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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의 산책

구약성서에서의 “쉼” 이해/구약성서에 나타난 노동

by 은총가득 2022. 1. 3.

구약성서에서의 “쉼” 이해

 

스트레스 속의 현대인

오늘 우리는 급격하고 신속한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 의학적으로, 변화가 있는 곳에는 스트레스가 따른다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위험”과 “위기”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체 내부의 기능은 항상성(恒常性, homeostasis)을 유지하기 위해 어떤 주어진 변화(스트레스)에 대해서는 과감하게 대처하여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미묘한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그러나 이런 육체적, 정신적인 변화가 더욱 지나치면 ‘변태’나 ‘변이’가 될 수도 있다. 사실 암세포는 밖에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외적 내적 요인에 의해 내 몸의 정상 세포가 스스로 규제할 수 없는 암세포로 변화된 것이라 한다.

 

쉼의 필요

이런 변화가 주는 스트레스는 쉼을 원하게 한다. 성서도 인간을 쉼이 필요한 존재로 보고 있다(마 11:29). 하나님도 창조라는 엄청난 변화에서 쉼을 필요로 하셨다. 그래서 “이렛날에 하나님이 창조하시던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고 기록하고 있다(창 2:3). 그 쉼이 인간에게도 필요하다고 보아 그 날을 안식일로 하여 복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현대인에게 쉰다는 사실처럼 반가운 것이 없다. 왜냐하면 바쁘고 피곤하게 살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쉼은 그 자체로 의미 있고 창조적인 생명을 가지고 있다. 현대인이 쉬지 못하는 이유에는 바쁘다는 구실 외에 “내가 아니면 안된다”는 이기적 사고가 깃들어 있다. 쉬는 것을 말리는 사람이 없는데도 현대인은 계속 바쁘다. 그는 자기가 자는 동안에도, 더욱이 자신이 죽은 후에도 세상일은 여전히 잘 진행되고 잘 돌아간다는 사실을 모르는 듯하다. 그래서 이 쉼을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에게서 발견하게 된다(창 2:2-3).

 

세상이 움직이는 것은 잘 쉴 줄 아셨던 안식일의 주인인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쉬신 시간에 온 만물이 우리에게 더욱 아름답고 신비스럽게 다가온다. 쉼은 일(창조)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우리는 이 대자연 속에서 하나님의 쉼을 배워야 한다. 이 날의 하나님의 쉼은 피조물에 대한 무관심이나 냉담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피조물과 함께 사귀기 위해 안식을 필요로 하신다.

 

쉼의 오해(誤解)

안타깝게도 현대인은 이 안식을, 쉼을 잃고 있다. 세상이 각박해지는 것은 바로 이런 쉼과 안식을 잃은 것과 관련 있다.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노래방이나, 디스코테크를 찾아 시간을 소리로 채우고, 취하도록 마시거나 밤새도록 고스톱을 치지만 그것으로 스트레스가 풀리지 않는다. 고요가 없는 곳에 쉼이 있을 수 없고 쉼이 없는 곳에는 창조가 있을 수 없다. 시내산 아래서는 요란스런 반동이 일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기도하며 쉬고 있던 모세의 얼굴은 환하게 빛나고 여유로웠던 것처럼 각자의 고된 일터에서 쉼의 얼굴로 사람들에게 여유를 보이며 쉼을 나누어주는 얼굴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런 여유와 쉼에서 우리는 온유와 안식을 얻게 된다. 여유를 잃은 현대인은 성급함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쉼을 찾아야 한다. 안식일을 찾아야 한다.

 

구약의 시간 이해

구약종교는 시간의 성화(聖化)에 목표를 둔 시간의 종교이다. 공간적 인식에는 시간이 일정하고 반복적이며 동질적(同質的)이지만 구약성서는 시간의 다양한 특성을 지각하고 있다. 시간은 사건이 포함된 흐름을 말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거룩한 구속사적 사건이 꼬리를 물고 계속 일어나는 시간이다. 그래서 똑같은 두 개의 시간은 없다. 구약은 그래서 시간 속에 있는 거룩함에 애착을 가지며, 거룩한 사건들에 애착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거룩한 하나님께 속한 날에 그 하나님을 만나는 제사와 연결되어 있다. 거룩이란 귀한 단어가 창조 이야기의 끝에 쉼의 내용과 함께 나타난다.

 

“그러므로 나 야웨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구약의 창조 기록에는 공간 속의 어느 장소적 대상(특정 지역이나 건물)에 거룩함의 특성을 부여한 적이 없다. 오히려 시간에 적용되고 있어 의미심장하다. 쉼은 장소도 중요하지만 시간적 여유와 질이 중요하게 다루어진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무수한 사건과 일 속에서 쉼을 얻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것이 오늘의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 같다. 왜냐하면 그들은 끝없이 바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구약에서 발견할 수 있는 안식, 쉼의 의미를 간략히 살펴본다.

 

구약에서의 쉼의 의미

창조에서의 안식의 의미는 창 2:2-3에 나타난다. 여기에 주동사 4개가 나오고 모든 동사의 주어가 하나님이다.

1) 하나님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셨다(????:2절)

2) 하나님은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2, 3절)

3) 하나님은 그 날을 복되게 하셨다(?????:3절)

4) 하나님은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3절)

 

첫째로, 쉼의 배경과 근거는 일의 완성, 또는 마침과 직결된다. 1번에 사용된 ???은 “완료하다, 완성하다” (complete), “끝내다, 마치다”(finish)의 뜻을 가진 동사 ???의 Piel waw 연속 미완료 3인칭 남성 단수이다. 하나님이 안식하게 된 근거는 1장의 천지를 창조하시고 6일간의 만물을 지으신 창조행위와 밀접히 연결되고 있다. 6일 동안의 구체적 일을 끝마침이 전제되고 있다. 천지 만물을 이루기 위해 하시던 엿샛날까지 일을 다 마침이 결국 참 안식을 가져온다. 그래서 진정한 안식은 어떤 일의 목표를 성취한 다음에 얻어지는 쉼일 때 가능하다. 일이 완수되었을 때 거기서 느끼는 즐거움을 말한다. 한편 이 하나님의 휴식은 그 휴식에 인간이 참여하여 하나님과의 교제를 나눌 수 있기를 희구하신다(히 3-4). 오늘 자기가 이루어야 할 의무와 책임을 소홀히 하고 거부한 자에게는 진정한 쉼이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쉼은 “휴식”과 일로부터의 “분리”와 “재충전”의 뜻을 간직한다.

2번에 “쉬셨다”는 ??? (Kal 3인칭 남성 단수) 동사가 사용되고 있다. 이는 1) “노동, 일로부터 쉬다, 땅을 개간하지 않고 놓아두다”로 “쉰다”, “휴식하다”는 의미이며 2) “멈추다, 끝내다, 중단하다”, “자신의 일로부터 자신을 완전히 분리하다”로 자신이 하는 일을 그치고 일단 그 일로부터 자신을 차단하여 새로운 차원에 머무는 것이며 3) “장래를 위하여 따로 남겨 주다(put away)”, “저축하다”로 내일을 위해 재충전한다는 의미가 있는 단어이다. 창조 사역의 마지막에 “하나님이 쉬셨다”는 의인법적(擬人法的) 표현은 인간에게 휴식이 필요하다는 역설적 의미를 강하게 나타내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안식은 창조의 연결선상에서 인간에 쉼을 주시는 성별한 축복의 상징으로, 창조의 완성을 축복으로 누리도록 하는 것이다.

 

셋째, 안식의 의미는 복됨을 함축한다.

