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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선지서

미가의 개혁운동

by 은총가득 2021. 9. 24.

 

 

 

미가의 개혁운동

 

 

미가(   )란 말은 "누가 여호와와 같으리요"라는 뜻입니다. 미가는 이사야 선지자와 같은 시기에 활동하였습니다.  당시에는 아하스와 히스기야 왕이 유다를 다스리던  때로서 북  이스라엘왕국이 멸망하고(B.C.  722) 아하스(B.C.736-728)가 하나님을 떠나 악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앗수르의 침략 위협과 종교적, 정치적 부패로 인하여 불의가 팽배하던 시기였습니다.


  더군다나 아하스는 유다의  왕이 되자 "바알의 우상을  부어 만들고 힌놈의 아들 골짜기에서  분향하고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그 자녀를 불사르고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한지라"(대하 28:2-4) 하나님은 아람군대와 이스라엘 군대를 동원하여  아하스를 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혼란한 시기였음에도 불구하고 백성의 지도자들과 선지자들의 부정은 날로 깊어만 갔습니다. "두령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치면서 오히려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2:11)고 백성들을 미혹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죄악이 팽배하고 부패가 성행하여지자 미가 선지자는 사회개혁을 부르짖고 나섰습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의 신으로 말미암아 권능과 공의와 재능으로  채움을 얻고  야곱의  허물과 이스라엘의  죄를  그들에게 보이리라"(3:8).

 

 

1. 사회개혁에 대하여

 

미가 선지자는 먼저 이스라엘 족속이 하나님의 율법을 떠나 우상을 섬긴 죄로 멸망할 것을  선포합니다(1:7).

그런 후 유다의  개혁을 위해 선언합니다.


첫째는,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착취한 것을 지적합니다(2:1-2).

둘째는, 치리자들의 부정부패를 지적합니다(3:1-3).  

셋째는, 거짓 선지자들의 사리사욕을 지적합니다(3:5).

 

그리고  이들을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심판하시겠다고 선언합니다(3:9-12).
이들은 모두  사회의 상류층에 속하는  사람들입니다. 가난하거나 지배받는 계급이 아닙니다.

이들이 부패함으로 나라는 점점 어둠에 빠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들이 부정과 부패를  일삼기 위한 사회구조적 모순이 더욱 심화되기만 합니다. 그 결과 피지배 계급은 날로 착취를 당하며 지배 계급에게 갈수록 유리한 제도 아래 점점 얽매여  갈 뿐입니다. 아무리 발버둥쳐봐도 공의가 무너진 시대에서는 오히려 불이익만 얻을 뿐입니다. 어딜가나 돈과 제도와 권위가 앞설 뿐이지 정의나 선은 찾아볼 수 조차 없는 사회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이렇게 부패한 이스라엘을 향하여  미가는 먼저 하나님께 정당한 예배를 드리라고 경고합니다(6:6-8). 정당한  예배를 위해서는 합당한 제물과 정성어린 제물과 귀중한 제물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제물을 준비하여 예배를 통하여 바치게 하신  목적은 단순히 의식적인 행위에서 떠나 참 회개와 영적 각성을 통한 헌신을 요구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바로 그러한 삶의 모양을 갖춘 것은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하는 것이 아니냐"(6:8)는  말씀 처럼 1)의를 행하며, 2)이웃에 대하여 인자하며, 3)하나님을 겸손히 따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삶의 모습은 참 회개와  신앙이 가져다 주는 열매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이라고 말합니다(신 6:5). 그러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만이 사람으로서 사람의 본분을 다 지켜 행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할 때만이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베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럴때 사회의 구조악과 부정과 부패는 자연스럽게 개혁이 됩니다.


  우리는 언뜻 나타난 현상을  고치면 새로운 사회가 건설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외형적으로 나타난 사회구조를 개편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미 역사가 증명해  주듯이 사회구조 자체가 인간을 속박하거나 착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구조를 운영하는 인간이 인간성을 상실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자기들의 권익과 명분만을 위하기 때문에 사회가 악해져 왔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사회개혁은 구조악을 제거하기 보다는 먼저 인간성의 회복이 앞서야 합니다. 그리고 인간성이란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에 따라서만 회복될 수 있을 뿐입니다.


