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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선지서

스가랴 1장

by 은총가득 2021. 10. 24.

 

회개의 시한(時限)이 정해져 있다(스가랴 1:1-6)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1:3b)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이 성전재건을 하다가 현실적 고난과 대적의 방해로 인해 영적으로 나태해졌고 공사마저 중단하고 있었다. 다리오 왕이 즉위해 속국들 고유의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면서 유다의 성전재건도 다시 허락했다. 이런 배경에서 스가랴 선지자는 성전재건을 독려하며 영적부흥을 촉구하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 첫마디는 여호와께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그럼 여호와도 그들에게 돌아간다고 한다. 이는 본서(1:16, 7:13, 8:3, 10:8 등)에서 계속 반복되는 주제이자 구약선지서 전부가 한 결 같이 강조하는 주제다.

 

당신의 백성이 죄를 짓고 회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정말로 떠나는가? 그렇지 않다. 그분이 당신의 백성을 떠나는 적은 한 시도 없다. 지금 선지자로 이런 선언을 하게 하는 것 자체가 당신께서 먼저 찾아왔다는, 아니 떠나지 않았다는 은총의 증거다. 회개치 않으면 그분과의 교통은 중지되고 결과적으로 그분의 은혜를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부부가 한 집에 살되 대화가 단절된 채 각방 쓰는 것처럼 말이다. 

 

참으로 흥미롭다. 역으로 말해 백성들이 회개치 않으면 그분 은혜를 받을 생각이 없고 죄 가운데 있는 것이 더 즐겁고 편하다는 뜻이 된다. 같은 메시지를 듣고도 회개치 않았던 조상들의 잘못을 똑같이 범하고 있다고 질책했다.(4절) 

조상대대로 지금껏 인간은 똑같은 죄를 범하고 주님도 동일한 계시를 하신다. 범죄자들의 후손들이 동일한 죄를 범하고 있는데도 당신의 긍휼 안에 품고 계신다. 그분의 끝없는 은총에 비추면 그 백성들의 끝없는 완악함은 죽음의 형벌을 받아 마땅할 뿐이다.

 

선조들의 잘못된 예를 따르지 말라고 간곡히 호소하며(5-6a) 그들이 영원히 살지 않았다고 엄숙히 경고한다. 제발 하나님 없이도 평안하게 즉, 당신께 아무 벌 받지 않고 살 수 있으리라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선지자들도 영원히 살지 않는다고 한다. 그들이 촉구하는 회개의 시한(時限)이 정해져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이 무한정 기다리지만은 않는다. 회개할 시간 여유가 촉박하다. 

 

언제 당신의 벌이 임할지 모르니까 지금 당장 돌아가야 한다. 나아가 계시한 그대로 일점일획도 떨어지지 않고 그대로 응했으니 지금 계시하는 내용도 정신 차려 들으라고 한다. 무엇보다 선조들이 벌을 받고나서야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다”(6절)고 즉, 하나님이 계시한 대로 행하셨다고 실토했음에 주목하라고 한다.

 ‘우리’를 네 번이나 강조했다. 그분의 심판 내지 징벌이 절대로 당신의 일방적 독선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로지 백성들의 길과 행함 즉, 하나님의 말씀과 법도대로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그분은 형벌을 무기삼아 종교적 의무수행을 강제하지는 않는다. “복 있는 사람은 ...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시1:1,2) 그럼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처럼 필연적으로 잎이 무성해지고 열매가 맺힌다. 

 

우리도 지난 신앙체험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교회생활 성실히 했더니 복 받았다는 즐거운 회상만 해선 안 된다. 세상 따르는 재미에 빠져 나태해지고 때로 범죄 함으로써

그분징계를 받았던 체험을 반드시 떠올리고 다시 바로서야 한다. 회개에 시한이 있을 뿐 아니라 죄에 빠져 있는 것 자체가 형벌이다.  


 돌아오라 돌아가리라

                              (스가랴 1:1-21)

 

 

슥1:3

그러므로 너는 그들에게 말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1 시대를 향해 쓴 소리를 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한 시대를 향해 경종을 울리는 일은 스스로에게도 크나큰 고통입니다.

그러나 소명입니다.

 

2. 선지자 스가랴에게 그 소명이 주어졌습니다.

70년 포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분명한 음성입니다.

 

3.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 재건을 꿈꾸며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공사는 중단됐습니다.

성전보다 백성들 마음이 더 많이 무너졌습니다.

 

4. 이때 스가랴를 통해 선포된 하나님의 메시지는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뜻 밖입니다.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돌아오라고 하십니다.

 

5. ‘내게로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귀환의 명령입니다.

회개의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수도 없이 반복했던 말씀입니다.

 

6. ‘너희들이 내게로 돌아오면 나도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사실 하나님께서 돌아오실 일은 없습니다.

늘 그 자리에 그렇게 서 계실 뿐입니다.

 

7. 집 나간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처럼 그렇게 늘 목을 길게 늘어뜨리고 계십니다.

오직 한가지를 염원하십니다.

“너는 돌아와야만 한다.”

 

8. 귀환은 성경의 주제어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담이 범죄하고 숨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의 이름을 부르며 찾으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9. 아담이 어디에 있는지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러나 부르십니다. 돌아오기를 원하십니다.

뉘우치고 돌아가기만 하면 맞아 주실 것입니다.

 

10. 귀환은 언제나 중심의 문제입니다.

회개는 언제나 마음을 되돌리는 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몸은 되돌아왔지만 마음은 아닙니다.

 

11.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귀환은 예배로의 귀환입니다.

그 다음이 성전 재건으로의 귀환입니다.

그 마지막 귀환은 언약의 회복입니다.

 

12. 우리는 늘 눈앞의 것들에 조급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중심에 먼저 좌정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중심에 돌아오시는 것,

그 귀환은 항상 우리가 제 자리로 돌아가는 것과 동시의 일입니다.

 

조정민 목사 성경칼럼


 

재촉된 회개 (스가랴 1:1-6)

 

 

여기에 담긴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스가랴의 목회 지반. 그것은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한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니라." 그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입과 같은 역할을 하라는 신의 위임을 받았으며, 그것과 함께 말할 내용도 지시받았다. 그는 또한 그들에게 전달할 것을 여호와에게 전해받았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로 향하였다." 이것은 망상이 아니라, 진실로서, 성령의 증거와 임재로써 그리하였던 것이다.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우리는 여기서 다음을 살필 것이다.

 

1. 여호와의 말씀이 처음 그에게 임한 때, 혹은 그 뒤에 따르는 말씀이 그에게 임한 때를 보자. 그것은 "다리오왕 2년" 이었다. 포로기 이전의 예언자들은 유다와 이스라엘 열왕의 통치에 의하여 기록의 연대를 매겼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종속하게 된 바사(페르샤) 왕들의 통치에 준하여 그리한다. 그러한 서글픈 변화는 죄가 만든 것이다. 스룹바벨도 통치를 맡고 있었지만, 자기의 통치 연한에 의해 자기 업무를 기록할 수 없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예언자들은 그 시대의 관례를 좇아, 이방 열왕의 통치 연한에 따라서 계산하는 일을 망설이지 않았다(단 7:1; 8:1).