3번에 의하면, 하나님은 이렛날을 복되게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는 “몸을 구부리다”(to bend), “무릎을 구부려 찬양하며 숭배, 예배하다”(to adore, to worship by praising on bended knees(시 10:3, 수 24:10), “…을 신성하게 하다”, “신이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다, 축복하다”(to bless), “인사하다”(greet, salute) 등을 의미하는 동사 ???의 Piel waw 연속 미완료 3인칭 남성 단수로서 피조의 세계에 풍성한 결실과 번영된 삶을 주셨고 행복과 성공의 시간들을 주셨다는 것이다. 이런 축복의 활력을 부여하여 인간존재가 풍성케 되는 능력을 새로이 공급하는 날로서 안식일의 쉼을 뜻한다. 한편 하나님이 인간을 확인하고 만물의 영장으로 인정하고 대우하여 축복적 존재의 의미를 갖게 하는 안식이다.

 

넷째로, 이 안식일을 거룩케 했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4번).

구약은 거룩이 무엇이냐를 묻는 것보다는 누가 거룩하냐를 묻는다. 야웨 하나님이 거룩하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하나님께 속한 것이 거룩한 것이다. 안식일이 왜 거룩하냐면 야웨께 속한 날이기에 거룩하다. 이스라엘 땅이 왜 성지(聖地)냐면 하나님께 속해서 거룩한 땅이다. 즉 구별되어 하나님께 성별된 날이기에 안식일이 거룩하다. 이 하나님께 속한 시간이 참 안식이 되고 복이 되고 참 쉼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 안, 그의 통치권 안에 있어 그의 평강과 희락을 간직할 때 어느 곳, 어느 때라도 참 쉼을 얻게 된다(시 23).

 

구약, 혹은 유대교의 가르침 속에 나타난 거룩함의 관념이 공간으로부터 시간으로, 자연의 영역에서 역사의 영역으로, 사물에서 사건들로 서서히 이동되었다. 신성함의 특질은 물체의 알맹이 속에 있지 않다. 오히려 하나님께 거룩히 구별하는 행위와 하나님과의 지속적 관계에 의한다. 예언자들도 “야웨의 날”을 “하나님의 집”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강조한다.

안식일은 계약의 상징적 물체나 부적들이 불필요하다. 안식일 자체가 계약의 징표요 상징이다. 안식일에 모든 영혼들이 거룩함 속에 부활하는 소생의 활력을 얻는다. 거룩한 시간이 우리 인간에게는 참 안식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과 함께 하는 거룩한 날의 시간이 참 쉼으로 표현된다(시 84:10). 선한 한 시간이 일평생의 가치에 대등할 수가 있으며 여러 해 동안 하나님을 피함으로써 잃은 것들을 하나님께 돌아가는 일순간에 회복 받을 수도 있다.

 

여기의 안식은 단순히 쉬는 것만이 아니라 예배와 더불어 미래를 위한 재충전의 기회를 의미한다. 이 안식일은 안식년(채무 면제, 종의 해방)으로 그리고 희년(땅 안식, 토지 재분배, 노예 해방, 속죄, 속량)으로 연결된다. 우리는 오직 시간의 성화를 통하여 시간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뿐이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에게 시간은 변장한 영원이다. 인간의 과업은 공간을 정복하고 시간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다. 안식일에는 시간의 한가운데에 있는 거룩함에 동참하라는 호소를 받게 된다. 심지어 영혼이 시들고 그리하여 꽉 잠긴 목구멍으로부터 단 한 마디의 기도가 나오지 않을 때에도 안식일의 청아하고 안온한 안식은 우리를 가이 없는 평화의 나라로 인도하여 영원의 의미에 대한 깨달음이 시작되게 한다.

다섯째로, 구약에서 최초의 실제 안식은 광야의 기나긴 여정을 끝내고 약속된 땅에 들어가 안전한 거처에 머물게 된 하나님 백성이 소유했다. “여호와께서 너희로 안식하게 하신 것 같이 너희 형제도 안식하게 되며 그들도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땅을 얻게 되거든”(수 1:15)에서 안식을 나타내는 동사는 “휴식하다”(to rest), “익숙되어 안정되다, 정주하다”(settle down)는 ???의 ??????? (Hiphil 미완료 3인칭 남성 단수)형이다. 영적인 차원보다는 오히려 현실적, 육체적으로 곤고하고 피곤한 사막생활을 청산하고 약속의 땅에 안전하게 정착하여 얻는 휴식으로 평안히 거함을 의미한다. 또한 사방의 대적(對敵)을 다 멸하고 전쟁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안식을 의미하기도 한다(수 23:1, 삼하 7:1, 왕상 5:4). 이는 구속과 구원의 개념으로 발전했다. 주위 환경과 생활의 안정으로 평강의 안락된 삶을 의미하기도 한다(룻 1:9, 3:1). 가나안 땅에서의 휴식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 백성을 위한 것이다. 이는 미래의 희망과 축복의 값진 교리로 발전한다(삼하 7:1).

여섯째는 계약 공동체적 노동과 휴식의 평등화를 의미하게 되었다.

 

신명기에 나타난 안식일은 출애굽 사건에 근거한 시내산 계약의 표징으로 그 계약 백성이 안식일을 맞이할 때마다 계약 백성으로 자기를 확인했다. 할례가 신체상의 계약 표징으로 순간 순간 확인되는 것이었다면 안식일은 시간 속에 나타난 계약 징표로 그날에 계약 공동체는 누구나 일에서 쉬도록 하여 휴식의 평등화를 이루며 계약 백성임을 확인하는 것이다(신 5:14).

 

일곱째로, 잠의 쉼이 있다.

모든 이에게 기본적으로 휴식이 되는 것이 바로 잠이다(욥 3:13). 그래서 시편 시인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시 127:2)고 했다. 여기에 사용되는 ???는 “평안하게 해주다”, “쉬다”(rest), 그리고 “잠자다”, “조용히 있다”는 의미를 가진 동사 ??? 의 명사이다. 경쟁 사회에서 바쁘고 수고가 많은 세상살이에서(시 127:1-2) 하나님은 그 사랑하는 자에게 가장 진정한 쉼이 되는 잠을 주신다는 것이다. 생체에는 여러 리듬이 있어 여러 기능을 효율적으로 조절하고 있다. 그 중 가장 중요한 리듬이 “24시간 순환 리듬” (circadian)이고 이 중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이 수면 리듬이다. 수면은 안구가 급속히 운동하는 “REM 수면”과 그렇지 않은 “NREM(Non-REM) 수면”이 있다. REM 수면 중 80%에서 꿈을 꾸며, 이 두 가지 수면에서 각각 내분비와 생리 기능이 달라진다. 잠을 못 자게 하는 고문 때 자아 붕괴, 환각, 망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REM 수면 중에 나타나는 꿈을 못 꾸게 하면 과민성, 피로가 나타난다. 잠은 낮 동안 소모되고 손상된 부분을 회복시키고, 낮 동안의 생존 기능과 본능적 보조 기능을 잘 할 수 있도록 준비, 조절하도록 한다. 더욱이, 인지적 기능으로 낮 동안 학습된 정보를 재정리하여 불필요한 것은 버리고 재학습 및 기억시키게 하는 기능도 한다. 또한 감정 조절 기능으로 불쾌하고 불안한 감정들이 꿈 등을 통해 정화되어 아침이면 상쾌한 기분을 갖게 한다. 잠이 쉼의 가장 좋은 방법이다.

 

현대인은 죄책이나 죄로 말미암는 갈등을 고상한 말로 바꿔서 스트레스나 콤플렉스 등의 무화과 잎으로 가린다. 그러나 인간의 정신적 육체적 갈등과 피곤의 깊은 곳으로 추적해 들어 가보면 죄 문제가 깊이 자리 잡고 있는 게 많다(시 38편). 그러기에 하나님께 나아가 죄가 눈같이, 양털 같이 희어질 때 근본적 참 안식을 얻게 된다(사 1:18). 그래서 창조의 하나님의 안식의 결과인 “축복”과 “거룩”은 안식일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에 믿음으로 동참하는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는 은총이다.

