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가 개요
이 책을 기록한 사람은 선지자 미가입니다. 그를 예루살렘 남서쪽으로 약 30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가드 모레셋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1장 1절에 나와 있듯이 그는 이사야 선지자(사 1:1)와 동시대에 사역했고, 그의 예언은 이사야와 유사합니다. 예를 들어 이사야서 2장 2,3절과 미가서 4장 1,2절은 거의 동일한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사야는 ‘유다와 예루살렘’에 관해 말씀하고, 미가는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관해 말씀합니다. 사마리아는 북이스라엘의 중심지이고, 예루살렘은 남유다의 중심지입니다. 미가서는 유다 왕들의 연대를 말하지만 이 말씀의 수신자들은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입니다.
미가는 호세아등과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선지자 입니다. 미가는 모레셋 사람이라고 성경에 쓰여져 있는데요. 이 동네는 예루살렘 남쪽의 시골마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미가를 보통 귀족출신인 이사야와 대비하여 농민출신의 선지자라고 알고계실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으로 미가서를 시작합니다.
주로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와 남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의 왕족, 지배계층에 대한 비판을 하죠.
그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을 바라보면서 활동한 마지막 선지자이지요. 미가는 주로 평민들을 상대로 사역하고, 이사야는 주로 왕실을 상대로 사역했습니다.
명칭 및 저자 |
본서의 명칭은 선지자 미가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미가'라는 말은 "누가 여호와와 같은가?"라는 뜻이다. 미가 선지자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분이었다. 7:18에서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라고 한 것은 자기의 이름을 언어기교로써 표현한 것으로 추측된다. 미가는 갓 지파에 속한 모레셋이라는 조그마한 마을 출신이다. 그는 예루살렘의 탐욕스런 부자들과 방백들로부터 백성들을 보호하려고 애썼다. 그는 주로 남유다에 대해서 예언했지만, 북이스라엘에 대해서도 예언했다. |
주제 |
본서에서 가장 두드러진 주제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지금 임하고 있는 중이며(1:2-4), 이미 임하였다(7:7-20)고 볼 수 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판은 죄 때문이다(1:5). '죄'와 '허물'이란 말이 1:5, 13; 3:8; 6:7에서 나란히 쓰이고 있다. 그리고 '죄악'이란 말이 7:18-19에 나온다. 여기에서 죄는 우상 숭배(1:7; 5:13)에서부터 살인(7:2)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다. 이러한 죄에 대해 의로우신 하나님은 공의의 원리에 따라 심판하신다(2:1-3). 그리고 미가 선지자는 하나님의 심판만 선포하지 않고 하나님의 구원을 함께 선포하고 있다. 그는 당대의 사회악을 언급한다. 그러나 미가 선지자는 그러한 상황들이 영원히 계속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심판이 임하면 신실한 사람들(남은 자)은 구원을 받을 것이다(2:12; 4:7; 5:7-8; 7:19). 그리고 다윗 계통의 한 새로운 왕이 베들레헴에서 나서, 현재의 약한 왕을 대신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여호와의 능력으로 땅 끝까지 다스릴 것이며, 그의 백성은 안전하게 거할 것이다(5:2-4). |
역사적 배경 |
■ 사회 배경 당시에 남유다의 부패상은 크게 두 가지로 지적될 수 있다. 하나는 영적·종교적 부패인데, 물질을 얻기 위해 순수한 종교 의식을 타락시킨 종교 지도자들과 가정에서 우상숭배를 관습적으로 행한 일반 백성의 부패상은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참조. 1:7; 3:5-7, 11; 5:12-14).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강자(권력자·부자)에 의해 약자(가난한 사람·과부·고아·외국인 등)에게 가해진 불의의 억압·착취·학대 등이다(참조. 2:1-2, 8-9; 3:2-3, 9-11; 7:2-6). ■ 국제 정세 미가는 요담(B.C. 739-731) 치세에 활동을 시작하여 아하스(B.C. 731-715)·히스기야(B.C. 715-686) 치세에 걸쳐 활동하였다. 요담은 선왕인 웃시야(B.C. 767-739)의 뒤를 이은 선한 왕이었지만, 우상을 섬기는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다. 아하스는 악한 왕으로(왕하 16:2-4) 친(親) 앗수르 정책을 폈다. 이때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포로로 잡혀갔다(B.C. 722-721). 유다의 왕 중에서 가장 선한 왕이었던 히스기야는 반(反) 앗수르 정책을 폈다. 그 결과 B.C. 701년에 그는 앗수르 왕 산헤립의 침입을 받아 격전을 벌여야 했다(참조. 왕하 18:13-19:36). 그러나 오랜 포위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은 함락되지 않았다. 따라서 예루살렘이 포로가 될 것과 멸망하리라는 예언은 보다 후대인 B.C. 586년 느부갓네살 Ⅱ세의 침입을 가리키는 것이 되었다. |
내용분해 |
1. 표제(1:1) 2. 사마리아와 유다의 멸망에 관한 메시지(1;2-2;11) 3. 심판과 구원에 관한 메시지(2;12-5;15) 4. 죄를 정복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메시지(6:1-7:20) |
서론 일람 |
1. 기록자 : 미가 2. 기록연대 : B.C. 735-698년 사이 3. 기록장소 : 유다 4. 기록대상 : 북이스라엘과 남유다 5. 핵심어 및 내용 : 미가서의 핵심어는 "정의", "자비", "겸손"이다. 미가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들의 모든 삶 속에서 정의를 드러내며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라고 외친다. |
미가서의 기록 목적은 이스라엘의 죄의 목록을 나열하면서 그들의 죄를 깨우치고, 그로인한 심판을 예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로 말미암아 회복이 일어날 것에대한 하나님의 약속으로 백성들을 위로하고자 합니다. 미가는 두 개의 큰 사건을 예언합니다. 하나는 예루살렘의 멸망에 대한 것이고(3:9-12), 다른 하나는 메시아의 탄생에 관한 것입니다(5:2).
