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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선지서

스가랴 2장

by 은총가득 2021. 10. 24.

 

척량줄의 환상 (스가랴 2:1-5)

 

이 예언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백성들에게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쳐지리라" (1:16)고 확신시키라는 명령을 받았다. 여기서는 그 약속이 예시되고 확증되며, 예언자는 더욱 더 명확하고 확신있게 백성들에게 자기 메시지를 전하게 되는 것을 본다.

 

Ⅰ. 그는 환상 중에, 한 사람이 예루살렘을 측량하러 가는 것을 본다(1,2절). "그는 또 눈을 들어보았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매우 고무적인 장면을 보이셔서(1:20), 그로 인해 이제 그는 "또 눈을 들어보았다." 우리 앞에 지나가는 하나님의 자비와 유쾌한 광경을 보았을 때는, 다시금 눈을 들어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우리들에게 주어진 새로운 것을 더 추구하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왜냐하면 아직 더 볼 것이 있기 때문이다. 앞 장의 끝 부분에서 그는 예루살렘의 대적들이 좌절되어 꺾이는 것을 보았고, 이제는 예루살렘이 파멸되지 않을 것이라고 바라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것은 그(예루살렘)를 행복하게 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며, 따라서 약속된 것 전부는 아니다. 여기 더 행해야 할 공장(工匠)들의 일이 있다. 다윗은 자기가 "악인의 뿔을 다 베기로" 결정하였을 때도, "의인의 뿔은 높이 들겠다" 고 작정하였다(시 75:10). 그리고 "다윗의 자손" 이 여기서 그렇게 한다. 왜냐하면 예언자가 "그 손에 측량줄을 잡은" 것을 본 바로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 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교회의 건축기사이며(히 3:3), 측량줄과 수평자에 의하여 정밀하게 지으신다.

 

스가랴는 용감하게 "어디로 가십니까?" 또한 그 측량줄로 무엇을 계획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나 그는 즉시 "예루살렘을 측량하러," 즉 그 장광을 각각에 따라 재어서 그 둘레에 세울 벽을 만드는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산정해 보며, 그 칫수를 그 안에 거주할 수많은 사람들과 비교하여 그들을 수용하는데 필요한 부가물이 무엇인지 알아보러 간다고 말씀했다.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집결할 때는(사 60:4) "그 장막터를 넓힐" 때이다(사 54:2). 하나님께서는 자기 교회의 크기를 감지하시며, 결혼 잔치에 수많은 손님들이 초대될 때도, 여전히 "자리가 있도록" 주선할 것임을 명심하자(눅 14:22). 새 예루살렘 위에 있는 "나의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도다."

 

Ⅱ. 그는 이 환상이 예루살렘에게 좋은 뜻을 가지며, 그가 본 측량줄은 "혼란의 줄" 이 아니며(사 34:11 처럼), 멸망을 위해 측정하는 줄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처녀 시온의 성을 헐기로 결심하시고 줄을 띠우실" 때와 같지 않다(애 2:8). 오히려 그것은 그가 "줄로 저희 기업을 분배하실" (시 78:55) 때와 같다.

예언자와 "말하던 천사" 는 그의 계획대로 "예루살렘을 측량하러 나갔다." 그리고 이 환상을 먼저 예언자에게 설명해 주어서 그로 하여금 불안한 기색을 할 기회를 주지 않으려고,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았다."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에게 고하여 이르라" (왜냐하면 이 예언자는 젊었을 때에 예언자직을 맡기 시작했으나, 하나님께서 이처럼 그를 높이 들리게 함으로, 아무도 그의 젊음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셨던 때문이다). 그는 젊고 경험이 없으므로, 최악의 사태를 두려워할 듯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최선을 바라라고 명하라. 그에게 예루살렘은 안전하고 위대해질 것이라고 말하라.

