟아졌으며(창 19:24 // 7:4), 모든 불경건한 자들이 진멸되었다(19:13 // 6:17). 의인 "롯"은 "노아"와 같이 하나님에게 은혜를 입으며(19:19; 6:117), 롯과 그의 온 집안이 구원을 받는다(19:12; 7:7). 이 때 롯의 집 대문은 마치 노아 방주의 문처럼 하나님에 의해 닫힌다(19:10; 7:16). 노아의 방주가 산에 안착한 것처럼, 롯의 집안은 산에 올라가 안전을 얻는다(19:17, 30; 8:4). 그러나 롯도 노아처럼 포도주에 취하며, 수치스럽게 벌거벗으며, 벗겨졌으나 알지 못한다. 노아가 포도주에 만취된 후 형제들 사이에 갈등이 일어난 것처럼, 롯에게서 태어난 두 아들은 장차 모압과 암몬의 분쟁의 씨앗이 된다(19:30-38; 9:19-25).
2) 이집트의 심판과 모세와 이스라엘의 구원
모세가 새로운 노아로 등장한다. 모세도 노아의 방주(teba)처럼 역청으로 안밖을 밀봉한 상자(teba) 안에서 지내면서 나일의 홍수에서 구원을 얻는다(출 2:3; 창 6:14). 또한 이스라엘의 백성들은 유월절 때에 문설주와 인방에 피를 바르며, 집 안에서 죽음의 사자를 피하며 안전을 얻었다(출 12:21-23; 창 7:16)
노아의 홍수 때 불경건한 자들이 물의 심판을 받아 수장된 것 같이, 이스라엘을 추격하던 이집트 군대가 홍해에서 수장된다(출 15:10; 창 7:19).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위해 깊은 물에서 마른 땅을 만들어 내셨다(출 14:21; 창 8:13). 보다 넓은 맥락에서 살펴보면, 노아의 식구들이 홍수로 세례를 받은 것 같이(벧전 3:20-21), 이스라엘도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전 10:2). 이 때, 노아의 방주에서 짐승들이 구원받은 것처럼, 양떼와 소떼들이 모세와 함께 깊은 바다를 통과하며 구원받았다(출 12:38; 창 7:13-14).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동안 "모래 사막의 바다"에서 시험받고 주님께서 기업으로 정하신 산에서 안식을 누린다(출 15:17; 창 8:4).
3) 가나안 족속의 심판과 라합의 구원
노아 시대에 장사들(네필림)이 설친 것 같이, 여호수아 시대에도 "장사들"이 있었다(민 13:33; 창 6:4).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거느리고 요단 강을 건널 때 요단강이 바다처럼 묘사된다(수 3:16; 출 15:6). 제사장이 법궤를 지고 요단강을 밟을 때, 요단 홍수가 마르며 하나님의 백성들이 마른 땅을 건넌다(수 3:13; 창 8:9). 노아 홍수가 모든 사람을 진멸한 것 같이, 가나안 사람들은 칼로 진멸된다(신 20:17; 수 6:21; 창 7:22-23). 그러나 라합과 그 모든 식구는 노아와 그의 식구 같이(수 2:19; 창 7:16), 문 안에서 구원을 받았다(수 2:19).
4) 최후의 심판과 성도의 구원
신약성서에 따르면, 노아의 홍수는 최후 심판의 모델이 된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할 것이다"(마 24:37). 즉, 예기치 않은 때에 최후의 심판이 찾아올 것이다. 노아의 때와 같이 그 때에도 불법이 온 세상에 가득 찰 것이다. 노아의 때에는 홍수가 세상을 덮었지만, 그 때에는 불로 온 세상을 덮을 것이다(벧후 3:4-7). 그러나 믿는 자는 노아와 같이 다시 한 번 더 완전한 구원을 받을 것이다.?
노아 아들들의 세계와 셈의 후손들(김정우 )
1. 노아 아들들의 후예(10:1-32)
2. 바벨탑 건축과 인류의 흩어짐(11:1-9)
3. 셈의 후예(11:10-26)
이제 노아 홍수는 끝났다. 이로써 하나님께서 친히 이 세상의 모든 악인들을 대청소하시는 일이 끝났다. 온 세상을 폭력과 불신으로 가득 채우며 "혼돈이 질서인 세상"을 만들던 소위 그 잘난 "하나님의 아들들"과 매력 덩어리로 보였던 "사람의 딸들"과 그들 사이에 태어났던 "고대의 유명한 용사들"인 네피림들도 역사에서 깨끗이 사라졌다.
악을 대량생산하던 "악인들"이 사라졌으면, 이제 새로운 세상이 와야하지 않을까?
"의인" 노아와 그의 가족들은 새로운 "유전인자들"로서 홍수 후의 세상을 자유와 평화와 공의가 넘치는 공동체로 만들어가지 않을까? 그들은 온 세상을 뒤엎는 홍수, 모든 문명의 전설 속에 기억되고 있는 파국적인 대홍수를 몸소 경험한 자들로서 다시는 범죄하지 않고 하나님을 두려워 하며 살지 않을까? 이런 신천신지의 꿈에 대해 창세기의 저자는 부정과 긍정을 함께 하지만 낙관적이기 보다는 더 비관적인 태도를 보인다. 세상에는 다시 니므롯 같은 무서운 "사냥꾼"이 등장하며, 그는 결국 바벨탑을 세우고 하나님의 심판을 당하며, 이번에는 "물의 혼돈" 대신 "언어의 혼돈"이 찾아와 온 세상이 분열된다. 그러나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희망"은 제도의 개선이나 새로운 "철학"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소수의 "사람들"이 가느다란 희망이 된다. 홍수 전의 세상에서는 아담의 10대 후손이었던 "노아"가 새로운 세상의 "희망의 불씨"였다(창 5:29). 이번에는 셈의 10대 후손이 새로운 약속의 씨앗과 모종이 된다. 그가 누구일까?