전반적인 내용을 요약해본다면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게 멸망 당할 것을 예언하면서 앗수르의 군대가 성읍들을 차지하며 나라가 멸망하는 환상을 보여줍니다. 동시에 성 안에사는 부자들의 탐심과 바닥에 떨어져 있는 경제 상태와 공의와 공평을 상실한 사회에서의 가난한 자들의 어려움을 지적했지요. 특히 제사장들의 탐욕을 지적하며 몹시 비통해합니다.
시기적으로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시기에 활동했던 선지자 입니다. 특히나 미가서 부터는 이전의 선지서와는 분위기가 조금 바뀌는데요, 이전의 선지서가 '심판'에 집중하고 있었다면, 미가서 이후의 선지서는 심판과 함께 '구원'의 예언이 함께 등장합니다.
아마도 북이스라엘이 실제로 멸망하고 사람들이 앗시리아로 끌려가는 모습을 실제로 목격하면서 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보니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다시 거두실것을 예언하시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미가서 역시 심판이 큰 주제이다보니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심판에 대한 예언으로 시작을 합니다.
하나님은 참을 만큼 참으셨고, 혹독한 심판이 임한다는 언급을 합니다. (2:1 5) 미 2:1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미 2:2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 미 2:3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을 계획하나니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 할 것이요 또한 교만하게 다니지 못할 것이라 이는 재앙의 때임이라 하셨느니라 미 2:4 그 때에 너희를 조롱하는 시를 지으며 슬픈 노래를 불러 이르기를 우리가 온전히 망하게 되었도다 그가 내 백성의 산업을 옮겨 내게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 밭을 나누어 패역자에게 주시는도다 하리니 미 2:5 그러므로 여호와의 회중에서 분깃에 줄을 댈 자가 너희 중에 하나도 없으리라 |
심판의 선언
전체 7장을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장-3장은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죄를 보여주며 그로 인한 심판이 곧 올 것을 말합니다.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은 하나님을 섬기는 중심도시가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는 중심도시로 변했습니다. 그러나 장차 우상들은 부서지고 불살라지며 깨뜨려질 것입니다.
미가는 백성들의 죄를 낱낱이 열거합니다(2:1-11). 그들은 침상에서부터 죄악을 계획합니다. 머리는 온통 악을 도모하는 데 몰두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부와 권력과 영향력을 이용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악한 계획을 신속하게 실행합니다. 또한 그들은선지자들을 배척하고, 가난한 자들을 압제했습니다.
특히 하나님은 미가를 통해 지도자들의 심각한 부패로 인한 공의와 심판이 있을 것을 일깨워주고,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구원으로 이르게 할 거라는 소망을 심어주십니다. 사람들은 본성적으로 힘을 악하게 사용하려고 합니다. 힘 있는 자들은 남의 재산과 땅을 탐내며 불법으로 빼앗고자 합니다. 미가는 이런 모든 행위에 대해 엄중하게 경고합니다.
하나님은 힘을 가진 자들이 연약하고 가난한 이들이나 환난 가운데 있는 이들을 도와주길 바라십니다. 그들이 나라를 공의와 공평으로 다스리고, 힘 없는 사람들을 붙들어주기를 원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부富를 주어서 부자가 되게 하신 것도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도와 그들을 회복시키려고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지도자들은 권력을, 부자들은 부를 이렇게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심판이 임박했다고 하신 것입니다.
앗수르의 왕이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킬 것이요 남유다도 풍전등화의 위기를 맞이할 것입니다. 선지자 미가가 상주喪主가 되어 슬픔 가운데 애가哀歌를 부릅니다(1:8-16).
