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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선지서

스가랴 3 - 4장

by 은총가득 2021. 10. 24.

 

 

 

저항과 지지를 받는 여호수아 (스가랴 3:1-7)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처음 정착할 때 제 1 대리자였던 여호수아가 있었다. 여기 포로기 이후에, 두 번째로 가나안에 정착하게 될 때에도 매우 활동적이었던 동명이인이 나온다. 예수도 그와 같은 이름이며, "구원자" 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들은 둘다 오실 자의 상징이었다. 스가랴와 이야기하던 천사는 "그에게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보여 주었다." 이 예언자는 그를 자주 보았던 듯하다. 그래서 그 여호수아는 그에게 말했고, 그들 둘 사이에는 큰 친밀감이 있었으리라. 그러나 보통 육안으로는 오직 그 여호수아가 사람들 앞에 나타났던 그대로를 보았을 뿐이다. 만일 그가 어떻게 여호와 앞에 서는가를 알려 한다면, 환상으로 보아야 했다. 그리고 바로 그렇게 이 예언자에게 보여졌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함께할 때 진실한 존재가 되나, 세상 사람의 눈에 나타날 때는 그렇게 되지 않는다.

 

그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즉 그리스도, 곧 아론의 반열에 속한 대제사장들까지도 거느리고 있는 천사들의 주님 앞에 섰다. 그는 그의 직임을 수행하고 천사들의 요구에 따라 하나님을 섬기려고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다." 그는 이스라엘을 위하여 계시를 자문하려고 섰으니, 그는 대제사장으로서 그들의 대리자였다. 범죄와 부패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의 두 가지 커다란 방해물이다. 우리가 범한 죄의 결과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치 않게 되었다. 우리 속에 거하는 죄의 세력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역겹게 되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 모두가 이 두 가지 때문에 위험에 빠져 있다. 여호수아는 바로 이 때문에 여기 있었으니, "율법은 약점을 가진 사람들을 제사장으로 세웠다" (히 7:28). 또한, 양자에 관하여, 우리는 하나님에 의해 우리에게 "의와 성화" 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구원을 받는다.

 

Ⅰ. 여호수아는 죄인으로 고소되지만, 의롭다함을 얻는다.

 

1. 심한 이의가 그에게 제기된다. "사탄은 그의 우편에 서서 그를 대적한다." "그에게 율법 노릇을 하는 대적은 사탄이다." 그는 검사나 증인이 서듯이 죄수의 오른쪽에, 그의 오른편에 선다. 악마는 형제의 고소자로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 이다(계 12:10).

 

혹자는 이 대제사장이 많은 하급제사장들의 죄로 인해 고소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후, 이방 여인들과 결혼하는 큰 죄를 지었다(스 9:12; 느 13:28). 하나님께서 제사장직을 재건하려고 하실 때, 사탄은 제사장들에게서 발견되는 죄를 통해서 거기에 반대하며, 그들을 지정된 영예에 무가치한 자들로 만든다. 우리가 사탄으로 하여금 우리에 대적하는 이점을 주며, 비난과 고소가 가능한 여지를 제공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우매함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만일 어떤 것, 특히 제사장들에 있어서 어떤 것이 빗나간다면, 사탄은 꼭 그것을 악화시켜 최악의 사태를 초래하고야 말 것이다. 사탄은 "그를 대적하려고," 즉 그가 공공의 선을 위해 행하고 있는 봉사를 반대하려고 섰다. 그는 "그의 우편에" 섰고, 그를 실망시키고 그의 길에 어려움을 일으킨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려고 그의 앞에 서거나 그의 권세를 받들기 위해 하나님 편에 설 때, 사탄의 교묘함과 이적이 온갖 반대를 감행할 것을 각오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를 반대하는 자를 반대하자. 그러면 그가 우리로부터 도망할 것이다.

 

2. 승리적인 방어가 그를 위해 취해졌다(2절). "여호와께서(즉 주 예수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하셨다. 심판자가 바로 자기들의 친구인 성도들의 행복이여! 그들이 고소된 자는 그들의 후원자요, 보호자이며 옹호자이어서, 확실히 그들을 구해낼 것이다.

 

(1) 사탄은 여기서, 권위를 가지고 정복하셨으며 또 여러 차례 침묵시킨 자에 의해 저지된다. "형제를 고소하는 자," 곧 사역자들과 그 사역을 비난하는 자는 "추방된다." 그의 고발은 취소되고, 그들에 반대하거나 찬성하여 내놓은 제안들은 악의있고 어리석으며 괴씸한 것으로 여겨진다.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여호와(곧 우리의 구속주)께서 이르시되,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곧 창조주 여호와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힘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효과있게 하는 데 사용된다. "여호와께서 너의 악한 분노를 누르시고, 너의 악한 참소를 거절하시며, 자기 종에 대한 너의 적의를 보복하신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는, 사탄이 자기들에 대해 가장 광포하게 보일 때에 자기들을 위해 용맹히 나타나실 분을 모시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라. 그는 사탄과 협상하지 않고, 날카로운 견책으로 즉시 그의 입을 다물게 하신다. "오 사탄아, 여호와가 너를 책망하노라." 이것이 저 광포한 원수를 처치하는 최선의 길이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서라."

