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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선지서

나훔서 개요 및 서론

by 은총가득 2021. 10. 8.

 

이 책은 니느웨의 심판에 관한 예언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니느웨는 당시 세계를 제패하던 앗수르 제국의 중심 도시입니다. 오래 전에 요나에 의해 놀랍게 회개했던 곳이기도하지요.

 

그들은 회개가 나라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직접 체험했지요. 그러나 회개를 통한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잊어버리고 다시 죄를 범합니다. 제국주의의 야망을 버리지못한 채 계속 악을 더해 갔습니다.

 

요나가 메시지를 전하고 약 150년이 지난 후 나훔이 앗수르의 멸망을 다시 선포합니다. 그리고 나훔의 예언 선포 18년 후에 이 일은 니느웨와 앗수르 제국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멸망의 원인

 

나훔서는 전체 3장입니다. 1장은 니느웨의 멸망을 선포하며 하나님께서 무엇을 심판하실지를 말합니다. 2장은 니느웨의 멸망을 묘사하며 어떻게 심판하실지를 말합니다. 3장은 니느웨가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말합니다.

 

나훔은 1장 2절에 그 원인을 “하나님을 거스르며 하나님을 대적하였다”라고 말합니다. 14절에는 각종 우상을 만들고 악을 행했다고 말합니다. 우상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며 대적하는 일입니다. 여호와는 질투하시며 보복하시는 분이십니다. 맹렬히노하시고, 악을 행하는 자를 단호히 심판하십니다.

 

또한 3장 1절에 니느웨가 야만적인 살인을 저지르고 무죄한 자의 피를 흘려 ‘피의성’이라고 하십니다. 성 전체가 피와 거짓과 포악이 가득하고 탈취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또 영적 음행인 우상숭배와 마술을 행하는 일들이 성행했습니다. 그것으로 여러 나라를 미혹했는데 이것이 니느웨 멸망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가 어떻게 멸망할 것인가도 말씀하십니다. 1장 “여호와께서 범람하는물로 그곳을 진멸하시고 자기 대적들을 흑암으로 쫓아내시리라”(8절), “하나님께서온전히 멸하시리니”(9절), “그들이 비록 강하고 많을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그가 없어지리라”(12절), “네 이름이 다시는 전파되지 않을 것이라”(14절)라고 하십니다.

 

또한 2장 6절에는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소멸될 것이다”라고 하고, “은과금, 아름다운 기구가 풍부했던 니느웨가 공허하고 황폐해질 것이다”(9,10절), “만군의 여호와가 앗수르의 대적이 되어 니느웨를 멸하실 것이다”라고 예언합니다(13절).

 

전쟁과 

 

니느웨 멸망의 키워드는 ‘전쟁’입니다. 장차 바벨론에 의해 앗수르가 멸망할 것입니다. 무시무시하며 막강한 군대를 묘사하고 있습니다(2:3-5). 왕후가 끌려가고 재물이 노략당하고 온갖 비싼 가구들이 빼앗기고 보물들이 약탈당할 것입니다. 부유했던 도시가텅 빌 것이고(2:7-10), 앗수르에게 압제를 받던 주변국들은 기뻐할 것입니다(2:11,12). 니느웨가 전쟁으로 도륙을 당해 죽은 자의 시체에 걸려 넘어질 정도입니다(3:3).

 

또 하나의 결정적 키워드는 ‘물’입니다. 강들의 수문이 열리고 왕궁이 물에 잠겨 소멸될 것입니다(2:6). 하나님께서 범람하는 물로 그곳을 진멸할 것입니다(1:8).

 

앗수르 제국의 멸망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이것을 증명합니다. 앗수르는 520년을 지속하던 거대한 제국이었습니다. 그러나 B.C.609년에 신흥 강대국 바벨론에 의해 멸망 당하는데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B.C.612년-609년 사이에 앗수르 제국은 깃발을 내리고 역사 속으로 사라져버렸지요. 많은 사람들이 앗수르 제국에 대한 이야기가 허구라고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19세기 중반에 영국의 고고학자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Austen Henry Layard가니느웨를 발굴하면서 앗수르가 역사적 제국인 것이 입증되었지요. 그 유적으로 니느웨는도시를 둘러싼 성벽의 길이가 13킬로미터, 성벽의 높이가 60미터, 성벽의 두께가 마차두 대가 나란히 달릴 만큼 넓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또 도시 변두리에는 30층이넘는 사원들이 금과 은으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지요. 그런데 주께서 예언하신 대로 물로 그 도시가 다 덮였습니다.