 

한 주일의 6일간을 우리는 공간적 물체의 압제 아래서 살다가 안식일에는 시간 속에 있는 거룩함에 조화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안식일은 우리가 시간 속에 있는 영원한 것에 동참하고 창조의 결과들로부터 창조의 신비로, 창조의 세계로부터 세계의 창조로 돌아가는 날이다. 그래서 쉼, 안식을 철저히 지켜야 인간답게 살 수 있다. 하나님의 축복의 은혜 안에 거룩하게 사는 것이 참 쉼의 지름길이다. 의롭고 성결하게 살아야 한다.


구약의 묵시사상이해에 대한 몇가지 재검토 - 다니엘서를 중심으로 -

 

I. 묵시사상에 대한 관심

 

미국의 구약학자 폴 핸슨(P.D.Hanson)은 세계2차대전 이후 핵무기시대의 “묵시록적분위기”와 사해사본(쿰란 공동체)의 발견으로 묵시문학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으며, 여기에 지구종말을 경고하는 생태계학자들과 미래학자들및 종말신앙의 설교자들이 가세하여 묵시신학사상의 이해에 혼선을 초래하기도 하였다고 지적하였다.

 

P.D.Hanson, “Apocalyptic Literature", The Hebrew Bible and Its ModernInterpreters, Scholars press, 1985, 465쪽 이하

사실 20세기의 인류는 “마지막 때”에 살고있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으며, 지난 세기와는 달리 20세기는 종말론에 관한 관심의 뚜렷한 증가로 그 신학적인 특징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금년은 우리 나라에서도 시한부종말론이 교계나 신학계뿐 아니라 일반 사회적으로도 큰 물의를 일으켰고 성경적인 묵시사상 이해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는 계기가 되었다.

시한부종말론 과연 성경적인가,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 사이비신앙운동 및 기독교 이단 대책위원회 / 장호회 신학대학 다원화 목회연구원 공동기획 편집,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출판국, 1991 참조

 

그런데 지난 1980년에는 “묵시문학과 한국교회”라는 신학자들의 심포지움이 있었고 비로소 해외 묵시문학연구 동향에 대한 관심과 함께 한국교회가 묵시사상이해를위해 보다 올바른 연구와 인식이 필요하다는 의견들이 개진되었다. 일반적으로 묵시문학이라고하면 말세의식및 종말론과 연계하여 생각케되는데, 한국교회나 신학계에서 이러한 말세적 종말신앙은 지금까지 주로 현실의 삶이나 역사를 도피하는 소위 초월적인 타계주의 신앙성격이 너무 강했다는 것이다.

심포지움 “묵시문학과 한국교회”, 신학사상 30(1980, 가을), 535-553쪽 참조.

 

그러므로 감신대교수 왕 대일은 묵시문학이 가지는 역사이해로서 “옛 에온(aeon)과 새 에온(aeon) 사이의 불연속성을 읽으려는 노력에서 파루시아(Parousia)에 대한 대망”은 이해하지만 현실역사인 지금 여기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현존에 대한 임마누엘 신앙을 포기한채 묵시신앙이 장차 도래할 하나님의 나라만을 강조할 때는 기형적 신앙 유형을 만들어 내게 될 위험의 소지가 매우 크다는 점을 잘 지적해 주었다.

 

왕대일, “묵시문학운동의 역사이해”, 기독교사상 특집 : 말세의식과 종말의식,37-50쪽, 특히 49쪽을 보라.

연세대 교수 박준서도 오늘날 세계의 구약학계가 묵시문학을 재발견하고 있다고 소개하면서, 1950년대까지 전통적인 구약 묵시문학 연구는 다니엘서에 집중되어 왔으며 대부분의 비평학자들은 다니엘서가 페르샤종교의 이원론의 영향을 받은 구약의 묵시사상의 출발로 보았으나, 오늘날 구약 묵시문학 연구의 공통적인 경향은 다니엘서의 묵시문학 출발가설을 극복하고, 구약의 묵시사상은 예언사상의 아들로서 주전 6세기 바벨론 포로기 이후의 특수한 사회-역사적 상황에서 예언 전승이 변형되어 생긴 것이라는 서구 신학자들의 주장을 수용하고 있다.

박준서, “구약묵시 문학의 역사 이해”, 신학논단 15집, 1982, 21-26쪽 참조.

이러한 관점에서 박준서는 묵시문학은 그 문학적 유형(예컨데, 환상이나 상징적 표현 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전통적인 역사이해, 이를테면 토라의 구속 사관이나 신명기 역사관이 설명해줄수 없는 주전 587년 유다왕국의 멸망 전후의 역사적 맥락을 설명하고 신앙으로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그 자체의 독특한 역사관을 가진 신앙유형으로서의 파악이 중요하며, 따라서 묵시사상의 역사이해는 묵시문학연구의 핵심적 위치를 차지한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폰라트는 묵시사상의 기원을 예언 전통에서가 아니라 지혜사상에서 찾았으며(전도서 3장의 정해진 때에 관한 지혜사상), 본대학 구약교수 슈미트(W.H.Schmidt)도 다니엘서의 저자는 경건파의 지혜자 그룹에 속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W.H.Schmidt, Einleitung in das Alte Testament, ξ 24, Daniel, 289쪽 ;왕대일, 상게서, 43쪽 참조.

어쨋든 폴 핸슨에 의하면 오늘날 묵시신학에 대한 구약학적 관심은 4가지 범주로 정리해 볼 수 있으며, 그것은 ① 묵시사상에 대한 정의 ② 묵시사상의 기원 문제 ③ 묵시문학 양식의 확정 내지 묵시문학의 자료 문제(예컨데, 구약에서 에스겔서와

 

제2이사야를 원묵시문서로 보고, 초기 묵시 문서자료로는 제3이사야, 이사야묵시록 24-27장, 요엘, 말라기, 중기묵시문서로는 슥 12,14장, 후기 묵시문서로서 에녹 1서 6-11장과 함께 단 7-12장으로 구분하는 문제) ④ 구약의 묵시사상의 현대적 적용내지 그 의미를 묻는 물음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그 동안의 구약학계의 묵시신학연구에 대한 새로운 관심과 연구내용을 살펴보면서, 주로 다니엘서를 통해 나타나는 묵시사상에 대한 오늘의 이해에 있어서 몇가지 문제점을 검토해보려고 한다.

 

II. 구약묵시사상과 다니엘서

 

묵시문학 또는 묵시록이란 이 세상의 종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일어날 일들에 관한 하늘의 비밀을 계시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책이다. 묵시(Aporalypse)란 말은 희랍어에서온 말로서 “계시”(revelation ; Offenbarung)를 뜻하며, 묵시자는 특별한 하늘로부터의 계시를 통해 세상 종말에 관한 비밀을 안다고 믿는다. 묵시사상이란 하나님과 사탄(또는 그에 상응하는 악의 세력)이 우주적인 세력으로 대결하고 있다는데 대한 이원론적이며, 우주적-세계종말론적 신앙이다. 현재의 역사는 비록 일시적이지만 돌이킬 수 없이 사탄의 지배를 받고 있으며, 따라서 하나님께 속한 의인들은 수난을 당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머지않은 장래에 사탄의 세력을 완전히 무너뜨리고, 닥아오는 미래는 하나님의 왕권통치 아래 완전한 세상이 될 것이며, 이 때 수난 중에 신앙을 사수한 의인들은 영복을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M.Rist, “Apocalypticism", IDB vol. 1, 157쪽 이하.