 

(2) 사탄이 논박된다. 그는 제사장을 대적하지만, 그로 하여금 그가 대적함이 다음과 같음을 알게 된다.

 

[1] 아무 효과도 없다. 예루살렘을 대적하면 아무 것도 성공하지 못하리라. 그 까닭은 "여호와께서 그(예루살렘)를 택하셨고," 그의 선택에 의해서 함께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대적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아신다. 그는 그들을 택하셨을 때, 그것을 예견하시고 그들을 택하신 것이며, 따라서 이제 그들을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는 그들을 택하셨을 때 그들의 죄악을 아셨다. 그래도 그의 선택은 이루어졌다.

 

[2] 그것은 불합리하다. 왜냐하면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여호수아가 그렇고, 제사장직과 그가 대표하는 그 백성이 그렇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칭송을 받아야 해서가 아니라 동정을 받아야 하겠기에 그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에게 최선을 다하려고 준비하며, 그들의 약점을 기꺼이 용납한다. 따라서 그들이 실수하는 것을 드러나게 하려 하지 않으신다. 그들은 근래에 불 속에 있었다. 그들은 까맣게 탔다. 그래서 그들이 들어 있던 그 불의 냄새를 지니고 있다. 따라서 그것은 고소될 것이 아니라 변명될 것이다. 사람들은 얼마 전 바벨론에서 포로였던 자들이야말로 매우 비천하고 하찮은 존재들일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들은 근래에 큰 고통으로부터 구출되었다. 그렇다면, 사탄은 다시 그들을 고통에로 던지고 싶어할 만큼 잔인한 데서 영광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 그가 그들을 던져 버리고 포기할 것인가? 아니다. 그는 아직도 연기를 내고 있는 부지깽이를 소멸치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것을 불에서 꺼낸 것은 용도가 있어서였기 때문이다. 다가온 위험에서 가까스로 피함은 행복한 조짐이며 더 흘륭한 은혜에 대한 강력한 탄원거리가 된다. 회개한 영혼은,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기적에 의해 "불에서 꺼내진 그을린 나무" 이다. 따라서 사탄의 희생물로 버려두지 않을 것이다.

 

Ⅱ. 여호수아는 더럽혀진 자로서 나타나지만, 정화된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대변한다. 그래서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씻겨지고 성화되기까지는 모두가 "부정한" 자들과 같다. 이제 여기서 다음을 관찰해 보자.

 

1. 여호수아가 입고 나타났던 부정을 보자(3절). 그는 조잡할 뿐만 아니라 "더러운 옷을 입었으니," 이는 그의 직임의 위엄과 그의 일의 거룩함을 손상했다. 모세의 법에 의하면, 대제사장의 옷은 "영화롭고 아름답게 하게" 되어 있었다(출 28:2). 그러나 여호수아 옷은 그에게 부끄러움과 경멸거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 옷을 입고 "그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섰다." 그는 직무를 수행할 때 입는 깨끗한 세마포 옷을 못가졌다. 그러므로 이것은, 제사직이 가난하고 멸시받았으며, 비난을 받는다는 것 뿐 아니라, 거룩한 것에도 많은 허물이 있음을 암시한다.

 

돌아온 유대인들은 그들이 어려움을 잘 참았으므로 죄를 불평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죄가 그들 중에 하나님의 역사의 진보에 큰 방해였음을 인식하지 못했다. 그들이 우상 숭배를 떠났으므로 어떤 허물에 의해서도 참소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잘못된 많은 것들이 있음을 그들에게 보이셨다. 이는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의 진보를 더디게 했다. 그들은 이웃하는 어떤 국가들보다 더 위험하다. 그들을 대적하여 싸우는 영적 원수들이 있었다.

 

갈대아 해석판에 의하면, "여호수아에게는 제사장들이 택하기에 합당하지 않는 아내들을 택한 아들들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이 사실임을 발견한다(스 10:18). 또한 제사직에 있어서 잘못된 다른 일들이 있었던 것은 의심할 수 없다(말 2:1). 그러나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사자 앞에 서는" 것을 허락받았다. 비록 그의 자녀들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를 행하지 않았으나, 제사장직의 언약이 깨어지지는 않았다. 그리스도께서는 마음이 정직한 그의 백성을 관대히 대하시며, 그들의 여러 가지 약점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교제하는 것을 용인하신다는 점을 명심하자.

 

2. 그를 정하게 하기 위한 준비가 취해졌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수종들며 자기를 기쁘시게 하려는 천사들에게, 여호수아를 더 나은 상태로 이전시키라고 명령했다. 여호수아는 그의 동정의 대상으로서, 더러운 옷을 걸치고 여호와 앞에 나왔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가 마땅히 품을 수도 있었을 분노가 아니라 연민을 가지고 은혜롭게 그를 쳐다 보았다. 그리스도께서는 여호수아의 더러운 옷을 꺼려했으나, 그를 몰아 세우지 않고, 그 옷을 벗겼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제사장들로 택하신 자들을 은혜로 대하신다. 그는 그들과 그들의 죄 사이를 가르시사, 그들의 죄가 그들과 하나님 사이를 가르지 못하도록 하신다. 그는 죄인들과 화해하시는 것이지, 죄와 화해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 여호수아를 위하여 두 가지 일이 취해지는데, 이는 신자들 안에서 그들을 위해 역사되는 하나님의 은혜의 이중적 역사를 나타낸다.

