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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선지서

나훔 서론 및 1장

by 은총가득 2021. 10. 8.

1. 저자와 제목

나훔의 이름은 ‘위로’를 의미한다. 본문 1:1은 나훔서의 주제가 ‘니느웨에 대한 경고’이며 ‘엘고스 사람 나훔’이 기록한 묵시의 글이라고 말한다. 

엘고스의 위치는 불분명하지만 나훔은 유다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2. 저작 연대

나훔은 노아몬의 패망(3:8-10)을 잘 알려진 사건으로 언급한다. 노아몬은 테베스의 히브리어 이름이다. 앗수르 왕 앗수르바니팔은 이 성을 주전 664/663년에 점령했다. 나훔은 또한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의 패망을 미래의 사건으로 예언한다. 니느웨는 주전 612년에 메데와 바벨론의 연합군에게 무너졌다. 따라서 나훔서는 주전 664/3에서 612년 사이에 기록된 것으로 추정된다. 

나훔서를 통해서 니느웨는 그 세력의 정점에 있었고 유다는 여전히 앗수르 지배 아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앗수르는 저전 640년 이전가지 그 세력의 절정에 있었고 마지막 황제인 앗수르바니팔(669-627)이 죽은 뒤에 급격한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유다왕 요시아는 앗수르바니팔이 죽은 때인 다스린 지 12년째 되는 해(628/627, 대하 34:3)에 종교개혁을 시작했다. 요시야의 개혁 노력이 유다의 국경을 넘어 확대된 사실(대하 34:6-7)은 아마 유다와 그 인접 지역에 대한 앗수르의 지배가 종식되었음을 암시한다. 

이러한 여러 시기들을 고려하면 나훔서는 주전 660년 경 이후부터 630년 이전에 기록디었을 것이다. 

 

* 역사적 상황

열왕기하는 유다의 아하스와 이스라엘의 므나햄이 디글핫빌레셀과 어떤 관계에 놓여 있었는지 잘 묘사하고 었다. 북 왕국의 므나햄은 디글랏빌레셀로부터 자기 정권의 정당성을 인정 받기 위하여 그에게 은 1000 달란트를 주었다: “앗수르왕 불이 와서 그땅을 치려 하매 므나헴이 은 일천 달란트를 불에게 주어서 저로 자기를 도외주게 함으로 나라를 자기 손에 굳게 세우고자 하여 그 은을 이스라엘 모든 큰 부자에게서 토색하여 각 사람에게 은 오십 세겔씩 내게 하여 앗수르왕에게 주었더니 이에 앗수르왕이 돌이키고 그땅에 머물지 아니하였더라’(왕하 15:19-20, 개역). 유다 왕 아하스는 시리아의 르신과 이스라엘의 베가가 반아시리아 반역에 가담하지 않은 그를 치기 위하여 예루살렘을 공략했을 때, 사람을 보내 디글랏빌레셀의 도움을 받아 위기를 모면했다. 이 일이 있은 후 아시리아의 신을 숭배하는 제단이 예루살렘에 세워졌으며(왕하 16:10-1 이 이들의 정치-경제적인 압박은 나홈 선지자가 활약하던 시대까지 지속되었다.

 

아하스 시대부터 유다는 100 여 년 동안 아시리아의 종속국으로 존재했다. 아시리아는 유다 사람들에게 있어 그들을 억압하는 혹독하고 무자비한 종주국이었다. 이스라엘에게 한없이 잔인하기만 했던 아시리아는 니느웨를 중심으로 형성된 나라였다. 니느웨는 도시 중심을 흐르는 코서강에 의하여 남과 북으로 나뉜 곳이었다. 북쪽 지역은 면적이 남쪽 지역의 두 배에 달했으며, 13 Km의 성벽으로 둘러싸였던 니느웨의 면적은 1,800 에이커 (1 에이커= 4046m2 = 1250평)(총 225 만평) 정도 되었다. 당시 도시 국가치고는 매우 큰 규모라 할 수 있다. 고고학자툴은 니느웨가 주전 5000 년부터 도시로 존재했으며 3,000년 이후부터 이 도시에 이스타르 여신의 신전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스라엘이 한창 가나안에 정착하던 1400-1200 년에 이르러 살만에셀(Shalmaneser 1)과 디글핫벌레셀(Tiglath-pileser 1) 이 대단한 규모의 건축사업을 통하여 니느웨의 규모를 키웠다. 주전 700년경에 산혜립이 니느웨에 새 궁궐을 세우고 아시리아의 수도로 삼으면서 도시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이때까지 아시리아의 수도는 앗술이었태· 산헤립은 도시에 정원들을 세웠고 약 50Km에 달히는 수로 시스템을 건설하였다. 그의 후계자들인 에살핫돈 과 아술바니발도 꾸준히 건축사업을 지속해 나갔다. 특히 아술바니발의 도서관은 수만 점의 흙판 문서가 보존된 상태에서 발굴되어 고고학지들과 역사가들에게 매우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었다. 히스기야가 유다를 통치하던 시대에 산헤립은 유다를 공략하여 히스기야를 예루살렘에 마치 ‘새를 새장에 가두듯이’ 가두어둔 적이 있었다. 다행히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으로 유다는 풍전등화의 위기를 모면했다(cf. 사 36-39; 왕하 18장). 그러나 산혜립이 유다에서 철수한 디음에도 아시리아의 영향력은 유다 땅에서 지속되었다. 므낫세 (697-643)는 바알과 아세라를 중심으로 한 아시리아의 종교를 지향했으며(왕하 21:3), 그의 아들 아몬은 암살될 때까지 2 년 동안 아버지보다 더한 배교행위를 지향했다(왕하 21:23). 아몬이 왜 암살을 당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유다의 외교정책에 변화를 추구하던 자들의 음모에 의히여 저격되었을 것이다.

 

아몬의 아들 요시야가 왕이 되었을 때(주전 641 년) 아시리이는 유다의 종주국으로 이미 100 여 년 동안 군림해오던 상황어었다. 아마도 이때 대부분의 유다 사람들은 옛적 다윗시대에 누렸던 정치적-종교적 독립을 갈망했을 것이다. 이러한 갈망 속에서 아시리아의 마지막 왕 아술바나발이 627 년에 죽자, 요시야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이방종교들의 흔적을 뿌리뽑고자 했으며 바알 제단과 아세라상들을 자신이 보는 앞에서 부수도록 했다(대하 34:3-7). 이 같은 행위는 아시리아의 신들을 거부하며 므낫세의 종교적 복합주의를 지탄하는 것을 의미했다. 

