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명칭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종)이다.
오바댜에 대해서 다른 참고 자료를 얻을 수가 없다.
그러나 오바댜라는 이름은 히브리인들 사이에 흔한 이름이었던것 같다.
(왕상 18:3, 대상3:21, 옵7:3, 옵8:38, 옵9:16, 옵12:9, 대하17:7, 옵34:12,스8:9, 느10:5등) 참조. 연대에 관하여 학자들 사이에 의견이 많으나 예레미야 전 후의 사람 이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렘49:14-16과 본서 옵1:1-3은 아주 같은 낱말들과 내용을 말하고 있는것을 볼 수 있다.
2. 주제표
초점 | 에돔의 심판 계시 | 에돔을 심파하는 이유 | 유다의 지위 회복 |
본문 | 옵 1-9절 | 옵 10-14절 | 옵 15-21절 |
3. 내용과 주요사상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돕지 않고 괴롭힌 에돔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본서의 내용이다.
그러기 때문에 본서는 다른 민족을 멸시하며 저주하고 오직 자기 민족만 높이 들리울 것을 희망하고 있는 인상을 주기 때문에 편협한 배타주의 민족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본서가 가르치는 중심 내용은 이웃나라(이스라엘)가 당하는 고난을 보고도 도와 주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기화로 자기(에돔)의 이익을 얻을 좋은 기회로 삼는 잔인한 무관심과 부도덕을 하나님께서 미워하신다는 것과 그러한 나라는 이웃나라와 꼭같은 고난을 받게 된다는 것을 예언한 것이다.
본서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과 에돔의 과거를 잘 알아야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야곱의 후손이요 에돔 민족은 에서의 후손이다.
야곱의 간교는 형제 사이에 불화를 가져왔는데 그 후손들도 화목하지 못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정착 하려고 에돔 땅을 지나갈 것을 요청 했을때 에돔은 그것을 거절했던 일이있으며 가나안 정착 후에도 두 나라는 서로 무역 경쟁자의 입장에서 이해 상반의 대립 관계에 있었다.
에돔은 유다 왕국의 멸망을 바라고 기뻐하는 처지였다(옵11:1-14절, 애4:21).
4. 내용 분해(대분류)
1. 에돔의 심판과 그 이유 옵1:1-14 1) 에돔의 멸망에 대한 경고 옵1:1-4 2) 에돔의 완전한 멸망 옵1:5-9 3) 에돔의 심판 이유 옵1:10-14 2. 여호와의 날 옵1:15-21 1) 만국의 심판 옵1:15-16 2) 이스라엘의 회복 옵1:17-21
5. 내용 분해(소분류)
○옵1:1 오바댜의 환상과 에돔에 내린 심판 옵1:1 에돔의 교만 옵1:6 에돔의 멸망 옵1:10 에돔의 죄 옵1:15 에돔의 멸망 옵1:17 야곱에 대한 구원의 약속
오바댜의 예언은?
오바댜의 예언은 민족들에 대한 하나님의 도덕적 심판의 메시지이다. 그런데 본서의 21절 중에서 16절은 에돔에 대한 다가 올 심판의 선언에 대한 말씀이고 나머지 5절은 이스라엘이 에돔을 이길 장래의 승리에 대한 예언이다. 이렇게 볼 때 오바댜서는 하나님의 계시이기보다는 단지 유대 민족주의에 대한 하나의 실례가 아닌가?
먼저 에돔에 대해서 알아보고 문제를 풀어보자.
에돔의 조상은 에서였고 그는 세일 산에 정착하면서 마침내 적은 나라를 이루게 되었는데 전 왕조시대를 통해서 트랜스욜단의 고지에 거주하였다. 그들은 유다에 종속된 때도 있었으나 주전 594-593년에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 존속하였다(참고, 렘 27:3). 주전 6세기에 에돔이 존속했다는 증거는 에시온게벨(tell el-kheleifch)의 발굴로 증명되었다.
주전 312년에 페트라(Petra)가 아랍의 나바티아 사람들에 의해 점령되었고 이런 변화로 제5세기는 이미 아랍의 영향력이 구축되었다. 암몬과 모압은 느혜미야시대 유다의 염려하는 원수로 언급되었다(느 2:10, 19; 4:3, 7; 6:1-15; 13:1-2, 23). 그러나 이 지역을 게셈이라는 아랍인이 지배함으로 에돔은 유다의 전통적인 대적자의 이름에서 대체되었다(느 2:17; 4:7; 6:1-2, 참고; 대하 17:11; 21:1; 26:7). 이런 변화는 페르시야 시대(6세기 후반에서 4세기) 아랍인에 의해서 통제되었던 제5세기 지방들에 대한 아랍의 이름들이 에돔 족속의 이름들을 대체한 에시온게벨에서 분명하다(Wiseman).
그러면 에돔이 유다의 원수로 잘못한 죄는 무엇이었는가?
오바댜 11-14절이 지적한대로 저들은 유다에 대해 외국인처럼 행동했으며(11절) 유다의 멸망을 기뻐하였고(12절) 유다의 부를 약탈했으며(13절) 유다의 피난민들을 노예로 팔았다(14절).
저들은 유다의 형제였다. 그러나 유다가 바벨론에 의해 포로되고 마침내 약탈과 방화를 당할 때 도움을 주지 않았음은 물론 바벨론이 파괴하고 죽이고 약탈하고 지나간 유다에 들어와 다시 약탈하며 피난민들을 노예로 팔고 예루살렘의 멸망으로 도피하는 유대인을 죽였다.2) 이렇게 주전 588-587년에 에돔 인들은 암몬과 모압 족속과 더불어 느브갓네살의 동맹군으로 예루살렘 공격에 참여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었다.
에돔은 어떻게 멸망하였는가?
에돔은 바벨론의 마지막 지배자들 중에 한 사람이었던 나보니더스(Nabonidus 556-539 B.C.)에 의해 멸망하였으며 마침내 네게브(Neguv)로 바뀌었다.3) 또 다른 사료에 의하면 나바티안 아랍 인들에 의해 조상의 땅에서 쫓겨나 남부 유다의 주민들이 사라진 지역에서 피난처를 발견했으며 후에 이두메로 바뀌었다고 본다.4) 여하튼 에돔은 오바댜의 예언처럼 멸망하고 말았다.
여기서 에돔의 죄와 그 멸망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하나님께서 세상을 도덕적으로 통치하시며 공의로 심판하신다는 사실이다. 에스겔서에 나오는 당대 강대국들 - 앗수르, 애굽, 바벨론-을 보라(겔 31장). 결국에 그들도 하나님의 심판으로 망하고 마는데 모두 약한 자를 돕기보다 잔인하게 짓밟고 약탈하였다. 그리고 한결같이 교만하였다. 그들이 강대했던 것은 선민들이 범죄했을 때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의 도구로 쓰이기 위함이었으나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로 행했고 그들도 마침내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야만다.
이렇게 볼 때 여기 오바댜의 에돔에 대한 멸망의 예고는 어떤 민족주의적인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세계를 통제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며 그 하나님은 반드시 범죄한 개인이나 나라를 행한 대로 심판하신다는 것이었다. 에돔이 망하는 것은 형제의 환난을 보고도 돕지 않고 오히려 그 환난을 기뻐하고 나가서 이용한데 있었다. 저들이 유다에게 행한 죄는 하나님께 대한 것이었고 결국 이스라엘의 원수된 저들은 마침내 하나님의 원수가 되고 만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결론할 수 있다. 오바댜의 메시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언제나 세상을 완전히 통제하시며 그의 목적을 이루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메세지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원수를 대적해서 이긴다는 믿음과 소망을 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승리는 모든 민족에게 축복이 될 것이다. 오바댜서는 하나님의 진실하심을 선언하며 그가 세상에 궁극적으로 공의를 세우실 바 그의 도덕적 정의에 대한 증거이다.5)
주
1. Carl E. Armerding, Obadiah, E.B.C. Vol.7(Grand Rapids: Zondervan, 1985), p.336
2. Billy K. Smith and Frank S. Page, Amos, Obadiah, Jonah(Brodman & Holman, 1995), p.192
3. Carl E. Armerding, Ibid.,
4. 글리슨 아쳐, 성경 난제 백과사전, 황영철역(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0), p.409
5. Norman Geisler and Thomas Howe, When Critics Ask(Victor Books, 1992), p.305
오바댜(Obadiah)의 외침
G. Campbell Morgan 저 / 김현진역
-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
"구원자들이 시온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옵1:21)
오바댜의 예언은 분명히 구약 성경에 있어 특이한 것이다. 그 예언 속에는 우리를 위한, 또 우리 시대를 위한 메시지가 전혀 없다고 생각되기 쉬우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사도르(Isadore)는 성경의 비유에 관한 그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이 선지서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모든 선지자들 중에서 그는 가장 짧은 말씀을 전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신비에 관한 은총은 다른 선지자들과 다름이 없다.
본서는 하나의 메시지로 엮어져 있다. 선지자가 누구인가와 그 시대적 환경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오바댜가 누구인가에 대해 명확히 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성령의 다른 곳에서도 오바댜란 이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어떤 인물인지는 확인할 수 없으며 또한 그의 예언의 시기도 정확히 알 수 없다.그러므로 우리는 별로 중요치 않은 이 일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그 말씀 자체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본 선지서의 특성은 이곳에 야곱과 에서의 반목이 다른 어떤 선지서에서보다도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는 것이다. 처음 8절까지를 보면, 오바댜가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의 많은 부분이 예레미야서에도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이는 오바댜가 예레미야의 예언에 정통하였거나, 예레미야가 오바댜의 예언에 정통하였거나 둘 중의 하나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 야곱과 에서의 반목은 성경을 통해 명확히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고, 지속적으로 암시되고 있는 명백한 것이다. 우리는 창세기에서 "아이들이 그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는 말씀을 읽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이는 리브가에게 있어 하나의 사전 경고였다. 이는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고, 그녀를 두려움에 떨게 만든 것이었다.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나는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한다"는 말씀은 많은 사려깊은 사람들을 어리둥절케 해왔다. 그러나 하나님은 야곱을 자신이 사랑하시게끔 만든 것도 아니고, 예서 자신이 미워하시게끔 만드시지도 않았다는 것이 정당한 말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 각각을 사랑하시거나 미워하였기에 그와 같은 사람들이 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미움을 초래한 것은 오히려 그들 자신의 행동과 성품이었다. 지속적으로 구약에 나타났던 이 반목은 신약에 다시 나타난다. 이는 결국 예수와 헤롯이라는 두 뛰어난 인물을 통해 매우 놀라운 방법으로 드러난다. 우리는 헤롯이 에돔인이었다는 것과 예수께서는 혈통에 따라 야곱의 후손이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 예수께서 결단코 헤롯에게 말씀하신 적이 없다는 점은 매우 시선을 끄는 섬뜩한 사실이다. 예수께서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시기 위해 그에게 신랄한 메시지를 보내신 적은 있다. 또한 그를 심하게 경멸함으로 자신의 반감을 드러내신 적도 있다.
이 오바댜서의 배경에는 야곱이 있다. 그는 고통당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의해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반면, 이 오바댜서의 前景에서는 에서가 야곱의 고통을 조롱하고, 그의 환난을 더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또 하나님은 야곱과 에서 둘 다에 관여하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 에돔에 대한 게시가 갖고 있는 가장 큰 가치는 실질적인 불경건에 대해 계시했다는 점이다. 우리는 야곱과 에서의 시대와는 멀리 떨어져 있다. 하지만 야곱과 에서에게 나타났던 원리는 지금도 여전하며, 그것이 인류 역사 속에 분명히 드러났듯이 오늘날에도 분명히 드러난다. 삶의 두가지 유형과 개념, 그리고 방법은 여전히 이 세상에 존재한다.
