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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선지서

나훔서 1장 연구

by 은총가득 2021. 10. 8.

 

시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신가?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나훔 1:2)  

하나님께서 정말 보복하시는가?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시지 않았는가?  바울 사도는 신자들에게 성내지 말라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 하였다.  또 원수 맺는 것과 시기와 분 냄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죄라고 지적하고 있지 않는가?(갈 5:20)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이 분 내시고 보복하시면서 어찌 그의 백성 된 우리에게는 금하실 수가 있으신가?
  
먼저 하나님의 보복에 대해 생각해 보자.
여기 한 절 말씀에 여호와는 보복하신다는 말씀이 세 번이나 나온다. 흔히 우리가 내게 잘못하는 사람에게 보복하게 되는 것은 성급하고 충동적이고 참지 못하며 원수를 갚으려는 심리에서 나오기 쉽다.  그러면 하나님도 우리 인간 같으신가?
  
그러나 3절에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하므로 그런 가정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면 여기서 보복하신다는 말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여기 보복이라는 말은 성격상 법정적이여서 심판이나 법과 도덕을 위반한 자에 대한 보수를 가리켰다.  그리고 법정적 기능으로서 보복(보수)은 크게 온 땅의 재판자이신 하나님과(신 32:35) 그의 권위의 대리자로 정해진 자에게 속하였다(출 21:20-21; 신 31:23; 수 10:13; 에 8:13).1) 그러므로 여기서 하나님이 보복하신다는 말은 사람이 원수를 갚는다는 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따라서 성경은 원수 갚는 것이나 스스로 자신이 재판자가 되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것은 사람의 권한이 아니며 누구나 사람은 편견 때문에 공정하게 잘잘못을 판단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 하였다(롬 12:19).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어떤 부정에 대해서도 보복하신다(신 32:35; 참고, 롬 12:19).  자기 백성이나 그렇지 않거나 간에 죄에 대한 하나님의 어떤 심판도 변덕스러움이나 제어할 수 없는 분노에 근거하지 않고 하나님의 불변하시는 성품에 근거한다.2)  구약에 이 말은 78회 나오는데 그 중에 51회는 하나님이 가해자로 있는 상황에 연관되어 쓰였다.  하나님은 만일 그가 죄를 허용하시고 반역을 벌하시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이 되실 수 없으시다.  하나님이 보수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1) 원수에 의해 압제받는 자의 소송의 변호자가 되시며(시 94장) (2) 그와의 언약을 깨뜨리는 자를 벌하신다(레 26:24-25).3) 그러므로 하나님의 보복은 인간의 보복과 다르며 그것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의 반영으로 공정한 심판이다.
  
이제 하나님도 분노를 품으시는지를 알아보자.
하나님의 분노도 위의 보복하신다는 말씀과 연관이 있다.  하나님의 투기는 구조상 그의 진노와... 이방인이건 이스라엘 백성이건 간에 죄에 대한 거룩하신 하나님의 분내심에 병행한다.4)  따라서 여기 분노하심도 투기에서 나온다.  그리고 이런 분냄은 사람의 죄 많은 자의와는 완전하게 다른 것이다(참고, 약 1:20). 하나님의 분노하심은 인간이 그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적법한 제한을 깨뜨릴 때마다 대면해야만 하는 신적, 특성을 구성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분노를 부인하는 것은 심판의 실재와 구속의 필연성을 부인하는 것이다.5) 성경은 분노에 대해 죄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분하는데  죄의 분노만을 금하고 있으며 그것은 그 목적이나 성격 또는 분노의 대상에 따른다.  바울은 성을 내되 죄는 짓지 말라 하였고(엡 4:26) 예수님은 우리의 도덕적인 모범이시지만 죄에 대해서 분노하시었다(참고, 마 23:15-36).  하나님의 분노와 인간의 분노는 거룩하신 분과 죄인의 차이만큼이나 크다고 보아야 한다.
  
가이슬러(Norman Geisler)는 선한 분노와 악한 분노를 이렇게 구별하였다.

           선 한  분 노                 악  한  분 노
          죄를 이김                    사람을 대적함
          죄를 대적함                 죄인들을 대적함
          의롭게 표현됨              불의하게 표현됨
          노하기를 더디 함          성내기를 급히 함
          공의로 함                    보복으로 함6)

이상에서 본대로 분노에도 선한 분냄과 악한 분냄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죄와 그 죄를 지은 자를 엄격하게 분리시켜서 죄에 대해서만 분노할 수 있고 죄를 지은 사람은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이 그러하시듯이 성내기는 더디 하기를 배워야 한다(느 9:17).