대부분의 학자들은 무기사상의 기본모형을 ① 우주적인 선신과 악신의 대결구도로 보는 이원론과 ② 초월적 하나님이 현실역사에 개입하시어 우주적으로 사탄의 세력을 물리치시고 새 세상을 만드시는 내세주의적 종말론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이러한 기본적 틀거리에 2차적인 특징으로서 신화적 동물의 상징, 환상, 예언된 재난, 천사론(귀신론), 구세주로서 인자 또는 메시아사상, 정해진 때에 대한 도식이나 숫자풀이, 주인공에 대한 가명 사용, 별들의 세력의 지상역사에 대한 영향력 등이 원용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묵시사상의 이해는 저러한 기본모형이나 틀거리를 장식하는 특징들에대한 파악보다는, 이스라엘 역사에 있어서 묵시사상의 기원문제를 어떻게 보는가 하는 관점에 더 직결된다고 여겨진다.

폴 핸슨은 구약 이스라엘의 묵시신학의 여명은 주전 722년 사마리아 멸망, 609년 유다왕 요시아의 죽음, 그리고 597년 바벨론 포로와 결국 587년 유다왕국 멸망으로 계속되는 역사에 대한 절망의식에서 태동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묵시사상의 그 구체적인 모습은 바벨론 포로귀환 이후의 역사적 좌절에 대처하는 신앙태도에서 출현하였다는 것이다. 즉, 당시 바벨론에서 페르샤로 이어지는 제국주의의 이교적 환경에서 ① 동화해 버리는 경우 (assimilation) ② 배교하는 경우 (apostasy) ③ 타협-적응하는 경우(accommodation)에 반대하고 나선 제4의 물결이 묵시운동이요 묵시사상이라는 것이다. 특히 제③의 태도는 페르샤제국과의 타협한 사독계 제사장들을 중심으로 제2 성전신학으로 나타났는데, 여기서 새로운 성직계급이 생겨나고 이방제국주의 세력과 합작함으로써 야웨신앙의 순수성과 그 목표를 상실한 것으로 보았다. 따라서 초기 묵시사상은 이스라엘이 신앙의 순수성을 사수하여 제사장나라로서 모든 백성이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을 섬기며, 이방에 빛으로의 사명을 감당할 것을 비젼으로 삼았다(사24-27 ; 56-66 ; 슥 9-14 참조). 그러나 현실역사의 흐름은 묵시자들(visionaries)의 사회참여와 개혁활동을 박탈내지 불가능하게 악화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묵시사상을 새창조(사 65,17)나 부활사상(사 25,8 ; 단 12,2), 초월적인 하나님나라의 도래(단 7,13-14 ; 슥 14,7-8 ; 48,35 참조)를 꿈꾸며 하나님의 역사개입을 수동적으로 기다리게 되었다고 본다.

 

P.D.Hanson, The Diversity of Scripture, 51쪽 이하 참조 ; cf The Dawn of Apocalyptic in Israel.

지금까지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하나님나라의 이상적 질서를 현실역사의 사회-정치적 차원에서 실현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의 회개신학이 가능했다. 그러나 예언자적인 정의와 공의를 역사적 지평에서 실현할수 없다는 절대절망의 역사적 산문이 묵시신학이라는 파악이다. 여기서 스위스 구약학자 예니(E.Jenni)는 “예언자적 종말론”과 “묵시적 종말론”을 식별해보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E.Jenni, “Eschatology of the OT", IDB, vol.2, 132쪽

폴 핸슨은 구약의 종말론은 주전 8세기 아모스와 고전예언자들에게서 나타난다고 보며, 묵시사상은 예언자적 종말론 사상의 영향을 받았으나 예언자적 종말론과 묵시적 종말론은 공통점과 차이점을 분명히 보여준다고 한다. 먼저, 공통점은 양자가 모두 인간역사의 의미와 방향에 대한 열쇠는 역사의 주재이신 하나님의 행동에 달려있다는 비젼을 가진다는 점이다. 양자는 인간역사의 모든 현실은 선악간에 하나님이 정하신 목표를 향해 움직여 나간다고 본다. 그러나 양자의 차이점은, 예언자적 종말론 (Prophetic eschatology)은 종말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룸에 있어서 현실역사에 대한 인간의 역할을 통합시킨다. 그러나 묵시적 종말론(apocalyptic eschatology)은 사회정치적 및 종교적상황의 열악한 상황때문데 하나님의 종말을 향한 행동은 이 세상의 역사현실 및 인간의 참여와는 점점 유리된 차원에서 진행된다는 것이다.

P.D.Hanson, “Apocalyptic Literature", 상게서, 468쪽 이하

 

 박준서는 이러한 구별을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 예언신학에서의 심판과 종말은 새이스라엘, 새계약, 새다윗, 새성전, 새출애굽과 같이 역사의 연장선장에서 이루어지지만, 묵시문학에서 종말은 구원의 역사완성이 아니라, 악의 세력의 파멸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과 도래할 아름다운 세계비젼은 공통점이나, 예언자적 종말은 역사의 연속성(현실성)을 강조하고, 묵시적 종말론은 역사의 “질적인 불연속성”을 강조한다고 본다. 따라서, 구약의 종말론 이해는 정상적인 현실상황에서는 역사내재적인 하나님의 역사성취의 목표가 제시된 반면, 극도의 상황에서는 역사초탈적인 종말시대의 도식적 이해가 가능해진다. 여기서 묵시적 종말론을 가진 소외계층의 사회집단(예컨데, 쿰관공동체)은 상징적 세계관을 형성하면서 이것을 이데올로기로하여 현실사회와 맞선 대안사회공동체를 건설하는 “묵시주의운동”을 보여주게된다는 분석이다. 이 시점에서, 왕대일이, “그러나 묵시문학의 역사이해를 역사에 대한 비관주의, 또는 이원론적 태도로만 보아야할까 ? 묵시문학이 여전히 역사가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서 진행되고 있다는 신념을 포기하고 있지 않음에 관심을 모아야한다.” 고 지적한 것은 앞으로의 묵시사상이해의 재검토를 위해 중요한 관점이라고 생각된다. 이와관련하여, 폴 핸슨도, “묵시적 종말론에서 나타나는 연대기적 때의 관심은 묵시사상의 뿌리인 예언자적 종말론에서 완전한 결별을 막아주고 있다. 역사적 맥락에서 완전히 단절된 종말사상은 묵시사상이아니라 영지주의사상(gnosticism)이다.” 라고 명쾌히 밝힌것은 매우 중요한 지적이다. 그러므로 묵시문학의 중심사상은 하나님이 적어도 현실역사에서 어느 한도까지는 경과적으로 거리를 두고 계신것을 선포하는 것으로서, 이 과정(하나님의 침묵)은 악의세력의 자유로운 확장을 허용하고 있다는 의견은 다소 과장된 것임이 틀림없다.

 

이상에서 살펴본 묵시사상이 구약에서 충분히 발전된 모습으로 나타나는 유일한 책이 다니엘서이다. 18세기 이후 다니엘서의 전통적인 주전 6세기 기원설은 도전을 받게되었고, 19세기 이래 베르트홀트(L.Bertholdt)의 다니엘주석(1806-1808)을 선두로 역사비평적연구는 ① 언어 ② 역사 ③ 신학 ④ 논리에 기준하여 다니엘서는 마카비시대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Antiochus IV Epiphanes)의 박해아래 고난 받고 저항하는 유대인들을 격려하기 위해 쓰여진 가명의 문서라고 주장하게 되었다. 다니엘서의 예언들은 “사건이후의 예언”으로서(vaticinia ex eventy) 규정되었으며, 이러한 예언들은 묵시적 메시지의 권위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B.S.Childs,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 Daniel, 611쪽

그러므로 다니엘서의 묵시사상이란 특정한 문학기법의 도움으로 그 저자와 그의 동시대독자들이 처한 현재 역사적 상황에 관해 행해진 일종의 역사해석으로 이해되었다. 구체적으로, 이러한 묵시사상은 이방세력의 통치기간에 대한 유대교 특유의 모든 반작용을 나타내며 디아스포라신앙의 모습을 가지고 있으면서, 능동적으로 현실역사의 정치참여에서 배제된 “소수”를 위한 역사관이라는 것이다.