이런 정황에서 볼 때 627년은 고대 근동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도 매우 중요한 해였다. 이 해에 아술바니발의 죽음은 곧 아시리아의 쇠퇴로 이어졌다. 그의 죽음은 아시리아의 내부적 갈등으로 이어졌으며, 반(半)유목민으로 분류되는 키메리오스족, 스키타이족, 메대족 등이 압력을 가해왔다. 지금까지 아시리아의 속국으로 있었던 바벨론에서는 느보가 왕이 되었으며 623년에는 아시리아로부터 독립을 선언하였을 뿐만 아니라, 아예 아시리아 공략에 나섰다. 아시리아는 614 년에 앗술을 메대 사람들에게 빼앗겼으며 612 년에는 느보가 이끄는 바빌론과 메대의 연합군이 수도 니느웨를 공격해서 취했다. 그들은 여세를 몰아 610년에 하란을 힘락시켰으며, 605 년에는 갈그미스 전투를 통하여 아시리아를 지도에서 지워버렸다.

 

아술바니발이 죽은 627 년에 유다에서는 예레미야와 스바냐, 두 선지자가 사역을 시작했다. 선지자들은 이처럼 국제 정세가 불안한 시기에 유다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나훔의 메시지는 이 같은 역사적 배경과 잘 어울린다. 나홈은 예레미야나 스바냐보다 더욱더 강도 높게 아시리아의 종말을 선언함으로써 앞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가 진정한 종교의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니 그때를 위하여 미리 준비하라는 권면을 하고 있다. 게다가 성전올 보수하던 제사장 힐기야가 621 년에 율법 책을 발견한 사건은 이러한 기대와 함께 종교개혁에의 의지를 더욱더 확고하게 하였을 것이다. 율법책이 발견된 후에 이스라엘은 유월절을 지키고 점술가들을 그들의 영토에서 몰아냈다. 이러한 노력을 높이 평가한 열왕기 저자는 요시야를 전무후무(한 왕으로 평가하였다. “요시야와 같이 마음을 다하며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여호외를 향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은전히 준행한 임금은 요시야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그와 같은 자가 없었더라’(왕하 23 :25). 유다의 왕 요시야의 통치기간(641-609 년)이 나훔 선지자의 사역 후반기와 겹친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시 아시리아의 지배하에 힘틀어하던 요시야 왕이 나훔 선지자의 메시지를 통하여 큰 위로를 얻었을 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요시야는 종주국으로 섬기기를 힘들어 하고 괴로워하던 아시리아가 곧 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메시지를 들을 때마다 아마도 앓던 이가 빠지는 시원함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시리아의 최종적인 종말은 지켜보지 못하고 609 년에 므깃도에서 죽었다. 아시리아가 625 년에 제국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지만, 605 년에야 갈그미스 전투에서 이집트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바빌론-메대 연합군에 패하여 지도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엑스포지멘터리 269)

 

3. 주제

주제는 니느웨에 대한 경고로 니느웨에 대한 멸망을 경고한다. 

 

4. 목적, 계기, 배경

나훔은 니느웨의 패망과 앗수르의 멸망을 알릴 하나님의 사자였다. 

나훔서는 요나서의 후속편이자 그와 극적인 대조를 이루는 책이다. 요나는 니느웨성에 대한 구원을 선포했는데 이는 주전 8세기 전반의 어느 시점이었을 것이다. 요나는 큰 성읍 니느웨에 하나님의 임박한 심판을 전했고, 요나의 기대와는 다르게 니느웨의 왕과 백성들을 그 심판의 메시지에 주의를 기울였고 회개 했고 하나님의 심판을 면했다. 

하지만 그 회개는 디글랏빌레셀 3세가 자기 나라를 근동의 주요 군사대국으로 만든 때인 주전 745년 이후까지 지속되지는 않았다. 광대한 앗수르 제국은 피흘림과 학살, 잔혹 행위와 고문, 파괴, 약탈, 역사상 거의 볼 수 없는 국외 추방 등을 통해 세워졌다. 주전 722년에 앗수르는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켰다. 

 

 

5. 핵심 주제

1. 나훔은 여호와께서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오래 참으시지만 (자신의 원수들에 대해서는) 진노하시고 복수하시며 (자신의 영광과 자기 백성을 위해) 질투하는 하나님, 나라들과 역사를 지배하시는 분, 공펑하고 의롭고 위엄 있는 자연의 통치자, 선하고 자비롭고 은혜롭고 인자하고 신실하며, 자신을 믿는 이들의 구원자이자 보호자라고 선포한다.

2. 하나님은 앗수르를 불성실한 이스라엘(북왕국과 남왕국 모두)에게 가하는 채찍으로 사용하셨지만 결국 자신의 시간표와 방법에 따라 앗수르에 마땅히 받아야 할 심판을 내리셨다.

 

3 니느웨는 크고 부유한 이방인의 상업 도시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을 믿지 않고 우장을 숭배하는 도시, 폭력과 정욕과 탐욕의 도시였기 때문에 멸망했다.

 

4.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은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에게 “산성”이시다(1:7). 하나님은 그들의 개인적인 삶의 모든 문제를 무엇이든 해결하실 수 있다. 또한 앗수르보다 더 큰 강대국들도 물리치셨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에게 궁극적인 구원과 명예 회복을 허락하신다.

 

6. 구원사 요약

하나님은 앗수르를 제멋대로인 남왕국을 징벌하는 데 사용하셨지만 유다가 멸절되는 것을 허락하신 것은 아니다. 메시아가 다윗 혈통에서 나오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은 무산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이 지키도록 격려하신 유다의 종교적 절기들(1:15) 은 그들에게 미래의 구주를 상기시켰을 것이다.

 

7. 문예적 특징

선지서인 나훔서는 비록 미래에 있을 유다의 회복이 잠시 암시되기는 하지만,  전적으로 심판의 신탁으로 구성되어 있고 구속이나 복의 신탁은 없다. 책의 후반부에는 조롱(때때로 ‘재앙의 관용구’라고불리는) 재앙의 선포, 생생한 멸망 이야기 등이 포함되어 있다. 어떤 면에서 이 책 전체는 확대된 조롱이다 비유적 표현과 모티프들은 일관되게 군사적인 것들이므로 나훔서는 전쟁시로 간주될 수 있다.

나훔서는 단순히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전투의 전주곡이다. 2~3장은 미리 보기에서 니느웨에대한 일련의 심판 신탁과 니느웨의 멸망에 대한 생생한 그림으로 묘사되는 (마치 직접 목격한 보고자가 진술하듯이 진술되는) 실제 전투로 넘어간다.