 

물이 범람하고 흙이 밀려오면서 60미터 이상인 성벽을 덮어버리고도 거대한 도시 위에6미터 높이의 흙이 쌓였습니다. 66미터 이상의 어마어마한 물결과 흙 때문에 거대 도시니느웨는 역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B.C.609년부터 A.D.1846년에 발굴될때까지 2,455년 동안 앗수르와 니느웨의 존재는 깊은 땅 속에 묻혀 있었지요.

 

 

공평한 심판

 

니느웨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하나님이 그들을 대적하시기 때문에 무너질 거라고 합니다. 나훔은 역사에서 예를 들어 말합니다(3:8-10).

 

‘노아몬’이라는 도시는 천혜의 요새였습니다. 그곳은 강 사이에 있었고, 바다를 끼고있었습니다. 바다가 성루가 되고 방어벽이 되었지요. 구스의 용병이 있었고, 애굽도 든든한 힘이 되었습니다. 그러한 노아몬도 무참하게 무너졌습니다. 가장 강하고 안전하다고 여겼던 노아몬도 결국 포로로 사로잡혀 갔지요.

그곳은 역사에 기록되지는 않았지만 나훔 당시에는 잘 알려진 도시인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노아몬도 하나님의 심판을 견디지 못했는데 니느웨가 견딜 수 있겠는가”라고 선지자는 질문합니다. 또한 니느웨가 의지하던 용사들도 환난의 날에 용맹을 발하지 못할 것입니다. 또 그들이 의지하던 튼튼한 성벽과 수비대들도 휴지 조각처럼 아무 쓸모가없을 것입니다. 전쟁의 날을 위해 비상식량을 최대한 비축했을지라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부자들은 전쟁의 불안으로 재산을 몽땅 들고 나라를 빠져나갔다고 합니다(3:16). 그들이 의지하던 왕과 권위자들도 아무 방어막이 되어주지 못합니다. “네 방백들이나 네 장수들은 힘 없고 쓸모 없는 메뚜기 같을 것이다”라고 하십니다(3:17).

 

나훔은 다음과 같은 슬픈 소식으로 끝을 맺습니다(3:18,19).

 

앗수르 왕이여

네 목자가 자고 네 귀족은 누워 쉬며

네 백성은 산들에 흩어지나 그들을 모을 사람이 없도다

네 상처는 고칠 수 없고 네 부상은 중하도다

네 소식을 듣는 자가 다 너를 보고 손뼉을 치나니

이는 그들이 항상 네게 행패를 당하였음이 아니더냐

 

나훔을 통해 예언하신 것처럼 세계를 제패하던 거대 도시도 불의와 불법을 행하면 주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온전히 멸망하여 다시는 그 이름이 전파되지 않을 것입니다. 나훔서를 통해서 또 다시 발견하는 것은 모든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그분은 공평하게 심판하신다는 것입니다.,< 홍성권 목사> 

 


나훔(Nahum)

1. 명칭

나훔에 관한 자료는 본서에 기록되어 있는 사실 외에 다른 것을 찾아볼 수 없다. 그의 고향인 엘고스라고 나1:1에 언급되어 있으나 엘고스가 어디인지 불분명하다. 나훔의 연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되는 두 사건이 있다.

 

하나는 노아몬(Thebes, 애굽 제18왕조 시대의 수도)의 함락(661년)이다.
다른 하나는 니느웨의 함락이다(612년). 나훔의 활동 시대는 이 두 사건의 중간 시대일 것이다.

본서 나3:8-10을 보면 노아몬의 함락이 과거사로 기록이 되어있는데 노아몬은 661년에 앗수르왕 아술버니팔 (Ashurbanipal) 에게 점령되었다. 또 본서에는 니느웨가 함락 되던일을 목격자 처럼 묘사해 있는데 니느웨는 612년에 바벨론왕 나보폴라살(Nabopolassar)이 함락 시켰다. 그러므 로 나훔은 661년과 612년 사이에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설에 의하면 나훔은 메소보다미아에서 살다가 거기서 죽었다고 되어있으나 본서에 의하면 그는 유대인이며 유다에서 활동한 예언자이다.

