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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천지창조 이야기, "구속사적 관점에서 본 가정: 그 근원과 타락과 회복"

by 은총가득 2021. 12. 31.

 

 

천지창조 이야기
창 1:1-2:3(김정우 )

1968년 성탄절 자정 예배 때, 아폴로 8호를 타고간 프랭크 보만 (Frank A. Borman)은 무한한 우주 공간에서 창세기 첫 장의 첫 10절을 읽으며 우리에게 성탄 메시지를 주었다. 영원한 침묵과 어둠 속에 잠긴 우주에서 들려오는 태초의 천지 창조 이야기는 우리 모두를 전율케 하였다. 그로부터 약 3년 후인 1971년 2월 5일, 아폴로 15호의 선장인 에드가 미첼 (Edgar Mitchell)은 달 나라에 가서, 성경전서를 담은 마이크로 필름을 땅에 묻었다. 그 때,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창세기 1:1을 16개의 언어로 번역하여 함께 묻었다고 한다 (우리 말도 포함되었을까?). 사실 우리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성경 첫 장 첫 절을 읽고 들을 때마다 새롭게 감동을 느끼는 이유는 이 단어 속에 바빙크 (B. Bavinck 1932)가 말한 바대로 "시간과 공간과 실체와 인과율"이라는 물리학의 4가지 기본 개념이 다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즉 영블라드 (R. Youngblood 22)가 간파한 바와 같이, "태초에 [시간] 하나님이 하늘과 [공간] 땅을 [물질] 창조하시니라 [인과율]"의 네 개념이 나타난다. 우리는 창조 이야기를 새롭게 들으며,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이 원래 무엇을 의미했는지 살피며, 또한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치는지 배우고자 한다. 본 장의 구조는 아래와 같다.

1.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 선언적 요약 (1:1)

2. 창조 직전의 혼돈과 공허 (1:2)

3. 창조 과정과 창조 사역 (1:3-31)

4. 창조 완성과 하나님의 안식 (2:1-3)

우리는 이 구조를 따라 창조 기사를 이해하며, 이 이야기가 오늘날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1.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1:1)

앞 장에 제시된 창세기의 구조에서도 보았지만, 창세기에는 10개의 "대략" 혹은 "사적" (톨러도트)이 있으며, 각 단락은 이 표제로 시작한다. 그러나 첫 장에는 이런 표제가 나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장은 창세기 전체의 서론으로서 10개의 톨러도트를 열어주는 근본이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라는 구절은 천지 창조의 선언적 요약일 뿐 아니라 창세기 전체의 표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이 표제 아래에 10개의 톨러도트가 뒤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보면, 10개의 톨러도트는 모두 천지창조의 후예들이 된다. 따라서 여러 역사 비평가들이 주장하는 바 1:1-2:4 상반절까지를 한 단락으로 보고, 2:4 상반절을 첫 창조 기사의 표제로 보는 입장은 인위적인 문서설의 기준으로서 이것은 창세기의 구조를 왜곡시키는 것이다.

창세기 1:1은 창조 기사 전체의 선언적인 요약이다. 히브리어로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일곱 마디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는 7이라는 완전 수를 통해 하나님 창조의 완전함을 담고 있다. 그렇지만, 이 일곱 마디가 담고 있는 내용은 (1) 태초에 (2) 하나님이 (3) 천지를 (4) 창조 하시니라는 네 가지이다. 이 네 가지 말씀이 모든 성경 내용의 근본이 된다. 또한 이 네 가지 말씀은 세 가지의 질문에 대한 답을 준다. 즉 이 세가지 질문은 아래와 같다.

(1) 세상은 언제 어떻게 생겼는가?

(2) 누가 이 세상의 주인인가?

(3) 첫 창조는 오늘 우리의 삶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그러므로 1:1은 창조주를 소개하며, 세상의 기원을 설명하고, 창조 질서와 구원사의 근본을 세우는 삼중적 목적을 가진다. 우리는 1:1에 담긴 네 가지 가르침을 하나씩 살펴보고자 한다.

1) "태초에"

성경은 "태초에"라는 심오한 말씀으로 시작한다. "태초에"라는 말씀은 시간 속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근본적인 한계를 드러내어준다.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욥 38:4). 우리는 이 "태초"가 정확하게 언제인지 모른다. 성경 저자도 이 때가 언제인지를 내는 데 관심은 없다. 그는 천지가 창조된 한 순간을 기억하고 있지만, 연대에는 관심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초에"라는 말씀은 창조의 역사성을 말해준다. 우리는 창조가 언제, 어떻게 다 이루어졌는지 모르지만, 시간이 생긴 한 순간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성경은 말해주고 있다.

달리 말하자면, 이 "태초에"는 어떤 추상적이거나 개념적이거나 형이상학적인 실체가 아니며, 바로 역사의 시작이었다. 이 역사성은 창조의 사실성을 말해주며, 우리 신앙이 역사성과 사실성을 띠고 있음을 처음부터 강조해 준다. 우리 신앙의 모든 요소와 부분은 철저하게 역사적이다. 이 역사성이 우리의 신앙 개념에서 사라질 때, 우리의 신앙은 역사적 책임은 외면하고, 몸이 없는 영혼의 세계만을 찾는 가현설에 떨어지고 말 것이다. 요한 복음의 저자도 "태초에"로 자신의 복음을 시작한다. 요한은 창세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로고스로서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하셨으며, 또한 그 자신이 하나님이었다고 말한다 (요 1:1).

2) "하나님이"

이 세상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가 만물을 만들었기 때문에 소유하신다. 이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이방의 신들과 다른 분이다. 그는 천지와 그 안에 있는 만물을 의인화시킨 어떤 가공의 존재가 아니며, 온 세상을 설계하시고 시공하시고 완공하신 건축자 같은 인격적 존재이시다. 그는 태초 이전에 스스로 계신 분이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시기 전에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루터는, "하나님은 미주알 고주알 케묻기 좋아하는 자들을 벌주기 위해 스위치를 만들고 계셨다"고 대답하였다. 이제 주님은 자신의 기쁘신 뜻을 따라 온 세상을 만드신다. 이 하나님은 세상으로부터 초월해 계시며, 자존하시고, 거룩하신 인격적 존재이다.

창세기 전체의 맥락에서 볼 때 이 창조주 하나님은 족장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열국의 신들과 본질적으로 다른 분이시다. 열국의 신들은 우상일 뿐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이것을 예레미야가 잘 말했다. "너희는 이같이 그들에게 이르기를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 이 하늘 아래서 망하리라 하라" (10:11).

"만방의 모든 신은 헛 것이요 여호와께서 하늘을 지으셨음이로다" (시 96:5).

창세기의 맥락을 넘어 오경의 맥락에서 보면, 이 창조주 하나님은 족장의 하나님일 뿐 아니라, 바로 시내산에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 하나님이시다. 창조주 하나님은 "얼굴 없는 신적 존재"가 아니다. 그는 족장을 부르시고, 자기 백성을 이집트에서 속량하시고, 시내산에서 언약을 맺으시며,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신 분이다.

3) "천지를"

성경에서 천지는 단지 창공과 땅 만을 말하지 않는다. 히브리어에는 "우주" (cosmos, universe)라는 말이 없기 때문에 "천지"는 "짜여진 우주"로서 모든 "만물"을 포함한다 (전 11:5; 사 44:24; 렘 10:16; 요 1:3). 달리 말하자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주님으로부터 나왔다 (시 33:6; 히 11:3).

4) "창조하시니라"

"창조하다" (bara)는 동사는 두개의 특징을 가진다.

(1) 하나님이 항상 이 동사의 주어이며, 인간이나 그 어떤 신도 주어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 어떤 이방신도 창조자로 성경에서 소개되고 있지 않다. 우리는 가끔 "새 역사를 창조하자" 혹은 "새 나라를 창조하자"는 정치적인 슬로건을 내걸지만, 결코 인간은 창조할 수 없다. 인간은 "만들고" "빚고" "세울 수는 있지만", "창조"는 하나님의 영역이다.

(2) 이 동사는 전치사나 목적격을 가지지 않는다. 즉 하나님은 그 어떤 기존하는 것을 수단으로 사용하여 "창조"하시지 않는다.

(3) 창조의 산물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인간 (창 1:27)과 예기치 않은 새로운 것 (민 16:30; 사 65:17)이다. 이 새로운 것으로 가끔 큰 물고기 (창 1:21), 산 (암 4:13), 동물 (시 104:30)이 언급된다. 창조하다 (bara)라는 용어에 근거하여 볼 때 "무에서 유의 창조"라는 입장을 만들 수 없다. 예로서, 이스라엘의 창조 (사 43:15)와 "새 마음의 창조" (시 51:10)에도 이 동사가 사용된다. 하나님께서 무에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입장은 다른 구절에서 명시되고 암시된다 (시 148:5; 잠 8:22-27). "무로부터의 창조"라는 용어는 막카비서에 가장 먼저 나타난다 (마카비 2서 7:28).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용어는 하나님의 활동을 묘사하는 데만 사용되며,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자유스러운 창조 행위"를 가리킨다.

일곱 개의 단어로 구성된 이 첫 절은 창조주와 창조의 역사성에 대해 명백한 선언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절은 선언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다 (Westermann, 94). 시편에서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할 때,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Creator of heaven and earth)로 부른다. 이 고백이 창세기 1:1에서는 동사 문장으로 바뀌어졌다. 창세기의 첫 줄 자체가 찬양의 외침일 뿐 아니라, 창세기 1장 전체가 찬양인 것이다.

2. 창조 전의 혼돈과 공허 (1:2)

1:2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위해 땅을 준비하시기 전의 땅의 상태를 묘사한다. "그리고 땅은"이란 절은 분절 접속사절로서 3절의 주절을 이끄는 상황절이다. 따라서 2절은 3절에 있는 첫 창조 명령 직전의 땅의 상태를 묘사해 준다. 이와 유사한 구문 구조가 3:1과 4:1에도 나타난다. 1:2은 현재 우리가 사는 땅이 나타나기 전의 상태를 삼중적으로 묘사한다. 그 중 두 가지는 부정적이며, 하나는 긍정적이다. (1)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2)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3)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신다."

첫 두 가지는 부정적인 상황이며, 세번 째는 긍정적 상황을 보여준다.

1)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며"

"혼돈과 공허"는 히브리어로 "토후 와보후" (tohu wabohu)로서 아주 아름다운 시어이다. 이 단어는 "황량하고 텅빈" (waste and void) 상태를 말하는 중언법 (hendiadys)이다. "황량함"은 "무" (사29:21), 혹은 여기에서 처럼 "무질서, 혼돈"의 두 가지 개념을 갖는다. 그렇지만 성경의 "혼돈" (tohu)은 우리가 생각하는 "마구 헝클어진" 상태나 "혼잡한 물질 덩어리" 상태가 아니라, 길 없는 사막이나 문명 이전의 상태를 가리킨다. 신명기 32장에서 이 단어는 이스라엘이 광야를 통과하던 시간을 묘사할 때 사용된다 (신명기 32장10절; 욥 6:18).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나면, 땅은 "거주할 수 없는 곳" (토후)이 되며, 백성은 포로로 잡혀간다 (렘 4:23-26).

포로로 잡혀간 후 땅은 창조 이전의 상태로 묘사된다. 창세기 1:2의 "혼돈"은 창조가 완성되었을 때 이루어진 질서와 대조되는 짜여지지 않은 상태를 말해주고 있다. "공허"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질서를 만들기 전에 아무 것도 아직 존재하지 않은 "텅 빈" 상태를 강조해 준다. 이 두 단어는 곧 보겠지만, 창조 과정의 두 중심 축을 이루어준다. 즉, 첫 삼일 동안 하나님은 "혼돈"에 대항하여 구조를 짜시고, 나머지 삼일 동안은 "공허"에 대항하여 채우신다.

문맥을 통해 볼 때에도, "혼돈하고 공허하다"는 "어둠"이 있고, 땅은 "물로 덮여 있는 상태"이다. 이 용어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라고 평가하시기 전의 땅의 상태를 묘사한다. 이 땅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not-yet) 상태이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다" 이전의 상태이다. 이런 점에서 2:5-6의 땅에 대한 묘사와 유사하다. 두 본문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를 묘사한다. 이것은 "인간이 거주할 수 없는, 인간이 거주하기에는 아직 준비가 안된 상태를 의미할 뿐이다" (Young 28).

그렇다면, 3절에서 "빛이 있으라"는 첫 창조 명령 전에 "땅은 혼돈하고 공허하였다"는 상태는 얼마나 오랫동안 존재했을까? 이 점에 대해 에드워드 J. 영은 "그 기간이 얼마나 길었는지에 대해 우리는 물론 알 길이 없다. 그러나 2절에서 볼 수 있듯이 지구의 상태는 창조되었을 때의 상태 그대로이며 하나님께서 현재의 세계와 같은 형태로 만들기 시작할 때까지 그런 상태가 계속되었다" (26쪽)라고 말하였다.

2)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어둠이 깊음 위에 있다"라는 상황이 제시된다. 아직 빛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3절), 어둠이 온 세상을 덮고 있다. 그러나 이 때의 세상은 "깊음"에 덮여 있었다. 여기의 "깊음"은 "깊은 물"이다. "깊은 물"은 태초의 바다로서 땅을 감싸고 있는 것이다. 이 깊음은 항상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며 하나님의 구원사를 거스린다 (출 15:8). 여기에서 "깊음"은 바벨론의 창조 신화에 있는 티아맛 같이 독자적인 신적 존재로 나타나지 않는다.

"어둠이 깊음을 싸고 있는" 상태는 태초의 황량함을 묘사해준다. 이 상태는 곧 나타날 하나님의 계시를 기다리고 있다. 은유적 관점에서 보면, 빛은 하나님을, 어둠은 하나님에 대해 적대적인 모든 것을 상징한다. 악한 자 (잠 2:13), 심판 (출 10:21), 죽음 (시 88:13)은 모두 어둠으로, 구원은 빛으로 묘사된다 (사 9:1). 이 어둠은 특히 사람들에게 공포스러운 존재였다 (암 5:18, 20). 깊음도 우리에게 두려움을 준다 (욘 2:3, 5). 그렇지만 하나님은 어둠 속에서도 다 보시며 (시 139:12), 또한 어둠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분이다 (신 4:11; 5:23; 시 18:12).