 

 

나훔서가 니느웨를 중심주제로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요나서와 비슷하다. 두책 모두 질문으로 마무리되는 점도 비슷하다. 하지만 요나서는 소망적인 질문으로 끝나지만 나훔서는 정망적인 질문으로 마무리된다. 요나서와 나훔서 모두 하나님을 심판하시는 분이시며 동시에 용서하시는 분으로 묘사하는 것은 같다. 그러나 나훔서가 강조하는 것은 심판하시는 하나님이며 요나서가 강조하는 것은 용서하시는 하나님이다. 요나가 경고했을 때 그들은 회개하여 재앙을 면했다. 그러나 나훔이 심판을 선언했을 때에는 귀담아 듣지 않아 멸망당했다. 

소선지서 12권의 순서에서 나훔서는 요엘서, 오바다서, 요나서 등을 뒤따르고 있는데, 이 책들은 한결같이 열방에 대하여 언급한다. 요엘서는 종말에 하나님께서 에돔을 심판하는 일을 통해 온 열방을 심판하실 것을 선언했다. 오바다서 역시 에돔을 표적으로 심판 메시지를 전한다. 요나서에 접어들면서 열방의 상정이 에돔에서 니느웨로 바뀌었다. 요나서는 하나님께서 회개히는 니느웨에게 용서와 자비를 베푸실 것을 선언하지만, 나훔서가 뒤따르면서 니느웨가 요나의 메시지를 듣고 회개하여 일시적으로 재앙은 면했지만, 그들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못하여 마침내 멸망했음을 알린다. 결국 열방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합당하며, 나홈서를 뒤따르는 소선지서들이 이 열방을 몰락시키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점차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8. 아웃라인

Title Verse (1:1)

I. The Character of God (1:2–15)

  1. The Revelation of God (1:2–6)

    (1) The Description of God’s Being (1:2–3)

    (2) The Description of God’s Actions (1:4–6)

  2. The Lord’s Care for Judah (1:7–11)

  3. The Lord’s Word for Judah (1:12–13)

  4. The Lord’s Word to Nineveh (1:14)

  5. The Joy of Deliverance (1:15)

II. The Lord’s Judgment of Nineveh (2:1–13)

  1. Warning to Nineveh (2:1)

  2. Comfort to Judah (2:2)

  3. Description of Nineveh’s Attackers (2:3–5)

  4. Description of Nineveh’s Defeat (2:6–10)

  5. The Hopelessness of Nineveh (2:11–12)

  6. The Lord Fights against Nineveh (2:13)

III. The Woe over Nineveh (3:1–19)

  1. The Destruction of Nineveh (3:1–4)

  2. The Humiliation of Nineveh (3:5–7)

  3. The Weakness of Nineveh (3:8–13)

  4. The Hopelessness of Defense (3:14–19a)

  5. The Joy in Justice (3:19b)

 Kenneth L. Barker, Micah, Nahum, Habakkuk, Zephaniah, vol. 2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9), 157.


 

 The Holy Bible: English Standard Version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16), 나 1.

 

1 니느웨에 대한 경고 곧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라

니느웨에 대한 여호와의 진노

2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3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 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아니하시느니라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로다

 

4 그는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시며 모든 강을 말리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시드는도다

 

5 그로 말미암아 산들이 진동하며 작은 산들이 녹고 그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들이 솟아오르는도다

6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도다

7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8 그가 범람하는 물로 그 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

 The Holy Bible: New Korean Revised Version, electronic ed. (South Korea, n.d.), 나 1.

 

 

1절) 니느웨에 대한 경고, 엘고스 사람 나훔의 묵시의 글이다. 

본절은 이 선지서의 저자가 누구인지, 그리고 이 책의 기록 목적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밝힌다.

 

나훔은 ‘하나님께서 위로하다’라는 뜻으로 느헤미야와 같은 단어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 주전 7세기 말 고대 근동의 군주가 앗수르에서 바벨론으로 바뀌는 혼동의 시점에 선지자 나훔은 자신의 신상정보를 많이 남기지 않았다. 

엘고스가 어디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대부분의 선지서들이 첫장 첫절에서 이렇게 저자와 목적을 언급하는데 본절은 특이하게 경고와 묵시라는 표현이 이중적으로 사용되었다. 

경고는 oracle인데 히브리어로 ‘마싸’이고, 묵시는 vision으로 ‘하존’이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 

 

oracle (Hb. massa’) denotes a prophetic utterance or proclamation (see note on Hab. 1:1), and vision (Hb. khazon) indicates how God communicated the contents of the book to Nahum. The name Nineveh occurs again only in Nah. 2:8 and 3:7.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712.

 

Nahum’s message is called a maśśāʾ, usually translated “burden” or “oracle.”3 The term can refer to wisdom sayings (Prov 30:1; 31:1) but usually is found in prophetic material, referring to a divine word regarding the foreign nations as it does in this instance. Isaiah used the term repeatedly in the section of his book concerning the foreign nations (Isa 13:1; 14:28; 15:1; 17:1; 19:1; 21:1, 11, 13; 23:1; 30:6). Habakkuk’s message bore the same terminology, though he spoke about the destruction of the tyrant rather than directly to the foreign nation (Hab 1:1; cp. Jer 23:33; Ezek 12:10). The prophetic speech may be directed against individuals (2 Kgs 9:25; Isa 22:1; 2 Chr 24:27). The word may also be used for oracles of salvation (Zech 9:1; 12:1; Mal 1:1). The basic meaning of the term is thus “oracle” or “prophetic saying”4 and not “burden,”5 but the underlying connotation of “burden” may well have commended itself to any native speaker of Hebrew.6

Of all the prophetic works only Nahum is described as a “book” in the title verse.7 As mentioned in the Introduction, this suggests that rather than originating as sermons preached by the prophet, this work may have been produced initially as literature. This most likely took the form of a scroll that may have been circulated as an underground pamphlet during times of Assyrian persecution.8

 

Nahum’s message came to him by means of a “vision.” That is, “the prophet perceived God’s revelation with the mind’s eye.”9 “A vision is an event through which the Lord spoke to a prophet.… On the one hand, it refers to the thing seen, the vision or the appearance of the vision (Dan 7:1). On the other hand, it shows the effect on the seer: He is encouraged, chosen, shocked, pardoned, et cetera. Not a visual image but a word from God is received.… The prophetic vision primarily involved a revelation of God and his word, and only then a visual impact: God let it be known what he wanted or what he was going to do and showed it to someone whom he had chosen for this purpose.”10 Watts says, “In a vision the usual restrictions of reason, time and space recede and the prophet is seized by a compulsion to see and speak in a heightened consciousness what he recognizes to be from God. The excellent poetic form of the book was understood to be a direct result of ‘inspiration.’ ”11 This word ḥazôn is also found in the opening verse of Isaiah and Obadiah (see also Hab 2:2). We are not told how the vision occurred. The prophets described various ways the word of the Lord came to them. The opening verses of Amos and Micah say the prophet “saw” it, using the related verb hāzâ.