이 선지서에서 우리는 무엇보다도 에서라는 인물의 적나라한 모습과 에돔의 의미에 대해 깨닫게 된다. 선지자는 그것을 그들 개인들에게서가 아닌 그들의 후손들로 이루어진 족속들에게서 그 당시 입증되었던 것으로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 에서와 에돔에 대한 계시에서 깨달은 것은 무엇인가?그것은 바로 잔인과 폭력의 가공할 모습이다. 여기에서 에돔은 자만의 높은 곳으로부터, 하나님의 진노하심을 겪고 있는 이스라엘 민족의 고통을 내려다 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에돔은 구경만 하다가 급기야는 국경을 넘어 야곱의 고통을 더한다고 폭로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에돔의 죄악의 전부는 아니다. 드러나야 할 뿌리깊은 악은 무엇인가? 우리가 이를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려면, 우리는 이 불신앙에 앞선 것, 이 불신앙을 유발시킨 것이 있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이는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란 말씀에서 드러난다. 마음의(중심의)교만은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으로 나타났다. 에돔인은 하나님을 몰랐을 뿐만 아니라 어떠한 신도 몰랐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다른 족속들은자기들의 신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은 우상 숭배자들이었다.그런데 에돔 족속은 전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어떤 형태로도 신을 섬기지 않았던 것 같다.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즉 그들은 하나님이 필요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우리는 신약에서 에서와 그의 모든 후손, 그리고 그들이 행했던 것과 같은 생활 태도에 관한 무서운 말씀을 대하게 된다. '불경한 사람 에서'여기서 불경하다는 것은 부주의하고 경망스런 정도의 언동을 말하는 것이 아ㄴ. 이는 완전히 자의적으로 하나님을 거역하는것이다.불경스런 사람은 전혀 영에 대한 생각이 없는 사람이며, 그의 삶이 완전히 유물론적인 사람이다. "나에게는 하나님이 필요없다.""나는 하나님과 무관하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중심이(마음이)교만한 자이다.
이런 생각이 우리에게 놀라운 것이 아니라면, 이는 우리 생각 속에 그러한 죄악이 있기 때문이며, 이러한 말을 들어도 무관히 여김은 모든 죄악이 이 근원적인 죄에서 비롯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교만한 자는 삶이 그 자체로 충분하며, 하나님과의 어떠한 관계도 필요없다고 말한다.
에돔의 이 교만은 에돔이 바위 성 높이 올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라고 말함에서 드러난다. 독수리 처럼 높이 올라 별 사이에 깃들임으로, 에돔은 자신을 신격화하려는 죄를 범하였다. 이 모든 것은 본 예언이 행해지던 당시의 상황이다. 에돔 족속은 우리가 지금 페트라(petra)라고 부르는 암벽 지대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 절대적으로 안전한 곳이라고 생각하였다.또한 실제로 그들은 오랜 기간을 그 요새에서 안전하게 지냈다. 그 결과 그들은 가장 도전적인 불신앙의 화신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신격화시켰으며, 자기 스스로 완전하다고 믿었다. 또 자기 방어를 위해 만든 요새가 모든 적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에 충분하다고 믿었다.
사진설명 : 이전에는 에돔이었던 나바태의 도성 페트라의 바위 요새로 들어가는 좁은 통로.
자, 이 마음의 교만이 어떻게 나타나는지 보자. 이 교만에서 비롯한 죄는 폭력, 잔인 그리고 완악함의 죄였다. 이는 야곱의 성품으로 표현되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것이다. 처음에 이는 소극적인 잔인함으로 나타난다. 재앙의 날에 에돔 족속은 이를 방관만 하였고 패망의 날에는 이를 즐겼다. 고난의 날에 그들은 스스로 교만해져서, 입을 크게 벌려 떠들어대었다. 이제까지는 소극적이던 것이 저극적이 되기 시작한다. 야곱 족속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그들은 그 성문에 들어가 그 고통을 방관하였고 재물을 강탈하였다. 또 야곱 족속이 도망치려 할 때 그들의 퇴로를 차단하였다. 이 모든 것은 인간에 대한 태도를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에 대한 태도에서 비롯한 결과이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자는 그들의 이웃을 무자비한 폭력으로 짓밟는다.
그렇다면 이것의 결말은 어떻게 될 것인가? 아마 오바댜의 말씀은 바로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오바댜가 예언하던 바로 그때는 야곱이 매우 고난을 당하던 때였다. 야곱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뿐 아니라 잔인하고 잔혹한 에돔이란 적으로부터도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야곱은 에돔의 거만한 외침을 들었다.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 내리겠느냐." 이는 대응할 길 없는 도전 같았다. 에돔은 언제나 번성할 듯했으며, 또 형통한 가운데 영원히 불경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응답의 여호와의 말씀 속에 있다.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나 여호와가 지혜있는 자를 멸하고 용사를 놀라게 하리라."
오바댜는 그러한 일이 복합적으로 일어나리라고 보았다. 에돔에 대한 말씀은 "너와 조약한 자들이 너를 대적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너와 화목하던 자들이 즉, 너와 협약을 맺었던 자들이 그 협약을 깨리라, 네 식물을 먹는 자들이 너의 적이 되리라." 따라서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는 모든 것들이 연합하여 에돔에 대적하므로, 에돔은 바위 성으로 부터, 또 별 사이에 깃든 곳으로부터 땅에 끌어내려진다. 이는 우리가 종종 시적으로 표현하곤 하는 하나님의 정의이다.
네가 행한 대로 받으리라.
이제 우리는 확실히 시사적인 마지막 말씀에 주목하여야 한다.
구원자들이 시온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이 마지막 문장은 마치 심령 깊은 곳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것 같다. 즉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는 깊은 확신으로부터 솟구쳐 나오는 것 같다. "구원자들이 시온산에 오른다"는 말씀는 두 가지로의 해석이 가능하다. 많은 이들이 "심판"이라는 단어의 의미에 집착한다. "구원자들이 시온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이 심판이라는 단어의 최우선적인 의미는 의로운 통치이다. 물론 이는 종종 징벌로서의 통치 행위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러나 적어도 필자에게 있어서 이 오바댜의 말씀에는 에서에 대한 소망, 심지어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에 대한 소망이 빛나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하나님의 산인 시온산 위의 "구원자들"이 모든 사악한 것들을 심판하여, 이를 의롭게 세우기를 바라는 소망이 빛나고 있다. 결국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기"까지 모든 사악한 것들을 심판하여, 이를 의롭게 세우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 선지서의 마지막 말씀은 다른 모든 선지서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비관적인 말씀으로 결론을 맺은 히브리 선지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명백한 사실이다. 히브리 선지자들은 음울하고 어두운 것을 보았다. 또 죄악과 불신앙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상의 것을 보았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모든 것이 음울함과 어두움 그리고 불신앙으로 끝나리라고 보지는 않았다. 그들은 이를 꿰뚫어 보았다. 짧은 글을 통해 불신앙과 신앙 간의 반목을 우리에게 명확하게 보여 주고 있는 오바댜도 마지막 문장을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로 맺고 있다. 오바댜는 눈 앞의 갈등, 즉 야곱의 고통과 에돔의 비웃음 이상을 보고 있다. 그는 반드시 에돔에게 임할 심판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를 보았다. 그러므로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는 것을 보았다.
이는 우리가 오늘날 귀기울여야 하고,주의해야 하는 선언이다. 아마도 불신앙이 오늘날처럼 심하게 번진 적도 없을 것이다. 기독교에 대한 이교도들의 공격은 거의 다 사라졌다 해도 무장하다. 그러나 오늘날처럼 실질적인 불신앙이 팽배한 시대도 없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필요없다. 우리는 별들 사이에 깃들여 있다. 누가 능히 우리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사람들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것처럼 행하고 있다.따라서 기도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 것은 보지 못한다. 그들은 영혼에 대해 아무 생각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인간이 자신을 높이는 바로 이때에,그들과 조약한 모든 이들과 그들의 자만심이 함께 작용하여 그들을 교만한 위치로부터 끌어내린다. 이로써 그들은 현실에 직면케 된다.
이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바댜처럼,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는 사실을 확신한다. 우리는 우선 그점을, 오늘날 나라가 여호와의 것이라는 사실로 인해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다스리신다. 이 세상은 하나님으로부터, 또 하나님의 통치로부터 결코 벗어날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통치하에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이런 의미에서 그 나라는 이미 여호와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도 여호와께 속할 것이다.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일상의 삶 속에서도 여호와께서 선포하신 말씀과 복음을 통해 나라가 그에게 속한 것으로 되어가고 있다.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그렇다면 우리는 이 말씀과의 관계에서 어디에 위치하는가? 우리는 야곱의 편인가,아니면 에서의 편인가? 야곱은 칭송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바로 우리의 표본이었다. 그는 대단히 많이 실수하였고 실패하였으며 어리석었다. 그러나 그는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을 때에라도 언제나 하나님을 믿었다. 이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인내하셧으며 그가 자신의 기만 행위로 말미암아 집을 떠나 방황할 때 그에게 환상을 보여 주셨다.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가 집으로 돌아올 때 친히 그를 만나 그와 겨루시고 또한 축복하셨다.
혹시 우리가, 하나님을 거역하는 불경스런 사람이고, 보이지 않는 것은 보지 못하며, 영혼에 대해서는 도무지 알지 못하는 에서, 또 스스로 암벽으로 된 요새에 거한다고 자만하여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 내리겠느냐"고 외치는 에서와 같은 사람은 아닌가? 만일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는 먼저 그래도 구원의 길이 있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하나님은 기다리신다. 또 그는 구원자를 보내주신다. 불경스런 자도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해 성화될 수 있다. 이 묵상을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할 수 있는 말, 또 유일하게 할 수 있는 말은, 광범위하게 해석될 수도 있고 개인에 한정될 수도 있는 말씀인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는 예언의 말씀이다.