   주
   1. Carl E. Armerding, Nahum, E.B.C. Vol.7(Grand Rapids: Zondervan, 1985), pp.461-462
   2. David W. Baker, Nahum, Habakkuk, Zephaniah(Downers Grove: IVP, 1988), p.27
   3. Walter C. Kaiser, Jr., Hard Sayings of the Old Testament(Downers Grove: IVP, 1988), p.231
   4. Ibid.,
   5. Carl E. Armending, Ibid.,
   6. Norman Geisler and Thomas Howe, When Critics Ask(Victor Books, 1992), p.313


하나님의 분노의 성격

(나1:1-8)

 

래 전 TV 드라마 시리즈 가운데 <두 얼굴의 사나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상황에 따라 다른 사람으로 변하면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드라마로 그린 작품입니다.

주인공 배너 박사는 사고로 아내를 잃게 됩니다. 아내가 죽은 뒤에 아내를 구하지 못한 깊은 죄책감에 휩싸입니다. 그래서 위기 상황에서 발생하는 괴력을 연구하게 됩니다. 연구 결과 감마선이 괴력을 낼 수 있게 해 준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몸에 대량의 감마선을 주입합니다. 그 결과 분노를 느끼면 감마선이 작동하여 괴력을 가진 헐크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이 드라마는 같은 사람의 두 얼굴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그려냅니다. 평소에 온순하고 따뜻한 배너 박사가 불의를 보며 분노를 느끼면 헐크로 변합니다. 그리고 헐크는 불의와 싸웁니다. 그러다 분노가 잦아들면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옵니다.

 

오늘 본문은 마치 하나님께서 이 두 얼굴의 사나이처럼 그리고 있습니다. 원래 사랑의 하나님께서 분노하셔서 공의의 하나님으로 변한 것처럼 보여 집니다.

어떻게 된 것일까요? 왜 하나님은 두 얼굴의 사나이처럼 비쳐지게 된 것일까요? 본문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본문 나훔이라는 책은 내용상 요나라는 책의 후편과 같습니다. 그래서 옛 라틴어 성경 번역본인 70인 역에서는 우리 성경과 달리 나훔서를 요나서 뒤에 편집해 놓기도 했습니다.

요나서는 하나님께서 선지자 요나를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보내셔서 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요나 선지자의 말씀을 듣고 앗수르 백성들이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왔습니다. 그러니까 요나서는 하나님께서 이방 땅 앗수르의 백성들을 사랑으로 보살피시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요나서의 사건 이후 100년 정도가 지났습니다. 앗수르 백성이 이미 오래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다시 악을 저지르는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괴롭힙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훔을 통해서 앗수르의 멸망을 선포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나훔서는 하나님께서 앗수르의 백성을 공의로 심판하시겠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는 두 얼굴의 사나이처럼 보입니다. 한 없이 자비롭고 사랑이 넘치시던 분이 채찍을 내려치시고 거칠게 분노하시는 분으로 변하신 것입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공의의 하나님으로 변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한 없이 자비로우신 분이신 동시에 거룩한 분노를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사랑과 공의가 하나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기 힘이 듭니다. 사랑은 그저 사랑으로 존재하고 어떤 경우에도 변함없이 사랑으로 남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더더욱 하나님은 늘 사랑의 하나님이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분노에 대해 당황스러워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분이 저토록 격렬하게 분노하신다니 당황스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분노를 이해하기 어려워합니다. 왜냐하면 분노라면 사람들의 분노를 떠올리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분노와 거룩한 하나님의 분노가 어떻게 다른지 알기가 힘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분노에 대해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사람들의 분노와어떻게 다른지, 하나님의 분노는 어떤 것인지 잘 알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분노의 성격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분노가 사람들의 분노와 달리 어떤 성격을 가지는지를 보여줍니다. 이것을 살펴보겠습니다.


1. 더디 하시는 분노

본문 3절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하나님께서 표출하시는 분노는 더디 나타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분노가 사람의 분노와 다른 점입니다.

사람의 분노는 대체로 순간적으로 폭발합니다. 참아도 얼마 가지 못한 채 폭발합니다.

