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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구약의 ‘헤렘 전쟁’의 의미 /구약의 관점에서 본 목회자상

by 은총가득 2021. 12. 31.

 

 
니콜라 푸생의 아모리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여호수아를 통해 보는 구약성경 여호수아

 

구약 역사 속에 나타난 ‘헤렘 전쟁’의 의미

 

1.문제의 성격

구 약에서 전쟁중에 내려지는, 원수를 '진멸하라' (herem)는 명령은 오늘날 우리가 가장 해석하기 힘든 주제 중 하나이다. 무차별하게 모든 원수를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우리는 어떻게 우리 교인들에게 설명할 수 있는가?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 그 끔찍한 전쟁을 승인하시고 명하실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헤렘 전쟁과 연관된 성경의 몇몇 구절만 인용해보아도, 문제가 정말 심각해 피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을 것이다.

(1)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면서, '성 중에 있는 것을 다 별하되 남녀 노유와 우양과 나귀를 칼날로 별하니 라"고 말한다(수 6:21).

 

(2) 선지자 사무엘은 이스라엘 첫 왕이 된 사울이 왕권을 확립하자, 및 출애굽 때의 상황을 회고하면서,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을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을 내가 추억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하셨나이다'(삼상 15:3)고 말한다.

 

(3)위의 두 본문이 말하는 진멸하는 전쟁에 대한법적인 근거는 신명기에 나타난다. “오직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이 민족들의 성읍에서는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지니 곧 첫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과 히위 족속과 여부스 족속을 네가 진멸하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명하신 데로 하라”(신 20:16-17).

 

어 떻게 한민족과 여러 족속들을 대량학살하는 일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고백하며, 남자와 여자, 어른과어린아이와나아가젖먹이까지불문하고 죽일 수 있을까? 만약 베트남 전쟁이나 보스니아전쟁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면, 학살을 명한 자와 집행한자는 모두 전시 재판감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헤렘 전쟁은 '구약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인가?"라는 문제뿐 아니라, "구약의 신앙은 어떤 신앙이었는가"하는 본질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2.문제의 범위

그 러나 문제는 윈수를 전별시키는 본문이 구약의 주류에서 벗어나 격리된 하나의 단편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며, 구약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는 점이다. 출애굽기 32장 26-28절에서는 레위인들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명령을 따라 금송아지를 만든 우상숭배자들을 다 칼로 처형한다. 마치 주님께서 자신의 친 백성인 이스라엘에게 헤렘 전쟁을 집행하시는 것 같다. 역사적으로 보면, 십자군 전쟁이 이런 본문에 근거하여 일어났다. 그러나 역사는 십자군 전쟁이 온갖 세속적인 욕심과 죄악으로 물든 전쟁이었을 뿐 아니라, 아람과 유럽을 영원히 갈라놓는 상처를 남긴 전쟁이었음을 말해준다.

엘리사는 선지자로 부름을 받은 직후 여리고에서 벧엘로 올라갈 때에, 그 동네아이들의 “대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는 말을 듣자마자 아이들을 저주하였다. 이때,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42명을 및어버렸다고 한다(왕하 2:23-25). 엘리사가 선지자의 권위에 도전하는 어린아이들에게 헤렘 전쟁을 선포했는지, 혹은"대머리여 더욱 올라가고 올라가라”는 말에 대한 그의 격노가 무죄한 아이들을 죽였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어했든 갓 부름받은 선지자가 자신을 놀리는 아이들을 저주하여 암곰에게 찢겨 죽게 했다는 사실을 들으면서, 의아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또한 우리는 페르시아 수산 성에 살고 있던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들을 미워하는 아각 족속 하만의 음모에 빠져 학살을 당할 뻔 하다가 “죽으면 죽으리라”고 결단을 내린 에스더의 헌신으로 구원을 받은 후, 하만을20미터 정도의 나무에 달아 죽인 것까지는 좋게 생각한다. 그러나 수산성 뿐만 아니라 각도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그들을 미워하는 자75,000명을 도륙한 이야기(에 9:16)를 들으면서는, 피와 복수에 굶주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아 몸서리치게 된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전쟁을 거부하는 기독교인들 중 일부는 여호수아서와 에스더서를 자녀들에게 읽어주지도 않는다.