 

2. 주제표

구분 니느웨에 대한 진노 니느웨에 대한 경고 니느웨의 멸망 묘사
본문 나 1 나 2 나 3
주제 파멸 애가 멸망

 

3. 내용과 주요사상

 본서의 주제는 니느웨의 함락이다.
본서는 하나님의 위엄을 찬양하는 찬미로 시작 되며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에 대한 형벌과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 대한 자비와 선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본서는 니느웨가 포위된 일과 그 함락과 함락의 이유를 말하고 있는데 유다의 숙적 앗수르에 대한 불타는 분노와 증오가 예언의 중심이 되어 있다.


다른 예언자 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강조하고 있는 데에 그들의 관심과 임무가 있었는데 나훔은 이러한 일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
본서는 오래동안 선민 이스라엘 민족을 괴롭힌 숙적 앗수르가 패배당하고 그 서울 니느웨가 함락 되는데 대한 환희에 넘치는 복수의 노래이다.
약간 편협한 국수주의 사상이 나타나 있으나 앗수르가 오래 이스라엘과 유다를 괴롭힌 것에 대한 그들의 분노를 생각하면 이해되는 일이다.

 

그림설명 / 니느웨 : 사로근 2세의 아들인 산헤립에 의하여 아시리아 제국의 수도가 되 었다. 7.2km 에 이르는 메소포타미아 최대의 도시 건설에 북이스라엘로 부 터 연행해온 포로들을 이용하였다. 발굴과정에서 특기되어야 할 일은 아슈 라바니팔 도서관이다. 26.000매에 이르는 토서판 중에 길가메쉬 서사시. 창 조설화. 대홍수 설화가 들어있다. 성벽은 제방이 되어 있는데 그중 일부 복 원된 북서벽을 일몰시간에 서쪽에서 촬영한 것이다.

 

4. 내용 분해(대분류)

1. 복수하시는 하나님 나1:1-15 1) 여호와의 복수와 진노 나1:1-8 2) 하나님의 백성의 구원 나1:9-13 3) 앗수르의 멸망 나1:14-15 2. 니느웨의 멸망을 노래함 나2:1-3:19 1) 니느웨의 공격과 그 함락 나2:1-13 2) 니느웨의 죄와 그 멸망 나3:1-19 3. 벌과 하나님의 최후의 자비 나6:1-7:20

 

5. 내용 분해(소분류)

○나1:1 심판과 구원의 선포 나1:1 하나님의 성품 나1:9 유다의 회복 나1:15 구원의 선포 ○나2:1 니느웨의 멸망 나2:1 니느웨에 대한 공격 나2:8 멸망당한 니느웨성 ○나3:1 니느웨의 멸망 나3:1 니느웨 멸망 원인 나3:8 피할 수 없는 니느웨의 심판


나훔(Nhum)의 외침

G. Campbell Morgan 저 / 김현진역

 

- 하나님의 보복 -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시며" (나1:2,참조,나1:1-15)


한 세대 전의 위대한 설교가이며 신학자였던 로버트 윌리엄 데일(Robert Willian Dale) 은 어느날 필자에게 말했다. "나는 지옥에 관해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을 알고 있다. 그 사람은 무디(D.L.Moody)이다." 데일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하였다. "내가 그렇게 느끼는 이유는 무디가 지옥에 대해 두려워하지 않고 말하는 것을 결코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거의 공포에 가까운 두려움없이 이 나훔의 선지서를 읽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의 문장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하나의 서술 句에 불과한 첫 문장에서 우리는 본서의 주제를 읽을 수 있다. "니느웨에 대한 중한 경고." 이를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니느웨에 대한 신탁'이다.

 

나훔서는 요나서의 후편이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요나서와 한 백년 정도 차이가 난다.

나훔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니느웨에 대한 신탁에 대해 말하려고 온 선지자였다. 나훔이 이 책을 기록하였을 때, 이는 하나의 예언이었다.하나님의 뜻과 행동에 의해 거대한 성읍과 위대한 사람들이 완전히 소멸되리라는 예언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는 우리는 역사가 된 사건에 대해 읽고 있는 것이다. 그가 예언으로 말하였던 모든 것이 그대로 되어졌다. 위로를 의미하는 선지자의 이름 나훔은 상당히 암시적이다. 분명히 그의 말씀의 목적은 이스라엘에게 위로를 베풀기 위함이었다.그 당시 이스라엘 민족은 앗수르 즉 니느웨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나훔은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태도가 무엇인지를 밝혔다. 또 그 성읍과 백성을 말살시킬 하나님의 행위를 예언하였다.