“This vb. in the context of prophetic perception refers to a revelation of the divine word, usually at night during a deep sleep and sometimes associated with emotional agitations. Prophetic seeing assumes the character of a vision (Ezek 12:27; 13:16).… Visual manifestation, however, played, at most, a minor role. The emphasis in the revelatory vision was on the revelation of the divine word, which endowed the prophet with special knowledge of divine things, which he had to proclaim (Isa 1:1; 2:1; 13:1; Amos 1:1; Mic 1:1; Hab 1:1).”12

The point is that the message was revealed to them by the Lord and was no human invention or imagination (cf. Jer 14:14; 23:16).13 “This prophetic material is not presented as the product of an ecstatic dervish whose mind swirled with frenzied irrationalities. His vision could be laid out as an objective, rational piece of literature with a unified theme embodying elaborate poetic structures.”14

3 The meanings come from two usages of the Hb. נשׂא, “to lift, raise.” To raise one’s voice gives rise to the meaning “pronouncement or oracle.” To lift a load suggests “burden.” See HALOT 2:638–39 for the two meanings: “load, burden” in Exod 23:5; 2 Kgs 5:17; Isa 22:25; “pronouncement” in 2 Kgs 9:25; Lam 2:14; Prov 30:1. H. P. Müller gives the arguments and literature for one or two sources for this term (TWAT 5:20–21). Some suggest the translation “oracle” is too general. J. A. Soggin prefers “charge” (Introduction to the Old Testament [Louisville: Westminster/John Knox, 1989], 303, 325). For a defense of “oracle” see R. D. Patterson, Nahum, Habakkuk, Zephaniah, WEC (Chicago: Moody, 1991), 19.

 

4 See W. Rudolph, Micha-Nahum-Habakuk-Zephanja, 148; J. D. W. Watts, “The Books of Joel, Obadiah, Jonah, Nahum, Habakkuk and Zephaniah,” in The Cambridge Bible Commentary on the New English Bib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75), 98; Patterson, Nahum, Habakkuk, Zephaniah, 19–20; D. W. Baker, Nahum, Habakkuk, Zephaniah, TOTC (Downers Grove: InterVarsity, 1988), 21.

5 F. Stolz (“נשׂא nśʾ to lift, bear,” TLOT 2:773–74), O. P. Robertson (The Books of Nahum, Habakkuk, and Zephaniah, NICOT [Grand Rapids: Eerdmans, 1990], 55), and W. A. Maier (The Book of Nahum: A Commentary [St. Louis: Concordia, 1959], 145–47) argue for “burden” following P. A. H. de Boer (OTS 5 [1948]: 197–214) and J. N. B. Heflin (Nahum, Habakkuk, Zephaniah, and Haggai, BSC [Grand Rapids: Zondervan, 1985], 33–34). Despite Jeremiah’s play on the word (Jer 23:33–38), the term does not automatically designate a prophecy as coming from a false cultic prophet; see Roberts, Nahum, Habakkuk, and Zephaniah, 40.

6 R. J. Coggins and S. P. Re’emi speak of the “implicit idea of judgment” (Israel among the Nations, ITC [Grand Rapids: Eerdmans, 1985], 16).

7 Watts (“Joel, Obadiah, Jonah, Nahum, Habakkuk and Zephaniah,” 100) sees the original use of the written “book” as that of a sermon text intended to be preached or a play script. Heflin contends that “committing Nahum’s prophecy to writing was merely another step in its eventual placement in the Old Testament canon. It was obviously a step taken for all of the canonical prophetic books, despite the omission of the precise word from their titles” (Nahum, Habakkuk, Zephaniah, and Haggai, 35–36).

8 C. F. Keil, “Nahum,” in The Twelve Minor Prophets 2, trans. J. Martin (Grand Rapids: Eerdmans, 1949), 9; T. Longman III, “Nahum,” in The Minor Prophets: An Exegetical and Expository Commentary, ed. T. E. McComiskey (Grand Rapids: Baker, 1993), 786. Rudolph (Micha-Nahum-Habakuk-Zephanja, 150) appears to follow the commentary of A. H. Edelkoort that Nahum’s book was an underground “Flugschrift” or pamphlet of those in flight, passed from hand to hand because Manasseh’s support of Assyria made any word against Assyria dangerous (Nahum, Habakuk Zephanja [Amsterdam: 1937], 39–45). E. Achtemeier (Nahum–Malachi, INT [Atlanta: John Knox, 1986], 7), Patterson (Nahum, Habakkuk, Zephaniah, 21); Maier (The Book of Nahum, 144), Heflin (Nahum, Habakkuk, Zephaniah, and Haggai, 35–36), and Roberts (Nahum, Habakkuk, and Zephaniah, 41) see no reason to assume that “book” means the material was originally written and not spoken. Patterson writes: “The use of the term may simply suggest that Nahum’s burdensome vision, whether delivered orally or not, has now under divine inspiration been committed to a permanent record that all may read (cf. Hab. 2:2).”

 

9 Heflin, Nahum, Habakkuk, Zephaniah, and Haggai, 36.

10 J. G. McConville, “חזה,” NIDOTTE 2:58–59. For the word content of vision he refers to 1 Sam 3:1; Ps 89:19. People could seek a vision (Ezek 7:26), but God could prevent prophets from having visions (Lam 2:9; Mic 3:6), and false prophets might have false visions (Jer 14:14; 23:16). Dreams and theophanies are distinct from visions, often related to the nighttime. A. Jepsen notes that of 115 occurrences of the root chazah, eighty-six are tied to prophecy (TWAT 2:824–25). He agrees that the root refers to word reception and not images as seen in Gen 15:1; 2 Sam 7:4, 17; Job 4:13; 33:14–16; Hos 12:11; Jer 14:14; 23:16; Ezek 12:23. This is true in what may be the oldest reference, Num 24:3–4, 14–15. Jepsen summarizes his conclusions: It signifies a revelation of God’s word received at night during a deep sleep and frequently associated with agitated circumstances. In this visual appearances play no or at best a small role (p. 827).