스가랴는 이 "다리오왕 2년 8월에" 그의 첫 설교를 행했다. 학개는 같은 해 6월에 설교했다(학 1:1). 백성이 기꺼이 학개의 입에서 나오는 여호와의 말씀에 순복했으므로, 하나님께서 다른 예언자를 보내는 축복을 주었다. 왜냐하면 가진 것을 잘 쓴 자는 더욱 더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2. 여호와의 말씀이 임한 예언자의 이름과 그 집안을 보자. 그는 "잇도의 손자 베레가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 였다고 했다. 이는 학개가 "선지자" 로 불렸던 것과 마찬가지다(학 1:1). 전 시대에 한 예언자 잇도가 있었으나, 스가랴를 그의 자손이거나 그의 이름을 따서 이름지었다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박식한 펨블(Pemble)씨는, 베레가의 아들인 이 스가랴는 우리 구주께서 말씀하시기를 재건 수년 이후에 "성전과 재단 사이에서 죽임을" 당했다고 하셨던 바로 그 사람이며(마 23:35), 우리 구주께서(보통 생각하듯이) 여호야다의 아들인 스가랴를 뜻하지 않았다고 단정적으로 말했다. 그 까닭은 여호야다가 베레가라고 불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설명하신 방식이 바로 그렇게 생각하도록 만든다고 한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흘린 무죄한 피를 언급하면서, 아벨에서 시작하여 거룩한 예언자들의 마지막 사람에게서 말을 끝맺기 때문이다. 반면, 여호야다의 아들 스가랴 다음에도 많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이 죽임을 당했다. 역사상 그들이 이 스가랴를 죽였다는 언급이 없음은 사실이지만, 조세푸스(Josephus)는 열심히 자기 조국의 부끄러움을 감추려 했을 것이다. 아마 스가랴가 그리스도에 관한 예언 속에서, 그가 팔리고, 그의 친구들의 집에서 상처를 입고, 목자가 살해되는데 대하여 말했던 것이 그 예언자 자신에게서 실증되었고,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의 예형이 되었을 것이다. 아마, 그의 박해자의 공격 때문에 그는 제사장들의 뜰을 피난처로 택하였고(어떤 이들은 그 자신이 제사장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입구와 제단 사이에서 죽임을 당하였을 것이다.

 

Ⅱ. 스가랴의 목회의 첫 열매들을 보자. 환상과 계시에 접하고 그의 예언자적 설교를 행하기 전에, 그는 평이하고 실제적인 것을 설교했다. 이는 그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기 때문이다. 그는 긍휼의 약속들을 발표하기 전에 회개에로의 부름을 전했다. 이렇게 해서 "여호와의 길이 예비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율법이 처음 선포되고, 그 후에 복음이 선포되어야 한다.

 

1. 여기서 예언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과 벌이셨던 변론을 회상시켜 준다(2절). "여호와는 무리의 열조에게 심히 진노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그의 진노의 빙거 아래 놓았다. 너는 네 귀로 들었고, 너희 열조들은 너희에게 그것을 말했다. 너희는 눈으로 그 애처로운 잔여를 보았다. 하나님께서 너희와 다투신 것을 오래 참으신 결과이다. 따라서 이제는 너희가 그것을 취할 생각을 할 때이다." 우리를 앞서간 자들이 겪었던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로 그들의 뒤를 쫓지 말라는 경고이다. 그리고 회개에로의 부름으로 간주해야 하며, 그로 인해 우리는 저주의 유산을 끊고, 축복으로 변화시킬 수 있어야 한다.

 

2. 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라고 부르며, 와서 화해하라고 한다(3절).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종 예언자들을 통해 종종 말했으나 배교하기를 즐기던 이 백성에게, 스가랴를 통해 다시금 말씀하신다. "믿음과 회개, 의무와 순종의 길을 따라 내게로 돌아오라. 그러면 내가 은택과 긍휼, 화평과 화해의 길로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반란자들로 하여금 충성으로 돌이키게 하여 정부의 보호 아래 있게 하고, 선한 신하로서의 모든 특권을 누리게 하라. 그들로 스스로의 길을 바꾸게 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의 길을 바꾸시리라(말 3:7 참조). 그러나 여기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하나님께서 여기서 세 번 "만군의 여호와" 라고 지칭되고 있다는 점이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도다. 말하는 이는 그이시니, 따라서 너는 그가 말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너희는 내게로 돌아 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이는 명령의 권위와 의무를 암시한다).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는 약속의 유효성과 가치를 암시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헛된 반복이 아니다. 하나님의 전능한 힘과 주권적 통치에 대한 숙고는 죄인들로 하여금 회개하여 그에게 돌이키도록 권장하고 참여토록 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만군의 여호와를 우리의 친구로 삼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며 그를 우리의 원수로 삼는 것은 매우 공포스러운 일이다.

 

3. 그는 회개치 않기를 계속하던 그들의 열조처럼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4절).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열조의 죄악의 본보기에 의하여 악한 길로 강퍅하게 되는 대신에, 오히려 열조의 징벌의 본보기를 보고 그 죄에서 떠나라. 우리는 우리의 앞서간 사람들에 의해 크게 좌우되기 쉽다. 동일한 본보기들이 어떤 이들에게는 생명에서 생명으로 이르는 향기이나, 어떤 이들에게는 죽음에서 죽음에 이르는 냄새이다. 어떤 이는 주장하기를, "우리가 열조들보다 더 현명할 것인가? 그들은 결코 예언자들을 게의치 않았다. 그렇다면 왜 우리가 그들을 주의해야 하는가? 그들은 그들을 대적하는 법을 만들었는데, 왜 우리가 그들을 용인해야 하는가?" 한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은 어떻게 주장해야 하는가를 가르침 받는다. "우리 열조는 예언자를 경시하였다. 하나님께서 그것 때문에 그들을 불쾌하게 생각하셨다. 그러므로 더 주의 깊게 하나님께서 그의 예언자를 통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에 주목하자." "과거의 일을 되새기고, 관찰하라."

 

(1) "하나님께서 그의 종 예언자들에 의해 너희 열조에게 보내신 사신(使信)이 무엇이었는가를 깨달으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쳤으니, 큰 소리로 외쳤다. 자신들이나 너희 열조들을 개의치 않고 크게 외쳤다. 그들은 열심히, 자기들의 말을 들어 주기를 바라면서 외쳤다. 그들은 자기들의 말을 말하지 않고,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했다. 그리고 이는 그들이 말한 내용의 본질이니, 모든 노래의 후렴처럼 반복되며 모든 설교에 적용되는 것이었다-너희는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떠나, 돌아 오라. 이것은 우리가 지금 너희에게 설교하는 것과 꼭 같은 것이다. 깨닫고 너희의 죄로부터 떠나라. 더 이상 죄와 상관치 않겠다고 결심하라. 신속한 회심이 다가오는 파멸을 예방하는 유일한 길이다. 이제 돌이켜 죄로부터 떠나고, 지체없이 하나님께 오라."

 

(2) "이 전언을 너희 열조들이 얼마나 하찮게 여겼는가를 깨달으라. 그들은 듣지 않았고, 주의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 부름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이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들은 내가 보낸 말에 의해 개심하려고도 아니하며, 순복하려고도 않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너희 열조들이 행했듯이 행하겠다고 하지 말지니, 그들은 잘못된 길로 갔음이라" (렘 44:17). 우리는 우리들의 열조가 하나님의 친자녀가 아니었다면, 그들의 예를 따르지 말아야 할 것이며, 그들처럼 하나님께 의무를 다 못하고 불순종하지는 말아야 한다.

 

(3) "너희 열조와 그들에게 선포했던 예언자들이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은 모두 사멸했다" (5절)는 것을 알라.

[1] "너희 열조가 어디 있느냐?" 그들의 온 세대가 없어졌고, 그들의 처소들이 더 이상 있지 않도다. 우리가 우리 조상들 즉 세상을 살아가며 우리 앞서 먼저 사라진 사람들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들이 어디 있느냐?" 고 생각해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여기 그들은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도성과 촌락에서 같은 거리를 왕래하며, 같은 집에 거하며 같은 가게와 거래처에서 매매하며, 같은 교회에서 예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어디 있는가? 그들은 아직도 어딘가에 있다. 죽음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우리가 급히 서둘러가고 있는 영혼의 세계, 불변의 세계 속에 영원히 있다. 그들은 어디 있는가? 죄중에 살고 죽은 자들은 고통 중에 있고, 우리는 모세와 예언자들,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에 대해 그것을 주목하라는 경고를 받는데, 그것은 우리로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눅 16:28, 29). 그들 중 그리스도 안에서 살다 죽은 자들은 낙원에 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들과 같이 살다가 죽는다면, 곧 영원히 그들과 함께 있게 될 것이다.