 

1. 수많은 사람이 역사할 때처럼 안전하고 위대하다(4절).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성곽없는 촌락과 같으리라." 그 거주민이 증가하고 배가하여, 놀랍도록 많아지리니 현재의 칫수를 훨씬 넘어갈 것이다. 성벽은 도성을 방비하듯이, 또한 제한하고 억제하며, 그 이상을 넘어서까지 거주민이 증가하지 못하도록 한다. 그러나 예루살렘은 적을 막기 위해 성벽을 쌓을 때도, "성곽없는 촌락과 같이 주민이 거하게 되리라. 그 성읍은 런던이 그렇듯이 성곽 안보다 외곽의 인구가 더 많아질 것이다. 곧 예루살렘이 그렇게 될 것이다. 그 성읍은 마치 성벽이 없듯이 자유롭게 확장될 것이며, 마치 가장 큰 성벽을 가진 듯이 안전해 할 것이니," "그 가운데 사람과 유축이 많으므로" (이는 성읍의 최선의 성벽이다), 식량뿐만 아니라, 부(富)도 역시 그들을 위해 공급될 것이다. 백성의 수가 증가하는 것은 큰 축복이며,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열매요 더 큰 축복의 징조라는 점에 주목하라(시 107:38). "복을 주사 저희로 크게 번성케 하시도다."

 

2. 하나님의 임재가 있기 때문에 안전하고 위대해진다(5절).

(1) 하나님께서 친히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실" 것이니, 그 성읍은 안전하리라. 예루살렘은 이 때에 사면의 성곽이 없었으며, 외부에 노출되어 드러나 있었다. 이전에 성곽이 있었을 때, 원수들이 그 벽을 부숴버렸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 그에게 불 성곽이 되실 것이다.

혹자는 이를 맹수를 쫓기 위해 양무리 주위에 불을 피우는 목자들이나, 혹은 광야에서 천막 주위에 불을 피우는 여행자들을 암시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하나님께서 욥에서 그리하셨듯이, 그들 주위에 "산울을 두르시며" (욥 1:10) 그들 주위에 성과 누곽을 만드시며(사 26:1, 이는 때려 부술 수 있다), 그들 주위에 산처럼 되실 뿐만 아니라(시 125:2, 산은 정복될 수 있다), 그 사면에서 불 성곽이 되시리니, 이는 부숴질 수 없고, 파괴할 수도 없고, 그 기초가 파헤쳐질 수도 없고, 공격할 수도 없고, 접근할 수도 없다. 하나님께서 그 주위에 불 성곽을 만드실 뿐만 아니라, 친히 그러한 성곽이 되실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하나님은" 그와 그의 교회의 대적들에게 "사르는 불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는 한 면만이 아니라 사면 전체가 불성곽이시다.

 

(2)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그 가운데서 영광이 되실" 것이므로 위대해질 것이다. 그의 성전, 그의 제단이 거기 세워지고, 그가 제정하신 성찬이 거행될 것이다. 그 때 그의 특수한 임재와 은혜의 증거가 거기 있을 것이니, 이것이 그들 가운데서 영광이 되며, 그들을 주위 사람들의 눈에 진실로 존경할 만한 존재들로 만들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로부터 영예를 취하며, 또 그들에게 영예를 입힐 것이다. 하나님을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삼는 자들은 거기서 영광을 얻는다는 점을 주목하라. 그분을 소유한 사람들은 영광을 가지는 것이다. 그로부터 교회도 "영광으로 충만하다고" 말해지게 된다. 그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사람들과 장소들은, 그들 사면에 불 성곽이신 하나님을 소유한 셈이니, "그 모든 영광 위에 천막을 덮으실 것이다" (사 4:5).

 

이제 이 모두는 부분적으로 예루살렘에서 성취되었으니, 시간의 경과에 따라 매우 번성하는 도시가 되었고 세상에서 큰 존재가 되었다. 회복되기 전에 그 성읍이 얼마나 낮았고,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는가를 고려해 볼 때,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발전했다. 그러나 그것은 복음의 교회에서 완전히 성취될 예정이었다. 복음에서는 이방인들을 받아들여 성곽없는 촌락처럼 크게 확장되었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을 그의 왕자와 보호자로 삼는다.