11 Watts, “Joel, Obadiah, Jonah, Nahum, Habakkuk and Zephaniah,” 100.

12 McConville (NIDOTTE 2:58), who also notes that a false prophet could have a vision (Zech 10:2; Isa 30:10; Lam 2:14; Ezek 13:6–9, 23; 21:32; 22:28). The nighttime reception of the vision that might lead one to think of dreams or images also apparently referred to reception of God’s word as Jepsen (TWAT 2:826) shows, referring to Job 4:12–16; Mic 3:6; 1 Sam 7:4, 17; Gen 15:1; Job 20:8; 33:15; Isa 29:10. Roberts notes that though it originally designated the manner of reception of revelation, it may have come to mean little more than “prophecy” (Nahum, Habakkuk, and Zephaniah, 41).

13 See Patterson, Nahum, Habakkuk, Zephaniah, 19.

14 Robertson, Nahum, Habakkuk, and Zephaniah, 55.

 Kenneth L. Barker, Micah, Nahum, Habakkuk, Zephaniah, vol. 2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9), 160–162.

 

2-3절)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벌받을 자를 결코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이절 본문속에서는 보복하다라는 표현이 세번이나 반복되어서 사용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렇게 질투하시고 진노하시며 보복하시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자리를 넘보는 이들에 대한 분노와 이스라엘에 대한 시기때문이다.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결혼했다. 남편되신 여호와께서는 아내의 관심을 빼앗는 그 무엇도 용납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이 보복하다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나캄’으로 원수를 갚다. 복수하다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두가지 성품이 대조적으로 등장한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진노하시는 것을 바로 사랑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질투와 진노가 누구를 향하느냐 하는 것이다. 이 두가지 성품을 다른 것이 아니다. 니느웨는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함으로 그들의 남편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명예에 도전한다. 이에 자신의 백성들의 고난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 가해자들에게 보복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사이의 언약으로 인해서 작동한다. 이처럼 나훔이 선포하는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이스라엘에게는 소망의 메시지가 되는 것이다. 원수들의 핍박이 핍박당하는 자들을 구출하기 위한 트리거로 작동한다는 사실은 핍박당하는 자들에게는 큰 위로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시는 백성들이 애매히 당하는 고난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들이 부르짖을때 그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그들을 핍박하는 자들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벌하실 것이다. 

 

2절에서는 하나님의 이름 ‘여호와’도 세 번 반복되어 사용된다. 2절 본문에서는 여호와라는 표현과 ‘바알’, ‘차르’라는 표현이 함께 사용되었다. 이는 선지자가 의도적으로 가나안의 다른 신들과 비교하여 여호와만이 참 신임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 유다는 앗수르의 핍박을 받으며 므낫세의 치하에서 바알을 비롯한 이방 신들을 섬기고 있었다. 이방의 우상에게 복을 비는 유다를 향해서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시며 진노하시는 분이심을 선언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이시기에 그분이 노를 발하실 때는 지체없이 죄에서 돌이켜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참을 만큼 참으시고 난 후에 심판하시기 때문에 지체해서는 심판의 재앙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호와의 노하기를 더디하는 성품에 대해서 불만을 가질 수 있다. 악인들이 우리를 핍박할 때 하나님께서 절대 참지 마시고 즉각적으로 응징해주시기를 원하는 마음이 있다. 그래서 참으시는 하나님을 보면서 그분의 연약함, 무능함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왜 정의의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이시면서 원수들의 포악을 방관하시냐고 질문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감수하시며 마지막까지 참으신다. 죄인들이 스스로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 노하기를 더디하심은 하나님의 무능이 아니라 은혜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의 백성들에게 무한하게 오래참으시는 것처럼 온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도 오래참으시는 것이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심판과 보복이 더디다고 여겨질지라도 믿음이 흔들리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 

 

3절하-6절) 본 절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온 세상 만물을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능력을 노래한다. 

여호와의 길은 회오리 바람과 광풍에 있고 구름은 그의 발의 티끌이다. 그분은 바다를 꾸짖어 그것을 말리시며, 모든 강을 말리시나니 바산과 갈멜이 쇠하며 레바논의 꽃이 시든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산들이 진동하고 작은 산들이 녹고 그 앞에서는 땅 곧 세계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들이 솟아 오른다.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그의 진노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 그분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인해 바위들이 깨진다. 

 

본 절을 통해서 고대 사람들이 숭배하고 신으로 여겼던 것들, 회오리 바람과 광풍과 구름, 산들과 바위가 아무것도 아님을 말하고 있으며, 바알을 통해서 얻고자 했던 풍요로움도 하나님께서 꾸짖으시면 모두 쇠하여 없어질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다를 꾸짖어 말리시는 사건은 출애굽의 홍해를 가르신 사건은 연상시킨다. 바다와 강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땅과 물을 나누기 위해서, 물을 담기 위해서 지으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바다와 강은 말라버리게 될 것이다. 니느웨는 두 개의 큰 강(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이 흐르고 도시 중심부로 코서 강이 흘렀다. 이것을 마르게 하신다면 이 강을 통해 었던 풍요로움이나 안전이 없어지게 될 것이다.

 

본문에서 바산과 갈멜과 레바논은 가나안의 가장 기름진 지역으로 가뭄의 영향을 잘 받지 않는 지역들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진노를 발하시면 물이 마르게 되고 식물은 죽어가게 될 것이다. 나아가 산들이 진동하고 작은 산들이 녹고 땅이 솟아오르며 뒤집히는 이러한 표현은 지진이나 화산 폭발과 같은 격변을 묘사하는 것이다. 

 

Did Nahum seek to remind us of the work of God in drying up the sea at the time of the exodus (Exod 14:21–22)?71 “It is characteristic of the whole Bible to be deeply suspicious of the sea; thus, in the Revelation to John part of the promise was that there should be no more sea (Rev 21:1).”72 Psalm 106:9 uses the word “rebuke” in reference to the crossing of the sea at the time of the exodus. Nahum here described God’s absolute mastery of the created order (cp. Isa 50:2; 51:10; Ps 66:6). Just as God brought order into the world, he may reverse the order of creation. Rivers and seas were created to hold water. If the omnipotent God so chooses, he may dry up the sea and the rivers. Nineveh was especially vulnerable at this point. Assyria represented a major part of Mesopotamia, the land between the Tigris and Euphrates Rivers. Nineveh was proud that they had harnessed the Khoser River. If God can do these things, what will the wicked do in the day of judgment?