  비로소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삶을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찾을 때 공의가 나타나며 인자가 널리 퍼지며 하나님께 대한 겸손 안에서 사랑이 실현될 것입니다. 따라서 진정한 사회개혁이란 구조적 측면을 변혁시키는 것이 아닌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에로 회복시키는 작업이어야 합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불리움 받았으므로 정치,  경제, 사회 모두가 하나님과 나누어 생각할 수 없습니다.  곧 하나님을 떠난 상태에서는 어떤  모양과 형식을 갖춘 정치, 경제, 사회일지라도 아무런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간들이  꾸며낸 각종 제도와 윤리로도  인간들을 가꾸고 장성하도록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각종 제도의 개선으로도 얼마든지 좋은 환경을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결과 인간들이 바라는 복락의 세계 즉,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을 체계화시킨 작업이 곧 맑스와 레닌에 의해 주창된 공산주의입니다. 그들은 맑스주의와 레닌주의를 가리켜 인류의 유토피아의 현장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어떤 제도나 이념이라 할지라도 인간의 모든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없습니다. 자기가 주장하는 이념은 그에게나 해당되고 정당하고 가치있는 것이지 전  인류에게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모두 자기에게 알맞는 이념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이념을 정립하고 그 이념에 동조하는 사람들을 규합하게 됩니다. 나아가 그 이념을 형상화시키기 위한 실력  행사를 하게 되는데 이것을  가리켜 이데올로기(Ideology)라고 합니다. 이념은 그것을 주장하는  자들에게는 생명이요 유토피아이지만 다른 이념집단에게는 이데올로기로 등장합니다. 그래서  서로 다른 이념을 갖는 사람들끼리 이데올리기 전쟁을 합니다. 예를 들면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싸움이 가장 대표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이념이든지 모순을 가질  수 밖에 없습니다. 그 모순을 최소화한다는 이유 때문에 또 다른  모순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이럴 경우 사회구조 자체가 악이 아닐지라도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악이 됩니다. 그 결과 한 이념집단 안에서도 어떤 이들에게는  선인 것이 다른 이들에게는 악으로 드러납니다. 따라서 서로 다른 이익을 추구하는 사람들끼리 분쟁을 하게 되며 결국 자신들의 이익을 앞세우는 권익 다툼을  형성하게 됩니다. 그 안에서 이익을 얻는 사람들은 계속 그 보장을 위해  더 애를 쓰며, 착취를 당하는 사람들은 이에서 벗어나려고 행동을 취합니다. 이것이 지나치면 분쟁이 되고 더 나아가면 혁명이 됩니다. 그렇지만 혁명이 성공한다 하도라도 그 반대의 양상이 나타날수 밖에 없기 때문에 또 다른 분쟁이 야기되며 결국 또 하나의 혁명을 가져오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이 제정한 어떤 이념에  근거한 제도일지라도 절대로 전 인류에게 안정과 평화와 만족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미가 선지자는 부자들과 통치자들과 제사장들을 타파하는 사회구조적 측면에서의 개혁을 부르짖지 아니하고, 온전히 하나님 앞에서 인간성의 회복이 앞서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만일 사회 개혁이 구조적 측면의 개혁이었다고 한다면 하나님은 몇 번이고 정치자들과 사업가들과 종교가들을 갈아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을 바꾸었다 해서 사회개혁이 이루어지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오직 사람들이  본연의 모습을 찾고 여호와 하나님께 돌아올 때만이 참다운 사회개혁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스럽게도 이스라엘은 이 일에 실패하고 말았으며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고 맙니다.

