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타르(Isht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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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타르는 아카드어로, 서(西)셈족의 여신 아스타르테에 해당하는 아카드족의 여신이다.
수메르 신들 가운데 주요여신 이난나는 이슈타르와 동일신으로 여겨지게 되었지만, 이난나가 셈족에게서 기원했는지, 또는 이난나가 이슈타르와 비슷하기 때문에 같은 신으로 여겨지게 되었는지(이 추측이 좀더 가능성이 있음)는 분명하지 않다. 이난나의 모습은 여러 전승이 서로 결합되어 형상화된 듯하다.
이난나는 하늘의 신 '안'의 딸로 등장하기도 하고, 그의 아내로 등장하기도 한다. 다른 신화들에서는 달의 신 난나혹은 바람의 신 엔릴의 딸이다. 이난나는 처음에 창고와 연관되어 대추야자나무·양털·고기·곡식의 여신이 되었다. 창고 문이 이난나의 상징이었다.
이난나는 비와 뇌우의 여신이기도 했는데, 그런 이유에서 하늘의 신 '안'과 연관되어 나타나게 되었다. 때로는 천둥처럼 울부짖는 사자의 모습을 하기도 했다. 이난나가 전쟁의 여신이 된 것은 폭풍우와 연관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난나는 또한 다산의 여신이자 창고의 여신이며, 대추야자나무의 성장과 수확을 상징하는 신 두무지 아마우슘갈라나
의 배우자였다.
(☞ 두무지 아마우슘갈라나 ▶- 특히 남부 과수재배지역으로부터 후에는 중앙 초원지역에까지 널리 신봉되었다. 풍요의 상징 이난나 여신(아카드어로 'Ishtar')의 젊은 신랑이었으며, 간혹 '대추야자나무의 여신'이라고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대추야자의 성장력과 새 생명을 상징했다. 에렉에서는 창고의 여신 역할을 하는 이난나와 두무지 아마우슘갈라나의 결혼은 본질적으로 추수 축제의 의미를 지녔으며 젊은 부부가 결혼을 함으로써 안정을 얻듯이 새해를 앞두고 먹을 양식을 모아둔 공동체가 느끼는 안정감을 상징했다. 두무지 아마우슘갈라나는 두무지(→ 탐무즈)의 한 형태로서 풍요와 생식을 상징하는 수메르 신이었다.)
이난나는 젊고 아름답고 충동적인 성격으로 등장하며, 결코 조력자나 어머니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일이 없다. 이난나는 대추야자 열매송이 아가씨라고 불리기도 한다.
▶수메르인들의 전승에 의하면 이슈타르의 역할은 다산의 역할이지만, 신화에서 이슈타르는 죽음과 재난에 둘러싸인 더욱 복잡한 신으로 발전했다. 이슈타르는 방화와 진화, 기쁨과 눈물, 공정한 경쟁과 적의 등 서로 모순된 의미와 힘을 가진 여신이었다. 또한 아카드의 이슈타르는 금성과 연관된 신이기도 하며, 더 나아가 태양신 '샤마시', 달신 '신'과 함께 제2의 3각항성(三角恒星)을 이룬다.
▶이슈타르의 상징은 하나의 원에 6, 8개 또는 16개의 광선을 지닌 별이다.
이슈타르는 육체적 사랑을 즐기는 금성의 여신으로서 매춘부의 수호신이며, 선술집의 후원자였다.
이슈타르 숭배의식에는 신전 매춘이 포함되었을 것이며, 이슈타르 숭배 중심지인 우르크는 창녀들로 가득한 도시였다. 이슈타르는 고대 중동지역에서 폭넓은 인기를 누렸으며, 많은 숭배 중심지들에서 여러 지역 여신을 거느렸을 것이다. 후기의 신화에서 이슈타르는 안·엘릴·엔키의 세력을 부리는 우주의 여신으로 등장한다.
거꾸로 매달린 여신 이슈타르Ishtar
이리 오세요, 길가메시(Gilgamesh). 그대는 내 남편이 될 것이니, 그대가 갖고 있는 육체의 아름다움을 내게 주세요. 그대는 내 남편이 될 것이며, 나는 그대의 아내가 될 것입니다. 나는 그대를 위해 청금석과 금으로 만든 전차를 마련해 줄 것이며, 폭풍의 신령들이 당신 노새의 마구를 채우게 하겠어요!
내 집으로 오세요. 그곳에는 삼나무 향기가 가득하지요. 그대가 내 집으로 들어설 때 문설주와 왕권의 단이 당신 발에 입을 맞출 것이며, 왕들과 귀족들과 군주들이 그대 앞에다 고개를 숙일 것이며, 그들이 그대에게 모든 산과 모든 평원을 공물로 바치게 할 것이며, 그대의 암염소는 세쌍둥이를 밸 것이며, 그대의 암양은 쌍둥이를 밸 것이며, 무거운 짐을 실은 그대의 당나귀는 노새를 추월할 것이며, 그대의 전차를 끄는 군마는 머리칼을 곤두세우고 질주할 것이며, 멍에를 진 그대의 황소는 필적할 상대가 없을 것입니다.”
가장 오래된 서사문학이라고 알려진 《길가메시 서사시》에는 영웅이 되어 우루크(Uruk)로 돌아온 길가메시를 이슈타르(Ishtar) 여신이 유혹하는 장면이 있다. 그녀는 길가메시의 멋진 모습에 반해 길가메시에게 자신이 지닌 모든 힘을 나눠 주겠다고 노래한다. 그러나 길가메시는 여신의 이런 유혹을 물리친다.
“내가 만일 당신과 결혼한다면 어떤 신세가 될까? 날씨가 추워지면 당신은 나를 헌신짝처럼 버리겠지? 당신은 미풍이나 외풍에도 흔들리는 거적문이며, 용맹한 전사를 뭉개 버리는 궁궐이며, 그 건축물을 갉아먹는 쥐이며, 짐꾼의 손을 검게 만드는 역청이며, 물을 나르는 사람에게 물벼락을 주는 물 가죽부대이며, 돌로 된 벽도 기울게 하는 석회암이며, 적군을 끌어들이는 성벽을 부수는 망치며, 주인의 발을 꼭 조이게 하는 신발인 거야! 당신이 신랑으로 삼은 자들 중 영원히 남아 있는 자는 어디에 있을까? ······당신의 가장 어린 남편이던 탐무즈(Tammuz), 그는 당신이 정해 준 운명 때문에 매년 매해 눈물을 흘려야만 하지!” 길가메시는 왜 여신을 이렇게 비난하면서까지 유혹을 물리치려는 것일까? 이슈타르 여신이 대체 탐무즈에게 어떻게 했길래 인간에게 이런 비난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이난나-이슈타르 여신, 기원전 2000, 메소포타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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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타르는 바빌로니아 지방에서 오랫동안 숭배되던 사랑의 여신이다. 바빌로니아가 자리 잡고 있던 메소포타미아 지방에는 과거에 수메르 문명이 자리 잡고 있었고 수메르에서는 이 여신을 이난나(Inanna)라고 불렀다. 기원전 4000년 전쯤 이 여신은 고대 수메르의 번화한 도시, 우루크의 수호신이었다고 한다. 그녀는 사랑의 여신이라는 점에서 아프로디테와 비슷하지만 동시에 전쟁의 여신이라는 점에서 아테네와도 비슷하다.
그리스 신화 속에서는 사랑과 전쟁이 각각 다른 신들의 역할로 분할되어 있지만 이난나-이슈타르 여신은 마치 서로 상반된 듯이 보이는 힘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스 신화의 여신들과는 성격이 다르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하는 땅과 하늘의 풍요를 위해 온 세상에 사랑의 에너지를 뿜어내지만 자신을 분노케 하는 존재에 대해서는 전쟁도 불사한다. 그런가 하면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것을 얻기 위해 술수도 서슴지 않는다. 그녀는 무엇보다도 생명 전체를 지배하는 강력한 힘을 지닌 여신이라는 점에서 고대 여신의 원형적 풍모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땅과 하늘의 모든 생명을 움직이는 사랑의 여신인 그녀가 더욱 더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된 것은 ‘메(ME)’라고 부르는 신비한 토판들을 소유하게 되면서다. 메는 원래 이슈타르의 것이 아니었다. 메의 주인은 에리두(Eridu)라는 도시의 수호신인 엔키(Enki) 신이었다. 그런데 이슈타르는 메가 탐이 났다. 그래서 엔키를 찾아가 그에게 술을 잔뜩 마시게 한 다음 수백 개의 메를 훔쳐 달아났다. 술에서 깬 엔키가 바다괴물인 압갈루(Abgallu)를 시켜 유프라테스 강을 건너는 이슈타르를 붙잡으려 했지만 허사였다. 그녀는 이미 자신의 신전이 있는 우루크로 도망친 후였다. 이슈타르는 결코 착하고 다소곳한 여신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위해서는 죽음도 불사할 만큼 대담하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슈타르의 이러한 대담한 기질이 잘 드러난 사건이 바로 그녀가 여동생인 에레슈키갈(Ereshkigal)이 다스리는 지하세계로 여행을 떠난 일이다. 이슈타르는 땅 위에 사는 모든 것과 하늘에 나는 모든 것을 움직이는 강력한 권능을 지니고 있는데도 죽은 자들이 거하는 지하세계에 대해서는 자신이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으며 어떤 힘도 미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당장 지하세계를 방문하기로 마음먹는다. 하지만 죽은 자들의 영토인 그곳은 여신에게도 너무 위험한 장소였다. 이슈타르는 자신의 또 다른 여동생인 닌슈부르(Ninshubur)를 불러 놓고 당부한다. 자신이 3일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북을 두드려 모두에게 자신의 죽음을 알리고 엔키1) 신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라고 했다. 그러고 나서 온갖 화려한 장신구와 향료로 온 몸을 아름답게 치장한 다음 에레슈키갈의 영토로 떠났다.