Bashan, Carmel, and Lebanon represented the most luxuriant, fertile areas of Palestine.73 They were the least likely areas of all of Israel to show the effects of drought, but “in the presence of the terrifying God, these places would quickly wither and fade.”74 These areas contained most of the timber of Palestine. If Lebanon withered,75 what would happen to the drier areas? Bashan is the northern Transjordan plateau; Carmel is the mountain range running northwestward until it juts into the Mediterranean Sea at Haifa; and Lebanon is the north-south mountain range to the north of Galilee. All these areas would withstand the most devastating drought, but none could stand before the Lord God. Everything comes under subjection to the power of God. “When Yahweh makes war, nature and the very structure of the earth fade and crumble before him.”76

71 Roberts puts all the weight here on the Canaanite mythological background with the sweeping statement that “there is no clear reference to the exodus in Nahum’s use of this mythological language” (Nahum, Habakkuk, and Zephaniah, 50). One must ask what would constitute “clear reference”?

72 Coggins and Re’emi, Israel among the Nations, 22.

73 Coggins and Re’emi (ibid., 23–24) point to the three mountains as standing elsewhere in opposition to God and Mount Zion (Bashan, Ps 68:15–16; Carmel, Amos 1:2; Lebanon, Ps 29:5–6). All three mountains appear in Isa 33:9. Longman (“Nahum,” 2:790) notes the use of synecdoche here, the three geographical entities standing for the whole earth.

74 See Heflin, Nahum, Habakkuk, Zephaniah, and Haggai, 41; and Maier, The Book of Nahum, 163–65, who gives extensive description and biblical references to each place.

75 Many scholars, including Roberts (Nahum, Habakkuk, and Zephaniah, 44) and apparently even Patterson (Nahum, Habakkuk, Zephaniah, 18, 34) find ways to change Hb. אמלל, the first word of the second line of v. 4 in Hb., into a form of דלל to create a daleth line in the “acrostic.” Maier argues vehemently against such a change (The Book of Nahum, 165–67).

76 Longman, “Nahum,” 2:790.

 Kenneth L. Barker, Micah, Nahum, Habakkuk, Zephaniah, vol. 2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9), 174–175.

 

이처럼 하나님이 진노하시면 누구도 그 진노를 막을 수 없다. 그분의 진노가 쏟아지면 아무리 단단한 반석도 결코 우리를 지켜주지 못할 것이다. 나훔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바다와 강을 말리시고 격변을 일으킴으로 진노의 심판을 내리실때 누구도 이에 맞설수 없음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주님의 백성들에게는 피할 바위되신 예수님이 계신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반석이 되심으로 우리가 주님에게 붙어 있는한, 주님이라는 반석 위에 서 있는한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1:6 Verses 4–5 prepare the reader for the rhetorical questions of v. 6,81 where four Hebrew words82 express his wrath,83 which pours out like fire and shatters rocks. “Together with other OT writers (Deut 4:24; 9:3; 32:22; Jer 7:20; 42:18; 44:6; Ezek 22:21; Amos 7:4) Nahum makes the red flames an apt picture of God’s consuming wrath.… even the rocks, typical of that which is hardest and strongest, crack into pieces.”84 Roberts is correct in seeing “the function of all this theophanic imagery is to underscore the awesomeness of Yahweh in order to prepare the way for the prophet’s announcement of judgment on the Assyrian enemy.”85 Who indeed can stand before the wrath of the Lord? If the Lord rebukes the sea, dries up Carmel, and strikes fear into all the world, what can the wicked do? His very presence makes the mountains quake and the hills melt away. Those who have seen the power of God know that no one can stand before this awesome God. “If oceans, torrents, plateau countries, and mountain ranges can be wiped out, should Yahweh choose to remove them, what coalition of conquerors, even Assyria itself, can hope to thwart His purposes?”86

These verses remind the modern reader of the Book of Nahum that nothing can stand before the Lord. We tend to think that our technology can save us and that our scientific research will deliver us from our evil. Nahum knew that the mighty army of Assyria could not stand before God. Our progress and technology stand impotent before the presence of God.

81 Longman says, “The effect of the rhetorical questions is to make the reader answer the question unconsciously. These questions also add a sarcastic, taunting note to the discussion” (“Nahum,” 2:791).

82 Longman says זעם, “indignation,” is best translated “curse,” reflecting the judicial context here (“Nahum,” 2:91).

83 Many scholars, including Roberts (Nahum, Habakkuk, and Zephaniah, 44), make a rather radical textual emendation to gain a zayin line in the “acrostic,” transposing the first and second words of the line. Maier argues strongly against this: “How could an editor be so stupid or perverse either carelessly or willfully to change the word sequence and to destroy the alphabetical order?” (The Book of Nahum, 173–74). Patterson (Nahum, Habakkuk, Zephaniah, 18, 36) and Longman (“Nahum,” 2:773–75, 791) argue for the MT. Roberts argues: “The corruption in the present form of the text reflects the tendency in textual transmission for unusual word order in poetic texts to be reverted back to more common patterns over the course of time” (Nahum, Habakkuk, and Zephaniah, 44).

84 Patterson, Nahum, Habakkuk, Zephaniah, 172–73.

85 Roberts, Nahum, Habakkuk, and Zephaniah, 51.

86 Maier, The Book of Nahum, 165.

 Kenneth L. Barker, Micah, Nahum, Habakkuk, Zephaniah, vol. 2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9), 176–177.

 

7-8절)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다. 그분은 자기에게 피하는 자들을 아신다. 그분이 범람하는 물로 그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실 것이다. 

앞서 선지자는 진노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경고하고나서 이제 두려워 떠는 이들로 하여금 그 진노를 피할 길이 있다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향해서 진노를 발하시는 날, 하나님은 자기에게 피하는 자기 백성들에게는 피난처가 되어주시는 선하신 하나님이시다. 

범람하는 물은 노아의 홍수를 연상시킨다.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신다라는 것은 대적들을 죽음에 이르게 하신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니느웨가 철저하게 멸망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1:7 “Nahum’s text is brutally frank, even terrifying, through the first six verses.”87 God is jealous and avenging; he is slow to anger and great in power. God does command the clouds and the rain; he rebukes the sea and makes the rivers run dry. Who wants to serve such an awesome God? Can you do anything but stand in absolute terror before him? Nahum stops to calm such fears by setting forth “the positive function of God’s warring activities.”88 He does so with the same confessional language with which he began (see vv. 2–3). With such confessional language an individual expresses trust in God and pledges obedience to him (Ezra 8:18, 22; Pss 34:8; 73:1; 100:4–5; 106:1–3; 107:1–2; 109:21; Lam 3:25).

“The goodness of God forms a basic tenet of Israel’s faith (e.g., 2 Chr 5:13; Pss 25:7–8; 69:16; 118:1, 29; 135:3; 136:1; 145:7–9; Jer 33:11).”89 Such goodness is not abstract but “appears most clearly in his dealings with people”90 Original sin was doubting the goodness of God (Gen 3:1–7; cp. Num 14:3, 27). The God who brings judgment does so as a part of his goodness.91 Yes, the same powerful God who does these things is good toward those who fear him.92 He cares for his people who suffer from the hands of any enemy. Believers in Christ have already “tasted that the Lord is good” (1 Pet 2:3).