 

[2] "예언자들 역시 영원히 살겠느냐?" 그렇지 않다. 그들 역시 사라진다. 보화가 질그릇에 담겨 있고 생명수가 토기 주전자에 담겨 있으니, 흔히 금이 가서, 마침내는 깨어진 채 집으로 돌아 온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사시는 예언자이시나, 여타의 모든 예언자들은 그들의 직책에 부여된 기한이 있다. 사역자들도 죽은 사람들이요, 이승에서 영원히 살지 못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그들은 자신을 그와 같이 여기고, 그에 따라 곧 침묵해야 하며, 어떤 선교가 최후의 것이 될는지 모르고 있는 자답게 설교해야 한다. 또 백성들은 그들을 그와 같이 여기고, 그에 따라 아직 잠시 동안 "그들과 함께 영광을" 누리며, "영광을 누릴 동안" 걸으며 일하는 자답게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우리는 죽어가는 백성들과 함께 그들과 우리들이 직면하고 있는 불멸의 영혼과 경이로운 영원에 관한 것을 취급하나, 죽음으로 향하고 있는 사역자들이다. 이는 우리도 이미 가버린, "우리 이전" 예언자들(렘 28:8)을 생각케 한다. 인간의 영광이었던 것은 시들어 떨어졌다. 그러나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벧전 1:24, 25). 지금 살아 있는 예언자들인 "우리들은 영원히 살겠는가?" (어떤 이들은 이와 같이 읽는다) 아니다. 학개와 스가랴는 너희와 오래 있지 않을 것이며, 예언 자체도 곧 멈추리라. 저 세계에서는 우리와 우리의 예언자들이 영원히 살리라. 그리고 그 세계를 예비하는 것이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큰 관심사이어야 한다.

 

(4) "하나님께서 그의 예언자들을 통해 그들에게 하신 말씀의 효과가 무엇이었나?" 깨달으라(6절). 설교자들은 죽었고, 청중들도 죽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죽지 않았다. 그것은 유효했으며, "일점일획이라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다."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리듯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리라" (시 55:11). 그는 그들 자신에게 호소했다. 그들이 매우 잘 알았기 때문이다.

 

[1] 하나님께서 경고하신 심판들이 그들의 열조에게 행해졌다. 그러나 그들은 믿으려 하거나 두려워하려 하지 않았다. "내가 종 선지자들에게 명한 내 전례들, 추가된 형벌과 함께 내가 그들에게 맡겼던 교훈들이 어찌 네 열조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비록 하나님의 예언자들이 그들의 회심을 일으킬 수는 없었지만 경고된 환난은 그들을 덮쳤고, 그들은 그것을 피할 수 없었으며, 벗어날 수도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들은, 마치 집행리가 채무자를 체포하여 넘겨주듯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인간의 불신은 하나님의 말씀의 경고를 무효로 만들 수 없으며, 조만간 그 집행을 막으려는 사전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 한 이 경고는 시행된다는 점을 명심하자. 하나님의 진노는 분명코 하나님의 권위에 굴복하지 않으려는 자들을 굴복시키고 말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심판하실 때, 이기시기 때문이다.

 

[2] 그들은 또 그들 자신에게 임한 심판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었음을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드러난 것임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돌이켜, 이르기를(그들은 마음을 돌이켰으며, 그들 민족의 파멸을 막기에 너무 늦었던 때임을 시인했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했다." 따라서 우리는 그의 진리와 그의 공의를 시인하며, 우리 자신만을 비난할지니, 그에게 돌릴 비난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Sero sapiunt phryges-즉 오랜 후에야 프리개아인들이 현명해진다. 이 뒤늦은 기지는, 하나님의 진리의 증거임과 동시에 인간의 어리석음의 증거이다. 그들은 볼 수 있는 것 이상 더 멀리 보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때가 오기 전에는, "하나님은 신실하시니, 그의 말씀대로 선하실 것이다. 그는 의로우시니, 우리의 타락에 따라 우리를 대하실 것이다" 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언제 판결이 시행될지를 충분히 본다. 이제는 달리는 자도 현재의 섭리와 그들이 당시에 맛보던 이전 예언, 그리고 현재의 징벌과 당시에 계속됐던 이전 죄악 사이에 나타난 영락없는 일치를 읽고 공포할 수 있다. 이제 그들은 "여호와는 공의로우시다" 고 말할 수밖에 없다(단 9:11-13).

 

 

 

 

 

 

말과 화석류, 나무의 이상 (스가랴 1:7-17)

  

이제 우리는 여호와의 이상과 계시들에 접한다. 그러한 방법으로 하나님께서는 스가랴를 통하여 백성의 주의를 환기하고, 말씀에 대한 그들의 겸손한 경외와 그에 대한 겸손한 탐구를 종용하고, 그것을 그들의 마음과 기억 속에 더욱 고정시키려고 작정하셨다. 다음의 이상들의 대부분은 포로 생활로부터 갓 돌아온 유다인을 위로하고 성전 건축을 북돋우는 격려를 하기 위해 계획된 듯하다. 이 이상의 범위는 (이것은 나머지 이상에 대한 서론의 역할을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보호와 지금 그들의 딱한 상태에 그들을 위하여 임한 하나님의 섭리의 눈길을 유다인에게 확신시키는 것이다. 이 이상은 스가랴가 하나님의 심판을 생각하고 회개하라는 설교를 행한 후(1절) 삼 개월인, "11월 24일" 에 임하였다(7절). 그 설교가 좋은 효과가 있어, 그들이 의무의 길에 서서 하나님께로 돌이켰음을 보고, 그가 그들에게 주었던 확신, 즉 하나님께서 긍휼의 길로 그들에게 돌아 오시리라는 것이 확인된다. 이제 여기서 살필 것은,

 

Ⅰ. 예언자가 본 것과, 그에 대한 설명이다.

1. 그는 "골짜기 속" 에 숨겨져 있어서 똑바로 주목하지 않으면 알아 볼 수 없는 "화석류 나무" 의 침침하고 작은 숲을 보았다. 이는 이 당시의 유대 교회의 낮고, 어둡고, 고독하고, 침울한 상태를 대변했다. 그들은 그들의 모든 이웃들에 의해 파묻혀 무명지사가 되었다. 그들이 가졌던 모든 친구들이 감추어졌고, 그들에게 구원과 원조의 길은 나타나지 않았다. 교회는 항상 눈에 띄는 것이 아니다. 가끔은 "광야의 여자" 처럼(계 12:6) 감추어져 왔다는 점을 명심하자.

 

2. 그는 "붉은 말" (홍마) 위에 탄 "사람" 을 보았는데, 이 침침한 화석류 나무 숲 가운데 서 있었다. 이 사람은 바로 "인간 그리스도 예수" 시니, "여호와의 군대장관으로서, 칼을 빼어 손에 들고" 여호수아에게 나타났던 그 분이며, "활과 면루관을" 가지고 요한에게 나타났던 그분이다(수 5:13, 14; 계 6:2). 비록 교회가 비참한 상황에 있었으나, 그리스도는 그 가운데 계셨다. 교회가 언덕들에 의해 가려졌는가? 그는 화석류나무에 숨겨졌으니, 매복하여 있듯이 숨어서 그의 백성의 때에 맞은 구원을 위해 나타날 준비를 했다. 이것이 그들의 행복한 경이를 낳았다. "진실로 주는 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시며" (사 45:15) 동시에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며, 그들 중에 거룩한 자" 이시라는 말과 비교해 보라.