 

 

자유에 초대된 시온 (스가랴 2:6-9)

 

혹자는, 사로잡힌 유대인들에게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자유를 주었던 고레스의 포고가 그들 전부를 돌려보내기에 충분했으며, 바로가 그들에게 애굽과 그 곳의 속박된 집을 떠나라는 허가를 내렸을 때처럼, 사람을 남기지 않으리라고 생각했으리라. 그러나 그렇지 않았던 듯하다.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움직여 떠나라고 한 약 4천 명은 떠났다. 그러나 아마 대부분이 뒤에 남았었던 것이다. 그들이 포로 생활을 하는 땅은 그들 대부분에게 있어서는 자기들이 태어난 땅이었다. 그들은 거기서 뿌리를 내렸고, 정주했으며, 그들 중 다수가 매우 안락했다. 어떤 이들은 아마 거기가 더 좋아서 땅을 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도 나을 것이 없다고 생각한 듯하다. Patria est ulicunque beneest-즉 내 나라란 내가 행복을 느끼는 모든 곳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나라에 큰 애착을 가지지 못했고, 거기 가는 도중에 있을 어려움도 두려워했다. 이는 나쁜 원인-즉 하나님의 힘과 약속에 대한 불신, 안일과 세상 부귀에 대한 사랑, 그들 나라의 종교와 이스라엘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으로부터 나왔다. 그리고 그것은 나쁜 효과를 냈다. 돌아간 자들은 어리석고 경솔하며, 마음이 변한 자라고 무언중 비난하는 격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은 해야 할 그들의 손을 약화시켰다. 이런 자들은 포로 기간 중에 노래할 수 없으니(시 137), "오 예루살렘아! 그들은 너를 잊었도다." 그들의 가장 큰 기쁨보다 너를 더 사랑하지 않고 너보다 다른 기쁨을 택했도다.

 

그러므로 여기 또 하나의 선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으니, 그의 모든 자유로운 신하들에게 엄히 경계하여 명하기를, 그들이 어디에 흩어졌든간에, 곧 속히 그들 자신의 땅으로 돌아와 거기서 좋은 자리에 위치하라고 했다. 그들은 큰 소리로 소환되었다(6절). "이제 너희는 북방 땅에서 도망할지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는 적절히 예루살렘의 재건과 확장의 약속에 수반된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과 그들의 평안을 위하여 그것을 세울 것이라면 그들은 그와 그의 영광을 위해 와서 거해야 할것이며, 바벨론에서 계속 굽실거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축복으로 받은 약속과 특권은 어떤 댓가를 우리에게 요구하든간에, 그것들에게 참여하여 "그것들과 운명을 같이해야" 한다. 시온이 하나님의 이스라엘 전체에게 자리를 주기 위해 확장되는 때, 그들이 바벨론에 머루르는 것은 최대의 미친 짓이다. 죄악된 상태의 얽매임은, 비록 사람이 잠시 현세의 일에 안일을 추구할 수 있더라도, 결코 계속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안 된다. "와서 도망치되" 최고의 속력으로 지체없이 하라. "네 목숨을 위해 도피하라. 뒤를 보지 말라." 그들을 이끌어 속히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다음을 숙고하게 하라.

 

1. 이제 그들은 흩어졌고, 그들의 상호 방위를 위해 연합하는 데 관심하고 있다(6절). "내가 너를 하늘의 사방 바람같이 흩어지게 하였으니, 몇몇은 세상의 이 구석으로 또 몇몇은 다른 구석으로 보내졌다. 이것이 오랫동안 너의 상태였으니, 너는 이제 서로 돕기 위하여 다시 모일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흩으신 것이 진노에서였다고 인정하신다. 따라서 그들은 이 초청이 하나님께서 다시 그들과 화해하려는 선의의 징표로 여겨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부르심을 거절함으로써 그의 친절을 거부했다.

 

2. 그들은 이제 속박되어, 그들 자신의 자유를 주장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따라서, "오 시온아 이제 너는 피할지니라. 박해자로부터 도피하여, 네 갈 길로 도주하라. 아브라함의 관대하고 은혜로운 씨가 되도록 도울 담대한 노력과 투쟁을 보도록 하자" (7절). 그리스도께서 포로들에게 친히 행하신 그 구원을 선포하셨을 때는 우리 각 사람에 관심하여 "우리를 구원하며 우리 목의 줄을 스스로 풀게 하며" (사 52:2), 우리가 은혜 아래 있으므로 "죄가 우리를 다스리지 않도록" 결정하게 하신다.