머리에는 황금으로 만든 빛나는 왕관을 쓰고 손에는 라피스 라줄리[lapis lazuli(청금석)]로 만든 홀(笏)을 쥐었다. 목에는 작은 라피스 라줄리 목걸이를 하고 가슴에는 황금으로 된 판을 대고 그것을 두 줄로 꼰 황금실로 묶었다.
팔에도 역시 황금팔찌를 끼었다. 이 모든 장신구는 그녀가 소유하고 있는 메의 상징이다.
드디어 저승의 문 앞에 이르렀을 때 저승의 문지기인 네티가 이슈타르 앞을 가로막았다. 이슈타르는 네티를 협박한다. “네가 문을 열지 않아 내가 들어가지 못한다면 나는 문을 부수고 빗장을 부술 것이다. 나는 문설주를 부수고 문을 없애 버릴 것이다.” 이슈타르의 대담함과 뻔뻔함에 에레슈키갈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이슈타르가 저승의 문 앞에 당도하면 자신이 걸치고 있는 모든 옷과 장신구를 벗어 놓으라 명하라! 누구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서는 저승에 들어올 수 없으며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내놓아야 한다!” 결국 이슈타르는 저승으로 내려가는 일곱 문을 통과할 때마다 자신이 걸치고 있는 것들을 하나씩 벗어 놓아야만 했다. 그리고 마침내 저승의 맨 아래 에레슈키갈의 옥좌 앞에 당도했을 때 그녀는 옷과 장신구는 물론이고 신성한 힘과 권위도 모두 잃어버린 채 알몸으로 서게 된다. 그러자 그녀에게, 인간에게 주어지는 예순 가지의 약점이 덮친다.
눈과 머리, 온몸에 인간의 모든 고통이 파고들었고 여신으로서는 경험하지 못한 병과 늙음, 나약함을 알게 된다. 에레슈키갈 곁에는 저승의 심판관인 일곱 명의 아눈나키(Annunaki)들이 둘러싸고 있었다. 이슈타르는 에레슈키갈과 아눈나키들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아눈나키를 바라보았다. 이슈타르가 아눈나키의 돌처럼 차가운 눈과 마주치는 순간 이슈타르에게 죽음이 덮쳤다. 그리고 그녀는 마치 도살된 짐승처럼 벽에 못 박혀 거꾸로 매달렸다.
사흘 밤낮이 지났다. 그녀가 지하세계로 내려가 있는 동안 지상의 땅 위에서는 황소가 더 이상 암소를 사랑하지 않고, 수탕나귀가 암탕나귀를 무시하고, 남자가 여자를 멀리했다. 지상에서 사랑이 사라진 것이다.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이제 세상은 어떤 꽃도 피어나지 않고, 어떤 열매도 맺지 않으며, 모든 동물이 홀로 밤을 지내는 황무지가 될 것이었다. 걱정으로 안절부절하면서 이슈타르를 기다리던 닌슈브르는 사흘이 지나도 여신이 돌아오지 않자 북을 두드려 사람들과 신들을 불렀다. 땅과 하늘의 최고신인 엔릴(En-lil)도 달의 여신인 난나(Nanna)도 고개를 저었다. 모두 에레슈키갈을 두려워했고 지하세계에 방문하기를 원치 않았다. 엔키만이 예외였다. 물과 지혜의 신인 엔키는 자신의 손톱 밑에 낀 때를 빼내 두 명의 정령을 만들었다. 남성도 아니고 여성도 아닌 이들의 이름은 갈라-투라와 쿠르-자라였다. 엔키는 그들에게 생명의 물과 음식을 주고 지하세계로 내려보냈다.
이들이 지하세계에 내려갔을 때 에레슈키갈은 고통과 슬픔으로 뒤틀어진 모습을 하고 있었다. 두 명의 정령은 에레슈키갈과 함께 울면서 그녀의 고통을 함께했다. 그러자 얼음처럼 차가운 에레슈키갈의 마음도 움직였다. 두 정령에게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었고 이들은 엔키가 시키는 대로 이슈타르를 돌려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에레슈키갈은 이들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하지만 조건이 있었다. 이슈타르 대신 누군가를 지하세계에 대신 데려와야 한다는 것이었다.
에레슈키갈은 벽에 매달려 있는 이슈타르의 몸을 끌어내렸고 두 정령은 이슈타르에게 엔키가 건네준 생명의 물과 음식을 먹였다. 이슈타르는 눈을 떴고 다시 오던 길을 거슬러 지상으로 되돌아왔다. 지하세계의 일곱 개의 문을 통과하면서 그녀는 자신이 벗어 놓은 옷과 장신구를 하나씩 되찾았고 그럴 때마다 신성한 힘이 되돌아왔다. 마지막 문을 통과해 마침내 지상으로 올라왔을 때 그녀의 모습은 예전처럼 빛나고 아름다운 모습이 되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에레슈키갈이 딸려 보낸 죽음의 악령들이 그림자처럼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는 점이다.
이슈타르가 자신의 도시인 우루크로 되돌아왔을 때 양치기들의 신이자 그녀의 남편이던 탐무즈는 이슈타르의 죽음을 슬퍼하기는커녕 그녀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다른 여자들과 연회를 즐기고 있었다. 이슈타르는 배신감에 분노가 치밀었고 자신의 주변을 맴돌고 있던 지하세계의 악령들에게 명한다. ‘저 자를 나 대신 지하세계로 데려가라!’ 이슈타르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 탐무즈는 결국 악령들에게 붙들려 에레슈키갈의 영토로 가게 된다. 하지만 탐무즈가 사라지자 그의 추종자들이 너무 슬퍼한 까닭에 에레슈키갈은 1년 중 절반만 탐무즈를 지하세계에 묶어 두었다고 한다. 어떤 전승에 따르면 탐무즈의 운명을 슬퍼하던 그의 누이가 1년의 절반을 대신 지하세계에 머무르기로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어쨌든 이슈타르는 이 여행을 통해 자신이 알지 못하던 슬픔과 고통, 질병과 죽음, 빈곤과 나약함 등의 어두운 영역을 이해하게 된다. 저승을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가는 여행을 감행함으로써 더 강력한 여신으로 자리 잡는다.
지하세계를 다녀오는 과정을 통해서 이전보다 한층 더 업그레이드된 존재로 거듭나는 이야기는 프시케 이야기에서도 한 번 다룬 적이 있다. 테세우스가 미궁 속에 들어갔다 살아 나오는 이야기도 이와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다.
저승, 저물어가는 땅, 몰락해 가는 것 들의 영토, 슬픔과 고통의 장소, 어둠의 땅 등으로 여겨지는 에레슈키갈의 영토는 살아 있는 존재에게는 접근이 금지된 곳이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처럼 우리는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두려움을 갖고 있어서 죽음을 연상시키는 것은 대부분 터부의 대상이 된다. 이러한 두려움은 신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어서 신들조차도 에레슈키갈의 영토에는 얼씬도 하지 않으려 한다. 아마 저승의 여왕인 에레슈키갈의 고통은 다른 무엇보다도 외로움의 고통이었으리라. 얼음같이 차가운 에레슈키갈이 마음을 움직이게 된 것도 자신의 고통을 함께 느끼고 슬퍼해 준 두 정령의 공감 때문이었으니까. 지하세계가 지닌 이러한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이슈타르는 자발적으로 이곳을 방문한다. 그녀의 이러한 행로는 하늘의 여왕으로서 자신의 존엄과 권위를 완성하기 위함이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에레슈키갈의 영토에 들어가야만 하는 때가 있다. 아주 드물긴 하지만 이슈타르처럼 용감하게 스스로 그곳을 방문해 보고자 하는 호기심과 대담함을 지닌 사람도 있다. 하지만 거의 모두는 소멸과 몰락, 죽음을 두려워하며 어쩌다가 그런 사건들과 만나게 되면 얼른 빠져나오고 싶어 한다. 우리는 늙지 않으려 하며 병에 절대 걸리지 않으려 하며 약해져서도 안 되며 싸움에 져서도 안 되고 무엇인가를 잃어버려서도 안 되고 무엇인가를 내주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몸에 좋은 모든 것을 먹고 바르고 저축하고 보험을 들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편보다는 이기는 편에 선다. 그 결과 평균수명은 100세까지 길어졌다고 하며 그러한 통계치 때문에 우리는 또다시 더 많은 보험을 필요로 하고 더 많은 일과 더 많은 걱정에 시달리게 되었다. 어쨌든 우리는 마치 영생을 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가 길가메시처럼 영생을 바라고 모든 소멸과 몰락을 거부하고 저항한다 하더라도 인생에 찾아오는 갖가지 굴곡을 피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때로 우리는 원치 않는 중병에도 걸리고 가까운 사람과의 이별도 경험하며 예기치 못한 손실도 경험한다. 그 순간 우리는 우리가 피하고 싶어 하던 에레슈키갈의 고통스러운 얼굴과 대면하게 된다. 에레슈키갈은 이슈타르와는 반대로 아무것도 낳을 수 없고 기쁨과 만족으로 가득 찬 화려한 빛을 뿜어낼 수도 없다. 그녀는 늘 뒤틀린 얼굴을 한 채 차가운 얼굴의 아눈나키들에 둘러싸여 자신의 세계로 끌려온 자들을 냉혹하게 심판할 뿐이다. 우리가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고 절망에 빠졌을 때 세상은 모두 어둠에 잠긴 듯하고 세상 사람 모두 에레슈키갈이나 아눈나키들처럼 보일 것이다.