그는 전쟁에 임한 사람처럼 "말을 타고" 있었고, 급한 사람처럼 그의 백성을 "도우시려고 하늘을 타고" 있었다(신 33:26). 그는 천연적으로 붉거나 전쟁의 피로 붉게 염색된 "홍마" 를 탔는데, "홍의를 입고" 나타난 승리하는 군주와도 같다(사 63:1, 2). 적색은 맹렬한 색으로, 그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질투함과" (14절) 예루살렘의 대적에게 크게 진노함을 뜻다. 율법 아래서는 그리스도가 홍마를 탄 것으로 나타났는데, 그 율법의 지배의 공포와, 그가 "피를 항거하여야" 했을 때, 아직 그의 앞에 있던 투쟁을 뜻한다. 그러나, 복음 아래서는 그가 "백마를" 탄 것으로 나타난다(계 6:2, 또 다시 계 19:11). 그는 이제 승리를 취하고 승전의 기쁨 속에 말을 타므로 핏빛 깃발이 아닌 흰기를 내건다.

 

3. 스가랴는 그의 명령을 받아 복종할 준비를 하고 있는, 그를 수종들 일단의 말을 보았다. "그 뒤에는 홍마와 자마와 백마가 있었다." 이들은 주 예수를 수종하는 천사들로서, 그의 교회를 섬기려고 그에게 기용될 준비를 하고 있다. 어떤 자는 심판의 역사에, 또 어떤 자는 긍휼에, 또 어떤 자는 복합적인 일에 쓰여진다. 교회의 임금은 명령에 따를 천사들을 거느리고 계시니, 그들은 그에게 존경을 표할 뿐 아니라, 그의 백성을 위해 봉사한다.

 

4. 그는 이 이상의 의미를 탐구하였다. 그는 이상 중에 보았던 사람들 외에, 그의 교사로서 한 천사와 이야기하였다. 에스겔(겔 40:3)과 다니엘(8:16)도 그러하였다. 스가랴가 그에게 물었다(9절). "오, 나의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그런데, "그와 말하던" 이 천사는 그리스도 자신이었던 것 같다. 그는 무리가 시종들던 "홍마를 탄 사람" 이었다. 즉시 스가랴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만일 우리가 하늘나라의 신비를 깨달으려면, 천사들에게 청원할 것이 아니라(그들 자신도 배우는 자들이니), 홀로 "책을 취하여 그 인을 떼기에 합당하신" 그리스도 그분에게 할 것이다(계 5:7).

예언자의 질문은 그 자신의 무식에 대한 겸손한 시인과 듣기를 갈망하는 간절한 욕구를 함축하고 있다. "오! 나로 하여금 이들이 무엇인지 알게 하소서!" 그는 이렇게 갈급했으니, 자기의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현재 비탄에 빠져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에 합당한 무엇을 얻고자 함이었다.

 

5. 그는 자기와 "함께 말하던 천사" 로부터(9절) 그리고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자" 로부터(10절), 이 환상의 해석을 들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일들을 배우려는 자들을 기꺼이 가르치시려 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그는 즉시 "내가 이들이 무엇인지 네게 보이리라" 고 하셨다. 우리가 영의 세계에 관하여 알고 있거나, 알 수 있는 어떤 지식이든,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의탁하고 있는 것이다.

스가랴에게 주어진 설명은 "이는 여호와께서 보내신 자들이니라" 는 것이었다. 그들은 땅에서 일어나는 일을 관찰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려고 "걷고, 뛰고, 신속히 날아 땅을 두루 다니라고" 임명된 하나님의 사자, 곧 사절이다(여호와의 눈에 관해 말했듯이, 대하 6:9).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나, 즐거이 그들을 쓰시며, 우리는 천사의 활동에서 오는 위로를 필요로 한다.

 

Ⅱ. 예언자가 들은 것과, 그것에 의해서 그에게 주어진 지시를 보자. 믿음은 들음으로 생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환상 중에는 뭔가 말이 들어 있었다.

 

1. 그는 천사들이 세상의 현 상태에 관하여 그리스도에게 고하는 보고 곧 진술을 들었다(11절). 그들은 날아 다니는 초병처럼 멀리가 있다가(" 왕의 명을 받들어 급히 나가매", 에 3:15), 돌아와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천사에게" 이를 설명한다(왜냐하면 천사들 자신은 주 예수께 설명하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보니 온 땅이 편안하여 정온하더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천사들에 의해 이루어짐과 같이 땅에서도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라는 가르침을 받는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그렇게 기도할 필요가 무엇인지를 본다. 왜냐하면,

 

(1) 우리는 여기서 천사들의 세계가 매우 분주한 것을 발견한다. 위의 법정에서 고용된 자들은 밤낮을 쉬지 않고 하나님을 찬송하니, 이것이 거기서 그들의 할 일이다. 그리고 아래 있는 장막에서 고용된 자들도 결코 게으르거나 시간을 허비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아직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요 1:51, 마치 야곱의 사다리처럼, 창 28:12). 그들은 아직 "땅에 두루 다니고" 있다. "사탄도" 이처럼 활동적으로, 이처럼 쉬지 않고, 악을 행하고 있다(욥 1:7). 선한 천사들이 선을 행하고자 부지런히 활동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우리에게 친절을 베푸려고 돌아 다니는 보호자들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우는 사자처럼 우리를 해치려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거룩한 천사들이 이 땅에서 불쾌한 일을 많이 만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사자로 일하는 동안 "땅에 두루 다니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타락한 자들이 좋아하지 않았던, 그들 자신의 거주지는 그들이 돌아 올 때면 더욱 더 좋아할 것이다.

 

(2) 우리는 여기서 인류의 세계가 매우 평온함을 발견한다. "온 땅이 평안하여 정온하더이다." 반면 모든 교회는 불안하게 되며, "폭풍에 동요되고 평안하지 못하다." 교회와 관계없는 자들은 안전하다. 교회에 원수가 되는 자들은 성공적이다. 갈대아인들과 바사인들은 평안히 거하나, 불쌍한 유대인들은 끊임없이 놀란다. 마치 "왕과 하만은 앉아서 술마시고 있으나, 수산 성읍은 혼란에 빠졌던" 것과 같다. 사람의 자녀는 즐겁게 연락하나, 하나님의 자녀의 불행은 "비통해하는 자도 없다." 세상이 깊은 잠 속에 빠졌고, 인류 일반이 나태한 정신에 사로잡혀 있고, 하나님의 진노와 세력 아래 있으나, 안전하고 염려없이 무사태평한 것을 생각하면, 비통한 일이라는 점을 주목하자. 그들은 가만히 앉아서 쉬고 있다(눅 17:26).

 

2. 그는, 그리스도가 고통받고 있는 자기의 교회를 위해 아버지께 드리는 중재의 기도를 들었다(12절). 천사들은 이 낮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의 모습을 진술했으나, 우리는 그들이 간언한 비통을 치료할 기도를 하고 있지 않음을 읽게 된다. 그렇지 않다. 위대한 중재자는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그 천사이다." 천사들의 보고에 접하자마자 그는 즉시 하늘을 향하여 고개를 돌리고, "여호와여, 당신은 그대의 교회에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시려나이까?" 하고 말했다.

 

(1) 그가 중재로 요청한 것은 "긍휼" 이시다(시 85:7 참조). "오 여호와여!" 당신의 긍휼은 교회의 위로의 전부가 된다는 점을 명심하자. 그리고 그의 모든 긍휼은 그리스도의 중재를 통해 소망되어져야 한다.