 

(1) 그의 더러운 옷이 벗겨진다(4절). 이 일의 뜻은 그리스도께서 권위있는 자로서, "보라, 내가 네 죄를 너로부터 떠나게 하였도다" 라고 말씀하신 중에 우리에게 주어졌다. 그 죄악은 사하시는 긍휼에 의해 벗겨졌고, 그 악취와 오점은 양심에게 선포된 평화에 의해서 제거되었고, 죄의 세력은 신생의 은혜에 의해 깨어졌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실 때, 그는 "우리 허물을 우리로부터 물러가게 하사" 우리를 정죄하려고 대적하여 나타나지 못하도록 하신다. "동이 서에서 멀 듯이" 죄는 우리에게서 멀리 물러간다. 그가 성품을 성화하실 때 그는 우리로 하여금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우리의 부패한 애정과 정욕의 더러운 누더기를 우리로부터 추방하도록 해 주시니, 그런 것들에 우리는 더 이상 관계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에게 입혀지거나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그의 피로 그들의 죄를 씻으시며 그들을 우리 하나님을 위하여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신다" (계 1:5, 6). 우리가 죄의 오염으로부터 깨끗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부정하게 여겨져서, 제사장의 직분을 행치 못하게" 될 것이다(스 2:62).

 

(2) 그는 새 옷을 입었으니, 그의 더러움의 수치를 제거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벌거벗음의 수치를 가렸다. "내가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여호수아는 깨끗한 자기 옷이 없었으나, 그리스도께서 마련해 주신다. 그 까닭은 그 자신이 세우신 제사직이, 비록 사람들 앞에서 조롱거리가 되거나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더라도, 없어지게 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갈아 입은 옷은 비싼 옷으로서, 절기 때에 입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거지같이 입었던 때와는 달리 사랑스럽게 보이리라. 거룩한 일을 감당하는 자들은 악을 그만둘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하는 것을 배우리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현명하고, 겸손하고, 근면하고 신실하게 만드실 것이며, 모든 선의 모본으로 삼으실 것이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아름다운 옷을 입었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영혼의 제사장으로 삼으신 자들은 그의 의로우심의 흠없는 옷을 입고 그들에게 장식이 되는 그의 성령의 은혜와 함께 하나님 앞에 나타난다. (입혀지고 주입된) "성도의 의로움은" 깨끗하고 흰 훌륭한 세마포요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 가 성장할 때 입는 옷이다(계 19:8).

 

Ⅲ. 여호수아는 직임에서 쫓겨날 위험에 놓여 있었다. 그러나, 그대신 그는 그 직임에 다시 임명되고, 세워진다. 그는 죄를 사함 받았을 뿐 아니라, 그 자신에게 충족한 은혜를 받았다. 그는 rectus in curia - 즉 법정에서 무죄선고를 받듯이, 그의 이전 명예와 신임을 회복했다.

 

1. 제사직의 면류관이 그에게 씌워진다(5절). 이는 특수한 경우에, 예언자의 요구에 따라 행해졌다. "내가 말하되, 그의 직임에 해당하는 명철로서, '정한 관을 그 머리에 씌우소서'하니라. 이제 그는 정하게 보이니, 또한 위대하게 보이도록 하소서. 그를 대제사장의 모든 옷으로 치장하소서." 하나님이 종교의 회복과 부흥을 꾀하실 때는, 그의 예언자들과 백성을 부추기사, 그를 위해 기도하게 하시고, 그들의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써 그것을 행하신다.

스가랴는 천사들이 여호수아의 머리에 관을 씌우라는 명령을 받게 해달라고 기도했으며, 그들은 곧 그렇게 했으며, "제사장의 옷을 그에게 입혔다." 아무도 이 명예를 스스로에게 돌리지 말고,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자" 에게 돌릴 것이다. 또 "여호와의 사자가 곁에 섰다." 즉 피조된 천사가 맡은 일을 감독하고 있었다. 그는 곁에 서서, 그것을 기꺼워하며, 그 일을 위하여 제시한 명령을 준수할 것을 결심하며 저 제사직에 계속 종사할 것을 확신한다.

 

2. 제사직의 계약은 그와 함께 갱신되니, 하나님의 "평화의 계약" 이라고 불리운다(민 25:12). 펨블(Pemble)씨는 그것을 "그의 직임의 특권" 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이 증인들 앞에서 그에게 선포되고 전달된다(6,7절). 여호와의 사자는 그를 직임에 맞게 보살펴 주고 그를 그것에 가담하게 한다. 그리고 비록 그가 "맹세로 제사장이 되지" 않았으나(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라 제사장이 된 자에게 그 명예가 유보된다. 히 7:21), 그의 예형으로서, 그가 그의 직임을 맡은 기간의 엄숙한 공포와 더불어 기념된다. 여호와의 사자는 여호수아에게 단언했다. 즉 만일 그가 그의 지위의 임무를 이행한다면, 그 직임과 보상을 누릴 것이라고 했다. 이제 다음을 주목하자.