 

 

2.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 원리

 

이스라엘 자체는 종교와 정치가  모두 하나였습니다. 온전히 하나님에 의해 다스려졌으며 운영되었고, 하나님만을 위해서 존재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이 회개할  것을 촉구하고 사회개혁을 부르짖었을  때는 한결같이 하나님 앞에서의 결단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왕에 의해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다스려졌기 때문에 왕에 대한 책임보다는 하나님께 대한 책임이 항상 우선이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왕의 권위에 따라 복종한 것이 아니라 그  왕을 세우신 하나님의 권위에 따라 왕의 다스림에 순복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우리 나라는 구약의 이스라엘과는 그 형편이 매우 다릅니다. 우리 나라에는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성된  교회가 존재하며, 대한민국이라는 영토 안에 있는  백성으로 구성된 국가가 별도로  존재합니다. 따라서 교인은 국가의 국민이기는 하지만 국민이 모두 교회일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은 국민이 모두 교회였으며 국가와 교회는 별도로 존재하질 않았습니다. 그 안에 왕직과 제사장직과 선지자직이 있었으나 어디까지나 국가와 교회가 하나였으며 그 안에서의 직능상 서로 다른 제도를 가지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지상 국가들은  구약의 이스라엘 처럼 국가가 곧 교회이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사회를 개혁하고자 할 때는 분명한 인식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첫째, 그리스도인은  양심기관이어야 합니다.

국가가  부패하고 사회정의가 무너졌을 때 가장  양심적 기관으로서 교회가 그  사명을 감당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먼저 교회는 부패하지  않도록 순수성을 보전해야만 합니다. 교회가 부패한 상태로 국가를 개혁할 수는 없습니다. 교회는 먼저 순결함을 유지하기 위해 자신을 항상  살피며 개혁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국가의 양심기관으로서 먼저 자신을 성별하고 악에서 오염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여야 합니다. 그리기 위해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야만 하는데 곧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대로 가르치고 전하고 봉사해야 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란 그말씀에 따라 살 때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평강을 전하는데서 나타내집니다. 또한 그 말씀을 거역했을  때,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모든 사람들에게 경각심과 두려움을 주는 것도 공의를 드러내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말씀에 따라  판단을 받아야 합니다. 말씀에  거스리는데도 아무런 거리낌없이 교회가 나아간다면 하나님의  공의를 감추는 결과를 초래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의 심판을 인정하고 굴복해야만 합니다. 그럴때 국가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누가 하나님을 따르겠습니까?


  세째, 국가는 교회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온 우주를 다스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국가를 세워 교회를 보존하고 교회가 불의할 때 교회를 쳐서 다듬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용하시고자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회가 국가인 것은 절대 아닙니다. 국가는 국가의 헌법이 있습니다. 그 헌법대로 다스려지는 것이 정당합니다. 반면에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헌법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국가의 헌법을 준행하여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헌법도 준수해야 합니다.
  이와같이 그리스도인들이 그 본연의 자세에 합당하게 행할 때, 국가는 개혁될 수 있습니다. 교회가 교회로서  정당할 때 사회는 변혁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회참여입니다.

 

 

3. 그리스도인의 사회참여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지상에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러나 지상에는 영역을 가진 국가가 존재하고, 하나님은 국가를 세워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도록 하십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전세계적인 공동체를 가질 수 있으나 지역적으로 국가 안에 존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교회는 국가의 영향력을 받아야 합니다.