세 가지 약속
4장-5장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곧 임할 것이고, 장차 회복이 일어날 거라는 축복의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4장 1절은 3장의 끝 부분과 비교하며 ‘그러나’로 시작합니다(한글성경에는 이 단어가나오지 않습니다). 네 가지의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1. 장차 열방이 말씀을 듣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올 것이며, 온 땅에는 진정한 평강이있게 될 것입니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은(4:3) 전쟁이그치게 될 것을, “포도나무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을 것”은(4:4) 두려움이 사라지고 평화가 올 것을 말합니다.
2. 포로 된 자들이 돌아올 것이며, 예루살렘은 궁극적으로 승리할 거라고 예언합니다.
3. 베들레헴에서 메시아가 나올 것이며, 백성들을 회복시킬 것입니다(5:2).
4. 모든 환난 가운데 믿음을 지킨 남은 자들은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쓰임 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사람을 기다리지도 의지하지도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며 의지하는 이슬 같고 단비 같을 것입니다(5:7).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그것으로 열방을 축복할 것입니다. 또한 사자Lion 같을 것입니다(5:8). 하나님의 능력으로 담대해져서 원수들을 밟을 것입니다(5:9).
회개의 촉구
그렇기 때문에 6장-7장에서 현재의 삶을 회개하라고 촉구합니다. 1장 2절에서 “백성들아 너희는 다 들을지어다”로 시작했듯이 6장 1절도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로 시작합니다. 1장은 그들의 죄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심판을 들으라고 했다면, 6장은 다시금 이스라엘의 죄들을 열거하면서 회개를 촉구합니다.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길 촉구하지요.
6장 3-5절은 매우 감동적인 하나님의 메시지입니다.
“내가 언제 너를 힘들게 한 적이 있느냐? 내가 언제 너를 실망시킨 적이 있느냐? 내가네게 어떻게 행했는지를 기억하라!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인도할 때, 또 싯딤에서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 너희가 내가 베푼 구원과 사랑과 은혜에 감격할 것 외에 무엇이 있느냐?”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나요? 놀라운 기독교의 정수를 보십시오(6:6-8). 그분은 우리가 종교적인 삶을 살기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일반적인 종교에서 행하는 종교의식, 재물, 예물, 몸을 원하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러한 종교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원하십니다. 이것의 요약이 십계명이지요.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은 어떤 외적인 예배를 말하는 게 아니라 깨끗하고 겸손하며 순종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사람을억압하지 말고 공의를 행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올바른 지도력을우리가 발휘하는 데 있습니다.
또한 6장 후반부에는 세상에 속한 부자들인 속부俗富의 모든 행동과 결과를 잘 말해줍니다. 불의하게 재물을 모으고, 그것을 전부 자기를 위해서만 사용하는 것을 하나님은 엄하게 지적하십니다. 재정은 올바르게 모아야 하며, 자기를 위해서는 적게 쓰고, 대부분은 가난하고 궁핍한 사람들을 섬기는 데 쓰는 것이 거룩한 부자인 성부聖富라고 말씀합니다.
7장 1-6절에는 미가의 탄식 “재앙이로다, 나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경건한 자가 끊어졌고 정직한 자가 없도다. 남에게 해를 끼치려는 악한 자가 많도다. 지도자와 재판관은 뇌물을 구하며 권세자는 이들과 함께 악한 일을 꾸민다. 주변에 믿을만한 사람이 없다. 자녀들은 부모를 멸시하며 대적한다. 집안에서 싸움만 일어난다.”
7-13절은 주변의 악한 상황만 바라보고 있으면 영혼이 더욱 상합니다. 이때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소망이 일어납니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라는 미가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구원을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기도에 응답하실 것입니다.
미가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고백으로 글을 마칩니다(7:18,19).
주와 같은 신이 어디 있으리이까!
주께서는 죄악과 그 기업에 남은 자의 허물을 사유하시며
인애를 기뻐하시므로 진노를 오래 품지 아니하시나이다
다시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죄악을 발로 밟으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시리이다
그리고 그 해변가에 이런 팻말이 세워져 있습니다.
“낚시 금지-주인 백”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깊은 바다에 던지셨습니다. 가장 깊은 바다는 태평양 마리아나 해구입니다. 가장 깊은 곳은 11,000미터이고, 평균 수심이 7,000-8,000미터입니다. 히말라야 산맥의 높이보다 더 깊습니다. 더 이상 떠오르지 않게 하셨습니다.
계속되는 고발이 이어집니다.
미 3:1~4 내가 또 이르노니 야곱의 우두머리들과 이스라엘 족속의 통치자들아 들으라 정의를 아는 것이 너희의 본분이 아니냐 너희가 선을 미워하고 악을 기뻐하여 내 백성의 가죽을 벗기고 그 뼈에서 살을 뜯어 그들의 살을 먹으며 그 가죽을 벗기며 그 뼈를 꺾어 다지기를 냄비와 솥 가운데에 담을 고기처럼 하는도다. 그 때에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을지라도 응답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행위가 악했던 만큼 그들 앞에 얼굴을 가리시리라
이렇듯 그 당시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타락은 심각했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은 돌무더기와 잡목으로 사라질 것임을 예언합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구원을 이야기 합니다.