 

(1) 그가 직임을 맡으려 들어갈 때 처한 상황은 무엇인가? 그로 하여금 선한 행위를 지켜야 함을 알게 하라. 그는 "여호와의 도를 준행해야" 한다. 즉 선한 생활을 영위하고, 모든 생활에 있어서 거룩해야 한다. 그는 백성들 앞에서 하나님의 계명의 길을 가야 하며, 신중히 걸어야 한다. 그는 또한 "하나님의 율례를 지켜야" 하며, 제사직의 모든 봉사를 주의 깊게 감당해야 하며, 하급 제사장들이 품위있고 질서있게 각자의 지위에 해당하는 의무를 수행하도록 감찰해야 한다. 그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 야 한다(행 20:28). 선한 사역자들은 선한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하자.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들은 사람들에게서 신임을 받아야 하며, 온갖 주위를 다 기울여 신임을 지켜야 한다(딤전 6:14)

 

(2) 우리가 기대할 수 있고, 그의 직임의 적당한 이행에 있어서 확신할 수 있는 특권들은 무엇인가? 그의 특권은 Quamdiu se bene gesserit - 즉 선한 행실과 함께 간다. 그로 하여금 그의 역할에 충실하게 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를 인정하시리라.

 

[1] "네가 내 집을 다스릴 것이다. 너는 성전의 일을 통할해야 하며, 하급 제사장들은 네 지시 아래 있어야 한다." 교회와 교회 통치자들의 권세는 입법적인 것이 아니라, 오직 사법적 권한임을 주목하라. 대제사장은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새 법을 만든다든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것 외에 다른 예배 의식을 제정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과 율례들이 어김없이 준수되는지 확인해야 하며, 그것들을 준수하는 자들을 보호해 주고 격려해야 하며, 그것들을 어긴 자들은 찾아 징벌해야 한다.

 

[2] "너는 또 내 뜰을 지킬 것이다. 너는 성전의 모든 뜰에서 행해지는 일들을 감찰해야 하며, 그들이 볼 예배를 위해 그들을 질서있고 청결하게 해야 한다." 사역자들은 하나님의 청지기요, 그들은 주님이신 분의 영예를 위해서 그의 소작인들에게서 평등과 훌륭한 질서를 유지하고, 그의 뜰을 지켜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3] "내가 또 너로 여기 섰는 자들 중에 왕래케 하리라. 이 자리에서, 탐사자요 보조자인 이 천사들 중에서 그렇게 하리라." 그들은 여호수아가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있는 동안 곁에서 있을 것이며, 그에게 보호자 같은 역할을 할 것이며, 혹은 그는 "하나님의 사자" 로서 높이 영광받고 존경받을 것이다(갈 4:14). 사역자들은 "천사들(사자들)" 이라고 불리운다(계 1:20). "하나님의 도를 준행하는" 자들은 "천사들 중에 왕래한다" 고 이야기할 수 있으니, 그 까닭은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서 그렇듯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그들의 "형제들과 같이 된 종" 이기 때문이다(계 19:10).

혹자는 이것을 영생의 약속으로 삼고, 미래 상태에 있어서의 그의 충성의 보답으로 삼는다. 하늘의 안식하는 장소인 왕궁일 뿐만 아니라 걸을 수 있는 장소, 곧 낙원이며 동산이다. 그리고 저 거룩하고 영화로운 공동체로 이룬 사회 속에서, 천사들 중에 길이 있다(겔 28:14 참조).


 

순금 등대와 두 감람나무 (슥 4:1-14
 
오늘 본문은 스가랴가 본 다섯 번째 환상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모두 여덟 개의 환상을 보았는데 이 환상의 목적은 일차적으로 16년 동안 중지했던 성전을 짓도록 격려하는 것이고 이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준비하는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환상은 성전 재건과 관련해서 생각해볼 때 이런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환상은 화석류 사이에 홍마 탄 사람이 있었습니다. 홍마 탄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예수님께서 골짜기에 있는 화석류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계시며 그들을 통해서 성전을 재건하길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결국, 성전 재건의 주역은 유다 백성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두 번째 환상은 네 뿔의 환상인데 성전 재건을 반대하는 세력들은 아무리 그 뿔이 높고 정치적으로 힘이 강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고 멸하실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세 번째 환상은 손에 척량줄을 잡은 한 사람이 예루살렘의 장과 광을 척량하는데 성전을 지을 장소가 예루살렘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네 번째 환상은 성전을 짓도록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택하시고 더러운 옷을 벗기시며 깨끗한 옷을 입히십니다. 이것은 성전에서 대제사장으로 일할 사람이 여호수아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환상은 성전을 지을 주체로써 여호수아와 함께 당시 총독이었던 스룹바벨을 격려하기 위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슥 4:6) 
 
다섯 번째 환상의 첫 번째 목적은 스룹바벨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스룹바벨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간 유다의 19번째 왕이었던 여호야긴의 손자입니다. 여호야긴은 고니야 혹은 여고냐라고도 하는데 이 왕은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서 죽지 않고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에윌므로닥이 바벨론 왕이 되자 감옥에서 풀어주고 먹을 것과 입을 것도 주어서 말년을 아주 평안하게 살면서 자식을 낳았습니다. 