일전에 교통사고 뉴스를 보고는 어처구니없어 한 일이 있습니다. 고속도로에서 두 대의 차가 신경전을 펼쳤습니다. 어떤 차가 갑자기 껴들자 뒤차가 전조등을 켜면서 위협을 했습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급히 악세레터를 밟아 다시 추월했습니다. 그러자 이 사람도 가만히 있지 않고 다시 추월했는데 이번에는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고속도로 1차선에서 급정거를 했습니다. 뒤차가 급히 속도를 줄여서 추돌 직전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뒤 따르던 차들이 연쇄 추돌을 일으켜 5중 추돌 사고가 일어난 것입니다. 이 사고로 한 사람이 숨지고 네 사람이 다쳤습니다. 물론 신경전을 벌이던 두 사람도 크게 다쳤습니다. 순간의 분노를 참지 못하고 폭발해서 큰 사고를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대체로 사람들이 이렇습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참지 못합니다. 바로 분노를 폭발해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분노가 일어나도 참으십니다. 그리고 잘못을 회개하고 돌아설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먼저 경고를 하시고 기다리시다가 마지막에 가서 분노를 폭발하십니다.

앞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하나님께서 요나로 하여금 앗수르에게 말씀을 전하게 하셔서 회개하게 하시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신 분이십니다. 이방인들이지만 저들도 사랑하시고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저들이 다시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습니다. 더더욱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는 악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저들에게 분노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노를 드러내시기까지 무척이나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나훔 선지자를 통해 그 분노를 드러내셨을 때가 100년이라는 세월이 지난 뒤입니다. 긴 세월 기다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훔을 통해 분노를 드러내셨지만 그것도 당장 징계를 통해 분노를 폭발하신 것이 아닙니다. 나훔 선지자로 하여금 경고의 말씀을 통해서 일단 그 분노를 전하신 것입니다. 아직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사람들의 분노와는 다릅니다. 무척 더딥니다. 오래 참으시고 기다려주십니다. 그리고 돌이킬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십니다.

 

시 103:8을 보면 다윗은 이렇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이렇게 노래한 것입니다. 그는 과거 밧세바를 간음한 일이 있습니다. 그 죄를 덮기 위해 남편 우리아를 죽게 했습니다. 율법으로는 마땅히 돌로 쳐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분노하시기를 더디 하셨습니다. 기다려주셨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회개할 수 있었습니다. 용서 받고 다시 왕의 소임을 다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분노는 화를 폭발하시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의 분노는 회개에 대한 촉구로 나타납니다. 기다려주시고 참아주시면서 회개하고 돌아올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다가 영영 돌아오지 못할 때 하나님의 분노는 최후의 수단으로 징계형태로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경고하실 때 빨리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최후의 분노가 일어나기 전에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2. 악에 대한 분노

본문 2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르는 자에게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자에게 분노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하나님을 거스르고 대적하는 자에게 분노하시느냐 하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한 괘씸함 때문일까요? 하나님께 반기를 든 것에 대한 복수심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악인에게 분노하시는 것은 악인이 악을 저지르기 때문입니다. 악인이 악과 함께 하기 때문입니다. 만일 악인이 악에서 떠나면 하나님께서는 그 악인에게 분노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것은 악인을 대상으로 한다기보다는 악을 대상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분노가 사람의 분노와 다른 점입니다.

사람의 분노는 대부분 자신에게 가해진 것들 때문에 일어납니다. 배반을 당했을 때 자기를 배반한 사람에게 분노합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자기를 모함하고 음해한 사람에게 분노합니다. 때로는 자기를 힘들게 한 상황이나 여건 또는 그런 사회나 공동체에 대해 분노합니다.

 

그래서 분노하는 사람들이 치를 떨며 질러대는 말이 이런 것들입니다. “네가 나에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두고 봐! 내 너를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네가 나한테 한 것을 내가 결코 잊지 않을 꺼다 백배 천배 만배로 갚아주고 말 거야”... 이것이 사람들이 하는 분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결코 이렇게 사람들에 대해 분노하지 않으십니다. 눅 23:34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께서는 지금 당신께 못할 짓을 저지르는 십자가 밑에 있던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하신 것입니다.