3)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신다"

이제 성경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신"이 나타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신"을 "강한 바람", 혹은 "하나님의 바람", 혹은 "하나님의 숨결" (서인석)로 번역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하나님의 영, 혹은 야웨의 영은 단 한번도 "강한 바람"으로 사용된 적이 없고, 항상 하나님의 영으로 나타난다.

히브리어 "운행하다" (rachap)는 시리아어에서 "알을 품다" 혹은 "부화하다"라는 뜻을 가지므로, 김이곤은 "마치 알을 품고 있는 날짐승처럼 하나님의 창조적 영이 혼돈의 물을 품고 있었고 그 어느 것도 그분의 품에서 벗어나 있을 수는 없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이것은 페니시아의 창조론에 나타나는 개념이며, 창세기 1장에서는 이런 뜻으로 쓰여진 것이 아니다 (Wehnam, 17참조).

이 단어는 신명기 32:11에서는 독수리가 그 새끼 위를 "너풀거린다"는 모습을 묘사하는데 사용된다. 우가릿어 라하프 (rhp)도 새들이 날아가는 모습을 묘사할 때 사용되며 (Gordon 1965:484), 바알이 얌과 일전을 할 때, 바알의 힘찬 행동은 매가 위에서 갑자기 급습하는 영상으로 묘사된다 (Kline 1977:253, n. 7). 신명기 32장에서 독수리가 그 보금자리에 있는 새끼 위를 "너풀거리는" 모습은 기본적으로 자기 새끼를 지키고 보호하며 돌보는 영상을 준다. 동물들은 새끼를 낳을 때, 그 보호 본능이 강하다.

이 영상을 창세기 1:2로 가져온다면, 하나님의 신이 아직 혼돈과 공허, 깊은 물로 가득찬 세상을 지키며 보호하고 있는 모습이 나타난다. 여기의 동사형은 지속적인 동작을 가리키므로, 성령은 현재의 땅이 수면 위로 나타나 인간이 거주할 수 있는 곳이 될 때까지, 혼돈과 공허로 뒤덮힌 땅, 깊은 어둠으로 뒤덮힌 땅을 지속적으로 지키고 있다. 마치 독수리가 새끼의 보금자리를 보호하고 준비하듯이 하나님의 신이 움직이고 있다.

워필드 (B. Warfield, 1895)는 창조에 나타난 성령의 사역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따라서 하나님의 신은 구약의 최초부터 만물의 존재와 존속의 원리이시며, 모든 움직임과 질서 그리고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성의 원인으로 나타난다" (윤영탁 번역, 1985:110).

3. 창조 과정과 창조 사역 (1:3-31)

1) 천지 창조 이야기 구조

실제적인 창조과정을 담고 있는 이 단락은 아래와 같이 삼일을 대칭으로 제시되고 있다.

1. 빛

2. 물과 궁창

3. 땅과 채소

4. 광명

5. 어족과 조류

6. 짐승과 인간

7. 하나님의 안식

이 구조를 수직적인 대칭으로 보면, 첫 삼일은 주로 "나누다"와 "모으다"의 동사군을 이루어 땅의 공간적인 구조를 이루며, 나머지 삼일은 주로 "채우다" "번성하다" "생육하다"는 동사군을 이루어 빈 공간을 채우는 모습이 나타난다. 이리하여 1:2에 있는 "혼돈"에 "질서"를, "공허"에 "채움"을 이루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하늘과 땅은 결코 "공허한 곳"이 되지 않을 것이다.

"주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며 땅도 창조하시고 견고케 하시되 헛되이 (bohu) 창조치 아니하시고 사람으로 거하게 지으신 자시니라" (사 45:18).

위의 구조를 수평적인 대칭으로 보면, 첫째 날은 넷째 날과, 둘째 날은 다섯째 날과, 셋째 날은 여섯째 날과 대칭을 이룬다. 이리하여 "빛"은 "광명"과 이어지며, "물과 궁창" (둘째 날)은 "어족과 조류" (다섯째 날)와 "땅과 채소" (셋째 날)는 "짐승과 인간" (여섯째 날)을 위해 만들어진다.

창조의 육일 중 셋째 날과 여섯째 날은 각 삼일의 절정으로 나타나며, 이 날 하나님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다른 날들과는 달리, 셋째 날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여 가라사대"가 두 번 나타나며, 여섯째 날에는 세 번 나타난다. 이리하여 3일과 6일은 형식에 있어서 서로 어울리며, 내용에 있어서도 3일에는 하나님께서 땅과 식물을 만드시고, 6일에는 땅 위에 사는 동물들과 인간을 만드시어 서로 어울리게 된다. 하나님께서 미리 "풀과 채소와 과목"을 내게 하시며, 6일에는 동물과 인간으로 먹게 하신다. 이리하여 고정된 생명의 지원 구조와 그 안에 움직이는 생물 사이에 평행이 이루어지도록 한다. 제 7일은 표준 구조에서 벗어나 있으며, 안식일 제도의 기원으로 제시되고 있다. 하나님의 안식으로 창조가 끝나는 날로부터 인간의 노동이 시작된다. 이리하여 인간의 노동은 하나님의 안식과 기쁨 속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님은 엿새에 걸쳐 창조를 이루시며, 제 7일에 완성하신다. 이리하여 제 7일이 창조의 절정을 이룬다. 즉, 안식일은 창조의 절정으로, 창조를 기억하며 창조주를 기리는 날이 된다.

2) 창조의 형식

하나님의 천지 창조는 엿새라는 "날"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나, 이 여섯 날을 내부적으로 묶어주는 형식이 있음을 우리는 발견하게 된다.

(1) 창조 명령 서론

"하나님이 가라사대"는 창세기 저자의 선언으로서, 모두 10회 나타난다 (1:3, 6, 9, 11, 14, 20, 24, 26, 28[그들에게 이르시되], 29). 이 열 마디의 말씀에 대해, 서인석은 "본문은 하느님으로 하여금 7일간의 긴 시간 안에 10회의 말씀을 차례대로 발설하게 하고 있다.…… 창조의 이야기에서 하느님의 후미지고도 평화로운 말씀들의 분절이 얼마나 장엄하고도 위력이 있는가를 독자들은 느껴야 한다" (32쪽)고 말한다. 그는 이 위엄찬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을 듣고 있으며, 이 순결한 말씀이 폭력과 무질서와 강한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느끼고 있다.

(2)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명령은 "있으라"는 형식으로 8회 나타난다. 서인석은 이 명령을 군사령관의 호령으로 보나, 오히려 건축자의 명령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물론 히브리인들의 창조 개념 속에는 전투 개념이 있으나, 건축 개념도 중요한 자리를 잡고 있다. "있으라"는 명령은 " (물들이) 모여라" (9절), "나타나라" (9절), " (움이) 돋아나라" (11절), "우글거려라" (20절), "날아라" (20절), "나오게 하라" (24절), "다스려라" (26절), "우리가 만들자" (26절)는 명령과 함께 나타나고 있다 (서인석 28쪽을 보라). 하나님의 명령은 능력이 있으며, 모든 혼돈을 질서로 바꾸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있다.

(3) 창조의 완성 형식

창조의 완성 형식으로 "있었다" (1회)와 "그렇게 되었다" (6회; 7, 9, 11, 15, 24, 30절)가 뒤따른다. 하나님의 창조 말씀은 불가항력적이며, 그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다.

(4) 하나님의 제작 행동

하나님의 제작 행동이 묘사된다. "그리고 하나님이 만드셨다" (7, 16, 17, 25), "나누셨다" (4, 7절), "창조하셨다" (21, 27절), "돋아나게 하셨다" (12절). 이 행동은 하나님의 초월성을 돋보이게 한다. 하나님은 "창공에 두 큰 광명을 만드셨다"에서 해와 달이 신적 존재가 아니며, 하나님의 피조물임을 분명히 한다.

(5) 평가 혹은 승인 형식

평가 혹은 승인 형식은 "좋았다"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은 좋고 선하다. 창조 이야기는 이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사실 이 구절은 1장에서 일곱번 나타난다 (4, 10, 12, 18, 21, 25, 31 ["매우 좋았다"]). 이것은 창조에 대한 승인 형식 (approval formula)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찬양하는 기능을 갖는다. 창조는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선하심을 증거해 준다. "성서는 아름다움에 대한 단어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틸리케 31).

(6) 명명 (命名) 형식

명명 형식은 "그리고 그가 불렀다"는 말씀으로 나타난다 (5회; 5[2회], 8, 10절 [2회]). 이 세상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유이며,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 또한 하나님은 "축복하신다" (22, 28절).

(7) 날에 대한 언급 (6회)

날에 대한 언급은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날이라"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는데 이것은 6회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10번이나 말씀하시고, 8번 명령하시지만 일곱 날로 분류된다. 이 반복적인 구조가 천지 창조 이야기의 뼈대를 이루어 문체를 단조롭게 하지만, 창조의 초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즉 천지 창조는 다른 사건과는 달리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과 손길을 따라 조화있게 또한 목적을 따라 만들어졌다. 천지는 단순한 인과법칙을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솜씨로 만들어졌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이 창조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로고스가 모든 창조 배후에 있으며,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하나님의 신이 함께 일하신다. 창조에서와 같이 출애굽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작한다. 하나님 말씀의 신학은 창조에서부터 시작된다.

3) 창조의 날들

(1) 첫째 날: 빛과 어둠의 구별 (1:3-5)

성경에 나오는 첫 하나님의 말씀은 "빛이 있으라"이다. 이 말씀과 함께 창조의 과정이 시작된다. 하나님의 첫 창조 작품인 "빛"은 창조의 첫 날에 이루어진 것으로 소개된다. 그러나 첫 창조는 하루 종일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순간적으로 만들어졌다. 말씀을 통한 창조는 6일 노동의 패턴에 정확하게 맞아 떨어지지 않는다.

"빛이 있으라"는 명령 다음에, "빛이 있었다"는 실행이 뒤따른다. 이 명령이 누구에게 주어졌는지, 누가 이 명령을 실행하는지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명령이며, 그 명령을 따라 창조가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처음으로 창조한 것은 빛이다. 그러나 16절이 되기까지 태양을 만든 이야기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3절의 빛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에 대해 학자들은 크게 둘로 나누어진다.

첫째 부류는 이런 "빛"과 "광명"을 다른 실체로 이해한다. 그들은 여기의 빛을 우주 속에 있는 빛으로서, "모든 기본적인 힘 중 가장 미묘한 것" 혹은 "신비로 가득찬 물질" (A. Dillmann), "가장 숭고한 요소", "실재하는 것", "미묘한 물질" (H. Gunkel)로 본다. "이 빛은 제 4일에 창조된 광명체와는 구별된 것으로서, 신의 영광에 비유될 수 있다"는 김이곤의 입장은 전통적인 입장에서 한 걸음도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 빛을 하나의 실체로 본다면, 측량할 수 없는 우주 속에 있는 빛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 태양계 자체도 은하계 (Milky Way)라는 갤럭시에 위치해 있고, 이것은 렌즈 모양의 우주 섬을 이루고 있으며, 약 10만 광년의 거리로 추정된다. 이런 갤럭시가 우주에는 수백만 개가 넘는다고 한다. 이런 시각에서 빛을 보면, 너무나 모호해진다.

두번 째 부류의 사람들은 여기의 "빛"을 태양 빛으로 본다 (Sailhammer, Youngblood). 즉 1:2에 처한 땅의 상황, 즉 "혼돈과 공허," 그리고 "어둠이 깊음 위에 있는" 상황에 드디어 태양의 빛이 비친 것으로 이해하는 입장이다. 이 입장의 근거는 (1) 천지 창조 기사는 철저하게 땅을 중심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2) 일반적으로 해와 달과 별들은 모두 "하늘과 땅" (1:1)에 다 포함된다. (3) 만약 우리가 1절을 창조행위로 본다면, 이미 천체는 다 만들어졌다고 보는 점들이다. 그렇다면, 3절은 태양을 만든 것을 묘사하기 보다 태양이 아침의 어둠을 깨고 나오는 것을 말한다. 성경에서 동트는 것이 위와 같이 묘사되었다 (창44:3; 출10:23; 느8:3).

아마 창세기 저자가 "빛"과 "광명"을 구분했을 때, 그는 의도적으로 "빛"을 모호하게 만들지 않았을까? 둘 사이에는 명백한 유사성이 있지만, 저자는 "빛"의 상징성 때문에, "광명"과 구분하였다고 볼 수 있다. 6일 창조의 틀 속에서 보면, 빛의 창조가 시작에 놓여 있으며, "빛의 창조"를 통해 다음 창조가 가능해진다. 빛은 땅의 시간 구조를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한다. 빛이 어둠으로부터 구별될 때, 시간의 구별이 생긴다. 빛은 시간적 구별을 위한 것이지 공간적 구별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빛을 창조하셔서, 시간과 질서의 기본 싸이클을 만드셨다.

이 빛의 상징성 때문에, 이후 이사야 선지자는 빛이 태초의 어둠을 뚫고 하나님의 첫 축복의 여명을 알리신 것처럼, 새 구원의 시대를 빛이 어둠을 부수는 것으로 묘사한다 (사 8:22-9:2; 마 4:13-17; 요 1:5, 8-9). 사도 바울도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빛이 어둠을 깨고 비치는 것으로 묘사한다 (고후 4:6; 요일 1:5; 계 21:23 참조).

(2) 둘째 날: 창공과 바다의 구별 (1:6-8)

개역 성경에서 "궁창"으로 번역한 단어는 라틴어 (firmamentum, 단단하게 만들어진 것)에서 나온 것으로, 마치 하늘에 단단한 물체가 있는 것 같은 잘못된 인상을 준다. 그렇지만 8절에서는 "하늘" (sky, "창공"; 표준번역)로 번역된다. 또한 14절에서 "궁창에는 광명이 있으며, 이곳은 새들이 날아다니는 곳"으로 그려지므로 (20절), "창공"으로 번역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창세기 7장에서는 "창공의 문들"이 열려 비가 쏟아진다 (7:11-12; 시104:3).

잠언 8:28에서는 창세기 1장의 궁창이 명백하게 "구름"을 가리킨다 ("구름 하늘" [개역], "구름 떠도는 궁창" [표준역]).