이 말씀은 개역개정보다는 메시지가 더 강렬하게 와 닿는것 같아 메시지로 적습니다.
미4:6~7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그 중대한 날이 오면, 나는 상처받고 집 잃은 모든자들, 네게 맞고 쫓겨난 모든 자들을 다시 불러 모을 것이다. 찌그러졌던 그들을 엘리트 집단으로 변보시킬것이다. 오래 길 잃은 그들은 강한 민족으로 만들고, 하나님이 통치하고 있음을 나타내 보이는 전시품으로 삼을 것인다. 이제부터 영원까지, 내가 시온산에서 그들을 다스리고 있음을 알릴것이다."
미4:10 딸 시온이여 해산하는 여인처럼 힘들여 낳을지어다 이제 네가 성읍에서 나가서 들에 거주하며 또 바벨론까지 이르러 거기서 구원을 얻으리니 여호와께서 거기서 너를 네 원수들의 손에서 속량하여 내시리라
이 구원의 사역 끝에 예수님의 등장을 예언합니다.
미5:2~4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그러므로 여인이 해산하기까지 그들을 붙여 두시겠고 그 후에는 그의 형제 가운데에 남은 자가 이스라엘 자손에게로 돌아오리니 그가 여호와의 능력과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의 위엄을 의지하고 서서 목축하니 그들이 거주할 것이라 이제 그가 창대하여 땅 끝까지 미치리라
성경을 잘 보다보면 이렇게 예수님의 등장을 예언한 구석이 많이 있습니다. 구약은 예수님 이전의 글이죠. 하지만 많은 구석에서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글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과연 우연이라고만 볼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만큼 성경이 진리의 말씀에 가깝다는 근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유대교 경전학자들 중에서는 이 구약의 해석 자체가 다르다고하는데요, 아직 제가 히브리어를 아는것도 아니고 그 정도의 능력이 있지는 않기에 일단은 이렇게 말씀드리는것으로 정리하겠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미가의 가장 핵심적인 구절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미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미가는 호세아등과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선지자 입니다. 미가는 모레셋 사람이라고 성경에 쓰여져 있는데요. 이 동네는 예루살렘 남쪽의 시골마을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미가를 보통 귀족출신인 이사야와 대비하여 농민출신의 선지자라고 알고계실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에 대한 심판으로 미가서를 시작합니다. 주로 북이스라엘의 수도인 사마리아와 남유다의 수도인 예루살렘의 왕족, 지배계층에 대한 비판을 하죠.
시기적으로는 북이스라엘의 멸망시기에 활동했던 선지자 입니다. 특히나 미가서 부터는 이전의 선지서와는 분위기가 조금 바뀌는데요, 이전의 선지서가 '심판'에 집중하고 있었다면, 미가서 이후의 선지서는 심판과 함께 '구원'의 예언이 함께 등장합니다.
아마도 북이스라엘이 실제로 멸망하고 사람들이 앗시리아로 끌려가는 모습을 실제로 목격하면서 들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보니 그들을 불쌍히 여기고 다시 거두실것을 예언하시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하지만 미가서 역시 심판이 큰 주제이다보니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심판에 대한 예언으로 시작을 합니다.
하나님은 참을 만큼 참으셨고, 혹독한 심판이 임한다는 언급을 합니다. (2:1 5)
미 2:1 그들이 침상에서 죄를 꾀하며 악을 꾸미고 날이 밝으면 그 손에 힘이 있으므로 그것을 행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미 2:2 밭들을 탐하여 빼앗고 집들을 탐하여 차지하니 그들이 남자와 그의 집과 사람과 그의 산업을 강탈하도다
미 2:3 그러므로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이 족속에게 재앙을 계획하나니 너희의 목이 이에서 벗어나지 못 할 것이요 또한 교만하게 다니지 못할 것이라 이는 재앙의 때임이라 하셨느니라
미 2:4 그 때에 너희를 조롱하는 시를 지으며 슬픈 노래를 불러 이르기를 우리가 온전히 망하게 되었도다 그가 내 백성의 산업을 옮겨 내게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 밭을 나누어 패역자에게 주시는도다 하리니
미 2:5 그러므로 여호와의 회중에서 분깃에 줄을 댈 자가 너희 중에 하나도 없으리라
이렇듯 여러 죄악속에서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경고의 예언으로 미가서는 시작됩니다.
하지만 이 경고의 2장에서조차 구원을 말씀하십니다.
계속되는 고발이 이어집니다.
이렇듯 그 당시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의 타락은 심각했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은 돌무더기와 잡목으로 사라질 것임을 예언합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는 구원을 이야기 합니다.