명칭 |
이 책의 히브리 어 명칭인 '오바댜'는 '여호와의 종' 또는 '여호와를 예배하는 자'라는 의미이다. 이 선지자의 혈통·사회적 신분·생업 등에 관하여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다. |
저자 및 기록연대 |
■ 저자 오바댜는 남왕국의 유다에 살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친척 관계나 부친에 관한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왕족이나 제사장 계열의 신분은 아닌 듯하다. 오바댜에 관하여 '하나님의 암시를 받은 선지자'라는 사실 이외에 다른 것을 밝혀내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 저작 연대 여호람이 유다를 통치하던(B.C. 848-841)중, 블레셋과 아라비아가 예루살렘을 침공했던 시기에(대하 21:16-17) 기록되었다. |
배경 및 주제 |
■ 역사적 배경 오바댜에는 왕의 이름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는다. 따라서 11-14절에 언급된 예루살렘 함락 시기를 역사적 배경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 사건의 시기를 확정하기는 어렵다. 구약 시대에 있었던 예루살렘의 침략에 관한 기사가 성경에 4회 기록되어 있다. (1) B.C. 926년 여로보암 Ⅰ세의 치세 중, 애굽 시삭의 침공(왕상 14:25-26). (2) 여호람의 통치 중(B.C. 848-841), 블레셋과 아라비아 인들의 침공(대하 21:16-17). (3) 아마샤 치세 중(B.C. 790), 북왕조 이스라엘 여호아하스의 침공(왕하 14:13-14). (4) B.C. 586년 바벨론의 느부갓네살의 침공(왕하24, 25장). 이 중 (2), (4)의 시기와 오바댜의 내용을 관련시킬 수 있는데, (4)의 시기를 택하는 것은 부적당하다. 왜냐하면 바벨론 침공 시에는 예루살렘을 얻기 위해 제비를 뽑지 않았기 때문이다(비교. 1:11). 그러므로 그 시기를 여호람의 통치 시기(B.C. 841)로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 견해를 19세기와 20세기 초의 많은 복음주의 학자들이 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오바댜는 엘리사와 동시대 사람으로 생각되며, 요엘보다 더 이른 시대에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중심 사상 오바댜의 예언 내용은 매우 간결하고 짧은 에돔 족속에 대한 한정된 심판처럼 보이나, 담겨 있는 의미는 심오하다. 하나님의 백성 유다에게 행한 에돔의 교만하고 악한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전 우주적인 심판으로 확대된다(15, 16절).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복,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을 묘사하고 있다. "오바댜 예언의 핵심적인 내용은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과 이스라엘의 회복이다."(Hengstenberg)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에돔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교만하고 악한 이방인의 태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비교. 욜 3:19). 그러나 오바댜의 예언이 전적으로 미래의 예언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므로, 역사 가운데서 에돔의 행위와 태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예루살렘이 함락된 것은 하나님의 백성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다. 이 징계에 대한 이방인의 행동은 정당화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온 우주의 심판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는 유다에 대해 방관하고 악한 행동을 가하는 그 자체 또한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을 요소가 되는 것이다. 남은 자가 땅을 회복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갱신이다. |
내용분해 |
1. 에돔에 대한 심판(1:1-9) 2. 에돔의 죄악(1:10-14) 3. 주의 날(1:15-21) |
서론 일람 |
1. 기록자 : 오바댜 2. 기록연대 : 오바댜는 예루살렘이 침공을 받았던 어느 시기에 기록된 것이다. 만약 예루살렘성이 블레셋과 아랍인들에 의해서 침공받았던 때에 이 책이 기록되었다면 그 시기는 대략 B.C. 848-840년 정도가 될 것이다. 3. 기록장소 : 유다 4. 기록대상 : 에돔 족속 5. 핵심어 및 내용 : 오바댜의 핵심어는 "교만"과 "형제"이다. 세일산 가운데 요새화된 성에서 안전하게 살았던 에도 족속은 교만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과 한 핏줄을 나눈 이스라엘 민족을 멸시했고 그들에게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그의 형제를 동정과 사랑으로 돌보게 해주는 참 자부심은 주님 안에 있을 때에만 갖게 된다. |
에돔의 운명 (오바댜 1:1-9)
이 예언이 겨냥하는 민족은 에돔이며 혹자는 이것이 조만간 거꾸러질 이스라엘의 모든 대적을 상징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랍비들은 에돔을 로마로 이해한다. 그들은 에돔이 기독교적 로마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석하여 로마에 대해 화해할 수 없는 앙심을 품는다. 그러나 만일 이것을 반기독교적 로마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본문 말씀이 아주 잘 들어맞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에돔은 이전에
여호사밧에게 굴복했듯 마카비 시대에도 굴욕을 당했다. 그러나 여기에 예언된 에돔의 멸망은 그들의
조상에서의 배척과 마찬가지로 상징적인 것처럼 보이며 멀리 복음 교회에 대적하는 자들의 멸망을
가리키는 것 같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모든 대적은 그와 같이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호와의 칼이 이두메아 위에 임함을 읽었는데(사 34:5) 이것은 하나님이 시온과의 송사를 위해
복수하실 큰 날을 의미한다(사 34:8). 이스라엘 백성은 사랑받은 야곱의 자손이고 에돔은 미움받은
에서의 후손이었다. 그런데 이스라엘인은 환난을 당하였고 에돔인은 형통하며 고생하는 이스라엘인을
보고 기뻐하였다. 혹자가 잘 관찰했듯 이런 것을 본 이스라엘 백성은 큰 시험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에돔의 전체적 최종적 멸망을 조망시키며 이스라엘의 징계의 복된
결과를 전망시키신다. 우리는 여기서 다음 사실을 관찰할 수 있다.
Ⅰ. 에돔에 대한 선전 포고(1절). "우리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소문 또는 명령을
들었다. 그는 명령을 하달하셨다. 무릇 그의 백성에게 화를 입히는 자는 정녕 화를 자초하게
되리라는 것이 그의 작전이요 명령이다. 그 명령을 번복할 수도 없고 거역할 수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기의 거룩한 거소로부터 일어나 심판할 보좌를 예비하고 계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리고 사자는 열국 중에 보내심을 받았다. "이것은 사자라기보다 오히려 전령이다. 즉 열국에
경보를 전달할 섭리의 사자나 일꾼이다. 또는 이것은 각국에 무거운 경고를 내린 여호와의
선지자이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자들은 서로 외치기를 "너희는 일어나라. 분기하라. 우리가
일어나 에돔으로 더불어 싸우자" 라고 한다. 이와 같이 느부갓네살 휘하의 동맹군도 서로 격려하여
분발시켜 그 나라를 공격하게 한다. "너희는 모여 와서 그를 치며 일어나서 싸우라" (렘 49:14).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의 대적 사이에 유혈극을 벌일 일이 있으실 때는 적격자를 찾아 내셔서 그
마음과 손으로 그 일을 실행할 수 있게 하실 것이다.
Ⅱ. 승전의 예고. 에돔은 반드시 정복당하고 약탈당하며 무너질 것이다. 왜냐하면 에돔이 신뢰하던
모든 것이 그를 낭패시키며 그에게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모든 자도 이와 같이 신뢰하던 것에서 실망을 맛볼 것이다.
1. 그들은 열방 중에 나타낸 자기들의 위엄과 영향력과 세력을 의지하는가? 그런 것들은 감소되고
하락할 것이다(2절). "보라. 내가 너를 열국 중에서 미약하게 하였느니라. 그래서 네 이웃
나라들은 네 우호를 구하거나 너와의 동맹을 청하지 않으리라. 너는 열국 중에서 얼빠지고 충실치
못한 민족으로 크게 멸시를 받으며 업신여김을 당하리라." 그리고 이렇게 하여 "네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3절). 다음 사실을 주목하자.
(2) 제 스스로 좋게 생각하는 자는 남도 자기를 좋게 생각할 것이라고 상상하기 쉽다. 그러나 그가
남들을 시험해 보게 되면 자기 생각이 오류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들의 교만은
그들을 속이며 그렇게 해서 그들을 죽인다.
(2) 하나님께서는 스스로를 크다 하며 높이는 자를 쉽사리 낮추실 수 있으시며 낮추는 방법도
찾아내실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기 때문이다(벧전 5:5). 한 때 매우 크게
보이며 큰 애호와 칭송을 받던 자들이 미약해지며 크게 멸시받는 일은 왕왕 볼 수 있는 일이다.
2. 그들은 천연이든 인공이든 제 나라의 견고한 요새를 의지하며 그로 인한 이점을 자랑하는가?
그러한 것들도 그들을 기만할 것이다. 그들은 독수리처럼 바위틈에 거했고 그들의 거소는 높았다.
그들은 자기 이웃보다 높은 데 살았다. 이것은 그들의 자랑거리였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외적에
대비하여 견고한 데 살았다. 이것은 그들의 안전을 보장해 주었다. 그들의 거소는 너무도 높아서
위험해서 접근하지 못할 정도였다. 다음 사실을 관찰하자.
(1) 에돔이 중심의 교만으로 하는 말은 무엇인가?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그는 제
힘만 믿고 하나님의 심판을 무시하며 마치 전능자의 능력도 자기를 이길 수 없다는 듯이 말한다.
그는 자기의 모든 대적 심지어 하나님조차 멸시하며 무시한다(시 10:5). 그들의 조상에서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권리를 팔았다. 그런데도 그들은 마치 존귀와 능력의 영광이 자기들에게
속해 있는 듯이 스스로를 높인다. 제 특권을 상실해 놓고도 그것을 자랑하는 자들은 많다.
에돔은 높고 자고하므로 자기를 능히 끌어내릴 자가 아무도 없다고 상상한다. 세상적 안전감에
사로잡히는 것은 죄다. 권세와 번영의 절정에서 뽐내는 자들은 이 죄에 빠지기가 아주 쉬우며
이 죄는 다른 어느 것에 못지 않게 인간의 파멸을 많이 성숙시키며 또 파멸이 임할 때 그
멸망을 더욱 심하게 만든다.
(2) 이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것인가?(4절) 인간이 만약 전능자에게 감히 도전한다면
그들의 도전은 받아들여질 것이다. 에돔은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고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내가 끌어내리겠노라. 높이 솟아오르며 높은 데 집짓고 사는 독수리와
같이 네가 높이 오르며 독수리의 비상보다 더 아니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그것은 네 자신의
공상에 불과하며)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예레미야 49장 15,
16절에도 나왔다. 죄인들은 자기들의 자랑거리가 무너지며 신뢰하던 것이 그들의 기대를
무너뜨릴 때 반드시 자기의 교만과 안전감을 부끄러워하게 될 것이다.
3. 그들은 재산과 보물을 의지하는가? 풍부한 재력은 전쟁군자금으로 중시된다. 돈이 그들의
방패이며 견고한 성인가? 그것은 그들의 생각에만 그럴 뿐이다. 왜냐하면 재물은 그들을 보호해
주기는커녕 도리어 그들을 위험에 내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재물은 대적을 꾀어 들일 것이며
그들은 재물로 인하여 대적의 먹이가 될 것이다(5, 6절). 우리는 이와 비슷한 취지의 말씀을
앞에서도 읽었다(렘 49:9, 10 참조). 여기에서는 "네가 어찌 그리 망하였는고!" 라는 표현이 더
삽입되었을 뿐이다. 이것은 "너와 네 모든 물건이 어찌 그리 없어졌는고!" 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선지자는 에돔의 번영이 단절되리라는 것을 예언하면서 슬퍼하고 있다. "너는 어찌 그리
엎드러졌으며 네 몰락은 어찌 그리 큰고! 너는 어찌 그리 마비되었는고! (갈대아어 판은 그렇게
되어 있다)" 이것은 그들이 파멸의 심판 아래서도 마치 그것이 보통 치는 것에 지나지 않는 듯이
무감각함을 한탄하는 표현이다. 선지자는 이것이 보통 재난이 아니라 전적인 파멸임을 증명한다.
(1) 재물을 도둑맞고 많은 것 가운데서 일부를 잃는 것은 보통 흔히 있는 재난이다. 그들에게는
도적이 이르며(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는 때문이다), 강도가 밤 중에 와서 그 마음에
만족할 때까지만 훔친다. 그들은 필요한 만큼, 마음에 둔 것만 취해 간다. 그들은 가져갈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 이상은 가져가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재화 중에서 잃는 것은 별로 없다.
과수원이나 포도원을 터는 자들도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만큼만 가져가고 얼마쯤은 남긴다.
도적은 주인을 위해 얼마의 과실은 남기며 주인은 자기 손실을 쉽사리 참고 곧 보충할 것이다.
(2) 그러나 애돔인의 경우는 이와 다를 것이다. 그들의 재산은 남김없이 탈취당할 것이며
파멸시키는 군대의 손을 피할 것은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극히 귀하고 중한 것도 예외가 아닐
것이다(6절). "에서가 어찌 그리 수탐되었는고! 에서의 것들은 어찌 그리되었는고! 그가 마음을
기울이며 자기 행복으로 삼던 물건들, 그의 좋은 물건들, 그의 가장 좋은 물건들, 그토록 주의
깊게 비장하고 감추었던 보물들이 어찌 적군에게 탐색되어 탈취되었는가! 그의 숨긴 보물들이
어찌하여 약탈되며 수색되며 수탐되었는가! 여러 해 동안 햇볕을 보지 못한 채 수장되었던
것들이 이제 적군에게 약탈되고 있다." 땅 위의 보물은 도적이 뚫고 들어와 훔쳐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아무리 굳게 잠가 두며 아무리 교묘하게 감추더라도 안전하게 보존할 수 없다는 데
주목하자.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위해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은 슬기로운 처사이다.