  물론 교회는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특수한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하나님은 지상에 있는 동안 지상 국가의  영향력 아래 교회를 두셨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국가를 운영하시는 분이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시라는 점입니다. 물론  국민들에 의해 선출된 지도자들이  입법을 하고 정치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 국민들을 주장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국가를 간섭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교회의  순결성을 보전하시기 위해 국가를 사용하고 계십니다. 곧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안정과 질서를 유지하도록 참으로써 교회가 교회로서의 모양을 잘 갖추어 나가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부패했을 경우에는 국가로 하여금  교회를 간섭하고 정화하기 위해 공권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를 믿는다면 국가 역시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점을  인정하고 국가의 권위에  승복하여야 합니다(롬 13:1-2). 그러나 만일  국가가 타락하여서 하나님을 거역하고  교회를 핍박한다고 하면 교회는 분연히 일어나 하나님께 국가를 탄원해야 합니다. 교회는 칼과 창으로 무장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 군대가 없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무장하여 국가를 정복하거나  무너뜨려서는 안됩니다. 국가를 세우고 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결정하실 문제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사회제도나 구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회적 구조 악이 팽배하다 할지라도 교회가  사회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사회구조악이 하나님의 공의를 거역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방해한다면 교회는 하나님께 탄원함으로써 사회구조를  개혁해야 합니다. 진정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이시며 권능이 충만하심을 믿는 교회라면 하나님께서 사회를 개혁해 주심을 기도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하나님의 신실한 백성으로서의 삶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전에 사회를 개혁한다는 이유로서 행동을 앞세워서는 안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과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거부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인 것을 포기해야 합니다. 물론 그가 국가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개혁을 주장하거나 행동을 표면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럴 경우 그는 교회라는 이름으로서가 아니라  국가의 한 일원으로서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왕이 되시며 주권자가 되십니다. 어떤 이유에서라도 자기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서 그리고 자기의 이념을 실현시키기 위해서 교회를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인이 민주화를 이유로 교회를 사용한다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의로운 나라 건설은 포기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건설한 것이 아닌 나라는 어떤 나라이든 참된 민주화가 보장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 사람이 주장하는 민주화일 수는 있으되 타인에게는 그처럼 지독한 독재는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민주화를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친히 건설하실 하나님 나라의 참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러한 백성으로 장성할 때, 참된 민주화는 자연히 이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아니하고 사회참여만을 고집하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거부하는  것이며 자기 이상을 구현하는 나라를 건설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대적하는 결과를 초래하고야 말 것입니다.

 

 

4. 새로운 왕국 건설을 위한 왕의 임재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름받은 이스라엘이  끝내 그 부름에 합당한 삶을 갖지못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고 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실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은 자"를 통하여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요나가 경험한 스올의 경험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한 댓가로 스올에 빠져  죽임을 당한 이스라엘을 전혀 새로운 존재로 회복시키시기  위한 메시지가 요나서였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회복을 통해 이방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우주적인 구원이 완성될 것을 하나님은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모스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의 패역을 지적하고 철저한 심판(죽음)이 예고 되었고,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죽은 이스라엘을 새로운 존재(인간성 회복)로 변화시키실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왕국을 멸절시키심으로 암흑 속에 던지시면서 이제 남유다왕국에 최후통첩을 미가 선지자를  통해 촉구하고 계십니다. 먼저 사회의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 전 국가의 지배층부터 하나님께 대한 정당한 예배를 시행하도록 요구하십니다. 정당한 예배란 온전히 하나님을 사랑함에서부터 시작되며 나아가 이웃을 자기 몸 같이 사랑하는 모습으로(마 22:37-40) 표출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로운 나라로 개혁되지 않고서는 심판과 멸망을 벗어날 수 없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성의 본질부터  부패해버린 이스라엘은 끝내 하나님의 최후통첩을 거부하고 맙니다.  "이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시온은  밭 같이 갊을 당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을 수풀의  높은  곳과  같게 되리라"(2:12).


  이처럼 철저하게  죽음에 빠지자 하나님은 새롭게  탄생할 이스라엘을 위해 태동을 허락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 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  한 자를 모아 그 저는 자로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멀리 쫓겨났던 자로  강한 나라가 되게 하고 나 여호와가 시온산에서 이제부터 영원까지 그들을 치리하리라 하셨나니 너 양떼의 망대요 딸 시온의 산이여 이전 권능 곧 딸 예루살렘의 나라가 네게로 돌아 오리라"(4:6-8)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  새로운 나라는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잡혀갔다가(4:9-13) 돌아와 새롭게 건설될 나라입니다. 이 나라는 지금까지의 인간이 다스리는 왕제도가 아닌 전혀 새로운 왕이 다스릴 것입니다.

 

  그 왕(메시야)이 오시는 날에 바로 이 약속된 새로운 나라가 건설될 것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그러므로 임산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주시겠고 그 후에는 그 형제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그(메시야)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그 떼에게 먹여서 그들로 안연히 거하게 할 것이라 이제 그(메시야)가  창대하여 땅 끝가지 미치리라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샬롬; peace)이 될 것이라"(5:2-5).