이 말씀은 개역개정보다는 메시지가 더 강렬하게 와 닿는것 같아 메시지로 적습니다.
이 구원의 사역 끝에 예수님의 등장을 예언합니다.
성경을 잘 보다보면 이렇게 예수님의 등장을 예언한 구석이 많이 있습니다. 구약은 예수님 이전의 글이죠. 하지만 많은 구석에서 예수님에 대한 예언의 글이 나타납니다. 이것을 과연 우연이라고만 볼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만큼 성경이 진리의 말씀에 가깝다는 근거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유대교 경전학자들 중에서는 이 구약의 해석 자체가 다르다고하는데요, 아직 제가 히브리어를 아는것도 아니고 그 정도의 능력이 있지는 않기에 일단은 이렇게 말씀드리는것으로 정리하겠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타납니다. 미가의 가장 핵심적인 구절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미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그리고 7장은 선지서들의 내용에서는 보기 드물게 미가 개인의 생각을 씁니다. 이스라엘의 부패에 대한 본인의 생각과 하나님의 희망을 버리지 않을것임을 이야기합니다. 미가의 바램과 희망을 느낄 수 있는 시편의 한장이여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멋진 장이니 일독을 권하며, 마지막으로 멋진 한 구절을 끝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미7:18~20 "주와 비길 신이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죄과를 말끔히 없애주시고 사랑하는 백성의 지난 죄들을 씻겨주시며, 못 본것으로, 못 들은 것으로 해주십니다. 주께서는 노를 오래 품지 않으십니다. 자비가 주의 전공이며, 주께서 가장 좋아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긍휼이 우리를 향해 진군해 오고 있습니다. 주께서 우리 허물을 짓밟으시고, 우리 죄들을 대양 밑바닥에 가라앉혀 주실 것입니다. 우리 조상 야곱에게 하신 약속을 이루어 주시며, 우리 큰 조상 아브라함에게 배푸셨던 긍휼을 우리에게도 변함없이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오래전, 우리 조상에세 약속 하셨던 모든것을 다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미가(Micah)
1. 명칭
미가는 농촌인 모라셋 출신의 예언자 이며 이사야보다 약간 늦게 활동한 예언자 이다 이사야가 수도인 예루살렘 출신인데 반하여 미가는 아모스와 같이 시골 출신이다. 그리하여 미가도 아모스 처럼 빈부의 심한 차이와 부자나 권력 자들의 불의를 실감 하였다. 당시 앗수르는 사방의 여러 나라를 위협하고 있었는데 유다는 앗수르와 애굽 양대국 가 사이에 완충 지대가 되어 있었다. 미가는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여러왕의 시대에 활동한 예언자 이다.
2. 주제표
초점 | 징벌 | 회복 | 회개 |
구분 | 재앙과 그 요인 | 심판과 위로 | 징벌과 언약 |
본문 | 미 1-2장 | 미 3-5장 | 미 6-7장 |
주제 | 재앙의 날(처벌) | 위로의 날(약속) | 법정의 날(용서) |
3. 내용과 주요사상
미가의 사상은 대 예언자들에 못지 않은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그는 가난한 농민 과 노동자들에 대하여 동정 하였고 부자들의 횡포와 불의에 대하여 예민하였다.
당시 의 사회적 경제적 불의를 공격한 것은 아모스와 흡사하다.
미가도 불의한 개인과 민족은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다고 가르쳤다.
미가는 북 왕국 이스라엘이 그 범죄 때문에 머지않아 앗수르의 침략으로 멸망한다고 내다보았다.
또한 그와 꼭같은 운명이 남왕국 유다에게도 임할것을 확실히 예견하였다.
미가는 억압과 불공평한 재판으로 신음하는 빈민 대중의 대변자가 되었다.
먹을 것이 없고 전답을 저당 잡히고 심하면 자녀들까지 저당 잡히는 빈민들을 위해서 그는 분노 를 참을수가 없었다.
이러한 이유로 미가를 분노와 위협만 선포하고 구원과 회복은 선포하지 않은 예언자 라는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미가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과 메시야의 재림 에 중심을 둔 구원을 선포한 예언자라고 보아야할 것이다.