이제 창세기에서 다섯 번째의 "개벽"이 시작된다. 노아는 "950년을 살고 죽었다"(9:29). 족장 노아의 시대가 끝났으므로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세계'(toledot)가 시작된다"(10:1 상). 그리고 창세기에서 여섯 번째 단락을 이루는 "셈의 세계"가 11:10에서 시작되며 아브람의 출생으로 태고사는 끝을 맺는다(1:1-11:26). 이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의 "세계들" 사이에 바벨탑 이야기가 나타난다. 즉 바벨탑을 중심으로(11:1-10) 홍수 후에 노아의 세 아들들이 어떻게 온 세상에 번성하였는지 먼저 말하며(10:1-32), 이어 아브람까지 이어지는 셈의 후예를 소개한다(11:10-26).
그러나 이 흐름은 역사적인 순서라기 보다 문학적인 배열을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바벨탑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볼 때 노아 아들들의 세상에서 이루어진 이야기이다. 그들의 세계는 "홍수 후에 그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는 말로 마치며(10:32), 이것은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땅에 흩으셨더라"와 완벽한 짝을 이루고 있다(11:9). 이리하여 창세기 10장에서 여러 나라들이 나누어지는 이유가 바벨탑 이야기로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바벨탑 이야기는 연대적으로 볼 때 10장의 중심적인 이야기 보다 앞에 있다. 그러나 저자가 이것을 중앙에 둠으로써 족보를 연달아 제시하는 단조로움을 문학적으로 피하며 모든 나라들이 "언어의 혼란"으로 흩어지지만, 하나님은 "아브람"을 통하여 그들을 새롭게 모으고 구원하실 계획을 가지고 계심을 말해준다.
1. 노아 아들들의 후예(10:1-32)
이 장은 자주 "열국의 목록"으로 소개되지만, 사실 "고대 근동아시아의 지도"(Youngblood 128)라고 불릴 수 있을 정도로 인종과 언어와 지역에 대한 구별이 뚜렷하게 제시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 나타나는 족보를 우리식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족보는 마치 영국 왕실처럼 "계대"를 따라 모든 일가친척들을 소개하여 "지속적인 연속성"을 만들어가지만, 성경과 고대 근동아시아의 족보는 대단히 선별적이며 다음과 같은 특징을 지닌다.
(1) "A가 B를 낳다"는 형식은 직계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아들"은 "후손", "후계자", 혹은 "나라들"을 뜻하며, "아버지"는 "조상," 혹은 "창건자"를 뜻한다. 따라서 성서의 족보에서 "아들"은 "자손"으로도 번역된다(창 46:18, '실바가 야곱에게 낳은 자손이라'). "벨사살과 그의 아버지 느부갓네살"의 관계는 후임자와 전임자의 관계이며(단 5:11),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의 아들" 즉 "후계자"이다(마 9:27).
(2) 계보는 4수, 7수, 10수의 패턴을 따라 형성되어 가고 있다.
① 창세기 15:16에서 "네 자손이 4대(dor, daru) 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리라"고 할 때 "한 대"는 약 80년으로 여겨지는 "한 기간, 혹은 한 세대의 싸이클"을 가리킨다. 출애굽기 6:16-20에는 모세와 아론의 족보가 4대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연대기적으로 정확한 족보가 아니라 4대의 패턴을 따른 족보이므로 완전한 족보가 아니다. 아므람은 "레위 지파(tribe)의 고핫 족(clan)의 가족(family)"으로 소개되지만 민수기 3:27, 28에서는 아므람은 이미 오래 전에 살았던 인물로 추정되고 있다. 따라서 출애굽기 6:20에서 "요게벳은 아므람에게 아론과 모세를 낳았다"는 표현은 직계를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 46:16-18에서 실바가 야곱에게 낳은 아들 중에는 증손자와 고손자도 포함되어 있다.
② 창세기 10장에서 야벳의 후손과 함의 아들 구스의 후손과 미스라임의 자손들이 7수 패턴을 따라 소개된다. 신약에서는 마태가 7대 손의 형식을 따라 메시야의 계통을 소개해 간다(1:1-17). 그는 1:8에서도 "요람" 다음에 "아하시야, 요아스, 아마시야"를 넘어 바로 "웃시야"로 넘어간다(왕하 8:25; 11:2; 14:1, 21). 즉, 마태의 족보도 대단히 선별적이며 각 계대는 엄밀한 연속성을 따라 소개되고 있지 않다.
③ 창세기 5장과 10장에서 족보는 홍수를 전후로 10대 단위로 주어지며 10장에서는 7수와 10수를 사용하여 완전수 70을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여기에 70개의 나라가 소개된 것은 그 당시 나라들이 70개 밖에 없었다는 뜻이 아니라 70이라는 완전수를 통해 열국을 총체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모든 나라들"은 노아의 세 아들에게서 나왔음을 역설하면서 홍수 후 인류의 통일성이 강조된다. 창세기 10장의 70나라는 역대상 1:5-23에서 정확하게 동일한 수로 간략하게 나타나고 있다.
(3) 족보와 역사 계산에 있어서 어림수가 사용된다. 창세기 15:13에서 "400년 동안"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그네로 사는 기간을 전체적으로 보는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은 이 기간 동안 점진적으로 애굽의 종이 되어 고통을 당할 것이다. 즉, 400년은 미래를 내다보며, 어림수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출애굽기 12:40에서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 거주한지 430년이라"고 말한 것은 과거를 돌아보며 정확히 계산한 햇수이다.
(4) 만약 성경의 족보를 연속적으로 본다면, 아브라함의 등장을 주전 2000년 경으로 잡는다 하더라도 노아 홍수는 그로부터 290년 전인 주전 2300년이 되고 아담은 약 주전 4000년에 태어난 것이 된다. 그러나 메소포타미아의 홍수 기록인 우룩의 길가메쉬에 따르면 비록 60진법으로 기록되었다 하더라도 홍수를 멀고 먼 과거의 일로 말한다.