 

TRE, Aporalyptik, II. AT, 198-99쪽

특히 안티오커스 4세는 주전 167년 예루살렘 성전제사를 폐지시켰으며 (단, 8,12ff ; 9,27 ; 11,31.36f ; 12,11), 그는 유대사회를 강제로 헬레니즘화 하려고 했다. 유대사회는 헬레니즘파와 전통신앙을 고수하는 유다주의파로 갈렸다(단 11,32). 이렇게 유대인의 신앙의 생존이 풍전등화와 같을 때, 주전 165년경 저자는 이 모든 사건들을 지켜보면서 다니엘서를 썼다는 추측이다. 그러나, 저자는 틀림없이 마카비 항쟁을 경험했고 (주전 166년 이후), 그 항쟁경험에서 “적은도움”(단 11,34)을 인정하고 있으나, 결정적인 구원은 초월적인 하나님 자신으로 부터 기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익명의 저자는 전설적인 지혜자 “다니엘”(겔 14,14.20 ; 28,3. 여기서 다니엘은 주전 6세기의 다니엘이 아니라 우가릿문서의 아크하트 이야기에 나오는 “다넬”이라고 본다)을 사용하여 바벨론 포로기의 느브삿네살왕 때부터 페르샤의 고레스 때까지의 인물로 등장시킨다. 다니엘서의 전반부 1-6장은 전설적 이야기로서 다니엘을 3인칭으로 서술하며, 7-12장의 후반 환상이야기는 일인칭 저자로서 처리하고 있다(단 7,1 ; 10,1의 도입양식 제외). 따라서 다니엘서는 무명의 저자에서 가명(위명)의 저자로 바뀌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후대 묵시문학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다니엘 저서는 유다 마카비의 성전재봉헌(주전 164년 : 하누카축제 : 수전절)사건과 아티오커스 4세의 죽음(파르테르 원정 도중 병사함 : 주전 164년)에 대한 언급이나 반영이 없는데, 그것은 성전모독후 3년반만에 종말의 시대가 기대되었으나, 다니엘의 묵시환상을 통해(단 7,25 ; 8,14 ; 9,24 ; 12,7) 그 정한 때는 역사의 진행과정에 따라 수정될수 있음이 점점 분명해 지고 있다는 해석이다(단 12,11 이하).

 

W.H.Schmidt, 상게서, 289쪽 이하, 특히 291쪽

그러나 이상의 역사-비평적인 다니엘서의 해석은 또한 많은 문제점을 안고있는 서구신학의 입장이라는 점에서 보수적인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비평을 받고있는 것이 사실이다.

Gleason L. Archer, Jr., A Survey of Old Testament Introduction, 1968, 365-388쪽 ; 정규남, 구약개론, 1985, 359-377 ; 최종진, 구약성서개론, 1986, 415-425쪽 참조.

그중에서도 최근에 존 왈튼은 고대중동의 소위 묵시예언양식과 후기 유대교 묵시문학양식과의 비교연구를 통해 다니엘서의 예언은 “사건후의 예언”(Vaticinium ex eventu)이 아니라는 점을 주장하였다. 그에 의하면, 아카드 묵시문서의 “사건후 예언” 다음에는 진정한 의미에서 예언이 나타나지않으며, 후기 유대교묵시문학에서는 사건후 예언 문맥 다음에는 우주적 종말로 심판예언이 나타나는데, 흔히 다니엘 11,1-39절을 “사건후 예언”으로 볼때, 단 11,40-45절의 성격은 미래에 나타날 역사적 인물에 관한 특별한 예언을 담고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며, “사건후 예언” 내용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John H. Walton, Anuint Israclite Literature in Its Cultural Context,Zondervan, 1989, 224-5쪽 참조 ; 비교 J.Barton Payne, Encyclopedia of Biblical prophecy, 1973, 1991, 372쪽

 

또한 비평학자들이 말하는 대로 에스겔서에 언급되는 다니엘은 우가릿문서의 전설적 인물 “다넬”(Danel)이 아니라 에스겔과 같은 포로시대의 유명해진 인물로서 주전 6세기의 역사적인물 다니엘을 언급한다고 보는 바르톤페인의 주장이 오히려 설득력이 있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우가릿문서의 “다넬”은 실제 바알종교와 관련된 인물로 등장하며, 그가 등장하는 이야기에서도 그의 아들 “아크하트”가 주인공이며, 지금까지 알려진 내용에서 볼때 “다넬”이 이스라엘 역사와 관련해서 하나의 신앙적 영웅으로 연결된 근거가 희박하기 때문이다.

 

M.D.Coogan, Stories from Ancient Canaan, 1978, 27-31쪽, “Aghat" 참조

다니엘서는 느브갓네살에 의해 유다왕 여호야김 3년 즉 주전 605년에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서(단 1,1-7 ; 에스겔은 주전 597년 제2차 포로로 잡혀갔다. 렘 46,2 비교), 페르샤제국의 고레스가 등장할 때까지 활동한것으로 보면(단 10,1), 다니엘은 고레스때 80세 이상의 고령이었다고 여겨진다. 다니엘이 남긴 히브리어(단 1,1-2,4a ; 8,1 - 12,13)와 아랍어(단 2,4b - 7,28)의 비망록 자료들을 모아(단 12,4 ; 8,26 ; 7,1 !) 그의 사후 어떤 제자가 지금의 모습으로 편집했을 가능성이 크다.

다니엘( ; 에스겔에서는 )은 “하나님(엘)이 나의 심판자다”라는 뜻인데, 이것이 곧 다니엘서의 주제로 볼수있다. 하나님은 “옛적부터 항상계신이”로서 천군천사들의 호위아래 심판책을 펼치시고 세상을 심판하시는 왕으로 소개된다(단 7,9 - 13). 다니엘서는 이런 의미에서, 죄악의 세력에 대한 신학적-역사적 해결을 찾고 있으며, 그 해결의 열쇠는 어떤 인간의 프로그램이나 노력에 있지않고 하나님의 심판주권에 달려있다고 하는 신정론적인 역사철학이다. 심판되어야할 악의 세력들은 느브갓네 살왕의 꿈에 나타난 금신상의 해석에 나타나는 것처럼 정금(바벨론) ????> 은 (메데-페르샤) ??????> 놋 (희랍) ??????> 철 (로마)의 세상권력들이며 이 악의 세력은 “사람의 손으로 하지 아니하고 산에서 뜨인 돌”(단 2,45)에 의해 부숴뜨려진다. 이러한 묵시적 역사 이해는 7장의 네짐승에 대한 해석에서도 재현 반복되는 것이다 : 사자 (바벨론) ??????> 곰 (메대-페르샤) ??????> 표범 (희랍) ??????> 열뿔달린 괴수 (로마). 하나님의 역사심판인 종말의 때는 저러한 세상주권자들의 역사진행을 거쳐 나타난다. 심판주 하나님은 “인자”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단 7,13-14), 역사의 수난속에서 신앙을 지킨 성도들이 “때가 이르매” (단 7,22) 인자와 함께 그 나라를 얻게된다. 다니엘은 예레미야의 예언대로 바벨론 포로기 70년이 끝나면 이스라엘 역사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지만 (9,3-19), 가브리엘천사는 “70 이레” (490년)가 이스라엘의 죄악을 대속하는 기간으로 정하였다는 묵시를 보여준다(9,24).