이 예언은 완전하게 성취되었다. 실제 군사들이 니느웨 도성으로 쳐들어와 성읍 전체를 황폐케 하였다.

나훔이 선포한 말씀은 매우 자세하고 명쾌하였다. 또 그 주장은 논리적이었으며 뚜렷하였다.


서두에 그는 이것을 묵시라고 기록하고 있다. "엘고스사람 나훔의 묵시 글이라."

이는 처음부터 끝까지 여호와의 묵시이다. 처음에는 진노하신 하나님의 묵시이고, 다음은 보복하시는 하나님의 묵시이다. 따라서 우리는 말씀의 순서에 따라 장을 나눌 수 있다.

1장은 보복의 결정이고,2장은 보복의 내용이다. 그리고 3장은 보복의 이유이다.본서의 최고 가치는 바로 여기에 있다.

본문에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나타나 있다.

이는 진노하심이 있다는 것과 그 진노의 이유를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형태까지도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를 읽음으로 하나님의 자비와 애정을 대하게 되었다고 고백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진노와 징벌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성품에 관한 심오한 진리는 결코 가리워지지 않는다.


본서는 성경전체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와 일치이며 본서 자체만으로도 그 계시를 완전히 드러내고 있다.

모든 선지자들은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의 진노를 목격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또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도 목격하였다. 우리가 이 모든 말씀을 주의깊게 읽으면, 특히 본 나훔서를 주의깊게 읽으면,하나님이 진노하시는 이유가 결국 그의 사랑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을 제쳐 놓고,오직 주님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자.

많은 사람들이 아이들의 찬송가 가사 식으로만 주님을 생각한다.


온순하고 온화하며 유순하신 에수.
이것은 주님에 대한 옳은 표현이긴 하지만 진리의 전부는 아니다. 구약의 어떤 선지자도 예수께서 하신 것 만큼 깜짝 놀랄 만한 말을 하지는 못했다. 예를들면, 예수께서는 우리가 위의 찬송가를 가르쳐 주는 아이들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그는 분명히 "온순하고 온화하며 유순하신 예수"였다. 그는 아이들을 사랑하셨다. 그는 이처럼 아이들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어린 아이를 실족케 하는 것보다는 연자 맷돌을 메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고 선포하셨다. 또한 그는 한 성읍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시기도 하신 분이셨다. 그러나 그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그는 그 성읍의 운명을 천명하셨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마23:38)
우리가 본문의 8절까지를 읽으면,나훔이 본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밝히고 있는 뛰어난 말씀의 조합을 대하게 된다. 각 선지자들은 하나님에 대해 약간씩 다른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이를 잘 조합한다면, 어느 정도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 이사야는 보좌에 오르신 하나님을 보았다. 하늘이 그의 보좌이며, 땅이 그의 발등상인 하나님을 보았다. 에스겔은 구르는 바퀴와 살아 있는 생물들 속에서 하나님을 보았다. 예레미야는 진노의 하나님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말로 하나님의 마음을 밝히고 있다.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륙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렘 9:1). 나훔이 본 하나님의 모습은 본서 서두에 나타나 있다. 이것들을 모아 보자."투기"(jealous),"보복"(avengeth),"진노"(wrath),"노"(anger),"분노"(indignation),"진노"(fierceness),"진노"(fury).


"노함"(anger)에 대하여 히브리어 성경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용오가 본서의 서언에 나타난다는 것은 우리의 시선을 끌게 한다. 이 용어들을 잠시 살펴보자. "투기"(jralousy)의 원뜻은 격렬한 감정적 혼돈이다. 이는 전적으로 주관적인 것이다. 질투는 언제나 진노의 결과이다. 이 진노는 사랑이 잘못됨에서 오는 것이다. 배신에 대한 감정적인 반감이 바로 이 투기이다.