성경의 족보에서 지속적인 연속성은 아담에서 에노스, 라멕에서 셈, 데라에서 아브람 정도로 연결되고 나머지는 확실치 않다. 출애굽의 세대들로서 브사렐은 야곱으로부터 7세대, 엘리샤마는 9세대, 여호수아는 11세대로 소개된다(대상 7:22-27).
(5) 족보는 문화와 민족에 따라 기능을 달리한다. 애굽 왕실의 족보는 종교적인 목적을 가지며, 히타이트(Hittite)의 족보는 의식적인 성격을 지니지만 역사성과 연대성은 사실적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성경의 족보는 무엇 보다도 신학적인 목적을 가진다(마1, 눅3). 창세기의 문맥에서 보면, 10장에 제시된 70나라의 배경 속에서 아브라함이 등장하며, "그의 씨"로 말미암아 "땅의 모든 족속"이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12:3). 아브라함의 "씨"도 창세기 끝에서 "70명"으로 소개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46:27; 출1:5 참조). 즉 이 70나라는 이후 애굽으로 간 야곱의 식구도 모두 70명을 예기하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아브라함은 둘째 아담으로서 "열국의 아비"가 된다(창 17:5). 이 선택된 "씨"를 통해 하나님께서 인류에게 주신 원래의 축복(창1:26-28)이 회복된다.
창세기의 저자는 열국의 목록과 고대의 지도를 제시하면서, 몇개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을 말해준다. 여기의 사건과 인물과 나라과 지명은 앞에 나올 창세기와 오경의 이야기와 특별한 연관성을 가지며 중요한 배경이 된다.
1) 노아의 세 아들들: 셈, 함, 야벳(10:1)
앞장에서 홍수가 끝난 직후에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명하셨다(9:1). 이것은 원래 첫 사람 아담에게 주신 창조주 하나님의 명령이었다(창 1:22). 즉, 노아는 새로운 아담으로 세움을 받으며, 이제 그의 후손들이 어떻게 번성하는지 말해주고 있다.
창세기 10장에서 "노아의 아들"과 "홍수 후"라는 두 단어는 첫절과 끝절(30절)에서 반복되어 나타나며 수미일치를 이룬다. 이리하여 저자는 창세기 10장의 족보는 홍수 기사(6:9-9:29)와 밀접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이제 "노아"는 죽었기 때문에, 그의 세 아들들이 각각 족장으로서 대표성을 가지며, 그들의 후손들이 이루는 나라들이 소개된다.
이 당시의 세계는 노아의 세 아들을 따라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지고 있다. 전체적인 구조는 야벳(2-5절), 함(6-20절), 그리고 셈(21-31절)의 후손들이 나타나며, 각각 아들에 이어 후손들이 제시된다. 32절은 마지막 결론으로서 저자가 열국의 목록에서 여러 인물들을 소개하는 목적을 "이들에게서 땅의 열국 백성이 나뉘었더라"로 제시한다(32절). 저자는 독자들에게 열국들을 파노라마처럼 소개하며, 장차 이루어질 구속사의 배경을 제시하고 있다.
2) 야벳의 아들(10:2-5)
야벳의 후손들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에 대해 영블라드는 야벳이 장자이기 때문이라고 한다(10:21). 흥미롭게도 우리말 성경에서는 셈이 야벳의 "맏형"(<공동>), 혹은 "형"(<표준>, <개역>)으로 소개되지만, 영어성경에서는 야벳이 셈의 "형"으로 나타난다(NIV, RSV, NKJ // LXX). 맛소라 사본에는 셈이 "큰 자 야벳의 형제" 즉, "맏형 야벳의 형제"('achi yepet haggadol)로 나타나고 있다. 우리말 성경에서 셈을 야벳의 형으로 고집한 것은 아마 성경에서 이 세 사람은 항상 "셈, 함, 야벳"으로 소개되기 때문인 것 같다(창 5:32; 6:10; 7:13; 9:18; 10:1; 대상 1:4).
그러나 야벳의 후손들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에 대해 강사문은 "히브리인들의 방향 감각"과 연관된 것으로 설명한다. 즉, 그들은 북남동서의 순서를 따르므로, 북쪽의 야벳인들과 남쪽의 함의 후손들과 동쪽의 셈족들 순서로 나타나며, 서쪽에 있는 야완 족속은 야벳의 줄기에 속해 있으므로 야벳이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한다(1998:124-25).
문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창세기 10장은 "셈, 함, 야벳"(1절)으로 시작하고, 이어 "야벳"(2절), "함"(6절), "셈"(21절)으로 이루어지므로 완벽한 동심구조로 이들이 나타난다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이 세 형제들은 10장에서 "셈"으로 마쳤기 때문에 바벨탑 이후에 바로 "셈의 후예"로 시작하여(11:10) 아브람으로 넘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저자는 먼 나라에 사는 자들로부터 시작하여 가까운 민족으로 넘어와 자신의 조상을 추적하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저자는 노아의 세 아들을 소개할 때, 지리적인 용어인 "지역"('지방' <공동>, '지역' <표준>; <개역>과 <개역개정>에는 생략됨), 언어적인 용어인 "방언"(<개역>; '언어' <공동>, <표준>, <개역개정>), 인종적인 용어인 "종족"(<개역>, <표준>; '씨족' <공동>), 그리고 정치적인 용어인 "나라"('부족' <공동>, <표준>)를 따라 열국들을 분석하고 있다(10:5). 바로 이런 기준 때문에 "가나안"은 언어학적으로 훨씬 가까운 셈족이 아니라, 함족 아래에 나타나고 있다. 또한 "스바"와 하빌라(10:7, 29)가 함족(10:7)과 셈족(10:28)에 두 번 반복되어 나타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야벳의 후손은 그림 1과 같이 소개된다.
야벳
고멜 마곡 마대 야완 두발 메섹 디라스
아스그나스 리밧 도갈마 엘리사 달시스 깃딤 도다님
그림 < 1 >
강사문은 야벳의 후손들이 길이는 짧지만 폭이 넓은 "방계족보"의 형식 속에 담겨 있음을 잘 지적한다(125쪽). 야벳은 7수 패턴을 따라 일곱 아들(10:2)과 일곱 손자를 가지며(3-4절), 모두 14명으로서 각각 나라와 민족을 대표하고 있다.