  이와같이 이스라엘의 남은 자(5:7-8)가  메시야 안에서 모아져 메시야가 왕이 된 나라를 건설하게  되는 새로운 나라는 지금까지의 제도나 사회구조와는 전혀 새로운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 나라에 대하여 미가는 다음과 같이 예언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그  날에 이르러는 내가 너의  말(마)을 너의 중에서 멸절하며 너의 병거를 훼파하며 너의 땅의 성읍들을 멸하며 너의 모든 견고한 성을 무너뜨릴 것이며 내가 또  복술을 너희 손에서 끊으리니 네게 다시는 점장이가 없게 될 것이며 내가  너의 새긴 우상과 주상을 너의 중에서 멸절하리니 네가 네 손으로 만든 것을 다시는 섬기지 아니하리라"(5:10-13).


  하나님의 새 나라가  건설될 때는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제도가 될 것이며 오직 하나님만을 의뢰하며 그렇지  않는 자들에게는 심판이 올 것을 선포하십니다(5:14-15). 그 날이 오면 하나님을 대적했던 모든 나라들이 진흙 같이 밟힐 것이며(7:10), 하나님의 크신 능력 앞에서 "열방이 보고 자기의 세력을 부끄려서 손으로 그 입을 막을  것이요 귀는 막힐 것이오며 그들이 뱀처럼 티끌을 핥으며 땅에  기는 벌레 처럼 떨며 그 좁은  구멍에서 나와서 두려워 하며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주로 인하여 두려워 하리이다"(7:16-17)함과 같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으로 웅장하게 건설되는 새로운 왕국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나라에서는 불의도 없고 부패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새롭게 인간성을 회복한 하나님의 남은 자들만이 들어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사회제도를 개혁하고  사회구조악을 개선하여 이루고자 했던 유토피아는 얼마나 볼품없고 미련한 것인지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성이 하나님의 형상에로의  복귀를 통해 회복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유토피아란 하나의 허구에 불과합니다. 반면에 철저하게 거듭난 새 인간성을 가진 "남은 자"들로 구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진정한 평강(5:5)이 약속된 것입니다.


  다시는 전쟁을 위한 말과  병거와 견고한 성이 필요없으며 하나님을 대신할 아무 것도 없는 새 왕국에서는 오직 여호와 한 분 만으로도 그 이상의 만족을 누리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는 하나님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사람들이 애쓸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다시는 좀 더 나은 생활을 위해 타인을 압제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다시는 불의한 모습을 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의만 볼 것입니다. 그 나라의  왕으로 오실 메시야는 비록 보잘 것 없는 작은 성 베들레헴에서  탄생할 것이지만(5:2), 그의 통치권(kingship)은 창대하여 온 우주를 지배할 것입니다(5:4). 그리고 아무도 그 왕을 대적하지 못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너무 자기 이념만을  내세웠습니다. 자기의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모두 실패하고야 말았습니다. 그리고 메시야의 웅장하게 임하는 새 왕국 앞에서 부끄러움을 면치 못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다고 큰소리쳤던 모든 사람들은 부끄러워 감히 왕이신 메시야 앞에서 고개도 들지 못할 것입니다.


  이전까지의 선지자와는 달리 미가서에서는 메시야의 임함과 새 왕국이 건설될 것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음이 특이합니다. 북 이스라엘의 멸망을 보고 있는 미가 선지서는 머지않아 남 유다왕국도 멸망할 것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심판이 오기 전에 통회하고 돌아설 것을 선포하지만, 부패한 인간성의 완악함을 알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인간성 말살을 바라봅니다. 그러면서 그 뒤에 올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결단코 다시는 패역하지 않고 영원한 왕이신 메시야에 의해 다스려질  평강을 선포하며 소망의 날을 바라보도록 인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미가는 이렇게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습니다.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을  사유하시며 그 기업의 남은 자의 허물을 넘기시며  인애를 기뻐하심으로 노를 항상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주께서 옛적에 우리 열조에게 맹세하신 대로 야곱에게 성실을 베푸시며 아브라함에게 인애를 더하시리이다"(7:18-20).


  이보다 더 큰 위로와 소망이 인류에게 주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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