이 용어에 바로 이어 나오는 것이 "보복"(avengeth)이다. 이것은 단순히 감정적인 것이 아니다. 이는 의지적인 것이며, 활동적인 것이다. 히자만 이 보복은 천벌이지,앙갚음이 아니다. 천벌과 앙갚음은 같은 것이 아니다. 인간의 노함은 거의 언제나 앙갚음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렇지 않으시다. 하나님의 노함은 천벌이다.

"진노"(wrath)는 히브리어로 단순히 한쪽 편으로부터 다른 편으로 건너감을 의미하는 용어를 번역한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의 태도와 활동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심판이 하나님에게 있어서는 "기이하신 행동"임을 기억하여야 한다. 즉, 이는 하나님의 마음, 그의 소망, 그의 목적, 그리고 그의 의도와는 동떨어진 것이다. 따라서 이 진노에서는 불가피한 원인이 있다. 다음에 우리는 거의 같은 의미의 "노"(anger)와 "분노"(indignation)을 대하게 된다. 이 둘은 각각 활동을 나타내는 것으로 진노의 표현을 가리킨다.


그 뒤에 나오는 "진노"(fierceness)는 타오르는 것을 의미하며 또 다른 "진노"(fury)는 뜨거움을 의미한다.
이 모든 것을 분명히 기계적이며 인위적인 구분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를 통해 하나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선지자가 시종 사용한 용어인 여호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은 이 이름을 통해 인간에게 나타나신다. 진노를 발하고 노하시는 이는 바로 이 하나님이시다. 이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우리는 2절에서 세 가지 모습을 본다. 이는 또 6절에서 8절까지 세 가지로 설명되어지고 있다.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1:2).
이는 활동적인 격정을 표현하고 있다.
여호와는 보복하시며 진노하시되.
이는 같은 것의 다른 면이다. 즉, 이것은 격정에서 나오는 행동을 언급하는 것이다. 그러면 마지막 말씀은 무엇인가.
자기를 거스리는 자에게 보복하시며 자기를 다스리는 자에게 진노를 품으며,
이 세가지 언명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가 격정의 결과라는 사실, 그리고 이것은 언제나 특이하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선지자는 우리에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선포로써 그 설명을 시작한다.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권능이 크시며 죄인을 결코 멸하지 아니하시느니라(1:3)
그는 가장 강력한 성격의 상징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여호와의 길은 회리바람과 광품에 있고." 하나님의 응답은 저항할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다음의 말씀을 주의깊게 살펴보자.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 그는 자기에게 의존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 그가 범람한 물로 그곳을 진멸하시고(1:7)


이는 니느웨에 관한 말씀이다.그러면 우리는 여기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 첫째, 하나님의 진노는 행동으로 진전하는 사랑에서 나온 격정이다. 우리가 본 선지서를 계속해서 읽으면, 니느웨가 어떤 도성이며, 니느웨가 무엇을 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니느웨는 주변의 모든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듣고 있었다. 이는 니느웨가 전제적 압정을 행하였기 때문이다.니느웨는 건방진 오만함으로 모든 종류의 잔혹한 행위를 하였다. 여호와는 갇힌 자의 외침을 들으셨다. 니느웨에게 억눌린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니느웨를 향한 노를 발하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는데, 니느웨가 바로 그 증거였다. 백년 전에 선지자 요나는 마지 못해 하면서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었다. 그때 니느웨는 회개하였었고, 하나님은 기다리셨다. 그 사이에 니느웨는 다시 자신의 회개를 돌이키는 가증스런 죄악을 범하였으며 잔악한 행위를 계속하였다. 이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니느웨에 임하게 되었다. 선지자는 이어 하나님의 진노에 관한 환상을 보여 준다. 여호와께서 노하신 이유는 다음과 같다.


여호와께 악을 꾀하는 한 사람이 너희 중에서 나와서 사특한 것을 권하는도다(1:11).
이는 역사적 언명이다. 그가 행한 행위는 이사야서에 나타나 있다. 이것은 산헤립을 중심으로 한 니느웨의 죄, 즉 하나님을 향한 니느웨의 죄였다.그 결과는 그 성읍에 명백히 임하였다. 3장을 읽어보자.