이슈타르가 저승으로 내려가면서 자신의 권능이자 메의 상징인 장신구를 모두 벗어 놓았듯이 그동안 쓸모 있다고 생각하던 것들, 권위와 자존감을 뒷받침해 준다고 여기던 모든 것이 휴지 조각처럼 쓸모없어지는 때도 있다. 에레슈키갈의 영토로 가는 길목에 우리가 벗어 놓지 않으면 안 되는 장신구는 우리의 이력서를 구성하고 있는 학력, 경력, 자격증, 재산, 지위 등 살아가면서 나의 권능을 휘두를 수 있게 만들어 주는 도구들이다. 에레슈키갈의 영토에서 이것들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녀는 저물어가는 땅의 여왕으로서 이런 모든 것을 쇠약하게 만들고 아무런 힘이 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가 어떤 단계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던 것들이 상황이 달라지면 모두 불필요하고 아무런 중요성도 없는 것으로 돌변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평생 집 한 채를 소유하기 위해 돈을 벌기만 했는데 마침내 꿈에 그리던 그 집을 소유하게 되자 갑자기 중병에 걸려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면,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를 얻기 위해 고통을 참아가며 성형과 다이어트를 계속했는데 그 때문에 치명적인 병에 걸린다면, 자식을 일류대학에 보내기 위해 자신의 모든 삶을 포기하면서 자식의 학력을 쌓아 주려 고군분투했는데 갑자기 대학 입학사정에서 그 모든 경력을 무시하겠다는 발표가 난다면, 갑작스럽게 닥친 태풍에 그동안 쌓아온 모든 재산과 가족마저 잃게 된다면 등등 삶의 예기치 못한 배신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런 걸 정말 배신이라고 한다면 삶이 우리에게 행하는 최고의 배신은 우리가 애써 쌓아온 모든 것을 뒤로 하고 죽어야 한다는 사실일 것이다. 결국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에레슈키갈을 대면할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언젠가 무섭고도 두려운 에레슈키갈을 만나야 한다면 이왕이면 이슈타르의 방식으로 만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다. 그녀의 방식은 자발적 방문이다. 내가 알지 못하니 한번 가서 알아봐야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삶에서 에레슈키갈의 그림자가 올라오기 전에 예방주사를 맞듯이 미리 그곳을 제 발로 찾아가 보는 일이다. 이것이 모든 고대 사회에서 이루어지던 입문제의의 의미였다. 말하자면 죽음과 몰락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고대사회에서는 입문제의가 비단 성직자들과 신비가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누구나 일생에 한번쯤은 거쳐야 하는 과정으로 여겨졌다. 그리스의 신비제전이던 엘레우시스(Eleusis) 제전이라든가 오르페우스 교단의 신비제의 등은 모두 우리가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 언젠가는 한번쯤 만나야 하는 죽음을 영접하고 또 다른 출발을 예비하게 하는 행사였다.
우리는 살면서 자발적이든 타의에 의해서든 이전의 삶의 방식을 버리고 다른 방식을 경험하고 변화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한다. 어린 시절 학교에 입학하고 학년이 올라가고 마침내 졸업하게 되는 것처럼 살아가면서 하나의 단계를 끝내고 또 다른 단계를 시작하는 것이다. 새로운 시작은 과거의 낡은 것들과의 이별을 내포한다. 거꾸로 내게서 무엇인가가 떠나간다면 그것은 삶이 새로운 시작을 예비하고 있다는 의미가 된다. 하지만 우리의 마음은 대체로 늘 익숙한 것에 길들여져 있어서 삶이 선사하는 변화에 두려움을 가지고 저항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낯선 것은 우리가 그것에 대해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뒷걸음치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늘 가던 길을 벗어나 한번도 가 보지 못한 길에 들어선다는 사실은 한편으로는 흥분과 설렘을 선사하기도 한다.
이슈타르는 아무도 가 보려 하지 않은 지하세계를 제 발로 걸어 들어간다. 그녀를 추동하는 힘은 아마도 낯선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낯선 길 앞에서 느낄 흥분과 설렘이었을 것이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 앞에 낯선 사건과 상황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그것을 향해 앞으로 나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두려움은 사건 자체가 가지고 있는 속성이라기보다는 그것에 대한 우리의 예상이 만들어 낸 환상일 수도 있다.
두려움 앞에서 우리는 이슈타르가 저승 문지기에게 호통을 쳤듯이 ‘네가 문을 열지 않으면 내가 문을 부수고 들어가겠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후에 이슈타르가 경험하게 되는 것이 무엇이든지 그녀는 받아들이고 긍정한다. 찬란하게 빛나는 하늘의 여왕이 벽에 못 박혀 거꾸로 매달리는 일까지 경험한 마당에 더 이상 두려울 게 뭐가 있을까. 이슈타르가 저승의 문지기에게 호통을 치면서 에레슈키갈의 영토로 자발적으로 걸어 들어가는 것은 그렇게 함으로써 그곳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일곱 개의 관문을 모두 통과한 후에 맨 아래에서 거꾸로 매달린 채 사흘 밤낮을 보낸다. 그녀는 이때 죽음을 경험한다. 그런데 그가 경험한 죽음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일단 자신이 갖고 있는 권능이 아무런 소용이 없으며, 그러므로 자신이 누구인지 내세우는 것도 불필요하고 아무것도 의지대로 할 수 없는 상황과 만나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가 거꾸로 매달렸다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 거꾸로 매달리면 모든 것이 뒤집혀 보인다. 거꾸로 매달려 사흘 밤낮을 보내는 것은 그동안 유지해 온 모든 관점과 견해, 가치관 등을 뒤집는 기간을 거친다는 의미다.
사흘이라는 기간은 밤하늘에 뜨는 달이 자취를 감추는 기간이기도 하다. 신화 속에서 죽음을 거쳐 부활하는 모든 존재는 사흘 만에 부활한다.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드러내고 있는 인류 최초의 상징이 달이기 때문이다. 달은 보름달을 거쳐 기울어 가는 동안에는 자신의 왼쪽 부분만 우리에게 보여 준다. 그러다가 사흘간 검은 달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오른쪽 부분만을 보여 주기 시작해 마침내 만월에 이른다. 달은 죽음을 거친 후 다시 태어나며 죽음 이전과는 다른 면을 드러낸다. 그러고 보면 한 달이라는 기간은 달이 자신의 완성된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 움직이는 전체성의 만다라인 셈이다.
이슈타르의 권능이 지하세계 방문을 통해 완성되고 더욱 강력해졌듯이 우리가 살면서 겪게 되는 여러 종류의 몰락과 손실 경험은 우리 한평생의 삶을 완성하고 우리를 더욱 강한 존재로 만들어 준다. 우리는 피하고 싶던 슬픔이나 외로움, 분노 등을 경험함으로써 생명이 지니고 있는 어두운 면모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며 그것이 사실은 전체로서의 생명을 구성하고 있는 하나의 부분이라는 사실 또한 알게 된다. 전체로서의 생명은 우리의 편의대로 정해 놓은 좋은 모습만 지니고 있지 않다. 부패도, 쇠퇴도, 몰락도 모두 생명의 한 모습이다. 커다란 생명의 일부분인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다. 우리 역시 꽃처럼 피어나는 시기가 있는가 하면 장차 태어날 열매를 위해 시든 꽃처럼 뚝뚝 떨어져 내려야 할 때도 있다. 자연의 사이클이 자라나는 시기와 줄어드는 시기 그리고 찬란하게 빛나는 시기와 완전한 어둠에 빠지는 시기를 모두 거쳐 하나의 완성된 원을 이루는 것처럼 우리의 삶 역시 성장과 쇠퇴라는 두 과정을 모두 거침으로써 완전해진다.
<삶의 길목에서 만난 신화 | 김융희 >
참고문헌・ 김산해,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휴머니스트, 2005, 183쪽, 187쪽.
길가메시가 이슈타르 여신을 그토록 가혹하게 비난하면서 여신의 유혹을 물리친 이유를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길가메시가 두려워한 것은 여신의 변덕이었다. 이슈타르 여신은 탐무즈를 사랑했지만 가차 없이 그를 지옥의 여신에게 내주기도 했다. 길가메시가 여신을 비난한 대목을 다시 되돌아보자. ‘당신은 미풍이나 외풍에도 흔들리는 거적문이며, 용맹한 전사를 뭉개 버리는 궁궐이며, 그 건축물을 갉아먹는 쥐이며, 짐꾼의 손을 검게 만드는 역청이며, 물을 나르는 사람에게 물벼락을 주는 물 가죽부대며, 돌로 된 벽도 기울게 하는 석회암이며, 적군을 끌어들이는 성벽을 부수는 망치며, 주인의 발을 꼭 조이게 하는 신발인 거야!’ 자신에게로 오면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하는 사랑의 여신에게 그가 내뱉는 말은 그녀가 무엇을 주고서는 다시 빼앗아 가는 변덕스러운 존재라는 악담이다.