 

(2) 그가 불평한 것은 이 긍휼의 지연이다.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려나이까?" 그는 그리스도를 통한 "긍휼이 영원히 세워질 것을" 알고 있지만(시 90:2), 그 세움이 너무 오래 지체된다고 생각한다.

 

(3) 하나님의 긍휼에 추천된 동정의 대상은 예루살렘 성도와 지금 파멸 중에 놓여 있는 다른 유대 성읍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70년" 동안 "그들에게 노를 품으셔" 왔다. 그는 70년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그것이 하나님의 회의에서 제정된 기간이기 때문이다. 그처럼 오래 포로기가 계속되고, 비록 "이제 잠깐 은혜를 베푸사 조금 소생하게 하셨으나" (스 9:8), 저 70년의 포로 생활의 흔적은 아직도 깊고 고통스럽게 남아 있다. 이는 그들이 아직도 타는 애처로운 곡조이니 - 곧 저 70년 동안의 하나님의 진노가 그것이다.

라이트푸트(Lightfoot) 박사는, 포로기의 70년은 여호야기 제4년부터 시작되어 고레스 제1년에 끝나지만, 이 70년은 예루살렘과 성전이 불타고, 첫 포로기 이후 약 19년에 해당하는 시드기야 11년에서부터 시작되어 다리우스 히스타스페스(Darius Hystaspes)의 제2년, 곧 고레스의 칙령 후 17년 경에 끝난다고 본다. 또 7장 5절에 언급된 70년은 약 19년 이후의 기간이라고 생각한다. 포로 생활은 올 때처럼 점차적으로 사라졌다. "여호와여, 우리는 아직도 70년의 진노 아래 놓여 있으니, 당신은 영원히 우리에게 노하시려나이까?"

 

3. 스가랴는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중재에 대한 은혜스러운 응답을 들었다. 왜냐하면 이는 유력한 중재며, 항상 응답되니, "아버지께서 항상 들으시는" 말씀이기 때문이다(13절). "여호와께서는 천사(곧 계약의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니," 긍휼과 구원에 대한 약속, 그가 그들을 위해 시작한 일을 완성하시겠다고 대답하셨다. 이것은 교회의 비탄을 슬퍼하던 그리스도에게 위로의 말씀이었으며, 시온을 위해 애통하는 자들에게 위로를 주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즉시 위대한 역사(기적)로 나타나시지 않는 때에도 종종 선한 말씀으로 기도에 응답하신다. 그리고 그 선한 말씀은 기도에 대한 참된 응답인 것이다. 사람들의 선한 말은 몸을 양육하지 못할 것이나(2:16), 하나님의 선한 말씀은 믿음을 부양하니, 그에게 있어서는 말과 행함이 인간에게서처럼 두 가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4. 그는 천사에게 주어진 저 대답을 그의 백성의 자녀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공포하라는 명령과 함께 그에게 반복되는 것을 들었다. 곧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그의 종 요한에게 지시한 계시와, 그에 의해 교회들에게 보낸 것이다" (계 1:1). 이처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복음에 있는 모든 선한 말씀과 위로의 말씀을 받는다. 그리고 그의 사역자들은 그것들(말씀)을 "온 세상에" 선포하라고 지명된다. 이제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게 부드럽게 말씀하시니," 스가랴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가로되 너희는 주의 길을 예비하라" 고 한 그 소리이다. "그 소리는 외치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외치라." 예언자들은 이전에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들의 허물을 제시하였듯이(사 40:2, 3, 6), 이제 큰 소리로 하나님의 백성에게 평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만일 그가 "내가 무엇을 외치리이까?" 하고 묻는다면, 그는 여기서 가르침을 받는다.

 

(1) 그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의 원수들을 위해 예비해 두신 진노를 선포해야 한다. 하나님은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신다" (14절). 그는 이전에 그의 교회에서 발견되던 허물에 의해 그러했듯이, 그의 교회에 행해진 상해와 모멸에 의해 자기 자신이 크게 모욕당한 것으로 느낀다. 땅은 "평안하여 정온하며" (11절), 전혀 긍휼이 없으며, 조금치도 후회함이 없다. 이는, 요셉의 형제들이 그를 팔 때 앉아서 떡을 먹었듯이, 그들이 온갖 불행을 예루살렘에게 행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하나님께서 매우 악한 것으로 여겼다(15절). "내가 안일한 열국을 심히 진노하나니," 그들은 고통받는 교회를 조금도 염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시온에서 안일한 자와" (암 6:1), 시온의 슬픔을 동정하지 않는 시온 자신의 아들들을 훨씬 더 증오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들은 시온을 염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녀(시온)을 대적하였다. 나는 내 백성에 대해 "조금만 노하였으며" 그들을 적당히 시정하려고 계획하였으나, 시정의 도구로 사용된 자들은 모든 동정을 던져 버렸고, 가장 큰 분노와 악의로 "고난을 도왔고" 더하였으며, "주가 치신 자를 핍박했으며" (시 69:26) 그가 흩으신 자들에게 모욕을 퍼부었다(사 47:6; 10:5; 겔 25:12, 15 참조). 하나님께서는 정당하게 고통당할 자들에게 고통을 더 하는 자들조차 진노의 대상에 넣으신다. 왜냐하면 그런 경우에 있어서는 참된 인간애가 곧 신성(신앙)이기 때문이다.

 

(2) 그는 하나님께서 예루살렘과 "유대의 성읍" 을 위해 쌓아두었던 긍휼을 선포해야 한다(16절). 그는 다음과 같이 외쳐야 한다.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도다. 나는 분노하여 떠났으나, 이제 사랑으로 돌아왔다." 같은 의도로 "다시 외쳐 이르라" (17절). 이제 이전에 단죄를 위해 그랬듯이 위로를 위해 줄줄이 외쳐야만 한다. "여호와" 만군의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확신시키시기를

 

[1] 성전이 건축될 것이다. 그들이 지금 착수하려는 이 선한 사업은, 비록 많은 실망을 겪을 것이지만 완성될 것이며, 그들은 하나님의 현존의 증거와 그와 대화할 수 있는 기회, 예배할 수 있는 기회를 이전처럼 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들 중에 자기의 집을 세우실 것이라는 말씀을 듣는 것은 어느 곳에 있는 사람에게든지 기쁜 소식이라는 점을 주목하자.

 

[2] 예루살렘이 다시 "조밀한 성읍과 같이 건설되었으니," 이전에 가졌던 영광이로다(시 122:3).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니," 매우 정밀하고 통일성있게 재건하려 함이다.

 

[3] 그 나라가 다시 흥왕하고 부해질 것이다(비록 지금은 쇠퇴하고 황폐하지만). 예루살렘 뿐 아니라 쇠퇴되어 좁은 지역을 차지하고 있는 다른 성읍들도 사람이 "넘칠 것이며," 경계가 커질 것이다. 그들의 교회가 널리 확장되며, 식민지가 세워질 것이다. 그리고 이는 "풍부할 것이라." 그들은 수다하며 부유하여, 그들을 위한 장소가 모자랄 것이다. 그들은 "그곳이 너무 좁다" 고 불평할 것이다(사 49:20). 그들이 환난으로 흩어져 널리 퍼졌듯이, 이제 왕성해야 한다. "네 샘물을 넘치게 하라" (잠 5:16). 이처럼 중대한 성읍을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성읍이라고 부르신다. 그들은 그에 의해 "축복되며," "열매맺고 커져서 땅에 충만하게" 된다.

 

[4] 그들이 현재 당하는 모든 슬픔이 대속될 뿐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의 위로로 멎을 것이다.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안위하리라." 비록 그의 슬픔과 비통이 오래 계속되지만, 마침내 하나님께서 시온과 그를 위해 애통하는 모든 자들을 위해 보존하신 위로를 나타내신다.