 

시온 자신이, 여기에, "바벨론 딸과 함께 거한다" 고 했다. 그 이유는 많은 "시온의 귀한 아들들이" 거기 거하며, 하나님의 백성이 있는 곳에 하나님의 교회가 있고, 따라서 장소에 매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시온이 바벨론의 딸과 거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 빛이 어두움과 무슨 교제를 할 수 있는가? 시온은 "그(바벨론)의 죄악과 재앙에 있어서" 바벨론의 딸과 함께 할 위험에 놓일 것이다. 따라서, "내 백성아 거기서 나오라(계 18:4). 네 자신의 땅으로 급히 돌이킴으로 너 자신을 구원하라. 오 시온아! 그리고 저 오염으로 더럽혀진 땅에 계속 머무름으로 네 자신을 망치지 말라." 하나님의 자녀의 세대 가운데 드는 자들은 이 세상의 "비뚤어진 세대로부터 스스로를 구원해야" 한다. 이것이 그의 새 개종자들에 대한 사도 베드로의 명령이었다(행 2:40)

 

3.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셨고 잊으셨던 것 같으나, 이제 자신이 그들의 입장을 지지한다는 것을 나타낼 것이며, 질투함으로써 그것을 변호하리라(8,9절). 돌아간 형제들이 계속 위험에 놓여 있었던 곤란과 반대를 듣는 것은 바벨론에 남아 있던 자들에게는 낙심되는 일이었다. "그러니 일어났다가 엎어지는 것보다 조용히 앉아 있는 것이 낫겠다" (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이 반대에 답하여, 예언자와 "이야기한 천사" (즉,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 그가 받은 명령을 말한다. 여기서 그는 시간이 차면 그리스도가 이루실 위대한 구속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된다. 여호와이신 그리스도, 온 하늘과 땅의 주재로서 주권을 가지신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그가(곧, 아버지) 나를 보내셨도다." 예수께서 원수들에 대적하여 그의 교회를 위해 하신 일과, 하시고 계신 일은, 아버지께서 보내사 맡기신 일이었음을 주목하라. 큰 만족감을 가지고 자주 그는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 를 언급하셨다.

 

(1) 그는 "영광을 좇아" 보내심을 받았다. 그들을 구원하는 영광스러운 시작 직후에, 그것을 완성케 하기 위해 그가 보내졌으니, 그는 시작하신 일의 완수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첫째로, 그 영광에 관계되어 있는 "유대인의 나라와 백성에게 보내진다" (롬 9:4). 그리고 그 자신이 "그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 이었다. 그러나 "영광 후에," 즉 그들을 돌보신 후에, 그들을 사로잡아 그들과 그들 주변의 모든 교만한 생각을 그 자신에게 복종시킬 복음의 능력에 의해, 그는 "이방을 비출 빛이 되기 위하여 열국에 보내졌다."

 

(2) 그는 "그들을 노략한 열국에게로 보내졌다." 그는 구원받은 자의 해(年)와 "시온의 송사를 위하여 신원하실 해가 오면, 시온에게 행한 악을 인해서 그들에게 보복할 것이다" (사 34:8). 그는 "그들 위에 손을 움직인다." 그의 무거운 손을 그들 위에 올려놓고,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 질그릇같이 부수기" 위하여(시 2:9) 보내심을 받았다. 혹자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아주 쉽게 그의 손을 놀려 그들을 굴복시키고 낮추시는 것을 암시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단지 그들 위에서 손을 놀리는 일이요, 그것만으로도 일이 이루어진다. "그들이 자기를 섬기던 자에게 노략거리가 될 것이며," 노예삼았던 자들에게 노예가 될 것이며, 약탈한 자들에게 약탈당할 것이다. 에스더의 시대에 이 일이 성취되었으니, 그때 "유다인은 자기를 미워하는 자를 제어하게 되었다" (에 9:1). 마카비 시대에도 그랬다. 그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적인 원수들을 정복하시고,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심" 으로써 더욱 더 이루어졌다(골 2:15). 그리고 그것은 아직 복음의 교회에 역사(役事)한다. 그리스도는 복음의 교회에 대적하는 자를 모두 심판하사, 조만간 그들을 "자기의 발등상으로" 만드시리라(시 110:1; 계 3:9).