 

그러나 아직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할 마지막 정한 때는 아니다. “멸망케할 가극한것”(단 11,31 ; 12,11)이 거룩한 곳에 세워지며, 천지간에 큰 환란이 있을 것이다. 다니엘은 천사들이 하는 말을 듣는다 : “이 기사의 끝이 어느때 까지냐 ?” (단 12,6) 그 대답은, “반드시 한때 두때 반때를 지나서 성도들의 권세가 다깨어지기 까지니 그렇게 되면 이 모든일이 다 끝나리라.” (단 12,7)는 것이다. 다니엘은 “내가 듣고도 깨닫지 못한지라. 내가 가로되 내 주여 이 모든 일의 결국이 어떠하겠삽나이까.” (단 12,8) 물었을때, 그 묵시는 “다니엘아 갈지어다. 대저 이 말은 마지막때 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단 12,9)고 말한다. 결국 1290일을 지내고 또다시 1335일을 참으며 마지막 까지 기다릴수있는 사람은 복되다 (단12,11-12). 여기서 우리는 박준서의 지적대로 종말이 실현되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종말의 도래를 갈망하는 역사적 사고가 묵시사상의 특징임을 알수있다. 다른 한편 다니엘의 종말예언은 성서신학적으로 예수님의 예언에서 역사적으로 재현되었으며(마 25,15 ; 막 13,14), 그것은 요한계시록의 예수재림과 최후심판의 예언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것임을 알수있다. 다니엘서는 단순히 수난역사에 대한 신 정조적인 역사해석이 아니라 역사적인 예수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에 대한 예언이며, 그 예언은 신약교회의 역사로 그 의미와 가치가 드러난다고 하겠다.

 

III. 다니엘서에서 보는 묵시사상에 대한 몇가지 재검토

 

데즈먼드 포드는 역사-비평적 방법으로 다니엘서를 분석하고 주석적연구를 한후, 매우 주목할만한 지적을 해주었다. 그것은 지금까지 비평적학자들이 다니엘서를 후기 유대 묵시문학과 일방적으로 같은 내용으로 취급한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비평학자들은 외경과 위경에서 나타나는 묵시문학과 다니엘서의 공통점으로서 ① 가명사용 (Pseudongmity) ② 사건후의 예언문학 (Vaticinium ex eventu) ③ 역사결정론 (determinism) ④ 윤리적 수용성 (Ethical passivity)을 지적한다. 그러나 포드에 의하면, 다니엘서에 나타나는 다니엘은 결코 가명의 인물이 아니며, 신약은 다니엘의 예언이 예수그리스도의 사건과 연결된 참예언임을 증거하고 있고(마 24,15), 다니엘서의 “정한때”도 결코 역사 결정론으로 몰아부칠 성격의 것이 아니며, 다니엘서에는 오히려 강한 윤리적 강조가 나타난다(단 4,27 ; 5,20-23 ; 6,4 ; 9,1-21 ; 11,32-35 ; 12,10)고 주장한다.

 

이러한 시점에서 우리는 위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전제로, 오늘날 일반적으로 구약의 묵시사상과 연관해서 주장되는 점들이 다니엘서에 비춰볼때 그 타당성이 있는지의 여부를 다시 짚어보아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박준서의 정리에 의하면, ① 묵시문학의 역사이해가 신정론적인 것인가 ② 묵시사상은 역사비관론과 시간적 이원론을 말하는가 ③ 묵시적 역사이해는 역사결정론인가 ④ 묵시적 종말론과 예언적 종말론은 반드시 구별되는가 ⑤ 묵시신학에서 윤리는 수동성이거나 무시되는가 하는 점들을 우리는 재검토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다.

첫째로, 묵시문학은 역사에 대해 근본적으로 비관주의적 태도를 나타내는데, 그 이유는 현재의 역사는 악의 세력이 지배하고 있으며 따라서 현실의 역사는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활동무대가 아니기 때문에 의인들은 수난을 당할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서는 역사의 수난과 시련을 근본적으로 신정론적이아닌 인과응보론적으로 보고있다(단 8,12). 다니엘의 기도에서도 이스라엘의 범죄와 죄악에 대한 강한 고백과 회개가 나타난다(단 9,5.20 !).

둘째로, 묵시사상은 다니엘서 2장에서 볼때, 금신상의 4왕국은 인간의 역사가 하나님께 대항하는 악의 세력밑에 있다는 것을 말해주며, 현재역사는 악의 세력밑에 있기때문에 구원은 이러한 악의 역사의 개선이라는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질수 없다고 본다는 것이다. 역사 비관주의는 역사적 대적인 태도로 발전하며, 시간적 이원론인 현재역사는 악의 세력이 지배하는 암흑시대이며, 앞으로 올 시대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빛의 시대라는 것이다. 고로 최후의 종말을 기다린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서는 하나님이 이 현실역사의 암흑기에서 침묵하시는 것이아니라, 다니엘의 세친구를 불가마에서 보호하시며,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구원하시는 하니님의 행동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하나님의 살아계신 구원행동을 경험하고 이방의 대왕들도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칭송하고있다 :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의 신이시요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 (단 2,47 ; 4,34 ; 6,26 ; 3,29). 다니엘서의 하나님은 빛과 어두움을 모두 다스리고 주관하시는,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자” (단 6,27)로 이해되고 있다.

 

셋째로, 역사결정론에 관해서는 역사는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 종말을 향해 나가며 역사진행의 궤도수정은 있을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닫혀진 미래”로서 예언자의 “열려진 미래” (회개 여부에 따라)와 큰 대조를 이룬다는 것이다. 물론 다니엘 9장의 정해진 때에관한 숫자계산식의 연대구분은 그 정해진 계획표의 수정이 불가능한 닫혀진 미래를 상징하는 것 처럼 보인다. 만약 이것이 역사결정론이라면, 인간은 역사도피와 현세도피적인 태도를 취할수 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종말의 때는 다니엘서에서 3년반 이내로 임박해 있기 때문이다(단 12,7). 그러나 이 때는 다시 1290일로 연장되며 또다시 1335일로 확대된다(단 12,11-12). 마지막 때는 임박했으나, 그 때의 연기도 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다니엘의 태도는 현실도피주의가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인 역사참여와 역사변혁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넷째는, 묵시적 종말론과 예언자적 종말론의 구분은 불연속선인가의 문제이다.

예언자는 그래도 사회참여의 기회가 봉쇄되지 않았기 때문에 역사적지평에서 이루어지는 종말사건으로서의 회개와 개혁을 선도했으나, 묵시자는 사회참여의기회를 완전히 박탈당한 상태이기 때문에 극한 상황에서 신앙을 지키기 위해 역사도피적이며 타계주의적인 종말신앙을 강조한다는 것이다. 폴 핸슨은 이점에 있어서 묵시적 종말사상은 전략적인 후퇴로 보아야하며, 진정한 묵시자는 예언신학의 후예로서 기회만 주어지면 다시 역사참여와 개혁의 사명을 수행할 터이라고 설명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원론적으로 이 세상을 포기하고 하늘나라만 바라는 “영지주의자”로 전락하고 말 것이라고 경고한다. 다니엘의 경우에는 예언자적 활동(왕궁의 관리로서 신앙적 현실참여 및 기도활동)과 묵시적 활동(단 7-12장의 4가지 환상)이 일체 양면성을 가지고 나타난다.

 

마지막 다섯째로, 묵시사상에서 개인과 집단의 윤리성은 수동적이거나 무시되는가 하는점이다. 일반적인 이해로는 말세론자나 내세를 강조하는 신앙에서는 “나와 세상은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기 때문에 개인의 책임성과 윤리성이 문제가 되기쉽다.