저자는 야벳의 일곱 아들 중 다섯(마곡, 마대, 두발, 메섹, 디라스)명의 후손들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오직 고멜과 야완의 자손들 7명만 기록한다(3-4절). 즉, 이들의 후손이 여기에서 총체적으로 소개되지 않고 있으며 대표 14명만 소개된다. 이 후의 성경 역사와 문학에서 이 나라들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계획 속에 포함된다(시 72:8-10). 이미 발람의 예언에서(민 24:7 이하) 이 나라들은 하나님의 통치 계획 속에 포함된다(민 24:23--24).
3) 함의 후손(10:6-20)
함의 후손은 모두 아들 4명(6절)과 손자 24명과 증손 2명(7-18절)으로 구성하며 4대에 걸쳐 모두 30 족속을 이루게 되며 방계 족보의 형식으로 소개된다. 이리하여 함은 노아의 세 아들 중 가장 많은 나라들을 이루게 된다. 저자는 먼저 함의 네 아들들인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을 소개하고(6절), 이어서 야벳의 명단처럼 구스의 아들들을 소개한다(7절 상).
함
구스 미스라임 붓 가나안
스바 하윌라 삽다 라아마 삽드가 니므롯 루딤 아나밈 르하빔 납두힘 바드루심 가슬루힘 갑도림
스바 드단 시돈 헷 여부스 아모리 기르가스 히위 알가 신 아르왓 스말 하맛
그림 <2>
위의 그림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구스의 다섯 아들이 소개된 후에, 자연스럽게 함의 둘째 아들인 미스라임(애굽)의 후손들로 넘어가지 않고(13절), 갑자기 구스의 네째 아들인 라아마의 두 아들(7절 하)로 넘어간다. 이리하여 구스 가문에만 모두 "일곱 명의 아들들" 혹은 "씨족들"이 만들어진다. 아마 이것도 저자가 완전수인 "7곱 씨족"을 만들기 위한 문학적인 장치로 여겨진다. 여기에서 구스의 첫 아들은 "스바"(Seba)나 "쓰바"(강사문)로 불려지며, 라아마의 첫 아들 "스바"(<개역>)는 "쉬바"(Sheba)나 "세바"(<공동>)로 부르는 것이 좋아 보인다.
구스의 후손 "일곱 족속들"을 소개한 후, 저자는 또 미스라임으로 넘어가지 않고 구스가 낳은 새로운 아들인 "니므롯"과 그의 도시들을 소개하고 있다(8-12절). 이리하여 갑자기 족보의 형식이 깨어지고 서술체로 넘어가며 니므롯의 인물됨(8-9절)과 그의 왕국이 소개된다(10-12절). 이리하여 10장에 나타난 열국의 목록에서 "니므롯"은 가장 뚜렷한 개성을 지닌 인물로 등장한다.
니므롯은 여기에서 "세상의 첫 영걸"(gibbor) 즉, 위대한 군인으로 나타난다(삼상 9:1; 사 9:6; "장사" <공동, 표준>, "용사" <개역 개정>). 그는 탁월한 지도력을 구사할 수 있는 능력과 권위를 가진 자로서 아마 세계 최초의 제국을 건설한 자로 여겨지는 것 같다. 또한 그는"여호와 앞에 특이한 사냥군"으로 소개된다(10:9). 여기에서 "여호와 앞에"란 최상급을 가리키므로 "당대 최고의 사냥군"이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고대 근동 아시아의 왕들은 위대한 사냥꾼이었으며 길가메쉬 서사시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사냥에서 이룬 업적들을 자랑한다. 앗시리아의 왕들은 궁궐 양각세공에 자신의 용맹을 그리고 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니므롯의 활동을 인정했다거나 거부했다는 점을 명백히 시사하지는 않지만, 그의 이름이 "우리는 반역하리라"(marad, "to rebel")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뭔가 어두운 그림자를 깔고 있는 느낌을 준다.
니므롯의 정체에 대해 여러 가지 견해들이 있다. 첫째, 니므롯은 사냥과 전쟁의 신이며, 바벨론의 수호신인 니누르타(Ninurta)로 여겨진다. 그는 "화살, 강한 영웅"으로 불려졌고, 메소포타미아 전역에서 주전 2000년대에 널리 숭배되었다. 둘째, 니므롯을 역사적인 왕이나 신화적인 인물로 연결시키기를 원하는 학자들은 그를 앗시리아의 투쿨티-니누르타 1세(주전1246-1206년)와 동일시한다. 혹은 그는 "아카드의 왕 사르곤에 대한 히브리어 이름"으로 해석되기도 한다(Youngblood 130). 이런 구체적인 역사적 인물과 동일시하기를 원치 않는 학자들은 니므롯을 메소포타미아의 이상적 왕의 원형으로 본다. 그러나 후대의 문헌들에 따르면, "니므롯"은 적그리스도처럼 하나님을 대적하며 바벨탑을 세운 주역으로 그려진다.
노아의 아들 함의 손자 니므롯은 천부적인 힘을 가지고 태어난 대담한 자로서 사람들로 하나님에 대해 오만하게 모욕하도록 자극하였다…하나님께서 다시 땅을 홍수로 덮으려고 하기 전에…그는 홍수도 도달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높은 탑을 세워 그들 조상들의 파멸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하였다(요세푸스, <유대 고대사> 1:113-14).
그는 주 앞에서 중대한 범죄를 하는 자였으므로 '니므롯처럼, 주 앞에 범죄하는 데 대단한 사람이다'라고 말한다.(탈굼 네오피티 창 10:9).
그는 사냥에 있어서 강하고 힘센 자였으며, 주 앞에 범죄하는 데 대단한 자였다. 그는 '셈의 [종교적] 법규를 버리고 니므롯의 법을 따르라"는 말로서 사람들을 속이곤 하였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용사 니므롯과 같다"는 말이 나왔다. 그는 사람들을 사냥하는 데 용사였으며 주 앞에 범죄하는 데 용사였다(탈굼 단편 창 10:9).