 

(3) 자기 교회를 위하여 그가 하실 일은 하나님의 온유한 보살핌과 사랑에 대한 명백한 증거가 되리라.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나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이는 그의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지고한 표현이다. 교회에 가해진 상해를 유감스럽게 생각함으로써, 그가 얼마나 그의 교회를 아끼시며, 얼마나 교회의 이익에도 관심을 갖고 계시며, 교회에 가해진 것을 그 자신에게 가해진 것으로 여길 뿐 아니라 바로 그의 눈동자에 가해진 것으로 여긴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런데 그 눈동자란 매우 섬세한 성격을 가진 가장 부드러운 부분으로서, 이중으로 보호되어, 우리에게 특별한 방식으로 주의를 요한다는 것과 조금만 건드려도 크게 다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을 격려해 주며, 다윗처럼 다음과 같이 기도하게 한다(시 17:8).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소서." 그리고 그들로 하여금 솔로몬이 지시했던 것처럼 하도록 한다(잠 7:2). "내가 율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리라."

 

혹자는 이를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무릇 너희를 범하는 자는 나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네게 해를 입히는 자는 결국 그들 자신에게 가장 큰 해를 가한 것임이 판명되리라."

(4)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명의 명백한 증거가 되리라. "너희가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사" 그의 교회의 보호자를 삼아, 교회에 주어진 약속들이 그분 안에서 "예" 와 아멘이 되도록 하셨음을 알리라. 우리의 영적 원수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는 아버지께서 그를 보내셨고 그와 함께 하셨음을 증명한다.

 

 

예언된 시온의 번영 (스가랴 2:10-13)
 
 
Ⅰ. 하나님의 교회, 곧 "바벨론의 딸" 로부터 떨어져 나온 "시온의 딸" 에게 선포된 기쁨을 보자. 돌아온 유다인들은 비탄과 위험 속에 빠져 있었고, 이웃의 원수들은 그들에게 악의를 가지고 있었고, 바벨론에 남아 있던 친구들은 그들에게 대해 냉담했고, 그들을 부끄러워했으며, 그들을 도우러 가기를 거절했다. 그러나 이들은 "노래하고" 환난 중에서도 "기뻐하라" 는 지시를 받는다. 순결, 정직, 영적 자유를 회복한 자들은, 비록 외적 번영을 회복하지 못했더라도, 노래하고 기뻐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스스로 평안을 누려야 할 충분한 이유를 지니고 있다.


1. 하나님께서 그들 중에 한 백성을 두실 것이다. 만일 바벨론에 있는 그들의 형제들이 그들에게 오지 않는다면, 다른 열방의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유다의 성읍들을 보충할 것이다. "그 날에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할 것이다." 그들은 지금 멀리 떨어진 이방인들이지만 포로기 이후의 유다 나라는, 이스라엘 민족으로 귀화함으로써 이스라엘 원주민의 모든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는 개종자들의 증가에 의하여 매우 팽팽해졌다. 아마 그들은 숫자상 거의 동등하였던 것 같다. 따라서 바울은 그가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 이라는(빌 3:5) 사실을 다른 많은 유다인들은 소유하지 못했던 영예처럼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이방인들이 그리스도 교회로 들어오리라는 보증이었고, 또 그 안에서 이 약속과 다른 비슷한 약속들이 충분한 성취를 누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시대에 발견하는 모양대로, 예언자 시대에 축복으로서 약속되었던 것이 유대인들에게는 큰 거침돌이 되어야 했다는 점은 이상한 일이었다. 즉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는 사실이다. 그리고 오직 한 법이 있었듯이, "이방인과 그 땅에서 난 자들을 위해" 한 복음이 있어야 했다. 그들이 어느 나라에서 왔든, 그들이 언제 "여호와께 속하였든," 그들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친애를 받은 것처럼 "내 백성이 될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마음으로 자기에게 연합하는 자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신다는 것을 주목하라.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러할 때, 우리는 질투의 눈이 아니라 기쁜 눈을 가지고 그들을 보아야 한다.