길가메시가 비난하는 것은 사랑의 여신이 제공해 주는 아름다움과 힘과 풍요가 아니라 그 뒷면, 말하자면 에레슈키갈적인 면모다. 사랑의 여신은 그 둘을 모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에 태모신을 섬긴 모권사회에서 가부장제를 기축으로 하는 부권사회로 넘어오면서 영웅신화가 부각된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라고 평가되는 길가메시 서사시 역시 길가메시라는 가부장적 영웅의 영생 탐사기다. 영웅신화는 남성 주인공이 어떻게 어머니 여신의 품에서 떨어져 나와 우주 자연이 지닌 원래의 힘을 극복해 나가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자연의 흐름에 순응하지 않고 역행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정립해 나간다. 영웅에게 중요한 과제는 일종의 ‘극복’이다. 그들에게 자연의 변화무쌍함은 일종의 악이다. 또한 자연과 자신을 서로 유리된 존재로 바라보고 자신의 내적 자연성에도 저항하고 싶어 한다. 말하자면 자신의 내부에서 울리는 자연의 속삭임, 자연의 욕망이 그들에게는 저항해야 할 악이 되는 셈이다. 그 악과 싸워 이김으로써 의지의 힘을 입증하는 것, 그것이 영웅의 과제다.
길가메시는 우루크에 있는 모든 여자를 자기 소유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힘을 과시하고 우쭐댄다. 그의 오만을 보다 못한 신들이 엔키두(Enkidu)라는 자연의 남성을 길가메시의 친구로 보낸다. 엔키두는 자연과 문명 둘 사이에 있는 존재다. 그는 인간이면서 동물과 어울려 놀며 얼굴에는 하나 가득 털이 덮여 있다. 길가메시가 엔키두에게 반해 그를 친구로 삼게 된 것은 그의 어마어마한 힘 때문이다. 길가메시가 좋아하는 것은 힘이다. 왜냐하면 그 힘으로 정복하고 지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두 남자가 힘을 합쳐 처음으로 한 일이 바로 삼나무 숲을 지키는 훔바바(Humbaba)를 죽이고 훔바바의 힘을 빼앗아 온 것이다.
그들이 훔바바를 죽이는 장면은 무척 잔인하다. “그는 도끼를 옆에 들고 허리춤에서 칼을 뽑았다. 그는 훔바바의 목을 내리쳤다. 두 사람은 훔바바의 오장육부를 해체했는데 혀를 비롯해 허파까지 몸속 모든 것을 파냈다. 길가메시는 가마솥 안에 그의 머리를 집어넣었다. 무언가가 무더기째로 산 위에 떨어지고 있었다. 그들은 삼목 숲을 잘라 내고 있었다.”
이것이 영웅이 자연을 대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길가메시 서사시의 저자는 바로 영웅의 이런 모습을 찬양한다. 자연과 싸우고 자연의 신성을 파괴하면서 영웅은 자연의 힘을 빼앗아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길가메시는 훔바바를 죽임으로써 신들의 비밀스러운 성소의 문을 열었고 훔바바의 주변을 감싸고 있던 일곱 후광을 취했다. 길가메시는 자신의 무력을 도구 삼아 신이 되기를 원했고 신이 되기 위해 신성한 것들과 싸워 이기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그토록 원하던 영생을 얻지 못하고 결국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길가메시가 영생을 얻기 위해 벌인 이러한 투쟁은 과거 그의 선대에서 신들의 제왕으로 숭배받던 마르두크(Marduk)가 태초의 어머니 여신에게 한 행동과도 유사하다. 바빌로니아 지방에서 섬김을 받던 최초의 여신은 티아마트라고 불리는 바다의 여신이었다. 티아마트에게는 아프수(Apsu)라고 불리는 남편이 있었다. 둘 모두 물의 신이었는데 티아마트가 짠물의 신이라면 아프수는 민물의 신이었다. 이 둘은 여러 자식을 낳았고 그러면서 세상은 차츰차츰 질서 잡혀 갔다. 그러나 신들의 자식이 많아지다 보니 세상이 너무 시끄러웠다. 참다못한 아프수는 자식들을 없애 버리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들을 낳은 티아마트가 그러는 남편을 말렸다.
그러다 어느 날 아누(Anu) 신이 커다란 회오리바람을 일으켜 세상을 뒤죽박죽으로 만드는 바람에 큰 신들의 분노를 불렀다. 이 바람 때문에 티아마트의 분노는 폭발 지경에 이르렀고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자식들의 시끄러운 장난을 두고 볼 수가 없었다. 티아마트는 자식들을 없애 버리기로 작정하고 괴물뱀들을 만들어 냈다. 신들의 막내이자 강력한 젊은 신이던 마르두크가 할머니뻘 되는 티아마트와 싸우는 데 선봉에 섰다. 그는 거대한 바다용으로 변해 입을 벌리고 있는 티아마트의 입 안에 악한 바람을 불어 넣었다. 티아마트가 주춤거리는 사이 그는 티아마트의 입속에 화살을 퍼부었고 마침내 화살이 그녀의 심장을 꿰뚫었다. 태초의 여신은 그렇게 숨을 거두었고 마르두크는 여신의 머리를 몽둥이로 으깨어 버렸다. 그러더니 포를 뜨듯이 여신의 몸을 반으로 갈라 한쪽은 하늘에 붙이고 한쪽은 땅에 붙들어 매었다. 이 일로 해서 마르두크는 신들의 제왕이 되어 모든 것을 다스렸다.
조지프 캠벨은 이 신화가 원시 모권 사회를 침략한 부권적 유목민들이 스스로의 침략과 지배의 정당성을 만들어 내기 위해 토착 원주민들의 신들을 깎아 내린 결과라고 지적한다. 흔히 괴물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여신은 대부분 부권적 유목민들의 ‘신화적 비방’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번개를 휘두르고 무기를 휘두르는 남신이 신들의 왕으로 등장하면서 그 이전의 어머니 신들이 괴물의 모습으로 바뀐다. 얼굴을 마주친 사람을 돌로 만들어 버린다는 머리카락이 뱀으로 이루어진 메두사, 수많은 머리가 달린 물뱀 히드라, 사자와 염소와 뱀의 결합체인 키마이라(Chimaera) 등은 모두 태고적 땅을 움직이는 생생한 생명력을 나타내는 존재였다. 이 괴물 여신은 모두 남성 영웅에 의해 살해당한다. 이들 모두 인간중심적인 질서에 방해가 되는 악한 존재로 간주되는 것이다.
길가메시는 이슈타르 여신을 비방한다. 자신 역시 사랑의 힘에 의해 생명을 얻게 되었는데도, 또한 자연의 피와 살로 이루어진 존재인데도 모든 것을 가져다 준 근원적인 어머니 자연을 부인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자연의 일부분으로 솟아난 인간이 스스로의 근원을 부정하고 자신을 그와는 다른 존재로 규정하고 싶은 것과 마찬가지다. 자연이 자신을 낳았지만 다시 자신을 거둔다는 사실이 영웅에게는 불만스러웠고 한때는 포근하던 자연의 바람이 겨울이 되면 차가워지고, 인간이 만들어 낸 모든 구조물의 재료를 제공하고 방법을 알려준 자연이 그것들을 부패하게 만들고 흔들리게 만든다는 사실이 영웅에게는 참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가 원하는 것은 자연이 지닌 이 변덕스러움을 길들여 언제나 풍요를, 언제나 안전을, 언제나 쾌락을 유지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러기 위해 조종하고 정복하며 빼앗고 축적한다. 영생을 얻으러 길을 떠난 길가메시에게 이슈타르의 유혹이 헛소리로 여겨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의 욕망은 자연을 정복하는 것이지 자연의 뜻에 따라 찾아오는 잠깐의 기쁨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길가메시를 비롯한 영웅들이 개척한 세계 속에 살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는 그들이 원하던 것처럼 인간중심적으로 질서 잡혀 있고 자연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해 보인다.
우리는 내일이 오늘과 별로 다르지 않을 것이고 앞으로의 미래도 예측가능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산다. 예측 가능한 미래를 준비해 주는 수많은 제도적 장치와 상품이 우리 주변을 에워싸고 있으며 그러한 것들이 만약 아무런 쓸모가 없는 상황이 다가온다면 우리 모두 패닉 상태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혹시 아는가. 여신이 아직도 길들여지지 않아서 변덕이 살아남아 있을지도 모를 일 아니겠는가.
<삶의 길목에서 만난 신화 | 김융희 >
- ・ 김산해,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 휴머니스트, 2005, 159쪽.
- ・ 조지프 캠벨, 《신의가면 Ⅲ: 서양 신화》, 이진구 옮김, 까치, 1999, 99쪽.