니므롯에 대한 이런 해석은 후대의 상황을 많이 반영하고 있지만 창세기의 본문 속에 그와 "바벨탑"의 관계가 암시되는 것에 근거하고 있기도 하다. 창세기 저자는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Babel)과 에렉(Erech)과 악갓(Accad)과 갈레(Calneh)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10:10). 여기에는 "시날"(즉, 바벨론)이 처음 나타나며, 또한 니므롯의 왕국이 "바벨"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이 두 지명은 다음 장에 나타나는 "바벨탑"에 대한 복선으로 여겨진다. 이후에 성경의 저자들은 바벨론을 실물보다 더 큰 상징적 가치를 가진 도시로 묘사하며 "하나님을 도전하는 세계의 제국"(사 13-14장)과 "적그리스도의 왕국"으로 발전시킨다(계 17).
저자는 비로소 자손의 족보로 돌아가 미스라임의 자손들을 제시하며, 다시 일곱 이름을 소개한다(10:13-14). 이리하여 7수의 패턴을 가진 마지막 이름들이 나오며 뒤에 소개되는 이름들은 특정한 숫자의 패턴을 따르지 않고 있다. 함의 후손들 중 중심을 이루는 자는 "미스라임"(애굽)이 아니라 "가나안"이다. 저자는 가나안의 후손을 모두 10족속으로 소개하며 그들의 영토를 상세하게 말한다(19절). 왜냐하면, 이 지역은 저자의 목적과 밀접하게 연관된 부분이기 때문이다. 즉 이 땅은 장차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는 아브라함에게 약속될 땅이기 때문이다(12:6).
4) 셈의 후손(10:21-31)
저자는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21절)고 말함으로써 야벳(2절)과 함(6절)과는 다른 소개 형식을 취한다. 그는 갑작스럽게 족보 형식에서 서술체로 문체를 바꾸어 셈이 창세기 10장의 중심 인물이요, 그의 후손이 역사의 중심을 이룰 것이라는 점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킨다. 우리는 셈의 후손들 명단에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 사항을 주목하게 된다.
(1) 저자는 바로 이 절에서 "셈과 야벳의 관계"와 "셈과 그 후세대의 관계"에 대해서만 말할 뿐, 함을 배제해 버리는 것은 노아의 축복과 저주 때문인 것 같다(9:26-27). 그는 과거 이야기를 암시하면서 이야기를 진행해 간다. 그의 중심 관심은 하나님이 주실 축복의 방향에 있다. "에벨의 자손"이란 표현은 뒤에 나오는 족보를 바라본다(11:10-26; 민 24:24 참조). 따라서 노아 자손의 명단을 완성하기 전에 저자는 앞서고 뒤따르는 설화의 맥락을 간략하게 요약하여 제시한다.
(2) 셈의 후손들 명단은 아주 선별적이지만, 6대에 걸친 방계 족보 속에 담겨 있다. 이들은 모두 셈의 아들 5명(5종족), 손자 5명(5종족), 증손자 10명(10종족)과 6대손 욕단에게서 나오는 13명(13종족)을 포함하여 26명(혹은 종족)으로 소개된다.
셈
엘람 앗수르 아르박삿 룻 아람
셀라 우스 훌 게델 마스
에벨
벨렉 욕단
알모닷 셀렙 하살마웻 예라 하도람 우살 디글라 오 발 아비마엘 스바 오빌 하윌라 요밥
그림 <3>
(3) 셈의 직계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지만(22절),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라며 "에벨"을 가장 먼저 소개하는 것은 이후의 역사에서 "에벨"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이다. "에벨"(Eber)은 "히브리"(Hebrew)라는 단어와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학자들은 그를 히브리인들의 조상으로 보기도 한다. 그의 이름은 최근 북부 시리아에서 발견된 주전 2400년대로 추정되는 에블라 비문에서 "에브리움"(Ebrium)으로 나타난다. 그는 에블라에서 28년을 다스린 왕으로 소개된다(Youngblood 131).
(4) 에벨은 셈의 마지막 셋째 아들 "아르박삿"의 손자이지만 아브라함으로 이어지는 가장 중요한 계통이 된다. 그는 두 아들 벨렉과 욕단을 낳으며, "벨렉 때에 세상이 나누어진다"(25 하). 여기에서부터 셈의 후손은 에벨의 두번째 아들 욕단(10:26-29)의 계통으로 이어진다(욕단의 후손들 중에 "스바"<개역>가 다시 등장한다. 그 역시 "쉬바" 혹은 "세바"<공동>로 수정하여 부르는 것이 좋아 보인다.).
(5) 따라서 저자는 셈의 족보를 에벨과 욕단을 거쳐 바벨론을 이루는 족속들(10:21-32)과 에벨과 벨렉을 거쳐 아브라함으로 이어지는 두 가문을 대조하고 있다(11:10-26). 이리하여 그는 셈의 한 계통이 바벨론 성을 짓고, 다른 계통은 아브라함의 가문이 됨을 말하고 있다. 저자는 셈의 후손이 이렇게 나누어 지는 것에 대해 벨렉의 때에 "세상이 나뉘었다"는 것으로 암시를 준다(10:25). "벨렉"(Peleg)은 히브리어로 "분열"이란 뜻이다. 여기에서의 "분열"이 지리적, 사회적, 영적인 분열 중 어떤 것인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이리하여 장차 인류의 두 큰 주류가 셈의 아들들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름(shem)을 내고자 애쓴 자들은 "혼돈의 성" 바벨론을 짓고 흩어지지만(11:4),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바벨론에서 불러내셔서 그의 이름(shem)을 위대하게 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12:2).