시편으로 넘어가면, 원수들에 대한 분노가 마치 지옥불에서 올라오는 것같은 격렬함으로 타오르는 것을 보게 된다. 시인은자신의 원수를 향해, "그년수를 단축케 하시며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시며, 그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 자녀가 유리 구걸하며 그 황폐한 집을 백나 빌어먹게 하쇼(시 109:8-10)라고 저주한다. 또 한 시인은 "여자 같은 멸망할 바벨론아 ? .네 어린 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시 137:8-9)라고 선언한다.

 

원수를 진멸하는 헤렘 전쟁은, 결국 오경과 역사서와 선지서와 시가서를 관통하고 있으며 구약에 가장 중요하게 나타나는 구원, 심판과 연관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따라서 헤 렘 전쟁에 대한 설명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구약 전체에 대한 설교를 어떻게 하느냐하는 문제가 결정될 것이다. 우리는 '거룩한 전쟁의 이름으로 집행된 헤렘 전쟁에서 어떤 적극적인 신학을 형성해낼 수 있을까?'를 묻게 된다.

 

 

3.헤렘 전쟁의 의미, 법주 그리고 규칙

(1) 헤렘 전쟁의 의미

개 역성경에서 "진멸하라”는 전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헤렘(herem)은 '일반적인 용도에서 분리되어 접촉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그것이 하나님께 가증하거나 혹은 바쳐졌기 때문이다' (EnclopaediaJudaica 8指). 어근으로 보면, 헤렘이란 단어는 셈어에서 ‘분리하다. 금하다’ 혹은 '성별하다’는 뜻을 가진다.

TDOT 5:188).최근에 성경의 헤렘을 연구한 스턴(p.Stern 1991:16)은, 이 단어가 '파멸을 위해 봉헌함, 혹은 파멸에 봉헌함' (consec-ration to destruction)이 라는 뜻으로 성경에서 사용되었다고 결론지으면서, 히필형(사역 형)에서는 '진멸을 통한 성별'(consecrate through destruction)이란 뜻이라고 말한다. 전쟁 밖의 맥락에서 헤렘은 '주께 바친 것' (heherim leyhwh,레27:28)으로, 전쟁 상황에서는 '주께 바쳐진 것'(미 4:13;수 6:17)으로 나타난다.

 

(2) 헤렘 전쟁의 범주

(S 다른 신을 섬기는 이스라엘인은 주님께 가증한 자가 되며, 이러한 사람은 죽이고 물건은 태운다(겨호와 외에 다른 신에게 희생을 드리는 자는 벌할 지니라', 출22:20/히브리 원문상으로는 22:19; 신7:25-26, 13:13-19).

(2)약속의 땅에 살고 있던 일곱 족속들은 진멸되며(신 7:1-2, 20:17),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라’ (20:16).왜냐하면, '그들이 그 신들에게 행하는 모든 가증한 일로 너희에게 가르쳐 본받게 할까 함이라 (20:18).

(3)한 개인이 주님께 헤렘으로 바쳐진 것은 가장 거룩한 것이다(qodesh qodas-him). 이것은 철회가 불가능하다. 이것들은 성전에서 활거나, 혹은 바친 자에 의해 속량될 수 없다(레 27:28).

헤렘의 규칙을 깨뜨리는 것은 곧 신성모독이며 전쟁의 패배를 겪게 된다.

 

(3)헤렘 전쟁의 규칙

헤 렘의 규칙은(D생존자를 남기지 않는 다(신 2:34, 3:3;수 10:28, 37, 39-40,11:12, 22; 대하 20:24; 렘 50:26;왕상9:21 참조). 사로잡은 왕과 지도자들은 대부분 죽인다. 남자들은 완전히 제거하며(왕상 11:15),때로는 음의 일부를 자르거나(삿 1:6, 아도니베섹의 '엄지손가락과 엄지발가락을 자른다),때로는 종으로 취한다(신 20:11).여자와 아이들은 전쟁의 노획물이며, 가끔 임신한 여인은 배를 갈랐다(왕하8:12, 15:16;암 1:13).