이슈타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슈타르???원래 이름소속 그룹행성배우자탈것페니키아 동등신그리스 동등신
하늘의 여신 | |
인안나 | |
여신 | |
금성 | |
두무지 | |
마안나 | |
아스타르테 아나트 |
|
아프로디테 아테나 |
이슈타르(아카드어: ???) 또는 인안나(수메르어: ?)는 메소포타미아 신화에 나오는 미와 연애, 풍요와 다산, 전쟁, 금성의 여신이다. 수메르인들에게는 인안나(lnanna, 하늘의 여왕), 아카드인들에게는 이슈타르(Isthar), 페니키아인들에게는 아스타르테(Astarte)로 불렸으며 오늘날에는 아카드어 이름인 이슈타르로 많이 알려져 있다. 아누의 딸이며, 니네베와 아벨라(에르빌)에서 특히 숭배되었다. 수메르 이름 중에는 인닌 , 엔닌 , 닌닌 , 닌니 , 니난나 , 니나르 , 인난나 , 엔닌나 , 이르니나 , 인니니 , 나나 그리고 닌 등 다수이름을 포함한다. 이 이름들은 공통적으로 하늘의 여신이라는 Nin-ana에서 비롯되었다. 인닌, 닌니,닌아나, 이르니나의 표현들은 발생단계부터 독립적인 여신의 형태로 나타난다.
기원
이슈타르와 두무지
이슈타르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잘 알려진 여성 수호신이다. 우루크시대 초기 BC 4000-3100년경, 이슈타르는 우루크 도시와 연관이 있다. 유명한 우루크의 화병에는 여성 통치자로 보이는 이에게 벌거벗은 남자들이 다양한 물품 즉 그릇과 선물 그리고 농산물 바구니와 양과 염소를 데리고 줄서서 선물을 가져오고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 모습은 하인들이 참석한 신성한 결혼식의 모습이다.
여성의 모습은 문설주에 꼬인 두개의 갈대상징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녀 뒤에 이슈타르임을 알리는 표식이 있고 남자의 모습은 퇴적더미와 상자를 포함하고 있는데 후에 EN을 상징하는 설형문자이거나 높은 성전 대제사장을 나타낸다. 특히 우루크시대에 고리달린 문설주의 상징은 이슈타르와 연결된다.
예배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사이에는 이슈타르와 관련된 많은 신사와 불각들이 있었다. 에안나 성전은 우루크에서 '하늘의 집' 또는 '안의 집'을 의미하며 신성한 매춘이 일반적인 관행으로 이루어지는 가장 중요한 곳이었다. 또한 레이크에 따르면 성별이 없거나 혹은 자웅동체의 몸을 가지고 있는 여성스러운 남자들이 이슈타르 사원의 예배와 의식 관행에 참여할 수 있었다.
네 번째 천년의 도시의 신은 본래 안(An)이었다.후에 이슈타르에게 헌신된 후 여신을 위한 여성사제의 집이 된 것으로 보인다. 연중행사로 봄을 알리는 춘분에 거룩한 결혼 혹은 신성한 혼례식에서 최고 여사제는 이슈타르의 배우자인 양치기 두무지로 재현되는 젊은 남자를 그녀의 침실로 부를 수 있었다.
도해
인안나의 별 상징
이슈타르의 상징은 여덟개의 뾰족한 별 혹은 장미매듭이다. 그녀는 힘의 상징인 사자와도 연결되어 있는데 종종 두마리의 암사지 뒤에 서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녀의 쐐기문자는 창고 문설주에 꼬인 갈고리 모양의 매듭으로 표현된다.
이슈타르의 별 비너스
이슈타르는 하늘 행성인 금성과 관련이 있다. 그녀의 아스트랄 발현으로 이슈타르의 찬가가 있다. 그것은 이슈타르와 에레슈키갈의 명계하강을 포함한 인안나에 관한 많은 신화에서 그녀의 움직임은 금성의 움직임에 대응하는 것으로 믿어왔다. 지구 가까이 위치한 금성이 하늘을 가로질러 다소 불규칙하게 이동하고 금성은 아침과 저녁 모두 서쪽과 동쪽에서 뜬다.
비너스의 변덕스런 움직임 때문에 일부 문화에서는 비너스를 개별적인 개체로 인식하고 오히려 두개의 별이 아침과 저녁 각각의 수평선에 나타나는 것이라고 인지하였다. 비너스의 이상한 움직임은 신화뿐만이 아니라 이슈타르의 엉뚱한 성격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신화
엔메르카르와 아라타의 왕
아라타는 우루크와 똑같은 구조로 지어진 도시로 아라타에는 우루크에 필요한 천연자원이 있었다.(금,은,라피스 라줄리) 우르크의 왕 엔메르카르는 아라타로부터 돌을 가져와 우루크에 신전을 지을 수 있도록 이슈타르에게 요청을 하자 그녀는 주비 산맥을 가로질러 아라타 왕에게 성전을 짓기 위한 귀중한 금속을 요청하는 전령사를 보내라고 말했다.그 메신저는 이슈타르를 찬양하는 방법으로 여러 관문을 통과하여 아라타의 왕에게 그의 명령을 전달했지만 아라타왕은 우루크의 요구를 이행할 수 없다고 거절하자 그는 당황했고 에안나 사당을 지으면 이슈타르가 기뻐할 것이라고 알려주었다.아라타의 왕은 우루크의 왕 엔메르카르에게 아라타는 지금 심한 기근에 시달리고 있기 때문에 아라타로 보리를 보내라고 요구했다. 엔메르카르는 남자들을 동원하여 그들에게 음식을 보냈지만 아라타의 왕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다.
이슈타르의 명계 하강
이슈타르의 명계 하강은 설형문자로 된 문서에 기록된 이야기로 이슈타르가 어떠한 이유로 명계를 찾아가는 것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슈타르가 명계로 내려간 이유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자신의 연인 탐무즈를 찾기 위해서, 또는 생명의 여신으로서 죽은 자의 세계를 정복하기 위해서 배다른 자매인 언니 에레쉬키갈이 다스리는 명계로 갔다고 한다. 명계에서는 누구도 한번 가서 돌아올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어기고 명계의 비밀을 알고나서 돌아올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것은 언니 에레쉬키갈의 분노를 사게 된다.
이슈타르는 지하 세계로 내려가기 전, 7가지 신권을 모아 의장으로 변화시켜 몸에 걸쳤다. 그리고 시녀 닌슈부르에게 자신이 사흘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으면 지혜의 신 엔키에게 도움을 청하라 일렀다.
지하 세계에 도착하자 에레쉬키갈의 계획을 전달 받은 문지기는 이슈타르에게 7개의 문을 차례대로 열게 하여 하나의 문을 지날 때마다 그녀가 걸치고 있던 7가지 의장 중 하나를 벗기도록 하였다. 이것은 에레쉬키갈이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이슈타르의 7가지 신권을 제거하고자 하였던 것이며, 저승에 갈 때는 이승에서 누리던 모든 권력을 버려야 함을 의미하기도 하였다.
이슈타르가 문을 지날 때마다 그녀의 왕관, 청금석 구슬 목걸이, 구슬 끈, 가슴에 대는 금속판, 금팔찌, 청금석 홀, 예복이 차례대로 벗겨졌다. 벌거숭이가 되어 화가 난 이슈타르는 에레쉬키갈의 방에 도착하였지만 에레쉬키갈은 그녀를 투옥하고 지독한 고통에 시달려 죽게 하였다.
이슈타르가 명계에 내려간 후로 지상의 농작물은 성장을 멈추고 모든 동물의 생식 활동이 멎었다. 이러한 상태로 사흘이 지나자 닌슈부르는 주인이 지시한 대로 지혜의 신 엔키를 찾아갔다. 엔키는 거세된 남자(Asu-shu-namir)를 만들어 그에게 에레쉬키갈에게 가서 위대한 신의 이름으로 그녀에게 대항하여 그녀의 가방에 있는 생명의 물을 요구하라 하였다. 에레쉬키갈은 거세된 남자의 말에 화가 났지만, 어쩔 수 없이 그의 요구대로 생명의 물을 주었다. 거세된 남자가 이슈타르에게 생명의 물을 뿌리자 이슈타르는 되살아났다.
이슈타르가 다시 살아나자 명계의 신들은 명계의 규칙을 지키고자 그녀를 대신할 자를 내놓으라 요구하였다. 이슈타르는 어느 누구도 자기 대신 죽도록 허락하지 않았으나, 자신이 찾던 연인 탐무즈가 지상의 옥좌에 태연히 있는 것에 화가 나 그가 자신을 대신해 저승에 가도록 한다. 이때 탐무즈의 누이 게슈티난나가 그의 대역을 자원하자, 이슈타르는 탐무즈와 게슈티난나가 교대로 명계에서 지내도록 하였다. 이슈타르는 명계를 벗어나면서 7개의 문을 다시 지나게 되고 문을 지날 때마다 자신의 의장을 되돌려 받았다.
길가메시 서사시
이슈타르 문의 사자 부조
지상의 모든 생물 중 이슈타르에게 총애를 받는 자들은 잔인하게 다루어졌다. 이러한 이슈타르의 속성은 길가메시 서사시에서 잘 드러난다. 우루크로 돌아오는 길가메쉬에게 첫눈에 반한 이슈타르가 그에게 청혼하자, 길가메시는 그녀의 애인이었던 남자들의 최후를 익히 알고 있었기에 청혼을 거절한다.
이슈타르의 사랑을 받는 인간은 그 가혹한 정열과 질투로 인해 짐승과 같은 운명을 겪는다는 의미였다. 신들에게 있어서도 이슈타르의 사랑은 치명적이었는데, 길가메쉬에 의하면 추수의 신 두무지도 그녀에 의해 죽음을 맞게 되었다 한다.