 

도대체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이런 기도를 드리실 수 있었을까요? 얼마나 억울하셨을까요? 아무런 죄도 없는 당신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유대 종교지도자들에게 분노가 일어나지 않으셨을까요? 주님을 배반한 제자들 특히 주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긴 가룟 유다에게 분노가 일어나지 않으셨을까요? 상황 파악도 하지 못한 채 부화뇌동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치고 있는 군중들에 대해 화가 나지 않으셨을까요? 아마도 사람들 같았으면 당연히 저들에 대해 분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들과 악을 분리해서 생각하고 계신 것입니다. 악에 대해서는 분노하시되 모르고 악을 따르고 있는 자들에 대해서는 분노보다는 연민을 느끼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악은 미워하시되 악인은 사랑하시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분노의 목표

점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이 품고 있는 악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그 악을 버린 자들은 과거 그들이 저질렀던 그 모든 악을 기억조차 하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다만 그렇게 기회를 주셨는데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악을 품고 있는 자들에게는 분노의 화살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악을 품고 있다면 자칫 우리가 하나님의 분노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살전 5:22에서 말씀하신 내용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왜일까요? 그 악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분노의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감당할 수 없는 분노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 그의 진노가 불처럼 쏟아지니 그로 말미암아 바위들이 깨지는도다.” 한 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분노를 발하실 때 그 누구도 그 앞에 설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분노를 발하실 때 그 누구도 감히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또한 하나님의 진노가 사람의 진노와 다른 점입니다.

 

사람의 분노가 때로는 두렵기도 합니다. 우리 속담에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자가 마음에 분을 품으면 천기마저도 뒤 바꿀 정도의 힘을 가진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사람의 분노가 중대한 복수로 나타나서 다른 사람을 파멸로 몰고 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특별한 예일 뿐입니다. 대부분 사람의 분노는 자기 스스로를 힘들게 할 뿐입니다. 그래서 또 우리 속담에 “두고 보자는 사람 무섭지 않다.”는 말도 있습니다. 대체로 이런 말은 그냥 말로 끝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분노는 다릅니다. 일단 그 분노가 표출되면 그 누구도 막아낼 수가 없습니다. 개인의 힘으로는 물론이고 집단의 힘 나아가 나라의 힘으로도 막아낼 수가 없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분노의 구체적인 예들 가운데 대표적인 예로 노아의 홍수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창 6:5 이하를 보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나님께서 당시 이 세상에 가득한 악에 대해 분노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선 노아를 택하셔서 하나님의 분노와 홍수 심판에 대한 사실을 전하셨습니다. 13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 그리고 노아에게 이 심판을 피할 준비를 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노아가 그 말씀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방주를 만들었습니다. 그 기간이 무려 120년이나 걸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기간 동안 기다려주신 것입니다. 이를 지켜본 그 시대의 사람들도 그 모든 내용을 알았을 것입니다. 앞으로 하나님의 홍수 심판이 임할 것과 모든 사람들이 이 홍수로 죽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장차 임할 홍수 심판이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 것인가에 대해 믿고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사람들은 홍수 심판이라는 것이 있을 것조차 믿지 않았습니다. 노아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홍수 심판을 피할 길을 알고 순종하여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시대의 사람들은 홍수 심판을 믿지 않았기에 심판을 피할 길을 준비하지 못해서 모두가 다 멸망을 당했습니다.

 

우리가 오늘 이 시대의 노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선 노아가 장차 임할 홍수 심판을 두려운 마음으로 믿었던 것처럼 오늘 본문 말씀 “누가 능히 그의 분노 앞에 서며 누가 능히 그의 진노를 감당하랴.”는 말씀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이 임하면 그 누구라도 피할 수 없고 견딜 수 없다는 사실을 두려운 마음으로 믿어야 합니다. 결코 장차 임할 하나님의 분노의 심판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이 심판을 당하게 되는 자들은 결코 무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러나 결코 악은 사랑하지 않으십니다. 악에 대해서는 분노하시고 공의로 심판하십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분노의 대상이 돼서는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 늘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노하시는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려야 하겠습니다. 그리고 늘 하나님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의 분노가 임하는 날에 하나님께서 예비해 주신 피할 길을 찾아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박봉수 목사 / 상도중앙교회 담임


니느웨에 대한 경고 (나훔 2:1-10)

 