창세기 1:6은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창공을 있게 하지만, 7절은 "하나님이 만들었다"고 말한다. 하나는 말씀으로, 다른 하나는 행동으로 이루어 진 것 같다. 창조 기사에서 말씀과 행동은 자주 이렇게 나타나, 마치 중복된 것 같은 인상을 준다 (11, 12절; 14, 16절; 24, 25절). 그러나 "하나님이 만들다"라는 표현은 저자의 관점을 보여주며 (창2:4; 시104:27-30 참조), 이것이 하나님의 소유이며, 여기에 하나님의 주권이 있음을 강조해 준다.

(3) 셋째 날: 뭍과 물의 구별 (1:9-13)

셋째 날에 하나님은 마른 땅과 바다를 나누시고, 마른 땅에 풀과 채소와 열매 맺는 나무가 나게 하신다. 물과 뭍을 둘 다 "좋다"고 말함으로써, 이것들이 인간의 유익을 위해 지어졌음을 말해 준다. 물을 나누는 행동은 홍수 기사 (창 6-9)와 홍해를 나누는 기사 (출 14-15장)와 이어지고 있다.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땅을 누리기 위해, 물을 제거해야 했다. 창조 기사에서 하나님이 물을 길들인 것은 인간의 유익을 위한 것이나, 홍수 기사에서는 큰 물이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사용된다.

(4) 넷째 날: 해와 달과 별로 채우심 (1:14-19)

우리가 넷째 날에 대해서 늘 난처한 질문을 받게 된다. "정말 본문은 넷째 날에 해, 달, 별들이 만들어졌다고 하는가? 그렇다면 그 전에 3일은 해 없이 있을 수 있는가? 셋째 날에 만들어진 초목과 채소는 해 없이 있을 수 있는가?" 우리는 넷네째 날의 중심 관심이 해, 달, 별들의 창조에 있기 보다, 그 삼중적 기능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1) 먼저 창세기 1:1의 "천지"는 우주로서 해, 달, 별들을 포함한다.

(2) 6절에서 "궁창이 있으라"고 말할 때, 하나님은 이전에 없었던 궁창을 만드신 것이다. 그러나 14절을 보면, 구문 구조가 다르다. "하늘의 궁창에 광명이 있어 주야를 나뉘게 하라. 또 그 광명으로 하여금 징조와 사시와 일자와 연한이 이루라." 즉 빛은 이미 궁창에 존재했는데, 이제 날과 밤을 나누며, 사시와 날과 해를 표시하는 역할을 한다. 이 명령을 통해, 봄이 오면 새싹이, 여름이 오면 이슬이, 늦가을이 오면 서리가 내린다.

(3) 15절과 16절의 구조가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15절에서 저자는 "그대로 되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저자의 보고를 마무리하며, 16절에 있는 그의 평을 시작해 준다. 즉, 16절은 해, 달, 별을 넷째 날에 만들었다는 보고가 아니라, 독자들로 하여금 이미 말한 것의 뜻을 설명해 준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광명을 만들어 공중에 두셨다."

창세기 1장에 선포되고 있는 6일 간의 천지 창조는 철저하게 "땅의 관점"에서 소개되고 있으므로, 넷째 날은 해와 달과 별이 땅에서의 생활에 어떤 기능을 가지는지 설명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여기에서 저자는 해와 달과 별들을 "광명"으로 부른다. 이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사실이다. 틸리케는 이것을 아래와 같이 표현하였다. "매우 부드럽게 어조를 낮추어서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이 두개의 램프를 궁창에 달아 놓으셨다". 고대의 세계관에서 보면, 당대의 사람들은 "별은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믿었다. 점성술을 믿는 자들에게는 모든 항성의 움직임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별의 움직임을 잘 관찰하는 것은 우리의 생사화복과 직결된 것이었다. 이런 배경 속에 살고 있던 사람들을 향하여, 성경의 기자는 "별은 우리의 운명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으며, 그들은 우리의 '등불'일 뿐"임을 역설한다. 저자는 하나님 만이 하늘의 광명을 만들었기 때문에, 그 어느 누구도 그가 받아야 할 영광과 존귀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렇게 해서 주님은 햇빛이 땅에 비취게하여, 초목과 동물들이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신다.

(5) 다섯째 날: 바다와 창공을 채우심 (1:20-23)

생물 창조는 다섯 째 날과 여섯 째 날, 두 날에 걸쳐 이루어진다. 다섯째 날에 하나님은 바다와 공중의 생물을 만드시고, 여섯째 날 (1:24-28)에 땅 짐승을 만드시며, 남녀를 만드신다. 창조 기사에서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활동을 묘사할 때에는 "창조하다" (바라)를 의도적으로 쓴다 (1:1의 우주와, 1:21의 큰 물고기와, 1:26의 인간).

다섯째 날이 되어서야 비로소, 창조 기사에서 처음으로 "축복" 개념이 나타난다 ( 1:22; 2:3; 5:2). 바다와 공중의 생물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 인간도 축복을 받으나, 통치력까지 받는다. 여기에서 "축복"은 생명을 주는 것과 연결되고 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어 가라사대 생육하고 번성하여 여러 바다 물에 충만하라 새들도 땅에 번성하라 하시니라" (22절).

하나님의 축복은 창세기의 중심 주제이다. 하나님은 동물들 (1:22), 인간 (1:28), 안식일 (2:3), 아담 (5:2), 노아 (9:1), 족장들 (12:3; 17:16, 20)을 축복하신다. 하나님의 축복은 후손의 선물로 가장 명료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의 축복은 생명과 연관된 모든 것에 임한다. 축복의 기본 개념은 생명이 번성하는 것이다. 이 생명의 번성으로 가족과 나라에 축복이 임한다 (신28:1-14). 현대인은 성공을 찾지만, 구약은 축복을 찾는다.

(6) 여섯째 날: 동물과 인간으로 채우심 (1:24-31)

여기에는 크게 두 종류의 창조가 나온다. 즉 땅에 거하는 "생물"과 "인간"이다. 땅의 생물은 다시 셋으로 나누어져, "집짐승" (육축), "땅에 기는 짐승"과, "들짐승"으로 나누어진다.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나누어진다.

하나님은 동물과 식물을 그 종류대로 창조하신다. 그들의 형태와 구조와 성격을 주님께서 다 만드시고, 그 다양성으로 천지를 채우신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선인장과 제비꽃의 모습 속에 하나님의 아련한 영상이 배여 있다. 즉, 이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자필"이다 (틸리케 48).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명령이 나타나며 (24절), 그리고 평가가 뒤따른다 ("그렇게 되니라", 25절). 25절은 24절에 아주 중요한 것을 첨가하고 있다. 11절에서는 "땅이 채소를 내도록 한다". 그러나 25절(하나님이 들짐승을 만드셨다)은 하나님이 생물을 만드신다는 점을 강조한다. 식물과 동물을 만드는데, 명령은 같지만, 이 두 형태의 생명은 다른 기원을 갖고 있다. 식물은 땅에서 나오며, 생물을 하나님 자신이 만드셨다.

창조 기사에서 인간 창조가 그 절정을 이룬다. 모든 드라마나 오페라에 있어서 절정에 도달하면, 숨을 죽이며 듣는다. 결혼식에서도 서약을 할 때, 숨을 죽인다. 하나님은 이제 그동안 창조하신 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것을 만드려고 하신다. 그는 자신과 가장 닮은 존재를 만들어 보려고 하신다. 이 인간이란 존재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에 대해 생각도 해보셨을까?

이들이 정말 나의 창조의 절정이 될 것인지, 아니면 창조의 흉물이 될 것인지? 이들이 진정 나를 닮은 자가 될 것인지, 혹은 자신을 신이라고 주장할 것인지, 이들 가운데 마리아 데레사 같은 성인이 나올 것인지, 혹은 히틀러 같은 인간이 나올 것인지 하나님은 생각해 보셨을까?

앞에서 주님은 인간의 거처인 땅 (9-13절)을 준비하였고, 그 생명의 순환을 결정하는 해와 달과 별을 만들었다 (14-19절). 이제 인간 창조로 넘어가면서, 인간 존재의 의의를 말하고 있다. 인간 창조는 앞에 있는 다른 창조와 다르게 독특하다. 저자는 미묘한 변화를 만들고 있다.

① 먼저 26절을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전형적인 형식이 나온다.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3인칭 명령 "있으라" (let there be)가 아니라, 보다 인격적인 1인칭 명령인 "우리가 만들자"로 시작한다.

② 앞에서는 "그 종류대로" 생물을 만들지만, 인간 창조는 남자와 여자가 "하나님의 모양 대로" (우리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 진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닮은 것이 아니라 그들의 창조주를 닮았다. 오경 저자는 인간을 소개할 때, 동물과 다르다는 점 뿐 아니라,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 인간은 피조물이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특별한 존재이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것은 이원론적인 생각을 배제해 준다. 인간의 몸과 영혼은 총체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고 있다. "육체는 경멸하고 영혼을 높이도록 애쓰라"고 말하지 않는다.

③ 인간 창조는 "남자와 여자"로 만들어진다. 다른 생물에서 성구별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지만, 인간에서는 아주 중요하게 부각된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 원래 사람은 남녀가 서로 잘 어울려 살도록 지어졌다.

④ 인간 창조의 목적은 땅을 다스리는 것이다. 오직 인간 만이 하나님의 창조계를 다스릴 수 있다. 인간은 모든 생물을 다 다스린다. 공중과 바다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이다. 주님은 인간을 자연의 지배자로 만드신다. 이것은 인간의 원래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의 "지배"는 착취나 위협이나 권력의 남용이 아니라,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잘 돌보고 가꾸는 데 있다. 하나님은 단지 인간을 모든 피조물의 먹이 사슬 중에서 최고로 높은 층에 있도록 만들었다는 뜻도 아니며, 삼라만상의 귀족으로 세우셨다는 뜻도 아니다. 오히려 인간은 가장 고등한 존재로서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을 메시야 왕처럼 돌보고 다스리도록 지음받았다.

⑤ 인간 창조에서 하나님이 "복을 주신" 모티프가 중요하다. 창세기와 오경에서 "복"은 중심 주제를 이루고 있다. 생물들은 이미 다섯째 날에 복을 받았다 (1:22). 하나님의 축복은 모든 생물에게까지 다 확대된다. 그러나 인간이 받은 복은 특히 후손의 복이며, 후손을 통해 문화적 사명을 이루도록 한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하나님의 축복은 "후손"과 "생명" 개념과 밀접하게 이어져 있다. 문화란 결국 생명의 질을 높이는 것이다.

⑥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평가 형식 (4, 10, 12, 18, 21, 25절)이 여기에서 세가지로 수식되어 최종 작품의 완전성을 강조해 준다. 먼저 "모든 것"이다. "좋았다"는 온 창조에 적용되고 있다. 개체 뿐 아니라 전부가 좋다. 둘째로, 일반적으로 앞에서처럼 "이는" 대신에, 여기에서는 "참으로"가 나온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일을 마치셨을 때, 흥분했음을 말해준다. 셋째로, "심히 좋았다"는 완전한 조화가 이루어졌음을 말해준다.

⑦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의 형식은 독특하다. 앞에서는 "한 날" (day, Xth) 형식으로 나오지만, 여기에서는 정관사가 나와, "제 여섯째 날" (day, the sixth)로 부른다. 이 형식은 인간을 만든 날과, 안식일을 묘사할 때만 나타난다. 안식일은 "제 이레" (day, the seventh)로 불린다 (2:3).

4. 창조의 완성: 결론적인 요약적 진술 (2:1-3)

제 7일은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앞의 육일과 아주 다르다. 그러나 이 세절은 아주 아름답게 배열되어, 창조기사를 끝맺어 준다. 2:1에서는 "하늘과 땅"을, 2:3에서는 "하나님이 창조하시다"를 언급함으로써, 1:1과 교차 대귀적으로 연결된다.

1) 창조의 완성 (2:1)

"천지와 만물을 다 이루니라"에서 "만물"은 보통 하늘을 가리키며, 구체적으로 "하늘의 만상"을 뜻한다. 시편 찬양에서는 땅도 포함되어, "하늘과 땅과 그 모든 만물"이란 표현이 나온다. 별 (신4:19; 사40:26)과 아주 드물게 천사들 (왕상22:19)이 하늘의 만물로 언급된다. 아마 여기에서는 천사가 제외되었을 것이다. "땅의 만물"은 그 어디에도 언급되고 있지 않다. 이 절은 1장의 요약적 결론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제 7일에 아직도 마치지 않은 일을 끝내었다는 뜻은 아니다" (F. Delitzsch).

2) 제 이레와 하나님의 안식 (2:2-3)

저자는 제 7일을 다른 날과 구별하고 있다. 이 날에 대한 설명 문체도 독특하다. 이 날은 하나님께서 다른 날처럼 말씀하시거나 일하시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은 이 날을 복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안식일을 축복하시는 것이 독특하다. 성경에서 축복은 주로 생물에게 제한된다. 즉 인간, 동물 등이다.

하나님이 인간과 동물을 축복하실 때, 그것은 생육과 번성과 성공을 뜻한다. 하나님이 창조적 활동을 마치신 날을 복되다고 말하는 것은 역설적이다.

하나님은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에서 "거룩하게 하시다"도 이례적이다. 날을 "거룩하게 한다"는 것은 그 날 속에 "거룩의 속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문법적으로 선포적인 의미를 가지며 (declarative), 이 날을 "거룩하다"고 선포하는 것이다. 왜 "거룩하다"고 선포하는가? 왜냐하면, 이 날은 특별히 구별되어 하나님에게 속한 날이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거룩하시며, 하나님과 연관된 장소와 사람과 물건들이 거룩한 것으로 선포된다. 안식일 외에, 축제일이 거룩하다고 불린다 ( 느8:9, 11에서만). 구약에서 거룩한 것으로 묘사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이 선택하여 구별하였기 때문이다. 안식일은 성경에서 처음으로 거룩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에게 속한 것으로서, 특별한 위치를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는 안식일의 거룩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안식일은 하나님의 창조를 기념하는 날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더라"에서 "마치다" (kalah)는 "완성하다"는 의미이다. "안식하였다" (shabat)의 일차적인 뜻은 "중단하다" (cease)이다. "휴식하다"는 동사는 따로 있다 (nuah). 여기에서는 "휴식" 보다는 "중단"이 더 강조된다 (출31:17 참조). 엿새 동안 하나님은 일을 완성하셨고, 제 7일에는 중단하셨다. 이 노동의 중단은 안식 개념에 대단히 중요하다. 현대인들은 쉬지 못한다. 창세기 저자는 노동의 중단을 통한 하나님의 안식을 강조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하나님이 쉬셨다는 표현은 세 번 나와서 안식을 강조해 준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인간도 제 7일에는 쉬어야 한다 (출 20:8-11). 지주나 사장 만이 쉬는 것이 아니다. 이 날에는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고 명하신다 (출 20:10; 신5:14).