5) 노아의 후손(10:32)
"이들은 그 족보와 나라를 따라(나누어진) 노아의 후손들의 부족들이며, 홍수 후에 이들로부터 나라들이 땅에 퍼져 나갔다"(사역; 10:32)는 서술체 문장은 10장의 후기로서, 열국이 나누어진 주제를 다시 부각시켜준다. 이리하여 저자는 바로 다음에 나오는 바벨론 이야기에 대한 배경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10장에서 인종과 언어와 지정학적인 범주를 따라 노아의 후손들을 묘사하다가, 11장에서는 갑자기 신학적으로 비약하여 하나님께서 바벨론을 심판하시고, 열국을 분산시키시며, 아브라함을 통해 장차 다시 열국을 자신 앞으로 모으시려고 하심을 은근히 말하고 있다.
2. 바벨탑 건축과 인류의 흩어짐(11:1-9)
바벨탑을 건축하는 기사는 족보를 다루는 창세기 10, 11장에서 셈의 두 계통 사이에 놓여 있다. 즉, 이 이야기는 (1)셈으로부터(10:22) 에벨(10:24)과 욕단(10:26-29)으로 이어지는 한 계통과 (2)셈으로부터(11:10) 에벨을 거쳐(11:14) 데라로 이어지는 두번째 계통(11:25) 사이에 나타난다. 현재의 위치에서 바벨론 건설 기사는 욕단으로부터 14대 끝에 놓여있다(10:26-29). 그렇지만 벨렉의 계통에서는 10번째 끝에 아브람의 부름이 나온다(11:27-12:3). 따라서 셈의 후손들은 에벨의 두 아들에 의해 두 계통으로 나누어지며(10:25) 하나는 바벨론에 다른 하나는 약속의 땅에 자리잡는다.
바벨탑 이야기는 짧지만 아름다운 시처럼 핵심단어들을 반복하여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아름답게 대칭을 이루며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실마리들을 주고 있다. 여기에서는 "이름"(shem)이 중심 역할을 한다. 건축가들은 "자기 이름을 내기 위해 하늘(shamayim)에 이르는" 성과 탑을 쌓는다(11:4). 그러나 이름을 내려고 한 "거기서"(sham) 흩어진다(2, 8절). 그들은 도시의 이름을 "바벨"(babel) 즉, "하나님의 대문"(Akk. bab'el)이라고 지었지만, 그 이름은 그들의 언어가 "혼돈"(balal)에 빠진 것과 이어진다(11:9). 인간들은 "벽돌을 만들어"(nlb) "모여 살자"고 하였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그들을 혼잡케 하여"(nbl) "흩어버리자"고 하신다.
우리는 바벨탑 건축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을 배우게 된다.
첫째, 노아의 후손들은 이제 바벨론의 고대 명칭인 시날로 왔다(11:2). 이곳은 약속의 땅 동쪽에 있다. 건축가들은 "동쪽"으로 가서 도시를 세웠다(11:2). 이전에 아담과 하와가 에덴의 "동쪽"으로 가서 집을 세웠고, 가인도 "에덴의 동쪽"에 거하였다. 롯도 "동쪽"으로 갔다. 그러나 동쪽으로 간 사람들마다 모두 바벨론과 소돔을 세우는 것처럼 헛된 일을 하고 만다. 창세기 저자는 "생명"과 "번영"을 찾기 위해 동쪽으로 가는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복을 떠나고 있음을 말한다(Sailhammer).
둘째, 인간들은 하나됨을 이루기 위해 성을 쌓는다. 노아의 홍수 이전에 사람들은 오직 하나의 언어만을 사용하고 있었다. 그들은 "벽돌"과 "역청"으로 도시와 망대를 쌓아 하나됨을 드러내고 싶었다. 만약 바벨탑의 배경이 가나안 땅이었다면 그들은 돌과 회반죽(mortar)으로 건물을 만들었을 것이다(11:3). 그들이 만든 "성"과 "대"는 전문적으로 지구라트(Ziggurat)라고 한다. 이것은 피라미드처럼 삼각형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중앙에 계단을 만들어 꼭대기에 오르게 하며 그 위에는 조그만 사당을 갖추고 있다. 예배자들은 외부 계단을 따라 올라간다. 그들은 신들이 이 사당에 내려와 그들을 잠깐동안 만난다고 생각하였다. 이것은 야곱이 "땅에서 하늘에 닿는 층계"(28:12)를 본 것은 "하늘에 닿는 탑"(11:4)과 유사하다. 고대의 사람들이 하늘을 찌르는 종교적인 건물을 세운 것은 "하나됨"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런 높은 성을 짓고 그 안에 하나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 사회에서 세우시고자 하는 통일성과 다르다.
셋째, 인간들은 "흩어짐"을 두려워한다(11:4).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었다. 인간들은 흩어지지 않고, 자기 자신의 동질성을 유지하려고 한다. 따라서 성과 탑을 세운 것은 하나님의 흩으시는 사역을 거부하는 자율적인 통일성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런 것을 "성곽심리"(fortress mentality)라고 한다(브루거만 100). 자기 자원으로서만 생존하고자 한다. 그것은 역사 속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넷째,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의 명성을 위해 하늘을 찌르는 성을 세우는 자들"을 심판하신다(5절). 이 절은 마치 노아 홍수 기사에서 8:1처럼, 모든 이야기를 돌려주는 고리 기능을 한다. "이 절 앞에는 오직 인간의 행동 만 나타나며, 뒤에는 하나님의 행동만 나타난다. 항상 그러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최종적으로 말씀하신다"(Youngblood 126). 바벨탑 이야기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바로 이것이다. 탑을 세우는 것이 무엇이 나빠서 하나님은 갑자기 심판하시는가? 여기에서 실마리는 "그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자"는 그들의 말에 있다. 즉 탑이 너무 높기 때문에, 뭔가 공격적인 느낌을 준다. 유대문헌에서는 이 점이 다양하게 해석된다.
우리 모두 그곳에서 하늘로 올라가자"(주빌리 10:19).
그들[탑을 세우는 자들]은 송곳을 가지고 하늘을 뚫고 들어가려고 하며 말하기를 '하늘이 진흙이나, 놋쇠나 철 중 어떤 것으로 만들어져 있는지 살펴보자.'(바룩 3서 3:7-8).