화 있을진저 피 성이여 그 속에서는 궤휼과 강포가 가득하며 늑탈이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휙휙하는 채찍소리. 굉굉하는 병거 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같은 창, 살륙당한 떼, 큰 무더기 주검,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이는 마술의 주인된 아리따운 기생이 음행을 많이 함을 인함이라. 그가 그 음행으로 열국을 미혹하고 그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3:1-4).바로 이것 때문에 여호와는 "내가 네 대적이 되어서"라고 말씀하셨다. 여호와는 노하셨다. 이는 통치자가 하나님의 뜻에 거스려 자고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거역하면 그 결과로 백성들을 가혹히 다루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통치자는 압제자가 되며 잔혹해지는 것이다. 그들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비참함과 황폐함이 따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노를 통해 어떤 이들은 은혜를 입기도 한다. 바로 억압당하던 자들, 짓밟히던 이들,억울함을 당하던 이들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오래 참음 후에 이 성읍을 향해 발하여졌음을 다시 한 번 기억하자. 이때는 이미 희망이 사라져 버린 때이다.


너의 다친 것을 고칠 수 없고 네 상처는 중하도다(3:19).
불의의 잔이 이미 넘쳐 흐르기 때문에, 니느웨가 넘어져도 이를 위로할 자는 아무도 없다. 모든 나라가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정당한 것임에 동의한다.그러므로 일단 하나님의 진노를 발하시면,이는 완벽한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다. 선지자가 기록한 니느웨에 대한 시적 기술이 실제 역사 과정을 통해 실현되었음을 다시 한번 기억하자. 우리는 이 성경적 예언 말고도 역사적 설명을 잘 알고 있다. 데오도루스 세쿨루스(Deodorous Seculus)는 강물이 대적할 때가 되어야 니느웨가 멸망하리라고 예언하였었다. 때가 되매 강이 범람하여 둑을 무너뜨리려 20스타디아(stadia)의 제방을 쓸어가 버렸다. 광포한 강물의 범람에 의해 니느웨는 멸망하였다.역사가들은 이를 단순히 불운에 의한 강의 범람 정도로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행위임을 안다. 그는 강을 사용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이 말씀은 하나님에 관해 무엇을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인가.

첫째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것은 곧 그의 진노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라는 점이다. 사랑은 어떤 상황에서는 진노일 수 있다. 사랑은 진노이다. 오늘날 비참함과 유혈, 그리고 잔인함과 잔혹,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가 침묵하며 고분 고분히 비위나 맞추고 있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일이다. 우리가 비위나 맞추고 있다면, 하나님이 노하시리라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인간성이 짓눌리고 훼손된 곳에는 언제 어디든지 하나님의 진노가 분연히 임한다. 우리는 이를 주님의 말씀과 연관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마18:7).


나훔서는 놀라울 정도로 명쾌하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죄악에 대해 밝히고 있다.첫째는 교만의 죄이다. 이는 자만한 마음을 갖는 것이다. 이 교만은 하나님을 무시하거나, 전혀 생각지 않는 데서 비롯한다. 하나님은 교만에 대해 언제나 노를 발하신다.이는 교만이 낳는 결과 때문이다.
또 하나님의 진노는 언제나 어떤 형태든 잔혹함이 있는 곳에 나타난다. 오래 참으심에도 불구하고,여전히 회개치 않으면,하나님의 진노는 가중된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못하리라(잠29:1).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두고 선지자의 분명한 선포로 돌아가 보자.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여호와는 선하시며 환난 날에 산성이시라.그는 자기에게 의로하는 자들을 아시느니라(1:7)
하나님의 진노하심은 언제나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행위이다.그러나 이는 그의 의로움과 그의 사랑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비추어 우리는 다시 한번 시편 기자의 말씀을 듣는다.
그 아들에게 입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시2:12).


나훔 서론

 

명칭

히브리어 성경은 본서의 저자인 선지자 나훔의 이름을 따라 그 제목을 '나훔(위로, 연민, 위안)'이라 하였다.

 

저자 및 기록연대

■ 저자

본서의 저자는 '엘고스 사람 나훔'으로 기술되어 있다. 나훔이란 이름은 '위로', '위안', '구원'이란 뜻을 갖고 있다. 본 예언의 주요 메시지는 임박한 니느웨의 멸망이었지만 그 결과, 앗수르로 부터 압제받던 유다의 구원이기도 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선지자란 명칭을 받을 만하였다. 나훔은 자기 백성에 대해서는 심판이나 징벌을 한마디도 선포하지 않았고 오직 위로의 말만 하였다. 그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선포하면서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게 하였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이제 네게 지운 그의 멍에를 내가 깨뜨리고 너의 결박을 끊으리라"(1:12, 13)로 위로하였다.