4. 내용 분해(대분류)
1) 표제 미1:1 2) 사마리아와 유다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 미1:2-16 3) 하나님의 분노의 이유 미2:1-13
2. 심판 후에 따르는 회복 미3:1-5:15
1) 백성의 죄와 예루살렘의 파괴 미3:1-12 2) 하나님의 나라 건설 미4:1-5:1 3) 새로운 왕과 왕국 탄생 미5:2-15
3. 벌과 하나님의 최후의 자비 미6:1-7:20
1)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불만 미6:1-16 2) 꾸지람과 약속 미7:1-20
5. 내용 분해(소분류)
○미1:1 사마리아의 심판 미1:1 하나님의 심판 이유 미1:8 예루살렘에 미친 상처 미1:11 성읍들의 파멸에 대한 예언
○미2:1 심판의 원인과 하나님의 계획 미2:1 이스라엘 범죄에 대한 형벌 미2:6 거짓선지자들의 꾸짖음
미2:12 야곱의 회복에 대한 약속
○미3:1 지도자의 죄상과 임박한 심판 미3:1 이스라엘 제자들의 죄악
○미4:1 시온의 영광 미4:1 그리스도의 왕국
○미5:1 앞으로의 통치자 미5:1 메시야 출생 예언 미5:4 메시야 왕국 미5:10 회복된 이스라엘
○미6:1 이스라엘의 죄를 밝히시는 하나님 미6:1 하나님의 자비를 상기시킴 미6:6 하나님을 원하는 삶
미6:9 악인이 받을 보상
○미7:1 선지자의 기도와 감사 미7:1 백성들의 범죄 미7:7 하나님의 구원 미7:14 미가의 기도와 응답
미7:18 죄악을 사유하시는 하나님
미가(Micah)의 외침
G. Campbell Morgan 저 / 김현진역
- 하나님의 요구 -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6:8,참조.미6:1-7)
선지자 미가는 이사야와 동시대 사람이다.그가 전한 세가지 말씀은 권위에 관한 것이었다. 주로 그는 민족적 삶의 중심지로서, 권위를 가진 자들이 거주하던 성읍들을 대상으로 말씀을 선포하였다. 그는 백성을 잘못 이끄는 불의한 통치자들을 수없이 비판하였다. 또 그는 구약에 있어 가장 훌륭한 필치로써 단 한사람의 참된 통치자가 오실 것을 예언하였다. 물론 그의 말씀은 민족에 관한 것이 우선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말씀 속에서 개인에 관한 것도 찾아낼 수 있다. 6:8의 말씀은 앞 두 절의 물음에 대한 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는 영적, 도덕적 고통 속에 처해 있는 사람,즉 예언의 교훈을 들음으로써 죄를 깨닫고 개인적 책무를 깨우친 사람의 질문이었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6:6).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6:7)
그때 그는 인간의 이교적인 우매함으로 자행되어 왔던 가장 끔찍한 행위를 마음 속에 떠올리며 절규하였다.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선지자 미가는 바로 이 외침에 답하고 있다. 우리가 이 대화를 조금만 더 거슬러 올라가 살피면, 우리는 이 질문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하신 쟁변에서 비롯하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엇에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너는 내게 증거하라. 내가 너를 애굽땅에서 인도하여 내어 종노릇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보내어 네 앞에 행하게 하였느니라(6:3,4).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네가 나를 괴롭게 한 것에 대해 내가 너에게 무엇을 행하였느냐?"고 말씀하셨다. 이는 아버지의 마음과 같은 애처로운 외침이다. 고통받는 영혼이 부르짖었던 호소에 대한 답변인 것이다. 또 이 영혼의 부르짖음에 대해 선지자는 바로 8절의 말씀으로 답하였다.
전 민족적인 사건들은 궁극적으로 개개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선지자는, 권위를 오용한 민족에게 그의 메시지를 선포하며, 진정한 권위자의 도래를 예언하고 있다. 또 그는 한편으로 이를 개인에 대한 말씀으로 외치고 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미가서를 이해하여야 한다.
이때 우리는 세 가지 사실에 주의하여야 한다.
첫째는 "여호와께서 네게 무엇을 구하시는가"라는 말씀 속에 있는 가정이다. 이는 분명히 하나님이 요구하고 계심을 가정하는 것이다. 둘째는 본문(6:8)을 시작하는 말씀, 즉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라는 말씀이다. 이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자신의 요구를 분명히 알리셨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밝히고 있는 본문 내용이다. 즉 선이 무어인가에 대한 해설이다.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따라서 예언의 말씀은 스스로 자연스럽게 간명하게 답을 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순서대로 살펴보자.
먼저, 가정을 보자. 개개인에 대해 말씀하신다는 느낌이 매우 강하게 떠오른다. '사람아, "오직 너 사람아."이는 다른 모든 이들과 절단된 "너" 혼자만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질문은 하나님이 무엇을 구하시는가이다. 이를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너의 하나님이 네게 무엇을 구하시는가"이다. 사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개인 개인에게 물으신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한한 힘과 위안이 된다. 하나님이 어느 한 사람에게 요구하신다면, 이 하나님은 바로 그 사람의 하나님이신 것이다.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정의에 대해 생각해 보자. 사람은 그가 살고 있는 도덕적 세게에 방치되어 있지는 않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성경 말씀의 권위와 그 세계를 가정하여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단순히 추상적인 것으로나, 가능성으로만 생각한다면, 이 본문에서 우리는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다. 이는 성경 전체에 해당되는 진리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다음의 것들에 익숙해 왔다."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하나님은 왕이시다. 하나님은 아버지시다. 하나님은 구세주이시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근본적인 정의를 발견할 수 있다. 만약에 우리가 무엇인가 창조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우리가 강조한 피조물에게 그 창조된 목적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고 느낄 것이다. 물론 우리가 무엇을 창조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창조할 수는 없다.바울은 이를 구약에서 인용하여 분명한 어조로 표현하고 있다.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뇨(롬9:20).