제 7일의 하나님 "안식"은 신학적 표상으로 미래에 중요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안식" 주제는 앞에 있을 것에 대해 미리 예시해 준다 (2:15; 5:29; 8:4; 19:16; 출 20:11; 신 5:14; 12:10; 25:19). 후대 성경 저자들은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안식"과 경건한 자를 위해 기다리는 미래의 "안식" 사이에 있는 연관성을 말해 준다 (시 95:11; 히 3:11).

5. 천지 창조에 대한 신학적 명상

1) 천지 창조는 스스로 계시며 천지를 지으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증거한다.

창세기 1장은 고대의 신화적인 세계관 속에 살던 사람들에게 천지 개벽과 같은 내용을 전해준다. 그들은 우주의 삼라만상 속에 신성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그들에겐 태양도 달도 별도 나무도 곰도 뱀도 다 신이었다. 창세기 1장은 세상의 종교가 신성화 시킨 모든 것을 비신화화 시키며, 세상 만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지어졌음을 증거해 준다.

창세기 1장은 모든 피조물로부터 구별된 자존하시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증거해 준다. 하나님은 이 우주의 일부가 아니다. 그는 시간과 공간을 만드시고 채우시는 초월적인 인격이시다. 구약의 신관은 물활론이나, 정령 숭배나 다신론이나 일신교 등을 통해 진화해 간 것이 아니다. 구약 신앙은 유일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말씀과 창조로 계시한 것이다. 따라서 창세기 1장은 암울한 바벨론 포로 시대를 살던 어느 제사장의 신학적 사색이 아니다.

"누가 창조를 지켜보았는가?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창조에 대해 어떻게 그렇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가? '…이 있으라'는 말씀을 들은 사람도 없고, 천지가 만들어지는 것을 본 목격자도 없지 않는가? 그러나 성경은 마치 목격자의 증인이 말하는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틸리케 16). 이런 논리는 상당히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고, 우리에게는 위협적이다. 이것은 "내세를 가보지도 않고,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동일하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직접 체험해 보아야만 알 수 있다는 인식론에 기초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 중에서 "부자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보면, "죽은 자를 보내면 믿을 것이다"라고 부자가 말하자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으면 죽은 자가 말해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아브라함이 대답한다. 창조의 말씀과 내세에 대한 모든 말씀은 궁극적으로 주님의 계시이다. 이 계시를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믿기 힘들 것이다.

그렇지만, 천지 창조의 구조를 유심히 볼 때, 여기에 하나님을 증거하는 말씀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의 표현에 따르면,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저희가 핑계치 못할 것" (롬 1:20)이다. 또 시편 기자는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고 탄성을 지른다 (시 19:1).

창세기 1장은 단지 유일하신 하나님 만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 만물을 지으시며,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의 신이 수면을 운행하신다. 천지 창조는 "말씀"과 "하나님의 신"으로 이루어진다. 이미 창세기 1장 속에 삼위일체의 씨앗이 나타나고 있다. 유일하신 하나님은 삼위로 계신다.
2) 천지 창조는 창조 질서를 증거한다.


가끔 우리는 "왜 교회당 꼭대기에 피뢰침을 달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가 있다. 십자가 위에 피뢰침을 다는 것은 신성 모독은 아닐지라도, 약간 방정스러워 보인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어떤 상황에도 주께서 교회를 지키시리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피뢰침을 다는 것은 참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혹시 우리는 하나님께서 실수하실까 두려워 피뢰침을 다는가?

우리는 신앙 생활을 하면서, 자연 질서와 초자연 질서의 관계 문제가 단지 피뢰침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님을 알게된다. 우리가 병이 들 때, 자연 질서를 따라 약을 먹고 쉴 것인가, 아니면 초자연적인 기적이 나타나길 기다려야 하는가? 많은 신자들 중에 병이 들면, 기도와 안수를 받고 금식으로 낫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믿음이 좋을수록 의사를 기피하고 약도 사양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기도원에서는 손톱으로 병든 환부를 파내는 소위 "성령 수술"을 한다고도 한다. 이런 곳에서는 멋있는 순환 논법을 사용한다.

"나는 고치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고침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고침을 받지 못할 때에는 나의 능력이나 믿음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의 책임이다. 왜냐하면, 나는 고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신이 고침받지 못한 것은 당신의 불신앙 때문이다."

좀 더 과격한 사람들은 모든 병을 귀신에게 돌린다. 감기까지도 귀신의 역사로 보므로, 귀신을 내어쫓아야 한다. 이런 사람은 모든 질병을 영계의 역사로 본다. 이 세상에는 성령과 악령 뿐이며, 성령으로부터 오지 않는 것은 악령의 것으로 본다. 이들은 창조 질서가 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좀 더 깊이 들어가보면, 카톨릭 교회에서는 초자연적인 생활을 추구하며 이상적이고 신비로운 품성에 도달하기 위해 자연적인 생활이 해롭고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자연적인 생활 자체가 죄는 아니지만, 장애가 된다. 가장 선하고 가장 확실하게 완전에 이르는 길은 빈곤, 순종, 청빈과 성결의 네가지 덕행이다. 따라서 보다 경건한 삶과 이상적인 삶을 살기 위해서는 수도원적인 삶을 추구하며, 인간의 자연성을 구성하는 식욕과 성욕과 혈연을 부인해야 한다. 카톨릭 신학에서는 자연과 초자연이 갈등을 일으키지는 않지만, 초자연의 우월성 때문에 자연에 대한 억압이 있다. 왜냐하면, 초자연적인 것이야 말로 본연의 질서이기 때문이다. 초자연적인 삶이야 말로, 자연적인 생활을 넘어 높이 우뚝 솟아 있으며, 이것을 위해 자연적인 삶을 가능한 많이 부인해야 한다. 수도승은 종교적으로 최고의 경지에 이른 신자이다. 이런 신앙은 인간의 기본 질서가 원래 창조 질서였음을 간과하고 있다.

우리 주위의 여러 교회에서는 입시철이 되면 수험생을 위한 기도회를 하게된다. 물론 정신적인 스트레스 속에서 고통받은 수험생과 그 부모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성적과 상관 없이 운수 대통하여 내가 아는 문제가 많이 나오고, 모르는 것도 잘 찍을 수 있도록 기도한다면, 비성경적인 기도회가 될 것이다. 사업에도 우리는 가끔 "별미 축복"을 운운하며, 야곱이 이삭에게 맛있는 음식을 드려 축복을 받은 것을 가지고 목회자를 대접하여 복받으려고 한다. 이런 행태는 신앙을 주술로 바꾸는 것이다.

신명기 22:8에는 "집을 지을 때 지붕에 난간을 세우라"고 명한다. 난간의 유무에 따라 지붕에서 떨어진 사람에 대한 책임 문제가 가려진다. 난간에서 떨어지는 것을 운명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람은 실수로 먼저 죽을 수 있기 때문에, 건축적인 대책을 세우라고 말한다. 예수 믿고 난폭 운전을 하는 사람은 이런 구절을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세우신 가장 기본적인 질서는 창조 질서이다. 콩 심은 데 콩나고, 팥 심은 데 팥나는 것이 주님의 질서이다. 주님은 창조 질서의 아버지이다. 창조 질서도 하나님의 질서이다. 우리는 이 질서를 더욱 사랑하고, 이 질서 속에서 참된 지혜의 기초를 찾아야 한다 (잠 3:19-26; 8:22-31; 14:31; 20:12; 욥 38장 이하).


3) 천지 창조는 구원 질서를 증거한다.

첫 창조가 완전한 창조였다면, 구원은 죄로 말미암아 일그러진 창조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며, 창조질서를 더욱 견고하게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과 창조 사이에 있는 내재적인 통일성을 바로 보아야 한다. 우리 주님은 "구속주와 창조주"이시다 (사 44:24). 우리의 구원은 창조와 완전히 동떨어진 별개가 아니며, 창조의 질서를 그리스도의 사랑과 희생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1) 창조는 구원의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하나님께서 혼돈의 깊음을 가르고, 어둠에 빛을 비추어 질서를 세운 창조는 구원의 파라다임이 된다 (시 74:12-17). 하나님께서 물을 정복하신 사건은 역사에서 그의 구원을 보증해 준다 (사 42:5; 43:1; 49:5; 시 22:9; 139:13-16).

(2) 창조는 출애굽 구원의 모델이 된다. 주님은 홍해를 가르고 육지를 내사 자기 백성들로 통과하게 하시며, 약속의 땅에 이르게 하신다 (사 51:9-11).

(3) 교회의 구원은 새로운 창조이다 (고후 4:6; 5:17). 창조주 그리스도께서 (요 1:1; 골 1) 옛 것보다 더 나은 새 창조를 이루신다.

<참고문헌>

김이곤. 1993. 창세기. 서울: 전망사.

서인석. 1986. 한 처음의 이야기: 창세기 1-11장의 기호학적 설화분석. 서울: 생활성서사.

손석태. 1993. 창세기 강의. 서울: 성경읽기사.

헬무트 틸리케. 1988. 세상이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이진희 옮김. 서울: 컨콜디아사.

에드워드 J. 영. 1982. 창세기 1장 연구. 이정남 옮김. 성광문화사.

Youngblood, R. F. 1991. The Book of Genesis. Grand Rapids: Baker.

"보시니 참 좋았다", 성서와 함께 편집부 n.d.


천지 창조 직후의 이야기
(창2:4-4:26)

김정우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 이러하니라"로 시작하는 새로운 단락(2:4-4:26)은 (1) 에덴 동산의 이야기(2:5-25), (2)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야기(3:1-24), (3)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4:1-26) 세 개를 담고 있다. 여기에 나타난 세 이야기는 천지 창조가 이미 끝난 후(1:1-2:3)의 일들을 다루고 있으므로, "천지의 창조된 대략"이란 제목과는 전혀 어울리는 것 같지 않다. 왜냐하면, "대략"이란 말은 "대체의 개략"이란 뜻으로서, 마치 다시 한 번 천지창조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그 과정을 요약하여 진술하려는 듯한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창세기 저자는 무슨 뜻으로 "대략"(toledot)이라는 말을 썼을까? 창세기에는 모두 10개의 "대략"이 나타나며, 여기에 그 첫번째 "대략"이 소개된다. 이 단어는 창세기의 다른 부분에서 "이것은 X의 사적"(6:9), 혹은 "후예"(10:1)로 번역되었다. "후예"라는 번역은 어근(yalad, "낳다")에 근거한 것이다. "후예"의 관점에서 본다면, 창세기 2:4-4:26의 이야기는 "천지 창조의 후예", 즉, 아담과 하와의 이야기가 된다. 그러나 "천지 창조의 후예"라는 표현은 자연스럽지 않다. 이 용어는 족장사에서 "X의 가족 역사"라는 뜻으로 나타난다. 족장들 이야기는 X의 아버지가 죽음으로 시작하며, X 자신의 죽음으로 마치면서 한 단락을 이룬다. "이것은 이스마엘의 가족사"라는 형식은 이스마엘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이 죽은 후 이스마엘이 족장으로 살던 이야기를 다루며, 이스마엘의 죽음으로 끝난다(25:12-18; 참조 25:19-35:29). 따라서 이 표제는 X가 대가족(히브리어, moledot)의 우두머리로 있는 기간 동안 일어난 그 가족의 주요 사건들을 담고 있다. 그러나 내용을 살펴보면 늙은 X가 형식적으로 대가족을 관장하고 있지만, 이야기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자들은 그의 아들들이다. 따라서, "이삭의 후예(가족사)"(25:19)는 이삭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의 죽음으로 시작하며(25:11), 이삭이 족장으로 살 동안 그의 두 아들 야곱과 에서 이야기를 주로 담고 있다. "야곱의 약전"(37:2) 역시 야곱 자신의 이야기 보다는 요셉과 유다를 중심으로 한 그 형제들 이야기를 담고 있다. 창세기 2-11장 안에서도 같은 논리가 6:9에 나타난다. "이것은 노아의 가족사이다"라는 표제는 홍수 전 족장들 중 마지막 사람 라멕의 죽음으로부터(5:30-32), 노아의 죽음 사이의 기간을 다루고 있다(9:29).

그러나 이 용어는 태고사의 다른 곳에서는 약간 느슨하게 사용된다. 정리하자면, 모든 경우에서 "X의 대략"은 X와 그의 후손들이 행한 것을 다루지, X의 기원을 다루지 않는다. 여기에서는 천지에 적용되었으므로, "천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을 묘사하지, 천지가 만들어진 과정을 말하지 않는다"는 스키너(Skinner)의 관찰은 옳다. 이렇게 본다면, 이 표제는 2:4에 뒤따라 나오는 이야기에 아주 적절하다. 따라서 우리는 문서설에서 주장하는 바와 같이 2:4을 상반절과 하반절로 나누어, "천지 창조의 대략"을 앞 창조기사(1:1-2:4 상)의 표제로 삼을 이유가 없다. 또한 2:4에서 시작된 "천지 창조의 대략" 이야기는 천지가 만들어진 직후, 첫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첫 무대인 에덴 동산의 이야기(2:5-25)와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야기(3:1-24)와 그들의 첫 후손인 가인과 아벨의 이야기(4:1-26)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2:4-4:26). 최소한 창세기 저자는 이 세 이야기를 한 묶음으로 보기 원한다.

1. 에덴 동산 이야기(2: 5-25)

헬무트 틸리케는 "인간이 무엇인지, 그에게 맡겨진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서는 연극이나 영화를 볼 때처럼, "누가 극작가이며, 연출자이며, 배우인지, 그리고 구성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알아야 한다고 한다(1988:77). 좀 더 구체적으로 "무대의 막은 올라갔는데, 나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내게 맡겨진 역할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연극을 하는 것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이제 천지 창조가 끝나고, 인간들이 무대에 올라 드라마를 진행하는 이 장에서 우리는 장르와 연출자와 무대와 배우의 관점으로 본문을 살펴보려고 한다.

1)장르 : 역사인가 초역사인가?