(D많은 경우에는 육축과 노획물을 구체적으로 명시한다.

(D가끔 도시 와 노획물을 불태운다(신7:5, 25, 13:17;수 6:24, 7:15, 25; 8:28,11:11,13).

@헤렘의 규칙을 깨뜨리는 것은 신성모독이며, 그 결과 군사적인 패배(수 7장)를 겪고 자신을 주님께 바치게 된다. 이것은 아간의 경우에 가장 잘 드러난다.

 

 

4.구약에 나타난 헤렘 전쟁의 용례들

물 론 구약성경에는 세속적인 의미의 헤렘전쟁(왕하19:11;대하32:14)과 헤렘이라는 용어는 나타나지 많지만, 헤렘 전쟁으로 사용된 경우도 있다. 여기서는 명백하게 헤렘으로 나타난 경우들을 중심으로 살피고자 한다(사 :2; 렘 25:9;슥 14:11;말3:24참조).

 

아래의 용들을 살펴볼 때, 헤렘 전쟁은 구약 전쟁의 일부임을 알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이 치룬 모든 전쟁이 다 헤렘 전쟁은 아니었다. 가나안 전쟁에서도 성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불태워 주님께 바친 경우는 극히 소수였음을 알 수 있다.

(1)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침공하려다 아랏 왕에게 폐한 후 온 이스라엘은 아랏을 헤렘으로 바치길 서원하며, 승리 후에는 이 성과 성에 있는 사람들을 진멸하여 바친다(민 21:1-3).

 

(2) 요단 동편에 있는 시혼(신 2:)과옥(3:6),그리고 요단 서편의 막게다. 에글론, 헤브론, 드비르, 리브나와 남방 동네들(10:28-40)과 북쪽 동네들◎ 1:10이하)을 진멸하여 바칠 떼, 생축과 노략물은 취하나 동네는 그대로 둔다.

腦) 헤렘 전쟁 중 가장 독특한 것은 여리고이다. 사람과 동물을 모두 칼로 죽이고 성은 불태우며, 전리품은 은이나 금이나 동이나 철로 된 그릇 모두 성전에 바친다(수 6:17이하). 이 바쳐진 물건을 탐내고 취 한 아간과 그의 가족과 생축과 재산은 모두 돌로 치고 불사른다(수 7:24-26).아이 성과 하솔 성도 여리고와 함께 불태우나, 전리품은 미리 취한다(수 8:26, 10:39,10:8, 11:13).

 

(4)네게브에 있는 스밧 사람들은 모두 진별된다(삿 1:17).

(5)사사 시대에 베냐민 지파와의 성전에 참여하지 않은 모든 자를 사형에 처한다는 공적인 명세를 한 후, 여기에 참여하지 않은 야베스 길르앗사람들, '모든 남자와 남자와 잔 여자를 진멸한 학 (딘 21:11).이런 헤렘 법은 레위기 27장29절을 따른 것이다.

 

(6)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사울에게 아말렉을 멸하라는 명령을 하신다. 아말렉 족속이 출애굽 때 무방비 상태의 이스라엘을 기습적으로 쳤기 때문이다(삼상 15;대상 10:13).

(7)후에 솔로몬은 그 당대까지 살아남은 가나안 백성들을 '진멸하지 않고 노예로 역군을 만드는' 정책적 전환을 하였다(왕상9:21;수 15:63,17:12;삿 1:19-35).