하나님은 창조주 이상의 분이시다. 그는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방임하지 않으셨다. 또한 자신이 만드신 인간을 제멋대로 행동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으셨다. 하나님은 왕이시다. 따라서 그는 입법자이기도 하다. 그의 법은 그가 창조하신 피조물의 존재와 권위를 규정하는 것이다. 그가 요구하시는 것이 바로 그 법이다.
또 하나님은 창조주와 입법자 이상의 존재로 나타나신다. 그는 아버지이시다. 이는 하나님이 스스로 지으신 피조물을 돌보시고 주의깊게 살피시며 섭리하신다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의 법은 언제나 사랑의 표현이며, 그의 부성애는 그의 지속적인 보살핌 속에 나타난다.
이상의 것들이 하나님을 완전히 표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조물주 이상이시고 왕 이상이시며 또 아버지 이상이신 분이다. 그는 구세주이시다. 모든 것이 변하여도 변치 않는 것이 그의 사랑이며, 결코 실패하지 않는 사랑이 그의 사랑이다. 그는 긍휼히 없는 곳에 긍휼을 베푸시고 구원의 손길이 없는 곳에 구원을 베푸신다.
이 모두는 하나님이 요구할 권리가 있는 분이심을 입증하는 것들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의도적이며, 신중한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피조물이 아닌 인생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출산의 놀라움에 대해 안다. 그러나 이는 오직 인생의 육신적인 면에 불과하다. 이것 역시 놀랍고 경외로운 능력인 것은 틀림없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생명의 탄생속에 하나님의 행동이 개입하고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인간적인 조건에 비추어 아이가 잘 태어났는지 아닌지를 깨닫는 것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육신의 아버지가 있으며 또 그에게도 자신의 아버지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의 아버지이시다. 모든 인간에게는 선조로부터 물려 받은 것 이상의 잠재력과 가능성이 있다. 오늘날의 인간에게 있어 놀라운 사실은 그 분별력이 계속 퇴화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부인의 필요성에 관해 말씀하신 것은 자아가 부정되어야만 비로소 자아가 건전해짐을 선포하신 것이다. 부인되어야 할 것은 거짓 자아이다. 거듭난다는 것은 하나님의 원래 의도를 실현할 수 있도록 개성이 되게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도덕적 세계에 관해 생각해 보자. 부도덕의 거대한 물결이 인류를 집어 삼킬듯 휘몰아친다. 그러나 종국에 가서는 하나님의 창조 의도와 왕적 권위하에 도덕은 여전히 남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의미에서 본문의 놀라운 선포를 접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래를 바라는 영혼의 애절한 부르짖음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답변이 주어졌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6:8).
우리는 이 말씀의 첫째 대상이 히브리인이라는 것, 그리고 선지자는 이를 그들의 율법으로부터 인용하였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신명기에서 다음의 말씀을 읽을 수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10:12).
이는 백성들을 위한 율법에 쓰여져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선지자는 질문자 개개인에게 "주께서 네게 보이셨느니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말씀이 보다 강력한 의미를 갖는 시대에 살고 있다. 선한 것은 단순히 기록된 법에 의해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성육신을 통해서도 드러난다. 예수는 나타나셨고, 선포되셨으며 알려지셨다. 그를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선한 것을 보이신다. 심지어는 예수의 인성에 관해서도 다양한 의견들이 있을 수 있지만, 그의 선하심은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통해 선한 것을 보아 왔다.
다시 한번, 이 두가지 적용, 즉 첫째, 율법을 통해서 히브리 백성에 대해 하신 말씀과 둘째, 성육신을 통해서 온 세상을 향해 하신 말씀을 돌이켜 생각해 보자. 그리하면 우리는 고대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 또 심지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조차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본문의 말씀은 이런 이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 우리는 요한복음 서두에 나오는 말씀을 떠올린다. 요한은 모든 사람을 비추는 빛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 빛은 역사적인 성육신을 일컫는 것이다. 빛은 율법이나 복음이 선포된 적이 없는 곳까지도 비추인다. 인간의 속성 가운데는 잠언 기자가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라고 묘사한 빛이 있다. 그 말씀이 하나님의 영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영에 관한 것임에 주의하자. 따라서 인간의 신비스러운 성품 가운데는 선에 대한 보편적인 의식이 들어 있는 것이다.