 

■ 저작 연대

본서는 니느웨의 멸망을 예고하고 있다. 나훔은 니느웨의 멸망을 명료한 어투로 언급하면서 그 사건의 긴박성을 암시하고 있다. 이 점을 미루어 볼 때 본서의 연대는 B.C. 612년 니느웨 멸망 직전이었던 듯하다. 그는 또한 테베가 약탈당한 사건(3:8)을 과거의 일로 언급하였다. 테베는 B.C. 663년 앗수르의 왕 앗수르 바니팔에 의해 약탈당했다. 따라서 본 예언은 이 두 사건 사이에 선포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거기다 내적 증거를 덧붙이면 그 연대는 B.C. 621년 요시야 왕의 개혁 직후로 더 좁혀진다. 1:15은 그 당시 유다 인들의 의식 속에 종교 의식의 준수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사상이 매우 생생하게 반영되어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런 점에 근거하여 본서의 연대가 B.C. 621년에서 612년 사이라고 추정하게 된다. 나훔 선지자는 스바냐, 하박국, 예레미야 등의 선지자와 동시대 인물이었다.

 

주제

나훔의 예언 중 우리가 우선적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여호와는 투기하시며 보복하시는 하나님'(1:2)이란 구절이다. 하나님은 사람들에 대해 오래 참으신다. 그러나 그 분노가 일어나게 되면 하나님은 분노를 자극시킨 악인들을 철저하고도 분명하게 처벌하신다.

 

그는 앗수르의 죄악 중 두 가지를 지적하였다.

첫번째의 것은 군사력을 무자비하게 사용한 점이다. 그 결과 피가 강처럼 흘렀으며, 많은 민족이 멸절되었고, 훌릉한 관습과 제도가 폐지되었으며, 전쟁이 곳곳에서 격렬하게 일어났다(2:11-13). 정복자 앗수르 인들, 특히 앗수르 바니팔 등에 의해 저질러진 만행을 살펴보면, 말뚝을 박아 사형을 집행하고 인골로 피라밋을 쌓았으며 그밖에 너무도 끔찍하여 묘사할 수 없는 많은 야만적인 행위 등을 들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의 존엄성을 멸시하였던 그 백성들에게 나훔은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리라'라고 선포하였다.

 

나훔이 지적하는 두번째의 다른 죄악은 비양심적인 교역이었다. 그 주변국가들은 아부와 부패로 정복민들의 사치와 악을 만족시켜 주고 있었고 상인들은 황금에 굶주려 온갖 종류의 우상과 세공품, 그리고 악을 조성할 만한 모든 물건을 팔았다. 그들에게 정직과 도덕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으며 부만 얻고 쾌락만 즐기려 하였다(3:1-4). 그러나 나훔은 유다 민족에게 좋은 소식을 전달하는 사자가 오고 있다고 선언한다. 그래서 유다 백성들이 압제자의 멸망에 대한 감사로써 종교 절기를 지키고 양심적으로 서원을 갚고 의무제사를 드리라고 권고한다(1:15).

 

내용분해

1. 답관체 형식의 시(1:1-15)

2. 니느웨가 멸망하는 광경(2:1-13)

3. 니느웨의 패배를 노래함(3:1-19)

서론 일람

1. 기록자 : 나훔

2. 기록연대 : B.C. 663-612년 사이

3. 기록장소 : 유다

4. 기록대상 : 앗시리아 민족과 그 나라의 수도인 니느웨성 백성을 대상으로 썼을 뿐만 아니라 유다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권면하고 위로하기 위하여 나훔서를 기록했다.

5. 핵심어 및 내용 : 나훔서의 핵심어는 "막강한 힘"과 "위로"이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 니느웨는 막강하고 강력한 성이었다. 이 니느웨성은 100피트 높이의 큰 성벽-이 성벽 위로 동시에 6개의 마차가 달릴 수 있었다-과 60피트 깊이의 연못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그러나 나훔은 이같은 가공할 만한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의 백성에게 계속해서 위로의 말을 선포했다. 곧 아무리 강력한 인간들이 침공해 올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능히 이기도록 도와 주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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