 

(8)성경에서 마지막으로 헤렘이 나타나는 곳은 에스라가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백성들을 성전에 불러모을 때이다. "누구든지 방백들과 장로들의 훈시를 를어 삼일 내에 오지 아니하면 그 재산을 적몰하고

위 의 헤렘 전쟁 중 가장 두드러진 두 본문은 여호수아의 여리고 전투(수 6장.)와 사울의 아말렉 전삼상 15:3)이다. 이 두 전쟁에서 주님은 이스라엘을 위해 친히 싸우신다. 여리고의 파멸은 너무나 독특하다. 여호수아6장 24절에서는 여리고의 완전한 파멸이 묘사된다. 여리고 성은 불로 태워져 사람들의 기억에서 없애버렀다. 이성은 완전한 멸망을 당해야 했다. 이 전쟁은 문자 그대로 철저하게 '진멸하는 전쟁'이었다. 여리고에 대한저주는 절대적이다. 이리하여 가나안의 도시와 땅이 완전히 멸망당하는 신명기 13장 16절의 규례가 이루어진다.

 

가나안 전쟁에서 완전히 불태워버린 성은 소수이지만, 여리고 멸망은 독특하다. 아브라함으로부터 400년간 가나안에 들어오지 못한 이유는 가나안족속의 죄악이관영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계는 가나안에 죄악이 관영하였으므로 이 약속의 땅을 주고 있다. 따라서 이는 이스라엘이 생존권차원에서 자기의 땅을 차지하는 것과는 다르다.

 

동일한 원리가열왕기하에 나온다. 이제는 심판받는 쪽이 이스라엘이다. 이들이 하나님의 땅에서 부패했기 때문이다. 신명기와여호수아서에 따르면 가나안 땅아 그 거민을 토해낸다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의가나안정복으로부터 다윗 왕조가 끝날 때즈음에는, 그 땅이 이스라엘 백성을 토해내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이제는 바벨론사람이 거룩한 전쟁의 도구가 된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칼을 빼고 이스라엘을 향해 전쟁을 벌이시는 것이다. 즉 거룩한 전쟁이 역전된다. 이제 당하는 자는 소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다.

이런 맥락 속에서 여리고의 멸망은 죄로 가득 찬가나안족속의 멸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사용되고 있다. 이 성은하나님께 완전히 바친바 되었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아무것도 취할 수 없었다. '이가운데서 무엇을 취하면 너희가 바친 바 될 것이다 (수6:18)는 것이다.

 

 

5.더 넓은 맥락 : 구속사적 맥락에 나타나는 구약의 전쟁

원수를 하나님께 바쳐 진멸하는 전쟁은보다 더 넓은 '성전' (holy war)의 맥락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스라엘 백성은 거룩한 전쟁에 동참하도록 부름을 받는다. 이때, 하나님이 '만군의 주님'으로 나타나며, 전쟁을 친히 치루신다.

 

출애굽기 15장 3절에서는 구약성경에서 처음으로 주 하나님이 '용사'로 불려진다. 모세는 주께서 애굽 군대를홍해에서 수장시키시는 것을 보면서, "주는 용사 시니 야웨는 그의 이름이시다'라고 찬양한다. 용사로서 주님은 바로와 그의 군대를 홍해에서 심판하시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원을 주했다. 용사로서 주님은 오른손을 높이 들고 원수를 치고 있다(출 15:6, 12,16린.주님에 대한 '용사' 라는 칭호는 출애굽기 15장에서 처음 나타나지만, 용사로서의 모습은 이미 창세기 3장에 나타난다. 주님은 아담과 하와가 실낙원을 한 후, 그룹과 두루도는 화염검으로 에덴동산을 지키도록 하신다. 주님은 용사로서, 이 거룩한 장소에 죄인들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도록 하나님 자신이 용사로서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신다.

노아 홍수는 하나님께서 우주적인 스케일로 모든 창조계를 동원하여 타락한 노아시대 사람들을 다 진멸하시고, 노아의 가족을 보호하신 사건이다. '그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 사십 주야를 비가 땅에 쏟아졌더 라"(창7:11).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하나님이 불로 심판하는 것을 보여준다. "그 온 땅이 유황이 되며 소금이 되며 또 불예 타서 심지도 못하며 결실함도 없으며 거기 아무 풀도 나지 아니함이 옛적에 여호와께서 진노와 분한으로 훼멸하신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의 무너짐과 같음을 보고 말할 것이요"'(신 29:23).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은 최후의 심판 때, 주님께서 다시 거룩한 용사로서, 불로 온 세상을 멸하실 것을 보여준다.