4. 그들은 인근 유력 국가와의 동맹을 의지하는가? 그러나 그 동맹국 역시 너를 낭패시킬 것이다
7절). "너는 사람들과 약조하였다. 너는 암몬인과 모압인을 동맹으로 삼았다. 너는 다른
강대국과도 화목하였다. 그들은 너와 공격 및 방위 조약을 맺었고 너를 해치지 않겠다는 것을
엄숙히 약조했을 뿐만 아니라 네게 온갖 도움을 주겠다는 것도 서약하였다. 그들은 네 식물을
먹었고 관대한 대접과 향응을 받았으며 너를 의지하며 생활하였다. 그들의 군대는 네 나라에
자유로이 주둔하여 병영을 설치했으며 네 원군으로서 대가를 지불받았다. 그들은 다 네 땅의
경계까지 너를 호송하며 네 사신들에게 매우 정중하였고 귀로에는 자기들 나라 변경까지 네
사실을 매우 정중하였고 귀로에는 자기들이 군대로써 기꺼이 너를 도우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네가 침략군을 맞아 싸우려고 할 때 너와 함께 지경까지 이르렀다."
(1) "그러나 그들은 너를 속였다. 그들은 네가 극도의 곤경에 처했을 때 등을 돌려 퇴각했고
도주했다. 그들은 지친 나그네를 실망시키는 상한 갈대와 같았다. 그들은 목마른 길손을
절아시키는 메마른 여름 시내로 판명되었다. 그들은 그 어떤 무게에도 견디지 못하며 위안을
주지 못한다."
(2) "아니, 그들은 너를 이겼다. 그들은 네게 너무 억센 상대였다. 그들은 네게 사기 약조를
하였고 기만으로 너를 파멸시키며 위험으로 몰아넣고 네 대적의 밥이 되게 하였다." 육체로
자기 팔을 삼는 자들은 그 팔로 자기를 대적하게 하는 자들이라는 데 주목하자. 그러나 이것이
다는 아니다.
(3) "그들은 네 아래 상처(흠정역)를 베풀었다. 즉 그들은 네 아래 지주가 될 것을 베풀었다.
그래서 네게 뒷받침이 되게 하며 의지할 기초가 되게 하며 쉴 수 있는 베개가 되게 한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너를 다치게 하는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그것은 네게 가시 같을 뿐만 아니라 칼
같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아래에 자기의 권능을, 팔과 사랑의 팔을 괴어 주신다면 그것은
견고하고 편안하게 할 것이다. 우리 언약의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우리를 속이지 않으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약조한 자들을 의지하며 그들이 우리 아래 베풀어 주는 것을 신뢰한다면 그것은
상처와 수치로 판명될 것이다. 그리고 자기를 이렇게 계략으로 속이는 자들을 믿고 의지한
에돔에 대해 공정한 비평이 내려지고 있다. "네 마음에 지각이 없음이로다." 그렇지 않다면
그는 자기를 배신할 수 없게 했을 것이다. 창조주를 믿고 의지하라는 권면을 받으면서도
피조물을 신뢰하여 자신을 기만하는 자들은 자기가 지각이 없다는 것을 증명한다. 이 점을
명심하자.
5. 그들은 모사들의 계략을 신뢰하는가? 그런 자들도 그들을 낭패시킬 것이다(8절). 에돔은
대정객들로 유명하였다. 그들은 학식과 경험이 많은 자로서 권좌에 앉아서 온갖 통치술에
통달했다고 무릇 조약을 맺을 때면 인방의 모사들보다 탁월한 지모를 나타내곤 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 모사들이 우매자가 되었다. 지혜자들을 그렇게 만드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 날에
내가 에돔에서 지혜있는 자를 멸하지 않겠느냐? 일반 다른 사람들과 같이 그들은 칼에 쓰러질
것이며(시 49:10)" 지혜도 그들을 안전하게 지키지 못할 것이다. 또 지혜자로서도 그들은 그 모든
계교에서 멍청할 것이다. 그들이 온갖 머리를 다 짜서 세운 계획도 수포로 돌아갈 것이며 그들의
계책은 실패할 것이다. 그들이 자기 자신과 국민의 이익을 확립시켜 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계획 때문에 양자는 다 멸망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데만이 다시는 지혜가 없게 되었다(렘
49:7). 다음을 주목하자.
(1) 이것은 육신의 팔을 의지한 그들의 어리석음에 대한 공정한 벌이다. 그들의 마음에는 지각이
없다. 그들은 살아계신 하나님, 진실무망하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연약하며 변덕스러우며
거짓된 인간을 신뢰할 정도로 지각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지각을 멸하실
것이다. 죄의 길을 피하는 데 자기 지각을 사용하려 들지 않는 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지각을
허락하지 않으셔서 그들로 위험의 길을 피하지 못하게 하셔 마땅하다는 데 유념하자.
어리석으려고 하는 자는 계속 어리석게 두라.
(2) 그것은 파멸의 전조였다. 하나님께서 모사들로 하여금 국가의 평화에 속한 일들을 보지
못하도록 하실 때 그 나라의 파멸은 확정된다. Quos Deus vult perdere, eos dementat-즉
하나님께서는 말하기로 작정하신 자들을 어리석게 만드신다(욥 12:17 참조).
6. 그들은 자기 군대의 힘과 용기를 의지하는가? 그들은 강건할 뿐만 아니라 용맹한 자들이기도 해서
원수를 대적할 수 있고 제 자리를 고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형편이 다르다. "드만아, 네
용사들이 놀랄 것이다. 그들의 용기는 떨어질 것이며 이로 인해 에서의 산의 거민이 살륙을
당하여 다 멸절되며 하나도 피하지 못하리라" (9절). 용사가 놀라며 전쟁에 질 뿐만 아니라
목숨까지도 잃게 될 때는 약하고 비무장한 자들이야 물론 멸망자의 수중에 떨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들은 낙심하는 수밖에 없다. "백향목이 흔들리면 잣나무가 어찌 슬피 부르짖지 않겠는
!" 강한 자의 죽음이나 화해는 왕왕 다수의 죽음이나 멸망으로 판명된다는 데 주목하자. 우리가
만일 전능하신 하나님을 우리 편으로 삼지 않는다면 우리 자신의 보호를 위해 용사를 의지해 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 하물며 전능하신 하나님을 대적으로 삼는 경우에랴!
에돔의 죄 (오바댜 1:10-16)
우리가 에돔의 운명이 전적인 멸망에 붙여졌다는 것을 읽었을 때 "그는 어떤 악을 행했기에 이런
심판을 받는가?" 하고 묻을 것이 당연하다. 하나님이 에돔과 다투시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것은 두
말할 필요도 없이 에돔에는 잘못이 많았던 때문이다. 그들은 범죄한 백성이요 허물진 민족이었다(사
1:4). 그러나 그들이 책망받는 죄는 단 한 가지이다. 이것은 그들의 죄의 양을 채우며 이 파멸을
초래시킨 죄였다. 그 죄 때문에 그들이 여기서 기소되며 유죄 선고를 받으며 정죄된다. 그 죄는 곧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피해를 입혔다는 것이다(10절). "그것은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
때문이며 네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해 품은 옛날의 유전적 원한을 인하여 너는 이 모든 수욕을 입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인간에게 대한 가해는 하나님께 대한 모욕이라는 것을 잊지 말자. 하나님은
의로운 신이시며 의를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신이시다. 그는 온 세상의 심판관으로서 억울한 일을
당하는 자에게 신원해 주시고 억울케 하는 자에게는 복수하실 것이다. 모든 포학, 모든 폭력은 전부
불의이며 죄이다. 그러나 다음 두 대상에게 행한 횡포일 경우에는 그 포학을 크게 악화시킨다.
1. 동족에게 대한 포학. "그것은 네 형제에게 행한" 포학이다. 그는 네게 가까운 피붙이다. 너는
그의 속량자(go l)가 되어야 할 신분이다. 남이 그에게 나쁜 일을 행하면 그것을 시정해 주는
것이 네 의무이다. 그런데 네 자신이 직접 그에게 괴로움을 주다니 얼마나 악한 일인가! 너는 네
어미의 아들을 비방하며 모욕한다. 이것은 심히 악한 죄이다(시 50:20).
2. 하나님의 백성에게 행한 포학이라면 더욱 더 악하다. "네가 포학하게 행한 자는 하나님과 언약을
세운 네 형제 야곱이다. 그는 하나님께 친근한 자이다. 너는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그를
미워했고 또 하나님의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를 증오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주장에 동조하시며
질투로 그의 일을 옹호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일에 관여하기를 아주 기뻐하시며 그에게 대한
포학을 자신이 당하는 포학으로 간주하신다. 무릇 야곱을 범하는 자는 야곱의 하나님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다(슥 2:8)." 그래서 이 포학은 crimen loesoe majestatis-즉 대역죄이며 이 죄에
대해 에돔은 치욕적인 형벌을 각오해야 한다. "이로 인해 너는 파멸시키는 수욕을 입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다음에는 보다 세부적 사항이 언급된다.
Ⅰ. 에돔이 그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은 어떤 것이며 이 책망의 증거는 무엇인가! 에돔인이
이스라엘을 침략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이것은 침략할 의사가 없어서라기보다 힘이
모자라서였을 것이다. 그들은 침략을 행하고도 남음이 있을 만한 악의를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러나 여기서 그들의 책망 내용이 되는 것은 유다와
예루사렘에게 대한 그들의 야만적 행위이다. 유다와 예루살렘은 곤고한 중에 있었고 멸망 직전에
있었다. 이것은 아마 갈대아인에게 멸망당하려 할 때거나 아니면 유대인이 재난을 당하던 다른
경우일 것이다. 그 때 그들은 유다와 예루살렘에 대해 야만적인 태도를 나타냈던 것이다. 유다에
대한 그들의 성미는 늘 그랬던 것처럼 보인다. 에돔인에게 대한 비난은 이외에도 있다(겔 25:12).
예루살렘의 날에 그들은 "훼파하라, 훼파하라" (시 137:7)고 말했다. 여기에서는 그들이 행하지
말아야 했던 것들을 언급함으로써 그들의 잘못을 말해 주고 있다(12-14절). "네가 방관할 것이
아니며 네가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 너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되었다. 그러나 너는
이러이러하게 행했다." 우리 자신을 반성하는 가운데 우리가 행했어야 하는 일과 행한 일을 비교해
보며 행위와 규칙을 비교해 보는 것은 유익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어디에서 그릇되게
행했는지를 밝힐 수 있으며 행하지 말았어야 할 일들을 행하였구나 하는 것도 알 수 있다. 우리는
모모한 때에 어느곳을 갔었는데 그런 곳에는 가지 말아야 옳았다. 우리는 이러이러한 자들과
어울리지 말아야 했으며 이러저런 말은 하지 않아야 했다. 이와 같이 죄를 계명의 거울에 비춰
보면 그것은 심히 악하게 나타날 것이다. 다음 사실을 살펴보자.
1. 에돔인이 이처럼 야비하게 행동하며 모욕하던 때 유다와 예루살렘의 처지는 어떠했는가!