여호야긴은 전반적으로 악한 사람이었는데 말년에 자식을 낳은 것이 그가 한 가장 훌륭한 일이었습니다. 여호야긴의 아들이 스알디엘이고 스알디엘의 아들이 스룹바벨입니다. 스룹바벨이 왜 중요한 인물이냐면 스룹바벨에서 10대를 내려가면 나사렛에서 목수 일을 하던 요셉이 나옵니다. 그리고 11대 자손이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지금 스룹바벨에게 관심이 많으신 것입니다. 다윗의 후손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조상인 스룹바벨을 격려하여 일차적으로는 성전 재건을 완성하도록 하고 이차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을 준비하였던 것입니다. 

 

 


Ⅰ. 다섯 번째 환상의 내용은 무엇인가? 

스가랴에게 계시를 전달하는 천사가 스가랴를 깨우고는 질문을 합니다. “네가 무엇을 보느냐?” 그러자 스가랴가 눈에 보이는 대로 대답했습니다. “순금 등대가 보입니다.” 

그런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 주발 옆에 보니까 좌우로 감람나무가 두 그루가 있고 두 개의 관이 연결되어서 주발로 기름이 공급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발에는 일곱 개의 관이 연결되어 있어서 일곱 개의 등잔으로 기름이 공급되었습니다. 그렇게 24시간 동안 기름이 공급되어 등잔에 불이 켜지는 것이 스가랴가 본 순금 등대의 환상입니다. 
 
원래 순금 등대는 모세가 율법을 받을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규례입니다. 모세의 규례는 출애굽기 25장, 37장 그리고 레위기 2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순금 등대는 금 한 덩어리로 연결해서 만든 것입니다. 가운데 한 개의 등잔이 있고 양쪽으로 세 개씩 있어서 도합 일곱 개의 등잔이 있는 이 순금 등대에 사용하는 기름은 반드시 순수한 올리브기름이어야 합니다. 불순물이 전혀 들어가지 않도록 해서 100% 순수한 기름으로 불을 켜야 되는 것입니다. 이 순금 등대가 성소 안에 놓여 있는데 제사장이 저녁에 들어가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이며 아침에 들어가서 불을 끕니다. 모세의 순금 등대는 밤에만 불을 켜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의 순금 등대와 스가랴의 순금 등대는 무엇이 다릅니까? 

 

두 가지가 다릅니다. 

첫째, 모세의 순금 등대는 제사장이 올리브기름을 부어야 됩니다. 손으로 직접 부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스가랴의 순금 등대는 좌우에 있는 두 감람나무와 주발로부터 관이 연결되어 있어 자동적으로 올리브기름이 공급됩니다. 

둘째, 모세의 순금 등대는 밤에만 불을 켜지만 스가랴의 순금 등대는 24시간 불을 켠다는 점이 다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 환상을 보고 의미를 몰라서 천사에게 물어봅니다. 


Ⅱ. 다섯 번째 환상의 일차적인 의미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바로 기름입니다. 순금 등대에 기름이 자동적으로 공급되는데 여기서 기름은 성령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순금 등대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 백성들이 빛을 비추고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수하려면 성령의 지속적인 부으심이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왜 스룹바벨은 성전을 꼭 지어야 되느냐? 그 이유는 바로 만국의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서실 곳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빛입니다. 인간의 지도자는 아무리 훌륭해도 빛은 아닙니다. 석가모니, 공자, 맹자, 소크라테스, 칸트 모두 훌륭하지만 그들도 어둡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영적으로 어두운 인간들에게 빛이 되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이십니다. 어둠에 처한 세상에 빛 되신 예수님께서 오시기 위해 성전이 꼭 지어져야 된다는 것입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슥 4:6). 

성전을 완공하는 일은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 공급되는 기름이 있어야 성전 재건이라는 사명이 완성된다는 것입니다. 힘이라는 것은 유다 백성들이 가진 집합적인 능력을 말합니다. 그들이 가진 정치적인 파워, 군사적인 힘, 경제력 등을 말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이런 능력이 많아도 그것만 가지고 하나님의 일이 되지 않습니다. 또 능이라고 것은 지도자의 개인적인 능력을 가리킵니다. 지도자의 카리스마, 지도력 등이 아무리 뛰어나도 성령의 기름부음 없이는 성전 재건을 성공하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이 부은 바 되면 두 가지 현상이 나타납니다

첫째, 산 같은 방해세력이 사라지게 됩니다. 유다 백성들이 성전을 재건하려고 하자 사마리아 사람들이 모함했고 페르시아 왕 아닥사스다가 조서를 내려 성전 짓는 것을 중지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능력을 받으면 이런 산과 같은 어려움이 있어도 평지처럼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슥 4:7). 