 

[5] 이 모두는 하나님의 선행적이며 확연한 은혜의 결실일 것이다. 그는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며," 그의 선택을 갱신하고, 언약을 갱신하고, 그가 예루살렘을 선택했음을 나타낼 것이다. 그가 처음에 그들을 애굽으로부터 이끌어 내실 때 한 백성으로 세우셨듯이, 이제 바벨론으로부터 이끌어 내시는 때 그들이 가치 있어서가 아니라 - 그 자신의 선택의 계속으로서 그들을 다시 세우실 것이다(신 7:7, 8). 예루살렘은 그가 선택한 성읍이니, 그가 그 성읍을 포기하지으리라.

 

 

 예루살렘에 대한 위로 (스가랴 1:18-21)

 

 

강한 힘과 맹렬한 기세로, "원수가 급히 흐르는 하수같이 올 때에," "여호와의 신이 군기를 들 것이다" 는 사실은 교회에게 위로와 승리를 갖다 준다(사 59:19). 이제, 이 이상 중에서(예언자가 본 두번째의) 우리는 하나님의 신이 교회의 대적들의 강력한 힘에 대항하여 앞장 서는 것을 본다.

 

Ⅰ. 우리는 여기서 용감하고 담대하며 교회를 멸절시키고 "이스라엘의 이름을 끊으려고" 하는 교회의 원수들을 보게 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근래에 그와 같은 원수에게 모욕당해 왔다. "내가 눈을 들어 본즉 네 뿔이 보이니라" (18절). 이것은 19절에서 설명된다. 그들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해친 뿔이다." 즉 나라와 성읍에 있는 유대인들이니 그들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광포한 황소가 그 뿔로 자기를 격분시킨 대상을 받아 올리듯이, "그들을 받았다" (어떤 이들이 이처럼 읽는다). 그들은 그들을 흩어서 "사람으로 능히 머리를 들지 못하게 했다" (21절). 아무도 그들이 두려워서 그의 얼굴을 들지 못하며, 더구나 반대는 생각도 못하고, 그들을 향해 고개도 못돌린다. 그들은 "뿔" 이니, 곧 그들의 위엄과 지배를 뜻한다. "뿔을 들어" - 이는 또한 그들의 강함과 힘셈, 강포함을 뜻한다. 그들은 "네 뿔" 이니 - 유대인들이 사방으로 그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들은 밀어닥치는 한 뿔을 피하면 또 다른 뿔이 덤벼든다. 유다의 사람들과 예루살렘의 거주민들, 그리고 그들과 연합한 많은 이스라엘인은 성전 건축을 착수했다. 그러나 그 일에 대한 대적들이 사방으로부터 그들에게 밀어닥쳐, 그들을 몰아냈다. 르훔, 심새 등 사마리아인들은 성전 건축을 반대했다. 그들이 이 뿔들이었다(스 4:8). 산발랏과 도비야와 암몬인과 아라비아인들도 성벽 건축에 반대하였다(느 4:7). 교회의 원수들은 뿔을 가지고 모든 선한 사업을 방해하는데 이용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신약 성서 교회의 큰 원수는 "일곱 머리와 열 뿔" 이어서(계 17:3), 교회에 어떤 봉사를 하고자 하는 이는 반드시 그 뿔에 받힐 것을 각오해야 한다.

 

Ⅱ. 우리는 여기서 활동적이며 유력한 교회의 친구들을 보게 된다. 예언자는 눈을 들어 네 뿔을 보고, 그들이 너무 강하여, 모든 선한 사람과 모든 선한 사업의 성공에 대해 절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때 "여호와께서 공장(工匠) 네 명을 그에게 보이셨는데" 그들은 이 뿔들을 자를 만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20,21절). 지각있는 눈을 가지고 우리는 교회의 원수들의 힘을 볼 것이다. 우리가 어떤 길을 보든간에, 세상은 그것(원수의 힘)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안전함을 보는 것은 신앙의 눈으로이다. 여호와께서 선지자의 종의 눈을 열어 그의 주인 주위에 둘러싼 천사 호위대를 볼 수 있도록 하였듯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보도록 해 주신다(왕하 6:17). 이방인의 뿔을 비벼 떨어뜨리거나 꺾을 자, 그리고 그것을 던져버릴 자를 주목하라.

 

1. "목수 혹은 공장" (혹자는 그들을 쇠뿔로 생각하였다), 곧 그것을 할 만한 기술과 능력을 가졌으며, 바로 그 일이 직업이며, 할 일을 깨닫고 그 일을 할 도구를 가지고 있던 사람들, 하나님께서 그 일에 적당하다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만든, 그의 교회의 이익을 채워 줄 자들을 부르신다는 점을 명심하자. 만일 교회를 대적하는 뿔들이 있을진대(이는 짐승의 힘과 광포를 뜻한다), 교회를 위한 공장들이(이는 인간의 지혜와 예측을 뜻한다) 있으니, 이들에 의해 그들은 가장 강한 짐승도 정복할 방법을 발견한다. "모든 종류의 짐승들이 길들여지니, 인류에 의해 길들여졌다" (약 3:7).

 

2. 그들은 "공장 네 명이다." 그 뿔들의 수만큼의 손들이 그들을 자르게 되었다. 교회가 아무리 재난으로 위협을 당하고, 반대에 부닥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힘을 견제하며, 그 진노를 억제하여, 그에 대한 찬송으로 바꾸시는 길과 수단을 찾아 내실 수 있다는 점을 명심하자. 어떤 이들은 이 네 명의 공장이, 반대를 무릅쓰고 하나님의 역사를 수행한 스룹바벨과 여호수아, 에스라와 느헤미야라고 생각해냈다. 저 뿔달린 짐승들은 하나님의 포도원에 파멸되어서 짓밟혀졌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선한 청지기들과 선한 사역자들은, 비록 "악인의 뿔을 다 벨 만한" (다윗이 그랬듯이, 시 75:5, 10) 힘이 없었으나, 그들을 두려움에 빠뜨려 추방하였다. 하나님께서는 하실 일이 있으실 때 그 일을 할 자들을 일으키시며, 그 일을 수호하며 그 일을 하는데 기용된 자들을 보호할 사람들도 일으키실 것이라는 점을 명심하자.


 

회개에의 요청 ( 슥 1: 1 -6 )

 

스가랴 선지자는 앞으로 임하게 될 메시야와 그의 나라 그리고 그분의 영광스러운 통치를 바라보면서 이때를 맞이하기 위해서 백성들이 먼저 진실되게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이를 위해 스가랴 선지자는 이스라엘 조상들이 생전에 범했던 행악들과 사악함 그리고 이에 대해 진노하사 임했던 심판들을 상기시키면서 열조들의 죄악을 본받지 말라고 강력하게 권고하고 있다. 그리고 여호와 앞에서 자복하는 자만이 앞으로 임하게 될 영광스런 축복에 동참하게 될 것을 가르친다.


1. 열조에게 진노하셨던 하나님(슥1:1,2)

하나님은 다리오 왕 2년 8월에 스가랴 선지자에게 임하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파할 당신의 말씀을 전하셨다. 이 날짜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하나님은 이스라엘 열조의 죄악에 대해 진노하셨는데, 이는 역사 속에서 어떻게 나타났는가? 동시에 이러한 하나님의 진노를 후손들에게 가르치는 이유는 무엇인가?