(1) 그것은 유다와 예루살렘이 환난을 당하는 날이었다(12절). 그것은 고난의 날이었다(13절). 이
말은 세 번씩이나 나온다. 이스라엘인에게 그 날이 환난과 재난의 날이었을 때 에돔인에게는 그
날이 변영과 평강의 날이었다. 왜냐하면 심판은 흔히 하나님의 집에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방 사람이 방임될 때 자녀는 징계된다.
(2) 그 날은 그들의 패망의 날이었다. 성읍과 농촌이 다 황폐하며 폐허로 화하는 때였다.
(3) 그 날은 외국인이 예루살렘 성문에 들어가는 날이었다. 오랜 포위 끝에 성은 붕괴되고 바벨론
군대의 대장들이 입성하여 그 땅의 유사처럼 성문에 좌정한 때였다. 그 때 군인들은
로마병정들이 그리스도의 의복을 나누듯 예루살렘의 전리품을 제비뽑았다. 그들은 정복자로서
땅도 제비로 나누었다. 또는 그들은 공격 시기와 장소를 결정하기 위해 제비를 뽑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4) 그 날은 이방인이 "그의 군대" 를 포로로 끌어가던 날(흠정역, 11절)이었다. 그들은 병사들을
사로잡아 포로로 끌어가며 빈궁과 수치 가운데 본국으로 데리고 갔거나 포로가 너무 많아 마치
군대와 같았을 것이다.
(5) "그 날은 오래도록 데 땅에서 편안히 쉬던 네 형제가 낯선 땅에 유형된 이방인같이 된
날이었다." 유대인의 처지가 이처럼 흉하고 슬펐을 때 그 이웃이요 형제인 에돔인은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며 위로해야 했고 그 다음에는 자기들 차례가 돌아 오리라는 것을
생각하고 떨어야 했다. 푸른 나무에게 이같이 하였으면 마른 나무리요?
2. 그러나 유대인이 이런 곤경에 처했을 때 에돔인의 태도는 어떠했는지 보라. 그들이 여기서
정죄받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다.
(1)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당하는 고난을 기쁘게 바라보았다. 그들은 멀리 서 있었다. 그들은
고난받는 이웃을 구조하러 왔어야 할 때 건너편에 서서 그들과 그날을 수수방관했고 그들의
환난을 무관심하게 바라보았다. 그들은 상처 입은 사람을 보고도 멀리 피해 지나가던
레위인이나 제사장 같았다(눅 10:33). 능동적으로 구조할 능력이 있으면서 자기 이웃의
어려움과 고난을 할 일없이 방관만 하는 자는 보상해야 할 것이 매우 많은 자이다. 그러나
그들의 태도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들은 유다의 고난을 멸시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것
만족과 흔연의 시선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환난을 보고 웃으면서 "아, 고소하다" 하고
말했다. 그들은 예루살렘이 파멸당하는 처참한 광경을 실컷 바라보았고 그 일을 오래도록
갈망하고 소원하던 자처럼 바라보았다. 우리는 형제의 고난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지
스스로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우리가 동정과 친절의 은혜로운 눈길로 바라볼 수
없다면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더 낫다. "너는 네 형제의 날에 했듯 방관해서는 안 된다."
(2) 그들은 유다와 예루살렘을 보고 기뻐하며 모욕하고 슬픔 중에 있는 형제를 비난하며 다른
자들을 동반해서 기뻐하였다. 그들은 유다 자손의 패망하는 날에 기뻐하였다. 그들은 유다의
멸망을 기뻐하면서 그 즐거움을 감추거나 숨길 만한 예의도 갖추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은
공공연하게 선언하며 무례하고 교만하게 공언했다. 그들은 기뻐하며 환성을 올리며 큰 소리로
웃으면서 그들을 짓밟았다. 재난의 날에 있는 자 특히 고난 당하는 참 이스라엘인에 대해
기뻐할 수 있는 자는 에돔인의 심성을 지닌 자이다.
(3) 그들은 교만하게 말했다(원뜻은 "입을 크게 벌렸다" 이다). 그들은 고난받는 이스라엘인을
크게 멸시하면서 말했고 에돔의 현재의 번영과 안전에 대해 거만한 투로 말했다. 현재의 상이한
형편에서 추리해 보면 형세가 역전되어 에서는 하늘의 총애와 사랑을 받고 야곱은 미움과
배척을 받았다는 것이 역연하다는 듯이 그들은 말했다. 다른 자들의 낮춤과 굴욕에 의해
스스로를 올리며 뽐내게 되는 자는 이런 저런 방법에 의해 효과적으로 낮춤을 당하고 굴욕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 된다.
(4) 그들은 한수 더 떠서 하나님의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그 성문에 들어가 그들의 재물에
손을 대었다. 그들은 정복자를 돕지는 않았을지라도 약탈자는 도왔던 것이다. 그들은 노략물을
얻는 데는 가담했다(13절). 예루살렘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 때 그들은 그리로 들어갔다.
재물이 사방에 널려 있었고 그들은 없어지게 놔두느니 취하는 게 낫다는 변명을 하면서 재물을
노략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자기들의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예루살렘을 황폐시킨 것은
바벨론이나 에돔은 약탈에 가담함으로써 pariceps crimins-즉 범죄의 가담자가 되었고 그들은
ex post facto -즉 사건 후 공범자로 간주될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당하는 파멸을 기화로
부유해지려고 생각하는 자들은 자신을 가난하게 할 뿐이라는 데 주목하자. 재난의 날에 손 댈
수 있는 것이면 무엇이나 자기들의 재산이라고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은 자기를 기만하는
자들이다.
(5) 뿐만 아니라 그들은 더욱 악한 일을 행하였다. 그들은 자기 형제가 환난을 당하는 날에 그들을
강탈할 뿐 아니라 살해하기까지 했다. 그들의 재물에 손을 댈 뿐만 아니라 사람에게도 손을
댔던 것이다(14절). 갈대아인의 호기로운 칼이 유대인 사이에서 난무하며 유혈극을 연출하고
있을 때 피해 도주한 자도 많았다. 또 상당수의 사람들은 구명도생할 수가 있었는데 야비하게도
에돔인들이 그들을 "가로막으며 사거리에 섰다." 사거리는 여러 갈래의 길이 만나는 곳이어서
어느 쪽으로 가든 추격자의 맹렬한 분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런데 에돔인들은 거기를
가로막고 서 있었던 것이다. 일부 겁약한 자들은 에돔인이 직접 무자비하게 죽여 버렸고 다른
자들은 잡아서 추격군에게 넘겨 버렸다. 이것은 단지 정복자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였다.
그들은 이렇게 잔혹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생사가 자기들 손에 달린 자들 더구나 자기들에게
해를 끼친 적도 없고 또 가해할 기미라곤 전혀 보이지 않는 자들에게 이토록 잔인하였다.
보호하기에는 절호의 기회라고 할 수 있는 때에 그들은 그 피난자들을 배신하였다. 악인의
온정과 자비란 이렇다. 누구든지 이것을 읽으면 그토록 학대받는 자들에 대해 동정을 금할 수
없다. 즉 원수의 칼을 피해 도망하면서 위험을 가까스로 벗어났다고 생각한 유대인들이 전혀
위험을 예상치 않던 이웃의 배신적 칼에 엎드러졌기 때문이다. 또 동정해 마땅한 대상에게
잔혹한 칼날을 휘두를 정도로 간성을 완전히 상실한자들에 대해서는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
(6) 이 모든 일로 그들은 이스라엘의 공적 경건한 백성의 박해자와 합세하였다.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다." 그들은 주범과 동등한 죄가 있는 종범이었다. 행악자에게 가담하여 악행을
방조하고 교사하는 자는 행악자의 한 사람같이 간주되며 셈을 치르게 될 것이다.
Ⅱ. 이런 포학을 인하여 그들이 입을 수욕은 어떤 것인가?
1. 그들은 잔 곧 떨림의 잔이 돌아온다는 것을 조만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과 동일한 상황에 놓이게 될 때에는 자기들의 행위를 기억하고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르게 될 것이다(15절). 여호와의 날이 만국에 가까이 왔다. 그 날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교회를 괴롭히던 자들에게 환난으로 보상하실 것이다. 심판이 하나님의 집에서 시작되더라도
거기서 끝나지는 않을 것이다. 이것은 타인의 불행을 기뻐하는 자들에게 효과적인 방지책이 된다.
우리는 그들의 형편이 언제 우리 처지로 바뀔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백성에게 대한 적의와 가해는 그들 자신의 가슴에 보상될 것이다. "너의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이다." 의로우신 하나님께서는 그 행위대로 열국과 각 개인에게 갚으실 것이다. 왕왕
형벌은 죄에 꼭 그대로 부응하며 날을 학대한 자들은 꼭 그대로 학대받을 것이다. 공의로우시고
질투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학대한 자들에게 복수할 시기와 방법을 찾으실 것이다.
너희가 내 성산에서 마신 것같이 만국인도 마시리라" (16절). 하나님의 거룩한 산에 거하는 그의
백성이 환난의 잔을 흠뻑 마셨듯이 (거룩한 산에 있어도 환난을 면하지 못했지만) 만국인도 제
차례가 되면 마찬가지의 쓴 잔을 들이키게 될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성에 재앙을 내리신다면 그의 이름을 알지 못한 성읍들이 어찌 형벌을 면할 것인가?(렘 25:29)
그리고 그것은 에돔의 형벌의 일부이다(렘 49:12). "이 잔을 마시지 않을 자 즉 형벌의 면제를
기대할 만한 자들도 확실히 마셨는데 하나님의 진노의 세대인 에돔이 형벌을 온전히 면하겠느냐?
아니다. 너는 반드시 그 잔을 마시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비틀걸음 치게 하는 떨림의 잔을
자기 백성의 손에서 거두어 자기 백성을 곤고케 하는 자의 손에 주실 것이다(사 51:22, 23). 아니,
그들은 환난 날의 자기 형편이 이스라엘의 고난당하던 때보다 더 심할 것으로 각오해야 한다. 그
이유는 다음 세 가지이다.
(1) 하나님의 백성이 당하는 고난은 일시적이며 순식간에 끝이 나지만 그들의 대적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끊임없이 마시게 된다(계 14:10).
(2) 그 잔에 남은 찌꺼기는 땅의 악인을 위해 예비되어 있다(시 75:8). 그들은 그것을 마시고 삼킬
것이다. 또는 그것을 빨아 먹을 것이다. 그래서 밑바닥까지 다 마셔 버릴 것이다.
(3) 하나님의 백성은 놀람의 포도주를 일순간 마시게 되는 수도 있지만 (시 60:3) 곧 회복하며
다시 제 정신이 돌아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방인은 마셔서 본래 없던 것같이 될 것이다.
거기에는 그들의 흔적도 기억도 없을 것이며 그들은 완전히 멸절당하며 뿌리째 뽑힐 것이다. 오!
주 여호와여! 주의 대적들로 모두 망하게 하소서. 그들이 돌이키지 않는다면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이스라엘과 유다에 대한 약속 (오바댜 1:17-21)
교회의 대적들의 멸망이 앞에서 경고되었는데 이것은 저 큰 보상의 날에 완전히 성취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심판을 위해 이 세상에 한 번 오셨으며 또 다시 오실 것이다. 교회 대적의 멸망이
경고된 뒤 여기에는 교회의 구원에 대한 귀중한 약속이 잇달아 나온다. 본 예언서는 요엘이나 아모스의
예언과 아모스의 예언과 마찬가지로 구원의 약속으로 끝맺고 있다. 에돔인은 유대인의 포로 상태가
영원히 지속하기라도 하는 듯이 득의만만했었다. 그러나 이 약속은 바벨론 포로가 귀환함으로써
부분적인 성취를 보았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 약속은 의심할 나위도 없이 예수 그리스도께 의해
이룩될 저 큰 구원에서 완전히 성취될 터였고 모든 선지자들은 이것을 증언한 것이다. 여기에서
약속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Ⅰ. "시온 산에는 구원이 있을 것이다" (흠정역). 산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기름부음받은 왕을 세우시는
거룩한 산이다(시 2:6). "시온 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라" (17절). 성산에 남은 이스라엘인은
구원받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말미암는다고 말씀하셨다(요 4:22).