둘째, 시작한 일을 완성하게 하십니다.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슥 4:9). 공부하는 학생이 학위를 위해서 공부하려면 논문을 끝까지 써야 하듯이 성전을 짓기로 시작했으면 끝내야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끝내는 것은 끊임없이 공급되는 성령의 능력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B.C. 520년 성전이 재건되기 시작하였고 B.C. 516년에 완공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성전을 가리켜서 스룹바벨 성전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두 감람나무로 사용하셨습니다. 이들에게 성령 충만을 주시고 유다 백성들을 격려하게 하셔서 스룹바벨 성전이 완성된 것입니다. 


Ⅲ. 다섯 번째 환상의 궁극적인 의미 

이 예언은 성전의 재건으로만 끝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과 신약시대를 예언하고 있습니다. 순금 등대는 신약시대의 교회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서 다 동의합니다. 요한계시록 1장에서도 소아시아 일곱 교회를 일곱 금 촛대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환상은 신약의 교회에 대해서 세 가지 중요한 진리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째, 교회의 사명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교회는 순금 등대가 끊임없이 기름을 받아서 빛을 비추듯이 영적으로 어두운 세상을 향하여 끊임없이 복음의 빛을 비추어야 한다는 사명을 갖고 있습니다. 교회가 빛 비추는 일을 그만두게 되면 교회로서의 존재 이유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빛이시고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마 5:14). 

그러므로 우리는 빛을 비추어야 됩니다.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선교와 전도는 교회를 향해 명하신 첫 번째 사명입니다. 어떤 분은 교회가 정치를 해야 된다고 합니다. 교회가 좌파를 물리치려면 정치를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도 우파입니다. 하지만 그런 문제는 개인적으로 해야지 교회의 이름으로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구제도 해야 하지만 구제가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은 아닙니다. 교회의 첫 번째 사명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어디서 태어나 왜 살고 죽는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어둠에 처한 사람들에게 복음의 빛을 비춰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교회의 승리는 어디에 달려 있냐는 것입니다

교회의 승리는 성령의 능력에 달려있습니다. 성령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향해 네 가지 중요한 일을 행하십니다. 

1) 그들을 거듭나게 하십니다. 
2) 성령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안에 내주하십니다. 
3) 성령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지배하십니다. 말과 생각, 행동까지도 지배하십니다. 
4) 성령께서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 11:13).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자기 자식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물며 선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좋은 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주십니다. 성령의 중생이나 내주는 기도를 통해서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행하시지만 성령의 충만과 능력은 구하는 자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 일과 우리 성도들의 성공은 모두 성령의 능력에 달려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의 능력을 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은 목사나 받으면 되지 내가 그런 것까지 받아야 하느냐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신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의 능력은 목사도 필요하지만 여러분도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입니다. 똑같이 국밥장사를 해도 성령의 능력을 받은 사람이 끓이는 국밥은 왠지 맛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작곡가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우리 교회 전도사님 아들이 작곡하는 노래가 대한민국에서 1, 2등 합니다. 그 많은 작곡가가 있어도 성령의 능력을 공급받아 작곡하는 노래는 유행가라도 1등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학위 논문을 쓸 때 박사학위 논문이 잘 써지지가 않았습니다. 책을 아무리 많이 읽어도 머리에 안 들어오고 우리말로 쓰는 것도 어려운데 영어로 써야 하니 너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어느 날 성령의 능력을 주시더니 하루에 15장씩 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20일 만에 다 써버렸습니다. 공부하는 사람도, 장사하는 사람도, 노래하는 사람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정치하는 사람도 성령의 능력을 받아야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해서 잘되는 것이 아닙니다. 
 
셋째,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격려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행하는 작은 일이라도 격려하고 기뻐하십니다. 스룹바벨은 손에 다림줄을 잡았습니다. 솔로몬 성전을 보았던 노인들은 스룹바벨이 손에 다림줄을 잡은 것을 보고 업신여겼습니다. 하지만 전지하신 하나님께서는 스룹바벨이 다림줄을 잡은 것을 보시고 기뻐하셨습니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슥 4:10). 

우리가 작은 일을 해도 하나님께서는 아시고 기뻐하십니다. 과부가 두 렙돈을 연보 궤에 넣어도 주님께서 다 아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성전을 짓는데 한 사람이 돈을 크게 내서 짓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만약 한 사람이 300억을 다 내서 성전을 지었다면 그 사람이 말하는 대로 제가 움직여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1원이라도 내가 내 교회를 위해서 헌신하여 드린다는 생각이 있어야 됩니다. 1원으로 성전이 지어지겠냐는 식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1원이라도 하나님께서 성령의 기름을 부으시면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작은 일이라도 순종해서 시작하면 하나님께서 일곱 눈으로 보시고 기뻐하시며 능력을 부어 성공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결론 