 

그러나 이미 앞서 지적한 것 처럼, 다니엘서에서는 다니엘의 역사적인 삶의 태도를 통해 오히려 묵시사상의 강한 윤리성과 책임성이 강조 되고 있다. 예컨대, 저러한 묵시적 상황에서도 다니엘은 정상적인 생활인으로서 생활했을뿐아니라, 오히려 원수의 나라 왕국에서 고위직을 맡아 현실역사에 깊숙히 참여하였으며, 그의 대적들이 “고소할틈을 찾으려고 하였으나 능히 아무틈 아무 허물을 찾지 못하였으니 이는 그가 충성되어 아무 그릇함도 없고 아무 허물도 없음이었더라.”(단 6,4)고 본문은 말해주고있다.

 

이로써 보건데, 한국교회에서 자주 지적되는 잘못된 말세사상과 도피주의적 종말론은 다니엘서를 통한 올바른 종말론적 윤리에 의해 시정되어야할 점이라고 여겨진다. 세상만사는 결코 헛된것이 아니며, 그것은 묵시사상에서 볼때 선악간에 오직 하나님의 주권과 그 경륜속에서만 그 참 의미와 목표를 발견할수 있는 것이다.


구약성서에 나타난 노동

 

인간에게 시간을 준 것은 노동에 사용하라고 준 것이다. 물론 일에만 매달린 사람에 대하여 전도서는 심을 때가 있고 뽑을 때가 있으며, 건설할 때가 있고 허물 때가 있으며, 웃을 때가 있고 울 때가 있으며, 포옹할 때가 있고 춤 출 때가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노동은 우리 삶의 본질적인 요소이다.

 

1. 창조의 동참으로서의 노동

창세기 2-3장에서 창조자가 자기의 피조물에게 준 위탁의 근본적 내용은 노동이다. 창세기 2장 5절에서는 창조 이전의 시간을 묘사한다. 이 때에는 초원의 식물과 경작지의 채소가 없었지만, 동시에 비(雨)와 사람도 없었다. 초원의 초목은 비만 오면 충분하지만, 경작지는 사람을 필요로 한다. 인간의 과제는 밭을 경작해야 한다(아바드 db^u*=섬기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인간은 노동을 함으로서 자신의 자리매김(창조주에 대한 피조물)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 나타난 창조 역사(歷史)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형상을 따라 인간을 창조하시고(창 1:26, 27), 인간 창조 이후에 여러 가지 형태로 인간을 축복하셨다. 인간에게 동물을 다스릴 수 있는 권한(라다, hd`r`)을 허락하셨고(창 1:26, 28), 인간을 축복하시어 생육하고(파라, hr`P*), 번성하고(라바, hb*r`), 땅에 충만하여(말레, al@m*) 땅을 지배(카베쉬, vb@K*)하도록 축복하셨다(창 1:28). 이 축복은 인간의 능력이며 과제이다.

 

창세기 2장 15절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동산을 건설하자마자 곧바로 인간을 동산 안에 데려가시고 에덴 동산을 다스리며 지키도록 하셨다. 하나님의 창조와 선물은 인간 활동의 전제가 된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인간에게 선물로 주시고, 이 선물을 돌보고 지키는 것을 인간의 과제로 주셨다.

 

창 3장 23절에서도 인간은 밭을 경작해야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인간 창조의 의미나 목적으로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창조주를 불신한 결과 처벌로서 인간에게 내려준 것이다. 이제부터는 노동의 수고와 밭의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는 재앙이 저주에 속한다. 인간에게 맡겨진 피조물의 위탁사항(인간의 노동)은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나타난다. 진보는 항상 축복의 결과로 나타난다. 그런데 교만은 어디에서나 가시덤불을 만나게 된다. 축복을 교만으로 바꿀 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만나게 된다.

 

2. 잠언의 지혜가 본 근면과 태만

이스라엘의 지혜교사들은 솔로몬 시대에서부터 학문적 연구를 발전시켰다. 인간의 생활 영역 전체를 위한 교육학을 포함하여, 왕자의 교육과 관리들의 교육, 법률적인 지혜와 자연과학적인 지혜에 속한 정치학이 등장하였다. 그러나 노동과 그 결과의 문제를 연구한 자들은 지혜교사들이었다. 이들은 상세한 규칙을 확립했다. 즉, 근면한 사람은 성공하고, 게으른 사람은 빈궁해진다는 철칙이다.

 

“게으른 손은 가난하게 만들지만, 부지런한 손은 부유하게 만든다.”(잠 10:4)

지혜문학에서는 부(富)를 주어지는 것으로 보지 않고, 책임을 가진 인간의 손에서 결정되는 것으로 보았다. 빈자와 부자의 사회적 대립을 근면과 태만의 결과로 보려고 하였다.

“게으른 자는 원하여도 헛일이나, 근면한 자의 노력은 만족함을 얻는다.”(잠 13:4)

자유와 예속, 지배와 압제도 노동의 경주에 달려있다고 보았다.

“부지런한 자의 손은 지배하게 되어도, 태만은 강제노동을 당한다.”(잠 12:24)

수많은 다른 잠언도 이와 비슷한 규칙을 확언하고 있다(잠 11:16; 12:27; 14:23; 21:5). 그리고 전도서에서도 이와 비슷한 구절을 볼 수 있다.

 

“태만한 경우에는 석가래가 무너지고,손이 게으른 경우에는 집이 샌다.“(전 10:18)

이스라엘의 교사들은 인간을 잘 알고 있으며, 그들은 할 수 있는 한 게으름을 막아보려 하였다. 게으름의 결과를 개인의 체험과 관련하여 교훈으로 나타낸다.

“내가 게으른 자의 밭과,지각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보았다.그런데, 그것은 완전히 잡초에 뒤덮였으며,그 지면에는 야생초로 꽉 덮였으며,농장의 돌담이 무너져 있었다.좀 더 자자, 좀더 졸자,좀 더 팔짱을 끼고 쉬자,그러면 너의 가난은 복병처럼 달려들고,네 곤경이 거지처럼 몰려올 것이다.”(잠 24:30-34)

 

여기에서 시사하는 교훈은, 태만이란 야웨의 선물을 인간이 죽이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이 죄악의 근원은 적절한 때에 일을 시작하려고 작정하지 않는 게으름에 있다. 태만의 한 유형은 수면벽이다.

“태만이 깊은 잠에 빠지게 하고,게으른 사람은 굶주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잠 19:15)

“너 게으른 자야, 개미에게로 가서,개미의 일하는 모습을 보고 슬기롭게 되어라!개미에겐 전혀 감독도 없고, 통치자도 없다.그래도 개미는 여름에 양식을 마련하고,추수 때에 자기들의 먹이를 모아들인다.게으른 자야, 네가 얼마나 더 오래 누워 있겠느냐?네가 언제 네 침상에서 일어나겠느냐?좀 더 자자, 좀 더 졸자좀 더 팔짱을 끼고 쉬자!그러면, 네 빈궁이 복병처럼 달려들고,네 곤경이 거지처럼 몰려올 것이다.”(잠 19:15)

슬기롭게 일한다는 말은 좋은 때를 알아낸다, 즉 적절한 때를 놓치지 않는다는 뜻을 의미한다. 건전한 사람은 자발적으로 때를 맞추어 일터에 나간다. 현인들은 태만의 특징들을 열거한다(참조, 잠 26:13, 16). 얼빠진 구실, 거짓 핑계에 지나친 잠, 식사 중에까지도 게으름을 피우고 꿈틀거림, 자기 과대 평가, 게으른 자가 순간적인 자기의 정욕에 몰두하는 것 등은 자기의 파멸을 재촉한다. 게으른 자는 적절한 시간을 바로 알지 못하고, 자기에게 주어진 가능성을 깨닫지 못한다. 노동이란 창조주가 마련해 주신 축복을 가져오는 행동이다(잠 14:23). 그러므로 인간은 두 가지 가능성 앞에 서있다. 얻느냐 잃느냐! 대지가 제공하는 것을 받아들이느냐 그냥 놓아두느냐(잠 20:4). 지혜교사는 성공과 실패가 노동의 결과임을 주장한다.