천사들은 즐거워한다. 따라서 시온의 딸들도 많은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게 될 때, 기뻐해야 한다.
2. 그들은 그들 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소유할 것이다.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할 것임이니라."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자들은 기뻐할 이유를 가지니, 그 까닭은 그가 그들에게 큰 기쁨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방문하실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거하고 다스리시려고 임하실 것이다. "내가 네 가운데 거할 것이다" (10절). 이것은 이중적 성취를 이룰 것이었으므로 반복된다(11절). 즉


(1) 성전의 봉헌에서이다. 그들이 거기서 모든 하나님의 규례를 정규적으로 준수하여, 하나님께서 그 안에서 그들을 품으신다는 점에서 그의 규례를 순수하게 집행하고, 하나님의 권세를 함께 하는 자들은 "그들 가운데 거하시는" 하나님을 소유하고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현존의 증거를 가진 유대 교회는 이후로 어느 때보다 더 축복되었다.


(2)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있어서이다. 여기서 그들 가운데 거하기로 약속하는 분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보내신 주님이시다" (11절). 따라서 유다 나라 가운데 오셔서 거하셨던 "주 예수" 이심에 틀림없으니,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영원한 "말씀" 이셨다. 이는 그 마지막 시대에 저 나라를 위해 보존된 큰 영예였다. 그들은 그 축복을 지니고 있는 동안은 멸망당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약속에 따라 "예루살렘의 구원을 바랐던" 자들에게 그 기대는 큰 지주와 위로가 되었다. 그리스도가 오셔서 그들 가운데 거하실 때에, 그들이 "그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보내신 줄 알게 되리라" 는 것이 약속이다. 참 이스라엘인들 모두는 그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기적에 의해 그것에 대한 증거가 주어졌다. 그래서 그들도 그것을 알 수 있도록 하였으나, 무지와 불신 속에서 그것을 알려고 하지 않던 자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멸망하였다. "그들이 그것을 알았다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이다."


3. 그들은 그들의 옛 위엄과 특권 모두를 다시 회복할 것이다(12절).
(1) 가나안은 이처럼 다시 죄로 더럽혀지지 않고, 근래에 그랬듯이 원수들에 의해 더럽혀지지 않는, 거룩한 땅이 될 것이다. 그것은 다시금 구별된 땅이 될 것이요, 함부로 짓밟지 못하게 될 것이다.
(2) 유다는 이 거룩한 땅에 거할 것이며, 그 평안을 즐기며, 더 이상 바벨론에서 상실되거나 분산되지 않을 것이다.
(3) 유다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며, 그에게 사랑을 받는 하나님의 소유가 될 것이며, 그에 의해 하나님께서 섬김을 받으시고, 그 속에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여호와의 소유물은 바로 그의 백성이다."


(4) 하나님께서 다시 "유다를 취하여 자기 분깃으로 삼으실" 것이다. 다시금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시며, 그것을 침해했던 자들의 손으로부터 소유권을 회복하실 것이다. 그는, 사람이 자기 유산을 다루듯이, 자기 백성을 보호하시며 다스릴 것이며, 그들 중에서 평안을 느끼실 것이다.


(5) 그는 이전에 그것을 택하셨듯이 "예루살렘을 다시 택하여," "거기에 자기 이름을 두실 것이다." 그는 선택을 갱신하고, 확인하시며, 하늘의 예루살렘에게 그 영광을 양보하기까지는 선택된 장소로서 존속케 할 것이다. 비록 선택이 잠시 동안 밀쳐진 것처럼 보였으나, 이제 "획득될 것이다."


Ⅱ. 여기 모든 주위의 세계에서 선포된 침묵이 있다(13절). 시온의 딸은 노래해야 하지만, "무릇 혈기있는 자들은 잠잠해야" 된다. 여기서 관찰할 것이 있다.