1) 열조에게 진노하셨던 하나님
다리오 왕 2년 8월은 학개 선지자가 사역을 시작한지 2개월 후의 일이요, 이미 성전 재건이 시작된 후이다(학1:1,15). 따라서 이렇게 정확한 날짜를 기입한 것은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동시대에 같은 사명을 하여 백성들을 격려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조상들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진노가 여실히 드러났던 사건은 바로 주전 586년에 성전은 물론이거니와 나라마저도 멸망당했던 일이었다. 이때 이스라엘은 바벨론에게 무참히 짓밟혔으며 또한 포로로 끌려가 비참한 하루 하루를 보냈다. 그런데 이러한 지난 과거를 다시 상기시킨 이유는 당대의 후손들이 조상들이 전철을 밟아서는 안 된다는 경각심을 심어 주기 위해서였다.

 

2)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미래를 보기 위해서는 지난 과거를 되돌아 모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미래는 과거의 연장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하나님은 앞으로도 변함없이 우리와 동행할 것이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이제는 나의 하나님으로 내 안에 계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의 지난 과거를 돌이켜 보면서 세상 만물을 주관하시는 그분을 보았던 것이다.


2. 내게로 돌아오라(슥1:3,4)

하나님은 백성들을 향하여 "그러므로…내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럼 내게로 돌아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슥1:3에서만도 '만군의 여호와'를 세 번씩이나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끝으로 너희 열조의 무엇을 본받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가?

1) 친밀한 관계를 원하시는 하나님
학개서를 보면 이미 백성들은 마음이 흥분되어(학1:14) 성전을 재건하기 시작하였고, 하나님의 너희와 함께하시리라 (학1:13)는 축복의 말씀을 받았다. 따라서 "내게로 돌아오라"는 말씀은 여호와 앞에 더울 가까이 나아오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더욱더 친밀한 관계를 원하신다. 그럴 때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니"라는 약속을 하나님은 하고 있다. 이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이심을 '만군의 여호와'라는 언약의 명칭으로 보증하고 있는 것이다. 백성들은 이때 용기와 새 힘을 갖게 된다. 이러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위해서는 열조들의 악한 길과 악한 행실을 본받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다. 여기서 `길'과 `행실'은 상징적인 의미로 `삶의 방식'을 뜻한다. 결국 나라의 멸망을 몰고 온 그릇된 삶의 방식을 가졌던 조상들을 본받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2) 여호와께 돌아가자
주홍같은 진홍같이 붉은 죄악을 지닌 우리들을 향해 "와 우리가 변론하자"고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마귀의 음흉한 흉계가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이 세상에서 믿음의 승리를 하기 위해서는 오직 여호와께로 돌아가야만 한다.


3.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슥1:5,6)

슥1:5에서는 두 개의 질문을 던지고 잇다. 이 질문 속에 담긴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이스라엘의 열조들이 "돌쳐 이르기를"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고 슥1:6의 말씀은 이스라엘의 열조들의 고백이라 할 수 있는데, 열조들이 깨닫고 고백한 내용은 무엇인가?


1)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의 계획
두 개의 질문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히 살아서 역사한다는 진리를 강조하는 것이다. 열조들은 주의 말씀을 증거한 선지자들도 결국은 죽어서 사라지는 존재에 불과함을 대조적으로 보여 주는 말씀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만을 의지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돌쳐 이르기를"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진노로 바벨론에게 끌려가는 열조들이 말했던 것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성취되는 것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경탄하면서도 그 말씀을 믿지 못했던 자신들의 무지를 탄식하는 말이다. 이때 열조들은 자신들의 죄악에 대해 경고하셨던 하나님의 뜻대로 징계가 임했음을 깨닫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열조들은 비록 징계를 받은 몸이지만 늦게나마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고백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열조들은 회개의 기회를 놓친 뒤였기에 이러한 고백이 무의미하였다.


2) 영원히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말씀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한낱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우리들이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지 그 해답은 자명해진 것이다.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들을 향해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원하고 계시다. 그 뜻은 바로 이 세상의 음란을 버리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살전4:3)


스가랴 선지자는 지난 과거를 돌이키면서 현재의 백성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였다. 열조들의 전철을 밟지 말라는 강한 권고였다.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온전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한 것이었다. 이 길만이 메시야의 영광스런 도래를 맞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스가랴는 본격적으로 자신이 본 이상과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전파함으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사모하도록 인도하고 있다.

1. 스가랴서의 특징

1) 문학적 특징
스가랴서는 일반적으로 두 부분적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 문체가 서로 다르기 때문인데, 앞부분(슥1-8장)은 산문체로 되어 있고 뒷 부분(슥 9-14장)은 시적인 문체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뒷 부분은 묵시 문학적인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단일 인임은 의심받고 있지 않다. 비평학자들은 앞부분에서 사용된 선지자, 이름, 시대, 사단 등의 기록이 뒷 부분에 가서 발견되지 않는다거나 사용되지 않는다는 이유를 들어 동일 저자가 아님을 주장하고 있지만 공통된 표현들도 많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특징들은 주제의 변화 때문에 일어나는 차이로 보아 저자의 통일성은 의심할 수 없다.


2) 내용적 특징
앞 부분에서 8개의 환상을 통해 종말론적 희망과 메시야 왕국의 왕으로서 스룹바벨을 제시하는 등 신학적인 내용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뒷 부분 스가랴 9-11장에서는 수리아와 베니게, 블레셋에 임할 여호와의 심판을 예언하였고 스가랴 12-14장에서는 이방 세력의 최후 공격과 그 성읍의 구원과 여호와께서 최후의 승리를 하실 것임을 언급하고 있다. 스가랴의 환상은 다리오 왕의 통치하의 종말론적 분위기 속에서 발전된 묵시 문학적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선지자 스가랴 이전에 예언되던 종말 사상과 묵시 문학은 이때 결합되어 스가랴의 환상을 해석하고 새로운 지배 계급의 권위를 보장하려 하기도 하였다.


3) 신학적 특징
스가랴는 그의 책에서 많은 신학적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루고 있다.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을 많이 하고 있으며, 구원론과 더불어 말세론까지도 다루고 있다. 기독론에 있어서는 메시야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것(슥9:9), 은 30냥에 팔리실 것(슥11:12,13), 십자가에 달리실 것(슥12:10), 십자가의 피로 우리 죄를 씻으실 것(슥13:1) 등이다. 메시야 사상은 스가랴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고 선지자 이사야, 미가, 예레미야, 에스겔, 학개 등에 의해서도 발전되고 심화되었다. 또한 스가랴는 구원론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환상을 통해 예언하고 있는데 사단에게 정죄받는 더러운 옷 입은 여호수아의 옷을 벗기고 아름다운 옷을 입히는 환상은 메시야께서 죄를 깨끗게 하시고 구원하시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스가랴에 의한 여호와의 날은 심판의 날이며 구원의 날이고 하나님의 영광의 날이 될 것이다. 그에 의하면 그 날이 되면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여호와 하나님에 의해 멸망할 것이며, 성 예루살렘이 이루어지고 이방인들은 예루살렘에 몰려올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다.


2. 여호와의 진노하심

1) 여호와께서 진노하시는 이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악한 행실을 용납치 않으시고 원하지 않으신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조상의 악한 행실을 본받고 있었다. 그리고 선지자의 말을 그들의 조상들이 듣지 않았던 것처럼 그들 또한 듣지 않았다. 그들의 범죄 행위는 불신앙과 우상 숭배, 위선 등이었다. 이러한 잘못된 생활은 여호와의 진노를 부르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2) 회개의 요구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심판이 아니다. 스가랴는 하나님의 뜻을 대언하고 있는데 하나님께 돌아올 것과 열조들을 본받지 말 것을 촉구하고 있다. 과거에도 끊임없이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던 조상들의 행실을 본받지 말아야 했던 것이다.