에덴 동산 이야기는 "역사"인가, 혹은 "초역사"인가? 혹은 "역사로서의 실제성"과 "초역사로서의 예표성"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야기인가? 이것을 "역사"로 보는 것은 이 이야기를 시간과 공간 속에서 일어난 실제적인 사건 묘사로 보는 입장이며, 네 가지 사실에 근거한다. (1) 이 단락의 문학적인 문체는 족장들의 삶을 묘사하는 설화와 같은 형식이다. (2) 신약성경은 이 이야기를 사실적인 것으로 다룬다(마 19:5; 롬 5:12; 고전 15:21; 딤전 2:11-14). (3) 인류의 계보는 신구약 성경에서 아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대상 1:1; 눅 3:23-38). (4) 에덴 동산은 지리적으로 명시되어 있다(창 2:10-14). 이 이야기를 "예표적 성격을 띤 초역사"로 보는 입장 역시 네 가지 사실에 근거한다. (1) 창세기 저자는 2:24에 있는 아담과 하와의 결혼을 모든 결혼에 적용시킨다. (2) 예수 그리스도 역시 이 결혼 기사를 모든 결혼에 적용시킨다(마 19:6). (3) 창세기 3:16-17에 있는 해산의 고통과 노동의 허무는 모든 인간의 삶을 묘사해준다. (4) 구약에 나타난 인물과 제도와 사건과 장소는 신약성경에서는 영원한 실재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된다. 신약성경에서 뱀은 "마귀"(요일 3:8; 계 12:9) 혹은 "악한 자"(요 8:44; 마 13:38; 요일 3:8)와 동일시 되며, 아담은 "인류의 대표"(롬 5:12; 고전 15:21)로 나타난다. 또한 "생명 나무"는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에서 승리한 성도들이 누릴 영원한 생명을 상징하는 것으로 묘사된다(계 2:7; 22:1). 따라서 우리는 본 장이 역사성을 담은 사건을 묘사하나, 한걸음 더 나아가 역사를 초월한 종말론적인 실재를 예표하는 이야기로 볼 수 있다. 이 점에 대해 게할더스 보스(G. Vos)는 "실제 사물에 구현된 실제적 상징성"이 "성경 상징의 중심 특성"이라고 잘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덴 동산의 이야기를 읽을 때, 첫 에덴 동산 뿐 아니라 모세의 "성막"과 솔로몬의 "성전"과 신약의 "교회"와 하늘의 "시온산"까지 함께 보아야 할 것이다.

2) 연출자: 주 하나님

주님은 여기에서 "인간을 만드시며"(7절), 그들이 거처할 "동산을 만드시고"(8절), 인간에게 "노동"(15절)과 "삶의 규범"(16-17절)과 "결혼 제도"(18절)를 정해 주신다. 특히, 주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공인 인간을 최고의 걸작품으로 만드시고 그를 자신의 대리인과 대표자로 세우신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시는 모습이 특이하다(7절; 욥 10:8-12; 시 139:13- 17). 창세기 2:7의, "주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인간 창조 보고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라는 1:26-27의 인간 창조와 달라 보인다. 그러나 2장의 인간 창조는 2:7에 제한되어 있지 않고 전장에 걸쳐 나타나므로 전체의 흐름 속에서 볼 필요가 있다. 2장에서 "흙으로 사람을 지으셨다"는 표현은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음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고유한 모습 즉, 인간이 천상의 존재는 아님을 강조해 준다. 그는 하나님이 만드신 다른 피조물처럼, "땅의 흙으로" 만들어졌다(2:19). 즉 인간은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흙에서 나온 존재로서 창조주의 피조물임을 강조해 준다. 이것은 타락 후의 인간 운명을 내다보게 한다. 타락 후 인간은 다시 흙으로 돌아간다(3:19). 주님은 토기장이가 진흙을 주물러 작품을 만드는 것 같이 인간을 자신의 작품으로 만드셨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땅에서 나온 자이며 흙으로 빚어진 자이다. 땅 자체도 주님의 선물이지만, 인간 자신은 땅의 진흙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그에게 생명의 기식을 불러일으킬 때까지, 그는 진흙에 불과하다. 인간이 흙에서 만들어진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모든 피조물과는 달리 주님의 "생기"를 얻은 존재이다. 여기에서 "생기, 혹은 생명의 호홉"(nishmat hayim)은 창세기 7:15, 6:17과 에스겔서 37장에 있는 "생기, 혹은 생명의 바람"(ruah hayim)과는 다른 단어이다. 우리 말로 "기"로 번역된 단어는 "호홉"이란 뜻으로서 "바람"보다 더 협소하고 드문 용어이다. 일반적으로 "호홉"(neshama)은 "바람"(ruah)보다 좀 더 희소하게 나타나며, 이사야 2:22과 신명기 20:16에서와 같이 "일반적이고 조용한 호홉"을 뜻한다(Snaith 1944:144). 여기에서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기"를 주셔서, 인간이 부드럽게 호홉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었다는 데 있다. 호흡은 주된 인간의 중심 특징이다(수 11:11; 사 2:22).

본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령으로 인간이 호흡할 수 있게 하셔서 인간이 숨쉬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창세기 2:7에 따르면, 주님께서 그 생기를 불어 넣음으로 인간은 비로소 "생령"(nepesh haya)이 되었다고 한다. 동일한 표현(개역에서는 "생물"로 번역됨)이 창세기 2:19에서 들짐승과 새들(창 9:9) 뿐 아니라 바다 고기에도 적용된다(1:20). 동물들도 동일한 생명력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창 6:17; 7:15, 22; 전 3:19, 21). 그러나 동물 창조는 인간 창조만큼 직접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만이 하나님께서 직접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으심으로 "생령"이 된 것이다. "생령"에서 "영"으로 나오는 단어는 구약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는 단어 중 하나로서, "식욕, 목구멍, 인간, 영혼, 자신, 신" 등의 뜻을 갖고 있다(Wolff 1974:7-25pp). 그러나 본문에서 그냥 "영"이라고 하지 않고, "생령"이라고 말한 것이 흥미롭다. 형용사 "산"은 죽은 것과 대조를 이룬다. 즉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 넣으심으로써, 인간이 살아 있는 전 인격적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인간은 지정의를 가진 인격체로서 살아 움직이는 존재가 되었다. 그는 앞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역사의 무대에서 어떤 역할을 할까?

3) 무대: 에덴 동산

(1) 위치: 동쪽의 산(8절)

① 동쪽은 생명의 장소를 가리킨다. 에덴 동산은 "동방의 에덴"에 위치한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동쪽은 생명의 장소이다. 동방은 해 뜨는 곳으로, 빛이 오는 곳이다. 따라서 에덴은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장소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하나님께서는 첫 인간을 자신의 임재가 충만한 생명의 땅에 두셨다. 에덴은 동산(garden)이다. 동산은 아름다운 정원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하나님께서 이 동산을 만드시고, 이곳에 인간을 초대하여, 자신과 교제를 나누게 하시며, 인간과 동물, 식물이 조화를 이루는 복을 누리도록 하신다. 하나님은 여기에서 인간을 만나시고, 함께 교제를 나누신다(3:8참조). 이곳은 생명과 평화의 장소로서 죄와 죽음이 배제되어 있다(3:22; 계 21:8). 하나님의 그룹이 동산의 평화를 지키고 있다(3:24; 대하3:7).

② 에덴은 산으로 묘사된다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다"(10절). 강이 시작하는 지점이므로 이곳은 산이다. "산"으로서 에덴은 불가침성과 높은 위엄을 가지고 있다. 이곳은 영광스러운 곳이다. 에스겔 선지자는 영광스러운 두로 왕이 마치 "하나님의 성산"으로 묘사된 에덴 동산에 살고 있는 것처럼 묘사한다(겔28:13-16). 사도 요한은 우리의 구원의 완성이 에덴의 산에서 이루어질 것으로 그린다(계 21:10, 22:1-2). 출애굽기 15:17에 따르면, 하나님이 선택하신 거룩한 산이 출 이집트의 최종적인 목적지이다(히 12:22; 골 3:1-4 참조). "산"으로서 에덴의 영상은 이후에 "시온산"과 "교회"로 이어진다. 이 거룩한 산에 살기 위해 주님에 대한 믿음과 순종이 요구된다(시15:1).

(2) 동산의 나무들(9절)

동산에는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아름답고 무성한 나무들이 있었다. 이 나무의 열매들은 잔치상에 놓인 과일들처럼 생명과 번영을 나타낸다. 하나님이 주신 생명의 복이 나무와 과실의 영상으로 그려진다. 이 세상의 나무들은 여름의 가뭄에도 싱싱하게 살아 있어, 하나님의 생명을 상징해 준다(시 1:3; 렘 17:8). 특히 에덴 동산의 중앙에는 "생명나무"와 "선악을 아는 나무"가 있었다. 저자는 이 두 나무가 동산 중앙에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두 나무는 에덴에서 뿐 아니라 이후 이스라엘의 예배에서도 중심에 자리잡는다. 먼저 생명나무는 성경에서 잘 알려진 나무이다.

길가메쉬 서사시에서는 "노년에 젊음"을 주는 깊은 바다의 약초를 언급한다(11:268-89). 창세기 3:22도 이 나무가 그 과실을 먹는 자에게 영생을 주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이 열매 속에 어떤 신비하거나 주술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가 영원한 생명이 됨을 이 나무가 상징적으로 말해 준다고 보아야 한다. 잠언에서는 지혜(3:18)와 의의 열매(11:30)와 소원 성취(13:12)와 부드러운 혀를 "생명나무"라고 한다. 즉, 이것들은 그것을 소유한 자들에게 넘치는 생명을 준다. 성막에 있는 금촛대는 생명나무를 상징한다. 열두덩이의 빵에 빛이 임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먹이심을 상징한다(출25:31- 35; 레24:1-9). 주님은 또한 동산 중앙에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두셨다. 주님은 인간으로 하여금 원래의 창조된 상태를 넘어, 더 나은 도덕적, 윤리적 성숙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두셨다. 이리하여 이 나무는 인간의 지적이고 윤리적인 수준은 원 창조 상태를 넘어 완성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자신의 인격적인 결단을 통해 진정 하나님의 모습을 내면 속에서 이루어갈 수 있는 길이 이 나무를 통해 제시된다.

(3) 동산의 강들(10-14절)

에덴 동산에는 땅의 네 방향을 나누는 강이 흐르고 있었다(10절). 에덴 동산은 강의 근원에 위치한다(13-14절). 저자는 강의 위치를 분명히 하여 그 강이 흐르는 땅의 성격을 묘사하려고 한다. 두 강은 우리가 잘 아는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힛데겔) 강이다. 나머지 두 강인 비손과 기혼은 찾기가 어렵다. 성경에서 "구스 땅"은 이디오피아이기 때문에, 이것은 이디오피아를 흐르는 강으로서 "이집트의(나일) 강"으로 볼 수 있다. "이집트의 강"은 후에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의 땅의 경계가 된다(창 15:18). "하윌라" 땅은 찾을 수가 없다. 에덴 동산에 흐르는 강은 문자 그대로의 강이지만, 영적인 의미와 천상적 의미를 함께 갖고 있다. 에덴 동산에서 땅의 사방으로 흐르는 것은 하늘의 복이 성전을 통해 온 세상으로 흘러 가는 것과 같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의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오고, 신약에서는 신자의 내면에 하나님의 성령이 생수처럼 흐른다(요 7:37-39). 생수의 샘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보좌에서 흘러 내린다(렘 17:13; 겔 47:1; 계 22:1). 그 물이 풍성함은 바다를 채우며(슥 14:8), 그 매력은 하나님의 도성을 기쁘게 하고(시 36:8-9; 46:4), 그 아름다움은 수정처럼 깨끗하며(계 22:1), 그 능력은 소금물을 단물로 바꾸며(겔 47:8-9), 그 정결케 하는 힘은 예루살렘 거민의 죄를 씻고(슥 13:1), 그 치료의 힘은 생명나무를 소성케 한다(겔 47:12; 계 22:2).

(4) 동산의 보석들

에덴 동산은 끝으로 보석 모티프를 보여주고 있다. 이 동산에는 "금"과 "정금"과 "베델리엄과 호마노"가 있었다(12절). 이 동산의 보석은 에스겔 28:13(옛적에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어서 각종 보석 곧 홍보석과 황보석과 금강석과 황옥과 홍마노와 창옥과 청보석과 남보석과 홍옥과 황금으로 단장하였었음이여)에 더 자세히 나타난다. 후에 모세의 성막도 보석으로 가득찬다. "너 곤고하며 광풍에 요동하여 안위를 받지 못하는 자여 보라 내가 화려한 채색으로 네 돌 사이에 더하며 청옥으로 네 기초를 쌓으며 네 성문을 만들고 네 지경을 다 보석으로 꾸밀 것이다"(사 54:11-12). 보석은 주로 사치에 사용되었기 때문에,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보석은 부정적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할 때에는 보석이 적극적으로 사용된다. 동산의 금과 보석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 준다. 학개 선지자는 성전의 금과 보석을 구체적으로 언급한다(2:7-8). 사도 요한도 새 예루살렘의 보석을 언급한다(계21:18). 보석으로 가득찬 에덴 동산의 모습은 구약 성전과 신약 교회의 참된 모습을 상징해 준다.

4) 주연 : 아담과 하와

(1) 인간은 제사장이다(15절)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동산에 "두신"(2:8) 목적을 설명해 준다. 주님께서 그들을 두신 목적은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한다"(le'abedah uleshamrah)로 번역되었다. 여기에서 "그것"은 여성형 의미(-ah)로 나타나 대부분 "동산"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이렇게 보면, 아담에게 주신 사명은 기본적으로 동산을 돌보고 지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타락 이전에도 노동이 주어졌다. 그러나 "동산"(gan)은 남성형이다. 따라서, "예배하고 순종하다"(to worship and obey)로 번역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렇게 보면 동산에 살게된 인간은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에게 순종하기 위해서 지어졌다. 그의 삶은 예배와 순종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단지 동산에서 일하는 일꾼이나 동산지기가 아니라 제사장으로 세움을 받았다. 이것은 오경의 주제와도 일치한다. 후대에서도 "일하다"('abad)는 성전에서 일하는 것으로 자주 사용된다. 시편 104편에서 우주는 주님의 성전이며, 인간은 주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다(겔 28장). 이스라엘은 약속의 땅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으로 부름받는다(출 19:6).