길가메쉬의 말에 화가 난 이슈타르는 그를 저주하여, 천신 아누에게 부탁하여 하늘의 황소 구갈안나를 풀어 복수하고자 한다. 하지만 길가메쉬와 엔키두가 구갈안나를 죽임으로써 복수는 허사로 돌아간다.[1]
캐릭터
- 이슈타르 - Fate 고대 마수 전선 바빌로니아의 캐릭터
- <위키백과>
<이쉬타르 성문>
어머니 여신과 아들
이슈타르 대신 지하세계로 붙들려 간 탐무즈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탐무즈는 양치기들의 신이라고 하며 고대 수메르에서는 두무지라고 불렀다. 이슈타르의 지하 하강과 관련된 이야기 중에는 그녀가 지하로 내려간 것이 탐무즈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지하세계의 여왕인 에레슈키갈이 탐무즈를 사랑했고 그래서 그가 결국 저승으로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슈타르가 붙들려 간 탐무즈를 구하기 위해 저승으로 갔다는 말이 된다.
이 이야기는 어쩐지 죽은 아내를 구하러 저승으로 여행을 떠난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를 연상시킨다. 오르페우스 역시 뱀에 물려 죽은 젊은 아내를 구하기 위해 저승행을 감행한다. 그리고 그가 저승을 무사히 다녀올 수 있던 것은 그가 연주하는 칠현금의 음악 소리 덕분이었다. 그의 연주 솜씨는 저승의 문을 지키고 있는 무시무시한 개 케르베로스뿐만 아니라 죽은 자를 실어 나르는 저승의 뱃사공 그리고 이미 죽어 울부짖는 혼령들까지도 감화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음악의 힘으로 저승의 왕인 하데스를 설득하는 데 성공했고 아내를 다시 이승으로 되돌려 보내 준다는 허락을 얻어 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아내는 이승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저승의 어두운 길을 완전히 벗어나기 전까지는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을 어겼기 때문이다. 어두운 아래쪽에서 메아리쳐 들려오는 온갖 목소리가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고 그는 결국 최초의 햇빛 자락이 멀리서 비치자 참지 못하고 뒤를 돌아보고 만다. 에우리디케(Eurydice)는 다시 지옥의 나락 속으로 굴러 떨어졌고 오르페우스는 상실감과 후회에 슬퍼하다 디오니소스의 여신도인 마이나데스들에 의해 찢겨 죽게 된다.
알렉상드르 쎄옹, 〈오르페우스의 통곡〉, 1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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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형된 이슈타르 이야기 속에서는 저승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이슈타르를 구하러 에아 신이 한 방랑가객을 보내 에레슈키갈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내용도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슈타르 이야기에 오르페우스 신화가 섞여 든 것 같다. 사실 그리스 신화보다 수메르 신화가 더 오래되었고 그리스 신화의 많은 부분이 주변 나라인 바빌로니아나 이집트로부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 한 예로 이슈타르와 탐무즈 이야기가 그리스로 가서 만들어진 것이 아프로디테와 아도니스(Adonis) 이야기다.
아도니스는 아프로디테가 사랑한 젊고 잘생긴 양치기였고 여신은 인간인 그의 안부가 늘 불안했다. 걱정이 사건을 부른다고, 아도니스는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멧돼지 뿔에 받혀 죽고 만다. 몸에서 피를 철철 흘리는 채로 쓰러져 있는 아도니스를 붙들고 여신은 울부짖었다. “너는 인간이라 죽을 수밖에 없지만 나는 너를 보내지 못하겠다. 네가 쓰러져 죽은 자리에 해마다 너의 피처럼 붉은 꽃이 피어나리라. 한 번 바람이 불면 피지만 또 한 번 바람이 불면 지는 꽃, 아네모네(anemone)라 부르리라!” 아도니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은 저승의 여왕인 페르세포네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사랑의 여신에게 사랑을 받은 양치기인 아도니스의 이름은 ‘아돈’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아돈’은 시리아에서 주님이라는 뜻이다. 그뿐만 아니라 멧돼지는 아돈의 신성한 동물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멧돼지에 받혀 죽었다는 아도니스는 사실 일종의 와전이다. 그러나 와전은 신화가 가지는 고유의 속성이다. 신화는 와전을 거쳐 변형된다. 그리고 변형의 주체는 신화를 말하고 듣고 전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이다.
어쨌든 두 신화 모두 사랑의 여신과 아들 같은 연인의 죽음이라는 사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의미를 파헤치기 위해서는 고대 여신들에 대한 심층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원래 이 세상에 처음으로 생겨난 신은 모든 것을 말로 창조하는 야훼도, 번개를 휘두르는 제우스도 아니다. 최초의 신은 남신이 아니라 여신이었기 때문이다. 인류가 신을 상상하면서 처음으로 떠올린 이미지는 아버지가 아니라 어머니다. 우리를 낳고 기르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보다 더 크고 강력하면서도 사랑의 힘으로 충만해 있는 신의 존재를 상상해 냈다.
여신들의 이름으로 숭배받던 사랑의 힘은 세상 모든 것을 생겨나게 하고 움직이게 하며 변화시키는 근원적이고 위대한 힘이었다. 그러나 인간의 의지대로 좌지우지되는 힘이 아니었다. 그 힘은 알 수 없는 끌림에 의해 찾아왔다가 다시 알 수 없는 바람에 이끌려 멀리 사라져 버린다. 사랑이 찾아오면 모든 것은 생기를 되찾고 기쁨에 노래 부르지만 사랑이 떠나면 고독과 고통과 황량함이 세상을 휩쓴다. 그러나 사랑은 아주 사라지는 법이 없어서 어느 날 예기치 않은 때에 다시 찾아들어 잊고 있던 행복을 다시 가져다주기도 한다. 모든 것은 사랑의 힘을 주관하는 인간 너머의 의지에 달려 있다는 믿음이 생겨났고 힘의 근원은 당연히 여성이었다. 모든 암컷은 사랑을 통해 새끼를 잉태하며 낳고 기른다. 그녀들의 사랑이 세상에 기쁨과 풍요를 가져오는 것이다.
그런데 태초의 어머니 여신의 모습은 그리스 신상들이 보여 주듯이 우아한 아름다움만을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이난나-이슈타르만 해도 올빼미의 발톱과 날개, 양손에 뱀을 움켜쥐고 있는 모습이며 에페소스(Ephesos)에 있는 아르테미스 여신상은 열 개가 넘는 젖가슴을 포도송이처럼 늘어트린 모습이다. 그뿐만 아니라 수메르의 태초의 여신 티아마트(Tiamat)는 거대한 바다용 모습을 하고 있다. 태초의 어머니 여신은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을 낳고 기르며 다시 거둬 가는 힘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여신은 자연의 힘 그 자체다. 따라서 그녀는 자연이 그러하듯이, 때로는 따스한 바람과 꽃향기와 탐스러운 열매로 나타나지만 때로는 사나운 동물의 울부짖음으로도, 비바람으로도, 동식물의 생명을 앗아가는 폭풍우나 산불로도 나타날 수 있다.
에페소스에 있는 아르테미스 여신상, 1세기, 터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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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여신으로 각인된 이슈타르나 아프로디테 여신은 실은 자연의 모든 생명을 움직이는 통합된 어머니 여신이었다. 태초의 여신들은 어떤 특정 분야만 담당하는 분화된 존재가 아니었다. 자연이 지닌 이중적 면모를 모두 통합한 신성이었고 그 통합된 힘의 이름이 사랑인 셈이다. 분화된 신격으로서 아프로디테는 사랑의 여신이면서도 마치 사랑이 우주의 여러 부분 가운데 하나라는 인상을 준다. 왜냐하면 나머지 다른 여신들이 제각기 자신만의 독자적인 지배영역을 지니고 있는 것으로 그려지면서 사랑 역시 여러 다양한 기능 중에 하나로 보이는 것이다.
태초의 어머니 여신은 근원적으로 사랑의 여신이다. 그리고 그녀의 사랑이 이런저런 다른 모습으로 드러날 뿐이다. 이슈타르는 사랑의 여신이면서 동시에 전쟁의 여신이다. 이시스는 사랑의 여신이면서 암소들의 여신이며 모든 파라오의 어머니신이다. 아르테미스는 사냥을 즐기는 신경질적인 처녀 여신으로 그려지지만 원래는 에페소스 지방의 태모신이었다. 그녀 역시 사랑의 여신이자 어머니 여신이다. 모든 여신은 낳고 기르고 다시 거둔다.
왜 아르테미스나 아테네를 처녀 여신이라고 할까? 처녀를 뜻하는 ‘버진(virgin)’은 결혼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가부장제의 규율에 얽매이지 않은 여자, 누구의 여자도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이슈타르 역시 처녀 여신이며 페르세포네는 하데스의 부인이면서도 영원한 처녀를 뜻하는 ‘코레(Kore)’로 모셔진다. 예수를 낳은 마리아 역시 성처녀 아닌가. 모든 어머니 여신은 성스러운 처녀다. 성스러운 처녀이자 성스러운 어머니 여신인 사랑의 여신들은 지역마다 다른 이름으로 불린다.
키프로스 섬에서는 아프로디테로, 에페소스에서는 아르테미스로, 그리스에서는 아테네로, 시리아에서는 아스타르테로, 이집트에서는 이시스로 불렸다. 그녀들은 각자 다른 신이 아니라 하나의 태모신을 부르는 다른 이름이다. (사랑의 여신이자 태모신이던 아프로디테가 사랑만을 주관하는 아름다움의 여신으로 정리된 것은 제우스라는 번개를 휘두르는 남신이 올림포스 신전 중심 신들의 권좌의 왕이 되고 난 이후의 일이다. 신화 계보에 따르면 그녀는 제우스의 할머니뻘이 된다. 모든 것을 주관하는 여신의 자리에서 강등되어 축소된 아름다움의 여신으로, 나중에는 급기야 창녀들의 여신으로 추락하고 마는 신세가 된다. 이와 같은 여신의 추락은 가부장제의 발달과 함께 벌어진 사랑과 자연에 대한 지위 하락과 관계가 깊다.)