3) 열조들은 어떻게 되었나?
하나님께서는 인생이 제한되어 있음을 말씀하고 계시다. 모든 인간은 죽음에 이르고 열조들이나 선지자들이나 모두 죽음에 이를 수밖에 없는 존재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계속 존재하고 영원히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점일획 빗나감이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말씀은 현재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일인 것이다.
3. 아이 성 싸움

수 7:3-7에 걸쳐 등장하는 아이 성 싸움은 이스라엘 백성의 지나친 자만에 대한 교훈을 주는 부분이다.

여리고 성을 함락시킨 이스라엘은 자만이 지나쳐서 한낱 작은 성에 지나지 않던 아이 성을 얕잡아 보게 되었다. 그래서 명목상의 전투 부대만 보내기로 하였지만 이스라엘 군대는 참패를 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의 대적은 작을지라도 가볍게 보아서는 안 될 것이며 생활 속에서 항상 겸손함을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blog.naver.com/oostView.nhn?

 


말들의 환상(스가랴 1장)

 

[1-3절] 다리오 왕 2년 8월에 여호와의 말씀이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나 여호와가 무리의 열조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 그러므로 너는 무리에게 고하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되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나 여호와가 무리의 열조에게 심히 진노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열조에게 심히 진노하신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떠나 우상숭배하고 악을 행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고 말씀하셨다. 비록 그들의 선조들이 우상숭배와 부도덕에 빠졌었으나 이제 그 후손들이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와 하나님 말씀에 복종하고 의와 선을 행해야 한다. 회개는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또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께서 그를 떠나시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평안과 행복도 그를 떠나간다.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떠나셨고, 그들은 전쟁, 기근, 질병 등의 재난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제 그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면 그는 그들의 선조들과 그들의 많은 죄를 사하시고 친히 그들에게로 돌아오실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평강과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라는 말(본서에 49회 나옴)은 하나님께서 천사들의 무리를 주관하시고 사용하시고 그의 계획하신 일들을 이루시고 영광을 받으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낸다. 

 

[4-6절]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 옛적 선지자들이 그들에게 외쳐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악한 길, 악한 행실을 떠나서 돌아오라 하셨다 하나 그들이 듣지 않고 내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였느니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너희 열조가 어디 있느냐?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 내가 종 선지자들에게 명한 내 말과 내 전례들이 어찌 네 열조에게 임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돌쳐[돌이켜]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 길대로, 우리 행위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고 뜻하신 것을 우리에게 행하셨도다 하였다 하셨느니라 하라.

 

하나님께서는 “너희 열조를 본받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이스라엘의 열조는 악한 길과 악한 행실을 떠나 돌아오라는 말씀을 선지자들을 통해 들었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죄가 인생의 근본 문제이며 회개는 그 문제의 해결책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열조들은 선지자들이 전한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았고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들은 무지하고 교만하고 완악했다. 그런데 그들의 열조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들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다 포로로 잡혀갔고 전쟁과 기근과 질병으로 죽지 않았는가? 또 “[그] 선지자들이 영원히 살겠느냐?”는 말씀은 선지자들이 그 후손들에게 경고하기 위해 계속 살아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선지자들도 죽는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우리는 그들의 글들인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던 말씀과 그가 행하셨던 역사적 사건들의 교훈을 받는다. 

 

[7-17절] 다리오 왕 2년 11월 곧 스밧월 24일에 잇도의 손자 베레갸의 아들 선지자 스가랴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여 이르시니라. 내가 밤에 보니 사람이 홍마(紅馬)를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myrtle tree, 도금양) 사이에 섰고 그 뒤에는 홍마와 자마(紫馬)와 백마가 있기로 내가 가로되 내 주여,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이들이 무엇인지 내가 네게 보이리라 하매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 그들이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여호와의 사자에게 고하되 우리가 땅에 두루 다녀보니 온 땅이 평안하여 정온(靜穩)하더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응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여호와께서 언제까지 예루살렘과 유다 성읍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려나이까? 이를 노하신 지 70년이 되었나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선한 말씀, 위로하는 말씀으로 대답하시더라.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며 시온을 위하여 크게 질투하며 안일한 열국을 심히 진노하나니 나는 조금만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처럼 말하노라. 내가 긍휼히 여기므로 예루살렘에 돌아왔은즉 내 집이 그 가운데 건축되리니 예루살렘 위에 먹줄이 치어지리라. 나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셨다 하라. 다시 외쳐 이르기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나의 성읍들이 넘치도록 다시 풍부할 것이라.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안위하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리라 하셨다 하라.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는 고난 중에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는 것 같다. 홍마를 타고 골짜기 속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사람은 그리스도를 가리킨 것 같고, 그 뒤에 홍마와 자마와 백마를 타고 따르는 자들은 천사들을 가리킬 것이다. 홍마는 전쟁을, 자마는 죽음을, 백마는 승리를 상징하는 것 같다. 스가랴 때는 예루살렘 성이 멸망한 지 70년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예루살렘 성의 재건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서 돌아오기는 했으나 아직 성전도 재건하지 못했고 성곽은 더더욱 재건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스가랴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예루살렘 성이 재건될 것을 증거하여 주신 것이다.

 

[18-21절] 내가 눈을 들어 본즉 네 뿔이 보이기로 이에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이들이 무엇이니이까? 내게 대답하되 이들은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헤친[흩어버린] 뿔이니라. 때에 여호와께서 공장(工匠) 네 명을 내게 보이시기로 내가 가로되 그들이 무엇하러 왔나이까 하매 대답하여 가라사대 그 뿔들이 유다를 헤쳐서[흩어버려서] 사람으로 능히 머리를 들지 못하게 하매 이 공장들이 와서 그것들을 두렵게 하고 이전에 뿔들을 들어 유다 땅을 헤친 열국의 뿔을 떨어치려[던져버리려] 하느니라 하시더라.

 

뿔은 힘과 세력을 상징한다. ‘네 뿔’은 유다와 이스라엘 사방에 있는 적대 세력을 가리킬 것이다. 유다와 이스라엘 주위에는 북으로는 수리아와 앗수르와 바벨론, 동으로는 모압과 암몬, 남으로는 에돔과 애굽, 서(西)로는 블레셋이 있었고 그것들은 유다와 이스라엘의 적대 세력이었다. 이 중에 특히 앗수르와 바벨론은 이스라엘과 유다를 멸망시키고 그들을 온 세계에 흩어지게 한 적대 세력이었다.

공장(工匠)이라는 원어(카라쉼)는 목공, 석공, 철공 등의 장인들(craftsmen) 곧 기술자들을 가리킨다. 네 뿔들이 강하며 유다와 이스라엘이 자기 힘으로는 그것들을 이길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는 네 장인들을 준비하셨고 필요할 때 그것들을 파하게 하셨다. ‘네 장인’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적대 세력을 꺾고 그 나라를 회복시키기 위해 동서사방에서 자유로이 사용하시는 섭리적 도구의 나라들을 상징한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적으로 바벨론을 들어 앗수르의 뿔을 꺾으셨고 또 메대와 파사를 들어 바벨론의 뿔을 꺾으셨다. 

 

하나님의 뜻은 예나 지금이나 죄로부터의 회개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로 돌아온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건하고 의롭고 선한 열매를 맺고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그의 주시는 평강을 누리자. 

우리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역사를 통해 교훈을 받고 성경적 설교와 교훈에 겸손히 순종하자. 우리는 이스라엘의 열조처럼 되지 말자. 모든 종류의 죄악을 회개하고 버리자. 불경건과 우상숭배를 버리고 미움, 시기, 음란, 불결, 거짓, 탐욕 등의 모든 죄악을 다 버리자. 

이스라엘의 회복은 하나님의 긍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그 시작(중생)도, 그 진행(성화)도, 그 완성(영화)도 하나님의 긍휼로 된다. 교회는 사방에 적대 세력들이 있어도 하나님의 긍휼로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이기셨다. 우리도 주 안에서 죄와 사망과 사탄의 권세를 이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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