(2) 인간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자유의지를 가진다(16-17절)

2:16-17은 성경에서 나타난 첫번째 금령이다.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선악과"는 성경에서 오직 이 이야기에만 나오기 때문에 그 뜻을 알기 어렵다. 그러나 이것은 2:9, 17과 3:5과 끝으로 3:22에 나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으므로 그 뜻을 문맥에서 찾아 볼 필요가 있다. 생명나무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교제가 주는 "생명의 복"을 상징하듯이, 선악과는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조건성"이 있음을 말해준다. 주님과 아담의 관계는 주님의 주권적인 은총으로 시작되었지만, 그 관계의 유지는 그가 먹어서는 안되는 금령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인간은 천상천하에 유아독존적인 존재가 아니다. 따라서 "선악과"를 따 먹는다는 것은 앞으로 "선악"의 문제를 스스로 결정하겠다는 "인간의 자율성"을 추구하겠다는 것이 된다. 즉, 선과 악의 기준이 주님과 그의 말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알아서 결정하겠다는 의지의 천명이 "선악과"를 따 먹는 시험으로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새로운 형태의 "선악과"를 주님으로부터 얻는다.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전해 주었다. 하나님이 주신 좋은 땅에서 복을 누리며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신 선악의 기준인 계명을 지키는데 달려 있었다(신 30:16). 성경의 첫 금령이 지닌 중심 내용은, 하나님 만이 인간에게 좋은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점이다. 우리가 "좋은 것"을 누리기 위해서는 그를 믿고 순종해야 한다. 우리가 불순종하면, 우리 자신이 선하고 선하지 않은 것을 선택해야 한다. 현대인에게는 이것이 아주 좋아 보이지만, 창세기 저자에게 있어서는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최악의 운명이 된다.

(3) 인간은 부부 간에 서로 연합하며 사랑한다(2:18-25)

2:16-17절에서 인간이 지켜야 할 조건을 일반적으로 제시한 후, 하나님이 알고 계신 "선"을 제시한다. 즉 남자를 위해 여자를 창조하신다. 창세기 첫 장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이 선인지 아신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이제 여자 창조가 하나님이 아시는 선의 원형적 예가 된다. "남자가 독처하는 것은 선하지 않다." 여기에서는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의 "동반자적 성격"(partnership)이 강조된다. 사람이 동물들의 이름을 지었지만, "아담에게는 배필이 없었다." 동물의 이름을 짓는 이야기가 여자를 창조한 이야기의 일부가 된다(20절). 사람이 동물의 이름을 짓는 것은 자신의 적절한 배필을 찾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아담은 자신의 배필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달리 말하자면,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다른 존재였다. 아담은 자신과 같은 자를 발견하고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노래한다. 남자는 자기를 닮은 자를 여자에게서 찾았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2:18)에서 전통적으로 교회는 "돕는 배필"이란 단어에 근거하여 남성 우월론과 한 걸음 더 나아가 남성의 여성 지배론을 정당화 시켰다. 이 단어의 원어('ezer kenegdo)는 "그에게 어울리는 조력자"를 뜻한다. 문맥이 이 점을 더욱 잘 드러내어 준다. 아담은 동물들 중에서 그를 닮은 자, 혹은 그의 짝('ezer kenegdo)을 찾을 수 없었다(2:20). "그의 짝" 혹은 "배필"이란 단어 원래의 뜻은 "그의 맞은 편에 있는 자"로서 성경에서 단 두 번 여기에만 나타난다. 이것은 "똑 같은 자"는 아니지만, "동등하고, 어울리는 자"(BDB 617)를 뜻한다. 따라서 "배필"이란 개념 속에 여성의 열등성은 없다. 두번째로, "돕는 자" 혹은 "조력자"는 우리의 문화적 배경에서는 종속적인 개념을 내포하고 있으나, 성경에서는 이런 종속과 열등의 개념을 찾아 볼 수 없다. 오히려 "돕는 자"는 "도움을 받는 자" 보다 더 우월한 위치에 주로 나타난다.

이 용어는 구약성경에서 약 열 아홉번 나타나는데 주로 "하나님"을 가리키는데 사용되며(출 18:4; 신 33:29; 시 20:2; 121:1, 2; 124:8; 89:19), 세 번 인간에게 사용되는데 이것도 예언서에서 군사적인 도움을 강자가 약자에게 주는데 사용되고 있다(예, 사 30:5 [이집트의 바로]; 겔 12:14[예루살렘 왕을 호위하는 자]). 물론 창세기 2장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도움을 주어야 한다고 해서, 여자가 남자 보다 강하다는 뜻은 아니다. 본문의 문맥에서 중요한 사실은 남자 혼자로서는 완전한 인간이 될 수 없다는데 있다. "돕는다"는 개념은 일상 생활에서 가사나 생업을 도우는 것 정도가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서로 받쳐주며, 함께 해 주는 것이다. 땅을 다스리는 사역을 함께 하는 동료요, 동역자인 것이다. 따라서 여자가 남자에 비해 존재론적으로 열등하다는 개념은 여기에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남녀 간의 상호 의존성이 명백히 나타난다. 그들은 동등하나 다르며, 다르나 상호보충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이는 뼈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28절)는 인척관계를 표시하는 구절이다. 라반은 그의 조카 야곱에게 "너는 참으로 나의 골육(뼈와 나의 살)이다"고 말한다(삿 9:2; 삼하 5:1; 19:13-14). 우리는 가족관계에서 "핏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히브리인들은 뼈와 살의 관계로 이해하고 있다. 창세기 2:23의 문맥을 살펴 보면, 인간 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골육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며, 남자와 여자가 연합하여 골육관계가 이루어진다. 이런 사상적 배경 때문에 후에 레위기에서는 짐승과의 교합을 가장 가증하게 여긴다. 창세기 2:23은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란 최상급을 사용하여 부부관계는 인간관계 중 가장 가깝고 친밀하고 지속적인 관계임을 강조해 준다. 우리는 천지 창조 직후의 첫 이야기인 에덴 동산 이야기를 들으면서, 좋으신 하나님께서 전인격적인 인간을 만드셔서, 산과 나무와 강과 보석이 넘치는 거룩한 동산 에덴에서 두시며, 그를 제사장과 자유인으로 세우셔서 자신의 뜻을 이 땅에서 실현하고자 하는 것을 살펴 보았다.

"구속사적 관점에서 본 가정: 그 근원과 타락과 회복"

창 2:18-25

김정우

구약은 가정의 창조로 시작하여(창 2:18-25) 잇따른 첫 가정의 붕괴(창 3:8-20)와 화해한 가정에 대한 희망찬 환상으로 마친다(말 4:6). 죄로 말미암아 역기능으로 변한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은 천적처럼 변했는데, 하나님이 보내실 마지막 선지자 엘리야를 통해 서로의 마음이 합해지고 가정 안에서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질 것을 바라보는 것으로 구약은 끝나고 있다. 복음서의 기사는 말라기가 예언한 엘리야 선지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한다. 그는 다윗의 후손 요셉의 집에 태어난다. 그러나 요셉의 집은 시작도 하기 전에 무너질 뻔 하였다. 예수께서는 가정에 대해 이율배반적인 말씀을 하셨다.

"나는 가정을 나누기 위해 왔다"(마 10:34-35). 그러나 그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시며 종말론적 언약공동체로서 더 큰 가정을 세우고 있다(막 3:31-35).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지막 부탁은 자신의 어머니를 제자 요한에게 맡긴 것이었다(요 19:26-27).

신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구원사는 가정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노아의 가정은 새 인류의 시작을 이루고, 아브라함의 가정은 믿음의 집을 시작하고, 야곱의 가정은 이스라엘 12 지파의 근간을 형성한다. 신약에서는 가정을 중심으로 초대교회가 이루어진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의 구원사에 있어서 가정은 전략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곳이다. 우리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가정의 시작과 타락과 회복을 보며 주님께서 세우시는 가정의 질서와 가정의 참된 목적이 무엇인지 듣고자 한다.

1.창조에 나타난 가정 질서(창2:18-25)

본문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에덴 동산을 만드신 후 아담과 하와가 만나는 장면을 아름답게 그려주고 있다. 온 세상이 인간이 살 수 있는 곳이 된 후, 하나님의 첫 작품은 가정의 창조였다. 교회도 학교도 없고, 사회도 국가도 만들어지기 전에 주님은 가정을 만드신다.

1) "사람이 독처하는 것은 선하지 않다"(2:18상)

아담을 위한 하와의 창조는 아담이 여러 동물들의 이름을 짓는 배경에서 나타난다(20-22절). 그가 동물의 이름을 짓는 것은 자신의 적절한 배필을 찾는 과정이었다. 그러나 아담은 수많은 동물 속에서 자신의 참된 배필을 찾을 수 없었다. 달리 말하자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다른 동물과는 다른 존재였다. 그는 동물과는 다른 배필을 원했고, 그 배필을 찾을 때까지 참된 만족이 없었다.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는 창세기 1장이 배경에서 볼 때, 아주 역설적이다. 주님은 천지창조를 마치시고,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셨다(창 1:31). 그러나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을 보시고 "좋지 못하다"고 평가하신다. 마치 자신의 창조에 결함이 있는 것처럼 말씀하신다.

이리하여 주님은 남자를 위해 여자를 창조하시기로 작정하신다. 남녀가 어우러져 더불어 살며, 사랑과 봉사의 공동체를 이루도록 주님은 결혼 제도를 세우시기로 결심하신다.

2)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2:18 하)

"돕는 배필"('ezer kenegdo)이라는 말은 현대어 번역에서 "도우는 자"(a helper; RSV), "배필"(a helpmate; JB), "적절한 도움"(a fitting helper; New Jewish V), "그에게 적합한 도움"(an aid fit for him; AB), "돕는 사람, 곧 그의 짝"(표준새번역) 등으로 번역된다. 우리말 번역의 "돕는 배필"은 독자의 문화적 배경에 따라 마치 여자가 남자의 "조수" 혹은 "시녀" 같은 느낌을 시사할 수 있다. 사실 전통적으로 교회는 "돕는 배필"이라는 번역에 근거하여 남성우월론과 한 걸음 더 나아가 남성의 여성 지배론을 정당화 시켰다(이우정 1985:150; Calvin, Genesis 129). 따라서 우리는 "도우는 자"('ezer)와 "그 맞은 편에 있는"(kenegdo)이란 두 용어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살펴야 할 것이다.

먼저 "도우는 자"('ezer)는 우리의 문화적 배경에서는 종속적인 개념을 내포한 듯이 보이나, 성경에서는 일반적으로 "돕는 자"는 "도움을 받는 자" 보다 더 우월한 위치에 나타나므로, 종속과 열등의 개념을 찾아 볼 수 없다. 이 용어는 구약성경에서 약 21번 나타나는데 주로 "하나님"을 가리키는데 사용되며(출 18:4; 신 33:29; 시 20:2; 121:1, 2; 124:8; 89:19 등), 세 번에 걸쳐 사람을 가리키는데 이것도 강자가 약자에게 군사적인 도움을 주는데 사용되고 있다.1) 따라서 이 단어는 "구원자"란 뜻으로 사용될 수 있다.2) 그러나 여기에서 하나님은 아담의 근원적인 고독을 풀어줄 존재를 만들려고 하지, 그의 구원자를 만들려고 하지 않으므로 "구원자"라는 번역은 적절하지 않다.

또한 "도우다"(히, 'azar)는 동사는 "건지다"( to rescue), "구원하다"(to save)는 뜻 뿐 아니라, "강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음을 유의해야 한다(페니키아어 가자르, gzr, "강한"). 그러므로 이 단어는 "돕는 자" 뿐 아니라, "힘센 자", 혹은 "강한 자"로도 번역할 수 있다.3) 만약 이런 뜻이 가능하다면, 하나님은 아담의 배필로서 동물과는 다른 "강한 자"를 만들려고 하신다. 사실 하와는 강한 자이며, 강한 여자는 아름답다(잠 31:10-21).

두번째로, "그 맞은 편에 있는"(kenegedo)이라는 용어를 직역하면 "그를 마주 보는"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꼭 같은 자"는 아니지만, "동등하고, 어울리는 자"(BDB 617)로서 "그에게 적합한 자" 혹은 "그에게 적절한 자"를 뜻한다. 특히 미쉬나 히브리어에서 "앞에 있는 것 같은"(keneged)은 "동등한"이란 뜻을 가진다.

"토라 연구는 다른 모든 계명에 동등하다(keneged)". 이러한 맥락에서 본다면 여자는 "남자 앞에 있는 동등한 강자"로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가 혼자 있지 않고, "그와 동등한 강자"와 함께 살도록 하셨다. 여자는 남자에게 어울리는 동역자(partner)이다. 그들은 서로가 동등한 인격과 힘을 가진자로서 서로에게 힘이 되도록 지음받는다. 남녀는 땅을 다스리는 사역을 함께 하는 동료이며 동역자이다. 따라서 여자가 남자에 비해 존재론적으로 열등하다는 개념은 여기에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남녀 간의 상호 의존성이 명백히 나타난다. 그들은 다른 인격이나 동등하며, 다르지만 상호 보충적인 삶을 살도록 만들어진다.

"남녀는 서로를 동등하게 받아야 하며, 그들의 차이는 모든 삶의 영역과 일에서 상호 보충적이어야 한다"(Jewett). 비록 남녀는 존재론적으로 동등하나, 달리 만들어졌으므로 서로를 보충하고 완성해야 한다.

3)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2:23)

하나님께서 중매자로서 그 앞으로 인도하시는 하와를 보는 순간 아담은 탄성을 지른다. 그는 성경의 첫 시로서 자신의 흥분과 감격을 드러내고 있다. "드디어 이 자는 나의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하와는 문자적으로 아담의 뼈와 살로 창조된다. 그러나 숙어로서 "뼈와 살"은 친인척 관계를 표시하는 구절로서 "아주 가까운 친척"을 뜻한다. 라반은 그의 조카 야곱에게 "너는 참으로 나의 뼈요 나의 살"(개역, "골육")이라고 말한다(창29:14). 우리는 가족관계에서 "핏줄"을 중요하게 생각하지만, 구약의 히브리인들은 "뼈와 살"을 중요시 한다.

창세기 2:23의 문맥을 살펴 보면, 인간 외에는 그 어느 누구도 인간과 골육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며, 오직 남자와 여자가 연합하여 골육관계가 이루어진다. 이런 사상적 배경 때문에 후에 레위기에서는 짐승과의 교합을 가장 가증하게 여긴다. 창세기 2:23은 "뼈 중의 뼈, 살 중의 살"이란 최상급을 사용하여 부부관계는 인간관계 중 가장 가깝고 친밀하고 지속적임을 강조해 준다.