따라서 구약의 전쟁은, 냉정한 흡혈귀 같은 전쟁의 신이 남녀노소를 무차 적으로 혹은 한 민족을 모조리 죽이는 것이 아니라, 공의로운 하나님께서 세상을 공의로 심판하시고 의로운 자를 구원하시는 구속사적인 맥락에서 제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6.결론

오늘날 많은 설교자들은 구약의 전쟁에 대해 침묵하거나 혹은 지나치게 영해해버림으로써, 옛 언약의 백성들이 얼마나 치열하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현실 속에서 살며 '용사이신 하나님' 을 섬겼는지에 대해외면하고 있다. 구약에 나타나는 전쟁에 대해 침묵하고 외면하는 것도 하나의 설명이 될 수 있지만, 문제를 회피하는 것은 좋은 대안이 아니다. 중요한 문제에 침묵하면, 후에 같은 유형의 문제가 나을 때에도 대안을 만들 수 가없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자신의 상황 속에서 구약의 성전 개념으로 현재 자신의 전쟁을 정당화시킨다. 지난걸프 전쟁에서, 미국은 이 전쟁을 '성전'이라고 말하고, 이라크도 '성전' 이라고 말한다. 정치가들은 자신이 치루는 전쟁의 정당성을 말하기 위해 다 '북한전쟁' 이란 용어를 사용하며 백성들의 지지를 호소한다. 월남 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의 유명한 성서신학자 에른스트라이트(G. Ernest Wright)는 "야웨는 평화주의자가 아니며, 나도 아니 볼라고 말했다고 한다(Hanson 342).

 

한국의 상황도 성전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에겐 국방의 의무가 딘성한 것' 이므로, 이것은 토론의 대상이 아니다. 이 신성한 의부 는 어떤 사회적, 윤리적 가치보다 우월한 것이다. 나라를 위해 죽은 자는'순국장병' 이다. 그러나, 우리의 전쟁을 신성한 것으로 만들면, 모든 전쟁이 신성한 것이 되고 전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 것이며 신성한것' 자체가주판적이 되어버리고 말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분리시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 말시온으로부터 불트만에 이르기까지, 구약의 하나님은 전쟁의 하나님이며 신약에 나타난 사랑의 하나님보다 저급한 신으로 여겨졌다.

말 시온은 결국 구약의 하나님을, 물질계를 만든 저급한 창조의 신이며 피를 좋아하는 전쟁의 신으로서, 신약이 말하는 및의 하나님보다 저급한 신으로 만들고 말았다. 불트만은 구약성경이 현실 세계에 밀착되어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초월적인 종말론적 실체로 넘어가지 못하고'유관 으로 끝났다고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구약의 전쟁신학에서 우리가 적극적으로 배울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칼빈은 임종 직전, 심각한 병에 걸려 있었을 때 여호수아 주석을 마친다. 그의 건강은 갈수록 약화되었지만, 그는'더욱 크고 밝은 빛 속에서 작업을 하였다고 한다’(Hen Beveridge).

칼 빈은 '교회에 대한 유언으로, 그가 그렇게 오랫동안, 그렇게 간절하게, 그렇게 성공적으로 선포한모든 교리 체계를 엄숙히 비준하는 작업' 으로 여호수아 주석을 썼다고 한다. 그는 여리고의 멸망에 대해,"만약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행된 것이 아니었다면, 이것은 비인간적인 학살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생사를 주관하시는 그 분께서 공의롭게 이 나라들을 별하시도록 정하셨으므로 이것은 모든 토론을 끝내준다"고 말한다.