 

3. 노동의 결과

노력으로써만 억척스럽게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자신만만한 사고에 관해 성경은 또 다른 견해를 보여준다. 즉, 노력은 인간이 하나, 결과는 야웨의 자유로운 축복이다.

“야웨의 축복만이 부유하게 만들며,자신의 수고는 하나도 도움이 되는 것이 없다.”(잠 10:22)

일을 하면 돈을 번다는 일반적인 기대는 야웨의 축복의 결단을 떠나서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없다. 인간의 의지와 성취 사이에도 야웨가 개입하여 차질이 생기게 하신다.

“의지의 시도는 인간에게 있으나,혀의 대답은 야웨에게서 온다”(잠 16:1)

 

자기의 힘으로 성취하겠다고 과도하게 열심을 내는 행위는 냉엄한 허사를 가져온다.

“야웨가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건축하는 자의 수고가 헛되고,파수꾼의 경성이 헛되다.헛되이 너희는 새벽에 일어나며,밤늦게까지 수고하고,수고의 떡을 먹고 있다.야웨가 자기의 친구에게는 그것을 주시는도다”(시127:1)

여기에서도 경험 지혜가 말하는 것은 인간의 자립과 자유 의지에도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야웨의 축복이 없을 때에는 열심을 내어도 소용이 없듯이, 야웨를 신뢰하고 순종하려는 각오가 없이는 재물과 부는 허무한 것이 된다(잠 11:4). 즉, 재산으로 인하여 허위(잠 19:1)나 분쟁(잠 17:1)이 생기기 쉽다. 그리고 성공은 특히 잘못된 확신을 가져온다(잠 11:28). 이와 같이 이스라엘의 지혜는 노동을 올바로 이해시켜 준다. 인간은 규칙을 알아야 한다. 특히 규칙의 주인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게으름을 피우면 동물(개미) 이하로 전락하게 되며, 자기 기만에 빠져 하나님이 되려고 하는 길을 걷지 않도록 경고를 받는다.

 

4. 노동과 휴식

노동과 함께 휴식도 하나님의 귀중한 선물로 여겨지고 있다. 신명기와 신명기 역사서에서는 휴식(메누하, hj*Wnm=)의 근본 사상을 위대한 구원의 선물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약속한 구원의 선물로 규정하고 있다. 이것은 끊임없이 여행하는 편력의 시대 후에 쉬는 휴식을 의미하지만, 사면을 에워싸고 있는 모든 원수들 앞에서 태연히 쉬는 휴식도 의미한다(신 12:9f.; 25:19; 수 21:43f.; 삼하 7:1, 11; 왕하 8:56).

 

시편에서도 잠을 통한 휴식을 높이 칭찬한다. 과도하게 열심을 내는 자도 기껏해야 근심 중에 먹을 수 있는 떡을, 자기를 괴롭히며 시간이 지나도록 여분의 노동을 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한 채 겨우 먹는 떡을 야웨는 자기의 사랑하는 자가 잠자고 있는 동안에 주신다는 것이다(시 127:1-2). 시 95:7-11에서 개인에게 주어진 휴식의 선물은 야웨의 음성을 듣는 것과 결부되어 있다.

 

잠언의 시는 생활에 나타난 지혜의 가치를 생생하게 묘사한다. 이것은 평안한 잠 속에서 나타나는 것으로 묘사하였다.

“네가 앉을 때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네가 누울 때에, 평안히 쉴 것이다.”(잠 3:24)

전도서는 인간이 노동과 적절한 관계를 맺을 때에 평안히 잠을 잘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노동하는 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잠을 달게 자거니와부자는 배가 불러서 잠을 자지 못한다.”(전 5:11)

지나친 열심이 휴식을 박탈하였던 것처럼, 과잉이 휴식을 빼앗아간다(전 2:23). 잠을 잘 잔다는 것은 야웨의 선물과 부르심에 응하는 삶의 표징이다. 휴식 속에 생활의 예술이 나타나며, 현인의 슬기, 즉 야웨의 경외가 나타난다. 전도서는 열광적으로 일만 하는 사람의 헛된 수고와 그 무위성을 깨달아 알고 있다. 인간의 휴식은 야웨의 귀중한 선물이며, 야웨께 대한 신뢰와 깊이 결부되어 있다.

 

휴식이 야웨의 귀중한 선물이기에, 구약성서에서는 휴일을 제도로 고정시킨 안식일 계명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안식일 계명의 중요한 내용은 노동으로부터의 휴식이다. 특히 사회적으로 약자의 위치에 있는 자들도 함께 쉴 수 있게 했다. 이러한 휴식의 근거는 야웨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해방시켰다는 데 있다(신 5:15). 휴일의 근본적 의미는 선물로 받은 해방을 기억하는 것이다.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행동을 기억하는 데 있다.

 

5. 노동과 사회

노동에는 개인적 차원 뿐 아니라, 사회적 차원도 있다. 애굽의 왕은 이스라엘 백성의 성장을 시기하며 이를 막기 위해 부역 감독관들을 이스라엘인에게 세우고, 무거운 짐(부담)을 지워 억압하였다. 그의 억압의 의도는 실패했다:“그러나 학대를 받을수록 더욱 번식하고 창성하니….” 이방인의 악한 의도는 야웨로 하여금 그의 보호와 축복을 이스라엘에게 내리게 한다.

 

애굽의 억압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은 혹독한 강제 노동의 간역을 겪는다. 그러나 야웨께서는 이스라엘의 탄식을 들으시고 선조와 맺은 계약을 기억하시고(출 2:23-25), 해방을 약속한다:“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령이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으로 인도하리라.” 강한 자들의 지배의 또다른 형태는 억압적 노동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노동은 인간에게 성취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피지배자라는 왜소감을 줄뿐이다.

 

이사야 65장 17-25절에서는 새 창조, 즉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창조의 사상을 담고 있다. 여기서는 포로 후기에 새롭게 출발하는 이스라엘 민족의 새 공동체의 이상과 지표가 담겨져 있다. 새 창조에 의해 탄생되는 이스라엘 민족의 새 공동체는 무엇보다도 평화의 공동체를 지향하고자 하였다. 여기에서 추구하고 있는 “평화”는 “정의”, 특히 “경제적 정의”의 실현을 통하여 실현되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집을 지은 사람들이 자기가 지은 집에 들어가 살 것이며,포도나무를 심은 사람들이 자기가 기른 나무의 열매를 먹을 것이다.자기가 지은 집에 다른 사람이 들어가 살지 않을 것이며,자기가 심은 것을 다른 사람이 먹지 않을 것이다”(사 65:21-22).

 

여기에서는 노동의 결과가 정당하게 누려지고 분배되는 사회를 추구한다. 이러한 사상은 포로 후기에 양분화 된 사회 질서­소수의 부유한 지배 계급과 다수의 가난한, 피지배 계층­속에서 배태되었다. 이와 같은 양분화 된 사회 질서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더욱 악화되어졌다. 따라서 “정의의 실현을 통해 평화를 이룩하려는 평화 운동”은 신약 시대의 하나님 나라 운동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발전하였고, 그 사상은 종말론적으로, 또 묵시문학적으로 더욱 심화되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