하나님께서 유대인을 위해 구원을 베푸셨고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는 우리의 구속을 상징했다.
그러나 시온산은 복음 교회이며 저기서는 신약 율법이 나왔다(사 2:3). 그 산에서는 구원이
선포되며 간구될 것이다. 복음교회에는 구원을 받을 자가 가세될 것이다. 계속해서 멀리 서있는
자들이 파멸을 당하도록 방임될 동안, 믿음과 소망으로 이 시온 산에 나아오는 자에게는 구원이
베풀어질 것이며 그것은 진노와 저주로부터의 구원이며 죄와 사망과 음부로부터의 구원이다.
Ⅱ. 구원이 있는 곳에는 이를 위한 성화가 있을 것이다. "그 산은 거룩할 것이다." 이것은 시온은
자녀들에게 이 구원을 예배시키며 그들을 구원의 적격자로 만들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주려고 예정하시는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기 때문이다. 현세적 구원이 자비 속에서 참으로
베풀어지는 때는 그 구원에 성결함이 있는 때이며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감사함으로 그 구원을
기꺼이 받아들일 마음이 생겨 나는 때이다. 우리가 성화될 때 구원도 성화된다. 거룩함은 그
자체가 큰 구원이며 우리가 바라는 영원한 구원의 보증이다. 그 산 즉 복음교회의 시온 산은
거룩할 것이다. 왜냐하면 거룩함은 하나님의 영원한 집에 합당하며 복음의 위대한 목적과 은혜는
거룩함을 심고 진작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산에는 거룩한 법도와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거룩한 영혼의 택함받은 남은 자들이 있을 것이다. 거룩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거룩한 영혼의
택함받은 남은 자들이 있을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들 중에 거하시기를 기뻐할 것이다.
거룩함이 있는 곳에 구원이 있을 것이라는 점을 유의하자.
Ⅲ. 이 구원과 거룩함은 세상에 퍼질 것이며 이길 것이며 토대를 구축할 것이다. 야곱 족속(원의:집)
곧 시온산은 거기에서 베풀어지는 구원과 거룩함과 함께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다. 즉 복음 교회가
열국 중에 세워질 것이며 땅을 채우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사도들은 전도에 의해 사람들의
마음을 획득하며 기업으로 삼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사자요 사역자들이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위해 사람들의 마음을 소유하게 될 때 사람들의 기업도 누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주께 자기 자신까지도 헌신하는 자들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주께 바칠 것이기
때문이다. 루디아의 마음이 그리스도께로 열렸을 때 그의 집은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에게
개방되었던 것이다. 열방이 구원을 받아 제자가 되며 여호와의 빛 가운데로 다니며 그들의 영광과
존귀를 새 예루살렘에 가지고 들어 왔을 때(계 21:24)는 야곱 족속이 자기 기업을 누렸다. 이것은
기독교가 세상에 수립될 때 부분적인 성취를 보았으며 사탄의 위가 있는 곳에 그리스도의 보좌가
설치되고 사탄 왕국의 폐허 위에 그리스도의 승리의 전리품이 쌓일 때는 더욱 더 성취를 볼 것이다.
이제 다음과 같은 것이 예고되고 있다.
1. 야곱의 기업은 획득되며 그에 대한 반대는 진압될 것이다(18절). "야곱 족속은 불이 될 것이요,
요셉 족속은 불꽃이 될 것이다." 이는 그들의 하나님이 현재나 장차나 소멸하시는 불이시기
때문이다. 에서의 집(족속)은 초개가 될 것이다. 그것은 이 불에 쉽사리 삼키며 소멸될 것이다.
(1) 이것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무수한 자들이 회심하는 데서 성취된다. 야곱과 요셉의
집에서 선포되고 인정받고 고백된 복음은 불과 불꽃같이 되어 완악한 심령을 녹이며 부드럽게
하며 죄와 부패의 찌기들을 소멸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심판하는 영과 소멸하는 영으로
정화되고 순화된다.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연단하는 자의 불과 같을 것이다(말 3:1, 2).
(2) 이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대적하며 회개하지 않는 모든 자의 낭패에서
성취된다. 그들은 복음을 반대하며 할 수만 있으면 온갖 수단을 다 해서 메시야의 나라를
세우지 못하도록 방해를 한다. 그러나 복음의 날은 화덕같이 타오르는 날이다. 그 날에는 모든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모든 자가 초개 같을 것이다(말 4:1). 야곱과 요셉은 불과 불꽃 같을
것이다. 그들에게 해를 입히기 위해 간섭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간섭이 목숨을 건 위험한 짓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은 간섭자들에게 곡식단 사이의 횃불 같을 것이다(슥 12:6). 하나님이
자기 사역자의 입에 두신 말씀은 불과 같고 백성은 그 불에 살라지는 화복 같다고 표현된다(렘
5:14). 그리고 불법한 자는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불 기운으로 소멸될 것이다(살후 2:8).
복음의 불로 정금처럼 연단되지 않는 자들은 찌꺼기처럼 타 없어질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생명의 향기나 사망의 냄새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상과 우상 숭배가 철폐되고 만국의 재물과
권세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섬기게 되며 무장한 강한 자의 재물을 더 강한 자들이 나누게
되었을 때는 야곱 족속과 요셉 족속이 에서 족속을 살라서, 그들 중에는 남는 자가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자기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셨으며 자기 사도들을 통해 이루셨다.
2. 그들의 기업은 멀리까지 확장될 것이다(19, 20절). 이것은 히브리어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이것은 바벨론 귀환 후 그들이 이스라엘 땅을 취득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사로잡혔던
이스라엘의 뭇 자손은 오래도록 포로 생활을 하다가 이제 돌아온 이스라엘 무리로서 여기에서는
여전히 사로잡혔던 자손이라고 불리우는데 이들은 자기들의 고토를 회복하게 될 뿐만 아니라 인접
국가의 땅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일부의 이웃 민족들은 개종자가 되어 유대인과 연합하게 될
것이며 유대인은 거룩한 친교로 그들을 소유하여 그들의 땅을 기업으로 삼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이웃이 회심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리스도를 믿으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에 우리와
연합하게 되면 우리 자신을 참으로 부유한 자로 간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그런
그리스도인의 교제를 얻게 되면 재산을 얻는 것보다 더 많은 부와 힘이 우리에게 생긴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또는 그 땅의 옛 주민들이 포로로 끌려 간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은 인접한 땅을 기업으로 누리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증가하여 본토로는 너무 비좁을 것이며 이웃 나라의 토지가 ob def ectum Sanguinis-즉 상속인의
부재로 그들에게 귀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접 지역을 점유하게 될 것이다. 에서의 땅은
가나안 남방의 사람이 얻을 것이다. 이는 그들에게는 그곳이 인접 지역인 때문이다. 가나안
서쪽은 평원 지방으로 그곳에 있는 평지 사람은 그 이웃 블레셋 땅을 점유하게 될 것이다. 돌아
온 두 지파 중 주요 지파였던 유다 사람들은 에브라임 들과 사마리아 들을 얻을 것이다. 이 땅은
전에 열 지파에게 속한 곳이었다. 그리고 다른 한 지파인 베냐민은 요단 저편의 길르앗을 얻게 될
것이다. 이 땅은 두 지파와 반지파에게 속해 있다. 이스라엘 왕국은 유다 왕국과 정치 종교
양면에서도 연합할 것이며 친구와 형제로서 서로를 기업으로 하며 누리게 될 것이다. 이 양자는
가나안 사람에게 속한 땅과 시돈에 속한 사르밧(사렙다)까지 얻을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남방의 성읍들을 얻을 것이다. 그들은 스바랏까지도 얻을 것이다. 요즈음의 랍비들은 학생들에게
사르밧과 스브랏을 프랑스와 스페인으로 이해 하도록 가르치는데 이것은 언젠가 유대인들이 상기
지역을 점유하게 되리라는 무모한 기대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기독교인을
에돔인이라고 부르며 또 그렇게 간주하고 자기들이 기독교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나온 약속은 말할 필요도 없이 영적 의미를 지닌다. 이것은 복음 이스라엘인 기독
교회가 세상에 수립되었을 때 성취되었다. 그리고 교회가 확대되고 증가하여 그 신비로운 몸이
완성될 때까지 더욱 더 성취될 것이다. 목사와 교인들이 자기들의 이웃을 설복하여 그리스도께
나아오게 하며 주님께 굴복하게 할 때 그들은 그 이웃을 얻는다고 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회심시킨 자들은 그가 "얻은" 사람이라고 표현된다(창 12:5). 소유는 획득된다. 그러나 그것은
힘이나 무기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무기는 세상 무기가 아니라 영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 소유를 얻게 하고 보존하게 하는 것은 복음의 전파와 그에 수반하는 신적 은혜의 능력이다.
Ⅳ. 구속주의 나라가 수립되며 유지되어 그의 충성된 백성에게는 위로를 주며 그의 모든 원수들에게는
공포와 수치를 심어 줄 것이다(21절). "나라가 여호와(원의:주) 즉 주 예수 그리스도께 속하리라."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그리스도의 수중에 붙이시고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권세를 그에게
위임하심으로써 나라를 그에게 주실 것이다. 사람들은 충성된 백성으로 그리스도께 기꺼이
복속하고 그를 자기들의 수장으로 삼음으로써 나라를 그에게 바칠 것이다. 왕의 일은 백성을
보호하고 대적을 진압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왕 중 왕으로서 이 일을 행하실 것이다. 그는
포상도 하시고 징벌도 하실 것이다.
1. 시온산은 구원될 것이다. 구원자들은 시온산에 올라 올 것이다. 복음의 전파자들은 구원자라고
불리우는데 이는 그들 자신과 그들의 말을 듣는 자들을 구원하는 것이 그들의 직무인 때문이다.
이점에서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역사하는 일꾼이다. 만일 그가 은혜로써 그들과 함께 일하시지
않는다면 그들의 모든 수고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다.
2. 에서의 산은 심판을 받을 것이다. 시온산에 구원자로서 올라오는 자들이 에서의 산을 심판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입에 담긴 복음의 말씀은 믿는 자들을 구원하며 믿지 않은 자를
심판하며 그들을 확신시키며 정죄하는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으리라고
전파하는 주의 사역자들은 시온산에 오르는 구원자들이다. 그러나 그들이 믿지 않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고 전파할 때는 에서의 산을 심판한다. 그들은 이런 일을 사명으로 위탁받고 행하도록
명령받았다(마 16:16).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의 진행 가운데서 성경은 성취된다. 하나님께서 고난
중의 자기 교회에서 친구를 세우실 때 (옛적 이스라엘을 건지기 위해 사사를 세우셨듯. 삿 2:16)
구원자들은 시온산에 올라와서 교회를 몰락과 파멸로부터 건질 것이다. 그리고 교회의 대적이
몰락하고 그들의 권세가 분쇄될 때 에서의 산은 심판을 받는다. 그리고 이 일은 하나님께서 가장
적당하다는 생각하시는 방법으로 각 시대에 행해질 것이다. 우리는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하고 교회가 음부의 권세를 쳐서 이긴다는 것을 믿어도 된다. 왜냐하면 나라가 여호와께 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 왕국은 하나님의 것이 될 것이다. 그는 자기의 큰 권세와 통치를
스스로 취하셨고 취하실 것이다.