우리가 탑을 만들어 궁창에 올라가 그 물이 쏟아질 때까지 도끼로 찍어보자(b. Sanhedrin 109a).
또 어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전쟁으로 보았다.
[천사가 바룩에게 말하기를] '이들은 하나님과 전쟁하려고 탑을 세운 자들이며, 주께서 그들을 제거하셨다(바룩 3서 2:7).
현대의 학자들은 여기에서 "영웅주의적 거인주의, 문화적 낙관주의, 과학적 낙관주의 이데올로기"를 찾는다(김이곤 81). 바벨탑은 "고대의 대성당"(cathedral of antiquity; Parrot)이라기 보다 인간 교만의 상징이었으며, 인간의 제국이 추구하는 교만과 자족의 화신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친히 내려오셔서 그들이 하는 것을 확인하시고 심판하신다.
다섯째, 이 도시는 "온 지면에 흩어짐"(parats)을 피하기 위해 세워졌지만, 하나님은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다(parats)"(11:8). 이 사실은 결론에서 두 번이나 반복된다(11:8-9). 이것은 두 의지와 계획의 대립과 싸움을 보여준다. 바벨탑을 쌓기 전에 "온 땅"의 구음은 하나였고, 언어도 하나였다(11:1). 그러나 주님은 그들은 "온 땅에" 흩어버렸다(11:8). 바벨탑을 쌓는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인간의 계획을 무산시키는 대표적인 이야기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축복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1:28)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인간들이 이 문화명령을 어기고 자신의 왕국을 구축할 때, 결국 의사소통이 깨어지고 혼란에 빠지게 된다.
여섯째, 언어 혼잡의 모티프는 후에 스바냐 3:9-11에서 "주님께서 뭇 나라의 언어들을 정화시키시고 흩어진 백성을 모으시며 그의 성산에서 그들의 예배를 받으시는 것"으로 재해석된다. 이리하여 선지자는 바벨탑으로 흩어진 인간의 언어와 사상을 새롭게 회복하는 것을 바라본다. 이 스바냐의 예언은 오순절 성령강림으로 이루어진다(행 2:8-21).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실 때, 우리의 언어는 조화를 이루며 서로를 참으로 이해하고 한 마음 한 뜻을 참 하나님을 섬기게 된다.
3. 셈의 후예(11:10-26)
셈의 후예는 다른 "후예들 이야기"와 비교해 볼 때 짧지만, 창세기의 고대사에서 여섯 번째 주된 단락을 이루고 있다. 창세기 5장의 족보에서처럼, 여기에서도 정확하게 10명이 등장한다. 5장에서 유명한 인물들인 "아담"으로 시작하여 "노아"로 마치는 것처럼, 여기에서도 셈으로 시작하여 아브람으로 마친다.
10장에서 인류는 "번성하여" 70나라를 이루었다. 그러나 그들은 결국 바벨탑을 짓다가 흩어졌다(11:1-9). 이제 셈의 후손들이 길게 소개되며(11:10-29), 이 이야기는 아브라함의 부름으로 넘어간다(12:1-3). 즉 전자는 "모든 나라들을 돌보시고 지도하시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후자는 한 백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선택"을 강조해 준다(브루거만 94).
창세기 5장과 11장의 두 족보를 비교해 보라(표 1)
표 <1>
이런 구조에서 보면, 저자는 10대에 시작되는 새로운 희망을 말해준다. 열국은 흩어졌지만 아브람을 통하여 새로운 구속사가 시작될 것이다. 셈의 족보는 아브람을 향하여 나아갔다. 이 족보를 통하여 저자는 태고사(창 3-11:26)와 족장사(11:27-50:26)를 완벽하게 이어준다.
창세기의 여섯 번째의 "세계"에서 비로소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람이 등장하는 것은 대단히 의도적이다. 즉, 저자는 신화의 배경 속에서가 아니라 세계사의 큰 흐름에서 자신의 조상을 소개하고 있다. 물론 "이스라엘"이란 이름이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그것이 성경에 처음 등장한 것은 야곱의 이야기에서이며 세속 역사에서는 이집트 왕 메르넵타의 비문에 처음 나타난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조상은 세계사의 인물들로 이어진다. "실로 하나님은 이 복잡한 세속 세계사의 뒤얽힌 실타래로부터 '아르박삿'이라는 한 오라기의 줄을 이끌어내어(10:22) 마침내 아브라함으로 연결되는 구원사와 연결시켰던 것이다(11:10-26)"라는 김이곤의 관찰은 탁월하다(김이곤 78).
"셈의 후예들의 세계"는 하나님의 새로운 작품이다. 하나님께서 우주 만물을 창조하셨는 데 이제 이스라엘을 창조하신다. 이스라엘의 창조는 하나님의 새 창조이다. 여기에 인류의 새로운 희망이 걸려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온전한 순종을 하여야 하며,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그 복을 온 세상에 나누어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사랑으로 선택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선택받기 위하여 무엇을 미리 준비한 것이 없다(암 9:7; 겔 16:3을 보라).
노아의 홍수 속 ‘큰 깊음의 샘들’은 무엇이었을까
목회/신학 [창조신앙과 과학 46] 노아의 홍수, 물의 근원
흘러나온 용암들, 막대한 양의 바닷물들 증발시켜
성경은 하나님이 ‘궁창 위의 물’ 만드셨다고 기록
전 지구적 대격변을 설명하는 중요한 사건이 노아 시대 대홍수이다. 지난 2018년 게재한 칼럼에서는 노아 홍수 속 과학 이야기와 노아 방주 속 과학 이야기라는 주제로 노아 홍수의 의미와 역사성, 그리고 노아 방주의 과학적 안전성에 대해 글을 실은 바 있다.
이번 글에서는 노아 홍수의 핵심인 ‘물의 근원’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한다. 즉 전 지구를 뒤덮은 노아 시대 대홍수의 물은 과연 어디에서 왔을까? 국지적인 홍수가 아닌 전 지구적인 대홍수가 한번에 일어날 수 있었을까?