“These verses have the menacing ring of a judicial indictment, citing the evidence against the accused. It reveals a conspiracy against the Judge himself, the Lord whose justice and supreme authority have been announced in the preliminary proceedings of vv. 2–6; the outcome of the trial is therefore in no doubt, and the sentence is already anticipated in the charge developed here.”93

87 Heflin, Nahum, Habakkuk, Zephaniah, and Haggai, 43.

88 Longman, “Nahum,” 2:792.

89 Armerding, “Habakkuk,” 7:464. Robertson (Nahum, Habakkuk, and Zephaniah, 70) ties “goodness” to God’s covenant faithfulness.

90 C. B. Bridges, Jr. “Good, Goodness,” EDBT, ed. W. A. Elwell, 305.

91 Heflin sees God is good to mean: he does not sin; he is faithful and trustworthy; he keeps his promises. His goodness is often demonstrated in his mercy.

92 Roberts explains: “God’s wrath is simply the reverse side of his goodness, because, as the continuation in v. 8 indicates, it is precisely Yahweh’s violent judgment on his enemies that effects the salvation of his friends” (Nahum, Habakkuk, and Zephaniah, 52). Achtemeier concludes that “God will be king over us, and it is for us to decide whether he will exercise his kingship in love toward us or in wrath” (Nahum–Malachi, 15).

93 Armerding, “Habakkuk,” 7:464.

 Kenneth L. Barker, Micah, Nahum, Habakkuk, Zephaniah, vol. 2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9), 177–178.

9 ◎너희는 여호와께 대하여 무엇을 꾀하느냐 그가 온전히 멸하시리니 재난이 다시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10 가시덤불 같이 엉크러졌고 술을 마신 것 같이 취한 그들은 마른 지푸라기 같이 모두 탈 것이거늘

11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악한 것을 권하는도다

1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아니할 것이라

13 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네 결박을 끊으리라

14 ◎나 여호와가 네게 대하여 명령하였나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 내가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하며 네 무덤을 준비하리니 이는 네가 쓸모 없게 되었음이라

15 ◎볼지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알리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지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 하시니라

 

 

 

앗수르가 번성하여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동안 이스라엘은 샬롬을 누릴 수 없었다. 앗수르가 부과하는 높은 조공과 수시로 자행되는 폭력, 우상을 숭배할 것을 요구받는 것으로 이들은 고통을 당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이들을 마른 지푸라기처럼 불태우시고 그들이 이스라엘에게 지웠던 멍에를 깨뜨리신다라고 약속하신다. 또한 아름다운 소식이 전해지고 화평, 샬롬이 임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유다)을 회복시키시는 이유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온전히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9절) 본문에서 너희는 이스라엘을 대적한 앗수르를 가리킨다. 지금 선지자는 우발적이 아니라 계힉적으로 하나님을 대적한 앗수르의 계략이 허튼 것임을 수사적인 질문으로 지적하고 있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를 대적하여 음모를 꾸미느냐?’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이스라엘과 맺으신 언약은 대적들의 계략과 음모로 멈추거나 훼방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자신을 대적하는 대상들을 두 번 치실 필요도 없이 단번에 완전히 멸하실 것이다. 

 

 

10절) 본 절은 하나님께서 대적들을 어떻게 멸하실지를 비유적인 언어로 서명하고 있다. 엉크러진 가시덤불과 술취한 자들이 마른 지푸라기처럼 모두 타버릴 것이라고 말한다. 두가지 비유가 서로 어율려 보이지 않지만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그들은 가시덤불처럼 엉켜지고 자신의 술에 취한자들 같을지라도 그들은 마른 검불처럼 타버릴 것이다’가 된다. 

모닥불을 붙일 때 가장 좋은 것은 바로 잘 마른 지푸라기이다. 이 지푸라기들은 한 번 붙으면 걷잡을 수 없이 타들어가게 된다. 하나님을 대적한 이들에게 하나님께서 불을 붙이시면 멈출 수 없이 모두 타버리게 될 것이다. 

 

11절) 하나님께서 앗수르에게 분노하시며 이들을 진멸시키시는 것은 악을 꾀하는 한 사람때문이다. 

 

왜 하나님께서 아시리아에게 분노하시는가? 11 절은 이들에게서 파괴자가 나왔기 때문이라고 선언한다. 선지지는 누구를 뜻하는 것일까? ‘악을 꾀하는 자'(11 절)는 구약의 여러 곳에서 사용되는 표현이다. 제사장으로서 맡은 직분은 감당하지 않고 엉뚱한 일만 하던 엘리의 두 아들(삼상 2 : 12), 이세벨이 나봇을 살해하고 그의 포도원을 가로챘던 행위(왕하 21:10) 등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성경에서 이러한 일을 행하는 자는 매우 비열하고 부패한 자들이며 무엇보다도 앞으로 오실 메시아의 성품(사 9:6)과 선명하게 대조되는 경건치 못한 자들이다·

 

나훔 시대에 ‘악을 꾀하는 자’는 구체화되지 않은 아시리아 왕, 혹은 포악한 왕 산헤립 (705-681 BC)이라는 것이 학자들의 해석이다· 그는 701 년에 예루살렘으로 쳐틀어온 적이 있었다(cf. 사 236-38; 왕하 18:13-19 :37). 그렇다면 선지지는 예루살렘에 대한 산헤립의 만행올 하나님을 향한 대적 행위로 간주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원수가 하나님의 원수이다. 개인 혹은 집단이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하여 다른 사람(민족)을 착취하고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은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대적하는 행위이다. 비록 이 타이틀이 일차적으로는 산헤립에게 적용되지만, 넓게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나라의 지도자들을 의미한다· 나홈은 이 타이툴을 아시리아의 형태(form of Assyria)로 나타난 육신회된 악에게 적용하고 있다.

 

 

12-13절) 나훔 선지자는 앗수르에 대한 심판을 멈추고 유다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첫째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 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질 것이다. 여기서 그들은 이스라엘을 괴롭히던 앗수르를 말한다. 본문에 없어지리라라는 표현은 ‘아바르’로 점차 사라지다라는 의미이다. 이 표현은 앞서 8절에서 ‘범람하는’ 물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출애굽 당시 하나님께서 죽음을 통하여 애굽 사람들을 지나가실 때 사용된 것으로 유월절의 유래를 연상시킨다. 