또한 "뼈와 살"은 언약체결을 통해 이루어진 상호 연대성을 말할 때 사용된다.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 나아와 말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는 왕의 골육이니이다"(삼하 5:1). 이스라엘 다른 지파와 다윗 사이에는 친인척의 관계가 없었지만, 언약체결을 통해 그들은 다윗에게 항구적인 충성을 맹세하며 "골육관계"를 형성한다. 여룹바알의 아들 아비멜렉이 세겜에 가서 "그 어미의 형제에게 이르러 그들과 외조부의 온 가족에게 말하여 가로되 나는 너희의 골육지친 임을 생각하라"고 말한다(삿 9:1-2). 그 때 "그들의 마음이 아비멜렉에게로 기울어서 말하기를 그는 우리 형제라"고 응답하였다. 여기에서는 실제적인 혈연을 말하는 것 같지만, 문맥은 정치적, 공동체적 연대성을 통해 권력을 나누는 것을 주제로 삼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은 언약을 통해 서로에게 "골육지친"이 된다. 이 세상의 여러 언약 중에서 결혼은 가장 근원적인 언약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살"과 "뼈"는 한 쌍의 단어로서, 인간의 "약함"과 "강함"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Bruggemann 532쪽). 욥기 2:5에서 사단은 하나님을 충동질하여 욥의 "뼈와 살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뼈"와 "살"은 욥의 가장 강한 부분과 약한 부분을 총체적으로 말해주는 합성어이다. 바로 앞 절에서는 "사람이 가죽으로 가죽을 바꾼다"고 말한다. "가죽" 혹은 "살갗"은 역사적 신체적 실존으로서 가장 민감하고 어려운 상황을 가리킨다. 이리하여 살의 약함과 뼈의 강함이 대조를 이룬다. "이 두 단어가 한 쌍으로 나타날 때에는 처음부터 끝까지라는 뜻을 시사한다. 모든 심리적-신체적인 차원을 다 포함한다"(Bruggemann 532쪽).4) 따라서 결혼식에서 우리는 "부할 때에나 가난할 때에나, 건강할 때에나 병들 때나"서로 사랑하기로 서약한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이, 지속적으로 사랑할 것"을 서약한다.

정리하면, "뼈와 살"은 이중적 의미를 지닌다. 하와는 아담의 갈빗대에서 나왔으나, 결혼으로 아담의 "뼈"와 "살"이 된다. 즉 그들은 결혼으로 언약을 맺고, 같은 관심을 가지며 충성과 책임을 함께 나누어질 것이다. 부부는 언약의 파트너(당사자)로서 자발적인 헌신을 통해 책임을 함께 지는 사랑과 우애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이루어가야 한다. 이 한 쌍은 삶의 모든 상황에서 반려자가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가 신랑과 신부와 같은 연대성과 충성심과 책임을 서로에게 진다고 말한다(엡 5:21-33).

4)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라"(24절)

여기에서는 첫 사람 아담과 하와의 결혼을 떠나 이제 결혼이 모든 인류를 위한 창조질서로 제도화된다. 결혼관계는 "떠남"과 "연합"으로 이루어진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에서 "떠나다"는 원래 "버린다"는 뜻이다. 고대 근동아시아의 사회에서 남자가 결혼으로 부모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아내가 부모 집을 떠나 남편 집안으로 들어왔으므로, "버리다"는 단어가 충격적이다. 먼저 문법적으로 보면, 여기에서 "버리다"는 당위성을 말하지 않는다.5) 이 표현은 보다 중립적이다. 히브리어의 미완료는 허용적으로 사용되므로, "자기 부모를 떠나야만 한다"라기 보다, "떠나서"로 보아야 한다. 또한 여기에서 "버리다"는 말은 상대적인 의미로서(호 6:6; 눅 16:26), 결혼으로 신랑과 신부는 삶과 헌신에 있어서 우선권에 변화가 생김을 말해준다. 결혼 전에는 부모에게, 결혼 후에는 부부 상호에게 우선권이 있어야 한다.

"떠나다"는 "연합하다"(dabaq)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이 연합은 상호간의 사랑을 전제한다. 이 연합은 정략적이거나 이기적인 동기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자신을 주는 헌신적인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부부 사이의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밀착성이 "연합"을 통해 표현된다. 이들의 연합은 거룩하고 완전했기 때문에, 바울은 후에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설명하는 데 가장 적절한 모델로 사용하였다. 아담과 하와의 연합은 "나"와 "그것"의 관계가 아니라, 바로 "나"와 "당신"의 인격적인 관계였다.

이 둘은 "한 몸"을 이룬다. "한 몸"은 남자와 여자가 한 "뼈와 살" 임을 보충하고 해석한다. "둘이 한 몸이 됨"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육체적인 결합을 뜻한다"(김중기 108)고 말한다. 이렇게 보면 "한 몸"은 "성적 관계의 아름다움과 일상생활에서 나눌 수 있는 모든 육체적 관계"를 뜻할 수 있다. 그러나 "한 몸"은 단지 신체적 연합이 아니라, 결혼 관계의 모든 풍부한 친밀성을 말한다. "한 몸"은 신체적이며, 정서적이고 영적인 차원을 다 포함하는 전인적인 연대성을 말한다. 나아가 "버리다"와 "연합하다"는 언약개념이므로 "한 몸" 역시 언약의 완성을 시사해준다. 사람들이 언약을 맺을 때, 이전 관계를 버리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며 하나의 새로운 공동체를 이루듯이(레 18:20; 신 24:1-4), 결혼으로 새 공동체를 이룬다.

또한 "한 몸"은 결혼이란 사회적 기관임을 시사한다. 복음서도 이런 관점에서 결혼을 해석한다(마 19:1-6; 고전 6:15-20; 엡 5:31). 따라서 부모를 떠나 한 몸을 이루는 것은 단지 협소한 의미에서 "부부의 관계"로 끝난다는 뜻이 아니다.

한 몸을 이루는 것은 자녀를 낳아 집안을 이루며, 더 큰 가족을 형성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따라서 "한 몸"은 단지 신체적 연합 뿐 아니라 정신적 연합을 말하며, 부부의 연합 뿐 아니라 그들이 생산하는 후손까지 다 포함하는 더 넓은 사회적 연대성을 포함한다.

2. 타락 후의 왜곡된 가정질서(창 3:16)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후,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남녀의 존재론적인 동등성(창 1:26-31)과 사회적 존재로서 남녀의 상호 의존성과 보충성(창 2:18-25)은 상호분리와 주도권 다툼으로 얼룩지며 순기능적인 가정은 역기능적인 가정으로 전도된다. 원래의 창조질서에 나타난 부부간의 친밀감과 연대감과 책임감과 사랑은 불화와 책임전가와 불신으로 왜곡된다. 하와는 원래 여자는 자녀 생산의 축복을 받았고(1:28), 행복한 결혼 생활의 축복을 받았다(2:18). 이 양면적 축복이 이제 저주로 얼룩진다. 하와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언도는 먼저 그녀의 자식에 대한 것이고, 이어 남편과의 관계가 나온다. 자식의 출산에 있어서는 더욱 아픈 고통 가운데 해산을 해야한다. 남편과의 관계도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이런 배경 속에서,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는 말씀을 주신다. 이 말씀은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한 규범인가? 혹은 타락 후 부부 생활의 장애에 대한 사실적인 설명인가?

1) "너는 남편을 사모할 것이라"(3:16 상)

수잔 포(Susan Foh)는 "사모하다"라는 동사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을 다음과 같이 잘 열거하고 있다.6) (1)이것은 "성적인 욕망"이다. 여인이 남편을 열망하는 마음이 "너무 강하여 아이를 갖는 모든 고통과 슬픔을 받아들인다"(D. R. Mace). 여인은 결혼의 성관계를 원하여 아이를 갖고 낳는다. (2) "자발적으로 남자의 종이 되려고 하는 욕망"(J. Skinner), 혹은 "강열하고, 달라 붙는 마음으로 남자를 의지하는 마음이다"(A. Andrews). 카일은 "병적인 열망"으로 본다. (3) 칼빈은 "여인이 그녀의 남편이 원하는 것을 원하는 것이며, 자신에 대한 주권을 잃는다"고 본다. 그렇지만, 여자가 남자보다 성적인 욕망이 강하다거나, 여자가 남자를 의지하는 것을 여자가 좋아하며 사모한다는 것은 우리의 경험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또한 "사모하다"는 동사는 꼭 성적인 의미를 내포하지 않는다. 이 동사(테슈카; 어근, 샤카/ 슈크)는 구약성경에서 오직 세 번(창 3:16; 4:7; 아가 7:11) 나타나기 때문에 그 의미를 결정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이 동사의 어근은 기본적으로 "간절히 원하다, 열망하다"로서 꼭 성적인 욕망이라고 말할 수 없다.

이 동사는 아랍어에서 (1) 샤카(shaqa), "몹시 바라다, 욕망을 불러 일으키다"와 (2) 사카(saqa), "충동하다, 몰다, 재촉하다"는 뜻을 가지므로 꼭 성적인 욕망이 아니다. 또한 창세기 4:7에서 이 단어는 가인의 아벨에 대한 미움이 너무나 격렬하여 동생을 죽이고 싶어하는 격정이 지속적으로 솟아나는 것을 보여주며, 아가서 7:11에서는 사랑하는 애인 사이에 있는 견딜 수 없는 갈망을 묘사해 준다. 따라서 이 단어를 성적인 욕망으로 보는 것은 포괄적이기 보다 제한적이다. 그렇다면, 여인은 무엇을 사모하는 것인가? 수잔 포는 창세기 4:7에 근거하여 "여인은 죄가 가인을 열망하듯 자기 남편을 열망한다. 즉, 소유하려거나 지배하려는 욕망이다. 이 욕망은 남편의 머리됨에 대한 논쟁을 야기한다"(382쪽)고 해석한다.

포는 계속하여, "이것은 성의 전쟁의 시작이다. 타락의 결과로 남자는 더 이상 쉽게 여자를 다스리지 못한다. 그는 자기 머리됨을 위해 싸워야만 한다. 죄는 아내의 자발적 복종심을 부패시켰고, 남편의 자애로운 다스림도 부패시켰다. 여인은 남편을 다스리길 사모한다. 따라서 낙원에 세워진 사랑의 통치가 갈등과 폭력과 지배로 대치된다. 그녀는 부부 관계에서 지도력을 위한 싸움을 그와 하기를 사모한다. 따라서 남자는 자기 아내를 능동적으로 다스리길 구해야만 한다"(382쪽).

이 본문은 아담과 하와의 타락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므로 "너는 남편을 사모하리라"는 진정한 의미에서 무조건적이며 순수한 사랑으로 볼 수 없다. 히브리어에서 진정한 의미의 사랑은 다른 용어(아하브, 헷세드)로 표현되며, 여기에서는 "열망하다"는 뜻을 가진 동사로 제시되므로 수잔 포의 해석은 원문의 의미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2)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다스리다"(mashal)는 동사는 양면적인 의미를 가진다. 먼저 이 단어는 창세기 1:18에서 태양과 달이 "주야를 주관하게 하다"(mashal)로 나타난다. 즉, 해와 달이 자연 질서를 따라 낮과 밤의 순환을 "주관하며" 이루어 가는 것이다.

특히 이 단어(mashal)는 창세기 1:26, 29에서 인간이 동물을 다스리는 지배권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다른 단어(radah)가 나타난다. 후자는, "짓밟다, 지배하다, 주권을 행사하다"(to tread down, have dominion over)는 뜻이다(BDB 921-22). 따라서 "다스리다"(mashal)는 지배와 복종을 시사할 수 있지만, 꼭 "독재적인 권력을 사용하다는 뜻은 아니다"(J. Skinner). 비록 타락 후이지만, 사람이 짐승을 지배하는 것과 남편이 자기 아내를 다스리는 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렇게 보면, 남편이 아내를 "주관하며" 나아가 "위로하다, 보호하다, 돌보다, 사랑하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다스리다"(mashal) 동사는 구약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주인이 하인을, 임금이 신하를 다스릴 때의 지배와 종속을 말할 때 사용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타락 후 남편과 아내 사이에 중대한 관계의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타락으로 말미암아, 남편과 아내는 지배와 복종의 관계로 변질된다. 타락 전에 남자의 "다스림"(mashal)은 죄로 오염되지 않은 통치였으나, 타락 후에는 폭군적이 되었다(수잔 포 28). 이런 관점에서 보스는 창세기 3:16에서 "다스리다"는 "억압하다, 지배하려 하다"를 시사한다고 본다(Vos 25). 이것은 원래 이상적인 부분의 관계는 아니었는데, 이제 타락으로 말미암아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로 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렇게 보면,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는 선언 속에는 거칠게 착취당하고 있는 여성의 모습이 나타난다.7) 정리하자면,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는 이상적이고 행복한 부부 관계의 규범이 아니며, 타락 후 변화된 부부 관계의 병적인 모습을 보여준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히브리어 구문 구조와 히브리 시의 평행법을 따라 본문을 새롭게 볼 수 있다. 본문의 구조는 창세기 4:7과 동일하다.

"죄의 소원(teshuqa)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mashal)."

즉, 가인 속에는 "죄를 사모하는 것"(죄를 짓고자 하는 마음)과 "죄를 다스리고자 하는 마음"이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저자가 생략법을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죄가 가인을 [다스리기를] 사모하나(teshuqa),

가인이 죄를 다스리도록(mashal) [사모할찌니라]."

이런 히브리 시의 생략법을 본문에 적용해 보면 다음과 같이 해석된다.

"너는 남편을 [지배하기를] 사모하고(teshuqa),

남편은 너를 지배하기를(mashal)[사모하리라]."

우리의 결론을 문맥도 지지해 준다. 창세기 3:16은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들 중 먼저 여자에게 심판을 선언하고 있으므로,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는 정상적이고 이상적인 부부관계의 규범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기 힘들다. 오히려 타락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남편과 아내가 가정에서 서로를 지배하기 위한 치열한 주도권 싸움을 펼칠 것임을 사실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 원래는 아내와 남편이 완전한 반려자였으나, 이제는 두 관계가 왜곡되어 서로 주도권을 쥐기 위해 싸우는 모습을 보여준다.