구약시대에도 성령께서 역사하셨습니다. 그러면 오순절 이후 신약시대와 성령의 역사가 무엇이 다릅니까? 구약시대에는 특별한 지도자들에게만 성령이 부어졌습니다. 모세, 다윗, 여호수아, 솔로몬, 스룹바벨과 같은 사람들에게만 성령이 부어졌습니다. 하지만 신약시대에는 남녀노소, 빈부귀천에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내주하시고 능력을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약해도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옛날 구약시대 같으면 어림도 없었는데 신약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기도하면 성령의 능력을 받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성령이 내주하시다가 그 사람이 불순종하면 떠나가 버리셨습니다. 삼손 같은 사람은 성령의 능력을 받아 나귀의 턱뼈 하나로 블레셋 사람 천명도 죽이고 했는데 들릴라의 유혹에 넘어가 죄를 짓고 불순종하자 성령께서 떠나가 버립니다. 그래서 아무것도 못하고 두 눈이 뽑혀 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사울도 처음에 왕이 되었을 때는 성령의 기름 부음을 받고 예언도 했습니다. 

그런데 예언의 은사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신령한 사람은 아닙니다. 제 친구가 어떤 사람이 한 예언을 따라가다가 가정이 망가져 버렸습니다. 그런데 다시 성경을 읽기 시작하니까 가정이 화목해졌다는 것입니다. 예언을 쫓아다닐 시간이 있으면 성경을 한 장 더 읽으십시오. 사울 왕이 예언도 하고 별짓을 다 하다가 불순종하자 성령이 떠나고 악신이 그를 괴롭혔습니다. 이처럼 구약시대에는 성령이 왔다가도 그 사람이 불순종하면 떠났습니다. 
 
하지만 신약시대에는 성도들 안에 성령께서 일단 들어오시면 영원토록 떠나지 아니하시고 우리와 함께하시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 14:16).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기 때문에 지옥에 가지 않습니다. 불신자와 성도는 무엇이 다릅니까? 성도 안에는 성령께서 계시고 불신자 안에는 악령이 있습니다. 청년들은 절대 불신자와 결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령께서 내주하는 사람과 악령이 그 속에 있는 사람이 함께 살면 반드시 싸움이 일어나게 되어있습니다. 싸우지 않는다면 그 사람 안에 성령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모신 사람들은 성령을 모신 사람들과 결혼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스가랴 4장에 나오는 다섯 번째 환상은 결국 성도의 인생과 교회의 모든 사역의 성공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씀합니다. 성령께서 지속적으로 능력을 부어주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와 성도들은 항상 성령의 기름 부어주심을 위해 기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godpeople.or.kr

 



오직 내 영으로 되리라

(슥 4:1-14)



슥 4:6
그가 내게 대답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1. 인생의 긴 여행 끝에 가보면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화해자가 남아 있습니다.
초기에 승승장구한다고 끝까지 승자는 아닙니다.
 
2. 그러나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도 아닙니다.
그래서 가치관이 중요합니다.
그 관점이 방향과 속도를 결정합니다.
 
3. 신앙은 출발부터 그 관점이 뚜렷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것과 본질이 다릅니다.
세상은 끝없이 자기를 추구합니다.
 
4. 성공과 행복을 원한다고 하지만 그 결과가 내게 귀속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출발점이 다릅니다.
나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5. 신앙은 진리를 추구합니다.
진리는 나로부터의 자유를 내포합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향해 선언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다.”
 
6. 예수님은 자신이 진리일 뿐만 아니라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고 밝히십니다.
자칫 독선으로 듣게 되면 그야말로 이 같은 독선이 없습니다.
 
7. 때문에 예수님은 지난 2천년간 계속해서 검증을 받고 있습니다.
 온 인생을 걸고 검증에 나섰던 사람들은 진리를 만났고 확인했습니다.
 
8. 신기한 일입니다. 놀라운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비밀을 알려주십니다.
진리에 이르는 것은 ‘힘과 능력이 아니라 영적인 사건’입니다.
 
9. 물론 이 본문은 스가랴 선지자에게 예루살렘 성전 재건에 관해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에도 동일하게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10. 우리 자신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간구하는 자에게 지금도 진리의 영을 보내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구하는 자마다 얻습니다.
 
11.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내 영을 모두에게 부어 주리니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하고 노인들이 꿈을 꾸며 젊은이들은 이상을 볼 것이다.”
 
12. 더 이상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없을 때가 그때입니다.
성령을 구해야 할 그때입니다. 지금이 바로 그때입니다.
성령을 받은 자마다 내 힘과 능력의 한계를 넘어섰습니다.
화해자는 오래 가지만 성령의 사람은 영원히 갑니다.