그녀가 낳은 것들 중에 하나가 인간이다. 그리스 신화에는 이미 자신의 아들과 결혼하는 여신의 이야기가 즐비하다. 어머니 여신은 아들을 낳고 그의 연인으로 변신한다. 그녀가 연인으로만 변신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연인의 생명을 앗아가고 그를 위험에 처하게 하는 악녀로 변신하기도 한다. 여신과 그의 연인으로서 아들 이야기는 사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것은 그저 큰 생명이 작은 생명들을 낳고 품고 기르고 다시 자신의 자녀들과 연결되고 합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해야 한다.
탐무즈의 희생이나 아도니스의 희생은 어머니 여신이 낳은 자식들을 다시 거둬 가고, 거둬 간 자식들을 다시 되돌려 준다는 이야기다. 탐무즈는 때가 되면 이슈타르의 영토에서 떠나 에레슈키갈의 영토로 내려가야 한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적당한 때가 되면 또 다시 지상의 이슈타르 품으로 되돌아온다. 여신의 아들인 탐무즈를 두 여신이 나눠 가지는 셈이다. 아니 거꾸로 여신의 아들이 어머니 여신의 두 면모를 번갈아 경험하는 것이다. 사실 이 두 여신이 한 여신의 두 얼굴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신화 속에서 자매나 모녀 관계로 그려지는 신은 모두 하나의 자연이 지닌 두 얼굴을 나타낸다. 이슈타르가 밝고 빛나는 모습으로 하늘 아래 세상을 움직인다면 에레슈키갈은 어둡고 일그러진 모습으로 땅속 세계를 움직인다. 지상과 지하로 그려지는 두 세계는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이 전체로서 한 사람의 다른 측면인 것처럼 사실은 하나다. 그녀의 자식들이 이 두 세계를 오가는 것이다.
비슷한 구조를 가진 또 하나의 신화가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 신화다. 밀의 여신인 데메테르는 전형적인 태모신 중에 하나다. 그의 딸인 페르세포네는 어느 날 지하세계의 왕인 하데스에게 납치되어 그의 신부가 된다. 갑자기 사라진 딸을 찾느라 데메테르 여신은 거의 혼이 나갈 지경이 되었다. 아무도 딸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이야기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데스 역시 에레슈키갈만큼 두려운 존재여서 아무도 입을 열려 하지 않은 것이다. 갑자기 딸을 잃어버린 데메테르는 사방을 찾아 헤매지만 딸을 찾을 수 없었다. 시름에 빠진 데메테르는 들판을 보살피지 않았고 그러자 밀은 시들고 과일나무는 열매를 맺지 않게 된다.
그러던 어느 날 외딴 곳에서 밤을 지키던 달과 마법의 여신 헤카테의 귀띔 덕분에 사실을 알게 된 데메테르는 딸을 찾아 지하세계로 내려간다. 하지만 딸을 완전히 되찾아 올 수는 없었다. 페르세포네는 지하세계에서 석류 세 알을 먹은 대가로 1년 중 석 달은 지하세계에 머물러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가 지하세계의 여왕으로 있어야 하는 석 달 동안 데메테르는 하데스에게 딸을 빼앗긴 슬픔에 젖게 되고 그 석 달 동안 지상의 초목은 모두 말라붙어 황량한 계절이 되고 만다. 딸이 다시 땅 위로 올라오면 데메테르는 기쁨에 가득 차게 되고 여신의 기쁨은 대지를 부활시킨다.
이런 식으로 반복되는 여신들의 지하세계 하강과 지상으로 귀환 신화는 농경시대 이후 생겨난 식물의 생장과정과 관계가 깊다고 해석할 수 있다. 밀을 주식으로 하는 지중해 지방에서 한여름은 너무 더워 모든 것이 말라죽고 만다. 이때가 바로 데메테르가 딸을 잃고 슬퍼하는 기간이다. 그러나 잃어버린 줄 알았던 딸은 한여름이 지나고 날씨가 선선해지기 시작하면 다시 지상으로 돌아온다. 이때 데메테르는 잃어버린 딸과 다시 재회하고 그녀의 기쁨과 함께 지상의 모든 것이 생기를 되찾는다.
페르세포네와 데메테르 이야기는 특히 그리스 지방에서 오랫동안 거행되던 신비제전의 주제였다. ‘테스모포리아(Thesmophoria)’ 또는 ‘엘레우시스 신비제전’1) 이라고 부르는 데메테르 제전에서는 참가자들이 이 이야기가 담고 있는 우주적 의미를 실제 체험하고 삶을 다른 눈으로 다시 바라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엘레우시스 제의는 말 그대로 미스테리움(mysterium), 말하자면 비밀제의였다. 참가자들이 보고 듣고 체험한 것 들에 대해 침묵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때문에 이 제의의 자세한 내용은 아직도 어둠에 잠겨 있다. 그러나 밝혀진 자료들에 따르면 제의는 크게 세 단계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 첫 번째는 코레의 ‘지하 하강’, 두 번째는 데메테르 여신이 딸을 찾아 헤매 다니는 ‘방랑’, 세 번째는 코레의 귀환과 데메테르 여신과의 ‘재결합’이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트립톨레모스(Triptolemos)라는 아들이 태어난다. 그는 그리스에 밀 재배 방법을 알린 신적인 존재라고 한다.
데메테르와 코레 사이의 트립톨레모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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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 단계는 지중해 지방에서 밀이 땅 속으로 들어가 여름을 보내고 다시 지상으로 올라와 싹을 틔우는 과정을 나타낸다. 가을에 다시 들판이 밀로 뒤덮이기 위해서 밀의 씨앗은 땅속으로 내려갔다 올라와야 한다. 엘레우시스 제의는 나중에 디오니소스 제의와도 겹쳐지는데, 포도가 포도주가 되기 위해 땅속에서 숙성기간을 거치는 과정과 밀의 생장과 발육 과정이 비슷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시리아에서 아도니스의 죽음이나 바빌로니아에서 탐무즈의 지하 하강 역시 이와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다.
바빌로니아에서는 7월을 탐무즈의 달이라고 부른다. 탐무즈가 지하세계로 내려가 지상에서는 모든 것이 말라죽어 버리는 달인 셈이다. 이때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탐무즈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러나 페르세포네가 다시 지상으로 귀환하듯이 탐무즈도 때가 되면 다시 부활한다. 끝날 것 같지 않던 더위와 가뭄도 때가 되면 사라진다. 여신이 돌아오면 또는 여신이 사랑하는 연인이 돌아오면 여신은 생기를 되찾고 지상의 생명도 기쁨으로 채워진다. 활기와 사랑과 풍요가 되돌아오는 셈이다.
이러한 죽음과 부활의 드라마는 비단 밀의 문제만은 아니다. 엘레우시스 제전이 지니고 있던 힘은 이러한 드라마가 우리의 삶 속에서도 벌어지고 있으며 죽음처럼 보이는 사건이 실은 단순한 사라짐 이상의 깊은 의미를 담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생겨난다. 페르세포네가 나뉜 두 세계를 오고 갈 때 그녀는 지하세계의 풍요로움을 지상으로 옮기는 역할을 한다. 이슈타르가 지하세계를 방문함으로써 더 강력해졌다는 점을 기억하자. 하데스의 영토, 에레슈키갈의 영토는 겉보기에는 불모의 영역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지상의 풍요로움이 뿌리내리고 있는 토대다. 모든 식물은 땅속에 뿌리를 박고 있지 않은가. 어둠속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서 식물은 자라날 수도, 꽃을 피울 수도, 열매를 맺을 수도 없다. 비단 식물뿐만이 아니다. 생명을 낳고 그것에 자양분을 제공해 주는 것은 어둠속에 잠겨 있는 지하세계의 어머니 여신이다.
페르세포네는 지하의 데메테르다. 그녀는 지하세계가 감추고 있는 생명의 뿌리에 자양분을 제공해 준다. 에레슈키갈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지하의 이슈타르다. 모든 어둠의 여신은 바로 지상에서 우리가 먹고 마시고 즐기는 모든 풍요를 가능케 해 주는 위대한 신성이다. 그리고 둘처럼 보이는 이들은 실은 하나다. 검은 달과 만월이 달의 두 모습이듯, 새벽에 떠오르는 샛별과 초저녁에 떠오르는 초저녁별이 금성이라는 한 별의 두 모습이듯 자연을 대표하는 어머니 여신은 성나고 노한 모습으로 나타나건 부드럽고 자애로운 모습으로 나타나건 모두 우주적 사랑이라는 한 힘의 다른 모습이다.
참고문헌
- ・ 세르기우스 골로빈 외, 《세계 신화 이야기》, 이기숙 · 김이섭 옮김, 까치, 2001, 258쪽.