Ⅰ. 니느웨에게 보내진 전쟁에 대한 경고가 있다(1절). 이 예언자는 그 전쟁이 눈 앞에 다가왔다고 말하며, 그것은 의심스럽거나 먼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네 주위를 돌아보라. 그리고 파괴하는 자가 너를 치러 올라온 것을 주목하라. 악명 높은 느부갓네살이 더 기승을 부려 나라들을 쳐서 파하는데, 이제 너에게 덤벼들어 너를 쳐서 흩으리라." 어떤 이들은 본문을 이렇게 생각한다. 바벨론은 "온 세상의 망치" 라고 불리워진다(렘 1:23). 니느웨에 대한 느부갓네살의 공격은 만민이 아는 대담하고 용맹스러운 것이다. "그는 네 얼굴 앞에 다가와서 너를 파멸시킬 자기 계획을 공언한다. 그러므로 무기를 들고 일어나라. 오 니느웨여! 너는 산성을 지키라. 너의 망대와 무기 창고를 확보하라. 길을 확보하라. 성읍에 이르는 모든 길에 파수꾼을 세우라. 네 허리를 견고히 묶으라. 네 군사들을 격려하고 네 자신과 그들의 사기를 북돋으라. 네 힘을 크게 굳게 할지니, 원수가 그들을 향하여 진격해 올 때 성읍들이 향하듯이 하라(이는 풍자적으로 말하여졌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라. 그래도 너는 이 심판의 타격을 견디어 내지 못할 것이니, 여호와를 대항할 어떠한 모사나 저항력도 없기 때문이다."

 

Ⅱ. 포고문이 작성되어 전쟁의 원인을 공표했다(2절). "여호와께서 야곱의 영광을 회복하시되, 이스라엘의 영광 같게 하시나니" 이는,

 

1. 앗수르인이 열 지파인 이스라엘에게 뿐만 아니라 두 지파인 야곱(유다)에게도 악랄하게 대하여서(이 두 지파는 그들을 모욕하고 멸시했다), "그들은 약탈하였고 또 그 포도나무 가지를 제거하였음이라." 왜냐하면 이 하나님은 그들과 계산하실 것이니, 비록 오래 전에 행하여졌으나, 이제 그 왕국과 그의 수도인 니느웨를 고려할 것이다.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쟁변은 "야곱에게 행한 강포 때문이다." 또는,

 

2. 하나님께서는 이제 이스라엘의 교만을 그 포로됨으로써 치셨던 것처럼, 느부갓네살을 통해 그 두 지파를 사로잡고, "야곱의 교만을 꺾으시려고" 하신다. 그는 그렇게 하셨다. 그는 하시기로 작정하시고 그들에게 "약탈자들을" 보내셨으니, 그것을 행할 원수는 니느웨로부터 시작하여 먼저 그를 낮추고, 그의 교만을 낮추어야만 한다. 그 교만한 성읍 니느웨 역시 기가 꺾이지 않을 것인가? "약탈자들이 그 성읍을 약탈하였고" 야곱과 이스라엘 나라에 있는 "그 포도나무 가지를 제거하였다." 그리고 니느웨의 자랑인 그의 영광 역시 꺾이어야 하지 않겠느냐?

 

Ⅲ. 침략해 오는 원수가 니느웨를 향하여 보여 줄 공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온다. 모든 것이 그를 무섭게 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1. "그의 용사들의 방패는 붉다." 아마도 그들이 이미 흘린 피로 물들었거나, 모두를 칼에 붙이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그들은 또 붉은 깃발을 높이 내걸어, 아무도 살려두지 않는다는 표로 삼았다.

 

2. "그의 무사들의 옷도 붉다." 이것은 그들이 꾀하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암시하려는 붉은 옷뿐만 아니라, 그 군대의 부를 암시하고 전쟁의 자금이 뜻하는 값진 옷도 뜻한다.

 

3. "그 항오를 벌이는 날에 병거의 철이 번쩍이리라." 그들이 접근할 때에 번개처럼 나를 듯이 행할 것이다. 수레바퀴는 돌 위에서 불꽃을 일으키며, 그 병거를 모는 자들은 타오르는 듯한 진노에 휩싸여서 미친 듯이 몰 것이다. 마치 예후처럼, 또는 밤중에 습격할 때의 기드온 병사들이 항아리 속에 횃불을 숨겨갔던 것처럼, 이 횃불은 그들에게는 인도자였고, 그들의 원수들에게는 공포였으며, 그들이 가는 곳마다 모두를 불로 휩싸이게 했다.

 

4. "전나무가 요동할 것이다" (한글 개역은 노송나무). 곧 다른 사람 위에 뛰어난 니느웨의 지위 높은 사람들, 마치 정정한 전나무가 관목들 위에 뛰어나듯한 자들, 곧 서 있는 바로 그 나무들은 큰 군대가 일으키는 격심한 땅의 진동에 의하여 흔들리게 될 것이다.