이제 "선하다"는 단어의 의미를 생각해 보자. 영어에 있어 이 단어는 많은 뜻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성경 원전의 히브리어 단어 역시 마찬가지이다. 이는 병듦의 반대인 건강하다는 뜻이며, 추함의 반대인 아름답다는 뜻이고, 또 그른 것의 반대인 옮음이라는 뜻이다. 이를 구별할 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병 들엇음을 인정하는 것은 건강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추함을 아는 것은 또 아름다움도 아는 것이다. 그른 것을 안다는 것은 옳을 가능성이 있음에 동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소라도 그러한 빛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없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자신의 빛의 분량 만큼은,즉 그 이상은 아니더라도 그 분량 만큼은 책임을 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선한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깨닫게 된다. 여호와는 번제물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일년된 송아지, 천천의 수양, 만만의 강수같은 기름을 번제물로 요구하시지 않는다. 또 영혼의 죄를 인하여 몸의 열매를 요구하시지도 않는다. 이러한 것들 중 어떠한 것도 우리가 하나님께 접근하는 수단인 희생으로써의 가치를 갖지 못한다. 선은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시는 것"이라는 말씀 속에 드러난다. 이는 선한 사람의 삶에 대한 놀라운 분석이다. 이것은 세 가지로 구분된다. 공의를 행하는 것,인자를 사랑하는 것,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먼저 인간과의 관계, 즉 공의를 행하는 것과 인자를 사랑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 다음은 인생에 있어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즉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다.
이것들 중에서 최고의 것은 분명히 마지막 것인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되면 앞의 두가지, 즉 인간과의 관계인 공의를 행하는 것과 인자를 사랑하는 것은 자동적으로 된다. 다시 말해서 인간 관계는 역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 말씀은 역으로 읽으면 이해가 쉽다.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 그리고 인자를 사랑하라. 그러면 공의를 행하게 되리라."이것은 선에 대한 완전하고 궁극적인 묘사이다.
하지만 이를 본문에 기록된 순서대로 살펴보자.선이란 먼저 공의를 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의를 행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그 말이 궁극적으로 정의를 의미하는 히브리어인 '미쉬파트'에서 유래된 것임을 상기해야 한다.
정의는 무엇보다도 의로운 기준을 첫째로 요구한다. 또 둘째로 참된 판단을 요구한다.
세번째로는 옳은 결정으리 요구하고,마지막으로는 이러한 것들의 조화로운 조합을 요구한다.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 공의를 행하기 위해서는 참된 기준과 의로운 법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웃에 대한 판단이 참된 것이 되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우리는 각 사람에 대한 판단이 공의로운 것이 되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행위가 하나님의 성품 속에 나타나는 위대하고 영원한 원리와 조화되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이 요구는 결코 힘든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순수하고 거룩한 것이다. 그것은 윤리적 삶의 표준을 밝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이 세상에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공의로운 행위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면 말씀의 두번째 요구, "인자를 사랑하며"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인자함이란 단어에는 "겸손히 머리숙인다." "허리를 굽힌다." "봉사한다"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이 모두는 사랑에 의해 창출되는 행동들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단순하나 중대한 문제를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 본문에는 우리가 공의를 사랑하고 인자를 행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지는 않다.사람은 관념적으로 정의를 사랑한다 하면서,실제로는 이웃에게 불의를 행하곤 한다. 그러므로 관념적으로 정의를 사랑하는 것은 충분치 않다. 우리는 이를 행하여야 한다. 인자를 행하는 것은 더욱더 충분치 않다. 삶의 깊은 고서으로부터 나오지 않으면서도 자선이라고 불리우는 행위는 있을 수 있다. 인자함이란 우리가 반드시 사랑하여야만 하는 것이다. 이는 영혼이 하나님의 자비와 화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위대한 말씀의 도전에 직면케 되면, "누가 이 모든 것에 충분할 수 있겠는가"라고 외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결핍의식, 즉 자기가 부족함을 절실히 느끼는 의식 때문에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갈 것인가"하고 질문자는 외쳤다. 이에 대한 대답은 바로 마지막 세번째 것, 즉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분이시다. 따라서 우리가 복종과 신의로 하나님과 함께 행하면, 우리 역시 인자를 사랑하고 공의를 행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미가의 말씀이 바로 복음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자. 이는 오히려 율법에 가까운 것이다. 우리 주님께서 "나는 곧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이 빛은 오직 정죄할 수만 있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지만, 이 미가의 말씀에는 복음에 대한 넘치는 갈망이 드러나 있다. 복음은 예수께서 빛 훨씬 이상의 분이심을 선포하고 있다. 그는 생명이며, 생명을 주시는 자이시다. 구약의 히브리 선지자들이 우리에게 우리의 실패만 깨우쳐 주었다면, 예수의 복음은 그 회복과 자아의 완전한 실현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를 받아 들이신다. 또 그는 우리를 새롭게 하신다. 따라서 그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이시다.
https://cafe.daum.net/correcttheology/1Et6/3?svc=cafeap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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