1. 자기 백성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나타나심에 대한 매우 경이로운 서술이 있다. 그가 "그 성소에서 일어나셨다." 마치 잠에서 일어난 사람(시 44:23; 78:65), 또는 결단력 있게 해나갈 사업을 착수하는 사람처럼 그렇다. 하늘은 위에 있는 그의 거룩한 거주지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거기로부터 나타나기를 기대해야 한다(사 64:1). 그의 성전은 이 낮은 세상에 있다. 그러므로 "그가 그룹 사이에서 빛을 비추리라" (시 80:1). 그는 기이하여 기대하지도 않았던, 매우 놀라운 일을 하시려 하며, 오랫동안 등한시되어 왔던 그의 백성의 문제를 변호하시려고 하신다.


2. 그와 같은 때에 대한 적절한 주의와 지시가 있다. "무릇 혈기 있는 자들아! 여호와 앞에서 잠잠하라-그리스도와 그의 은혜 앞에서(혈기 있는 자들은 그가 취하시는 방법에 대하여 반대하지 못하게 하라)-하나님과 그의 섭리 앞에서 잠잠하라." 교회의 원수들은 잠잠할 것이다. 모든 부정한 자는 입을 닫으라. 교회의 친구들도 잠잠해야 한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 자신의 뜻대로 하도록 하고, 그가 하시는 것을 가지고 다투지 말라. "잠잠하여 그가 하나님이심을 알라. 잠잠히 서서 그의 구원을 보라" (합 2:20; 습 1:7 참조). 하나님께서 "그 성소에서 일어나실" 때는, 그가 물러서거나 다시 앉으시지 않고 그의 모든 사업을 완수하실 것임을 확신하고, 인내하며 기다리라.

 

 


내가 나를 못 지킵니다

                              (슥2:1-13)

 

 

슥 2:5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세 가지 사회적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1. 첫째가 탐욕사회입니다.

무한 성장을 꿈꾸는 불치의 탐욕입니다.

 

2. 둘째, 음란사회입니다.

온 국민이 시청하는 공중파 방송에까지 음란한 내용들이 거침없이 범람합니다. 정말 이래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3. 셋째, 피로사회입니다.

다들 힘겹습니다. 다들 지쳐 있습니다. 명백히 그 의도가 드러난 세계화에 내몰려 무한 경쟁의 톱니에 걸렸습니다.

 

4. 결과적으로 모두가 평강을 잃었습니다.

일상이 불안합니다. 불안이 급속히 증폭되면서 분노가 더 빠른 속도로 도처에 확산되고 있습니다.

 

5. 출구가 있을까요?

이 거대한 흐름을 누가 거스를 수 있습니까? 제도와 체제를 갈아엎으면 해결될까요? 단기간의 완화는 가능합니다.

 

6. 그러나 역사는 혁명이나 전쟁이 문제의 본질을 해결할 수 없음을 입증합니다.

안타깝게도 한 가지를 해결하고 나면 열 가지가 생겨납니다.

 

7. 왜 그럴까요?

에덴의 동쪽으로 가는 줄곧 에녹성을 쌓고 바벨탑을 쌓기 때문입니다. 내가 내 성을 쌓고 더 높이 쌓는데 혈안입니다.

 

8. 그 악순환의 삶에서 돌아온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전혀 다른 길을 가리킵니다.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어주마. 내가 영광이 되리라.”

 

9. 불신자들은 내가 나를 지킬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나님은 그 믿음을 죄라고 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죄는 터진 웅덩이를 믿었던 것입니다.

 

10. 생수의 근원을 버리고 내가 판 저수지를 의지하는 것을 죄라고 하시고, 지혜의 근본을 떠나 내 지식을 의지하는 것을 교만이라고 하십니다.

 

11. 믿음의 눈은 불 성곽을 봅니다.

엘리사가 사환의 눈을 열어 자신들을 에워싼 아람 군대보다 더 많은 불 말과 불 병거를 보게 합니다.

 

12. 나를 지켜주시는 분이 전능자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평안을 누립니다.

그 분의 영광 앞에서 비로소 잠잠합니다. 시기와 탐욕에서 벗어나고, 불안과 갈등에서 풀려납니다. 스가랴가 전한 하나님은 오늘도 불 성곽입니다.  조정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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