 

우리는 구약의 전쟁과 송두리째 원수를 주님께 바치는 헤렘 전쟁을 보며, 궁극적으로 종말론적인 최후의 심판이 역사 속에 먼저 침범해온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노아 홍수, 소돔과고모라의 멸망, 가나안 일곱 족속의 진멸, 그리고 여리고와 아말렉의 진별은 죄에 대한 주님의 최종적 심판이 역사 속에서 실현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우리가 주님의 최종적인 심판을 믿는다면, 구약에 나타난 저 비참하고 냉혹하게 보이는 '진멸하는 전쟁'도 담대히 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민족주의적인 아집과 욕심에 이끌려 이음나라들과 '거룩한 전쟁'을 선포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성전과 헤렘 전쟁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아모리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여호수아

니콜라 푸생

캔버스에 유화

96 x 134 cm

1624~1625

푸시킨 미술관, 러시아 모스크바

 

러시아를 대표하는 미술관 중 하나인 푸시킨 미술관이 소장한 프랑스를 대표하는 바로크 거장 니콜라 푸생의 걸작 아모리 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여호수아이다.

오른쪽에 대각선으로 약 25%는 어둡고 왼쪽 75%는 밝다.

좀 더 들여다보면 전쟁 중인데 왼쪽 사람들이 오른쪽 사람들을 거의 학살하는 중이다.

바닥에는 잘린 사람의 머리와 죽은 말과 무기가 내동댕이쳐 저 있다.

 

 

 

 

구약성경의 관점에서 본 목회자상

김정우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후, 처음 나가던 교회의 목사님은 새벽마다 "울부짖는 듯한 기도"를 하곤 하셨다. 나도 처음 믿을 때 많은 눈물을 흘렸지만, 목사님께서 새벽마다 "울부짖는 듯한 기도"를 하시는 모습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나는 어느 선교단체를 통하여 기독교신앙을 갖게 되었고, 그곳에서 나는 <사영리>를 효과적으로 전하는 법과, "성령충만함을 받는 비결"을 여러 번 반복하여 학습하였으며, 기독교인의 삶은 "기쁨"과 "확신"이 넘치는 삶이라는 오리엔테이션을 받았기 때문에, 새벽마다 "징징우는 듯한" 목사님의 모습을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그 때 (1970년대초)에는 웟치만 니의 책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으며, "우리의 자아가 깨어지면, 성령의 은혜가 자동적으로 흘러 넘친다"는 주술비슷한 신앙이 은연 중에 무의식 속에 깔려 있기도 하였다. 따라서 늘 책망하는 듯한 설교와 딱딱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교육과 엄격한 주일성수를 요구하시던 목사님은 어쩌면 "율법주의적인 테두리 안에서 살며, 기쁨과 확신과 자유로 가득찬 진정한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지 못하고 계신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이제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30년이 지났고, 신학을 시작한지 25년이 되었다. 그리고 기라성 같은 목회자들을 가까이서, 또한 멀리서 보아왔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거의 핵폭발에 버금가는 양적인 팽창이 있었고,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치는 목회자들도 배출해 왔다. 그분들의 깊은 내면은 알 수 없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다들 뭔가 자신감에 넘치고, "승리의 비결"을 알며, 때로는 호령도 하고, 마치 "왕 같은 제사장"으로서 자신의 신분을 즐기고 누리는 듯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한국교회는 그 모든 외형적인 팽창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역사 속에서 나아가야 하는 근본적인 방향을 상실하고 표류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고 있다.

 

사실 "눈물 젖은 목회자상"과 "기쁨이 넘치는 목회자상"은 구약성경이 보여주는 "메시야의 두 모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구약에는 "영광의 메시야"와 "수난의 메시야"가 늘 중첩되어 나타나고 있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신약이 시작되던 당시의 유대주의에서는 후자의 모습은 거의 완전히 잊혀지고 전자의 모습만 부각되어,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줄 구원자로서의 메시야를 기다리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역시 "수난의 메시야"를 이해할 수 없었으며, 예수께서 바로 "영광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곧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인자가 영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고난을 받아야 함"을 잘 알고 계셨고, 십자가를 지시며 "죽기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셨다."