 

5. 전쟁의 병거는 매우 무서울 것이다(4절). "그 병거는 거리에서 미친 듯이 달리며," 그 병거를 모는 자는 광란할 것이다. 너는 그 병거 자체가 미쳤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 병거들은 수가 많을 것이며, "대로에서도" 광포하게 달릴 것이니, 충분히 넓은 곳에서도 "이리저리 빨리 갈 것이다." 그리고 이 철병거는 매우 찬란하여 태양빛에 반사되며, 밤의 "횃불 같을 것이다." 그들은 빠르고 맹렬하게 달리며 "빠르기 번개 같도다."

 

느부갓네살의 장군들은 본문에서 그의 "존귀한 자, 용감한 자, 영웅" (난외를 읽으면 그렇다)이라고 불리운다. "그는 그들을 생각해 내어" 즉시 명령을 내리고 그들의 존귀한 지위에 실수없이 앉혀서, 그들로 거동을 시작하여 곧 전투를 개시하며 니느웨의 포위를 위한 전쟁을 전개하도록 결정시킨다. "그의 존귀한 자들은 기억할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와 같이 읽는다). 그들은 그들의 위치에 대한 의무와 그들이 맡은 직임을 숙고할 것이며, 그리하여 그들의 할 일에 집중하게 되고, "업드려질 듯이 달려서" 보통 속력 이상으로 달려갈 것이다. 그들은 업드려질 듯하나 엎어지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급히 성벽에 이르러" (한글 개역과 다름) 참호를 팔 것이며, 그리고 막을 것, 곧 참호가 준비될 것이며(이것은 그들을 포위된 자들의 화살에서 보호해 준다) 그 포위를 좁혀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우 용맹스럽게 드디어는 "강들의 수문이 열리리니" (6절), 티그리스강으로 향한 니느웨의 문들이(거기 니느웨가 세워졌다) 원수들에 의하여 강제로 열려져서 드러날 것이요, 그 문들로 원수들이 들어올 것이다. 그 후에 "왕궁이 소멸되리니" 왕의 집 또는 그의 신 니스록의 집이 소멸되리라. 같은 말이 왕궁과 신전을 동시에 의미한다. 하늘의 하나님께서 한 백성과 쟁론을 펴실 때에 왕궁도 신들도 그들을 보호하고 막아 주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모두가 그들과 함께 멸망될 것이 분명하다.

 

Ⅳ. 이 일의 결과에 대한 예언이 나온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얼마나 비참할 것인지를 추측하기란 쉬운 일이다.

 

1. 그 왕후는 원수의 손아귀에 떨어질 것이다(7절). "후삽이 사로잡혀 끌려갈 것이다." 왕후로 "등극된" 그녀는 자기가 비밀 처소에 들어가 숨어 있었으므로 안전하다고 생각했으나, 발각되어(난외를 읽으면 그러하다) 사로잡혀 끌려갈 것이니, 보통 포로들보다 더 큰 수치를 당할 것이다. 그녀는 조롱받으며 "끌려갈 것이며," 그녀의 시녀들이 그녀를 모셔갈 것이다. 이것은 그녀가 허약하고 익숙하지 않아서, 갑절이나 어렵고 두려운 공포와 곤란을 견뎌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녀를 시중들되, 쾌활하게 말하거나 그녀를 격려하지 못하고, "비둘기같이" 속삭이며 슬피 울리니, 마치 그 "슬피 우는 것" 으로 유명한 "골짜기의 비둘기" 같을 것이다(겔 7:16; 사 38:14; 59:11). 그들은 "가슴을 치리니," 마치 북을 치듯이(그 말의 원뜻의 의미이다) 슬픔과 비통에 싸여 가슴을 칠 것이다.