3.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된 가정질서(엡 5:21-33)

본 장은 고대 헬라시대와 로마시대에 널리 사용된 "가정 운영"(oikonomia)에 대한 규범에 대한 기독교적 대안을 제시해 주고 있다. 이 당시 모든 7사회의 가정 규칙들은 부부와 부자와 주종 사이의 질서를 다룬다. 이 규범들은 한 쌍을 이루는 인간 관계에 있어서 종속적인 위치에 있는 자를 먼저 언급하며 이어 권위 있는 자에 대한 권면이 뒤따른다.

이런 가정 운영 규칙은 동양사회에서도 같은 패턴을 가진다.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가족 제도인 대가족 제도는 가부장 중심으로, 여필종부와 부부유별, 부자유친, 장유유서라는 철두철미한 위계질서와 종적 인간관계 생활을 사회의 기본생활로 짜고 있다. 여기에서 성차별과 자녀에게 맹종을 요구하는 것이 부작용으로 나타나며, 부부 사이에는 부부 일체감 대신에 괴리감과 소외감을 심화시켜왔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들에게 주어진 자유와 평등의 대전제 하에서 가정 안에서 가족 상호간의 질서를 제시하고 있다. 그는 신약시대의 넓은 사회적 배경 속에서 기독교적인 가정질서를 구속사적인 관점에서 제시하고 있다.

1) 그리스도 안에서 지킬 인간 관계의 새질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5:21)

우리말 성경(개역)은 가정질서에 대한 권면을 22절부터 시작하지만(//KJV), <그리이스어 신약>(Nestle-Aland, NTG 1979, 26판)은 21절부터 새단락이 시작된다. 왜냐하면, 22절에는 가장 신빙성 있는 헬라어 사본들에 동사가 없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번역자들은 22절의 "복종하라"는 동사를 21절에 있는 "복종하는"에서 가져왔다. 또한 21절은 뒤따르는 세가지 인간 관계, 부부, 부자, 상전과 종에 대해 바울이 적용하는 일반적 원리로 나타난다. 신약성경은 상호 복종의 원리를 인간 관계의 일반적 원리로 제시한다(빌 2:3; 롬 12:10; 빌 2:7; 마 20:28 등). 따라서 이 절은 "빛의 자녀의 생활"(5:6-20)의 결론이라기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야 하는 인간 관계, 특히 가족 관계의 서론으로 제시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따라서 아내(5:22)와 자녀(6:1)와 종(6:5)에게 준 "순종"과 "복종"의 권면은 결코 일방적이 아니며, 이들에 대응하는 남편과 부모와 주인에게 함께 주어진 것이다. 여기에서 "서로"는 상호성을 띠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된 모든 인간관계는 결코 일방적인 예속이나 강제나 폭력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이루어지는 상호 순종이다. 여기에 인간관계의 새로운 "기독론적" 기초가 제시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경외하므로, 서로를 향한 순종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이런 새로운 인간관계는 고대 세계의 가부장적인 가정 구조의 배경에서 볼 때 혁명적이다. "신약성서 외에 고대 어느 윤리에서 부부, 부자, 주종에게 동등하게 '서로 서로' 순종하라는 교훈이 있는가? 이런 관점에서 보면 21절은 가정 덕목록의 윤리 전체를 이해하는 길잡이이다. 바울이 단지 고대 사회의 철저한 가부장적인 가치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여 기독론적 기반 위에서 '기독교화' 하였다는 주장은 21절을 바로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조경철 138).

2) 그리스도 안에서 부부관계의 새 질서(엡 5:22-33)

(1) 아내들에게(22-24절)

바울은 고대 세계의 일반적 형식을 따라 먼저 아내들에게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22절)고 권면한다. 원문에는 "아내들은 주께 하듯 자기 남편에게"로만 나타난다. "복종하다"는 단어는 앞 절에서 가져와 완전한 문장을 만든 것이다.

"복종하다"는 번역은 새번역에서 "순종하다"로 제시된다. "순종하라"(휘포타셋스세)는 자녀들로 부모에게 "복종하라"(휘파쿠에테)는 명령과는 다르다. 물론 "순종하라"는 말은 "어쩔 수 없이 당시의 가부장적인 사고"에 대한 여운을 담고 있지만(조경철 138), 주 안에서의 순종은 굴욕적이며 굴종적이거나 여성 비하적인 순종이 아니다. 아내의 자기 남편에 대한 순종은 자발적인 협력과 양보를 의미한다.

또한 순종의 범위는 어디까지나 "자기 남편"에 제한된다. 이 권면은 한 가정 안에서의 부부관계를 다루고 있으므로,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하라"는 일반적인 권면이 아니다. 이어 바울은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해야 하는 이유를 "남편이 아내의 머리되기 때문"으로 제시한다(23절). 나아가 아내는 "범사에" 순종해야 하며,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듯" 순종해야 한다(24절).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란 사상은 원래 창조 기사에서 암시적으로 나타났으나, 이제 명시적으로 나타난다. 물론 구약성경에서 남편의 대표성은 항상 전제되어 나타났다. "아내의 머리 됨"이란 표현은 신약성경에서 여기에 단 한번 나타나지만,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는 비슷한 표현이 한 번 더 나타난다(고전 11:3).

"남편의 머리 됨"은 고대 세계의 일반적인 가치관으로서 "남성 우월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며 남녀 차별을 신학화하는 것도 아니다. 남녀의 평등과 동등성은 이미 창조 질서에 나타났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는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갈 3:28).

"남편의 머리 됨"에 있어서 "머리"는 크게 "근원"(source)과 "권위"(authority over)를 의미한다. 웨인 그루뎀은 그리스어 "머리"(kephale)가 단지 "근원" 혹은 "시작"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주장하는 여러 학자들(B. & A. Mickelsen; M. Howe; L. Scanzoni & N. Hardesty)의 입장을 주전 8세기부터 주후 4세기 사이에 36명의 저자들이 2336회에 걸쳐 언급하는 본문들을 다루면서, "머리"가 "권위를 행사하다"는 뜻을 의미하지 않는 다는 주장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논증하였다.8)

바울은 "남편의 머리 됨"을 설명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다"(23절)고 말한다. 머리되신 그리스도와 몸인 교회의 관계는 분명히 "권위와 복종을 말한다"(골 2:10). 따라서 바울은 가정 안에서의 대표성과 최종적인 책임을 남편에게 두고 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은 질서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또한 바울은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는 표현을 사용한다(고전 11:3). 여기에서 "머리 됨"은 또 다른 차원을 가진다. 왜냐하면 성부와 성자의 관계는 본질의 동등성과 기능과 경륜에 있어서의 차이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어쨌든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해방된 부부 생활의 올바른 관계를 "머리"와 "몸"이란 비유로 제시한다. 그러나 이 관계는 기독론과 교회론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달리 말하자면,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는 "인간론적인 구조"는 철저히 그리스도가 어떻게 교회의 머리인가라?라는 "신학적 구조"에 의존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라고 말함으로써, "머리 됨"의 의미를 한층 분명히 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가 되기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대신 주셨다. 여기에 "머리 됨"은 결코 일방적이거나 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며, 정복과 착취를 일삼는 통치가 아니다. 그것은 "희생적인 헌신"과 "자발적인 섬김"과 "올바른 다스림"이다. 그리스도는 제왕으로서가 아니라, 참된 종으로서 어떻게 우리를 지도하며 다스리는지 모범을 보여주셨다(막 10:45).9)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은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신" 사랑과 헌신으로 나타난다(25절). 따라서 바울은 이미 가정으로 주어진 개인적, 사회적 존재를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변환시키고 있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종말론적인 성령의 오심으로 개인적 정체성, 사회적 책임, 힘과 권위에 근본적인 전환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사랑의 빛 속에서 모든 것이 결코 옛날과 같을 수 없었다.

따라서 가정질서는 구속사적인 전환을 따라 본질적인 변화를 만들 수 밖에 없다. 부부는 기본적으로 "주 안에서"의 신자로서의 관계를 이룬다(골 3:18).

아내는 "복종"하나 그들의 불신 남편을 그리스도 앞으로 "얻기"위해 더 높은 목적으로 복종한다(벧전 3:1-2).

그러나 가정 안에서 본질적인 권위의 원리가 있다. 가정과 사회와 국가에서 궁극적 권위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혼란과 혼돈이 생긴다. 바울은 한 가정 안에서 최종적 권위를 남편에게 둔다. 가장이 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지속적인 결심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지혜로운 가장은 계속 자신의 결심에 영향받는 자들과 의논해야 한다. 그는 아내와 자녀의 조언을 들어야 하며 가족 구성원의 기술과 능력을 최선을 다해 이용해야 한다.

(2) 남편들에게(5:25-33절)

25절부터 남편의 책임을 다룬다. 남편에게 주는 아내 사랑의 의무(25-33절)는 아내의 남편에 대한 순종 의무(22-24절) 보다는 세배나 더 길며, 오히려 바울의 중심 관심이 여기에 있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다.

바울은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25절)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사랑의 최고의 표현으로 설명한다. 남편의 사랑은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한 것"과 같이 희생적이고, 비이기적이어야 한다. 그 사랑은 신약의 독특한 용어인 아가페로 표현되어야 한다. 이것은 최고 형태의 사랑이며, 자기를 주는 희생적 사랑이다. 이 사랑에는 자기 절제와 부인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도우며 돌보는 사랑까지 포함하고 있다. 이어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구원론적인 목적을 제시한다(26-27절). 그리스도의 사랑은 교회를 향해 구체적인 목표와 목적을 가진다. 주님은 교회를 정결케 하여 구원하실 뿐 아니라(26절), 나아가 완성하시려고 하신다(27절).

이런 기독론적이며 교회론적인 기초 위에 바울은 최종적으로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같이 하라"(28절)고 말한다. 여기에서 부부 사랑이 한 몸으로 표현되며, 바울은 창세기 2:24을 인용한다. 부부 사랑의 심오한 연합으로 서로가 서로의 일부가 된다. 마치 "바이올린에 활과 같다. 서로 협조하지 않으면, 결코 황홀경(extasy)이 없다"(Maston).

따라서 결혼의 목표는 부부의 행복이 아니며, 오히려 둘이 하나됨에 있다. 이제 부부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다. 두 인격체가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사랑과 헌신에 근거하여 하나로 엮어진다. 그러나 하나됨은 밋밋해짐이 아니다. 항상 더 큰 다양성의 풍성함이 있다. 행복은 하나 됨의 산물이다. 끝으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부 사랑과 상호 순종을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라고 말한다. 그는 단순한 창조의 순서에 의한 위계질서를 제시하고 있지 않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사랑(기독론)과 교회의 순종(교회론)에 근거하여 가정의 질서를 새롭게 만들어가기를 권한다.

4.결론

우리는 위에서 창조와 타락과 구원의 큰 틀 속에서 가정질서의 원형(orientation)과 변형(disorientation)과 새로운 형태(reorientation)를 보았다. 우리는 특히 죄가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깊이 보았다. 죄는 인간 상호간의 친밀성과 연대성을 다 파괴하며, "평등과 상호 보완 및 복종"의 관계를 지배와 주도권 다툼으로 변질시켰음을 보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우리의 가정을 회복하며, 인간 관계를 회복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우리 가정과 가족관계는 그리스도의 희생적인 십자가의 사랑과 교회의 그리스도에 대한 복종에서 그 모델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복종하며, 서로를 섬기고, 서로에게 헌신하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미주>

예로서 사 30:5(이집트의 바로), 겔 12:14(예루살렘 왕을 호위하는 자)를 보라.(본문으로)
R. D. Freedman, BAR 19(1983), "Woman, A Power Equal to Man" 시 70:5에서 "나의 도움"('ezri)이 나의 구원자(mefalleti)와 평행을 이룬다. 신 33:26, 29. 시 68:34. 신 33:29//시 28:7. 유다 왕 아자리야와 웃시야는 'zr가 "힘"을 뜻함을 보여준다.(본문으로)
프리드만에 따르면, 히브리어 "도우는 자"('ezer)는 두 어근(아자르와 가자르)의 합성어이다. 히브리어 아인은 원래 후음이어서 아인/카인이 된다. 주전 1500년 페니키아어에는 두개의 다른 음소가 있었다. 두개의 음소가 하나의 문자소(grapheme)로 합성되었다. 따라서 에제르는 "건지다" 혹은 "강하다"가 된다.(본문으로)
창 2:9의 "선악"이 모든 것을 가리키듯. "넓은 뜻에서 전지"를 가리킨다(von Rad). "크고 작은 자"(gadal-qaton)이 모든 그룹을 다 포함하는 것 같다. "하늘과 땅"(창 2:4), "도시와 들"(신 28:3), "이리와 양", "표범과 어린양", "암소와 곰"은 모든 것을 가리키며, 피조계 전체의 샬롬을 말한다(사 11:6-9).(본문으로)
Beeston에 따르면 현대 영어 번역본들에서, "shall leave… shall cleave to"는 "명령적인 어투"가 있어 "must"와 거의 같은 뜻으로 사용되고 있으나 NEB는, "leaves…is united to"로 해석함을 본다. A. F. L. Beeston, VT 36(1986): 115-7를 보라.(본문으로)
Susan Foh, "What is the Woman's Desire?"(본문으로)
그러나 타락 후, 남자의 다스림이 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에 대해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에서 남편의 통치는 죄의 심판 결과가 아니며, 남편의 머리됨은 창조 질서의 일부로 보기 때문이다(고전 11:8; 딤전 2:13상). Clarke, "창조 때에는 둘 다 동일한 권리를 가졌으며, 여자도 남자처럼 남자를 다스릴 권리를 가졌으나, 남편의 뜻에 복종하는 것은 그녀가 받은 저주의 일부이다" 참조.(본문으로)
Wayne Grudem, "Does Kephalah('Head') Mean 'Source' or 'Authority Over' in Greek Literature? A Survey of 2,336 Examples." Trinity Journal 6(1985):38-59.(본문으로)
"여성을 다스릴 수 있는 권리나 권위를 가진 유일한 자는 우주의 통치자 뿐이다. 그러나 주님 자신도 자신의 권위를 아무에게나 강요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발적으로 받아들여져야 하며, 그 때는 그의 멍에가 쉽고 그의 짐이 가벼운 줄 알게 된다. 그의 통치와 권위는 우리의 최선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 개인 생활 뿐 아니라, 남녀, 부부, 부자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메스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