 

구약성경에는 두 가지 메시야의 모습이 나타나는 데, 왜 사람들은 한 모습을 잃어버렸을까? 아마 수많은 이유들이 있겠지만, 사람들이 "쉬운 인생"을 원했기 때문일 것 같다. 소위 하나님의 백성들도,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줄 터이니, 우리가 잘 먹고 잘 살도록 해주시오"라는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축복을 갈구하였으며, 유대교에서는 메시야를 통해 "황금시대"가 그들을 위해 오리라는 예언으로 구약성경을 이해하게 되었다. 즉,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믿음에 대한 적절한 현실적 보상"을 바랐으며, 영적 지도자들은 이 백성의 소리(vox populi)를 잠재우고 영적 각성을 하도록 애쓰기 보다, "순종"과 "축복"의 짧은 신앙적 회로를 만들기에 급급하였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메시야의 영적인 승리와 종말론적인 승리를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 이해하였고, 결국은 "수난의 메시야 상"을 상실하게 되었다.

 

구약의 메시야 사상 형성에 있어서 가장 중심적인 소제가 된 사람은 다윗이다. 다윗은 "주의 기름부음 받은 자"로서 사사시대의 모든 혼란을 극복하고, 예루살렘을 수도로 세우며, 통일 이스라엘을 이루고,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안치하며, 솔로몬의 성전을 준비하며, 하나님과의 언약을 통해 "영원한 왕조"를 약속 받았다. 따라서 후대 이스라엘의 역사가들과 선지자들과 시인들은 다윗 안에서 메시야의 모습을 찾았고, 그의 아들 가운데 온 세계를 다스릴 영광스러운 왕이 올 것을 바라보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구약성경은 이외로 "수난의 메시야"의 모습을 너무나 많이 그려주고 있다. 이것이 신비이다. 어떤 민족과 나라의 메시야상에 있어서, 그가 하나님과 사람에게 철저하게 외면되고 버림받고, 죽음까지 당하게 되는 그림을 그릴 수 있을까? 그렇지만, 구약성경은 "건축자가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는 신비를 메시야상 속에 아름답게 그려놓고 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 신비로운 섭리 가운데, "수난의 메시야"를 준비해 주셨을까? 그것은 인간의 죄가 우리의 모든 상상을 초월하여 깊고 넓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는 지성과 감정과 의지의 모든 영역에 회복될 수 없는 심각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죄인된 인간을 구원하는 메시야는 죄인들의 질시와 미움과 버림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21세기를 맞이하며, 우리는 혁명적인 문화적 변혁 가운데 살고 있다. 그렇지만, 인간의 죄된 본성은 영원하며 하나님의 사랑도 영원하다. 목회자는 죄인된 인간과 사랑의 하나님의 중간에 서서 중보자로 일한다. 그는 하나님의 은총과 능력 때문에 감격하지만, 또한 자신의 죄성과 하나님을 의식적으로 거스리는 세상 때문에 울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운다는 것은 약하기 때문 만은 아니다. 그것은 성인으로서 철이든 증거이며, 이제는 책임을 지는 위치에 섰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유명한 강사가 노자 강의에서 "성자란 근심하는 자이다"라고 정의하였다고 한다. 성자는 자신의 부족 때문에 근심하고, 사회의 아픔과 악함 때문에 근심하며, 더 큰 자유와 진리와 생명을 위하여 근심한다.

 

구약성경의 메시야 상에서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한 두 본문인 시편 22편과 이사야 53장은 "근심하는 성자" 정도가 아니라, 인류의 모든 죄와 그 모든 책임을 홀로지고, 하나님과 사람과 이웃과 동료들과 부모에게서조차 완전히 버림받는 자로서의 메시야를 그려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죄는 없으시며 오히려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으며...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었다" (사53:5). 목회자는 "수난의 메시야"의 길을 따르며, "영광이 메시야"의 다시 오심을 바라보고 사는 자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죄성은 있으며, 죄인된 인간 가운데서 그들을 섬기기 위하여 부름받은 자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21세기의 목회자도 성화와 겸손과 헌신에 더욱 힘써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새벽마다 십자가 앞에 나아가 "울부짖던" 나의 첫 목사님이 갑자기 그리워진다. 그렇지만, 나에게도 그 "울부짖음"과 "눈물"이 지금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