“Pass away” reflects the same Hebrew root as the second word in v. 8, translated by NIV there as “overwhelming” but noted as a technical term for God’s saving deeds in causing Israel to pass over the sea and the river. Here the verb is singular, whereas the previous verb is plural.135 Maier interprets this as referring to the wicked counselor or Belial of v. 11.136 Robertson, in continuity with the salvation history association of the term, sees God as the subject of “pass over.” “In the very way in which he ‘passed over’ in the land of Egypt, so now again he through his agent the death angel shall smite Assyria.”137

NIV New International Version

135 Patterson sees this as intentional, “a change in emphasis from the cutting off of the individual soldiers/units to the resultant demise of the entire army” (Nahum, Habakkuk, Zephaniah, 48–49).

136 Maier, The Book of Nahum, 206, but he then argues that the waw introducing the next line should be redivided and placed on the preceding עבר, making the verb plural rather than singular. Roberts gives reasons for redividing the Hebrew to make עבר plural (Nahum, Habakkuk, and Zephaniah, 47).

137 Robertson, Nahum, Habakkuk, and Zephaniah, 77.

 Kenneth L. Barker, Micah, Nahum, Habakkuk, Zephaniah, vol. 20, The New American Commentary (Nashville: Broadman & Holman Publishers, 1999), 185.

 

둘째 하나님께서 전에는 너를(이스라엘)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히지 않으실 것이다. 선지자는 이전에 범죄하는 이스라엘을 치시기 위해서 이방, 앗수르를 사용하셔서 징계하셨지만 이제는 그 징계가 끝날 것을 선언하신다. 하나님께서는 필요에 따라서 악을 사용하여 그의 백성을 연단하기도 하신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악을, 악인을 사용하셨다고 해도 결코 악의 행위가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악을 도구로 사용하시지만 그들의 만행과 비도덕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분명히 책임을 물으신다. 

셋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지운 앗수르의 멍에를 깨뜨리고 그 결박을 끊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멍에는 소와 같은 짐승의 목에 채워지는 것이며, 결박(사슬)은 멍에를 매는 가죽 줄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억압하고 구속하던 앗수르의 멍에와 결박을 끊으실 것이다. 

 

1:13 His yoke refers to the burdensome rule of the Assyrian monarchs (cf. v. 11) over Judah. About 734/733 b.c., during the reign of Ahaz (2 Kings 16:7–8), the southern kingdom had become a vassal state of Assyria. This involved paying heavy tribute to the Assyrians (cf. 2 Kings 18:13–16) and other oppressive measures. When Judah revolted under Hezekiah, the Assyrians in 701 b.c. devastated the land (2 Kings 18:13; Isa. 7:18–25; 8:5–8) and took away many people and much plunder. break … burst. The vassalage of Judah lasted until the reign of Josiah (640–609 b.c.), when Assyria began to decline rapidly and finally ceased to be a nation (see Introduction: Date).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713.

 

14절) 이제 앗수르의 운명에 대해서 이렇게 선포하신다. 

첫번째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고 둘째 네 신들의 집에서 새긴 우상과 부은 우상을 멸절할 것이며 셋째 네 무덤을 준비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결국 쓸모없게 될 것이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다는 것은 자신의 이름을 이어갈 후손이 없다는 것이다. 우상이 멸절될 것이라는 것은 이스라엘을 압제하던 이들의 종교가 망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지배국은 피지배국에 자신들의 종교를 강요해왔다. 하지만 이들이 쇠퇴하며 그들이 섬기던 종교, 우상이 멸절되어 모든 종교행위가 멈추게 될 것이다. 무덤을 준비한다는 것은 죽음이 임할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결국 앗수르의 운명은 그들이 남을 억압하고 경멸한 만큼 당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괴롭히고 멸시한 이들을 기억하시고 심은대로 거두게 하신다. 

 

1:14 The Termination of Vile, Idolatrous Nineveh. You is masculine singular in Hebrew. Nahum suddenly switches to directly addressing the Assyrian king(s) (see v. 11): the Assyrian monarchy would come to a decisive end. This implies the total conquest of Assyria and the irreversible fall of Nineveh. the house of your gods I will cut off. Complete defeat of the Assyrian ruler would also be marked by the desecration of his temple and the destruction or removal of his idols, which represented the gods who he believed gave him power, wealth, and descendants. Archaeologists have noted the complete destruction that Nineveh’s temples underwent.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713.

 

15절) 본문은 ‘볼지어다’라는 단어로 시작된다. 산위의 유다에게 아름다운 소식과 화평을 전하는 이가 도착했다. 이 ‘히네’라는 표현은 심판으로부터 구원으로의 급격한 전환을 예고한다. 

 

이사야 52:7

7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많은 이들이 이 구절이 나훔의 핵심 구절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영적인 전쟁의 승리의 소식을 전하는 전령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본문의 표현은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했던 내용과 흡사하다. 전령이 전하는 소식은 아름다운 소식, 곧 화평(샬롬)이다. 샬롬은 무엇보다 모든 속박에서 자유하게 되었다는 의미로, 당시로는 앗수르의 억압과 핍박으로부터, 지금으로 보자면 사탄의 속박에서 완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소식이 임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복음이다. 복음은 샬롬을 가져온다. 나훔은 주의 백성에게 샬롬을 전하는 자의 발을 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샬롬을 주신 이유는 그 자유를 가지고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는데 사용하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앗수르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목적은 바로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마음껏 섬기고 예배할 수 있도록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대적들을 진멸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면 자유를, 화평을 주시는 이유는 하나님을 온전히 경배하고,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제대로 이행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히브리어 성경은 본문 1장 15절을 2장 1절로 취급한다. 

 

니느웨의 압제로부터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을 가리킨다. 

 

 1:15 Peace and Deliverance for Judah. This verse concludes the second major portion of the book (vv. 9–15). Nahum returns to addressing Judah. What he has foretold with regard to Nineveh, the Assyrian monarchy, and the Assyrians he now considers as good as accomplished. upon the mountains. The imagery is that of a messenger bearing the good news of the fall and devastation of Nineveh. The people first catch sight of him running along the Judean mountains (cf. Isa. 52:7). peace. Judah does not have to be afraid of any more military action and oppression coming from Assyria (on peace in the OT and NT, cf. note on John 14:27). Keep your feasts. These festivals would remind the people of the Lord’s past acts of deliverance and the future hope of the coming Messiah. At the feasts they would also, as a nation, worship the Lord and give him proper thanks and praise. fulfill your vows. Some in Judah voluntarily made vows to the Lord to give him thank offerings. the worthless. I.e., the Assyrians (cf. Nah. 1:11).

 Crossway Bibles, The ESV Study Bible (Wheaton, IL: Crossway Bibles, 2008),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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