- ・ Edward A Beach, The Eleusinian Mysteries
루시퍼
영웅시대 이후로 이루어진 여신에 대한 신화적 비방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원래 태모신이었지만 사랑의 여신이나 달의 여신, 전쟁의 여신 등으로 분화된 여신들의 위상은 부권사회가 대제국 형태를 띠면서 더 축소, 강등된다. 특히 사랑의 여신으로 추앙받던 여신들의 경우는 그 강등과 비방의 정도가 더 심해서 로마시대 후기에 이르자 아프로디테 여신의 위상을 계승한 비너스나 메소포타미아의 이슈타르 여신, 시리아의 아스타르테 여신은 창녀들의 여신으로 바뀌는 수모를 겪어야만 했다.
사랑의 여신들은 주로 하늘의 금성과 연관된다. 알다시피 금성의 영어 명칭은 비너스다. 메소포타미아에서는 금성을 이슈타르-이난나라고 불렀다. 이슈타르의 상징 중 하나가 아홉 개의 꼭짓점을 가진 별이다. 그런데 금성의 다른 이름 중에 하나가 ‘루시퍼(Lucifer)’였다고 한다. ‘루시퍼’는 ‘빛’을 뜻하는 ‘룩스(lux)’에 ‘가져오다’라는 뜻의 ‘페레(ferre)’가 합쳐진 말이다. 다시 말해 ‘루시퍼’는 ‘빛을 가져오다’라는 뜻이며 샛별을 뜻하는 라틴어였다. 말하자면 이슈타르이자 아프로디테가 루시퍼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루시퍼’를 악마라고 알고 있는 걸까?
기독교가 국교가 되고 로마제국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잡게 되면서 지중해 지역에 폭넓게 퍼져 있던 다신교 신앙체계와 심각한 갈등을 빚는다. 무엇보다도 교부들의 골칫거리는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는 여신숭배 관습이었다. 기독교는 여성의 관능을 죄의 근원으로 자리매김한 종교였고 이브에 대해서 그랬듯이, 관능적 사랑의 여신들에 대해 아주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였다. 수십 개의 젖가슴을 지닌 에페소스의 아르테미스나 자신의 가슴을 두 손으로 떠받치고 당당하게 서 있는 이슈타르의 모습은 이들에게 불편하다 못해 악마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눈엣가시 같은 여신숭배를 뿌리 뽑을 수 없던 이들은 지중해 지역에서 숭배받는 여신들의 이런저런 면모를 끌어모아 ‘성모 마리아’의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성모 마리아는 사랑의 여신처럼 무한한 사랑을 베풀어 주지만 남성과 몸을 섞은 적이 없고, 이브처럼 뱀의 유혹에 넘어가지도 않으며 결혼했는데도 페르세포네처럼 영원한 처녀로 신의 아들을 낳는다. 또한 아프로디테처럼 연인과 같은 아들을 잃고 슬퍼하며 이집트의 사랑의 여신 이시스처럼 아들을 무릎에 앉혀 놓고 아들의 성스러움을 뒷받침해 주며 이슈타르처럼 빛나는 존재가 된다. 르네상스시대의 이러한 이미지 합성은 더욱 심해져서 마리아의 머리 위에 아프로디테의 아들인 에로스가 그려지고 마리아는 아프로디테와 완전히 동일시된다.
호루스를 안고 있는 이시스, 기원전 600~400, 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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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의 이미지는 사랑의 여신이 가진 요소 가운데 가부장적 일신교가 불편해 하는 요소를 모두 뺀 나머지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증오한 부분이 바로 관능이었다. 그들에게는 남성의 내면에 자리 잡은 성욕이 아마도 골칫거리였던 듯싶다. 금욕을 통해 신성에 이르고자 하는 시도는 중세의 기독교뿐만 아니라 축의 시대 이후 대부분의 남성 종교가 지니고 있는 공통점이다. 감각적 쾌락은 그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여 세계의 실상을 바라보고자 하는 의지를 무력화하기 일쑤였다. 플라톤과 피타고라스가 몸담았던 오르페우스 신비종교도 그러했고, 이시스를 모셨던 이집트 신비종교도 그러했다. 세계의 실상을 보고자 하는 자는 모든 감각적 유혹을 물리쳐야 했고 그중 마지막 시험이 바로 관능의 유혹이었다. 일정 기간 동안 감각적 쾌락을 포기할 뿐만 아니라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먹고 마시고 잠자는 모든 욕구를 포기함으로써 이전에는 볼 수 없고 알 수 없던 세계에 눈뜨는 것은 신비종교의 입문자와 샤먼의 필수 코스다.
길가메시가 이슈타르에게 퍼부은 저주는 오랫동안 대물림되어 오늘날까지도 남성 영웅들은 어머니 여신의 몸인 자연에 저주를 퍼붓고 나무를 무더기로 뽑아내고 산을 없애고 강과 바다를 유린한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까지 이어진 유럽의 마녀사냥은 과거의 태모신들을 악마적 존재로 여기는 남성적 신경증이 폭발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 기간 동안 자그마치 600만 명의 여성이 학살당했다.
악마로 낙인찍힌 ‘루시퍼’, 금성은 밤하늘에서 누구든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아주 밝은 별이다. 우리말로 ‘샛별’, ‘초저녁별’로 불리며 한자로는 ‘태백성(太白星)’이라 한다. 이른 새벽 해가 뜨기 전에 동쪽 지평선 위로 떠올라 태양빛이 밝아지면서 사라진다. 그런가 하면 태양이 질 때쯤 서쪽 지평선 위로 떠올라 초저녁 하늘을 밝게 비춘다. 샛별을 자세히 보면 초승달처럼 보인다고 한다. 마치 또 하나의 작은 달처럼 보이기도 한다. 바빌로니아의 천문학자들은 이 별이 일곱 달 반 동안은 아침에 뜨고 다시 일곱 달 반 동안은 저녁에 떠오른다는 사실을 알아 냈다. 이슈타르가 일곱 개의 관문을 거쳐 에레슈키갈의 영토에 이르고 다시 일곱 개의 관문을 거슬러 지상으로 올라오듯이 ‘루시퍼’의 별 역시 그러하다.
일곱은 이슈타르를 비롯해 처녀 여신을 상징하는 숫자다. 이슈타르가 일곱 개의 관문을 오르내릴 때 그녀는 죽음을 경험함으로써 자기 변형을 이룬다. 페르세포네도 마찬가지다. 아르테미스 여신의 상징이자 헤카테 여신의 상징이던 달도 7일이 두 번 지나면 반대 방향으로 기운다. 하늘의 달력 주기는 28일이고 그 주기를 반으로 나누는 지점은 보름달이 떴을 때다. 달의 순환주기를 또 한 번 나누면 7일을 한 묶음으로 하는 주일 개념이 생겨난다. 한 달은 7일이 네 번 반복되는 동안이다.
조르주 루오, 〈아침별〉, 18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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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타르 여신의 별인 금성이 하늘과 땅을 오르내리면서 동쪽 하늘과 서쪽 하늘을 오가듯이 오랫동안 여신의 상징이던 달 역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달 역시 ‘빛을 가져오는’ ‘루시퍼’다. 금성이 변덕을 부리듯이 달도 변덕을 부리며 달이 변화하는 때를 맞춰 여성은 월경을 하고 물고기와 바다 생물 들은 몸을 부풀리고 짝짓기를 한다. 우리 몸속에서 흐르는 바닷물인 붉은 피는 달의 움직임을 따라 여성의 몸을 부풀리기도 하고 쭈그러들게도 만든다. 배란기에 여성은 아름다워지며 목소리 톤은 높아진다. 월경이 끝날 때쯤 그녀의 목소리는 약간 낮아진다. 황소의 뿔은 초승달 모습으로 자라며 개와 늑대는 보름달이 뜨면 달을 보고 울부짖는다.
달이 사라진 사흘 밤 동안 세상은 어둠에 잠기고 오직 하늘의 천장에 매달려 있는 먼 별무리들만이 빛을 밝힌다. 달이 사라지는 사흘은 여신이 지하세계에 거꾸로 매달려 있는 기간이다. 여신이 지하세계로 내려갈 때 우리의 마음 역시 저 너머 어둠 속으로 내려간다. 현대 심리학자들이 무의식이라 부른 어두운 영토 말이다. 하데스의 영토, 에레슈키갈의 영토는 바로 무의식의 영토이기도 하다.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채 어둠에 싸여 있는 곳, 그래서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금단의 땅 그리고 죽음의 땅이기도 한 곳, 그곳이 무의식의 영토다. 거기서 모든 것이 비롯되지만 동시에 형태를 갖추고 명료하던 모든 것이 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사흘이 지나면 약속의 반지처럼 달은 다시 모습을 드러내며 또 한 번 빛의 여정을 시작한다.
고대 입문제의에서 상징적으로 나타난 여신이 바로 이 검은 얼굴의 여신이었다. 엘레우시스 미스테리움이나 이집트 사제들의 입문제의였던 이시스 제의, 이슈타르 여신을 위한 신성결혼(Hieros gamos) 등이 모두 그러하다. 아시리아(Assyria) 사람들은 이슈타르에게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저로 하여금 날마다 행복과 만족을 느끼게 해 주소서! 제가 당신을 경배하오니 저에게 건강과 기쁨을 허락하소서! 제가 원하는 것을 저로 하여금 얻게 해 주소서! 하늘이 당신을 기뻐하고 바다는 당신 위에서 마구 뛰노나니! 우주의 신들이 당신을 축복하기 바라옵니다! 위대한 신들이 당신에게 쾌락을 선사하기 바라옵니다!”
출처: 다음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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