 

2. 그 거민은 비록 수가 많을지라도 하나도 침략자를 대항하거나 그들의 땅을 지킬 수 없으리라(8절). "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못 같더니," 즉 물이 찬 못처럼 사람들로 가득하더라("물" 은 "무리" 를 뜻한다 계 17:15). 물고기가 있는 물과 같았었다. 그것은 예전에는 번창하는 성읍이었다. 요나의 시대에는 어린아이가 12만 명이 있었으며(욘 4:11), 성읍과 촌들이 매 년마다 수적으로 정상적인 증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비록 공사에 기용할 많은 사람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들 상호간에 용기를 가지고 고무할 수 없을 것이며, "이제 겁장이처럼 도망하리라." 그들의 대장들은 사기를 높이려고 별짓을 다할 것이다. 외치기를 "서라 서라, 마음을 굳게 하면 우리도 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돌아보는 자가 없도다." 그들은 일말의 용기도 없을 것이니, 모두가 기회를 선용하여 도망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도리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그들을 부르는 자를 돌아보려고 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비통의 날에는 하나님께서 가장 강한 자와 가장 용감한 자도 낙담시킬 것이니, 사람들은 그들에게 기대한 것처럼 되지 않으며, 말라서 날라가 버리는 물로 차 있는 "물이 모인 못" 같이 되리라는 점을 명심하자.

 

3. 그 성읍의 부요함은 먹이가 될 것이며, 그의 모든 풍요한 기구는 승전하는 원수의 손에 떨어지게 될 것이다(9절). 그들은 이리하여 서로 흥분시켜 약탈을 고무하고 권장할 것이다. "은을 노략하라. 금을 늑탈하라." 이리하여 장교들은 병사들을 선동하여 그들의 기회를 활용하게 할 것이다. 여기 그들에게 충분한 은과 금이 있다. "돈과 접시의 저축한 것이 무한히 있도다."

 

니느웨는 "예로부터 물이 모인 못 같더니," 다량의 진흙을 모았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가구를" 크게 자랑했고, 모든 "욕망의 그릇들" 에서 영광을 찾았으나, 이제는 그것이 정복자의 노획물과 자랑이 될 것이다. 의상을 진흙같이 예비하고 은을 티끌처럼 쌓는 자들은, 그 의상을 입고 그 은을 나눌 자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욥 27:16, 17).

 

이리하여 이 풍요한 성읍은 공허하고 황무하게 된다(10절). 세상적인 부요함이 헛됨을 본다. 그것은 그 부의 소유자를 지켜 주는 대신에 단지 그들을 위태롭게 하여 원수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더 큰 재앙을 가할 수 있게 만든다.

 

4. 병사들과 백성은 그 성읍을 수비할 경황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마음은 불 앞의 밀납처럼 "녹아버릴" 것이다. 그들의 "무릎이 서로 부딪치며" (벨사살이 고민 중에 그러하였듯이, 단 5:6), 땅 위에 서지 못하리니, 결코 도망하지 못하리라. "모든 허리가 아프게 되리라." 이런 일은 극심한 공포 중에는 흔히 있는 일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등을 꼿꼿이 세우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낯이 빛을 잃으리니" 매일 불 위에 오르는 주전자와 같을 것이다(이 말의 본 뜻은 그렇다). 양심의 죄악이 악한 날에 사람으로 하여금 공포로 가득차게 할 것이다. 이 세상의 부에 행복을 두고 마음을 착념하는 자들은, 그들의 은, 금 그리고 그들의 아름다운 가구가 그들에게서 없어질 때 자기들은 망했다고 생각한다는 점을 명심하자.

 

 

 

니느웨의 파멸 (나훔 2:11-13)

 

 

여기서 우리는 니느웨의 파멸을 본다.

 

1. 니느웨는 이웃 나라에게 정복당한다. 그 이웃은 이제, 니느웨가 교만하여 창성할 때 범한 모든 박해와 권세의 남용을 기억나게 해 준다(1,12절). "이제 사자의 굴이 어디뇨?" 그것은 사라졌으니 사자의 굴도 그 발자국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젊은 사자가 먹이를 먹는 곳이 어디뇨?" 어디서 그들이 먹이를 포식했는가? 니느웨의 방백들은 맹수인 사자와 같았다. 잔인한 폭군이 더 나았다. 아니 오히려 이 점에서는 니느웨 방백들이 더 악랄했다. 폭군들은 사람이기 때문에 당연히 인간성을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진정 사자들이라면, 자기들과 같은 종류는 먹이로 하지 않았을 것이다. Saevis inter seconvenit ursae-즉 사나운 곰들도 서로는 화목하다. 그러나 그들은 사람의 탈을 쓰고서도 사자의 잔인성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숲 속의 사자처럼 니느웨를 활보했다. 그리고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었으며," 모든 사람이 두려워서 그들 앞에 멈칫하였다. 그들은 아무에게서도 위험을 느끼지 않았다. 비록 아무도 그들을 사랑하지는 않았으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두려워 하였다. 이것이 그들이 원했던 전부였다. Oderint, dum met uant-즉 오로지 두려워하도록 하기 위해 그들로 하여금 증오하게 하라.