노아 시대 대홍수 사건을 대하게 되었을 때 가장 중요하면서도 의문시 되는 질문이 이것이 아닐까 한다. 이 질문에 대해 성경은 창세기 7장 11-12절에서 그 답을 명확히 하고 있다.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라(창 7:11-12).”
성경에는 그냥 ‘비가 왔다’고 기록하고 있지 않다.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고”,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라는 표현으로 그 당시 대홍수의 상황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즉 격변적 상황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큰 깊음의 샘들이 터졌다’라는 표현과 ‘하늘의 창문이 열렸다’라는 표현은 도대체 무엇을, 어떤 상황을 설명하고 있는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격변적 판구조론에 의한 지구 맨틀에서의 엄청난 폭발로 인한 엄청난 조산운동과 물의 분출을 ‘큰 깊음의 샘들이 터졌다’는 단적인 한 마디로 표현하였고, ‘하늘의 창문이 열렸다’라는 것은 하늘에 무엇인가 엄청난 물층이 존재했음을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땅의 물과 하늘의 물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고 쏟아지면서 전 지구적인 홍수가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큰 깊음의 샘(Fountains of the great deep)
현대 지질학 분야에서 발견된 엄청난 발견 중의 하나는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중앙 해령(Mid-oceanic ridge)’이다. 이 중앙 해령은 대양 바닥 중앙부에 폭넓게 지형이 솟아 있는 고개이다. 꼭대기의 높이가 대양 바닥에서 2,000-4,000m에 이르는 해저 대산맥이다.
해령은 지구상의 해저를 잇는 일체의 구조이며, 그 연장을 합치면 67,000㎞나 된다. 해령 꼭대기 부분에는 열곡(裂谷)이라는 폭 25-50㎞ 되는 갈라진 모양의 깊은 골짜기가 있고, 그 양쪽에는 험준한 지형이 거의 대칭적으로 펼쳐져 있다.
이 열곡에 따라 지진 활동이 집중되며 화산활동도 일어난다. 해저확장설에 따르면 해령은 지구 내부로부터 마그마가 올라오는 곳이고 열곡은 그것이 분출하는 출구에 해당하며 그곳에서 새로운 해저가 생긴다고 한다.
▲대서양을 가로지르는 중앙 해령.
즉 다시 말하면, 중앙 해령은 ‘큰 깊음의 샘’이 터져나온 엄청난 흔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격변적 판구조론에 의하면, 빠르게 가라앉는 대양저의 지판들은 맨틀을 통과하는 순환적 흐름(Circular flow)을 일으키며, 거대한 스케일로 대류하는 흐름(Large-scale convection currents)을 야기시켰다.
이들 섭입되는 지각 판들에 의해서 교체된 뜨거운 맨틀 암석들은 대양 가운데 지각이 갈라진 열곡대(Rift zones)로 분출되고, 그곳을 녹이고 새로운 대양저를 형성하였다.
이곳에서 흘러나온 용암들은 막대한 양의 바닷물들을 증발시켜서, 대양저 열곡대의 전체 70,000km(43,500마일)의 길이를 따라 초음속으로 분사되는 증기분출의 선형막(Linear curtain of supersonic steam jets)을 생성하였다.
아마도 이것이 창세기 7장 11절의 ‘큰 깊음의 샘들(Fountains of the great deep)’을 의미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초음속의 증기 분출은 엄청난 양의 바닷물을 포획해서, 대기 중으로 내뿜어지게(Shoot up) 하였다.
물은 지구 위로 높이 발사됐고, 그리하여 격렬한 전 지구적인 강우가 되어 지표면으로 다시 떨어졌다. 아마 이것은 창세기 7장 11절의 ‘하늘의 창들(Floodgates of heaven)’의 근원이 되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궁창 위의 물(캐노피 이론, Canopy Theory)
큰 깊음의 샘이 터져 나온 것과 함께, 대홍수의 물의 근원 중 또 다른 하나는 ‘궁창 위의 물’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창세기 1장 6-7절의 기록을 보면 매우 중요한 용어가 하나 눈에 띈다. 그것은 ‘궁창 위의 물’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창 1:6-7).”
▲‘궁창 위의 물’에 대한 주요 이론.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궁창’은 무엇을 의미할까? 우리말 성경에서는 ‘궁창’을 ‘하늘’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영어 성경에는 ‘하늘’을 일반적인 ‘Sky’ 등의 의미보다는 ‘Expense’로 표현하고 있으며, 이는 지구를 둘러싸고 있는 ‘대기권’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궁창 아래의 물’은 지하수, 바다, 강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궁창 위의 물’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 대답은 ‘잘 모른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볼 수 없으니까.
분명히 성경은 창조 당시 하나님이 궁창 위의 물을 만드셨다고 기록하고 있고, 노아 시대 대홍수 때에 하늘의 창문이 열리면서 이 궁창 위의 물이 한꺼번에 쏟아지면서 전 지구적인 홍수가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궁창 위의 물은 오늘날 하늘의 구름이나 안개라기보다는 눈에 뵈지 않으면서 빛을 투과시키는 수증기였을 것이다.
물의 근원에 대해서는 큰 깊음의 샘물이 터진 것으로 대부분 설명할 수 있지만 궁창 위의 물층, 즉 물층 이론(Canopy theory)도 이를 설명하기 위한 또 하나의 견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찌 되었든 단번의 전 지구적인 홍수는 가능하며, 역사적인 사실이었다는 것이다.
글을 정리하며
전 지구적인 노아 시대 대홍수의 물의 근원은 큰 깊음의 샘과 궁창 위의 물이었음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전 지구적 홍수가 단번에 일어날 수 있었고, 이런 큰 깊음의 샘이 터져나온 사건과 하늘의 창이 열리면서 궁창 위의 물이 쏟아진 사건이 이 지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인간 수명의 장수(長壽) 기록에 대해서는 다음 게재 기회에 다루고자 한다.
이경호
한국창조과학회 회장
인하대학교 조선해양공학과 교수
온누리교회 장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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