"사로잡혔던 이스라엘의 뭇 자손은 가나안 사람에게 속한 땅을 사르밧까지 얻을 것이며
예루살렘의 사로잡혔던 자 곧 스바랏에 있는 자는 남방의 성읍들을 얻을 것이니라" (옵 1:20)
여기 나오는 지명을 안다면 본서의 연대나 예루살렘 공격 후에 어디로 사람들이 추방되었는지를 알수 있는 귀중한 단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여기 언급하는 스바랏이란 곳이 어디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다. 아람 어에 의하면 스페인을 가리키며 제롬(Jerome)에 따르면 보스퍼러스 해협을 가리킨다. 그러나 대개는 메디아 남서쪽에 위치한 사파르다 혹은 사르디스(터키 이즈미르 근처)로 추정한다.1) 그렇지도 않다면 바벨론 제국 건너 메디아의 북서에 위치해 있었을 것이다(Stuart).2)
그런데 만일 소아시아의 서쪽 리디아의 수도가 사르디스(Sardis)였다면 그리고 그 곳에 유대인들이 흩어져 살게 되었다면 그들의 본토(예루살렘)에서 아주 먼 곳까지 추방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의 본토로 그들을 회복하시기에는 결코 너무 먼 곳이 아니었다. 결국 스바랏에서 그 백성의 회복은 하나님의 자애와 능력의 위대하심을 돋보이게 한다.
주
1. 강병도편, 호세아, 말라기(서울: 기독지혜사, 1994), p.328
2. Billy K. Smith & Frank S. Page, Amos, Obadiah, Jonah(Broadman & Holman, 1995), p.201
(옵 1:13)은 어느 번역이 옳은가?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손을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재물에 대지 않을 것이며" (옵 1:13)
위의 구절을 표준새번역에서는 “나의 백성이 패망하던 그날 너는 내 백성의 성문안으로 들어가지 않았어야 했다...”라고 부정 명령형 과거로 번역하였다. 흠정역(KJV)에서는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며... 그 재물에 손을 대지 않았을 것이며”라고 하여 가정법 과거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새 흠정역(NKJV)과 새국제역(NIV)에서는 부정 명령구로 되어 있다. 우리말 새표준역은 과거로 번역한 것이 다르다.
그러면 어느 번역이 옳은가?
히브리 어원에는 동사가 정상적인 부정 명령형 구조로 되어 있다. 즉 부정의 말(al)과 함께 쓰인 명령법이다. 그러므로 이 말은 들어가지 말며, 방관하지 말며, 손을 대지 말며 등으로 번역되어야 한다.1)
새 미국표준역(NASB)에서는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성문에 들어가지 말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말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재물에 손을 대지 말며 라고 번역하였다. 만일 가정법 과거로 번역한다면 이미 예루살렘은 멸망했고 에돔이 그 약탈에 참여했음을 시사해 준다.
그러나 부정 명령형으로 본문을 번역하는 것이 옳다면 이 예언은 아마 예루살렘으로 쳐 올라와서 무력으로 그곳을 점령한 불레셋과 아랍인들에게 에돔 사람들이 가세한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주전 848-841년)의 때와 관계가 있을 것이다(대하 2:16-17).2)
문제는 예루살렘과 유다가 약탈과 곤경에 처한 환난의 때가 언제였는가에 달려 있다. 예루살렘이 약탈을 당한 시기는 적어도 여섯 번이나 된다.
1. 르호보암 제5년에(931-913) 시삭에게 예루살렘이 항복했는데 요새들이 동맹했던 외국 군대와 함께 애굽의 지배자에 의해 함락되었다(왕상 14:25-28; 대하 12:2-10). 이때에 에돔은 유다의 적이었다.
2. 예루살렘의 두 번째 침공은 여호람 통치 때(853-841년)였는데 아람과 불레셋의 연합군이 유대를 공격해서 예루살렘에 있던 왕의 재산과 가족을 빼앗아 갔다(대하 21:16-17; 22:1). 이때에도 에돔과는 날카로운 대립 상태였다(왕하 8:20-22; 대하 21:8-10).
3. 유다의 제3차 침공은 요아스 통치 때였다(835-796년). 수리아의 침략으로 유대의 지도자들과 군사가 희생되고 약탈되었는데 이는 그 왕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였다(대하 24:23-24).
4. 예루살렘이 아마시야 때에 포획되었으며(796-767) 에돔과 공적으로 적대했던 기간에 유다의 보화와 인질들이 함께 강탈당했다(왕하 14:7-14).
5. 제8세기에 와서 아하스 통치 기간에 유다가 외세에 의한 위협이 증가되었을 때에 에돔의 침범에 대한 그 이상의 증거가 있다(735-715년). 그러나 예루살렘이 실제로 포획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6. 예루살렘의 마지막 침략은 주전 597년 느브갓네살에게 여호야긴이 항복한 후 586년 바벨론에게 멸망했을 때였는데 그 때 에돔의 존재는 하나의 독립된 국가였다.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은 성전과 더불어 실제로 불에 타 버렸다(왕하 25:8-21; 대하 38:17). 이 때에 에돔의 행동에 대한 이야기들은 특별히 중요한데 느브갓네살을 대적한 팔레스틴국가들의 동맹에 한 동맹자로 참여한 근거가 있다(렘 27:3; 40:11). 그러나 이 사건은 후에 유대에 대한 보복을 취한 것으로 고소되었다(겔 25:12). 그리고 그들의 심판이 그 정점에 달했던 때에 그들의 환난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칼에 내어 준 죄로 고소되고 있다(겔 35:5-6; 참고, 애 1:17). 에돔은 예루살렘의 멸망을 기뻐한 죄가 있었다(시 37:7; 애 2:15-17; 4:21; 겔 35:11-15; 36:2-6). 따라서 이 시기에 에돔의 멸절에 대한 선지자적 선포가 그 정점에 달했던 것이다(렘 9:26; 25:21; 애 4:21-22; 겔 25:13; 32:29; 35:3-4, 7-9, 14-15; 36:7). 따라서 오바댜는 에돔이 분명히 연관된 주전 586년 예루살렘의 멸망을 뒤돌아보았을 것이다. 물론 이 결론은 증명된 확실성이 부족하다. 소선지자들 중에 오바댜와 요엘은 연대의 중요성이 없다. 예레미야 49장과 에스겔 35장 그리고 요엘서에 대한 오바댜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필연적이 아니다(렘 49:14-22의 연대가 대략 주전 600년이라는 것이 이 논의를 분명하게 확증한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유다의 정치와 종교적인 역사에 있어서 이 시기만큼 오바댜의 예언에 맞는 시기는 없을 것이다.3)
에돔이 예루살렘에 들어간 것은 바벨론의 군대에 의해 그 시가 약탈되고 크게 포기된 후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에돔은 바벨론이 조직적으로 약탈을 하기에는 너무 작았던 많은 유대의 도시들을 약탈하였을 것이다. 예루살렘이 이년의 포위 속에 주전 586년 첫달에 멸망하였다(왕하 25:1-8). 따라서 바벨론의 군대가 예루살렘에 집중되어 있었던 주전 588-86기간에까지도 에돔은 보호되고 있지 않은 남쪽 지역을 약탈할 수 있었을 것이다.4)
오바댜 13절의 동사의 번역을 가정법 과거로 해야 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부정 명령형으로 하느냐에 따라 그 예언이 지시하고 있는 시기를 결정한다면 두 경우 모두 주전 588-586에 있었던 예루살렘 멸망 때 에돔의 약탈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만일 과거로 번역을 한다면 예루살렘 멸망이 이미 일어난 후를 가리키며 부정 명령형으로 취한다면 아직 예루살렘이 멸망하지 않은 어느 때를 의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본다고 해도 아쳐(Archer)의 주전 848-841년의 여호사밧의 아들 여호람 때로 보는 것은 자연스럽지 않을 것이다. 알머딩(Carl E. Armerding)의 견해처럼 이 예언들이 어느 특정한 때의 사건과 꼭 연관을 짓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예언이 예루살렘의 멸망(주전 586)때를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생각하며 이 견해를 부인할 명확한 근거도 희박하다.
주
1. 글리슨 아쳐, 성경 난제 백과사전, 황영철역(서울: 생명의 말씀사, 1990), p.408
2. Ibid., pp.408-409
3. Carl E. Armerding, Obadiah, E.B.C. Vol.7(Grand Rapids: Zondervan, 1985), pp.350-351
4. Douglas Stuart, Hosea-Johna(Waco: Word, 1987), p.41
에돔은 누구인가?
"주 여호와께서 에돔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옵 1:1)
에돔이란 말은 붉다는 뜻으로 붉은 팟죽으로 장자의 기업을 판 것 때문에 에서에게 부쳐진 이름이거나(창 25:30; 36:1, 8, 19) 집합적으로 에돔 족속(민 20:18, 20-21; 암 1:6, 11; 9:12; 말 1:4)을 가리킨다. 더 나아가서 이전에 세일의 땅이었던 곳을 에서의 후손들이 점령한 곳을 가리켰다(참 32:3; 36:20-21, 30; 민 24:18). 그 곳은 와디젤드(Wadizered)에서부터 대략 160㎞가 되는 아카바만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아라바의 양편이나 에돔의 광야와(왕하 3:8, 20) 사해에서 홍해까지를 연결하고 있는 큰 구렁에까지 확대된다(창 14:6; 신 2:1, 12; 수 15:1; 삿 11:17-18; 왕상 9:26). 그 정상은 1,067미터에 이르며 비옥한 땅은 아니나 경작할 수 있는 좋은 곳도 있다(민 20:17, 19). 성경 시대에 왕의 큰 도로가 동쪽 고원지대를 따라 나 있었다(민 20:14-18). 수도 셀라는 페트라 뒤 편 적은 고원에 위치해 있었다. 그리고 다른 주요 도시로서는 보스라와 데만이었다.
에돔 족속은 에서의 후손으로(창 36:1-17) 그들이 그 곳으로 이주하면서 원주민이었던 호리 족속과 연합하므로 지배적인 집단이 되었으며(창 14:6) 다른 족속들도 그들의 수에 가담하였다. 그리고 에돔 족속은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어느 왕이 있기 전에 벌써 왕을 소유하고 있었다(창 36:31-39; 대상 1:43-51). 출애굽 때에 이스라엘은 에돔에게 왕도를 따라 여행할 수 있도록 요청하였으나 거절당했으나 그들의 형제로 알아 공격하지 않았다(민 20:14-21; 21:4; 삿 11:17-18; 신 23:7-8).1)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서와 야곱의 후손 사이에는 불화와 적대관계가 지속되었다.
그 중요한 사건을 열거하면 아래와 같다.
1.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고 위협했다(창 27:41)
2. 에돔은 이스라엘이 그들의 땅을 통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민 20:14-20).
3. 사울은 에돔을 대적해서 싸웠다(삼상 14:47).
4. 다윗은 에돔을 굴복시켰다(삼하 8:14).
5. 아마시야는 에돔을 정복하고 셀라를 포획했다(왕하 14:7)
6. 에돔은 유다를 배반했다(대하 21:8-10).
7. 에돔은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의 멸망을 자축했다(시 137:7, 렘 4:21-22).