 

방백들뿐만 아니라 왕 자신도 모든 수단을 써서 폭력과 착취를 행하여 자신을 부요하게 하며, 자기 가족을 부양하는 것을 자기 사업으로 삼았다. 그는 "그 새끼를 위하여 식물을 충분히 찢었고" (조금으로는 그들에게 충분하지 않았다), "그 암사자를 위하여 움켰으니," 그의 곁에 다가 오는 것은 무엇이나 죽였고, 그의 자식과 아내와 첩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취하며, 흔히 사자가 하는 것처럼 "취한 것으로 자기 굴을 채웠고, 찢은 것으로 그 구멍을 채웠도다." 많은 사람들이 부양할 처자를 약함과 부정의 핑계로 삼으나, 오히려 그렇게 하여 얻어진 것은 그들에게 아무런 이익도 주지 않으리라는 점을 명심하자. "여호와를 경외하고" 정직하게 취할 것을 취하는 자들은 자기들과 처자를 위하여 재산을 원치 않을 것이다. "젊은 사자들" 은 비록 굴과 구멍이 자기들을 위해 "먹이와 찢은 것으로 가득했어도" 먹을 것이 모자라고 굶게 될 것이나, "진실로 이들은 먹을 것이다" (시 34:10).

 

2. 그것은 하늘과 땅의 공의로운 재판관에 의해 공언된다. 그것이 그의 소행이니 온 세상으로 하여금 그 사실을 주목하게 하라(13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리라" 고 했다. "만군의 여호와" 께서 그녀를 멸망시키려고 일어나실 때 그 남편이 그녀에게 무엇으로 보호를 한들 소용이 있겠는가? 니느웨에 거하는 압제자들은 자기들에게 상대가 안 되며 쉽사리 정복할 수 있는 이웃들만이 주위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공의의 주장이시며 불의의 보복자이시고 또한 앞으로도 그러하실 하나님이 그들과 대면하신다는 점이 입증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니느웨의 방백을 칠 것이다.

 

(1) 따라서 이 같은 군사적 준비가 그들을 지켜 주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의 병거들을 살라 연기가 되게 하리라." 그는 "불로" 라고 말하지 않고, 그들을 멸시하여, 하나님의 분노의 "연기" 가 그들의 병거를 사르는 데 쓰여질 것이라고 말씀한다(한글 개역과는 뜻이 다소 다름). 그들은, 하나님의 분노의 불이 타오르기 시작하여 아직 연기만 나고 완전히 타지 않았을 때에, 이미 타버릴 것이다. 또는 그 병거를 모는 자가 연기로 숨이 막혀 질식하게 될 것이다. 그때 "영광의 수레" 는 그들 가족의 치욕이 될 것이다(사 22:18).

 

(2) 그들 집안의 희망인 그들의 자녀들을 멸절하리라. "너의 젊은 사자들을 칼로 멸할 것이다." 그들은 이 사자들을 압제와 착취로 부양하려고 고심했다. 자식들을 배불리기 위해 죄악된 행위를 감행하고(어떤 사람들의 말처럼), 자녀들을 신사로 만들기 위해서 그들의 영혼을 저주하는 자들에게서, 하나님이 자녀나 또 그들의 위안물을 제거해 버리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3) 사기와 폭력으로 축적한 부는 그들이 즐길 수도 없을 것이며, 그들을 위해 사용되지도 않을 것이다. "내가 너의 노략한 것을 땅에서 끊으리니," 네가 그로 인해 이익을 보기는커녕 아무도 그로 인해 이익을 못볼 것이다. 어떤 이들은, 이 말을 그들이 미구에 그들의 이웃을 늑탈하지 못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4) 그들의 국외 대리자들은 그들의 이웃으로부터 이전과 같은 존경을 받지 못할 것이며, 이전에 끼쳤던 영향력을 끼치지 못할 것이다. "너의 파견자의 목소리가 다시는 들리지 아니하리라." 더 이상 그에게 주의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여기에 나온 사람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모욕하여 그 후 니느웨에게 기억되었던 죄악을 범한 니느웨의 파견자 중 하나인 랍사게를 가리킨다고 생각하고 있다. 한때 하나님을 비방했던 자들의 소리는 다시 들을 가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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