조정민 목사/http://cafe.daum.net/stigma50/EfmC/4

 

순금등대의 환상(스가랴 4장)

 

[1-6절] 내게 말하던 천사가 다시 와서 나를 깨우니 마치 자는 사람이 깨우임 같더라. 그가 내게 묻되 네가 무엇을 보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가 보니 순금 등대가 있는데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고 또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으며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그 등대 곁에 두 감람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그 주발 우편에 있고 하나는 그 좌편에 있나이다 하고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물어 가로되 내 주여, 이것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말하는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들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내가 대답하되 내 주여,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스가랴는 순금 등대를 보았다. 그 꼭대기에 주발 같은 것이 있고 그 등대에 일곱 등잔이 있고 그 등대 꼭대기 등잔에는 일곱 관이 있고 그 등대 곁에 그 주발 좌우편에 두 감람나무가 있었다. 순금등대와 일곱 등잔들은 의와 진리를 밝히 증거하는 존귀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몸된 교회 즉 그가 친히 피흘려 사신 성도들을 예표한다고 본다. 두 감람나무와 일곱 관은 성령께서 기름을 중단 없이, 풍부하게 공급하심을 상징한다고 본다.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에게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고 말씀하신 것은 성전 건립이 사람의 힘이나 능력으로 되지 않고 하나님의 영 곧 성령으로 됨을 보인다. 이것은 구약의 성전뿐 아니라, 신약교회도 그러하다. 개인의 구원과 성화도 그러하고, 영혼들의 구원과 교회의 건립과 양육과 성장, 그리고 완성도 그러하다. 

 

[7-10절]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 그가 머릿돌을 내어놓을 때에 무리가 외치기를 은총, 은총이 그에게 있을지어다 하리라 하셨고 여호와의 말씀이 또 내게 임하여 가라사대 스룹바벨의 손이 이 전의 지대를 놓았은즉 그 손이 또한 그것을 마치리라 하셨나니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줄을 네가 알리라 하셨느니라.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큰 산’은 성전 재건을 방해하는 자들을 가리킨 것 같다. 방해자들은 큰 산과 같은 장애물이다. 그러나 그들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스룹바벨의 손을 통해 성전의 기초와 머릿돌을 놓게 하셨다. 사람들은 “은총, 은총이 그것(라흐 הּ(KJV, NASB)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외칠 것이다. 그것은 성전 건축의 일이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고 완성됨을 고백하고 기원하는 뜻이 있다고 본다. 오늘날도 개인의 구원이나 교회의 건립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고 완성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것도 이루어질 수 없다. 고린도전서 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10절의 ‘작은 일들’은 이전의 솔로몬 성전에 비교해서 보잘것없어 보이는 스룹바벨 때의 성전 재건 공사를 가리킨다. 그 일곱은 일곱 등잔을 가리키는 것 같다. 일곱 등잔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 곧 일곱 영을 가리킬 것이다. 요한계시록 5:6은, “일곱 눈이 있으니 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더라”고 말한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영이시며 전지(全知)하신 영이시다. 성령께서는 온 땅에 두루 행하시며 모든 일을 보시고 행하시며 이루신다. 

 

[11-14절] 내가 그에게 물어 가로되 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는 무슨 뜻이니이까 하고 다시 그에게 물어 가로되 금 기름을 흘려내는 두 금관 옆에 있는 이 감람나무 두 가지는 무슨 뜻이니이까? 그가 내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이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느냐? 대답하되 내 주여, 알지 못하나이다. 가로되 이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모셔 섰는 자니라 하더라.

 

순금등대 좌우의 두 감람나무나 두 가지는 같은 것을 상징한다고 본다. 두 감람나무의 두 가지에서 금 기름이 두 금관을 통하여 흘러 등대의 일곱 등잔에 공급되고 그 등잔은 빛을 내는 것이다. 두 감람나무에서 나오는 기름을 금 기름이라고 부른 것은 금관에 비친 그것의 색깔 때문이거나 그 기름의 고귀한 가치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일 것이다. 그 기름은 분명히 성령을 상징하였다. 천사는 그 두 감람나무를 온 세상의 주, 곧 하나님 앞에 모셔 섰는 기름 발리운 자 둘이라고 설명하였다. 구약시대에 기름 발리운 사람은 선지자와 제사장과 왕이었다. 여기에서는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을 가리켰다고 본다. 그러나 단지 그들 자신을 가리켰다기보다는 그들의 직분과 사역이 예표하는 자를 가리켰다고 본다. 그들은 메시아를 예표한 자들이었다. 메시아께서는 제사장과 왕으로 오실 것이었다. 대제사장들은 예표의 사람들이었다(슥 3:8). 메시아께서 일곱 눈을 가진 돌로 오셔서 친히 고난을 받으시고 죄악을 하루에 제하실 것이다. 회복된 이스라엘 곧 신약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의 충만한 공급하심을 받아 세상에 빛을 발할 것이다. 

 

구약성전이 예표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진리와 의를 비추는 순금등대와 같다. 성전 건립의 일, 곧 성도 개인의 구원과 온전함, 그리고 교회의 건립과 성장과 완성은 참으로 귀하고 가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작게 보이는 일을 멸시하지 말아야 한다. 

성전 건립의 일은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고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다. 씨를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니고 기르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성전 건축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충만한 은혜만 의지하면서 개인의 성화를 이루고 교회의 건립과 성장과 완성을 위해 힘쓰자. www.oldfaith.net

cafe.daum.net/correcttheology/1Et1/93?svc=cafea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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