8. 유다 마카비는 에돔에 대한 후대 이름이었던 이두메아를 정복하였다(Josephus Antiquities 12.353)
9. 존 힐카너스는 유대주의를 채택하도록 이두메 사람들에게 압력을 주었다(Josephus Antiquities 13, 257-58).
10. 이두메 사람이었던 헤롯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마 2:16-18).
11. 헤롯의 아들 안디바스는 세례요한을 죽였다(마 14:1-12).
12. 유대인의 전쟁기간동안(주후 66-70년) 이두메 사람들은 유대 군대의 지도자 시몬 벤 기오라스
(Simon ben giorus)에 의해 공격을 받고 유린 당했다(Josephus War 4.534-537)(2).
따라서 에돔은 이삭의 아들로 야곱의 형 에서의 후손이면서도 항상 야곱의 후손인 이스라엘의 원수로 행하였다. 후대에 와서 에돔은 이두메로 그 이름이 바뀌었으나 선민에 대한 그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쇠퇴하고 말았다.
주
1. New Bible Dictionary(Leicester: IVP, 1996), pp.290-291
2. J. Carl Laney, Answers to tough Questions(Grand Rapids: Kregel, 1997), p.160
[1-4절] 오바댜의 묵시[환상]라. 주 여호와께서 에돔에 대하여 이같이 말씀하시니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말미암아 소식을 들었나니 곧 사자가 열국 중에 보내심을 받고 이르기를 너희는 일어날지어다. 우리가 일어나서 그로 더불어 싸우자 하는 것이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너를 열국 중에 미약하게 하였으므로 네가 크게 멸시를 받느니라. 바위틈에 거하며 높은 곳에 사는 자여, 네가 중심에 이르기를 누가 능히 나를 땅에 끌어내리겠느냐 하니 너의 중심의 교만이 너를 속였도다.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오르며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내가 거기서 너를 끌어내리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사해 남쪽 산악지대에 살았던 에돔은 야곱의 형 에서의 자손들이었으나, 이스라엘 자손들과는 항상 적대관계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이방 나라들을 일으켜 에돔을 치게 하실 것이다. 세계 역사는 하나님의 섭리 역사이다. 전쟁과 평화는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의 손 안에 있다. 여호와께서는 에돔을 포함하여 모든 나라들의 흥망성쇠를 주관하신다. 물론 그것은 국민의 경건성과 도덕성에 관계되어 있다. 개인의 생사화복도 하나님의 손에 있다. 에돔의 문제는 교만이었다. 에돔은 자신감과 자만심이 넘쳤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별 사이에 깃들일지라도 거기서 그들을 끌어내리리라고 말씀하셨다.
[5-9절] 혹시 도적이 네게 이르렀으며 강도가 밤중에 네게 이르렀을지라도 그 마음에 만족하게 취하면 그치지 아니하였겠느냐? 혹시 포도를 따는 자가 네게 이르렀을지라도 그것을 얼마쯤 남기지 아니하였겠느냐? 네가 어찌 그리 망하였는고. 에서가 어찌 그리 수탐되었으며 그 감춘 보물이 어찌 그리 수탐되었는고. 너와 약조한 자들이 다 너를 쫓아 변경에 이르게 하며 너와 화목하던 자들이 너를 속이고 이기며 네 식물을 먹는 자들이 네 아래 함정을 베푸니 네 마음에 지각[총명]이 없음이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에돔에서 지혜 있는 자를 멸하며 에서의 산에서 지각[총명] 있는 자를 멸하지 아니하겠느냐? 드만아, 네 용사들이 놀랄 것이라. 이로 인하여 에서의 산의 거민이 살륙을 당하여 다 멸절되리라.
도적이나 강도가 와도 그리고 포도 따는 자가 와도 마음에 만족하게 취하면 얼마쯤 남길 것이지만, 에돔은 샅샅이 뒤짐과 약탈을 당하고 완전히 멸망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할 것이다. 에돔과 평화조약을 맺었던 나라들이 침략하여 그들을 국경으로 쫓아낼 것이다. 에돔의 식물을 먹는 자들 곧 그들과 교역을 하거나 그들의 지원을 받던 자들이 그들에게 함정을 베풀 것이다. 국가 간에 맺은 평화조약은 헛될 것이다. 에돔 나라에는 총명한 지도자들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에돔에서 지혜 있는 자들, 총명한 자들을 멸하실 것이다. 에돔의 용사들은 놀라고 거민들은 전쟁으로 인해 살륙을 당해 다 멸절할 것이다. 에돔은 완전히 망할 것이다.
[10-14절] 네가 네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을 인하여 수욕을 입고 영원히 멸절되리라. 네가 멀리 섰던 날 곧 이방인이 그의 재물을 늑탈하며 외국인이 그의 성문에 들어가서 예루살렘을 얻기 위하여 제비 뽑던 날에 너도 그들 중 한 사람 같았었느니라. 네가 형제의 날 곧 그 재앙의 날에 방관할 것이 아니며 유다 자손의 패망하는 날에 기뻐할 것이 아니며 그 고난의 날에 네가 입을 크게 벌릴 것이 아니라. 내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성문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고난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며 환난을 당하는 날에 네가 그 재물에 손을 대지 않을 것이며 사거리에 서서 그 도망하는 자를 막지 않을 것이며 고난의 날에 그 남은 자를 대적에게 붙이지 않을 것이니라.
에돔이 멸망하게 되는 까닭은 그가 그의 형제 야곱에게 행한 포학 때문이었다. 그들은 그 죄 때문에 수욕을 입고 영원히 멸망할 것이다. 의는 존귀와 생명을 가져오지만, 죄는 수욕과 멸망을 가져올 것이다. 에돔 사람들은 그 형제 이스라엘의 날, 곧 그들이 멸망하는 날에 멀리 서 있어 방관했고, 그들을 늑탈한 이방인들 중의 하나같이 처신하였고, 그들의 멸망을 기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게 처신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환난을 당하는 날에 그 성에 들어가지 말아야 하였고, 그 고난을 방관하지 말아야 했고, 그 재물에 손을 대지 말아야 했고, 사거리에 서서 그 도망하는 자들을 막지 말아야 했고, 그 남은 자들을 대적에게 붙이지 말아야 했다.
[15-16절] [이는] 여호와의 만국을 벌할 날이 가까왔나니[가까웠음이니라.] 너의 행한 대로 너도 받을 것인즉 너의 행한 것이 네 머리로 돌아갈 것이라. 너희가 내 성산에서 마신 것같이 만국인이 항상 마시리니 곧 마시고 삼켜서 본래 없던 것같이 되리라.
본문은 10절에 이어서 에돔의 멸망의 이유를 말한다. 여호와께서 만국을 벌하실 날이 올 것이다. 역사상 종종 하나님의 심판의 일들이 있었으나, 최종적으로 세상 만국을 벌하실 날이 올 것이다. 그 날에는 에돔도 자기의 행위의 보응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과 징벌은 공정하다. 하나님께서는 에돔의 악에 대해 공의로 보응하실 것이다. 모든 사람은 행한 대로 보응을 받을 것이다.
“너희가 내 성산에서 마신 것같이”라는 말은 문맥상 에돔을 가리킨다고 본다. ‘마시는 것’은 노략질한 후 술잔치를 벌이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만국인이 항상 마시리라”는 말씀은 모든 이방 나라들이 하나님의 진노와 재앙을 계속 당할 것이라는 뜻이라고 본다. 또 “곧 마시고 삼켜서 본래 없던 것같이 되리라”는 말씀은 열국의 완전한 멸망을 가리킬 것이다. 세상 나라들은 결국 다 멸망할 것이다.
[17절] 오직 시온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며.
시온산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이다. 시온산은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곳이다. 그곳은 하나님의 언약과 긍휼이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환난을 피할 자들이 있을 것이다. 시온산에 구원이 있을 것이다.
또 그 산은 거룩할 것이다. 이전에는 그 산이 종교적으로 부패하고 도덕적으로 더러웠고 그래서 이방인들에 의해 짓밟히고 더러워졌으나 이제 하나님께서 그것을 회복시키실 것이다. 이제 시온산에 거하는 자들은 하나님께 참된 예배를 올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영광을 받으실 것이다.
또 야곱 족속은 자기 기업을 누릴 것이다. 야곱 족속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 즉 이스라엘과 유다를 가리킨다. 그들은 범죄함으로 하나님의 주셨던 기업의 땅 가나안을 잃어버렸었다. 그러나 그들은 장차 하나님의 은혜로 그 땅을 다시 회복할 것이다. 또 그뿐 아니라, 그들은 이방인들의 땅들도 소유하게 될 것이다(암 9:12; 옵 19-20).
시온산과 이스라엘의 얻을 기업은 신약교회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시온산은 하나님의 긍휼과 속죄의 피뿌림이 있는 곳이며 구원받은 만국 백성이 그리로 올라올 것이다. 히브리서 12:22는, “너희가 이른 곳은 시온산과 살아계신 하나님의 도성인 하늘 예루살렘”이라고 말했다. 요한계시록 14:1은,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양이 시온산에 섰고 그와 함께 14만 4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라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 온 세상에 이루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로부터의 구원이 있다. 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킴으로써 가능하였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예수님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는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얻는다.
[18-21절] 야곱 족속은 불이 될 것이요 요셉 족속은 불꽃이 될 것이며 에서 족속은 초개가 될 것이라. 그들이 그의 위에 붙어서 그를 사를 것인즉 에서 족속에 남은 자가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음이니라. 남방 사람은 에서의 산을 얻을 것이며 평지 사람은 블레셋을 얻을 것이요 또 그들이 에브라임의 들과 사마리아의 들을 얻을 것이며 베냐민은 길르앗을 얻을 것이며 사로잡혔던 이스라엘의 뭇 자손은 가나안 사람에게 속한 땅을 사르밧까지 얻을 것이며 예루살렘의 사로잡혔던 자 곧 스바랏에 있는 자는 남방의 성읍들을 얻을 것이니라. 구원자들이 시온산에 올라와서 에서의 산을 심판하리니 나라가 여호와께 속하리라.
이스라엘 백성은 불과 불꽃이 되어 에돔 곧 에서 족속을 불사를 것이다. 에서 족속은 남은 자가 없을 것이다. 이것은 복음의 정복을 상징한 것 같다. 또 회복된 이스라엘은 열국의 땅을 차지할 것이다. 온 세상은 본래 하나님의 세계이었지만 아담이 범죄한 후에 하나님 없는 세계, 하나님을 대항하는 세계,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세계가 되었다. 그러나 온 세상은 다시 하나님의 세계가 될 것이며, 경건한 사람들의 세계, 의인들의 세계가 될 것이다. ‘구원자들’은 일차적으로 포로 귀환 시대의 지도자들을 가리키겠지만,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종된 사도들과 신약시대의 복음사역자들을 가리켰다고 본다. 또 그리스도의 복음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심판이 된다(막 16:16; 요 3:18). 믿지 않는 자는 이미 정죄를 받았다. 장차 세상 나라는 우리 주와 그 그리스도의 나라가 될 것이다(계 11:15).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그의 진노로부터 구원을 받았다(요 5:24). 그러나 우리는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을 알고(고후 5:10) 우리의 행위를 항상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면, 인간의 모든 노력들은 다 헛될 것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만 믿고 의지하고 사랑하고 바라고 순종하며 살아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대로 이웃을 사랑하며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며 바르고 선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특히 우리는 형제가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그를 방관하지 말고 그에게 악을 행하지 말고 교만을 버리고 주권자 하나님 앞에서 겸손과 두려움으로 긍휼과 선을 행해야 한다. 국가의 평안도 단순히 외교적 노력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지도자와 백성의 경건과 도덕성에 있다. <김효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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